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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1)조선 천주교 개척 이벽&황사영

    1779년(정조 3) 겨울. 남인의 젊은 학자들이 천진암에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李蘗)은 눈발이 날리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100여리의 밤길을 내달려 강학회에 참여했다. 이벽의 등장으로 유학을 강마하던 모임은 대번에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4년. 이벽의 권유를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자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가톨릭)가 싹텄다. 천주교는 지식인을 비롯한 중인, 평민과 천민, 여성 등 각양각색 인물들에게 퍼져갔다. 정조가 승하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난 1801년 1월.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은 서울을 빠져나와 충청도 제천의 산골짜기 배론(舟論)에 숨어들었다. 배론의 토굴에 숨어지내며 그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 말미에서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대미문의 요청을 했다. 편지는 그가 잡히면서 공개되었고 조선 조정은 뒤집어졌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 사건’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진리를 찾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택했지만 그 선택은 박해가 예고된 고난의 여정이었다.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은 진정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했던 것일까. ●18세기 중국 통해 서학·천주교 유입 17세기 초 조선 사람들은 ‘유럽’이란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서양의 천문, 역법, 수리, 의학에 관한 서적과 기물에 더욱 익숙해졌고, 북경에 간 사신들은 으레 선교사가 거주하는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저들도 나름의 진리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당시 서양과 그들의 학문에 대해 가장 해박했던 인물은 이익(李瀷)이었다. 그로 인해 서학(西學)이 일세에 풍미하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이른바 ‘친서파’(親西派)로 일컬어지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정약용 형제, 이승훈 등이 배출되었다. 이익 문하의 학자들은 여전히 ‘서학 수용’에 머물러 있었다. 서학은 새로운 지식일 따름이지, 유교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새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런데 홀연 학문에서 신앙, 신념으로 건너뛴 인물이 나왔다. 이벽이었다. 이벽은 어려서부터 ‘하늘의 도리’에 뜻을 두었다. 20세쯤 서학서에 충격받았고, 25세 전후에 서학 서적을 망라해 읽고는 드디어 마음을 바꾸고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이 시기 전후에 그는 조선 최초의 호교서로 평가받는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집필한다. 그것은 천지를 주관하는 천주(天主)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의 선언은 성리학의 근본 원리인 천리(天理)에 대한 도전이었다. 성리학에서 하늘은 천리이다. 천리는 우주 질서의 원리, 사물의 물리, 사회의 윤리이다. 천리는, 우리가 ‘하늘’을 들을 때 떠올리는 ‘하느님’, ‘푸른 하늘’ 같은 인격성과 자연성이 약하고, ‘질서·조화·바름’과 같은 추상성과 윤리성이 강한 개념이다. 천리는 유교 왕국 조선에서는 모든 질서의 원천이자 가치의 근원이었다. 이벽은 ‘천리는 현실에서 공허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천리에 비해 천주는 인격적 존재로 현실감이 있고 내세관마저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는 양 개념이 대립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보완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대다수 조선인들은 천주 선언을 유교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보았다. ●관대하던 정조 사후, 1801년 대대적 박해 시작 천주교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지식인들은 ‘천리’와 ‘천주’의 대결이 가져올 파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서로 대결한다면 그것은 문명 사이의 가치관 전쟁이자, 그에 동반한 사유와 많은 개념들을 재조정하는 일이 될 터였다. 16세기 천주교를 동양에 전파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점을 알고 있었고, 두 문명 사이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도모하였다. 선교사들은 ‘Deus’(God의 라틴어)를 유교 경전에 등장한 상제(上帝)와 유사한 천주로 번역했고, 또 천주를 천지의 대부(大父)·대군(大君)이라고 소개하였다. 천주교 설명에 유교의 텍스트와 개념을 빌린 것이다. 이 같은 설명 방식은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주교에서 유학과 일치하거나 때론 유학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았다. 예컨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인격적 상제관에 기초한 새로운 유학 틀을 구상하였다.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던 이벽 또한 천주교를 축으로 유학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회, 윤리 측면에서 문제는 매우 복잡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천주 공경이 대효(大孝), 대충(大忠)이므로 유교 윤리는 천주교에서 완성되고, 유학자들이 오히려 천지의 군주와 부모를 모른 체한다고 역공했다. 물론 그 논리는 유교 윤리의 소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천주 앞에서 군(君)·신(臣), 부(父)·자(子)의 수직적 위계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천주교인들이 자신들은 충성과 효도를 어긴 적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대다수 지배층은 ‘천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 속에 잠재한 현실적 파괴력을 알고 있었다. 백성 하나하나가 박해를 감내하면서 자신이 신앙을 결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명분 질서가 사라진 무부, 무군의 미래였다. ●“서양군 통해 유교 압박”… 황사영 백서 큰 파장 1785년(정조 9) 형조의 적발로 최초의 천주교 모임이 발각되었다. 신부도 없이, 지식인들이 서로 성직을 맡아 진행한 모임이었는데, 정조의 관대한 처분으로 그럭저럭 무마되었다. 모임의 주동자였던 이벽은 사건 이후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본격적 박해를 경험하지 않은 이벽은 차라리 행복했다. 1801년에 터진 대대적 박해는 일부 신자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졌다. 백서의 내용 대부분은 순교자들의 전기이다.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논란을 부르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몇 가지 방책을 제시했는데, 그중 ‘조선을 청에 내복(內服)시킴, 서양 군함과 병사를 통해 압박함’이 들어 있었다. 그 방책은 반국가, 반민족적 구상이라고 줄곧 비판받았다. 교회 재건이라는 동기와 박해라는 정황을 인정하더라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백서의 청원은 너무나 대담하고 몽상적이어서 교인들 사이에도 논란이 있었고, 당시 북경 교회가 그대로 감행하기도 어려웠다. 황사영 역시 실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부를 압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그 방책들을 제시하였다. 그가 반정부, 반국가 의지가 강했다면 가장 쉬운 길은 교인들의 무력 봉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란에는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황사영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종교의 보편 진리를 꿈꾼 그는 서양의 도리를 신뢰했던 듯하다. 예수회가 전한 서양은 안정된 생활, 인정이 넘치는 풍속,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형제애가 실현된 ‘이상적 사회’였다. 현실의 고통이 강할수록 이상적인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기독교적 형제애에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전통적인 유교 윤리, 혈통 의식, 국제 관계 등은 무력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선교사가 청 황제,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지나친 기대감은 그의 판단력을 가려버렸다. ●지금도 유교문화 속 기독교 신자 수 동아시아 1위 천주교와 유교의 보완을 꿈꾸었던 이벽의 노력은 정약종, 정하상 등으로 맥을 이어갔다. 일부 교인들은 동서양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하여 그를 되살렸다. 19세기 후반 천주교 공동체의 염원이 담긴 예언서 ‘니벽전’에서 그는 학문에 능통한 선비, 득도한 신선, 승천하는 예언자로 그려졌다. 황사영은 대역부도죄로 체포되어 능지처사되었다. 비극은 그의 개인과 가족, 당대 교인들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백서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을 정말로 무부무군의 무리,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로 여기게 되었다. 두 사람의 선택은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신자 수가 1위인 동아시아의 특이한 국가이다. 전근대의 보편 가치와 근대의 보편 가치를 상징하는 두 종교 사이에 현재의 우리가 놓여 있다. 예수회 이벽의 선택은 ‘내 안의 가치’와 ‘타인 안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세와 통한다. 그리고 종교, 문명,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 힘쓰는 이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인정과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에서 대화는 출발하지만, 나·우리 혹은 타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고정해 버리면 성찰과 다양한 해석이 설 자리는 사라져 버린다. 그 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황사영은, 박해라는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외재(外在)하는 기준을 절대화해 버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원을 긍정하고 독선에 빠지지 않는 자세야말로 언제나 곰곰이 생각해 볼 덕목이었다. 세계화, 다문화, 정보화가 가속하는 지금에서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0)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선택! 역사를 갈랐다} (20)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최고의 스타다. 풍석 서유구(1764~1845)는 조선의 무명스타다. 서로 두 살 터울. 다산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조명했다. 풍석은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고, 18년이라는 정치적 유폐기를 거쳤고, 유폐기에 대작을 저술했고, 조선의 융성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남양주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사후 많은 사대부가 추앙했다. 다산만의 얘기라 생각하는가. 풍석도 꼭 그랬다. 그럼에도, 두 위인의 학문적 지향은 전혀 달랐다. 후생들은 결국 다산에게 마음을 기울였고, 풍석은 거의 뒷전이었다. 다산은 풍석의 과거 선배다. 요샛말로 다산은 1789년에 급제한 89학번으로 60명 중 2등, 풍석은 1790년에 급제한 90학번으로 46명 중 24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 명을 받았다. 이는 여러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최종 과거에 응시하라는 왕명이다. 이러면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다. 급제 후 곧장 초계문신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초계문신은 정조의 최측근 문신 집단이다. 다산의 승진 속도는 풍석보다 빨랐다. 고위직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5년 먼저 받은 것이다. 정조가 군주이자 학문적 스승을 자처하며 왕권을 강고하게 행사할 때까지, 둘은 겉으로 보기에 같은 쪽을 향하는 듯했다. 다산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정조의 두터운 신임은 여전했다. 이에 반해 풍석은 최대 문벌 중 하나인 대구(달성) 서씨의 후예다. 게다가 진퇴에 신중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다. 다산이 ‘문제적 범생’이라면 풍석은 ‘범생’ 그 자체다. ●정약용·서유구 정치적 공백기 18년 정조는 집권 초부터 젊은 문신 양성의 일환으로 ‘경사강의’(經史講義)라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중 시경(詩經)을 분석하는 ‘시경강의’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참여한다. 이 시경강의는 16년 동안 25회에 걸쳐 실시했던 경사강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정조는 590문제를 출제했고, 초계문신에게 40일이 주어졌다. 이로도 모자라 20일을 연장했다는 다산의 고백에서 얼마나 힘든 테스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이 중 579개의 문제와 답을 적어두었다. 수험자가 18명이니, 1인당 32문제꼴로 답안이 채택되어야 평균이다. 누구 답변이 가장 많이 채택되었겠는가. 우리의 영웅 다산일 거라 짐작한 독자에게는 미안하다. 풍석이 독보적이다. 풍석의 답안은 총 181개로, 전체의 31.3%다. 시작과 끝 문제의 답안 역시 풍석의 것이었다. 다산의 답안은 117개가 실렸으며 총 20.2%를 차지한다. 다산의 것도 결코 적은 비중은 아니나 풍석의 월등함에 빛이 바랬다. 시경강의는 두 사람에게 큰 이력이었다. 다산은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의 추억으로 이 시경강의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정조의 어평(御評)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자신이 남긴 ‘시경강의’ 서문에는 물론이고, 스스로 쓴 묘지명에도, 가장 존경했던 형 정약전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했다. 또 자신의 답안이 최고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압도적 수석인 풍석은 이 기억을 되새기지 않았다. “책을 열자 바로 개안하는 느낌이다.”라거나 “근거가 분명하고 충분하며 언어가 알맞고 정연하여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등 총 6군데서 어평을 받았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젊은 시절 풍석은 분명히 경학의 당대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산은 정조 사후 천주학 타도 바람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시작한다(1801년). 풍석은 이 바람과 무관하게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5년 뒤 김달순 옥사를 계기로 풍석의 탄탄대로에 탈이 났다. 작은아버지 경기감사 서형수는 유배형을 받고, 재종숙부 영의정 서매수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가세는 급격히 쇠락한다. 연좌의 공포에 휩싸인 풍석의 선택은 귀향이었다. ●정약용, 이상적 통치 목표 ´경학·경세학´ 몰두 억울하게 유배지에 갇힌 다산과 죄 없이 죄인을 자처하며 낙향한 풍석. 과정이 어쨌든 불우한 처지이기는 피차일반이었다. 정치적 공백기 18년.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들의 길은 판이하게 갈린다. 다산은 유학의 정통 분야인 경학과 경세학(經世學)에 몰두했다. 조선 유자의 지향점을 요약하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수기는 자신의 몸과 덕성을 수양하는 일이요, 치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다. 수기는 치인을 위한 인문학적 토양이고, 치인은 자기 수양의 경세론적 확장이다. 다산은 61세에 자신의 학문을 이렇게 정리했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 자기 몸을 닦고 1표(表)와 2서(書)로 천하·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추었다.” 육경과 사서는 경학이고, 수기의 세계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는 경세학이고, 치인의 영역이다. 저술은 경집(經集) 232권, 1표2서를 포함한 문집 260여 권으로 총 500권이 다 된다. 다산의 지향은 조선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반면 풍석은 파주 장단으로 귀농하고서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히 외면했다. 경학을 해봐야 옛 사람의 중언부언이고, 경세학을 해봐야 결국 ‘흙 국’이나 ‘종이 떡’처럼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잡학’ 마니아가 된다. 풍석의 잡학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 질서 있게 배열되었다. 농학, 천문학, 공학, 수학, 요리학, 의학, 어업, 예술, 상업 등 총 16분야다. 경학과 경세학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서 113권으로 마무리했다.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하나다. 시골에서의 자립적인 삶을 위한 지식 체계. 풍석의 지향은 사대부 일상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풍석은 18년 공백 후 정계에 복귀해 15년간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 와중에도 시골생활 백과사전 정리를 그치지 않았다. 임원 생활을 대비했고 임원을 동경하기도 했다. 반면 다산은 해배 후 야인으로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경학, 경세학 정리와 심화에 몰두했다. 국정 참여의 뜻을 꺾지 않은 듯하다. 묘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다산과 풍석은 일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다산은 ‘자찬 묘지명’(1822년, 61세)을, 풍석은 ‘오비거사 생광 자표’(1842년, 79세)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 환갑 때 쓴 다산의 묘지명은 분량이 아주 많다. 주요 개인사를 모두 적었고 저술 체계도 매우 상세히 서술했다. 글자 수가 자그마치 1만 2316자! 내가 아는 자기 묘지명 중 가장 길다. 1000자 내외가 대부분이다. 가슴에 묻어둔 한이 많았던 걸까. 이와 대조적으로 풍석은 평생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그 시기를 모두 허비했다며 반성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40년 가까이 공 들인 ‘임원경제지’ 저술도 인쇄할 뒷심이 없어 낭비였다고 회고한다. 자신을 오비거사(五費居士)로 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산의 묘지명은 828자인 풍석의 것보다 무려 15배나 많다. 파란만장으로 말하면 누군들 할 말이 없을까마는, 다산은 거의 회고록 콘셉트이었고, 풍석은 반성문 콘셉트였다. ●서유구,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지식 외면 다산은 농사를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했다. 풍석은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닌 체험으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풍석은 입으로만 농사를 짓지 않았고, 글로만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정보를 조직적으로 정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거나 실행되어야 할 선진 기술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다산은 스스로 말한다. 자신의 경세학은 “지금의 쓰임에 구애되지 않고 기준을 제시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연구다.”라고. 당대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기준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하지만, 풍석이 흙으로 끓인 국 즉 토갱(土羹)이요, 종이로 만든 떡 즉 지병(紙餠)이라 비판했던 저술은 바로 이런 거였다. 풍석은 이상을 추구하되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실현할 수 없는 지식은 ‘토갱지병’이다! 이상적 기준을 제시하고서 현실을 이상으로 밀고가려 했던 다산의 방법론과는 대조적이다. 풍석의 이용후생론은 바로 이런 실용학이었다. 다산 탄신 250주기를 맞아 여기저기서 다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조선의 다빈치’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그의 위대성을 유학사상과 정치철학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다산의 저작을 폄하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다산에게서 조선의 모든 잠재성과 가능성을 찾으려는 경향은 지나치다. 풍석의 평생 역작 ‘임원경제지’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지 않는다. 개혁은 일상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풍석의 신념이었다. 풍석은 ‘놈팡이 선비’를 제일 혐오했다. “곡식만 축내며 보탬이 안 되는 자 중에 저술하는 선비가 으뜸이다!” 선비들이여, 농업·공업·상업 알기를 똥으로 아는 그 엘리트 의식부터 싹 뜯어고쳐라. 버러지처럼 놀고먹지 마라. 경서를 공부하되 제 식구 먹을거리, 입을거리, 살 곳은 유지하면서 하라. 방 안에 틀어 앉아 공맹과 성리를 논할 시간에 밖에서 바지 걷어붙이고 쟁기질하라! 그물 던져 물고기 잡아라! 짐 지고 나가 장사하라! 몸놀림을 혁신하라. 땀 흘려 일해서 벌어먹는 일을 점점 기피하고, 종일 컴퓨터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사람다운 노동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여기서 얻을 힌트는 과연 없는 것일까. 정명현(임원경제연구소 소장)
  • [김문이 만난사람] 정약용 탄생 250주년 맞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문이 만난사람] 정약용 탄생 250주년 맞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누구나 출생의 비밀은 있다. 이름을 빛낸 위인의 경우에는 더욱 관심이 쏠린다. 그 비밀의 문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250년 전인 음력 6월 16일, 아버지 하석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아버지는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로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후손이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세 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 그러니까 10남매가 있었다. 첫 부인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 소생으로 큰아들 약현(若鉉)이 있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을 두었다. 딸은 나중에 조선 최초의 영세교인인 만천(蔓川) 이승훈에게 시집간다. 다산 정약용의 나이 9세 때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12살 때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바로 서모(庶母) 김씨다. 서모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 슬하에 3녀 1남(약횡)을 두었다. 다산의 작은형 약종은 형제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사옥 때(1801) 희생됐다. 전도에 힘쓰다가 책롱사건(册籠事件)으로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했다. 형 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인연뿐만 아니라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1801년 11월 하순 함께 귀양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약전은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다산연구소 자료 참조) 올해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다산의 생애와 학문, 사상을 재조명하는 행사가 풍성하게 열린다. 국립박물관과 실학박물관의 전시회, 음악제, 국제학술대회 등이 잇따른다. 지난 3월부터 올 12월까지 계속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다산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판소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산연구소 주최로 열리는 이 행사는 오는 9월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해석 명창에 의해 1시간 20분동안 진행된다. 창본은 김세종씨. 특히 영문판 CD까지 제작, 세계 각국에 보급할 예정이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다산을 기리는 판소리 무대는 있었지만 75년 생애를 오롯이 담기는 처음이다. 이 밖에 다산이 직접 쓴 글씨와 그림을 전시하는 ‘한국 서예사 특별전-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전’이 다음 달 9일부터 7월 2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또 다산 기념 음악회가 8월 24일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열린다. 다산연구소의 박석무(69) 이사장. 그는 요즘 이 같은 행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는 올해로 다산 연구에 몰두한 지 40년째가 된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순화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이사장은 연구소 설립 이후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편지를 지금까지 700여회 쓰고 있다. 자리에 앉으면서 최근에 쓴 편지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대군(大君)이다, 멘토다, 실세 중의 실세다라는 사람들의 감옥행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딱하고 국가 체면도 구겨질 대로 구겨져 버렸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큰소리치면서, 그들을 그런 직위에 임명했던 임명권자의 입장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중략)화려했던 권력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부와 권세를 놓치고 감옥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분들, 그런 기회에 목민심서라도 읽으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감옥행을 보면서 다산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 또 있다. ‘정약전·약용 형제는 세상에 없는 지기지우인 동포 형제였습니다. 두 분이 주고 받은 편지나 학문적 토론의 글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는 사이였습니다.(중략)오늘의 세상에야 사촌이 남이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친형제조차도 재산 싸움에 남보다 더 원수지간이 되고 있음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재벌가의 왕자난이나 쟁송(爭訟)의 보도를 읽다보면 다산 형제의 우애가 세상을 바로잡을 청량제로 여겨집니다. 오늘에도 그런 형제애를 복원할 수는 없을까요.’ 이런 편지의 내용은 전국 35만 4000여명에게 이메일로 보내진다. 일주일에 주말을 제외한 4~5차례 꼬박꼬박 쓴다. 어리석은 질문 하나, 박 이사장은 목민심서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 현상을 보면서 문득문득 목민심서나 논어를 다산적으로 해석한 글들을 생각날 때마다 다시 뒤적이고 그 뜻을 가슴에 담지요. 수시로 읽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편지 쓸 때에도 다산의 눈으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대학이나 단체 등에 강의 나갈 때도 다시 목민심서를 읽고 가지요. 성균관대에서 ‘다산과 21세기’라는 교양과목 강의를 하고 있는데 아주 명품강좌로 소문났다지요(웃음).” 지금도 틈 날 때마다 다산을 연구한다는 그는 대학 시절부터 ‘반계수록’ 등 실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1971년 대학원 때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석사 학위논문을 쓴 것을 계기로 다산 연구와 인연을 맺었다. 1973년 유신에 항거하다 투옥됐을 때에 다산의 책을 여러 차례 읽었고 이후 8개월 수배 생활 동안에도 다산을 공부했다. 1982년 3월 복권됐을 때 비로소 7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해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편역,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50여쇄나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끄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다산은 학문의 깊이가 끝이 없는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입니다. 다산은 52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면서 인간존중 사상, 개혁정신, 실사구시의 철학 등을 펼쳐 시대정신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학자로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안목과 방대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지요. 특히 유배지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인간성과 철학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산이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같은 한 줄기의 민중적 의지로 75년동안 치열하게 살다 간 역사적 인물이지요.” 가난에 찌들어 굶어 죽어가는 이웃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공동 경작에 의해 공동분배하도록 하자고 혁명적인 전론(田論)을 주장하기도 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를 일삼는 관리들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생각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해서, 관리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 그리고 시를 통해서 백성들을 일깨워 보고자 했던 그의 생애는 2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르고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산은 22세때 진사과에 합격했는데 정조임금이 답안지를 직접 읽고 휼륭한 인재임을 알고는 근처에 있도록 하면서 자주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시문행사때마다 항상 1등을 차지하는 다산을 늘 아꼈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정조는 다산을 통해서 사실상 정치를 바로 할 수 있었고 그런 다산은 정책 보고서를 임금에게 직접 올리게 됩니다.” 박 이사장은 가정의 달을 맞아 “요즘처럼 가족윤리가 무너지고 사제 간의 의리도 깡그리 파괴된 때, 우리는 다산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가족의 중요함과 사제간의 정다운 의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다산의 효제(孝悌)사상을 새삼 강조했다. 다산의 탄신일과 관련해서는 “1762년 6월 16일에 태어났는데 그날이 양력으로 8월 5일이어서 생일 기념은 매년 8월 5일에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도 그날에 회혼례, 산신제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석무 이사장은 1942년 전남 무안에서 4대째 한학을 공부해온 집안에서 자랐다. 전남대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투신, 4차례 옥고를 치렀다. 1971년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다산 연구에 집중했다.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 동안 복역하면서 감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의 시간을 가졌다. 출옥후에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발간했다. 지금까지 50쇄나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읽히고 있는 명저가 됐다. 1980년 광주항쟁 때는 관련 주모자로 몰려 오랜 수배생활 끝에 붙잡혀 1년 3개월여를 또다시 복역했다. 1988년 13대 국회에 진출한 후 14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를 맡아 활동을 펼쳤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과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 초빙교수, 전남대학교 초빙교수와 단국대학교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석좌초빙교수이자 (사)다산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술로는 ‘다산기행’, ‘우리 교육을 살리자’,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1,2’,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가 있으며, 편역서로는 ‘흠흠신서’, ‘애절양’, ‘다산산문선’,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및 ‘다산 논설선집’, ‘다산 문학선집’(공편역) 등이 있다.
  • 민족과 희로애락 함께한 청어 재발견

    민족과 희로애락 함께한 청어 재발견

    몸 등 쪽은 옅은 검은색이고, 배 쪽으로 내려오면서 푸른색에서 은백색으로 변한다. 정어리와 생김이 거의 닮았지만 조금 크고 옆구리에 반점이 없다. ‘청어’라 불리는 물고기다. 청어는 과거 우리 선조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종실록, 명물기략, 난중일기 등 고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손암 정약전이 쓴 우리나라 최고의 해양생물서 ‘자산어보’가 으뜸이라 할 만하다. 청어의 생김새와 구별 방법, 생태 등 청어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EBS ‘다큐프라임’은 19일 밤 9시 50분에 ‘신(新)자산어보, 청어’에서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청어를 조명한다. 자산어보를 통해 청어를 사회·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오랫동안 서민들의 밥상에서 사랑받은 최고의 물고기 청어의 생태적, 형태적 특징을 분석한다. ‘맛 좋기는 청어, 많이 먹기는 명태’라는 말이 있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했다. 가난한 집안에서도 쉽게 사 먹을 수 있고, 잔칫상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식재료였다. 청어는 음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친숙한 소재였다. 전라도 지방에는 달밤에 여자들이 손과 손을 잡고 청어를 엮듯이 엮었다 풀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는 민속놀이가 있다. 어로작업을 무용으로 만든 ‘청어 엮자’다. 청어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다룬 고서는 200여년 전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했던 정약전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서 ‘자산어보’다. 흑산도 앞바다는 정약전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자신이 실제로 견문한 내용을 토대로 흑산도 연해의 다양한 수산자원을 기록했다. 정약전의 탐구 정신은 현대 과학으로도 이어진다. 수산과학원 이해원 박사는 현대인들의 식탁에서 자취를 감춘 청어를 연구하면서 청어가 생태계와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 수산자원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청어는 외면받고 있다. 한번 잡힐 때마다 어획량이 방대한 청어는 흔하디흔한 물고기로 인식되고, 그 진가가 저평가된 탓이다. 한때 잠시 청어가 자취를 감추자 그 틈을 꽁치와 과메기가 비집고 들어와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럼에도 청어의 진가를 높이 평가하며 청어잡이를 고집하는 이가 있다. 50년간 배를 타며 고기잡이를 한 바다 사나이 손진락 할아버지다. 경북 포항의 작은 어촌마을에 사는 그는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청어잡이를 하며 청어 과메기를 만들어 쫀득한 맛을 지켜가고 있다. 청어의 역사, 그리고 청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어의 매력을 들여다보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26일 TV 하이라이트]

    ●역사스페셜(KBS1 밤 10시) 다산 정약용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신을 향한 믿음은 곧 이단이자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왜 신을 믿었을까. 한편 그의 형제 정약전, 정약종 또한 천주교도의 길을 걸었는데…. 유학(儒學)의 명가 나주 정씨의 후손이었던 정약용 3형제는 어떻게 한꺼번에 천주교에 빠져든 이유를 들어본다. ●복희누나(KBS2 오전 9시)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공장을 늘려야 하나 고민하는 복희(장미인애). 봉제공장 늘리는 일에 관해 백구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는 백구는 복희에게 사업계획서를 써오면 생각해 보겠다고 얘기한다. 한편 송병만은 전에 없이 허심탄회한 속내를 드러내며, 영표를 향한 마음이 남다름을 표현한다. ●해를 품은 달(MBC 밤 9시 50분) 도성 문을 향하고 있는 가마 속에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가마 문을 열려 애쓰고 있는 무녀 월이 있다. 어환을 고치기 위해 궁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거절한 녹영 대신 녹영의 신딸인 월을 인간 부적으로 쓰기 위해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잠깐의 혼란을 틈타 도망쳐 보려다 궁지에 몰린 월은 한 스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 ●태양의 신부(SBS 오전 8시 30분) 효원은 강로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찾아가지만, 강로는 효원을 절대 놔줄 수 없다고 말하고 매섭게 돌아선다. 강로와 효원의 사이가 틀어져 가는 것이 통쾌한 인숙은 효원에게 해외로 나가 살라고 말한다. 한편 박 변호사는 효원의 차압을 풀어달라는 KDH의 제안에 테마파크의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회신한다. ●독립다큐관(EBS 밤 12시 5분) 하고 싶어도 차마 하지 못했던 핏빛 시대의 뜨거운 증언.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 내 가족 안에 있었다. 평생 정신병으로 고생하던 작은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우연히 그분의 일기를 보게 되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슬픈 가족사와 맞닥뜨린다. 바로 역사책에서만 접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내 가족 안에 있었다. ●김구라, 문희준의 검색녀(OBS 밤 11시 10분) 개그우먼 김지혜가 남편 박준형은 ‘소 처럼 일한다’고 말해 눈길을 끈다. 어느 날, 남편 박준형이 외박을 했다. 화가 난 그녀는 말도 없이 외박한 남편에게 따졌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가 잠든 후 12시쯤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가, 그녀가 다시 잠에서 깨기 전인 아침 6시에 일을 나간 것인데….
  • 소설엔 주인공 없어야 한다, 20여명 모두가 ‘주인공’

    소설엔 주인공 없어야 한다, 20여명 모두가 ‘주인공’

    “난 지금까지 소설에 ‘사랑’이란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 아직 그 두 글자가 장악이 안 됐다. 매일 사랑을 쓰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다. 남은 생에 사랑을 몇 번이라도 써볼 수 있는 행복한 날이 있으면 좋겠다.” 전작 ‘내 젊은 날의 숲’이 사랑한단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연애소설이었다면 신작 ‘흑산’(학고재 펴냄)은 다시 김훈(53)의 장기라 할 만한 역사소설이다. 그의 역사소설 가운데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그린 ‘칼의 노래’는 100만부, 병자호란의 참담함을 다룬 ‘남한산성’은 60만부가 팔렸다. 소설 발간에 맞춰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난 김훈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윈의 ‘종의 기원’을 100페이지쯤 읽다 왔다고 말했다. 이어 “다윈의 문장을 좋아한다. ‘종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를 엎었다. 하지만 그 진화론에 목적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는 거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질서만 있다.”면서 “자연에서 전개된 생명의 웅대한 흐름과 끝이 ‘흑산’에 나오는 정약전이나 황사영과 같은 배교자와 순교자가 꿈꾸던 도덕과 자유와 사랑의 목표와 만나는 미래를 그려 보려 했다.”고 말했다. ‘흑산’은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던 끔찍했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조선이 배경이다. 올 4월부터 경기도 선감도에서 원고지 1135장으로 완성한 소설의 원래 주인공은 정약전이었다. 천주교에 연루된 정약전은 한때 세상 너머를 엿보았으나 끝내는 배반의 삶을 산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에 비견할 만한 실증적 어류 생태학을 담은 ‘자산어보’를 남긴다. 그의 동생 정약종은 참수, 순교했고 막냇동생은 한국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이다. 김훈은 소설의 구상 과정에서 정약전을 주인공의 위치에서 끌어내린다.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로 낡은 조선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천주의 세상을 열고자 했던 황사영의 삶과 죽음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긴 한다. ‘흑산’에는 김훈의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0여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 책에는 주인공이 없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현실에서는 아무도 주인공이 아니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등장인물을 대등한 위치에서 그렸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와 배교자인 황사영과 정약전의 이야기에 조정, 양반,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여러 계층이 생생하게 얽힌다. 작가는 서울 양화대교 옆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성지인 절두산 밑을 지나다니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15년 전 경기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하면서 절두산 아래를 통과해 귀가히게 됐고, 불과 140여년 전에 ‘사학의 무리’라며 목이 잘린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것. 바윗덩어리를 보면서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책을 읽어서는 잘 생각이 안 나고 물건을 봐야 생각이 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는 수십 권의 참고문헌과 연대기, 낱말풀이가 붙어 있다. 학고재의 손철주 주간은 “작가가 우리를 마소처럼 부리며 자료를 수집해 읽었다.”며 농반진반 곁들였다. 현재는 냉담 중이지만 작가는 천주교 유아 세례를 받았고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에서 복사로 일했다. 군 복무를 하면서 더 믿음을 지속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성당을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을 살짝 비쳤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영혼과 관련된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으며 관찰자의 시각을 견지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는 듯한 꼼꼼하고 건조한 묘사와 적확한 단어 구사는 역시 김훈의 역사소설이란 찬탄이 나올 만하다. 칼날처럼 냉정한 짧은 문장으로 그려낸 슬픈 역사는 다윈의 진화론처럼 반복되는 것이기에 더 슬프다. ‘정감록’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던 조선의 민초와 2011년 대한민국 서민의 삶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에서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또 한 번 그의 문장에 몸살을 앓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토종음식 ‘김’, 日 로열티 피할 해결책은…

    토종음식 ‘김’, 日 로열티 피할 해결책은…

    한끼 대용으로 편의점에서 사 먹는 삼각김밥. 그런데 주재료인 김 때문에 값비싼 로열티를 일본에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조선시대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 소개될 정도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먹어 와 토종 식품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 양식되는 김 종자의 20%는 일본에서 들여온다. 대표적인 것이 방사무늬김. 부드러우면서도 잘 찢기지 않아 삼각김밥에 주로 쓰인다. 그런데 내년부터 김은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의 보호 작물로 지정돼 종자를 사고팔 때 품종 개발자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일본의 신품종이 지금과 같은 비율로 국내에 등록될 경우 지난해 김 양식 생산액 1865억원 가운데 11억~22억원을 로열티로 지급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21일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되는 ‘TV 쏙 서울신문’이 전남 목포시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 해조류바이오연구센터를 찾았다. 이 센터에서는 지난해부터 방사무늬김을 대체할 신품종 개발에 매진해 왔다. 이곳의 자랑거리는 김 계통주 117개 등을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원은행. 신품종 개발은 아주 복잡한 과정과 시간을 요구한다. 자생 김을 채집해 우량 엽체를 뽑아낸 뒤 얇은 실 모양의 사상체를 실내에서 배양해 생장도를 조사하고, 바다에서 적응 실험을 해야 한다. 바다 실험은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밖에 할 수 없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해조연은 DNA 마커를 이용해 교잡체를 확인, 실내 배양의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올해는 방사무늬김 신품종을 시험 양식하며 이르면 2013년에는 양식 어민들에게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은정 해조연 연구사는 “어민들이 더 자유롭게, 다양한 김 품종을 양식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치단체마다 연구소가 있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박 연구사가 거의 유일한 김 육종 전문가. 하지만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연산 김이 역전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생태계가 잘 보존된 우리 바다는 양식 품종 외에도 자연산이 김발에 자유롭게 붙어 함께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 TV 쏙 서울신문은 박영수 음식업중앙회 부회장을 스튜디오로 초대하는 등 음식점 업주들의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요구를 전한다. 서울신문 시사 콕에서는 김균미 국제부장이 우리의 미진한 보훈 현실을 짚어 보고 주말 나들이로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리는 2011 ADEX전을 안내한다. 국내 첫 탱고 박사학위 수여자도 만난다. 목포 글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사진 문성호PD sungho@seoul.co.kr
  • 수녀가 쓴 역사 팩션 절제·상상력의 진수

    역사적, 혹은 인간적 사실에 허구를 결합한 팩션은 문학에서도 까다로운 영역으로 인식된다. 상상력을 앞세우다 보면 사실의 왜곡, 변질의 해악에 빠지고 사실에 지나치게 충실하자면 문학적 작품성과 재미에서 멀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문단에서는 팩션의 모험을 선뜻 감행하려는 문인이나 작품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천주교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소속인 임금자씨가 세상에 낸 장편소설 ‘파격’(다섯수레 펴냄)은 흔치 않은 역사 팩션으로 눈길을 끈다. 임금자씨는 타이완 푸런(輔仁)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수원가톨릭대 교수를 지낸 수녀다. 그가 천주교 수도자 신분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면서 동원한 절제의 상상력이 범상치 않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서양 세력이 중국과 조선에 물 밀듯이 들이닥친 순조 34년(1834년)부터 헌종 13년(1847년)이다. 시대적 흐름에 눈뜨지 못한 채 서양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지배받기 시작한 서세동침기에 사회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축을 이룬다. 사회적 변혁기엔 어느 사회든 현실에 안주하는 수구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자는 개혁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마련이다. 임 수녀는 그 변혁의 간극과 혼돈의 중심에 한국 천주교의 태동과 박해라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삽입했다. 한국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태동한 흔치 않은 역사를 갖는다. 이 소설의 묘미는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정착의 과정에서 거듭됐던 박해의 사실을 변혁의 주체들과 연결해 실감나게 풀어 간다는 데 있다. 상하이와 광저우를 넘어 미국을 향해 배를 띄운 양반 출신 거상 정시윤과 역관 김재연, 목숨을 걸고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성직자들,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정약용·정약전 등 실학자들의 활동과 신도들의 순교가 생생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 변혁의 주체들은 소설 제목 그대로 신분질서의 타파와 개선을 이루려는 파격의 인물들이다. 태동기부터 주로 실학자들에 의해 유입됐던 이 땅의 초기 천주교는 당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집권자들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배척과 타파의 우선적인 대상이었던 천주교는 평등과 신분질서의 개선을 주장하는 큰 이데올로기요 운동이었음을 이 작품은 또렷이 보여 준다.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얽어 무리하지 않게 만들어 내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역사의 개연성은 소설을 흥미 있게 만드는 또 하나의 덤이다. 한국 천주교사에 오랫동안 천착했던 수녀의 선 굵은 철학과 고집이 읽힌다. 1만 68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14개 섬 유배객의 궤적

    중국 당대 선승 임제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에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등장한다. 언제 어디 있든지 내가 주인이고,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라는 이 일갈은 불교에서 개개인의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는 말로 회자된다. 삶에서 끊임없이 부닥치게 되는 시련과 고통을 꿋꿋한 마음가짐으로 이기고 넘어서자는 경계. 이젠 일반인도 자주 새기는 경구 중 하나이다. ‘험한 곳일수록 나를 챙겨 진여(眞如)를 보라’는 이 교훈은 피할 수 없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더 빛이 난다.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들과, 유배지를 새로운 삶의 반전 기회로 삼은 사람들의 대비는 그 마음가짐의 편차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이종묵·안대회 지음, 북스코프 펴냄)는 그 수처작주의 마음가짐을 유배지에 연결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이란 부제를 붙였듯이 거제도, 교동도, 진도, 제주도, 흑산도, 남해도를 비롯한 14개의 유배 섬에 서린 유배객들의 궤적을 생생하게 들춰낸다. 유배라 함은 주로 권력싸움의 패배에서 맞게 되는 죽음과도 같은 격리의 극형이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전할 만큼 이 땅에서도 그 유배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정쟁의 회오리가 거셌던 조선시대엔 유배자도 늘어나 15∼16세기 무렵엔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꼴로 유배를 당했다는 조사결과가 전한다. 형벌의 정도도 가혹해져 처음엔 유배자를 한양과 가까운 곳으로 보냈다가 점차 살기조차 힘든 절해고도의 궁벽한 곳으로 격리시켜 갔다. 제목의 위리안치 역시 유배객이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그 안에 유배객을 유폐시킨 형벌이다. 책은 그 위리안치에 감금당한 유배자의 삶의 차이를 들춰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권력 다툼의 와중에 신하들에게 쫓겨난 두 왕 연산군과 광해군이 한탄하며 살다가 숨을 거둔 교동도는 절망과 한의 유배지다. 정쟁의 피바람속에 이건명이 두 아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던 나로도,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적국 땅으로 유배돼 최후를 맞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의 대마도 역시 비운과 한의 섬. 그런가 하면 유배기간 ‘현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흑산도며 70세의 나이에 유배돼 ‘백령도지’를 낳은 이대기의 백령도, 유배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사씨남정기’를 남긴 김만중의 남해는 기회와 진여 찾기의 땅으로 부각된다. 유배객이 아니었다면 이름조차 생소했을 절해고도. 그곳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냈던 이들의 흔적이 그저 가벼운 이야기 거리만은 아닌 듯싶다. 1만 8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동해안 꼼치 대량생산 ‘물꼬’

    동해안 꼼치 대량생산 ‘물꼬’

    강원 동해안의 ‘겨울 별미’ 꼼치가 대량생산된다. 강원도환동해출장소는 16일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심층수연구센터 및 강원도립대학과 1년 동안의 연구 끝에 치어 10만 마리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꼼치는 술에 시달린 속을 풀어주는 데 그만인 이른바 ‘꼼치국’의 주재료로 쏨뱅이목 꼼칫과의 생선. 삼척, 속초, 울진 등 겨울철 강원·경북의 동해안 연안에서 많이 잡힌다. 지역에 따라 곰치(강원) 물곰(경북) 등으로도 불린다. 꼼치는 최근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 마리당 15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등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이번에 생산된 꼼치 치어는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4~5월까지 키운 뒤 심해에 방류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동해안 꼼치 자원 증식을 통한 어민 소득증대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꼼치는 살과 뼈가 매우 연하고 무르며 맛은 싱거워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간의 해독 능력이 뛰어나고 칼슘, 철분, 비타민 B, 단백질과 필수 아미노산 등 영양분이 풍부하다. 또 저지방, 저칼로리라 감기 예방뿐 아니라 피부미용에도 좋아 겨울철 영양보충과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어류다. 동해안 꼼치는 남해안 꼼치(1~2㎏)와 달리 대형종으로 70㎝(8㎏) 이상까지도 성장하며, 한해성이어서 여름철 수심 1000m 내외의 심해에 서식하다가 산란을 위해 겨울철 연안 수심 100m 지점까지 회유하는 독특한 생태를 가지고 있다. 강릉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씨줄날줄] 낙지/이춘규 논설위원

    낙지는 두족류에 속한다. 예로부터 보신에 좋다며 인기였다. 석거(石距)라고 하며, 낙제(絡蹄)라고도 부른다. ‘동의보감’은 맛은 달며 독이 없다고 했다. 크면 몸길이 70㎝ 정도다. 몸통·머리·발로 되어 있다. 발은 8개다. 몸통은 달걀 모양으로 심장·아가미·간·장·위·생식기가 들어 있다. 몸통과 발 사이 머리에 뇌가 있다. 연안 개펄에서 심해까지 돌틈이나 진흙 속에 굴을 파고 산다. 주로 밤에 게·굴·조개·새우 등을 잡아 먹는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영양부족인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였더니 벌떡 일어났다.”고 효험을 소개했다. 맛이 달콤하여 회나 국, 포를 만들기에 좋다고 극찬했다. 실제 1960~70년대 농촌에서는 소가 시름시름 앓거나, 농번기나 한여름 지쳐 있을 때 장에서 구해 온 산낙지를 풀에 싸 입을 벌리고 먹여주면 원기를 회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찰진 개펄에서 잡히는 낙지, 세발낙지는 한국인의 식생활을 윤택하게 해 주는 존재로 인식됐다. 서울 무교동 일대 낙지 전문점들이 유명했으나 지금은 재개발로 흩어졌다. 대신 전국적으로 낙지 음식점이 늘어났다. 볶음이나 무침, 연포탕 등 요리는 다양하다. 산낙지를 머리부터 통째로 먹다가 질식하는 사고는 가끔 화제가 된다. 인기가 높아 중국산 낙지까지 수입돼 식도락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낙지가 잡히지만 도쿄 등 대도시 사람들은 거의 안 먹는다. 대신 낚시 미끼로 활용하니 우리보다는 낙지 대접이 박하다. 낙지는 정겹다. 남도 바닷가 출신 한승원은 소설 ‘낙지 같은 여자’에서 “낙지일수록 어린 것을 먹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면서 “사람들은 어린 낙지를 씹으면서, 앳된 여자를 품어 녹이는 것을 떠올려 말하곤 하였다. 고개 머리를 쳐들고 옮겨 갈 때는 마치 소복을 한 앳된 여자가 잔디밭 한가운데서 치마를 펼치고 앉으며 오줌 눌 자리를 잡느라고 몽그작거리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낙지가 카드뮴 오염 논란에 휩싸였다. 서울시가 지난 9월13일 낙지머리(내장)에 기준치의 14배가 넘는 중금속 카드뮴이 들어 있어 먹지 않는 게 좋다고 발표하면서다. 시민들이 낙지 먹기를 주저하면서 낙지값이 크게 떨어지는 등 혼란이 시작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서둘러 안전하다고 반박했지만 서울시 관계자는 여전히 낙지머리가 위험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뿔난 어민들이 서울시를 상대로 시위와 손해배상 소송도 불사할 기세다. 안전한 먹거리 논란의 끝은 어디인가.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낙지머리 카드뮴’ 진실은…

    ‘낙지머리 카드뮴’ 진실은…

    서울시가 발표한 이른바 ‘중금속 낙지머리’를 두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해 주목된다. 서울시가 낙지와 문어의 머릿속에 든 내장과 먹물 등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카드뮴이 검출됐다고 밝힌 것과 관련, 식약청은 “낙지와 문어는 안전하다.”고 정면으로 치받는 등 조사 방법과 해석을 놓고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 이를 두고 시민들은 “도대체 낙지를 먹으라는 말이냐, 먹지 말라는 말이냐.”며 객관적인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식약청은 14일 “내장이나 먹물 등 낙지의 특정 부위만을 조사한 서울시의 조사방법이 일반적인 중금속 조사방식과는 다르다.”면서 “서울시의 검사치는 잘못된 검사방법으로 산출한 과장된 결과”라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는 앞서 13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9건의 낙지와 4건의 문어 머리에서 중금속인 카드뮴이 기준치(1㎏당 2.0㎎)를 초과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검사 결과 중국산 낙지의 머릿속 내장에서 ㎏당 최고 29.3㎎의 카드뮴이 검출됐고, 문어 머리에서는 기준치를 15배 이상 초과한 31.2㎎이 검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식약청은 “낙지에서 내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하인 점을 고려하면 이번 시험 결과는 안전관리 기준치 이하”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서울시가 ㎏당 31.2㎎의 카드뮴이 검출됐다고 밝힌 문어의 경우 낙지 전체를 기준으로 한 식약청의 추정치로는 ㎏당 1.7㎎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13건 중 1건을 제외하고 모두 기준치를 초과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검사 기준에는 없지만 내장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습관을 고려, 사각지대를 조사했다.”면서 “결국 내장은 카드뮴 덩어리인 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식약청 관계자는 “특정 부위만을 따로 조사하는 법도 없고, 부위별로 중금속 기준치를 따로 정하지도 않는다.”면서 “(문제의 낙지와 문어는)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식약청은 검사한 샘플의 대표성도 지적했다. 13건에 불과한 ‘샘플’에서 얻은 결과를 국내에서 소비되는 모든 낙지와 문어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기관이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자 외식업계와 소비자들은 더욱 불안해 하고 있다. 서울 무교동의 한 음식점 관계자는 “서울시 발표대로라면 낙지를 먹지 말라는 것 아니냐.”면서 “식약청이 객관적인 조사를 실시해 결과를 밝혀 줬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두 기관의 다른 주장에 소비자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국민의 관심이 큰 음식물 등에 관한 조사결과 발표는 정확성과 종합적인 지표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이번 조사결과 발표에도 오염 원인과 경로,유통 단계 등이 제대로 적시되지 않아 궁금증을 더했다는 지적이다. 두 기관의 주장엔 ‘어디서 어떻게’가 빠져 있다.  특히 낙지는 ‘펄속의 산삼’으로 불릴 정도로 영양가가 높아 관심도를 더했다. 인·철분·비타민·코발트·망간 등이 빈혈 예방과 정력 증진에 좋고 콜레스테롤을 방지하는 DHA가 함유돼 있다. 또 먹물은 항암·항균작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낙지 등 수산물에서 나오는 먹물을 분리하면 항암 활성이 강한 뮤코다당류가 포함돼 항암효과 외에도 방부작용 및 위액분비 촉진을 돕는다고 알려져 있다. 소비자시민모임 관계자는 “많은 시민들은 머리에 영양성분이 많아 유익한 줄 알고 익혀 먹었다.”면서 “전체 중 일부에서 카드뮴이 축적돼 있다 하더라도 소비자로서는 좋을 것은 없는만큼 가능하면 머리 부위는 안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 네티즌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힘없는 소한테 낙지 서너마리를 먹였더니 벌떡 일어났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대체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며 아리송해 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얘기하는 이도 많았다.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바다와 갯벌에 중금속이 누적됐고 그 결과 작은 생물들이 중금속에 노출됐으며, 결국 문어나 낙지 등도 중금속에 오염된 먹이를 먹고 카드뮴 등이 쌓였다는 논리다. 카드뮴은 바위의 풍화작용 등으로 토양에 녹아 있거나 산업 및 농업 폐수로 유입되는 중금속으로, 체내에 들어오면 배출되지 않고 쌓인다.   최영훈·안석기자 ccto@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2) 정약용 ‘유배지 편지’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2) 정약용 ‘유배지 편지’

    ●유배와 편지, 출구이자 입구 다산 정약용은 살아생전 수백 권의 저작을 남겼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압도적인 분량의 저술은 그의 글을 직접 읽는 대신 가벼운 호기심으로 그를 추억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곤 한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라거나 명석한 천재였다거나, 혹은 다산초당이라는 관광지의 주인공이라는 식으로! 다산은 ‘지식인이 책을 펴내 세상에 전하는 것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진가를 알아주기를 바라서’라고 했다. 하지만 다산에 이르는 길은 너무 멀고, 다양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文理)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부지런히 책을 읽는 데 힘쓰거라.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종놈 석(石)이가 2월 초이렛날 되돌아갔으니 헤아려보건대 오늘쯤에야 집에서 편지를 받아보겠구나. 이달을 맞아 더욱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구나. (1801. 2. 17,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데 여기, 그에게로 이르는 좁지만 또렷한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편지다. 일-기계, 공부-기계, 저술-기계, 관료-기계였던 다산이 언제부턴가 ‘바깥’을 향해 내보냈던 이야기들이다. 특히 유배라는 제약된 상황 아래에서 편지는 그와 세상이 만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출구(出口)였던 그 문이 우리에겐 그에게로 향하는 입구(入口)가 되는 셈이다. 다산문집(전 10권)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다양한 편지들은 정약용으로 향한 접근을 한결 쉽게 도와준다. 박석무 고전번역원장은 1979년 이 편지들을 묶어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냈다. 이 책은 거의 ‘준 고전급’ 반열에 올라 있다. ●아들들, 폐족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이 될 수 있다 다산은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사십대와 오십대는 물도, 바람도, 기후도 낯선 먼 땅끝 마을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사이 사라져버렸다. 다산의 위대함은 그가 남긴 수백권의 저서나 그의 학문이 갖춘 위엄 이전에, 유배라는 고립된 환경과 18년이라는 미지의 시간을 버텨낸 그의 의지에서 온다. 폐족(廢族)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런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구석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하는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데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1802. 12. 22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다산은 편지를 쓴다. 큰아들 학연에게, 둘째아들 학유에게, 혹은 조카 학초에게! 너희들은 폐족(廢族)이다. 과거 시험도 볼 수 없고, 남들로부터 업신여김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폐족은 인생 막장을 가리키는 불명예가 아니다. 폐족이란 참다운 독서 기회를 행할 수 있는 권리의 다른 이름이다. 폐족은 고위 공무원은 될 수 없지만, 성인이 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열심히 공부해라, 너희가 아니면 내 저서는 누가 읽어 주겠느냐.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얘들아, 얘들아… ●지기(知己)… 형님,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다산은 둘째 형님 정약전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형님, 이번에 공부를 하다 보니 요순 시대의 ‘고적(考績)’제도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형님, 지난번 말씀하신 형님의 논의는 너무 탁월합니다. 이번엔 참고삼아 제 논의도 조금 덧붙여 봅니다. 읽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형님, 강진의 물소리가 차갑습니다. 그곳도 계절이 바뀌고 있겠지요? 형님, 흑산도의 수백마리 들개들을 가만 놔두고 영양 실조를 염려하시다니요. 여기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을 보내드립니다. 형님, 얼마 전엔 밥을 해주는 노파에게서도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배울 것 천지입니다. 형님, 형님…. 어느날 저녁에 집주인 노파가 곁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이니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하며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고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이건 너무도 편파적이 아닌가요?”(둘째 형님께 드리는 편지) 하지만 둘째 형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결국 숨졌다. 오랜 유배 생활 동안 다산은 형을 잃고, 막내 아들을 잃고, 중풍으로 자신의 건강도 잃었다.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만 손암선생(정약전)만이 나의 지기(知己)였는데 이제는 그분마저 잃고 말았구나.” 그러고 보면 다산의 열정적인 저술 활동은 아무라도 단 한 사람 자신을 알아주길 바랐던 그가 내밀었던 실존의 외침이었다. 또한 그의 편지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이며, 동생이고, 남편이었던 그의 내면이 들려준 은밀한 풍경 소리였다. ●실학, 참다운 학문의 길 다산의 삶에는 쉬는 페이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바쁘다. 아마도 이것은 다산 스스로 참된 선비의 학문은 늘 쓰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이제는 그의 말을 듣고 정책에 반영해줄 군주도, 세력을 가진 친구들도 주위엔 없게 되었지만 학문과 지식의 쓰임이 반드시 정책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이제까지 자신의 언설을 최종 수신하던 군주(정조)의 빈 자리를 객관적이고 확실한 ‘앎’(지식)으로 대체시켰다(다산학의 출발!). 이를 위해 다산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관찰하고, 정리하고, 사색하고, 그리고 저술했다. 어쩌면 그것은 한 지식인이 자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혹은 정직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문성환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처음으로 더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노론파 김매순이 보낸 편지의 의미 신유박해(1801)는 현실정치에서 노론에 의한 남인의 완벽한 패배를, 다산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유배자와 폐족이라는 신분 상의 근본적인 재배치를 강요한 사건이었다. 이때 다산의 나이는 불과 마흔 살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는 지나치게 젊고 왕성한 나이였다. 1818년, 18년만에 비로소 유배지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이미 늙고 병들어버렸을 뿐 아니라 가슴 속에 깊은 울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노년의 선비를 원할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다산의 해배(解配)는 단지 그의 근거지가 강진에서 서울로 옮겨졌다는 사실 외에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요식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기 다산은 여전히 고독했다. 이 무렵 다산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더 이상 관직이나 저술 활동 등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힘쏟았던 저작들을 진심으로 읽어줄 단 한 사람의 친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3년째 되던 어느날 노론계의 실세 중 한 사람인 김매순(邁淳)은 우연히 다산의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읽게 되었다. 김매순은 다산의 저작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미묘한 부분을 건드려서 그윽한 진리를 밝혀낸 것은 비위(飛衛)가 이[蝨]를 쏘아 적중시킨 것 같고, 헝클어진 것을 추려내고 굳어있는 것을 찢어낸 것은 포정(?丁)이 고기를 자른 것과 같다. …이는 공자의 도를 밝힌 원훈(元勳)인 동시에, 주자(朱子)를 업신여기는 일을 막아낸 경신(勁臣)이다. 유림(儒林)의 대업(大業)이 이보다 클 수 있을까.’ 다산은 김매순의 이러한 평가에 크게 고무되었다. 비록 현실 정치의 장에서는 씻을 수 없는 원한에 사무친 적(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을 알아봐준 단 한 사람의 지인(知人)을 비로소 만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쓴다. “박복한 목숨 죽지 않고 살아나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멀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편지를 받고 보니, 처음으로, 더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의 고적하고 신산했던 삶이 한 문장의 말에 사무쳐 있다.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 [名士의 귀향별곡]장흥 율산마을 소설가 한승원

    [名士의 귀향별곡]장흥 율산마을 소설가 한승원

    득량만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해산 토굴’이란 빛바랜 목조 간판이 토굴 처마에 내걸렸다. 마당에 들어서면 득량도 너머 고흥 반도의 리아스식 해안과 섬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전남 장흥 안양면 율산마을. 이 마을에 둥지를 튼 소설가 한승원(71)씨의 창작실이 해산 토굴이다. “서울 우이동에서 살다가 짐을 싼다고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15년이 흘렀습니다.” 한승원씨는 “당시 지인들은 ‘문학시장’이 서울인데 왜 지방으로 내려가느냐며 ‘낙향’을 반대했다.”며 “그러나 서울보다는 바닷가로 내려온 뒤 훨씬 글이 더 잘 써졌다.”고 말했다. 그가 이름붙인 ‘연꽃 바다’ 득량만은 자궁을 상징한다. 풍요와 만물의 근원이다. 그는 요즘도 늘 자궁을 내려다보며 글을 써 나간다. 그의 소설과 시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는 태생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다. 갯벌과 해풍을 버무린 듯한 향토색 짙은 작품 속 언어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금세 느낄 수 있다. “고향이 나를 키워줬으니 이제는 내가 보답해야지요.” 그는 어떻게 보답하겠느냐는 질문에 “끊임없이 작품을 쓰겠다.”고 답했다. 고희를 넘기고서도 어떻게 저런 정열이 나올까 궁금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을 들고 나왔다. 최근 펴낸 장편 소설 ‘다산’ 속에 해답이 깃들어 있다. “다산 선생은 일을 통해 깨달음(正心)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힘이 다하는 날까지 생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수많은 저술과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체가 스러지는 순간까지 쓰고,또 쓰겠다.”며 “소설속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소설 ‘다산’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천착해 온 정약용의 삶에 대한 완결편이다. 손암 정약전의 유배생활을 통해 인간의 ‘절대고독’을 얘기했던 ‘흑산도 하늘길’ ‘초의’ ‘추사’ 등도 다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완성된 것들이다. 최근엔 장편 소설 ‘억불산 이야기’를 탈고했다. 산 이름의 억(億)자는 ‘민중’을 뜻하며, 구세주인 부처가 곧바로 민중이란 얼개로 짜였다. 설을 쇠고 나서는 포구 이야기를 엮어낸다. 고향인 장흥의 크고 작은 포구와 경상남도, 서해안 포구까지를 망라한다. 포구를 중심으로 사람사는 얘기를 만들어간다. 그의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작품을 통해 고향을 알리겠다는 포부를 감추지 않는다. 고향 산천과 어릴적 고된 바닷일을 했던 기억들이 그의 문학의 알토란 같은 자양분이다. 그는 고교 졸업후 이곳에서 3년간 김양식과 농삿일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고향은 ‘자연’이라고 하는 프리미엄을 나에게 줬습니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태어난 작가들은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그는 “모든 게 서울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지방에는 고급 문화의 공동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작가들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작품활동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요즘도 아침 6시에 일어나 한시간 가량 작품을 쓴 뒤 2~3㎞쯤 떨어진 수문리 앞 해안도로를 산책한다. 아침 식사 후 10시부터 12시까지 또다시 펜을 든다. 오후엔 잠도 자고, 자료조사를 하며 뉴스와 동물의 왕국 등 TV 프로그램을 즐긴다. 군이나 다른 공공기관이 주최하는 강연회 등에도 자주 불려 나가 ‘문학의 역할’ 등을 역설한다. 그는 “세상과 교통·교감하며,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는 것이 문학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차와 포도주를 마시고, 회 먹고, 글쓰는 재미로 삽니다.” 그는 끝없이 펼쳐진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다산의 정심(正心) 상태에 이르기 위해 오늘도 일(글쓰기)에 매달린다. 글 사진 장흥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약 력 << ▲장흥중·고 졸업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목선, 신화, 불의 딸, 포구, 해산가는 길, 원효, 흑산도 하늘길, 다산 등 수 백편의 소설과 수필·시집 등 다수. ▲한국소설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현대문학상▲이상문학상▲서라벌문학상▲한국해양문학상▲미국의‘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등 수상
  • 흑산도 일주도로 27년만에 완공

    전남 신안군 흑산면 일주 도로가 27년 만에 마무리되면서 다도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새로운 명소로 떠오를 전망이다. 2일 신안군에 따르면 1984년 착공해 540억원이 투입된 흑산도 일주도로(군도 28호선)가 다음달 말쯤 개통된다. 이 도로는 흑산면 진리~예리 구간으로 총길이 25.4㎞, 너비 7m이다. 일주도로는 현재 가드레일 설치 등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도로는 국내 도로공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을 거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하루 2.6m, 1년 940m씩 도로를 뚫은 것으로 절벽 등 난공사 구간이 많은 데다 예산 확보가 지연됐기 때문이다. 신안군은 일주도로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인근에 포토존, 전망대, 쉼터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설치해 방문객을 맞기로 했다. 흑산 일주도로는 차량으로 한 바퀴 도는 데 40분이 걸린다. 흑산 일주도로 인근에는 최익현 유허비, 자산 정약전 유적지, 고인돌 유적지 등 다양한 관광명소가 자리 잡고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아빠를 위한 ‘여행 처방전’

    [내 책을 말한다] 아빠를 위한 ‘여행 처방전’

    불혹에 들어선 난 평생 처음으로 딸에게 성적을 물었다. 학교 공부는 엄마 담당이라. “요즘 몇 등 하나.” “뒤에서 2등.” “엄마야 학교 가 봐라. 천재들만 모였나.” 학교 다녀 온 엄마 왈, “100점이 7명이라네요.” “뭐라.” “과목당 30만원씩 주고 과외한대요.” “뭐라, 초딩이 과외를? 딸, 가자.” “어디로.” “문화재 답사. 인문학의 바다나 유영하자꾸나.” 자고로 남들 다 가는 길은 피해 가는 게 상책. 딸에게 매일 사자성어 날리기 시작. 선비나 만들어야지. 주말에 한 문제를 낸다. 맞히면 1만원. 틀리면 국물도 없고. 자고로 돈의 시대. “딸, 용돈의 10퍼센트는 불우이웃에 던져라.” “월드 네이버스에 3만원씩 보내고 있어. 좀 아깝긴 하지만.” 베스트셀러 나올 때까지 하겠다던 택시 운전은 이미 5년째. 책 두 권이 완전 쪽박 찼으니. 그래 라면 끓여 먹으며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을 발간했다. 대박. 건축가 김원 선생에게 전화했다. “선생님, 드디어 5년 만에 연 1만권 파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조정래 선생은 한 달에 1만권 파는 책이 수두룩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딸 왈. “아빠, 나 학교 그만 둘래.” “그러세유. 단 조건이 있다.” “먼데.” “1주일에 한 권씩 독서.” “그럼 한 권 읽을 때마다 1만원씩 줘.” “당근.” 어떤 사람이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내 이놈을.’ 택시회사를 사직했다. 승부를 걸겠다. 이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전업 건축평론가. 굶어 죽을 가능성이 많은. 아지트를 대전으로 옮겼다. 사통팔달. 여관비와 휘발유 값을 감당 못하니.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이용재 글, 디자인하우스 펴냄)을 냈다. 책 한 권에 1500만원이 들어갔다. 수록된 지역은 30곳이지만 100곳 다녀 보고 추린 거다. 눈 오면 다시 간다. 꽃 피면 또 간다. 낙엽 져도 가고. 자살은 늘어가고. “딸, 가장 큰 불효가 머냐?” “공부 안 하는 건가.” “아니, 부모보다 먼저 가는 거.” “알았어.” 이 시대 가장들은 인문학 기행을 해야 한다. 우리 선비들이 지난 시절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게 어떤 정신 치료약보다 효과가 있다. 지난주 딸과 처음 흑산도를 찾았다. 목포에서 두 시간. 우리 시대의 선비 정약전 선생은 아무런 죄도 없이 이 오지에서 16년 귀양 살다 간 거다. 얼떨결에 지천명에 이르렀다. 센 놈은 하늘에서 전화가 온다고 하던데. 전화가 왔다. “야.” “예.” “까불지 마라.” “아, 예.” 이제 가훈을 바꿨다. 까불지 말자. 가로 열고. 다침. “아빠, 인문학적인 건축이 뭐야?”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을 완성하는 건축.” “아빠, 적자보면서 까지 책내는 이유가 뭐야?” “엄마한테 복수하려고. 인세로 엄마 연봉을 넘어서는 게 아빠 꿈이걸랑.” “내가 보기엔 안 될 거 같은데.” “안 되면 말고.” 1만 4800원. 이용재 전업작가
  • 카~ 시원하다 ‘곰칫국’

    카~ 시원하다 ‘곰칫국’

    쓸모없어 버려지다 ‘귀족 생선’으로 환골탈태하는 물고기들이 요즘 왜 그리 많을까. 가장 앞줄에 곰치를 내세운다면 식도락계의 제현들께서 동의할는지. 예전엔 포구마다 발길에 차이는 신세였던 천덕꾸러기가 지금은 현지에서조차 마리에 6만원을 호가하니 말이다. 요즘 강원도 삼척 등 동해안 일대엔 곰칫국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수확량이 격감해 곰칫국에 들어가는 녀석의 살점도 나날이 줄고 있긴 하지만, 겨울철 최고의 별미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곰치의 정확한 명칭은 꼼치다. 쏨뱅이목 꼼치과의 물고기로 뱀장어목의 곰치와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본명보다는 곰치, 물곰 등의 ‘예명’으로 더 자주 불린다. ●생긴 건 곰치, 맛은 금(金)치 국내 최고의 검색 포털에 나온 곰치의 설명을 보자. ‘몸길이 약 45cm. 몸은 가늘고 길며 물렁물렁하여 일정한 모양을 갖추기 힘들다. 수심 50∼80m의 바닥이 뻘로 된 곳에 주로 서식하며, 겨울철에 연안으로 이동한다. 맛이 없어 먹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눈에 거슬린다. 맛이 없어 먹지 않는다고? 예전엔 그랬을지 모르겠으나, 요즘은 ‘금치’라고 불릴 만큼 귀한 물고기 대접을 받는다. 사실 곰치는 불친절해 보이는 생김새만큼이나 어디서건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던 생선이었다. 강원도에선 물텀벙이라고도 부르는데, 어부들이 곰치가 그물에 걸리면 재수없다며 바로 바다로 던져버렸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바다에 떨어지면서 ‘텀벙’ 하는 소리를 냈음은 물론이다. 경남 거제 사람들은 먹지 않고,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밭에 거름으로 주었단다. 한 술 더 떠 정약전(1760~1816)은 ‘자산어보’에서 곰치를 ‘미역어(迷役魚)’ 라 적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로 쉽게 표현하자면 ‘뭐 이런 기 다 있노?’ 정도 되겠다. ●삼척 정라항 일대 ‘곰칫국 골목’에 맛집 즐비 하지만 ‘못생겨도 맛은 좋아!’란 옛날 광고문구가 곰치에겐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 된다.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비린내 없는 뽀얀 살이 자랑이기 때문. 게다가 지방질 함량이 적은 데 비해 단백질과 철분, 칼슘 함량은 많아 겨울철 보양식품으로 인기다. 곰치에 묵은 김치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곰칫국은 사실 뱃사람들이 값나가는 생선을 대신해 배 위에서 끓여먹던 음식이었다. 그러다 주독을 해소하는 데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 뱃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졌고 술꾼들이 하나둘 찾기 시작하면서 이제 겨울철 별미의 상석을 꿰차게 된 것. 곰치는 암수가 색깔이 다르다. 빨간 것은 암놈, 검은 녀석은 수놈이다. 곰칫국엔 대부분 ‘흑곰’을 쓴다. 식초에 살짝 담가 육질을 단단하게 만든 뒤 회로 먹거나 말려서 찜을 해먹는 경우도 있지만 곰치는 역시 탕이다. 그야말로 살점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한 번 훑으면 뼈만 남고 모두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애주가라면 그 순간 눈앞에 맑은 소주가 방울방울 맺힐 터다. 사실 곰칫국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묵은 김치다. 삼정식당 신윤지 사장은 “곰칫국은 김치가 맛있어야 한다. 묵은 김치의 신맛이 비린내 없는 생선의 담백한 맛을 끄집어 낸다.”고 설명했다. 곰치는 내 나라 안 어디서나 잡히는 생선. 굳이 삼척을 추천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곰칫국을 십수년 전부터 상차림 목록에 올려놓고 팔았던 곰칫국 골목이 이제는 삼척의 명물이 되다시피 할 정도로 곰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숨막힐 듯 아름다운 해안선이며, 대이리 동굴지대, 금강송 가득한 준경묘 등 볼거리가 차고도 넘친다. ●시원한 복국도 드시고 오세요 곰치와 도루묵, 양미리, 도치, 장치 등 이른바 동해안 별미 5형제가 남획 등의 이유로 수확량이 줄면서 요즘은 복어가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역시 12~2월에 많이 난다. 그런데 이 겨울 12월엔 다소 뜸하더니 1월 들어 많이 잡히고 있다.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밀복. 정라항 인근 삼정식당(033-573-3233)이 잘한다. 복지리나 탕 모두 1만원을 받는다. 기왕 나선 길, 다양한 해산물로 장바구니까지 채우고 올 생각이라면 번개시장을 찾는 게 좋다. 아침 5~8시 사이 잠깐 열린다. 정라항 등에서 새벽에 들어온 싱싱한 해산물을 살 수 있고, 양은 적지만 도치 등 보기 어려운 생선과도 만날 수 있다. 값이 싸 삼척 주민들도 애용한다. 삼척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책꽂이]

    ●프로페셔널의 조건(오마에 겐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일본의 저명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가 21세기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21세기형 인재의 핵심역량으로 선견력(先見力), 구상력, 토론력, 적응력 등을 꼽았다.1만 1000원.●사찰 장식의 선(善)과 미(美)(허균 지음, 다할미디어 펴냄) 미술사학자인 지은이가 사찰의 계단과 축대, 불전, 불단, 불탑, 부도, 범종 등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와 미학적 가치 등을 220여장의 사진과 함께 설명.1만 2000원.●김홍희 몽골방랑(김홍희 지음, 예담 펴냄) 사진작가인 저자가 몽골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대자연의 풍광 등을 앵글에 담고 여운을 기록했다.1만 5000원.●화폐의 역사(캐서린 이글턴 등 지음, 양영철·김수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각국 돈의 역사와 지역적 형태 등을 입체조명한 세계 화폐의 모든 것. 돈이 인간정신과 생활방식에 미친 영향도 고찰.2만 9000원.●류승완의 본색(류승완 지음, 마음산책 펴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짝패’ 등 컬트와 예술을 넘나들며 한국 B무비를 개척해온 류승완 감독의 영화관과 삶.1만 2000원.●무서운 그림(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펴냄) 공포감을 자아내는 명화들을 통해 작품 이면의 역사·문화적 사실을 들춰보고 화가의 개인사도 들여다봤다.1만 3500원.●유배(김만선 지음, 갤리온 펴냄) 김정희의 ‘세한도’,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정약전의 ‘자산어보’ 등 유배지에서 꽃피운 학문과 예술의 진면모를 돌아봤다.1만 3000원.●세상을 바꾸는 비즈니스(마크 베니오프 등 지음, 김광수 옮김, 해냄 펴냄) 세계적 기업들의 성장과정을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어떻게 조직문화와 경영전략에 접목시켰는지 파악했다.1만 9800원.●마르크스,21세기에 끌려오다(마토바 아키히로 지음, 최민순 옮김, 시대의창 펴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도 마르크스주의의 효용은 다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때라는 주장.1만 3500원.●행복하소서(최일도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밥퍼 목사’로 유명한 저자가 지난 1년 동안 빠짐없이 쓴 일기글 모음.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건져올렸다.1만 2500원.
  • [씨줄날줄] 고등어/함혜리 논설위원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나는 대표적인 어종 가운데 하나가 고등어다. 고등어는 1530년 이행·윤은보 등이 펴낸 ‘동국여지승람’에도 고등어잡이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우리와 친숙한 생선이다. 얕은 물에서 떼를 지어 다니는 고등어는 한국 중국 일본 연해에 널리 분포해 있다. 우리나라 연해의 고등어 회유와 분포에 관한 기록은 정약전이 1814년에 쓴 한국 최고(最古)의 어류학서 ‘자산어보’에 소상하게 남아 있다. 식탁에 자주 오르는 만큼 요리법도 다양하다. 구이, 조림, 찜 등 여러가지로 요리할 수 있다. 배에서 잡은 것을 빙장 또는 냉동했다가 녹여서 요리하기도 하고 염장(자반)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안동 간고등어는 내륙에 위치한 안동의 지리적 특성에 의해 생겨난 음식이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가 영덕을 출발해 하루쯤 지나 안동에 도착하면 상하기 직전 상태가 된다. 바로 이 순간에 소금 간을 하면 맛도 좋고 보관도 용이한 안동 간고등어가 되는 것이다. 고등어는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 가장 맛이 좋다.‘가을 배와 고등어는 며느리에게 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정어리, 전갱이, 꽁치와 함께 4대 등푸른 생선으로 꼽히는 고등어는 ‘바다의 보리’라고 할 정도로 영양가를 인정받고 있다.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인 EPA와 DHA 농도가 높아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의 원인이 되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리고, 중성지방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대표적인 붉은살 생선인 고등어는 흰살 생선에 비해 질 좋은 아미노산과 헤모글로빈, 각종 비타민이 풍부해 각기병이나 빈혈, 뇌질환이나 치매와 같은 신경계 질환을 예방해 준다. 값싸고, 영양가 높아 최고의 반찬거리로 각광받았던 고등어가 요즘 ‘귀하신 몸’이 됐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최근 3년간 어획량이 20% 이상 줄고, 기름값 부담 때문에 어획선 출항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크게 오른 탓이다. 반면 고급생선으로 꼽혔던 갈치는 남해안 수온이 올라가면서 어획량이 급증해 가격이 많이 내렸다. 그래도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고등어의 맛을 갈치가 따를 수 있을까. 이래저래 서민들의 삶은 고달파지기만 한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미래의 휴양자산 섬] 암초에 걸린 섬개발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미래의 휴양자산 섬] 암초에 걸린 섬개발

    ■ 일손놓고 반대운동…덕적도 핵폐기장 건립 등 ‘좌초’ 정부는 1994년 인천 옹진군 덕적도 인근 굴업도에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을 추진했다. 육지와 90㎞ 떨어진 데다 주민들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키로 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덕적도 주민들은 일손도 놓은 채 반대운동에 나서 핵폐기장을 무산시켰다. 당시에는 환경단체의 영향을 받아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섬이 망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14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 주민들은 “핵폐기장의 위험성이 과장됐다. 섬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이었는데….”라고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어 핵폐기장 대상지로 떠오른 전북 위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빚어졌다. 섬 개발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섬은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해 육지에서 시행키 어려운 국책사업이나 관광레저사업 등이 우선 개발 대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섬의 폐쇄성과 배타성, 환경문제 등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섬에서는 작은 시설 건립을 둘러싸고도 외지인과 원주민이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다. 옹진군 모 섬의 경우 외지인들이 숙박시설을 지을 경우 완공 후 5년이 지나야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마을 정관으로 정해 놓았다. 인천 용유·무의도 일대 21.65㎢에 추진되는 해양관광단지도 주민들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고 있다. 주민들은 인천시가 독일 캠핀스키 그룹과 협약을 체결한 관광단지 개발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 건양대 권경주 교수는 “주 5일제 근무 등으로 섬 관광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투자비 회수에 대한 불확실성 등으로 섬 개발이 예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개발이 진행되더라도 개개의 섬이 지닌 특수성을 파악하고 지속적인 개발이 가능하도록 종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섬=휴양지’라는 도식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양문화 콘텐츠를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예로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경우 빼어난 경관 외에도 ‘홍어’ ‘흑산도 아가씨(해녀)’ ‘정약전과 자산어보’ 등 흑산도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들이 많으므로 이러한 요소들이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적극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성환 신안문화원 사무국장은 “단순히 개발이 편리한 지역에 인공적인 휴양지를 조성하는 것은 한계점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며 “다양한 해양문화 콘텐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외자유치 실패로 안면도·행담도 사업 표류 섬개발 실패 사례 자치단체 등이 추진 중인 섬 관광지 개발사업이 민자유치가 여의치 않거나 난개발, 부동산 투기 등으로 개발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충남도가 1989년부터 추진 중인 안면도 국제관광지 개발사업은 외자유치 무산 등으로 표류하고 있다. 이 사업은 2014년까지 7408억원을 들여 태안군 안면읍 승언·중장리 일대 꽃지해수욕장 주변 380만㎡에 골프장·호텔·콘도·워터파크 등 국제적인 고급 휴양지를 조성하는 것이다. 도는 2006년 말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했으나 법정 소송에 휘말려 중단됐다. 탈락한 컨소시엄측이 “선정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며 대전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선정 취소 판결이 내려졌다. 충남 당진의 행담도를 종합관광단지로 개발하는 사업도 외자유치 실패와 무리한 사업 추진 등으로 사업이 중단됐다.1999년 싱가포르 투자사인 에콘과 현대건설의 컨소시엄이 지분 90%, 한국도로공사가 지분 10%로 행담도개발㈜을 설립해 사업을 추진했다.1단계로 기존의 섬에 휴게소를 건설하는 사업은 2001년 마무리됐다. 그러나 2단계 행담도 주변 해양복합레저타운(오션파크리조트) 건설사업은 투자사의 부도 등으로 매립만 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개펄이나 바다를 메우는 섬의 간척 사업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연구팀 김준 연구위원은 “외국에서는 해양오염 정화 역할을 하는 갯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역 간척으로 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섬을 친환경적인 관광자원으로” 장승우 여수세계박람회조직위장 “섬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입니다.” 장승우(전 해양수산부 장관) 2012여수세계박람회조직위원장은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해양관광·레저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여수 해양엑스포는 섬 개발을 앞당기는 촉매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 위원장은 “엑스포 행사장과 주변섬에 설치되는 각종 시설물의 사후 활용 방안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바다와 섬이 어우러지는 쾌적한 공간 구성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남 통영∼전남 목포 앞바다 섬들의 경관은 세계 어느 지역의 것보다 아름답다.”며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섬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섬들이 그동안 제모습을 잃지 않은 것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됐기 때문”이라며 “개발을 위해 일부 규제가 풀린다 할지라도 해당 지자체장과 주민, 시민단체 등이 앞장서 난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위원장은 “이탈리아 나폴리 등 지중해 연안의 유명 휴양지 섬들의 경관은 우리나라 다도해에 못 미친다.”며 “그럼에도 세계인의 발길이 몰리는 것은 인문·자연 경관을 잘 보존하고 체계적으로 개발한 덕택”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자연 경관을 손대지 않으면서 사람이 머물고 즐길 수 있는 숙박·레저 시설을 적절히 배치하고, 체계적인 개발에 나선다면 동남아의 푸껫·발리 등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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