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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의 문화인물…정약종 선생

    문화관광부는 1월의 문화인물로 선암(選庵)정약종(丁若鍾1760∼1801)선생을 선정했다.그는 조선후기의 천주교 신학자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저술했으며 신유박해(1801)의 순교자이다. ‘주교요지’는한글로 펴낸 것으로 성서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시대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한국 최초의 어류생태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저술했고 동생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등 수많은 저술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형 정약전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된 정약종은 1786년 아우구스티노란 세례명을 받았다.1791년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 사건’으로 탄압이 심해지자 형제들이 신앙을 버렸지만 정약종은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만든 명도회(明道會)란 평신도 단체 회장을 맡는 등 신앙활동에 몰두하다 1801년 2월11일(음력)에 체포돼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철상(哲祥·가를로)이 같은 해에,부인 유세실리아와 작은 아들 하상(夏祥·바오로),딸 정혜(情惠,엘리사벳)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가톨릭 집안이다. 정약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등 관련단체는 2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서 기념추모회를 비롯,기념강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이종수기자 vielee@
  • 인형으로 재현한 200년 한국천주교회사

    한강을 굽어보며 우뚝 솟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작은 암벽봉우리.본래 ‘양화진’‘양화도’라 불리던 나루터지만 200여년 전 천주교 신자 수천여명이 목이 잘린 채 강물에 던져진뒤 ‘절두(切頭)산’이라고 이름 붙은 천주교의 대표적인순교성지다.부활절인 지난 15일부터 이곳 절두산 순교박물관지하1층 특별전시장에서 ‘전통 인형으로 빚은 한국 천주교회사’전이 열려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가 신유(辛酉)박해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이 이색 행사는 오는 10월말까지 계속된다. 조선 후기 생활사에 등장하는 옛 복식의 전통과 당시의 천주교 신앙생활상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해낸 순교인형작품 75점이 12개 테마로 나뉘어 들어앉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려준다.인형들은 전통인형 전문가 임수현씨가 3년9개월간 두문불출 작업 끝에 완성한 것들.25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촘촘하게 들어찬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순교인형들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들어오는 것은 ‘이벽의세례’.조선 초기 세례자인 이승훈이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 대청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재현한장면이다. 양반인 두 사람 모두 유건(儒巾)을 쓴채 옥색 중치막을 입은 차림으로,이승훈은 서고 이벽은 무릎을 꿇었다. 바로 옆 ‘명례방의 신앙집회’는 이승훈이 이벽에게 세례를준 뒤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됨에 따라 열린 첫 신앙집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집회에는 집주인인 김범우를 비롯해 이승훈 이벽 권일신 이윤하 이총억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이 참석했다.이 집회는 형조 관리들에게 적발됐고 이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경계가 심해지게 된다. 중국 청나라 선교사로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이땅에서 처음 집전한 부활미사 장면도 있다.할머니와 세살바기 손자가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있으며 엄마 등에 업혀온 색동옷을 입은 두살바기 아기 모습도 보인다.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평생 동정 부부로 살았던 전주의 유중철·이순이 부부,우리나라 첫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과 탄생 모습 등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끌만하다. 작가 임수현씨는 인형 하나하나를 만들 때마다 묵주기도를드리고 묵주를 봉헌했다고 말한다.전시장 한 켠에 걸려있는묵주 75개와 인형에 얽힌 단상기록들이 관람객들을 숙연케한다. 문명자씨(59·광주 광산구 우산동)는 “전주의 유중철·이순이 동정부부의 무덤을 가본 적이 있는데 인형을 보니 더욱마음에 와닿는다”면서 “초기 천주교 신앙세계를 한 눈에볼 수있는 자리가 마련돼 기쁘다”고 말했다.조연화씨(34·서울 마포구 합정동)는 “인형전을 보고 천주교 순교사에 새로운 인상을 갖게됐다”면서 “천주교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홍도·흑산도 파도위 기암괴석들의 觀兵式

    홍도(紅島)의 첫 인상은 깨끗함이었다. 선착장이 너비 500여m의 빠돌해수욕장 한가운데 있으니 선착장이 바로 해수욕장의 다이빙보드 역할을 하고 있는셈.백사장은 없다.짙푸른,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깨끗한 물이 만점이다.빤질빤질한 돌이란 뜻의 빠돌을 밟으며 돌들이 파도에 떠밀려 내는 ‘사갈사갈’소리를 듣는 삼매경 또한 만만찮다. 2시간30분의 긴 바닷길에 쌓인 피로는 멱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속에 녹아버린다. 이어 90분에 걸친 유람선 여행.남문,촛대,칼,남매,독립문,주전자,거북 등 형형색색의 기암괴석을 즐기는 유람은 익히 아는 홍도의 멋.특히 탑섬은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탑들의 형상이 이국적인 맛을 물씬 풍겼다.,“참말로 징헌 장관이네잉”귀에 익은 전라도 사투리 사이로 경상도 아줌마들의 왁자지껄한 탄식도 끊이질 않는다. 부부탑,석화굴,그리고 천정에 뿌리를 내리고 거꾸로 땅을 향해 자라는 나무가 있는 요술동굴을 보며 오묘한 섭리를 만끽한다. 칼바위에 노을이 어리기 시작하자 배가 멈춰선다.아,홍도의 옛이름이 왜 매가도인지 알겠다.온통 붉은 빛으로 단장한 바위,기쁨에 달아오른 길손들의얼굴,온세상이 붉다. 횟감을 유람선에서 맛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유람선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어민들이 옆에 배를 대고 직접 횟감을 손질,건네준다. 불콰한 얼굴로 선착장에 돌아오니 이번엔 화려한 낙조.붉은 태양이 무참히얼굴을 담그는 장관을 매일 쳐다볼 수 있다면 삶을 마구 사는 일은 없을 것이란 속절없는 감상에 빠져든다. 그러나 사람살이는 강팍하다.경사 35도 이상의 가파른 산지로 이루어져 도대체 밭 한뙈기를 얻기가 힘들었던 땅.집은 붙어서고 골목은 비좁기 그지 없다.성수기가 아니더라도 외지인이 주민 500명보다 많아 늘 흥청거린다. 군데군데 원추리와 들꽃들이 만발한 왼쪽 구릉을 헤치고 깃대봉을 넘으면 홍리2구.격랑 때문에 배를 띄울 수 없을 때만 이곳 주민들에 한해 길을 열어준다는 등산로가 아득히 높다. 동백나무 울창한 산책로가 매끈해 연인들 거닐기에 그만한 장소가 없다고 주민들은 자랑하지만 정작 외부인 출입은 통제된다.섬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이기때문.관리사무소 곁의 자생란 전시실도 꼭 둘러볼만 하다. 홍도분교에 전학생이 늘어 교사를 신축했다는 얘기가 많은 걸 함축한다.돈이 꾀이고 사람이 몰린다는 얘기니 이 섬의 비경은 그런 강팍함을 비싼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산도(黑山島)는 동으로 영산도,북으로 대둔도와 다물도,서로 대·소장도,홍도 등 100개를 넘나드는 섬을 거느리고 있는 큰 섬.비포장도로를 3시간 남짓 달려야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오뚝이마냥 몸을 마구 흔들리며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는데 먼지가 휘날리는 게 장난이 아니다. 뭍의 오지 트레킹이나 오프-로드에 비견해도 손색없는 산길은 그 덕분에 비경을 감출 수 있었으리라.특히 예리선착장에서 1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에 있는 세께해수욕장은 영화 ‘남태평양’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야트막히 경사진 해변에서 모래와 뒤엉켜 키스신을 오래도록 나누던 환상을 떠올리기에 족했다. 바위 가운데 파도가 넘쳐나오면 그 모양이 야릇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하여 붙여진 여바위.바위뚫린 곳의 형상이 꼭 우리나라 모양같다하여 붙여진지도바위,갯벌에서 일하는 부모를 보호하기 위해 파도에 맞서 바위로 굳었다는 칠형제 바위 등 흑산도는 살가운 사람냄새로 그윽하다. 이 섬은 또한 유배의 땅.조선시대는 뭍에서 일주일이 걸렸다니 얼마나 험한뱃길인지 가늠된다.정약전과 상소로 이름난 면암 최익현이 유배생활을 견뎌낸 곳이기도 하다. 지겨운 먼지길을 달린 뒤 도착한 상라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섬의 전체 풍경 또한 여유롭기 그지 없다.흑산도의 마지막 인상은 지겨움이지만 그 안에는 비릿함 대신 사람사는 내음으로 정겹다. 홍도 글·사진 임병선기자 bsnim@. ●가는 길 서울 강남터미널∼목포 5시간 소요,20∼40분 간격 운행.김포공항∼목포 50분 소요,하루 10편 운항. 목포∼흑산도 2시간10분,오전 7시20분·7시40분,오후 1시20분·1시40분.흑산도∼홍도 40분.요금 2만9,750원.배편은 계절과 해상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잦아 출발전 운항여부 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목포항 (061)243-1081 홍도관리사무소 246-3700 신안군문화관광과 242-6501 흑산 여객터미널 275-9323 흑산관광안내소 275-9115우리여행사(02-335-7137)에선 오는 30일과 8월1·3일 세차례 출발해 2박3일로 홍도와 흑산도를 돌아보는 여행상품을 19만5,000원에 내놓았다. ●잠잘 곳과 유람 홍도에선 숙박시설을,흑산도에선 민박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홍도 대한장 (246-3788)을 비롯해 여관이 15곳 정도이고 횟집을 겸한 민박집이 비슷한 수로 있다. 홍도 유람선은 쾌속선이 도착한 후 바로 출발할 수 있거나 목포행 배가 출발하기 전 유람을 마칠 수 있도록 조정돼있다.2시간이 걸린다.16일부터 1만2,000원.그밖에 홍도 입장료로 2,000원을 걷는다. 흑산도 유람선 역시 쾌속선 출발·도착시간과 연계해 운행되며 대둔도 다물도 영산도 등을 돌아본다.요금 1만원. ●먹거리 홍도에선 양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횟감은 모두 천연산.전복과 농어 등을 최상품으로 친다.그러나 다소 값이 비싼 편. 흑산도 홍어는 음력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만 잡기 때문에 지금은 제맛을 즐길 수 없다. 수협 사상 역대 최고 입찰가는 한마리에 80만원.그외 전복과 멸치,다시마,미역 등이 좋다.
  • ‘최초의 순교자’ 여전히 홀대

    한국천주교의 본산이자 올해로 창건 101주년을 맞는 명동성당.명동성당이현재의 명동(明洞) 언덕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이자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金範禹·세례명 토머스·1751∼1787)가 살던 집터로 천주교로서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순교자인 김범우의 묘소는 지난 89년 발견된 이래 아직도 방치돼있어 그의 묘소에 대한 성역화 작업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는 대대로 역관(譯官)을 지낸 경주 김씨 가문출신으로 그 역시 역관을 지냈다.현 명동성당 자리인 명례방(明禮坊)에 살고있던 그는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李蘗)과 친교를 맺고 지냈는데이벽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입교후 그는 두 동생을 시작으로 중인·양반 등 계층을 막론하고 천주교를 전파하였는데 그의 집은 초창기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1785년 봄 그의 집에서 이승훈과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를 포함,양반·중인 등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마침 그곳을 지나던 추조(형조)의 관리가 이들이 도박을 하는 것으로 여겨 집회현장을 수색,예수 화상(화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였는데천주교에서는 이를 ‘을사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라고 부른다. 당시 형조에서는 양반 자제들은 훈계하여 방면하였으나 중인신분의 김범우만은 옥에 가두었다가 밀양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유배된지 1년만에 사망했다. 한편 밀양군 단장면(丹場面·현 삼랑진읍)에 있는 그의 묘소는 한동안 충북 단양(丹陽)소재로 잘못 알려져 왔다.그러다가 지난 89년 삼랑진 거주 천주교 신자 이성기씨(李聖基·70·성심가축병원원장)의 노력으로 그의 묘소가 밀양에 소재한다는 것이 확인됐다.이씨는 밀양 단장면이 고려시대 이후 대표적인 귀양지였다는 사실에 착안,김범우 후손의 호구(戶口)단자 등 관련자료와 현지답사를 통해 현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속칭 동이비알에 있는 묘소가 김범우의 묘소임을 확인,교계에 보고하였다.이씨는 “‘단장’을 라틴어로 읽는 과정에서 ‘단양’으로 착각,오기(誤記)한 것같다”고 말했다.지난 89년 5월 이씨는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신부(현 부산교회사연구소장)를 비롯해 김범우의 후손 등 200여명이 입회한 가운데 묘소를 발굴,뼈·이빨·수염 등을 수습하였는데유전자 감식결과 이빨은 200년전에 사망한 남자의 것으로 확인됐다.당시 묘소에서는 ‘돌십자가’도 같이 발굴됐는데 이는 순교자 황사연의 묘소에서도발굴된 바 있다. 한편 김범우의 묘소는 발굴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초라한 형국 그대로다.발굴자 이씨는 “사제 쪽에 무게를 두다보니 순교자 가운데 평신도들은 홀대를 받고 있다”며 “천주교 사상 첫 순교자인 김범우의 묘소에 대한 성역화작업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송기인 신부는 “장기적인 계획은 마련돼 있지만 자금문제,인근지역의 지가상승 문제 등으로 당장은 성역화 작업이어려운 실정”이라고 밝혔다. 삼랑진 정운현기자 jwh59@
  • 명동성당 100돌/임영숙 논설위원(외언내언)

    명동성당이 올해로 100돌을 맞는다. 지난 1898년 5월29일 축성돼 교회로서의 기능을 시작한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요람. 그 역사만으로도 가톨릭의 한국전래와 뿌리 내리기가 설명된다. 명동은 원래 한국천주교가 출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가톨릭 신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에게 세례를 주고 이벽은 다시 김범우에게 세례를 준다.지금의 명동인 명예방 장예원 앞에 살았던 김범우는 자기집에서 신앙집회를 열었고 이승훈을 비롯,이벽·정약전·정약용 등 초기 신자들이 이곳에 모였다. 몇달후 이 집회는 형조에 의해 해산되고 김범우는 단양으로 귀양갔다가 죽지만 한국 천주교는 박해를 이겨내고 굳건한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자생적인 신앙공동체로 출발한 한국 천주교는 나중 파리외방전교회의 도움을 받아 종현이라 불리던 명동언덕에 1892년 교회를 세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신부(한국명 고의선)가 당시 대한제국에 고용되어있던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 건물은 총건평 1천498㎡(약360평)에 길이 69m,너비 28m,지붕높이 23m,종탑높이 45m의 라틴십자가형신고딕 양식. 6년만에 준공식을 갖고 처음엔 종현성당으로 불렸으나 해방후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적 258호로 지정됐다. 명동성당 100돌이 뜻깊은 것은 그러나 교회적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성지일뿐만 아니라 한국민주화의 성지로서 우리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어 왔다. 1904년 가톨릭청년들은 이곳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의하는 모임을 가졌고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은 벨기에 국왕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이곳에서 이재명 의사의 칼침을 맞았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물론 최근까지도 명동성당은 공권력도 침범하기를 삼갔던 성역으로 학생시위의 종착점이자 농성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등 재야인사들이 지난 76년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3·1시국선언을 발표한 곳도 명동성당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빛과 소금 역할을해온 명동성당의 100돌을 마음 깊이 축하한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본 89년:14)

    ◎「매신」의 8차례 부록 발간/충무공 등 소개… 암흑기 민족의식 고취/광개토대왕의 기개·정몽주충절 상세히/이퇴계·정약용·김정희 등 석학·명필 망라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총독부 기관지로 새로 창간한 경성일보(일문판)에 흡수되어 국문판 자매지 성격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매일신보는 1938년 4월16일 경영체제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이는 1936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내선일체를 더욱 강조해가던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심계도를 위해 보다 강력한 한글신문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 이었다. 이에따라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등 새경영진이 선임되고 편집국장에 김형원 논설부장 유광렬등이 새로 임명되었다.이들은 제호부터 신자를 신으로 고쳐,매일신보로 바꾸고 경영독립을 기념으로 대대적인 지면혁신및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지면혁신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록판 발행.독립경영 2개월후인 6월30일자에 첫번째호를 발간했다.「역대명가유필진적」이라는 제목하에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필적을 소개한 이 부록판은 비록 이듬해 1월31일까지 매월 말일자로 여덟번 발간된후 중단됐으나 36년8월 동아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론 획기적 기획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부록판은 표면적으로는 선현들의 「글씨」소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한국 역사인물과 역대왕조의 소개등이 자연스레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일제하에서 역사를 빼앗긴채 「일본신민」으로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높은 기상을 자랑하던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알리고 고려말 충신들을 소개했다.또 이순신장군의 대첩,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조선조 유명한 선비들에 대해 소개했다.이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문화의 중요성과 그 보존을 강조한 것이 틀림없다. 이 부록판 발간에 대해 매일신보는 첫호가 나가기 전날인 1938년 6월29일자 1면에 사고를 내고 『본사경영독립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서도의 금자탑인 역대명가의 유필진적을 애독자 제위에게 무료증정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또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사가 그동안 막대한 노력과 시일을 들여 수집망라한 것으로 글씨 한개마다 전문 사학가의 해설을 곁들였음』을 밝혔다.인쇄및 장정에 대해서는 『본사 특선의 고급당지에 석판이도쇄로 미려정교하게 인쇄,병풍을 만들어 영구히 보존할수 있도록 고급전아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사고는 또 이 부록판 발간을 『조선신문 초유의 희생적 사업』이라고 정의하고 『반드시 독자제위의 열광적 환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했다. 38년 6월30일자로 발간된 첫번째 부록판은 황해도 해주군 광조사지의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등 고려전기의 탑비 6편을 수록했다.해설의 예를 보면 진철대사비의 경우 고려 태조 20년에 세운 것으로 작자는 최언위 필자는 이환상으로 구양순체임을 밝히고 있다. 7월31자로 발간된 두번째 부록판은 고려때 최고의 왕사였던 석탄연의 문수원비를 비롯,오늘날 지극히 귀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보의 유묵과 안향 정몽주 문공유등 고려시대 석학들의 필적을 실었다.특히 포은 정몽주는고려말 절개를 지킨 굴지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기술했다. 특히 세번째 부록판(8월31일자)은 광개토대왕비등 만주 안동성 집안현 일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비문들로 꾸며졌다.특히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는 『동양인이 쓰고 세운 비석 가운데 최고 최대의 비석』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세하게 대왕의 업적을 소개했다.『고구려의 19대왕으로 아버지는 고국원왕,아들은 장수왕이며 18세에 즉위했다.왕은 천자영매하고 용병의 귀신이었으며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64개의 성과 1천4백개소의 촌락을 공략하여 국경을 넓혔다.이르되 호태왕이라 한다.…』 ○신라때 비석도 게재 네번째 부록판(9월30일자)은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소재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낭공대사탑비,신행선사비등 주로 신라시대 인물들의 탑비를 싣고 있다.진흥왕순수비는 한반도내 광개토대왕비에 버금가는 최고,신라 제일의 비로 소개했다. 다섯번째 부록판(10월31일자)은 박연 성삼문 서거정 김시습 안평대군 정란종 최흥효등 조선 전기 각분야에서 특출난 인물들을 소개했다.박연은 세종때 처음으로 아악을 연구 시행한 음악가로 이조판서와 대제악을 역임했으며 성삼문은 조선의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 세임금을 섬겼으나 세조를 거부한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다고 설명했다.또 김시습은 단종폐위사건에 반발하여 일평생 방랑생활을 했던 신동으로 일시적으로 금오산에 우거,금오신화를 남겼고 이율곡이 그를 백세지사로 극찬하였음을 소개했다. 여섯번째 부록판(11월30일자)은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인 이순신을 비롯,이황 양사언 한석봉 김구 등 조선중기 대가들의 유필을 수록했다.특히 임진왜란때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그의 난중일기 일부를 소개하며 거북선 건조,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의 대첩등 큰 전공을 세운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곱번째 부록판(12월31일)은 허목 이광사 이숙 윤순거 송준길등 조선 중기 석학들에 대한 필적과 업적을 소개했다. 마지막회가된 39년 1월31일자 부록판은 김정희 조광진 정약용 이삼만 권돈인강세황등 조선말기의 명필 석학들의 글씨를 두루 실었다.특히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 통달,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를 자세히 소개했으며 남쪽의 김정희에 필적할만한 북쪽의 명필로 조광진을 내세웠다.또한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뛰어난 학문과 저작을 칭송하고 그의 형 정약전 정약종과 함께 이들 형제의 천주교 귀의와 순교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매신」 실체규명 계기 이같이 한국의 대표적 역사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매일신보 부록판은 39년 1월 별다른 설명없이 중단되었다.그러나 이 부록판은 민족자각의 의도성 여부를 떠나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따라서 이같은 매일신보의 새로운 측면은 그동안 친일 반민족 신문으로만 평가되어 한국언론사연구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역할을 규명할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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