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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여행 | Trekking Jeju- 올레와 올레 사이 제주와 포옹하는 법

    국내여행 | Trekking Jeju- 올레와 올레 사이 제주와 포옹하는 법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말은 틀렸다. 걷는 사람이 풍경이다. 적어도 제주도에서는. 정성 가득한 탑돌이처럼 6년 동안 이어진 제주의 올레 걷기가 올해 드디어 하나의 원으로 완성됐다. 제주올레걷기축제는 놀멍, 쉬멍, 먹으멍, 제주를 꼭 끌어안는 방법이었다.제주 억새길 사이를 걷는 올레꾼들. 올레걷기축제 동안 올레 20코스는 자연이 사람을 이끌고, 사람이 풍경을 채워주었다놀당가잰, 이 길에서! ‘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제주시가 주최하고 (사)제주올레가 주관한 2015년 제주올레걷기축제가 지난 10월30일(금)~31일(토), 양일간 ‘놀당가잰, 이 길에서!’를 주제로 제주 북동부의 올레 20코스와 21코스에서 열렸다. 하루 한 코스씩 올레길을 완주하며 제주의 자연, 문화, 먹거리를 즐겨 왔던 제주올레걷기축제는 6년 만에 제주를 한 바퀴 도는 대장정을 완성했다.제주올레 20코스 | 김녕서포구-김녕성세기해변-월정해변-행원리-한동해안도로-평대옛길-세화오일장-제주 해녀 박물관(총 15.8km, 5~6시간 소요)제주올레 21코스 | 제주해녀박물관-면수동마을회관-별방진-석다원-도끼섬-하도해수욕장-지미봉-종달항-종달바당(총 10.1km, 3~4시간 소요)제주 화산석으로 쌓은 올레길의 소원 탑●잘 놀았다! 제주올레 역시 ‘제주표’ 바람이었다. 이른 아침 김녕성세기해변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로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 해변에 도착한 축제 참가자들에게 날씨쯤은 장애가 아니다. 개막식이 가까워지자 일본, 중국, 미국 등 외국인 참가자들까지 가세한 해변은 더욱 분주해졌다. 어느새 국제적인 행사로 커 버린 제주올레걷기축제의 자랑스런 면모였다.평대초등학교 5~6학년으로 구성된 록밴드의 쩌렁쩌렁한 모닝 록공연으로 막을 올린 개막식이 테이프커팅과 스윙재즈밴드의 축하공연으로 이어지는 동안 일부는 벌써 출발을 서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들은 바가 있었다. 올레걷기축제의 노하우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라고! 길목마다 준비되어 있는 공연과 놀이들을 충분히 즐겨도 하루가 넉넉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꼴찌가 될 용기는 없어서 슬그머니 중간 대열에 섰다. 간세 표지판을 볼 필요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이끌어 주었다. 길이 험하거나 좁아지면 정체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그 또한 선물이다. 느리게 걸어야만 보이는 풍경들. 새 길을 헤치고 나아가면 어김없이 푸른 바다가 얼굴을 내밀고 도열한 풍력발전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나아가는 시간들. 물오른 제주의 가을 풍경은 완벽했다.공연도 볼거리도 많으니 한없이 주저앉고 즐기고 싶은 곳도 한둘이 아니었다. ‘저한테 반할 준비 되셨나요?’라고 물어보던 평대초등학교의 소년 록커, 전망 좋고 분위기 좋고, 커피 맛도 끝내줬던 월정해변의 카페, 주부밴드 ‘모아맘 밴드’와 알프스 요들송으로 유명한 김홍철씨의 공연이 펼쳐졌던 구좌농공단지 운동장의 푸른 잔디밭, 제주막걸리와 순대가 푸짐하던 세화오일장,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오던 지미봉의 전망대, 제주에서 만나니 더 반가웠던 김창기 밴드의 공연 등등 수를 헤아리기 시작하니 소중한 순간들이 끝없이 떠오른다. 어느새 걸음마다 알알이 박힌 제주의 장면들이 추억이 되어 버렸나 보다. 축제를 통해 올레 전 코스를 완주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던데, 제주 한 바퀴를 완성한 올해의 20, 21코스가 어쩌면 내게는 제주 올레 한 바퀴의 첫 코스가 될지도 모르겠다.참가자들의 촬영 요청마다 활짝 웃으며 응해 주었던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축제의 최고 인기스타 였다별방진 위에 선 올레꾼들●비로소 보이는 사람, 사랑 첫날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 제주의 풍경이었다면 둘째 날에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레길 위의 최고 스타는 단연, 서명숙 이사였다.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요청에 지치지도 않고 일일이 응답하는 그녀의 꿋꿋하고 열정 어린 행보가 올레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올레가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이 되기까지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노력은 이미 여러 권의 책과 인터뷰를 통해 알려져 있지만 이번 축제 기간에 맞춰 출판한 그녀의 신간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은 제주 해녀에 대한 이야기다. 제주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들. 그래서 이제 길을 만드는 일은 (사)제주올레에게도 작은 부분일 뿐이다.주민행복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기획하고 주관하는 올레길 할망숙소, 에코 브랜드, 마을콘텐츠개발 등 가야 할 길은 끝이 없다. 그 와중에 떨어진 발등의 불은 (사)제주올레의 새로운 보금자리다. 치솟는 제주의 땅값이 무서워 35년 된 낡은 병원건물을 덜컥 구입하긴 했으나 ‘담돌(담을 쌓는 돌)’ 쌓기가 빠듯하단다. 담돌 간세(후원회원)를 간절히 기다린다니 벽돌 한 장의 후원도 생각해 볼 일이다.●놀멍, 쉬멍, 먹으멍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이모저모 벌써 6년째다. ‘화이팅!’을 외쳐 주는 봉사자들, 자발적인 코스튬플레이로 재미를 창출하는 참가자들, 마음까지 쉬어 가게 만든다는 연주자들의 공연이 있으니 ‘올레걷기축제’의 마니아들이 해마다 늘어남은 당연한 일이다. 혼자 걷는 재미와는 또 다른, 함께 걷는 재미. 풍성하고 감사하다.1. 걷는 자는 즐기는 자다‘제주 분이신가 봐요!’ 제주 해녀 복장을 한 참가자에게 물으니 의외로 ‘아뇨. 서울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패셔니스타 콘테스트’의 자발적 참여자들이다. ‘놀당가잰’이라는 피켓까지 준비한 꽃분홍 한복치마 군단과 뒤통수에 탈을 뒤집어쓴 남정네들, 망사리를 짊어지고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년이었다면 피가 뚝뚝 묻어 있는 핼러윈 복장은 역시 과감한 젊은이들의 몫이다. 제주에서 같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던 것을 인연으로 온라인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특이한 복장으로 올레걷기축제에 참가한다고. 검은 망토와 피 묻은 앞치마를 두른 그들이 호박등 바구니에서 꺼내 주는 사탕과 초콜릿은 더욱 달콤하게만 느껴졌다.2. 힘들면 안아 드려요 ‘벌레기간세’ 아무리 좋아도 걷다 보면 ‘힘들다’라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게 마련이다. 그럴 쯤이면 신기하게 나타나는 노란 후드티의 청년들이 있으니 자원봉사자들인 벌레기간세다. ‘벌레기’는 청미래덩굴을 뜻하는 제주사투리. 유별나게 똑똑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을 편하게 부르는 말이란다. 그래서 벌레기간세는 유별나게 제주올레를 사랑하는 청년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제안하는 소소한 게임과 ‘파이팅’ 한 번이면 다시 힘이 불끈 솟으니 신기할 뿐이다. 가위바위보, 딱지치기 등 소소한 게임에 매번 승자가 되진 못했지만 하이파이브도 좋고, 프리 허그도 따뜻하고, 무엇보다 젊은 기운을 수혈 받았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목마다 교통을 통제해주던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3. 규슈올레도 걸어 보세요 축제 전날 한국과 일본의 올레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주뿐 아니라 일본 규슈에도 올레길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제주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매년 코스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 규슈관광추진기구 소속의 각지 공무원들이 축제때마다 바다 건너 제주를 찾아오고 있었다. 특히 새로 개장을 앞두고 있는 미나미시마바라 코스 관계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홍보 부스 설치와 명함 돌리기는 기본이고 규슈올레 깃발을 꽂은 채 이틀 동안 축제 코스를 완주하기도 했다. 테사와라 겐이치 주제주일본국총영사, 박진웅 주후쿠오카총영사도 함께 올레길을 완주했다.4, 제주를 먹으니 힘이 납니다 식사 쿠폰을 미리 사 두라는 것도 중요한 팁이다. 첫째 날 행원리 부녀회가 준비한 소라죽과 표고야채죽도, 다음날 하도 부녀회와 해녀회에서 만든 ‘돈비빔밥’과 ‘버섯비빔밥’도 품귀현상을 겪었으니 말이다.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해산물과 건강한 제주의 식재료들을 이용한 파전, 오징어초무침, 소라꼬치 등의 메뉴들을 맛보는 일은 올레축제 참가자만의 특권이다. 한동리 노인회가 준비한 정통 오메기떡 만들기는 ‘일타쌍떡’의 재미가 쏠쏠했다는 후문.5. 춤추고 노래하고, 놀당가잰!공연마다 ‘앵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쿠스틱 음악을 들려주는 ‘나형이네 밴드’, ‘구좌어린이합창단’, 핑거기타리스트 ‘산하’, 제주에 정착해 여행을 노래하는 ‘제주거지훈과노노들’, 남성 중창단 앙상블 ‘브와믹스Voix Mix’, 요가 시연을 보여 주었던 ‘요가느림원’, 하도리 해녀 합창단 ‘해녀시대’, 창작 댄스팀 ‘올레칠선녀’, 피날레를 장식했던 ‘김창기 밴드’ 등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공연이 축제 기간 내내 펼쳐졌다. 둘러앉기만 하면 최고의 바다풍경을 배경으로 무대가 만들어지고, 감동은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6. 헬로! 피시 헤드빨간 생선 모양의 탈을 쓰고 축제에 참가한 민예은 작가도 시선강탈의 최강자였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 중인 그녀는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 스스로가 마치 시야 좁은 물고기처럼 느껴졌던 경험을 토대로 이번 퍼포먼스를 계획했다고 한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제주 올레뿐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펼쳐질 계획이라고 하니 어느 길에선가 빨간 물고기를 만나게 되면 안부를 전해 주시길.올레꾼의 쉼터, 간세라운지 제주시에 새로 오픈한 간세라운지는 휴식과 배움이 함께 이뤄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제주의 로컬 재료만을 이용한 트레킹 푸드와 음료를 자체 개발해 판매 중이며 올레관련 기념품과 제주 마을 상품들도 전시, 판매하고 있다. 라운지의 기능도 충실하다. 짐을 보관할 수 있는 코인 락커가 있으며 올레 지도를 포함한 자료들, 제주 여행 안내서들도 충분히 구비하고 있다. 쉬는 동안 도전해 볼 수 있는 간세인형만들기 체험은 나만의 기념품으로 최고다.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 8길 7-9 9:00~22:30 070 8682 8651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사)제주올레 www.jejuolle.org
  • “매주 손과 발 되어주는데… 딸보다 낫지”

    “매주 손과 발 되어주는데… 딸보다 낫지”

    해마다 12월이 되면 소외되고 그늘진 이웃들의 신산한 삶에는 화려하고 들뜬 세밑 풍경이 그려내는 그림자가 한층 더 길고 진하게 드리워진다. 동시에 그들을 돌보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들의 손길은 더 바빠진다. 서울신문 기자들이 서울 성북구 ‘정릉골’과 종로구 숭인동 쪽방촌을 담당하는 경찰관과 독거노인 돌보미(재가관리사)를 20일 동행 취재했다. “애기야, 어쩐 일로 여길 다 왔누.” 지난 20일 독거노인 돌보미(재가관리사) 일일체험을 위해 찾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일대 ‘쪽방촌’ 노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낯선 젊은 얼굴을 ‘애기’라고 불렀다. 16년차 베테랑 돌보미 이진희(54·여)씨도 그들에게는 살가운 ‘막내’였다. 돌보미는 집안일과 잔심부름, 병원 동행 등을 하는 독거노인의 손과 발이다. 그러나 노인들이 그들을 부르는 이름에는 ‘복지 서비스’라는 딱딱한 단어로는 다 담지 못할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노막례(75) 할머니의 집부터 찾았다. 종로구에만 7명의 돌보미가 각각 하루 평균 서너 곳을 방문한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청소부터 시작했다. 걸레를 다섯 번 이상 빨아 가며 집안 구석구석을 닦았지만 할머니의 성에는 차지 않는 듯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집살이하는 기분으로 집안일을 얼추 끝내자 할머니는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었다. 이제 ‘수다 보따리’를 풀 시간인 것이다. 정신없이 신고식을 치르고 나니 점심시간이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겨우 밥 한 술 뜨려는데 이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일 방문하기로 돼 있는 김모 할아버지의 김치 심부름이었다. 일정에 없어도 이렇게 연락이 오면 별 수 없다. “원칙대로만 하려고 하면 이 일 못 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는 이씨를 따라 일어섰다. 치아가 안 좋은 할아버지를 위해 반찬가게에서 사온 김치 한 포기를 잘게 썰어 냉장고에 넣어 두고 예정대로 김복례(84) 할머니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보미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일거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씨는 김 할머니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요강부터 집어 들고 깨끗이 닦았다. 경력 서너 시간 남짓인 ‘초짜’ 돌보미도 쭈뼛대며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한참을 쓸고 닦은 뒤에는 몸단장에 나선 할머니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도 돌보미의 몫이다. 얼마 전 넘어져 뒤통수를 다쳤다는 할머니의 말에 빗질을 하며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도 조심스레 살폈다. 김 할머니는 10여년째 살림을 돌봐주는 돌보미가 가족 같다고 했다. “친자식도 제 부모를 매주 안 찾는 마당에 딸보다 낫지.” 김 할머니의 윗집에 사는 조단림(87) 할머니도 4년째 돌보미의 도움을 받는다. 이날은 조 할머니가 목욕을 하는 날이었다. 최근 할머니가 왼쪽 두 번째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고생했던 터라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발부터 담그고 목욕을 시작했다. 샴푸 향기를 가득 풍기는 할머니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헌 옷은 비벼 빨았다. 쪽방촌의 모든 빨래는 손으로 이뤄진다. 세탁기는커녕 온수라도 잘 나오면 다행이다. 인기척이 들려 나가 보니 문 앞에 할머니의 ‘일용할 양식’인 우유가 놓여 있었다. 구의 지원으로 독거노인들에게 하루 하나씩 배달되는 180㎖ 들이 팩이다. 대접할 것 없는 텅 빈 냉장고를 아쉬워하던 할머니가 아이처럼 기뻐하며 우유를 한사코 애기의 손에 쥐어 줬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든 우유팩에서 훈기가 느껴졌다. 숭인동 노인들이 이 추운 겨울을 나는 비결인 듯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6] 된장·소주로 소독?…‘모르면 독’되는 민간요법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6] 된장·소주로 소독?…‘모르면 독’되는 민간요법

    “머리가 터졌으면 된장을 발라야지, 뭐 하고 있어? 얼른 된장 한 주먹 퍼 와.” 상처에 된장을 바르는 일, 아주 오래 된 얘기 같지만 사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입니다. 우리가 흔히 ‘빨간 약’이라고 불렀던 머큐로크롬 같은 서양식 소독제가 민간에 보급돼 소주와 된장을 대체한 게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니까요. 사실, 요즘처럼 소독의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는 상처에 바를 약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상처가 좀 크다 싶으면 된장을 바르는 게 고작이었고, 연필을 깎다가 베이는 손가락 상처 정도면 헝겁 조각을 찢어 묶거나 개구장이들은 고운 흙먼지를 뿌려 상처 부위를 말리는 식으로 지혈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소독이 된장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물이나 알코올로 씻거나, 서부 영화를 보면 총상 환자의 환부를 불에 달군 나이프로 갈라 총알을 빼낸 뒤 독한 위스키를 부어 소독하는 장면처럼 임기응변 식이 소독의 전주가 아닙니다. 소독용 알코올이 없으니 독한 술로 대신한 것인데, 아마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도 병원을 찾을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 응급 외상을 입었을 때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위스키 등의 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하니까요. 이 뿐이 아닙니다. 끓이거나 불에 달구기도 했고, 햇볕에 말려서 세균에 의한 오염 가능성을 낮추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며, 상처 부위를 쑥물에 담그거나, 소금물로 씻어낸 것도 모두 우리가 기억하는 소독의 역사입니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소독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 전통문화에도 틀림없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소독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지금처럼 병원 출산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모든 산모들이 집에서 애를 낳았습니다. 이 때, 산모의 출산을 돕는 산파는 탯줄을 자를 때 쓰는 가위를 끓는 물에 소독해 사용했지요. 이 단순한 사실에서 산파가 산모와 태아의 감염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 아기를 낳은 집에는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산모와 태아를 감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인식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그 산파가 어떤 세균이 어떻게 틈입해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는 식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은 못 가졌겠지만, 단순한 초보적 ‘소독관’은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몸에서 피가 나면 상처가 생긴 것이고, 상처는 더럽게 다루면 덧나며, 잘못 다루면 최악의 경우 목숨줄까지 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소독이 필요한 상황은 많습니다. 타박 등 ‘외상 없는 상처’도 흔하고, 얻어맞아 피멍이 들거나 불에 데이고 살을 베이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이런 상처를 유형에 따라 처치하는 현대적 진료체계가 마련되지 않는 예전에는 그런 문제를 상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니 민간에서는 매 맞아 골병 든 사람이든, 일하다가 괭이에 발등이 찍힌 사람이든 독한 화주(火酒)를 먹여서 재웠고, 불에 데이거나 멍이 든 곳에는 녹두를 갈아 붙였지요. 소싯적 일입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들로 나섭니다. 소 먹일 꼴을 베기 위해섭니다. 개구쟁이들이 들로, 산으로 몰려가면 해찰 부릴 일이 많았지만, 꼴 베러 나선 그 또래에 가장 어울리는 일이 낫치기였습니다. 잘 벼린 낫을 핑그르르 하늘로 던져 땅에 맵시있게 꽂히면 이기는 놀이인데, 어줍잖은 놈 하나가 제 머리 위로 낫을 던져 가마꼭지에 맞는 바람에 사단이 벌어졌지요. 상처가 어지간하면 흙먼지라도 끼얹고 꼴을 벴겠지만, 이건 손바닥으로 싸안아도 꿀꿀 피가 흐르니 도리없이 들쳐 없고 마을로 내달렸지요.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얼굴이 피칠갑이 된 떠꺼머리를 업어다 제 집 마룻장에 부려 놓으니 어른들이 더 놀라 천방지축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허둥지둥 달려온 애 아버지가 낫날에 찍힌 상처를 살펴보더니 된장을 한 줌 떠다가 척 붙이고는 질끈 동여 묶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처치가 끝났습니다. “된장 발랐으니 까당까당 아물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다친 놈 한번 쥐어박지도 못 하고 혀만 끌끌 차고 맙니다. 생각해보면, 요즘도 감기 기운이 들면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고 푹 자라”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감기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와 세균은 전혀 다른 개체이지만, 소독(消毒)이라는 말이 ‘독성을 없앤다’는 뜻이고 보면 박테리아든 바이러스든 다스릴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 시절에 병이든, 상처든 원인을 알고 치료한 게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따라 처방과 시약이 달랐으니 여항에서야 아프면 아픈 것이고, 안 아프면 안 아픈 것이지 지금처럼 머리카락에 홈을 파듯이 이런 저런 검사에 원인, 증상, 후유증 등을 가려 따지지를 않았지요. 알고 보면, 소독의 범주는 넓습니다. 상처에 된장을 바르고, 고춧가루 소주를 마시는 일부터 모기, 파리 잡는다며 골목길을 소독차가 쓸고 다니고,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소독약을 적신 매트 위를 딛도록 하는 것까지, 목적과 방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단지 범주가 넓을 뿐 아니라 갈수록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올해 국내에서 발생해 충격울 줬던 메르스를 상기해 보면 소독의 중요성이 실감이 날까요. 메르스 사태 때 익숙해진 격리는 물론 휴교조치 등이 모두 소독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결된 조치이니까요. 이처럼 의료나 건강의 관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소독이라는 개념을 체감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독을 위해 사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손씻기 등 청결이 더 실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독을 청결과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감염을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전문적으로 검증된 약물이나 방법을 사용하는 소독이 단순히 손을 씻는 행위와는 다르니까요. 이렇듯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 우리가 거쳐온 60∼70년대를 돌이켜보면, 누구나 소독을 생각했지만, 누구나 정확하게 소독을 하면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도 별 일 없이 살아냈지만, 그 때문에 모두의 삶이 위태위태했지요. ●‘옥도정기’, ‘다이야찡’ 그리고… 소독제가 빨갛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옥도정기’라는 약도 널리 사용된 외용 소독제입니다. 일본말로 옥도정기지만 의료계에서는 ‘요오드틴크’ 또는 요오드 용액으로 불리는 약입니다. 피부에 바르면 불그레한 노란색을 띠는데,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물론 곰팡이균까지도 제거할 수 있어 요즘도 수술실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수술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수술 직전에 간호사가 수술 부위에 널찍하게 바르는 소독약이 바로 요오드틴크입니다. 과산화수소 용액도 있었습니다. 상처 부위에 바르면 마치 발포되듯 하얀 거품이 이는 말간 소독제지요. 지금처럼 걸핏하면 병원을 찾는 세상과 달리 예전 민간에서는 소독이 외상 치료의 전부였습니다. 요즘처럼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가면 진단을 거쳐 상처 부위를 세척하고, 소독하고, 망가진 조직을 복원하고, 정교하게 꿰매고, 다시 소독하고, 덮는 방식이 아니어서 상처가 나아도 흉터가 남아 두고두고 놀란 기억을 되돌리곤 했지요. 그 때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유난히 흉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소독을 몰랐던 탓에 사소한 상처 때문에 곡경을 치르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 가을, 이웃 마을에서 벼타작을 하는데, 젊은 일꾼 하나가 마당에서 굽은 못을 잘못 밟아 발바닥에 꽂혔답니다. 반반한 흙마당에서 하는 일이니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했겠지요. 맨손으로 쑥 못을 빼내고는 어찌어찌 일을 마쳤는데, 저녁이 되자 상처 부위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욱씬거려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소금물로 씻은 뒤 ‘다이야찡’ 가루를 바르고 밤을 넘겼는데, 그 다이야찡이라는 게 아마 당시 개발된 소독제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물론 어려서 자주 들었던 하얀 가루약이지만, 직접 써보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필요한 일엔 흙먼지를 뿌리면 됐으니까요. 며칠 뒤, 그 장정은 상처가 심해져 대처 병원을 찾아가 파상풍 진단을 받고 다리를 잘라냈는데, 그러고도 며칠 못 가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생각해보면, 못에 찔린 직후 적절한 소독 등 상처 관리를 하지 못했고, 그 후 오염된 못이 살속을 파고 들었는데도 겉에다가 다이야찡 가루만 뿌렸댔던 것도 한심한 대처였지요. 나중에 병원에 가서야 파상풍이란 걸 알았고, 그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끝내 숨졌으니 그 사이에 패혈증으로 발전했음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인데, 안타깝지만 거기까지가 그 시절의 소독에 대한 인식과 의료적 처치의 한계였겠지요. 결국, 소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몰랐던 몽매한 시절 탓에 젊은 장정 하나가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런 일들이 그 시절에는 더러 있었습니다.  ●사소한 찰과상에서 증증 화상까지 상처에 된장을 바르는 게 얼마나 살균소독 효과 있을까, 또 화상 부위에 소주를 바르고, 입으로 상처를 빨아내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할 때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예전과 달리 소독 의식이 많이 개선돼 미필적 안전사고는 주는 듯 하지만, 가정 안팎에서는 오히려 화상 등 안전사고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어린이 안전사고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 증가했으며, 그 중 가정 내 사고가 전체의 67.5%로 가장 높았습니다. 문제는 어린이 안전사고의 경우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만든다는 점인데, 이를 사소하게 여겨 방치하거나 습관적으로 엉뚱한 조치를 취하는 탓입니다. 가정에서 흔하게 겪는 화상을 볼까요. 화상을 입을 경우 소주를 바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독할 목적도 있고, 화상 부위를 차갑게 식혀 화상의 열기를 낮추기 위해서이지요. 그러나 2도 화상 이상인 경우 이미 소주로 소독할 상황이 아닐 뿐 아니라 화상 부위에 엉뚱한 약들을 발라 정작 병원 치료를 어렵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상처 부위에 알코올을 바르면 기화하면서 일정 부분 열을 빼앗아가는 효과는 있지만 소주보다는 팩으로 감싼 얼음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요. 예전에는 화상 부위에 간장이나 참기름을 바르거나 메밀 또는 밀가루를 반죽해 붙이기도 했지요. 이런 민간요법은 소독이나 화상 치료와 전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자칫 감염으로 이어지면 혹 떼려다 혹을 붙이기 십상인 방식입니다. 화상을 입었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병원을 찾는 것입니다. 그 전에 환자나 보호자가 할 일은 화상 물집을 터뜨리지 말 것, 부득이하게 터졌다면 물집 주머니를 제거한 뒤 살균소독을 하고 항생제 연고를 발라주는 것 등입니다. 나머지는 의사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물집이 생기지 않았거나 물집이 생겼더라도 화상 부위가 작아 굳이 병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 화상이라면, 환부를 노출시키고 피부 보습제를 발라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물집이 생긴 경우라면 기본적으로 2도 화상으로 분류하는데, 이 때는 멸균 드레싱이 필요합니다. 화상 부위를 깨끗하게 씻고 항균제를 바른 뒤 거즈를 덮어주면 됩니다. 요즘에는 병원에서 마른 거즈 대신 메디폼 등의 습윤드레싱재를 붙이는 것이 대세라는 점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화상이 아닌 일반 상처도 알고 관리해야 합니다. 출혈이 있다면 무엇보다 지혈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상처를 입으로 빨아 지혈을 시도하는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외부에 노출된 인체 부위 중에서 가장 많은 세균이 서식하는 곳이 입이라는 사실을 알면 내 상처든, 남의 상처든 함부로 입을 갖다 대기는 어렵겠지요. 지혈이 필요하다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연고나 분말형 약제를 바르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오히려 상처의 치유를 돕는 분비물 유지와 오염 제거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넘어지거나 날카로운 곳에 부딪혀 생긴 출혈 열상은 먼저 깨끗한 수건이나 거즈로 상처 부위를 덮고 가볍게 눌러 지혈한 뒤 상처 부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이 때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 다음 살균소독을 해야 하는데, 소독제를 구입할 때는 세포를 덜 손상시킬 뿐 아니라 세포 재생에 효과적인 걸 고르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요즘에는 예전의 빨간약을 개선한 용액 및 분말 제제가 많으며, 스프레이 타입도 나와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골라 사용하시면 됩니다. 단, 약제를 고를 때는 미리 살균력의 범위를 살펴 상처 부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박테리아나 곰팡이균은 물론 바이러스까지 제압할 수 있는 제품을 고르는 것이 유용할 것입니다.  ●소주와 된장, 그 무지의 기억을 넘어  이제는 아무도 소독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필요성도 그렇고, 중요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소독은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고 있고, 이 때문에 소독에 대해서는 ‘모두 다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이상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최근에 서울의 한 병원에서 주사기와 주사 바늘을 재사용하다가 수많은 환자들이 C형 간염에 집단 감염되는 ‘희한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의사의 가족들까지 이런 방식으로 주사를 맞았다니 더 우스운 일입니다. 이 정도면 그 의사는 터진 머리에 된장을 바르는 옛날의 무지몽매한 사람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게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사람들이야 소독의 필요성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 했고, 또 소독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어 불가피하게 검증도 안된 민간요법을 동원했지요. 하지만, 그 의사는 의대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뒤 국가자격시험을 거쳐 의사가 됐고, 큰 돈을 들여 병원을 차린 사람일텐데, 그런 방식으로 환자를 대했다면 적어도 다음의 둘 중 하나에는 해당되는 부류이지 않겠습니까. 의대를 뒷구멍으로 드나든 얼치기 ‘의사(疑詐)’이거나, 돈에 맛들여 환자들 건강이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고급 파렴치한이거나. 소독이 비단 비전문가인 일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전문가의 무지와 무관심이 더 심각한 위협입니다. 일반인들의 무지나 무관심은 한 사람의 피해에 그치지만 전문가의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는 사회적 피해가 되니까요. 우리 사회가 다원화, 다변화의 속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건강이나 위생의 측면에서 소독의 중요성을 새삼 환기합니다. 소독은 다른 말로 바꾸면 ‘예방’이고, ‘방어’이며, ‘진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우환을 막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차제에 소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냥 닥치는 대로 대충 하는 소독이 아니라, 사소하고 작은 상처라도 정확하게 알고 대처하면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다’고요. 중요하고도 확실한 것은, 이제 화상에 소주 붓고, 상처에 된장 바르는 수준의 소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대처는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이것도 대처라고, 한번 해놓고 나면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병원을 찾거나 약을 쓸 생각을 안 하게 되거든요. 거울 앞에서 필자의 앞머리를 들추면 보이는 상처가 하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의 지붕 모서리에 받혀 찢어진 곳인데, 여기에도 누군가가 된장을 발랐습니다. 다행히 상처는 아물었지만, 팥알만 한 흉터가 무지의 흔적처럼 남아있습니다. 제 두 딸의 무릎과 복사뼈 근처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모두 필자가 소홀해 전문가에게 치료를 맡기지 않은 결과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jeshim@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4] 까치밥, 똘레랑스 그리고 정신건강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24] 까치밥, 똘레랑스 그리고 정신건강

    한 때 우리 사회에서 ‘똘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이 회자됐었지요. 프랑스 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이 아닌 타자, 자기 것이 아닌 다른 문화과 관습을 능동적으로 포용한다는 것인데, 저는 오래 전 홍세화씨의 책에서 이 말을 실감나게 접했습니다. 이 말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이타적인 삶, 타자를 위한 배려가 부럽기도 했고, 그렇게 너그러운 그들의 삶에 자꾸 낯설게만 투영되는 ‘나’와 ‘내 주변’의 옹색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의 이런 생각이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유럽의 강대국들이 전세계에 이식시킨 패권적 이념에 길들여진 식민적 속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국을 ‘신사의 나라’로 여기지도 않고, 프랑스 문화가 재밌을지언정 우월하다고 믿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국부(國富)나 인종적 특성이 부러운 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그들의 열린 자세가 부럽고, 그로부터 발원한 그들의 치열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발랄하면서도 격조가 있는 삶의 자세를 부러워합니다. 아마 그런 그들의 삶이 상당 부분 똘레랑스와 결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가지지 못한 자의 아름다운 나눔 언제부턴가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매몰되어 살아 왔습니다. 그 정도가 지나쳐 톨레랑스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문명 밖의 문명’처럼 낯설거나 이질적으로 비치기도 할 것입니다. ‘나만 좋으면 된다’거나 ‘항상 내가 우선’이라는 이 몰염치한 습속은 일제 암흑기와 한국전쟁 등 독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어려운 핍진한 환경을 헤쳐나오면서 체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바둑의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먼저 내 말을 살린 뒤 상대방의 말을 공격하라)’라는 격언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명도생부터 해야 했으니, 그 참담한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에서 보듯, 항상 궁핍하고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챙겨야 했고, 그렇게 아등바등 뺏고, 감추며 살았지만 쌀독은 항상 비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들 했으니, 그런 터수에 언감생심 무언가를 베풀면서 사는 여유를 갖는다는 게 호사이고 꿈일 뿐이었지요. 그렇다고 우리네 삶이 똘레랑스와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우리 조상들은 유럽의 똘레랑스보다 훨씬 본원적인 베풂을 알았고, 그런 가치를 존중했습니다. 가진 자의 시혜보다 가지지 못한 자의 배려가 더 아름다운 것은 먹고 쓰고 남은 것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허기와 필요를 덜어야 하는 일이고, 최소한의 자기 몫을 쪼개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고,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는 개국 이래 단 한번도 국통이 끊이지 않았던 장구한 역사가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시골집 뒤란의 늙은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밥’은 또 어떻습니까.  ●‘오로지 주고자 했던’ 까치밥의 철학 ‘초록이 지쳐 단풍 들더니’ 가을이 깊어져 갑니다. 이슬이 서리로 변하면서 이내 살풍경한 겨울이 되어 온 산야를 흰눈이 뒤덮을 무렵이면 텅 비어 삭막한 풍경 가운데에다 마치 누군가 작심하고 붉은 물감으로 방점이라도 찍어놓은 듯 선연한 붉음이 눈길을 끌곤 했지요. 바로 까치밥입니다. 가을걷이의 마지막은 감을 따 갈무리하는 것인데, 개량되기 전의 예전 감은 겉이 붉어보여도 속살을 베어물면 여간 떫지 않았습니다. 그걸 따모아 항아리나 석작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달디 단 홍시가 되면 하나씩 꺼내 먹곤 했던, 요긴한 겨울 군입거리였지요. 요즘의 개량종 단감과 달리 예전의 토종 감나무는 집안의 조왕신 같은 것이어서 크게 키워 비바람을 막고, 시원한 그늘도 드리우며, 먼 동구밖에서 봐도 한 눈에 우리 집임을 아는 장소성까지 부여했으니 감나무가 바로 산이고, 정자이며, 스카이라인이고, 랜드마크였지요. 스무 척, 서른 척 키를 키운 탓에 감을 딸 때면 큰 가지를 타고 올라가 간짓대로 투덕거리곤 했는데, 해거리를 하지 않을 때는 워낙 많이 열려 그걸 따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따다 보면 어느 새 가지가 텅 비고, 꼭대기 가지 끝에 잔챙이 감이 서른 개, 마흔 개씩 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그건 까치밥하자. 그만 내려와라”시며 일을 매조졌지요. 아닌 게 아니라 날이 추워 먹거리가 마땅찮으면 까치가 가지 끝에 내려앉아 남은 감을 쪼곤 했는데, 그래서 까치밥이라고 불렀겠지요. 찬서리에 익어서 더 붉어진 까치밥이 얼음 들어 푸르딩딩한 하늘을 배경으로 매달린 모습을 보노라면 문득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그런 느꺼운 마음이 미물에게라도 뭔가를 베풀 수 있다는 은전의 여유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까치를 위해 가지 끝에 감을 남겨두는 일은 어떤 강제나 규율도 없이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는 있이었는데, 지금보다 훨씬 궁핍하게 살았던 예전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표도 나지 않게 그런 덕성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의 체온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 하루 끼니 걱정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빈 콩밭에 ‘참새 몫’으로 수수목을 남겨두거나, 대보름날 정성껏 무친 나무새를 이것 저것 바가지에 덜어 소에게 먹일 턱이 없지요. 까치든, 소든 사람에 견주면 하찮은 미물이고 축생인데도 말이지요. 우리의 핏속에는 미물일지라도 곁에 머무는 것이면 무엇이든 챙기고 걱정해주는 미덕이 있었습니다. 제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겼는지도 모를 궁핍 속에서 살면서 그런 짓이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한다면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더 찬찬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들이 넉넉하지 못한 것도 맞고, 그래서 짜디 짠 자반 한입 못 먹어보고 해를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걸 그다지 아쉽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살림이 요족해 육고기를 줄창 먹고 살았다면 간사한 입맛이 남아 ‘땡기기라도’ 했겠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원래의 삶이 안빈(安貧)에 길들여진 탓에 배만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지요. ‘사흘 고기맛을 못 보면 소증 난다’는 말은 덜 떨어진 권문세가의 논다니들 말이지, 하냥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살았던 사람들의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까치 같은 미물까지 챙기며 살았으니 그걸 먼 유럽의 똘레랑스와 견준다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유럽의 똘레랑스가 관습과 제도의 결과라면, 우리의 나눔은 태생적인 끌림의 결과이니까요. 예전에 흔했던 보시(布施)는 어떻습니까. 불교의 수행법으로, 베푸는 모든 행위를 이르는 보시는 불가에서 이타정신(利他精神)의 정점으로 이해합니다. 더러는 보시를 복을 받기 위해 하는 ‘이기적인 이타’라고도 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설령 보시를 하면서 되받을 일을 생각했더라도, 그 복이라는 게 실체도 없고, 아무도 담보할 수 없는 불확실한 대가여서 거기에 기대 자기 것을 나눌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보다는 자기 것을 나누면서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복’을 생각했다는 게 현실적이지요. 마찬가지로 까치밥 역시 ‘오로지 주고자 했던’ 아가페적인 나눔의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서구의 똘레랑스 정신을 ‘우리는 갖지 못한 포용이자 관용’이라고 부러워만 할 일은 아니지요.  ●정신 건강 혹은 영혼의 안식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 이후에 사회적 통합을 위해 주창한 근대화의 기제 속에서 체화된 개념인데, 우리의 그것은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작용하지 않은 자연발생적 정서였고, 또 모르긴 해도 자연의 모든 것에 정령이 깃든다는 원시 토테미즘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니 비록 우리의 정서가 반듯하게 각이 잡혀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단들 제도적 산물인 똘레랑스와 같은 선에서 견준다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까치밥을 보면서 궁핍하지만 영혼이 건강하게 사는 지혜를 배웁니다. 지혜라고 했지만, 대단한 사유나 거창한 논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물이 흐르듯, 아니면 밥 먹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마음의 부름에 따르면 되는 일이고, 거기에 대단한 결심이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지요. 필자가 어렸을 때의 경험입니다. 유월 더운 날, 온가족이 나서 산비탈 보리밭에서 보리를 베고 있었지요. 거진 다 베어갈 무렵, 갑자기 까투리 한 마리가 요란하게 꿩꿩 거리며 나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골에 흔한 게 꿩이라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는데, 그 때 할머니가 허리를 펴시더니 “오늘은 여기서 손 털자”고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직 베지 못한 보리가 예닐곱 평이나 남았는데 마치자는 말에 다들 의아해 하자 할머니는 “저 쪽에 새끼를 쳐놨길래 꿩이 저 난리지”라며 “한 이레면 새끼 데불고 나갈테니 그 때 와서 마저 베면 된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시더군요. 집안 어른 말씀에 가타부타할 수도 없어 그렇게 일을 마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보리밭에 다녀 오신 아버지가 “꿩이 산으로 갔는지 둥지가 비었더라. 내일 가서 남은 보리 정리하면 되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할머니는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르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찮은 꿩이라도 새끼를 거느릴 때는 해코지해서는 안 된다는 공생의 철학이 하나이고, 보리밭 어름에서 꿩이 우짖는 걸 보고 사연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둘입니다. 보리야 며칠 뒤에 베어도 축날 일이 없으니 흔쾌히 그리 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나 아닌 남을 생각하는 일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할머니와 어머니는 김장김치나 간장·된장 등을 넉넉하게 준비해 이웃들과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게 나눈 뒤에는 항상 “전답이 넉넉치 않아 가을이라고 거둔 것도 없을텐데, 겅개라도 좀 나누니 맘 편하다”며 기꺼워들 하셨지요. 그래선지 할머니는 그 시절의 여건을 생각하면 무병장수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집안 일을 하시는 등 강건하셨습니다. 그게 어디 제 할머니만의 일이겠습니까. 살림이나 품성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확실히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나누고, 살피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은 확실히 건강했습니다. 필자가 낳고 자란 마을이 100여호 쯤 됐는데, 치매를 겪은 노인은 딱 두 사람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더러는 ‘노망’이니 ‘망령’이니 수근대기도 했지만, 삼이웃이 너나 없이 돈독했고, 우애가 깊었지요. 그러니 온 마을이 떵떵거릴 만큼 크게 잘 사는 집은 없었어도 굶주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가다 마주치면 살갑게들 인사를 나눴고, 철부지들이라도 위, 아래를 알았습니다. 쌀독이 비면 아무 집에나 찾아가 손을 벌렸고, 장날이 되어 뭐든 돈을 바꾸면 식량을 곧 되갚았습니다. 농투산이들 사이에 흔한 물꼬싸움을 해도 악다구니가 없었습니다. 늙수그레한 노친네들이 다툴 일 없도록 거중조정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러는 앓거나 다치기도 했지만,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한 누구를 빼고는 흉변이랄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 시절엔 다들 가난을 팔자라고 여겼으니 유리걸식하는 처지만 아니라면 그걸 딱히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차고 넘치지는 않았지만, 욕심이 없으니 많든 적든 자기 처지가 요족하다고 여기며 살았고, 그런 중에 서로 보듬고 나누었으니 심화를 끓이거나 안달복달할 일도 없었지요. ●“당신은 건강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지금이야 ‘칠십 청춘’이라고들 하지만, 예전에는 태어나 육십갑자를 다 채우고 맞는 환갑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갑잔치는 놀이판이기도 했지만 혈족들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평생 농삿일로 허리가 굽은 채 환갑을 맞은 마을 어르신이 말합니다. “내가 육십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한눈 안 팔고 살아 전답도 장만했고, 자식 대학도 보냈는데, 그러느라 허리는 휘고 낯바닥은 감탕이 되었지만 못 살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헤프지도 않았지만, 필요할 땐 인심도 쓰면서 산 덕분에 죽어서 연옥은 면할 듯도 하고…”. 그 어르신은 술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어갑니다. “나야 배우지 못해 세상의 이치를 알 턱이 없지만, 사는 게 별것 아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란 없으니 형제끼리는 우애로, 이웃끼리는 정으로 살믄 될 일이다. 죽고 사는 것이야 인력으로 어쩔 수 없으니 그건 걱정할 것 없고, ‘나 하나 잘하믄 세상이 다 좋은 것이다’고 믿고 살았는데, 진짜로 내가 그렇게 살았는지는 나보다 식솔들과 이웃 지기들이 더 잘 알 일이다.” 건강하게 사는 많은 조건들 중에서 당신은 무엇을 첫 손에 꼽겠습니까.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 주관적인 판단이 있을 뿐이지요. 무섭다는 암도 피하고 싶고, 암 아니라도 안 아프고 살기를 바라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자기 몸 자기가 건사하기를 바랄 것이고, 또 어떤 부류는 돈 좀 많이 모아 쭈글거리지 않은 노후를 보내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옳고, 부러운 바람이지만 저는 여기에 한 가지만 보태고 싶습니다. 스스로 가진 능력 이상을 거머쥐려는 욕심은 좀 덜고, 가진 것 조금이라도 떼어서 베풀며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그것입니다. 물론 의무감으로 할 일은 아니고, 떼돈 들여 큰 일을 벌이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어버이가 그러셨듯이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 몇 알 남겨두거나 꿩의 처지를 살펴 보리 베는 일 며칠 늦춰주는 그런 일을 하며 살자는 뜻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자기 배만 채우려 하지 않고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며, 자기 주장만 하지 않고 이기의 벽을 허무는 일이며, 좀 번거롭더라도 남의 처지나 형편에도 한번쯤 따뜻한 눈길을 주는 배려입니다. 빨갛게 언 발가락을 털어가며 겨울을 나야 하는 까치 등속의 미물에 대해 갖는 측은지심이 어디 불가(佛家)만의 가르침이겠습니까. 그 사소하다 못해 하찮기까지 한 까치밥에서 서구의 똘레랑스에는 없는 ‘우리다운 나눔과 배려’의 원천을 봅니다. 그럴 수 있다면 조금씩 베풀면서 남들의 따뜻한 시선 속에 머무는 것, 그리고 편안한 자기 위안을 얻는 것, 그런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신세계가 강퍅하지 않고 풍요로워서 갈수록 환자가 늘어난다는 우울증이나 착란, 도착 그리고 치매까지도 사회적 유병률이 훨씬 낮아질 것이고, 그런 변화가 우리들 개개인의 건강으로 확인되지 않겠습니까. 병이야 의사가 고치는 것이지만, 병문(病門)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니까요. 베풀며 산다고, 여유롭게 산다고 모든 병마를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신의 세계만큼은 훨씬 정갈하고 넉넉해질 것이며, 그렇게 살다보면 흔히 말하는 세상의 번뇌와도 조금은 멀어지게 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병마도 피할 수 있어 우리의 삶이 더 따뜻하고 안온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마음의 병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양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jeshim@seoul.co.kr
  • [똑소리 나는 김장법] (중)김치의 필수재료 젓갈

    [똑소리 나는 김장법] (중)김치의 필수재료 젓갈

    젓갈은 오래된 음식이다. 첫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문왕조에 나온다. 신라 신문왕이 왕비 김씨를 맞이할 때의 폐백 품목에 쌀·술·기름·꿀·장·메주·포와 함께 젓갈(?:해)이 들어 있다. 한나라 무제가 동이족을 쫓아서 산둥 반도에 이르렀을 때 좋은 냄새가 나서 찾아보게 하니 물고기를 소금에 절인 것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특히 젓갈은 김장김치의 필수재료다. 김치에 젓갈을 넣는 것은 지역과 가정마다 각기 다르지만, 젓갈 선택은 김장철 주부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어떤 젓갈을 어찌 사용할까. 새우젓은 깔끔하고 시원한 맛, 까나리나 멸치액젓은 향은 강하지만 혀에 착 감기는 맛으로 식욕을 돋게 한다. 새우젓, 멸치젓, 생새우, 조기 등 다양한 해산물을 이용한 젓갈 3가지 이상을 섞어 사용하는 예도 흔하다. 통상 배추김치에는 새우젓, 황석어젓, 갈치속젓을 넣고 총각김치와 파김치에는 멸치젓을 사용한다. 서울과 경기도는 새우젓을 많이 넣지만 충청도는 황석어젓을 선호한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멸치액젓을 많이 넣는다. 김장용 젓갈은 담는 시기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새우젓은 음력 5월에 담근 것을 오젓, 6월에 담그면 육젓, 삼복 이후에 담그면 추젓이라 한다. 겨울철에 담근 것은 백하젓이다. 이 가운데 육젓이 으뜸이다. 육젓은 새우의 살이 통통히 올랐을 때 잡아 맛이 가장 좋다. 멸치젓은 남해 추자도 근해에서 잡은 추자젓이 최상품 대접을 받는다. 나이 든 어른들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저장 음식인 젓갈의 맛을 아는 젊은층도 갈수록 늘고 있다. 젓갈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전북 부안군, 충남 논산시에 있는 젓갈 시장은 관광단지가 조성될 만큼 주부들의 발길로 북적된다. ●국내 최대 젓새우 생산지 신안군 전남 신안군은 전국 최대의 젓새우 생산지로 유명하다. 다양한 어종이 생산되는 수산물 생산의 중심지로 젓새우와 병어, 민어, 김 등은 이미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신안 젓새우는 전국 생산량의 85% 이상을 생산해 전국으로 유통한다. 신안군에서는 187어가가 젓새우를 포함한 병어, 민어 등을 조업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1만 2000t의 젓새우를 어획, 250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군은 젓갈 생산지로서의 명성과 관광명소가 될 목적으로 지난 9월 신안 젓갈타운을 조성하기도 했다. 106억원이 투입된 젓갈타운은 젓갈 등 수산물판매장 20곳과 젓갈 저장 및 숙성을 위한 저온저장시설 1곳, 전시·홍보관 1곳 등이 갖춰져 있다. 젓갈타운은 생산설비뿐 아니라 저장과 숙성, 제조과정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반시설이다. 먹을거리와 볼거리·즐길거리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을 지닌 관광지다. 신안군 임자도를 중심으로 새우젓 어장이 형성돼 있다. 새우젓을 담아놓으면 새우 색깔이 하얗다고 해서 백하라고도 불린다. 가을이 되면 깊은 바다로 이동하고 봄이 되면 다시 얕은 바다로 돌아오는 회유 습성이 있고, 주로 물고기를 비롯한 다른 해양생물의 주요 먹이다. 최상품은 오젓과 육젓으로 한 드럼당 1000만원까지 한다. 오젓과 육젓이 좋은 이유는 겨울을 난 후 음력 5~6월 산란 직전에 알이 꽉 찬 젓새우로 담그기 때문이다. 이 시기 새우는 다른 때보다 크고 살이 통통해 맛도 고소하다. 특히 오염 없는 청정해역에서 어획해 선상에서 바로 미네랄이 풍부한 신안 갯벌서 난 천일염을 이용, 새우젓을 만들고 있다. 10~20도의 서늘한 곳에서 2~3개월 정도 잘 숙성시켜 시중에 새우젓으로 나온다. 신안게르만염 젓갈타운(061-275-4905). ●전북 부안 곰소젓갈 서해안을 낀 전북은 바다가 있는 군산, 김제, 부안, 고창 지역에서 모두 젓갈을 생산한다. 이 중 부안 곰소젓갈이 가장 규모가 크고 맛도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안군 진서면 곰소 지역은 변산반도 남단에 곰소항이 있어 연중 신선한 해산물과 건어물, 젓갈이 풍성하다. 곰소젓갈은 일제강점기 때 곰소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으로 젓갈을 담그면서 시작됐다. 조선시대 해군의 요충지였던 곰소항은 1980년대부터 전북을 대표하는 젓갈시장으로 발달했다. 곰소젓갈은 곰소염전에서 생산돼 1년 이상 저장, 간수를 완전히 뺀 천일염과 부안 칠산어장에서 잡힌 싱싱한 어패류로 만들어 쓴맛이 없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변산반도의 자연바람과 서해 낙조에 의해 오래 숙성돼 맛과 향이 뛰어나다. 곰소젓갈마을에는 80여개 젓갈 제조 및 판매업소들이 성업 중이다. 일반 젓갈은 새우젓, 멸치젓, 갈치젓, 밴댕이젓, 꼴뚜기젓, 황석어젓, 바지락젓 등이다. 김장철에 많이 사용하는 액젓은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갈치액젓, 갈치속액젓 등이다. 이 밖에 양념젓갈로 명란, 창란, 오징어, 꼴뚜기, 바지락, 어리굴젓, 아가미젓, 갈치속젓 등을 생산해 전국에 유통하고 있다. 특히 액젓은 타 지방 젓갈 생산업체들이 영세한 시설로 무허가 생산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곰소액젓은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정식 허가를 받은 업소들이 생산하고 있어 믿고 구입할 수 있다. 홍종철 곰소젓갈단지협회장은 “매년 10월 곰소젓갈마을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면서 “곰소액젓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젓갈로 김장철에는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곰소 젓갈단지협회(063- 583-9860~1). ●충남 논산 강경젓갈 ‘새우들이 드럼통 속에서 부활하는 소리 들릴 거야…소금에 절여뒀으니까 걔들은 썩지 않아. 썩지 않는다는 건 부활할 수 있는 상태라는 거지.’ 작가 박범신이 고향에 낙향해 쓴 소설 ‘소금’의 한 대목처럼 충남 논산시 강경읍은 젓갈의 대명사로 불린다. 강경은 전국 젓갈 생산량의 65%를 차지한다. 2대째 젓갈을 판매하는 ‘심씨네젓갈’ 주인 심철호(54)씨는 “지난달 젓갈축제가 끝났지만, 요즘도 택배 등으로 젓갈을 구입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어릴 적 부모와 함께 강경으로 젓갈을 사러 왔던 이들이 부모가 돌아가신 뒤 옛날 그 맛을 믿고 택배를 시킨다. 손님도 2대째로 이어지고 있다”고 웃었다. 이곳은 육젓, 오젓, 추젓 등 새우젓이 중심이나 황석어젓, 오징어젓, 바지락젓 등도 널려 있다. 이곳 젓갈 맛의 비결은 숙성에 있다. 다른 곳과 비슷하게 전남 신안과 인천 강화 등에서 뱃사람들이 갓 잡아 소금을 뿌린 새우를 가져와 숙성시킨다. 소금은 신안산 등 질 좋은 것을 쓰고 염도도 낮은 것을 골라온다. 숙성은 토굴 대신 저온 숙성실을 이용한다. 심씨는 “토굴에서 저장하면 빨리 숙성돼 싱싱한 맛을 내기 어려워서 요즘은 저온으로 숙성시키는 방법을 선호한다”며 “숙성 방법이 뛰어나 전통적인 감칠맛을 잃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온에서 100일 이상 숙성시켜 감칠맛에다 짜지 않고, 담백하고, 싱싱한 것이 특징이다. 강경은 조선시대 평양·대구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 원산포와 함께 조선 2대 포구로 명성을 날렸다. 서해에서 금강하구를 타고 올라온 소금과 풍부한 어물로 넘쳤다. 자연히 팔고 남은 수산물을 보관하는 염장법과 수산가공법이 발달했다. 하루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고, 전라·경기도 상인들까지 몰렸던 강경은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하면서 쇠락을 맞았다. 1990년에는 금강하굿둑 건설로 뱃길마저 끊겨 젓갈시장이 붕괴했다. 그러나 노력 끝에 시장이 복원되고, 1997년 젓갈축제 개최에 전통의 젓갈 기술이 이어져 2007년 정부로부터 ‘발효젓갈산업특구’로 지정됐다. 강경은 현재 150여개 가게에서 연간 2만 4700t의 젓갈을 생산해 모두 27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젓갈축제 때만 56만여명이 찾는다.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 강경젓갈전시관 등 볼거리도 좋다. 강경전통맛깔 젓사업협동조합(041-745-1985). ●인천 백령도 까나리액젓 인천 옹진군 백령도에서 생산되는 까나리액젓은 인천, 경기에서 ‘명품 젓갈’로 통한다. 김치를 담글 때뿐 아니라 냉면 육수에 사용하는 등 용도가 다양하다. 백령도 인근 청정해역에서 잡은 무공해 까나리로 만든다. 담백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까나리액젓은 김치의 신선도를 높여주고 비타민 B1·B2, 아미노산, 불포화지방산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김치를 담글 때 멸치액젓과 함께 사용하면 김치에 감칠맛이 더 난다. 까나리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뒤 항아리에 까나리와 천일염을 7대3의 비율로 섞어 숙성시킨다. 까나리수산(032-836-0363). 신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부안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논산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인천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6년 전 칠성파와의 ‘그날’… 쇠락의 단초가 될 줄 아무도 몰랐다

    6년 전 칠성파와의 ‘그날’… 쇠락의 단초가 될 줄 아무도 몰랐다

    “형님, 칠성파 아이들이 단체로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뭔 일이 터질 것 같은데요.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9년 11월 11일 오후 4시. ‘범서방파’ 두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김태촌(당시 61세)이 출소하기 6일 전이었다. 범서방파 실세인 나모(당시 43세)씨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부두목급인 정모씨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았다. 나씨는 ‘김태촌의 후계자’로 불리며 2000년 이후 고문 직책을 맡아 범서방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인물이었다. “빨리 애들 대기시켜.” 나씨의 지시가 떨어지자 정씨를 비롯한 부두목급 조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긴급 소집된 200여명의 조직원이 강남구의 한 식당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타고 온 검은색 차량에는 30㎝ 길이의 회칼과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등 무기들이 실려 있었다. 같은 시간 강남 인근에서는 칠성파 조직원 80여명이 모여 범서방파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내 3대 폭력조직 중 하나인 범서방파와 부산 최대 폭력조직인 칠성파 간에 전쟁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 대결로 범서방파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양측의 대치는 다음날 저녁까지 이어졌지만 ‘전쟁’ 직전 경찰이 출동하면서 가까스로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양측의 상처는 컸다. 경찰은 이때부터 범서방파를 집중적으로 쫓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에는 부두목급 김모(48)씨를 비롯한 간부급 조직원 8명을 구속하고 5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6년 만인 지난 10월 나씨가 범죄단체 구성 등 혐의로 검거되면서 범서방파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김태촌의 양아들로 알려진 김모(42)씨도 나씨보다 앞선 지난 4월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된 터였다. 조직의 자금줄인 해외 원정도박을 운영·알선하던 조직원들이 줄줄이 검찰에 붙잡히면서 범서방파가 사실상 와해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범서방파 -칠성파 충돌 피한 후 경찰 타깃… 조직원 줄줄이 잡혀 범서방파의 전신은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방면에서 이름을 딴 서방파다. 또 다른 폭력조직인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65)과 쌍벽을 이루며 80년대 주먹계를 평정했던 김태촌은 1975년 서방파의 행동대장을 시작으로 폭력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1977년 ‘번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박종석(당시 34세)을 두목으로 하고 자신은 부두목을 맡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세력을 확장했다. 1989년 초여름 서방파의 행동대장 격인 정모씨가 회칼로 난자당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태촌은 정씨의 장례식에 조직원 150여명을 집결시켜 서방파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어 경기 파주시에서 300여명의 조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축복기도 대성회’라는 종교 행사를 가장한 옥외 집회를 열었다. 사실상 범서방파의 결성식이었다. 조직을 정비한 김태촌은 본격적으로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세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강남과 경기 일산 일대를 중심으로 유흥업소 운영 및 도박장 개장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범서방파 김태촌·양은이파 조양은 ‘쌍벽’… 80년대 주먹계 평정 범서방파는 조직 기여도와 나이 등을 고려해 서열을 정했다. 검찰은 이들의 서열을 ‘행동대장급→부두목급→수괴급→고문급’의 순으로 매긴다. 조직 내 예절과 행동강령은 엄격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범서방파 조직원들은 선배를 보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해야 한다. 선배와 대화할 때는 항상 ‘형님’에다 말끝에 ‘요’자를 붙이도록 했다. 선배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물어서도 안 되고 언제 어디서건 전화를 바로 받아야 한다. 식사를 할 때도 나이 순서대로 일어서서 90도로 먼저 선배에게 인사한 뒤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다른 조직폭력배들 앞에서 기죽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선배들이 인사를 시켜 주기 전에는 모른 척해야 하고 싸움이 붙었을 때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 신규 조직원들은 합숙 생활까지 하며 이런 예절 교육을 받았다. 단합을 강조하기 때문에 조직 ‘식구’들의 경조사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조폭들은 조직원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대거 참석해 세를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경조사 당사자 밑의 후배들은 전원 동원돼 손님을 영접한다. 평소 ‘줄빠따’ 등으로 조직원들의 ‘군기’를 잡아 배신과 이탈을 방지했다. ●행동강령 엄격·합숙 생활하며 예절 교육… 선배엔 90도 인사 범서방파를 말할 때 라이벌 양은이파를 빼놓을 수 없다.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과 김태촌의 숙명적인 만남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의 조폭계는 토착 세력인 ‘신상사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신상사파라는 이름은 두목인 신상현(83)이 육군 헌병대 상사 출신인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서울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의 과실이 집중되면서 호남 지역의 ‘젊은 피’들이 대거 상경해 신상사파와 맞붙게 됐다. 1975년 1월 당시 범호남파 계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던 조양은은 조직원 3명과 함께 신상사파 신년회가 열린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사파는 서울 중심가를 범호남파에 내줬고, 조양은은 범호남파 실세로 부상했다. 이듬해 3월 번개파 행동대장이었던 김태촌은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조양은의 보스 오종철(당시 27세)을 기습해 부상을 입혔다. 조양은과 김태촌은 이때부터 숙명의 라이벌이 됐다. 결국 1980년대 서울 지역은 양은이파와 범서방파, 뒤늦게 세력을 구축한 이동재(65)의 ‘OB파’까지 ‘3대 호남 조폭’이 분할 점령했다. 그러나 김태촌의 계속된 수감 생활로 범서방파의 세력은 점차 약화된다. 게다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0년대 기업형 조폭 변신… 2013년 김태촌 사망 후 흔들 범서방파는 2009년 김태촌 출소에 맞춰 ‘함평식구파’를 흡수하며 조직 재정비에 나섰다. 유흥업소와 대부업체 운영, 건물 유치권 분쟁 등에 뛰어들어 조직 자금을 마련하며 재기를 노렸다. 2000년대는 조폭들의 범죄 수법이 금융·기업사냥 영역으로 확장된 시기이기도 하다. 범서방파도 기업형 조폭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김태촌의 양아들 김씨는 거액의 사채를 끌어와 무자본 기업 인수·합병(M&A) 수법으로 위조지폐 감별기 제조사를 사들인 뒤 회사 돈 200억원을 빼돌리는 지능적 범죄를 저질렀다. 해외로 진출해 마카오,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 도박장을 운영하고 손님들을 알선하며 거액의 돈을 챙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2013년 1월 김태촌이 사망하면서 범서방파는 또 한번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태촌의 양아들 김씨와 후계자 나씨마저 올해 연이어 구속 기소됐다. 최근에는 해외 원정도박 일당도 대거 구속되면서 범서방파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검찰 “평소 합법적 사업… 언제든 신종 불법 뛰어들 가능성” 그러나 조직의 ‘뿌리’까지 뽑히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검찰 등은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최근에는 조폭들이 평소에는 합법적인 자기 사업을 하다가 행사나 특정 시기에 집결했다가 다시 사업으로 돌아가는 등 ‘꼬투리’를 최대한 잡히지 않는 식으로 세력을 유지한다”며 “당분간 조직이 약화될 순 있어도 언제든 신종 불법 사업에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해외여행 | 태국-어둑한 마음에 볕을 러이Loei의 마법

    해외여행 | 태국-어둑한 마음에 볕을 러이Loei의 마법

    어쩔쏘냐. 삶이 내 뜻대로만 흘러갈 수 없으니, 스트레스가 쌓이고 불안에 흔들릴 때도 있는 법이다. 문제는 가슴에 쌓인 덩어리들을 어떻게 내보내냐는 것이다. 먹먹함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찾아오면 그대 러이를 찾아가길. ‘겨우?’ 의심이 갈 법한 소소한 의식들이지만 당신을 구름처럼 가볍게 할 능통한 명약이 그곳에 있다. 태국 동북부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러이는 방콕에서 약 500km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는 약 7시간이나 걸리는 지역이지만 태국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면 1시간이면 충분하다. 가장 여행하기 좋은 시즌은 겨울이다. 라오스, 버마(현재 이름은 미얀마) 등의 국가와 근접해 있기 때문에 여러 양식의 문화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버마를 견제하기 위해 라오스 왕자와 아유타야 공주가 혼인을 통해 손을 맞잡고 이 지역을 상징적인 평화의 지역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건축물에 전통 아유타야 방식은 물론 라오스식 건축 양식이 섞여 있단다. 물론 지역 주민들 또한 라오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다고. ●단사이Dan Sai 단사이는 피타콘 페스티벌이 열리는 단사이는 러이 지방의 소도시다. 30분~1시간 안팎의 자전거 투어로 마을 곳곳을 둘러볼 수 있는데, 마을 병원에서 시작해 피타콘 뮤지엄까지 이어지는 길은 가이드가 함께해 골목길을 거쳐가기 때문에 러이 사람들의 생활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다. 자전거 투어는 1회에 약 15~20달러면 충분하다. ▶러이의 마법 주문 1 무서운 표정 하지 말아요 음모라도 꾸민 듯이, 해가 바뀌자마자 안 좋은 일들이 겹쳤다. 보드를 타다가 생애 처음으로 뼈가 부러져서 한달 넘게 깁스를 했다. 출장으로 떠난 유럽에서 휴대폰을 분실했고, 지인과는 끝장까지 볼 요량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번엔 또 무슨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조 섞인 기대감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내리쬐는 태양, 내 마음에도 태양의 흑점처럼 부글부글 화가 끓고 있었다. 방콕에서 국내선을 타고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러이에서 나 못지않게 화난 얼굴을 한 피타콘Phi Ta Khon 마스크를 만났다. “귀신의 형상을 한 피타콘은 이 마을의 상징이자 나쁜 기운을 의미합니다. 매년 6월에는 피타콘 페스티벌이 사흘간 크게 열리는데,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설명을 들으며 왓 폰 차이Wat Phon Chai 마을의 피타콘 박물관Phi Ta Khon Museum으로 들어서자 사람 상반신만한 크기의 피타콘 마스크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6월27일경에 사흘간 열리는 피타콘 페스티벌은 마을 주민들은 물론 태국 전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큰 축제다. 피타콘 마스크를 쓴 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놀리듯이 행진하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어울리면서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단다. 축제가 가까워지면 마을 학교에서 모인 아이들은 피타콘 마스크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아이들이 만든 피타콘 마스크는 정의 앞에서 호되게 당할 것만 같이 순수함이 숨어 있다. 진짜 무서운 귀신을 그려 주겠다, 마음먹고 붓을 집어 들었다. 뾰족뾰족 날이 선 손놀림으로 완성한 마스크는 내 심정 그대로다. 포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붓을 내려놓자 마음은 한결 평안하다. 쌓여 있던 화가 마스크로 옮겨 간 것일까. 외지인들의 방문에 마을 사람들은 피타콘 페스티벌을 맛보기로 보여 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타콘 코스튬을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방울 소리와 마스크의 현란한 색깔이 와글와글 펼쳐지는 동안 신기하게도 엉켜 있던 마음이 설렁설렁 풀어지고 있었다. ▶러이의 마법 주문 2 위로의 말이 상냥해 고민을 직접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는 더욱 쉬워진다. 이곳엔 ‘자꾸안’이라 불리는 정신적 지주가 있다. 자꾸안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존재다. 사람들은 질병이 생기거나,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자꾸안을 찾아와 고민과 희망을 전하고 자꾸안은 그것을 기도를 통해 신에게 전달한단다. 나중에 소원이 이루지면 다시 돌아와 자꾸안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것이 예의다. 자꾸안의 집에 들어가 마련돼 있는 종이에 소원을 적었다. ‘좋은 일이 생기게 해 주세요.’ 어차피 못 알아볼 테니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을 주절주절 덧붙였다. 자꾸안에게 통역사가 간단히 내용을 전하자 잘 전달하겠다는 자꾸안의 답이 되돌아온다. 잘될 거라는 격려와 함께. 자꾸안의 집을 나서는데 괜히 발걸음이 가볍다. 명확한 답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잘될 거란 말이 든든하다. 마을 사람들도 이런 마음일 테다. 고민을 들어주고 격려를 받는 것만으로도 지친 마음은 재생의 힘을 얻는다. ▶러이의 마법 주문 3 비움의 길, 성인을 따라가는 길 불교인구가 95%에 달하는 태국에서는 단기간 출타를 하는 것이 낯선 풍경은 아니다. 태국의 왕 또한 왕이 된 후,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약 15일을 보냈다. 큰 일을 앞두고 마음을 정진하기 위해, 혹은 건강을 위해 잠시 동안 출가한단다. 기간은 본인이 정할 수 있다고. 우리나라의 템플스테이가 범인의 신분으로 며칠 동안 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단기 프로그램이라면, 태국의 것은 정말 스님이 되었다가 다시 세속의 범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침 피타콘 뮤지엄 주변에서 출가를 앞둔 이들을 위한 의식이 열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젊은 청년 한 명과 중년의 남자 두 명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듯 바글바글한 절 뒤뜰에는 들뜬 목소리들이 가득하고, 태국 최신 가요일 법한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진다. 새하얀 옷을 차려 입은 주인공들은 가만히 식을 기다리고 있다. 연꽃 한 송이를 들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천으로 가리고서. 각자 다른 이유로 출가를 결심했겠지만 모두 결연한 표정이다.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는 다르게 어쩐지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연이은 불행에 지쳤던 때라 의식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괜한 기대감이 생겼다.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스쳐간다. 이때까지 있었던 문제들은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생긴 것이 아니었을까. 불교의 이야기대로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식을 기다리는 이들도 마찬가지 기대를 품고 있을 터였다. 주인공들과 마을 사람들이 탑돌이를 시작한다. 온갖 축복의 말들이 쏟아진다. 행운을 의미하는 작은 동전들을 사방팔방에서 하늘로 던지고, 꽃가루까지 날린다. 그야말로 완전한 축복의 순간. 햇빛을 가리는 넓은 차양으로 호위를 받는 세 명의 주인공들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었다. 복작복작한 가운데서도 이들에게서는 형형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다. 그들의 여정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덕분에 나도 힘을 얻는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 방법은 놀랄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말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치앙칸Chiang Khan 치앙칸은 메콩강 줄기를 따라 들어선 치앙칸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태국 여행이 가능하다. 치앙칸을 둘러싼 자연을 느끼는 에코투어리즘이 유명하기 때문. 무엇보다 치앙칸의 명물은 ‘햇빛’인데, 일출과 일몰 시간이 되면 하늘이 오색으로 물든다. 메콩강에 비치는 노을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치앙칸에는 정갈하게 보존된 2~3층 높이의 전통 가옥들이 긴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데, 마치 전통양식을 살려 보존해 둔 일본 골목을 찾아온 것처럼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가 많고 소박하게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가 많아 태국의 대학생들이나, 유럽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이곳의 매력에 빠져 길게 머무르는 여행자들도 많다고. 직접 만든 작은 소품들을 파는 숍, 파삿 체험을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태원 골목에 숨어있을 법한 예쁜 카페 등이 주를 이룬다. 뻔한 기념품이 아니라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물건이 많기 때문에 주머니가 넉넉하다면 과감히 지를 것을 추천한다. 강 주변의 레스토랑에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주홍빛 전등 밑으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온다. 강 쪽으로 난 산책로에 서면 언제이건 여유롭고 조용하게 메콩강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마음을 쉬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 양손 엄지 척. 꼭 가보시라. ▶러이의 마법 주문 4 메콩강에 흘려 보낸 마음 출가 의식 때 우연찮게, 혹은 필연적으로 손에 날아들었던 행운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치앙칸으로 이동했다. 흑점처럼 타오르던 마음은 여정이 계속되면서 이미 작은 불길로 잦아든 지 오래다. 동행인들은 치앙칸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넓은 메콩강 위에 나쁜 기운들을 쏟아낼 수 있을 거란다. 태국 전통 가옥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치앙칸에 도착하자마자 골목길 안쪽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간다.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플로팅 오브젝트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태국어로 ‘파삿 로이 코Pasard Loy Kror’라고 불리는 플로팅 오브젝트는 태국인들이 나쁜 일이 생기면 행하는 의식에 사용되는 것이다. 파삿에 촛불을 켜고 강 위에 흘려 보내면서 나쁜 기운도 같이 흘려 보내는 것. 태국 사람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파삿을 만들어 강으로 나선단다. 재료는 모두 자연에서 난 것이다. 대나무 줄기를 꺾어 틀을 잡고 대나무 잎으로 바닥을 만든다. 그리고 왁스 꽃으로 장식하고 사방에 작은 초를 꽂아 완성한다. 파삿을 완성하면 모두 동그랗게 둘러앉아 간단한 의식을 치른다. 등 뒤로 명주실을 크게 돌려 원을 만들고 짧은 기도를 한 뒤 등 뒤의 실을 무릎 앞으로 넘겨 가져온다. 나에게 있었던 나쁜 기운이 원을 따라 파삿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조심조심 양손으로 바삿을 들고 메콩강으로 간다. 자칫 우습게 보일 수도 있는 의식이었다. 누군가 ‘이 까짓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애타던 자에게는 이 과정과 행위들이 더없이 황홀한 순간이었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강 위에 파삿을 띄우는 행위는 상상하는 것보다 더 뭉클한 것이었다. 공들여 만든 나의 파삿에 촛불을 켜고 메콩강의 흙빛 물 위에 올린 뒤 밀어냈다. 그때부터다. 찬찬히 마음이 해방감에 젖어 들었다. 정말로 파삿 안에 나의 나쁜 기운이 담긴 것처럼 말이다. 파삿을 물에 띄우고 나면 다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법칙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 멀리 누군가 띄운 걱정들이 어둑어둑한 강 물 위에서 반짝이며 흔들흔들 떠다니고 있었다. ▶러이의 마법 주문 5 비운 자리엔 반짝이는 행운을 담아 마음을 비웠으니 좋은 기운을 채울 차례다. 이른 새벽 숙소 앞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새벽마다 공양을 하는 스님들에게 보시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보시는 일상과 같다. 매일 새벽마다 사람들은 골목길을 따라 앉아 스님들을 기다린다.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이런 풍경에 여행자도 동참할 수 있도록 보시할 음식과 전통 옷을 준비해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참여했던 많은 의식들이 모두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면, 보시는 행운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스님에게 보시를 하면서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주황색 승복을 걸친 맨발의 스님들이 자박자박 걸어온다. ‘좋은 일이 생기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흰 쌀밥 한 줌, 과자 한 봉지를 바구니에 담는다. 스님들은 때때로 멈춰서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며 행복을 기원해 준다. 새벽의 고요함 속에 중얼중얼 서로의 축복을 기원하는 순간이다. 이 경건한 의식은 쉬웠지만, 더없이 뿌듯한 것이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치앙칸에서의 보시가 마음을 정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반나파낫 타이담 문화마을Ban Na Pa Nat Taidam Cultural Village에서의 체험은 마음속에 반짝이는 기쁨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치앙칸에서 한 시간 거리인 반나파낫 타이담은 직조 기술로 유명한 마을. 100여 년 전 라오스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때문에 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그중에서도 집집마다 창과 문에 걸어 놓은 각양각색의 모빌이 가장 눈에 띈다. 색색의 실을 얇은 대나무 가지에 꼬아 만든 모빌은 ‘행운’을 의미한다. 행운이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에 창과 문에 걸어 둔단다. 벼가 자라는 시기,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이곳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천을 짜거나 모빌을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덕분에 보통의 시골마을이 초록 일색이라면 이곳은 노랑, 빨강, 분홍 등 생기 넘치는 색이 가득하다. 실로 만든 공예품일 뿐인데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 때문이다. 작은 나무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던 모빌은 그 존재만으로도 즐거운 기운이 넘쳤고, 그 기운이 나에게도 전해졌던 것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놀라운 행운이 나를 가득 껴안았다. 여행 중 잃어버린 귀한 물건을 공항에서 찾았던 것. 올 초부터 이어졌던 불행의 또 다른 연장선상이 될 뻔했던 분실 사고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행운이야.” 함께했던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넬 때, 같이 기도했을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찼다. 그리고 짧은 여행에서 참여한 의식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미신 같거나, 소박했을지언정 절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순간들이. ▶travel info AIRLINE태국 수도인 방콕에서 러이행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자동차로는 7시간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이용하면 1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다. 타이항공, 녹에어, 에어아시아 등이 러이행 국내선을 운행하고 있다. Restaurant란창 가든 바 & 레스토랑LanChang Garden Bar & Restaurant단사이 마을 인근의 모던 태국식 레스토랑. 생선, 고기, 야채 등 다양한 태국 요리를 선보이는데 기름지지 않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사로잡은 곳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플레이팅에도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등 정찬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Muang Loei, Loei, Thailand 42000 +66 42 833 733 www.facebook.com/pages/LanChang-Garden-Bar-And-Restaurant Hotel푸파남 리조트 & 스파Phu Pha Nam Resort & Spa시내와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 목조건물로 내부 인테리어에서도 나무의 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창밖으로 푸른 숲의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나무에 둘러쌓인 큰 테라스가 있어 여유롭게 아침을 즐기기에 좋다. 다만 모기를 조심할 것. 음식은 기교 없이 담백하다. 태국 음식이 낯선 사람이라도 부담없이 도전 해 볼 수 있다. 252 Moo 1, Koakngam, Amphur Dansai, Loei 42120, Thailand +66 42 078 078 www.phuphanam.com 더 올드 치앙칸 부티크 호텔The Old Chiang Khan Boutique Hotel치앙칸에서는 메콩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숙소를 정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곳은 메콩강 방향으로 난 숙소인데다, 100년 역사의 태국 전통 건물을 호텔로 만들었다. 손때 묻은 전통 가옥이 주는 넉넉함은 물론 일출이 시작되거나 노을이 지는 때, 호텔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으면 평화로운 기분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현대식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자잘한 것들이 있지만 그쯤은 이곳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다. 치앙칸 골목이 시작되는 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야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288, Chiang Khan, Chiang Khan District, Loei 42110, Thailand +66 42 822 119 www.theoldchiangkhan.com Stupa프라 탓 스리 송 락Phra That Sri song Rak 1560년대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과 라오스 비엔티안 지방의 스리 사타나카나헛 왕국이 평화 협정을 맺고 만들었다는 사리탑이다. 사리탑은 신발을 벗고 입장할 수 있는데, 한낮에는 바닥이 뜨거우니 양말을 꼭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탑돌이를 할 때는 시계 방향으로 돌지만, 이곳에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몸의 왼쪽에 있는 심장을 사리탑과 더 가깝게 두기 위해서다. 큰 수트파 사방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대나무 공예품들이 쌓여 있다. 그것이 이곳 마을 사람들이 스투파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Temple왓 너라밋 위파타사나Wat Neramit Wipattasana대리석으로 지은 태국 방콕의 마블템플에서 모티브를 얻어 20여 년 전 만들어진 사원이다. 러이의 특산품인 분홍 대리석을 썼다. 치앙센 양식과 수코타이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부처상은 은혜로운 미소와 함께 자비 넘치는 표정으로 완성됐다. 러이 지방 아티스트가 8년에 걸쳐 벽을 따라 그렸다는 벽화에서부터 중앙에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부처상까지, 꼼꼼히 둘러볼수록 그 정성이 남다르다. 명상하는 사원이므로 여행자 또한 발소리와 목소리를 죽여 승려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글·사진 차민경 기자 취재협조 태국관광청 www.visitthailand.or.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글로벌 시대] 한국전 참전용사와 情 나눔의 잔치를/김창후 LG전자 고문·한국외대 경영학과 겸임교수

    [글로벌 시대] 한국전 참전용사와 情 나눔의 잔치를/김창후 LG전자 고문·한국외대 경영학과 겸임교수

    외국 생활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하게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대부분 터키인들이 배내 시절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정(情)이 싹트여 자라온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한반도의 8배가 되는 큰 나라이건만 전국의 거래선을 만나 상담하고 고객과 대화를 하노라면 예외 없이 따뜻하고 우호적인 정감을 깊이 느낀다. 터키는 우리와 역사적 혈맹 관계로 6·25 때 참전해 수천 명의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바쳤다.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당시 한국 관중이 대형 터키 국기를 들고 보여 준 응원은 집에서 TV를 보던 터키 국민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다. 두 나라 국민 사이에 강한 우정의 흐름을 다시 한번 확인케 됐던 것이다. 지구의 건너편 한국에 터키 국민이 지속적으로 보여 준 애정은 무형의 값진 자산이다. 터키인들이 우리 외에 다른 어느 국민에게 이처럼 우호적이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한다. 이제는 우리도 그동안 받은 정을 갚으며 진정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기업으로 ‘받은 정(情)을 다시 정(情)으로 보답’하는 문화행사를 해 보자고 마케팅 부서장에게 지시했다. 터키 전역의 한국전 참전 용사을 초청해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정 나눔의 잔치’을 하자는 것이었다. 행사는 보스포루스해협 언덕에 위치해 야경이 장관인 곳에서 하기로 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옛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뒤로하고, 해협 건너편 아시아 방향으로 달리면 6·25 때 퍼져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터키 민요 ‘위스크다르’의 유래지인 마을이 있다. 세월이 흘러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모두 팔순의 할아버지가 됐다. 베테랑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터키말로 인사를 했다. 모두 두 손으로 꽉 잡는다. 한국전 참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부분 전쟁 당시 지급된 군 정복을 정갈하게 입고 와서 불패의 군인정신을 되찾은 모습을 보인다. 왼쪽 가슴에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어 무공을 세운 전사에게 주는 양국 정부의 훈장을 정연하게 달고 나왔다. 많은 훈장의 무게가 무거워서인지 처진 어깨가 더 처져 보인다.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팔척 장신 알리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헌병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거쳐 간 문산·영등포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손에 조그만 단어 암기장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우리말로 인사했다. 전쟁 당시 한국어를 배우면서 정리한 회화 공책이라며 보여 준다. 60년 전 받아 필기한 공책을 아직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참 감동적이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기 전 마케팅 부서에서 미리 터키어로 준비해 주어 여러 번 연습한 환영의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발음과 억양이 서툴지만 모두 마음으로 이해를 완벽히 하는 분위기다. 한국인으로서 그간 역사적으로 보여 준 터키인의 두터운 애정을 우리는 늘 감사히 생각하며 잊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 그리고 현지 법인 회사의 대표로서 이곳 형제의 나라에 와서 여러분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자주 만날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이어서 참석한 여러분들을 보니 어렸을 때 귀동냥으로 배운 터키 민요를 기억한다고 하면서 ‘위스크다르’ 서너 구절을 무반주로 불렀다. 놀랍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사를 외우면서 수십 번 연습한 애창 민요의 독창 시도를 나의 터키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시로 받아 주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기분을 갖고 감사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 [서울 핫 플레이스] 광진구 ‘건대 앞’

    [서울 핫 플레이스] 광진구 ‘건대 앞’

    수백개가 넘는 술집과 식당. 비교적 저렴한 물가. 술 한잔하기에 천혜의 환경을 가진 이곳. 바로 건대 앞이다. 그런 이유로 ‘건대 앞에서 보자’는 말은 ‘오늘 술 한번 제대로 마셔 보자’는 말로 통한다. 그랬던 건대 앞이 최근 몇 년간 다양한 공연문화시설이 만들어지면서 능동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청춘의 공간으로, 동쪽은 30·40대 직장인과 가족의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김기동 광진구청장은 이곳을 “젊은이들의 청춘을 불태우는 공간과 가족이 가을 산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자랑했다. [어디까지 가 봤니] ●‘건어물녀’ 1개 사단이 와도 문제없다… 미용실만 185곳 ‘뷰티로드’ 길의 시작을 어디서 하면 좋을까. 만약 20대 여성이라면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하기를 권한다. 이곳을 시작으로 능동로를 따라 건대입구역까지 약 900m 구간은 가칭 ‘뷰티로드’로 불린다. 이곳에 밀집한 미용실만 185곳이고 이발소는 17곳, 피트니스·요가 등 스포츠센터 26곳, 뷰티마사지숍 10곳, 네일아트숍 19곳, 속눈썹관리숍 2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년째 건대 앞에서 일하고 있다는 미용사 강모(34)씨는 “1990년대 후반만 해도 50~60곳 정도가 있었는데, 이후 미용실의 메카인 이화여대 앞의 임대료가 폭등하면서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이곳으로 미용실이 몰려들게 된 것”이라며 “최근에는 이곳도 월세가 많이 오르면서 점점 세종대 쪽으로 뷰티로드가 확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게가 많아지면서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좋아졌다. 3000원으로 앞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부터 딱 1명의 손님만 받는 1인 미용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숍들이 즐비하다. 건국대 행정학과 3학년 최모(21)씨는 “건어물녀 1개 사단도 이곳만 지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델처럼 꾸밀 수 있다는 농담도 있다”고 말했다. ●하루 평균 6만여명 찾는 최신 식당·술집… 강남서도 찾아오는 ‘불금’ 뷰티로드에서 머리를 하고 옷도 한 벌 사다 보면 어느새 건대입구역 2번 출구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골목 탐험이 재미나다. 수백개의 식당과 술집이 밀집한 골목 안쪽은 하루 평균 유동인구만 6만 10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유동인구가 10만명을 훌쩍 넘기는 금요일 밤이 되면 ‘남녀상열지사’가 수십편은 연출된다. 이곳 식당과 술집의 특징은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 이곳에서 전복요리집을 운영하는 김모(36)씨는 “한때는 닭갈비가, 한때는 닭발이, 또 한때는 주꾸미집이 가득했다”면서 “대부분의 고객이 젊은층이다 보니 음식의 유행도 가장 빠르게 찾아왔다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감주’라고 불리는 ‘감성주점’이 이곳을 휩쓸고 있다. 한양대 3학년 김모(21)씨는 “술집과 클럽의 중간 형태”라면서 “최근 유행 음악이 나오는데, 거기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러다 눈이 맞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부킹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제한이 만만찮다. 대부분 20대 중후반을 커트라인으로 출입을 금하는데, 엄격한 곳은 만 26세부터 출입이 안 된다. 먹고 마시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광진구가 골목 한쪽에 만든 야외 공연장 ‘청춘뜨락’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아카펠라와 힙합, 포크, 재즈, 록밴드 공연, 마술, 팬터마임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버스킹(거리 공연)의 명소가 됐다. 맥줏집을 운영하는 한모(42)씨는 “가끔은 프로가 아닌가 할 정도로 실력 있는 밴드의 공연이 열릴 때도 있다”면서 “작은 공연장이 들어서고 나서 골목의 분위기가 좀 더 문화적으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컨테이너박스 200개 쌓은 ‘커먼그라운드’… 힙합·랩 공연 아지트 부상 건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200m 정도 걸어 나오면 영국 런던의 박스파크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컨테이너파크처럼 컨테이너를 이용해 쌓아 올린 쇼핑몰을 만날 수 있다. 40피트 컨테이너박스 200개를 겹겹이 쌓은 커먼그라운드에는 비주류 패션 브랜드숍 56개와 한식·일식·태국요리 등 16개의 식당이 있다. 건물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핫플레이스가 될 수는 없다. 이곳을 진짜 핫하게 만드는 것은 컨테이너건물 가운데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대학생 동아리를 비롯해 청년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공연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커먼그라운드 관계자는 “공연 장르는 커버댄스부터 힙합, 랩 등 다양하다”며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엔 공연을 하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화양동 분수광장부터 이어진 공연·프리마켓… ‘한국 몽마르트르’ 꿈꾼다 청춘을 불태우는 서쪽길과 달리 동쪽은 가족과 한적하게 문화를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먼저 가 볼 곳은 화양동 분수광장 앞에 설치된 아트브리지 무대다. 이곳에선 토요일 오후 7시 30분이면 실력파 인디밴드들이 공연을 펼친다. 올해로 벌써 4년째가 되면서 유명해져 이제 무대에 서려면 오디션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구 관계자는 “홍대의 밴드 연주 공간이 줄어들면서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한 인디밴드들이 오디션에 많이 참가한다”며 “최근 수준이 높아지면서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트브리지 무대를 지나 건대입구역 쪽으로 내려오면 젊은 예술가들이 수공예품을 파는 프리마켓을 만날 수 있다. 보통 금요일과 토요일에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열리는데 날씨에 따라서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프리마켓에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이들부터 자체 디자인한 가방과 지갑, 도자기 그릇 등을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도자기를 만드는 물레를 체험하는 팀도 참석하는데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프리마켓 관계자는 “과거 70팀까지 올 정도로 프리마켓 참가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50~60팀 정도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광진구는 세종대에서 건대에 이르는 이 길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예술과 문화가 흐르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구는 최근 광진문화회관 앞에도 시민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건대 앞 사거리를 지나 한강공원으로 쭉 내려오면 자벌레를 만날 수 있다. 어린이도서관과 수족관, 곤충전시관, 작품전시관 등으로 구성된 자벌레는 그 모양이 ‘자벌레’를 닮아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 풍경은 ‘엄지 척’이라고 할 만하다. [뭘 먼저 먹어 볼까]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건대 앞. 농담처럼 100만 가지의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까닭에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이 더 어렵다. 또 빠르게 식당가가 바뀌기 때문에 자칫 인테리어만 보고 들어갔다가는 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동네에서 잘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골목은 양꼬치거리다. 중국인들의 이주가 늘면서 만들어진 이 630m 길이의 골목에는 100여개가 넘는 양꼬치집이 성업을 하고 있다. ‘양러우촨’(羊肉)이라 불리는 양꼬치의 가격은 1인분에 1만원~1만 2000원 수준. 1인분을 시키면 10개의 양꼬치가 나온다. 여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칭다오 맥주를 한잔 추가하면 더 좋다. 중국 정통 양꼬치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느끼한 음식이지만 건대 앞 양꼬치는 기름기를 줄이고 중국음식 특유의 향도 줄였다. 양꼬치뿐만 아니라 만두와 전병을 비롯해 다양한 중국 가정식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구청 공무원들은 이곳에 있는 송화반점과 매화반점을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추천할 만한 곳은 커먼그라운드의 옥상 식당가다. 이곳에는 16개의 식당이 있는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커먼그라운드 광장에 세워진 푸드트럭에서 파는 수제 햄버거와 감자, 맥주를 서서 먹다 보면 마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6500원짜리 햄버거에 3500원을 더하면 세트로 먹을 수 있다. 광장에는 한국식 타코를 파는 가게와 추로스와 음료 등 간식거리를 파는 곳도 있다. 옷가게가 즐비했던 로데오거리에 숨어 있는 맛집도 있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은호초밥과 화덕피자와 떡볶이를 함께 먹을 수 있는 퓨전음식점 ‘바나바나’가 인기를 끌고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서울 핫 플레이스] 광진구 ‘건대 앞’

    [서울 핫 플레이스] 광진구 ‘건대 앞’

    수백개가 넘는 술집과 식당. 비교적 저렴한 물가. 술 한잔하기에 천혜의 환경을 가진 이곳. 바로 건대 앞이다. 그런 이유로 ‘건대 앞에서 보자’는 말은 ‘오늘 술 한번 제대로 마셔 보자’는 말로 통한다. 그랬던 건대 앞이 최근 몇 년간 다양한 공연문화시설이 만들어지면서 능동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청춘의 공간으로, 동쪽은 30·40대 직장인과 가족의 공간으로 재편되고 있다. 김기동 광진구청장은 이곳을 “젊은이들의 청춘을 불태우는 공간과 가족이 가을 산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자랑했다. [어디까지 가 봤니] ●‘건어물녀’ 1개 사단이 와도 문제없다… 미용실만 185곳 ‘뷰티로드’ 길의 시작을 어디서 하면 좋을까. 만약 20대 여성이라면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하기를 권한다. 이곳을 시작으로 능동로를 따라 건대입구역까지 약 900m 구간은 가칭 ‘뷰티로드’로 불린다. 이곳에 밀집한 미용실만 185곳이고 이발소는 17곳, 피트니스·요가 등 스포츠센터 26곳, 뷰티마사지숍 10곳, 네일아트숍 19곳, 속눈썹관리숍 2곳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년째 건대 앞에서 일하고 있다는 미용사 강모(34)씨는 “1990년대 후반만 해도 50~60곳 정도가 있었는데, 이후 미용실의 메카인 이화여대 앞의 임대료가 폭등하면서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이곳으로 미용실이 몰려들게 된 것”이라며 “최근에는 이곳도 월세가 많이 오르면서 점점 세종대 쪽으로 뷰티로드가 확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게가 많아지면서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는 좋아졌다. 3000원으로 앞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부터 딱 1명의 손님만 받는 1인 미용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숍들이 즐비하다. 건국대 행정학과 3학년 최모(21)씨는 “건어물녀 1개 사단도 이곳만 지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델처럼 꾸밀 수 있다는 농담도 있다”고 말했다. ●하루 평균 6만여명 찾는 최신 식당·술집… 강남서도 찾아오는 ‘불금’ 뷰티로드에서 머리를 하고 옷도 한 벌 사다 보면 어느새 건대입구역 2번 출구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골목 탐험이 재미나다. 수백개의 식당과 술집이 밀집한 골목 안쪽은 하루 평균 유동인구만 6만 1000여명에 달한다. 특히 유동인구가 10만명을 훌쩍 넘기는 금요일 밤이 되면 ‘남녀상열지사’가 수십편은 연출된다. 이곳 식당과 술집의 특징은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 이곳에서 전복요리집을 운영하는 김모(36)씨는 “한때는 닭갈비가, 한때는 닭발이, 또 한때는 주꾸미집이 가득했다”면서 “대부분의 고객이 젊은층이다 보니 음식의 유행도 가장 빠르게 찾아왔다가 가장 먼저 사라진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감주’라고 불리는 ‘감성주점’이 이곳을 휩쓸고 있다. 한양대 3학년 김모(21)씨는 “술집과 클럽의 중간 형태”라면서 “최근 유행 음악이 나오는데, 거기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러다 눈이 맞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부킹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제한이 만만찮다. 대부분 20대 중후반을 커트라인으로 출입을 금하는데, 엄격한 곳은 만 26세부터 출입이 안 된다. 먹고 마시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 광진구가 골목 한쪽에 만든 야외 공연장 ‘청춘뜨락’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아카펠라와 힙합, 포크, 재즈, 록밴드 공연, 마술, 팬터마임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버스킹(거리 공연)의 명소가 됐다. 맥줏집을 운영하는 한모(42)씨는 “가끔은 프로가 아닌가 할 정도로 실력 있는 밴드의 공연이 열릴 때도 있다”면서 “작은 공연장이 들어서고 나서 골목의 분위기가 좀 더 문화적으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컨테이너박스 200개 쌓은 ‘커먼그라운드’… 힙합·랩 공연 아지트 부상 건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200m 정도 걸어 나오면 영국 런던의 박스파크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컨테이너파크처럼 컨테이너를 이용해 쌓아 올린 쇼핑몰을 만날 수 있다. 40피트 컨테이너박스 200개를 겹겹이 쌓은 커먼그라운드에는 비주류 패션 브랜드숍 56개와 한식·일식·태국요리 등 16개의 식당이 있다. 건물이 조금 다르게 생겼다고 핫플레이스가 될 수는 없다. 이곳을 진짜 핫하게 만드는 것은 컨테이너건물 가운데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대학생 동아리를 비롯해 청년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공연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커먼그라운드 관계자는 “공연 장르는 커버댄스부터 힙합, 랩 등 다양하다”며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엔 공연을 하려면 줄을 서야 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화양동 분수광장부터 이어진 공연·프리마켓… ‘한국 몽마르트르’ 꿈꾼다 청춘을 불태우는 서쪽길과 달리 동쪽은 가족과 한적하게 문화를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먼저 가 볼 곳은 화양동 분수광장 앞에 설치된 아트브리지 무대다. 이곳에선 토요일 오후 7시 30분이면 실력파 인디밴드들이 공연을 펼친다. 올해로 벌써 4년째가 되면서 유명해져 이제 무대에 서려면 오디션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구 관계자는 “홍대의 밴드 연주 공간이 줄어들면서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한 인디밴드들이 오디션에 많이 참가한다”며 “최근 수준이 높아지면서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트브리지 무대를 지나 건대입구역 쪽으로 내려오면 젊은 예술가들이 수공예품을 파는 프리마켓을 만날 수 있다. 보통 금요일과 토요일에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열리는데 날씨에 따라서 시간이 단축되기도 한다. 프리마켓에는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이들부터 자체 디자인한 가방과 지갑, 도자기 그릇 등을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도자기를 만드는 물레를 체험하는 팀도 참석하는데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프리마켓 관계자는 “과거 70팀까지 올 정도로 프리마켓 참가자가 많았는데, 요즘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50~60팀 정도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광진구는 세종대에서 건대에 이르는 이 길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예술과 문화가 흐르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구는 최근 광진문화회관 앞에도 시민들이 연주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건대 앞 사거리를 지나 한강공원으로 쭉 내려오면 자벌레를 만날 수 있다. 어린이도서관과 수족관, 곤충전시관, 작품전시관 등으로 구성된 자벌레는 그 모양이 ‘자벌레’를 닮아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 풍경은 ‘엄지 척’이라고 할 만하다. [뭘 먼저 먹어 볼까] 양꼬치·수제 버거·타코… ‘글로벌 푸드코트’ 따로 없네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 건대 앞. 농담처럼 100만 가지의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까닭에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것이 더 어렵다. 또 빠르게 식당가가 바뀌기 때문에 자칫 인테리어만 보고 들어갔다가는 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동네에서 잘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골목은 양꼬치거리다. 중국인들의 이주가 늘면서 만들어진 이 630m 길이의 골목에는 100여개가 넘는 양꼬치집이 성업을 하고 있다. ‘양러우촨’(羊肉)이라 불리는 양꼬치의 가격은 1인분에 1만~1만 2000원 수준. 1인분을 시키면 10개의 양꼬치가 나온다. 여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칭다오 맥주를 한잔 추가하면 더 좋다. 중국 정통 양꼬치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느끼한 음식이지만 건대 앞 양꼬치는 기름기를 줄이고 중국음식 특유의 향도 줄였다. 양꼬치뿐만 아니라 만두와 전병을 비롯해 다양한 중국 가정식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다. 구청 공무원들은 이곳에 있는 송화반점과 매화반점을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두 번째로 추천할 만한 곳은 커먼그라운드의 옥상 식당가다. 이곳에는 16개의 식당이 있는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커먼그라운드 광장에 세워진 푸드트럭에서 파는 수제 햄버거와 감자, 맥주를 서서 먹다 보면 마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6500원짜리 햄버거에 3500원을 더하면 세트로 먹을 수 있다. 광장에는 한국식 타코를 파는 가게와 추로스와 음료 등 간식거리를 파는 곳도 있다. 옷가게가 즐비했던 로데오거리에 숨어 있는 맛집도 있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은호초밥과 화덕피자와 떡볶이를 함께 먹을 수 있는 퓨전음식점 ‘바나바나’가 인기를 끌고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이명선 기자가 만난 사람] “줄타면 행복합니다” 20대 어름사니 박지나양

    [이명선 기자가 만난 사람] “줄타면 행복합니다” 20대 어름사니 박지나양

    “줄을 타며 행복했지~“ 여기 유행가 가사처럼 줄 위를 걷는 청춘, 어름사니가 있다.그것도 국내에는 단 두명뿐이란다.천하를 호령하는 왕보다 허공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만끽하며 젊음을 불태우는 광대다. 줄을 잘 타기 위해서는 몸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남사당놀이의 꽃인 줄타기하는 ‘어름사니’, 3m 가까운 높이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얇은 줄 위를 걷는 그녀는 허공에서 줄 위를 걷는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고된 훈련으로 극복해내고 여자 어름사니로서 오늘도 관객들의 환호성을 즐기며 줄 위를 걷는다. 어린나이에 한때 줄타기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도 있었지만, 이젠 관객들의 즐거운 표정에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낀다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줄타기의 매력을 알리고 전통의 명맥을 잇고 싶다는 당찬 그녀. 패랭이를 쓰고 부채를 펼쳐 들며 신명나게 줄을 타는 박지나(27)양을 만나봤다. →어름사니를 하게 된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나. ―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특기적성으로 사물놀이부를 했다. 그러던 중 사물놀이부 강사님이 남사당에 들어와서 같이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길로 나도 모르게 남사당에 입문하는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주말마다 남사당을 따라다니며 춤도 추고 악기도 배웠다. 근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항상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남사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가느다란 줄 위에 오르기도 무서울 텐데 어떻게 훈련을 했나. ― 줄타기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다.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항상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는 “줄”이라 생각하며 미친 척 말을 걸어 본적도 있다.(ㅎㅎㅎ) 연습이 잘 안되는 날엔 줄에게 “기분이 좋지 않냐?”라고. 처음 줄타기를 시작 했을 때에는 발목 높이에서 서는 연습과 걷는 연습을 했고 조금씩 몸에 익어갈 때쯤 무릎높이, 다음에는 허리높이, 어깨, 머리, 그 뒤로는 점프해서 뛰어도 손이 닿지 않는 높이 순으로 연습했다. 기술과 재담을 배우고 익히며 그것에 따라 줄 높이도 점점 높아졌다. 어렸을 때는 학교수업을 마치면 바로 남사당 전수관으로 나가 쉬지 않고 연습했고 방학 땐 방학 내내 합숙하며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저와 싸우며 지금의 내가 됐다. 연습이나 공연 중 작은 부상은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크게 부상이 없어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항상 부상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 초등학창 시절에 뭔 추억이 있나. ― 어려서부터 항상 학교가 끝나면 바로 남사당에 나와 체력단련과 연습을 늦은 시간까지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추억이 많지 않다. 그래서 어려서는 친구들과 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방과 후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재미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그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걸 견뎠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난날을 후회는 않는다. →줄타기 훈련을 많이 하면 엉덩이에 영광의 훈장(?)이 있다던데. ― 줄을 타면서 여러 곳에 생긴 상처나 흉터들이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엉덩이에 옹이가 박혀 있지는 않다. 발바닥 같은 경우도 줄을 오래 딛고 있으면서 굳은살이 두껍게 박혀 있어 사실 이제는 줄보다 평지에서 오래 걸으면 많이 아프고 힘들다. 오히려 줄 위가 더 편할 때도 있다. 가끔 사람들이 궁금해서 내 발을 봤다가 “줄타는 사람은 양말을 두겹으로 신냐”면서 웃은 해프닝도 있다. 그리고 손에도 중심을 잡기 위해 흔들 부채 때문에 굳은살이 있단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훈련하며 여기저기 부상당한 곳이 비만 오면 통증이 나타나 좀 고통스럽다. 하지만 아플수록 제가 열심히 산 것처럼 느껴져 삶의 훈장처럼 생각하고 있다. → 줄타기 어름사니가 여자라서 좋은 점과 안좋은 점이 있다면? ― 여성이 줄을 타는 점에서 남자보다 힘이 약하다고 한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지만 일부러 그런 고정관념들을 깨기 위해 연습을 더 많이 했다. 투박하고 파워풀한 점에서는 조금 부족할 수 있지만, 섬세하고 유연한 부분에 있어서는 여성으로서 더 잘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본다. → 줄타기의 기술종류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술과 고난도 기술은 뭔지. ― 줄타기의 기술에는 40여 가지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걷기부터 거미가 거미줄을 늘이는 것 같다고 해서 “거미줄늘리기”, 옆으로 앉았다 일어섰다하는 “옆쌍홍잽이”, 가운데로 앉는 기술인 “쌍홍잽이” 등이 있다. 그리고 책상다리, 외발뛰기, 코차기, 황새두렁넘기 등 기술들도 있다. 그중 관객들이 가장 흥미있어 하는 건 양발 끝으로 “코차기”라는 기술을 좋아하는데 높이 뛰면서 하는 만큼 매우 신기해하고 박수도 많이 나오는 기술이다 . 그래서 저도 그 연희를 좋아한다. → 관객들이 줄타기공연을 재미있게 보는 포인트를 알려달라. ― 우선 우리 전통연희라는 것이 관객과 소통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단지 보러 온다는 생각보다 함께 즐긴다는 마음으로 공연을 함께한다면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 우리 전통공연은 다른 공연과 다르게 재담이라는 것이 있다. 공연 중간 언제라도 추임새를 넣어주면 우리는 더 신이 나서 공연하고 중간중간 상황에 맞는 재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이 됐으면 좋겠다. → 현재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풍물단” 단원이라는데 이 풍물단에 대해 얘기해달라. ― 현재 우리 풍물단에서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에 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 조선시대 안성남사당의 최초 여성 꼭두쇠였던 바우덕이의 얼을 받아 그 바우덕이의 이야기로 스토리텔링해 현대화된 공연으로 이루어져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공연이다. ​→앞으로의 희망이나 바람이 있다면 뭔지. ― 꾸준히 공연을 보러 오는 분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는 공연을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외줄타기를 인생에 많이 비유하지 않는가. 사는 것 자체가 매순간 아슬아슬하고 까딱 잘못하면 낙오되는 우리의 인생사를 이 줄타기에 많이 비유한다. 저도 그렇고, 사는 것도 그렇고 힘들고 무섭더라도 다시 건너야 하는 줄타기처럼. 외줄을 위태롭게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중심을 잃지 않도록 희망이 담긴 줄을 타고 싶다. ■ 어름사니 박지나씨는 누구 어름사니 박지나씨는 부모 슬하에 2남1녀의 둘째로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가 젊은시절 음악을 했고 언니와 동생도 각각 플루트, 색소폰을 전공하다 현재 동생은 연기 공부를 하고 있다. 유일하게 어머니가 음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3남매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게 틀림없다. 현재 박지나씨는 중앙대학교 음악극과에 재학 중이다. ● 2003년 뮤지컬 ‘바우덕이’출연 ● 2004년 그리스 아테네올림픽 한국 공연단 ● 2006년 홍콩 춘절축제 초청 공연 ●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공연 ● 2009년 MBC 마당놀이 ‘토정비결’출연 ● 2010년 新남사당 테크판타지쇼 ‘바우덕이’ ● 2015년 국악으로 행복한 수요일 출연 그 외 600회 이상의 국내외 공연 및 방송출연 이명선 전문기자 mslee@seoul.co.kr
  • [2015 불륜 리포트] 기혼자 24%·월급 700만원 이상 52% ‘외도’… 불륜의 통계

    [2015 불륜 리포트] 기혼자 24%·월급 700만원 이상 52% ‘외도’… 불륜의 통계

    ‘636만명.’ 국내 기혼 남녀 수(2628만명·사별 뒤 재혼하지 않은 인구 포함)에 서울신문·마크로밀엠브레인의 여론조사 결과 드러난 간통 경험률(24.2%)을 적용해 추산한 국내 불륜 인구 규모다. 서울에 사는 전체 기혼 인구(499만명)보다 많고 부산시 전체 인구(351만명)와 비교하면 1.8배나 많다. 간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흔한 문제인지를 보여 주는 수치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가, 왜 불륜에 빠질까. 여론조사 결과 속에 담긴 국내 불륜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31% 50대 외도, 20대 2배 달해 이번 설문조사에 응한 기혼자 2000명 가운데 ‘간통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모두 484명이다. 이들의 연령과 직업, 소득, 배우자와의 관계 등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특정 사회·경제적 배경이 교집합을 이룰 때 간통할 확률이 높았다. 우선 연령별로는 ‘불혹’을 넘기면서 간통을 경험하는 비율이 급증했다. 결혼 뒤 배우자가 아닌 이성(성매매 포함)과 성관계(간통)를 가진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만 19~29세인 젊은 응답자 중 15.3%만이 ‘있다’고 답했다. 30대는 18.9%가 같은 답을 해 20대와 30대 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40대 중에는 23.4%가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해 증가 폭이 커졌고 50대는 30.9%로 직전 세대에 비해 7.5% 포인트 늘었다. 40~50대가 외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블랙홀인 셈이다. 특히 남성 불륜 경험률만 보면 ▲19~29세 25.0% ▲30대 29.2% ▲40대 36.6% ▲50대 51.6%로 40~50대 때 외도에 빠지는 경향이 더욱 눈에 띄었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중년기는 삶의 정점기로 사회적 지위 등을 갖추지만 신체는 눈에 띄게 노화하는 시기”라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지 못하면 삶의 허함을 느끼게 되는데,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려 삶의 활력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53% 고위 관료·기업 간부 외도 소득에 따라서도 간통 경험률은 의미 있는 차이를 보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수록 간통 경험이 증가했다. 개인소득이 전혀 없는 설문 응답자 가운데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10.2%였지만 ▲50만원 미만 11.9% ▲월 50만~100만원 미만 13.0% ▲100만~299만원 22.9% ▲300만~499만원 31.2% ▲500만~699만원 42.3% 등 높은 소득군(群)일수록 간통을 흔히 경험했다. 특히 개인 월 소득 700만원 이상 계층은 51.6%가 간통 경험이 있었다. 연봉 8400만원(700만원×12개월) 이상 고소득자는 2명 중 1명꼴로 간통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바람도 돈이 있어야 피운다’는 사회적 통념이 통계를 통해서도 입증된 셈이다. 응답자의 직업과 직급도 간통 경험률의 차이를 가르는 핵심 변수였다. 5급 이상 고위 공무원과 부장급 이상 기업 간부, 학교장 등 경영·관리직 종사자는 53.4%가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해 전 직업군 가운데 가장 높은 경험률을 보였다. 이어 ▲자영업 35.9% ▲기능·숙련공 30.3% ▲판매·서비스직(상점 점원 등) 27.9% ▲전문직(교수·의사·변호사 등) 26.0% ▲사무·기술직(기업 사무직· 초중고 교사 등) 25.4% 순이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간통을 일종의 권력 문제로 접근했다. 그는 “간통은 ‘권력 행사’로 볼 수 있다”면서 “소득수준이 높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 중 간통 경험자가 많은 건 자신이 일정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심리적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혼 남녀들은 외도 상대를 주로 어디서 만날까. 간통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자신의 간통 대상으로 ▲채팅 사이트·나이트클럽 등 새로운 곳에서 만난 사람 37.2% ▲유흥업소 관계자 29.5% ▲직장 동료 25.6% ▲동창 등 친구 17.1% ▲동호회 사람 11.6% ▲업무 관련 직원 1.2% 등을 꼽았다. 특히 남성 응답자는 유흥업소 관계자(38.6%)나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37.6%)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례가 빈번한 반면 여성은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36.1%) 다음으로 직장 동료(27.9%), 동창 등 친구(19.7%), 동호회 사람(14.8%) 등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성과 ‘잘못된 만남’을 갖는 경향이 짙었다. 외도 사실이 배우자에게 발각될 확률은 10.7%였다. 외도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대부분 ▲배우자가 다른 이성을 만난 사실을 알아채거나 의심한 적이 없다(55.4%)거나 ▲배우자가 결정적 증거를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의심한 적이 있다(33.9%)고 답했다. 한편 외도하고 싶은 욕구만 있는 ‘잠재적 외도군’들은 ‘배우자에 대한 미안함’(54.7%)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이어 ‘자녀의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에 대한 걱정’(21.9%), ‘도덕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15.4%), ‘발각됐을 때의 경제적 손실’(3.1%) 등의 순으로 이유를 들었다. 특히 여성의 25.9%는 ‘자녀의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봐 외도하지 못한다’고 한 반면 남성은 16.6%만 같은 이유로 외도하지 못한다고 답해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간통의 유혹을 가로막는 힘이 더 강했다. 간통죄 폐지 이후 6개월이 흘렀지만 국민 다수는 여전히 간통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특히 ‘간통 피해자’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강한 여성들은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장치로 간통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간통죄 폐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남성 응답자는 38.8%가 ‘간통죄는 징역형에 처하는 방식으로 있어야 한다’고 답했고 27.4%는 ‘폐지된 것이 옳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여성 응답자는 57.8%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고 ‘간통죄는 폐지된 것이 옳다’고 답한 비율은 12.0%에 그쳤다. 또 세대별로는 20·30대의 53.7%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답한 반면 40·50대는 같은 응답을 한 비율이 46.7%로 7.0% 포인트 낮았다. 비교적 성(性) 문제에 개방적일 것 같은 젊은 세대가 오히려 부부간 성적 성실의무에는 엄격한 셈이다.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20~30대 기혼자의 경우 결혼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로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다 보니 상대에 대해 규범을 더 엄격하게 적용할 수 있다”며 “반대로 결혼 생활을 오래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 온 기성세대일수록 부부 관계 면에서도 보다 융통성 있게 사고하는 듯하다”고 해석했다. 86% 바람피운 쪽 이혼 청구 반대 바람피운 배우자도 이혼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파탄주의’(현실적으로 혼인 관계가 깨졌다면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법 개념) 채택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5.5%가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하는 것은 권리 남용으로 도입하면 안 된다’(50.0%)거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상조’(35.5%)라는 등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우리 현행법은 유책주의(혼인 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배우자는 이혼 청구를 하지 못한다는 법 개념)를 채택하고 있는데 최근 대법원에서 파탄주의 도입에 대한 공개변론을 여는 등 제도 변화 논의가 활발하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했을 때에 대한 인식(성매매 제외)을 묻는 질문에도 성별, 연령에 따른 인식 차가 확연했다. 남성 응답자 중에는 16.4%가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반면 여성 응답자 가운데 같은 답을 한 비율은 10.5%로 낮았다. 만 19~29세와 30대 기혼 응답자 가운데 ‘경우에 따라 용납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8.2%, 7.7%였지만 40대와 50대는 각각 13.6%, 18.3%가 같은 응답을 해 중년층이 배우자 외도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배우자의 간통 사실을 알아챘을 때 실제 이혼을 결심하는 비율도 설문 결과로 가늠할 수 있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호감을 갖고 몇 차례 만나다가 성관계를 가졌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묻는 질문에 ‘소송하지 않고 헤어진다’(42.6%), ‘소송한 뒤 헤어진다’(28.6%) 등 10명 중 7명꼴로 이혼 의사를 밝혔다. 반면 ‘망신 혹은 위협만 가하고 마음을 돌려 같이 살 것’(16.1%)이라거나 ‘모르는 척 넘어갈 것’(9.5%)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배우자의 외도를 인지했을 때 남녀 간 대응 태도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소송한 뒤 헤어질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여성(31.7%)이 남성(25.0%)보다 높아 ‘법적 응징’을 하려는 경향성이 더 짙었다. 88% 아내 바람 절대 용서 못해 동병상련일까. 간통 경험자들은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하는 데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배우자를 기만한 경험에서 나오는 죄책감 역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간통 경험자 가운데 28.7%는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답해 전체 응답자 평균(13.3%)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반대로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한 비율은 71.3%였다. 간통죄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는 32.4%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응답한 반면 33.3%는 ‘간통죄는 폐지된 것이 옳다’고 답해 전체 응답자 평균보다 간통죄 폐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간통 유경험자는 간통죄 폐지에 대한 악영향에 비교적 낙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간통죄의 폐지로 간통이 빈번해질 것인지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39.5%였고 ‘그렇다’는 응답은 60.6%였다. 전체 설문 응답자 중 71.5%가 ‘간통죄 폐지로 간통이 빈번해질 것’이라고 우려한 것보다는 낮은 수치다. 이번 설문에서는 부부간 성적 신의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이중적 태도도 묻어났다. 관계가 원만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업무 관계로 알게 된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다면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상황 가정형 질문’에 남성 응답자 중 76.9%는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고 23.1%는 ‘경우에 따라 용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아내가 업무 관계로 알게 된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다면 남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남성 응답자의 88.1%가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고 11.9%만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남자의 불륜은 상황에 용납할 수 있지만 여성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자기 중심적인 남성의 심리가 작용한 셈이다. 반면 여성 응답자들은 남편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와 아내가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질문에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91.4%, 91.8%로 일관되게 답했다.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 [2015 불륜 리포트] 기혼자 24%·월급 700만원 이상 52% ‘외도’… 불륜의 통계

    [2015 불륜 리포트] 기혼자 24%·월급 700만원 이상 52% ‘외도’… 불륜의 통계

    ‘636만명.’ 국내 기혼 남녀 수(2628만명·사별 뒤 재혼하지 않은 인구 포함)에 서울신문·마크로밀엠브레인의 여론조사 결과 드러난 간통 경험률(24.2%)을 적용해 추산한 국내 불륜 인구 규모다. 서울에 사는 전체 기혼 인구(499만명)보다 많고 부산시 전체 인구(351만명)와 비교하면 1.8배나 많다. 간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흔한 문제인지를 보여 주는 수치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가, 왜 불륜에 빠질까. 여론조사 결과 속에 담긴 국내 불륜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31% 50대 외도, 20대 2배 달해 이번 설문조사에 응한 기혼자 2000명 가운데 ‘간통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모두 484명이다. 이들의 연령과 직업, 소득, 배우자와의 관계 등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특정 사회·경제적 배경이 교집합을 이룰 때 간통할 확률이 높았다. 우선 연령별로는 ‘불혹’을 넘기면서 간통을 경험하는 비율이 급증했다. 결혼 뒤 배우자가 아닌 이성(성매매 포함)과 성관계(간통)를 가진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만 19~29세인 젊은 응답자 중 15.3%만이 ‘있다’고 답했다. 30대는 18.9%가 같은 답을 해 20대와 30대 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40대 중에는 23.4%가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해 증가 폭이 커졌고 50대는 30.9%로 직전 세대에 비해 7.5% 포인트 늘었다. 40~50대가 외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블랙홀인 셈이다. 특히 남성 불륜 경험률만 보면 ▲19~29세 25.0% ▲30대 29.2% ▲40대 36.6% ▲50대 51.6%로 40~50대 때 외도에 빠지는 경향이 더욱 눈에 띄었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중년기는 삶의 정점기로 사회적 지위 등을 갖추지만 신체는 눈에 띄게 노화하는 시기”라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지 못하면 삶의 허함을 느끼게 되는데,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려 삶의 활력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그래픽을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53% 고위 관료·기업 간부 외도 소득에 따라서도 간통 경험률은 의미 있는 차이를 보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수록 간통 경험이 증가했다. 개인소득이 전혀 없는 설문 응답자 가운데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10.2%였지만 ▲50만원 미만 11.9% ▲월 50만~100만원 미만 13.0% ▲100만~299만원 22.9% ▲300만~499만원 31.2% ▲500만~699만원 42.3% 등 높은 소득군(群)일수록 간통을 흔히 경험했다. 특히 개인 월 소득 700만원 이상 계층은 51.6%가 간통 경험이 있었다. 연봉 8400만원(700만원×12개월) 이상 고소득자는 2명 중 1명꼴로 간통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바람도 돈이 있어야 피운다’는 사회적 통념이 통계를 통해서도 입증된 셈이다. 응답자의 직업과 직급도 간통 경험률의 차이를 가르는 핵심 변수였다. 5급 이상 공무원과 부장급 이상 기업 간부, 학교장 등 경영·관리직 종사자는 53.4%가 ‘간통 경험이 있다’고 답해 전 직업군 가운데 가장 높은 경험률을 보였다. 이어 ▲자영업 35.9% ▲기능·숙련공 30.3% ▲판매·서비스직(상점 점원 등) 27.9% ▲전문직(교수·의사·변호사 등) 26.0% ▲사무·기술직(기업 사무직· 초중고 교사 등) 25.4% 순이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간통을 일종의 권력 문제로 접근했다. 그는 “간통은 ‘권력 행사’로 볼 수 있다”면서 “소득수준이 높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 중 간통 경험자가 많은 건 자신이 일정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심리적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혼 남녀들은 외도 상대를 주로 어디서 만날까. 간통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자신의 간통 대상으로 ▲채팅 사이트·나이트클럽 등 새로운 곳에서 만난 사람 37.2% ▲유흥업소 관계자 29.5% ▲직장 동료 25.6% ▲동창 등 친구 17.1% ▲동호회 사람 11.6% ▲업무 관련 직원 1.2% 등을 꼽았다. 특히 남성 응답자는 유흥업소 관계자(38.6%)나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37.6%)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례가 빈번한 반면 여성은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36.1%) 다음으로 직장 동료(27.9%), 동창 등 친구(19.7%), 동호회 사람(14.8%) 등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이성과 ‘잘못된 만남’을 갖는 경향이 짙었다. 외도 사실이 배우자에게 발각될 확률은 10.7%였다. 외도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대부분 ▲배우자가 다른 이성을 만난 사실을 알아채거나 의심한 적이 없다(55.4%)거나 ▲배우자가 결정적 증거를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의심한 적이 있다(33.9%)고 답했다. 한편 외도하고 싶은 욕구만 있는 ‘잠재적 외도군’들은 ‘배우자에 대한 미안함’(54.7%)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이어 ‘자녀의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에 대한 걱정’(21.9%), ‘도덕적 비난에 대한 두려움’(15.4%), ‘발각됐을 때의 경제적 손실’(3.1%) 등의 순으로 이유를 들었다. 특히 여성의 25.9%는 ‘자녀의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까 봐 외도하지 못한다’고 한 반면 남성은 16.6%만 같은 이유로 외도하지 못한다고 답해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간통의 유혹을 가로막는 힘이 더 강했다. 58% 간통죄 부활 주장하는 여성 간통죄 폐지 이후 6개월이 흘렀지만 국민 다수는 여전히 간통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특히 ‘간통 피해자’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강한 여성들은 바람난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장치로 간통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간통죄 폐지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남성 응답자는 38.8%가 ‘간통죄는 징역형에 처하는 방식으로 있어야 한다’고 답했고 27.4%는 ‘폐지된 것이 옳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여성 응답자는 57.8%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답했고 ‘간통죄는 폐지된 것이 옳다’고 답한 비율은 12.0%에 그쳤다. 또 세대별로는 20·30대의 53.7%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답한 반면 40·50대는 같은 응답을 한 비율이 46.7%로 7.0% 포인트 낮았다. 비교적 성(性) 문제에 개방적일 것 같은 젊은 세대가 오히려 부부간 성적 성실의무에는 엄격한 셈이다.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20~30대 기혼자의 경우 결혼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로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다 보니 상대에 대해 규범을 더 엄격하게 적용할 수 있다”며 “반대로 결혼 생활을 오래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 온 기성세대일수록 부부 관계 면에서도 보다 융통성 있게 사고하는 듯하다”고 해석했다. 86% 바람피운 쪽 이혼 청구 반대 바람피운 배우자도 이혼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파탄주의’(현실적으로 혼인 관계가 깨졌다면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도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는 법 개념) 채택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5.5%가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하는 것은 권리 남용으로 도입하면 안 된다’(50.0%)거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상조’(35.5%)라는 등 부정적으로 응답했다. 우리 현행법은 유책주의(혼인 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배우자는 이혼 청구를 하지 못한다는 법 개념)를 채택하고 있는데 최근 대법원에서 파탄주의 도입에 대한 공개변론을 여는 등 제도 변화 논의가 활발하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했을 때에 대한 인식(성매매 제외)을 묻는 질문에도 성별, 연령에 따른 인식 차가 확연했다. 남성 응답자 중에는 16.4%가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응답한 반면 여성 응답자 가운데 같은 답을 한 비율은 10.5%로 낮았다. 만 19~29세와 30대 기혼 응답자 가운데 ‘경우에 따라 용납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8.2%, 7.7%였지만 40대와 50대는 각각 13.6%, 18.3%가 같은 응답을 해 중년층이 배우자 외도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배우자의 간통 사실을 알아챘을 때 실제 이혼을 결심하는 비율도 설문 결과로 가늠할 수 있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호감을 갖고 몇 차례 만나다가 성관계를 가졌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묻는 질문에 ‘소송하지 않고 헤어진다’(42.6%), ‘소송한 뒤 헤어진다’(28.6%) 등 10명 중 7명꼴로 이혼 의사를 밝혔다. 반면 ‘망신 혹은 위협만 가하고 마음을 돌려 같이 살 것’(16.1%)이라거나 ‘모르는 척 넘어갈 것’(9.5%)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배우자의 외도를 인지했을 때 남녀 간 대응 태도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소송한 뒤 헤어질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여성(31.7%)이 남성(25.0%)보다 높아 ‘법적 응징’을 하려는 경향성이 더 짙었다. 88% 아내 바람 절대 용서 못해 동병상련일까. 간통 경험자들은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하는 데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배우자를 기만한 경험에서 나오는 죄책감 역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간통 경험자 가운데 28.7%는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답해 전체 응답자 평균(13.3%)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반대로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한 비율은 71.3%였다. 간통죄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는 32.4%가 ‘간통죄는 있어야 한다’고 응답한 반면 33.3%는 ‘간통죄는 폐지된 것이 옳다’고 답해 전체 응답자 평균보다 간통죄 폐지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간통 유경험자는 간통죄 폐지에 대한 악영향에 비교적 낙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간통죄의 폐지로 간통이 빈번해질 것인지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39.5%였고 ‘그렇다’는 응답은 60.6%였다. 전체 설문 응답자 중 71.5%가 ‘간통죄 폐지로 간통이 빈번해질 것’이라고 우려한 것보다는 낮은 수치다. 이번 설문에서는 부부간 성적 신의를 바라보는 남성들의 이중적 태도도 묻어났다. 관계가 원만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업무 관계로 알게 된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다면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상황 가정형 질문’에 남성 응답자 중 76.9%는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고 23.1%는 ‘경우에 따라 용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아내가 업무 관계로 알게 된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다면 남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남성 응답자의 88.1%가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고 11.9%만 ‘경우에 따라서는 용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남자의 불륜은 상황에 용납할 수 있지만 여성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자기 중심적인 남성의 심리가 작용한 셈이다. 반면 여성 응답자들은 남편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와 아내가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질문에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91.4%, 91.8%로 일관되게 답했다. 특별기획팀 tamsa@seoul.co.kr 특별기획팀 유영규 팀장, 유대근·윤수경 기자
  • [단독] [커버스토리]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 유럽행은 또 다른 차별의 시작이었다

    [단독] [커버스토리]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 유럽행은 또 다른 차별의 시작이었다

    그리스 동쪽 에게해 섬에 도착한 난민들은 이내 눈시울을 적신다. 위태위태한 고무보트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다가 무사히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아이들과 여성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인 그리스까지 밀입국에 성공한 뒤 난민의 이동은 자유롭다. 그러나 고무보트 상륙은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조국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 수헤일(23)은 터키를 거쳐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에 닿았지만 그리스 본토를 밟기 위해 마냥 기다려야 했다. 이곳에는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라크 등지에서 몰려온 난민이 2만명 가까이 머물고 있다. 재정위기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맨 그리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곳 난민은 신분 등록을 마칠 때마다 2500명씩 카페리선에 실려 그리스 본토로 이송된다. 이들은 다시 등 떠밀려 하루 2000명 이상이 북부 마케도니아 국경으로 향한다. 정부가 나서 난민을 발칸 국가들로 떠넘기는 셈이다. ●국경 넘으려 브로커에 돈 주고 가짜 여권 만들고 수헤일은 레스보스 섬에서 열흘 가까이 대기하다 페리에 몸을 실었다. 아테네 외곽의 피레우스항까지의 뱃삯은 46유로(약 6만 1000원). 아테네까지 도보로 이동한 뒤 테살로니카에서 45유로를 내고 열차를 탔다. 국경 도시인 에브조노이까지는 10유로(약 1만 3000원)를 내고 택시를 이용했다. 이곳에서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은 그는 난민 수천 명과 맞닥뜨렸다. 이때부터 발칸을 지나 동유럽으로 북진하는 길이었다. 게브젤리자역에선 가까스로 기차에 올랐다. 스코페까지 10유로, 다시 기차에서 내려 로자네까지 5유로를 내고 버스를 이용했다. 여윳돈이 있었지만 세르비아 국경을 넘기 위해선 다시 걸어야 했다. 하루 수천 명이 몰려 거대한 난민촌으로 돌변한 수도 베오그라드 중앙역을 피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제대로 된 체류 허가증을 받지 못해 헝가리행 열차 탑승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헤일은 일단 베오그라드까지 20유로를 내고 기차로 이동했다. 이후 버스를 타고 국경도시 칸지자까지(20유로) 간 뒤 다시 걸어서 헝가리 국경도시 세게드에 이르렀다. 수헤일은 헝가리가 국경에 철조망을 두르고 난민 유입을 본격 제어하기 직전 100유로 넘는 돈을 주고 손쉽게 부다페스트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브로커를 통해 550유로가량을 지불하고 승용차에 탑승해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독일 땅을 밟았다. 그가 최종 목적지인 독일까지 오는 동안 들인 교통비만 비행기 삯을 빼고도 2400달러(약 284만원)를 웃돈다. 20일 남짓한 여정 동안 숙식을 위해 들인 비용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땅 시리아에서 6개 나라를 거쳐 도착했다. 이젠 수중에 남은 돈도, 고향 어머니에게 무사하다는 것을 알릴 방법도 없다. 수헤일보다 가난한 난민들은 승용차 대신 구글앱과 왓스앱에 의지해 비상 수송용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경로를 찾는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루트도 개척 난민을 돕는 시리아의 애드난 변호사는 “다마스쿠스에서 난민을 대상으로 독일까지 여정을 제공하는 브로커 사업이 활개치고 있다”면서 “평균 500유로(약 67만원)면 가짜 여권을 만들 수 있고 2400달러면 독일까지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부익부 빈인빅 현상이 두드러졌지만 최근 17~25세의 젊은 난민이 주류를 이루면서 브로커 의존도가 크게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난민의 유럽행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지중해 루트’와 ‘터키·그리스 루트’, ‘북극 루트’ 등이다. 과거 주요 이동로인 지중해 루트는 주로 수단, 리비아를 거쳐 지중해를 건넌 다음 이탈리아의 람페두사나 시칠리아로 유입되는 경로다. 모로코에서 서지중해를 건너 남부 스페인으로 유입되는 난민도 해마다 6000명 선에 이른다. 이 같은 경로의 난민은 2012년 2만 2000여명, 2013년 6만여명 수준이었다가 지난해 12만 4000여명, 올해는 벌써 38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중해 루트를 이용하기 위해 지금도 리비아에서 30만명 가까운 난민이 대기 중이라고 밝혔다. 지중해 루트에서 전복 사고가 잇따르자 난민들은 그리스·터키 루트로 불리는 육로로 몰렸다. 이 루트에서도 터키에서 그리스까지 가는 데 고무보트를 타야 하기에 동지중해 루트로 불리기도 하는 길이다. EU에 가입하지 않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려면 여권 등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거쳐야 하기에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밀입국용 고무보트에 오른다. UNHCR에 따르면 올 1월부터 8월까지 난민 15만 8000여명이 터키·그리스 루트를 이용했다. 최근 난민들이 새로 개척한 ‘더 확실하고 안전한’ 유럽행 루트는 이른바 ‘북극 루트’다. 시리아에서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간 뒤 이곳에서 러시아로 들어간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르만스크를 거쳐 노르웨이 오슬로에 닿는다. 이들은 항공편과 기차, 택시, 자전거 등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소개했다 ●알자지라 “우리가 원하는 건 전쟁 멈추는 것” 루트에 따른 차별도 존재한다. 이는 인종·종교 차별과도 맞물려 있다. 최근 프랑스 북부도시 칼레의 나타샤 부샤르 시장은 선별적으로 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거칠게 비난했다. 중동 일대의 난민촌에서 5년간 2만명을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받아들이겠다는 영국 정부의 복안에 반발한 것이다. 칼레에 머무는 난민은 리비아에서 목숨을 걸고 도착한 흑인이 대부분이다. 수단,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니제르 등 아프리카 출신이다. 이들은 다시 영·불 간 도버해협을 건너려다 매주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은 무슬림을 배제하고 기독교계 난민을 먼저 수용하겠다는 속내를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국가들은 난민 속에 IS가 섞여 들어오는 것도 우려한다. 난민들이 가장 원하는 루트는 어디일까. ‘어떤 루트도 가지 않고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게 정답이다. 아랍권 언론 알자지라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럽행이 아니라 전쟁이 멈추는 것”이라고 호소하는 시리아 난민 소년 키난 마살메흐(13)의 인터뷰를 전했다. 마살메흐가 “우리는 유럽에 가고 싶지 않다. 고향의 평화를 바란다”고 간청하는 영상은 난민 유입을 막으려는 국가와 난민 수용에 나선 국가 모두에 울림을 줬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6·25 참전용사 미스터 척 엘리/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6·25 참전용사 미스터 척 엘리/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엘리를 우연히 만난 곳은 목욕탕이었다. 85세의 엘리는 30대의 젊은이와 함께 사우나를 하고 있었는데 6월 25일 이후인지라 한국이 매년 초대하는 참전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말을 건넸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온 6·25 참전용사냐고. “그렇다”는 대답에 옆에 있는 젊은이는 혹여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손자인데 64년 만에 한국 땅에 오게 됐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엘리는 주일 미군으로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7월 초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상륙정(LST)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부산, 서울, 평양의 전쟁터를 오가며 이듬해인 1951년의 크리스마스는 고국에서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은퇴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국이 오늘날처럼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기적이라는 말도 모자랄 정도라고 감격에 젖어 했다. 발가 벗은 몸으로 목욕하다 만난 참전용사에게 나는 엘리와 같은 분들 덕택에 한국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한국이 됐다고 감사 표시를 했다(Very personally, I woluld like to express my heartfelt gratitude for your participation during korean war, so that’s why Korean people enjoy freedom and economic prosperity). 나는 명함을 주며 “미국 어디에서 왔느냐? 한국 정부에서는 어떤 비행기 표를 제공하느냐? 숙박은 어떻게 되느냐?” 등의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본인은 미국 중부에 있는 일리노이주에 사는데 시카고에서 13시간 걸려 이코노미 좌석으로 왔다고 했다. 순간 ‘85세 노인이 그것도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 준 노병에게 13시간 비행에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이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의 비행기 값은 절반을 한국 정부가 지원한다고 했다. 손녀딸까지 왔다면 그 비행기표는 본인 부담이라고. 미안한 마음이 내 얼굴을 붉게 만들고 “만약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미리 이 메일로 알려 달라”고 말하고는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 시카고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엘리와 헤어지며 총지배인에게 경비를 내가 지불할 테니 엘리의 방에 과일 바구니 하나 전달해 주면 좋겠다며 호텔을 나섰다.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을 제공받아 힘들었다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노병 엘리가 며칠 후 메일을 보내왔다. “경민,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완전히 놀랐어. 웨이터가 과일 바구니를 갖고 문을 두드렸을 때 방을 잘못 찾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의 명함을 보고 손자와 환호했다”라고. 과일 바구니 하나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60대인 필자도 13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면 녹초가 되는데 84세인, 그것도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도 불사하지 않았던 참전용사들에게 한국은 인원수를 조금 줄여 초청하더라도 좌석이 넓은 비즈니스 클래스 비행기표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덩치가 커 싱글 침대도 비좁다. 남은 생이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을 초청할 때는 그들에게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보호자로 같이 온 젊은 손자에게도 한국이 자랑하는 휴대전화나 노트북 한 대씩 들려 보내 “할아버지 덕분에 한국에 가서 호강했다”는 자랑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좋겠다. 그것이 은혜를 갚는 일이며 수백만 명이 넘는 미국의 재향 군인들이 모두 한국 친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참전용사의 직계 후손들이 2, 3, 4세대를 넘어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한국에 초청되는 프로그램을 이어 가야 한다.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있었기에 한국에 가서 명예스러웠다고.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본국에 돌아가서 “한국전쟁에 참전해 보람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광복 70주년을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초청 프로그램을 손질해야 하겠다. 그들은 귀중한 한국의 안보자산이고 외교자산이다. 그 좋은 자산이 한국을 지지하는 힘이 되도록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하겠다.
  • [독박(讀博) 육아일기](22) 외식에 집착하는 외로운 아기엄마의 항변

    [독박(讀博) 육아일기](22) 외식에 집착하는 외로운 아기엄마의 항변

    지난해 이맘 때쯤이다. 스트레스는 쌓일대로 쌓였고 외로움과 우울함이 정점을 찍었던 시기다. 잠들기 전 남편에게 “내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얘기를 마침내 내뱉어 버렸다는 것과 그런 생각을 잠시라도 품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조금 후회가 되고 부끄럽지만 그 땐 그랬다. 막상 얘기를 하고 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때부터 혼자만의 해방구를 찾아 나섰다.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문화센터와 같은 놀이 프로그램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아이의 첫 사교육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외출할 핑곗거리를 자꾸 만들어야 했다. ”도대체 왜 아이를 데리고 엄마들이 밖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가?” “애를 데리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물론 나만의 경험일 뿐이라 전혀 객관적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아기를 데리고 누구보다 식당과 카페를 자주 드나드는 아줌마로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이와의 외출과 외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약간 충격을 받아서다. 급기야 ‘맘충(Mom+蟲)’, ‘커피충’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졌다. ‘노 키즈존(No kids zone)’은 이미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온 뒤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였다. 아기를 안고 나돌아니고 밥을 먹는 것도 늘 눈치가 보였다. ■ 도대체 왜 아이와 밖에 나와 밥을 먹을까? - 외로운 아기 엄마의 항변 그럼에도 나는 나가고 싶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나가고 싶다. 아이가 집에서도 재밌게 놀 수 있도록 열심히 중고 장난감을 사들였지만, 사실 아이는 그렇게 진득하게 놀지 않는다. 뭐든지 엄마가 같이 해줘야 한다.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힘들다.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똑같은 책 열 번, 스무 번 읽어주다 보면 지친다. 아기만 바라보며 오롯이 집중을 하는 게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하고 있다 보면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와 빨래가 걱정되고, 바닥은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해 보이는지 아이 발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바닥이라도 한 번 스윽 문지르려고 움직이면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설거지를 하면 다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기만 한다. 6~7개월쯤 아기가 드디어 엄마의 얼굴을 구분하고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반갑고 기뻤지만, 나는 꼼짝도 못하게 됐다. 마침 새 집으로 이사를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환경이 더욱 낯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울거나 안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집에서도 아기를 안고 화장실에 가야했다. 언제든 한 몸이어야 아기가 울지 않았다. 종일 울면서 매달리고 내 옷을 붙잡고 늘어질 때면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나를 숨도 못 쉬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에 나가면 얌전하고 잘 웃는 아기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는 밖에 나가면 얌전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순하다”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싫던지. 하루종일 몇 날 며칠을 엄마 얼굴만 보다가 여러 사람들을 보는 게 아기도 즐거운 것 같이 여겨졌다. 아기띠로 안고 돌아다니면 자고 싶을 때 알아서 조용히 잠들고, 사람들과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었다. 이유식도 더 잘 먹었다. 기저귀에 물티슈에 나중에는 이유식까지 아기를 데리고 나가려면 한 짐이었고, 몇 시간 안고 다니느라 어깨와 허리도 아팠지만 어차피 집에 있어도 그렇게 하루종일 안고 있어야 했으니 나가는 편이 좋았다. 나에게도 나가야만 하는 이유들이 있었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엄청나게 큰 일이었다. ‘외식’에 집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모유수유를 했지만 아기와 씨름하느라 밥을 제대로 챙겨먹을 수 없었다. 누군가 챙겨준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처지도 아니었고 내가 챙기려니 반찬을 만들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라면이나 즉석식품으로 때우든지 배달음식을 시켜 먹기 일쑤였다. 1만원 이상을 시켜야 배달을 해주기 때문에 2인분씩 사서 반 이상 남겨뒀다가 다음 끼니 때 먹든지 아니면 버렸다. 그나마 남편이 퇴근한 뒤에 저녁을 함께 먹어야 했으니 그 때 겨우 요리를 했다. ●먹는 것 외에는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었다 먹고 자고 심지어 싸는 것까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기의 얼굴과 웃음이 큰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과는 별개였다. 아기와 함께해서 즐거운 만큼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걸 풀 곳이 없었다. 아기를 잠깐이라도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한 시간 운동을 하거나 조용히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어 시간 잠이라도 푹 자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아무 데도 편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먹는 걸로라도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아니,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됐다. 커피는 워낙 중독 수준으로 좋아했던 데다 매일 잠을 제대로 못자 피로가 쌓여있다 보니 더 마시게 됐다.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에 넘어가면 마치 링거 주사를 맞는 듯이, 몸에 아주 약간의 에너지라도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밖에 나가 ‘누구라도’ 만나고 싶었다 정말로 나가고 싶었던, 지금도 나가고 싶은 이유는 단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다. 친정 가족들이 사는 곳은 시차가 13시간이나 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몇 시간과 잠들기 전 몇 시간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 친정엄마가 “이제 잔다”고 문자를 보내는 순간부터 “굿모닝”이라는 문자가 다시 올 때까지 아무하고도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평일 낮에 아기 엄마를 만나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구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에게 단체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저처럼 집에서 방바닥 긁는 분 계신가요? 저 좀 만나주세요” 딴에는 엄청난 용기였다. 5명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4명이 친정에 가 있다고 답이 왔다. 다른 곳도 아닌 하필 친정이라니.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고 난 뒤 거의 매일 밖으로 나갔다. 그냥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매우 좋았다. 아기를 안고 다니니 몇몇 사람들은 궁금해서 한 번씩 더 쳐다보기도 하고 아기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관심도 반가웠다. 아기가 몇 개월이나 됐느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드디어 남편이 아닌 사람과 제대로 문장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소비를 하고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됐다.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는 것에 고단했던 하루를 보상받는 것 같기도 했다. ■ 밖에서 밥 먹는 엄마와 아기들을 사람들은 왜 싫어할까? -엄마들이 지켜야할 것들 아기를 데리고 외식을 하면 요구할 것이 많아진다. 아기 의자부터 아기 식기, 그리고 휴지와 물티슈 등. 뭔가를 계속 달라고 해야 한다. 가게 주인이라면 1인분 밥 값도 안 내는 아기를 위해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기 짜증이 날 것도 같다. 그렇다고 아기가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먹는 것도 아니다.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뭘 떨어뜨리거나 정신을 쏙 빼놓는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바닥에는 밥풀이 흐트러져 있다. 물론 요즘에는 알아서 아기 의자를 챙겨주고 아기가 먹기 편하게 빨대컵에 물을 담아주는 식당도 아주 많다. 하지만 ‘노 키즈존’이라는 단어를 접한 뒤부터는 그런 배려에도 왠지 눈치가 보였다. 내 아이를 데리고 나가 나의 스트레스를 풀려면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도 스트레스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도 했다. ‘개념 있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까지 자리잡았다. ●‘개념 있는 엄마’ 강박… “내 아이 욕먹이기 싫어서” 식당에 가면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게 미안해 보통 2인분을 주문한다. 과하다 싶으면 아직 아기이지만 어린이 메뉴라도 주문한다. 아기 수저와 물통은 따로 준비해 간 것을 쓰고 물티슈는 늘 넉넉하게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도 밥을 다 먹고나면 휴지가 수북하게 쌓이고 지저분하다. 요즘에는 아이가 직접 숟가락질을 하겠다고 우기면서 음식물을 바닥에 더 많이 흘려서, 식사를 하고 나면 바닥을 물티슈로 닦는다. 계산을 할 때면 무조건 “아기 때문에 정신 없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고 나온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 번은 유모차를 세울 곳이 없어서 식당 안에 끌고 갔다가 곧바로 쫓겨난 적도 있다. 나름 신경써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쪽에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종업원 입장에서는 성가셨을 것도 같다. ●쓰레기 잔뜩 버리고 식당에서 기저귀 가는 엄마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엄마들과 사귀고 어울리게 됐다. 그러면서 많은 상황들을 보거나 들으며 접한다. 같은 아기 엄마 처지인데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이런 이유에선지 아이가 있는 엄마들조차 노 키즈존에 적극 찬성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엄마들은 나에게 대놓고 “아기를 데리고 왜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니느냐”, “왜 아기와 외식을 하느냐”고 질책을 한 일도 있다. 아기와 식당에 가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권리라거나 특혜를 바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밥을 먹고 싶은데 아기를 데려가는 것 뿐이다. 요즘은 아기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조금 달라졌지만. 아무튼 아기를 위한 배려를 넘어서 무리한 요구까지 너무 당당하게 하는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음식 1인분을 시켜놓고 아기도 같이 먹게 양을 더 많이 달라고 하거나 어린 아기의 이유식이 아닌 어느 정도 큰 아이가 먹을 외부 음식을 가져와 데워달라고 하는 것은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배려를 해주면 좋은 것이지, 무리한 요구가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로 가져간 간식거리의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오거나 음식 부스러기와 휴지 등을 온통 바닥에 다 떨어뜨려 놓고 나오는 모습은 같은 아기 엄마가 봐도 불편하다. 심지어는 아기가 구토를 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아르바이트생에게 닦으라고 하거나 식당에서 기저귀를 갈고, 또 그 기저귀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나오는 게 허다하다고 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것은 아기 엄마라는 점을 떠나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고 싶다 아이들도 바깥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길 권리가 있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즐거움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권리를 빼앗기도록 하는 것, ‘노 키즈존’을 비롯해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을 결국은 엄마들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밖에서 욕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진짜 이유는 나 때문에 내 아이가 욕먹는 게 싫어서다. 내 자식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지만, 남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내 자식이 어디서든 귀한 대접을 받으려면 나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가 해야할 일이다. 나부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모습을 자꾸 보여야 아이가 보고 배울 것이다. 식당에서 뛰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은 아이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첫 걸음이다. 아이가 뛰다가 누군가와 부딪히면 엄마가 먼저 사과를 해야한다. 내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늘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다. 그걸 가장 먼저 가르치는 건 바로 나다. ■ 애가 우는데 엄마들은 왜 가만히 있나? -아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당부 다 안다, 엄마들도. 아이가 뛰지 말아야 하는 것, 떠들지 말아야 하는 것. 그런데 쉽지가 않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녀도 아예 모른 척 하는 엄마들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정말 문제다. 하지만 아이와 있다보면 갑자기 당황스러운 일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이도저도 못하는 순간, 뭘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우는데 아무리 달래줘도 안 그치고 더 큰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있다가 먹은 것을 게워내거나 하는 등의 상황들이 닥칠 수 있다. 몸과 머리가 멈추는 듯한 경험을 수시로 한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아기가 소중한 인격체로 존중을 받으며 아기와 함께하는 문화가 녹아든 사회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아기를 낳은 이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아기는 울고 흘리고 가만히 있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기가 갑자기 울면 어디가 아픈지,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시끄럽다, 애 엄마는 뭐하냐는 따가운 눈초리가 나온다. 아기를 경험할 일이 없었고 그래서 아기의 특성을 접할 일이 없었고, 굳이 아기를 이해할 필요성도 전혀 없었던 이유에서다. ●내 자식이지만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다 밖에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은 아기가 조용하고 방긋방긋 웃을 때에는 “예쁘다, 귀엽다”고 칭찬해주었지만 아기가 빽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인상을 쓰며 쳐다봤다. 아이들은 시끄러운 존재, 방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는 듯 하다. ‘노 키즈존’이 더욱 불거진 것은 그런 경험과 생각을 가진, 함께 식사를 하던 손님들의 공감대가 확산되면서다.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도 소리를 지르고 기분이 나쁘면 울면서 소리를 지른다. 나도 즐겨찾는 식당에서 아기가 소리를 빽빽 질러대 당황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이 안 통한다. 내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더 큰 소리를 낸다. 그럴 때 무시하거나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러면 나는 “애를 방치하는” 엄마가 된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중간에 자리를 뜬 적도 많지만 음식이 나온 초반부터 그러면 난감하다. 급기야 스마트폰으로 ‘뽀로로’를 보여준다. 잠시 조용해진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어휴, 식당에서 왜 저렇게 애들한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걸까” 혀를 찬다. 지하철을 탔을 때 아기가 갑자기 잠에서 깨 울기 시작했는데 어느 하나 “아기가 어디 아프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힐끔힐끔 흘겨봤고, 할머니들은 “엄마가 애를 힘들게 한다”고 핀잔을 줬다. 다섯 정거장만 가면 내릴 수 있는데 그 10분 남짓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순간 짜증이 나서 “제발 그만 좀 울어”라고 아기에게 말했다. “애기한테 왜 짜증을 내냐”는 말이 들렸다. 결국 도착하기도 전에 다른 역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내려버렸다. 자기 자식 하나 왜 어쩌지 못하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진짜로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누구나 아이였고, 부모가 된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였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될 것이다. 아이는 울음으로 말을 하고 큰 소리로 표현하는 존재라는 생각만 가져줘도 감사한 일 같다. 10분, 20분 내내 우는 아이를 방치해도 좋다는 게 절대 아니다. 아이 울음에 대한 반사적인 거부감을 조금만 거둬들여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학생일 때도 지하철에서 몇 년 만에 반가운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누다가 “좀 조용히 좀 하라”는 주의를 받은 적도 있다. 밤이 되면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노래를 부르고 고성을 지르기도 한다. 무조건 아이라서 안 된다는 시각이 불편하다. 결국은 엄마들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모두가 한 걸음씩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극단적인 갈등은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아기 엄마는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이해해 준다면 금상첨화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이 기사의 관련기사 (15)불어난 몸무게 만큼 고통과 행복이 함께 늘었다 (16)환상 속에’만’ 둘째가 있다 (17)엄마인 나의 육아를 존중받고 싶다 (18)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 (19)연예인 만삭화보, 그것은 꿈일 뿐… (20)엄마가 되어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21)아줌마가 되게 해줘서 고마워 ▶1회부터 14회까지는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허백윤 기자의 독박 육아일기
  • 해외여행 | Ohana Time in Hawaii 필사적 하와이 가족여행①Driving, Shopping

    해외여행 | Ohana Time in Hawaii 필사적 하와이 가족여행①Driving, Shopping

    오하나Ohana는 하와이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말이다. 알로하Aloha·안녕하세요, 마할로Mahalo·감사합니다 못지않다. 가족이라는 뜻이다. 하와이 오아후섬에서 가족과 함께 오하나 타임Ohana Time을 누렸다. 아빠는 해외 첫 렌터카 여행에 성공했고 엄마는 쇼핑에 빠졌으며, 딸은 모든 것에 마냥 신났다. 오붓했기에 더 필사적이었던 하와이 가족여행기. 오아후Oahu는 하와이를 이루는 6개의 큰 섬 중 가장 번화하고 제일 유명하다. 가보지는 않았어도 누구나 다 아는 와이키키Waikiki를 품고 있고 진주만Pearl Harbour을 안은 섬이다. 호놀룰루국제공항이 있으니 하와이의 관문이기도 하다. 6개 섬 중 세 번째 규모라지만 우리나라 제주도와 맞먹으니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렌터카는 필수다. 외곽 구석구석 자유롭고 빠르게 누빌 수 있다. 오아후는 쇼핑의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초대형 쇼핑몰과 수많은 명품 브랜드, 아웃렛과 할인점이 진을 치고 있다. 서핑의 발상지인 와이키키에서 맘껏 해양 액티비티를 즐긴 뒤에는 산악 액티비티로 오아후의 산과 바다를 모두 즐길 일이다. 하와이 전통 축제를 만난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www.visit-oahu.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Ohana Time Driving 정처 없이 오아후 렌터카 일주 호놀룰루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리는 동안 아내와 딸은 뒤에서 연신 희희낙락 재잘재잘 생애 첫 하와이에 감동한다. 그래 마음껏 누려라 오랜만의 해외 가족여행이니…. 최대한 익숙한 척 렌터카 계약을 진행하지만 ‘긴장 게이지’는 최고치다. 하와이도 처음이고 해외 렌터카여행도 처음이어서다. 그래도 보란 듯이 허세를 부린다. 좀 더 큰 차로 바꾸겠어요! 누적주행거리가 채 1,000마일1,600km도 되지 않는 신형 링컨 MKZ, 우~와! 가족이 만족하니 긴장도 누그러진다. 첫 목적지는 호놀룰루 시내의 초대형 쇼핑몰 알라 모아나 센터Ala Moana Center. 주차공간도 넓고 게다가 무료이니 호텔 체크인 전 들러 간단히 요기도 하고 한숨 돌리기 좋다는 조언에 충실한 결정이다. 도착하니 때마침 중앙무대에 펼쳐지는 무료 훌라 공연! 가족 모두 하와이구나 실감한다. 자신감을 연료로 채우고 오아후 렌터카 일주에 나선다. 섬 동남부 와이키키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감고 돌기로 한다. 올해 봄쯤, 중학생 된 기념으로 딸보다 한 발 앞서 하와이 가족여행을 다녀온 딸의 친구가 틈만 나면 ‘카톡’을 띄운다. 새우트럭 갈릭새우는 꼭 먹어라. 돌 농장 파인애플 아이스크림 환상적이야. 진주만도 좋더라. 와이키키는 밤에도 멋져…. 마치 미션 지령 같다. 더 이상 미션을 보내지 못하도록 섬을 샅샅이 훑어보겠다, 운전대를 쥔 손이 비장하다. 하와이, 타히티, 피지, 통가, 사모아 등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합쳐서 폴리네시아Polynesia라고 부른다, 폴리네시안 문화센터PCC는 이들의 문화와 전통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대규모 민속촌 같은 곳이다, 전통공연과 체험거리도 많다…. 애쓴 설명을 딸은 귓등으로 듣는다. 다음에 나올 새우트럭에 대한 조바심에서다. 친구가 얼마나 자랑했으면…. 별 수 없다. PCC에 새로 들어선 후킬라우 마켓플레이스Hukilau Marketplace만 선택하고 집중한다. 아기자기한 가게마다 폴리네시안 색채 물씬한 물건을 팔고, 레스토랑은 허기를 부추긴다. 이곳의 대표 레스토랑 파운더스Pounders에서 하와이 전통요리 포케Poke를 맛본다. 참치를 깍두기처럼 썰어 양념에 버무린 음식이다. 맛나구나, 만족하며 PCC에 대한 아쉬움을 달랜다. 새우트럭은 느닷없이 나타난다. PCC에서 20분쯤 달리면 카후쿠Kahuku 마을인데, 어느 순간 지오반니Giovanni’s 글자가 선명한 푸드트럭이 공터에서 툭 불거진다. 노스쇼어North Shore 쪽에 있는 서너 개의 새우트럭 중 원조로 꼽힌다는 그 카후쿠 지오반니 새우트럭이다. 조금 전 PCC에서 배불리 먹었잖아, 마늘양념 쉬림프 스캠피Shrimp Scampi 한 접시만 주문한다. 어라, 새콤매콤 맛있는걸. 한 접시 더? 고민하다 관둔다. 83번 도로는 동부 해안 중간쯤에서 바다와 만나는데 북쪽 노스쇼어를 정점으로 찍고 서부 해안 중간으로 내려올 때까지 바다와 동행한다. 그야말로 바다, 바다, 바다…. 전문 서퍼들의 성지라는 평판에 어울리게 노스쇼어 해안의 파도는 기세등등하다. 모래 고운 해변들도 불쑥불쑥 스쳐지나간다. 무섭지도 않나봐, 바위절벽에서 사람들이 다이빙한다며 딸과 아내가 호들갑이다. 오아후를 찾은 젊은 혈기라면 한 번씩 뛰어내린다는 와이메아 베이 비치Waimea Bay Beach Park이겠거니 차를 세우려 하지만 빈틈이 없다. 조금 전 여기보다 덜 복작대는 해변에 멈추길 잘했다 안도한다. 잘게 간 얼음가루 위에 빨강 노랑 파랑 무지갯빛 시럽을 뿌린 아이스크림인 셰이브 아이스Shave Ice가 탄생한 마을이자, 빈티지 느낌 물씬한 가게와 카페들이 즐비해 ‘노스쇼어의 빈티지 마을’로 불리는 할레이바Haleiwa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점점 가까워 온다. 들를까 말까, 속으로 잠깐 고민하다 그냥 지나친다. 미션 수행이 우선이지 않은가! 여기서 절약한 시간은 돌 농장Dole Plantation에서 기다란 대기 줄을 참고 파인애플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데 사용한다. 딸은 아이스크림 맛에 감탄사 연발 후 인증사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진주만에서도 그렇게 열심이면 얼마나 예쁠까마는, 도통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이 이곳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군 함대를 공격했고 그래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됐는데 이게 역사적으로 어쩌니 하려다 문득 보니, 딴 짓 한창이다. 바닥의 대형 세계지도에 새겨진 ‘Territory of Hawaii, Pearl Harbor’에 자기의 두 발을 넣고 찰칵찰칵. 하루 종일 딴 짓이 과했던 탓인지 와이키키로 되돌아가는 길 내내 존다. 그래 좀 자 둬, 밤에는 와이키키 비치를 산책할 거니까! 폴리네시안 문화센터 www.polynesia.co.kr 돌 농장 www.dole-plantation.com 진주만 www.pearlharborhistoricsites.org ●Ohana Time Shopping 하와이에서 여자는 모두 쇼퍼홀릭 알라 모아나 센터의 무료 훌라 공연이 끝나자 아내와 딸은 기다린 듯 탐색에 나선다. 들뜬 설렌 신난 그런 기색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쇼핑몰이라니 그럴 만도 하다. 대형 백화점이 4개나 들어와 있대,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노드스트롬Nordstrom, 메이시스Macy’s 그리고…. 어느 틈에 한국어 홈페이지www.alamoanacenter.kr를 찾았는지 딸이 폰을 더듬대며 읽으니 아내는 속사포다. 명품 브랜드 천지네. 구찌, 루이비통, 샤넬, 프라다, 티파니, 불가리, 코치…. 딸도 아는 브랜드를 더 발견한다. 아베크롬비, 크록스, 리바이스…. 쭈뼛쭈뼛 뒤를 따라가니 낯선 브랜드 익숙한 브랜드 모르는 브랜드 줄을 잇는다. 의류, 구두, 신발, 쥬얼리, 화장품, 액세서리, 기념품, 안경, 스포츠용품, 레스토랑까지 없는 게 없다. 20만 평방미터(6만평) 규모에 매장만 300개라는 설명을 몸소 걸으며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에는 너무 넓고 또 많다. 그래도 그 유명하다는 니만 마커스 백화점의 레스토랑 마리포사Mariposa는 살짝 구경하고 싶다. 마리포사는 스페인어로 나비라는 뜻. 레스토랑 천장은 나비 모양 모빌의 날갯짓으로 우아하다. 허기진 김에 1층 푸드 코트에서 요기한다. 마리포사보다는 덜 우아하지만 음식점이 30개는 족히 되니 뭘 고를까 고민마저 즐겁다. 허기가 가시니 쇼핑몰 탐색이 탐색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솟구친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 있다! 아내가 가리킨 곳은 난생 처음 보는 브랜드, 토리 버치Tory Burch. 미국 제품을 미국에서 사니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단다. 분홍 구두 하나 사더니 최소 10만원은 벌었다며 뿌듯해한다. 분명 돈을 썼는데 왜 벌었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음날 딸마저 다시 가자고 떼쓴다. 자기가 고른 재료와 액세서리로 자기만의 플립플롭을 만드는 가게가 계속 아른거린다나. 엄마도 덩달아 만든다. 자기들이 만든 플립플롭을 신고 까르르 웃는 모녀가 보기 좋아 함께 웃는다. 여기는 여자를 홀리는 뭔가가 있나 보다 확신하며…. 틈이 생겨 쇼핑을 하는 건지 쇼핑을 위해 틈을 내는 건지 애매할 정도로 쇼핑이 잦다. 그만큼 쇼핑 스폿이 많다. 와이키키에서 자동차로 30~40분은 가야 하지만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Waikele Premium Outlet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참을 고르고 대리 구매하고 선물도 사니 쇼핑백이 한 짐이다. 딸도 매장을 전전하다 어디선가 운동화를 사들고 나타난다. 와이키키 비치와 나란히 늘어선 호놀룰루의 대표적인 거리 칼라카우아 애비뉴Kalakaua Avenue에는 명품 브랜드숍과 쇼핑몰이 즐비해 걸음걸이가 더디다. 초콜릿이나 마카다미아넛 같은 소소한 선물도 살 겸 밤에 월마트에 다녀오자는 제안에 이르러서는 너무 하다 싶어, 하와이 전통맥주 롱보드Long Board를 시켜 단숨에 들이킨다. 운전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의. 쇼핑보다 맥주인 남자를 남겨두고 운전 못하는 여자 둘은 용케도 월마트에 다녀온다. 알라 모아나 센터 www.alamoanacenter.kr 니만 마커스 www.neimanmarcushawaii.com 와이켈레 프리미엄 아웃렛 www.premiumoutlets.com 하와이 최대 규모의 쇼핑몰인 알라 모아나 센터. 백화점 4곳이 입점해 있고 300개 브랜드와 레스토랑을 만날 수 있다 글·사진 김선주 기자 취재협조 하와이관광청 www.gohawaii.com/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어떤 여성이든 만난 지 두 시간 내에 함락시킨 19세 ‘보이’

    어떤 여성이든 만난 지 두 시간 내에 함락시킨 19세 ‘보이’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67. 극장 앞에 함정판 21살 플레이보이…시계 판 돈도 바친 두 아가씨가 함께 고발(선데이서울 1973년 4월 1일) 아무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한다지만 극장에서 여성을 헌팅해서 2시간도 채 되기 전에 함락해 버리곤 했다니 놀랍다. 그러고도 모자라 여자가 갖고 있던 시계와 반지 등을 뺏어 달아난 꿩 먹고 알먹은 플레이보이. 실제의 나이는 21살이지만 호적상으론 미성년인 19살의 홍장균(가명)군이 이 희한한 탈선 속공법의 주인공. 177cm의 헌칠한 키에 음영 짙은 서구적인 생김새가 얼른 보아도 미남이다. 줄무늬의 연고동 멋쟁이 양복이 잘 어울리는 어느 외국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착잡한 심정 건드리지 마십시오. 지금도 애자(가명·19)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민자(가명·21)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이·김 두 아가씨는 바로 그를 고발한 아가씨들. 3월 19일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된 홍장균군의 집은 강원도 삼척인데 서울이 활동 무대였다. 그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된 건 폭행이란 죄명이지만 그의 폭행은 매우 다양하고 색다르다. 배가 2척이나 있고 그런대로 시골에서 살 만하다고 하는 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공부보다는 운동에, 운동보다는 노는 데 더 재미가 있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좁은 삼척 바닥에서는 그의 플레이보이 기질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던지 작년 8월 무작정 상경. 호주머니에는 집에서 훔쳐온 돈 몇 푼을 넣고…. 서울이란 곳이 놀기에는 좋았으나 돈이 떨어진 그는 하는 수 없이 중국집 보이 노릇을 하기도 했다.   ●노는 데 재미를 붙여 상경…중국집에 취직, 탈선 견학 여기서 그는 방 안에서 식사를 시켜 놓고 탈선을 일삼는 남녀들을 아주 흥미 있게 견학했다. 그러나 보수가 너무 적어 집어치우고 헌 옷 장사를 했다고. 지난해 크리스마스 장사는 안되고 자취방은 쓸쓸하고 여자 헌팅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영등포 Y극장으로 갔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라는 국산 영화를 상영하는 Y극장 앞에는 젊은 여성관객이 많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을 눈여겨 본 그는 그 가운데서 꽤 예쁘장하게 생겼고 혼자 구경 나온 듯한 이애자(가명·18·S산업 직공)를 점찍었다. “혼자 나왔느냐?”, “이야기해도 좋으냐?” 등등 친절하고 공손한 말로 접근을 시도한 그는 300원을 주고 입장권 2장을 사서 함께 입장하는 데 우선 성공했다.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껌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는 등 서비스를 다했다. “함께 저녁이나 하자”며 이양을 데리고 근처 중국집으로 간 그는 군만두 2인분과 고량주를 시켜 먹은 뒤 “당신같이 순진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다. 사랑하고 싶다. 당신같이 예쁜 여자 옆에 있으니 세상 살맛이 난다”며 꾀어 키스세례를 퍼부었다. 중국집 보이 노릇할 때 열심히 봐 둔 대로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했다’고. 그러고선 이양이 갖고 있던 손목시계와 금반지(2돈짜리) 1개를 뺏어 호주머니에 넣고 “너같이 아름다운 여자와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다. 그러니 다시 나와 만나 줄 때까지 이 물건들을 보관하고 싶다”고 그럴듯하게 설명. 함께 나온 그는 다방에 들러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며 이양을 남겨둔 채 그대로 줄행랑.   ●구경 함께하자면서 꾀어 2시간 만에 마음 사로잡아 그러나 그날 오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이양을 또 만나게 된 그는 다시 능청을 부린 뒤 이양을 데리고 근처 D여관에 함께 투숙하고 이튿날 또 뺑소니. 며칠이 지난 1월 1일 그들은 S극장 앞에서 또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그러나 이때의 이양은 이미 홍군의 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상태. 또 한번 근처 무허가 여인숙에 투숙한 그는 이번에도 오히려 이양의 새 손목시계를 뺏고는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얼마가 지났다. 홍군은 이양의 직장을 알아가지고 찾아갔다. 2월 12일이었다. 그는 이양에게 “돈 갖고 와서 함께 살자”며 돈을 요구할 정도로 이양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고 또 뻔뻔스러웠다. 재미를 붙인 그는 그보다 며칠 전인 2월 7일, 이양을 꾈 때의 방법 그대로 S극장에 구경 온 김민자(가명·21·T화학 여공)양을 꾀어 ‘몸으로 사랑해 준 뒤’ 시계를 갖고 뺑소니. 그러나 김양 역시 그 뒤 몇 차례나 홍군을 만났지만 이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만날 때마다 ‘사랑의 유희’를 되풀이하며 피해만 입었을 뿐 그의 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한번은 그가 잠든 사이에 그의 주머니를 뒤진 김양은 수첩에서 이양의 주소를 발견하게 되어 이양을 찾아갔다. 이양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김양은 함께 복수를 하기로 합의, 지난 18일 Y극장 앞에서 그를 잡아 경찰에 넘겼다. 경찰에서 이·김 두 아가씨는 “홍도 나쁘지만 자신들도 잘못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정리=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신문은 1960~70년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다양한 기사들을 새로운 형태로 묶고 가공해 연재합니다. 일부는 원문 그대로, 일부는 원문을 가공해 게재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당시의 우리 사회 모습을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원문의 표현과 문체를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는 오늘날에 맞게 수정합니다. 서울신문이 발간했던 ‘선데이서울’은 1968년 창간돼 1991년 종간되기까지 23년 동안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오락 주간지입니다. <편집자註>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패전 70년, 군국주의 상징 ‘제로센’ 다시 날아오르다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日 패전 70년, 군국주의 상징 ‘제로센’ 다시 날아오르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사슬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자 태평양 전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일본 군국주의 광풍(狂風)이 멈춘 지 70년이 된 해이다. 같은 전범국이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이 반세기 넘도록 사과와 반성을 거듭하면서 국제사회의 모범 국가로 대접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종군위안부와 징용을 부정하면서 사과와 반성을 거부하면서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패전 70년에 즈음해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한 법안을 통과시키며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된 일본이 이제는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열었던 침략의 상징 ‘제로센(零戰)’ 전투기 복원을 준비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 태평양 전쟁의 상징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대규모 전투기 편대가 나타났다. 휴일을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 해군 태평양함대는 일본군 전투기 부대의 대공습을 받아 패닉 상태에 빠졌고, 이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와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가 이끄는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항공모함 6척에 441대의 전투기와 공격기를 싣고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의 대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하와이에 접근해 방심하고 있던 미 해군을 대상으로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당시 미 해군 전함을 공격했던 기종은 97식 함상공격기였지만, 하와이 상공의 제공권을 잡으며 미군 전투기들을 사냥했던 전투기는 제로센, 이른바 '0식 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만든 ‘바람이 분다’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소개된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가 설계한 이 전투기는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는 했지만 등장 당시에는 태평양 전선 최강의 전투기로 악명을 떨쳤다. 지로는 제로센을 설계할 당시 일본해군의 “최대한 멀리 날 수 있고 최대한 빠르고 날렵한 전투기를 만들라”는 요구에 대단히 고심했다. 전투기가 빠르고 멀리 날기 위해서는 고성능 엔진이 필요한데 당시 일본의 공업기술력으로 이러한 엔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안은 ‘기체 경량화’였다. 제로센은 장갑판을 최대한 생략했고 동체와 주익 외피에 사용된 금속판은 최대한 얇게 만들었으며, 골조 내부를 비게 만들어 최대한의 경량화를 달성했다. 제로센의 무게는 연료와 무장을 제외한 자체 중량이 약 1.7톤이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라이벌이었던 미 육군 항공대의 P-40 전투기보다 1톤 가까이 가벼운 수준이었다. 기체가 가볍다보니 제로센은 발군의 기동력을 자랑했다. 속도는 물론 가속성능과 선회 능력이 대단히 우수했는데, 이 때문에 개전 초기 태평양 지역의 미군과 영국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 능력, 즉 더 빠른 속도로 더 작은 공간에서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능력이 우수했기 때문에 연합군 조종사들은 제로센을 발견했다 싶으면 어느 순간 꼬리가 물려 있는 상황에 종종 처했다. 이러한 이점으로 제로센은 개전 초기 2년 동안은 무적의 전투기로 군림했지만, 이러한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무기체계 관련 기술 개발에 천문학적인 자금과 노력을 투입했던 연합군과 달리 일본은 전투기 성능 개량이나 개발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제로센이 기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사이 미군은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로센보다 더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갖추었음에도 속도가 더 빠른 F-6F 헬켓(Hellcat)이나 F-4U 콜세어(Corsair)을 배치했고 한때 태평양 상공을 주름잡았던 공포의 전투기는 같은 회사의 G4M 폭격기와 더불어 ‘원 샷 라이터(One-shot lighter)’로 전락했다. 한두 발만 맞춰도 불덩이가 되어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별명처럼 제로센은 급격히 몰락했다. 기체 중량을 줄이기 위해 무장이 기관총 정도밖에 없다보니 두꺼운 장갑판을 두른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키기 어려웠고, 반대로 제로센은 미군 전투기나 대공포로부터 몇 발만 맞아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뚫리며 추락했다. 이 같은 화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20mm 기관포를 탑재하는 개량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개량 때문에 기체가 무거워지면서 그나마 장점이었던 기동성이 희생되어 제로센의 피해는 더 커져만 갔다. 결국 1943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제로센은 1944년부터는 제대로 된 공대공 전투보다는 자살 돌격작전, 즉 가미카제(神風) 작전에 동원되었고 수많은 젊은 조종사들이 ‘일왕 만세(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허망하게 죽어갔다. ▲ 패전 70년, 일본 군국주의 부활 원년? 제로센 전투기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태평양 전쟁의 신호탄을 쏜 무기이자 침략자 일본 왕을 위해 옥쇄(玉碎)도 불사한다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전투기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전국 곳곳에 이 전투기와 조종사들의 활약상(?)을 기리는 박물관과 전시장이 11곳이나 존재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 내 전쟁박물관 한복판에도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전투기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지난 70여 년 동안에는 복원 작업을 통해 다시 하늘로 날리려 하는 ‘패기’를 가진 이들은 없었다. 이 전투기가 복원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은 곧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날갯짓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내외 반발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전투기를 대중에게 친숙한 아이템으로 어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일본 NHK 방송의 경영위원이자 소설작가인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가 제로센 전투기와 자살 돌격대를 미화한 『영원의 제로(永遠の0)』라는 소설을 출간해 500만 부 이상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방위성과 육·해·공 자위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인기 아이돌 오카다 준이치(岡田准一) 주연으로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 영화는 700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문제는 이러한 ‘전범 미화작업’이 일본 문화계 전반에 걸쳐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대한 고발 소설을 써 극우 세력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던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작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는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역사의 치부이며, 이들은 자발적인 죽음이 아니라 군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희생됐다”고 지적하면서 극우 세력의 제로센과 가미카제 미화 작업을 비난했다. 그러나 극우 세력은 이러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로센을 다시 띄우기 위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미쓰비시중공업 제품 올 8월 비행 예정 일본 극우세력들은 지난 2013년, 모금을 통해 조성한 자금으로 ‘주식회사 제로 엔터프라이즈 재팬’이라는 기업을 만들어 제로센 전투기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시즈카 마사히데(石塚政秀) 소유의 전투기를 지난 2008년 구입, 수년에 걸쳐 이 전투기를 여러 파트로 분해해 일본으로 반입했으며, 지난주에 엔진 구동 시험을 마치고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형식 승인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복원작업 전 과정은 일본 방위성과 자위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는데, 현재 제로센 전투기가 격납되어 있는 곳도 해상자위대 가노야(鹿屋) 항공기지이며, 해자대는 제로센 복원 작업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일본은 이 제로센 전투기를 패전 70주년이 되는 올 8월 하늘로 띄울 계획이다. 공교롭게도 8월에는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제로센’이라 불리는 일본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 ATD-X(Advanced Technology Demonstrator-Experimental) 심신(心神)의 첫 비행이 계획되어 있으며, ‘공격무기의 상징’인 상륙돌격장갑차 시제차량 공개도 예정되어 있는데, 더 재미있는 것은 제로센 전투기와 ATD-X, 신형 상륙돌격장갑차를 만드는 회사가 모두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이라는 것이다. 패전 70주년에 맞춰 집단적 자위권 확보를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활시키고 70년 전 침략 전쟁의 선봉에 섰던 전투기를 복원시키며, 더 나아가 그 전투기를 만들었던 회사에서 신형 스텔스 전투기와 공격용 장갑차까지 개발해 패전했던 그 날에 공개한다는 계획! 이것을 단순한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슬픈 척하지 않는 슬픔…터져 나오는 민초의 힘

    슬픈 척하지 않는 슬픔…터져 나오는 민초의 힘

    극작가 겸 연출가 고선웅(47)은 요즘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그가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대형 창작뮤지컬 ‘아리랑’(조정래 원작)의 개막을 앞두고서다. 오는 11일 첫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그를 최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도 서너 시간밖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잠을 자면서도 대본과 장면을 계속 복기(復棋)하고 있어요. 개막 때까지 총기를 잃지 않아야 하는데…” 하지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는 총기가 또렷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확신을 가진 작품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막연한 기대감 정도였어요. 하지만 대본을 쓰고 배우들과 함께 밀도를 채워가면서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뜨거운 이야기와 배우들의 카리스마가 한데 어우러지는 것을 봤거든요.” 5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아리랑’은 큰 흥행을 기대하기 힘든 작품이다. 서구의 판타지와 로맨스가 넘쳐나는 뮤지컬 시장에서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핍박의 역사는 아무래도 설 자리가 좁아 보인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로 5년 동안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그는 뮤지컬에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고 있다. “뮤지컬을 보면서 다 함께 환호해야 한다는 군중심리만 걷어낸다면, 관객이 작품 속의 슬픈 상황을 1대 1로 목격한다면 충분히 소통이 가능할 겁니다.” ‘푸르른 날에’, ‘홍도’ 등을 통해 슬픔을 꾹꾹 눌러담는 솜씨를 발휘해 온 고선웅 연출은 ‘아리랑’을 ‘애이불비(哀而不悲·슬프지만 슬픈 체하지 않음)’라는 네 글자로 요약했다. “슬픈 분위기를 강요하지 않는다”면서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푸르른 날에’처럼 잔잔한 위트 속에 슬픔을 녹여낼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땐 제가 젊은 패기가 있었죠. 그리고 너무나 아픈(이 단어를 떠올리기까지 한참 뜸을 들였다) 상황이기 때문에 재기발랄하게 보여줄 수 없었어요.” 애국심에 호소할 생각도, 웅장한 넘버로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끌어낼 요량도 전혀 없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애이불비의 정서는 ‘민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있었다. “전막을 연습할 때면 이상하게 눈물이 펑펑 나요. 선량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향을 떠나 도망을 가고, 사랑하는데 만나지 못해야 하는지…” 그는 이를 ‘한국인의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제 할아버지는 동학혁명에 가담한 의병이셨어요. 아버지는 ‘왜놈 학교에 가지 마라’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식교육을 받지 못하셨죠. 그런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1999년 신춘문예를 통해 극작가로 데뷔한 그는 연극과 뮤지컬, 창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극작과 작사, 연출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전례 없는 흥행을 기록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까지 그의 작품은 흥행과 호평을 놓치지 않는다. 가뿐하게 성공을 이어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지난 과정을 높이뛰기에 비유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넘어서야 할 것들이 보입니다. 허들을 1cm씩 높이고 뛰어넘는 것이죠. 저에겐 창극, 뮤지컬 다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힘들긴 해도 다 넘게 되더군요.” 9월 5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6만~13만원. (02)577-1987.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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