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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24) 전남 벌교 섬마을 꼬막밭 트는 날

    [김준의 바다 맛 기행] (24) 전남 벌교 섬마을 꼬막밭 트는 날

    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도의 섬마을, 물이 빠지고 있는 갯벌에 ‘널배’를 챙겨 든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일찍 도착해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쫓는 사람도 있었다. 어젯밤 늦게야 알고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왔다는 주민도 있었다. 마을 꼬막밭을 ‘트는’ 날이다. 한 집에서 한 명씩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참석하지 못할 경우 벌금을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연말 배당금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서울이나 부산으로 자식들을 만나러 갔던 사람도 이날만큼은 열 일 뒤로하고 귀향한다. 나이가 많아 일을 하기 어려운 집은 자녀는 물론 사위까지 대신 참석할 정도다. 바닷물이 빠지자 어촌계장의 신호에 따라 수십 명이 널배를 타고 미끄러지듯 꼬막밭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다. 꼬막은 꼬막, 새꼬막, 피조개로 나뉘며 연체동물 돌조개과에 속하는 이매패류다. 이 중 꼬막을 ‘참꼬막’이라고도 부른다. 참꼬막의 ‘참’은 진짜라는 말이지만 으뜸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반면 새꼬막은 ‘똥꼬막’이라 부른다. 새꼬막은 썰물에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 살지만 참꼬막은 바닷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는 갯벌의 5~10㎝ 깊이에서 자란다. 따라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기 위해 껍질이 매우 두꺼울 수밖에 없다. 반대로 새꼬막은 껍질이 얇아 채취할 때 쉽게 부서진다. 참꼬막은 상품이 되려면 4, 5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새꼬막은 2년이면 팔 수 있을 만큼 자란다. ●전라도서는 망자의 상에도 반드시 올려 집 앞 골목시장에서 참꼬막 1㎏에 2만원, 새꼬막은 1만원에 샀다. 피조개는 세 개를 덤으로 얻었다. ‘꼬막 맛이 떨어지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산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자도 꼬막 맛을 잊지 못한 것일까. 전라도에서는 망자의 상에도 반드시 올려야 하는 음식이 꼬막이었다. 잔칫상에도 홍어와 함께 참꼬막이 오르면 ‘걸게 장만했다’는 말을 들었다. 상을 잘 차렸다는 전라도말이다. 참꼬막은 새꼬막에 비해 짭조름한 맛이 강하다. 또 달다. ●참꼬막은 살이 검붉은 색·새꼬막은 희멀건 색 맛의 차이는 삶아서 껍질을 까 보면 알 수 있다. 참꼬막은 살이 검붉은 색을 띠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새꼬막은 희멀건 색을 띤다. 얼마나 다행인가. 짭짤함 없이 달기만 했다면 꼬막은 진즉 갯벌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자산어보’에서는 참꼬막을 ‘감’(?), 새꼬막을 ‘작감’(雀?)이라 했다. ‘달콤한 조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작감은 속명을 ‘새고기’라 하고 ‘참새가 물에 들어가서 된 조개’라 했다. 채소를 손질하다 건져내야 할 시간을 놓쳤다. 몇 개는 벌써 입을 벌리고 살이 오므라들었다. 꼬막 살을 꺼내 보니 모습이 꼭 새를 닮았다. 그래서 새고기라 하지는 않았을까. ‘우해이어보’에서는 껍질이 지붕의 기왓골을 닮았다고 해서 ‘와농자’라 했다. 그런데 정약전은 정말 꼬막을 보기나 했을까. 갯벌도 없고 조류도 거센 흑산도에서 말이다. 그가 쓴 ‘자산어보’의 ‘원편’에는 꼬막이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이청이 자신의 경험과 중국 문헌을 보고 보충해 집어넣었다. 이청은 다산이 강진 유배 생활을 하며 가르쳤던 제자다. 그곳 ‘도암만’은 지금도 꼬막이 잡히고 있으며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기 전에는 보성 벌교에 뒤지지 않는 서식지였다. 참꼬막은 전남 여자만과 가막만이 주산지다. 그중에서도 보성 벌교와 고흥 남양에서 많이 생산된다. 충남 서산과 전남 여수 등지에서도 꼬막이 잡힌다. 모두 파도의 영향을 적게 받는 내만이거나 섬과 섬 사이의 펄갯벌이 발달한 곳이다. 이들 지역은 펄의 깊이가 수m에서 10여m에 이르러 물이 빠져도 걸어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어민들은 길이가 어른 키보다 길고 폭이 어깨 넓이만 한 ‘널배’(뻘배라고도 부른다)를 타고 이동한다. 어머니들이 널배를 타고 갯벌을 누비는 것을 보면 쉬울 것 같지만 의외로 힘이 많이 들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한 발을 기다란 널배 위에 올려놓고 다른 발로 갯벌을 밀어 이동한다. 꼬막을 잡을 때는 가슴을 판자 위에 올려놓은 물동이에 대고 엎드려 조금씩 이동해 가며 양손으로 열심히 갯벌을 휘젓거나 주물러 꼬막을 찾는다. 긴 판자에 갈퀴처럼 철사로 심을 박아서 만든 도구를 널배에 붙이고 밀어서 잡기도 한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어떻게 먹을까 씨알 굵고 살짝 입 벌린 놈 골라 끓는 물 식혀 80℃로 삶으랑께 꼬막은 씨알이 굵고 무늬가 선명하며 입을 꽉 다문 것보다 벌어져 있는 것이 좋다. 물에 소금을 좀 뿌리고 박박 문질러 개흙과 이물질을 제거한 후 소금물에 담가 한두 시간 동안 해감한다. 꼬막을 삶을 때 썩은 것이 한 개라도 들어가면 같이 삶은 꼬막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잘 선별해야 한다. 꼬막을 삶을 때는 펄펄 끓는 물을 약간 식힌 후(75~80℃) 꼬막을 넣어 같은 방향으로 십여 차례 저은 후 꺼낸다. 꼬막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며 특히 새꼬막은 식은 후에는 맛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꼬막무침, 꼬막장조림, 꼬막된장국, 꼬막전 등 꼬막요리가 많이 개발됐다. 꼬막의 고장이라는 벌교에는 갖가지 밑반찬에 꼬막탕수육, 꼬막전, 삶은 꼬막(꼬막찜), 꼬막꼬치, 꼬막초무침 등으로 ‘꼬막정식’을 내놓는 식당이 인기다. 문학기행만 아니라 소설 ‘태백산맥’의 꼬막 맛을 찾아온 사람도 많다. 꼬막무침은 오이, 미나리, 풋고추, 배, 시금치 등의 야채에 삶은 꼬막 살을 넣고 고추장과 양념을 넣은 후 버무리는 것이다. 보성에서는 특산물인 녹차 분말을 섞은 밀가루에 꼬막 살을 넣어 녹차꼬막전을 내놓기도 한다. 또 김치를 송송 썰어 꼬막과 함께 전을 부치기도 한다. 메추리알, 소고기 등으로 만드는 장조림에 꼬막을 더해 만드는 장조림은 짭짤한 밥반찬으로 좋다. 벌교시장은 꼬막과 숭어로부터 겨울이 온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꼬막을 삶아주는 집이 있다. 한 됫박 사서 먹다 남은 꼬막은 까서 밥 한 공기에 남은 반찬을 넣고 참기름을 얹어 쓱쓱 비벼 먹으면 추운 겨울도 거뜬하다.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보리’ 가을 고등어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보리’ 가을 고등어

    어머니는 생일날이면 소금 독에 묻어 둔 고등어를 꺼내 구웠다. 지글지글 기름기가 불 위로 떨어질 때면 부뚜막의 굵은 소금을 집어 한 토막에는 살살 뿌렸고, 다른 세 토막엔 팍팍 뿌렸다. 비릿하고 고소한 고등어 굽는 냄새가 연기와 함께 마당에 가득 퍼질 때쯤 두 토막은 할머니 밥상에 올랐고, 다른 두 토막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들 차지였다. 고등어 네 토막은 일곱 식구의 특별한 반찬이 되었다. ‘자산어보’는 고등어의 등에 푸른 부챗살 무늬가 있어 ‘벽문어’(碧紋魚), ‘동국여지승람’은 고등어 모양이 칼과 같아 ‘고도어’(古刀魚)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전 해역에서 고등어가 잡혔다. 고등어는 쓰시마난류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전 해역, 오키나와, 동중국해에 분포한다. 난류성 어류로 수온이 올라가면 동해와 서해로 올라가고, 내려가면 남쪽으로 옮겨 와 겨울을 난다. 고등어는 어군을 형성해 이동하며 경계심이 강하다. 장애물에 부딪히면 아래로 피하는 습성이 있다. 낮보다는 야간에 움직이며 빛을 따라 움직인다. 자산어보에도 “낮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헤엄쳐 다니므로 잡기 어렵기 때문에 밝은 곳을 좋아하는 성질을 이용해 횃불을 밝혀 놓고 밤에 낚는다”고 했다. 조선시대 고등어 어장은 거문도와 추자도, 경남 울산, 강원도, 함경도 원산지방에 형성됐다. 당시에는 대부분 낚시나 어살로 잡았다. 비록 명태, 조기, 대구처럼 제상에 오르는 대접은 받지 못했지만 어엿한 진상품이었다. 또 종갓집에서도 귀한 손님을 위한 소중한 식재료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거제도 장승포, 경남 방어진, 경북 감포, 구룡포, 포항, 전남 거문도 등 조선 연안에 일본 어촌을 건설해 고등어를 잡아갔다. 이들 지역에 등대가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다. 통영의 욕지도, 여수의 안도, 고흥의 나로도 등에도 건착망과 기선으로 무장한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 정착을 했다. 특히 방어진에는 고등어잡이 배의 건조, 철공소, 어구 판매소, 저장 및 가공을 위한 제빙소, 염장고 등이 들어섰다. 그리고 신사와 유곽 등 일상생활과 유흥을 위한 시설도 만들어졌다. 며느리를 사랑해서일까 미워해서일까. 가을 배와 가을 고등어는 며느리에게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산란을 끝내고 겨울을 나기 위해 왕성한 먹이 활동을 해서 기름이 가득해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가을에 잡은 고등어는 값이 싸고 영양이 좋아 ‘바다의 보리’라고 불렀다. 옛날 말이다. 이제 고등어는 귀한 생선으로 바뀌었다. 고등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안동간고등어’다. 해 뜰 무렵 영덕에서 고등어를 지게에 지고 출발하면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도착하는 곳이 ‘챗거리’라는 안동 인근의 장이었다. 쉽게 부패하는 고등어를 더 이상 싱싱하게 가져갈 수 없어 고등어 배를 갈라 왕소금을 뿌렸다. 마침내 안동에 이르면 바람과 햇볕에 자연 숙성이 되고 물기도 빠져 육질이 단단하고 간이 잘 배어 있는 고등어로 변신을 했다. 그렇게 해선 탄생한 것이 안동간고등어다. 고등어를 찾는 사람은 크게 증가했지만 어획량은 한때 40여만t에서 10여만t으로 크게 감소했다. 기후변화로 수온이 바뀌고 서식어장이 훼손된 탓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획이다. 일 년도 되지 않은 어린 고등어를 마구 잡는 탓이다. 산란 기회를 잃은 고등어가 밥상에 오르니 텅 빈 어장이 될 수밖에. 게다가 한·일 간의 새로운 어업협상으로 어장도 줄어들었다. 이제 수입산 고등어로 밥상을 채워야 할 형편이다. 다행스럽게 최근에 통영의 욕지도, 연화도 등에서 고등어가 양식되고 있다. 이 덕에 고등어를 수족관에서 만나고 싱싱한 회로 먹을 수 있으니, “고등어는 국을 끓이거나 젓을 만들 수 있지만 회나 포로 먹을 수 없다”고 했던 손암(정약전) 선생이 이를 알면 뒤로 넘어질 일이다. ●어떻게 먹을까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서 주문진, 동해, 삼척 등 어시장이 북새통이다. 단풍철에 가장 맛이 좋은 고등어 때문이다.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인과 흥정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고등어회다. 주인은 익숙한 솜씨로 고등어를 씻어 물기를 닦아 낸 다음 머리를 자르고 내장을 꺼냈다. 그리고 가운데 뼈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포를 뜨고 남은 잔뼈와 지느러미를 정리한 뒤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다시 물기를 제거한 후 회를 떴다. 고등어회는 초장이나 겨자보다는 양념장과 함께 먹어야 맛이 있다. 제주에서는 김에 밥과 고등어회, 양념장 등을 올려 싸 먹기도 한다. 가장 즐겨 먹는 고등어요리는 조림이다. 종류도 시래기를 넣은 고등어시래기조림, 무를 넣은 고등어무조림, 감자를 넣은 고등어감자조림 등 다양하다. 이때 고등어에 후추나 소금으로 밑간을 하거나 쌀뜨물에 담근 후 요리하면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보통 조림이나 찜은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넣어 얼큰하게 끓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젓가락을 내밀지 않는다. 담백하면서 맵지 않고 비린내도 나지 않는 고등어조림이나 찜을 원한다면 육수를 이용하길 권한다.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를 만들어 준비한다. 그리고 감자나 무를 깔고 손질이 된 고등어를 올린 후 자작하게 육수를 붓는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양파와 맛술을 넣고 끓인다. 마지막으로 고추, 대파 등 채소를 올려 한소끔 더 끓이면 된다. 고등어자반구이를 할 때도 밀가루나 녹말과 카레를 섞어서 고등어에 묻혀 구우면 바삭하고 고기도 부서지지 않아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고등어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물 좋은 고등어를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 고등어를 고를 때는 눈을 바라보자. 노래 가사처럼. 눈을 감는 법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살이 단단하고 등의 푸른색이 선명하고 광택이 나며 탄력이 있는 것이 좋다. 날씨가 춥다. 밥상을 지켜 준 고등어가 아직도 우리 바다에 살아 줘서 정말 고맙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어른 ‘대하’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바다의 어른 ‘대하’

    “자연산과 양식은 먼저 꼬리를 봐야 해요. 이것 보세요. 이렇게 꼬리가 분홍색을 띠면 양식이고, 뿔이 머리보다 밖으로 길게 나오면 자연산이죠. 마지막으로 수염이에요. 자연산은 (수염이) 자신의 몸보다 두 배 이상 길어요.” 충남 보령의 무창포 수산시장에서 살아 있는 대하를 수족관에 넣어 두고 젊은 아주머니가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이쯤이면 걸음을 멈출 만하지 않는가. 살아 있는 대하를 구경하는 것도 어려운데 양식과 자연산을 가려 준다. 양식은 중남미가 고향인 흰다리새우를, 자연산은 대하를 내보였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새우는 90여종에 이른다. 이 중 바다에 서식하는 새우는 도화새우, 보리새우, 대하, 중하, 꽃새우, 젓새우 등이다. 대하는 보리새우과에 속하는 새우로 왕새우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하가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 서해 5도의 토산물로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대하는 경남, 전남, 충남, 경기 지역의 바다에서 잡히고 있다. 새우는 ‘사리다’라는 옛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새우의 굽은 모습과 바다에서의 움직임이 마치 몸을 사리는 것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긴 수염을 두고 ‘해로’ 즉 바다의 노인으로 표현했다. 새우는 암수가 구별된다. 크기만 보면 암컷이 수컷보다 두 배 이상 크다. 색깔로 보면 암컷은 붉은 보랏빛을 띠며, 수컷은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색이다. ‘자산어보’에도 “대하는 빛깔이 희거나 붉다. 흰 놈은 크기가 두 치(한 치는 약 3㎝), 보랏빛인 놈은 크기가 5~6치에 이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붉은 수염이 몸길이의 세 배나 된다”고도 했다. 늘 느끼지만 손암(정약전)의 물고기에 대한 관찰과 해석은 지금 읽어도 감탄스러울 뿐이다. 동해가 단풍 물든 설악이라면 서해는 대하다. 외포, 대명, 소래, 태안, 보령, 남당, 무창포, 홍원, 마량, 군산, 법성에 이르기까지 온통 대하다. 안면도, 남당, 무창포 등은 가을철 대하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하는 명실공히 서해의 가을철 진객이다. 남당포구에서 대하를 팔던 한 아주머니는 “수컷이 이렇게 작아서 무슨 일을 하냐”는 필자의 농담에 “그래도 큰일은 수컷이 다 한다”며 새벽같이 나갔다가 새우를 잡아온 남편을 쳐다보며 웃는다. 중국의 약학서인 ‘본초강목’에 “혼자 여행할 때는 새우를 먹지 말라”고 했다. 특히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고 했다. 새우가 양기에 좋은 강장식품이기 때문이다. 한번에 10만개 이상의 알을 낳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일까. 대하는 장수, 다산, 부부의 해로를 상징한다. 대하는 봄바람 따라 서해의 얕은 바다로 다가와 산란을 한다. 다 자란 새우는 남서풍이 불 때 좀 더 깊은 바다로 나간다. 이때가 살이 통통하고 맛이 제일 좋을 때다. *어떻게 먹을까. 소금간을 해서 말린 대하는 조선시대 궁중 찬품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 11년(1429) 명나라에 보낸 선물 목록 중 건어물로 포함되었다. 바닷속 작은 새우가 조선의 상층부는 물론 명나라에까지 알려진 조선의 토산식품이었다. ‘난호어목지’는 “대하는 빛깔이 붉고 길이가 한 자 남짓 한데, 회에 좋고 그대로 말려서 안주로도 한다”고 했다. ‘도문대작’에서는 “대하는 서해에서 난다. 알로 젓을 담그면 매우 좋다”고 했다. ‘규합총서’에는 생새우꼬치구이, 새우 어육장, 대하를 넣은 열구자탕 등이 소개되어 있다. 옛날에는 대하를 살짝 쪄서 짚으로 조기처럼 엮어서 말렸다. 가을볕에 잘 말린 대하는 겨울철에 훌륭한 양식이었다. 좋은 새우는 껍질이 투명하고 윤기가 흐르며 붉은빛을 띈다. 머리와 꼬리가 제대로 붙어 있어야 하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대하를 손질할 때는 등을 구부려 두 번째 마디에 이쑤시개를 넣어서 검은 줄 모양의 내장을 빼낸다. 먼저 ‘대하장’을 소개한다. 게장은 익숙하지만 대하장은 생소하다. 하지만 그 맛을 보면 오랫동안 먹어 온 것처럼 입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 집 아이들은 꽃게장보다 대하장을 더 좋아한다. 태안이나 서천에서는 물이 좋은 대하는 팔고, 머리나 꼬리가 떨어져 상품가치가 없는 대하로 장을 담갔다. 흰다리새우를 사용해도 좋다. 간장 3컵에 물 1컵을 넣고 통고추, 마늘, 생강, 양파, 소주 약간을 넣고 팔팔 끓인다. 그리고 간장만 건져서 식힌 뒤 갈무리해 둔 대하가 잠길 정도로 붓는다. 하루 정도 지나 새우를 건져내고 간장만 한 번 더 끓인 후 식혀서 대하가 잠길 정도로 부어 둔다. 사흘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다.짭짤한 대하살을 발라 채소를 넣고 비빔밥을 해도 좋다. 대하를 제대로 먹는 사람은 머리만 먹는다. 소금구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머리를 바삭하게 구우면 고소하다. 살만 있는 배보다 육즙이 더해져 감칠맛이 난다. 다만 내장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신선하지 않을 때는 머리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 대하와 꽃게를 넣고 된장으로 간을 해서 끓이는 대하꽃게탕은 시원함의 극치다.가을이다. 단풍구경도 좋지만 연인과 두 손 꼭 잡고 바닷가를 거닐다 대하에 눈을 맞춰 보길 권한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8) 보양식 뱀장어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8) 보양식 뱀장어

    계량에 봄이 들면 뱀장어 물때 좋아 그를 잡으러 활배가 푸른 물결을 헤쳐 간다. 높새바람 불면 일제히 나갔다가 마파람 세게 불면 그때가 올 때라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탐진(현 전남 강진)에서 어민들의 삶을 표현한 시 ‘탐진어가’(1802년)의 일부다.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과 장흥군 유치면 사이 국사봉에서 발원해 장흥군과 강진군을 지나 남해로 흐른다. 그 강에서는 지금도 간간이 자연산 뱀장어가 잡히고, 그 장어로 요리하는 식당이 대를 잇고 있다. 같은 시기 흑산도에 유배된 형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 “모양은 뱀을 닮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며 뭍에서도 뱀처럼 잘 다닌다. 맛은 달콤하고 짙으며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것으로 죽을 끓여 먹으면 낫는다”라며 뱀장어를 소개했다. 강에서 충분히 자란 뱀장어는 반년에 걸쳐 태평양 깊은 바다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이동한다. 그리고 알을 낳은 뒤 최후를 맞는다. 연어와 달리 바다에서 산란을 하고 강에서 자란다. 부화한 새끼는 아주 작은 댓잎 모양이다. 그래서 ‘댓잎뱀장어’라고 부른다. ●바다에서 산란·강에서 자라는 뱀장어 이 뱀장어는 어미와 반대로 1년에 걸쳐 약 3000㎞를 이동해 어미가 머물렀던 강으로 여행을 한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고 안내자도 없는 여행길이다. 강어귀에 이르면 손가락 정도의 길이로 자라 ‘실뱀장어’로 변한다. 이 비밀이 밝혀진 것도 불과 1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부들 중에는 뱀장어가 산란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어와 뱀이 사랑을 나눠 새끼를 낳는다고 했다. 중국의 ‘조벽공잡록’에는 ‘가물치에게 그림자를 비추면 그 새끼가 가물치의 지느러미에 붙어서 태어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우리가 즐겨 먹는 뱀장어는 실뱀장어를 잡아 양만장에서 키운 것이다. 한 마리당 500원에 거래되던 실뱀장어값이 몇 년 전에는 7800원까지 뛰었다. 댐 개발, 해양오염, 서식지 파괴, 기후변화 등으로 실뱀장어 어획량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장어구이를 찾는 사람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모기장 같은 그물을 피한 실뱀장어는 6년에서 12년을 강에서 자란다. 그래서 ‘민물장어’라고도 한다. 그런데 장어요리집은 한결같이 ‘풍천’이라는 이름을 성씨처럼 달고 있다. ‘바람이 부는 하천’이라는 뜻이다. 강어귀는 강바람과 바닷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다. 육지와 바다, 낮과 밤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기압이 교차하면서 부는 바람이다. 뱀장어가 서식하는 탐진강, 영산강, 금강, 인천강, 동진강, 만경강, 한강, 임진강 등이 그런 곳이다. 그래서 풍천을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하구 혹은 기수역이라고도 한다. ●‘풍천장어’ 유래를 아시나요 풍천장어는 그곳에 뱀장어가 서식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탐진어가’에서 ‘높새바람’과 ‘마파람’이 부는 탐진강 어귀가 곧 풍천이며, 대를 이어 장어집을 운영하는 전남 영산강 구진포, 전북 고창 인천강(선운사 입구), 익산 목천포도 마찬가지다. 이 중 ‘풍천마케팅’에 성공한 곳이 고창군이다. 심지어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은 “풍천은 ‘자연현상을 거슬러 역류하는 하천’으로, 인천강과 선운천이 만나는 곳이 그곳”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어떻게 먹을까 생강·후추·청주로 비린 맛 제거…어른은 구이·아이는 튀김이 ‘딱’ 장어를 요리하려면 먼저 억센 뼈를 발라내야 한다. 칼집을 등에 넣어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머리를 자른다. 발라낸 살은 물로 깨끗이 씻어 밀가루를 듬뿍 넣고 바락바락 문질러 점액질을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물에 씻어낸 다음 물기를 제거한다. 요즘에는 장어를 주문하면 손질해서 보내 주기도 한다. 장어는 구이, 튀김, 탕, 찜, 백숙, 덮밥 등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먹는다. 익숙한 요리법은 구이다. 굵은 천일염을 뿌려 구운 소금구이, 된장을 발라 구운 된장구이, 고추장을 바른 고추장구이, 갖은 양념장을 만들어 바른 양념구이, 복분자구이도 있다. 특유의 비린 맛을 제거하기 위해 장어소스를 만들 때 생강이나 후추, 청주 등을 사용한다. 또 구운 장어를 먹을 때 식초에 발효시킨 양파나 생강 혹은 깻잎을 곁들여 먹으면 맛이 깔끔하다. 장어구이가 어른들이 좋아하는 요리라면 아이들에게는 팬이나 오븐에 장어를 구워 소스와 함께 야채를 곁들이거나 장어살에 튀김용 가루를 발라 바삭하게 튀긴 것이 좋다. 장어조림은 구이와 달리 양념이 장어에 스며들어 맛이 있다. 이때 간장, 고추장, 청주, 매실, 설탕, 다진 마늘, 으깬 생강, 참기름, 후추 등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손질이 잘된 장어를 반으로 잘라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다음 양념장을 넣고 조린다. 장어탕은 된장과 잘 어울린다. 발라낸 뼈와 머리를 소금물로 잘 씻은 다음 된장을 넣고 삶는다. 다 삶아지면 살며시 건져 뼈를 제거한 후 마늘을 넣고 다시 삶는다. 이때 간은 국간장으로 맞춘다. 팔팔 끓기 시작하면 시래기를 넣고 다시 끓인다. 시래기에 미리 양념을 해 두면 더욱 좋다. 장어를 통째로 넣어 끓이기도 한다. 장어 육수에 밥을 넣고 끓이는 장어죽이나 쌀을 넣고 만든 장어백숙도 권할 만하다. 좋은 장어는 미끈하고 눈이 투명하며 등이 회흑색이나 갈색을 띤다.
  • [씨줄날줄] 전어와 축제/정기홍 논설위원

    남해와 서해안에 가을 전어가 돌아왔다. 항구에는 축제들이 무르익는다. 전어는 살이 붙은 가을엔 친정 간 며느리 몰래 먹을 정도로 한껏 주가를 높이지만, 다른 계절에는 그 풍미가 뚝 떨어진다. 계절에 따른 대접의 차이가 전어만 한 게 없어 보인다. 봄 전어는 개도 안 물어가고, 가을 전어 머리엔 깨가 서 말이라는 속담도 있다. 전어가 ‘전국표 횟감’이 된 건 채 20년이 안 됐다. 1990년대 후반 잡어회 붐이 일면서 양식 전어가 급격히 늘어 그 고소한 맛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전어의 이야깃거리는 많다. 조선의 실학자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상인들이 전어를 소금에 절여 한양에서 파는데 신분의 귀천 없이 돈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며 돈 전(錢)자를 넣어 전어(錢魚)라 이름 지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유영하는 모습이 쏜 화살과 같다며 화살 전(箭)을 써 전어(箭魚)로 표기하기도 했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속담에서는 고단한 시집살이를 끌어들여 풍자했다. 두어 달 전어잡이로 겨울을 난다고 해 ‘돈벼락 전어’란 말도 생겼다. 성질이 급해 잡은 뒤 빨리 죽는 탓에 조업이 어려운 날엔 금값이 되기도 한다. 2005년 10월 진해만에서는 전어잡이 어선들이 해군 작전 해역에까지 들어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남 창원의 ‘떡 전어’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살던 양반이 새끼전어를 잡아오라는 수령의 명을 거절해 곤경에 빠졌는데 이를 안 전어들이 백사장에서 덕(德)자를 만들어 놓고 죽었다 하여 ‘덕전어’라 불렸고, 경상도의 된소리 발음으로 ‘떡전어’가 됐다는 속설이 있다. 이웃 일본의 전어 이름인 ‘고노시로’(魚祭) 어원은 애잔하다. 일본의 영주가 처녀를 첩으로 삼으려고 하자 그 부모가 딸이 병들어 죽었다며 관 속에 딸 대신 전어를 넣고 태웠다고 해 제사 제(祭)자를 넣었다고 한다. 전어를 제사상에 올리지만 굽는 냄새를 시체 타는 것으로 여겨 구운 건 잘 안 먹고 꽁치구이를 많이 먹는다. 전어는 뼈째썰기(세꼬시)와 구이, 양념 무침으로 먹지만 특이한 것도 있다. 경남 사천에선 ‘통마리’라 하여 머리와 내장을 제거해 통째로 된장에 찍어 먹는다. 어부들이 즐겨 먹던 방식이란다. 가을을 들썩이는 전어이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전어잡이의 발자취가 문헌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마을 어른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일부 지역에서 전어잡이 노래만 복원한 정도다. 몇 개의 속담과 속설에 기대고 축제 플래카드를 내거는 정도로는 전어의 명품화는 쉽지 않다. 해당 지자체들은 지금부터 자료 수집에 적극 나서 흥미로운 전어 이야기를 많이 내놓아야겠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 푸짐하게 차린 ‘글밥 술상’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 푸짐하게 차린 ‘글밥 술상’

    바다의 작가, 한창훈(51)이 이번엔 글밥 술상을 푸지게 차렸다. 바다를 안주 삼아 들이켜는 그의 술잔에는 ‘거친 바다 막막함을 삶의 질료로 하는’ 뱃사람, 섬사람들의 짠내 나는 고단함과 쓸쓸함이 함께 찰랑거린다. 손암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써낸 지 200년 만에 펴낸 에세이집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문학동네)에서다. 문학동네 카페에 지난 3~7월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2010년 펴낸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의 2탄 격이다. 한창훈에게 바다는 이 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전남 거문도에서 나고 자라 일곱 살 때 낚시를 배우고 아홉 살 때 외할머니에게서 잠수를 배운 그는 도시에서 선원, 디제이, 트럭운전사, 막노동꾼, 포장마차 사장 등을 전전하다 8년 전 고향으로 회귀했다.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나는 여기가 좋다’, 장편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등의 작품도 대부분 바다에 뿌리를 뒀다. 지금도 해발 1m의 바닷가 흰 집에서 글 쓰는 생계형 낚시꾼으로 사는 그에게 사람들은 묻곤 한다. ‘당신에게 바다란 무엇인가요.’ 그는 책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한다. 전작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가 갖가지 바다의 산해진미로 침샘을 자극했다면 이번 책은 술과 함께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바닷물과 더불어 가장 가깝게 지낸 액체’이자 ‘무언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액체’다. 1959년 태풍 사라가 우리나라를 덮쳤을 때다. 당시 3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잔혹한 태풍에도 거문도의 유일한 조합선 팔경호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기로 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한 거문도 주민들의 ‘살림살이와 마음의 총화(總和)’였으므로. 배를 버리느니 죽기를 선택한 사내들은 마지막으로 막소주를 한 사발씩 들이켰다. ‘그것은 동료들과 미리 마시는 이별주이며 자신의 몸뚱이에게 보내는 첫 번째 제주(祭酒)이자 약해진 배포를 키우는 주술행위였다.’(37쪽) 5일 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 아들, 형이 돌아온 이야기는 50년 넘은 지금도 섬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목숨 내놓고 마시는 막소주에 “입안에 폭설이 내리치는 듯한” 사케, 쥐치포와 술집 여자의 마른 손가락(?)을 안주 삼아 마시는 맥주, 북극의 유빙을 조각내 만든 빙하 보드카 칵테일 등 사연도 풍경도 제각각인 바닷사람들과의 술상을 마주하다 보면 읽는 것만으로도 흥건히 취기가 오른다. 글쓰기에 한창 열중하던 지난 4월. 작가는 바닷속에 수장된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연재를 중단했다. 아이들을 수장시킨 사람들을 떠올리며 바다 앞에서 이를 갈았다. 그러곤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아이들을 집단으로 죽여버린 대한민국. 제가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그 무능하고 책임없는 사람들의 안정된 생활과 품위 유지를 위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는 게, 바다가 무참하게 훼손당해 버렸다는 게,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미워해야 할 것과 미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목숨과 바다를 지켜낼 수 있으니까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정약용이 사랑한 생선 ‘병어’

    [김준의 바다 맛 기행] 정약용이 사랑한 생선 ‘병어’

    회떠먹고… 찜쪄먹고… 조려먹고… 이놈 한 마리면 여름밥상 끝! 오랜만에 경남 통영의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다. 현지 횟집에서 초장을 달라고 하면 ‘서울에서 도시 것들이 왔나 보다’ 하면서 시큰둥해하고, 와사비를 달라고 하면 ‘부산 것들이 왔나 보다’ 한다고 했다. 그런데 된장을 달라고 하면 긴장을 하고, 양념을 하지 않은 막된장을 달라고 하면 맛의 고수를 만난 듯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그 된장과 가장 잘 어울리는 횟감이 오늘의 주인공 병어다. 농어목 병엇과에 속하는 생선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병어를 경기도와 전라도의 토산물이라 했다. ‘난호어목지’는 호서의 도리해에서 많이 난다고 했다. 요즘도 전남의 서해안과 인천에서 많이 잡히며, 부산에서도 꽤 잡히고 있다. ‘자산어보’에서 손암 정약전이 지적한 것처럼 병어는 머리가 작고 목덜미가 움츠러들어 있고 마름모꼴이다. 그래서 축항어라 불리기도 했다. 어부의 도움을 받아 병어의 특징을 잘 살핀 형과 달리 동생 다산(정약용)은 맛에 푹 빠졌다. 다산은 자신의 시 ‘여름에 읍청루에서 목 정자 조영 등 제공을 모시고 술을 마시며’에서 ‘저 뱃길로 옛적에는 장요미(長腰米)라는 쌀을 바쳤는데, 갯가 저자 오늘날 축항어(縮項魚)를 사온다오’라며 병어를 예찬했다. 병어와 비슷한 생선으로 덕대가 있다. 같은 병엇과지만 어른과 어린이 차이라 할 만큼 덕대가 크다. 값도 비싸고 많이 잡히지 않아 귀하기 때문이다. 밥상보다는 제상에 자주 오른다. 병어는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서해로 올라와 봄과 여름에 산란을 하고 가을에 내려간다. 서해안에 젓새우, 갯지렁이 등 병어가 좋아하는 먹이가 풍부하고 갯벌과 모래가 적절하게 섞여 산란하기 더없이 좋기 때문이다. 여름철엔 활어를 멀리하는 대신 선어의 인기가 높다. 그중 병어가 으뜸이다. 아랫녘에서 즐겨 먹었던 여름철 생선이지만 지금은 서울에서도 많이 찾는다. 잡히는 양은 예전 같지 않은데 찾는 사람은 늘어 가니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또 물때에 따라 잡히는 양이 다르니 하루하루 값이 널을 뛴다. 지난 6월 연휴에는 30마리 한 상자에 60여만원까지 치솟았다. 평소에는 아무리 비싸도 40여만원을 유지했으니 놀랄 만하다. 맛은 길들여진다. 특히 몸이 원할 때는 방법이 없다. 30여만원을 주고 한 상자를 주문했다. 병어는 싱싱할 때 내장을 제거하고 잘 손질해 한 마리씩 봉지에 넣어 냉동 보관해 두면 겨울에도 변함없는 맛을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회, 구이, 조림, 튀김, 탕 등 어느 요리에나 주인공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으니 여름철 갑작스레 손님이 닥쳐도 병어 한 마리면 족하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김준의 바다맛 기행] 여름철 입맛 찾아주는 강달이

    [김준의 바다맛 기행] 여름철 입맛 찾아주는 강달이

    땀을 많이 흘리는 계절이다. 덩달아 입맛도 잃기 쉽다. 이럴 때 식은 밥이든, 막 뜸을 들인 밥이든, 사각사각 씹히는 물오른 상추 위에 한 숟가락 올리고 그 위에 ‘강달이젓’을 얹어 입안 가득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어보자. 잃었던 입맛이 거짓말처럼 살아난다. 강달이는 흔히 황석어라 불리는 바로 그 어종이다.강달이는 참조기, 수조기, 부세, 민어 등과 함께 민어과에 속한다. 지역에 따라 황세기(충남 아산), 황새기(서산, 군산), 깡치(서산, 영광), 황숭어(법성포), 황실이(목포) 등으로 불린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조기, 보구치, 반애, 황석어 등을 모두 조기로 분류했다. 간혹 조기 새끼를 강달이의 한 종인 황강달이로 헷갈리기도 한다. 차이라면 조기 새끼에 비해 머리가 크고 머리에 돌기가 있다. 오래전 일이다. 서해를 휩쓸었던 조기 파시가 시들해질 무렵, 전남 신안의 비금도와 자은도 그리고 임자도 앞바다에는 어김없이 강달이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사월포, 원평, 전장포 등 항·포구마다 주막들이 들어섰고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가 갯바람에 흔들렸다. 특히 원평항은 일제강점기부터 강달이 파시로 유명했던 포구다. 어장철이면 모래밭에 술집이 자그마치 50여개나 들어서 뱃사람들이 향수를 달래며 회포를 풀었던 곳이다. 어떤 이는 귀향을 포기하고 번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모처럼 만선으로 돈을 만진 섬사람들도 기웃거렸다. 원평 파시는 기계배가 등장하고 흑산도로 잇는 뱃길이 만들어지면서 송치 파시로 이어졌다. 송치는 도초도와 마주보고 있는 비금도 어촌마을이다. 흑산도로 가는 쾌속선의 기항지다. 강달이 종류를 보면, 배가 황금색을 띤 황강달이, 눈이 큰 눈강달이, 민강달이 등이 알려져 있다. 강달이는 15㎝에서 20㎝ 내외로 오뉴월에 산란을 한다. 그 모양새가 7월에서 9월에 안강망 그물에 많이 잡히는 조기 새끼와 흡사하다. 안강망에 걸려드는 것은 강달이만이 아니다. 웅어, 밴댕이, 새우, 쏙 등도 그물을 피하지 못했다. 잡어들 속에서 주인공 강달이가 대접을 받는 것은 먹거리의 쓰임새 때문이다. 임자도 전장포에 정박한 배 위에서 어부들은 강달이 손질로 부산했다. 아침 일찍 털기 시작한 그물에 강달이가 가득했다. 손질이 끝난 강달이는 얼음과 함께 상자에 담겨 택배차에 실렸다. 택배기사가 서울로 올라갈 물건이라고 귀띔을 해줬다. 서울사람들도 강달이 맛을 알아버린 것일까. 다른 쪽에서는 소금과 버무려 젓갈 통에 담느라 바쁘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어떻게 먹을까 제철 오뉴월 저렴한 가격…통통한 알배기는 조림에 강달이젓 담가 가을부터 강달이 요리의 가장 큰 매력은 저렴하다는 점이다. 도매시장에서 한 상자에 2만원이면 살 수 있다. 그런데도 양이 엄청나다. 싱싱할 때 찌개나 젓갈을 담고 남은 것은 직접 말리면 좋다. 문제는 바닷가에 살지 않을 경우 말리기가 어렵다는 것.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말려서 팔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달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조림이다. 고사리를 밑에 깔고 강달이를 올린 다음 자작자작하게 물을 붓고 조린다. 오뉴월 강달이는 알이 있고 살이 쪄서 통통하다. 깨끗하게 씻은 다음 머리와 꼬리를 떼어낸다. 양파나 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팬의 바닥에 강달이를 올린다. 그 위에 다진마늘, 파, 고춧가루, 간장, 된장, 매실액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물을 자작하게 붓고 한소끔 끓인다. 생것도 좋지만 말린 강달이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생것은 통째로 넣고, 마른 것은 머리를 떼어내고 넣는 게 좋다. 오뉴월이면 목포나 신안에서 계절음식을 내놓는 식당마다 강달이 조림이 인기다. 음력 보름이나 그믐 무렵에 어시장에 가는 것이 좋다. 그때가 물이 좋고 값도 싸다. 마른 강달이를 구입할 때는 깡마른 것보다는 80% 정도 마른 것이 좋다. 이런 강달이는 조림이나 볶음용으로 괜찮다. 젓갈은 강달이가 많이 잡히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담근 것이 좋다. 싱싱한 강달이를 바닷물이나 소금물에 깨끗하게 씻은 다음 건져내 물기를 뺀다. 그리고 소금과 강달이를 1:1 비율로 섞은 다음 항아리에 넣고 맨 위에 강달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소금을 끼얹고 비닐로 덮어 봉해둔다. 여름을 지나고 가을부터 먹기 시작한다. 또 멸치젓 대신에 맑게 끓여 체에 밭쳐 김장을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옛날부터 서해에서는 김장을 할 때 김치 속에 생조기를 묻어 두기도 했다. 겨울철 김치가 시원해 진다. 조기 대신 강달이젓을 쓰기도 한다. 강달이 튀김은 또 어떤가. 이제껏 먹어본 생선 튀김 중에 으뜸이다. 임자도 강달이축제에서 처음 먹어 보았다. 바삭바삭한 튀김이야 재료가 무엇이든 비슷하지만 통째로 튀겨 씹히는 맛이 좋다. 게다가 강달이 자체가 짭짤하기 때문에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말려서 냉장 보관해 둔 강달이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조기에 비하면 크기가 형편없이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 쓰임새와 맛은 조기와 굴비를 능가한다. 남쪽 바닷가 사람의 여름 밥상을 책임지는 생선이다.
  • [TV 하이라이트]

    ■한국인의 밥상(KBS1 밤 7시 30분) 경남 거제도의 봄은 바다에서 돌아온 숭어 떼의 힘찬 도약과 함께 시작된다. 예로부터 숭어는 맛과 영양이 좋은 생선으로 평가받았다. 정약전의 어류도감인 ‘자산어보’에는 숭어를 두고 ‘맛이 좋고 깊어서 생선 중 첫째로 꼽힌다’고 돼 있다. 요즘은 흔한 횟감 정도로 취급받지만 평생 먹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는 거제 숭어, 그 쫀득쫀득하고 달달한 맛을 만나본다. ■도전 발명왕(MBC 오후 6시 20분) 더운 여름철을 시원하게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발명품 ‘바람난 매트’가 등장한다. 의자, 침대 등에 깔고 앉거나 누우면 마치 아래에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신개념 통풍 매트다. MC 김성주와 성대현은 ‘바람난 매트’를 펼쳐 보이며 침대에 직접 누워 발명품의 효과 확인에 나섰다. 또한 첨가제 없이 집에서 안전하게 만들어 쓰는 신개념 물티슈도 소개한다. ■경찰 25시(OBS 밤 11시 5분) 한 남성이 수백억원대 유산 상속을 받기로 돼 있던 동거녀가 납치를 당했다며 충남 보령경찰서를 찾았다. 남성는 3년간 같이 살았던 여성이 1년간 재산을 노린 협박범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수사가 진행되던 그때,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여인의 모습이 포착됐다. 알고 보니 그녀가 남성에게 말했던 모든 것이 가짜로 밝혀졌는데….
  • [김문이 만난사람] 3500곡 작사… 전설의 작사가 정두수

    [김문이 만난사람] 3500곡 작사… 전설의 작사가 정두수

    1961년 어느 봄날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서울 서대문에 살던 그는 걸어서 남대문 직장까지 출퇴근했다. 하여 덕수궁 돌담길을 하루에 두 번씩 걸어다녔다. 당시 돌담길은 우마차도 안 다니던 한적한 산책로였다. 그러나 주말이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를 걸었던 연인들은 대부분 사랑에 실패한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대학을 나오면 대체로 남자는 군대를 가고 여자는 시집을 가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다. ‘덕수궁 돌담길을 가지 마라, 징크스가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약간 취기에 젖은 채 늦은 밤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제대복을 입은 한 청년이 돌담길에 기대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그는 집에 와서 펜을 들고 써내려 갔다.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 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이 있기에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그로부터 2년 후였다. 부산문화방송 전속 가수로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시 한 편 달라기에 ‘덕수궁 돌담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건네줬다. 어느 날 정두수 작사, 한산도 작곡, 진송남 노래로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게다가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서정가요로 선정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제1회 국제신보사 제정 작사상을 비롯해 문화공보부와 전국예술인총연합회 제정 작사상을 받았다. 이후 그는 ‘마포종점’, ‘흑산도 아가씨’, ‘가슴 아프게’, ‘마음 약해서’ 등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한국 가요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인기를 끌었다.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배호, 문주란, 최희준, 하춘화, 주현미, 조용필, 태진아, 설운도, 조항조 등 명가수들과 함께하며 우리나라 대중가요사를 썼다. 그가 작사한 노래만 해도 무려 3500곡이 넘는다. 시대를 초월해 항상 가요 현장에서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이라는 명콤비는 말 그대로 ‘가요산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노래 시(詩)들은 대중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인정을 받았고 각종 시상식에서 390여 차례 넘는 수상 기록을 남겼다. 고향 하동 등 전국 13곳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 6일 우리나라 가요사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작사가 정두수(77)씨를 경기 광주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시인 정공채의 동생이다. 오는 4월 말 고향에 정 시인과 나란히 시문학관이 생긴다. 감개가 무량할 터. 환하게 웃으며 담배를 한 대 피운다. “그동안 작사도 작사지만 시를 쓴 것도 많아요. 서사집이자 장시집인 ‘백두대간’도 있고 ‘사랑으로 꽃핀 노래’ 1, 2권도 있어요. 형님은 ‘정공채 문학관’, 저는 ‘정두수 시문학관’이 생기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정두수 노래비도 그 옆에 있지요.” 정씨는 ‘알기 쉬운 작사법’, ‘한국가요 걸작선집 해설’, ‘노래 따라 삼천리’ 등 책을 여러 권 썼다. 시집은 4권이다. 다 함께 전시된다. 잠시 회상을 한다. 담배 한 대를 더 입에 문다. 그래서 물었다. “선생님 대표곡을 굳이 꼽으라면 어떤 것일까요.” “‘흑산도 아가씨’, ‘가슴 아프게’ 등 많지요.” 시곗바늘을 돌린다. 1965년 봄이다. 작곡가 박춘석씨와 충무로에서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는 다방에서 만났다. 석간신문을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름 아닌 ‘흑산도 어린이들과 청와대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흑산도 어린이들의 꿈, 이뤄지다! 영부인 도움으로 해군함정에 실려와 서울 구경도 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학용품을 받다’이다.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거센 풍랑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 여사가 나서서 소원을 들어줬다는 미담 기사였다. 정씨는 박씨에게 “이번 이미자 노래는 흑산도로 합시다. 어린이 대신 아가씨로 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이 조선 정조 때 유배지 흑산도에서 죽었다는 내용과 당시 전남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도 바다를 바라보며 흑산도의 형을 간절하게 그리워했다는 내용 등을 귀띔했다. 박씨도 ‘좋다’고 했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이때부터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라는 셋을 하나로 묶는 고정 레퍼토리가 시작됐다. ‘그리운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등이 연이어 탄생한 것이다. 이번에는 ‘가슴 아프게’를 뒤적인다. 1966년 어느 봄날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비를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젊은 여주인이 혼자 라디오 앞에 앉아 열심히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웅~’ 하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술집에서 뛰쳐나왔다. 소년 시절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낸 시절이 떠올랐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저절로 ‘무엇이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바다와 나 사이를 짓누르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써내려 갔다. 19세의 신예 남진이 혜성같이 등장했고 국내는 물론 일본 열도까지 뜨겁게 달군 한류 1호 ‘망향의 노래’로 빅히트했다. “노래마다 대부분 사연이 조금씩 있어요. ‘마포종점’은 마지막 전차에서 이별하는 것이고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시킨 ‘물레방아 도는데’는 어린 시절 헤어진 삼촌과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지요. 1972년에 써서 문주란이 부른 ‘공항의 이별’은 서독으로 가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이별하는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이미자와 남진한테 약 500곡씩 써준 것 같네요.” 그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물레방아 도는데’로 했다. 가장 애착이 가느냐고 물었더니 “고향 하동을 노래했고 ‘소식도 없는 주인공’은 바로 일제강점기에 전쟁터로 끌려가 주검으로 돌아온 삼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의 문학성과 음악성은 한학자인 조부, 시인인 형, 그리고 하동포구라는 지리적 배경이 한몫한다. 특히 어릴 때 하모니카 불기를 좋아해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동래고 2학년 때 진주 개천예술제 시부문에 참가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 무렵 고향이 진주인 가수 남인수씨를 만나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시를 써 주기도 했다. 또한 ‘남인수 모창’을 그럴듯하게 했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에서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란 제목으로 당선했다. 이듬해 KBS의 건전가요 가사 공모에 ‘즐거운 여름’으로 최우수상에 뽑혔다. 작사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즐거운 여름’은 원래 현인씨가 불렀으나 나중에 서수남·하청일씨가 불러 히트시켰다. “시인이 되려면 신춘문예나 현대문학 등 문예지를 통해 등단해야 하는데 당시 국내에는 공식적인 작사가 등용문이 없었어요. KBS 공모전에 당선하니 모두 작사가로 인정해 주더군요. 상금도 많아서 전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MBC 전속 가수였던 양병철씨가 대중가요 전문 작사가의 길을 가라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미리 써둔 ‘덕수궁 돌담길’을 주었지요. 한산도씨가 작곡을 하고 진송남이 불러 히트시키면서 지구레코드사 소속 전속 작사가가 된 것입니다.” 작사가, 작곡가, 가수 중에 누가 영향력이 클까라는 우문을 던졌다. 노래 내용이 있어야 작곡을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냐고 지체 없이 반문한다. 역사성과 아픔이 적힌 시를 보고 곡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사는 아버지이고 작곡은 어머니로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와 작사의 한계에 대해 물었더니 “둘 다 어렵다. 요즘도 생각이 날 때마다 메모를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많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최근에 작사한 것을 잠시 보여 준다. ‘비 오는 날은 가수 배호가 어떨는지요/ 그의 노래는 비 오는 날 더 흐느끼기 때문이다/ 결박당한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일반인들은 (작사가를) 그저 유행가 가사나 적는 사람으로 여길지 몰라도 시대의 정서를 정확히 읽어야 합니다. 시인은 작사가를 한 수 아래로 보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유행가 노래 한번 만들어 보라고 하면 아마 도망갈걸요. 가수의 성향과 음색, 작곡자의 취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거든요. 조용필, 이미자가 생명력이 긴 것도 바로 옛 가요의 정서를 바탕으로 현실을 노래하기 때문이지요.” 현재 작사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1만여명 되는 것으로 전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저작권료는 얼마나 되느냐고 하자 “좀 받고 있지만 얼마인지 정확히 모른다. 왜냐하면 집사람 주머니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며 웃는다. 부인은 경희대 성악과 출신이고 슬하의 딸 셋 중 둘째는 성악을 하고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작사가 정두수는… 1937년 경남 하동 출생이다. 부산 동래고와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왔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최한 시 현상 공모에서 ‘공장’이라는 제목으로 당선했다. 1962년 KBS 건전가요 공모에서는 ‘즐거운 여름’이 당선됐다. 1963년 가요 ‘덕수궁 돌담길’로 대중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흑산도 아가씨’의 이미자, ‘가슴 아프게’의 남진,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 ‘공항의 이별’의 문주란, ‘그 사람 바보야’의 정훈희를 비롯해 조용필, 하춘화, 진송남, 은방울 자매, 패티김, 들고양이, 최희준, 김부자, 설운도 등 인기가수 100여명이 그의 노래를 불렀으며 지금까지 작사한 곡은 3500여곡에 이른다. 1995년 장시 ‘지리산’ ‘섬진강’ ‘백두대간’ ‘하동포구 이야기’ 등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비가 전국 13곳에 세워져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알기 쉬운 작사법’ ‘시로 쓴 사랑의 노래’ 등이 있다.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 매생이 봄을 품다

    [김준의 바다 맛 기행] (1) 매생이 봄을 품다

    제철 해산물은 흔히 보약에 비유됩니다. 영양의 보고인 데다 입맛까지 돋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제철 해산물만 잘 알아도 식탁은 한결 풍성하고 건강해질 겁니다.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자 해양학자인 김준(51) 박사가 제철 해산물에 담긴 이야기들과 음식궁합, 맛집 등에 대한 정보를 격주 목요일마다 독자 여러분의 식탁으로 배달할 예정입니다. 섬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엿보고, 바다와 사람의 맛있는 만남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매생이는 남도의 후미진 선창에 자리를 잡는다. 술꾼들이 옴팡진 단골집에 똬리를 틀 듯 그렇게. 그러고서 북서풍 끝자락을 붙잡고 봄의 불씨를 지핀다. 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 더욱 잘 자라고 입에 척척 달라붙는다. 그렇다고 아무 선창이나 기웃거리지 않는다. 외골수로 단골집만 찾듯 바닷물이 잘 통하고 유속이 느린 청정해역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바로 뜯은 생생한 이끼’가 아니던가. 동해안은 물론 서해안에서도 보기 힘들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전남 완도, 장흥, 고흥, 강진, 해남 일대의 연안에서 볼 수 있는 녹조식물문의 매생이과에 속하는 일년생 해조이다. 매생이 양식은 김 양식과 달리 큰 목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양식장의 관리부터 채취, 가공을 오롯이 인간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몸에 좋다는 입소문에 냉장기술까지 발달해 비싸든 싸든 판로를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섬마을 노인들에게 이보다 효자가 없다. 손자보다 반가운 것이 겨울철 매생이다. 그런데 금년에 작황이 심상찮다. “뭔 일인지 모르겠어라. 양은 작년만 못한디. 값은 작년보다 떨어졌응께.” 완도군 고금면 넙도리에 사는 오보선(64)씨는 매생이를 뜯다 말고 이제 대책을 세울 때가 됐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후 변화와 연안 오염으로 매생이도 ‘안녕’하지 않을 날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생이는 김이나 미역처럼 인간의 힘으로 포자(씨앗)를 붙일 수 없다. 하지만 매생이가 머물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 준다면 녀석들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민이고 매생이를 탐하는 인간들이다. ‘자산어보’는 매생이를 매산태(?山苔), ‘신동국여지승람’은 매산(?山)이라 했다. 손암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통해 ‘누에 실보다 가늘고, 쇠털보다 빽빽하다. 길이는 몇 자에 이른다. 빛깔은 검푸르다. 국을 끓이면 연하고 미끄러우며 서로 엉키면 풀어지지 않는다. 맛은 매우 달고 향기롭다’고 적었다. 그런데 유배지 흑산에 남도의 선창처럼 옴팡진 바다가 있었을까. 몇 자(1자 30.3㎝)에 이른다는 것이 아무래도 다른 해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손암의 정배지였던 흑산도나 우이도에서 매생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전라도 남쪽 어민들의 겨울 밥상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매생이가 ‘국민음식’으로 자리한 이유가 뭘까. 매생이는 패스트 푸드와 달리 칼로리는 낮고 영양소가 풍부하다. 철분, 칼슘, 칼륨, 엽산, 요오드 등 각종 무기염류와 비타민 A, 비타민 C 등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요소들이 풍부하다. 뼈를 튼튼하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키기 때문에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좋다. 또 피부를 맑게 하고 위나 장의 점막을 강화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에게도 좋다. 결국 가족 모두에게 권할 수 있는 식품이라는 결론이다. 매생이가 서울 사람들 밥상에 오르기 전 한정식집에 먼저 소개됐다는 것이 호사가들의 이야기다. 당시 정치인과 고위공무원들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입맛 하면 또 ‘공무원 입맛’이 최고 아닌가. 낯선 곳에서 끼니를 해결할 곳을 찾지 못할 때 관공서 주변의 식당을 찾는다면 실패할 확률이 낮다. 어디에 그런 맛과 멋이 숨어 있었을까. 후루룩, 후루룩. 양반이든 상놈이든 그릇에 코를 박고 먹어야 한다. 젓가락질은 사양하고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담아야 한다. 코가 석 자라도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 맛있게 먹기 어렵다. 입안에서 느끼는 뜨겁고 물컹한 것이 오장육부를 감싸며 몸을 덥힌다. 엄동설한에 바다를 품듯 말이다. 매생이는 국이라 하지 않고 ‘탕’(湯)이라 부른다. 국의 높임말이다. 음식에도 격이 있다. 홍어도 ‘홍어탕’이라고 하듯이. 매생이를 한주먹 쥐고 곱게 빗어 넘기며 ‘재기’(덩이)를 만들던 한 아낙이 “매생이 박사가 뭔 김을 이렇게 붙여 놨당가”라며 오씨를 쳐다봤다. 옆에서 매생이를 씻던 다른 아낙이 “박사니까 그 정도지 다른 집은 김도 매생이도 없당께”라며 말을 받았다. 오씨는 말이 없다. 약산도, 고금도 일대의 옛날 지주식 김양식장은 모두 매생이밭으로 바뀌었다. 특히 오씨가 사는 작은 섬마을은 매생이 덕에 유명해진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그를 ‘매생이 박사’라고 부른다. 그는 객선도 닿지 않는 열댓 가구 사는 작은 섬마을을 매생이 하나로 완도군에서 최고 소득을 올리는 섬으로 바꾸었다. 김양식을 할 때는 매생이가 ‘웬수’였다. 이제 매생이가 주인공이니 김이 ‘웬수’다. 오전 내내 뱃전에 가슴을 붙이고 뜯어온 매생이가 예년 같지 않고 김이 많이 섞였다. 양식시설이 물에 잠기는 정도에 따라 김, 매생이, 파래 등이 각각 붙는다. 사실 김이 약간 섞인 매생이가 맛이 있다. 하지만 도회지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어민들이 김발에 약을 쳐서 매생이를 제거하고 시꺼멓고 깨끗한 김을 만들어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젠 반대로 김이 전혀 섞이지 않는 매생이를 원한다. 가슴을 뱃전에 붙이고 엎드려서 바다에 펼쳐진 발을 들어 올려 한 올 한 올 훑어서 채취하는 것이 매생이다. 어민들 가슴에 멍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대한민국에 이보다 가슴 아프게 번 돈이 있을까. 일이 끝나면 아무리 추워도 등에 김이 모락모락, 얼굴에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손이 시리고 발은 저린다. 밥상 위 매생이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 고충을 알까. 그런데 사람보다 먼저 매생이를 탐하는 놈들이 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매생이를 사람만 탐하라는 법이 있던가. 오리들이 나누어 먹자고 야단이다. 이들의 먹성을 볼라치면 장난이 아니다. 혼자 독식하겠다고 나온다. 급기야 어민들이 총을 들고 나섰다. 오리와 전쟁이다. 탕! 탕! 탕! 상인에게 넘겨줄 재기를 만드는 내내 총소리가 울렸다. 글 사진 김준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어떻게 먹을까 →요리 매생이를 흐르는 물에 잘 흔들어 바구니에 건져 낸다. 굴은 소금을 살짝 뿌려 찬물에 씻어 물기를 뺀다. 냄비나 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굴이 익어 갈 때까지 볶는다. 이때 대파 흰 부분을 다져서 넣는다. 물을 약간 넣고 굴을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매생이와 국간장을 약간 넣고 한소끔 다시 끓인다. 매생이탕의 핵심은 ‘덕음’이다. 소금으로 나머지 간을 하고 한 번 더 끓인다. 너무 오래 끓이면 특유의 향이 없어지고 물처럼 녹아 없어지므로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비릿함을 싫어한다면 굴 대신 소고기를 넣기도 한다. 소고기는 넣기 전에 미리 볶아야 한다. 명절에 먹고 남은 떡을 썰어 넣으면 매생이 떡국이 된다. 남녘에서는 매생이탕을 걸쭉하게 끓인다. 매생이영양죽은 쌀죽을 끓이다 마지막에 매생이를 넣고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물이나 육수는 적게 잡아서 끓이는 것이 특징이다. 노인들에게는 골다공증 예방에 좋은 매생이영양죽과 혈압 안정에 좋은 매생이전이 좋다. 아이에게는 매생이 수제비, 매생이칼국수가 인기다. 이외에도 매생이김치, 매생이무침 등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매생이 파스타, 매생이 피자도 등장했다. 남쪽 5일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먹어본 사람이 찾던 매생이는 이제 겨울철을 대표하는 국민음식으로 식탁에 자리하고 있다. →음식궁합 1. 매생이탕을 끓일 때 다시마로 국물을 내면 좋다. 2. 미네랄이 풍부한 청정해역의 매생이와 피부에 좋은 바다의 우유 굴은 환상콤비다. →매생이 선별요령 매생이는 파란색보다는 검푸른 색깔이 나는 것이 좋으며 들어 올렸을 때 끊어지지 않고 길게 매달리는 것이 좋다. →맛집 해태식당(061-43402486) 강진군 강진읍 평화식당(061-867-1090) 장흥군 대덕읍 동산회관(061-532-3004) 해남 송지면 정애네집(062-234-4398) 광주광역시 충장로
  • 해수부, 바닷속 살핀 정약전 선생처럼 新자산어보 프로젝트

    정부가 수산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수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신(新)자산어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했다. 해양수산부는 2015년부터 7년간 연구개발비 3500억원을 투입해 수산물의 방사능 오염 우려, 적조 피해 등을 극복하고 수산자원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11일 밝혔다. 신자산어보 프로젝트는 내년이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 주변 어류의 생태와 이용에 대한 수산 과학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지 200주년이 되는 데서 이름을 따왔다. 사업 내용은 ▲지속 가능한 수산생명자원 관리 체계 구축 ▲안전한 수산물 생산 환경 기반 조성 ▲수산물 소비 활성화 기반 조성으로 요약된다. 수산생명자원 관리 체계 구축에는 빅데이터 처리 기술이 활용된다. 우리나라 바다의 수산생명자원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목표다. 안전한 수산물 생산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연구에는 방사성물질과 노로 바이러스, 병원성 미생물·기생충 피해 극복을 위한 기술 개발과 적조·해파리 등의 유해 생물 조기 탐지 기술 개발 등이 포함됐다. 어촌 지역 특성에 적합한 수산생명자원 가공, 소비자 맞춤형 유통 기술, 친환경 물질을 이용한 생선회 유통기한 연장 기술 등이 중점적으로 개발된다.. 세종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길섶에서] 라면수프/문소영 논설위원

    국물요리의 종결자는 라면수프다. 손님을 불러놓고 아무리 해도 음식 맛이 안 날 때 비상수단으로 라면수프를 집어넣는 것이다. ‘꽃보다 할배’에서 부대찌개 만찬을 준비하던 이서진은 끝내 국물 맛을 내는 데 실패하자 라면수프를 투하했고, 맛있다는 칭찬을 받았다. 최근 한 출판사 대표가 파주 한강 하구 수로에서 참게 4마리와 붕어를 여러 마리 잡아 해물탕을 끓였지만 맛이 나지 않자 라면수프를 투입해 맛있게 먹었다고 자랑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파주의 참게는 흙냄새가 나지 않고 맛도 독특해 조선시대 왕에게 진상했다고 소개돼 있다. 화학조미료는 안 먹는다며 멸치·표고버섯·다시마로 맛국물을 내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라면수프 앞에서는 곧잘 무장해제가 되곤 한다. 라면을 먹고 싶다는 꺼림칙한 욕망을 친환경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쓴다. 콩나물·숙주를 넣어 해장용 라면으로 만들거나, 라면수프 양을 줄이겠다고 된장·고추장을 풀기도 한다. 전복라면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에는 문어라면도 있다. 아이러니 아닌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우리나라 민어 최대 산지 임자도

    우리나라 민어 최대 산지인 신안 임자도는 바로 옆 재원도와 함께 민어에 얽힌 이야기가 모래알처럼 쓸려 다니는 전설의 섬이다. 호황을 누리던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파시(波市·바다 위 생선시장)가 있었다. 임자도 부근에 민어 떼가 몰려오면 ‘부욱 부욱’ 우는 소리에 섬사람들이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고 호사가들은 입방아를 찧는다. 산란하며 새우류를 좋아하는 민어가 여름이면 임자 해역으로 몰려들고, 민어를 따라 어부와 상인들이 불야성을 이뤘다. 6월이면 민어 배들이 수백 척 몰려들어 10월까지 섬은 모든 것이 넘쳤던 때다. 당연히 요리집과 기생들까지 한 철 장사로 술렁거렸다. 일본인들은 ‘못 먹을 생선’이라고 우기며 그들 나라로 실어 날랐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에는 일본인의 횡포로 억울함을 못 이긴 기생 50여명이 집단 양잿물 자살을 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 ‘요란스럽던 시절’은 이제 추억담이 됐다. 어구가 좋아져 남획되고 수온 변화로 민어 수가 줄면서 배들은 임자도를 떠났다. 근래는 그 자리를 젓새우잡이 배가 오달지게 차지하고 있다. 전국 새우젓의 80%를 움직이는 곳이 송도 위판장이기 때문이다. 임자도 민어가 대놓고 목포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대개는 송도 위판장에 부려진다. 추석 차례상용 작은 통치에서 크게는 30㎏짜리까지 거래된다. 민어는 사리 때 움직여서 조금에 들어가면 위판장은 썰렁하다. 당연히 값도 천정부지로 뛴다. 민어는 단백질과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많아 어린이나 노약자 체력 회복에 좋은 음식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보면 “맛은 담담하면서도 달아서 날것으로 먹으나 익혀 먹으나 다 좋고,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고 돼 있다. 또 “부레는 아교를 만든다”고 언급했다.
  • 데쳐 먹고 쪼사 먹고… 얼큰한 국물에 입이 호강하네

    데쳐 먹고 쪼사 먹고… 얼큰한 국물에 입이 호강하네

    남도 여행,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빼놓을 수 없는 이유, 풍성한 먹거리다. 올여름 남도로 휴가를 떠난다면 하루쯤은 부러 전남 장흥으로 발길을 돌리길 권한다. 식욕을 자극하는 여름철 별미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다. 산과 들, 바다와 강이 어우러지며 길러낸 싱싱한 식재료에 남도 특유의 맛이 버무려져 장흥 어디를 가도 만족스럽다. ‘하모도 한철’이라 했다. 여름에 잡힌 갯장어가 특히 맛있다는 뜻이다. 하모는 갯장어의 일본식 표현이다. 정약전이 지은 ‘현산어보’는 갯장어를 ‘견아리’(犬牙?), 즉 개와 같은 이빨을 가진 장어라고 적고 있다. 성질도 포악해서 물 밖으로 나오면 곧잘 사람에게 덤벼든다. 여기에 뱀을 닮은 외모를 하고 있으니 그다지 먹음직스러운 식재료는 아니다. 우리 선인들도 갯장어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다르다. 책 ‘현산어보를 찾아서’(이태원 지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엔 갯장어를 수산 통제 어종으로 지정해 함부로 잡거나 유통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어획량이 저조하면 어민들이 숨겨 놓고 내놓지 않는다고 의심해 배 밑창까지 조사할 정도였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갯장어가 여름철 보양식으로 인기가 높다. 식감이 쫄깃하고 성인병 예방이나 원기 회복에 좋다고 알려지면서부터다. 갯장어는 7~8월에 잡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8월이 지나면 몸에 기름기가 많아져 주로 육즙을 내서 먹는다. 현지인들은 갯장어를 여름철 최고의 횟감으로 꼽는다. 하지만 대개는 샤부샤부(사진 ①)로 살짝 익혀 먹는다. 갯장어에 촘촘하게 칼집을 낸 뒤 육수에 데쳐 자색 양파, 부추 등과 함께 싸 먹는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싱싱회마을(863-8555, 이하 지역번호 061), 해돋이(862-7234) 등이 알려졌다. 특히 싱싱회마을 육수가 진국이다. 장어 뼈를 고아낸 육수에 전복, 대추 등을 넣고 끓인다. 샤부샤부를 먹은 뒤엔 녹두죽으로 입을 가신다. 올해 유난히 생산량이 떨어져 값이 많이 올랐다. 한 접시에 9만원 선. ‘여름철 지쳐 누운 소도 벌떡 일어서게 한다.’ 식도락가라면 주인공이 누군지 단박에 알 터다. 스태미나 식품으로 즐겨 먹는 낙지다. 우리나라 낙지 생산 1번지는 장흥이다. 장흥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잡힌 낙지의 60%가량이 전남산이고 이 가운데 40% 정도가 장흥산이었다. 장흥이 전국 최대 낙지 산지가 된 건 2008년부터다. 어민들이 김 양식에 염산을 사용하지 않은, 이른바 ‘무산김’을 생산하면서 득량만의 생태계가 살아난 게 기폭제가 됐다. 이젠 어민들이 수작업으로 이물질을 제거한다. 그러다 보니 어류나 연체동물의 먹잇감이 풍부해졌다. 김 맛도 좋아지고 낙지 등의 해산물 생산량도 덩달아 늘어나게 된 것이다. 장흥산 낙지는 머리가 작다. 발은 오종종하고 길다. 몸 맛은 씹을수록 쫄깃쫄깃하다. 한데 먹는 방식이 문제다. 영국의 한 일간지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음식 8가지’ 가운데 낙지를 1위에 올렸다고 알려진 데 이어 국내에서도 최근 낙지 관련 사고가 잇따랐다. 낙지는 한 마리를 둘둘 말아 통째 먹는 게 최고다. 통째 먹는 게 불편하면 낙지를 잘게 ‘쪼사’(잘게 자른다는 뜻의 사투리) 먹는 ‘탕탕이’(사진 ②)가 좋겠다. 현지에선 한우 육회를 얹어 먹는 ‘소고기 낙지 탕탕이’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읍내 만나숯불갈비(864-1818~9)와 싱싱회마을이 알려졌다. 3만 5000~4만원. 낙지는 낱마리에 3000~4000원이다. 생산량에 따라 매일 경매가가 달라진다. 대리 수산물어판장에서 싸게 살 수 있다. 메기매운탕(사진 ③)도 빼놓을 수 없다. 핵심은 된장으로 맛을 낸다는 것. 그게 대체 무슨 맛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된장의 구수한 맛과 고추장의 얼큰한 맛이 어우러졌다고 보면 틀림없겠다. 먼저 소머리와 사골로 육수를 낸다. 시래기와 들깨 등도 듬뿍 넣는다. 여기에 된장과 약간의 고추장을 섞은 소스를 넣는다. 끓일수록 국물은 걸쭉해지고 시래기 등엔 양념 맛이 듬뿍 밴다. 민물새우도 빼놓을 수 없다. 매운탕 맛을 한결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2만~4만원. 탐진강 메기탕(864-6543)이 유명하다. 글 사진 장흥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열린세상] 文·史·哲(문학·사학·철학)이 홀대 받는 야만의 나라/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文·史·哲(문학·사학·철학)이 홀대 받는 야만의 나라/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 쪽에 다산 정약용 유적지와 실학 박물관이 있다. 책을 읽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가끔 이곳에 들른다. 팔당호를 바라보고, 다산 유적지를 거닐다 보면 답답한 속이 확 트이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던 머릿속도 말끔하게 정리된다. 며칠 전에도 다산 유적지를 찾았다. 입구에는 다산의 ‘목민심서’ 내용이 새겨진 동판이 있다. 관리의 폭정을 비판하면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이 저서에는 다산의 애민(愛民) 사상이 잘 집약되어 있다. 아마 다산 선생께서 요즘 정치꾼들을 보면 “쓰레기 같은 놈들. 모두 사라져 버려”라고 불호령을 내리리라 생각하면서 다산 묘소 입구 나무 그늘 의자에 앉았다. 바로 옆쪽 의자에서 40대로 보이는 아버지와 초등학생 딸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부녀는 다산의 일생, 다산이 살았던 조선 후기 사회상, 다산의 실학사상, 다산의 문학관 등에 대해 스크랩한 자료를 뒤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좋아 부녀의 대화가 끝날 무렵 다가가 인사를 했다. 부녀가 답사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아버지의 교육관이 궁금해졌다. 공학을 전공했다는 그는 어느 날 딸이 한국의 위인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대답해 줄 말이 없어서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책을 읽다 보니 현장 학습을 겸한다면 이만한 공부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답사를 다니다 보니, 교육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의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대해 딸과 함께 공부하고 있으며, 올해는 한국의 실학사상가에 대해 알려고 직접 현장을 답사 체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곧 방학에 들어가면 가족과 함께 흑산도로 여행을 가 자산문화관을 방문해서 정약전의 삶과 사상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라 했다. 답사 여행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딸과 사이도 가까워지고 공부를 대하는 딸의 태도도 훨씬 적극적으로 변했다면서 웃는 가장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부모는 모두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식이 어릴 적부터 영어 학원은 물론이고 각종 학원에 기를 쓰고 보낸다. 또 성적이 조금만 떨어지면 나무라면서 공부하라고 다그친다. 아이는 부모가 짠 일정표대로 로봇처럼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창의적인 문학적 상상력도 잃어버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역사적 뿌리도 망각하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삶의 철학도 정립하지 못한 채 기능적 지식인으로 전락한다. 그런 아이가 일류 대학을 나와 출세를 한들 뭐 하겠는가. 기껏해야 일신의 영달만을 생각할 뿐이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모든 학문의 근간이자,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려면 반드시 깨우쳐야 할 진리를 담고 있다. 글로벌 교육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가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문학과 역사와 철학 교육에 힘써야 한다. 수능시험만을 중시하는 한국의 교과 과정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철학은 아예 교과 과정에 없다.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국사는 교과 과정에는 있지만 교육 현장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더구나 진보와 보수가 이전투구를 하면서 교과서마저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문학은 그나마 대입 수능시험에서 차지하는 점수 비중 때문에 중시되지만, 이 역시 문제풀이식 교육으로 전락해 버렸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교육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대학은 어떤가. 철학과는 이제 대학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에서 취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전인적 인격체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빼고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국 대학은 이 문학, 역사, 철학을 개밥에 도토리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욕쟁이, 사기꾼 같은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모습이 개탄스럽다. 교육의 측면에서 한국은 야만의 나라이니까. 이런 나라에서 다시 다산 같은 사상가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헛된 꿈일 뿐이다.
  • 전남 강진 백련사 동백숲

    전남 강진 백련사 동백숲

    참 역설적이지요. 꽃이 져야 봄이 온다니 말입니다. 동백(冬柏)은 겨우내 키운 꽃을 훈훈한 갯바람이 불면 봉오리째 떨어뜨립니다. 피보다 붉은 동백은 땅의 냉기를 지우고 머뭇대던 봄도 그제야 완연해집니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닌 것이지요. 전남 강진의 백련사 동백숲에 들면 꽃 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수백년을 살아낸 동백들이 절집 주변을 빼곡하게 감싸고 있으니, 과장 좀 보태면 투둑대며 꽃 떨어지는 소리가 빗방울 듣는 소리와 닮았습니다. 땅은 붉고, 숲은 푸른 풍경, 상상이 되십니까. 내친 걸음, 주작산까지는 가봐야 겠습니다. 강진을 두고 흔히 ‘남도 답사 1번지’라 하지요. 하지만 단언컨대, 강진 땅 남쪽을 떠받치고 있는 주작산에 오르지 않는다면 이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질리지 않을 보석 같은 풍경들이 두 눈 가득 담기기 때문입니다. 석문산에서 덕룡산을 거쳐 해남 땅 두륜산으로 이어진 산군(山群)들의 위용 또한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요. 장비의 장팔사모가 그리 뾰족했을까요. 창날처럼 솟은 희디 흰 암릉들은 꿈틀대는 백룡을 보는 듯했습니다. 꽃이 진다. 봉오리째 툭툭 떨어진다. ‘자의식’이 강한 꽃이지 싶다. 가지 끝에서 하루하루 시들 바에는 차라리 떨어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남겠단다. 그 결기를 품고 낙화한다.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나무’, 동백이다. 갯바람이 닿는 남도 이곳저곳에 동백숲이 흩뿌려져 있다. 중부 이남에서 잘 자라는 성질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84호)과 전남 강진의 백련사 동백숲(천연기념물 제151호)이다. 두 곳 모두 빼어난 풍경을 가졌지만, 다른 점도 있다. 선운사 동백숲은 사람과 꽃 사이에 울타리를 쳤다. 이에 견줘 백련사 동백숲은 일부 구역을 제외하고는 사람과 꽃의 경계가 없다. 동백꽃은 두 번 핀다. 나뭇가지 끝에서, 그리고 떨어져 땅 위에서 또 한번 핀다. 동백꽃은 늘 푸른 잎에 감춰졌을 때보다, 되레 땅 위 떨어졌을 때 더 아름답다는 이들이 많다. 가수 송창식도 노래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고. 동백꽃이 세 번 핀다는 주장은 이런 이유에서 나왔다. 가지와 땅에 이어 뭇사람들의 가슴 속에서도 피기 때문이다. 백련사 주차장에 서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비포장의 숲길, 오른쪽은 경내로 직행하는 아스팔트 길이다. 동백숲은 터널을 이뤘다. 사실상 절집의 일주문 노릇을 하는 숲이다. 떨어진 꽃들이 땅 위에 붉은 비단처럼 깔렸다. 꽃의 속내를 아는 이라면, 이를 ‘사뿐이 즈려밟고 갈’ 수는 없다. 철없는 아이조차 꽃술 하나 다칠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숲은 벌이 날며 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노련한 ‘월하노인’(月下老人)답게 여기저기서 붕붕댄다. 동백꽃 암술과 수술의 중매는 주로 동박새 등이 맡는다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다. 길 양옆으로 키 5~7m 정도의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예서 백련사까지 거리는 대략 300m. 그 구간 약 5만 2000㎡(약 1만 6000평)에 수백년 묵은 고목 1500여그루가 자란다. 백련사 동백숲의 면적과 나무 숫자 등에 대한 견해가 제각각이어서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기록을 기준 삼았다. 동백나무 사이사이엔 후박나무, 비자나무 등 늘 푸른 나무가 섞여있다. 거개가 남녘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무들이다. 허리 숙여 땅을 보면 들꽃 천지다. 보랏빛 현호색 등 키 작은 들꽃들이 땅에 떨어진 동백꽃과 어우러져 있다. 동백숲 그늘을 지나면 곧 백련사 경내다. 절집 뜨락, 명자나무가 붉디 붉은 꽃술을 열었다. 동백꽃을 시샘한 까닭인지, 늘 이맘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핀다. 절집은 수수하다. 단청 벗겨진 대웅전이 정겹고, 응진전과 만경루도 고즈넉하다. 고려 8국사(國師)를 배출한 남도의 명찰이니, 어쩌면 소박한 게 당연한 노릇일 터다. 개창 연대는 신라 문성왕 1년(83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내 대다수 절집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등 전란 통에 소실되는 비운을 겪고 새로 지어졌다. 절집 뒤편의 만덕산(408m)은 예부터 ‘다산’(茶山)이라 불렸다.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련사와 이웃한 초당에 유배됐던 정약용(1762~1836)도 이곳의 지명을 따 자신의 호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백숲과 더불어 백련사를 세상에 알린 공신 중의 하나가 ‘다산오솔길’이다. 백련사와 정약용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을 잇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길은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총 4코스(65.7㎞) 가운데 2코스에 해당하는 다산오솔길은 다산초당~백련사 동백숲길~남포마을을 지나 강진 읍내의 영랑생가로 이어진다. 다산오솔길의 일반적인 들머리는 다산유물전시관이다. 두충나무 숲길을 지나 다산초당과 야생차밭, 그리고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따라 백련사까지 걷는다. 하지만 사유를 위한 길에 진입로가 따로 있으랴. 어디로 가든 자신만의 철학의 길은 완성될 터. 백련사를 들머리 삼아 걷는 게 다소 수월하다. 다산초당 주차장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고갯길이 이어진다. 허덕대며 오르기보다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게 훨씬 운치 있다. 다산오솔길 곳곳엔 다산과 혜장선사(1772∼1811)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다산은 1808년부터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 등 강진땅에서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힘든 나날들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기도 했다. 저 유명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방대한 양의 저술이 모두 다산초당에서 완성됐다니 말이다. 다산은 이 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선사와 교분을 나눴다. 혜장은 다산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이자 제자, 그리고 벗이었다. 다산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산오솔길은 결국 당대의 실학자였던 다산이 학승 혜장과 교유하며 사상의 토대를 세웠던 ‘철학의 길’인 셈이다. 절집 못 미처 왼쪽으로 다산오솔길이 시작된다. 안내판은 다산초당까지 거리를 800m, 소요시간은 30분이라 적고 있다. 하지만 쉬엄쉬엄 걷다 보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또 다산초당에서 주차장이 있는 다산유물전시관까지 30분 이상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다산초당 주변엔 다산의 흔적이 여태 남아있다. 다산은 초당 동쪽에 동암을 지어 기거했고, 물을 끌어다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텃밭을 일궈 남새도 길렀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초당 뒤편 바위에 ‘정석’(丁石)이란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천일각도 옛모습 그대로다. 멀리 강진만이 한눈에 담기는 곳. 다산은 종종 천일각에 올라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생각하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백련사를 찾았다면 당연히 주작산(428m)을 돌아보는 게 순리다. 거리도 가깝고, 오르기도 어렵지 않다. 오가는 길에 ‘강진의 소금강’ 석문공원 등 볼거리도 많다. 특히 주작산 정상에서 맞는 풍경은 나라 안 어디서고 쉽게 만날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다. 지도로 보면 강진은 빨래집게를 닮았다. A자형 집게 다리 사이엔 강진만이 들어찼다. 강진 위쪽은 월출산이다. 국내 대표적인 악산이다. 집게 다리 왼쪽, 그러니까 도암면과 신전면 등 해남과의 경계 지역엔 주작산과 덕룡산(432m)이 불쑥 솟았다. 북으로는 월출산, 남으로는 덕룡산 등이 강진땅을 감싸 안은 형국이다. 특히 덕룡산은 규모에서 뒤질 망정, 기세로는 월출산과 견줄 만한 악산이다. 주작산은 진달래가 아름다운 산이다. 대규모로 군락을 이루기 보다, 암릉과 산허리 등 꼭 피어야 할 곳에 소박한 규모로 핀다. 진달래가 만개하는 4월이면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산꾼들이 몰려 든다. 트레킹 수준의 산행을 원하는 여행객이라면 주작산 휴양림을 들머리 삼으면 된다. 왕복 2시간이면 정상까지 돌아볼 수 있다. 승용차로도 오를 수 있다. 다만 길이 비포장인 데다 좁고 굴곡이 심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휴양림 주차장에서 구불구불 산길을 50분 정도 오르면 일출전망대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의 전망대지만, 객들에게 선사하는 풍광 만큼은 정말 빼어나다. 왼쪽으로는 덕룡산과 그 품에 안긴 강진의 들녘이 두 눈에 가득찬다. 사신(四神) 가운데 남쪽을 지키는 주작(朱雀)의 등을 타고 앉아 동쪽에서 용솟음치는 청룡(靑龍)을 굽어보는 듯한 느낌이다. 석문산과 멀리 월출산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자태도 기막히다. 오른쪽으로는 어미의 뱃 속 아기집을 닮았다는 강진만이 넉넉한 자태로 펼쳐져 있다. 야트막한 산이 차려낸 상차림 치고는 다리가 휠 지경이다. 일출 전망대에서 정상까지는 10분 정도 더 올라야 한다. 정상에서 맞는 풍경은 일출전망대와 사뭇 다르다. 발은 강진땅을 딛고 섰으되, 눈을 사로 잡는 건 해남과 그 너머 다도해다. 해남기맥의 창끝 같은 암봉과 그 아래 매달린 절집, 그리고 ‘명품’이라 부를 만한 두륜산의 장엄한 자태가 일품이다. 강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 가우도다. ‘강진만의 여의도’라고 불리는 섬이다. 여의도가 대방동, 마포와 다리로 연결됐듯, 가우도 또한 도암면과 대구면 방향으로 각기 다른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교량의 길이는 1.12㎞, 폭은 2.2m다. 차로는 갈 수 없고, 걸어서 오가야 한다. 너른 강진만을 횡단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우도는 강진군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다. 거북이를 닮은 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섬 안에 한옥형 숙박시설도 마련돼 있다. 글 사진 강진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61)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간다면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으로 나가서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까지 간 뒤 해남 방면 18번 국도로 갈아타고 곧장 가면 백련사 이정표가 나온다. 주작산 휴양림, 석문공원 등도 이 도로를 타고 가다 만날 수 있다. 요즘 봄꽃이 한창인 만큼 오가는 길에 구례 산수유마을이나 영암 백리 벚꽃길 등을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백련사 종무소 432-0837, 주작산 휴양림 430-3306. →맛집 강진은 한정식집이 많다.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알싸한 홍어삼합과 산낙지, 꽃게찜 등을 푸짐하게 차려낸다. 강진읍내의 흥진식당(434-3031)과 둥지식당(433-2080), 청자골 종가집(433-1100), 명동식당(434-2147) 등이 알려졌다. 병영면 수인관(432-1027)의 달달한 돼지불고기도 맛있다. →잘 곳 읍내 프린스행복모텔(433-7300)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다. 부성파크모텔(434-2081), 탑모텔(434-8816) 등이 비교적 깔끔하다. →주변 관광지 강진읍내에 다산이 머물렀던 주막집 사의재가 복원돼 있다. 시인 김영랑이 나고 자란 생가도 지척이다. 병영면의 ‘하멜기념관’과 근대문화재 제 264호로 지정된 돌담길도 둘러볼 만하다.
  • 주말 하이라이트

    ■아들 녀석들(MBC 토요일 밤 8시 40분) 현기와 인옥은 학교에서 다빈과 아람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찾아 나선다. 없어진 다빈과 아람을 찾으며 현기와 인옥은 다시금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병국도 아이들이 없어지자 다빈에 대한 마음을 푼다. 한편 미림의 병을 알게 된 승기는 미림 곁에 있으려 하지만 미림은 석진을 핑계삼아 승기를 밀어낸다. ■OBS 스페셜(OBS 토요일 밤 8시 15분) ‘유배’라는 절망과 좌절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지 조명한다. 과연 유배자가 겪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대 고독은 어떤 것일까. 추자도에 두 살 난 아들을 숨기고 제주도 관노로 유배 간 정난주, 나주 율정점에서의 정약용, 정약전의 이별 장면 등을 생생하게 재연한다. ■놀라운 대회 스타킹(SBS 토요일 오후 6시 20분) 농구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이 처음으로 ‘스타킹’ 무대를 찾았다. 빠른 스피드와 정확도로 공을 넣는 것은 물론 왼손으로만 골인시키기부터 안대를 쓴 채 골인시키기까지 우지원은 입이 떡 벌어지는 농구 묘기를 선보인다. ■나눔 0700(EBS 토요일 오후 3시 50분) 올해 열일곱 살이 된 동욱이는 뇌병변 1급 장애를 앓고 있다. 엄마 문은희씨는 병원에 가기 위해 동욱이를 데리고 준비하는 것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동욱이를 들고 옮기는 것도 엄마 은희씨의 몫이다. 동욱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은 10년간 반복돼 온 일상이다. ■아빠! 어디가?(MBC 일요일 오후 4시 55분) 아빠와 아이, 단둘이 떠난 제주도에서 보낸 낯선 하룻밤. 그런데 항상 밝고 씩씩하기만 하던 지아와 후가 울음을 터트린다. 한편 환하게 빛나는 제주의 아침은 아빠들의 선착순 아침식사로 시작되고, 만족스러운 식사 후 다섯 아빠와 아이들의 5인 5색 제주도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TV 동물농장(SBS 일요일 오전 9시 25분) 나쁜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견공 네 마리는 난생처음 가족들과 떨어져 문제를 교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합숙에 돌입한다. 낯선 곳에 남겨져 어안이 벙벙한 녀석들. 하지만 이내 견공 본색으로 내무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KBS2 토요일 오후 6시 15분) 198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걸그룹 펄 시스터즈의 배인순, 배인숙 자매가 최초로 동반 출연한다. 이날 왁스는 배인숙이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불렀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선곡해 왁스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무대를 꾸몄다. 한편 포맨은 펄 시스터즈의 ‘떠나야 할 사람’을 재탄생시킨다.
  • 실학자 정약전 詩文 첫 발견

    다산 정약용의 형인 실학자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 유배 생활 중에 쓴 시문집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연세대 학술정보원은 2일 정약전의 호 ‘손관’(巽館)이라는 글자가 적힌 시문 40여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시문에는 정약전이 흑산도 어부, 나무꾼들과 주고받은 시, 동생 정약용의 시에 운을 따서 쓴 답시 등이 담겼다. 이 시문은 정약용의 저술 ‘여유당집’(與猶堂集) 필사본의 일부로 알고 보관해 온 ‘잡고’(雜藁)라는 표지의 책 속에 실려 있었으며 정약용 탄생 250주년 전시회 준비를 위해 필사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정약전이 남긴 작품으로는 흑산도 연해 어류의 특징을 기록한 ‘자산어보’(玆山魚譜), 소나무 벌목 금지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이 전해지지만 시문학 작품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선택! 역사를 갈랐다] (23)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

    연암은 아무런 관직도 없이 중국에 갔다. 집안 덕이었다.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단 책임자(정사)로 금성도위 박명원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연암의 삼종형(팔촌)이어서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중국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연암(1737~1805)과 다산(1762~1836)은 모두 영조 시대에 태어났다. 다만 연암이 다산보다 25세 위다. 연암의 집안은 반남 박씨로 노론 명문가로 꼽혔다. 다산의 집안은 압해 정씨로 정치적으로 실세한 남인 몰락 가문이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두 사람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나란히 거론된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같다고 보면 문득 다르고 다르다고 보면 문득 같다. 연암은 당대의 주류 다수파에 속했으면서도 비주류 소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다산은 당대의 비주류 소수파에 속했으면서도 주류 다수파의 모습이 보인다. 연암은 16세에 결혼해 장인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임했다. 공부가 늦은 감이 있다.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잘나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찌감치 학업에 정진했다. 7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고 10세에 시집을 만들 정도였다. 연암은 몇 차례 과거를 봤지만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다산은 과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과거에 합격해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28세에 벼슬길에 나갔다. 과거를 통과하지 않았던 연암은 50세가 넘어서야 정조의 배려와 친구의 천거로 벼슬에 나아갔다. 55세에 첫 지방수령직으로 안의현감에 임명되었다. 지방관 경력을 잠시 비교해보자. 다산은 36세의 나이에 곡산부사로 나갔다. 같은 해에 연암은 61세에 면천군수로, 그 후 64세에 양양부사로 승진되었다. 다산은 30대 부사, 연암은 60대 부사였다. 아무튼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양양부사에 임명된 사람은 연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과거 단념·서얼들과 교류… 연암의 ‘강남 스타일’ 과거를 단념한 연암은 30대였던 1760년대 후반부터 탑골공원 근처에 살면서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교유했다. 주로 노론 출신이라는 점과 이덕무 등이 신분상 천대받은 서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이른바 ‘북학파’ ‘연암그룹’ 또는 ‘백탑시사’ 등으로 불린다. 10대의 다산은 줄곧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다녔고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권철신, 이가환 등을 만나고 한국 천주교를 스스로 일으킨 이벽, 이승훈과 어울렸다. 이들은 ‘성호학파’ 또는 ‘기호남인’으로 불린다. 다산은 15세에 결혼한 후 서울 남촌에서 살았다. 연암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사는 서울 북촌에 살았으니 요즘으로 치면 연암은 강남, 다산은 강북에 산 셈이다. 두 사람은 문장가, 학자로서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연암은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다. 다산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연암은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 했다. 다산은 글을 쓰려면 속을 꽉 채우라 했다. 연암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는데 다산은 마치 일기 쓰듯 많은 시를 남겼다. 연암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다산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연암은 문장가, 다산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글쓰기에는 두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은밀하게 감추는 방법과 들춰내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연암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했다. 다 읽고 나서도 그의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다산의 글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했다. 읽노라면 곡진한 느낌을 준다. 연암은 인상파 화가인 듯하고,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인 듯하다. 연암은 정조에 의해 당시의 자유분방한 문체를 주도한 죄인으로 지목되었다. 다산은 정조의 우등생이요 모범생이었다. 다산은 정조의 순정한 문체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다산은 당시 사교라 불린 천주교에 감화돼 적극 동조했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어 거리를 두었다. 반성문도 썼다.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폭력적 탄압에는 반대했다. 이렇듯 다르다 보니 동시대 인물인데도 두 사람이 만났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나이도 차이나고 사는 동네도 달랐지 않은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인물로 박제가(1750~1805)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낮에는 규장각에서 다산과 함께 근무했고 저녁에 퇴근하면 연암그룹과 어울렸을 것이다. 박제가를 통해, 또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의 이름이 이미 높았기에 다산은 연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혹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다산이 손위인 연암에게 먼저 인사를 했을 것이다. 인사를 받은 연암은 어떻게 대꾸했을까? 젊은 친구가 누군지 몰라 심드렁하게 인사만 받았을까,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리라 공손하게 인사를 받았을까. 다산이 18년 유배 기간이 끝날 무렵에 마무리한 ‘경세유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으며 유신(儒臣)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중국의 기구 이용 제도는 보통 사람이 헤아리기 힘든 것이 많았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유가적 이상에 입각한 국정 전반의 제도 개혁안이다. 여기서 다산은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여 오로지 그것을 직무로 하는 관청을 별도로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른바 ‘이용감’이었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제안한 제도 중 꼭 그대로 시행되길 바라는 열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이용감 설치는 그중 하나다. ●저자와 독자 그 이상의 연결고리 ‘열하일기’ 이로 볼 때 두 사람은 ‘열하일기’로 연결되고 있었다. 물론 저자와 독자의 관계였지만. ‘열하일기’는 연암이 중국에 다녀와서 쓴 책이다.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야구도하기’ 또는 유명한 소설 ‘허생전’을 교과서에서 읽었을 텐데 모두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여행기 또는 문학작품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 해 여름, 44세 연암은 붓 두 자루, 먹 하나, 작은 공책 네 권 등 간단한 행장으로 중국을 향했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자객 형가를 생각했다. 진시황을 죽이러 적국이며 강대국인 진나라로 강을 건너가기 직전의 형가가 하필 떠올랐을까! 연암은 국경을 넘어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는 여염집을 보고서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변방의 촌마을이 이 정도라니. 연암은 중국에서 정말 볼 만한 것은 큰 누각이나 성곽이 아니라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이라고 했다. 민간의 이용후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연암은 도중에 목격한 수레, 벽돌, 목축, 선박 등 여러 제도들을 소개했다. 허구적이고 자폐적인 북벌론의 미몽에서 깨어나 북학을 해야만 북벌도 가능할 터. 대내용 북벌만 강경하게 외칠 뿐 민생은 나아지지 않는 조선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여정의 진행에 따라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면서 갖가지 주제를 넘나들었다. 형식 또한 일기 형식으로 시작해 다양한 산문 형식을 시도했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 전체에 흐르는 주제의 하나는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것’이었다. 연암은 사신의 일행이면서 공식 임무가 없었다. 새벽이면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 여기저기 많은 곳을 둘러보려고 했고 저녁이면 몰래 숙소를 벗어나 중국 지식인들과 만나 필담을 나누다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청 황실의 대내외 통제 술책을 간파하면서 지금 태평연월을 누리고 있는 천하가 장차 어찌 될지 변역의 기미를 살폈다. ‘열하일기’는 현실적 존재인 청 왕조를 오랑캐라 외면하고 무시하는 자폐에 대한 질타였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조선의 식자층 내지 지배층에 고정관념과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만 보는 자폐와 남의 눈으로만 보는 자아 상실의 극단은 늘 경계할 병통이다. 또한 천하대세를 전망하고 변역의 기미를 놓치지 않는 예민함은 지금도 절실하다. 아, 아깝다. 또 다른 위대한 저술가 다산은 해외 여행 갈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외국에 다녀왔다면 필시 굉장한 저서를 낳았을 터이다. 다산이 유배 18년 동안에 육경사서와 정치·경제·행정·역사·지리·언어·국방·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룬 저서가 모두 500권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그는 다만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연암의 역저 ‘열하일기’는 점차 위축되었다. 그릇된 문체의 본산으로 지목되고 오랑캐 연호를 사용한 원고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후손조차 문집 간행을 보류했을 정도다. 나라를 잃은 1911년에 와서야 활자로 간행되었다. 다산의 역저 ‘경세유표’ 등도 빛을 보지 못하다가 조선왕조가 망할 때에 가서야 주목을 받았다. 연암은 문체 문제로, 다산은 천주교 문제로 각각 정조의 지적을 받았지만 두 사람 다 정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조가 죽자 다산은 유배를 가고 연암은 몇 년 후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는 망하기 직전인 1910년 다산과 연암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둘 다 ‘문도공’(文度公)이었다. 만시지탄. 그들은 글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필생의 역저를 남겼다. 그 진가는 뜻있는 독자들에게 달렸다.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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