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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첸공/“러인포로 70명 처형” 위협

    ◎반군공세에 러군가담 사실 시인 요구/러,보안위 긴급소집… 대책 논의 【그로즈니(러시아) AP 연합】 체첸 당국은 28일 만약 러시아 당국이 지난 26일 발생한 반군의 그로즈니 공격에 러시아군이 관련됐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경우 29일 이번 전투중 붙잡힌 70명의 러시아인을 29일 처형하겠다고 경고했다. 체첸 공화국 정부의 한 대변인은 『러시아측이 29일 하오 6시(현지시각)까지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공격사실을 시인하지 않으면 이 러시아인들을 체첸공화국의 전시규정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체첸공화국 관리들은 더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웃도시인 모즈도크에 도착하고 있다면서 이들은 그로즈니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중이라고 주장했다. 이 통신은 이날 오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지휘하는 러시아 보안위원회가 비상회의를 소집,체첸공화국사태의 논의에 들어갔다고 하원 두마의 이반 리프킨 의장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국방장관은 용병들이 체첸공화국 정부군과 반군 양측에서 전투를벌였으나 러시아 정규군이 개입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 정치적 파문 고려 “평가는 역사에”/검찰「12·12」수사발표 의미

    ◎기소유예 불구,“명백한 군사쿠데타” 규정/고소·피고소인 모두 불만… 파장 오래갈등 부하 장교들에 의해 현직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이 전격 연행된 79년의 12·12사태는 15년가까이 지나 군사반란으로 결론지어졌다.다시 말해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79년 발생한뒤 쿠데타의 주역들이 그동안 대통령을 두차례나 역임하는가 하면 현재까지도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왔던 게 사실이다. 사건 주역들의 위세에 눌려 침묵을 지켜왔던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전수경사령관측이 지난해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을 포함,신군부측에 섰던 34명을 내란 및 반란등의 혐의로 고소해옴에 따라 사건이 표면화됐다.검찰로서도 이 사건 피해자들이 고소해온 만큼 어떠한 결론이든지 내려야 할 처지에 이르렀던 것.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오는 12월 12일 끝나게 돼 있었다.이에 따라 고소인측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지난해 고소를 하게됐고 검찰 또한 공소시효 이전에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수사에 착수했다. 공소시효를 넘길 경우에는 수사기관의 검증을 통한 사법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고소인과 참고인들을 부르기 시작,모두 1백51명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아울러 정승화 전총장이 연행됐던 한남동의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현장확인과 함께 실황조사를 실시하는가 하면 국회의 광주회의록,12·12사건 국정조사회의록등에 대해서도 모든 검증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 신군부측의 무력동원은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은 군사반란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정전총장 등 고소인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반면 정전총장을 연행하거나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기 위해 「자파」의 병력을 동원한 신군부측의 변소는 거짓으로 판명난 셈이다. 신군부측의 무력동원은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고 있던 전두환보안사령관이 10·26사건 관련 혐의를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전총장을 제거,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한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실행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이러한 실정법위반이 드러났는데도 신군부측 관련자들에게 전원 불기소처분을 내려 국민들의 「법감정」과는 다소 동떨어진 결정을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군형법상 반란혐의는 사형등 「중죄」를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불기소 처분이 내려져 신군부측인사들은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된다.이들은 우리나라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로부터 당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역사적 중죄를 짓고도 법정에 서지 않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됐다.후일의 「역사적 평가」는 사가들의 몫으로 돌려지게 된 셈이다. 이에 대해 검찰관계자는 『12·12사건에 대한 검찰의 처분이 국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고려,법률적 문제는 물론 정치·사회적 제반 요소들을 신중히 검토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신군부측 피의자들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헌정사를 후퇴시켰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제2,제3의 불법적 군사행동이나 하극상 사건의 재발을 엄중히 경고했다. 김영삼대통령도 지난해 이 사건과 관련,『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역사적 평가에 맡기자』고 언급한 바 있어 검찰수사도 이와 궤를 같이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공소를 제기하는 문제는 김대통령의 앞선 「언급」과 함께 검찰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모두 「불기소처분」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피의자들을 정식 재판에 회부할 경우 공판과정에서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고 법적논쟁이 계속돼 국론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다는 계산을 먼저 심중에 넣은 것 같다. 이러한 난맥상은 또 장래적으로 국가안정을 저해하고 자칫 국가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공산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신군부측 인사들이 지난 14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나름대로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을 고려했음도 물론이다.더욱이 전직 대통령등을 법정에 세워 단죄하는 경우 국민들에게 심정적으로 혼돈을 느끼게 할 우려가 크다는 점도 참작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먼저 고소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대해 불복,항고의사를 분명히 했고 신군부측 역시 「무혐의」 또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어 그 파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반군 수뇌 집결지 공격” 긴급명령/하오10시 40분/양측,한남동서 중화기무장 대치/밤∼다음날 새벽/최대통령 「총장연행」 재가… 신군부 승리/「그날」 일촉즉발의 순간들 「육군 26사단,수도기계화사단,공수9여단 병력 완전무장 출동하라」「전두환장군을 비롯한 반군 수뇌부가 집결한 경북궁 30경비단및 보안사령부를 공격하라」 79년 12월 12일 하오 10시 40분쯤 반군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예하 부대에 타전한 「급보」내용이다. 수경사로 자리를 옮긴 육군의 「정식지휘계통」에 있었던 장성들이 이날 하오 7시25분쯤 정승화참모총장의 강제연행으로 시작된 「군사반란」에 대응해 3시간여만에 일전불사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신군부측과 육본측은 일촉즉발의 경계에 돌입했다.그러나 상황은 이미 신군부측으로 기운 뒤였다.우선 수적으로 육본측은 열세였다. 당시 전합수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측에 가담한 부대는 공수 1여단(박희도준장),3여단(최세창준장),5여단(장기오준장)을 비롯,수경사 30단(장세동대령),33단(김진영대령),9사단 29연대(이필섭대령)등 수도권 핵심주둔부대 대부분과 전방의 2기갑여단(이상규준장)등 무려 5천여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이에비해 정규군측이 실제 동원가능했던 병력은 행정병을 포함,수경사 잔류병력 1백여명과 전차 몇대뿐이었다.공수9여단(윤흥기준장)병력은 합수부측의 항의를 받은 윤성민 육참차장의 복귀지시에 따라 회군해 버리고 말았다.또 출동명령을 받은 26사단등의 병력출동도 불발에 그쳤다. 이날 밤과 새벽사이 정육참총장의 공관이 있던 한남동과 한강다리쪽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양측은 장갑차와 전차등 중화기로 무장한채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대치중이었다. 상황발생 9시간50분만인 13일 새벽 5시10분 합수부측이 최규하대통령으로부터 총장연행재가를 받으면서 신군부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상황은 끝났다.서울시내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을지도 모르는 시가전의 위협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 미함정·전투기 아이티해안 접근/양국 “전쟁 전야” 주변표정

    ◎미 국무차관/군정지도자 체포땐 사법처리/아이티 주민/클린턴연설 경청… 차분한 생활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은 이날 아이티 군사정권지도자들이 미국의 침공시 체포되면 아이티 합법정부로 넘겨 사법처리를 받도록 할 것이라며 침공이후 아이티군부지도자의 처벌방침을 공개. 크리스토퍼장관은 이날 아침 미ABC방송의 「굿모닝 아메리카」라는 프로에서 『우리가 그들을 붙잡게 되면 합법정부로 넘겨 사법절차를 밟도록 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과제가 아니며 중요한 과제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 ○…작전완료까지의 시간과 관련,윌리엄 페리 미국방장관은 이날 『아이티를 침공한다면 군사작전은 최장 이틀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 페리장관은 이날 NBC TV와 가진 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전투상황은 수시간안에 끝날 것이며 『길어야 하루 또는 이틀』이라며 자신감을 표명. ○…미군함들과 항공기가 아이티 해안에 모습을 나타난 가운데 아이티인들은 군사정권 퇴진에 대한 희망과 불안속에서 오래전에 예고된 미국의 침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 그러나 군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으며 에밀 조나생대통령은 『정부가 그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겠다』고 다짐하고 『공화국을 방위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 ○사격장서 실탄훈련 한편 아이티군 소식통은 아이티 정규군과 민병대가 한달반전부터 포르토프랭스를 비롯한 전국 일원에서 실탄없이 침공에 대비한 훈련을 받아왔으나 15일부터는 포르토프랭스와 도미니카 국경 중간지점의 한 사격장에서 실탄 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미국방부는 아이티 침공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 월 1백50달러의 위급전쟁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국방부의 한 관리는 계급에 관계없이 전투지역에 파견되는 장병들에게 이같은 전쟁수당을 일률적으로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엔은 미국의 아이티 침공을 감시하는데 필요한 군사옵서버단을 15∼60명으로 구성했다고 유엔의 조 실스 수석대변인이 15일 밝혔다. 실스대변인은 프랑스·방글라데시·피지 등이 옵서버단 참여를 자원했으며 캐나다의 경우 민간경찰 감시단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군함들이 아이티에 대해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거리로 이동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의 일상생활은 15일에도 예상보다 정상적이었으며 대다수의 아이티인들은 집에 머물면서 조용히 클린턴대통령의 연설내용을 들었다.아이티의 라디오방송들은 이날 프랑스어로 동시통역을 하면서 클린턴대통령의 연설을 워싱턴에서 생중계. ○…미국의 아이티침공이 임박함에 따라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수백명의 취재기자들이 몰려들어 이들이 침공병력을 가장 먼저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대다수가 미국인인 외국기자들은 수주전 아이티항로가 모두 끊기는 바람에 이웃 도미니카공화국으로부터 거칠기 짝이 없는 비포장육로를 거쳐 포르토프랭스로 진입했다. ○기자 수백명 몰려 특히 기자들과 외교관들에게 인기가 높은 일사이드 몬타냐 호텔에는 텔레비전 카메라장비와 위성접시들로 만원을 이루었으며 호텔측은 기자들을 위해 공항을 포함,포르토프랭스가 거의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방을 제공하고 있다.
  • 북한인탈출 급증/중,국경통제 강화

    【모스크바 연합】 중국은 최근 북한인의 자국내 탈출 사례가 급증하자 북한과의 국경선 일대에 수비대와 정규군을 증강 배치,국경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9일 북경발로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당국의 이같은 국경통제 조치는 최근에만 북한을 탈출,중국으로 불법적으로 들어온 북한인 수가 약 1백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취해진 것이라고 전했다.
  • 안무장군/봉오동·청산리대첩의 얼굴없는 주역(이달의 독립운동가)

    ◎국민회군 조직,김좌진·홍범도와 연합/회령·강양동 일군 습격… 국내 진입 시도/모아산서 일기습받아 피랍… 42세 순국 안무장군(1883년 6월29일∼1924년 9월7일)은 김좌진·홍범도장군등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대표적인 무장항일투사이다. 호가 청전인 안장군은 함북 경성에서 출생,1889년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입대해 하사관을 거쳐 교련관으로 근무한 정규군인이다. 안선생은 1907년 8월1일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강제해산한데 따라 잠시 고향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아 북간도로 망명,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됐다. 선생은 이동휘가 활약하고 있던 북간도 명동에 도착한뒤 동지들과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예하에 국민회군 3백명을 편성,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무기반입·독립군 훈련을 펼쳤다. 당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각지에 10여개의 지방회와 80여개의 지회를 두는등 한창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세력이 확산됨에 따라 산하 군사조직으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선생의 국민회군등 2개 조직을 두게 된다. 바로 이 부대들이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의 하나로 손꼽히는 북간도 봉오동 전투를 치른 주역이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중화기를 동원,국내진입을 꾀하는 독립군부대를 토벌하려는데 맞서 독립군이 일제를 일패도지시킨 전투이다. 1920년 5월28일.무장독립단체들은 국내진입작전을 펼치기 위해 대한군북로도군부를 조직하고 병력을 화룡현 봉오동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모인 병력은 홍범도와 안무계의 5백50명등 모두 1천2백명이었으며 무기는 기관총 2문·총기 1천1백정·수류탄등 1백개등에 불과했다. 먼저 이들 무장독립군은 같은해 5·6월 두차례에 걸쳐 함북 회령과 강양동의 일제초소를 공격,국내진입 가능성여부를 타진했다. 일제는 이에 따라 나남 주둔 19사단의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중국땅으로 건너와 「독립군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독립군은 공격에 나선 일제의 주력을봉오동으로 유인,4시간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일제를 물리치는데 성공한 것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정무원은 『적군의 사자 1백57명·중상 2백여명·경상 1백여명이요,아군의 사자 4인·중상 2인』이라고 피아 피해상황을 밝혔다. 안장군이 이 전투에서 맹활약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봉오동 전투는 일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립군의 전력을 재평가,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본격적으로 수립하게 됐다. 일제의 대대적 작전을 감지한 독립군은 안장군의 국민회부대를 화룡현 이도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등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기지를 옮기도록 했다. 당시 집결한 병력은 사상 최대규모인 2천여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은 이런 배치로 유명한 청산리대첩에 대한 준비를 갖춘 것이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홍범도·안무 3장군의 부대등이 연합,이·삼도구 서북쪽 심산 밀림지대에서 일제 「토벌군」2만여명과 밤낮 구별없이 6일동안 치른 전투이다. 독립군은 이 청산리대첩에서 일제를 철저히 괴멸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일제 19사단이 추가로 출동할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다시 더멀리 밀산으로 이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립군은 밀산이 너무 비좁은 지역이라 장기주둔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아래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하바로스크 위쪽 알렉세호스크)로 이동했다가 일제와의 불화를 우려한 러시아로부터 큰 타격을 받고 주력을 잃는 비극을 겪게 됐다. 러시아는 1921년 6월 일제의 요구에 따라 독립군을 무장해제키로 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갑자기 독립군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당시 피해상황에 대해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에서 발표한 「자유시사변에 대한 성토문」은 『독립군 2백72명이 전사하고 9백17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변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안장군의 부대는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북간도로 돌아왔다. 안장군은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활약하던중 1924년 9월6일 일경의 습격으로 모아산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상을 입고 체포된뒤 다음날 42세의 일기로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정마저 남기지 못하고 조국광복의 제단에 목숨을 받친 선생의 일생은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리라.
  • 평양회담 대표단 100명선/정부,오늘 실무접촉서 북에 제한

    ◎보도진은 80여명으로/정상회담 「단독」 두차례·「확대」 한번/남북 군상호사찰 제의… 전쟁방지 최우선/국기 게양없이… 의전은 잉반관례대로 남북한은 1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접촉을 갖고 지난 28일 첫 예비접촉에서 미처 합의하지 못한 의전,대표단 구성,신변보장,회담형식등을 논의한다. 이날 실무접촉에서 우리측은 오는 25일 평양에서 열릴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할 대표단과 기자단의 규모를 북한전문가를 포함한 수행원 1백여명,국내기자단 80여명등 모두 1백80여명으로 제안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에 앞서 30일 상오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이홍구통일부총리 주재로 통일정책조정회의를 갖고 1일 판문점에서 북한측에 제시할 우리측의 실무절차안을 확정했다. 정부는 이 회의에서 정상회담은 배석자 없는 단독 정상회담으로 하고,북한에 머무르는 동안 두차례 정상회담과 한차례 확대정상회담을 갖는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1일 실무협의 대표로 윤여전국무총리특보,수행원으로구본태통일원통일정책실장,엄익순국무총리보좌관을 정했다. 김형기통일원대변인은 이날 『실무절차와 관련된 세부문제를 세밀하게 점검했다』면서 『북한측도 이러한 우리측 제의에 동의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대변인은 『남북은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민족내부의 특수관계로 국기게양은 하지 않을 것이며,이번 정상회담의 의전과 경호절차는 제3국과의 정상회담에 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영삼대통령은 북한주석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전쟁방지를 최우선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남북상호사찰의 실시를 북한측에 공식 제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아울러 북한의 핵투명성이 확보된다면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의 체결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미·일과의 수교를 도우며 북한핵발전소의 경수로전환 비용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힐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정부는 남북 상호사찰을 남북 군비통제 차원에서 다루는 방안을 추진중인 것으로전해져 상호사찰이 정규군의 감축등 군축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정부의 한 관계자는 밝혔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구상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시키려는 전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북한도 현재 국제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특별사찰을 상호사찰로 전환함으로써 북핵문제를 한반도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 6·25 44돌… 학도병 참전 용사들의 회고 특별대담

    6·25때 홍안의 미소년으로 전장을 누볐던 학도병들은 몇차례 강산이 바뀌는 세월속에서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의 옛전사로 변했다.하지만 이들의 가슴속에는 동족상잔의 아픔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살아있다.포연의 전장에서 불퇴전의 용기로 살아남은 유성덕 서울대광고교장(63)과 정년탁대한학도의용군회 총본부 전회장(63)의 대담을 통해 그날을 되새기고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자세등을 되짚어본다. ◎“펜대신 총으로…” 5만여명 구국전선에/조국사수 일념에 사격훈련만 받고 전투/곳곳서 맹활약… 포항선 71명 장렬한 산화/“자유만끽” 요즘 젊은이들,기성세대의 체험 곱씹어 보아야 ▲유교장=사실 저는 의식적으로 6·25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하지만 또 한시도 기억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게 바로 6·25지요.중학6년(18세)때 학도병으로 자원해 나갔다가 온 몸을 크게 다쳐(왼쪽 손가락 4개와 오른 손가락 2개,양쪽 발가락절단,발뒤꿈치 골수염) 지금도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하는 불편한 상태입니다.하지만 해방이후 북쪽의공산당이 싫어 평양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학도의용병으로 참전해 죽을 고비를 넘긴끝에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교육자로 평생을 지내고 있으니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6·25발발 직후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할 당시를 생각하면 우리 남쪽은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었지요.북한군에 밀려 대구와 부산만 겨우 남아 있었으니까요.피란지인 부산에서 중학교 영어 실력이지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다 학도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50년 8월 초쯤으로 기억됩니다.어린 나이였지만 「펜대신 총을 들어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자」고 모두들 나서는 분위기였습니다.전투에 나가 더이상의 북한의 공세를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미군부대에 보고도 않고 곧바로 의용병모집 장소로 달려갔습니다.함께 지원한 2백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주에서 3일동안 사격훈련을 받고 안강전투에 참가했지요.갑자기 모집한 학도병이고 보니 복장도 교복차림에 군복,미군작업복등 각양각색이었어요.우리가 배속된 부대가 김석원준장(작고)이 이끄는 수도사단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당시 학도병들은 일정지역에 모아 부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모이는대로 그때 그때 전투지역으로 보냈지요.그만큼 병력은 부족하고 전황은 다급했다는 이야기지요.정회장도 학도병에 자원할 당시 중학생이셨지요. ▲정전회장=저는 중3때 광주지역에서 학도병으로 참가했어요.사실 호남지역에는 6·25이전에 이미 빨치산등 좌익세력이 적지않았어요.학교에도 좌익에 물든 사람이 꽤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학생은 물론 선생까지 좌우로 갈라져 있었어요.어린 눈에 좌익분자들이 사람을 백주에 죽이는것을 보고 까무러쳤습니다.좌익학생들의 연대파업등을 수없이 보았습니다.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을 모집한다고 하니까 공산당의 폐해를 피부로 경험한 학생들이 너나없이 몰려나갔지요.4일동안 간단한 사격훈련등을 받고 12사단에서 배속돼 주로 태백산과 노령산 일대에서 전투를 했었죠.훈련받을 때 총이 모자라 인민군의 딱총도 함께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어릴때 공산당의 잔학상을 보아왔던 때문인지 사람이 죽는다는걸 별로 무섭게 느끼지도 않았던것 같아요.안강전투는 대단했다면서요. ▲유교장=지금생각해도 정말 대단했습니다.우리로서는 더이상 밀리면 부산·대구까지 내주어야 하니까 몸으로라도 끝까지 사수해야하는 마지노선이었어요.죽거나 부상당해 후송되는 학생들 말고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당시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학도의용병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지요.학도병들의 용기는 현역병을 훨씬 능가했습니다.살아남겠다는 생각없이 그야말로 물불을 가라지 않고 싸웠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을 겁니다.지금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나 싶어요.형산강을 피로 물들이고 일주일여 사투를 벌이니까 북한군이 물러서기 시작하더군요.이후 포항탈환작전에 참가,시가전을 벌였고 고성,함흥등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포항 시가전에 참가했을때 어느 중학교에는 인민군과 우리 군과 학도병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기도 했습니다.결국 그들을 포항에서 물리친 것이지요.북진이 계속되고 김일성이 다급해지니까 중공군에 도움을 요청,이른바 중공군의인해전술이 시작돼 우리는 다시 남으로 밀리게 됐지요. ▲정전회장=교장선생님도 지적하셨지만 당시 학생들의 전의는 대단했습니다.군대 안가려고 일부러 손가락까지 자르던 일부 징집대상 젊은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피끓는 울분을 토로했던 기억이 납니다.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마디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지요.죽음을 초월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런일도 있었어요.태백산자락 어느 전투에서 북한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였어요.어느 지점을 며칠만에 지나는데 태극기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반듯이 누운 한 젊은이를 발견했어요.죽은 줄알고 다다가 보니 목숨이 붙어있더군요.전투중에 실종된 학도병이었습니다.이 친구는 부상을 당해 낙오가 되고 기력이 떨어져 움직일 수 없게되자 가지고 있던 총을 인민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분해해 버리고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죽음을 기다린 것이지요. ▲유교장=당시 학병들의 참전은 아군의 전투력증강에 상당한 보탬이 된것으로 압니다.정회장은학병모임일도 보신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전회장=대한 학도의용군회 회장을 여러해 맡았습니다.학도의용군은 50년 6월 전쟁발발때부터 51년 4월 이승만대통령이 복교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전쟁에 참여했던 학생들로 중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됐었습니다.50년 6월28일에 피란가던 서울시내 각대학 학도호국단 간부 2백여명이 수원에서 합동비상학도대를 조직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이후 각 군소재지 학교에서까지 이들이 결성돼 눈부신 활약을 벌였어요.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이 말입니다.5만여명 정도가 참전했고 7천여명이 전사했습니다.당시 정규군병력이 15만에도 못미치는 상황이었으니 규모면에서도 대단한 것이지요.그중에서도 중학생이 가장 많았습니다.1·4후퇴때는 북한에서 2천여명의 학생들이 넘어와 참전했었고 부산지역의 학생 7백여명은 유엔군에 편입돼 일본에서 훈련을 받은뒤 다시 돌아와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었죠.가장 비참했던 전투는 포항전투로 1기로 참전했던 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전원이 이름없는 고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역사적으로 학생들의 애국심이 이처럼 높았던 나라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외에는 없다고 외국전문가들도 이야기합디다. ▲유교장=학병들의 정신은 지금도 면면이 내려온다고 생각됩니다. ▲정전회장=그렇습니다.지금도 국립묘지에 가보면 6·25당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학도의용군들의 묘역이 있습니다.지금도 당시 같이 전투에 참가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곤 합니다.당시 장성들을 만나도 학도병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제가 보기에 학생운동의 맥은 일제시대의 광주학생운동과 해방직후 반탁반공운동,4·19의거,그리고 6·25때의 바로 이 학도의용군으로 이어지지않았나 생각합니다.역사속에 면면이 흐르고 있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선배들의 정신을 너무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세계적인 변화속에서 반공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고요. ▲유교장=독사에게 물려본 사람만이 독사가 무서운 줄 알듯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전쟁의 고통과 공포를 알 수 있지요.자유역시 마찬가집니다.자유를 빼앗겨본 사람만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요즘 젊은이들은 민주화 민주화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진정 자유가 박탈된 상태,전쟁이 주는 공포는 체험해 보지 못했습니다.기성세대의 뼈아픈 체험을 한번쯤은 곱씹어 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기성세대를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가슴에 담고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신들의 포부를 펴나가라는 것이지요.일제와 6·25를 겪으며 고난의 역정을 걸어온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부인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열어나가는 좌표로 인식돼야합니다. 학생들이 사회의 모든 일에대해 지나치게 간여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정치는 정치인에게 국방은 군에 맡기고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또 국민역시 각성해야 할 부분이 적지않다고 봅니다.지난 현충일 연휴때 나들이 인파로 주요도로가 모두 만원을 이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날의 어려움을 모두 잊지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전회장=지금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의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들의 정세에 맞춰 겉모습만을 바꾼 것뿐입니다.그런데도 학생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폭력시위를 벌이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나름대로 애국심을 가진 행동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학생운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시대에 맞게 어른들과 선배들의 충고에도 귀기울일줄 알아야죠.통일에 대한 문제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루 반영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나친 기대 금물/구본영 북한부기자(오늘의 눈)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한껏 높아지고 있다. 20일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먼저 제의한 정부도 21일 상오 정종욱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이홍구통일부총리실에 들러 구수회의를 갖는 등 분주한 분위기다.하지만 실무준비에 나서고 있는 정부 관계자 누구도 북측이 카터 전미대통령을 통해 스스로 제안한 정상회담에 진지하게 응해 올 것인지에 대해선 마음을 놓지 못하는 표정들이다. 사실 지난 80년대 이후에만도 모두 12차례의 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탐색단계나 절차 논의과정에서 무산된 전례를 굳이 이 시점에서 「불길하게」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정황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우선 우리 정부가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판독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간주하는 대남 비방방송이 아직 전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우리측이 정상회담을 제의한 이후에도 그들의 대남 방송에선 「괴뢰 역도」운운하는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조잡한비방공세가 그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측은 카터전대통령을 통해 김일성주석이 먼저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자」고 제의해온 점에 한때 기대를 걸기도 했다.그러나 북한핵문제에 대한 카터의 중재활동이 미국 조야에서조차 도마 위에 오르자 정부도 그의 정상회담 「주선」에 다시 못미더워하는 인상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카터전대통령이 남북한 병력을 10만명선으로 감축하자는 김주석의 제의를 「역사적」이라고 평가한 데 대해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의 북한에 대한 「순진함」 때문이었다. 병력을 상호 10만명선으로 줄이자는 얘기는 지난 54년 제네바회의에서 들고 나온 이래 90∼92년 사이 열린 남북고위급회담과 군사공동위 등에서 북한측의 단골 메뉴였다.60년대부터 시작된 「전인민의 무장화」 등 4대군사노선으로 4백만의 노농적위대 등을 완전무장시켜 놓은 채 정규군을 줄여도 대남 군사력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황을 감안한다면 정상회담에 대한 과도한 기대보다는 남북관계 개선을위해선 정상회담을 포함한 어떠한 대화채널도 가동한다는 의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러,병력감축계획/10월까지 30만명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러시아는 예산부족 등으로 인해 군병력을 오는 10월까지 2백만명이하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인테르팍스통신이 13일 보도했다. 병력감축안에 따르면 현재 공식 집계된 정규군 2백20만명이 오는 10월1일까지 1백90만명으로 줄어든다.
  • “크로아군 보스니아 영내 진주”/정규군 5천∼1만명 추정

    ◎미 정보기관/사실 확인땐 금수 경고 【워싱턴 AFP 연합】 5천∼1만명의 크로아티아 정규군병력이 내전중인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를 돕기위해 보스니아령내에 이미 진주한 것으로 믿어진다고 미행정부의 한 관리가 지난 31일 밝혔다. 이 관리는 미정보기관이 이처럼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행정부는 이와 관련,유엔이 앞서 세르비아에 취했던 것처럼 대크로아티아 무역금수조치를 단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 관리는 경고했다. 이에앞서 마이클 매커리 미국무부대변인은 크로아티아군이 보스니아령내에 진주했다는 보도가 사실로 판명될 경우,미국은 대크로아티아 경제제재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언론은 최근 유엔 관측통들과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교전중인 크로아티아계를 지원키 위해 자체 정규군병력을 파견했다고 보도했다.
  • 원주민 차별·나프타 부작용서 발단/멕시코 농민폭동 왜 일어났나

    ◎4일째 1백여명 사망… 장기화 조짐/농산물 수입땐 영세농 몰락 위기감 새해 첫날 일어나 4일째 계속되고 있는 멕시코 치아파스주 농민폭동은 4일 일단 소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장기화될 전망이다. 이 폭동으로 현재까지 정부군과 폭동에 가담한 농민등 모두 1백여명이 숨졌고 치아파스주내 일부 시청사등 공공건물·상가 수십여채가 불에 탄 것으로 집계됐다.일부 도시에서는 토지분규로 수감돼 있던 원주민 죄수들이 탈옥하는등 무정부상태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원주민 농민들은 한때 주내 6개도시를 점령했었으나 현재는 라스 마르가리타스시·차날시등 3개도시를 장악하며 정부군에 맞서고 있다. 자칭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주도로 이뤄진 이번 봉기는 멕시코정부의 오랜 대원주민 차별정책과 빈곤에다 1일 발효된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가 불을댕겨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즉 빈곤속에 푸대접을 받아온 원주민들이 나프타의 발효로「공동체해체」라는 위기감이 증폭돼 일어난 것이다. 폭동농민들은 지난1일자로 된 성명에서 『멕시코정부가원주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저항해 봉기했다』고 밝힐 정도로 각종 정책에서의 소외감을 지적했다.한편으로 농민들은 값싼 농산물이 밀려오면 소규모 영세농인 자신들이 어디든 쫓겨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이『나프타는 남부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라며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폭동이 일어난 치아파스주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토착종교와 카톨릭간의 종교,인종갈등이 깊은 지역.과테말라와 함께 마야문명을 꽃피운 곳이어서 전체주민 2백만명가운데 절반가량이 원주민 인디오들이다.토착민들은 산악과 정글이 많은 탓으로 경작할 땅을 놓고도 종족간의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가운데 25%는 아직 스페인어대신 토착어를 쓰고 있고 약 30%가 문맹자로 파악되고 있으며 걸핏하면 「박해」「차별」을 이유로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어왔다. 폭동을 주도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규모는 2천여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도의 훈련을 받은데다 정규군이상의 무장을 하고 있어짧은 시간안에 진압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대부분 치아파스주의 젊은 원주민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름에서 보듯 이들은 멕시코의 혁명영웅이며 농민군지도자였던「사파타」의 이념을 따르고 있는데 에밀리오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에 참가,빈농과 공동체 농민에 대해 토지재분배를 규정한 「아야라계획」을 멕시코헌법정신에 관철한 인물이다.따라서 이들이 최대요구사항은「토지의 무상분배」로 요약해볼 수 있다. 16세기 초반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 이후 4세기간 반복되고 있는「정복자」와「원주민」사이의 반목의 역사청산은 나프타이후 멕시코정부의 경제성공여부에 달려있으나 쉽게 이뤄지기 힘들거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 새로운 건설시장(평화 싹트는 중동:10·끝)

    ◎중동 종단·횡단도로 등 청사진 화려/“신속성 긴요” 한국업체 진출 유망/레바논 송전선공사 이미 현대 참여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카키색 군복차림에 거꾸로 총을 맨 이스라엘 병사들이 히치 하이킹(공짜로 차타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유난히 여자병사가 많고 더러는 상당히 나이들어 보이는 병사들도 눈에 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의 극적인 평화협정은 팔인들보다도 오히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골란고원에서 지뢰탐지·매설반에 소집돼 복무중인 예비군 로렌스 리프킨씨(39·건축업)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면서 『이제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던 예비군복무가 대폭 줄어들 것이고 아랍 보이콧정책이 완화되면 이스라엘의 침체된 경기도 살아날 것』이라며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예비군 50% 감축 그는 『이스라엘은 남녀 똑같이 18세부터 3년간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게 돼있으며 제대후에는 50세까지 연 30일씩 정기소집된다』고 설명하고 『그러나 각종 비상소집 등으로 실제로는 적게는 45일부터,많게는 90일까지 복무해 왔다』고 말했다. 이같은 기대를 반영하듯 지난 10월초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이츠하크 라빈총리는 한 야당의원의 질의에 대한 서면 답변에서 오는 96년까지 예비군을 91년 기준으로 50%까지 감축,점차 정규군으로 대체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같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의 기대를 안고 있는 이 평화협정은 세기말 이 지구상에 평화 도미노의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다.협정에 제시된 7개의 시한 가운데 이미 조인(9월13일)과 발효(10월13일)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같은 기대는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미 원조 이달 도착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6천명에 대한 석방에 합의하고 1차적으로 지난달 25일 수감중인 팔레스타인인 6백17명을 석방했다.또 이스라엘 치안당국은 지난 3월부터 시행중인 팔인들에 대한 예루살렘 출입제한 완화방침을 밝혔다. 국제적으로도 이 협정의 성사를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협정이행의 최대 걸림돌인 시리아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 등 각국 지도자들이 이스라엘과 시리아간 대화 중재에 나서고 있다.또 11월부터는 세계 각국이 약속한 경제원조 가운데 우선 미국으로부터 약속된 일부가 도착할 예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12월13일(5년자치 개시) ▲94년 4월13일(이스라엘군 가자지구·예리코 완전철수) ▲94년 7월13일(팔 총선완료,자치정부수립 위한 평의회구성) ▲95년 12월13일(점령지 지위를 규정할 항구평화협상 개시) ▲98년 12월13일(팔 자치기간 만료,점령지 지위확정)등 5개의 시한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낳게 한다.더욱이 그 시한은 최대한으로 잡은 것이기 때문에 잘만 된다면 기간이 짧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골란고원을 관통 벌써 이곳에서는 중동 종단평화고속도로등 각종 대형건설공사 계획등이 발표되고 있어 평화의 도래와 함께 이 지역이 과거 중계무역지로서의 세계적 명성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은듯 했다.베냐민 벤 엘리저 이스라엘주택장관이 밝힌 이 도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지중해안을 따라 터키의 이스켄데룬을 잇는 것으로 이집트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키 등을 지나게 돼있다.또 골란고원을 관통,이스라엘의 하이파항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횡단도로도 계획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중동의 평화에 대비하는 우리 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랐다.아직 우리 대사관이나 대한무역진흥공사 등 정부기관이 없는데도 이스라엘이나 레바논 등지에서 이미 한국제품들은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동예루살렘의 팔인 호텔 룸에서 금성TV를 볼 수 있었으며 베이루트에서 다마스쿠스를 운행하는 관광버스는 대우버스였다.또 현대건설은 레바논정부의 「호라이즌 2000」계획의 첫 사업인 8천만달러짜리 송전선공사를 따내 공사에 들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한국 상품 오랜 전쟁의 질곡에서 평화로 깨어나는 중동.가자시장 자카리아 미키박사의 얘기는 중동에 다시 한번 한국의 위력을 떨칠 그날을 기대하게 했다.『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성」 입니다. 웨스트뱅크의 비행장도 가자지구의 항만건설도 빨리 해야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기술도 좋고공사도 빨리 해낼 수 있는 업체라면 우리는 대환영 입니다』
  • 김부자 경호부대 5만명/탱크·미사일 갖춰 반란도 대비

    ◎귀순특수부대원 밝혀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김일성 부자의 경호를 위해 5만명을 배치하고 있으며 미사일과 탱크등 최신 무기까지도 갖추어 군의 반란까지도 대비하고 있다고 지난 7월 한국에 망명한 특수부대원 김명철씨(33)가 일본 요미우리(독매)신문과의 회견에서 22일 밝혔다. 김일성 부자를 위한 경호부대 「호위총국」에 근무한 뒤 군수품공장에서 일하다 망명한 김씨는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호위총국은 북한의 정규군인 조선인민군과는 별도의 편제로 김주석의 직할부대라고 말했다. 이 부대는 수도방위사령관인 이을설 부원수가 국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1호위부(김주석),2호위부(김정일비서),3호위부(노동당등 중요기관)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는 평안남도 평성시 외곽에 있는 김주석의 별장 경호를 담당하는 81경호여단에 근무했는데 이곳에는 김주석이 가장 좋아하는 별장이 자모산정상에 있으며 7천명의 장병이 배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김주석은 이 별장을 연간 평균 5차례 정도 이용하고 있으며 주로 수렵을 즐겼다고 밝혔다.
  • 북,3개군단 증편/국방부,「노동2호」개발 아직 미확인

    국방부는 16일 북한이 현재 사정거리가 2천㎞에 달하는 「노동2호」스커드 미사일을 개발중에 있다는 보도와 관련,『현재로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한·미당국간에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합참의 고위관계자는 이날 최근의 북한 군사동향에 대한 기자브리핑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노동2호 스커드미사일의 개발여부는 북한이 실제 시험발사를 하는 단계에 접어들어야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이 전시병력과 장비수송을 위해 휴전선 부근에 땅굴을 파고 있다는 보도도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현재 정규군단이 없는 3개도(양강·자강·황북)지구사령부를 군단으로 증편중이며 전방군단에 1백70밀리 자주포(사거리 54㎞)와 2백40밀리 방사포(사거리 70㎞)의 증강배치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인영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13도 의병 규합… 1907년 “서울진공” 시도/12월말 8천여명 연합부대 편성·지휘/양주서 집결…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무기·병력 열세로 일제에 패배… 한말 15년의병사 마감 『동포들이여,우리는 함께 뭉쳐 조국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우리는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을 전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27세 여주서 거병 이인영선생은 1868년 9월23일 경기도 여주군 군북면 교곡동에서 부친 이현상씨와 모친 한씨의 4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선생은 27세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등 압제를 강화해나가자 보다못해 유린석등과 함께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여주에서 의병 5백여명을 규합,왜군과 싸웠다.1896년 여름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의병해산령을 공포하자 선생은 할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고 경북 문경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일제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킨 뒤 고종을 폐위하는등 더욱 오만무례한 행동을 자행,나라의 형세는 말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고 있을 때 강원도에서 의병 2천여명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등이 선생을 통솔자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으나 부친의 병이 깊을 때여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했다.이은찬등은 나흘동안을 유숙하며 선생의 결단을 촉구하자 선생은 마침내 허락을 하기에 이른다.1907년 7월25일이었다.선생은 즉시 원주로 가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 선생은 곧 국내외에 격문을 발송했다.일제는 인류의 적이므로 분쇄,조국의 독립을 찾자는 내용이었다.해외동포들에게도 격문을 보내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 격문에 감동,의병으로 참가,그 수가 무려 1만여명에 달했다. 선생은 이때부터 1907년 11월까지 원주·철원등 강원 지역에서 38차례나 일군과 항전했다. ○일군 접전 38차례 선생은 시골에서 아무리 일군과 싸운다해도 서울을 일군이 장악하는 한 국권회복은 멀다고 판단,전국의 의병을 하나로 뭉쳐 서울로 진격시키는 전략을 굳혔다.산발적인 의병활동을 대규모 연합의병부대로 통합,일거에 일군을 패퇴시키려는방책이었다. 각 의병대장에게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라는 전갈이 전달된다.선생은 13도 창의대진소 원수부가 설치된 뒤 의병장들의 협의끝에 만장일치로 총대장으로 옹립됐다.선생도 이를 쾌히 승락하고 조직을 정비,관동군(강원도지역)6천여명과 진동군(경기·황해지역)2천여명을 축으로 연합대부대를 편성했다. 서울 진격일을 12월말로 정한 선생은 예하 각 의병대장들에게 경기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 일대에 진주토록 했다. 선생은 각 의병진에서 결사대원 3백여명도 엄선했다. 선생은 공격개시에 앞서 심복부하인 김세영에게 격문원고를 작성,서울에 가 이를 인쇄토록 지시했다.인쇄된 격문은 김세영이 직접 서울주재 각국영사관에 전달하게 했다. 선생은 이 격문에서 을사조약의 폐지와 13도 창의대진소를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 뒤 2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다.그러나 이때 이미 일군은 수천명의 보병과 기마병으로 망우리 일대 군사요충지를 선점,기다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결사대원이 앞장서 싸웠음에도 연발총무기로 무장하고 정규군대 훈련을 받은 일군 앞에는 불가항력이었다.선발대 의병은 항일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열악한 화살총으로는 패전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선발대는 설상가상으로 각도 의병진들이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망우리고개를 넘지 못한 의병대에 후퇴명령을 내리고 패전의 진용을 재정비할 무렵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1907년 12월25일(양력 1908년 1월28일)이었다.선생은 허위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퇴한다.3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그날로 문경 고향집으로 달려간다. ○42세때 체포·순국 선생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을 때 후임 의병총대장 허위는 소요산까지 퇴군하게 되었는데 일군이 산을 태워 공격하는 화공작전으로 나와 의병들은 1908년 5월14일 포천 영평에서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의병 15년사의 대미를 장식하려던 서울공략계획은 이로써 무산돼 버렸다. 선생은 이후 시영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북 상주,충북금계동으로 피신생활을 하면서 3년상이 끝나는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부친의 묘를 성묘하는 것이 단서가 돼 1909년 6월7일 금계동에서 9명의 일군헌병에게 붙잡혔다. 일본 헌병의 가혹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낸 선생은 『당시 전황이 그러한데 어찌 부친이 사망했다고 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은 조선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부모에 효도하지 않는 자는 금수와 같으며 금수는 신하가 될 수 없다.그러면 그것이 바로 불충인 것이다』고 답했다.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일왕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09년 9월20일 사형이 집행됐다.42세때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태평양시대 맞아 기동항모 도입을”/해군 「해양력 심포지엄」 중계

    ◎군구조 재편통해 번영·통일에 대비해야 해군은 4일 경기도 성남시 세종연구소에서 「제3회 국제해양력 심포지엄」을 열고 동북아 안보정세변화와 한반도 주변강대국들의 해군전력을 분석하고 우리나라 해군의 향후 발전방향을 모색했다. 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심포지엄은 해군해양력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와 대내외적인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미국·일본·러시아·영국등 국내외 학자 30여명등 1천여명이 참석했다.이날 주제발표자들의 발표요지는 다음과 같다. ○20년내 2함대 가능 ◇한국 군부의 사고와 해군력 발전방안 모색(강영오 해군연구위원·예비역해군준장)=군의 준비태세가 향상됨에 따라 육군의 방어전략은 지난 80년 중반부터 초공세적 전략으로 변했다.해군의 임무는 경제번영과 평화적 통일,태평양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재정립돼야 하며 한국해군의 세력구조도 재개발돼야 할 것이다.이에따라 3개 함모기동함대가 신설돼야하며 항모기동함대를 한국본토로부터 1천마일이내에서 호위할 수 있도록 유도탄구축함 2척과 유도탄호위함4척씩으로 구성된 최소 5개 수상함전대가 필요하다.국민총생산 성장률이 연간 5%이고 해군예산반영비율이 계속 유지된다면 20년이내 2개의 항모기동함대를 갖출 수 있다. ○일은 정규군화 모색 ◇아시아 안보에 대한 러시아의 시각과 해군력 정책(러시아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군사연구실장·세르게이 E 블라고볼린 박사)=안보영역에서 러시아가 당면한 정책과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미국,그리고 유럽공동체(EC)와의 제도화된 관계,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방해하는 문제들에 대한 신속한 해결책,한국과의 협력확장 및 강화등이다.아시아지역에서 러시아해군의 정책은 복잡한 개혁단계에 있으나 태평양에서의 러시아해군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은 정규군화 모색 ◇아시아 안보에 대한 일본의 시각과 해군력 정책(일본 히타치연구소 마쓰무라 쓰도무박사)=방위비의 압박, 자위대의 젊은 보충세력 부족과 결손등으로 일본의 안보정책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결코 급변하지 않을 것이다.군사력 보유권리를 허용하지 않은 일본헌법 개정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많은 일본국민은 일본내에서 법적으로 보장된 정규군을 갖기를 원하고 그에따라 세계평화에 평균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라고 있다.일본 북부 4개섬과 관련된 영토문제에 대해 러시아는 경제원조 협상을 정치와 분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정부는 정치와 경제원조가 집약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 아르메니아­아제르 영토분쟁 5년(포연속의 코카서스에 가다:중)

    ◎두민족 금세기 4차례 피의 살육전/“카라바흐 독립운동”“침략전쟁” 입장차/「국경선 변경」 걸려 국제적 중재도 허사 아르메니아군의 대공세는 금세기들어 4번째이다.3차 공세때인 1918년에는 수도 바쿠까지 아르메니아군이 진격,1만1천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두 민족간 원한의 뿌리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아제르바이잔측은 이번 공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토확장욕에 의한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이를 구소련시절 잘못된 역사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한 카라바흐주민들의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다.동족인 카라바흐주민들에 대한 무기·경제지원은 시인하되 자기들의 직접개인은 절대 부인한다. 양국분쟁의 진원지인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내에 고도같이 떠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주이다.이들이 고르바초프시절인 지난 88년 개혁분위기를 틈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다수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소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내쫓으면서 두 민족간 유혈충돌이 시작됐고 이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영토전역에서 강제추방과 피의 살육이 자행됐다. 지난 5년간 이렇게해서 생긴 인명피해가 쌍방 합쳐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의 공동묘지들은 전선에서 실려온 전사자들과 민간인 피해자들로 초만원이 됐다. 아르메니아의 직접 개입여부는 향후 카라바흐문제의 평화논의에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국제사회는 지금까지 아르메니아측 주장에 일리가 있다며 아르메니아정부에 아무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았다.유엔결의안도 카라바흐자치군대가 켈바자르를 침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격규모상으론 아르메니아 정규군의 직접 개입없인 불가능하다는게 통설이다.카라바흐자치군의 규모는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3만5천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번 아그담공격 때는 아르메니아군의 T­72탱크 20대와 20대의 장갑차가 동원됐고 지대지 그라드 미사일과 D­80가우비차 미사일이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2개의 탱크여단과 5개의 포병사단으로 구성된 아르메니아군 제2군단병력 6천명이 공세를 주도했다고 아제르바이잔측은 파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군의 배후에는 러시아군까지 개입돼 있다는게 아제르바이잔측의 주장이다.소련방해체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소련군이 완전 철수한 반면 아르메니아영토에는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러시아군 제7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군이 밀리는 이유 가운데는 정규군의 경험·훈련부족도 큰 몫을 차지한다.아르메니아는 지난 88년 독자군을 창설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금년초 겨우 독자군을 창설,그것도 각지구별 지방군대로 이루어져 일사불란한 작전수행이 어렵게 돼있다. 어떤 싸움에서든 쌍방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타협은 힘든 법이다.역설적으로 아그담이 점령된 직후 전전선에서 극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막후모색도 시작됐다. 그러나 양국간에는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를 자국영토내의 한 자치주로 간주,후원국인 아르메니아와의 국가간 협상을 고집하는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협상주체가 카라바흐 자치정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우선 카라바흐를 독립공화국으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바흐의 독립국인정은 넓게 보면 2차대전후 수립된 「국경선의 변경」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말이 날 성질이 아니다.우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양국의회의 승인도 있어야 한다. 국제적인 평화노력도 진행되고는 있다.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주도하는 중재노력이 대표적인 하나다.러시아·미·독·불·이·벨로루시·스웨덴·체코·터키등 「민스크그룹」9개국이 ▲점령지 선철수 ▲즉각휴전 ▲CSCE평화유지군주둔등을 명시한 유엔결의안 822호의 시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군이 힘의 절대우위를 확보한 이상 민스크그룹의 중재안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게 이곳의 분위기이다. 팰릭스 파미코니안 주모스크바 아르메니아대사는 『점령지철수등은 카라바흐정부가 결정해야지 아르메니아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아르메니아정부가 국제적인 중재 대신 카라바흐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 1대1 협상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음을 인정한 것이다.카라바흐는 이미 협상대표까지 선임해 놓고있다.휴전합의도 공식적으로는 카라바흐자치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에 마무리됐다. 아제르바이잔 아사이라다통신의 이라다 사장은 『전쟁와중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로서는 군사적으로 더 이상 밀리면 정권유지 자체가 어렵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일단 협상에 임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아제르바이잔 새정부가 쉽게 카라바흐의 독립을 인정해 아르메니아측에 넘겨주리라고 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6월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잃은 실지회복을 거사의 주명분으로 내세웠다.정권유지를 위해서도 일단 숨을 돌린 다음 재반격 기회를 노릴 것이 분명하다.평화해결의 길은 여전히 요원하게만 보인다.
  • 파키스탄군 수도 진입/오늘 대규모 반정시위… 충돌 우려

    【이슬라마바드 AFP 연합】 총리 퇴진과 총선 실시를 요구하는 파키스탄 야당의 대규모시위를 하루 앞둔 15일 아침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지시에 따라 군병력이 대거 동원돼 군과 시위대간의 충돌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다. 이슬라마바드 시가지에서는 대통령관저와 총리 관저,의사당으로 향하는 군병력수송트럭 행렬이 이어졌으며 행청 관청과 외국대사관들이 밀집한 중심가에도 군용차량들이 순찰에 나서는등 삼엄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슬라마바드 시에는 정규군뿐만 아니라 민병대 병력까지 동원됐으나 이들 민병대는 아직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약 20개 야당이 참가한 야당연합체인 『전정당회의』(APC)는 샤리프 총리의 사퇴및 긴급총선 실시를 요구하면서 정부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해 16일 50만을 넘는 군중을 동원해 이슬라마바드를 포위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 북,장거리포 전방지역 증강배치/국방부

    ◎노동1호 시험사격 성공사실 확인 국방부는 북한이 지난 5월말 함북 화대군 대포동 미사일사격장에서 발사한 노동1호(사정거리 1천㎞)로 보이는 장거리 유도무기 시험사격에 성공했음을 확인하고 발사된 4발 가운데 2발이 각각 5백㎞,1백㎞ 떨어진 동해상의 목표물에 명중했다고 24일 밝혔다. 국방부 당국자는 이날 최근의 북한 군사동향에 대한 브리핑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나머지 2발은 1백㎞이하 지점에 떨어졌으며 핵탄두장착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이들 미사일이 실전배치될 경우 주변국까지 위협이 확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당국자는 이어 『북한은 지난 90년 5월말 함북 화대군 무수단시험장에서 노동1호에 대한 최초시험사격을 실시한 뒤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여러가지정보등을 분석한 결과 이번에 시험사격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 76년 이집트로부터 구소련 스커드 B미사일 2기를 도입해 중국의 기술지원으로 자체개발에 착수,지난 84년 4월과 86년 5월에 각각 스커드B(사정거리 3백㎞)와 스커드C(5백㎞)미사일 시험사격에 성공했으며 스커드미사일은 구소련이 핵탄두장착이 가능한 전술핵무기로 개발한 미사일이라고 국방부는 밝혔다. 북한은 그뒤 중동지역에 스커드 B,C미사일 2백50여기를 수출했으며 황북 신계지역에 스커드C 미사일을 야전배치한 지난 88년부터 사정거리 1천㎞의 노동1호 개발에 착수했다. 한편 국방부는 북한의 군사동향과 관련,『95년을 통일의 해로 설정해 놓고 있는 북한은 휴전 40주년인 오는 7월27일을 전쟁준비 완료시한으로 정한 가운데 2백40㎜방사포와 1백70㎜자주포등 장거리포의 전방지역 증강배치와 지구사령부의 정규군단증편,전투함정의 건조등 군사력의 양적증강과 질적개선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상

    ◎“소 2개비행사단 50년11월 첫 참전”/극비특명… “계급장없이 중공군 위장”/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중국 안동에 본부… 총병력 2만6천명 투입/51년3월 증파… 미기와 북 상공서 공중전/스탈린,해군출전도 계획… 미 자극 우려 포기 ▷남침 초기◁ 러시아가 개방·개혁정책추진으로 철의 장막을 걷고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함에 따라 한국전쟁관련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6·25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군 정보장교(대위)로 9개월동안 소련의 제64비행단에 근무했으며 현재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묘노비치 올로프박사(69)의 증언을 3횡에 걸쳐 게재, 구소련의 한국전 참전비밀을 파헤쳐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3월 초순 어느 날 모스크바 군사영어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새 임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그렇게 해서 그해 10월까지 8개월여동안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근무지는 한국전 지원임무를 맡은 소련공군 제64비행단이 주둔하던 중국의 안동. 정보장교로 참모본부에 근무한 덕에 나는 당시 비행단의 병력규모,위치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우선 참모본부 아래 미그 15기 3개사단이 있었다.제1,2사단은 1950년 11월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3사단은 이듬해 3월 배치됐다.그외 구경 85㎜,37㎜로 무장한 대공포 2개사단이 별도로 있었다. ○미그­15 3개사단 병력수는 참전초기부터 종전을 맞아 철수할 때까지 2만6천명선이 계속 유지됐다.이는 조종사 3백명이 포함된 숫자이다.보유무기로는 주력기종인 미그­15기가 1백80∼2백대,야간전투기인 LA­11(재래기종)25∼30대,대공포구경85㎜가 1백40∼1백60문,37㎜포가 1백30∼1백50문이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이 전쟁에 불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그래서 여러가지 비상수단이 취해졌다.모든 병력이 기장,계급장이 없는 중국군복을 입었고 조종사들은 비행중 무선교신시 절대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물론 이런 지시들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조종사들이 초기에 조종간옆에다 간단한 교신어를 한국어나 중국어로 음을 적어놓고 발음만 흉내내기도 했으나 작전시 이로 인한 혼란이 커서 대부분 러시아어로 교신을 했던게 사실이다.물론 전투기들도 모두 중국·북한표지를 했다. ○중국·북한기 표지 보다 중요한 점은 혹시 격추돼 참전사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작전지역이 철저히 제한됐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은 종전때까지 지켜졌다.동으로 동해,남으로는 전선에서 1백80㎞ 떨어진 39도선이 우리의 작전한계선이었다.즉 북한영토내에서는 압록강을 끼고 청진과 신안주사이가 우리의 작전지역이었다.미군측은 이 지역을 「미그앨리(소로)」라고 불렀다. 전쟁개시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김일성이 당시 외교부장 박헌영과 함께 극비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지원을 요청한 이래 스탈린은 참전에 끝까지 적극적인 태도롤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직접무력대결을 원치않았기 때문이다.마지막에 스탈린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리게 만든 것은 모택동의 참전결정이었다.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왔고 특히 중국내전에 참여해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1만4천명의 북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이 50년초 귀국,정규군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북한군의 사기는 상당히 드높았다. 이런 여러 고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다.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대련항을 떠난 소련군함들이 참전의혹을 받지 않도록 즉시 귀항명령을 받았고 이후 전쟁기간 내내 소해군은 한국전에 개입치 않았다. ○중 개입 영향받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을 때도 스탈린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무력개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당시 정치국원으로서 모스크바 시 당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가 무력개입을 의미하는 「즉각적인 방어정책수립」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스탈린은 이도 묵살했다.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결국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의용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며 스탈린에게 병력이송과 물자보급을 위해 압록강 교량6곳의 안전이 긴요하고 이를 위해 소공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강조했다. 1950년 11월 말 소공군 2개 전투비행사단이 실전에 투입되자 미군의 B­29기들이 압록강 철교들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주 목표는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교량 2곳이었다.하나는 복선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철도 겸용 다리였다. 당시 북한은 임시수도를 신의주에 두고 있었고 김일성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중국군·북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B­29기 폭격이었다.그래서 그 해 11월 12월 사이 미그­15기의 최대공격목표도 이 B­29였다.안동에서는 40∼50대의 미그­15기가 당시 압록강을 넘어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말 소련군지도부는 제공권을 되찾기 위해 64비행단의 보강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 결과 이듬해 3월 소련공군의 영웅 이반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새 비행사단이 안동에 도착했다.이렇게 해서 그해 봄 북한상공에서는 보강된 소군기와 미군기 사이에 전례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됐다. ▷필자 약력◁ ▲1924년생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역사학박사) ▲소공군 64비행단 정보장교로 한국전참전 예비역대령 ▲저서 「절대무기의 개랍」(1988)「제3제국과 제3의 법칙」(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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