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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선물해야 되는 ‘학교 밖 선생님’들

    아직도 선물해야 되는 ‘학교 밖 선생님’들

    학원·어린이집엔 여전히 선물 관행 “1만~3만원 커피 쿠폰 돌리느라 부담”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스승의날 학교 풍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지만 부모들은 여전히 고민스럽다. 학교 교사에게 선물과 꽃 등을 주는 관행은 사라졌지만, 어린이집 등 보육기관 종사자나 학원강사 등 ‘제도권 밖의 선생님’들에게는 여전히 성의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14일 서울 여의도의 한 대형 쇼핑몰은 스승의날 선물을 사려는 학부모들로 붐볐다. 30대 학부모는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선물하려고 하는데 원장에게도 줘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온라인 맘카페에도 비슷한 고민이 여럿 올라왔다. ‘올해 어린이집 학부모가 됐는데 교사에게 선물을 보내도 되느냐’는 단순 질문부터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부모는 조리사 선물까지 챙긴다는데 우리 아이만 밉보일까 봐 걱정’이라는 하소연까지 다양했다. 청탁금지법 시행 뒤에도 학부모들의 ‘선물 고민’이 여전한 건 법 적용 대상에서 빠진 교육 종사자들 때문이다. 이 법은 현직 초·중·고교 정교사와 학교 기간제 교사, 유치원 교사, 교수 등 교육 관련 법상 교원으로 임용된 이들에게 적용된다. 학원 강사, 어린이집 교사, 방과 후 과정 지도 교사, 학습지 선생님 등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 입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교육 강사나 맞벌이 부부가 크게 의존하는 어린이집 교사의 영향력은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24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직장인 서모(34·여)씨는 “일부 어린이집은 가정통신문을 보내 ‘스승의날 선물은 물론 편지도 받지 않을테니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공지했다던데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은 공지가 없었다”면서 “선물을 보낼지 말지 시험에 든 기분”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북지역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학부모도 “작은아이의 어린이집 교사에게 3만원, 언어 치료 선생님 1만원, 큰아이 영어·피아노·태권도 강사에게 1만원씩 커피 쿠폰을 돌렸다”고 전했다. 반면 학교 교사들에겐 스승의날이 피하고 싶은 날이 됐다. 교육부에 따르면 15일 전국 초·중·고교의 5.8%인 694개 학교가 재량휴업을 할 계획이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은 교육부 장관에게 스승의날을 법정 기념일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학부모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의 김하영 변호사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어린이 보호·보육 역할은 같기 때문에 어린이집 교사가 청탁금지법 대상이 아니더라도 자체적으로 동일 기준을 적용해 학부모들에게 안내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괴짜지만… 인간적인 과학자, 다윈

    괴짜지만… 인간적인 과학자, 다윈

    의학·신학보다 자연·생명에만 관심 집 뒷마당서 비둘기 사육 등 ‘바보 실험’ 7명 자녀·주변인들과 소통하며 연구 ‘종의 기원’은 새로운 시각에서 시작신이 자연을 설계했다는 자연신학에 맞선 진화론으로 근대 과학계를 뒤흔든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과학자’라 부른다. 심지어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다윈을 뉴턴,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사상가로 치켜세운다. 에든버러대에서 의학공부를 한 지 2년도 못 돼 낙향하는가 하면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도 생명에만 관심을 가졌던 다윈. 그는 어찌 보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문제아이자 이단아였다. 미국 웨스턴캐롤라이나대 생물학 교수인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윈보다 더 솔직한 다윈을 추적했다. 오랜 천착의 결실인 이 책을 통해 다윈은 이렇게 정의된다. ‘끊임없이 관찰, 실험하고 주변사람들과 소통한 인간적인 과학자’.비글호에 몸을 싣고 5년여에 걸쳐 진행했던 남아메리카 탐방은 다윈의 인생 행로를 결정지은 단초임에 틀림없다. 다윈은 좁은 선실에서 우상인 찰스 라이멜의 저서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고 정박지마다 열대림과 해안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 채집했다. 19세기 과학계를 뒤집어놓은 진화론의 결정체인 ‘종의 기원’은 바로 갈라파고스를 포함한 그 탐험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종의 기원’을 비롯한 큰 업적이 어디서 발현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책은 다윈이 40년간 살며 위대한 발견을 도출해 낸 다운하우스의 시골집 뒷마당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그 뒷마당 실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이들과 교류하고 고민했는지를 세밀하게 소개한다. 다윈은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한 과학자다. 줄창 생명과 자연에만 관심을 쏟는 다윈을 향해 아버지는 ‘가족과 네 자신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는 폭언을 했다고 한다. 대신 다윈은 할아버지의 기질을 더 많이 받았다. 영국의 유명 시인 콜리지가 ‘다윈화하기’(darwinizing)라는 단어를 만들만큼 대담한 창의력을 지닌 의사 겸 시인이었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 저자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 평범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 한 것이 위대한 ‘종의 기원’의 시작이라고 잘라 말한다. ‘발견을 위한 진정한 항해는 새로운 풍경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데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일갈처럼 다윈은 당대의 주류인 자연신학에 의심을 품고 자연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 의심과 실험의 역사적 장소가 집 뒷마당 실험실이다. 종의 이동 실험을 위해 오리발로 만든 달팽이 사육장과 갖가지 농도의 소금물 항아리들, 실험용 씨앗을 얻기 위한 잡초 정원, 변이 실험을 위해 만든 따개비밭과 비둘기 사육장….그곳에서 다윈이 진행한 온갖 관찰과 실험 과정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비둘기를 키우고 온실에서 덩굴식물을 키우며 아이들과 함께 벌들을 쫓아다닌다. 파리지옥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먹이로 주는가 하면 지렁이에게 합주곡을 들려주는 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진화론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했다. 저자는 특히 그 기발하고 독특한 실험이 세상과 동떨어져 혼자만의 연구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강조한다. 7명의 자녀가 다윈 곁에서 언제나 기꺼이 조수 역을 맡았다고 한다. 사촌과 조카는 물론 집사와 가정교사까지 자신의 연구에 끌어들이는 데 능숙했으며 친구와 지인들을 동원해 표본을 구하거나 실험에 필요한 도움을 구했고 동료들에게도 수시로 조언을 받았다. 다윈 자신도 그 실험들을 가리켜 ‘바보실험’이라 부르곤 했다고 밝힌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윈은 한때 새로운 풍경을 찾아 세계를 여행했지만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주변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는 법을 터득하면서 보냈다. 우리도 실험가 다윈을 알아 가다 보면 친숙함 속에서도 친숙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지게꾼에서 ‘벚꽃 알바’까지

    [그때의 사회면] 지게꾼에서 ‘벚꽃 알바’까지

    여자친구처럼 벚꽃 구경을 같이 해주는 이른바 ‘벚꽃 알바’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대학생 아르바이트는 눈물겨웠다. 현실은 냉혹했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Y대 의대에 입학한 한 학생은 갖은 아르바이트를 다 해 보았지만,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면제를 먹고 삶을 포기하려 했다. 1964년이었다. 이 학생은 나중에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됐다. 1960년대 대학생에게 ‘3T’가 있었는데 파티, 데이트, 그리고 아르바이트였다(동아일보 1963년 5월 29일자). 1950년대에 사환 근무, 찹쌀떡·메밀묵·우유·담배·만년필 장사, 신문팔이, 구두닦이는 중고생들이 주로 했다. 대학생들은 가정교사나 야학 교사, 타이프라이터, 번역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구하기 어려웠다. 밤거리를 누비며 행상 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서울역에서 지게꾼 일도 했다. 선거철이 되면 선거 운동원의 절반이 혈기왕성한 대학생들로 채워지곤 했다. 누드 모델을 불건전한 직업이라고 할 순 없지만, 건전하지 않은 일로 돈을 버는 학생들도 없지 않았다. 일부 여학생은 비어홀이나 카바레, 요정 등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직업소개서를 찾은 여학생을 윤락가로 넘긴 사건도 있었다. 돈 받고 자신의 피를 파는 매혈(賣血)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길이었다. 1950년대 초 댄스 열풍이 불었을 때 카바레에서 학생, 깡패, 제비족을 포함한 젊은 남성이 가정부인이나 여학생을 유인하는 행위를 ‘아르바이트’, 그런 카바레를 ‘아르바이트홀’이라고 불렀다. 번성하던 아르바이트홀과 사창가 실태를 둘러본 윤치영 서울시장이 남긴 말은 “할 말이 없소이다”였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17일자). 1970년대 들어 아르바이트도 다양해졌다. 연구소 조사원, 시간제 사무직, 안내원, 도난경보기 외판원, 바텐더, 디스크자키, 연말연시 카드 판매 등이다. 백화점 거리 선전원이나 판매원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대생들이 인기였다. 다방을 종일 빌려 차를 파는 1일 찻집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다. 미팅에도 이용되는 다방 티켓을 많게는 1000장을 팔아 수입이 적지 않았다. 골프장 캐디로 일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서울에 캐디 학원이 한 곳 있었다(동아일보 1975년 10월 27일자). 1980년 과외가 금지돼 대학생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음식 배달, 집 봐주기, 세탁물 수거, 학습지 확장 요원 등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방학 때 중동 건설 현장에서 뛰기도 했다(매일경제 1981년 12월 21일자). 대학들은 ‘아르바이트 조합’, ‘아르바이트 개발위원회’를 만들어 일자리 찾기를 도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영원한 ‘맨발의 청춘’ 신성일…전설이 된 배우, 그를 추억한다

    영원한 ‘맨발의 청춘’ 신성일…전설이 된 배우, 그를 추억한다

    “우리 영감님 돌아가신 지가 5개월이나 됐네요. 저녁노을만 보고 있으면 ‘이 양반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넘기고 떠났을까’ 하는 생각에 소리없이 눈물이 주르륵 나와요. 가만히 책을 보고 있어도 흐느껴지더라고요. 사람의 정이라는 게 이렇게 가슴 깊이 뿌리 박혀 있구나 싶어요.” 지난해 11월 남편이자 동료 배우였던 신성일(1937~2018)을 떠나보낸 엄앵란(83)이 고인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4일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 내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 ‘청춘 신성일, 전설이 되다’ 개막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사람들에게 슬픈 모습과 눈물을 보여 주기 싫어서 줄곧 집에서 지냈다”면서도 신성일과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는 내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1960년대 ‘청춘의 아이콘’ 조명 신성일은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래 50여년간 영화 514편에 출연하면서 오랜 시간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1962년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신성일은 1964년 ‘맨발의 청춘’에 출연하면서 최고의 스타에 등극했다. 특히 그는 1964~1974년 제작된 한국 영화 가운데 4분의1에 해당하는 작품에 출연했을 만큼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사를 관통했다. 엄앵란은 “남편이 일만 하다가 죽어서 참 불쌍하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희생자”라면서 “진달래, 벚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 ‘아이고 이 사람아, 나한테 드라이브도 시켜 주고, 장어에 소주도 같이 먹었으면 좋은 추억이 남았을 텐데. 어찌 그리 바빴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은막의 황금 콤비’라고 불렸던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3년 ‘가정교사’에 함께 출연하면서 최초로 ‘스타 시스템’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청춘교실’(1963)에 이어 ‘맨발의 청춘’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신성일·엄앵란 콤비는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영화에 함께 출연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1964년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치렀다. 엄앵란은 젊은 날 만난 신성일의 모습을 떠올리며 “신인 배우였을 당시 눈을 크게 뜨면서 카리스마 있게 연기를 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이 남자는 되겠다’ 싶었다”면서 “의리 있는 모습에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좋아하게 됐다. 남자는 그래야 된다”며 미소 지었다. ●엄앵란과의 결혼식 앨범도 첫 공개 엄앵란은 전시를 둘러본 뒤 “눈물이 핑 돌았다”면서 “남편이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영화박물관이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전시를 보니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신성일이 1960년대 출연한 청춘 영화를 통해 그가 어떻게 ‘청춘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집중 조명한다. 신성일이 생전에 아꼈던 상패와 두 사람의 결혼 앨범,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이 입은 흰 가죽 재킷과 청바지, 엄앵란이 입은 더블 단추 코트 등을 복원 제작해 전시한다. 이날 개막식에는 신성일·엄앵란의 아들 강석현·딸 강수화씨를 비롯해 이장호·정진우 감독과 배우 박정자·안성기,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장, 평론가 김종원·김두호·정중헌 등 영화계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억했다. 기획전은 6월말까지 계속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핼리 혜성을 ‘밝힌’ 핼리의 특이한 삶

    [이광식의 천문학+] 핼리 혜성을 ‘밝힌’ 핼리의 특이한 삶

    -다음 돌아올 핼리 혜성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남쪽의 튀코 우주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핼리 혜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핼리 혜성의 존재를 최초로 밝힌 것으로 유명한 에드먼드 핼리는 영국의 천문학자로, 지구 물리학, 수학, 기상학 및 물리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견들을 해낸 다용도 과학자다. 1656년 11월 8일 영국 런던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핼리는 어려서는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공부하다가 17세가 된 1673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핼리는 입지(立志)가 빨랐던 인물이다. 일찍이 천문학에 꽂혀 20살 때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개인적인 관측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다니던 옥스퍼드 대학을 그만두고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1677년 11월 7일 수성이 지구와 태양 사이의 일직선상에 놓이는 태양면 통과(transit) 현상의 관측과, 아직까지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남반구 별들을 관측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핼리는 수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고 진자실험(振子實驗)을 했다. 22살 때 귀국한 그는 341개 남반구 별들의 정보를 실은 '남천 항성목록'을 출판한 데 이어, '행성의 궤도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명성을 쌓았다. 영국와 찰스 2세는 옥스퍼드에 핼리에게 석사학위를 주라는 칙령을 내렸다. 중퇴자에게 석사학위를 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 당국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칙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핼리는 대학 중퇴자로서 석사학위를 받았을 뿐더러, 왕립협회 회원으로 천거되어 당당한 천문학자로 입신했다. 그때 핼리의 나이 22살로, 최연소 왕립협회 회원이었다. 왕실 천문학자이자 그리니치 천문대장인 존 플램스티드는 핼리를 ‘남쪽의 튀코’라고 불렀다.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역사상 최고의 육안 관측자로 꼽히는 튀코 브라헤에 비견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돌아온 핼리 혜성 영국으로 돌아온 지 4년째가 되던 핼리는 그의 삶에서 전기가 된 천문학적 사건을 맞게 되었다. 장대한 꼬리를 가진 대혜성이 출현한 것이다! 오늘날 핼리 혜성이라 불리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혜성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왔다. 핼리의 시대에도 혜성은 재앙을 알리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사자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뉴턴의 친구인 핼리는 누구보다 만유인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우주의 모든 천체는 만유인력의 영향을 받는다. 이는 곧 혜성이 태양을 향해 떨어져가다가 이윽고 태양을 유턴할 것이다. 말하자면 타원형 궤도를 도는 것이다. 핼리는 헤성에 관한 과거의 기록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꼭 76년 전인 1607년, 그리고 다시 76년 전인 1531년에 밝은 혜성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그전의 기록들에도 밝은 혜성이 75년 내지 76년을 주기로 관측되었다. 1607년의 혜성에 대해 요하네스 케플러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직선으로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핼리는 위의 혜성들이 모두 같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 혜성은 약 3/4세기의 공전주기로 거대한 타원을 그리며 태양 둘레를 도는 태양계의 일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기가 좀 차이나는 것은 목성의 인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핼리는 1705년 뉴턴의 역학을 적용해 그 궤도를 산정하여 '혜성 천문학 총론'>이란 책을 펴냈다. 핼리의 추측이 맞다면, 1682년 밤 인류에게 엄청난 흥분을 불러일으킬 혜성은 다음에는 1758년 말이나 1759년 초에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핼리가 그때까지 산다면 102살이다. 핼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약 우리가 예측한 바가 맞다면, 이 혜성은 1758년경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때 우리의 정직한 후손들은 이 혜성이 영국인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음에 감사히 여길 것이다.” 핼리 혜성의 다음 회귀년은 2061년 핼리는 86살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자신의 예언이 맞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정말로 성취되었다! 1758년 천문학계는 혜성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혜성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며 접근해왔다. 하늘에 나타난 ‘혜성의 귀환’을 맨 먼저 본 사람은 천문학자가 아니라, 아마추어 별지기인 독일의 한 농부였다. 그는 성탄 전야에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물고기자리 근처에서 빛나는 한 점을 발견했다. 그후 이 대혜성은 핼리 혜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핼리의 공적에 의해서 혜성 중에 주기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대의 기록을 알아보면, 지금까지 29회의 출현기록이 남아 있는데,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기원전 467년 중국 주대(周代)의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10년에 이어 1986년 지구에 출현한 핼리는 소련의 베가 1호, 유럽 우주기구의 지오트 탐사기, 일본의 플래닛 탐사기 등의 카메라에 의하여 얼음에 덮인 핵과 꼬리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핼리 혜성의 다음 방문은 2061년으로 예약되어 있다. 현재 지구 행성에서 살고 있는 70억 인구 중 2분의 1은 그때 핼리 혜성이 태양을 향해 달려가는 장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핼리 혜성은 앞으로 약 1천 번 더 회귀할 것이며, 7만 6000 년 후에 수명을 다하게 된다. ​ 핼리가 천문학에 끼친 다른 큰 영향은 항성의 고유운동 발견이다. 그는 시리우스와 아르크투루스, 알데바란의 위치가 1850년 전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가 기록했던 위치에서 30분(1/2도) 이상 움직인 것을 발견했다. 핼리는 이것을 바탕으로 별들이 움직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고유운동의 발견은 수정구에 별들이 박혀 있다고 주장한 천동설의 관에 마지막 대못을 박은 것이나 같았다. 핼리는 다재다능하여 그의 과학적 업적도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중 하나는 최초로 과학적인 인간의 사망률표를 만든 것으로, 이는 그후 생명보험회사들이 보험료를 산출하는 데 기초가 되었으며, 인구 통계학의 시초가 되었다. 그밖에도 뉴턴의 '프린키피아'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도 바로 핼리였다. 성질 까칠한 뉴턴이 만유인력의 우선권을 놓고 로버트 훅과 마찰을 빚은 나머지 프린키피아 집필을 거부했다. 핼리는 뉴턴과 훅 사이를 원만히 조절하여 뉴턴으로 하여금 다시 집필하게 하고, 원고 교정을 기꺼이 떠맡았을 뿐만 아니라, 자금이 모자라는 왕립협회를 대신하여 사비로 책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핼리가 아니었다면 '프린키피아'는 자칫 햇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류 과학 발전에 끼친 핼리의 공적은 적지 않다 할 것이다. 핼리는 1703년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의 천문학 교수가 되었고, 64살인 1720년에는 플램스티드의 뒤를 이어 2대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에 취임했다. 1742년 1월, 그가 평생을 보냈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삶을 마감했다. 향년 86세. 손에는 포도주 한 잔이 쥐어져 있었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갤럭시 S10 공개]③‘비서’ 아닌 ‘코디’…빅스비 루틴을 들이시겠습니까

    [갤럭시 S10 공개]③‘비서’ 아닌 ‘코디’…빅스비 루틴을 들이시겠습니까

    미국 샌프란시스코 빌 그레이엄 시빅 센터에서 20일(현지시간) 열린 ‘삼성 갤럭시 언팩 2019’에서 인공지능(AI) 비서 ‘빅스비’가 또 다시 주목 받았다. 삼성전자는 ‘갤럭시 S10’ 빅스비에 ‘빅스비 루틴’(Bixby Routines)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사용자 생활 습관에 따라 자동으로 개인화된 스마트폰 설정을 추천해 주는 기능이다. 원래부터 빅스비는 여러 기능을 수행했다. 연동된 애플리케이션을 작동 시킨다든지, 지시에 따라 검색을 해준다든지, 날씨 등 생활 정보를 검색해 알려줬다. 사용자가 심심해서 끝말잇기라도 제안하면 ‘해질녘’이나 ‘버섯’ 같은 난도 높은 단어를 대는 설계된 유머 감각도 갖췄다. 이미 답을 찾는데 능숙했던 ‘빅스비’는 ‘빅스비 루틴’에서 어떻게 진화했을까. ‘빅스비 루틴’은 사용자의 반복적 행동을 분석한 뒤 사용자에게 필요한 스마트폰 사용법을 추천한다. 차를 탈 때마다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내비게이션을 켜고, 음악을 트는 일을 반복하는 사용자의 패턴을 ‘빅스비’가 포착한 뒤라면 운전자가 차량에 탑승해 블루투스를 연결할 때 빅스비가 내비게이션을 켜고 음악을 트는 앱을 동시에 구현하거나 추천하는 식이다. 사용자가 자주 확인하는 앱을 초기 화면에 제시해 손쉽게 앱을 구동시키게 해 사용자의 스마트폰 사용 방식을 한결 간단하게 만들고, 부대효과로 배터리 사용량을 줄이는 식의 작업도 ‘빅스비 루틴’이 수행할 수 있다.기존 ‘빅스비’가 질문을 하면 답을 가르쳐 주던 비서나 가정교사 같았다면, ‘빅스비 루틴’은 사용자의 스마트폰 사용 습관까지 교정해주는 ‘코디’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빅스비가 작동하는 기본 개념인 ‘인텔리전트 기능’은 ‘갤럭시S’의 사진 촬영 기능에도 적용됐다. 전작에서 눈 감은 사진을 골라내는 등의 기능을 이미 수행한데 이어 ‘갤럭시 S10’ 카메라는 촬영 시 장면을 분석해 가장 적합한 채도·대비·노출 등을 조절해 주고 촬영 장면을 최적의 구성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구도를 추천해준다. 손떨림 등으로 인해 피사체가 기울어진 형태로 촬영을 하려고 하면, 촬영 화면에 수평선 형태로 지시선을 그어줘 촬영 구도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돕는다. 다만, 이 기능은 전면 카메라로 촬영할 때에는 쓸 수 없다. 셀카 모드에선 여전히 카메라 인텔리전트 기능 도움 없이 스스로 제 구도를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지만 한국 매체가 간과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본 기사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1903년 재정비한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고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한편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았다. 1918년 종교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자산과 토지가 몰수돼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고 재산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일본 당국이 조선선교회를 세르기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한반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지하에 일본 정교회의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 소속 베냐민 대주교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 말 추방당했다. 선교회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그때의 사회면] “여비서를 빌려줍니다”/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여비서를 빌려줍니다”/손성진 논설고문

    “맹물을 팝니다.” 사오십년 전에 마실 물을 판다고 하면 대동강 물을 제 것처럼 팔았다는 누구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에는 주인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누구나 사 먹는 생수제조업이 이색 업종이었다. 1972년에 창립한 초정약수 회사를 소개하는 기사는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왜 물을 실은 차가 서울 시내를 누비는지…”라고 쓰고 있다. 회사 경영자를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고 했다. 소비층은 외국 대사관이나 미군 등 90%가 외국인이었다. 소주처럼 유리병에 담아 팔았다(매일경제 1977년 7월 16일자).지금은 누구나 이용하지만 한때 이색·신종 업종 또는 직업이었던 것들이 있다. 1982년 초 통금 해제 한 달 만에 서울에서는 발빠르게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자가 운전자들을 겨냥한 대리운전 업체가 몇 개나 생겼다. 그때만 해도 이색 업종으로 지상에 소개됐다. “식단을 팝니다.” 신축 아파트촌인 서울 여의도에는 이런 광고 전단이 뿌려졌다. 요일별로 다른 반찬을 곁들인 밥상을 배달해 준다는 광고였다(1982년 12월 14일자). 지금은 없어진 ‘음식상 배달업’이다. 용역회사의 원조는 어디일까. 1983년 지상에 “여비서 빌려줍니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1일 비서로 일종의 대행업이었다. 미모의 여성들을 확보해 사무 보조부터 모임 수행, 야유회 파트너, 출장 수행원으로도 ‘대여’하지만 “엉뚱한 마음을 품고 대여하려 할 때는 거절당할 것”이라고 돼 있다(동아일보 1983년 4월 2일자). 1966년에 소개된 이색 여성 직업은 백화점 여직원, 여자 운전사, 외국 관광객 안내원, 병아리 감별사, 사진기자 등인데 지금은 전혀 이색적이지 않은 여성 직업이다. 1970년에는 캐디, 비서직, 사서직 등이 이색 직업에 들었다. 1971년에는 남녀를 통틀어 고층건물 유리닦이, 엘리베이터걸, 차도의 행상, 슈퍼마켓 감시원, 운전학원 아가씨 교사, 고속도로 요금징수원이 신종 직업군에 들어 사회상의 변화를 반영했다. 또 1970년대에는 많은 집에 있던 식모(가정부)가 없어지고 파출부(가사 도우미)라는 신종 직업이 생겨났다. 1985년에 신문에 소개된 이색 직종은 이렇다. 정원관리업, 패션수선업, 쥐잡이 회사, 각종 모임 때 주안상을 차려 주는 회사, 김장 대행업, VTR을 이용한 신종 가정교사, 전화교환 관리업. 지금은 생활양식의 변화로 없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반짝 직종이었던 셈이다. 직업은 세태의 흐름을 반영하고 발전한 사회일수록 종류도 많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짝사랑을 대신 고백해 주는 직업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살아남아 있을까.
  •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유아교육과 신입생 모집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유아교육과 신입생 모집

    청강대 유아교육과에서 오는 11일까지 정시 신입생 모집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특히, 청강대는 이번 정시 전형에서 역대 최대 모집인원인 13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정시 전형은 수능점수 60%와 학생부 40%를 반영하여 선발한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이하 청강대)는 7개 전문 분야 스쿨과 1개 학과를 운영하며 문화산업 분야에 필요한 전문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대학이다. 그 중 유아교육과는 1996년 개교 때부터 학교와 함께 성장해온 단일전공 학과이다. 3년제 과정으로, 유치원 정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교육부가 요구하는 교육자격취득 검정 기준에 맞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청강대 유아교육과는 차별화된 커리큘럼과 체계적인 취업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에 청년실업률이 심각했던 2018년도에도 청강대 유아교육과 2017학년도 졸업생의 취업률은 89.2%에 달했다. 이러한 청강대 유아교육과는 2013년과 2017년에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전문대학교 유아교육과를 대상으로 한 교원양성기관평가에서 두 번 모두A등급을 받았다. 청강대가 유아교육기관으로써 훌륭한 교원양성 능력이 있다고 평가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연에서 놀이로 함께 크는 아이, 청강 놀자공’이라는 이름의 특성화 교육과정이 있다. 유아교육과의 권유선 교수는, “‘청강 놀자공’은 국내 유아교육과 최초로 놀이, 자연, 공동체 교육과정(이하 놀자공)으로써, 대학 캠퍼스를 둘러싼 5만여 평의 자연체험장에서 유아들과 직접 상호작용하며 유아교사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프로그램”이라고 전했다. 이어 “정규교과과정 외에, 유아교육과 교수진과 푸드스쿨, 패션스쿨 그리고 공연예술스쿨의 교수진이 협업하여 개발한 ‘유아문화예술 융합 프로그램’을 통해 유치원 현장에서 요구되는 창의유아교육의 역량을 함께 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성을 갖춘 현장형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청강대는 지난 10월, 권위 있는 해외 자연놀이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국제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유아교육 기관장들과의 네트워킹을 구축하는 등 산학협력에 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청강대 유아교육과에 관심이 있는 수험생들은 오는 4일부터 6일까지 서울양재 aT센터 제2전시관에서 전문대학 정시박람회에서 1:1 상담을 받아볼 수 있으며, 무료로 지원이 가능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물질의 유토피아, 정신의 디스토피아… 맨발의 청춘 울린 서울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물질의 유토피아, 정신의 디스토피아… 맨발의 청춘 울린 서울

    ‘2018년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는 이번 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지난해 5월 12일 1회를 시작한 이후 매주 토요일 오전과 한여름 밤 그리고 추석 연휴 기간을 이용해 총 35차례에 걸쳐 서울 전역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서울미래유산을 중심으로 서울의 역사 현장을 두 발로 밟았고, 사연을 톺아보았습니다.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매회 정원 30명이 조기 매진됐고, 1회 평균 35명이 참석해 연인원 1225명이 서울미래유산과 함께했습니다. 투어는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배출한 서울도시문화지도사 17명이 해설자로 참여해 각양각색의 해설을 선사했습니다. 또 매회 투어 대상지의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흥미진진 견문기, 서울미래유산 톡톡 등 3개 꼭지의 원고를 서울신문 지면에 실어 이해를 도왔습니다. 무료 답사프로그램으론 처음으로 오디오가이드시스템을 도입해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2019년에는 더 알찬 프로그램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5회 서울의 영화2(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편이 지난해 마지막 주말인 12월 29일 중구 명동과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에 모인 참석자 40여명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영락교회~명동예술극장~유네스코회관을 거쳐 옛 반도호텔 자리인 롯데호텔과 아이스링크가 설치된 서울광장을 순례했다. 영하 11도의 한파가 몰아친 현장답사에 이어 청진동 라이나생명 전성기캠퍼스에서 영화스틸을 이용한 영화 해설과 함께 일정을 마무리했다.●빛과 그림자 양극단이 공존하는 서울 “영화에서 서울을 읽겠다는 것은 영화에 일시적으로 재현된 수많은 서울의 역사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불연속적인 단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서울이란 당위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 삶의 무한한 임시거처이며 그 삶들이 중층화되고 끊임없이 변경되는 현실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모더니티와 영화장치가 적극적으로 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이다. …서울은 유일한 대안이자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라고 영화평론가 변재란 순천향대 교수는 ‘근대화 시기 한국영화를 통해 본 영화 안의 서울’이란 논문에서 영화도시 서울을 분석했다.문학작품 속 서울처럼 영화 속 서울 또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일제강점기, 전쟁과 분단의 비극과 참상 그리고 서울로의 인구집중, 근대화 및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무자비한 개발이 낳은 인간성 상실과 사회병리 현상을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은 물질적으로는 유토피아지만 정신적으로는 디스토피아이다. 빛과 그림자의 양극단이 공존하는 거대도시이다. “경험은 기억 속에서 엄격히 고정돼 있는 개별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산물이 아니라 종종 의식조차 되지 않는 자료들이 축적돼 하나로 합쳐지는 종합적 기억의 산물”이라는 도시연구가 발터 베냐민의 지적처럼 서울이라는 도시는 영화필름에 담긴 영상적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영화 ‘맨발의 청춘’은 서울관객 25만명을 동원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자 대중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4·19, 5·16이라는 미증유의 변혁기를 거치면서 외국영화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을 한국영화 전용상영관으로 끌어 모은 청춘영화의 결정판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청춘영화의 기수’라는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김 감독은 1961년 ‘5인의 해병’으로 메가폰을 잡은 뒤 1960~70년대 흥행보증수표로 통했다. 모교인 서울예대 영화과 교수,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이 영화를 빼고 한국의 대중영화를 말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아류작들을 배출했다. 1964년 아카데미극장에서 3·1절 특선영화로 개봉됐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6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남과 북의 체제 경쟁, 조국근대화의 계몽적 담론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생을 젊은이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내세운 여느 영화와는 달리 사회의 암적 존재인 깡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색달랐다. 시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불우한 개인사를 가진 두수를 통해 떠도는 젊은이의 억압된 열망을 보여 줬다. 그러나 일본영화 ‘진흙 속의 순정’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모방작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문화의 유입이나 유행을 경계하는 부정적 시선이 엄연하던 때였다. 고아 출신의 불량배와 고위 외교관 자녀의 사랑이라는,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 설정과 지나치게 서구적인 소비문화, 동반자살을 택하는 극단적인 자유분방함은 허황된 낭만주의와 통속적이고 신파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신성일·엄앵란의 사랑의 불씨가 된 영화 신성일과 엄앵란이라는 당대 최고 청춘심벌을 결합시킨 작품이라는 영화 외적 측면도 무시 못 한다. 두 사람은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콤비를 이룬 뒤 정진우 감독의 ‘배신’에서 최초의 키스 장면을 선보였고, ‘맨발의 청춘’이 최고의 흥행작이 되면서 사랑의 감정에 불이 붙었다. 김 감독의 ‘동백아가씨’를 찍은 부산에서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1964년 11월 14일 세기적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가정교사’, ‘청춘교실’, ‘떠날 때는 말없이’, ‘학생부부’ 등 80여편에서 호흡을 맞췄다. 신성일의 본명은 강신영이다. 신성일을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시킨 신상옥 감독이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영어를 한자 예명으로 지어줬다. 신성일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거칠 것 없는 자유인, 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삶을 산 로맨티스트라고 소개한다. 모두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60~70년대 청춘스타의 대명사였고, 한국영화배우협회 초대 이사장을 거쳐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영화에서 감초역을 맡은 아가리(트위스트 김)가 울면서 두수의 시신을 실은 리어카를 눈길 위에서 끄는 엔딩 장면에도 재미난 사연이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을 낳았고,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맨발이 나오는 장면이다. 그런데 눈을 찾아 대관령으로 간 촬영팀의 카메라에 잡힌 거적에 덮인 맨발의 주인공은 신성일이 아닌 제2 조감독이었다고 한다.●감독도 배우도 주제곡 부른 가수도 떠나고 두수라는 캐릭터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탄생했다. 신성일이 대한민국 최고의 멋쟁이로 여겼던 김두수 우석학원재단 이사장이다. 미국 배우 앤서니 퀸을 닮은 그에게 신성일이 전화를 걸어 “형, ‘맨발의 청춘’에 형 이름 써도 괜찮아?”라고 묻자 그는 “나야 좋지”라고 흔쾌히 허락했다. 두수는 뒷골목 사나이의 이름으로 어울렸다. 요안나란 이름은 세례명이다. 때 묻지 않은 고귀한 이름으로 뒷골목 사나이와 신분격차를 벌리는 역할을 했다. 주제곡도 히트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보는/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첫 장면부터 짙은 페이소스가 풍기는 가수 최희준의 저음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이다. 3·1절 기념작으로 개봉 일정이 잡힌 영화는 촬영기간 18일 만에 급조됐다. 편집기사 출신으로 편집의 명수였던 김 감독은 촬영 중반부터는 아예 녹음실에 틀어박혔다. 현장에서 찍어서 녹음실로 보내면 녹음실에서 편집해 가면서 녹음을 했다. 신성일은 “영화는 조감독 고영남과 나, 엄앵란 셋이 현장에서 만들다시피 했다. 시간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맨발의 청춘’은 장고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다. …엄앵란과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지낸다. 가정의 즐거움을 같이 누리면서도 애정 문제만큼은 상대방의 의지에 맡기고 구속하지 않는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우리나라 현실에서 미래의 부부상을 일찌감치 실천하는 셈이다”라고 자서전에 썼다. 김 감독은 2017년 9월, 가수 최희준은 2018년 8월, 신성일은 2018년 11월 각각 별세했다. 한시대가 저물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 소득주도성장 갈등… ‘J노믹스’ 김광두 사의

    소득주도성장 갈등… ‘J노믹스’ 김광두 사의

    최근 잇단 쓴소리… 文, 반려 가능성도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뼈대에 해당하는 ‘J노믹스’ 설계를 주도한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지난달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의장은 그동안 대통령 직속 경제자문기구(의장 대통령)를 이끌면서도 소득주도성장의 방식을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경제철학의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6일 “김 부의장이 몇 달 전부터 사의를 표명했고, 그동안 만류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완강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 부의장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도왔다. 2012년 박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기) 공약을 입안하는 등 ‘경제 가정교사’로도 불렸다. ‘합리적 보수’로 통하는 그는 진보성향 경제학자인 김상조 현 공정거래위원장을 매개로 2016년부터 문 대통령과 공부모임을 통해 연을 맺었고, 지난해 3월 ‘문재인 캠프’에 공식 합류해 ‘새로운 대한민국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최근 이상신호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8월 페이스북에 “국정 이슈에서 효율성에 관한 인식이 거의 안 보인다. 잘못 기획된 정책의 잘못된 결과를 모두 세금으로 메꾸려 한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2일 한 세미나에서 “일자리를 파괴하면 정의로운 정책이 아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사의를 반려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전에도 “역할을 좀 더 해달라”며 반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소득주도성장 갈등… ‘J노믹스’ 김광두 사의

    소득주도성장 갈등… ‘J노믹스’ 김광두 사의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뼈대에 해당하는 ‘J노믹스’ 설계를 주도한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지난달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의장은 그동안 대통령 직속 경제자문기구(의장 대통령)를 이끌면서도 소득주도성장의 방식을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경제철학의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6일 “김 부의장이 몇 달 전부터 사의를 표명했고, 그동안 만류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완강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 부의장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도왔다. 2012년 박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기) 공약을 입안하는 등 ‘경제 가정교사’로도 불렸다. ‘합리적 보수’로 통하는 그는 진보성향 경제학자인 김상조 현 공정거래위원장을 매개로 2016년부터 문 대통령과 공부모임을 통해 연을 맺었고, 지난해 3월 ‘문재인 캠프’에 공식 합류해 ‘새로운 대한민국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최근 이상신호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8월 페이스북에 “국정 이슈에서 효율성에 관한 인식이 거의 안 보인다. 잘못 기획된 정책의 잘못된 결과를 모두 세금으로 메꾸려 한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2일 한 세미나에서 “일자리를 파괴하면 정의로운 정책이 아니다”라면서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정책을 수용하는 대상이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면 독이 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사의를 반려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전에도 “역할을 좀 더 해달라”며 반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가짜 영수증에 신상품은 원장 집으로… 50명분 국엔 두부 2모만”

    “가짜 영수증에 신상품은 원장 집으로… 50명분 국엔 두부 2모만”

    “어린이집은 원장이 지배하는 하나의 왕국입니다. 가짜 영수증, 식자재 빼돌리기는 예삿일이죠.”보육·복지 시민단체 연대체인 ‘보육더하기 인권 함께하기’는 14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어린이집 비리 근절을 위한 시민사회 간담회’를 열고 보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리를 폭로했다. 사례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현직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와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제보 등을 토대로 했다. 집계된 사례에 따르면, 서울 노원구 한 공공형 어린이집 원장은 6시간 근무하는 시간제 교사를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정교사인 것처럼 허위로 등록한 뒤 임금 일부와 교사에게 나오는 수당을 자신에게 상납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파구 한 국공립 어린이집 원장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나 생활용품을 산 뒤 원생 급식용 과일을 산 것으로 ‘허위 영수증’ 처리를 했다. 경남 한 어린이집 원장은 새 교구나 가전제품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고 헌 제품만 어린이집에 배치했다. 평가 인증을 받을 땐 다른 어린이집에서 교구 교재를 빌려와 비치했다가 돌려주는 ‘꼼수’도 썼다. 또 한 어린이집에서는 50명분의 국을 끓이는 데 식자재를 아낀다고 두부 2모만 사용하는가 하면, 영유아에게 제공하지 않는 식재료인 ‘문어’가 원장 가족의 제삿날에 맞춰 식자재로 들어오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은 유기농 식자재를 사용한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 온 것으로 나타났다. 서진숙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 의장은 “보육정보시스템 접속 권한이 오직 원장에게만 부여되고, 그들만 보육서비스 공급자로 지정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남희 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은 “국공립 어린이집조차 대부분 민간에 위탁돼 사유화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서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고 원장이 피고용인으로 순환 근무하는 사회서비스공단 어린이집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어린이집은 원장의 소왕국입니다” … 어린이집 비리 ‘천태만상’

    “어린이집은 원장의 소왕국입니다” … 어린이집 비리 ‘천태만상’

    “영유아 어린이집은 원장의 소왕국입니다. 가짜 영수증, 식자재 훔치기, 가구 바꿔치기는 흔한 일상이죠.”보육·복지 시민단체 연대체인 ‘보육더하기 인권 함께하기’는 14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지하 느티나무홀에서 ‘어린이집 비리 근절을 위한 시민사회 간담회’를 열고 보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리 사례를 공개했다. 이들은 사립유치원 비리와 같은 문제가 영유아들을 돌보는 어린이집에서는 국공립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경남 한 어린이집 원장은 새 교구나 가전제품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고 헌 제품만 어린이집에 배치했다. 평가 인증을 받을 땐 다른 어린이집에서 교구 교재를 빌려와 비치했다가 돌려주는 ‘꼼수’도 썼다. 서울 노원구의 한 공공형 어린이집에서는 6시간 근무하는 시간제 교사를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정교사로 등록하고서 임금 일부와 교사에게 나오는 지자체 수당을 원장에게 ‘페이백’하도록 했다. 한 지역에선 두 어린이집이 담합해 각각 버스를 한 대씩 빌린 것으로 영수증 처리하고 실제론 한대만 빌려 두 어린이집이 돌려가며 썼다. 버스 한 대 비용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서울 송파구 국공립 어린이집에서는 원장이 인근 소매점에서 자신의 필요 물품을 구입하고는 과일을 구매한 것으로 가짜 영수증 처리를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의 내부 제보로 드러났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가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에서는 더 적나라한 사례가 드러났다. 한 어린이집에서는 21개월 영아에게 떠먹는 간식을 제공하면서 어른 숟가락 두 번 정도만 떠서 줬다. 또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50명분의 국을 끓이는 데 두부 2모를 사용했다. 자장면이 간식으로 공지가 나간 날에는 짜파게티를 끓인다는 증언도 나왔다. 영유아 아이들에게 제공하지 않는 식재료인 ‘문어’가 원장 가족의 제삿날에 맞춰 식자재로 들어오기도 했다. 어린이집을 위한 김치를 담근다며 교사들과 김장을 하곤 김치 대부분을 원장 집에 가져가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어린이집 비리 문제가 국공립 위탁으로 인한 원장의 사유화와 원장 독점 운영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서진숙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 의장은 “어린이집은 보육정보시스템을 통해 지자체와 연결돼 회계, 근무 중인 교직원 현원, 운영상태 등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지만 이 서버는 각 원장의 공인인증서로만 접속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모든 정보는 원장을 통해 위로 올라가고 원장을 통해야만 교사에게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어린이집 수는 4만 238개이며 그중 국공립은 3157개다. 그러나 국공립어린이집 가운데 84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에 위탁된 상태다. 김신애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은 모든 정보가 공개되기 때문에 투명한 줄 알고 더 믿었지 이런 문제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두 아이가 각각 국공립어린이집과 가정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어 어린이집 감사 결과 정보공개 청구를 했는데,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지자체로부터 우리는 감사가 아닌 지도점검만을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남희 참여연대 복지조세팀장은 “어린이집은 명백한 회계부정이 발생하는 경우 외 가짜 영수증 처리나 원장의 급간식, 물품을 개인적으로 빼돌리는 것은 적발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국공립어린이집도 다수가 민간위탁 개인 원장에 의하여 사유화되는 사례가 드러난 이상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는 사회서비스공단 어린이집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온종일 돌봄부터 국공립 교사 수급까지… 유치원 해법 ‘산넘어 산’

    온종일 돌봄부터 국공립 교사 수급까지… 유치원 해법 ‘산넘어 산’

    국공립은 오후 5시까지만… “늘어도 고민” 병설, 초등학교 건물 임차 탓 종일반 눈치 교사수 두 배로 급히 늘리면 교육 질 저하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맞벌이 김모(39)씨 부부는 내년에 만 3세가 되는 딸이 다닐 유치원을 알아보다 걱정만 늘었다. 주변 국공립유치원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있지만 해당 유치원이 통학차량을 운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방과후 과정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아 퇴근 전까지 아이를 봐줄 사람을 새로 구해야 하는 점도 고민이었다. 집 근처 사립유치원은 통학차량 운행에 밤 10시까지 아이를 봐주는 온종일 돌봄 서비스도 하고 있지만 ‘비리 유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김씨는 “국공립에 당첨되더라도 걱정이고, 그렇다고 근처 사립에 보내자니 찜찜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국공립을 늘린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통학버스나 온종일 돌봄 서비스가 없다면 결국 사립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립유치원 비리로 정부가 내년 국공립유치원 확대 목표를 기존 목표의 두 배인 1000학급을 증설하겠다고 밝혔지만 학부모들은 “국공립이 늘어도 고민”이라고 한숨을 쉰다.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하지만 통학버스 운행 등 사립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4일 교육부와 유치원 현황 공시 사이트 ‘유치원알리미’에 따르면 2018년 전국 4707개 국공립유치원 중 통학차량을 운영하는 곳은 2296곳(48.8%)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반면 사립유치원은 전체 4088개 중 4031곳(98.6%)이 통학차량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 7~9시, 오후 8~10시에 추가로 아이를 봐주는 온종일 돌봄 서비스를 실시하는 비율도 사립이 높다. 국공립유치원은 전체의 2.6%(123곳)만 온종일 돌봄을 하고 있지만 사립은 두 배에 가까운 274곳(6.7%)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를 봐주고 있다. 온종일 돌봄을 받는 유아 수는 사립이 3만 5715명이고, 국공립은 1만 6038명이다. 그런데 온종일 돌봄을 하는 국공립유치원은 대부분 단설유치원이라 혜택을 받는 지역이 한정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전국 국공립유치원(국립 3곳 제외) 중 병설은 4322곳으로 380곳인 단설보다 10배 이상 많다. 한 병설유치원 관계자는 “초등학교 건물을 임차해 쓰는 병설의 경우 장소 특성상 밤 늦게까지 온종일 돌봄 서비스를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공립유치원의 교사 수급과 관련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신규 유치원 교사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당초 내년 국공립유치원 정교사 1018명을 뽑기로 했던 정부는 국공립 확대 방침에 따라 선발 인원을 늘려 발표할 예정이다. 배지현 성결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현 정부 계획대로라면 기존에 목표치 대비 두 배의 신규 인원을 선발해야 하는데 양적으로 급하게 인원을 늘리다 보면 이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유치원 현장의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교장 아빠가 딸 면접… 합격자는 정해져 있었다

    교장 아빠가 딸 면접… 합격자는 정해져 있었다

    사립학교 교사 채용 비리 3년 새 21배 급증이사장 마음대로 채점 기준 변경 가능 뒷돈 받거나 재단 지인 응시자 등 뽑아“다음 응시생의 수업 실연이 있겠습니다.” 대구의 한 사립중·고교 교무부장이 신규 교사 채용 시험장에 응시자 A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심사를 맡은 영어과 교사 2명이 힐끗 눈치를 보자 교무부장은 눈짓했다. ‘작전 신호’였다. 심사위원들은 수업 내용과 무관하게 A씨의 수업 지도안과 수업 실연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 응시자의 운명은 이미 합격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 이사장에게 1억여원을 건넨 상태였다. 학령인구 감소 탓에 교사 되는 길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가운데 A씨 사례처럼 불법적으로 교원을 뽑는 채용 비리가 3년 새 20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개채용 형식만 갖추면 이사장이 마음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교사를 뽑을 수 있는 제도 때문이다. 채용 시험의 공정성을 믿고 공부에만 몰입했다가 탈락한 예비교사들은 두 번 울고 있다. 8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교원 채용 비리 적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4년간(2014~2017년) 사립 초·중·고교가 부정한 방법으로 교원을 채용했다가 덜미 잡힌 건수는 모두 93건이었다. 2014년 3건에 불과하던 사립학교 교원 채용 비리는 매년 늘어 지난해에는 63건으로 급증했다. 시·도별로는 대구가 49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16건)·서울(13건) 순이다. 가장 흔한 채용 비리 방식은 애초 공지한 시험 방법을 멋대로 바꿔 점찍은 응시자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대구의 한 사립고교에서는 중국어 정교사를 채용하면서 ‘관광’ 과목 담당인 교감이 혼자 실기시험 평가를 맡아 재단 이사장의 처조카인 응시자 B씨를 통과시켰다. 면접 평가 때는 B씨의 사촌언니인 행정실장이 참여해 최종 합격시켰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사립고에서 진행한 기간제 교사 채용 때는 학교장이 단독 면접관으로 참여해 딸을 1대1 면접한 뒤 최고점을 줘 선발했다. 이후 서울 교육청이 감사에 착수하자 임용을 포기했다. 대전의 한 사립고는 채용 공고문에 1차 때 필기·논술시험을 본다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필기시험과 서면 심사로 변경해 감사에 적발됐다. 사립학교가 연간 5조 4700억원(2017년 기준)의 정부 재정 보조금을 받는 만큼 채용 비리를 막을 엄정한 장치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립학교가 신규 교사 선발 절차를 교육청에 맡기는 ‘교육감 위탁 채용 제도’가 있긴 하지만 참여율이 지난 3년간 평균 30%에 불과했다. 박경미 의원은 “사립학교 위탁 채용 제도를 의무화하는 등 시스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교장 아빠가 딸 면접하고 이사장이 채점 기준 바꾸고, 바늘구멍 교원 채용… 합격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교장 아빠가 딸 면접하고 이사장이 채점 기준 바꾸고, 바늘구멍 교원 채용… 합격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공개선발 형식 갖추면 기준 변경 가능 뒷돈 받거나 재단 지인 응시자 등 뽑아 신규 교사 선발절차 교육청에 맡기는 ‘사립학교 위탁채용 제도’ 의무화 필요“다음 응시생의 수업 실연이 있겠습니다.” 대구의 한 사립고교 교무부장이 신규 교사 채용 시험장에 응시자 A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심사를 맡은 영어과 교사 2명이 힐끗 눈치를 보자 교무부장은 눈짓했다. ‘작전 신호’였다. 심사위원들은 수업 내용과 무관하게 A씨의 수업 지도안과 수업 실연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 응시자의 운명은 이미 합격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 이사장에게 2억원을 건넨 상태였다. 꽁꽁 얼어붙은 교원 채용 시장 상황을 틈타 뒷돈을 줬거나 재단 고위직의 지인인 응시자를 불법적으로 뽑는 채용 비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공개채용 형식만 갖추면 이사장이 마음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교사를 뽑을 수 있는 제도 탓에 예비교원들을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채용 비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흔한 채용 비리 방식은 애초 공지한 시험 방법을 멋대로 바꿔 점찍은 응시자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대구의 한 사립고교에서는 중국어 정교사를 채용하면서 ‘관광’ 과목 담당인 교감이 혼자 실기시험 평가를 맡아 재단 이사장의 처조카인 응시자 B씨를 통과시켰다. 면접 평가 때는 B씨의 사촌언니인 행정실장이 참여해 최종 합격시켰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사립고에서 진행한 기간제 교사 채용 때는 학교장이 단독 면접관으로 참여해 딸을 1대1 면접한 뒤 최고점을 줘 선발했다. 대전의 한 사립고는 채용 공고문에 1차 때 필기·논술시험을 본다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필기시험과 서면 심사로 변경해 감사에 적발됐다. 이 학교 교장의 딸은 서면 심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 합격했다. 사립학교가 연간 5조 1200억원(2016년 기준)의 정부 재정 보조금을 받는 만큼 채용 비리를 막을 엄정한 장치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립학교가 신규 교사 선발 절차를 교육청에 맡기는 ‘교육감 위탁 채용 제도’가 있긴 하지만 참여율이 지난 3년간 평균 25.3%에 불과했다. 선발권을 교육청에 넘기면 재단의 힘이 약해지고 원하는 사람을 채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여를 꺼린다.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은 “사립학교 위탁 채용 제도를 의무화하는 등 시스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교장 아빠가 딸 면접…합격자 정해져있다

    교장 아빠가 딸 면접…합격자 정해져있다

    사립학교 교사 채용 비리 3년 새 21배 급증이사장 마음대로 세부 기준 정해뒷돈 받거나 재단 지인 응시자 등 뽑아 “다음 응시생의 수업 실연이 있겠습니다.” 대구의 한 사립중·고교 교무부장이 신규 교사 채용 시험장에 응시자 A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심사를 맡은 영어과 교사 2명이 힐끗 눈치를 보자 교무부장은 눈짓했다. ‘작전 신호’였다. 심사위원들은 수업 내용과 무관하게 A씨의 수업 지도안과 수업 실연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 응시자의 운명은 이미 합격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 이사장에게 1억여원을 건넨 상태였다. 학령인구 감소 탓에 교사 되는 길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가운데 A씨 사례처럼 불법적으로 교원을 뽑는 채용 비리가 3년 새 20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개채용 형식만 갖추면 이사장이 마음대로 정한 기준에 따라 교사를 뽑을 수 있는 제도 때문이다. 채용 시험의 공정성을 믿고 공부에만 몰입했다가 탈락한 예비교사들은 두 번 울고 있다.8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교원 채용 비리 적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4년간(2014~2017년) 사립 초·중·고교가 부정한 방법으로 교원을 채용했다가 덜미 잡힌 건수는 모두 93건이었다. 2014년 3건에 불과하던 사립학교 교원 채용 비리는 매년 늘어 지난해에는 63건으로 급증했다. 시·도별로는 대구가 49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16건)·서울(13건) 순이다. 가장 흔한 채용 비리 방식은 애초 공지한 시험 방법을 멋대로 바꿔 점찍은 응시자에 혜택을 주는 것이다. 대구의 한 사립고교에서는 중국어 정교사를 채용하면서 ‘관광’ 과목 담당인 교감이 혼자 실기시험 평가를 맡아 재단 이사장의 처조카인 응시자 B씨를 통과시켰다. 면접 평가 때는 B씨의 사촌언니인 행정실장이 참여해 최종 합격시켰다. 지난 1월 서울의 한 사립고에서 진행한 기간제 교사 채용 때는 학교장이 단독 면접관으로 참여해 딸을 1대1 면접한 뒤 최고점을 줘 선발했다. 이후 서울 교육청이 감사에 착수하자 임용을 포기했다. 대전의 한 사립고는 채용 공고문에 1차 때 필기·논술시험을 본다고 해 놓고는 실제로는 필기시험과 서면 심사로 변경해 감사에 적발됐다. 이 학교 교장의 딸은 서면 심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최종 합격했다. 전문가들은 채용 비리 증가세 원인으로 채용 인원 감소에 따른 높은 경쟁률과 사립학교가 가진 선발 재량권을 꼽는다. 지난해 사립 유치원과 초·중·고교에서 뽑은 정규 교사는 969명으로 2015년(1279명)보다 24.2%나 적었다. 사립학교가 연간 5조 470억원(2017년 기준)의 정부 재정 보조금을 받는 만큼 채용 비리를 막을 엄정한 장치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립학교가 신규 교사 선발 절차를 교육청에 맡기는 ‘교육감 위탁 채용 제도’가 있긴 하지만 참여율이 지난 3년간 평균 30%에 불과했다. 선발권을 교육청에 넘기면 재단의 힘이 약해지고 원하는 사람을 채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여를 꺼린다. 박경미 의원은 “사립학교 위탁 채용 제도를 의무화하는 등 시스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위탁 채용을 의무화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11년만의 데자뷔’ 김현종은 또 그자리에 있었다

    ‘11년만의 데자뷔’ 김현종은 또 그자리에 있었다

    #2007년 6월 30일, 미국 워싱턴의 하원 의사당.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역사적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에 서명을 했다. 2006년 2월 3일 김 본부장과 로버트 포트먼 당시 USTR대표가 협상 개시를 선언한 지 약 1년 4개월여 만. #2018년 9월 24일, 미국 뉴욕의 롯데 뉴욕팰리스 호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가 한·미 FTA 개정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FTA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지난 1월 5일 워싱턴에서 첫 공식 회의를 가진 이래 8개월여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제가 이것을 두번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FTA 가정교사’로 불렸고, 참여정부 당시 진보진영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논쟁적 이슈였던 한·미 FTA 체결을 주도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4일(현지시간) 한·미 FTA 개정안 서명이 매듭지어진 소회를 이처럼 농담을 섞어 밝혔다. 이번 한·미 FTA 개정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고조된 미·중 무역전쟁은 물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연합(EU) 간 FTA 협상 등 전세계가 ‘통상 쓰나미’에 휩싸인 가운데 가장 먼저 타결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날 뉴욕 쉐라톤 타임스퀘어호텔에 한국 취재진을 위해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브리핑을 위해 들어선 김 본부장은 지난 2007년 첫번째 한·미 FTA 협정 서명 당시와 꼭같은 노랑, 빨강, 보라, 녹색 등이 검정색과 사선으로 배색된 넥타이와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로써는 11년전 그날이 떠올랐기 때문일 터.김 본부장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양국의 안보와 통상 모두 안정적으로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한미 FTA 개정을 진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일각에서는 개정안에 서명하기 전에 미국의 ‘자동차 232조 조치’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국익증대 차원에서 서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정절차를 2019년 1월까지 완료되도록 합의했다. 10월 안에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며 “만약 국회에서 비준동의가 되지 않아 개정안 발효가 지연되면서 양국의 분쟁이 발생할 상황이 된다면, 서로 협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이후에는 미국의 자동차 232조 조치에서 한국이 제외되도록 하는 데 통상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설명했다. 김 본부장은 또한 “저는 첫번째(2007년)도 그랬고, 두번째도 마찬가지인데 한·미 FTA를 깰 생각을 하고 협상에 임했다”고 협상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 “내가 (미국 측에) 이걸 왜 깨겠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며 “한·미 FTA라는 것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통과의례의 하나인데,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인지 깨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인지 계산을 해 봤을 때 우리 민족으로서 ‘퀀텀점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계량화가 안 되는 차원에서도 통상 분야에서는 퀀텀점프를 할 수 있으면 그만큼 유리할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런 계산을 했기 때문에 나는 깰 생각도 있다는 것을 상대방한테 설명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캐나다와 멕시코와는 달리 소규모, 타결 가능한 패키지로 가자. 국익·국격·국력 증대 차원에서 크게 손해 보지는 않는 것이고, 우리의 ‘레드라인’을 다 지킬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서명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개정안은 지난 3월 한·미가 공개한 합의 결과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미국이 한국산 픽업트럭을 수입할 때 붙이던 관세를 20년 더 유지해 2041년에 없애기로 했다. 양국은 독소조항으로 꼽혀온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의 소송 남용을 제한하고 정부의 정당한 정책권한을 보호하기 위한 요소를 협정문에 반영했다. 김 본부장은 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로 미국 윌브럼 앤드 먼스 고교를 나와 컬럼비아대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를 받은 미국통이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뒤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법률자문관을 지냈고, 민간인으로서 처음 통상교섭본부장에 발탁돼 참여정부 때 한·미 FTA 협상을 이끌었다. 2007~2008년에는 유엔 대사를 역임했고 2009~2011년에는 삼성전자 해외법무담당 사장을 맡아 ‘삼성맨’으로 변신했다. 2016년에는 2월 4·13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됐고, 인천 계양갑에 출마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부활된 통상교섭본부장(차관급)에 전격 기용되면서 또한번 주목을 받았다. “통상 책임자의 숙명은 다중인격자가 돼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는 협상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2007년 당시 협상 막바지 무렵 자동차와 반덤핑 분야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짐 싸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라”며 미국 측을 강하게 압박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뉴욕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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