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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업 35년 중간정리/「김윤식 선집」 6권 발간

    ◎회갑 기념… 평론·예술기행·산문 등 갈래별 체계화/염상섭·이상서 신세대까지 섭렵/척박한 한국근대문학사의 토대 마련 「발바닥으로 글쓰는」 평론가 김윤식씨(60·서울대국문과 교수)는 자신의 작업을 그렇게 자평한다.『나는 명민하지도 천재를 타고나지도 않았다.남들이 한시간 일할때 나는 두세시간 씨름했다.나는 발바닥으로 살아왔다』 우리시대의 성실한 대학자이자 탁월한 평론가인 김씨의 이 말은 뜻밖이다.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사람의 유한한 조건을 뚫고 전무후무한 글무더기의 산을 쌓아올린 이의 자부심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평론쟁이」 35년간 70여권의 저서를 펴낸 김씨가 회갑을 맞아 그간의 필업을 중간정리한 「김윤식 선집」6권을 솔출판사에서 펴냈다.쓰기와 읽기로 이어져온 삶에 모처럼의 막간을 맞아 그는 남보기엔 조용히 살아온듯한 자신도 알고보면 「풍운아」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론가 김씨는 넓고 깊고 고르다.우리 평단에서 그보다 더 반짝이거나 엄정하고 격조높은 글,더 폭발적인 한때의 작업은 있었을지모르지만 아무도 그처럼 지속적으로 모든 것을 시도하지 못했다.김윤식이라는 이름은 우리 문학의 거의 모든 부면에 그늘을 드리웠다.인문학의 전분야를 뒤져도 그처럼 왕성한 필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학자로서의 그는 척박한 한국 근대문학사를 개간,거의 얼개를 짰다.염상섭,이상,김동리,이광수,임화,조연현,박영희 등 거대한 근대작가들이 계파를 넘어 그의 손을 탔다.또한 현장비평가로서는 말그대로 블랙홀에 가까운 흡수력과 소화력을 보였다.4.19세대에서 더 나아가 30년 터울을 둔 신세대작가까지 스스로를 6.25세대로 규정하는 그의 촉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작가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으로 그는 사실과 주관을 오갈 수 있는 「전기」라는 양식을 연구에 도입했다.어느누구보다 실증적 자료광이었지만 객관적 글쓰기를 조롱하듯 불투명한 「것」「아닌가」체를 평문에 끌어들이기도 했다.자신말고는 아무도 자기 질문에 답할자가 없다는듯 주·객의 문답체 평론을 시도한 것도 그였다. 이번 선집은 「문학사상사」「소설사」「비평사」「작가론」「시인­작가론」「예술기행­에세이­연보」로 구성돼있다.앞의 세권은 학자,다음 두권은 평론가,마지막권은 독특한 산문가로서의 김씨를 각각 보여준다.방대한 글더미가 갈래별로 체계화돼 김씨의 세계에 접근하기가 어느때보다 쉬워졌다.편집위원은 문학평론가 이동하(서울시립대) 정호웅(홍익대) 한기(안성산업대) 서경석(대구대) 권성우교수(동덕여대).모두 김씨가 키워낸 제자들이다. 지난 4월 29일 하오 신촌의 한 음식점에선 이 편집위원들과 출판사관계자,김씨의 제자들이 꾸린 전집출간기념잔치가 열렸다.김씨는 『나는 아무 좌우명없이 「갈팡질팡」 살아왔다.하지만 삶에 누가 똑바른 답을 알겠는가』라며 소감을 대신했다.김씨의 옆자리를 차지한 작가 박완서씨는 『그는 누구보다 넓은 그물망으로 모든 작가들을 걸러낸다.곁에 앉기도 두려운 분』이라 해 웃음을 자아냈고 이문구씨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열쇠처럼 사람들이 앓고 있는 모든 문제에 그는 답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솔출판사 대표 임우기씨는 『선생은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회의를 그치지 않는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자연인』이라고 김씨의 글 세계를 기렸다.〈손정숙 기자〉
  • 첫 창작집 「쥐와 그의 부하들」간 안광씨(인터뷰)

    ◎“각박한 현싱을 동화나 설화 빌어 풍자” 『현대사회는 날로 고도화되는데 샐러리맨들의 어깨는 처져만 갑니다.비루하고 의기소침한 일상에 도끼를 찍어내리는 글을 써보고 싶었어요』 소설가 안광씨(36)가 등단 10년만에 첫 창작집 「쥐와 그의 부하들」(세계사)을 펴냈다.특이한 제목의 표제작을 포함,흔히 볼 수 없는 우화적 상상력과 힘있는 문장이 돋보이는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안씨의 작품은 대번 쉽게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과작이나 공들여 다듬은듯 탄탄한 문장 때문만은 아니다.부패한 구조에 치이고 첨단문명의 물결에 받히면서도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평균」 생활인의 모습이 너무도 가깝게 그려지기 때문이다.이는 현대사회의 타락에 대한 지은이의 숙고가 얼마나 진정하고 깊은지를 반증한다. 안씨의 주인공 중 사악한 인물은 드물다.아니 오히려 그들은 너무 여리기 때문에 경쟁사회의 생리를 견뎌내지 못한다.「구지가에 대한 명상」의 나는 거래선 접대때문에 불가항력의 오입을 했다가 성병에 걸리고 아내마저 떠나보낸다.미루나무가 하늘에 닿도록 뻗어나는 환상을 꿈꿨던 「자크와 콩나무」의 주인공은 회사에서 잘리고 도박판에 퇴직금을 날린다.「난생설화」의 길수도라는 인물도 세상 모든 불화를 없애기 위해 마술사가 되려는 무구하고 식물적인 영혼의 소유자.그러나 그는 80년 광주의 충격과 무자비한 공권력에 정신이 미쳐 자살한다. 이같은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가지 설화를 끌어들여 풀어나간다.구지가,박혁거세 신화,자크와 콩나무 동화 등이 작품의 모티브로 등장,비소한 일상인의 이야기에 무궁한 상징을 부여한다. 『각박한 현실을 풍요한 설화의 공간과 한데 놓아 비교,더욱 신랄하게 풍자하고 싶었다』는 안씨는 『앞으로도 이런 설화의 현대적 패러디 작업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손정숙 기자〉
  • 5월을 열며…(외언내언)

    거렁뱅이가 구걸을 하면서 『적선 한푼 합쇼!』하는 것이 우리였다.부잣집 소슬대문 앞에서 읊어대는 각설이들의 품바타령에도 「적선할 기회」를 주는 자신들의 「역할(!)」을 생색내는 대목이 많다. 탁발승이 여염을 돌며 시주를 빌 때 부르는 회심곡은 구성지고 아름다워서 산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구천을 떠도는 죽은 이의 넋도 위로하는 듯하다.그 소리를 듣기위해 시주줄 곡식종그래기를 행주치마에 우정 숨겨들고 문설주 뒤에 숨어 가락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는 며느리들도 많았다.그 회심곡에는 사람사는 도리로 선행을 권하는 대목이 가득하다. 집을 남향판에 앉히는 일에도 「3대가 적선을 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해 온 것이 우리네 조상들의 세계관이었다.거렁뱅이에서 탁발승에 이르기까지 『당신에게 선행할 기회를 주기위해 내가 구걸을 한다』는 식으로,적선을 빌려 주는 일을 큰 덕담으로 생각했던 우리.그러나 그런 철학은 다 무너지고 만 것같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만난 남녀가 마침내 살인극으로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죽은 사람은 말이없고 죽인 자가 하는 말은 믿을 수도 없으니 진상을 알 수 없지만 둘이가 다 잘못된 인생이었음은 분명하다.제가 든 보험을 타먹겠다고 다른 사람을 죽여서 불에 태우고 「시체의 용도」를 살리려 했던 일도 있다.그렇게 하고서 「다른 사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은 그 끔찍한 어리석음.자고 새면 죽이고 뺏고 사기치고 폭력한 이야기가 그득그득 신문 사회면을 메운다. 우리가 사는 땅을 몸서리칠 황량함으로 온통 뒤덮는 이런 일을,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무심할 수가 없게 되어간다.이런 정신적 황무지에서 자라는 어린 세대들에게서 윤택한 삶의 질은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가정의 달인 5월.이 달에는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믿었던 옛사람들의 덕성이라도 되살려보는 것이 좋겠다.장미향 그윽한 계절의 여왕 5월을 위해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송정숙 본사고문〉
  • 신부전증 박재삼씨 15번째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

    ◎노년의 허망함 아름다운 시로 노래/「노망」·「아득한 청산…」등 와병전 쓴 작품 모음/후배문인들 병원비 모금·시집 구매 줄이어 〈죽도록 부지런히 쓴다면/시를 쓰는 것은/돈과는 거리가 멀고/그러면서 그 짧은 행간에/짜릿한 공감을 심는 일은/늘 아득하기만 하네//그러나 청산은 아무 일도 안하고/늘 그 자리에 놓여 있건만/햇빛 하나는 잘 받아/그 이마가 빛나는/이 사실이 부럽네〉(「아득한 청산을 보며」전문) 신작시집 「다시 그리움으로」(실천문학사간)에 실린 이 시엔 박재삼시인(63)의 초상이 여러겹으로 어른거린다.커다란 설움의 못에서 올올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길어낸 시인은 안정된 생활보다는 사람과 술을 더 좋아한 영락없는 나그네였다.시만 써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되는 현실에서 그는 시를 평생의 주업으로 택했다.「현대문학」과 「대한일보」등을 떠돌며 잠깐씩 밥벌이도 했지만 돈과는 늘 거리가 먼 삶이었다.지난해 가을 신부전증이 덮쳤을때도 가난은 그를 꼼짝없이 쓰러뜨릴 판이었다. 박시인이 자리보전에 들어간지 어느덧 반년.몇차례의 위독한 혼수를 겪으며 금방이라도 훨훨 세상을 등질것 같았던 시인은 그러나 지금 빠른 회복세로 돌아서 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인 한명을 잃을 수 없다는 동료·후배 문인들이 병원비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에 발벗고 나선것.서벌·노향림시인이 주도,초반 아는 이들끼리의 성의표시로 시작한 모금은 뜻밖에 범문단차원으로 번졌다.두달여간 문인 3백여명이 참여,3천여만원이 모였다.주도한 측에서도 『박시인의 인덕이 이정도인줄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때맞춰 열다섯번째 시집이 되는 「다시 그리움으로」도 나왔다.박시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자 하는 문인들의 예약구매로 박시인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썼던 시편들을 묶은 이 시집은 발간도 되기전 2천여권이 팔려나갔다. 이번 시집엔 늙어가고 잊혀지는 허망한 심사를 토로한 짧고 간결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주제야 어찌 변했건 「서정주이래 가장 아름다운 토종 서정시인」의 정감어린 감성은 작품곳곳에 묻어난다. 〈가만 있거라 보자./자네가 누구시더라./말은 그렇게 해놓고도/한동네에 살면서 그 노인은/언뜻 떠오르지 않아서 답답하던/그때의 내 젊은 혈기였는데./이제는 그것이 어느새/세월이 흘러흘러/내게로 왔다네.//가령/방에서 마루로 나올 때는/무얼 하러 나왔건만/뜰에 환히 라일락꽃이 핀 것에/그만 정신이 팔려/잊고 마는 이 로망을 어쩌지.〉(「로망」전문) 지난 24일 박시인의 묵동집에선 3차 모금기금 전달식이 조촐히 열렸다.최근엔 하루에 한 차례씩 마당산보도 할 정도로 호전됐다는 박시인은 좀 기운없어 보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맑은 눈빛으로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았다.그들은 『별것아닌 일로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씩 웃는 박시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손정숙 기자〉
  • 죽은 열사보다…(외언내언)

    『죽은 열사보다는 살아있는 젊은이가 필요한 때다』­영향력을 지닌 「어른」이 젊은이에게 한 이 말이 우리 귀를 신선하게 때린다.이건 너무 당연한 말이다.그 당연한 말이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치는 종소리처럼 울리는 것이 우리의 어이없음이기도 하다. 토착화 한 돌림병처럼 때만 되면 도지는 「분신자살증」이 우리에게는 있고 그것을 충동이는 혐의를 받는 세력도 아직 있는 것같다.이 4월에만도 3명의 젊은 목숨을 「분신」으로 앗겼다.그 소중한 젊음을 제물로 삼아도 될 사회문제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없다.더구나 지금은 말도 안되게 없다.그런데도 이 봄날 그 꽃다운 목숨의 스러짐을 보아야 한 일은 잘못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일에 몸을 사려온 것이,그들이 따르는 어른들이었다.사려깊은 어버이의 마음이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 말을 이제라도 듣게 된 것이 고맙고 반갑다. 사회문제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든가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가장 소극적이며 지양해야 할 방식이라는 지적은 당연히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논리다. 「살아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빛나는 가치인가를 젊은이들이 잊지 않도록 하는 일에 우리는 아직도 너무 무심하다.생떼같은 젊은이들을 「신입생환영술」로 자빠뜨리고 수학여행에서 희생되게 한다.아직도 「좌경화」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젊은이들의 「자해행위」에 대해 확실하게 『그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도 인색하다. 그러므로 이런 때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 보여준 결의는 성숙하다.무엇보다도 「죽어야만 되는 열사」에의 미망을 여전히 벗지 못한 채 한번 도지면 연쇄적으로 저질러지는 죽음에의 유혹을 단호하게 차단한 것은 어른다운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모자라는 것은 뛰어나게 앞서가는 기술도 아니고 후진성의 보완도 아니다.사려깊음이 모자란다.특히 어른의 깊은 사려가 젊은이에게 본을 보이는 일,「살아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게 하는 일 같은 사려깊음이다.〈송정숙 본사고문〉
  • 소설가 이청준(작가를 찾아:6)

    ◎“문학은 「불쟁의 멋」을 먹고 자라는 괴물”/70∼80년내 검열 피하려다 내 글도 복잡해져/현실이 험악할수록 문학이 꽃피는 덴 유리/신작 「축제」는 치매로 세상 떠난 팔순모모 초상치른 애기/창작의 고통은 천형 같아… 판소리 동화로 풀어쓰며 소일 그가 곁에 있다.그러나 어느 순간 저만큼 가 있다.분명히 함께 얘기하고 있었는 데….그러나 갑자기 야릇한 미소로 입꼬리를 치켜올리는 그.그와의 대화는 역광으로 거멓게 죽은 사진속 얼굴을 알아보는 일처럼 애를 닳게 만들었다.건너야 할 못이 왜그리 깊은지.「병신과 머저리」에서의 형,「이어도」의 천기자,「눈길」의 노인….자기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작가 이청준은 아무리 작은 일에도 허투루속을 내주지 않았다.그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그와의 대화도 꼬인 미로를 찾듯 양파껍질 벗기듯 진행됐다. 아파트1층에 자리잡은 이청준씨의 거실에선 베란다 창을 통해 만개한 4월의 백목련이 내다보였다.나른한 봄의 적막.이게 거추장스러운 듯 그는 슬며시 먼저 말을 꺼냈다.첫화제는 역시 신작 「축제」.소설을 쓰는동안 임권택감독이 영화화를 병행했다 해서 말그대로 화제가 됐던 작품.영화개봉일에 못미칠세라 그는 4월중순까지 꼼짝없이 원고에 매달렸었다. ○「서편제」멤버 재집결 『재작년 연말 우연히 임감독을 봤어요.인젠 유행을 좇아다니기보다 인생을 정리해보는 영화를 해야 겠다더군요.지나가는 말로 그해 11월 팔순노모 초상치른 얘기를 했는 데 이사람이 흥미를 보이더라구요.어머니를 두번 장사지내게 될 것 같아 껄끄러웠지요.한데 임감독이 「죄짓는 일 않겠다」해서…』 제법 알려진 얘기지만 작가의 노모는 말년에 치매를 앓았다.마침 임감독의 노모도 치매로 고생중이었다.작년 나온 작가의 「할미꽃은 봄을 세는 술래란다」는 치매노인의 죽음을 손녀딸의 눈으로 아름답게 그려본 동화.이를 테마로 육상효가 시나리오를 쓴 오정해 주연의 영화가 크랭크인했다.이래저래 「서편제」의 멤버들이 다시 모인 셈. 『영화와 조절을 해야 했기에 작품도 시간순으로 죽 써내려갈 수 없었지요.그래서 편지형식을 택했어요.임감독에게 매번 편지로 자료를주는 거지요.영화진도에 맞춰 보충도 할 수 있고 먼젓번 글에 해석도 달 수 있게끔 말이에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작가에게 어머니는 곱건 밉건 유일한 근원이었다.지독한 가난의 부끄러움,게자루를 짊어진채 찾아든 친척집,젖은 속옷을 몰래 말리는 열적음….작품에 나타나는 이같은 사연들이 모두 어머니 체험의 변형이다.그는 늦게 어머니에게 빚이 많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축제」엔 노모의 중요한 패물로 비녀가 나와요.시집올 때부터 간수해온 이 비녀를 잃어버리곤 어머니는 걷잡을 수 없이 치매에 빠져들지요.한평생 부끄러움을 걸어잠근 이게 없어지면서 삶의 빗장이 풀려 그만 정신이 흩어져버리는 겁니다』 어머니의 물림인 부끄러움은 그에게서 섬세한 자의식으로 개발됐다.이 희귀한 자의식은 그 우울하던 70˘∼˘80년대 그를 당대의 대표작가로 만들었다.당시 그는 고도의 우회를 통해 시대를 꼬집은 지적인 작품들을 썼다.「소문의 벽」「비화밀교」「당신들의 천국」같은. ○실존과 사회 화해 모색 『억압이 심한 사회일수록 우화가 성하는법입니다.검열을 피하려니 내 소설들도 알게 모르게 복잡해졌어요.안된 말이지만 그런 점에서 현실이 험악할수록 문학이 꽃피는 데 유리하다는 말도 수긍이 갑니다.문학이란 불행의 멋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지요』 의사소통의 기초인 말이 사람들사이에 혼선을 일으키는 현실을 비꼰 「언어사회학 서설」연작도 당시의 작품이다.그런가하면 이때 그는 응어리진 한을 소리를 통해 해원하려는 「남도사람」연작도 썼다.이청준의 가장 아름다운 단편에 속하는 「선학동 나그네」「서편제」가 여기 들어있다.두 연작은 마지막 단편에서 하나로 합쳐져 실존과 사회와의 화해를 꾀한다.그렇지만 이는 모두 지난 연대의 작품 아닌가. 인터뷰도중 초인종이 울리고 20대 여성 가스검침원이 찾아들었다.그는 작가집의 계량기를 체크하곤 집주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이…창준이요? 그게 아니라 이청준이라구요』 영화 「서편제」쯤은 봤겠지만 그는 원작자인 작가를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작가 스스로 『이젠 많이 행복해진 것 아니냐』고 하는 시절,사람들이 점점 문학을읽지않는 요즘,작가는 아직도 화해를 모색하는 소설을 쓸까.그렇지 않으면 다른 관심사가 있는지.그는 넌지시 웃었다. 『20∼30대 때는 고전을 읽을 때「이것밖에 못했어? 난 이보다 나은 글 쓸 수 있을거야」했지요.그런데 나이들수록 소설쓰기가 고통스러워지더군요.창작에 따르는 노동이 어떨 때는 천형 같아요.그래서 긴 글을 탈고한 요즘은 한박자 쉴겸 아이들 글을 쓰고 있어요.수궁가·흥보가 같은 판소리 다섯마당을 동화로 풀어보는 거지요.판소리는 들을 수록 예술형태로 보태고 뺄 것이 없는 데 이를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이 좋은 것을 누리게 하려면 어릴 때부터 접촉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완벽주의자답게 성기지만 멈추지 않고 그는 작업계획을 세워간다.그런걸 보니 「고통」을 말하지만 이 대작가가 쉽게 붓을 놓을 성 십지는 않다. ○“판소리는 완벽한 예술” 작가의 집을 나서자 기우는 햇살이 따가웠다.어두운 실내에서 나온 탓인지 흐린 빛에도 금새 눈이 시렸다.이 시린 햇빛을 말한 작가의 작품 「눈길」이 있었다.집안이 망해 다섯칸집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도시에 유학중이던 중학생 아들은 눈치를 채고 귀향한다.하지만 어머니는 아무일도 없는 듯 돌아온 아들을 그집에서 밥먹이고 재운다.새주인에게 사정해 하루 집을 빌린 것.이튿날 새벽 눈길을 걸어 아들을 차부에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다 마을어귀에서 주춤하는 어머니.더이상 돌아갈 집이 없어서가 아니다.햇살이 너무 눈에 시려서,시린 눈에 맑간햇살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라는 것.『이청준이 아니라 그의 고향과 어머니가 썼다』는 어떤 이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적절한지 몰랐다.〈손정숙 기자〉 □연보 ▲1939년 전남 장흥군 대덕면 진목리에서 출생 ▲6세때(44년)막내동생과 맏형,8세때(46년)아버지 등 유년시절 잇단 가족의 죽음을 체험,심층정서에 큰 흔적이 남음 ▲광주서중(54년)광주일고(57년)졸업.서울대 독문과(60년)입학 ▲대학 1학년때 겪은 4·19는 그의 문학에 원형적 틀을 제공.평론가 김현과는 4·19세대의식으로 평생 긴밀한 문학적 연계. ▲4학년때 「사상계」신인문학상에 「퇴원」이 당선돼 등단(65년)졸업과 동시에 사상계 입사(66년)10여년간 근무 ▲대표작 「병신과 머저리」「별을 보여드립니다」「매잡이」「이어도」「당신들의 천국」「서편제」「눈길」「황홀한 실종」「잔인한 도시」「선학동 나그네」「새와 나무」「시간의 문」「비화밀교」「키작은 자유인」「인간인」 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등 수상.
  • “위생복 안입고 근무 간호사 해임은 정당”/대법 원심 확정

    대법원 특별1부(주심 이돈희 대법관)는 24일 경기도 금촌의료원의 전 노조위원장 주동호씨 등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노동행위 구제소송 상고심에서 『간호사가 위생복이 아닌 노동조합에서 지급한 단체복을 입고 근무했다면 해임 사유가 된다』고 판시,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병원 복무규정에 반드시 근무복을 입도록 돼 있는데도 근무시간에 노조의 구호가 적힌 주황색 옷을 입어 환자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등 병원의 정숙과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했으므로 원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밝혔다.〈박홍기 기자〉
  •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생존작가/V S 네이폴 본격 소개

    ◎식민지 지식인 아픔 그린 「흉내」 출간 국내 독자들에겐 나라이름마저 생소한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작가 V S 네이폴의 소개가 본격화될 전망이다.지난 81년 민음사 이데아총서를 통해 「미겔 스트리트」로 첫선을 뵌 네이폴의 장편 「흉내」가 강출판사에서 나왔다.7월엔 또다른 장편 「강굽이」가 출간을 기다린다.출판사측은 그밖의 작품들도 하나하나 펴낼 것이라며 이 생존 현대작가를 비상히 주목하고 있다. 영국령 트리니다드섬에서 인도계 이주민 후손으로 태어난 네이폴에게 식민지체험은 당연히 깊은 이방인의식을 심었던 모양.퇴폐와 무기력으로 점철된 식민지 분위기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들춰낸 초기작 「미겔 스트리트」는 이미 이런 상흔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서인도제국 영국령 이사벨라 섬 출신으로 영국유학까지 한 식민지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린 「흉내」역시 다분히 자전적이다.외가의 드센 입김과 식민지의 질식할듯한 공기,시끄러운 다인종 틈바구니에서 성장,냉소적 열등의식속에 영국유학을 마치고 고향서 로열 패밀리로 대접받으면서도 주인공은 식민지인이라는 결정적 금을 넘을수 없다. 이 작품은 국내 리얼리즘 독자들이 익숙해진 공식대로 한 지식인을 싸움터로 내모는 거시적 각성을 그리고 있지 않다.정반대로 무기력하고 냉소적인 대로 그 혼돈된 내면세계의 흐름을 섬세하게 드러내준다.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채 남이 호명해준 대로 「흉내」만 낼뿐인 식민지 지식인의 일그러진 자아는 작은 기미에 민감하고 연상이 풍부하며 사유깊은 문체속에 서서히 떠오른다.런던과 서인도제도의 문화적 색채를 대비시켜 보여주는 시적인 재능,탄탄하게 연결된 상징적 문장 등은 번역으로도 바래지 않는 작가의 문학적 심도를 알려준다.〈손정숙 기자〉
  • 낮게 울리는 악기 소리(송정숙 칼럼)

    기원전 1세기경,지중해권에 패권을 확대해가던 고대 로마에서 개혁을 외치다 쓰러진 그락시스 형제의 삶은 극적이다.그중 아우인 가이우스 그락시스는 절제의 미덕을 알던 형과는 달리 연설하는 태도가 불을 뿜듯 열정적이었다고 한다.연단 양끝을 오가며 지칠줄 모르고 열변을 토하는 형이었다.그러나 그런 그도 연설의 톤이 너무 높으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언제나 연단 뒤쪽에 해방노예 하나로 하여금 악기를 들고 서있게 하고는 머리좋은 그 노예가 가이우스의 연설 톤이 너무 오른듯싶으면 가지고있던 악기를 낮게 울려 주인을 깨우치게 했다. 2천년도 더 전시대를 살던 옛사람이 그토록 정교한 예지를 지녔었다는 사실이 감동스럽다.자기도 모르게 목청이 높여졌을 순간 귓전을 울리는 낮은 악기소리.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깨움인가. 자고 나면 불리함이 집채같은 파도로 밀려오는 폭풍속에서 여권은 선거를 치렀다.그렇게 투표를 끝내고 개표방송에 막 들어가기 직전 TV들이 쏟아놓던 「여론조사결과」는 충격이었다.당분간 잊히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과학임』을 연신 강조하며 들떠서 외치던 그 내용은 여권 지지층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지내놓고 나니까 「북풍설」같은 것이 공인되는 분위기지만 DMZ사태가 이번 선거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설에는 상당한 검증이 필요하다.무엇보다도 서울의 여당 27석에는 그렇게만 말할수 없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안보에 관한한 「역매카시즘」현상을 보여온 것이 서울 유권자들이다.지역주의,장학로,DMZ가 만든 어떤 바람에서도 이성을 잃지않는 오직 한곳,그것이 서울이다. 그러므로 신한국당이 과반수를 훨씬 넘으리라면서 각당에 인터뷰를 해대고,결과적으로 낙선한 후보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축하!」를 외치던 그 「여론조사 결과」는,듣는 순간 두려움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그것은 선거운동과정을 의심해야 하거나 이제는 우리의 자부심으로 정착된 공명선거를 회의해야 하는 그런것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보다는 선거기간 동안 형성된 여권의 겸허와 성실의 소중한 자세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암담함 같은 것이었다.역사는 아직도 「좋은 여당」을 허락할 의지가 없는 것인가,하는 외경같은 것. 거기 비하면 실제 결과는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한다.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하는 긴장의 느낌이다.역사의 의지가 이토록 정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과반수를 딱 부러지게 허락한게 아니고 노력을 가하면 과반수의 역할이 가능한 절묘한 선.여당을 독려하여 나라를 이끌고 가려는 의지는 분명히 하면서 안일은 용서않는 생선회칼 같은 예리함. 야권에게 주어진 표에도 심도의 독해를 요하는 내재율이 있다.「힘」을 허락했다기보다는 위로를 위한 일회성 보상,해묵어 쇠어버린 환상에 대한 뼈아픈 깨달음의 경고,함량 모자란 노력으로 이득챙기기에 너무 성급한 무뢰에 대한 가격들이 읽혀진다. 그렇다면 개표 벽두에 펼쳐진 방송들의 그 「거창한 실수」의 확성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여당에 대해서는 비판기능이 넘칠만큼 왕성한 방송언론이 무엇에 홀린듯이 집단으로 경솔을 저지른 이 위대한 오보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혹시 이것이 국민의 기본적 향의를 나타내는 원모습은 아닐까.여당에게 거는 국민적 여망은 이만큼이었음을 사전에 살큼 보여준 것은 아닐까.이런 전주없이 투표함이 열렸다면 어땠을 것인가.과반수에는 조금 못미치지지만,엄습해오는 패배감때문에 몸을 낮추고 최소한으로 염원했던 것을,양은 물론 질적으로 크게 상회하는 결과가 나온 것에 여권은 서로 논공행상이나 하며 취하지 않았겠는가. 방송들의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다만 이번 선거결과가 보여준 드라마가 인간의 연출이라기에는 너무 놀랍다는 뜻이다.민심 한표 한표가 모여 만든 우연의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섭리의 개입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신한국」이 그런 외경을 깨닫는 노력없이 『우리당은 15대 선거에서 승리했다』든가 『양김 전쟁에서 완승했다』,『투표율만 높았더라면 더 이길수 있었는데…』라며 목청을 높인다면 모처럼 성숙시켰던 낮은 키의 겸허를 잃을지도 모른다.2천년전 머리좋은 해방노예가 켜던 「낮게 울리는 악기소리」를 듣던 귀가 오늘도 여전히 긴요하다.〈본사 고문〉
  • 중진작가 김원일씨 체험 깔린 장편소설 1,2권 펴내

    ◎아우라지로 가는 길/자폐아 통해 본 세상/짧고 어눌한 문체로 IQ70의 인생유전 묘사/조직폭력배·에이즈·환경문제 등 두루 제기 중진작가 김원일씨(54)가 자폐아를 화자로 내세운 신작장편 「아우라지로 가는 길」1,2(문학과 지성사)를 펴냈다.우리 소설사에 자폐아를 다룬 작품자체가 많지 않은터에 의사표현도 제대로 없으리라고 막연히 알려진 자폐아 내면의 소리로 원고지 2천장분량을 끌어간 점이 단순히 소재의 이채로움을 뛰어넘는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소설에는 실제로 자폐아 아들을 둔 지은이의 체험이 깔려있다.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인 장남을 둔 절망을 삭여 인류애와 인간구원에 대한 승화된 소설세계를 열었듯이 이 작품에서도 개인사를 순결한 문명비판으로 끌어올리는 작가의 힘이 빛난다. 『사실 제 신변사가 알려지는 것을 꺼렸습니다.세상 모든 이들이 다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사는데 혼자만 큰 짐을 진듯 소란을 떠는것 같아서요』 자폐아의 의식을 통해 세상을 비춰보기 때문에 이 작품의 문체는 극히 짧고 어눌하다.비현실적,환상적인 색채마저 풍기는 극단문으로 그려내는 「의식의 흐름」은 고집스레 사실주의를 붙들어온 그간의 작품에 비기면 단연 파격이다. 주인공 시우는 IQ 70에 지나지 않지만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골짜기서 풍요로운 자연에 파묻혔던 청년.그러나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과 정반대로 그에게는 우연이 거듭된 불행이 닥쳐온다.도회에서 온 한 고물장수의 꾐으로 지하공장에 팔려간뒤 온갖 비인간적 노동의 현장을 떠돌다 경기도 구리를 근거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 최상무파 일당에 포섭돼 패싸움끝에 죽을 고비까지 넘기는 것. 『시우는 비록 말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밑바닥을 흘러다니는 어리배기지만 누구보다 맑은 성정을 지녔어요.만약 농경시대에 태어났다면 자연을 닮은 순박한 그가 농사짓고 사는덴 아무 지장 없었을 겁니다.이 순수한 영혼을 자본주의의 가장 검은 찌꺼기인 깡패조직 한복판에 놓아 뚜렷이 대비시켜보고 싶었지요』 소설속엔 이 시우에게 자연의 뭇 생명가진 것들의 이름과 이치를 가르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전교조 해직교사인 그는 풍부한 인문적 교양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장애아에 대한 편견과 맞서는 이상주의자.이 인물에게서 독자는 지은이의 그림자를 읽어볼법도 하다. 『정도차는 있겠으나 소설의 일차적 소재는 어느 경우에도 작가의 체험이겠지요.책속에서 시우가 운동화끈 매는 장면,달걀껍질 까는 것 등이 사실적이라면 이 역시 체험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책은 또다른 이유로 독자를 놀라게 한다. 「노을」「불의 제전」「마당깊은 집」 등을 통해 분단과 이데올로기대립의 상처를 하염없이 물고 늘어졌던 김씨가 반세기를 뛰어넘어 95년의 사회에 돋보기를 갖다댄 것이다.모래시계,조직폭력배,삼풍백화점,지자제선거,에이즈,연변조선족 등이 신문기사처럼 오르내리고 장애인문제,노인문제,물질만능주의 세태,전교조문제,환경문제 등이 두루 제기된다. 또 평생 선굵은 「사나이」들의 세계만을 그려온 지은이가 모처럼 아기자기한 사랑얘기를 꾸리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미욱하지만지순한 시우는 인희엄마,미미,예리,경주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의 공통적 애정의 대상이다. 지은이는 계간 「문학과 사회」에 연재됐던 「불의 제전」 전6권을 연말 펴낸뒤 『치매환자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 일제부터 현재까지의 민족사를 되짚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계획을 밝혔다.〈손정숙 기자〉
  • 굿바이 황영조(외언내언)

    쥐가 난 다리를 이끌고도 마라톤 전코스를 완주하여 29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순위지만 골인지점을 정식으로 통과하는 황영조를 지켜보던 관중은,고통스럽게 들어오는 그에게 1위선수에게보다 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동아마라톤에서의 일이다. 그 실패 뒤에 「뛰는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황영조가 15일 마침내 「마라톤 정신」대로 정정당당하고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했다. 아틀랜타행 티켓이 달린 중요한 경기에서 그는 왜 하필 다리에 경련을 일으켰을까.단순한 불운이었을까.성적이 톱인 학생은 그걸 지켜야 하는 강박관념에 쫓겨 자살하는 일도있다.황영조의 다리에 쥐가 난것은 아무래도 단순한 생리적 현상만은 아니지않을까. 몬주익의 신화를 낳았고 아시안게임에서 그 신화에 확인의 못을 박아준 그는 그밖에도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올림픽 우승의 강박관념을 이기기 어려워서였는지 잠시 방황도 했지만 여전히 그만큼 자신을 유지한 것은 무서운 책임감이었을 것이다.그런 그를 우리는 진작에 놓아줘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육상연맹은 규정대로 3명의 선수와 황선수를 아틀랜타 파견의 예비선수로 유보하고 최종 엔트리는 훈련상태를 보아 결정하는 것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죄인 같은 심정」으로 숨어 지내던 그는 『동료가 어렵게 얻은 자격을 양보하라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그래서 은퇴선언을 결행한 것이다. 언제 또 다리에 쥐가 날지 모를 그를 그만 풀어주고 다음 영웅을 발굴하여 새 피를 수혈하는 일이 국가적으로도 중요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할 만큼 했다.최근에 낳은 「좋은 한국인」으로 그를 이길 사람은 드믈 것이다.그런 영웅을 최후의 진까지 뽑아 추락하는 몰골이 되게 하는 것은 국민적으로 괴로운 일이다.부상하고도 사명감으로 완주하고는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 숨어살았다』는 그가 너무 애처롭다.이제 그에게 『황영조선수! 그동안 참 애썼다.』라고 말하며 위로할 차례다.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한국인이다.〈송정숙 본사고문〉
  • 민족시의 정신사/이동순 지음(화제의 책)

    ◎애국계몽기서 현대까지 민족시 역사 연구 개항에 이은 애국계몽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민족시」의 역사를 총정리한 연구서. 지은이는 민족시를 『민족적 부조리를 누구보다 재빨리 간파해 극복하려는 시대정신과 저항의지를 담은 시』로 정의하고,신채호·백석·김기림·윤동주 등 널리 연구된 문인의 시작품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한다.아울러 묻혀 있던 시인을 적극 끄집어내 소개했다.「개벽」같이 잘 알려진 문예지부터 상해판 「독립신문」,20년대말의 「시대일보」「중외일보」,심지어는 총독부 비밀문서인 「언문신문의 시가」나 무명시인의 동인지인 「무명탄」 등 희귀자료를 샅샅이 훑어 많은 무명시인의 열혈저항시를 발굴했다. 지은이는 이식문화론이나 전통단절론 등 근대 국문학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연구경향은 민족시의 성과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결론짓는다. 창작과비평사 1만원.〈손정숙 기자〉
  • 시인 고은/내 기질 꽃피울 곳은 역시 예술(작가를 찾아:5)

    ◎미학으로서의 역사를 미는 나는 정치적 유미주의자/중학 하교길 한하운 시집 주워 읽고 시인 꿈꿔/시집 「만인보」는 고달픈 민중의 삶 기록/통일이 특정세력의 구호였던 시대 끝나 인간을 하나의 소우주라고들 하지만 이 우주라는 비유가 고은(63) 시인에게서 처럼 걸맞는 대상을 만난 경우도 드물다. 어떤 자리에서든 한번이라도 고은과 마주앉아 봤다면,더욱이 그와 술잔이라도 기울여본 이라면 잘 알 것이다.빨아들일듯 이글대다가도 금세 세상잡사를 초개로 돌려버리듯 표연히 돌아앉는 눈초리와 넘실대는 거대한 에너지의 엄청난 감염성을. 시인으로서 그의 생산력은 초신성 터지듯 폭발적이다.그런가하면 블랙홀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허무의식은 젊은시절 그를 잇단 자살기도로 몰아대기도 했다. 그의 세계에서 세인들이 갈라놓은 선악개념은 빛이 바랜다.인간적 가치를 넘어선 곳에서 우주가 불규칙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듯 그의 내부에서도 늘 낡은 관념에 묶인 자아에 대한 사살이 일어나고 번번이 새 생명이 돋는다.그는 진흙위에서만 화려하게피어나는 연꽃의 미덕을 안다. 어느 때는 천진,제멋대로인 소년이다가 어느 때는 선승의 도통으로 속세를 내려다보는 예술가.민주화의 물결을 앞에서 끌며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한 이상주의자인가 하면 어느 순간 무정하리만치 매서운 현실분석으로 돌변하는 정치사상가. 이 종잡을 수 없는 카오스 자체이며 마르지 않는 글샘 고은이 최근 왠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1년에 열권의 책을 쉽게 쏟아내던 그가 새책을 내놓지 않은지 어느새 반년. 『이제는 숨도 좀 돌리고 정리를 해가며 쓰려고요.하루 1백60장까지 쓰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많아야 50장이면 족합니다.오래 발효시켜 올 하반기쯤 큰 글을 하나 낼 계획입니다.「만인보」10∼12권도 이때쯤 나올겁니다』 젊은날 시인이 불교며 동양사상에서 받은 세례는 현실문제가 다급했던 80년대 내내 잠복해있다가 근작에 일제히 분출됐다.「화엄경」「선」「뭐냐」 등 소설과 선시집으로 오묘하며 허허로운 도의 세계를 빚어냈던 그는 다음 작품에서도 이를 더욱 파들어가보겠다고 한다. 『동양사상은 서구에서도대접받기 시작한지 오랩니다.보르헤스도 불교에 심취했었고 옥타비오 파스도 노장의 영향을 받았다지 않습니까.미국의 신과학주의 같은 것도 그렇고….종속이론이며 제3세계의 많은 저항적 정치이념이 사양길을 걷는 때에 그 정신문화는 오히려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이것은 제1,2세계 문학이 퇴색했으니 동양사상이 다시 떠올라야 한다는 식의 대항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나는 서구의 것까지 껴안아 넘어서는 더 넓은 대안의 문학을 제시해보고 싶은 겁니다』 진보·저항문인의 대표적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고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까지 지냈던 그로서는 90년대 한국 정치상황의 급변을 매번 눈을 씻고 다시 보아왔다. 『이번 총선 때도 보세요.과거 민주화운동을 같이했던 동지와 후배들이 무소속,민주당,국민회의,신한국당까지 뿔뿔이 흩어져 나왔더군요.과거엔 짐작이나 했던 일입니까.몹쓸 선거역병들이 여전히 들끓었지만 나는 크게 보아 발전이고 적어도 발전을 향해 가고 있다고 봐요.몸살을 실컷 치르고 나면 우리 시민사회가 성큼 무르익겠지요』 그는 우스개삼아 『사실 정치라면 내가 누구보다 기질이 있다』고 덧붙인다. 『정치적 아이디어 풍부하지 선동력,토론능력,싸움꾼 근성까지 어느 출마자에 뒤지지 않지요.하지만 이게 직업정치에만 필요한게 아닙니다.민주주의를 꿈꾸고 독재의 모순과 맞섰던 정치적 인간으로서 나는 더욱 떳떳하니까요.본질적으로 내 기질을 꽃피울 곳은 누가 뭐래도 예술이겠고요』 중학 3학년 때 한시간을 넘게 걸어다녔던 하교길에서 우연히 한하운 시집을 주워 읽은뒤 시인을 꿈꾸기 시작한 그에게 예술혼이란 말은 숙명과도 같은 울림을 띤다.그래서인지 『나는 앎의 궁극목표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과학으로서의 역사 보다 미학으로서의 역사를 믿는다.나는 정치적 유미주의자다』라는,다른 사람이 했으면 엉뚱했을 호언조차 자연스럽게 들린다. 지난 83년 결혼과 함께 들어앉은 경기도 안성군 대림동산 장미골 집에서 그는 13년째 살고 있다.이곳 2층에 차려진 거대한 서재에서의 세월은 계절병처럼 찾아든 몇번의 구속을 빼곤 생애 처음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문학과의 밀월을 흠뻑 즐긴 기간이었다.이 시절에 그는 고달픈 민중삶에 대한 거대기록인 시집 「만인보」를 쓰기 시작했고 네권짜리 장시집 「백두산」을 맺었다.나이 쉰둘에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도 얻었다. 눈앞에 펼쳐진 산맥에서 이름을 딴 그 딸 차령이가 어느덧 국민학교 5학년.자라나는 자식을 보며 노시인은 누구보다 간절히 풍요로운 미래를 꿈꾼다.그때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화두는 통일이다. 『통일이 민주화운동 세력들만의 구호이던 시대는 지났지요.이제는 어느 편도 통일이 보편적 염원이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아요.저마다 나름의 통일방안을 내세우는 이도 많지만 통일이 어찌 이뤄질지야 운명만이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를 대비해 민족의 자기동일성을 이뤄나가는 일이에요.저토록 폐쇄적이고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북한을 그대로 두고 통일이 된다 해도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북한에 대한 창조적 비판과 민족애로 굳고 맺힌데를 풀어줘야 합니다.이들에게도 통일을 준비시켜야 해요.이런 저런 이유로 통일은 한 20년쯤 걸리지 않겠습니까.나는 그때까진 살 작정이요』〈손정숙 기자〉 □연보 ▲1933년 전북 옥구군 용둔부락(현 군산시 미룡동)에서 고근식·최점례의 3남중 장남으로 출생.본명 고은태 ▲군산중학교 수석입학(47년) ▲전쟁의 참혹상에 충격받고 두차례 자살시도.이 와중에 한쪽 고막이 녹아버림.혜초승려를 만나 출가(50∼51년).법명 일초(52년) ▲조지훈의 천거로 「현대시」에 시 「폐결핵」발표.「현대문학」에 서정주의 단회추천으로 등단(58년) ▲첫시집 「피안감성」발표(60년) 환속(62년)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74년)「조국의 별」(84년)「네 눈동자」(88년)「만인보」9권(86∼89년) 장시집 「백두산」4권(87∼91년) ▲「이중섭 평전」(73년)「이상평전」(74년)「한용운평전」(75년) ▲기타 소설집·평론집·산문집 등 저서 1백여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74년)국민연합 부위원장(79년) 한국민예총 공동의장(8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90∼91년) ▲83년 함석헌 주례로 이상화(이상화·중대교수)와 결혼 ▲제3회 만해문학상(88년) 등 수상
  • 박경철씨 장편소설 「헤밍웨이 읽을 시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자전거 여행 대학생의 과거찾기/공해·반공해의 상징 담배·자전거를 화두로 반공해의 상징인 자전거와 대표적 공해산품 담배. 94년 「세계의 문학」가을호에 단편 「매향」으로 등단한 박경철씨(32)의 두번째 장편 「헤밍웨이 읽을 시간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민음사·다음주초 발간)는 서로 어울릴것같지 않은 이 둘을 나란히 화두로 세운 소설이다. 주인공 「그」는 여름방학 한달간 자전거 여행에 나선 대학 2학년생.그는 「어린 시절 집으로 향하던 길에 이정표가 돼주었던」 담배가게 표지판을 지도에 옮기겠다며 온양온천 남서쪽 작은 마을들을 떠돈다. 소설은 이 여행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사물들의 사연을 담은 20여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있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차에 적신 마들렌느 과자 한조각이 지난 기억을 불러내듯 여기선 담배가 과거를 끄집어내는 촉매가 된다. 아리랑담배를 피우다 그게 35원에서 1백원으로 인상된 74년 50원짜리 파고다로 품종을 바꾼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사고로 죽은 어머니의 아련한 잔상과 연결돼있다.여행길에 만난듯한 한 노신사는 대학생시절 한·일협상 반대데모에 참가하며 다섯갑의 엽궐련을,6·3사태가 나던 해엔 4백28갑의 새마을을 피웠다며 41년간의 흡연추억을 독백한다.구멍가게 담배가게표지판 곁에서 부딪친 것들은 이밖에도 빗물을 막으려는듯 파라솔을 쓴 전봇대,주인도 죽어버린 녹슨 손수레,적은 용량에 부피만 큰 냉장고 등 하나같이 시간속으로 내쫓긴 존재들이다. 여기서도 보듯 시간 의식은 소설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주인공은 알수없이 반짝이는 지난 시간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지만 찾은 것은 불가항력으로 사라져가는 보잘것없는 추억뿐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씨는 『주인공의 자전거 여행은 일종의 환멸 경험이다.이는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으로 환멸을 대가로 치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보지 못한 길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는 매혹으로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길의 끝이 아니라 열림을 보여준다』고 평했다.〈손정숙 기자〉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백쇄 돌파

    ◎78년 초쇄… 총 발행부수 40만8,3000부 기록/노동현장 현실 고발… 80년대 대학생 필독서/「광장」 99쇄·「사람의 아들」 40쇄… 스테디셀러 자리굳혀 현대 한국소설의 대표적 작품중 하나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문학과 지성사간)이 최근 1백쇄를 기록했다.78년 초쇄를 찍은지 18년만의 일이다.초쇄부터 1백쇄까지의 총발행부수는 40만8천3백부.또한 76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최인훈의 「광장」도 현재 99쇄째여서 오는 5월이면 1백쇄 대열에 합류할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발행부수가 많고 많이 팔리는 것보다 1백쇄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저 「반짝인기」일수도 있지만 쇄를 거듭한다는 것은 오랜 기간을 두고 꾸준히 읽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그만큼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과 문학성을 공인받았다는 말이다. 난장이 아버지를 둔 노동자 가족의 삶을 다룬 「난장이∼」는 유신말기 충격속에 발표돼 단숨에 한국문학의 문제작으로 떠올랐다.노동현장에 대한 현실고발을 그간 볼수 없었던 환상적 형식에 결합시킨 이 책은 「노동문학의 미학」을 제시하며 80년대 내내 대학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과 영화가 잇달아 나왔고 성민엽·정과리 등 중진평론가들은 이 작품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최근 작가 신경숙씨가 장편「외딴방」을 통해 「난장이∼」를 베끼며 문학수업을 했다고 고백했을 만큼 이 책은 후배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난장이∼」는 분단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광장」과 함께 아직도 연간 2만부이상씩 팔리고 있으며 특히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면 판매부수는 부쩍 올라간다고 출판사측은 밝히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는 스테디셀러로는 이밖에 이문열작 「사람의 아들」「젊은날의 초상」(이상 민음사) 이청준작 「당신들의 천국」(문학과 지성사)등이 있다. 지난 79년 나온뒤 1백만부 이상 팔려나간 「사람의 아들」의 경우 초판 통계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집계는 어렵지만 재판,삼판 합쳐 40쇄이므로 반응이 훨씬 뜨거웠을 초판을 보태면 1백쇄는 너끈히 넘어섰으리라는게 출판사측주장.「사람의∼」은 43쇄째인 「젊은날의 초상」과 함께 아직도 매해 4만∼5만부씩 팔려나가고 있다. 문학과 지성사의 김병익 사장은 『「난장이∼」와 「광장」은 우리사회에서 아직 진행형 양대문제인 소외와 분단을 파고들었다.특히 뛰어난 문학성으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을 압도했다』고 그 「인기비결」을 풀이했다. 우리의 스테디셀러는 모두 교양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젊은날의 초상」은 특히 이런 성격을 표면에 드러낸다.「사람의 아들」「광장」「당신들의 천국」 등도 많건 적건 교양소설의 특성을 나눠가지고 있다.교양소설의 공식이 시련과 고난의 통과제의를 거쳐 미성숙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의식세계를 그려내는 것이라 한다면 이 소설들이 오늘의 고전으로 자리잡는 현상은 소설이 아직도 일반독자를 계몽하는 역할을 떠맡고 있는 우리사회를 반영하는 셈이다.〈손정숙 기자〉
  • 유학 외국인(외언내언)

    인생을 살며 느끼는 것은,각급 과정의 동창처럼 가까운 이웃이 없다는 것이다.대만의 이등휘 총통이 미국을 방문할때 그의 미국 모교가 해준 역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예부터 동문수학한 친구와는 육친보다도 가깝게 지내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학이란 우리가 외국으로 가는 것만을 생각해왔다.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유학생이 각계각층에서 은근히 많아졌다.「새마을」이니 개발경제,개혁정치 같은 분야에서 발전도상국들이 배워가고 싶어하는 것이 많이 확대되기도 했다. 특히 과거의 동구권 국가들이나 구소련에 속하던 러시아권 나라들에서는 한국에 유학오는 것을 아주 선호하게 되었다.어느틈에 여기까지 이른 우리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어깨가 으쓱해질 수도 있는 대목이다. 바로 그 대목이 조심스럽다.우리는 본래 외국인에 대해서는 다소 배타적인 성정을 지니고 있다.외국사람에게는 무조건하고 비칭을 붙이기 좋아하고 우리만 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를 쉽게 업신여기는 버릇도 있다.우리의 그런 성정때문에 외국인을 노엽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은 고쳐야 할 일이다.모든 일은 사람에 의해 이뤄진다.서로가 기억의 용량 속에 들어있어야 발굴대상에도 들고,활용도 하고,영향도 입힌다.특히 유학생은 자신의 지적 근간을 이루게 한 나라에 대한 미련과 호감이 뿌리깊게 박이게 마련이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민간외교관이 되어준다. 그런 뜻에서 한국으로 유학오는 유학생의 수를 획기적으로 확대해가기로 한 정책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서기 20˘00년까지 현재의 1천6백명 수준을 1만명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가지 제도도 마련하고 「한국어 능력 검정제도」도 개발할 것이라고 한다.그런 일과 함께 우리나라를 다녀간 유학생들을 잘 관리하는 방안도 여러가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기껏 다녀갔으면서도 호감보다는 유감이 있는 사람들을 만들지 않게 하는 일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송정숙 본사고문〉
  • 아프리카에서/윌리엄 보이드 지음(화제의 책)

    ◎제3세계서의 제국주의 횡포 풍자·역설 제3세계 정치현실에 알게 모르게 개입,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강대국 제국주의를 고발해온 소설은 많다.이 책도 그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기둥줄거리는 영국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가상국가 킨자니아에서 영국 외교관 모건이 현지 선거를 둘러싼 흉계에 휘말리면서 환멸스런 현실에 눈떠가는 과정.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다룬 많은 다른 소설들이 심각한 고발을 앞세우는데 견줘 이 책은 역설과 풍자로 일관한다.이는 독자가 무거운 주제의식의 부담에서 벗어나 쓴웃음을 지어가며 책을 단숨에 읽어내리게 만든다. 부임 3년째 접어든 모건은 본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으며 술과 섹스로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그런 그에게 상관인 고등판무관장은 다가올 총선에서 영국에 우호적인 킨자니아국민당(KNP)이 승리하도록 그 일인자 아데크늘을 조종하라고 지시한다.모건은 마지못해 아데크늘과 접촉하지만 그 부인과 동침한 게 발각돼 거꾸로 이용당할 처지에 놓인다…. 현지인을 미개인처럼 보는 강대국의 굴절된 시선,사리사욕에만 어두운 현지 정치인,이 와중에 희생되는 저항적 지식인 등이 적절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려진다.지호 각권 4천8백원.〈손정숙 기자〉
  • 바하만작 「동시에」·보만작 「사랑과…」 번역서 출간

    ◎남녀관계 본질탐구의 압권/독어권 두 여성작가 소설집 눈길/미묘한 감정흐름 예리하게 묘사 독일어권 현대 여성작가 두사람의 소설집이 나란히 번역돼 나왔다.잉게보르크 바하만의 「동시에」(예문)와 가브리엘레 보만의 「사랑과 결혼의 27가지 이야기」(문예산책)가 그것. 이 작품들에 공통되는 소재는 단연 관계,그중에서도 남녀간 관계의 문제다.그런 만큼 섬세한 심리묘사가 서사를 압도한다.굵은 주제의식 보다 삶의 기미를 포착하는 예리한 눈매가 세계를 인식하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단편집 「삼십세」로 우리나라에서도 은근히 많은 독자를 모은 바하만은 결코 편하게만 읽히지 않는 실존적 문제의식을 지녔으면서도 엉클어진 내면의 욕망과 좌절을 귀신같이 집어내는 섬세함이 특징.26년 오스트리아 생인 그는 평생 시집 두권,작품집 두권,장편 한편,방송극 두편을 쓴 과작 작가다.「동시에」는 죽기 1년전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으로 바하만 문학의 무르익은 경지를 보여준다는 평. 이 책에 실린 다섯 단편엔 모두 진실에서 겉돌며 사람간의 단절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인들이 등장한다.「동시에」의 동시통역사 나드야는 외교관 프랑켈과 함께 여행중이지만 둘은 서로의 자의식에 갇혀 합일의 황홀함을 모른다.「그녀의 행복한 눈」에서 미란다는 장님에 가까운 시력이면서도 남자친구의 주름살을 외면하기 위해 안경을 쓰지 않는다. 이처럼 다른이와의 행복한 만남을 모르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바하만이 주목하는 것은 그러나 소통 불가능성 그 자체라기 보다는 소통의 노력을 그칠수 없는 삶의 본질 쪽인 것 같다.그런점에서 바하만의 주인공들은 실존적이다. 바하만의 작품이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데 반해 보만의 단편은 일상생활에서 부부관계의 단면들을 정확한 관찰로 들춰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32년 독일생인 보만은 우리나라에선 처음 번역되는 작가로 역시 장편과 시,방송극,라디오극 등을 두루 소화하는 팔방미인.하지만 이 책에 실린것과 같은 아주 짧은 단편에서 예리한 관찰력,풍자와 반전으로 이끄는 위트를 특히 인정받고 있다 한다. 「다함께 건배」의 청소년담당 판사 노버트는 너그러운 판결로 유명하지만 어느 날은 장모가 강도를 당했는 데도 피의자에만 관용을 베푸는 바람에 아내와 심리적으로 충돌한다.보만의 작품에는 특히 닳고 닳은 노부부들이 자주 등장,「한밧줄에 묶인 원수」 같을수도 있는 이 관계의 본질을 소름끼치게 들춰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 읽는 작품들은 우리의 생활감각과 다소 동떨어진 감도 없지 않다.하지만 부부간의 미묘한 감정흐름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솜씨는 양의 동서를 떠나 사람관계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손정숙 기자〉
  • 중국 현대문학 아버지 루쉰 산문시집 「들풀」

    ◎“암울하고 메마른 상징들로 가득”/혁명가의 인간적 고뇌 담긴 작품 24편 묶어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루쉰(노신)의 산문시집 「들풀」이 솔출판사의 세계시인선 21번으로 나왔다. 루쉰 하면 무엇보다 20세기 초엽 중국 혁명기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이 먼저 떠오른다.신해혁명,5·4운동 등을 겪은 중국 격동기에 누구보다 진보적 열정으로 행동했던 그의 이력은 작품소개가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입소문으로 떠돌았다.「광인일기」「아Q정전」등 대표적 소설 이외에 90년대 들어 산문·서한·전기 등이 활발히 번역되면서 이같은 진보적 혁명가로서의 인상은 더욱 굳어졌다. 「들풀」은 이처럼 혁명가,사상가로 알려져온 루쉰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수 있게 해주는 작품.24년부터 3년간 쓴 24편의 산문시를 묶은 이 책에는 그의 다른 글에서 접하기 힘든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기는 루쉰이 북경여자사범대학 교장 반대운동을 지지했다가 수배돼 상해로 도망치는 시기와 겹친다.새세계에 대한 높은 열망이 번번이 현실의 걸림돌에 좌절되는 것을 보면서 강고한 혁명가의 마음속에도 고민이 싹트지 않을수 없었을 것. 이같은 지은이의 심사는 「들풀」을 암울하고 메마른 상징들로 가득 채웠다.「들풀」의 세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절망이나 지옥 그 자체가 아니다.〈지옥은 이제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칼들의 숲은 예리한 광채를 잃었고,끓어오르던 기름 가장자리는 일찌감치 잦아들었고…〉(「아름다운 은 지옥」중)〈절망은 허망한것.희망이 그러하듯!〉(「희망」중).대적할 지옥마저 사라지고 절망과 희망사이의 구분조차 지워진 좌표잃은 현실을 시인은 〈그리하여 내 앞에는 결국 진정으로 어두운 밤조차도 없는 것이다〉라고 한탄한다(「희망」). 싸워볼 대상마저 보이지 않는 갑갑한 현실 앞에서 루쉰의 대응은 어떠했을까.그는 죽음과 썩음의 미학으로 대응한다.〈나 자신을 위하여,벗과 원수,사람과 짐승,사랑한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나는 이 들풀의 죽음과 썩음,그것이 빨리 도래하기를 희망한다.그렇지 않으면 나 일찍이 살아 있지 않았던 것이되니 이는 참으로 죽거나 썩는 것보다 훨씬 불행하리라〉(「서시」중). 옮긴이 유세종 교수(한신대 중국어과)는 『「들풀」은 중국현대사와 따로떼어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시대적 배경과 연관된 「들풀」해설서도 따로 준비중』이라고 밝혔다.〈손정숙 기자〉
  • 홧병(외언내언)

    우리에게는 「홧병」이라는 병이 있다.대대로 내려온 문전옥답을 아들이 미두로 날리자 늙은 아버지가 홧병으로 몸져눕기도 했고,징용끌려간 아들의 소식이 끊긴 이후 「가슴에 화가 든」 어머니는 마침내 그 홧병으로 돌아가 시기도 한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다 이긴줄 알았던 선거에서 상대후보의 흑색선전에 걸려 떨어진 국회의원 출마자에게서도,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한 중년가장에게서도 이 병은 나타날 수 있다.어쨌든 우리에게는 「화병」이 낯설지 않은데 이 병이 한국인에게만 있는 특이한,새로운 정신병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고 한다. 명예스러울 것은 없으나 듣기에 신기하기는 하다.그러나 이것이 한국인에게만 있는 정신병성이라는 이론에는 납득이 잘 안된다.화가 쌓이면 가슴에 불을 붓는 것같은 증상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증상이 아닐까? 지역이나 기후에 따른 풍토병은 아닐 것같은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증상이 한이 되게 하는 이행과정은 풍토병처럼 독특한 것이 아닌가 싶다.스트레스를 「적절히 해결하는」대신 안으로 쌓아두다가 승화시키는 처리는 분명 우리의 독특함이다.그런 뜻에서 홧병을 여성적 질환으로 특정짓는 일은 유의의한 것같다.이시영박사의 말처럼 시앗을 보거나 시집살이 같은 갈등이 홧병을 만들므로 이 병은 여성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이긴 하다.그러나 그보다는 이런 증상이,체념의 과정을 거쳐 한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남성에게서는 많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 병이 우리의 정신의학자에 의해 정신질환의 하나로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국제적 관심을 모은 연구결과일 것이다.그래서 병의 이름도 우리 말대로 음역해서 「Hwapyung」이라고 한다니 국력의 신장까지는 아니라도 우리 정신의학자들의 노력이 결실된 결과로 생각된다.다만 우리의 「화병」은 「홧병」이라야 실감이 나는데 「화병」이라고 하니까 별로 그 병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송정숙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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