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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령화 시대 ‘고용 안정’ 시급 판단

    근로자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본격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와 같다. 2018년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 우리나라도 ‘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면서 정년 연장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국회에서 여야가 정년 60세 연장안에 사실상 합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뒤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연장된 만큼 정년도 현실화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국민들도 큰 이견이 없었으며, 이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특히 6·25 이후 1955년에서 1963년 사이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들이 50대가 되면서 그들의 대량 퇴직 사태가 예고된 것도 정년 연장을 이뤄내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일단 정부와 노동계는 적잖은 기대감을 내보이고 있다. 고용 안정성을 담보하며 조기 퇴직자 일자리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금 재정과 의료보험 재정에 대한 정부의 부담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부양 의무 부담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정년 연장이 장밋빛 제도만은 아니다. 넘어야 할 관문도 숱하게 남았다. 사측은 임금피크제를 임금 삭감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고, 노조는 정년연장은 받아들이면서 임금피크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다. 여야가 22일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합의 턱밑까지 이르렀음에도 최종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제도 도입 이후 노사의 편법 운용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정년 연장이 노사 간 갈등을 더욱 키우는 불씨가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임금체계가 연공서열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임금피크제 도입을 병행하는 취지도 퇴색될 것이라는 우려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신규 채용이 줄면서 청년 실업 문제가 심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점도 문제다. 고령자 취업 문제가 청년 취업문제와 ‘제로섬 게임’ 관계에 있는 탓에 퇴직자 수가 줄어드는 만큼 신규 취업의 문턱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 퇴직 연령이 2~5년 늦어지면서 생길 수 있는 승진 적체 현상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또 고용주의 부담도 더욱 커진다. 초임 저연령 근로자보다 고령 근로자 수가 많아질수록 지출해야 하는 인건비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일정 연차 이상이 되면 임금이 줄어드는 ‘임금피크제’를 병행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일의 효율성도 문제다. ‘젊은 피’ 수혈이 더뎌지면 회사의 연령 구조가 역피라미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업장에서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역동성이 떨어져 기업 조직이 경직화될 수 있다는 게 사회 안팎의 우려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점이 통계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서울광장] 종군기자들은 춤만 추고 갔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종군기자들은 춤만 추고 갔다/진경호 논설위원

    싸이가 신곡 ‘젠틀맨’을 내놓은 지난 13일 밤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엔 그의 열혈팬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전쟁이 임박한 한반도’를 취재하라는 지시에 따라 한국에 급파된 외신기자들이 여럿 있었다. CNN과 ABC, 폭스뉴스 등 미국 방송들은 물론 영국의 뉴스전문채널 ITN, 중동의 알자지라 방송에서부터 저 멀리 스웨덴의 기자까지 죄다 몰려 나왔다. 문 닫힌 파주 남북출입사무소도 찍고, 비무장지대(DMZ) 철책 너머도 찍고, 광화문에서 시민 인터뷰도 했건만 전쟁의 낌새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던 판에 저마다 본사로부터 ‘기왕 갔으니 싸이 공연을 취재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받아들고 찾은 기자들이다. 어색함도 잠시, 이들은 곧바로 뜨거운 현장의 열기에 녹아들었다고 한 외신기자는 전했다. 몇몇은 아예 웃통을 벗어젖히고 시건방춤을 따라 추며 환호했다고 한다. 북 미사일도, 김정은도, 자신이 왜 한국에 왔는지도 그 순간엔 다 잊었을 테고, 종군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감을 안고 왔을 이들은 결국 그날 밤 이런 기사를 써 보냈다. “세계의 시선이 김정은의 평양이 아니라 싸이의 서울에 몰리고 있다.”(인디펜던트) “김정은이 싸이를 질투할 것 같다.”(CNN) 싸이 공연의 타이틀이 ‘해프닝’이었다던가. 아마도 이들에겐 그날 자신들이 목도한 한반도가 통째로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전쟁 개시자’라는 미 NBC 전쟁 전문기자 리처드 엥겔까지 날아든 마당에 수만명이 싸이 춤에 맞춰 ‘알랑가 몰라, 알랑가 몰라~’ 흥얼대다니, 한국인들이야말로 알 길 없는 족속이었을 듯싶다. 배 좀 나오고 눈 좀 째졌다고 싸이와 김정은을 구분 못하고, 그 연장선에서 영국 가디언이 서슴없이 ‘싸이와 김정은의 공통점’을 따져보고, 김정은의 말춤 패러디를 수백 가지 쏟아내는 한반도 밖의 눈으로, 60년의 분단사를 헤쳐오며 쌓은 한국인들의 ‘평정심’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녕 한국은 달라졌다. 1983년 이웅평 대위가 미그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 그 11년 뒤 1차 북핵 위기가 닥치고 김일성이 죽었을 때, 온 나라는 라면을 사재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그 뒤로도 라면은 몇 차례 더 동이 났다. 그러나 북이 3차 핵실험 이후 연일 ‘말폭탄’을 터뜨리며 협박해 온 지난 두 달 동안, 우린 라면도 생수도 쟁여 놓지 않았다. 계속된 자극에 순치됐을 수도 있다. 총체적 국력차에 따른 자신감, 군과 정부에 대한 믿음도 있을 듯하다. 먹고사느라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탕은 하나일 것이다. 이젠 고등학생만 돼도 북의 행태를 알 만큼 아는, 한층 성숙해진 우리의 대북 인식이다. 안보 불감증이 도를 넘었다고 개탄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북의 허튼 위협에 우리가 흔들렸다면, 결과는 대책 없는 양보나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을 것이다. ‘코리아 리스크’는 현실이 되고, 금융시장을 필두로 경제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김정은이 바라던 상황으로 내달았을 것이다. 우리도 모르게 세계 각지의 전쟁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떠난, 그 위중한 일주일을 보내고 남북 간에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미국이 김정일의 숨은 돈을 찾아내 묶으면 북이 펄쩍 뛰며 다시 반발하겠지만 일촉즉발의 고비는 넘기는 듯하다. 의연한 자세로 한국이 위기를 헤쳐가고 있는 것이다. 핵과 미사일 카드를 그렇게 흔들었건만 눈길을 받기는커녕 한반도의 2대 광대로 꼽히다니, ‘최고 존엄’의 심사가 꽤 틀어졌을 법도 하지만 어떤가. 선대와 달리 그래도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은 젊은 피 아닌가. 걸맞게 뭔가 좀 달라야 하지 않겠나. 라이벌 싸이가 주먹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 하나로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걸 지금 보고 있지 않나. 흘러간 미국의 농구선수를 부를 게 아니라 깔끔하게 “싸이씨, 평양에 한번 오라”고 하는 건 어떤가. 세상은 그렇게 뒤집는 것 아닌가. jade@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공정사회’

    그녀는 보험계약자와 상담을 하는 중이었다. 딸이 전화했지만 계약을 꼭 따내고 싶어 딸의 귀가를 챙기지 못했다. 그날, 딸은 집으로 오지 않았다. 파출소에 가보았으나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말을 듣는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던 그녀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딸을 길에서 발견한다. 누가 내 딸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별거 중인 남편을 포함해 여기저기 접근해 보았으나, 모두 다 그녀를 미친 여자쯤으로 취급한다. 충격으로 병상에 누운 딸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제가 벌을 받은 거예요?” 그녀를 연기한 장영남은 얼마 전 ‘이웃사람’이란 영화에서도 10대 딸을 둔 엄마 태선 역할을 맡았다. 그 영화에서는 이웃 여자의 딸이 화를 입는다. 태선은 같은 처지의 엄마이면서도 이웃 여자의 마음에 진심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장영남은 ‘공정사회’에서 전혀 반대의 인물로 변신한다. 성폭력을 당한 딸을 보고 눈이 뒤집힌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공정사회’의 특징은 이런 유의 영화가 보통 그러하듯이 사건의 발단과 복수에 이르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지 않은 데 있다. 이지승감독은 사건과 복수에 방점을 찍기보다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주목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남녀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가 온 힘을 다해 남자에게 매달리지만 힘센 젊은 남자에게는 당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듯 ‘공정사회’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밝히면서 시작한다. ‘공정사회’에서 눈에 띄는 스타일은 ‘반복’이다. 영화는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분해하고 뒤섞은 다음, 그것을 반복해서 보여주기를 선택했다. 반복되는 장면은 전부 남성의 폭력 및 무관심과 연결된 것들이다. 사이가 틀어진 남편의 심드렁한 얼굴, 사건을 맡은 형사의 안일한 자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의 폭력적인 모습 등은 영화 전체에 걸쳐 수도 없이 되풀이되며 관객의 머리에 각인된다. 결국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른다. 어떤 점에서 ‘공정사회’는 여성이 처한 상황을 반복 학습하는 영화다. 보기에 편한 방식은 아니지만, 이지승은 ‘거듭되는 폭력적 상황에 지치고 힘을 잃어버린 인간의 고통’에 눈길을 주기를 의도한다. 영화는 동일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아줌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여자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원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복수를 마친 그녀는 정작 다른 것을 원하는데,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녀도 알고 우리도 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범죄의 악순환을 막을 수는 없어도 폭력과 무관심의 벽에는 함께 맞서기를 바란다. 최소한 그것은 가능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래야 우리의 공정사회가 마련된다고 말한다. 영화평론가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기고] 4·19 민주혁명 국민문화제로!/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

    [기고] 4·19 민주혁명 국민문화제로!/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

    대한민국 헌법은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에겐 위기가 닥친 순간마다 나라를 올곧게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가 많다. 특히 4·19혁명은 3·1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받치는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특별하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불법·부정 선거에 항의해 4월 19일을 절정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 혁명을 통해 독재정권을 몰아냈다. 하지만 4·19혁명이 일어난 지 53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1980년 일어난 5·18 광주민주항쟁은 세계적인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돼 일주일간 축제를 하며 축제 기간 동안 전 세계인이 모이는 반면 4·19혁명은 안타깝게도 매년 4월 19일에 하는 기념식 외에는 별다른 행사가 없다.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젊은 세대들은 4·19가 우리 현대사에 미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헌법 전문에도 명시돼 있는 4·19 민주이념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4·19혁명 희생자들의 넋이 깃든 국립 4·19민주묘지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 강북구에서는 잊혀져 가는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위기의식에서 올해 처음으로 4·19혁명을 기리는 국민문화제를 추진하고 있다.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개최되는 국민문화제는 ‘피어나라, 4·19! 타올라라, 통일의 불꽃이여’를 주제로 사흘 동안 전야제, 대학생 달리기, 학술토론회, 엄홍길과 함께하는 순례길 트레킹, 태극기 아트페스티벌 등 다양한 공연·교육 등의 행사로 꾸며진다. 국민들이 참여해 민주주의를 향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국민문화제가 성공적으로 정착된다면 젊은 세대들에게도 4·19 민주이념을 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자긍심도 고취시킬 수 있다.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 같다. 아울러 국민문화제가 죽어 있는 4·19가 아닌 국민의 가슴속에 다시 살아 숨 쉬는 4·19, 미래로 나아가는 4·19, 통일을 준비하는 4·19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얼마 전 찾은 4·19민주묘지 기념관에서 4·19혁명 당시 사망한 한 여중생이 어머니에게 쓴 유서를 봤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바른 역사 인식은 그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세계 여러 나라를 보아도 역사가 바로 서지 않은 채 성장한 나라는 없다. 소중한 목숨들의 희생으로 누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4·19혁명 국민문화제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대한다.
  • [공연리뷰] 연극 ‘러브… ’ 로맨틱 코미디에 담은 세대 갈등

    [공연리뷰] 연극 ‘러브… ’ 로맨틱 코미디에 담은 세대 갈등

    사랑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가 있다. 포스터도 달콤한 분홍빛이고, 두 주인공이 활짝 웃고 있으니 로맨틱 코미디 향기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대사에 귀를 기울이면 가슴 뜨끔하고 때론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회적 담론이 담겨 있다. “우리 젊은 세대가 중심”이고 자신을 “조국의 미래”로 알았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은퇴세대가 됐다. “돌아보니 40년 간 중노동했”고 “뼈 빠지게 일했다.” 그런 노년을 바라보는 자식세대는 불만이 가득하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어. …나는 진짜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믿었어. 엄마가 그러라 그랬으니까.” 똑똑한 아빠 엄마에게 장래를 내맡기고 부모가 일러준 대로만 착실히 살아왔는데, 어느덧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다. 집도, 차도, 가정도, 내 힘으로 얻기 어렵게 만든 건 부모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엄마 아빠는 싸구려 비행기, 비싼 차 타고 다니면서, 그게 환경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절대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야. 노조 깨부수고, 부자 감세 시행한 마거릿 대처를 찍은 세대야. …이번에는 토니 블레어 찍었지? 또 보수당이야, 또.” 딸이 아빠·엄마를 향해 불만을 분출시키며 내뱉는 대사, 영국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야기라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하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 부모 세대는 대학 졸업자도 별로 없었고, 취직도 쉬웠고, 조금만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던 시절에 승승장구했다. 부모 세대 당사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길을 만들고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오히려 그 바탕 위에서 자식들은 편안하게 공부하고 일하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고 탄식한다. 서울 중구 명동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러브, 러브, 러브’(마이크 바틀릿 작, 이상우 연출)는 세대에 따른 사고의 변화, 시각차와 갈등의 배경을 명쾌하게 그려냈다. 비틀스가 ‘올 유 니드 이즈 러브’를 부르던 1967년. 케네스(이선균)는 형 헨리(김훈만)의 집에 얹혀살지만 “국가가 내게 투자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넘친다. 산드라(전혜진)는 자유를 갈망하는 피끓는 청춘이다. 19살 동갑인 데다 옥스퍼드대 학생인 케네스와 산드라는 비틀스와 크림의 음악을 좋아하고 대마초를 피우면서 변화하는 세상을 외쳐댄다. 여러 방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더니, 덜컥 결혼했다. 1990년. 비틀스에 광분하던 케네스는 아들 제이미(노기용)가 듣는 모던록그룹 블러의 ‘송2’에 기겁하는 중년이 됐다. 부부는 중산층 동네에 살며 딸 로지(노수산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경제적 여유를 누린다. 열정은 없고 구속이 지겨운 부부는 쉽게 이혼했다. 21년 뒤, 은퇴한 63살 케네스는 프랑스식 창문이 있는 넓은 집에서 제이미와 함께 지낸다. 연금, 임대수입을 합쳐 수입은 6만 파운드(약 1억원)에, 취미로 골프를 즐긴다. 세련된 노년이 된 산드라와 친구처럼 연락하며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됐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영 불편하다. 대학을 나와 일하다 보니 37살이 됐는데, 가진 거라곤 대출금 1만 파운드(1700만원)가 전부인 로지가 그렇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부모 세대는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사다리를 부숴버”린 이기적인 사람들일 뿐이다. 케네스와 산드라도 할 말은 있다. “최소한 부모한테 빌붙지는 않았”고, “없는 사다리를 만들어서 올라갔”다. 부모와 자식의 처지는 모두 이해의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소통과 이해는 접점을 찾지 못한다. 작품에서도 부모 세대가 이기적인지 자식 세대가 나약한지, 누가 옳고 그른지 결론내지 않는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코믹한 대사와 상황을 양념 삼아 작품을 즐긴 관객들이, 공연장을 나서면서 세대의 간극을 이해하고 답을 찾으려고 시도할 때 작품이 품은 의미와 메시지가 완성될 듯하다. 1막과 2막, 3막을 거치면서 케네스와 산드라의 생활환경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 무대가 돋보였다. 배우 전혜진의 연기가 유난히 빛을 발한다. 전혜진은 10대와 40대, 60대를 연기하면서 각각 발랄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활력을 넣었다. 실제로 부부 사이인 이선균과 전혜진의 자연스러움과 적당한 긴장감이 유지된 연기도 볼만하다. 오는 21일까지. 2만~5만원. 1644-2003.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씨줄날줄] 기업가 정신/오승호 논설위원

    그저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출연한 남매가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악기 연주에 올인한다는 내용이었다. 기타 연주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더욱 감명받게 한 것은 이들의 아버지였다. 자녀들에게 학교를 중단하고 기타 배우기에 몰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학부모들 같으면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무슨 소리를 하느냐. 공부를 해야지”라면서 말렸을 것이 뻔하다. 출연자의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까지는 피아노 등 악기를 잘 다루는데,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잊어버리고 만다고 지적했다. 시험 준비를 위해 악기는 집어치우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데서 비롯된다는 진단이었다. 자녀들의 교육은 영어는 외국 영화를 통해 익히는 등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창조경제를 통한 일자리 창출은 새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다. 정부 조직 개편 작업이 늦춰지는 바람에 미래창조과학부의 얼개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체는 젊은이들의 도전 정신이나 창업, 기업가 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공통적인 시각이다. 누구나 다 대학에 가려 하고, 대기업만 찾아 나선다면 청년 실업이나 중장년 실업은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적 위협 요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기업가 정신은 2001년 이후 크게 위축되고 있다. 2000년 벤처 버블이 붕괴된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기업가정신지표는 1977년 72.3을 정점으로 2001년 이후부터는 4~7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기업가지수도 2000년 61.1에서 2007년에는 24.2로 떨어졌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가 정신의 최고 실천 국가는 의심할 바 없이 한국이다”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중소기업청이 대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창업의 꿈을 키워 주기 위해 올해 1250차례에 걸쳐 기업가 정신 특강을 할 계획이란다. 1인 창조기업 비즈니스센터도 12곳을 추가했다. 건양대는 ‘기업가 정신과 리더십’을 신입생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미래창조과학부 신설을 계기로 제2의 벤처 붐이 기대된다.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사회가 되려면 대기업 중심의 경제 생태계가 중소·중견 기업과 상생하는 체제로 재편돼야 한다. 반기업 정서도 없어져야 혁신 경영이나 창업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여자프로농구] 혁명군 반란군 대격돌

    신한은행의 아성이 무너진 여자프로농구(WKBL)가 일곱 시즌 만에 새 챔피언을 가린다. 네 시즌 연속 꼴찌 수모를 딛고 정규리그를 우승한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에 번번이 가로막혀 눈물을 흘린 삼성생명이 격돌한다. 5전 3선승제로 진행되는 WKBL 챔피언 결정전 첫 경기가 15일 오후 5시 우리은행의 홈인 춘천 호반체육관에서 열린다. 챔피언 결정전이 5전 3승제로 바뀐 2001년 겨울리그 이후 첫 경기를 잡은 팀이 우승할 확률은 62.5%(16회 중 10회). 단기전인 만큼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 우리은행의 강점은 ‘젊은 피’를 앞세운 패기다. 양지희(29), 박혜진(23), 이승아(21), 배혜윤(24) 등 주축 선수들이 모두 20대다. 위성우 감독이 시즌 전 지옥훈련을 실시한 덕에 체력만큼은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영희(33)와 티나 톰슨(38)의 관록미도 돋보인다. 임영희는 경기당 평균 15.37점을 올려 리그 5위에 올라 있고, 톰슨은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득점 1위까지 차지한 백전노장이다. 삼성생명은 박정은(36)과 이미선(34), 김계령(34) 등 베테랑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이미선은 신한은행과의 플레이오프(PO) 3차전에서 15득점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박정은은 PO 1차전에서 오른쪽 새끼손가락 인대가 파열됐지만, 챔프 결정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각오다. 정규리그에서 톰슨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던 앰버 해리스(25)도 설욕을 다짐하고 있다. 정규리그 상대 전적은 우리은행이 5승 2패로 앞섰다. 1라운드에서는 삼성생명이 16점 차 낙승을 거뒀지만, 2~6라운드는 내리 우리은행이 이겼다. 그러나 4라운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10점 이내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한 우리은행은 지난달 24일 이후 경기 없이 푹 쉬며 체력을 비축했다. 삼성생명은 준 PO와 PO를 치르느라 강행군을 했지만, 신한은행을 꺾어 사기가 오른 것이 믿는 구석이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굿모닝 닥터] 검버섯 놓치지 마세요

    “제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검버섯이라뇨?” 얼마 전 30대 후반의 여성이 피부에 잡티가 많아 고민이라며 병원을 찾았다. 살펴보니 그녀가 잡티로 여겼던 것은 대부분 검버섯이었다. 환자는 당황스러워했다. 처음에는 크기도 작고 옅은 갈색이라 무심코 넘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으로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흔히 ‘저승꽃’이라 불리는 검버섯은 주로 50세 이상 중·노년층에 많지만 최근에는 골프, 등산, 테니스 등 야외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사람에게도 검버섯이 부쩍 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피부 노화의 증표이기도 한 검버섯은 보통 타원형의 갈색이나 검은색 반점이 융기된 형태로 얼굴, 등, 손등, 팔다리 등 햇빛에 자주 노출되거나 피지선이 발달한 부위에 많이 생긴다.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처럼 보여 기미로 오인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검버섯은 기미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지고 색도 진해지는 특징이 있다. 또 자각 증상이 없으며 악성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나 아주 드물게 갑자기 가려움증을 동반한 검버섯이 많이 생겼다면 장기에 이상이 발생한 것일 수도 있으니 전문의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검버섯은 치료가 의외로 간단하다. 보통은 레이저로 치료하는데 색깔, 두께, 조직의 차이에 따라 경미한 상태라면 큐 스위치 레이저를, 이미 두꺼워진 경우라면 탄산가스 레이저를 사용하면 된다. 최근에는 검버섯뿐 아니라 노화로 인한 주름, 안색, 탄력까지 함께 개선해 주는 프락셀 레이저가 단연 인기다. 검버섯을 예방하려면 자외선 차단과 함께 외출 후 피부 노폐물을 잘 씻어줘야 한다. 평소 항산화제가 많은 채소와 과일을 자주 섭취하고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도 좋은 예방책이다. 하지만 이미 생겼다면 일반적인 관리만으로는 개선이 어려우므로 전문의를 찾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이상준 아름다운나라 피부과·성형외과 원장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영화 프리뷰] 2011 베니스 화제작 ‘킬러 조’

    [영화 프리뷰] 2011 베니스 화제작 ‘킬러 조’

    크리스는 도박빚을 갚지 못해 사채업자들에게 쫓긴다.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가 5만 달러짜리 생명보험을 들어 놓았다는 얘기를 듣고선 음모를 꾸민다. 무능한 아버지와 이참에 한몫을 챙기려는 새엄마, 백치미가 넘치는 여동생 도티까지 크리스의 계획에 선뜻 동의(혹은 방관)한다. 현직 경찰이지만 살인청부업자로 ‘투잡’을 뛰는 킬러 조는 크리스에게 선금을 요구한다. 땡전 한 푼 없는 크리스는 여동생을 바라보는 킬러 조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채고 담보로 내건다. 킬러 조는 약속대로 엄마를 제거한다. 하지만 웬걸. 생명보험 수혜자가 도티가 아닌 엄마의 애인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이 꼬인다. ‘킬러 조’는 201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경쟁부문에 오른 화제작이다. 이탈리아 온라인매체 기자들의 투표로 뽑는 골든마우스상도 받았다. 지금껏 전설로 남은 걸작 ‘프렌치커넥션’(1971), ‘엑소시스트’(1973)를 연출했지만, 그 후 30년간 졸작을 쏟아내 온 특이한 이력의 노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이 오랜만에 내놓은 논쟁적인 작품이다. 질퍽한 폭력 묘사는 물론 주노 템플과 지나 거손, 매커너히 등 쟁쟁한 배우들이 전라로 나오고 음식을 이용한 성적 행위 묘사까지 곁들여진 탓에 북미에서는 NC17(17세 미만은 보호자를 동반해야 관람 가능) 등급을 받았다. 폭력과 성적 표현의 수위가 절정으로 치닫는 건 킬러 조가 크리스 집안을 지배하는 새로운 가장으로 대체되는 후반부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크리스와 새엄마를 조는 무참하게 뭉개 버린다. 서사의 흐름상 불가피한 건 맞다. 하지만 비위가 약한 관객이라면 고개를 돌릴 만큼 농도가 짙고 시간도 지나치게 길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치킨을 먹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혹시나’ 했던 프리드킨 감독에 대한 기대는 ‘역시나’로 끝났다. 캐릭터는 하나같이 비현실적이고, 인물들의 관계는 지나치게 생략됐다. 그럼에도 스크린 앞에 관객을 붙잡아 두는 힘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청부 살인자 역할을 맡아 광기를 뿜어낸 매커너히다. 금발 근육질 몸매, 지적인 눈빛까지 겸비한 그는 젊은 시절 로맨틱 코미디로 재능을 허비했지만,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2011), ‘매직마이크’(2012)에 이어 ‘킬러 조’에서도 캐릭터와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인다. ‘어톤먼트’(2007),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등으로 이름을 알린 신예 템플 또한 텅 빈 눈빛과 몽롱한 말투를 지닌 도티 역에 딱 맞는 캐스팅이었다. ‘킬러 조’로 영국 아카데미 라이징스타상을 받았다. 북미에서는 지난해 7월 소규모로 개봉했다. 3개 스크린에서 출발해 75개 스크린까지 늘어났지만, 누적 수익은 198만 달러(약 21억원)에 그쳤다. 전 세계 수익은 366만 달러(약 39억원). 7일 개봉.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동일본 대지진 2년] 15만명 아직도 피난생활…방사능 공포 속 재건 몸부림

    [동일본 대지진 2년] 15만명 아직도 피난생활…방사능 공포 속 재건 몸부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오는 11일로 만 2년이 되지만 후쿠시마는 아직도 대지진과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의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후쿠시마현을 비롯해 미야기현·이와테현 피해 지역의 이재민들은 지금도 가설주택에서 생활하는 등 고달픈 피난 생활에 지쳐 가고 있다. 대지진과 원전 사고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후쿠시마현 주민 가운데 아직까지 피난 생활을 하는 이는 15만명을 넘는다. 특히 어린아이를 둔 젊은 부부들은 끊임없이 후쿠시마현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후쿠시마현은 이 같은 추세로 유출이 계속되면 2011년 10월 198만 9000명이던 주민이 2040년에는 122만 5000명으로 최대 38%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북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미나미소마시는 원전 사고 2주년을 10여일 앞둔 지난 2일 그나마 활기를 띠고 있었다. 원전 방향을 막아선 높은 산 덕분에 피폭 방사선량이 서울 평균치의 3배 수준인 시간당 0.32마이크로시버트(μ㏜)로 다른 지역보다 현저하게 낮기 때문이다. 오염 제거 작업을 하는 근로자들도 시내 곳곳을 누비며 방사능의 상흔을 지워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해 봄 이후 이 지역 초등학생 약 220명, 중학생 약 70명이 복귀했다. 조금만 바람이 심하게 불면 마스크부터 찾아 쓰는 불안한 생활이지만 서서히 원전 사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원전 남서쪽 지역인 가와우치무라는 피난 지시를 받은 원전 주변 12개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귀향을 선언한 마을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덕에 공장을 유치했고, 근로자들을 위해 마을 역사상 처음으로 아파트도 지었다. 하지만 엔도 유코 촌장을 따라서 복귀한 주민은 3000명 중 400명뿐이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귀환을 꺼려 복귀한 주민의 80%는 50세 이상의 장·노년층이다. 원전에서 60여㎞ 떨어진 후쿠시마시와 고리야마시 등 대도시 역시 겉으로는 대지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하다. 재건과 이재민을 위한 의료 구호 활동도 한창이다. 고리야마시에서 8대째 쌀 농사를 이어 가고 있는 후지카 히로시(32)는 후쿠시마산 농림수산물에 대한 방사성물질 검사 결과를 매일 웹사이트인 ‘후쿠시마 신발매’에 올리고 있다. 그는 “후쿠시마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해 농산물 출하를 조절하고 있다”며 “원전 근처 이외의 후쿠시마산 농작물은 믿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는 또 “원전 사고가 일어난 것에 대해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다”며 “하지만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후쿠시마의 농업을 다시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고리야마시에서 45㎞쯤 북쪽에 위치한 현청 소재지 후쿠시마시. 후쿠시마현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원전 사고 이후 이재민들을 위한 각종 구호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적십자병원도 이재민들을 돕는 주요 거점 가운데 한 곳이다. 적십자사를 통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일본에 전달된 재해구원금은 지난 1월 31일 현재 597억엔(약 6669억원)에 이른다. 이 기금 대부분은 가설주택에서 생활하는 이재민들의 건강 관리와 방사능 내부 피폭을 측정하는 ‘홀 보디 카운터’를 도입하는 등의 여러 사업에 사용된다. 후쿠시마시내 방사능 피폭 검사 대상자 29만 2240명의 11.6%인 3만 3897명에 대한 검사를 지난해 11월까지 마친 상태다. 이들 중 6635명을 정밀 측정한 결과 건강이 의심되는 200~300밀리베크렐(m㏃) 이상은 45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병원에서 피폭 검사를 받고 나오던 한 고교생(15)은 “방사능에 피폭된 산모로부터 백형별 아이가 태어난다는 괴담이 있어 걱정된다”며 “원전 사고 당시 도망치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 부담을 드리는 게 싫어 후쿠시마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원전 사고 이후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온 젊은이들도 있다. 후쿠시마현 출신의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설립된 ‘피치 하트’를 이끌고 있는 가마타 지에미(27)가 대표적이다. 방사능 공포로 위축된 젊은 여성들이 요가, 필라테스, 재봉, 요리 등을 함께 배우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 출신인 가마타는 “대지진 직후 고향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고 도쿄에서 후쿠시마로 돌아왔다”며 “앞으로 이곳에서 결혼해 아이를 키울 생각이고, 냉혹한 현실에 맞서 다른 용기 있는 여성들과 서로 의지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후쿠시마·고리야마·미나미소마(후쿠시마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 [길섶에서] 간호사 도우미/최광숙 논설위원

    어느 날 한 병원에 한 간호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허드렛일을 돕는 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병원 직원도 아닌데 갑자기 출연한 그 아줌마의 정체가 다들 궁금해졌단다. 알고 보니 간호사의 엄마가 딸에게 붙여준 이른바 ‘간호사 도우미’였다. 간호사로 취직한 어린 딸이 피 묻은 고름 등을 닦아내는 등 궂은일을 하는 것이 ‘무섭다’고 징징거리자 그 엄마가 집에서 일하는 가사 도우미를 딸의 직장으로 파견한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의 말을 듣자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황당하다. 집에서 공주같이 자란 귀한 아이들이 병원에서 험한 일을 제대로 할 리 만무고, 그러다 상사로부터 한 소리를 들으면 부모가 더 흥분해 자식으로 하여금 사표를 쓰게 한다고 한다. 사표도 집에서 퀵서비스로 휙 날려 보낸다나. 철없기는 젊은 의사들도 마찬가지란다. ‘환자들이 이상하다’며 오랜 시간 전화통을 잡고 엄마한테 하소연하기 일쑤란다. 어찌하여 자식을 위해 뭐든 한다는 ‘헬리콥더 맘’은 갈수록 진화하는지 걱정스럽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Weekly Health Issue] 철인 3종 출전 후 붉은색 소변, 근육손상으로 인한 급성콩팥염

    평소 자신의 건강을 믿었던 이재호(31)씨는 운동광이었다. 운동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는 만능 재주꾼으로 통했다. 그런 이씨가 아마추어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한 뒤 문제가 생겼다. 다음 날, 움직이기 어려울만큼 다리가 아팠고, 평소보다 소변량이 많았던 데다 붉은 색조까지 보였다. 이씨는 ‘경기에 출전하느라 무리해서 그럴 것’이라고 여겨 병원을 찾는 대신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저녁 무렵이 되자 허벅지에서 장딴지에 이르는 부위에 팽창감과 함께 참기 어려운 통증이 몰려왔다. 게다가 소변색까지 더욱 붉어져 핏빛이 완연하자 이씨는 놀라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의료진은 서둘러 뼈주사 검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양쪽 허벅지 근육에서 동위원소 흡수가 관찰되었으며, 심한 근육 손상이 확인됐다. 병명은 횡문근 융해증(가로무늬 근육이 손상되는 질병)에 의한 급성 콩팥손상이었다. 소변 상태가 심각해 지체 없이 혈액 투석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씨는 이후 일주일간 입원해 치료를 받은 뒤 병세가 일부 호전돼 퇴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계속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강덕희 교수는 “이씨처럼 평소에 건강을 자신하는 젊은 사람도 급성 콩팥손상으로 병원을 찾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면서 “이는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근육 손상이 급성콩팥병으로 발전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 경우 심한 근육통과 함께 소변이 붉어지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보이는 붉은 색 소변은 피가 섞인 것이 아니라 손상된 근육에서 배출된 근육색소가 피에 섞여 혈뇨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강 교수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운동능력이나 신체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근력운동을 하거나 마라톤 같은 운동을 무리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또 운동 중에는 수시로 물을 마셔 탈수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콩팥 손상을 예방할 수 있는 중요한 수칙”이라고 조언했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몸 바쳐’ 돈 벌어오던 형이, 엄마를 죽였다

    ‘몸 바쳐’ 돈 벌어오던 형이, 엄마를 죽였다

    살인 사건이었다. 13평 아파트에 사는 중년의 변계숙이 살해됐다. 범인은 볼링공으로 내려쳤다. 범인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돌아다닌 터라 7명이 경찰에 신고 전화를 하고 15분 만에 잡혔다. 현장검증에서 범인은 거침없이 자신의 범행을 재연했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살해 직전 변계숙에게 건넸다고 했다. 신문 1면 헤드라인은 ‘후안무치한 살인범 춤추듯 현장으로’로 채워졌고, 2면과 3면 사진은 ‘태연자약하게 범행 재연 반성의 기미 전혀 없어’가 됐다. 현장검증이 끝나 사진기자들과 형사들이 사라진 살해 현장, 아파트에는 락스와 향균스프레이, 수세미를 든 조인호가 서 있다. 조인호는 변계숙의 아들이다. 또한 범인은 조인호의 형이다. 여기까지 읽고서 존속살해를 당한 피해자이자 범인의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인호의 굴곡진 인생이 등장하려니 했다. 그러나 안보윤(32)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모르는 척’(문예중앙 펴냄)의 주인공은 조인호의 네 살 위 형, 어머니를 살해한 조인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신문 사회면에 있을 법한 보험 사기라는 것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니 이야기의 대강과 결말도 윤곽이 잡히는 듯했지만 예단은 어긋났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형제의 심리적 갈등과 편애가 낳게 되는 병리적인 감정, 착한 자식이자 가장으로 길러지는 맏이의 운명, 제대로 살고 싶은 가난한 사람들의 욕망 등이 ‘자본주의적 폭력’과 뒤얽혀 굴러가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이나, 어느 집단이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 아니면 안 돼’라는 마법 같은 주문에 휘둘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사람들은 산다. 그런데 헌신적인 사람들은 어느덧 그 주문에 휘말려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 하나 고생하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며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은 고작 ‘제가 좋아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이해된다. 전업주부였던 변계숙의 가족은 가장인 아버지가 돌연사한 탓에 가난한 P시로 흘러왔고, 무능한 엄마 대신 12살의 맏아들이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머리를 벽에 짖이기고, 망치로 발가락뼈를 부러뜨리며,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려 206개의 뼈가 모두 조각조각 났는데도 인근은 말한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의 범죄의 기원은, 근친살해의 기원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부모가 동반자살해 절집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석문정은 이런 잔혹하고 매정한 상황을 적시한다. “제일 나쁜 건 있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야.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장 나한테 이득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받아들이게 돼. 그게 좀 더 지나면 당연해져 버리는 거야.”(201쪽) 가난하고 남루한 P시 청소년의 대화도 암담하다. 가난은 뿌리가 깊다. “아빠가 시멘트 개고 엄마가 벽지 바르고 내가 벽돌 나르면 알콩달콩 신도 나겠다, 씨발. 노가다가 가업이라니 끔찍하잖아.”(207쪽) 왜 제목이 ‘모르는 척’인가. 사실 우리는 헌신적인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고 영악하게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32살의 젊은 작가가 묻고 있다. 우리는 또 무엇을 모르는 척 회피하고 있는지 큰 바늘로 쑤시는 듯하다. 같은 사실을 처한 상황과 인지 수준에 맞게 이해하는 인근과 인호의 엇갈리는 서술은 영화 ‘오! 수정’이나 소설 ‘산체스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작가는 2005년 문학동네 작가상으로 등단해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을 받았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박근혜 파워엘리트 100인 ① 새누리당 핵심 당직자] 4월·10월 재보선, 집권여당 권력지도 재편 최대변수로

    [박근혜 파워엘리트 100인 ① 새누리당 핵심 당직자] 4월·10월 재보선, 집권여당 권력지도 재편 최대변수로

    박근혜 정부가 25일 공식 출범했다. 박근혜 정부를 이끌어 낸 ‘퀸 메이커’들도 다시 뛸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성공 신화를 쓴 ‘박근혜 사람들’이 모두 박근혜 정부의 중심에 서는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과의 관계에 따라 역할과 권한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향후 5년간의 박근혜 시대에 새누리당과 청와대, 정부, 외곽 등에서 권력 지도를 새롭게 그려 갈 것으로 예상되는 ‘파워 엘리트’ 100인을 살펴봤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새누리당의 파워 엘리트 25인을 조명했다. ‘박근혜 정부’를 뒷받침하는 집권 여당의 주축 세력으로 우선 황우여 대표와 이한구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를 꼽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기간 당을 이끈 황 대표와 이 원내대표 등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이 정권 출범 이후 3~6개월 안에 대선 공약을 포함한 주요 국정 과제를 마무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만큼 여당인 새누리당은 법안 처리와 예산 편성 등을 통해 보조를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5·15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황 대표의 임기(2년)는 내년 5월까지다. 집권 초반 당·청(여당과 청와대) 관계를 주도할 것으로 보이며 19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후보로도 거론된다. 대표적인 친박(친박근혜)계이자 황 대표와 손발을 맞춰 온 이혜훈, 정우택, 유기준 최고위원의 역할도 주목된다. 이 가운데 이 최고위원은 남편인 김영세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와 ‘부부 친박’으로도 유명하다. 당내에 중량감 있는 여성 정치인이 많지 않은 만큼 입지를 키워 나갈 것으로 관측된다. 정·유 최고위원도 중앙 정치 무대뿐만 아니라 각각의 지역 기반인 충청과 부산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4월과 10월에 예정된 재·보궐선거는 황 대표 체제의 순항 여부를 결정할 중대 변수가 될 수 있다. 선거 결과, 현 지도부에 대한 교체 압력이 상승할 경우 대선 당시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전 의원의 행보에 관심이 쏠릴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당권 주자 ‘1순위’로 거론되는 김 전 의원은 오는 4월 재선거가 확정된 부산 영도에서 출마를 선언한 상태여서 국회 복귀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이 원내대표는 한때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릴 정도로 당내에서도 손꼽히는 정책통이다. 이른바 ‘근혜노믹스’(박근혜+이코노믹스)가 우리 경제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국회 차원의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원내대표의 임기는 오는 5월까지다. 원내대표 선거는 당 지도 체제의 향배를 가늠할 첫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차기 원내대표 후보군으로는 남경필 의원과 서병수 사무총장, 이주영 의원, 최경환 의원 등이 꼽히고 있다. 이들 중 누가 차기 원내대표에 오르냐에 따라 당내 권력 지형은 물론 대야·대정부 관계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남 의원은 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을 이끄는 등 쇄신파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이 원내대표에 밀려 아깝게 고배를 마신 바 있다. 대선 때 당의 살림을 책임졌던 서 사무총장은 박 대통령의 서강대 동문으로, 17대 국회부터 박 당선인과 두터운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탁월한 정무적 판단과 원만한 성격이 강점이다. 남 의원과 서 사무총장은 각각 내년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와 부산시장 출마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이 의원은 박 대통령의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당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는 등 박 대통령의 공약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게 장점이다. 계파색이 상대적으로 옅다는 점에서 탕평 인사 후보로 평가된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경선 총괄본부장과 후보 비서실장 등을 지낸 최 의원이 ‘다크 호스’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핵심 참모진과도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라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들이 ‘성공 방정식’을 써 나갈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에 이어 유승민, 이학재, 유일호 의원 등의 거취에도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 가운데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유승민 의원의 중용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이 의원의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 출마설이 제기되고 있다. 박 대통령과 오랜 기간 정치 노선을 함께 걸어 온 이른바 ‘원조 친박’들은 현 정부의 정치적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정치 전면에 재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 역시 여전하다. 홍문종, 김태환, 김재원, 이진복, 조원진 의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홍 의원은 대선 당시 조직본부장이라는 핵심적인 일을 맡은 대선 승리의 1등 공신이다. 친박 직계로 분류되는 김태환 의원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일을 해냈다. 김재원 의원은 박 대통령의 사생활을 챙기는 등 야권의 공격을 막는 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의 근거리에서 활동하며 역량과 존재감을 인정받은 ‘젊은 피’들도 눈에 띈다. 대선 당시 수행을 맡았던 윤상현, 박대출 의원, 대변인인 이상일 의원 등이 이에 속한다. 초·재선 의원이라는 낮은 선수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내 ‘정책통’들의 활약도 기대된다. 대선 때부터 대통령직인수위원회까지 꾸준히 참여했던 안종범, 강석훈 의원은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정책 투톱’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들 두 의원은 박 대통령의 모든 정책 공약에 관여할 정도로 신임도 두텁다. 향후 박 대통령의 인선 때마다 1순위 후보로 거론될 가능성이 높다. 친박계들은 그동안 한묶음처럼 움직여 왔지만 향후 ‘자리 경쟁’ 과정에서 분화될 것으로도 관측된다. 이는 차기 당권 주자 또는 대선 주자들의 움직임과 맞물려 돌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박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 관계를 유지하다 대선 과정에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면서 관계가 호전된 정몽준 의원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 의원은 친박계와 대립해 온 친이(친이명박)계 대표 주자라는 점에서 당내 권력 지형을 바꿔놓을 수 있는 최대 변수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밖에 김세연 의원을 비롯한 소장·쇄신파 의원들의 움직임도 박근혜 정부의 순항 여부를 가늠해 볼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이들이 ‘박근혜표’ 정책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정권에 힘을 실어 주는 구심력이 되거나 정반대로 추진력을 떨어뜨리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부 교체 바람이 불 경우 소장파 등을 중심으로 ‘주류 퇴진론’이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디지털에 점점 의존… 그래도 난 영화의 원초적 힘을 믿는다”

    “디지털에 점점 의존… 그래도 난 영화의 원초적 힘을 믿는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만큼 충격적인 데뷔작도 드물 터다. 천재감독에겐 미안할 만큼 낡은 표현이지만, 혜성 같았다. 당시 레오스 카락스( 53)의 나이 스물넷.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아홉부터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를 했다지만, 신인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쁜 피’(1986), ‘퐁네프의 연인들’(1991)로 이어지는 카락스의 작품은 1980~90년대 영화학도와 시네필을 추종자로 포섭했다. 하지만 1999년 남매 간의 사랑이란 설정으로 논란을 빚은 ‘폴라X’를 끝으로 더 이상 장편을 찍지 못했다. 13년 만인 지난해, 그는 칸영화제에 ‘홀리모터스’를 출품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홀리모터스’를 2012년 최고 영화로 꼽은 건 자국 출신 거장에 대한 예우는 아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부터 호흡을 맞춘 카락스의 페르소나, 드니 라방이 1인 11역을 소화한 ‘홀리모터스’는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첫 장면은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 시작된다. 죽었는지 잠을 자는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그 광경 위로 ‘홀리모터스’란 제목이 나타난다. 그제야 영화는 하루에 아홉 개의 삶을 사는 주인공 오스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아침에 눈을 떠 리무진을 타고 출근길에 올라 정해진 일정에 따라 걸인, 모션캡처 전문 배우, 광인, 아버지, 아코디언연주자, 킬러, 죽어가는 남자 등의 삶을 산다. 관객은 오스카의 직업이 배우일 거라 생각할 듯싶다. 카락스가 2009년 이후 4년 만에 한국에 왔다. 되는 대로 쓸어넘긴 반백의 머리는 여전했다. 조금 야위었고, 여전히 진지했고, 골초였다. 카락스는 4일 서울 봉래동 프랑스문화원에서 13년 만에 장편을 찍은 이유에 대해 “공백이 길어진 건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X’를 찍을 때에도 제작비에 쪼들렸다. 물론 여유가 있더라도 다작을 할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9~10편쯤은 찍지 않았을까”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비슷한 영화를 찍고 싶지는 않다. 삶의 다양한 면,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때론 삶의 피곤함을 느낄 때가 잦은데 그 피곤함을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영화”라고 덧붙였다. 4편(옴니버스 ‘도쿄’ 중 ‘광인’을 포함하면 5편)이나 함께 찍은 라방에 대해 “뭘 요구해도 다 구현할 수 있는 배우”라고 잘라 말했다. 30년을 알고 지냈고 불과 200m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지만, 사적으론 친하지도 않고 밥도 따로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지음’(知音)이나 다름없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찍을 때 소년 역을 캐스팅하는 데 애를 먹었다. 우연히 구인구직소에서 배우 사진을 보다가 발견했다. 희한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발전하는 관계가 됐다. ‘홀리모터스’에서 두 가지 역은 정말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냈다. 점점 좋은 배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카락스는 “디지털 기술이 너무 발달하면서 (영화인도) 점점 의존하고 있다. 그래도 영화 초창기의 원초적 힘을 난 믿는다. 무르나우(1889~1931)의 영화를 보면 카메라에서 흡사 신의 눈길이 느껴진다. 나도 다시금 신의 눈길을 찾고 싶다. 젊은 영화인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미술로 배우는 미국 300년史

    미술로 배우는 미국 300년史

    미국 300년사를 그림으로 감상해 볼 수 있는 ‘아트 어크로스 아메리카’(Art Across America)전이 5일 서울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휴스턴미술관, 테라 미국미술재단 등에서 작품을 대여해 온 대형 전시로 정통 초상화를 보여주는 찰스 윌슨 필의 1772년작 ‘캐드왈라더 가족’에서부터 추상표현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잭슨 폴록의 1950년작 ‘넘버 22’까지 모두 168점을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들이 내년 이들 미술관에서 ‘조선미술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순회전시할 예정이다. 한·미 간 교환전시의 일환이라는 얘기다. 4일 언론에 공개된 전시는 ‘아메리카의 사람들’, ‘동부에서 서부로’, ‘삶과 일상의 이미지’, ‘세계로 향한 미국’, ‘ 미국의 근대’, ‘1945년 이후 미국 미술’ 등 모두 6부로 이뤄졌다. 전시장을 걸어나가면서 미국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한 구성이다. 처음에 맞닥뜨리는 것은 인물 초상화들이다. 식민지 지배층의 부유한 느낌을 담은 ‘캐드왈라더 가족’을 비롯,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다. 19세기 들어 서부로 팽창함에 따라 광활한 자연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토머스 콜을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이 이 시기를 잘 드러내 준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 원리주의적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보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윈슬로 호머가 그린 ‘건전한 만남’은 눈만 마주치면 풀밭에 뒹굴 것만 같은 피 끓는 젊은 남녀가 경건하게 우유만 나누어 마시는 모습을 담았다. 전반적인 그림의 톤까지 따사로워 지금으로 봐서는 건전가요 듣는 느낌이다. 이후에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 선보인 뒤 1945년 이후로 가면서 마침내 세계 패권국으로서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올라선 미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잭슨 폴록을 비롯,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존 싱어 사전트, 조지아 오키프 등 귀에 익숙한 작가의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5월 19일까지. 1만 2000원. 1661-2440.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맥도너 오바마 비서실장에 지명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차기 비서실장에 ‘젊은 피’ 데니스 맥도너(43)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을 지명했다고 백악관이 25일(현지시간) 밝혔다. AFP통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직접 맥도너 지명을 발표한다. 맥도너는 1992년 세인트존스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96년 조지타운대학에서 석사학위(외교학)를 받았다. 이후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중남미 분야)와 톰 대슐(민주) 전 상원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데 이어 2007년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의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었다. 맥도너는 2008년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 외교 정책을 담당했고 2009년 백악관에 들어가 NSC 비서실장을 거쳐 2010년 10월부터 NSC 부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맥도너는 2011년 5월 오사마 빈라덴 사살 당시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작전을 지켜보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관심을 끌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오바마 새 비서실장 ‘최측근’ 맥도너 유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차기 비서실장으로 40대 초반의 ‘젊은 피’ 데니스 맥도너(43) 백악관 안보 담당 부보좌관이 유력하다고 미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12일(현지시간) 백악관 인사에 정통한 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오바마 대통령이 고위 참모들에게 재무장관으로 지명된 잭 루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맥도너가 선두 후보라고 보도했다. 의회전문지 더힐도 오바마 대통령이 차기 비서실장 임명에서 맥도너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전했다. 맥도너가 오바마의 다섯 번째 비서실장이 되면 루 재무장관 내정자와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내정된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국토안보 보좌관에 이어 또 한 번의 ‘백악관 측근’ 발탁이 된다. 빌 버턴 전 백악관 부대변인은 “맥도너는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며 “그는 매우 유능하고 똑똑하며, 충성심의 대가가 없는 곳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직하다”고 평했다. 맥도너는 1992년 세인트존스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96년 조지타운대학에서 석사학위(외교학)를 받았다.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중남미 분야)와 톰 대슐(민주) 전 상원의원의 보좌관 등을 지낸 데 이어 2007년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의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2008년 오바마 대선 캠프에서 외교정책을 담당하다 2009년 백악관에 들어가 국가안보위원회(NSC) 비서실장 등을 지냈으며, 2010년 10월부터 국가안보 부보좌관으로 재직해 왔다. 키 192㎝의 맥도너는 농구광인 오바마와 종종 농구도 함께하는 사이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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