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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희망·가면 양립 안된다/주병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희망·가면 양립 안된다/주병철 논설위원

    #1. 조너스 솔크(1914~1995)는 1953년 소아마비 백신을 최초로 개발한 미국 의학자다. 피츠버그대 등에서 소아마비 백신 연구에 매달렸지만 성과가 없었다. 머리를 식힐 겸 2주간 일정으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으로 떠났는데, 이곳에서 귀중한 영감을 얻었다. 연구실에서 안 나오던 아이디어가 어떻게 여기서 나왔을까. 그는 이곳의 층별 천장 높이가 다른 데보다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천장이 높을수록 생각도 깊어져 ‘창조적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점을 나중에 학술적으로 밝혀냈다. 솔크는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도움으로 1962년 샌디에이고에 솔크생명공학연구소(Salk Institute)를 짓게 되는데, 건축가는 유명한 루이스 칸이었다. 칸한테 창의적 사고를 위해 일반 건축물의 천장 높이(2.1~2.4m)보다 1m가량 높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출된 노벨상 수상자만도 11명이고, 미국 랭킹 1위의 바이오 클러스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제법 됐는데도 말이다. #2. 16세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그는 대표작 군주론에서 “정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이다. 하지만 군주론은 사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가(家)에 잘 보여 공화국 서기관으로 복직하기 위해 젊은 공자 로렌초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집필했다. 로렌초는 군주론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즘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가 됐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가 혼란기가 아닌 평화기였다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말한 사악함과 교활함, 속임수를 통치술로 강조하지 않고, 법·제도·덕치를 말했을 것이란 얘기가 있다. 뜬금없이 조너스 솔크와 마키아벨리를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는 조너스 솔크의 ‘창조적 사고’에 목말라 있고, 마키아벨리즘 같은 정치적 뒷거래가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창조적 사고라는 화두는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21세기 신경영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지 오래됐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도,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CEO)도, 정부도 날만 새면 외치는 얘기다. 문제는 사회 한쪽에서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키아벨리즘 같은 고질적인 병폐로 우리 주위가 썩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 주변이 가장 큰 주범이다. 현재 권력, 미래 권력, 과거 권력들은 지금 무상급식·무상보육·반값등록금·저축은행 피해 전액 보상·우리금융 국민주 매각 등 복지포퓰리즘의 가면을 쓰고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살아 있는 권력 내부도 마찬가지다. 권력은 독점적일 때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독재시대가 끝난 이후 권력은 분점적 형태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주도권 싸움이 그동안 더 치열했다. 최근 수사권 독립을 둘러싼 검찰과 경찰, 중수부 폐지를 놓고 벌인 정치권과 검찰의 싸움질 등이 그런 예다. 분명한 것은 권력이 분점화되고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소통의 역할이 커진다. 하지만 누구도 소통의 중재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는다. 자기는 소통이 잘되는데 남들이 불통이라는 식이다. 일종의 소통의 가면이다. 이러니 무슨 문제가 풀리겠는가. 얼마 전 일본에서 신선한 소식이 들렸다. 오카다 가쓰야 민주당 간사장에 이어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열린 예산심의회에서 민주당 집권의 원동력이었던 아동수당 등 무상 복지정책에 대해 잘못됐다며 사과했다. 친서민으로 위장된 ‘무상복지 포퓰리즘의 가면’을 집어던진 것이다. 대단한 일본이다. 우리도 늦지 않았다. 적어도 청와대, 정치권, 정부, 사정기관 등 국가의 녹(祿)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하는 척하며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의 가면이든, 소통의 가면이든, 친서민의 가면이든. 가면의 탈을 쓰고는 한발짝도 앞으로 못 나간다. 그래서는 희망도 미래도 없다. 나라의 희망을 얘기하려면 가면부터 벗어라. bcjoo@seoul.co.kr
  • [문화마당] 평양냉면/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평양냉면/신동호 시인

    스승을 모시고 냉면 여행을 떠났다. 경기 가평에서 양평으로, 다시 강원 평창을 거쳐 경주까지. 메밀밭을 지나면 해바라기가 뙤약볕 아래에서 허리를 곧추세웠고 굽이굽이 산길에는 아카시아 향내가 자꾸 추억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한여름 아버지는 고사리손을 잡고 냉면집을 찾았다. 그 밍밍한 맛이 이제야 가슴에 박혀온다. 가끔 우리네 삶도 거친 메밀을 감싼 육수처럼 투명해지고 싶었을까. 스승의 뿌리는 평양, 한때는 버드나무가 많다 해서 유경이라 불리던 곳의 안골. 안골은 만경대 부근으로 북쪽 사람들은 그곳을 혁명유적지로 잘 관리하고 있다. 스승은 양평의 막국수 집에서 ‘다대기’를 건져낸다. 물 위에 떠 흘러 다니는 부레옥잠. 스승은 땅 한 평, 집 한 채 마련할 수 없었던 실향의 마음을 이에 비유하곤 했는데 그걸 잠시라도 위로해준 것이 냉면이었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냉면집을 가는 건 자주 반복되던 일상이었고 가끔 막국수 집에서 어머니는 다대기를 건져내셨다는 말씀. “다대기만 건져내면 평양냉면이야.”라는 말에 덩달아 양념 없는 밍밍한 맛에 빠져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평창동계올림픽이 확정되던 밤, 내게 떠오른 건 냉면이었다. 거칠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 불량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강하게 자라나는 메밀. 강원도 사람들의 성품같이 불평도 별로 없이, 되도록 남 탓하지 않으면서 꼭 필요한 영양분을 전해주는 메밀. 이 메밀을 가루로 내서 약간의 녹말을 섞어 반죽하면 평양냉면의 면발이 된다. 쓱쓱 면을 뽑아 갖은 양념을 더해 손으로 막 담아내면 그건 막국수다. 막국수의 기본 원료도 물론 메밀. 스승은 산허리를 돌아가면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말씀하신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산골에서 볼 수 있는 아찔한 풍경. 달의 숨소리를 듣는 건 과연 가능할까. 메밀밭가에서 달을 보며 빌었던 강원도의 꿈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자연과 동화되면서,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당나귀와 함께 늙어갔고 이 짐승을 결국 자신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모두가 화해하면서, 허생원은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나 옛 인연과 따뜻하게 해후했다. 충북 제천까지 가는 길목의 주막에서 이들 앞에 주모는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내놓았을 것이다. 아주 밍밍하게, 아버지와 아들은 꼭 속내를 꺼내지 않고도 인연을 확인했을 터이다. 둘은 동시에 왼손으로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집어 올렸을 것. “평양냉면집의 남방한계선은 경주”라는 스승의 말씀은 메밀과 관련되어 있다. ‘내부수리중’이라는 안내판을 뒤로하고 아쉽게 발길을 돌렸지만 경주의 냉면집도 평양냉면을 전문으로 한다는 걸 확인은 했다. 북위 70도까지 자란다는 메밀이 경주를 기점으로 재배되지 않는 탓으로 부산에는 밀면이 발전했다 하신다. 부산으로 피란 온 실향민들이 메밀 대신 밀을 갖고 만든 냉면이 바로 밀면이다. 한국전쟁이 낳은 역사적 음식이 아닐 수 없다. 평양냉면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제육이다. 때론 냉면맛보다 기름기가 쏙 빠진 돼지고기 맛으로 냉면집을 선택하기도 한다. 냉면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새우젓을 찍어 김치에 싸서 먹는 제육 맛도 일품이지만 역시 메밀면에 제육을 척 얹어 먹는 맛은 평양냉면의 백미다. 강원도 화천의 한 막국수 집은 이런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아예 면 위에 가득 제육을 담아내기도 한다. 육수를 내고 남은 돼지고기의 순하고 편한 맛. 이것이 메밀과 섞이면 여름의 짜증을 한번에 날리고도 남는다. 스승은 돌아오는 길에 “평양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고 싶다.” 하신다. “버드나무 우거진 보통강가도 걷고 싶다.” 하신다. 면발처럼 긴 이 인연은 얼마나 질긴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이 인연을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확인해 보면 어떨까. 한 세대가 저물기 전에 이산가족들이 만나 함께 냉면을 먹고, 고향땅 성묘를 주선하면 얼마나 좋을까. 밍밍하게, 과거는 턱 덮어두고 면발 위의 고명들처럼 고만고만하게들 어울려서.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0)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10)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다행스럽게 사르트르가 있었다. 사르트르는 우리들의 외부였다. 그는 정말로 뒤뜰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새로이 자리잡은 질서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준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런 수단이었다. 그는 하나의 모델, 하나의 방법 혹은 하나의 전형이 아니라 약간의 신선한 공기, 바람이었다. 카페 드 플로르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지식인들의 분위기를 바꿔 버리는 그런 지식인이었다.”(들뢰즈 ‘대담’) 1980년 4월 19일, 파리 몽파르나스는 인파로 넘쳐났다. 한 꼬마의 말로 회자되듯이 “사르트르의 죽음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린 것. 이 스펙터클한 장례식 행렬 속에는 도무지 하나로 파악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보기 흉하리만치 작달만한 신체, 까칠한 피부, 썩은 치아, 실명한 한쪽 눈에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지닌 철학자. 사르트르만큼 세인의 관심을 받은 철학자가 또 있을까.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입을 주시했으며,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 그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표현대로 ‘대중의 열정과 조급함의 대상’이었다. 사르트르 역시 자신에게 떨어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공적 삶과 사적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삶과 철학이 당대에든 후대에든 ‘투명하게’ 노출되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열광했고, 또 한없이 분노했다. ●사르트르의 영광과 비참 세계 제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사르트르의 강연회는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몰린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의자가 부서지고 고함소리가 난무했으며, 몇몇은 실신했다. 그들은 왜 거기 모였는가? 그들 중에 난해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인 ‘존재와 무’를, 그의 처녀작 ‘구토’를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사르트르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이 강연은 즉각적으로 그에 대한 오해와 비난을 야기했다. 젊은 들뢰즈와 그의 친구들은 ‘휴머니즘’이라는 낡은 모토에 아연실색했으며, 레비-스트로스를 위시한 일단의 ‘구조주의자’(미셸 푸코를 포함해서)들은 역사와 주체의 책임을 말하는 그의 논리를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르트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사르트르의 꼬리표가 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르트르’라는 이름은 대중문화처럼 삽시간에 소비되었으며, 1950년대와 60년대에 세계 각지의 민족해방운동단체, 혁명집단, 압제당하는 소수집단들은 앞을 다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중에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인 프란츠 파농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소설 ‘구토’는 세상의 모든 오물과 악취에 비유되었으며, 그의 여성 편력과 취향은 소설 속의 묘사와 비교되면서 끊임없이 가십거리가 되었고, 그의 아파트에는 두 차례에 걸쳐 폭탄이 투하되기도 했다. 좌파, 우파, 공산주의자, 반공주의자, 신, 도덕, 국가 등등 사람들은 사르트르를 거의 모든 것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비난했다. 심지어 알튀세르는 이런 ‘사기꾼’의 입을 막으려면 채찍으로 때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 영광과 비참 사이에 사르트르가 있다. 그는 끊임없이 인용되었으며, 그보다 더 많이 오해되었다. 사르트르라는, 한 시대의 아이콘에 대한 애정을 담아 쓴 꼼꼼하고도 깊이 있는 평전 ‘사르트르의 세기’의 저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사르트르에게 가해진 당대의 비난들, 즉 휴머니스트·역사주의자·주체주의자 등의 명명으로부터 사르트르를 구출해 내려고 한다. 사르트르는 영속적인 본질과 내면을 지닌 인간 주체를 믿기는커녕 끊임없이 ‘인간’ 자체를 회의하고 자아를 부정했으며, 고리타분한 역사의 진보 따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분출하고 단절하고 폭발하는 ‘사건들의 도래’를 기다렸다는 것이 레비의 생각이다. 사르트르의 텍스트에 대한 가치판단은 해석자의 몫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나 그를 비난할 수 있었지만 당대의 누구도 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의 ‘뒤틀리고 왜곡된 사유’를 비난했던 푸코도 마지막 대담에서는 자신이 그에게 진 빚을 고백했으며, 들뢰즈 역시 그러했다. “마지막 철학자는 사르트르야. 알겠나. 우리 모두는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어.” ●나는 지식인이다, 나는 작가다 20세기 철학자 중 사르트르만큼 다양한 장르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학, 정치, 연극, 저널리즘, 비평, 방송, 샹송 작사 등 그는 글로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했던, 말 그대로 ‘총체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지향했던 ‘총체적 지식인’의 이미지는 보부아르의 ‘이별의 의식’에 나오는 한 구절로 단번에 짐작된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 스스로 스피노자이면서 동시에 스탕달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요.” 스피노자와 스탕달, 냉정한 철학자와 이야기하는 사기꾼을 동시에 꿈꾸었던 철학자. 사르트르는 자기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수많은 철학자를 경유했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다. 그에게 문학과 철학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는 두 개의 동시적 글쓰기요 존재양식이었다. 정치와 문학, 정치와 철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지식인으로, 때로는 작가로, 그는 필요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발언하고 행동했다. 전후에 벌어진 거의 모든 시위 현장에는 사르트르, 그가 있었다. 1947년에 발표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쓴다는 행위’에 대한 현재적 질문으로 구성된 텍스트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사실, 아무도 이런 물음을 스스로 제기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르트르의 답은 이렇다. 작가는 자기 시대에 관해 쓰고, 자기 시대를 위해 쓰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다수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 문학작품은 바나나처럼, ‘상하기 전에’ 소비되어야 한다. 문학 자체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즉 이 시대의 비참함과 가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후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위해, 지금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게 바로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참여문학론’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이, 사르트르는 ‘문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 자체가 이미 ‘참여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이 세계에 참여하는 행위라는 것. 사르트르는 자신의 작품을 틈날 때마다 가다듬고 수정하는 그런 유의 작가가 아니었다. 작가의 임무는 걸작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대중을 도발하는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 하에서 그는 사유의 속도로 글을 써내려갔고, 불멸의 작가가 되기보다는 현재에 어필하는 ‘공공작가’가 되기를 소망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일체의 상과 지위를 거부했다. 194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직도 거부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노벨상 수상마저 거부한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뻔했던 작품 ‘말’은 사르트르의 유년기를 담은 일종의 자전소설이다. 사람들은 ‘말’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르트르가 ‘참여문학’이라는 유치한 망상에서 벗어나 문학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레비에 따르면, ‘말’은 문학에 고하는 이별선언문이다. 문학이 세계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야말로 병증이었다는, 자신이 유년기부터 앓아오던 ‘문학’이라는 병증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났다는 섬뜩한 고백. 그러니까 스웨덴 한림원은 문학에 이별을 고한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려 했던 셈이다. 희대의 아이러니!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척하면서 대중을 배반한다. 그래서 누구도 사르트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를 사랑했던 이들도, 그를 증오했던 이들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은 그대로 그의 텍스트였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죽음이 말해지는 시대에, 사르트르는 여전히 텍스트와 삶의 일치를 꿈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20세기다운, 20세기의 작가다. “내가 미래에 요구하는 것은, 그 미래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나의 작품을 읽어달라는 것이다.” 채운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목욕탕서 마주한 나의 내면… 그리고 당신의 내면

    목욕탕서 마주한 나의 내면… 그리고 당신의 내면

    큰일났다. 기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대답이 추상적이다. 그마저도 짧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해 길게 물어 봤자 “그냥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무의식적으로 하다 보니…”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란다. 뒤에 무슨 말이 더 이어지겠지 싶어 볼펜을 만지작거리고 서 있어 봤자 거기서 끝이다. 되든 안 되든, 심오한 사유이든 개똥철학이든 뭔가 이야깃거리를 풀어 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따윈 없어 뵌다. “이러다 기사에 ‘그냥요’라는 말만 나간다.”고 협박(?)해 봐도 돌아오는 건 배시시 웃는 낯뿐이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영빈(31) 작가 얘기다. 이제 갓 대학원을 졸업한 신예다. 개성 시대 아니랄까 봐 젊은 작가들도 자신의 작업에 대해 포장하는 게 보통 아니다. 정말 그럴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평소에 신 나게 놀다가 지원금만 쥐여 주면 뚝딱뚝딱 작품을 만들어 내는 젊은 작가들도 많다. 그런데 이 작가는 다르다. 어린 나이에 대형 상업화랑에서 떡하니 전시를 열게 됐으니 기분이 ‘업’(UP)돼서 수다를 떨 법도 한데 말이 짧다. 작품은 모두 목욕탕을 그린 것이다. 언뜻 심심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한지에 연필로 그린 드로잉인데 가끔 담채로 색깔을 올렸다. 자를 안 대고 막 그어 댄 듯, 탕 안의 타일과 바깥의 마룻바닥을 드러내는 선들이 삐뚤빼뚤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게 텍스타일 같기도 하다. 요즘도 저렇게 단순 무식하게 큰 목욕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목욕탕 풍경도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다. 중간에 탕 하나 큰 게 있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도 아니고 잠잠하다. 목욕탕 안의 인물들도 지극히 작고 단순하게 그려져 있다. 목욕탕 하면 떠오르는 훈훈한 증기 같은 것도 없다. ‘마음의 때를 벗기고 어쩌고’ 식의 뻔한 소리가 나올 만한 구석도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개인적인 작가 스타일을 접목시키고 나면 작품이 슬슬 눈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모든 게 ‘네거티브’다. 반항이라 해도 좋고, 역발상이라 해도 좋고, 소외된 것을 끌어안는다 해도 좋고, 작가의 말마따나 음의 기운이나 아래로 하강하는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라 해도 좋고, 말 그대로 단순히 네거티브 필름을 떠올려도 좋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작품에도 작가의 시점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격자형으로 그려진 타일들은 인물들 간 거리를 표시하는 모눈종이 같다가도, 인물들을 이어주는 연결 통로처럼도 보인다. 폐쇄적 공간의 단절감 같다가도, 원래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 저런 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순한 이미지 속에 격렬한 충돌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그걸 작가의 내면 풍경이라 해도 좋고, 관람객들이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입이라 해도 좋다. 이웃한 전시 공간은 더 파격적이다. 16절지에다 간단히 인물을 드로잉한 작품 150여 점을 쭉 잇대어 걸어 놨다. 아니 붙여 놨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액자나 별 다른 장식도 없이 그냥 벽에다 풀로 붙인 듯한 모양새다. 인물 드로잉 자체가 하나의 타일 같기도 하다. 그래선지 이번엔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악필이라 친근하다.” 했더니 “저 글씨 예쁘다던데요.”라며 살짝 눈을 흘긴다. “작가라서 일부러 못 쓰는 척한 거 아니냐.” 했더니 “그런 거 아닌데….” 하곤 끝이다. 역시나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은 그나마 가장 화려하다. 역시나 목욕탕인데 안팎 경계 없이 타일로 점철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한 사람을 그렸다. 아니 그물에 걸린 생선 같기도 하다. “저건 해방에 대한, 자유에 대한 제 느낌이에요.” 겨우 하나 맞췄다고 하자 “보는 분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죠.” 맥 빠진 답이 돌아온다. 여성적이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이라면 푹 빠져들 법한 전시다. 6월 26일까지. (02)720-1524~6.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내가 지도한 최홍만, 격투기서 피투성이 되니 가슴 찢어져…”

    “내가 지도한 최홍만, 격투기서 피투성이 되니 가슴 찢어져…”

    [스포츠서울닷컴] 호쾌하고 인자한 이만기의 미소 속에서 지나온 세월의 희로애락과 씨름에 얽힌 환희와 씁쓸한 마음이 교차했다. 후배 강호동과 특별한 인연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모양이다.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42회에 걸쳐 열린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씨름계 내분과 함께 힘의 씨름으로 넘어가면서 재미없다는 말을 듣게 됐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결국 2004년을 끝으로 천하장사 씨름대회는 막을 내렸다. 이후 체급별 장사대회만 열리고 있다. ◆ 대중의 씨름 외면, 이만기는 예견했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고, 국내에서 글로벌로 넓혀진 것처럼 스포츠 문화도 청소년들 뿐 아니라 30~40대 계층도 참여형으로 바뀌었어요. 1980년대부터 이미 그런 흐름이 있었죠. 씨름도 그에 맞게 변화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는 씨름에 대한 대중의 외면을 예상했다. 글에서 그림으로, 그림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애니메이션에서 영상으로 변한 이 시대에 씨름판은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다. 이만기는 2006년 민속씨름동우회 회장으로 재직하던 중 씨름 행정 개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씨름연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스포츠 팬들은 제게 힘을 실어 주셨어요. ‘왜 이만기를 버리느냐’고요. 잘난 척처럼 비쳐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순수하게 우리 씨름을 살리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했죠. 선수들이 이종격투기(K-1)로 빠져나가는 것도 안타까웠고요.” 당시 천하장사 타이틀을 박탈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만기의 씨름 개혁 의지는 분명했다. 현실에 맞는 스포츠, 스포츠 팬들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해 줄 수 있도록 찾아가고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씨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지요. 스포츠 팬들이 요구하는 것은 달라졌어요. 씨름계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전체적인 틀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씨름을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우리 전통 문화의 관점에서 살려야 해요.” 이만기의 이 같은 진심이 통했을까. 5년이 지나고 지난달 11일 대한씨름협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은 이철우 의원(한나라당)이 주최한 씨름 활성화 및 세계화 방안 토론회에서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국내 5개 씨름 단체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씨름 단체가 지금까지 많았어요. 이제는 하나된 목표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협의체를 구성했어요. 씨름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 ‘후배’ 최홍만 K-1 진출, “처음에는 씁쓸했어요” 자연스레 후배 장사들의 K-1 진출 이야기가 오갔다. 이만기는 그 중 대표 격인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을 2003년 여름 지도한 바 있다. 최홍만의 소속팀 LG투자증권의 차경만 감독이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만기에게 여름 방학동안 특별 지도를 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당시 이만기는 대학 씨름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프로선수를 지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될성부른 떡잎이라 여기고 성심 성의껏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해 최홍만은 천하장사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2005년 소속팀의 해체와 동시에 일본 이종격투기(K-1)에 진출해 화제를 뿌렸다. ”씁쓸했죠. 후배들이 씨름으로 밥벌이가 어려워서 K-1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선배로서 비통한 마음 그 자체였어요. 무엇보다 천하장사가 격투기 무대에서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졌죠.” 후배들이 더욱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더 뛰었더라면 천하장사의 위상을 이처럼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마음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이해를 했어요. 우리 선배들이 특별히 해 준 것이 없으니까…. 이해를 하게 되더라고요” ’대답은 이만기다’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1980년대 이만기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당시 운동선수로는 드물게 CF 섭외가 줄을 잇는 등 스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씨름판에서 이만기의 스타성을 살릴 스타 마케팅은 없었다. ”우리 시절에는 스타 마케팅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죠. 모래판에서 이겨도 준비된 세리머니가 아닌 포효였죠.(웃음) 덩치 좋은 사람들이 우렁차게 내뱉는 ‘파이팅’ 소리나 각종 액션 등이 이론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지만 스포츠 팬들에게 각인이 됐죠. 저 같은 경우 결승전에서 이기면 모래도 던지고, 만세도 하고, 기도도 했어요.(웃음)” ”선수들의 그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팬들이 보는 시각에서는 외적인 기준이 될 수 있죠. 모래판에서 씨름을 잘한다는 것도 있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관심거리에요. 예전에 박광덕 씨가 선수 시절에 보여 줬던 람바다 춤처럼 후배들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져야 해요.” ◆ 20년의 교수 생활…”대학생 된 아들 덕에 공감대 생겨” 이만기는 현역 은퇴 후 학문에 눈을 떠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쳐 왔다. 새벽을 좋아할 만큼 스스로 동이 트면 하루를 계획하고 강의를 준비한다. 그가 지혜를 다지는 시간은 바로 새벽이다. 어느덧 교수 생활도 20년이 됐다. 씨름 선수에서 연구자와 교수로 걸어 온 그간의 시간이 이만기의 또 다른 정체성이기도 하다. ”(은사님께서 교수직을 권유하셨다고 하던데?) 천하장사를 하고 나서 학교(경남대) 은사님 한 분을 찾아뵈었어요. 그런데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만기야, 너는 앞으로 문무를 겸비해라. 감독이나 코치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또 다른 세상이 올 것이라고요. 그 말씀을 아주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죠. 제 인생의 길을 열어 주신 분이에요. 말씀 한마디가 큰 빛이었고 희망이었죠.” 최근 은퇴를 선언한 ‘후배’ 이태현은 용인대학교 격기지도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대선배 이만기를 따라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자 나섰다. “아주 좋은 일이죠. 저와 김경수(건동대)에 이어 민속씨름 선수 출신으로는 세 번째로 교수가 됐어요. 현장감을 바탕으로 이론을 접목해서 정말 좋은 제자를 길러 냈으면 좋겠어요. 특히 씨름 분야의 학문적인 연구를 많이 해 줬으면 좋겠고요.” 슬하에 두 명의 아들을 둔 이만기는 첫 째가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과 또래가 됐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제자들을 그저 젊은 세대로만 봤어요. 그런데 아들과 또래라고 생각하니까 자식처럼 공감대가 생기더라고요.(웃음) 잘 가르쳐서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으로 키워 내고 싶고, 체육을 선택한 것에서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이십대의 열정을 다 바쳤기에, 그 소중한 시간을 절대 헛되이 보내게 하고 싶지 않다. 이만기 스스로가 지식을 쌓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체육을 넘어 문화계에서 큰 몫을 하고 있듯이 제자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는 전도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 ‘방송인’ 이만기의 삶 “예능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이만기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씨름판보다 오히려 방송에서 더욱 익숙하다. KBS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 비타민과 함께 케이블 TV에서 방영됐던 ‘샅바 인터뷰’ 등에서 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기자, 연구원, 방송 해설가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어요. 저 역시도 교수를 하고 있지만 그동안의 방송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어요. 지금은 스펀지 하나만 하고 있지만 후배들에게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분야에서 선배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그런데 예능 프로그램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팬들이 얌전한 이미지로 봐 주셔서 곤란하네요. 제가 30대쯤 됐어도 장난도 많이 쳤을 텐데.(웃음) 예능은 아무래도 30~40대 계층에는 사각지대에요. 그래도 제가 스펀지나 1박2일, 무릎팍 도사 등에 출연했는데 사실 중년 나이치고는 드물잖아요? 옛 향수를 떠올리면서 재미있어 하시더라고요. 살아온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으니까.” 이만기는 2008년 KBS N을 통해 ‘이만기의 샅바 인터뷰’를 진행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스포츠 분야별 대표 선수들을 만났다. “사실 섭외가 어려워서 (프로그램을) 오래 하지는 못했어요.(웃음) 유명 선수들의 스케줄 조정부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진행도 다소 미흡했고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자신이 씨름계 정상에 섰듯이 체조 여홍철, 펜싱 남현희 등 각 분야의 1인자들과 만남은 매우 특별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샅바 인터뷰’에 출연한 선수들은 모두 자기를 제어할 줄 알고, 인내할 줄 알았다. 그 역시 와 닿는 내용이 매우 많다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박찬호 선수 팬이라고 들었는데) 네,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0승 이상을 올린다는 것이 정말 힘들거든요. 개인적으로 젊은 친구가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 선수들을 삼진 아웃시키는 모습이 멋졌어요. 지금은 선수로서 노장이 됐지만 일본에서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만기는 지난해 김해시생활체육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경남문화재단 대표이사로도 선출됐다. 씨름에서 생활체육으로, 생활체육에서 문화계로 활동 분야를 넓히고 있다.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진정한 슈퍼맨이 아닐까. 씨름은 이만기를 세상과 만나게 한 샘이었다. 그렇기에 씨름에 대한 열정의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이만기는 ‘이만기 브랜드’로 스포츠와 문화 예술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촉매로 거듭나고 있다. 모래판 위에서 눈부시게 당당했던 그가 다시 샅바를 고쳐 매고 선 곳은 더 큰 모래판이다. 인생이라는 모래판 위에서 그가 또다시 펼칠 시원한 들배지기 승리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은 이만기 선수라고 합니다. 그만큼 저와 씨름은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죠. ‘코리언 레전드’로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씨름을 더 알리고 나아가 교수로서 21세기에 필요한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포츠서울닷컴 독자 여러분들도 건강하시고 건승하세요.”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스포츠서울닷컴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kyi0486@media.sportsseoul.com
  • ‘백악관 상황실’ 사진 속 21세기 美정부 변화상

    ‘백악관 상황실’ 사진 속 21세기 美정부 변화상

    참모에게 상석을 내주고 웅그린 흑인 대통령. 테스토스테론이 넘쳐 나는 권력의 중심부를 꿰찬 여성 참모진. 백악관이 지난 2일(현지시간) 공개한 상황실 사진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끈 이 두 장면은 21세기 미국 정부의 변화상 3가지를 단적으로 뽑아냈다. 인종과 여성, 권위의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오사마 빈라덴 제거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주시하는 미국 국가안보팀(NSC)을 포착한 이 사진은 전 세계 언론 1면을 차지했다. 정치·역사학자들은 사진이 “우리가 넘고 있는 새로운 미국의 지평을 시각적으로 제시했다.”고 평가했다고 CNN이 5일 보도했다. 정계와 군부의 중심부,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결단의 순간에는 항상 남성들만 들끓었다. 하지만 이번 사진은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에 맞선 여성들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뒤편에 서서 고개를 삐죽 내민 낯선 여성의 존재는 세인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신상정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통령실 대테러국장 오드리 토머슨이었다. 1999년 터프츠대, 2003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졸업하고 40세도 채 안 된 것으로 알려진 이 젊은 여성은 미 중앙정보국(CIA) 글로벌 지하드팀에서 전 세계 알카에다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 리언 패네타 CIA 국장에게 정기적으로 현황을 보고, 오바마 이너서클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왜 신상이 알려진 게 없느냐는 질문에 토미 비어터 NSC 대변인은 “그전에는 빈라덴을 죽인 적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 그녀가 빈라덴 제거 작전의 공신임을 내비쳤다. 460㎡짜리 상황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사진 앵글의 구석에 자리해 있다. 합동특수전사령부(JSOC) 사령관인 마셜 B 웹 준장에게 중앙의 상석을 내준 그는 캐주얼한 재킷 차림에 사진에 나온 누구보다 몸을 낮추고 앉아 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탑건’ 흉내를 내며 수컷 이미지를 과시했던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들과는 180도 다른 자세다. 하지만 이 사진 한장에서 미국인들은 참모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협동의 힘을 믿는 오바마식 리더십과 자기 확신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강한 척하지 않아도 강했다.’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을 도맡았던 흑인에 대한 시각도 바뀌었다. 정치 블로그 ‘잭&질팔러틱스’의 셰릴 콘티는 “흑인은 그간 길에서 피해야 할 깡패였지만 사진에 그런 흑인은 없었다. 이제 백인들은 흑인을 대통령일 뿐 아니라 최고의 수호자로 보게 됐다.”고 말했다. 몸은 굽혔지만 눈빛만은 비장했던 오바마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1승을 거뒀고, 성난 흑인의 이미지를 없애려다 얻은 유약한 이미지까지 걷어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영화프리뷰] 숏숏숏 프로젝트 ‘애정만세’

    ‘숏숏숏’은 국내 단편영화 활성화를 위해 전주국제영화제가 2007년부터 시작한 디지털 단편영화 프로젝트다. 올해는 ‘사랑’을 화두로 독립영화계의 스타 양익준 감독과 부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두편을 묶은 제목은 ‘애정만세’. 양 감독의 ‘미성년’은 어른인 척하지만 그러지 못한 30대 진철과 가끔 어른같아 보이지만 아직 ‘고삐리’인 민정의 얘기다. 우연히 하룻밤을 함께 보낸 둘은 캔맥주와 짬뽕을 먹으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하지만, 진철은 민정을 좋아하던 남학생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2008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비롯한 국내외 영화제를 휩쓴 ‘똥파리’ 이후 양익준의 귀환이다.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점철된 ‘똥파리’를 떠올린다면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양 감독은 지난달 29일 전주국제영화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안을 받았을 때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똥파리’ 이전에 만든 중단편들은 모두 사랑이야기”라고 말했다. 남성 판타지를 영화화한 마초적인 작품이란 비판도 있다. 30대 남자와 여고생의 해피엔딩에 초점을 맞춘 시각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조건의 남녀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얘기했을 뿐이다. 다만 남자가 30대이고 여자는 고3이었던 게다. 그나저나 영화를 보고 나면 짬뽕이 생각나는 건 분명하다. 부지영 감독의 ‘산정호수의 맛’은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순임의 사랑 얘기다. 지난가을 산정호수에서 있었던 회사 야유회에서 2인 3각 경기를 함께한 연하남 준영과의 추억을 순임은 고이 간직한다. 한겨울 산정호수를 홀로 찾아간 순임은 온몸으로 추억을 복기한다. 부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9)로 주목받은 데 이어 올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인 ‘시선 너머’ 중 ‘니마’를 연출했다. 공통점은 주변부에 놓인 이들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다. 어쩌면 순임은 평범한 여자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새 어그부츠를 신고 외출한다. 남자에게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전화를 해놓고는 수줍어 말을 못 잇는다. 그런데 순임이 신은 어그부츠는 고교생 딸의 물건. 좋아하는 연하남은 전형적인 ‘어장관리형’이다. 상처는 순임의 몫이다. 부 감독은 “사랑이나 멜로를 생각해 봤을 때, 딱히 젊은 연인들이 떠오르지 않았다.”면서 “낭만적 사랑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이 더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6월 9일 개봉.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9)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29)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

    28일, 466년 전 이순신 장군이 이 땅에 태어난 날 아침이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민족의 귀감인 장군의 흔적이나마 찾아 보전하려는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돼 왔다. 그중에 ‘이순신 나무’로 불리는 나무도 있다. 경남 남해군의 작은 섬 창선도 대벽리의 단항마을 바닷가에 서있는 왕후박나무가 그 나무다. 단항마을은 통영의 한산도에서부터 여수에 이르는 한려수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로, 노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곳이다.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왕후박나무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으로 오랫동안 마을의 자존심으로 살아남았다. ●용왕이 어부에게 보내준 씨앗서 싹 터 이 왕후박나무는 아주 오랜 옛날, 바다의 용왕이 보내준 나무다. 그때 이 마을에 살던 늙은 부부가 어느 날 마을 앞 바다에서 매우 큰 물고기를 잡았다. 워낙 큰 물고기여서, 부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기로 하고, 모두 모인 자리에서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 그 물고기의 배 안에서 이상한 씨앗 하나가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씨앗은 바닷가 깊은 곳의 용왕이 보내준 선물이라며 마을 들판의 양지바른 자리에 심어 키우기로 했다. 씨앗은 새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나 마을의 상징처럼 우람하게 잘 자랐다. 사람들은 고기잡이 하는 어부를 보호하는 나무라고 생각하고,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올렸다. 용왕이 보내준 나무이니, 나무에 올리는 제사는 곧 용왕께 올리는 제사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 지금 9m 가까이 자란 나무는 마치 납작한 공을 덮어놓은 듯한 푸근한 모양으로 아름답게 자랐다. 나뭇가지는 키보다 훨씬 넓게 펼쳤다. 동서로 21.2m, 남북으로 18.3m에 이를 만큼 넓게 펼친 나무 그늘은 마을 사람 모두가 들어서도 남을 만큼 널찍하다. “옛날에는 훨씬 더 컸는데, 10여년 전쯤에 태풍을 맞아서 큰 가지가 부러졌어요. 그때 키가 조금 작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큼 멋있는 나무가 어디 있겠어요? 얼마 전에 우리 민박집에 머물던 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양반은 하루 종일 이 나무만 바라보고 있다가 ‘남해에 와서 이 나무 하나로 본전 다 뽑았다.’고 하더라고요.” 마을 앞 포구에 몰려 든 조개잡이 배에서 걷어올린 바지락, 피조개 등을 바삐 나르는 임시 장터에서 만난 바닷가 민박집 아주머니 이야기다. 나무가 좋아 나무 아래 산다는 아주머니는 민박집 이름도 아예 ‘후박나무 민박’이라고 붙였다. ●이순신 장군이 전열을 정비한 그늘 왕후박나무는 후박나무와 같은 종류의 나무로, 잎 모양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구별이 불가능하다. 학자에 따라 두 나무를 같은 나무로 보아야 한다고도 주장하는 이 나무는 울릉도와 남해안의 바닷가에서만 자라는 상록성의 나무다. 후박나무는 분명 우리 토종의 나무인데,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를 후박나무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있다. 5월쯤에 가지 끝에서 목련을 닮은 하얀 꽃을 소담하게 피우는 낙엽성 나무로, 본래 이름은 ‘일본목련’이다. 무려 40㎝나 되는 넓은 잎을 가진 이 나무에서 후덕한 인심을 연상하고 ‘후박나무’라는 이름과 나무의 이미지가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한 탓이다. 또 이 나무 껍질을 약재로 쓸 때의 이름이 ‘후박’인 탓도 있다. 특히 우리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후박나무나, 중부 지방에서 부르는 후박나무는 십중팔구 일본목련이다.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일본목련과 달리 지름 1㎝도 안되는 작은 꽃이 핀다. 천연기념물 제299호인 이 나무에 ‘이순신 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건 400년 전. 정유재란(1597)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이 마을 앞바다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당시 이순신은 군함 500척으로 왜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단항마을에 잠복했던 장군은 주변에 무성하게 숲을 이룬 대나무를 꺾어내 작은 배에 가득 싣고 불을 질렀다. 불이 붙자 대나무는 마디가 터지면서 마치 대포를 쏘는 듯한 큰 소리를 냈다. 이순신 함대의 동정을 엿보던 왜군은 끝없이 이어지는 포성에 주눅이 들어 줄행랑을 놓았다고 한다. 왜군이 모두 물러간 뒤, 장군은 여유있게 해안에 상륙하여 이 왕후박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쉬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다음 전략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승전을 축하하고, 장군을 성원하는 마음으로 제가끔 푸짐한 음식을 내와서 군인들을 성원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전공을 세우고 쉬어 간 나무라는 자부심으로 이 왕후박나무를 이전보다 더 살갑게 돌봤다. 용왕이 보내준 이 신령한 나무를 아예 ‘이순신 나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우리 민족 모두가 돌아봐야 할 나무 “옛날에는 나무 앞에서 해마다 풍어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안 지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런 거 안 하잖아요. 그래도 이 나무가 신성한 나무라는 건 다 알고 있어서, 둘씩 셋씩 모여서 나무에 저마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자주 찾아온답니다.” 나무 앞의 완두콩밭에서 김을 매던 아낙은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많고 때로는 소원을 빌기 위해 제물을 차려셔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낙의 이야기를 증거하기라도 하듯, 콩밭 가장자리의 둔덕에 앉아 아낙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지나가던 자동차가 나무 앞에 멈춰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년의 한 남자가 내려 넋을 놓고 나무를 바라보더니 휴대전화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돌아간다. “농사 일이 한가해지는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 주변에서 풀뽑기를 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보살피지 않아도 군에서 잘 보호하고 있어요.” 더듬더듬 풀어내는 아낙의 이야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혼이 담긴 이 왕후박나무야말로 온 나라 사람들이 소중하게 가꿔야 할 나무 아니겠느냐’는 극진한 자부심이 담겨있다. 아낙의 자부심을 타고 흘러온 봄바람이 푸근하게 펼친 나뭇가지 품으로 흐뭇이 파고 들었다. 글 사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69-1. 남해고속국도의 사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사천공항 방면의 국도 3호선을 이용해 21㎞ 쯤 가면 삼천포대교가 나온다. 대교를 건너자마자 나오는 단항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단항마을 쪽으로 간다.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1.6㎞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단항마을 경로당이 나오고, 이어서 새로 지은 모텔이 보인다. 모텔을 지나면 곧바로 언덕 아래 바닷가 쪽으로 나무가 보인다. 나무 가까이 자동차로 다가갈 수 있다.
  • [18일 TV 하이라이트]

    ●독립영화관 마녀의 관(KBS1 밤 1시 10분) 러시아 작가 고골의 ‘비이’(VIY)를 각색하여 만든 공포 연대기 3부작. 고골 원작의 비이를 영화화해야 하는 젊은 영화감독 P는 오디션을 통해 뽑은 신인 여배우가 어쩐지 불길하다. 재능 있는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촬영하는 과정에서 감독 P는 자신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을 느끼게 되는데…. ●금요기획(KBS2 밤 11시 5분)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는 드물다. 죽음은 연상만으로도 불편한 감정을 안겨준다. 어느 순간 우리는 죽음을 파헤치기보다 모른 척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죽음은 현대 사회의 터부가 되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일일연속극 남자를 믿었네(MBC 밤 8시 15분) 평창동에서 선우를 봤다는 경미의 말에 경주는 평창동을 이잡듯이 뒤지지만 선우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인희가 없는 빈집에 허전함을 느낀 진헌은 인희에게 전화를 하고, 고가의 목도리를 선물하는 등 조금씩 마음을 표한다. 한편 경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남기는 경주의 집으로 직접 찾아간다. ●귀농 프로젝트 농비어천가(SBS 오후 6시 30분) 야간작업 끝에 돌탑을 쌓은 경기 양평 청년들. 그러나 마을의 상징물이 될 섬이마을 돌탑 주변이 왠지 허전하게 느껴지고, 부족한 2%를 채우기 위해 돌탑 주위에 꽃을 심기로 한다. 그런 청년들의 눈에 띈 것은 석산(꽃무릇)이다. 섬이마을의 또 다른 이름인 석산리와 똑같은 이름의 야생화인데…. ●세계의 아이들(EBS 밤 8시 50분) 남아메리카 중앙 고산지대에 위치한 볼리비아는 아직도 농업이 국가 경제활동의 주를 이루는 가난한 나라이다. 그곳의 14세 소녀 타티아나는 학교 오전 수업이 끝나면 엄마와 함께 코카밭으로 가 잎을 딴다. 소녀가 오후 내내 수확하고 버는 돈은 우리 돈으로 600원. 때로는 자유를 꿈꾸기도 한다는 소녀의 수줍은 고백을 들어 본다. ●명불허전 이시형 박사편(OBS 밤 10시 5분) 한국 시사만화가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 화백의 부드럽고 날카로운 진행으로 명사들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 이번주 주인공은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 전도사인 이시형 박사. 마음이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과 ‘국민의사’로 불리기까지 그의 지나온 삶의 궤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
  •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일고여덟살 무렵부터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신문을 펼치는 사람은 나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내복바람으로 달려나가 신문을 집어들고 와서 먼저 펼쳤던 것이 ‘TV편성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색연필까지 들고서 만화영화의 편성시간대에 체크를 하고, “~하고 마는데…” 하고 끝나는 프로그램 예고기사를 두근거리는 맘으로 읽기도 했다. 여덟 살 꼬마에게 신문읽기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의식이었다. ‘신문사랑’은 계속되었다. 열살 때는 연재소설에 맛을 들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야했다. “보지 마라.”는 부모님의 핀잔은 어린 가슴에 불을 댕겼고, 그 이후로 아침마다 가장 먼저 신문을 읽고 나서는 안 읽은 척, 새 신문인 것처럼 각을 잡아놓곤 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몰래 읽는 스릴이 최고였다. 나이가 들고 관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스포츠 섹션, 시, 짤막한 칼럼, 독자참여란이나 오피니언 등의 순서로 ‘열독 코너’의 수준이 높아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갔다. 서울신문에서 요즘 가장 즐겨 읽는 코너는 토요일자 서평 섹션이다. 마음만큼 책을 읽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서평으로 대리만족하곤 한다. 이렇게 자잘한 재미를 찾아 신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신문과 친해지고 그 이로움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신문을 읽는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소소한 즐거움이 있기에 신문을 집어들게 된다. 매일 아침 펄떡거리는 새 뉴스를 상에 올리는 신문이지만 고정적으로 즐겨 찾는 밑반찬 같은 코너가 있다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위안은 자못 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일까. 눈에 들어오는 편집과 디자인 덕에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기에는 쉬운, 젊은 느낌의 신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을 붙일 만한 피처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취약하다는 점은 아쉽다. 유머는 한물간 것이고, 날씨는 지면 중간 애매한 곳에 있어 가독률이 떨어진다. 만화, 만평, 운세는 다른 신문과 별반 차이가 없다. 풍부하고 충실한 내용 이외에도 독자의 충성도를 높여줄 ‘갈고리’를 추가로 장착할 것을 제안한다. 서울신문은 지난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연재하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한국 신문소설의 역사, 나아가 현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는 시대지만 여전히 연재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의 전력을 살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실험적인 작품의 연재는 어떨까. 서평이나 문화면에서도 차별화를 권한다. 서평 전문기자의 충실하고 풍부한 서평은 지금도 좋다. 책의 주제를 쉽게 함축한 디자인에는 눈이 덜컥 가서 걸린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기준이 궁금하다. 그냥 화제작이나 신간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읽어 볼 만한 책이라든지 특정 주제의 책을 묶어 소개하는 식으로 기준을 다양화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구색갖추기용 지면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이 신문을 읽을 때 먼저 1면을 대충 훑어보고 그 다음 뒤로 넘겨 신문을 펼친다고 한다. 오피니언 면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좋은 거리가 ‘길섶에서’와 ‘씨줄날줄’ 이다. 주제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히 풀어낸 글은, 편하게 앉아 현명한 인생선배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 같아 좋다. 기사를 읽기 전 혹은 후에 쉬어갈 수 있는 코너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알차고 풍부한 내용이라도 쉼 없이 읽어 내려면 생각만 해도 숨이 찬다. 물론 그런 것이 신문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정공법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젊은 층이 신문을 외면하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도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어릴 적 그 설렘을 다시 떠올리며 깊이 있는 신문, 살아있는 신문에 더해 재미있는 신문, 정이 가는 서울신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 김영남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

    김영남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

    물과 꽃의 공통점이 있다. 한 음절의 단어라는 것? 맞다. 뭇 생명을 잉태하는 근원이라는 것? 맞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품고 오랜 문화예술사를 통해 숱한 가인들로부터 다양하게 변주됐다는 것? 맞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젊은 시인 김영남이 욕망을 담아 즐겨 사용한 시재(詩材)라는 점이다. 김영남이 자신의 네 번째 시집 ‘가을 파로호’(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드러낸 시정은 농염하기만 하다. 꽃을 노래할 때도, 호수나 바다를 노래할 때도 시인은 짓궂은 욕망을 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보여준 뒤 상대방의 표정을 빤히 쳐다본다. 생물학적 나이로 54세니 이미 중견시인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는다. 삶을 관조 연(然) 하는 것이 어울릴 법한 나이다. 짐짓 심각한 척해도 되고, 같은 시어라도 그렇게 읽으라는 식의 기호를 담을 수 있겠건만 애써 거부한다. 한데 시력(詩歷)을 따지면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고작’ 14년차에 불과하다. 어쩐지…. 장난치고 싶어, 연애하고 싶어, 새로운 시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 김영남이 여전히 젊은 시인이고, 젊은 시인이어야할 징표다. 시집의 첫 시편부터 애사롭지 않다. ‘…/우물가 집 뒤란의 누나 방에/ 굴러다니는 피임약이여, 그걸/ 영양제로 주워 먹고 건강한 오늘날이여’(‘앵두가 뒹굴면’ 중)라고 노래하거나 ‘…/ 이 아저씨들 하역 다 끝나면 나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쪼그라든 콘돔을 앞에 두고/ 저건 점박이, 이건 꼽새 아저씨 것 하고 한 번 우겨보리라’(‘나로도 호박꽃’ 중)라며 풋풋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성장기의 일부를 내밀히 고백한다. 그리고 목련, 동자꽃, 나팔꽃, 능소화, 할미꽃, 코스모스, 성에꽃, 튤립, 찔레꽃 등을 차례로 호출한다. 꽃마다 유혹과 욕망의 시상이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버무려져 있다. 찔레꽃은 ‘포옹에 관한 리뷰’가 되고, 튤립은 ‘자전거에서 내린 소녀’이며 능소화는 ‘그예 그리움으로 담을 타는 여인’이 된다. 시인의 장난끼는 바다를 대하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벽과 마주 앉아 한잔 크게 나누어보지 않으면 잘 모르리라/…/ 저 강진만 바다를 형님! 형님! 하고 불러보자’(‘강진만’ 중)라며 바다와도 벗을 맺거나 ‘새벽녘 다랑논에 나가/ 모내기하는 앵강만을 데려와 씻겨 벗겨 눕혀본다’(‘앵강만 일출’ 중)고 하며 자연에 대한 호방한 욕망을 거침없이 뿜어낸다. 시와 인생을 가지고 노는 일망무애(一望無涯)함이 부러움을 자아낼 만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세대공감] 세월따라 변한 ‘부의 상징’

    [세대공감] 세월따라 변한 ‘부의 상징’

    농산물 수입개방이 되기 전인 1986년 봄. 초등학교 1학년 꼬마는 소풍에서 자신의 짝지가 완전 부잣집 딸이란 것을 알게 됐다. 꼬마가 태어나서 한번도 하나를 온전히 먹어보지 못한 노란 바나나. 짝꿍의 소풍 가방에는 바나나가 무려 3개가 나왔다. 하나는 선생님 것. 하나는 짝의 것. 그리고 하나는 꼬마에게 쥐어졌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짝지의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나눠주라고 챙겨준 것이었다. ‘바나나 한개를 혼자 먹다니.’ 이후 1학년 꼬마에게는 바나나가 ‘부의 상징’이 됐다. 이젠 바나나는 가장 싼 과일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하지만 30대가 된 꼬마에겐 여전히 바나나가 ‘있는 집’의 상징으로 생각된다. 세태가 급변하면서 경제력의 척도를 나타내는 물건도 바뀌고 있다. 세대마다 깊게 각인된 ‘부의 상징’은 여전히 “우리 때는 저거 있으면 정말 사는 집이었지.”라는 말을 끄집어낸다. 세대별 부의 상징을 찾아봤다. 친구의 메이커 운동화 흙 묻히며 심술냈어요 서울 봉천동의 김진화(24·여)씨는 초등학교 시절 ‘메이커 운동화’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4학년 때까진 어머니께서 사 주신 신발을 아무 말 없이 신었지만 5학년이 되고 나서 ‘메이커’에 눈을 떴다. 메이커라고 해 봤자 아는 것은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스포츠 브랜드가 전부. 꼬마였던 김씨는 이런 브랜드들을 하나 하나 외며 친구들 앞에서 제법 아는 척 했다. 당시 김씨의 눈에 메이커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하나 같이 잘사는 집 아이들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의사, 사업가, 유명 학원장 등이었다. 한마디로 그때 김씨의 학교에서는 메이커 운동화가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던 것. 이런 친구들은 새로 산 티가 나는 운동화를 친구들 앞에서 내밀며 괜스레 자랑하고 다녔다. 김씨는 “솔직히 부럽기는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산 운동화는 밟아 줘야 오래 신는다며 일부러 흙을 묻히기도 했죠.”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서울 신월동에 사는 송유경(26·여)씨는 마음의 여유가 곧 부의 상징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송씨는 주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출판사에서 성인을 위한 영어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송씨는 돈을 버는 데 아등바등하기보다는 적은 돈이라도 여유롭게, 싫은 일을 억지로 하기보다는 천천히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하며 살고 싶다. 웰빙이 곧 부의 기준인 셈이다. 송씨는 “세상에 돈이든 보석이든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있지만 마음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나요? 전 마음이 부자이고 싶어요.”라며 미소지었다. 외제차 부럽지만 엄두는 못 내죠 서울의 회사원 최영민(27)씨에게 부의 상징은 소위 ‘명품 외제차’이다. 결혼식에 번쩍번쩍하는 외제 승용차를 몰고 오는 친구들은 완전 선망의 대상이다. 최씨는 “남자가 명품 자동차를 몰고 예쁜 여자가 옆에 타고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면서 “여자와 사귈 때도 고급 승용차가 있으면 작업이 더 잘 된다.”면서 부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최씨는 명품 자동차를 사기 위해 딱히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최씨는 “부의 상징은 단지 상징일 뿐 내가 하기에는 막연한 거리감이 있다.”면서 “이제 직장생활 1년차인데 아껴서 장가갈 돈 모으는게 더 급하죠.”라고 말했다. 그에게 명품 차는 아직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갓 입학한 여대생들은 명품 가방에, 명품 구두까지 갖춘 졸업반 여대생들은 옷이 날개인 듯 명품 의류에 필이 꽂힌다. 서울에 사는 피아노 강사 김영희(34·여)씨에게 부의 상징은 ‘교정기’이다. 김씨는 요즘 들어 TV에서 유명 스포츠 스타나 탤런트들이 교정을 통해 과거에 비해 확연히 예뻐진 모습을 보며 교정의 효과에 새삼 놀란다. 김씨는 “그동안 절친들이 미용을 위해 교정을 한다는 것에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시큰둥했던 자신이 후회스럽다.”면서 “연예인들은 물론 주변 친구들이 교정을 하고 달라진 모습에서 부러움과 환상을 동시에 느낀다.”고 말했다. 현재 사귀는 이성도 없어 결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 김씨에게 교정기는 그야말로 탁월한 성형 효과를 가져다주는 부의 상징이다. 김씨가 교정기를 부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웬만한 사립 대학의 등록금에 맞먹는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 하지만 김씨는 일주일 전 큰 마음을 먹고 교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씨는 “지난 1년 간 피아노 강사를 하며 모은 돈을 쪼개 나를 위해 투자할 생각”이라면서 “현재 학원 수업 도중 틈날 때마다 주변 치과에 들러 교정하는 데 드는 비용을 문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등촌동에 사는 대학생 지은송(25·여)씨의 부의 상징은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취업난이 심각한 요즘 취업만 해도 성공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떤 일을 하느냐가 성공을 넘어서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해서다. 지씨는 “취업난으로 불안한 마음은 대학입학 때부터 항상 있어 왔던 일이잖아요. 그래서 대학입학 때부터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라며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씨는 현재 졸업을 1학기 남겨두고 휴학 중이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신림동 고시촌 근처에서 살며 매일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엔 떨어졌지만 올해는 꼭 붙겠다는 각오다. 지씨는 “매일 반복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합격할 저를 생각하면 다시 한 번 힘이 나요.”라며 밝게 웃어 보였다. 모두가 안정적인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도전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는 어른들에게 지씨는 “이렇게 불안한 시대에 안정적인 것을 찾는 게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아닐까요. 미래에 제가 안정적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게 좋은 일 아닌가요.”라고 대답한다. 사는 곳이 자신의 경제력을 말해주죠 ‘부동산 광풍’이라는 말은 순천에 사는 주부 정연순(48·여)씨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만 같다. 전세살이로 전전하다 8년 전에 마련한 시골 마을의 1층 단독주택이 정씨의 보금자리. 넓은 집은 아니지만 정원에는 봄꽃이 봉오리를 틔울 준비를 하고 있고 누렁이 한 마리도 있다. 아담한 보금자리다. 하지만 정씨는 “우리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부의 상징은 바로 아파트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정씨의 생각에 아파트는 보금자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정씨는 서울 강남의 남동생 부부가 내려와 아파트값이 떨어졌다느니, 어느 곳에 신도시가 개발되는 데 괜찮을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를 실감했다. 정씨는 몇년 전 서울에 갔다가 강남에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들을 봤다. 벽면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로 뒤덮여 있고 꼭대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정씨는 문득, ‘저런 아파트가 아니어도 살기 좋은 집은 많은데 굳이 저런 아파트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정씨는 “아파트를 부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에 투기가 발생하고 땅값이 오르는 것 아니냐.”면서 “집을 부의 상징이 아닌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이나 서초 등 사는 지역도 부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쌀이 부족하니 보리혼식을 합시다’. 제주에 사는 김성진(58)씨는 1960년대에 한참 나돌았던 이 구호를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온다. 제주에는 쌀이 턱없이 부족해 사람들은 보리밥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제주는 논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다른 지역보다도 쌀 부족 현상이 심했다. 1960년대 제주에서는 ‘쌀밥’이 부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당시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집은 곧 부잣집”이라면서 “제사상에 쌀밥과 쌀떡을 올리는 집 아이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친구들을 데려와 제사상에 올려진 쌀밥과 떡을 슬쩍 보여주곤 그걸로 며칠 동안 목에 힘을 주고 다녔지.”라며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집이라도 소풍이나 운동회 날이면 쌀밥을 먹고 싶은 게 아이들의 인지상정. 김씨는 “운동회 날이면 어머니께서 모처럼 쌀밥을 지어서 보리밥 위에 한두 숟갈 얕게 얹어서 도시락을 싸 주었지.”라며 “도시락을 열었을 때 하얀 쌀밥이 눈에 들어오면 지금 말로 완전 대박”이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TV는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었지 서울 목동에 사는 김성일(58)씨는 텔레비전을 꼽았다. 김씨는 “지금이야 엄청나게 화질도 좋고 선명한 큰 텔레비전이 많이 있지만 제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흑백 텔레비전은 마을에서 하나 있을까말까 했어요.”라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에 한대 있던 텔레비전은 아이들이 그 집으로 모이게 했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 아저씨는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텔레비전 보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집 아들이 문제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텔레비젼을 보지 말라며 생떼를 썼기 때문. 그때마다 김씨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부끄러웠다. 김씨는 “기분은 무척 나빴지만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꾹 참았지만 나름대로 마음의 상처였는지 가끔 생각하면 씁쓸하네.”라고 말했다. 김씨는 부잣집 아들의 구박에도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었다. 김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상품이 쏟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바뀔 수 없는 것은 그때의 추억”이라면서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때 다같이 사람들이 웃고 울던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안양에 사는 김기숙(52·여)씨는 부의 상징이란 곧 ‘가방끈’이라고 단언했다. 전남 함평 출신인 김씨가 학창시절을 보낸 1970년대만 해도 까만 교복을 입고 여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손에 꼽을 정도. 설사 학교에 다닐 수 있어도 운이 좋으면 초등학교 때까지 혹은 초등학교 3, 4학년까지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4남매의 첫째였던 김씨도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초등학교만 나온 게 전부였다. 김씨는 “3학년인가 4학년인가 그때쯤 아버지가 이제 학교 다니지 말고 집에서 일하고 동생들 돌보라고 하셨을 때 난 학교를 가겠다고 소리 지르면서 집을 뛰쳐나갔던 게 생각난다.”면서 “첫째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던 아버지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하며 한숨울 내쉬었다. 결국 김씨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끝까지 다닐 수 있도록 허락했다. 몇몇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김씨는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 애들이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집에 숨었어요.”라면서 “지금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선생님, 교수가 됐는데 저도 똑같이 공부했다면 그 친구들처럼 자신 있게 명함을 내밀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혼자 웃곤 해요.”라고 말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쫓는 자’ 웃었소 ‘쫓기는 자’ 울었소

    ‘쫓는 자’ 웃었소 ‘쫓기는 자’ 울었소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뽑힌 ‘추노’(5표)는 대본, 연출, 연기의 3박자가 잘 맞았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 형상화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추노’의 곽정환 감독-천성일 작가 콤비가 재도전한 ‘도망자’는 가장 아쉬운 작품으로 뽑혀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감도 컸음을 보여줬다. ‘2010 베스트 & 워스트 드라마’는 올해 종영한 드라마를 기준으로 했지만, 현재 방영 중인 작품을 꼽은 응답자도 있었다. ●‘추노’ 대본·연출·연기 3박자 척척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추노’를 베스트로 추천한 이유에 대해 “조선 시대 경제 하층인 노비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속의 양극화 문제를 돌아보게 했다.”면서 “영상 미학적인 부분에서 기존에 볼 수 없던 영상으로 드라마에 현대사를 투영시킨 주제 의식도 돋보였다.”고 호평했다. 장근수 MBC 드라마국장은 “새로운 방식으로 땀 흘리고 공들인 것이 마치 MBC 예능 프로그램의 ‘무한도전’ 같았다.”면서 경쟁사 드라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 국장은 “완전히 사전 제작으로 만든 작품은 아니지만 충분히 찍고 충분한 호흡으로 만든 것이 성공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김수현 작가 가족드라마 가치 지켜내 2위를 차지한 SBS ‘인생은 아름다워’(3표)는 동성애 등 파격적인 주제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막장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가족 드라마의 가치를 지켜낸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정덕현 평론가는 “재혼 가정, 동성애 등의 소재를 자극적으로 이용하기보다는 가족 드라마의 틀 안에서 부드럽게 풀어내고, 가족의 시선으로 끌어안는 과정을 잘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공동 3위를 차지한 SBS ‘자이언트’(2표)는 모처럼만에 힘 있는 드라마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영탁 KBS 드라마국장은 “강남 개발사를 통해 얼룩진 현대사를 정면으로 담아낸 것도 좋았고, 등장인물 묘사와 배우들의 연기 등 극적 효과도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성균관 스캔들’(2표)은 시청률은 낮았지만, 한동안 침체된 청춘 멜로물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잘 만든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구조나 등장인물의 캐릭터 구축이 굉장히 모범적이었다.”면서 “희망 없는 젊은 세대의 열정을 부각시키고, 과거 정치 권력의 문제를 현재의 상황에 절묘하게 연결시킨 것도 주목할 만했다.”고 말했다. 각 방송사별로 시청률 면에서 성과를 거둔 작품들도 베스트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다. KBS ‘제빵왕 김탁구’(1표)는 “중간에 막장의 요소가 첨가되긴 했지만, 정의가 이긴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MBC ‘동이’(1표)는 궁중 사극과 서민 사극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베스트 ‘추노 명콤비’ 워스트까지 차지 올해 가장 아쉬웠던 드라마로 뽑힌 KBS ‘도망자’(5표)의 문제점으로는 의욕 과잉이 꼽혔다. 전문가들은 뭔가 보여주려는 의욕이 너무 앞서다 보니 연기, 연출, 극본에 힘이 들어가면서 전체적인 드라마 톤의 안배에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200억원대의 제작비를 투입했지만, 같은 제작진이 1년에 두 작품을 만들다 보니 준비 기간 부족으로 숙성된 작품이 나오기 힘든 구조였다는 지적도 있었다. ●‘로드 넘버원’ 호화 캐스팅에도 부진 2위를 차지한 MBC ‘로드 넘버원’(3표)은 1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투입하고, 소지섭·김하늘·윤계상 등 호화 캐스팅을 자랑했지만, 기본 줄거리와 배우들의 연기가 겉돌아 드라마가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6·25 60년 기념 드라마였지만, 전쟁의 비참함이나 평화의 메시지가 약해 전쟁을 소재로 한 멜로 드라마에 그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두 드라마 모두 아무리 톱스타와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해도 스토리가 빈약하면 볼거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고 입을 모았다. 3위를 차지한 MBC ‘장난스런 키스’(2표)는 대본, 연출, 연기 면에서 특별히 보여준 것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해외(일본·타이완)에서 이미 검증된 콘텐츠였음에도 ‘장난스런 키스’가 실패한 것은 실험성과 창의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자체 기획 드라마가 실패한 것보다 더 큰 책임이 따른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 밖에도 SBS ‘대물’(1표)과 MBC ‘동이’(1표)는 대표적인 용두사미형 드라마로 꼽혔으며, MBC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1표)는 “스타 시스템에만 의존한 블록버스터는 시청자에게 외면받는다는 교훈을 확인시킨 사례”로 지적됐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심사위원 고영탁 KBS 드라마국장, 장근수 MBC 드라마국장, 허웅 SBS 드라마국장,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 평론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 [박창규 기자의 광저우 아침] “일 없습네다… 그러나 남·북은 한민족 한마음”

    얼굴도 같고 말도 같은데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 좀체 다가가기가 어렵다. 가끔 이것저것 말을 걸어 보면 대개 “일 없다.”는 대답이다. 아니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모른 척한다. 지레 민망해져 물러선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다들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번 대회 들어 북한 선수단이 많이 냉랭해졌단다. 딱 10년 전, 남북한 선수단은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했다. 이후 7년 동안 9차례 국제종합대회마다 함께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부터 따로 행진이 계속됐다. 이번 대회 들어 북한 선수단은 한국 취재진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는다. 손 한번 흔들어 주는 서비스도 없다. 경기장에서 마주치는 선수들끼리도 어색하게 지나친다. 이기흥 한국 선수단장은 “대회 기간 북한과 공식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게 방침”이라고 했다. 냉각된 남북 관계가 스포츠에까지 영향을 미친 걸까.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이면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같은 말 쓰는 같은 민족이다. 더구나 편견 없고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 모인 자리다. 대화와 공감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북한 선수단은 함께 즐거워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있었다. “대회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데 친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남들 보는 곳에선 못 떠들어도 우리끼리 있으면 같이 잘 놀아요.” 한 여자 선수의 말이었다. 다른 선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선수촌 안이나 선수대기실처럼 다른 사람 눈이 없는 곳에선 장난도 치고 잘 지냅니다. 눈치 보여서 몰래몰래 얘기하는 편이지요.” ☞ [포토] 코리안號 ‘종합 2위 목표’ 순항중 남북한 선수들은 무슨 얘기를 나눌까. 보통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와 똑같았다. 남자 선수 여럿은 “어떤 여자 선수가 예쁜지 오늘 경기 끝나면 몰래 술이라도 한잔할지에 대해 얘기할 때가 많다.”고 했다. 여자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남자 얘기에, 오늘 식사 때 나왔던 디저트 얘기, 지독한 감독님 뒷담화를 주로 한다.”고 말했다. 결국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는 다들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공개된 곳에선 왜 그렇게 어색해할까. 남북한 양쪽 모두 비슷한 이유가 있었다. 북한 선수단은 보위부의 감시를 의식해야 한다. 남들 보는 곳에선 대화하기가 어렵다.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장담할 수 없다. 남한 선수들도 다를 게 없다. 한 선수는 “북한 선수와 몇 마디만 해도 당장 어디선가 국정원 직원이 나타난다. 무슨 얘길 했는지, 주고받은 건 없는지 꼬치꼬치 물어대서 밖에선 북한 선수들을 모른 척 한다.”고 했다. 핏줄은 자연스레 서로 당기게 되어 있다. 그걸 막는 건 체제와 정치다. nada@seoul.co.kr
  • [주말 영화]

    ●달콤한 거짓말(KBS1 토요일 밤 12시 45분) 술만 마시면 첫사랑 얘기로 주정을 부리는 조기종영 전문 방송작가 지호(박진희).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방송국에서도 잘린 채 집에 돌아가던 어느 날, 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낸 사람은 다름 아닌 10년 전 첫사랑 민우. 일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지호는 사고로 기억을 잃은 척 연기를 시작하고, 얼떨결에 그녀의 보호자가 된 민우. 그녀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지호는 민우의 집에 머물며 그의 이상형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요리 잘하는 척부터 다소곳한 척, 여성스러운 척, 온갖 ‘척’ 연기를 하며 민우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행방불명된 지호를 찾고 있던 소꿉친구 동식이 우연히 지호를 발견하고, 그녀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제멋대로 지호의 기억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민우를 잡기 위해선 ‘없는 척’ 연기를 멈출 수 없는 지호. 연애하고 싶은 그녀의 쇼는 계속되고, 한순간의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하는데…. ●살인의 추억(OBS 일요일 밤 12시 20분) 1986년 경기도.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살해당해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일대는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발생지역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수사본부에는 구희봉 반장을 필두로 지역 토박이 형사 박두만과 조용구, 그리고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이 배치된다. 육감으로 대표되는 박두만은 동네 양아치들을 족치며 자백을 강요하고, 서태윤은 사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지만,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은 처음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서태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 대상이라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길다(EBS 일요일 오후 2시 40분) 아르헨티나의 도박장에서 많은 돈을 따고 거리에 나선 조니는 강도의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카지노 소유주인 발린 먼슨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 사람의 심복이 된다. 조니는 먼슨의 집에서 그의 부인 길다를 소개받는데, 길다는 다름 아닌 조니의 옛 애인이다. 길다와 조니는 서로에게 이끌리고 이것을 눈치챈 먼슨은 두 사람에 대한 증오심으로 조니에게 길다의 보디가드 노릇을 해줄 것을 명한다. 길다와 조니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간 먼슨은 비행기 사고로 죽게 되고, 이후 조니와 길다는 결혼하지만 조니 또한 길다의 남성 편력에 대해 의심하며 애증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중 죽은 줄로만 알았던 먼슨이 조니와 길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오고, 격투를 벌이던 끝에 먼슨이 죽고 만다.
  • [23일 TV 하이라이트]

    ●과학카페(KBS1 오후 11시30분) 찌는 듯한 무더위. 하지만 실내 온도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 이런 실내외 온도차는 여름철 노출이 심한 여성들에게 최대의 적이다. 겨울철 대표 질환으로만 알고 있던 안면홍조, 그러나 최근 들어 여름에도 안면홍조증이 나타나 고통 받고 있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겨울철 질환이 여름에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쥬로링 동물탐정(KBS2 오후 4시30분) 최근 들어 아름드리시에서 애완동물이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건이 고기를 배달하러 간 집에서 악어를 발견하고, 그 집에 의심을 품는다. 쥬로링 동물탐정단은 그 집의 요리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저녁에 침투한다. 그런데 악어는 단지 자신의 알을 지킬 뿐 애완동물 실종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동이(MBC 오후 9시55분) 동이가 사가로 나간 지 6년의 시간이 흐르고, 연잉군은 일곱 살이 된다. 세자는 숙종과 사신단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갑자기 혼절을 하고, 세자를 진료하는 의관은 세자가 어쩌면 후사를 보기 어려울 수 있다고 옥정에게 말한다. 인현은 옥정이 세자의 몸을 어의에게 살피게 하지 않고 다른 의관에게 전담시키는 것을 미심쩍어한다. ●자이언트(SBS 오후 9시55분) 강모가 죽은 대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회장은 재산의 절반을 강모에게 주기로 마음먹고 유언장을 고친다. 필연은 교도소로 찾아온 오 실장에게 정치인 비밀사찰 문건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정연은 만보건설에 관한 악성루머가 돌아 주식이 곤두박질치자 경옥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EIDF 우리가족은 성형중독(EBS 오후 10시30분) 오랜만에 가족과 만난 감독은 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을 제외한 16명의 식구들은 모두 성형 중독에 빠져 있다. 이 깨어진 가족관계 속에서 감독은 완벽함을 추구하며 서로를 재단했던 자신의 가정과 유년기를 떠올린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는 없었을까. ●경찰 25시(OBS 오후 11시5분) 혼자 집에 있던 할머니에게 찾아온 30대 젊은 부부. 몇 개월 전까지 노부부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었다. 모처럼 찾아온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방 안에서 담소를 나누었던 할머니.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떠나는 부부를 배웅하고 나서야 그들이 반가운 손님이 아닌 절도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 “자람 언니와 비교된다고요? 저만의 송화를 봐주세요”

    “자람 언니와 비교된다고요? 저만의 송화를 봐주세요”

    사실 좀 억울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공연을 봤다는 사람들이야 ‘차지연’ 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지만, 일반인에게까지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 여기다 출연 작품마다 유명인과 더블캐스팅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열연에 비해 주목도는 다소 낮다. 올해만 해도 그렇다. 상반기 화제작이었던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주연 메르세데스 역이나 지금 공연 중인 뮤지컬 ‘서편제’의 송화 역에서 출중한 능력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대중적인 관심도에서는 함께 캐스팅된 가수 옥주현(30)과 ‘예솔이’로 유명한 젊은 국악인 이자람(31)에게 밀리는 모양새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서편제의 백미, 막판 10분여에 걸쳐 심청가 판소리 대목을 소화할 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내듯 소리를 내고, 그 여파 때문에 커튼콜 때까지 넋 놓은 듯한 품새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혹시 송화처럼 ‘한’이 켜켜이 쌓인 것은 아닐까. ●뮤지컬계에서는 알아주는 디바 지난 18일 서편제 무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배우 차지연(28)은 그런 추측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실 국악이라면 차지연도 뿌리가 깊다. 외조부가 판소리 고법(鼓法) 인간문화재 송원 박오용 선생이다. 어릴 적 외조부 공연 때 북을 직접 치기도 했다. 여자가 타악기를 다루면 무대가 가벼워진다는, 그 시절 남녀차별적인 분위기 때문에 접었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덕분에 북 치는 장면에서 장단과 추임새가 무척 좋다. 손목 스냅이 비범하다고 했더니 “송화는 소리를 하는 캐릭터라 북을 너무 잘 치면 안 돼요. 잘 못 치는 척해야 하는데 공연 분위기에 취하다 보니까….”라고는 웃는다. 문제는 소리다. 판소리 대목이 의외로 많아서다. “뮤지컬 곡이 많고 소리는 적으니 걱정 말라.”는 이지나 연출의 ‘꼬드김’에 넘어가 시작했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소리는 자꾸만 늘어 갔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젊은 소리꾼 이자람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주변에서는 왜 그런 비교당할 역할을 하느냐고들 해요. 이전 작품에서도 그렇고. 그런데 송화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음악에 대한 진정성 아니겠어요. 제가 정성껏 만든 송화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해요.” 동료들이야 ‘한 달 반 배운 초보치곤 잘한다.’고 띄워 주지만 준비하면서 스트레스 꽤나 받았던 모양이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에휴…. 그러니까 저한테 힘 좀 많이 불어넣어 주세요.” 아주 좋았다고 했더니 “사실 이 작품을 통해서 뭘 더 성취한다거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거나, 소리를 알게 된다거나 그런 목표는 없어요. 저는 그냥 조금 더 현대적인 소리를 할 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편안하게 하고 있어요.” 잠시 생각에 젖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이렇게 노메이크업으로 (화장 안 하고) 언제 무대에 서보겠어요. 있는 그대로 다 비워내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나 스스로가 깨끗해지는 듯하고 다시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막판 소리 장면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 것 같은데도 극 중 송화의 감정에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환경, 가수가 되고 싶어 서울로 왔으나 몇 번이나 좌절당했던 경험 같은 개인적 감정까지 싹 토해낼 수 있어 오히려 홀가분하고 좋단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 버리고 가는 셈. 화장품 광고도 아닌데 숫제 ‘맑게 깨끗하게 자신 있게’ 분위기다. ●“노래가 너무 하고 싶을 때 받아준 곳이 뮤지컬” 대사 전달력이나 표현력은 이자람보다 훨씬 더 낫다고 했다. 이간질 작전이다. 금세 눈이 동그래진다. “자람 언니에게 얼마나 배우는 게 많은데요.” 방향을 틀어 차지연을 ‘인신공격’했다. ‘눈 크고 코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 외모에 172㎝의 키 때문에 동양적인 느낌이 다른 배우에 비해 떨어지는 것 아니냐. 극 중 송화의 귀여운 모습이 연기로는 소화가 되지만 신체조건 때문에 어색해 보인다.’ 집요한 공격에도 돌아오는 답은 무참하게 짧다. “그러게요.” 하긴 무대에서 울부짖을 때나 인터뷰 내내 ‘꺽꺽’ 하고 웃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제가 원래 그런 거엔 신경을 안 써요. 여배우니까 가련하게 이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나 그냥 속에서 나오는 대로 다 표현하는 편이에요.” 차지연은 또 하나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 초쯤 앨범을 낼 생각이다. 춤이나 다른 장식을 걷어치우고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정통 솔(soul) 음악을 선보일 계획이다. 가수로 성공하면 뮤지컬은 부업이 되는 거냐 했더니 정반대의 답이 돌아온다.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방황했던 시절, 그때 저를 받아준 곳이 뮤지컬이에요. 그걸 잊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가수로 성공하면 뮤지컬 흥행하는 데도 조금 도움 되지 않겠어요?”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박상민, 데뷔 22년 만에 50만평 정원 집 최초공개

    박상민, 데뷔 22년 만에 50만평 정원 집 최초공개

    배우 백상민이 데뷔 22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공개했다. 박상민은 3일 Y STAR ‘스타뉴스’ 방송에서 “내 정원이 50만평인데 국가에서 관리까지 해주고 너무 좋다”며 유쾌하게 제작진을 맞이했다. 숲이 우거진 전망을 가리키며 박상민은 “사계절 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잘 안 본다”며 “비오는 날만 본다. 날 좋으면 돌아다니기 바쁘다”고 말했다. “집 공개는 처음이다. 근래 들어서 집을 공개하고 인터뷰 할 기분도 아니었다”고 이혼의 아픔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박상민은 트로피들과 서재 드레스룸을 공개했고, 특히 젊은 시절 반항적인 매력으로 여심을 흔들었던 영화 ‘장군의 아들’ 오디션 수험표까지 간직하고 있어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 박상민은 ‘터프가이’라는 별명과 관련해서는 “나라고 다 좋겠냐. ‘박상민은 터프한 척한다’등 평가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 대해 평가에 좌지우지 됐다면 20년간 배우 생활 못했을 것이다”고 베테랑 연기자 다운 면모를 보였다. 박상민은 1990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로 데뷔했다. 당시 영화는 한국 영화사상 첫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더불어 최근 SBS 드라마 ‘자이언트’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사진 = Y STAR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NTN 주요 뉴스 ▶ 2PM 콘서트 선정성 논란..."에로틱 안무가 8세 관람?" ▶ 박수진, 김희철 때문에 눈물 펑펑 쏟은 사연 ▶ 이승기-신민아, 이메일 주고 받는 사이? ‘애정입증’ ▶ 시아준수, 믹키유천 출연 ‘성균관스캔들’ 방문 ...절친 우애 과시 ▶ 설경구-송윤아 부부, 오늘 득남...’엄마, 아이 모두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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