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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력발전 세계명국서 인기(지구촌)

    ◎미 풍차제조업체들,주문 밀려 “즐거운 비명”/무공해에 비용도 화전보다 저렴/컴퓨터장치 개발,발전 자동조절 무공해 풍력발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가면서 미국의 발전용 풍차제조업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 최대의 풍차제조업체인 유에스 윈드파워가 최근 네덜란드의 한회사와 풍차생산계약을 한데 이어 윈드 하비스트도 사우스 웨일즈에 60개의 터빈을 판매하기로 하는등 미국 풍차제조업체 대부분에 해외주문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풍차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풍력발전이 화력발전보다 비용을 덜 들이면서도 에너지를 더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풍력발전은 자원이 무한하고 공해를 유발하지 않는등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생산비가 많이 들고 풍력에 따라 전력생산에 차이가 나는 단점때문에 제대로 보급이 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같은 단점이 첨단 컴퓨터발전조절장치의 개발로 말끔히 해소되면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 컴퓨터장치는 바람의 강약에 상관없이 적절한 전력을 얻을 수 있도록 터빈의 회전속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도록 돼 있다. 바람이 약할 때는 터빈이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반대의 경우 회전속도를 늦춰 전력생산을 일정하게 하는 것이다. 생산비용도 화력발전에 비해 ㎾/시간에 5센트정도 싸게 먹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장치의 개발에 따라 현재 샌프란시스코 이웃 앨터몬트지역은 풍차가 무려 7천여개로 늘어나 세계 최대의 풍차밀집지역이 됐다. 이곳 윈드 하비스트 대변인은 『현재의 설비로 지금까지 받아놓은 주문량을 모두 생산하려면 꼬박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이곳의 에너지 전문가들은 지금같은 속도로 풍력발전수요가 늘어나게 되면 앞으로 30년안에 풍력에너지의 비율이 미국 전체에너지소비량의 10%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 발레리나 김혜식씨(이세기의 인물탐구:9)

    ◎도약때 새의 비상 방불… “춤의 요정”/외지,“미감번득이는 탐미주의적 포즈” 격찬/세계적 명성 얻고도 자만하지 않는 노력형/포용력있는 성품… 「사치와 무관한 예수셰계」 추구 꽃잎처럼 여리고 가늘고 향기로운 느낌.한국이 낳은 세계적 발레리나 김혜식씨의 이미지다.곧고 균형잡힌 체격과 세련된 용모,예술가의 찬란한 경력과 연륜,세계적 명성에 비해 그의 어느 구석에서도 자랑과 오만,자부심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알프스 소녀같은 순백한 표정에 말씨도 미소도 웃을때의 눈매도 부드럽다.걸음걸이도 발레리나 특유의 티를 내지않는다. 그러나 목선과 어깨선 조용히 앉아있거나 책을 읽을때 주스를 따를 때도 그에게선 어쩔수 없이 일가를 이룬 한 발레리나로서의 기품이 엿보인다. 잔잔한 리듬이 밴 발동작과 우아한 스텝은 그가 국립발레단 시절 「레 실피드」에서 보여준 「공기의 정령」,또는 몸속에 쇼팽의 선율이 흐르는 듯한 물결같은 움직임이다. 일명 「백색발레」(aballetblanc)로 불리는 「레 실피드」에서의 아라베스크와 절정을 향한 앙트리샤는 그의 많은 묘기중에서도 눈부시게 뛰어난 테크닉으로 손꼽힌다.특히 그의 도약은 그림자무게만큼이나 가벼울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잘 새의 비상(비상)에 비유되곤 한다. 한발로 선채 한 다리와 한팔을 마음껏 뒤로 뻗치는 앙트리샤는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신문과 댄스 전문지등에서 일찍이 「미감이 번뜩이는 탐미주의적 포즈」로 호평된바 있다. 외지 보도에서 그는 언제나 「혜식(Haeshik)」으로 불리고 한국의 임성남 사사를 밝히는등 최근의 「댄스 티처나우」지(92년 1월호)는 「서울에서 온 김혜식」특집기사속에서 「잠자는 미녀」의 「오로라」,또는 「봄의 요정」에서의 「요정(Fairy)」자체로 그의 춤을 표현하고 있다. ○임성남씨에 사사 그는 무대위에서 「사랑스럽고 감미롭고 고혹적」이다.그러나 이 글을 쓴 무용 평론가 레슬리 프라이드맨은 그의 무용가로서의 이면에는 「고집이 세고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에 대한 확고한 판단력과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완벽주의가 도사려 있다」고 밝힌다. 이대 무용과에서 같이 무용을 공부한 미스코리아 출신 오현주씨는 「예술가적 양심과 도덕성,세계적 수준의 발레 기교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동시에 갖추었으나 언제나 온순하고 겸손하고 관대하다」고 친구를 자랑한다. 그의 관대함과 포용력은 이번 국립발레단 새단장 내정때 이를 질투하고 항의하는 전화를 받고도 수화기를 든채로 코를 골고 잔 이야기가 잘 뒷받침하고 있다. 물론 그의 국립발레단 새단장은 새삼스럽게 거론된 것은 아니다.3년전부터 해마다 동아무용콩쿠르 심사위원자격으로 서울에 올때마다 스승인 임성남씨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고 무용계에서도 양식있는 실력자의 출현을 당연히 환영하는 빛이었다. 「임성남씨가 은퇴하더라도 김혜식이 있으니 안심」이라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 깊이 외국무대에 뿌리를 내린 그로서는 거미줄같은 스케줄에 얽매여서 이를 뿌리치고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지난 16년간 교수로 몸담아온 프레스노대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농공학교수인 부군 김주익씨와의 섬세하고도 다각적인 의논끝에 「나를 키워준 고국에 대한 감사의 차원」에서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입장이었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김혜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아버지 김응순씨(70년 작고)는 고대출신으로 오랫동안 교통부 해운국장으로 재직,비교적 건강하고 구김살없는 환경에서 명랑하게 자란 편이다.집안에 무용을 하는 사람은 없다.다만 사촌언니이며 문단의 중진인 시인 김양식씨가 김혜식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발레리나의 꿈」을 심어주었다. 성공회 유치원시절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여 이화여중때 일본에서 러시아발레를 전공하고 돌아온 임성남무용연구소에 입소,중학교 3학년때 「꽃의 왈츠」에서 군무로 명동 시공관 무대에 섰고 고3 되던해 「백조의 호수」에서 스승인 임성남씨의 파트너로 본격 무대에 데뷔,「발레 신데렐라」로 떠올라 무용계는 일찍이 김혜식 발레시대를 예고했다. 「타고난 재능보다 부족함을 메운다는 노력」을 신조로 하여 그는 밤낮없이 포즈연습에 매달렸고 하루가 멀다하고 토슈스를 해어뜨리는 딸의 춤을 그의 부친이 말없이 뒷바라지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화 「수정 온디누」를 보고 그때부터 막연히 마것 폰테인의 영국 로열발레 진출을 꿈꾸게 되었다. 당시 미국대사관 공보관으로 와있던 미스터 핸더슨은 김혜식의 「백조의 호수」「레 실피드」에서의 연속회전인 푸에테에 반해 뉴욕시티발레·로열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 공연 필름을 구해주었고 새들러스 웰즈의 「불새」공연에서 눈이 핑핑 돌것같은 마것 폰테인의 현란한 선회를 마치 그 자신의 운명을 응시하듯 지켜봤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드디어 그는 67년 5·16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갔고 런던의 로열발레스쿨에 입학,세계적 프린시펄인 줄리아 파론,일리아 워드 도널드 리튼을 차례로 사사,발레스쿨 수료후엔 에롤 에디슨에게서 알레그로 스텝의 보충레슨을 위해 1년간 수업을 연장했다. 그러나 시즌엎이어서 로열발레단 오디션을 놓치는 바람에 「잠자는 미녀」솔로로 니콜라스 베리오소프 감독에게 발탁되어 스위스 취리히발레단에 입단,이 사실은 국내에도 널리 보도되었었다.그는 아름다운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 머물면서 각국에서 모여든 재능있는 예술가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이상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 미국에 살고있던 동생이 그를 만나러 왔다가 「유명 발레리나의 춥고 가난한 생활」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하자 『예술은 사치스럽다든가 풍요로운 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모든 동작이 정지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냐만이 우리의 생명』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춤출 때외엔 화장을 하지 않는다.멋진 옷을 탐내지도 않는다.유럽 구석구석을 누비는 투어중에도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모든 발레리나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겨울에 입을 스웨터나 머플러를 뜨개질 하면서 공연 틈틈이 보았던 샛별같은 발레들을 머리속에 그리곤 한다.그중에서도 유럽공연을 가진 캐나다 레그랑 발레 캐나디안의 토슈스를 신지않은 「카르미나 브라나」는 퍽이나 인상적인 무대였다. 그는 이에 자극받아 취리히 발레단과의 3년계약을 끝내고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에 입단,오디션에서 2백명중 1명으로 뽑혀 처음엔 세미 솔로이스트,다시 솔로이스트로 올라서 모든 공연에서 「작은 코리안의 센스있는 작품해석,유연한 기량」등의 개인평과 함께 차츰 춤의 요정으로 변신해갔다. ○공연때마다 호평받아 「나이든 모습으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30세가 되던 72년,워싱턴 DC 케네디센터에서 있었던 록 발레 「토미(Tommy)」공연에 찾아온 김주익씨와 그해 12월20일 프레스노에서 결혼,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농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주익씨는 「무용하는 와이프를 원치않아」결혼과 함께 그곳 신문들은 「프린세스 차밍과의 결혼을 위해 토슈스를 포기한 발레리나」를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었다.예상치못한 김혜식 발레 포기는 미국은 물론 한국무용계를 크게 놀라게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주부로 머물면서 뜨개질이나 하고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발레 필름에 넋을 빼앗기는 아내를 발견한 김주익씨는 「그는 아내이기전에 한사람의 예술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더구나 「이 도시에 세계를 누빈 발레리나가 와있다」는 소문과 함께 결혼 3개월만에 프레스노 시립발레단이 「호두까기인형」「잠자는 미녀」공연에 초청,네 왕자와 더불어 추는 「로즈아다지오는 비길데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란 극찬등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초청발레리나겸 안무자로 활약하다 77년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로 초빙됐다. 자녀가 없는 이들은 푸들 스카티를 아들삼아 키우면서 친구처럼 남매처럼 오로지 세상에 두사람뿐인 것처럼 누구보다 다정한 부부다. 발레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부군도 언제부턴가 발레전문가를 능가하는 발레이론가가 되어 어떤 외조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혜식으로서는 그동안 큰 좌절이나 난관은 없었다.좌절과 난관이 있기 전에 철저한 연습으로 이를 대비했기 때문이다.슬픔이 있었다면 20년 가까이 친자식처럼 키워온 스카티를 지난해 모국방문기간 동안 잃은 일이다.스카티 얘기가 나오면 언제 어디서라도 『나를 닮아서 춤을 잘추었는데,바느질 스티치같은 부우레가 얼마나 귀여웠는데』하며 소녀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는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과 판단,완벽주의」가 도사려 오는 1월 단장취임에 앞서 지난 3주동안 발레단체의 대대적인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연스케줄이 짜져야만 2∼3시간씩 하던 연습을 하루 8시간으로 대폭 늘렸다.타성이 된 모든 잘못된 포즈나 폼은 연습을 통해서 고친다는 각오다. 이제 우리는 본격적인 김혜식 발레시대의 출범과 함께 그가 세계무대에서 호평받았던 젤롬로빈스의 「목신의 오후」,조지 발란신의 「알레그로 블리리안」그리고 토슈스 없는 「카르미나 브라나」를 국립극장 무대에서 보게될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은 그의 우상이었던 마것 폰테인의 이미지를 몸속에 간직한 꽃잎과도 깃털과도 같은,김혜식 특유의 미감이 번뜩이는 불멸의 예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연보 ▲1942년4월 서울출생 김응순씨와 백운정여사의 3남2녀중 셋째(장녀) ▲61년 이화녀고 졸업 ▲57∼64년 임성남 무용연구소 사사 ▲63년 제1회 동아무용콩쿠르 김상 수상 ▲64년 이대 체육대 무용과 졸업 ▲64∼66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66년 5·16장학금과 동아일보 장학금 받아 도영,영국 로열발레 스쿨 수학(RADDIPLOMA) ▲67∼69년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특별연수,스위스 취리히 발레단 차석 무용수 ▲69∼72년 캐나다 몬트리올 발레단 프리마발레리나및 솔로이스트 ▲73∼77년 미캘리포니아 피그가든 댄스아카데미 안무및 지도위원 ▲72∼92년12월 미캘리포니아 주립대 프레스노대 연극무용과 교수 ▲67년 이탈리아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참가 ▲68년 스위스 주네브 댄스페스티벌 초청예술가 ▲69년 캐나다 퀘백주립고교및 대학에서 발레교육과 테크닉을 위한 설기지도 ▲70년 미 자코브스 필로댄스 페스티벌 초청예술가 ▲71년 미 케네디센터 개관기념 공연 참가 ▲73∼74년 미 프레스노 시립발레단 발레리나 「잠자는 미녀」「호두까기인형」공연·안무 ▲77∼92년12월 프레스노대 포타볼댄스 투톱을 위한 안무와 초청발레리나 ▲82·86년 포타볼댄스 투톱의 일본 대만등 순회공연 ▲83년 홍콩아카데미 아트센터 발레실기지도 ▲85∼89년 센트럴 캘리포니아 발레콩쿠르 심사위원 ▲87∼89년 미국대학 발레전공 장학생 선발 콩쿠르 심사위원 ▲90∼92년 동아일보 주최 동아무용 콩쿠르 심사위원 「백조의 호수」「로미오와 줄리엣」「잠자는 미녀」「코델리아」「호두까기인형」「프린스 이글」「연」「아이다」「파우스트」「토미」「파이어버드」「미스줄리」「카르미나 브라나」「더트립」「아루키(ARUKI)」「인터플레이」「알레그로 블리리안트」「세레모니」「레 실피드」「목신의 오후」「봄의 요정」등 수십편.
  • 고사장길 수월… 지각생 “전무”/전기대 입시

    ◎경찰 등 수험생수송작전 큰몫/「대도무문」 등 대선빗댄 격문많아 눈길 전국 1백3개 대학 5백30개 고사장으로 향하는 올 수험생들의 「고사장길」은 예년에 보기 드물게 수월했다. 교통혼잡으로 지각생이 속출했던 예년과 달리 수험생들도 서두른데다 경찰 등 관계당국의 철저한 지원으로 입시사상 처음으로 전국에서 단 한명의 지각생도 없었다. 특히 경찰은 모든 운송수단을 동원,수험생 수송에 나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세대 정문앞에는 구로고 1년 이규원군(16)등 고교생 3명이 상오7시부터 3시간여동안 돼지머리와 시루떡·사과등을 상위에 올려놓은 고사상을 차려놓아 초조함을 달래려는 학부모들이 돈을 놓고 절을 하는등 인기. 이군은 『입시때마다 애를 태우는 학부모들에게 약식으로나마 고사를 지내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안도 주고 용돈도 벌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며 이날 10만원을 벌었다고 싱글벙글. ○…서울대 정문과 주변 게시판에 재학생·고교후배등이 내건 현수막·격문 가운데는 「03도 붙었는데 용문이야…」「안정속의 합격」「이번에는 합격률을 바꿔보자」「대도무문」등 지난주 끝난 대선구호에 빗댄 문구들이 많아 눈길. 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서울대」「난 알아요,합격­남강」「합격과 수석이 미림으로 간 까닭은」등 대중가요와 영화제목 등을 딴 격문도 나붙었다.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 등 대학이 몰려있는 신촌지역의 신촌·이대·홍대지하철역은 이날 상오 일찍부터 교통체증을 우려한 수험생들이 지하철을 이용해 수험장으로 가는 바람에 평소보다 크게 붐볐다. 신촌로터리 부근 교통은 상오7시부터 30여분동안 차량운행이 평균 시속 5㎞ 밖에 안되는 서행이었으나 예년에 비해 교통소통은 원활한 편이었다. ○…고려대는 이대학 정문앞 대운동장을 수험생을 태우고 온 차량을 위한 주차장으로 개방한 때문인지 삼선교입구에서 고대,종암동 방향에서 고대 양방향의 차량소통은 예상과 달리 상오7시쯤 약간 정체를 보였을뿐 비교적 원활한 상태. ○…이날 상오7시쯤 부산 해운대역을 출발하는 동서통근열차가 기관차고장으로 30분이나 연발하는 바람에 이 열차를 타고 고사장으로 가던 수험생 20여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부산지방철도청은 열차가 연발하자 역무원들의 승용차 10여대를 가야역·부전역 등에 동원,수험생들을 고사장으로 긴급 후송. ○…청주시내 충북대·청주대 등 4개 전기대에 응시한 외지수험생중 2천여명이 각 대학 학생회와 사회단체·공공기관의 노력으로 민박을 한 것으로 나타나 청풍명월의 고장 청주의 인심을 유감없이 발휘. ○…아주대에 지원한 문윤호군(18·옥천상고)은 수험표를 가져 오지 않아 고사장입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수험표를 챙겨 기차를 타고 고사장으로 달려온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사시작 15분전인 상오8시25분에 가까스로 고사장에 입실.
  • 인 힌두교/구걸규제 강력 반발(세계의 사회면)

    ◎정부법안 연말국회 상정에 맞대응/“거지 단속·추방은 교리에 배치” 주장/의회의견 양분… 「제2종교분쟁」 우려 최근 종교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인도당국이 이번에는 거리에 득실거리는 거지들의 구걸규제방법을 둘러싸고 힌두교와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고 있다.힌두교에서는 적선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돼있어 구걸행위를 규제하려는 정부의 입장과 상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같은 구걸행위를 집중단속하기 위해 정부가 이번 국회에 상정한 강력한 구걸규제법안도 힌두교중심의 반대파들로 부터 거센 반발에 직면,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도에서 비단 거지들의 구걸행위가 사회문제로 등장한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문제는 구걸행위를 제한하는 현재의 법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힌두교 전통으로는 구걸행위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단속의 실효를 기대할 수 없다는데 있다. 게다가 거지들도 이같은 법망의 허점을 이용해 구걸행위가 날로 대범해지고 규모 또한 조직직이어서 당국을 괴롭히고 있다. 이들 거지들의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관광명소,절의 계단,거리의 곳곳에 종일 죽치고 있는 자리지키기형이 있는가 하면 상당수는 신호등에 기다리고 있다가 빨간 불이 켜져 자동차가 정지하면 잽싸게 달려들어 동전을 얻어챙기는 이동형등이 있다.또 더러는 조직적인 갱단을 형성,직업적으로 구걸협박을 일삼는 무리들도 많다. 최근 정부통계에 의하면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뉴델리의 경우 거지들이 무려 6만명을 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정부고위관리들은 실제로는 통계자료보다 휠씬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같은 거지들의 구걸행위를 뿌리뽑기 위해서 인도당국은 이번 연말 국회에 구걸규제법안을 제출해 놓고 있다.이번에 제안된 새로운 구걸규제법안은 형식적인 기존의 구걸규제법을 대폭 보완한 것으로 인도정부당국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대대적인 거지추방운동을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번에 제출된 구걸규제법안은 금지된 구걸행위를 할 경우 최고 5년까지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하고 있는데 거지에 대한 정의도 그전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있다.거리에서 구걸하는 행위,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내보여 동정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등도 모두 이 법에 저촉된다.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금전 음식 의류등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구걸규제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기는 하지만 국회내부에서도 심한 이견을 보이고 있어 통과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같은 구걸행위규제가 무조건 거지를 추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서 직업과 생계가 힘든 국민들에게 보다 안정된 생활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재활을 위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같은 구걸규제는 전통적인 힌두교의 교리에 배치되는 것으로,이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무시한 처사일뿐더러 이들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될수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처럼 빈민들의 구제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맞서게되자 일부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또다른 종교분쟁의 불씨를 낳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 기림사 삼존불 개금불사/설판·동참제자 모연,94년 거행

    경북 경주군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의 대한불교조계종 기림사(주지 법일)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보물9백58호 비로자나 삼존불의 개금불사가 거행된다. 기림사는 광유성인이 임정사를 창건,오백제자를 교화했다는 성지로 선덕여왕12년(644년)에 부처님의 시현으로 절을 확장하고 사명을 개칭,오늘에 이르고 있다.이 절의 대적광전에는 삼존불을 모셨으며 동쪽에는 약사여래를 모시어 일체중생을 병에서 구함은 물론 관음전과 삼천불을 봉안하고 있다.이 삼존불은 부처님 진용을 그대로 현신한 신묘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법일스님은 『이같이 귀중한 불상이 좀이 슬어 도금이 벗겨진채로 있어 부처님 모시는 입장에서 송구스럽기가 그지없어 개금불사를 감행키로 했다』고 밝혔다.이 개금불사는 앞으로 2년간 설판및 동참제자를 모연하고 복장성물도 모집한뒤 94년 시작할 예정이다.(05 61)44­2269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석주열사/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착취앞장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백범 지도받아 상해에서 군자금모집 활동/민족혼 일깨우려 단신으로 서울잠입,장거/“2천만 민중이여 분투하라” 일경과 총격전끝 장렬히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함께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나석주열사가 선정됐다.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열사는 일제 착취의 간성인 동양탁식회사에 폭탄을 투척,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인물.나열사의 당시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가 경제수탈에 집중될 때 발생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따라서 선생의 의거는 의열투쟁이라는 단순한 사건 차원을 넘어,당시 민족운동으로 승화된 농민·노동운동 차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정부는 지난 62년 3·1절에 열사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2천만 민중아,분투하여 쉬지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져간 나열사의 생을 되새긴다. 1890년.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 이곳은 당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가 설립한 양산학교가 있었다. 백범과 나열사의 운명적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아버지 나병헌과 어머니 김해금씨 사이의 외아들 석주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양산학교를 거치며,몸과 마음이 굳센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황해도 재령 출생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이 지방까지 번지면서부터 청년이 된 석주는 「고기가 물을 만난」듯,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3월 하순,어느날.사리원 부호 최병항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강도들은 답지않게 모두 최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최부자도 그제서야 좌정을 하고 냉정을 찾았다.그때 한 복면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반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최부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오히려 6인조 강도들이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너,석주로구나! 그 복면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그래,춘부장 어른께서도 편안하신가?』 깜짝놀란 석주는 복면을 벗고 최부자 앞에 조아렸다.나머지 다섯명도 얼굴을 드러냈다.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등이 그들이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이것밖에 없으니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나!』 최부자가 「강도들」에게 내놓은 돈은 무려 6백30원이었다.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6인조는 크게 감동,엎드려 큰 절을 드린 다음,인사를 올렸다. 『저희들이 떠나고나면 즉시 위경에 연락하여 권총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십시오.왜경이 눈치 채면 봉변을 당하십니다』 ○6인조 강도 사건 6인조 강도단은 4월에도 다시 안악부호들인 김응석 원형락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등 그 활동이 신출귀몰하였다. 수사망이 좁혀들기 시작하자 나석주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1920년 11월 22일이었다.「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다. 나석주는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을 다시 만난다.당시 백범은 임시정부 경무국장. 이때부터 나석주는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임정 경무원·의정원 근무와 함께 한인애국단·의렬단 가입으로 폭파활동과 군자금 모집활동등이 전개되었다.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등에선 전술전략을 연마했다. 1926년.나석주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이 닥쳐오기 시작했다.그것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인 김창숙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5월 김창숙과 백범은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함께 모색했다. 이들 두 거두는 「지금 무엇인가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쳐주지 못한다.이때에 위정기관과 친일부호를 박멸하여 국내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한다」는 방략에 일치를 보았다. 이를 실행할 인물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김구가 먼저 제의를 했다. 『나와 친한 결사대원으로 나석주 이화익과 같은 용감한 청년이 지금 천진에 있다.또 그곳에는 의열단원도 많으니 무기를 구입,천진으로 가서 기회를 보는 것이 좋겠다』김창숙은 두명의 조선청년을 만났다.그리고 계획을 설명했다.둘은 거침없이 나섰다. 『우리들은 일찍이 한번 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나석주로 결정이 되었다.이화익은 섭섭한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김창숙이 말했다. 『백범도 그대의 장도를 학수고대하고 있소.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탁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대의를 위한 무운을 비는 바이오』 「중국 산동성 출신.나이 35세.이름 마중덕」 1926년 12월 26일.인천항에 상륙한 이 중국인은 다름아닌 나석주였다.「마중덕」은 열차를 이용,진남포로 향했다. 고향을 떠날 때 한마디 이별의 말을 하지못한 부모님과 부인,그리고 아들·딸을 보고싶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귀향길에서 그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가 고향등지에 펼쳐져 있다」는 정보를 듣게된다. 나석주는 바로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피눈물이 흘렀다. 중국인 전용여관 「동춘전」.1926년 12월 28일.날씨는투명했으나,조국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나석주는 아침밥을 든든하게 들었다.그리고 낮이 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오가는 동포들의 표정이 어두웠고,슬프게 느껴졌다. ○들리지않는 폭음 하오 2시5분.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이게 웬일인가! 뒷벽 기둥에 던져진 폭탄은 불발이었다.절망적인 생각이 찰나처럼 스쳐지나갔다.폭탄을 입수할 때 시험을 하지 못한 점,6개월간의 보관기간중 뇌관에 녹이 슬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회한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다행히 일인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나석주는 태연하게 정문을 나섰다. 『그렇다면,이젠 동탁이다!』 동탁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석주는 기민하게 움직였다.1층에서 왜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2층으로 뛰어올라가 또다른 왜인에게 사격한뒤 놀라 도망가는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 기술과장실에 나머지 폭탄 1개를 힘껏 던졌다.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내려오며 2명의 왜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거리로 나와 폭음을 기다렸다.그러나이게 또 웬일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시야가 노랗게 변해갔다.황금정(지금의 을지로1가)쪽에서 달려온 경찰을 쏘아 쓰러뜨릴 때까지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황금정2정목에 이르렀을 때에는 왜경들의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졌다.나석주는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2천만 민중아,분투하여 쉬지말라!』 나석주는 자신의 가슴에 나머지 3발을 쏘았다.그것은 해방의 날을 준비하기 위한 장렬한 불꽃이었다. ◎역사적 평가/일 경제수탈에 맞선 농민의 아들 「나는 고향을 떠난지 6년여에 공연히 동서로 분주하면서 아무런 성공없이 지내왔으니 제일은 민주에 대한 죄인이요,제이는 가주에 대한 죄인」이라고 고향 동지인 최호준에게 1925년5월의 편지로 몸부림치던 나석주의사,그는 끝내 민족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1926년 12월28일 백주에 을지로(당시 황금정)네거리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나석주의사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리에서 태어났는데 북률면은 재령강이 흐르는 나무리들(여물평)로서 원래는 조선왕실의 궁방전이 많았으나 일제가 점유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불하하여 9할의 면적을 동척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따라서 북률면민은 거의 동척회사의 소작농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나석주의사도 동척농장의 소작인 나병헌의 외아들로 자라났다. 그가 1926년12월28일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지금 을지로입구 외환은행 본점자리)와 식산은행(지금 롯데백화점자리)에 수류탄을 던지고 또 동척 관계자 6명을 살상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일제 경찰간부를 처단하고 자결 순국했는데 그때 나석주의사가 동척이나 식산은행을 표적했다는 것이 자기 가정의 처지로 봐서 우연이 아님을 알수 있다.그렇다고 가정 보복으로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1926년은 일제 식민통치가 경제수탈에 집중되어 민족운동이 사회경제운동을 고조시키고 있던 때였다.당시 전국에 걸쳐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확산되던 가운데 특히 북률면 동척농장의 소작쟁의가 용천 불이농장의 소작쟁의를 부추기면서 사회운동이 권익운동과 더불어 일제 수탈기구에 대항한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그럴때 조선민족의 눈에 동척회사나 식산은행이 수탈 본산으로 잡혔던 것이다.그러므로 나석주의사의 의거는 의열투쟁만의 논리를 넘어 농민운동·노동운동을 포괄한 민족운동 총체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26년의 의열단은 광주에 있는 황보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있었다.즉 1919년 창단 이래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의 내용처럼 개인의 작탄활동(의열투쟁)을 전개하다가 이제 막 군사편대활동으로 방법을 바꾸고 있었다.그러니까 나석주의사의 의거는 의열단으로서 의열투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나석주의사는 의열단과 유림단의 소망을 안고 순국했으며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대변하면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하였다.그럼으로써 일본제국주의에는 철퇴를,세계에는 경종을 울렸고 우리 민족에게는 용기를 불러 일으킨 정의의 화신으로 청사에 빛나고 있다.
  • 산업계 건전경쟁풍토 조성 기대

    ◎오늘부터 시행 「영업비밀보호법」을 알아보면/관리하는 기업 비밀·노하우 대상/특허출원 않고 기술 무기한 독점/부정수단으로 유출됐을땐 법원에 제소 가능 「영업비밀보호법」이 15일부터 시행된다.이에따라 산업계의 새로운 경쟁질서가 자리잡게 됐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영업비밀보호에 대한 규정이 없어 기업들의 부정경쟁을 막는데 역부족이라는 지적을 들어야했다. 예를 들어 지난85년 정밀화학가공업체인 K기업의 경우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투입,개발한 플라스틱제조공정이 한 직원에 의해 대만으로 유출돼 이 공정을 이용,생산한 제품이 국내에 역수입되는 바람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뒤 회사는 유출한 직원을 찾아냈어도 『아는 사실을 말해주었을 뿐』이라고 말해 절도죄로 고소는 물론 아무런 조치도 취할수 없었다. 영업비밀보호는 기업이 시간과 돈을 들여 개발한 기술이나 인력을 투자없이 다른기업이 부정한 방법으로 손쉽게 가로채려는 행위를 막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제품과 기술의 설계방법·설계도·실험데이터뿐만 아니라심지어 코카콜라의 원료 배합비율등의 제조기술·고객명부·판매계획등… 형태는 없으나 회사의 영업활동을 위한 기술·경영상의 노하우를 모두 가리킨다. 이같이 범위가 넓어 사실상 기업이 비밀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것이면 모두 영업비밀에 속한다. 하지만 비밀보유자가 비밀을 유지하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때만 보호를 받는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기업 스스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 사항을 비밀로 인정할수 없기 때문이다. 영업비밀은 공개를 원칙으로 한 특허와 달리 특허출원을 하지 않고 무기한 기술을 독점할수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특별히 영업비밀유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절도·사기·협박등 부정한 수단으로 영업비밀이 유출되었을 경우,피해기업은 민사상 침해행위금지·제품의 폐기및 제거청구권·손해배상청구권·신용회복청구권등을 제기할수 있다. 특히 현직 임직원이나 전직원이 이익이나 기업에 손해를 끼치기 위해 영업비밀을 제3자에게 누설했을때에는 3년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 기업의 관계자는 『이법의 시행은 기업들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고 기술·경영상의 노하우를 개발,축적하도록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또 영업비밀의 부정입수를 목적으로 한 인력스카우트를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믿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영업비밀보호추세에 따라 통상마찰해소와 함께 첨단분야의 기술및 노하우이전이나 합작투자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회사가 사원에게 일정기간동안 경쟁기업으로의 입사를 금지하는 불평등 계약등을 강요하거나 방해할수 있어 인력스카우트의 위축은 물론 직업선택의 자유을 제한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한편 기업들은 영업비밀의 보호관리를 위해 사원들에게 영업비밀유지의무를 정기적으로 교육하는등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또 정보의 등급화,일정 지위의 임원만 볼수 있는 정보와 일반 직원의 접근이 가능한 정보를 나눠 별도 관리하는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허청 신창준관리국장은 『이제 국내 기업들은 각자 특성에 맞게 영업비밀 관리체제를 마련해 기술도입이나 수출등에 대응해야 한다』면서 『본청은 이 법안에 대한 상담이나 교육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북녘의 선거 어떻게 치러지나(오늘의 북한)

    ◎단일후보 놓고 찬반투표… 겉치레 행사/당서 후보지명,유세대신 “충성 맹세”/17세이상 선거권… 거의 100% 투표/초기엔 「흑백투표제」 실시… 외부비난 일자 단일함으로 제14대 대통령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비밀·자유·직접·평등의 원칙에 따라 유권자 누구나가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기도 한다.그렇다면 공산당 1당의 독재가 합법화된 북한의 경우는 어떨까. 북한에는 우리의 국회의원선거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지방의 주권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인민회의선거 등 두 종류의 선거가 있다.그러나 이들 선거는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투표로 치러지는 요식행위에 지나지않아 우리의 선거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또 지금 대선과 관련,전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과 같은 열띤 선거유세를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북한선거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북한의 선거에도 후보자 추천 및 후보등록과정이 있긴 하다.그러나 후보자는 노동당조직부에서 선정하는 단일후보이기 때문에 다른 당의 후보와 득표경쟁을 벌일 필요가 전혀 없다.단일후보는 각 공장·기업소의 종업원협의회,협동농장직원회의,주민회의 등을 통해 추천된다.하지만 이는 형식이고 실제로는 각급 당위원회 조직부서가 추천자를 내정하고 있다.북한에도 노동당외에 허수아비격인 「조선사회민주당」「천도교청우당」등이 있어 타당후보도 추천되고 있다.그러나 이들 당후보도 노동당조직부서가 추천하기는 매한가지여서 어느 당에서든 일단 후보로 지명되기만 하면 당선은 떼논 당상이나 다름없는 셈이다.우리와 같은 선거유세활동이 없는 대신 북한에는 후보등록이 끝난 직후 열리는 후보자 지지대회란게 있다.선거기간동안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김일성·김정일부자를 중심으로 한 단결의 중요성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당정간부나 선동원들이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등 각 단위로 파견돼 강연·해설·담화등으로 선거홍보활동을 벌인다.당에 의해 지명된 단일 후보자들은 선거공약이 아닌 김부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과 함께 선거구 유권자에게 이와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서신을 보내고 각종 매체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한다.이 기간중 인민학교(국민학교) 고등중학교 학생들은 부모에게 선거에 참여하는 「기쁨」등을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써보내기도 한다. 투표일이 되면 유권자들은 노래와 춤등으로 축제 분위기를 즐기다가 정해진 시간에 작업반장이나 인민반장의 인솔 아래 투표하게 된다.때문에 투표는 짧은 시간안에 끝난다.투표시간은 상오 7시부터 하오 6시까지이지만 통상 12시 이전에 모두 종료된다.투표는 「노력영웅」이 제일 먼저하고 훈장숫자등 공훈정도에 따라 순서가 매겨진다.투표일 당시 출장중인 유권자는 출장증과 공민증을 보여주고 「현지투표」 할 수 있다.노약자와 신체불구자들을 위해서는 이동투표함이 준비된다. 이같은 방법을 통해 북한은 지난 48년이후 지금까지 치른 26차례의 선거(최고인민회의 9·지방인민회의 17)에서 제9기대의원선거(99·78%)를 제외하곤 매번 1백%의 투표율을 기록해 왔다. 투표방식은 제1기(48년) 제2기(57년)투표시 찬성과 반대표를 다른 투표함에 집어넣는 「흑백투표함」제도를 실시하다 외부로부터의 비난이 거세지자 62년 10월 제3기 선거때부터 단일투표함 제도로 바꾸었다.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다.투표소에 들어간 유권자는 투표자명부 대조후 앞쪽은 「선거표」 뒤쪽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라고 쓰인 투표용지를 받아 찬성이면 투표함 앞에 서서 김일성사진에다 공손히 절을 한후 투표용지를 그대로 넣으면 된다.반대할 경우는 후보이름 위에 「X」표를 해 투표함에 넣게 되어 있다.그러나 반대표시를 하기위해서는 투표함 옆 지상 5㎝정도의 좌대에 놓여진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그러나 다음 투표자가 언제 커튼을 들추고 들어올지 모르므로 이런 모험을 할 사람이 있을리 없다. 북한의 유권자는 만17세 이상 주민으로 돼있다.그들의 개정(92년4월9일)사회주의 헌법 제66조는 『17살 이상의 모든 공민은 성별·민족별·직업·거주기간·재산과 지식정도·당별·정견·신앙에 관계없이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문에 북한은 우리가 만 20세 이상인 국민에게 선거권,25세 이상인 국민에게국회의원 피선거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과 관련,『젊은이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제하고 있다』며 오히려 비난하고 있기도 하다.
  • 어머니/김상복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굄돌)

    12월이 되니 8년전 12월 생각이 떠오른다.내 생애에 최고의 크리스마스선물을 받은 달이었다.그 당시 워싱턴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날 하오도 습관대로 교수 사무실로 별 생각없이 우편물을 찾으러 갔다.그날 받은 세통의 편지중 하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것이었는데 발신인의 성함으로 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이었다.그 편지부터 뜯어보았다.『제가 북한에 계신 제 부모님을 찾았는데 제 부모님에게서 온 편지 속에 선생님의 편지가 들어 있어서 보내드립니다』 간단한 사연이 적힌 메모지와 함께 또 하나의 흰 봉투가 접혀서 들어 있었다.의아한 생각이 들었다.북한에서 나에게 편지가 오다니? 내 이름과 주소가 어설프게 영자 타이프로 찍혀 있었고 발신인은 영어 약자로 쓰여져 있어서 잘 모르겠으나 끝에는 「D.P.R.K.­PyengYang」이라고 되어 있었다.「평양」이란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어려서 반공교육을 받아 온 나에게는 순간적으로 무슨 불온문서를 받아 든 느낌도 들었다.뜯어보니 그 속에 달필로 쓰여진 넉장이나 되는 긴 편지가 들어 있었다. 서두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보고싶은 나의 아들 상복아!』「나의 아들」이라니? 「아들」이라면 「어머니」가 쓴 편지가 아닌가? 나의 어머니는 평양에 계신데 어머니께서?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어머니!』19 50년 6·25전쟁중 유엔군이 후퇴하던 당시 나는 평양에서 얼떨결에 어머니와 헤어졌다.어머니라면 지금은 80이 훨씬 넘으신 노할머니가 되셨을 터인데 아직도 살아 계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급하게 읽어내려갔다.그해 8월14일 폭격에 돌아가신 아버지,방공호에 들어가 무사히 살아 남은 네 동생들,수많은 조카들의 소식,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으시다는 애절한 어머니의 하소연들이 알알이 적혀 있었다.믿어지지가 않았다.그러나 믿고 싶었다.나는 이 시간을 위해 36년동안 날마다 기도해 오지 않았던가? 수십년만에 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어머니의 편지를 막상 손에 들고보니 오히려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실 분이 없었는데 그 분이 아직도 살아계셨구나! 『어머니!』 일년이지난 다음해 여름 어머니를 나의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었다.36년동안의 꿈은 현실로 나타났다.이 세상에는 「어머니」란 단어보다 더 큰 단어가 없다.이제 새로 탄생할 대통령은 어떤 일보다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의 아들과 딸들에게 부모님들 앞에 무릎꿇고 『어머니,아버지』를 부르며 큰 절을 할수 있는 기회를 하루 속히 만들어주기 바란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7)

    ◎유년시절:5/“7세때 3·1운동 참여” 우상화 극치/“총탄속에 짚신 벗어들고 독립만세”/온가족이 함께 육탄투쟁한듯 기술/생부 투옥때 면회내용도 날조 투성이 김일성이 만6세때 만경대에서 행동했다는 「사적」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군함바위:만경대 집 건너편 산 밑에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다.김일성은 이 바위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같이 탄 아이들에게 대장칼을 휘두르며 『원수 왜놈들을 베어버리자』고 돌격명령을 내렸다.그들은 만경봉 아래에 있었던 일제의 해각까지 돌격하였다.그래도 그는 부친을 투옥한 「왜놈」에 대한 증오를 삭일 수 없었다. ○“평생의 감명” 회고 ②김일성이 평양감옥에 부친을 찾아가서 면회했다는 이야기는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므로 이것을 발췌해 놓는다. 우리가 들어간 면회실은 햇빛조차 잘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아버지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어머니더러 잘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상해서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얼굴 목 손 발 할것없이 살이란 살은 온통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다. 『네가 그새 컸구나.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예,아버지도 집에 빨리 돌아오세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불굴의 모습에서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었다.아버지의 상처는 항일혁명투쟁 전기간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18년 가을에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필자는 김일성이 김형직의 감옥살이를 1919년이라 했다가 16년으로 변경한 후 17년이라고 다시 고친 사실을 앞에서 지적하였다.그런데 면회 갈때의 나이까지 몰랐던 그가 회고록에서는 면회실에서의 회화내영까지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런데서 이 면회극은 역시 창작이라고 밖에 볼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의 어린이들은 이런 식으로 「원수에 대한 증오」와 「김부자에 대한 효성」으로 자체를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유년시절 우상화의 하이라이트는 만7세때 그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이다.「회고록」에서는 일부러 「독립만세의 메아리」라는 1절을 설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여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언한 다음,「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시위대열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수만명 시위 주장 만경대와 칠골 인민들도 대열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우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 시위에 나섰다.떠날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열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이던 나도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열에 끼어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비슷이 따라 잡을수가 없었다.그래서 어떤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열을 따라갔다.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적들은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시켜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그러나 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수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보통문 앞에서도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양철통 두드렸다” 이날은 내가 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본 날이며 우리민족의 유혈을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어린 나의 가슴도 분노로 끓어 번졌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가 또다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양철통까지 두드리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었다.나도 형복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있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①무지개 비낀 만경봉 110∼119면 ②「세기와 더불어1」 30∼33면 ③같은책 36∼37면
  • 무용가 정재만씨(이세기의 인물탐구)

    ◎힘차고 광활한 춤사위… 남무의 대가/벽사에 사사한 승무,만개앞둔 꽃망울 연상/“생활이 춤”… 삶의진실 담은 전통 재현 노력/작품구상땐 무작정 거리 헤매… 「구두한켤레」 별명도 □연보 ▲948년3월 경기도 화성출생 ▲72년 경희대 무용학과 졸업 74년 동 대학원 졸업 ▲73∼79년 국립무용단단원 ▲80년 국립국악원 수석무용 ▲80∼87 세종대 무용과 조교수 현재 정재만무용단,남무단대표(정기공연),벽사 춤아카데미 대표,서울예술단 무용감독,한국무용가협 부이사장 「92 춤의해」운영위원,숙명녀대 무용과 교수 국립무용단 무용극 출연 「별의 전설」「왕자호동」「꿈꿈꿈」「시집가는날」등서 주연 해마다 대한민국 무용제·무용예술큰잔치·무형문화재 공연참가 「춤소리」「□」「춤 그 신명」「먼길」「홰」「비천무」「바라춤」「학춤」「승무」「살풀이굿」「학불림굿」「춤4319」「달맞이」「비단타령」「빛과 소리」(88서울올림픽)「자화상」「한량무」「꿈」「광대의 꿈」「북소리사위」「태극선의메아리」「길놀이 마당놀이」뮤지컬 「옹고집전」「양반전」「지신밟기」안무 84년부터 미국·유럽각지역·동남아·호주·남미·이스라엘·연변·북경·상해 백두산 등 각지역 순회공연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중요 무형문화재평가회의 「학무」최우수상,82대한민국 무용제 안무상,84대한민국 무용제 대상,제45회 디종 국제민속예술제 금상 수상 정재만의 춤은 힘차고 광활하다.수평의 폭이 넓고 수직은 하늘로 솟구친다.긴 장삼 얼기설기하여 공간으로 획 뿌리치는 무태에는 비구름이 묻어있다.그리고 움직임 움직임마다에 기쁨과 슬픔,고통과 오뇌가 휘몰아치다 잦아든다. 신라시대 화낭을 연상케 하는 씩씩한 기상과 자신감 넘치는 풍모가 정재만 춤의 특징이다.그가 한번 춤추기 시작하면 그 주술적인 힘에 매료되어 관객은 어깨춤이 절로 나거나 한동안 숨을 멈추게 된다. 특히나 그의 「승무(승무)」는 날이 갈수록 깊은 맛을 더하여 푸른 못속에 뜬 연(연))꽃 봉오리가 만개하려는 찰라다.이제 그는 춤을 알게된 나이다. 15∼16년전쯤 어느 사석(사석)에선가 정재만의 스페인춤을 본적이 있다.그때만해도 조택원이후 송범씨가 그 맥을 이어받았을뿐 남성무용수는 다섯손가락이 넘지않았고 그중에서 정재만은 첫째 둘째를 다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살풀이」며 「산조」를 한자리씩 추는 자리에서 유독 구둣발로 바닥을 울리며 등장하더니 그는 「투우사의 노래」를 허밍하면서 정열적인 스탭으로 「투우사의 춤」을 밟아나갔다.한국무용을 하는 사람답지 않은 힘찬 스타카토의 리듬이 돋보이는 춤이었다. 테이블의 붉은 카네이션을 양복주머니에 꽂고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물레타처럼 휘두르며 이리저리 소를 유인하는 동작은 마치 영화 「바렌티노」에서 누레예프의 탱고춤이 어울리듯 그늘진 구석없는 화려한 스페인춤이 더없이 어울려보였다. 춤추기 시작한지 어느덧 30년.그의 이력에는 「송범 문하생·벽사 한영숙전수생·김백봉사사」가 자랑스럽게 따라다닌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 그는 일찍이 송범문하에 들어가 전통무의 발디딤새를 배우고 벽사의 「승무」「살풀이」「학무(학춤)」를 전수하여 중요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 전수조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기전 그는 경기도당굿이 성했던 화성에서 태어나 동네에서 벌어지는 굿판에 몰두한 시절이 있었다.하루종일 굿구경에 빠져있다가 배고파 집에 돌아오면 가난이 기다렸다. 옹기를 굽는 집안에서 9남매중 다섯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불우한 소년기를 보내야했고 그래서 차라리 굿판에나 따라다녔으면 하는게 소원이었다. 본래는 부농이었으나 아버지 정수환씨(70세로 82년 작고)가 남의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집안이 망해 광성국민학교를 졸업하던해 서울로 이사,위로 큰형과 세 누나와 뿔뿔이 헤어져 그는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방배동 단칸방에 정착했다. 그때는 어머니(김순림여사·78)가 동작동 국립묘지 앞에서 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아직 중학교에 가지못한 그는 낮에는 집안을 치우고 동생들을 돌보다가 저녁밥까지 지어놓고 동작동까지 나가 어머니의 꽃 모판을 받아이고 돌아오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그런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책을 읽었다.하루는 헌잡지에서 본 조택원씨의가사를 떨쳐입고 춤추는 사진과 일대기를 읽고는 막연하나마 조택원씨처럼 되고싶은 꿈을 꿨었다. 『저앤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은데 어디 양자라도 보내어 공부를 계속하게 했으면』 어머니는 설거지에 밥하고 동생이나 돌보는 아들의 고생이 보기 안쓰러운 나머지 동료 꽃장수들에게 그렇게 하소연하곤 했다. 그후 인천으로 출가한 큰누나의 집에 얹혀살면서 여기서도 낮에는 조카들을 봐주고 밤에는 인천대건중학교,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고에 진학하면서 가정교사,그러다가 가정교사로 있던 주인집의 소개로 필동에 있던 송범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잔심부름과 청소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뚜렷한 이목구비에 재빠른 동작을 눈여겨본 송범씨가 그에게 조금씩 춤을 지도했고 그는 한 동작 한 동작을 혼신을 다해 익히면서 스승이 귀가한 후에도 혼자서 밤새도록 마루바닥을 뛰었다.발바닥이 얼얼하게 부어 성할 날이 없었다. ○송범씨 만나 춤과 인연 벽사 한영숙씨의 제자가 된 것은 벽사가 71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였다. 폐쇄적인 당시의 무용인맥에서는 좀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송범씨는 자신의 문하생을 선뜻 벽사에게 허락해주었다.고 한성준옹으로부터 그의 따님이던 한영숙씨에게 전수된 문화재급의 주옥같은 춤들을 남자무용수로서 전수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벽사의 유일한 남자제자가 된 그는 「승무」「학무」를 비롯,「살풀이」「산조」「훈령무」「태평무」를 차례로 전수받았고 벽사로서도 부친의 춤의 맥을 잇는다는 일념외에도 그를 친아들처럼 믿고 의지했다. 89년 10월 벽사는 눈을 감으면서 그의 춤의 사군자로 일컬어지던 승무·학무·살풀이·태평무의 보존과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한 「살풀이」「태평무」에 대한 당부를 그에게 녹음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요즘도 공연을 앞두거나 해외에 나갈땐 경기도 남양주군 남한강가에 모신 스승의 산소를 찾아 돗자리를 펴놓고 춤추는 성묘로 보고하기를 잊지 않는다. 지난해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승무·학무 보존을 위한 벽사춤아카데미를 청담동 그의 무용연구소에 개설,6월에는 「나의 춤모(모)에게 바친다」 추모공연을 가져 무용계에 훈훈한 미담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송범의 춤의 특징인 수직과 대학·대학원의 지도교수였던 김백봉의 수평,벽사의 곡선을 두루 망라하여 춤에서의 원의 완미를 이룬다는 목표를 세우고있다. 스승이 남긴 승무·학무의 보존을 위해서는 고유의 특성을 훼손·변질시키지 않는데 그치기보다 「삶의 진실에 대한 표현,삶에 대한 유기적 통찰」의 의미를 담아 전통을 재현해낸다는 자세다. 한때 초기의 춤에서 환희와 힘을 과시하면서 극적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의 외롭고 초췌했던 성장기를 은폐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창작무용에 손대기 시작한 80년에 접어들어 그는 씩씩한 우조에서 벗어나 높은 것을 한층 난춰 감동이 배제된 은은한 계면조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춤소리」와 「□」은 화려함속에 비감이 느껴지는 수작으로 그는 한작품 작품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시대를 뛰어넘는 불후의 빛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역시 그런 각오로 빚어진 「북소리사위」는 북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춤추는 사람이 5북에서 9북을 다루는 파격적 춤사위로 「거동이 정한(정한)하면서도 흥과 멋이 섬화처럼 빛나는 쾌작」으로 손꼽힌다. ○해마다 전국순회 공연 무용계에 남성무용수가 적은 것을 안타까워한 그는 세종대교수시절 졸업생들을 모아 정재만 남무단을 발족,87년 국립극장에서 창단기념공연을 가진이래 숙명녀대로 옮겨와서도 해마다 방학이면 이들을 이끌고 대전·대구·부산에서 당진·서산·합덕에 이르기까지 지방 구석구석을 찾아 순회공연하는등 안성들만의 「훈령무」와 「학무」 「북소리사위」를 펼치고 있다. 73년부터 6년간 국립무용단의 주역으로 뛸때의 파트너이자 경희대 후배인 박순자씨와 75년에 결혼,박순자씨는 무용극 「시집가는 날」의 여주인공을 끝으로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무용단을 떠났다.자녀는 용진(남·국악고2)형진(여·국민교1)남매. 요즘도 그는 스승들을 사사하던 시절과 똑같이 새벽4시에 일어나 5시부터 연구소에 나가 3시간연습,낮에는 대학강의와 무용감독으로 있는 서울예술단에 출근했다가 하오 6시부터 밤10시반까지 연습,춤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구소로 달려간다.춤구상을 할때면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는 버릇 때문에 「구두 한켤레」란 별명이 붙어있다.한두달에 보통 구두한켤레씩을 해뜨린다는 얘기다. 그의 생활모두는 춤이다.춤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흥미도 관심도 없다.그의 춤의 한 단면만을 본 사람이라면 씩씩하고 남성다운 용모로 인해 그들 솔직하고 사교적인 인물로 착각하기 쉽다. 더구나 「한량춤」에서 보이는 「끼」와 가락은 한량기질이 넘쳐보이기도 한다.물론 아직은 40대중반이어서 그의 춤이 달통의 경지라고는 미리 말할순 없을 것이다.다만 견제가 심한 무용계에서 일관된 침묵과 양보,남과 다투지않는 화합의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만 파고든다. 이따금 옹기장이이던 가난한 부친과 그의 굽던 옹기생각에 온몸이 뜨거워지고 아버지 그리움에 곧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그래서 요즘은 아버지를 위한 창작무 「사금파리」를 구상하고 있다. 남모를 추억과 슬픈 그리움 때문일까.그의 춤추는 손가락 끝에선 피가뚝뚝 흐르는 절규,비스듬히 미끌어지듯 내딛는 보법에는 메마른 눈물과 싱그러운 꽃가루가 동시에 흩날린다. 깊이 숙여쓴 고깔과 백합같은 정화,허공 한끝을 헤매는 속눈썹엔 부세의 번뇌가 향연처럼 타오르고 그의 승무는 지금 속절없는 방황을 헤뜨린듯 하얀 소매끝에서 장한이 적멸된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합장)인양」 동중정을 극도로 자제하여 그속에는 탄식 같은 흐느낌을 소리없이 감추고 있다.
  • 북경∼서울의 앞날/한진건 북경대교수 서울신문 47돌 특별기고

    ◎황해경제 한·중 축으로 대도약/경쟁아닌 보완관계로 호혜기반 강화/경협 우선,문화 등 교류폭 점차 확대를 지난 8월 중국과 한국간에 이뤄진 수교는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었다.중국인들로서는 오랫동안 바랐던 일로 모두가 마음속으로 매우 흡족해했다. 수교를 계기로 양국간에는 기존의 경제무역 교류는 물론 문화예술방면의 교류도 봇물 터지듯 활발해지고 있다.또 두나라가 가까워짐에 따라 동북아시아 뿐아니라 전세계 평화를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분석이 관계전문가들 사이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이는 한국과 중국 두나라 국민이 양국관계의 발전을 위해 온갖 지혜를 모아야할 이유가 될수 있을 것이다.상호간 친선증대를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우선 경제분야에선 상호이익이라는 전제아래 협력체제를 강화해가야할 것이다.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는 협력은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잘아는 바와같이 중국과 한국은 지난 79년부터 무역거래를 시작했다.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나라 사이에는 국교가 없었던 탓으로 홍콩이나 일본 싱가포르등의 중개업체를 통해 서로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어쨌든 양국무역은 84년에 급격히 늘어난데 이어 88년에는 본격적인 상호의존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지난해에는 60억달러에 육박한 것으로 전해지고있다.그러다가 올해는 관계전문가들로부터 1백억달러의 예측이 나오고 멀지않아 2백억달러교역도 가능하리라는 얘기들이고 보면 정말 꿈만같은 일들이 우리앞에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이에반해 한국업체들의 중국에대한 투자는 아직까지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것 같다.물론 수교 직후에는 억달러단위의 투자가 계획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는 있으나 그동안 한국업체들의 대중국 투자의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아직 중국의 경제정책을 완전히 믿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업체들이 많은것 같고 중국의 투자환경이나 상품시장에 대한 이해부족도 꼽을수 있을것 같다. 모두들 잘아는 바와 같이 중국은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한데다 인구까지 많아 노임마저 아주 싸기 때문에 한국업체들이 투자하기엔 안성맞춤이라는게 본인의 소박한 생각이다.거기에다 거리도 가깝고 서로 바다로 연결돼 수송에도 문제가 없고 언어장벽까지 해소시켜줄 조선족도 많지 않은가.반면 우리 중국에는 자금이 부족하고 기업경험이 많지 않을뿐아니라 시장자율경제에 대한 의식도 부족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업체의 중국투자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근본적으로 한국업체도 이익을 보고 중국인도 그 덕을 좀볼수 있는 터전은 이미 마련됐다는 얘기이다. 중국이 갖고있는 기술밑천은 기초연구사업과 일부 전자기술연구가 좀 앞서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하지만 연구비가 부족하고 기술판매시장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어서 중대한 연구가 중도에 그만두게 되거나 일부 기술항목은 연구에 성공했다해도 기업의 상품생산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런 기술을 이용,합작사업을 벌이면 양측 모두 큰 이득을 볼게 뻔하다. 양국간 건실한 협력체제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할수 있어야함은 물론이다.중국과 한국은 지난 몇십년간 상호 격리상태로 지내왔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너무 몰랐던게 사실이다.그래서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인이 말하고 행동하는데 많은 제한을 받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막상 현지에 와서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물론 어떤 면에서는 아직 개선할 여지가 있지만 모두들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한다. 사회전반을 놓고 볼때 나쁜 버릇과 그릇된 행위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을수 있다.예컨대 일부 중국인들이 버스를 탈때 줄을 서지않은채 앞다퉈 오르거나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는 행위,상점판매원의 퉁명스런 태도,달러암시장에서 액수를 속이는 일따위를 들수있다.그러나 이같은 일들은 모두 일시적인 현상이다.경제발전과 사회적 계몽에따라 점차 종적을 감추게될 사회적 쓰레기들에 불과하다. 일부 한국인들은 이같은 일들을 싫어할수도 있겠으나 너무 신경쓸 일은 못된다.어느 사회든 결함이 전혀없는 완벽한 사회는 없기 때문이다.중국도 결함이 많지만 장점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중국인의 한가지 모습을 보고 중국인은 모두 이럴것이라고 판단하면 안된다.중국은 영토만해도 남한의 1백배나 된다.기후도 한대 열대 온대지방을 모두 갖추고 있을 정도이며 지역마다 각기 다른 풍광과 문화유적을 지녀 만약 중국내 32개 성·시를 모두 여행하고 나면 32개 국가를 돌아다닌만큼 다양한 경험을 갖게 될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중국이나 한국은 모두 한문화권에 속한다.특히 한국에서는 유교문화의 정수가 구석구석에 스며있다.모두가 예의 바르고 어른을 존중하며 부모에 효도하고 가문의 전통을 중시한다.그래서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존경해왔다.이와는 반대로 중국에서는 문화혁명의 많은 파괴과정을 거쳐 유교사상의 장점들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거나 아예 사라지게 됐다. 몇해전 어느 한국학자가 공자의 탄생지인 곡부를 방문했을 때 많은 외국인들이 공자사당에서 절을 하는데 정작 중국인들은 옆에서 팔장을 낀채 구경만하더라고 전한바 있었다.사실 한국의 성균관과 문묘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와 그 주요 제자들을 위한 제사를 예부터 줄곧 지내오고 있으나 중국에서는한동안 중단됐다가 80년대에 와서야 다시 시작됐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간에 문화교류가 본격화되면 한국의 유교사상은 도리어 중국에 되돌아 전파돼 중국국민들에게 영향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이러한 문화적 반작용은 중국인들로하여금 유교의 훌륭한 전통을 잘 이어받게 하고 한문화권을 더욱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지금 상당수의 한국유학생들은 중국에서 한의 경제학 중문학등을 공부하고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한국에서 연구사업등에 종사하고 있다.이는 양국간에 진행해야할 수만갈래의 교류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그동안의 경제와 문화교류의 범위를 기술정보 철학 종교 라디오 TV등 각 분야로 확산시켜야 한다.이를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해야할 것이다. □약력 ·44년 협서성봉상현출생 ·70년 북경대 동방어언문학부 조선어과졸업 ·78∼80년,86∼87년 김일성종합대학어문학부 연수 ·현 북경대 동방어언문학부 조선어과교수 ·저서:「중한동물명칭사전」 「중한식물명칭사전」 「한국속담선집」 「한국속담이야기」 「한국말의 어원을 찾아서」 「세계풍속전서」
  • 점보트론차·농악팀동원… 축제 방불/김영삼(대선 유세현장)

    ◎대규모 군중대회에 버스연설 병행/김대중/무개차 타고 초대형연단서 사자후/정주영/독립기념관 참배/이종찬/서울역서 집회/박찬종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나선 각당 후보들은 21일 서울 및 중부권지역에서 일제히 첫 공식적인 유세에 돌입,옥외집회 대결을 벌였다. ○충북·강원 5곳서 ▷민자 김영삼후보◁ 이날 충북 음성·충주·단양·제천과 강원의 영월등 5곳에서 군중연설을 한데 이어 탄광지역인 사북 및 태백지역 주민들과 간담회를 갖는 등 첫날부터 밤늦게까지 마라톤유세. 이날 음성유세에서는 연단이 마련된 연설용차량과 김후보의 연설모습을 외곽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대형비디오화면이 설치된 점보트론차량이 선을 보내신속하고 현대화된 유세풍속도를 반영.또 3천여명의 청중들은 김후보 사진이 담긴 피켓과 태극기 및 수기를 흔들며 『김영삼』을 연호했고 행사 전후에는 민자당의 농악팀 「곰돌이패」가 한마당농악을 펼쳐 분위기를 고조. 이어 이날 상오11시30분 충주체육관앞 광장에서 열린 충주유세에서는 김후보가 헬기로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한 식전행사가 1시간가량 열려 눈길. 이 행사에는 연예계의 김후보 지지모임인 「큰 나래회」에서 탤런트 이덕화,가수 김지애,코미디언 김형곤씨가 나와 흥을 돋우었고 그룹사운드 「코리아나」가 88올림픽 공식가요였던 「손에 손잡고」를 열창하는 가운데 휘트니스무용단소속 20여명의 무용수가 연기를 펼쳐 1만여명이 넘는 청중들의 열기를 고조. 행사장에는 민자당의 상징인 대형곰돌이 인형이 연단주변에 자리잡았고 청중들 곳곳에 당원들이 「난 알아요 김영삼당선을」「김영삼 천하지대본」「깨끗한 김영삼 실천하는 김영삼」등이 쓰인 플래카드와 사진 피켓을 들고 김후보를 연호했으며 행사장 외곽에는 「신한국 김영삼」이라고 쓰여진 대형 애드벌룬을 설치해 주민들의 참석을 유도. 김후보는 충주유세에서 『부족한 내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도록 꼭 만들겠다』고 자신감을 표시. ○전철타고 안산에 경기도 안산·시흥·부천시등 수도권을 돌며 대규모 군중집회와 소규모 「버스유세」를 병행해가며 공식적인 첫 유세를 시작. 이날 첫 유세지인 안산 초지운동장 유세에서 김대표는 『군사정권 31년,민자당통치 33개월동안 정치·경제·사회등 모든 분야를 다 망쳐놓아 국민들은 좌절과 낙담속에 살고 있다』고 강조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꼭 바꿔보자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일고 있다』며 포문. 김대표는 이에 앞서 상오10시40분 승용차로 영등포역광장에 도착,시민·상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지지를 호소한뒤 수행원 40여명과 함께 전철을 직접 타고 안산에 도착. 전철안에서는 시종 미소를 띤채 옆좌석에 앉은 시민 이필윤씨(81)등과 생활주변얘기를 소재로 환담을 나누며 「부드럽고 따뜻한」분위기를 연출. 김후보는 이 집회에서 『부천은 민주주의를 섬기고 총선때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준 곳』이라고 말문을 연뒤 『바로 이같은 여러분의 성원,지지 때문에 이번 대선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시. ○상인들과 악수도 ▷국민 정주영후보◁ 이날 인천시청앞 광장에서벌어진 선거유세는 갑자기 수은주가 뚝 떨어져 쌀쌀한 날씨를 보이는데도 불구,후보등록뒤 첫유세답게 많은 청중이 모여 시종 뜨거운 열기속에서 진행. 유세장에는 「경제대통령 정주영」「통일대통령 정주영」「갈아보자 썩은정치 살펴보자 병든경제」등의 플래카드가 나붙었고 폭31m 높이5m의 초대형연단이 마련. 한라산농악대와 청년당원을 앞세우고 트럭을 개조해 만든 무개차를 타고 정대표가 채문식공동대표 김동길최고위원 등과 함께 유세장 중앙통로로 입장,연단에 오르자 청중들은 정후보의 사진과 국민당의 마스코트인 호랑이그림이 붙어있는 피켓을 흔들며 「대통령 정주영」을 열렬히 연호. 정후보는 연설에서 『세계에서 우리국민이 가장 부지런하고 착한데도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것은 썩은 정치탓』이라며 『여러분들을 잘살게 하기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강조. 정후보는 유세연설을 마치자 이웃 석바위종합시장에 들러 상인들과 장보러 나온 시민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물건값을 물어보는등 득표활동.○선열에 출정보고 ▷새한국 이종찬후보◁ 새한국당의 이후보는 이날 상오 충남 천원군의 독립기념관을 참배,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서 선열들에게 대선출정참배를 한뒤 인근 지역에서 모인 1천여명의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즉석 유세. ○명동모임은 좌절 ▷신정 박찬종후보◁ 신정당의 박후보는 이날 상오 10시 서울 명동성당앞에서 첫 유세에 나서려했으나 하루전 연설회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관위 직원의 제지를 받자 중앙선관위로 직행,『어제 유세장소허가신청을 했으나 관할구청이 교통방해를 이유로 거절했다』고 항의. 박후보는 이에 따라 이날 하오 서울역광장에서 첫 유세를 갖고 양금시대청산과 세대교체등을 내세우며 기존 정치권을 집중성토.
  • 부시­클린턴 정권인수회담/러시아 등 분쟁지역문제 중점논의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당선자는 18일(현지시간)제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뒤 처음으로 워싱턴의 백악관을 방문,부시대통령과 정권인수관련사항등을 논의하는등 다음 대통령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클린턴은 이날 부시대통령과의 회담에 이어 워싱턴시내의 흑인상가방문,어린이보호기금모금파티 참석,정계·언론계 주요인사들과의 만찬등으로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클린턴은 부시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뒤 기자들에게 『대통령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만남이었다』고 밝히고 『대통령으로서 직면하게 될 국내외 문제,특히 러시아·보스니아·중동문제와 급증하고 있는 의료보험비용 문제를 중점 논의했다』고 전했다. 부시대통령과 클린턴 당선자가 만나는 동안 정권인수단 대표인 버논 조던과 워런 크리스토퍼는 부시대통령측의 정권인계단 대표인 앤드루 카드 교통장관과 별도 회담을 갖고 내년 1월20일 있을 정권인수를 준비하기 위해 정부 각 부서에 정권인수단을 배치할 시기에 대해 논의했다. ◎클린턴 워싱턴나들이 이모저모/흑인상가지역 들러 주민들과 대화/“세금낭비 불가” 국빈숙소 사용 거절 ○…클린턴은 이날 하오1시 방탄용 검정색 리무진으로 백악관에 도착,집무실 바깥 차량진입로에 미리 나와 기다리던 부시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악수를 나눴다.불과 보름전만해도 서로를 적대시하며 헐뜯다시피 공격을 하던 사이였으나 이날만은 한사람은 정권의 인계자로서,또 한사람은 정권의 인수자로서 따뜻한 분위기속에서 예정시간을 45분이나 넘겨가며 1시간40여분동안 「국사」를 함께 논의했다. ○…백악관회동이 끝나자 클린턴은 곧바로 워싱턴시내 북부지역의 조지아 애뷔뉴에 있는 흑인 상가지역을 방문,시민들의 환호속에 약1시간동안 도보로 가게를 찾아다니며 주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지역은 1마일 반경내에서 지난해만 8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등 최근 들어 미국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있는 도시내부문제의 표본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클린턴은 수산물 식료품상에 들러 『은행이 더많은 대출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면서 앞으로 의회와 함께협력하여 경제를 호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클린턴은 이날 저녁 부인 힐러리여사가 선거직전까지만해도 회장으로 있던 아동보호기금이 마련한 모금파티에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이날 모금파티는 한사람당 3백달러이상씩의 기부금을 내게 되어있었으나 1천2백여명이나 모여 성황을 이뤘다. 클린턴내외는 이어 정권인수위원장인 버논 조던이 초청하는 만찬에 참석했다.클린턴은 19일 의사당을 방문,민주당과 공화당소속 의회간부들을 만나 새 행정부가 추진해나갈 정책을 적극 뒷받침해 줄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클린턴은 이에앞서 이날 상오 특별전세기편으로 아칸소의 리틀 록을 출발,워싱턴의 내셔널 공항에 도착,백악관 이웃 헤이 애덤즈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백악관측은 정권인수팀의 워런 크리스토퍼 사무국장의 요청에 따라 공군제트기와 국빈들이 묵는 블레어 하우스의 사용을 양해했으나 클린턴은 『벌써부터 납세자의 세금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 왜 녹황색 야채를 먹어야하나/김숙희 이화여대교수(영양칼럼)

    요즘 우리들의 건강문제를 위협하는 것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아마도 암일 것이다.신체의 어느 부위의 암이건 일단 진단을 받고보면 거의 절망에 가까운 느낌을 갖는다.요즘 들려오는 소문중에는 병원에서 암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진 사람이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들에게 폐나 덜끼치겠다는 생각으로 산 좋고 한적한 절의 암자로 들어갔다고 한다.거기서의 생활이란 지금까지의 자기에게 부딪치던 현실과 결별을 하고 또다른 현실에 적응하고자 가능한 여건을 생각해보니 그저 밥이나 죽이나 닥치는대로 먹고는 일단 방을 나서서 발길 닿는대로 산을 걷는 일이었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대로 아침을 먹고는 나서서 산으로 들로 걸으면서 눈에 뜨이는대로 잎을 따서 입에 넣어 거부감이 없으면 삼키고 또 열매도 따서 입에 넣어서 그저 그러면 모두 삼키면서 기운이 있는데까지 이러한 산책을 일과로 삼아서 한 3년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삶을 크게 갈망하지도 않은채 그날 그날을 이렇게 지냈다고한다.어느날 가족들의 권유를 따라서 진찰을 다시한번 받고는 의사선생의 놀람을 보고 서로 놀랐다고 한다.죽음을 연상시켰던 암의 증세가 희망을 가질만큼 호전되었다고 한다. 요즘 녹황색 야채나 과실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천연색소인 카로틴의 폐암에 대한 효과를 다시한번 재평가하고 있다.특히 베타 카로틴을 다량섭취하면 폐암의 치료까지는 기대하지 못하지만 상당히 수명연장이 되며 상태도 상당히 호전된다고 한다.이에 덧붙여 폐암뿐만이 아니라 위암,간암 등을 위시해서 장기에 발생한 암에 대한 효과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가해온 베타 카로틴의 영양학적 신체내의 기능은 섭취후에 비타민A로 전환되어서 비타민A로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면 비타민A를 다량섭취하여도 같은 효과가 있나 하는 의구심에서 실험해본 결과 카로틴으로 섭취한 결과와 같지 않았다는 보고이다.결론은 베타 카로틴 고유의 기능이 있어서 위에 지적한 부위의 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힘은 없어도손에 잡히는대로 따먹은 열매나 잎은 거의 베타 카로틴의 함량이 높은 식물(식물)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암의 원인을 다양하게 추측한다.그중에서 스트레스도 생각한다.절에 가서 한가하다기 보다는 안정된 자기모습으로 쫓기지 않으면서 모든것을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여유스럽게 한잎 두잎 따먹으면서 인생을 음미해보는 그 시간이 아마도 치료에 일부를 담당하였으리라고 생각도 해본다.
  • “가을엔 책 더 읽지않는다” 69%/도서관이용자 조사

    ◎업무·취업준비로 가장 바쁜 계절 ○…도서출판 사계절이 서점및 도서관이용자 5백3명을 대상으로 10월중에 실시한 설문조사결과 응답자의 69%가「가을철에 책을 더 읽지 않게 된다」고 답했다.또 56%는 「가을철이라고해서 특별히 독서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기존 통념과 차이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가을에 오히려 독서를 하지 않는 이유로는 응답자의 39%가 가을은 업무및 취업준비등으로 1년중 가장바쁜 계절이기 때문이라는 반응을 나타냈다.그러나 희망하는 여가활동으로는 독서가 36%로 문화활동(32%),여행(18%),스포츠(1%)에 비해 가장 높았다. 가을철에 특별히 읽고 싶은 책으로는 34%가 고전,명상류등을 지적했으며 시집·수필류가 29%,대하소설은 17%순이었다.
  • “나는 주체사상에 속았다”/조선노동당 연루 황인욱씨

    ◎간첩활동 참회 장문의 반성문 제출 「남한조선노동당중부지역당」 사건으로 구속돼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인 황인욱씨(25·서울대대학원 서양사학과·2년·중부지역당기관지 편집국장)가 5일 간첩활동을 참회하는 장문의 반성문을 검찰과 재판부에 제출했다. 16절크기의 조사용지 28장에 써낸 반성문에서 황씨는 자신의 운동권투신경위,친북성향을 갖게된 경위,형 인오씨(36)의 간첩활동에 연계된 경위 등을 설명한뒤 주체사상에 대해 비판했다. 황씨는 「환상에서 깨어라」라는 부제를 붙인 대목에서 『안기부로 압송돼 조사를 받으면서 북한사회와 김일성에 대한 나의 생각이 비이성적 추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면서 『한국사회의 자주통일을 위해 실천했던 반미선전사업이 북한의 한민전노선에 기초한 반국가적 간첩행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말했다. 황씨는 또 「북한·주체사상·그리고 운동권에 대한 전망」이라는 소제목이 붙는 대목에서는 『객관적으로 체제가 안고있는 정치적 부자유와 경제적 낙후라는 문제점을 외면한채 수령관으로 주민의 자유와 개성을 제한하고 있는 북한의 지도노선은 세계사적 흐름에서 볼 때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북한은 주체노선을 포기하고 수정주의를 거쳐 현실에 맞는 실용주의철학을 수용하면서 시대착오적인 대남공작사업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황씨는 이어 『남한의 자주·통일운동세력권속에 나와 같은 전철을 되풀이하는 사람이 다시 없기를 바란다』면서 『혁명주의를 내걸었던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공개적인 합법활동을 추구하고 나섰듯이 지금은 순수한 대중운동으로 돌아가 합리적 방법론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때』라고 덧붙였다.
  • 3당이 제시한 「대선약속」 비교/“물가 잡겠다”/체감공약에 비중

    ◎국민 대화합·잘사는 나라 건설에 목청/“실명제 내년 실시” 등은 실현성에 의문 민주당과 민자당이 2일과 3일 각각 1백개와 77개 중점공약을 발표,본격적인 정책대결에 들어갔다.국민당도 오는 6일 50백여개의 공약을 확정한다는 계획아래 마무리손질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자·민주당의 공약과 잠정확정된 국민당의 공약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것이 많아 전체적으로 우리사회의 문제점 해결방식에 대해서 비슷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경제부분에 역점 특히 3당의 공약에는 군정종식이나 독재타도등과 같은 정치적 구호는 사라지고 국민대화합,물가안정,소득증대와 같이 국민들의 피부와 와 닿는 것들이 많아 시대상황의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민자·민주 양당의 공약은 경제 제1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국민당을 의식,경제부분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민자당측은 이와함께 책임있는 정당, 나아가 집권가능성이 가장 큰 정당으로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은 배제하고 반드시 실천할 수 있는 공약만을 엄정 선정했다고 주장하면서 민주·국민당의 공약은 선심성이 상당부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민주당의 근로소득세 40%경감,농어촌 부채탕감,수세및 농지세 폐지와 국민당의 아파트 반값분양등과 같은 것은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라는 것이 민자당의 입장이다. 김영삼총재도 이날 공약을 확정지은 선대위 상임위원회회의에서 『국민들이 정치를 불신하게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실성이 없는 공약의 남발에 있었다』면서 『예산의 뒷받침이 가능하고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공약만을 선정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민주당측은 민자당의 공약에 오히려 선심성이 더 많다고 주장하며 정부의 낭비성 예산을 줄이면 민주당의 공약은 실현 가능하며 이미 재원확보방안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측은 예컨대 주택3백만호 건설공약에 대해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기하지만 5년동안 소형위주로 건설하면 충분히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법 철폐 주장 국민당도 민자당측의 주장을 반박하고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기위해 아파트 반값분양등과 같은 공약을 시범적으로 시행한다는 계획을 세어놓고 있다. 그러나 3당이 모든 공약을 발표한 것은 아니다. 민자·민주당은 물론 국민당도 앞으로 선거유세과정에서 이른바 「비장의 카드」인 깜짝 놀랄만한 공약들을 터뜨려대선에서의 득표를 노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3당 공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분야에서는 민자당이 깨끗한 정치와 강력한 정부의 구현,지역·계층간 갈등해소와 대사면을 통한 국민대화합을,민주당이 부정부패청산과 도덕정치의 구현에 의한 대화합의 정치를 제시했고 국민당도 비슷한 공약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민자당은 국가보안법이 개정되기위해서는 북한의 태도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비해 민주·국민당의 이의 철폐를 공약했다.안기부의 기능에 대해서도 민주·국민당은 대외정보활동에 국한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방법론에 차이가 있을 뿐 3당 모두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경제분야 가운데서도 3당 모두가 금융실명제실시를 주장한 것은 실물경제에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 다만 민자당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냐에 따라 실시시기에 대해 다소 유동적인 반면 민주·국민당은 93년안에 실시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실현 가능성에 의문의 소지가 없지 않다. 또 민자당은 94년부터 흑자경제시대의 개막을 전제로 2년이내에 물가 3%수준으로 안정,금리 한자리수 인하와 개인소득 1만5천달러 실현을,민주당은 2년안에 무역수지 흑자,2년이내에 물가 3%안정등 비슷한 공약을 내걸었다. ○농어촌 지원 관심 3당은 또한 대선에서의 득표력을 의식,최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어촌과 중소기업분야,여론의 관심이 높아진 환경보전분야에 대한 지원을 경쟁적으로 약속했으나 방법론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 시각은 비슷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육분야에서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민자당은 입시제도의 개선과 대학정원의 점진적인 자율화를 내걸었으나 민주당은 중학의무교육제도의 즉각적인 실시,모든 대학지원자 수용을,국민당은 대학입학정원의 자율결정을내세웠다. 민자당측은 이같은 민주당등의 공약에 대해 재원확보 대책이 없거나 대학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약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근로자및 여성,문화·청소년분야에서도 3당이 대체로 비슷하나 민주당이 노조의 정치활동보장,공공기관에 여성할당제 도입,공보처폐지등을 내걸어 눈에 띈다. 3당의 통일론도 대체로 비슷하며 한·미안보체제의 유지와 주한미군의 주둔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의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3당의 공약은 미래에 대한 장미빛으로 가득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같은 분홍빛 공약들이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느냐가 관건이라 하겠다. ◇3당 주요 대선공약비교 ●정치 ­민자 ▲깨끗한 정치 ▲대사면 ▲강력한 정부 ▲능률행정 ▲지방화시대 ­민주 ▲범국민적 내각구성 ▲정치자금 양성화 ▲국가보안법폐지 ­국민 ▲국가보안법 개정 ▲대선직후 자치단체장 선거 ●경제 과학 기술 ­민자 ▲2년내 물가3%안정 ▲정보산업 육성특별법제정 ▲지역균형개발법 제정 ▲과감한 금융자율화 ▲토지과다규제완화 ▲금융실명제 조기실시 ­민주 ▲국제수지적자 2년내 흑자 ▲93년까지 금융실명제 실시 ▲한국은행독립 ▲정경유착 단절 ­국민 ▲금리 7∼8%유지 ▲금융실명제 93년 후반기 실시▲금리규제와 통화규제철폐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 과세 ●농어촌 ­민자 ▲농어촌 발전위원회설치 ▲농지거래규제 대폭완화 ▲쌀시장 개방불가 ­민주 ▲쌀·쇠고기등 기간작목 개방불허 ▲수세및 농지세폐지 ▲양곡정책개혁 ­국민 ▲농어민연금제 실시 ▲영농후계자에 대한 병역면제 ▲농지매매시 재산권행사 제한요소완화 ●중소기업 ­민자 ▲중소기업 창업절차 간소화 ▲신용보증 확대및 은행대출용이▲세금 대폭경감 ▲지방중소기업 육성법 제정 ­민주 ▲중소기업 진성어음 1백%할인 ▲중소기업 소득세감면 ▲소기업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제정 ­국민 ▲중소기업 인력스카우트규제법 제정 ▲중소기업 금융채권 발행활성화 ▲중소기업 전담은행 공격 ●환경보전 ­민자 ▲폐기물처리 체계개선 ▲대도시 교통난해결 ▲무주택 영세민에 대한 주거비지원 ▲노인건강관리법 제정 ▲주택가격안정 ­민주 ▲통합의료보험 실시 ▲장애아동 의무교육실시 ▲식품공급 검사제 강화 ­국민 ▲아파트 반값공급 ▲주택전산망 완비해 가수요 조절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 누진중과세 ●교육 ­민자 ▲입시제도개선과 정원자율화 ▲교원지위향상 ▲사학지원 대폭강화 ­민주 ▲중학의무교육 즉각 전면실시 ▲대학 전일제수업과 모든 지원자수용 ­국민 ▲중학의무교육 실시 ▲대학입학정원 자율결정 ●근로자 ­민자 ▲근로복지기금조성 ▲고용보험제실시 ▲직업병 예방철저 ­민주 ▲근로소득세 40%경감 ▲고용보험제 실시 ▲노조 정치활동 보장 ­국민 ▲6급이하 공무원 단결권및 단체교섭권 인정 ▲근로소득자 면세점 물가연동 ●여성 ­민자 ▲여성차별법·제도개선 ▲여성정치참여 확대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여성보호 ­민주 ▲공직선거·공공기관에 여성할당제 도입 ▲남녀고용평등 감독관 신설 ▲성폭력 특별법제정 ­국민 ▲여성인력개발·고용촉진 ▲보육시설 확충 ●문화청소년 ­민자 ▲예술인 창작여건 개선 ▲선진방송기반 구축및 자유와 책임이 조화된 언론환경조성 ▲건강하고 밝은 청소년 육성 ­민주 ▲공보처폐지,공보전담공보실로 전환 ▲지원하되 간섭않는 문화정책실시 ­국민 ▲지방문화진흥 ▲생활체육저변확대 ●통일외교국방 ­민자 ▲금세기내 통일실현 ▲통일에 대비한 미래지향적 국방태세확립 ▲아·태 번영주도 ­민주 ▲1연합2독립정부→1연방2지역 자치정부→1국가1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추진 ▲군복무기간 18개월 단축 ­국민 ▲대북군사우위유지 ▲국민통일→경제통일→정치통일
  • 소설가 황순원씨(이세기의 인물탐구)

    ◎소설을 시의 경지로 승화시킨 “청산의 백학”/작품 끝낼때마다 “마지막 작” 심정으로/문장·단어 하나까지 보석처럼 갈고 닦아/시·소설의 잡문엔 손 안대… 문학박사학위도 거절 서울신문사는 증면과 더불어 새로운 기획물 「인물탐구」를 매주 화요일 1페이지에 걸쳐 연재키로 했습니다.이 와이드 기획물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가지고 관심있게 대하는 사람의 이야기 인물평전입니다.그것은 삶의 모습을 담은 인생일 수도 있고 세상살이와 고리를 함께 하는 인간의 진면목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집필은 본사 이세기논설위원이 맡았습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산골아이」나 「소나기」「학(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투명하게 정제된 청강(청강)의 문체와 명편에 흐르는 별빛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정서속에 총총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새삼 황순원문학과 한국문학사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오늘의 위치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청산의 백학」「소설을 시의 경지로 승화시킨 언어미의 추구」「하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절고의 기품」등 이미 잘 알려진 시중의 찬탄을 되풀이 열거하는 것도 무색한 노릇이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한뿐 더이상 다른말은 하지 않는다」,그래서 독자들에게 책임지고 소설을 내놓기위해 그는 문장 한구절 단어 하나에 세심하게 배려하여 「토씨」 한 자도 잘못 놓인 바가 없다는 정평을 받고있다. 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남에게 읽힐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 27편중 12편을 빼 버리고는 『내가 이렇게 버린 것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 내지 말기를』당부하기도 한다. 작품이 활자화되기 이전까지 그만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켜 초교에서 재교까지 꼼꼼하게 손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넘치는 감정의 뒷받침없이는 작품을 써본적이 없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쓰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사일언적(일사일언적)인 그의 압축된 문체의 시정신은 「생각나면 시구를 적어두는 운문적 스케치 방식,사전구상에매이지 않고 붓이 생각해서 쓰도록 맡겨두는 데서 온 탄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문장은 말하듯이 써야한다고 하지만 귀로 듣는 말과 눈으로 읽는 글이 같을 수 있을까. 그는 언젠가 들은 감명깊은 강연을 후에 속기록으로 살려 글로 옮겨쓴 것을 보고는 그 지리멸렬함에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 「역시 말하듯이 말하고 글쓰듯이 써야 한다」고.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보석처럼 갈고 닦는 언어 탁마(탁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설을 끝낼때마다 「나는 과연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는가」를 자신에게 묻기를 잊지 않는다. 이른바 지난 60년 동안 시와 소설외에 단 한번도 잡문을 쓰지 않았고 신문연재소설을 거절해 왔으며 어떤 단체에도,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 제자들이 새로 책을 내면서 서문이나 발문을 부탁하면 정중하게 이를 말린다.그자신도 그의 책속에 서문이나 발문을 써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나 서문이나 발문은 독자가 소설을 읽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재직했던 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할때도 「소설가는 소설가 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이를 깍듯이 거절했다.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예만으로는 그가 얼핏 까다롭게만 비치기 십상일것이다. 물론 문학을 하는 길에서는 공정·엄격하고 단호하고 결벽하다.그외엔 인자하고 다감하고 말을 아끼고 술을 즐긴다. 주량은 3년전까지는 소주 한병반,주력은 문단데뷔보다 빨라 13세때부터 체증(체증)으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문학하는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술마시는 자리에서도 명정(명정)의 모습을 보이거나 비틀거려 누가 댁까지 바랜일도 없다. 아무리 취중이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빛나는 형안(형안)으로 경청하고는 내용이 정확치 않으면 두번 세번 되물어 확인하기 때문에 어설픈 지식이나 주워들은 풍월은 통하지 않는다. 다만 「술」에 얽힌 일화라면 그의 친구이며 번역문학가인 원응서씨와의 총죽지교(총죽지교)를 빼놓을 수 없다. 황순원과 술자리에서의 「마지막잔」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술자리에서든지 원응서씨는 『그 마지막 잔은날주게』하는 버릇이 있었다.술이 바닥에 이르면 이유도 없이 친구는 이 술을 탐냈고 언제부턴가 마지막 술은 원응서씨의 몫으로 돌아갔다. 73년 낚시갔다가 쓰러져 친구가 타계하자 황순원씨는 술마시는 자리에서 반드시 이 마지막 잔을 친구에게 따라주었다. 잔에 술을 따라 빈그릇에 버리는 이 의식은 지난 20년간 한결같이 지켜져온 그의 친구를 그리는 아름다운 슬픔의 장면이다. 역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라면 77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때의 예가 있다. 그때 최종심에 두편이 남게되자 같은 심사위원인 홍성원씨가 『두편중 선생님이 고르시지요』했다. 아무래도 대선배인 황순원씨가 당선작을 확정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으나 그는 굳이 홍성원씨의 선택에 따르겠다면서 이를 사양했다. 『하나는 군대물로 장래성이 보이고 다른 하나는 뱃사람 얘기로 소설기법상 우수하므로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장래성 보다 소설로서 완벽한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럼 뱃사람 얘기로 결정하세』 뱃사람 얘기로 결정후 잡담하는 자리에서『군대물을 쓴 사람은 바로 내 제자』라고 했다는 얘기다. 그는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작품이상으로 그를 부추기거나 추켜세우지 않는다.또 어떤 경우에도 남을 악평·혹평하는 법이 없다. 그가 문단후배들을 즐겁게 했다면 72년 2월 현대문학사가 주최한 문인극 「양반전」에 특별 찬조출연한 일이다. 유현종 연출로 한국일보 13층 홀에서 공연된 이 연극에서 그는 박영준 최정희씨와 함께 「동네사람」으로 분장해서 모처럼 문단에 훈훈한 화제를 뿌려주었다. 황순원씨는 언제 어디서나 명징·적연할뿐 넘치거나 눙치지 않는다.보기싫은 것·듣기 싫은 것·하기 싫은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여 전혀 주저가 없다. 오산중때 남강 이승훈씨의 단정한 풍채와 인품을 보고 『남자가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했다는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늙어서 아름다운 남자축에 들수 있기를」마음속에 그려왔는지도 모른다. 황순원씨는 평남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교육자이며 조림사업을 하던 황찬영씨와 장찬붕여사의 아들 3형제중 장남.숭실학교 출신인부친은 숭덕학교 교사시절 바로 남강과의 기미독립만세사건으로 수감된 적이 있었고 64년 창우사에서 펴낸 「황순원 문학전집」(전6권)제자는 바로 부친의 친필이다. 숭실중으로 전학하여 졸업후 일본 와세다 제2고등학원 재학때 나고야 김성여전에 다니던 양정길여사와 35년 결혼,동갑인 양여사와는 평양 숭의여고 문예반장때부터 교제해온 사이다.자녀는 시인이자 서울대 영문과 교수인 동규씨(54)등 3남1녀. 요즘은 부인과 함께 새벽7시면 사당동 대림아파트 단지내 공원을 1시간씩 산책하면서 처음 문단 출발때처럼 오랜세월 가슴에 담아두었던 시어를 고르고 있다. 삶을 정관하는 절제된 서정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정,보석을 눈에 띄지않게 장식한 듯한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감동하게 되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울같은 청휘,또는 고치에서 막 뽑히기 시작한 명주실 같은」바로 그 싱그러운 시와 문득 마주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최근 시에 이렇게 쓰고 있다. 밤늦어 플랫폼에 내 긴 그림자를 끌고 섰을때 밀물이 거슬러 오르는 강물을내 저만치서 바라볼때 가을걷이 끝낸 들판을 내 해걸음녘에 거닐때 그러나 나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항상 곁에 지키고 있는 이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이가 누구라는걸 나는 안다­.
  • 눈동자/김희수 김안과병원장(굄돌)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화가라고 부른다.화가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도 하지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선녀가 피리를 불며 구름을 타고 내리는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천당과 지옥까지도 그려 보여주는 이가 화가이다. 신라의 전설적인 화가 솔거는 황룡사의 벽에 노송 한 그루를 그렸다고 한다. 그 소나무는 너무나 실물과 흡사하여 지나든 새들이 날아 들다가 벽화예 머리를 부딪혀 수도 없이 죽게되므로 살생을 금하는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할 수없이 그림을 지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국보 제13호인 무위사극락전은 벽화로 유명하다.처음 절을 지어놓고 내부벽화를 그려줄 화가를 찾지 못하여 걱정만을 하고 있을때,지나가던 걸인 차림의 과객이 찾아와서 『내가 벽화를 그려 드리겠소.그러나 한번 법당문을 닫고 들어가면 벽화가 완성 될때 까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을 것이니 절대로 문을 열거나 틈새로 들여다 보아서는 아니됩니다』라는 약속을 굳게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달이 지나고 두서너달이 지나도록 인기척이 없으므로 궁금하게 생각한 스님이 창문에 구멍을 내고 법당안을 들여다 보았다고 한다.한마리 새가 입으로 붓을 물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약속이 깨어지자 그만 붓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렸다고한다.문을 열고 내부를 둘러보니 아름다움을 넘어서 신비스러움까지 느낄 정도로 완벽한 그림을 그렸으나 오직 관세음보살의 눈동자만은 그리지 못한채 영원한 미완성으로 끝맺음을 하였다고 한다.화가는 관세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릴 수 없었을까,그리지를 못했을까? 하나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머니의 눈동자라고 한다.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10일을 넘지 못한다.나이를 먹고 늙어갈수록 익어가는 어머니의 눈동자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성스러워진다.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동자를 보라! 어느 화가가 감히 그릴 수 있단 말인가.슬플때는 슬픔을,기쁠때는 기쁨을,아플때는 아픔을,미울때는 미움까지도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눈동자이다.있는것 없는것 모두를 그릴 수 있는 화가라도 눈동자만은 그려내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겨준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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