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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 봉정식

    안휘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는 28일 오후 6시 서울 역삼동 GS타워 아모리스홀에서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 봉정식을 갖는다.(02)880-6210.
  • [책꽂이]

    ●햇빛 찬란한 나날(조선희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오랜 기자 생활을 접고 6년 전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저자가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에세이집에 이어 내놓은 첫번째 소설집. 묵직한 주제의식을 날렵한 문체로 풀어낸 단편 11편이 실렸다.9800원. ●문학의 목소리(김치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문학과지성’을 창단한 이른바 ‘4K’의 멤버로 지난달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저자의 평론집.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학의 흐름을 꼼꼼하게 진단했다.1만 5000원.●지옥처럼 낯선(하종오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2004년 출간한 ‘반대쪽 천국’과 짝을 이루는 시집으로 지옥처럼 낯설지만 때론 천국처럼 익숙한 우리네 삶을 담담한 목소리로 진솔하게 그려냈다. 자본주의적인 삶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마케팅 에피소드’연작이 눈길을 끈다.6000원.●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정호승 지음, 비채 펴냄)저자가 시작노트에 적어놓은 67개의 보약같은 말들을 책으로 묶었다.‘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신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신다’ 등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난 짧은 글들을 통해 삶의 희망을 전한다.1만 500원.●아쿠아마린(캐럴 앤셔 지음, 양은주 옮김, 민음in펴냄)올림픽에 출전한 동성 라이벌선수 마티에게 사랑을 느낀 17세 소녀 제시.20년 후 순종적인 가정주부,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가난한 이혼녀라는 세가지 길을 걷는 제시의 모습을 통해 동성애 문제와 페미니즘을 동시에 보여준다.1만원.●도선비기(박혜강 지음, 이룸 펴냄)의상, 원효와 더불어 3대 고승으로 꼽히는 선승이자 풍수지리학의 대가인 도선국사의 일대기. 저자는 5년 전 운주사 천불천탑의 전설과 신비를 그린 대하소설 ‘운주’를 펴낸 바 있다.9000원.
  • “과학도들 윤리의식 꼭 지켜줬으면…”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박사인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정창현(65) 교수가 35년 동안 잡았던 교편을 놓고 정년퇴임한다. 1941년생인 정 교수는 59년 정권의 근대화정책으로 신설된 원자력공학과 1회 입학생으로 서울대에 들어왔다. 스물아홉살이던 70년에는 미국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귀국했다. 정 교수는 이듬해 서른이라는 나이에 서울대 조교수가 돼 ‘최연소 교수’ 기록을 세웠다.2년 뒤에는 교무부처장직을 맡아 최연소 보직교수라는 기록도 남겼다. MIT 재학시 박사학위 시험에 합격한 뒤 논문을 5달만에 제출하자 학교측에서 ‘논문은 훌륭하지만 학위를 주기엔 너무 빠르다’며 1년 남짓 시간을 더 끌었고 1년 뒤 그 논문 그대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의 ‘천재성’을 가늠하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이 논문은 미국 물리학회지에 실려 아직도 인용되고 있다.●초등학교때 부모 잃고 소년가장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정 교수에게도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경남 진주에서 검사의 아들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정 교수는 초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53년 1월 부산 다대포 앞 창경호 침몰사건으로 부모님을 잃고 세 동생을 거느린 소년가장 신세가 됐다.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 경남고에 진학한 그는 공책 한 권을 사기 힘든 형편에도 100점 만점에 평균 99.8점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 교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갈 돈도 없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는 생각에 가출을 하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와 잘 사는 친구 집에 얹혀 지내던 그는 “서울대만 들어가면 한 학기 입학금을 대주겠다.”는 친구 어머니의 제안에 다시 책을 잡았다. 눈썹까지 밀면서 3달 동안 공부에만 집중한 결과 정 교수는 결국 서울대에 입학했고, 총학생회장까지 맡는 등 의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괴짜로 소문난 정 교수의 자유분방한 언행은 교수가 된 뒤에도 여러 해프닝을 만들어냈다.●자유분방한 `괴짜´… 숱한 해프닝교무부처장을 맡았던 당시 문교부 장관이 주재하는 식사 자리에서 “저 장관 별명이 짱구다. 머리만 크고 든 게 없다.”고 호탕하게 웃어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지인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고 있는 일화다. 고등학교 시절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에 반해 공학도가 되었다는 정 교수는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후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어려운 시절 날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면서 “후배들이 과학도로서의 윤리의식을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퇴임식은 오는 10일 오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재경부 퇴임 공무원 장일석씨 저서 수익금 위안부 할머니에

    지난해 말 재정경제부에서 정규직으로는 처음 정년퇴임을 한 장일석(61) 전 금융정보분석원(FIU) 행정실장이 27일 저서 ‘제2의 진주만 침공’ 판매수익금 1000여만원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전달했다. 장 전 실장은 지난해 정년퇴임을 앞두고 일본의 우경화 문제를 정리해 이 책을 발간하면서 “일본은 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보수·우경화 세력의 결집을 통해 세계 패권의 야욕을 드러낼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책 판매수익 전액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후원금으로 내놓은 것도 이같은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말했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특강·학술 계속… 필요한 곳 도와야죠”

    “앞으로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도와야지요.” 주미 한국대사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한승주(65)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27일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28일 오후 4시 교내 정경관에서 정년퇴임식을 갖는다. 뉴욕시립대 8년, 고려대 27년 등 모두 35년간 후학 양성에 힘써 온 그는 퇴임 이후 고려대 명예교수로 남아 특강 및 학술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사회 각 분야에서 한 몫씩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볼 때가 가장 뿌듯합니다. 앞으로 직함이나 소속을 갖기보다는 어디서든 저의 힘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자문역할을 하겠습니다.” 그는 “주된 활동영역은 아니었지만 2002년까지 유네스코(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 석좌교수를 지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동, 교육, 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지난해 12월8일 고별강의를 떠올리면서 “학생과 친지를 초청했는데,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이 `스승의 은혜’를 불러준 것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감격이었다.”고 말했다.고별강의에는 한 교수의 `외교란 무엇인가’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 350여명 외에 어윤대 고려대 총장과 이홍구 전 총리를 비롯한 각계인사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정년퇴임 교원 2381명 포상

    정부는 2월 말로 정년퇴임하는 2381명의 교원에 대해 훈·포장 및 표창을 수여했다. 선우중호 전 명지대 총장, 이경준 선문대 총장, 성기호 전 성결대 총장, 안병만 한국외대 총장 등 4명이 청조근정훈장을, 윤웅섭 교육인적자원부 학교정책실장 등 894명이 황조근정훈장을 각각 받았다. 강영지 서울 신도초등학교 교사 등 528명이 홍조근정훈장을, 신상웅 서울 면목고등학교 교사 등 398명이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2006년 2월말 정년퇴직교원 정부포상자 명단 바로가기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 34년 모은 곤충표본 35만점 기증

    생물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경상대 박중석(65) 교수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채집한 곤충표본 35만점을 환경부에 기증한다. 기증된 표본은 인천에 조성되는 종합환경연구단지 내 국립생물자원관에 전시·보관될 예정이다. 기증하는 표본 중에는 멸종위기 동식물인 꼬마잠자리를 비롯, 왕은점표범나비, 대왕박각시, 붉은점모시나비, 왕쇠똥구리, 기생벌 등 희귀한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굳이 경제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환경부는 22일 박 교수가 기증한 표본이 시대별·지역별로 망라돼 있어 국내에 자생하는 생물종의 서식분포를 확인할 수 있고, 유전자를 채취, 분석할 경우 학문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서울 중동고를 거쳐 고려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1973년 경상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후 34년간 외길을 걷다 이달말 정년퇴임한다. 박 교수는 “곤충을 채집하려고 산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으며, 발을 헛디뎌 수없이 구르기도 했다.”며 채집과정의 어려움을 털어놨다.채집한 곤충을 표본으로 만드는 과정도 간단찮다. 우선 채집한 곤충을 알코올로 세척하고, 여과지로 수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붓으로 형태를 잡은 후 현미경으로 보면서 원래의 모양대로 다듬는 힘든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는 이번에 기증하는 표본 외에도 75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완벽한 보관시설만 갖추면 나머지도 기증할 생각이라고 밝혔다.진주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서울대 교수 작가 유안진·이인성씨 명퇴신청

    서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소설가 이인성(53)씨와 생활과학대 교수인 수필가 유안진(65)씨가 최근 대학측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박용현 전 서울대병원장도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1980년 ‘문학과 지성’봄호에 중편 ‘낯선 시간 속으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 교수는 전통적 소설문법에서 벗어나 분열적 자의식을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세계로 유명한 작가. 서울대 불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7년간 한국외대에서 강의한 뒤 17년 전부터 모교 강단에 서왔다. 이 교수는 1일 “젊었을 때는 두 가지 일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몇년 전부터 글쓰기와 강의를 병행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면서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 외에 특별한 계획은 없다. 이제부터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널리 알려진 유 교수도 정년퇴임 1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유 교수는 40년간 수필, 시,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필명을 날렸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유 교수는 1981년 서울대에 부임, 소비자아동학과에서 발달심리학과 아동양육론 등을 강의해왔다. 한편 서울대는 이달 28일자로 교수 27명이 정년퇴직한다고 밝혔다. 정년퇴직 교수 중에는 서울대 유일의 ‘학사 출신’ 교수이며 한국 디자인계의 거목인 양승춘(미대 디자인학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며 한국 미학계의 거두 오병남(인문대 미학과) 교수 등이 포함돼 있다.◇인문대 =안휘준(고고미술사학과), 문양수(언어학과), 황윤석(독어독문학과), 오병남(미학과)◇사회과학대=김인(지리학과), 정기준(경제학부), 최명(정치학과), 정영일(경제학부)◇자연과학대 =김종찬(물리학부), 양철학(화학부)◇공과대=김효철(조선해양공학과), 배광준(조선해양공학과), 정창현(원자핵공학과)◇농업생명과학대=부경생(농생명공학부), 채영암(식물생산과학부)◇미술대=양승춘(디자인학부)◇법과대=김유성(법학부)◇사범대=이기석(지리교육과), 김신일(교육학과), 조창섭(독어교육과), 임번장(체육교육과)◇수의과대=남치주(수의학과)◇의과대=홍강의(의학과)◇보건대학원=백남원(환경보건학과), 정문호(환경보건학과), 최상철(환경계획학과)◇치의학대학원=최선진(치의학과)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황우석 석좌교수직 박탈

    황우석 석좌교수직 박탈

    서울대가 20일 황우석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 조작에 가담한 공동저자 전원에 대해 중징계 의결을 요구했다. 서울대는 이날자로 황 교수의 석좌교수직도 박탈했다. 정운찬 총장은 이날 2004년과 2005년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린 수의대 황우석·이병천·강성근 교수와 농생대 이창규 교수, 의대 문신용·안규리·백선하 교수 등 7명에 대한 징계의결 요구서를 징계위원회에 전달했다. 정 총장은 7명 전원에 대해 중징계 의견을 내고, 황 교수의 석좌교수직도 해제했다. 학칙상 총장에게는 석좌교수 임용기간 중이라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기간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황 교수는 2004년 9월 포스코 석좌교수로 임명돼 정년퇴임 때까지 15억원의 지원을 약속받았었다. 서울대의 징계는 ‘자체조사나 외부 수사기관의 조사를 통해 소속 교원의 비위사실 적발→총장 명의로 징계의결 요구→부총장 주재 징계위 소집→60일 이내에 징계 의결→징계요구권자인 총장에게 다시 통보’ 순으로 이뤄진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꽃동네에 핀 ‘감동의 仁術’

    꽃동네에 핀 ‘감동의 仁術’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 예순여섯 나이에 소외된 환자들을 찾아 인술(仁術)로 펼친 소박한 ‘인생 2막´. 최일영(한양대 명예교수) 박사의 실천하는 사랑이 주는 잔잔한 감동이다. ●간호사없이 환자 고름짜는 일까지 장애인, 노숙자, 독거노인, 버려진 아이 등 사회에서 소외된 2000여명이 함께 모여 사는 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 최 박사는 지난해 9월5일 40년간의 한양대병원 생활(혈액종양내과)을 마감하고 이곳에 있는 인곡자애병원으로 내려왔다. 정년퇴임을 한 지 꼭 닷새 만에 짐을 쌌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소외된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 친구들은 “늘그막에 무슨 고생을 하려느냐.”며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최 박사에게 이런 말들은 무의미했다. 유명 대형병원의 스카우트 제의도 단 한마디로 거부한 그였다. 꽃동네 사람들은 고단했던 인생역정만큼이나 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입원환자만 120여명. 병원은 늘 환자들로 북적인다.13일 오후 회진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병상이 부족해 바닥까지 환자가 들어차 있어 신발을 신고 병실에 들어설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와 한 환자를 입원시켰는데 정작 병실에 그 환자가 안 보이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침대 사이 바닥에 누워 있더군요. 이곳 현실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지요.” ●60대 중반에 맞은 주말부부 생활 그의 숙소는 인근 마을에 마련된 20평 남짓한 허름한 아파트.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진료. 주말에야 경기도 분당의 집으로 갈 수 있다. 유명 대학병원의 내과과장·주임교수라는 직함은 그저 과거 일이다. 회진 때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잡무를 챙기던 후배 의사들도, 하늘 같이 모시던 제자들도 없다. “의료환경이 대학병원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일손이 달리다 보니 고름을 짜내고 환부에 찬 물을 빼내는 일, 거즈를 가는 일 등 수련의들이 해온 일까지 모두 제가 하지요.40년 전 초보 때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부터 고혈압, 당뇨, 결핵까지 다양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하얗게 먼지 않은 의학서적을 다시 뒤적거려야 한다. 혈액종양 분야의 권위자가 초보 레지던트 생활을 하는 셈이다. ●노트에 노인환자·장애인 애환 가득 “이곳 환자들은 불평이나 불만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무료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미안함, 또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호강하는 것이란 생각이 강하지요. 그게 저를 더 마음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자기표현이 부족한 환자는 의사를 힘들게 하는 법이다. 환자가 어디가 안 좋은지 아는 것이 진료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는 4개월간 이곳 생활을 하면서 병명과 진료기록은 물론 환자별 특징까지 노트에 빼곡하게 정리했다. 일기처럼 써내려가는 노트에는 환자들로부터 들은 절절한 사연들이 가득하다. 소외된 이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멀쩡한 가장들이 노숙자로 내몰리던 1999년. 그는 서울 문래동의 4층 건물을 임대해 노숙인이 살 수 있는 쉼터 ‘자유의 집’를 마련하고 밤마다 그들의 건강을 돌봤다. 그러기를 5년여. 늙은 스승의 왕진에 서서히 제자들이 동참했다. 비슷한 때 시작한 몽골 의료선교활동도 그가 매년 빼놓지 않는 여름휴가 일정이다. 최 박사의 아들도 내과 전문의다.“아들이 아비처럼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작은 희망입니다. 부모로서 묵묵하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느끼겠지요.” “사람들에게 뭔가 줄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합니다.”그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60대의 인생예찬이다. 글 음성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8월 퇴임 앞둔 신석기연구 1세대 임효재 교수

    8월 퇴임 앞둔 신석기연구 1세대 임효재 교수

    고고학을 흔히 ‘고독한 학문’이라고 한다. 한번 시작하면 두더지처럼 평생 어두운 땅속을 파헤치며 살아야 하는 고고학자들. 밝은 세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아직도 조금은 별난 존재로 비춰진다. 그런데 하물며 고고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본격 도입된 60년대 초엔 어땠을까? 하지만 ‘무(無)인식’이란 척박한 환경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은 한민족의 원류를 찾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과 일본이 서로 ‘우리가 한반도 인류의 원류’라고 주장하던 때 이를 뒤집는 역할을 해낸 게 바로 우리 1세대 고고학자들이다. 196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창설과 함께 입학한 이들 고고학자 1세대들이 올 2월과 8월 줄줄이 정년퇴임한다. 당시 입학생은 총 10명. 이들중 임효재 서울대 교수를 비롯, 같은 대학의 안휘준 교수, 김병모 한양대 교수, 정영화 영남대 교수, 손병헌 성균관대 교수, 김병모 한양대 교수, 권이구(작고) 전 영남대 교수 등 6명이 학계에 남았다. 특히 임효재(65) 교수는 불모지대였던 신석기 문화를 전공, 그동안 굵직한 발굴 성과들을 통해 한반도 신석기 역사를 새로 써온 산 증인. 정년 퇴임을 앞두고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정리하느라 바쁜 임 교수를 만났다. 그의 고고학 입문 동기가 별나다.“더 이상 지상여행을 할 데가 없으면 무한한 지하세계를 여행해 보라.” 고3때인 1960년, 여행에 미쳐 전국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던 그에게 담임 선생님이 해줬던 이 말 한마디가 고고학 인생 출발점이 됐다. 그가 학부 졸업 후 완전히 불모지대였던 신석기 분야를 주전공으로 택한 이후 임 교수의 발굴사가 곧 한국 신석기 문화사가 된다.90년대 들어 이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가 하나둘 나오기 전까지 한반도 신석기 분야는 사실상 임효재의 원맨쇼 무대였다. 관심 갖는 이가 적은 만큼 고독했지만, 하나하나 발굴성과를 이룰 때마다 그 보람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특히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 발굴, 경기도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은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다. ●한반도 기원 2000년 끌어올려 당시 발굴 얘기만 꺼내면 지금도 임 교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특히 1972년부터 6년간 진행됐던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은 극적이다. 당시 그는 3년간의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있었는데, 미국에서 배운 ‘워터 플로팅(Water floating)’이란 신기술을 처음 이 발굴에 적용했다. 유적지의 부엌이나 화덕 터에서 흙을 채취해 물에 띄운 뒤 탄화된 곡물의 흔적을 찾아내는 기법이다. 여섯가마의 흙을 채취해 실험실로 옮겨와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곡물 흔적은 보이지 않아 거의 포기할 지경에 이를 즈음, 작업 5개월 만에 좁쌀 두 알이 나왔다. 이어 쌀과 다른 곡식 알갱이의 탄화물이 검출됐다. 임 교수는 “일생 일대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회고한다. 임 교수는 이 탄화물 샘플을 분류해 일본과 미국 등 몇몇 세계적 연구소에 보내 검사를 의뢰했고, 기원전 10세기의 것이라는 게 세계적으로 인증됐다. 이는 곧 ‘일본에서 쌀문화가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그때까지의 정설을 뒤집는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기원전 4세기 쌀문화의 흔적을 찾아낸 상태였고, 한국은 AD 1세기 김해패총에서 나온 한 움큼의 쌀이 쌀문화 흔적의 전부였다. 흔암리발굴 이후 일본의 한반도 쌀 전래설을 담은 일본 교과서도 모두 수정됐다. 10년이 넘게 이루어진 양양 오산리 유적에 대해 임 교수는 우리 고고학연구의 ‘금자탑’이라고 평가한다. 이 발굴은 납작밑 빗살무늬토기와 뾰족밑 빗살무늬토기의 지층을 구분 발굴, 한반도 인류의 기원을 2000년 정도 끌어 올린 데다, 만주권이 중국이 아닌 우리 민족과 같은 문화권이란 사실을 입증했다. 이 발굴 성과가 발표되자 미국의 한 작가가 이를 주제로 소설까지 썼을 정도로 그 반향은 컸다. ●천문고고학등 복합학문 활성화 필요 임 교수는 아직 우리의 선사시대 연구는 너무 부족함을 인정한다. 연구 역사가 너무 짧은 데다, 지금도 연구 인프라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점은 과학적 연구기법이다. 현재 미국 등에선 비행기가 레이저를 쏘아 유적지 지하를 이 잡듯 뒤져 땅속 지도를 만드는 시대다. 또 첨단 자력계로 땅을 파지 않고도 땅속 10m까지 훤히 들여다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십년 전에 개발된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법 정도만 사용하는 수준. 임 교수는 장비뿐만 아니라 이같은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 육성에 대학이나 정부 모두 관심이 없다고 꼬집는다. 또 하나의 과제는 인접 학문과의 접목 문제다. 연구와 발굴, 자료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농경 관련 학문이나, 천문학 등과의 접목이 필요한데, 서로의 영역만 고집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선 ‘천문고고학’ 등 다양한 복합학문이 활성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임 교수는 얼마 전 그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한국 신석기문화의 전개’란 책을 낸 데 이어, 발굴 현장 및 애환 등을 담은 책 ‘두더지 고고학’(집문당)도 곧 발간할 예정. 퇴임 후 그는 일반인과 고고학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힘을 쏟겠다고 한다. 대중들의 고고학에 대한 애정이 곧 고고학자들의 힘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대중과 친숙한 고고학자로 나설지 자못 궁금해진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1년 서울출생 ▲196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대학원 ▲1985년 일본 규슈대 대학원 ▲1988-91년 서울대 박물관장 ▲1988-91년 한국국립대학교 박물관협의회 회장 ▲1993-94년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방문교수 ▲1996-97년 한국고고학회 회장 ▲1969년- 서울대 고고학 교수 ▲2006년8월 서울대 정년퇴임 예정
  • [데스크시각] 서울시에 부는 선거열풍/강동형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연말 모임에서 ‘줄기세포’를 모르면 자리에 끼지 못할 정도로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가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청에서는 예외다. 선거 열풍이 ‘황우석 진실’을 압도하고 있다. “○○○당 서울시장 후보는 누가 유력할까.” “○○○당에서는 누가 서울시장 후보가 될까.” “차기 서울시장은”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화제에 올리는 내용들이다. 정답이 될 수도 없는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고, 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때론 반론을 제기,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서울시 공직자들은 눈앞에 다가온 지방선거는 물론 대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선거에 관한 한 가히 열풍 수준이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탓이다. 서울시의 선거 열풍은 구청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모 구청의 부구청장을 만났다. 그는 “내년 선거에서 누가 서울시장으로 유력한가, 대통령 후보는 누가 될 것 같으냐.”고 말문을 열었다. 나아가 본청 공무원 가운데 ‘누가 지방선거에서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로 뛰고 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회도 피력했다. 서울시 고위간부 2∼3명, 부구청장 2∼3명이 지방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설이 공공연하게 나돈다.1∼2명의 중간간부도 단체장 출마를 검토하고 있어 선거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요즘 서울시에는 크게 두 부류의 공무원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한 부류는 기회가 되면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질 ‘공직자’다. 앞에서 출마예상자로 거론된 공무원군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내년 지방선거 이후 자리 보장이 힘들 것이라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또 한 부류는 정년퇴임을 하겠다는 공직자들이다. 이들은 시청 근무를 고사하고, 승진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상당수가 구청을 피난처로 삼으려 한다. 시청 근무는 정년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구청장으로 나가기 위해 직급을 낮춰 자리를 옮긴 공무원도 있다. 한 인사는 “고위간부들이 부구청장을 선호해 구청으로 가고 싶어도 자리가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공직자들이 민선 단체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치단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단체장 선거를 준비하는 공직자 가운데 상당수가 공직생활을 더 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단체장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야당 단체장이 맡고 있는 서울시정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에 먼저 불만을 표시한다. 공무원으로서 일만 했는 데도 중앙정부나 여당에서 바로 봐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유력 대권후보인 이명박 시장의 일거수일투족은 대권 행보로 받아들여진다. 자의든 타의든 이 시장과 지근거리에 있는 고위 공직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는 공직사회까지도 우군이 아니면 적으로 분류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최근 더 심해졌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단체장과 공무원 스스로의 책임이 더 크다. 광역자치단체나 지방자치단체장은 직원들을 줄 세우려는 유혹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 공무원들은 공직자의 신분을 망각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요즘 시청에서 “모당 후보가 차기 시장이 돼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선거결과에 초연할 공무원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공직자로서 ‘○○○사람’이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특히 경계해야 한다. 서울시에서 일만 열심히 하고, 정치와도 상관이 없는 한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지난해 구청 국장(서기관)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부이사관이 되지 못하고 공직을 끝내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보였다. 결국 그는 공로연수를 가지 않고, 부이사관 승진과 동시에 공직을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많은 동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의 좌절에는 정치권과 동료들이 붙인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직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강동형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yunbin@seoul.co.kr
  • ‘비행소녀’ 지구 524바퀴 돌고 착륙

    국내 항공업계 사상 첫 임원급 여성 승무원인 대한항공 이택금(56) 상무가 지난 22일부터 닷새간의 인천∼로스앤젤레스 왕복비행을 끝으로 27일 유니폼을 벗었다. 이 상무는 이날까지 2만 6214시간의 비행기록을 세웠다. 이는 3년을 꼬박 공중에 떠서 보낸 것으로, 전체 객실 승무원 가운데 역대 3위다. 특히 비행시간 50시간이 지구 1바퀴(4만 7㎞)를 도는 것임을 감안하면 지구를 524바퀴 돈 셈이 된다. 이 상무는 마지막 비행에 대해 “23세에 입사해 지금까지 33년간 한 우물을 팠다. 좋은 직업을 택한 데 대한 자부심으로 오늘까지 지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한 뒤 1972년 우연히 신문공고를 보고 응시해 공채 14기로 입사한 이 상무는 ‘여성 최초’ 기록만 5개를 가진 회사 내 신기록 보유자다.79년 항공업계 첫 여성 과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89년 여성 첫 수석사무장,92년 여성 첫 부장,2001년 여성 첫 이사로 진급했고 이번에 여성 임원 첫 정년퇴임의 주인공이 됐다. 이 상무는 오는 31일 정년퇴임을 하면 33년간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묶어 ‘여자로 태어나 대기업에서 별따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예정이다. 아직 독신인 이 상무는 “결코 독신주의는 아니며 지금도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할 생각이 있다. 일을 위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라며 웃었다. 그는 승객들의 기내 문화에 대해 “예전에는 ‘이봐요’‘야’라고 부르는 승객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매너가 매우 세련되어졌다.”고 말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는 스튜어디스와 친해지는 것이 중요하지요. 아무래도 매너있고 점잖은 승객에게 좀 더 주의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연합뉴스
  • “입원한 이한열 마지막 모습 어른…”

    “병원 홍보업무로 일관한 지난 21년을 돌이키면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에게 의료를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점에선 위로가 됩니다.” 우리나라 병원 홍보의 산증인 격인 박두혁(60) 연세의료원 홍보부장이 26일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정년퇴임식과 함께 그간 홍보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담을 엮은 ‘21세기 병원홍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법정 정년은 내년 2월 말이지만 퇴임을 앞두고 위로휴가가 예정돼 근무는 올해로 끝난다. 의학전문지 기자로 출발해 적십자혈액원 홍보과장을 거쳐 1984년 4월 연세의료원에서 처음 병원 홍보업무를 맡은 박 부장은 이날 퇴임식에서 “홀연히 떠날까도 생각했으나 그간 음양으로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 비례(非禮)를 범하는 것 같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87년 6월항쟁 때는 최루탄에 맞아 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그 사진이 이 열사의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역사의 한 장면일거라는 생각에 찍어뒀던 것인데….” 그는 “의료시장 개방을 앞두고 말들이 많으나 유일한 해법은 글로벌 경쟁력”이라며 “우리 의술이 미국의 엠디앤더슨병원보다 낫고, 메이요병원보다 심장을 더 잘 치료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느냐?”고 반문한 그는 어둠이 내린 병원을 떠났다.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후배 경찰 쉼터로” 4억원 땅 선뜻

    오는 27일 명예퇴직하는 현직 경찰서장이 후배 경찰관들의 복지를 위해 시가 4억원의 자기 땅을 경찰에 기증했다. 강원 원주경찰서장 권혁표(60) 총경은 22일 후배 경찰관들의 복지를 위해 써 달라며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일대 자신의 땅 1만 273평을 경찰청에 기증했다. 이 땅은 중앙고속도로 원주 신림 IC에서 5분 거리에 있다. 권 서장은 “고된 업무에 비해 경찰 공무원을 위한 복지시설은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해왔다.”면서 “경찰 제복을 벗기 전 후배들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공서 등에 기부된 땅은 원칙적으로 국가소유가 되지만 실제 관리는 경찰청 관재계에서 하게 된다. 경찰청은 권 총경이 기부한 땅을 경찰수련원 등 복지시설을 만드는데 쓰겠다는 계획이다. 권 서장은 “기증한 땅에 경찰 휴양 공간이 건립되면 강원도 경찰은 물론 경북, 충남, 경기지역 등의 후배 경찰관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평생을 바친 조직을 위해 거액의 땅을 기부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부인과 자녀들도 흔쾌히 허락했다.부인 윤정옥(56)씨는 “31년간의 경찰생활을 명예롭게 마치는 순간까지 후배들을 생각하는 남편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원주 출신인 권 서장은 경찰 간부후보생 23기로 경찰에 입문했다.1998년 총경 승진 이후 경찰청 경비 2과장과 춘천경찰서장 등을 역임했고, 대통령 표창 2회 등 30여 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권 서장은 내년 12월 말로 정년퇴임이 예정돼 있었지만 자신이 경찰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고향 원주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며 지난 1일 명예퇴직을 신청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대법관 인사 보수·진보 편가르기”

    30일 정년퇴임한 배기원(65) 대법관이 최근 대법관 인사에 대해 쓴소리를 남겼다.배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대법원의 구성이 종래의 서열인사에서 벗어나 다양화돼야 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서도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이 대법원을 진보적·개혁적 인사로만 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주장했다.그는 이어 “이데올로기 대결시대가 종언을 고한 마당에 보수냐 진보냐의 잣대로 법관들을 편가르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면서 “단편적인 몇 개 판결만으로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법철학을 재단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행정도시 ‘사실상 합헌’] 소수의견

    [행정도시 ‘사실상 합헌’] 소수의견

    참여정부 들어 임명된 헌법재판관 3명이 행정도시특별법의 헌소사건에서 같은 의견을 냈다. 각하 의견을 낸 재판관 7명 가운데 전효숙, 조대현, 이공현 등 재판관 3명은 행정도시가 수도로서의 기능을 해체하지 않는다며 각하 결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각하결정을 내린 다른 재판관들과는 달리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 재판관은 지난해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 헌소사건에서도 관습헌법을 인정하지 않고 홀로 각하의견을 제시했다. 조 재판관은 지난해 신행정수도특별법사건에서 정부측 변호를 맡았다. 전 재판관과 조 재판관은 노무현 대통령과 사시동기다. 또 이공현 재판관이 정년퇴임한 김영일 전 재판관의 뒤를 이어 임명됐을 때도 이번 결정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반면 권성, 김효종 재판관은 행정도시가 건설되면 현재 서울이 갖고 있는 수도로서의 지위는 잃지 않지만 수도가 두 곳이 되는 것으로 수도분할에 해당된다며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두 재판관들은 특별법에 따라 행정도시로 이전되는 12부4처 등은 행정 각부처 중 73%를 차지하며 국가행정에 가장 중요한 경제를 담당하는 기획예산처, 정부의 제2인자인 국무총리와 대부분의 국무위원들도 거처를 옮기게 돼 사실상 수도의 지위를 갖게 된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서울을 수도로 정하고 있는 관습헌법은 서울이라는 도시 하나만을 수도로 정한다는 결단이 내재된 만큼 복수의 수도를 설정하는 것은 헌법개정에 해당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주말 탐방] 한강낚시터 잠실~행주대교까지

    [주말 탐방] 한강낚시터 잠실~행주대교까지

    한강의 ‘강태공’ 그들은 누구인가. 그 이름에서 유유자적이 느껴지지만 사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국 고대의 실제인물인 강태공은 노인이 될 때까지 특별히 하는 일이 없던 ‘백수’였다. 그는 주나라 문왕(文王)의 눈에 들어 재상에 오르기까지 위수(渭水·황하의 지류)에 낚싯대를 드리운 촌로였다. 낚시로 세월을 보냈던 시절, 아내가 집을 나가는 등 시련을 겪었던 강태공의 마음이 어찌 편하기만 했을까. 서울 한강의 ‘강태공’들도 엇비슷하다. 하루 평균 100여명, 연간 3만여명을 헤아리는 그들. 물이 맑아지고 어종이 크게 늘면서 일부 지류에서는 견지낚시를 즐기는 애호가들도 눈에 띈다. 그들은 한강에서 무엇을 낚을까. 그들은 대부분 짜릿한 손맛에 고기 비늘만큼이나 찬란한 삶의 꿈을 긷지 않을까. 한강이 낚시 명소로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한강의 낚시터는 잠실수중보에서 강서구 개화동 행주대교에 이르는 양안 57㎞ 구간(강남 33㎞, 강북 24㎞)에 펼쳐져 있다. 상수원 보호구역인 광나루지구와 선유도공원을 제외한 한강시민공원 10개 지구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2003년 9월부터 19개 지역(19.4㎞)에서는 낚시 행위가 금지되고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 낚시터에 대한 관리는 9월까지 낚시터가 있는 각 자치구에서 관할했으나 이달부터 한강수계 낚시터 전역을 한강시민공원사업소가 관리하도록 조례가 개정됐다. 한강시민공원사업소는 낚시터 관리·운영 권한이 넘어옴에 따라 낚시터를 전면 재정비하고 조정할 계획으로 있다. 우선 한강 서울수계 대부분이 낚시 가능지역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 낚시터마다 강태공들을 위한 의자 등 편의시설들을 마련할 예정이다. 한강에서 낚시하기 위해서는 강태공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도 있다. 우선 개인당 4대 이상의 낚싯대를 펼칠 수 없고, 훌치기 낚시(미끼를 달지 않고 세 방향으로 뻗어있는 바늘을 지나가는 물고기의 몸에 걸어서 잡는 낚시)를 해서는 안 된다. 잠실수중보에서 성산대교까지는 떡밥·어분낚시가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구간에서 야영·취사행위도 금지돼 있다. 특히 떡밥 낚시는 한강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에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위반시 30만원의 과태료를 각오해야 한다. 지구별로 낚시터의 특징을 살펴본다. ●잠실지구 잠실수중보 인근에서 탄천 양수장까지 2㎞에 이르는 구간으로 한강낚시터의 대표격이다. 잠실수중보 밑으로 물고기가 밀집해 있지만 2년 전 수중보가 낚시 금지구역으로 지정돼 낚시꾼들의 아쉬움이 큰 지역이다. ●뚝섬지구 영동대교 하류 600m 지점에서 자양빗물펌프장까지 1.7㎞ 구간에 낚시꾼들이 몰린다. 누치·쏘가리·잉어·강준치 등 한강에서 대물 소식이 가장 많이 전해지는 곳이다. 장마철에는 붕어와 잉어가 떼지어 오르는 길목이다. ●반포지구 낚시터 시설이 가장 잘 돼 있어 ‘낚시터공원’으로 불린다. 특히 반포주공아파트 뒤편에 1만 2000평 규모의 인공섬인 서래섬이 길쭉한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양화지구 한강에서 보기 드문 대낚시 포인트이다. 당산철교에서 성산대교 직전의 양화 유람선 선착장까지 2㎞의 호안은 대어가 종종 올라온다. 특히 선유도를 마주보고 형성돼 있는 800m 구간은 물살의 영향이 거의 없고 침수수초가 형성돼 있다. ●여의도지구 여의도 샛강 유입부에서 상류로 한강철교 아래까지 붕어·잉어·누치 등 어종이 다양하다. 계단식 호안과 어소(고기집) 블록이 깔려 있다. 호안이 단조로워 릴낚시가 성행한다. ●망원지구 양화지구 맞은편의 망원지구 낚시터로 성산대교 근처 홍제천 유입구부터 상류의 당산철교까지 2.9㎞ 구간에서 잉어가 잘 낚인다. 릴낚시와 대낚시가 고루 구사된다. ●이촌지구 예부터 두무포라 불리던 이곳은 강변에 늪지가 많아 잉어가 모이는 집산지로 유명하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꿈이 이뤄질 세상을 낚고 있죠” 평일인 지난 17일 오후 한강 낚시꾼들이 많이 있다는 서래섬을 찾았다. 서래섬은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있는 인공섬으로 1982∼86년 올림픽대로 건설과 함께 조성됐다. 구름 한점 없이 화창한 날에 열대여섯명의 낚시꾼들이 5∼10m 간격으로 앉아 낚싯대를 담그고 있었다. “평일에 이렇게 한강에 나온 낚시꾼들치고 사연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래섬에서 처음 만난 유모(43·관악구 신림2동)씨는 낯선 기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강이 고마울 따름이죠. 이렇게 낚싯대를 던져놓고 출렁이는 물을 바라보는 것이 화를 식히는 유일한 길이거든요. 이것마저 없었다면 길가에 나앉아 술이나 마시는 신세로 전락했겠죠.” 유씨는 올 1월까지만 해도 경기도 안양 근처에 직원 12명을 거느린 모자공장 사장이었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지난해부터 조금씩 자금유통이 어려워지고 수금이 안 되더니 급기야 올초 공장문을 닫게 됐단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다툼이 잦았던 아내와는 이혼했다.10살짜리 딸은 동생 집에 맡겨졌다. 유씨는 딸이 보고 싶지만 만나지 않겠단다. 딸 얘기가 나오자 눌러쓴 모자를 한번 더 힘껏 누른다. 유씨는 3개월째 거의 매일 한강에 나와 온갖 구상을 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 재기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강은 희망을 낚으려는 유씨와 같은 사람들에게 한없이 고마운 공간이다. 홀로 낚싯대 2대를 던져 놓은 공정기(45·구로구)씨는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공씨는 스스로를 삼청교육대 피해자라고 밝혔다. “삼청교육대에 4주동안 잡혀 있었어요.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삼청교육피해자신고접수’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25살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공씨는 그후 20년동안 제대로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뒤에서 감시하면서 자신을 쫓아다니는 느낌 때문이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던 공씨는 정신과 진료를 통해 장애등급까지 받았다. 공씨는 “그나마 한강에 나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면서 “우선 피해자접수 결과를 지켜본 뒤 다른 일을 해 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대기업에서 정년퇴임한 후 낚시를 즐기는 김모(65)씨는 ‘꿈’을 낚고 있다. 그는 10년 전 회사를 은퇴하고 재테크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진행형인 ‘꿈’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모은 돈으로 노인전문요양소를 짓고 있어요. 아직 설계중인데 몇년 안에 완공될 것 같습니다.” 김씨의 아내는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두 자녀들도 모두 가정을 갖고 있다. 그는 “더이상 세상일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면서 꿈이 이뤄질 세월을 낚고 있다. 소주 한 병에 순대 2인분을 사들고 한강을 찾은 김기철(60)씨와 노병선(57)씨는 4년 전 낚시하다 만나 친구가 됐다. 모두 아내와 함께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젊어서는 가게일에 열중했지만 이제는 모두 아내들에게 일임했단다. 둘은 거의 매일 함께 낚시를 다닌다. 굳이 한강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최저 비용으로 최고 재미를 누릴 수 있는 낚시터를 찾는 것도 둘만의 쏠쏠한 삶의 재미다. 노씨는 “이곳저곳 다녀봤지만 한강만한 낚시터도 없다.”면서 “낚시꾼들에게서 요금을 받지 않도록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3년 전까지만 해도 한강 낚시터에서는 낚싯대 1대당 1000원씩 요금을 받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주말 낚시꾼들은 몰라도 평일 낚시꾼들 숫자는 곧 경기회복과 맞물려 있다.”면서 “40대 중반의 평일 낚시꾼 수가 ‘확’줄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년퇴임 앞둔 서울대 마지막 ‘학사교수’ 양승춘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년퇴임 앞둔 서울대 마지막 ‘학사교수’ 양승춘씨

    역사적 사건 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때는 1983년 어느 여름 밤. 서울 용산구 이촌동 120평 규모의 코스모스 아파트 안. 각종 디자인 샘플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4인의 디자인 전문가들이 며칠째 합숙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88 서울올림픽’의 엠블럼 제작마감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묘안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올림픽 휘장만든 디자인계 산증인 통행금지가 임박했을 무렵, 누군가 “에이, 포기하고 술이나 마시자.”며 자조섞인 말을 불쑥 내뱉었다. 다들 지쳤는지 얼른 동의했다. 이어 근처 중국식당에서 술과 안주가 배달됐다. 한두잔씩 거푸 들이켰다. 잠시후 이들 중 양승춘(65) 서울대 미대 교수가 아픈 머리를 식힐 겸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로 갔다. 무심코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수압이 세어 그런지 물이 한꺼번에 콸콸 쏟아졌다. 수도꼭지를 얼른 잠근 다음 세면대의 작은 하수 구멍을 열었다. 고였던 물이 왼쪽에서 오른쪽, 세갈래로 휘휘 돌아감기면서 쏙 빠져들어갔다. 이때였다. 양 교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탁쳤다.“맞아, 바로 이거야, 삼태극(三太極)!”이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책상 앞으로 달려와 포기했던 작업을 다시 진행했다. 이튿날 양 교수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작품을 당당히 제출했다. 결국 ‘동서의 화합’과 ‘세계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세계로’ 등을 뜻하는 삼태극 모양의 엠블럼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서울올림픽의 상징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됐다. 양 교수는 이외에도 각종 국가 홍보포스터 등 지금까지 300여종,1000여점의 그래픽 작품을 제작한 우리나라 디자인사(史)의 산 증인이자 거목으로 꼽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기업CI(Corporate Identity) 작업 1호로 광고계에서는 워낙 유명하다. 지난 67년 광고회사 오리콤 창립멤버로 참여한 것을 비롯,OB맥주, 제일제당, 백설표 설탕, 신세계백화점, 삼성물산, 한국주택공사 등 국내 굴지의 기업CI는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시피했다. ●한글 글자꼴도 20여종 개발 특히 컴퓨터가 보급되던 80년대부터 지금까지 20여종의 한글 글자꼴을 개발해내 이 방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밖에도 70년대 초 사진에도 디자인기법을 처음 도입했다. 이로 인해 서울대에 최초로 ‘영상’관련 과목을 개설, 후학들의 진로를 넓혀주기도 했다.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런 양 교수가 학사출신이라는 점이다. 서울대 교수 1730여명 가운데 석·박사 학위 없는 교수는 양 교수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번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하게 돼 36년간의 정든 강단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본인 스스로의 감회는 물론, 디자인계에서도 이래저래 의미있는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 연구실에서 양 교수를 만났다. 연구실 안에는 디자인용 컴퓨터가 여러대 놓여져 있었다. 그 위에는 커다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붙여져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항상 대중적인 마인드를 갖기 위해서라고 귀띔했다.‘박식다험(博識多驗)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글귀도 보였다. 평소의 철학이 담긴 슬로건이라고 했다. 먼저 정년퇴임을 앞둔 소감부터 물었다.“두달여 남았습니다. 뒤돌아 보니 아쉬움도, 또 보람도 많았습니다.”면서 “그만둔 뒤 다험을 살려 학생들에게 진로나 방향 등을 잘 잡아주는 카운셀러 역할을 해주고 싶습니다.”고 피력했다. 학사출신 교수가 흔치 않은 데다 정년까지 채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큰 복이자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라고 했다. 그러자 “석·박사학위를 따고 싶어도 주위 환경이 그러질 못했습니다.”라며 웃는다. 지금까지 학사출신 교수한테서 박사로 탄생한 제자만 해도 부지기수. 상명대 서명덕 총장을 비롯, 여러 대학의 학장과 교수들도 사제지간의 연을 맺고 있다. 정년을 앞둔 요즘에도 10여명의 박사과정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양 교수를 ‘디자인계의 정규 육사1기’로 여기며 정중히 예우한다. ●요즘도 박사과정 제자 10여명 가르쳐 양 교수는 무인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고종황제 때 시종무관까지 지냈다.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개울가에서 붕어를 잡아 미술시간만 되면 살아있는 것처럼 감쪽같이 그려냈다.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미술 교사의 지도 아래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한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부친의 강권에 못이겨 육사에 지원하지만 시험 당일 극장에서 영화감상으로 ‘딴 짓’을 했다. 결국 고집이 이겨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에 합격했다. 당시 예비 매형이 “장차 우리나라는 산업국가로 갈 것이니 응용미술학을 지원하라.”고 권유했다는 것. 이 때만 해도 응용미술은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의 스승은 도쿄예대 도안과 출신의 이순석(1905∼86) 교수로 한때 ‘고약’의 대명사였던 ‘이명래 고약’의 집안출신. 또한 한국인으로는 서울에 최초로 다방을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양 교수는 65년 대학 졸업 무렵에는 미국 유학파 교수들한테 배운다. 이때 미국의 자동차 광고 포스터를 처음 접해 큰 충격에 빠진다. 이어 교수의 권유에 따라 대학원 진학을 위해 취직을 미루고 1년 동안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곧 설립이 추진될 것으로 여겨졌던 대학원 신설이 무산된다. 할 수 없이 66년 OB맥주에 입사했다. 이 무렵 합동통신사가 일본의 광고대행사인 덴츠와 업무협정을 맺었다. 그러자 합동통신에서 광고기획 및 제작일도 하게 됐다. 또한 67년 코카콜라가 들어오면서 국내 광고대행사 1호인 ‘맘보사’가 탄생됐다. 아울러 합동통신사가 이를 흡수합병하게 되자 한국 최초의 종합광고기획사인 오리콤 창립멤버에 가담했다. 현업 3년 동안 조일광고 대상과 대한민국 상공미전 특선을 3차례나 수상하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68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임용되기에 이르렀다. 강단에 있으면서도 기업체 CI작업에 자주 참여했다. 따라서 늘 ‘1호’가 따라다녔다.71년초 국내 1호인 OB맥주의 CI를 비롯, 산업화붐이 한창이던 70년대에만 신세계백화점, 한국주택공사, 삼성물산, 진로 등 수십개 회사의 CI를 제작했다.80년대 들어서도 성모병원, 동방생명, 한샘, 삼양사, 금복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올림픽 등 각종 팸플릿 등에 참여했다.90∼2000년대에 들어서도 두산, 종가집, 대림혼다 등 100여개 기업체와 제품의 CI를 제작했다. ●태극과 색동의 조화 필생의 연구목표로 양 교수는 대학졸업 논문으로 ‘태극기 개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만큼 원래부터 전통과 한국의 미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서울올림픽의 엠블럼과 휘장 등도 사실상 이같은 열성의 산물인 셈. 요즘 들어서도 태극과 색동의 조화를 필생의 목표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얼마전 색동표지를 새롭게 선보여 ‘2005년 최우수 학술 도서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양 교수가 80년대 디자인 스코프를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해 디자인의 도구화를 처음 이룬 업적도 잘 알려진 공로. 또한 동료 교수들보다 훨씬 빠른 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로 디자인 작업을 했다. 이런 얘기가 나오자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젊은이들도 사용하기 힘든 3차원 폰입니다. 게임은 물론 디카, 캠코더, 스트레오 음악, 동화상, 편집 등 안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면서 디자인은 요즘들어 정말 정신없이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해상도가 매우 높은 30인치 LCD모니터(2560×1600)를 구입했단다. 그러나 양 교수는 단지 시대 조류에 앞서 나가기 위해 이런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60년대의 지상목표는 물건을 파는 것이었죠. 우리나라도 지금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대중과 함께 살아 숨쉬는 문화적 디자인으로 옮겨가는 것이 요즘 선진국의 추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대중과 함께 하는’ 한국형 디자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0년 서울 출생 ▲59년 대광고 졸업 ▲65년 서울대 미술대 졸업 ▲66∼68년 OB맥주, 합동통신사, 오리콤 창립멤버로 근무. ▲68년∼현재 서울대 미대교수, 미술대 조형연구소 부소장 ▲69∼2003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77∼80년 한국시각디자인협회 회장 ▲83년 체신부 정책자문위원 ▲87∼89년 서울대 기획위원 ▲89∼99년 서울대 미대 디자인학부장 ▲98년∼현재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운영위원 ▲2002년∼현재 세계포스터비엔날레 운영위원 ▲2003년∼현재 인천가톨릭대 운영위원 ■ 주요 작품 88서울올림픽 당시 엠블럼, 기념우표, 문화포스터, 입장권 제작. 기업CI로는 신세계백화점 한국주택공사 동양맥주 삼성물산 진로 유로패션 경남기업 한일은행 성모병원 한샘 삼양사 금복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방송 대림혼다 두산기계 종가집 등 100여 작품 제작 km@seoul.co.kr
  • [청계천 새물길 열렸다] 황병기교수의 산책기

    [청계천 새물길 열렸다] 황병기교수의 산책기

    나는 1936년 서울 북촌의 가회동에서 태어나 그 동네에서만 살다가 74년 비로소 서대문 밖의 북아현동 꼭대기로 이사 온 후 지금도 그 곳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서울에서만 살아온 토박이여서 지난 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때는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의 하나가 삼청동 계곡의 시냇물에서 바위 뒤에 숨어 있는 가재를 잡아다가 집에서 놋대야를 놓고 기르던 일이다. 맑은 수돗물에서 사는 것을 가재가 싫어하기 때문에 흙과 돌까지 퍼 와서 대야의 물을 가급적 시냇물과 흡사하게 만드느라 고생했다. 이 삼청동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경복궁 동편으로 해서 중학동을 지나 결국 청계천이 되어 서울 중심부를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 당시도 개울물이 그다지 맑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아낙네들이 빨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빨래할 정도의 물은 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하기는 이름이 ‘청계천’이니 옛날에는 오죽 맑은 물이었을까 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 후 청계천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0년대에 박태원의 장편 소설 ‘천변풍경’을 읽으면서이다. 이 소설은 청계천 부근에서 사는 서민들의 삶을 다룬 단편소설집인데, 이 단편들을 계속해서 읽으면 하나의 일관된 장편소설이 되는 이른바 옴니버스식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청계천은 단순한 냇물이 아니라 서울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서울의 혼이 담겨 있는 정다운 물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서울 인구의 폭증과 산업화의 급류 속에서 청계천은 차츰 악취가 풍기는 구정물처럼 변하고 인근은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촌의 모습이어서 서울의 치부처럼 느껴졌다. 사실 외국에서 손님이라도 오면 보이는 것이 창피할 정도였다. 그래서 60년대 말에 복개공사가 이루어져 이 치부가 말끔히 사라지자 시민들이 박수를 치기도 했다.70년대에는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자 그 위를 차로 달릴 때 바라보이는 빌딩들이 한국 산업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세월은 흘러 21세기에 들어왔다. 그동안 서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강남시대를 맞이했지만, 나는 여전히 강북에서 그리고 청계천 북쪽의 북아현동 꼭대기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어언 정년퇴임을 하고 이문동의 옛 중앙정보부 자리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문화원에 출강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다시 복원한다는 뉴스를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엉뚱하기도 하고 기발하기도 한 뉴스였다. 처음에는 시민들로부터 온갖 걱정과 염려를 사고 진통을 겪었지만 차츰 청계천 복원이 일종의 희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불과 2년여 만에 이것이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목전의 현실로 다가오고 인터넷상에 복원된 청계천의 환상적인 가상사진이 뜨기 시작했다. 60년대의 청계천 복개가 문자 그대로 부정적인 옛 것을 덮어서 없애버린 것인데, 오늘의 청계천 복원은 그 옛 것에 대하여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되살려 낸 것이니 가히 청계천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9월29일 나도 꿈의 청계천 복원현장을 아내(한말숙·소설가)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둘러 보았다. 처음에 청계천 광장을 지나 산책로로 내려가자 상전벽해라기보다도 천지개벽이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서울은 위대하고 대한민국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선을 다하여 복원한 흔적이 역력한 광통교를 흥미롭게 살피고, 풀밭사이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징검다리도 건너보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192m 길이의 도자벽화 정조반차도도 흥미롭게 보았다. 더구나 이 반차도는 옛 군악대인 취타수들의 연주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국악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여서 더욱 반가웠다. 그러나 한참 걸어가다 보니 차츰 지루해지고 허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그럴까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청계천 복원도 문명의 힘으로 밀어붙인 인공물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복원된 청계천이 앞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잘 가꾸어지면서 연륜과 역사가 더해지고 서울 시민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한 살이 되기 위하여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입계단으로 올라와 한동안 청계로 위의 난간 쪽 보도로 걸었다. 그런데 이 보도의 폭이 두 사람도 함께 걸을 수 없이 좁아서 휠체어는 물론 유모차조차 다닐 수 없는 길 아닌 길이라는 것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우리는 자연과 문화와 역사에 대하여 좀 더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제부터 꾸준히 청계천을 가꾸어가야 할 것이다.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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