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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절 특사 496명 석방

    법무부는 19일 3·1절을 맞아 행형 성적이 우수하고 재범의 우려가 없는 모범 수형자 325명과 모범 소년원생 171명 등 모두 496명을 20일 석방한다고 밝혔다. 이번 특사 대상에는 매월 20일 시행되는 월례 가석방에 포함되지 않는 무기수 및 형기 10년 이상의 장기수 37명과 각종 기능자격 취득자,검정고시 합격자,기능대회 입상자 등이 포함돼 있다. 법무부는 그러나 조직폭력배,가정파괴범,인신매매범,마약사범 등 고질적인 민생침해 사범은 석방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 불교성지 네팔 룸비니·인도에 대규모 한국사찰 세운다

    ◎대각사 용성 스님 문도회 중심 추진/룸비니 국제사원구역에 대웅보전 25일 기공/인 부다가야·녹야원 등에도 10년내 건립계획 한국의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 국제사원구역에 네팔 최대규모의 법당을 세우고 인도의 불교 4대성지에 대규모 한국사찰을 건립한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조실 불심도문 스님)는 오는 25일 네팔 룸비니 현지에서 해외사찰인 대성석가사(주지 법신 스님)의 대웅보전 기공식을 갖는다. 이 대웅보전은 오는 3월 완공될 연건평 1천500평의 요사채에 이어 세워지는 것으로,2천556평 규모의 3층(1층 1천66평,2층 780평,3층 480평,옥상 280평)구조를 하고 있으며 총 공사비 4억5천여만원이 투입된다. 대성석가사는 지난 95년5월 네팔정부와 룸비니동산의 국제사원구역에 2만평의 대지를 99년간 임대차 계약을 맺고 그해 12월 7백여평의 요사채를 준공한 이후 1년2개월만에 대웅전을 기공하게 됐다. 이번 기공식에는 네팔 교육부장관,유엔 룸비니 국제사원개발위원회 록다산 고문과 현지주민,한국인 성지순례단등 1천여명의 네팔인과 한국인이 참석해 역사적인 대웅보전의 건립을 축원할 예정이다. 대성석가사는 대웅보전을 오는 2003년께 완공할 계획이며 이밖에도 제2요사채의 건립과 강원과 율원,선원,국제회의장,승려와 신도 숙소,식당,휴게실 등 10여개의 건물을 만다라 형식으로 짓게된다.경주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재현한 석탑과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연못과 석교 등 한국의 전통사찰 형식으로 탄생할 이 건물들은 네팔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네팔의 대성석가사가 모두 완공되는 2005년에는 3천여명의 동시 숙식이 가능해져 그동안 이곳을 찾을때 일본이나 태국,티베트,미얀마,스리랑카의 사찰이나 호텔에 묵는 등 불편을 격어온 한국불교도들의 성지순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각사는 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부다가야와 최초로 설법한 녹야원,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원정사,열반지인 구시나가라 쌍수원등에 각기 1만평의 대지를 구입,앞으로 10년동안 현대적인 한국절을 지어 한국의 신도와 승려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할 예정이다. 네팔과 인도의 대성석가사 건립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중 한 사람인 대각사주지 용성 스님이 『세계화시대가 되면 불교의 성지를 한국불교계가 주도적으로 가꾸라』는 유훈을 남긴데 따라 용성스님문도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고 있다.용성 스님의 법제자인 불심도문 스님은 『우리 국력이 세계적으로 성장했는데도 불교성지에 한국의 절이 없어 신도들이 우리나라보다 못한 나라의 절에 숙식하는 등 불편하고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면서 『1천6백년 전통의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부처님법을 온 인류가 실천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사찰불사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이 총리 “노동법­한보문제 모든 공직자 책임”(국무회의:11일)

    ◎정시채 농림 “사회지도층이 근검절약 앞장서야” 11일 열린 정례국무회의에서 이수성 국무총리는 한보파동과 관련해서 공직자들에 대한 당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총리는 먼저 『최근 노동법 문제와 한보문제에 대해 언론들은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은 지적』이라고 말했다. 이총리는 『모든 공직자는 국민에게 언제나 무제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법률적인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행정적·도의적 책임은 그에 못지않게 큰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총리는 특히 『모든 공직자는 재임기간 사회와 경제안정을 이룩하고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함으로써 국민을 안도시킬 의무가 있다』면서 『국무위원을 포함,전 공직자들은 매일 최선을 다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 성심을 지녀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시채 농림부장관은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한보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식 차원에서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특히 사회지도층이 근검절약에 솔선수범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총리는 『설 연휴를 큰 사건·사고 없이 보내게 되어 다행』이라면서 귀성객 인전수송과 교통소통대책·화재 및 각종 사고예방 등 설 연휴 종합대책 추진을 위해 애쓴 국무위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총리는 특히 『일선현장에서 차례도 못 지내고 고생한 관계공무원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한다』고 말했다. ○…이총리는 『지난 1월 중순 이후 이상건조기후가 계속되어 지난 연휴기간중에도 13건의 산불이 일어났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대보름 쥐불놓이나 입산객이 늘어나 산불발생이 우려되고 있는 만큼 내무부와 산림청 등 관계부처는 제반 대책을 강구하여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김한규 총무처장관은 『제78주년 3·1절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3·1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오는 3월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광역시·도에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의결안건◁ ▲국립중앙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제정안) ▲전기통신기본법 시행령(개정안) ▲전기통신공사법 〃(개) ▲공중위생법 〃(개) ▲「국제연합요원 및 관련요원의 안전에 관한 협약」가입안 등
  • 해인사(음식문화 이렇게 바꾼다)

    ◎발우공양… 식사후 물따라 마셔 쓰레기 없애/식사인원 미리 철저히 파악… 음식량 조절에 신경/자장 등 기름기 많은 음식은 뷔페식 자율 배식도 절에서는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식사를 마친 스님들의 바리때(나무로 만든 그릇)에는 쌀 한 톨,콩나물 대가리 하나 없다.아침에 먹다 남은 음식은 점심에,점심에 먹다 남은 음식은 저녁에 국이나 찌개로 만들어 먹는다.철저한 「재활용」이다.어쩌다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이 음식물쓰레기를 남기기도 하지만 이것도 며칠을 모아야 잔반통 하나를 채울까 말까 할 정도다.경남 합천 해인사의 사례를 소개한다. 지난달 31일 낮 해인사 본사 오른쪽 대적광전 옆에 있는 수행도량인 정수당의 반지하 식당.한 구석에서 스님 몇 명이 사시공양(점심식사)을 하고 있다.스님 대부분이 외출을 한 터라 스님 모두가 큰 방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회사의 구내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식판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다.식당 한 쪽 배식대에는 밥과 국,그리고 반찬을 가득 담은 큰 그릇들이 놓여 있다.이른바 뷔페식이다. 스님들은 각자 먹을 만큼 식판에 담아 먹는다.식사시간에 절에 남아 있는 스님들이 얼마 되지 않거나 식사 후 기름기 때문에 그릇이 잘 닦아지지 않는 짜장 또는 카레를 만들어 먹을때는 발우공양을 하지 않고 이처럼 자율배식을 한다고 한다.『이제는 절도 현대식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에서는 10명 남짓한 행자스님들이 밥을 푸고 또 보살간에서 만들어 날라온 두부 등 반찬을 먹기 좋게 썰고 있다.보살간은 보살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해인사에는 70세가 지난 쌍둥이 보살을 비롯해 10여명의 보살이 있다.보살들은 주방 출입을 하지 않고 보살간에서 반찬만 만든다. 공양간이라 불리는 주방에서는 밥만 짓고 국과 찌개는 갱두간에서 만들어 가져 온다.일종의 분업이다. 하지만 식사인원을 정확하게 예상해 음식을 만들어 식사 뒤 남는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주방 입구에 있는 잔반통은 음식물쓰레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주방에서 일하는 이름을 밝히기를 극구 꺼리는 한 행자스님은 『절에서 무슨음식물쓰레기가 나온다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 왔느냐』면서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인사의 스님은 모두 160여명.모두 비구다.여기에 객승과 처사(절에서 일하는 직원),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를 합쳐 식사를 하는 인원은 한 끼당 220여명선.하루에 한 가마를 조금 웃도는 쌀이 든다.일반인 같으면 200명이 넘는 인원이 먹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지만 스님들은 식사량이 적기 때문에 한 가마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절의 살림을 총괄하고 있는 주현 스님의 설명이다.밥에 콩이나 팥 등 잡곡을 섞으면 쌀의 양이 더 줄어든다.신도들이 찾아올 때는 공양을 더 준비하지만 몇 명이 찾아오는지 미리 원주 스님을 통해 공양간·보살간·갱두간에 각각 통보되기 때문에 음식이 거의 남지 않는다. 신도들이 먹다 남긴 음식은 남에게 내놓을수 없기 때문에 잔반통으로 들어간다.그래서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러 올때 음식량 조절에 더욱 신경을 쓴다.하지만 신도들이 남기는 음식물쓰레기도 채소를 다듬다가 나오는 것을 합쳐 4∼5일이 지나야 잔반통 하나가 찰 만큼 매우 적다.음식물쓰레기는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밭의 거름으로 쓴다. 사실 절의 식사문화를 보면 음식물쓰레기가 생길 여지가 전혀 없다.최근 들어 자율배식이 때때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절의 전통적인 식사법은 발우공양이다.발우공양을 할 때는 밥·국·반찬·물을 각각 담는 4개의 바리때를 쓴다.먼저 물을 밥그릇에 담았다가 밥그릇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국그릇으로 옮긴다.국그릇의 물은 다시 그보다 크기가 작은 반찬그릇으로 옮겨지고 반찬그릇의 물은 마지막으로 바리때 가운데 가장 작은 물그릇으로 옮겨진다.그러면 행자 스님들이 밥·국·반찬·물을 나누어 준다.식사를 할 때는 밥풀 하나 남기지 않는다.다 먹고 난 뒤 밥풀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물을 따라 다시 먹는다.식사를 끝낸 뒤에는 식사 전과 반대의 순서로 물을 옮겨 손으로 바리때를 씻는다.그런 다음 물을 퇴수통에 비우고 바리때를 바루보로 닦아 선반에 올려놓으면 공양이 비로소 끝난다. 퇴수통의 물은 늘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아귀(배는산처럼 크지만 입은 바늘구멍만 해 음식을 먹을수 없는 귀신)을 위한 것이다. 불가에서 음식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개울물에 떠내려간 콩나물 대가리 하나를 찾아 계곡을 헤맸다는 한 고승의 일화다.옛날 한 젊은 스님이 깊은 산 속의 암자에 큰 스님이 기거한다는 말을 듣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떠내려왔다.이를 본 젊은 스님이 『이렇게 음식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무슨 큰 스님인가』라고 실망해 있는데 큰 스님이 내려와 『내 콩나물 대가리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그러자 젊은 스님은 잠시 전의 의심을 뉘우치고 큰 스님에게 무릎을 꿇어 가르침을 구했다는 이야기다. ◎해인사 원주 주현 스님/“음식의 근본 깨달으면 버릴수 없어…” 『음식을 생명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쌀 한 톨도 버리지 못할 겁니다』 해인사 원주(절의 살림을 총괄하는 스님) 주현 스님은 『한 끼의 음식은 수많은 생명이 죽어서 비로소 내게 온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주현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밭에 농약을 치고 김을 매면 숱한 벌레가 죽는다.그런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있어야 비로소 음식을 먹을 수 있으므로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현 스님은 또 『쌀 미자의 글자 모양대로 음식이 상에 올라오기까지에는 88번이나 손이 간다』며 『이러한 수고와 희생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밥을 먹을 자격이 있나 없나를 따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은 백지 한 장에서 구름과 비와 나무를 본다』면서 『구름은 비를 만들고 비는 종이의 재료가 되는 나무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를 음식에 빗대면 음식의 재료가 되는 쌀과 채소 등이 만들어지기 까지에는 물과 햇빛을 비롯해 수많은 요소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수많은 요소의 결합과 무려 88번이나 되는 수고를 거쳐 비로소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음식을 남겨 쓰레기통으로 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현 스님은 『책으로 만들면 6천791권에 달하는 팔만대장경을 바로 외우고 또 거꾸로 외워도 근본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면서 음식의 근본을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는다면 음식물쓰레기가 남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김경호씨 형제/48년만에 차례상 “큰절”

    ◎탈북일가 서울서 첫 설맞이/임진각 올라 두고온 맏딸 생각에 눈시울도 지난해 북한을 탈출한 김경호씨(62) 일가족 등 16명이 8일 상오 서울 은평구 대조동 불광시장안에 있는 큰 형님 경태씨(71)집에서 귀순 후 첫 설을 맞았다. 경호씨 형제가 함께 모여 차례를 올린 것은 48년만이다. 이날 차례상은 불광시장 상가번영회 회원들이 지난해 10월 부인과 사별한 경태씨 대신 장만해준 것이어서 경호씨 가족들의 가슴을 더욱 훈훈하게 했다. 조부모와 부모의 차례상 앞에서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경호씨는 차남 성철씨(27)의 부축을 받으며 경태씨와 함께 큰절을 올렸다. 이어 장남 금철씨 등 딸·며느리·사위·손자·손녀 순으로 절을 올렸다. 차례를 마친 뒤 경태·경호씨 형제는 조카 등의 세배를 받고 덕담과 함께 세뱃돈을 건넸다. 이들은 이어 임진각 망배단을 찾아 실향민들과 함께 두고온 북한의 산하와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냈다. 임진각 3층 전망대에 올라 북녘하늘을 쳐다보며 김씨 일가는 탈출에 동행하지 못한 맏딸 생각에 끝내 눈시울을붉혔다. 하오에는 서울 송파구 신천동 최씨의 작은 아버지인 전도씨(77)의 집을 방문,세배를 드리는 것으로 첫 설 행사를 마감했다.
  • 북한의 설(외언내언)

    북한에는 두종류의 명절이 있다.「사회주의명절」과 「민속명절」.사회주의명절은 양력설(1월1일) 김정일생일(2월16일) 김일성생일(4월15일) 노동절(5월1일) 해방기념일(8월15일) 정권창건일(9월9일) 노동당창건일(10월10일) 헌법절(12월27일) 등이다.애초에는 3·1절도 사회주의명절로 지정했으나 62년 빼버렸다. 북한최대의 명절은 김일성생일.그는 죽었지만 3년상이 끝나는 올해까지는 「민족최대의 명절」로 떠 받들어진다.김정일의 생일인 「2월명절」도 올해엔 예년보다 성대하게 치를 것 같다.오는 가을 국가주석직과 당총비서직을 승계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속명절로는 설·단오·추석 등이 지정돼 있다.67년 5월 『봉건잔재는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교시에 따라 민속명절은 사라졌으나 88년에 추석이,89년에는 설과 단오가 다시 민족명절로 부활 됐다.그러니까 북한에서도 양력설·음력설 모두가 명절인데 우리와는 달리 양력설을 「설」이라고 부르고 설은 「음력설」이라고 한다.뒤늦게 나마 민속명절을 부활시킨 것은 잘한일이지만 사회주의명절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설날 하루를 쉴 수 있을 뿐 명절공급품이 없고 차례도 찾아보기 힘든다.차례를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릴 음식이 없어 그냥 넘긴다는 것이 최근 귀순한 사람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그리고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고 단순한 휴무일이기 때문에 그 전후의 일요일 하나를 택해 일을 해야 한다. 설 아침 북한주민은 누구나 마을가까이에 있는 김일성동상을 찾아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경배하도록 되어있다.그것이 끝나면 어른은 집에서 쉬고 어린이는 널뛰기·자치기 등으로 하루를 보낸다.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북한주민은 지금 극심한 식량난으로 굶주리고 있다.이런 참담한 현실에서 명절을 맞은들 무엇이 즐겁겠는가.북한 주민에게 있어 설은 차라리 고통스런 명절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가슴아픈 일이다.
  • 이 가구업체 「미체」(G7으로 가는 길:55)

    ◎프랑스보다 더 프랑스적 가구 만든다/베르사유궁전 골동품 그대로 재현/“제작과정 하나하나가 예술” 자부심/1천여 원자재 컴퓨터관리로 부품 수급조절 『베르사유 궁전의 실내장식이 부럽습니까.당신도 프랑스의 황제 루이 14세가 사용했던 바로 그 가구를 가질수 있습니다』 흡사 프랑스 가구업체의 광고같지만 이 문구는 이웃나라 이탈리아의 가구업체 「미체」가 내세운 것이다. ○청동장식품으로 출발 미체는 프랑스의 영화를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쓰던 가구를 만드는 업체이다.그러나 프랑스의 어떤 업체보다도 프랑스 궁전가구를 더 잘 만드는 회사라고 자부한다.이 회사가 지난해 제작한 가구를 가장 많이 사들인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이같은 자부심을 뒷받침한다.「프랑스 가구업체보다 더 프랑스적인 것을 만들자」는 것이 가구업체 미체가 추구하는 목표다.지난해의 총매출액 2백10억원중 프랑스로 수출한 금액이 5분의 1을 넘는다. 미체는 베르사유궁에서 쓰여졌던 가구를 가감없이 원형 그대로 재현해 내는 회사이다.루이14세·15세·16세 등의 황제를 비롯,왕실의 가족들이 사용한 가구답게 화려한 문양과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품격도 갖추고 있고 우아함도 겸비하고 있다.물론 값도 비싸다.미체가 제작,판매하는 가구는 제품 하나의 가격이 3백만∼8백만리라(한화 1백70만∼4백50만원)이다.그러나 이것은 이탈리아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격이고 외국 특히 아시아 등에서는 현지판매 가격의 10∼20배까지도 팔리고 있다. ○박물관서 진품 사진촬영 미체는 지난 63년 설립당시 가구에 다는 황동 및 청동 장식품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기업이었다.이 회사가 만든 장식품은 비록 값은 비쌌지만 품질이 우수해 여러 가구회사에 납품,호평을 받으며 한동안 순조롭게 성장했다.그러나 장식품을 만들어 파는 사업이 수지가 맞는다는 소문이 나자 곳곳에서 경쟁업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장식품 제작업체의 난립으로 동종업계에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미체는 다른 기업을 따돌릴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미체가 살아남을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내의 가구업계도 상호경쟁이 말할 수 없이 치열했다.미체는 엉뚱한 데서 돌파구를 찾았다.이탈리아의 전통가구나 현대적 가구가 아닌,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가구를 본뜬 가구를 만들기로 했다.도메니코 루지아노 회장(46)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베르사유 궁전의 가구를 관람한 것이 계기였다.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가구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바로 이거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고 말했다. 미체는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없는 기업이다.옛날 궁전에서 쓰던 골동품 가구가 디자인의 원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디자인 작업은 말처럼 결코 쉽지는 않다.진품은 모두 루브르박물관에 있다.진품들의 겉모양은 모두 사진촬영해오거나 사진집 등을 통해 외관을 파악할 수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의 설계와 디자인은 알 길이 막막하다.루지아노 회장은 『우리는 베르사유 궁전가구의 디자인과 설계등에 관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비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고객취향따라 주무제작 미체가구는 옛날의 궁전가구 제작과정과 마찬가지로 일일이 손으로 제작된다.원목은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나오는 무게가 가벼운 「비치우드」와 딱딱하고 무거운 「월넛나무」를 사용한다.이 원목들을 식탁,시계,침대,옷장,책장,화장대,소파 등 만들고자 하는 제품에 맞게 가공한다. 미체가 가구를 만들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무늬새김과 황동장식 2가지이다.장인들이 가구에 무늬를 새기는 과정은 우리나라의 전통 자개장에 조개를 박는 것과 비슷하다.예컨대 꽃무늬를 새길 때는 고유의 색깔을 지닌 나무나 염색된 나무를 잘게 잘라 일일이 가구에 붙여 꽃모양을 만들어낸다.고유의 독특한 색이 있는 나무로만 꽃무늬를 만들어낸 가구가 훨씬 고가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황동장식을 가구에 접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황동장식을 빈틈없이 정확한 위치에 갖다 붙이는 일은 오랜 경험을 지닌 장인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이곳에서 17년간 근무한 기술자 피노체트(40)의 말이 인상적이다.『우리들은 제작 과정 하나하나가 「예술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모든 가구가 우리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작업중단 하는일 드물어 미체는 베르사유 궁전의 가구들을 원형 그대로 만들뿐만 아니라 고객들이 원하는 취향에 맞게 주문제작도 한다.가구에 대해 안목이 높은 일부 고객들은 자신들이 설계와 디자인을 한뒤 사용하고자 하는 원목의 종류까지 직접 선택한다.소비자가 자신의 집안분위기나 취향에 적합한 가구를 주문하면 그에 따라 제작해주는 것이 사업의 일부이다. 미체의 장점중 하나는 컴퓨터로 관리하는 자재창고.미체가 사용하는 원자재의 종류는 1천개가 넘을 정도로 많다.원자재의 종류가 많아지면 작업도중 부품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컴퓨터 관리는 바로 이같은 부품의 절품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항상 부품을 갖춰놓고 있기 때문에 작업이 중단되는 일이 드물다.작업능률을 높이고 생산기간을 줄여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체」회장 도메니코 루지아노/“고품질·변함없는 가격 고수/최대시장 불 고객 특별관리” 도메니코 루지아노 미체 회장은 『최고의 가구를 적정가격에 파는 것이 미체의 경영전략』이라면서 『이같은 방침은 앞으로도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체의 성장비결은 무엇인가. ▲이탈리아에는 많은 가구회사가 있다.최근에는 치열한 경쟁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는 회사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미체가구는 비록 고가이기는 하지만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가격이 변하지 않았다.미체가 꾸준히 커가는 것은 가격경쟁력을 갖춘 최고급 가구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미체를 어떤 식으로 알렸기에 찾는 사람이 늘고있는가. ▲매년 열리는 가구박람회 또는 전시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런 행사를 통해 미체는 꾸준히 알려졌다.베르사유 궁전에서 쓰던 가구라 박람회나 전시회에 들른 사람들의 눈에 금방 띈다. ­지역적으로는 어느 곳에서 호평을 받는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따라서 프랑스 시장만큼은 단골고객들을 특별관리,이들이 계속 미체의 소비자로 남아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이탈리아 시장에서는 고전적인 가구들이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 같다.프랑스 다음으로는 아랍과 아시아 미국등지의 부호들이 미체를 찾는다.최근에는 이 지역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체는 위기를 겪은 적이 없었는가. ▲왜 없었겠는가.가구판매가 줄어들면 항상 새 제품을 선보인다.지금까지 시장에 나오지 않은 새 제품을 내놓으면 그것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어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미체를 만들려면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장인들을 충분히 확보해야 가능할텐데. ▲그렇다.현재 100여명에 가까운 장인들이 미체에서 일하고 있다.이탈리아에는 가구기술을 가르치는 장인기능학교가 있기 때문에 이곳 출신들을 선발,미체를 만들어왔다.그러나 이제는 이탈리아에서도 가구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현격히 줄어들어 안타깝게도 5년전 이 학교가 폐교됐다.20년쯤뒤에는 장인인력이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당신의 하루 근무시간은 얼마나 되나. ▲나에게는 퇴근시간이 없다.매일밤 10시이후에도 업무를 본다.주말에도 남들과 달리 일한다.1년에 한번뿐인 휴가도 보통의 유럽인들과는 달리 1∼2주간만 즐긴다.한마디로 일에 파묻혀서 사는 것이 내 인생이다.
  • 어느 노인의 인생유전/전과 13범… 37년 옥살이

    ◎가출소 두달만에 또 절도/대법,감호청구 기각 파기 절도전과 13범으로 37년4개월동안 수감생활을 한 60대노인이 가출소 2개월만에 다시 절도죄를 저질러 최고 11년까지 세상구경을 못하게 됐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이돈희 대법관)은 23일 가출소 2개월만에 1백94만원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구속기소된 문모 피고인(68)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4년만 선고하고 보호감호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문피고인은 징역 4년에 통상의 보호감호기간 7년을 다 채울 경우 79세에 석방될 수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오랜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출소한 뒤 2개월도 안돼 범행을 저지른 점 등으로 미뤄 재범의 개연성이 있다』면서 『원심판결중 보호감호청구를 기각한 부분을 파기한다』고 밝혔다.
  • 회령에서 서울까지(흔들리는 동토 북한:1)

    ◎집단탈출 김경호씨 일가의 증언/두만강 급류에 아들 실종… 연변서 상봉/94년 미 부모와 첫 편지 왕래… 탈북 결심/2년후 연변서 모친 만난뒤 자신감 얻어 암담했던 북한 땅을 탈출한지 80여일.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도착한지도 40여일이 지났다. 서울생활이 편안할수록 김경호씨 일가는 더욱 지난 시절의 아픔이 가슴에 사무친다.북한을 탈출한 김씨 일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탈출과정과 북한 생활을 다섯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최현실씨가 부모님의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92년 3월6일이었다.회령시 해외동포영접부 직원과 보위부 직원이 찾아와 『어머니가 오는 23일쯤 딸을 보겠다며 미국에서 방문신청을 했는데 사전에 약속이 돼 있느냐』고 전했다.충격이었다.46년 아버지 최영도씨와,48년 어머니 최종순씨와 생이별을 한지 45년여만이었다. 아버지는 85년 미국에 있는 친구가 평양에 친척방문을 했을때 딸의 소재파악을 부탁,딸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었다. 생사여부조차 몰랐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방문소식에 기쁨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한편으로는 불안이 앞섰다.가뜩이나 월남자 가족이라고 76년 평양을 떠나 회령으로 강제이주당하는 등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판이었다.더욱이 미국에 부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보위부에서 집중감시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러나 3개월이 지난 8월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초조해진 최씨는 8월5일 셋째딸 명숙씨와 무작정 평양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평양에 있는 해외동포영접총국에 가면 어머니가 어디 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여비는 애지중지하던 TV를 팔아 마련했다.그러나 총국에서 들은 것은 『3월에 어머니가 오기로 돼 있었지만 취소됐고,한번 입국신청을 했다가 거부되면 영원히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절망에 휩싸였다.최씨는 문득 평양에 살고 있다고 말로만 들은 어머니의 이모부를 떠올리고 무작정 찾아갔다. 다행히 이모부는 『평남 남포시 강서군 청산리에 큰어머니(어머니의 언니)가 살고 있다』고 알려줬다.어렵게 찾아간 큰 어머니는 이미 5년전부터 어머니와 편지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봉투를 한 장 들고 다시 회령으로 돌아와 그길로 미국에 편지를 썼다.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있다.통일이 돼서 만날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시내에 나가 사진도 새로 찍어 부쳤다.속내를 그대로 편지에 쓸수는 없었다.많은 편지가 검열당한 뒤 다시 풀로 붙인 채 오는 것으로 보아 미국으로 가는 편지도 보위부에서 내용을 뜯어볼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주소는 영어를 몰라 큰어머니로부터 가져온 편지봉투의 영문을 그림 그리듯이 해서 보냈다. 40여일이 지나 답장이 왔다.어머니는 오랜 고난속에서 18살 밑인 사진속의 딸이 자신보다 더 늙어보였든지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확신은 편지 2∼3번을 보내고서야 들었다.편지 왕래는 1년에 4∼5번씩 계속됐다.편지와는 별도로 어머니는 청진합영은행을 통해 3∼6개월 단위로 매번 500달러씩을 부쳐주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탈북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은 94년 중순. 어머니는 『너희도 자유롭게 미국에 내왕하며 살면 얼마나 좋겠니』라고 편지에 희망을 피력했다.탈북이 마냥 꿈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96년 7월 20일.최씨는 연변에서 어머니를 만났다.아버지가 중국에 친지를 통해서 북한으로 「접선장소」와 시간을 알려왔다.최씨는 이곳에서 구체적인 탈북을 어머니와 상의했고 약간의 자금도 건네받았다. 그러나 최씨는 9월까지 계속된 장마통에 북한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탈북도 그만큼 늦춰졌다.가족들은 어머니의 안부가 걱정됐다.아들 금철씨와 성철씨가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이때도 전직 안전원 최영철씨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두 아들은 잔뜩 불어난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다 급류에 휘말렸다.금철씨는 동생이 죽은 줄로만 알고 초죽음이 돼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다. 두만강을 따라 계속 표류하던 동생 성철씨는 구사일생끝에 가까스로 강기슭 나무뿌리를 붙잡고 살아나 역시 형의 생사를 모른채 연변으로 갔다. 금철씨가 절망속에서 다시 연변에 갔을때 형제는 눈물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이들은 결국 10월26일 한많은 북녘 땅을 뒤로 한채 차디찬 두만강을 건넜다.
  • 일 나라현 법륭사(세계 문화유산 순례:19)

    ◎한민족혼 숨쉬는 세계최고 목조가람/7세기 아스카시대 불교건축문화의 정수/국보·문화재 190종 2천3백여점 집결/금당 석가삼존상 등 한반도 도래인이 제작/지붕·벽 우리의 옛날집 모습 그대로 일본 나라현 호류지(법륭사)는 일본 문화가 자라나온 모태였다.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서 지난 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류지는 「나무의 문화」인 일본 건축문화의 정수이자 일본 불교문화의 원형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가람이다. ○5만7천평 동·서원으로 분리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 너른 들판 끝 산자락에 위치한 이 절의 18만7천㎡의 경내는 서원과 동원으로 나뉘어져 있다.서원은 산문인 남대문,중문,오중탑,금당,회랑,경장 등으로 이뤄져 있고 동원은 몽전(몽전:유메도노)불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190종 2천3백여점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서원의 대보장전에는 백제관음상,유메치가이(몽위)관음상,다마무시노즈시 등 일본 문화의 정수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1천300년전인 7세기 아스카시대에 지어진 이 절이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끄는 것은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오중탑,금당,중문,회랑,경당은 물론 15세기에 재건된 남대문을 보노라면 마치 고향집에 돌아온 듯 아늑한 느낌을 준다.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지붕과 벽의 단정한 처리가 우리의 옛날 집들 그대로다.불교는 고분문화시대에서 「문명시대」인 아스카시대로 넘어오는 6세기중엽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전래됐다.고대 시대 일본의 교육은 대부분 승려들에 의해 이뤄졌다.절은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 문화를 한반도 도래인들이 지도했던 것이다. 오노 겐묘(대야현묘)집사장은 『당시 한반도에서 기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의 문화를 지도했다』면서 『호류지에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금당의 석가삼존상 뿐이지만 삼존상 제작자인 도리 불사도 할아버지가 도래인이었다』라고 말한다. 호류지는 서기 607년 스이코왕과 쇼토쿠세자가 건립했다.그러나 일본서기에는 670년 4월 30일 호류지가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됐다고 기술하고 있다.아직도 이 부분은의문에 싸여있다.발굴조사등에 의하면 완전소실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재건·비재건 논쟁에 관계없이 이 절의 주요 부분들이 7세기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산문인 남대문을 지나면 바로 중문.깊숙히 덮인 처마,그 처마 밑에 정교하게 새겨진 공포,그리고 신전의 기둥과 비슷하게 엔타시스 양식으로 다듬어진 기둥 등 아스카시대 건축의 정수를 한데 모은 건물이다. 오중탑은 호류지의 말사로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포함된 호키지(법기사)의 3중탑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위로 오르면서 점차 줄어드는 처마의 비례가 그지없이 아름답다. 지난 81년 호류지 5중탑과 비슷한 규모의 나라현 야쿠시지(약사사) 서탑을 재건한 미야다이쿠(궁대공:도목수) 야마모토 가쓰미(산본극사)씨는 『도다이지 대불당 하나 짓는데만 연인원 2백60만명이 동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81년 서탑 재건에는 2천만달러가 들었다』면서 『호류지 건축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권력,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과 문화가 어우러져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금당벽화 소실… 모사품 걸려 금당은 5중탑과 함께 호류지의 눈동자이다.금당의 벽화는 1949년 실화로 소실되거나 그을려 지금은 수액 처리돼 보관돼 있고 현재는 모사품이 걸려 있다.벽화의 제작자는 모른다.고구려승 담징이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적다고 한다.오노 겐묘집사장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면 150세이상을 살아 활동했다는 말이 되므로 무리가 있다』면서도 『벽화에 고구려적인 특성이 짙은 것으로 미뤄 일본에 붓과 물감을 전한 담징의 제자들이 벽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추론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회랑의 서쪽편에는 경장이 있다.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천문 지리학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백제학승 관륵승정의 상으로 전해지는 좌상이 안치돼 있다.오노집사장은 『관륵승정은 초대 주지였다』라고 말한다.이어 『지금도 호류지의 주지로 취임하면 관륵상 앞에서 취임식을 갖는다.그때만 경장의 문을 연다』고 말한다. 호류지가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천년을 넘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나라지역이 지진 등 자연재해가 적고 호류지가 나라의 중심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전화 등 재난을 피할수 있었던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다음은 끊임없는 재건과 보수작업 덕분.썩기 쉬운 기둥의 곳곳에는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새 나무를 끼워넣은 흔적이 수다하다. 호류지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다카다 료신(고전양신)스님은 「세계문화유산 호류지」에서 『창건후 200년이 지나면서 호류지는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면서 『그러나 쇼토쿠세자시절 호류지에 하사된 오미 가와치 세쓰 등의 영지에서 재원을 조달할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가 가능했다』라고 말한다.료신스님은 재원을 모으기 위해 스님들이 분주했다고 말한다.영지 농민들의 땀이 호류지를 지킨 거름이 된 셈이다. ○창건·보수 민중의 땀으로 호류지는 지을 때부터 보수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땀으로 쌓아올려진 문화재였다.만요수(만엽집)의 빈궁문답가는 아스카시대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삶을 전해준다.「해초와 같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무너지는 집에 짚을 깔고 앉았다.부모는 머리쪽에 처자는 다리쪽에 웅크리고 있다.부뚜막에는 거미가 줄을 치고 이장은 채찍을 들고 세를 받으러 와 불러댄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까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까」라고.호류지는 그 시대 백성들의 땀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여행 가이드/오사카서 근철로 15분거리… 인근 고분군 둘러볼만 한국에서 나라 호류지로 접근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루트는 세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첫째는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들어가 공항에서 나라로 들어가는 공항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나라까지 95분 소요된다.둘째로는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시내를 거쳐 호류지로 가는것.오사카시내 텐노지(천왕사)역에서 긴테쓰(근철)노선으로 호류지로 간다.텐노지역에서 15분만에 호류지역까지 도착이 가능하므로 가장 이용하기에 편리하다.한국에서 항공편이 닿는 나고야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나고야에서는 JR 또는 긴테쓰선을 이용해 교토를 경유하거나 직접 나라로 향할 수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오사카에서 나라행 노선을 이용할 경우 호류지역에 도착,왼편 출구로 나가면 20분정도 걸어 호류지에 닿을 수 있으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오른편 출구로 나가면 된다. 호류지 인근에는 호키지,후지노키 고분 등이 산재해 있다.역사기행에 알맞으므로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나라시내로 발을 옮기면 도다이지,야쿠시지,하세데라 등 수많은 명찰들이 반기게 된다.
  • 현대무용가 김복희(이세기의 인물탐구:118)

    ◎부딪치는 모든 인연을 안무주제로/한지·상여·전통악기 등 우리것 춤속 용해/동서의 모든것 혼합·파격… 「한국적 춤」 고수 「변치않는 경상도 사투리」 「70년대의 몸매와 90년대의 몸매」 「풍경을 만들줄 아는 멋쟁이」 「우정」 「시시한 평문은 무시하기」 「뛰어난 음악 감식안」 「생선요리와 채소선호」 「연습때는 호랑이」 「작품에 임할때는 독」 이는 무용평론가 김영태가 김복희와의 20년 교류를 정리한 「김복희의 열가지 특징」이다. 김복희는 자신의 예술을 성취하기 위해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어느 부분에서도 「호랑이」와 「독」의 요소를 속속들이 지니고 있다.정열적으로 자신을 설명할줄 알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승부근성이 대단하다.그의 춤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고 부딪치는 모든 인연」을 안무의 주제로 삼으면서 어떤 무대에서나 「정서적으로 안정된 한국적 춤」을 고집한다.그의 춤은 이른바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자료들, 이른바 백의와 한지와 탈 상여 부채를 끌어내고 대금 징 목탁과 구음을 춤에 인용하고 있다.또 자료와 자료들을 서로 접목시키거나 동서의 모든 것을 뒤섞어 보기도 한다.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파격하고 다시 용해시켜 춤의 탄성을 확고하게 확대해 나간다. 이광수소설을 원작으로한 「꿈,탐욕이 그리는 그림」에서의 대금과 첼로의 대비가 그랬고 서서히 역사의 뒤로 사라져가는 고려의 이미지를 윤이상의 「이미지」에 접목한 「반혼」이 그 한예이다.그중에서도 대작 「꿈,…」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조각」들이 현실의 가상공간으로 유도되는 과정을 오버랩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불균형과 비대칭으로 해탈과 초월에 이르는 경지를 경건하게 그리고 있다.이 춤은 지난 95년,푸미폰 아둔야뎃태국국왕 즉위50주년을 맞아 태국정부가 마련한 기념공연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그의 극미한 거동조차도 춤의 흐름이며 춤의 다이내믹스와 짜임새가 놀라울만치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저돌적이면서도 앞장서는 행동은 71년 이화여대를 졸업하던 해부터 시작된다.그가 현대무용을 본격적으로 접하던 60년대 말의 우리의 현대무용은 육완순이 미국에서 배워온 마사 그레이엄과 호세리몬의 테크닉이 전부였다.그 시절에 스승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는 『예술의 세계와 사제지간은 별개』라고 선언하고 동기생인 김화숙과 스승의 문하를 떠났다. ○대학졸업때 독립선언 「우리만의 한국적 현대무용」을 만든다는 각오로 전통악기나 살풀이가락을 춤에 맞추거나 한국적인 정중동과 서구적인 역동성을 도입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긴 세월을 모색으로 보냈다. 그때의 첫무대가 불교적 색채가 짙은 「법열의 시」다.공연이 끝나자 『현대무용의 새로운 시각이다』 『아니다.저것이 무슨 현대무용이냐?』는 호평과 비난이 엇갈렸고 결국 「구성상의 재치가 돋보이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계속 선보여 「자신들의 세계를 투철하게 성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술은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에서 출발된 그들의 협력작업은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게 귀기울이면서 자신이 들은 것을 스스로 기록해야 한다」는 에머슨의말에 공감하여 지난 92년부터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그때부터 김복희는 그동안 축적된 자신의 세계를 솟구칠듯 분출시키면서 「오리지널 김복희춤」을 연속적으로 발표해 나갔다. 「십우도」를 바탕으로하여 「인간본성의 상실과 억제,정열과 정열의 파멸」을 심층있게 파헤친 「아홉개의 의문,그리고」를 비롯,그리움이 하나가 되어 한송이 꽃에 이르는 「국화옆에서」와 인체를 산이나 강에 비유한 「진달래꽃」,역시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장승과 그림자」는 인간의 현란한 삶이 「장승」이라는 목신의 유구함에 비해 아무것도 아닐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으로 무용계의 호평받았다.평론가 김경애의 「평소 불교적인 소재의 작품을 많이해온 김복희의 일련의 작품에서 또다른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는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법열의 시」가 첫무대 그가 불교적 의식과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것은 대학 4학년때 우리의 전통악기를 사용한 작품 「탑」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부터다.절에서 울리는 북이나 종소리를 녹음해 오기도 하고 석가탑다보탑 등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실감하기 위해 그는 요즘도 자주 지방여행에 나선다. 그는 대구중심가인 상서동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과수원을 하던 아버지는 완고한 편이었으나 어머니가 무용을 좋아해서 두딸중 장녀인 그에게 무용을 가르쳤다.6살때부터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다녔고 정소산 최희선을 거쳐 수도여사대 김남주 교수에게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자신의 무용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배운다는 욕심에서 그는 대학에 와서도 현대무용외에 김진걸의 「산조」,육태환의 「탈춤」을 사사했고 「반드시 춤은 몸으로만 춘다」는 타성에서 벗어나 「몸으로 내는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춤」이라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불교적 소재 즐겨 사용 사업을 하는 김규현씨와의 사이엔 딸만 둘,74년부터 살고있는 연남동자택에서 가야금과 관음보살상이 걸린 서가에 앉아 그는 강의와 공연이 없는 날은 하루종일 탈춤을 연구하고 무당춤의 동작에 파고들어 새로운 동작을 창조하는데 천착한다.그의 저서에서 「춤은 끊이지 않고 의미를 바꾸면서 암시적이면서도 포괄하기 어려운 고리를 형성시킨다」고 한것처럼 그는 강렬한 창작력이 샘솟는 가운데 「가장 감정적이고 지적인 경험」을 그의 새로운 작품에 살려내려는 것이다. 「몸을 움직일수 있고 춤을 출수 있을때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그의 의지는 「춤을 춤으로도 보고 춤을 소리로도 듣고 춤을 그림으로도 생각하면서」 언제나 「열려진 감각으로 사물과 자연과 풍속과 세태를 감지」하는 자세를 지킨다.그리고 김영태의 지적대로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은 변치않지만 그의 춤만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고 움직이면서 긴 인고와 고뇌끝에 마침내 「춤은 아름답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이제 한국현대무용언어를 정립한 시점에서 「그만의 의식을 위해」「인생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밤새 천둥소리를 이긴 또다른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는 현란한 창조의 빛을 무대에 흩뿌리고 있다. □연보 ▲1948년 대구출생 ▲71년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제1회 현대무용발표회 「법열의 시」외 ▲74년 이대 대학원 졸업,이대 강사 ▲75년한양대 전임강사,제2회 현대무용발표회 「춘향이 이야기」외 ▲7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남불) 개인공연 ▲80년 브뤼셀 암스테르담 개인공연 ▲80∼85년 서울대 연세대 강사 ▲81년 대한민국무용제 참가 ▲82년 미국 LA개인공연 ▲83년 일본 ’83무용작가협회 특별공연(도쿄 도라노몬홀) ▲84∼85년 소극장운동 전개 ▲85년 파리 국제무용제 참가 ▲86년 현대춤협회 회장 ▲87년 파리 피에르카르댕극장 개인공연 ▲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혼돈」안무,서울국제무용제 참가 ▲89년 대한무용학회 부회장 ▲90년 멕시코 세르반티노시티 축제참가 및 5개 도시순회 공연 ▲91년 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서울예술단 「영혼의 노래」 안무 ▲92년 원광대 대학원(철학) 졸업 ▲93년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 ▲94년 경기대 대학원서 박사학위,스페인 마드리드 라빌라문화센터 초청공연 ▲95년 태국국왕제위 50주년기념 페스티벌초청공연,광주비엔날레 축하공연 ▲96년 멕시코문화원초청공연,김복희무용단 창단25주년기념공연 〈저서〉「현대무용 테크닉」(80년) 「무용창작」(83년) 「무용론」(86년) 〈수상〉대한민국무용제우수상(79년) ’87최우수예술가선정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90년)
  • 3차원 게임장면 구현/국산게임 개발 주역­(주)미리내

    ◎3D 엔진기술/“세계 5위권” 자부/87년 6명으로 출발… 「그날이 오면」 일서 선풍/올 매출 15억 예상… 일·가서 기술이전 제의 국산게임 개발업체인 (주)미리내 소프트웨어 정재성 사장(29)은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다. 절대로 외국게임을 들여와 국내시장에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전반적인 경제불황과 맞물려 국내 게임시장의 전망이 밝지는 않지만 이 철칙에는 변함이 없다. 게임 개발사마저 수입에 눈을 돌린다면 국산 게임이 설 땅이 없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미리내는 제작한 게임을 국내시장에 팔기보다는 일본·미국·대만 등 외국에 주로 수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올해 게임 매출 예상액 15억원도 10억원을 외국에서,5억원을 국내에서 거둔다는 목표다. 국내시장의 전망이 어둡다면 과감하게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해외시장을 정복할 전략으로는 국내 게임 개발 전문업체끼리의 기술제휴를 제안한다.몇몇 업체를 빼고는 아직은 국내 업체들의 게임제작 수준이 외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기술,3D엔진,캐릭터 개발,시나리오 작성등 각 게임 개발업체마다 앞선 분야의 노하우를 서로 합쳐 최상의 상품을 내놓자는 것이다. 미리내는 게임에서 3차원의 입체감있는 장면을 구현하는 3D엔진기술이 세계 5위권에 들어있다고 자신할 정도로 앞서 있다. 지난 해말 완성한 「리얼 스페이스 3D엔진」은 건물 안팎에서 보는 기술,다층구조,계단과 빛의 처리,캐릭터의 움직임 등이 외국게임에 비해 손색이 없다. 이 기술만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미국의 게임 「퀘이크(QUAKE)」정도는 충분히 만들수 있다.일본·캐나다 등 외국에서만 10여곳,국내에서도 두 군데서 이 기술을 사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4월말에 통신전용 에뮬레이터 「도란도란 3.0」이 나오면 3차원 동영상을 보면서 채팅을 할 수 있어 통신과 게임이 접목된다. 미리내는 정사장이 87년 2월 경북대 전자공학과 1학년때 동아리 친구 5명과 만든 회사다. 중학교 1학년때는 「별점으로 보는 컴퓨터 운세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 프로그램을 팔아 보겠다고 무작정 상경했을 만큼 일찍이 「끼」가 있었다. 「그날이 오면」을 처음 만들어 일본에까지 수출하며 「미리내」라는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날이 오면 1,2」는 일본에서만 5만개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93년에는 PC게임용 「그날이 오면3」으로만 순이익 5억원을 올리면서 게임을 만들어서도 돈을 벌 수 있음을 입증하면서 국내에서 게임개발사가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망국전기」「배틀 기어」「고룡전기 퍼시벌」「풀 메탈 자켓 1,2」등이 모두 미리내에서 자체 기술로 만들어 성공한 게임들이다. 올해초 선보일 「네크론」은 대만·일본의 잡지에 대서특필되며 출시도 되기전에 외국에서 먼저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3D엔진 등 기술개발에만 전력,잠시 성장이 주춤했지만 올해 내놓을 세 편의 신작 게임과 새로 개발한 멀티 BBS기술 계약까지 성사되면 미리내의 올해 매출액은 70억∼1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 국내 은행의 규모(금융 빅뱅시대:2)

    ◎평균자산 일의 8%… “구멍가게 수준”/25개 일반은행 합쳐야 세계9위 규모/98년 금융개방땐 “다윗과 골리앗 싸움” 일본·미국 등 선진국 은행의 규모가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이라면 국내은행은 구멍가게다.선진국 은행이 대학생이라면 국내은행은 초등학생 수준이다.규모면에서 우선 그렇다. 95년 현재 국내 15개 시중은행과 10개 지방은행 등 25개 일반은행의 총자산은 3천9백억달러다.25개은행을 합해야 세계 순위에서 겨우 한 자리수(9위)에 들 정도다. 주택은행·장기신용은행 등 총자산이 많은 일부 특수은행까지 포함해도 상위 25개 은행의 총자산은 4천6백52억달러다.세계 6위인 일본 사쿠라은행의 4천7백80억달러를 밑돈다. 국내은행중 자산기준으로 세계 100위내에 드는 은행은 하나도 없다.외환은행의 총자산이 4백62억달러로 국내은행중에는 가장 많지만 145위 수준이다.합병에 따라 총자산 세계 1위가 된 도쿄­미쓰비시은행(7천1백27억달러)의 6% 수준이다. 자산기준 상위 5대은행 평균에서도 격차는 여전하다.95년의 국내 5대은행(외환·서울·국민·한일·조흥은행) 평균 총자산은 4백9억달러로 일본 5대은행 평균인 4천9백30억달러의 12분의 1,미국 5대은행 평균인 2천89억달러의 5분의 1이다.독일과 영국의 5대은행 평균은 각각 3천3백13억달러와 2천5백27억달러다. 10대은행으로 넓혀보더라도 큰 차이는 없다.국내 10대은행 평균 자산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상위 10개국중 은행 평균 자산규모가 가장 적은 캐나다의 절반이다. 5대은행의 평균 자기자본도 선진국 은행에 비해 크게 뒤쳐지기는 마찬가지다.국내 5대은행 평균은 22억달러로 일본의 1백74억달러,미국의 1백32억달러를 훨씬 밑돈다. 절대적인 규모에서만 선진국은행에 뒤지는게 아니다.국민총생산(GNP)을 고려할 때에도 마찬가지다.95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1만76달러여서 일본(4만1천220달러),미국(2만7천516달러),영국(1만9천128달러)의 절반∼4분의 1수준이다.1인당 GNP의 격차보다 5대은행의 격차는 더 심한 셈이다. 세금내기전의 순이익도 적어 수익성도 좋지않은 편이다.국내 5대은행 평균은 1억달러로 미국의 36억달러,영국의 32억달러,독일의 13억달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국내은행의 1인당 업무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5천2백만원과 1천2백만원으로 외국은행 국내지점의 1억3천8백만원과 7천8백만원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규모의 차이는 투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미국 씨티은행은 한해에 전산투자에만 10억달러를 쏟아붓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하지만 국내 선발은행은 5백억∼6백억수준,후발 시중은행은 1백억∼3백억원 수준이다. 오는 98년 말부터 외국은행들이 합작형태로 진출할 수 있게 된데다 국제화추세에 맞춰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은행의 규모와 경쟁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규모는 국내시장을 지키고 국제금융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다. 이수휴 은행감독원장은 『국내은행은 외국은행에 비해 규모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대형화를 통해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조흥경제연구소의 강댁호 책임연구원도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국내은행의 규모가 선진국 은행에 비해 형편없는수준은 아니지만 외국은행과 경쟁하려면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고(객석에서)

    ◎연극화 시도 자체가 돋보인 고전·정통극 벽에 걸린 도스토예프스키 초상화를 비추던 조명이 무대로 옮아가면서 연극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극단 신화)의 막은 올라간다. 러시아 연극계 기술진의 도움으로 꾸민 화려한 무대,의상,민속음악 등은 관객의 눈과 귀를 시종일관 붙들어맨다.이어 오랜만에 연극무대에 선 장민호(조시마 장로),윤주상(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 표도르)의 정제된 연기도 앞으로 펼쳐질 연극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표도르가 살해당하기까지가 1막,표도르의 사생아이면서 까라마조프가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스메르자코프가 살인범으로 밝혀지고 까라마조프가가 몰락하게 되는 과정이 2막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워낙 방대한 양과 다중적 의미를 가진 원작이라 그동안 연극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없었다.따라서 이번 연극은 번역극 우려먹기와 웃기기에 혈안이 된 졸속극 만연한 우리 연극계에서 그 시도는 높이 평가받을만하다. 하지만 의욕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까라마조프…」는 3시간동안 계속되면서 관객의 눈을 모았다가 풀어주는 흐름을 타지 못한다.따라서 관객들은 경직된 기분으로 그저 앉아있을 뿐이다.특히 1막은 화려한 무대를 좀 더 보여주겠다는 의도인지 암전이 많아 극의 흐름이 끊기는 일이 잦다.또 내용을 많이 압축한 탓에 대사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연극의 장면장면이 쪼개져 머리에 입력된다. 그나마 내로라하는 연기자들이 모인 덕분에 연극을 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장민호 윤주상 김학철 김규철 정경순 박지일 등 출연자들이 정확한 발음과 몸동작으로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였다.특히 스메르자코프를 맡은 박지일의 연기가 돋보였다.그동안 지적인 연기를 주로 해온 그가 콤플렉스에 가득찬 얼굴로 다리를 절며 표도르를 저주하는 말을 내뱉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까라마조프…」을 계기로 관객들이 진심으로 몰입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고전」「정통」극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2월2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
  • 남북관계,새해 새조짐(박화진 칼럼)

    연말·연시가 북한의 잠수함침투사건 시인·사과 및 재발방지노력다짐 공식성명 속에 저물고 밝았다.북한의 사과성명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남북관계의 중요한 돌출장애요인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속단은 금물이지만 어떤 이유와 계산의 사과요 수용이건 그것은 이미 시작된 새해의 남북관계를 위해,일단은 좋은 징조요 고무적인 조짐으로 환영할 만한 사태의 전개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소행임을 시인하는 일조차 거부하다 「훈련표류」를 내세우며「백배천배의 보복」위협까지 일삼던 북한행태를 생각하면 잠수함사건을 시인·사과하고 재발방지까지 다짐한 작년말 북한외교부 공식성명은 정말 전례 없이 큰 변화요 발전이라 할 수 있다.새해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남북화해와 공존시대의 돌파구가 마침내 열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성급한 기대까지도 갖게 하는 상황전개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북한이 그같은 공식사과성명을 내는데 동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심각한 경제난·식량난에 주로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경제·식량난의 북한은 연이은 탈북사태 등 주민의 동요까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일을 비롯한 외부세계의 경제지원이 절실한 형편이었다.잠수함사건은 한·미·일을 비롯한 세계의 대북경제·식량지원을 그나마 동결시킴으로써 북한 스스로의 숨통을 더욱 죄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식량난만이 절대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제3의 새롭고 중요한 동기도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다.금년 7월8일은 김일성사망 3주년이다.말하자면 「3년상」이 되는 해요 날인 것이다.이날을 계기로 혹은 그 전후의 금년중 어느날 김정일의 공식권력승계가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조짐은 김의 7월 방중 타진 등 그동안 여러가지로 있어왔다.경제·식량난 완화는 물론 한·미·일 등과의 관계개선이라는 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식량난→북 주민 동요 절실한 경제·식량난 완화를 위해서건 김정일 공식권력승계를 위한 정지작업이건 혹은 금년이 우리 대선의해임을 노린 것이건 어떤 이유에서라도 좋다.중요한 것은 북한이 아무리 싫어도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계속 직면해가고 있음을 이번 사과성명발표는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정부의 확고하고 끈질긴 「북의 공식사과」요구를 미국이 이해하고 관철하기 위한 공조노력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북한의 「통미봉남」전략이 먹혀들지 않도록 한 것은 앞으로의 대북정책에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이제는 북한의 대남도발 아닌 남북화해·협력의 돌파구로 유도해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불만스럽고 미흡한 대목이 없지 않았지만 북한의 이번 성명을 대국적 견지에서 받아들이고 수용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스러운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통미봉남」이 아니라 북한의 동독이나 루마니아식 붕괴를 막는데도 결국 우리의 도움이 필수적인 「통한봉괴」의 전략이 필요함을 북한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는 노력의 하나도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화해·협력 동파구 마련을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이번 사과를 받아내는 과정의 한·미공조 특히 초기의 양비론적 반응으로 분노를 샀던 미국의 협조노력은 대단히 바람직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사과성명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다시 한번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물론 미·일등 세계도 모두 원하는 남북화해·협력시대 유도를 위해선 한·미·일의 공조와 중국·러시아 등 세계의 협조가 절대적임을 잊어서 안될 것임을 북한의 사과성명은 일깨워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북한의 이번 사과성명을 계기로 벌써부터 우려되고 있는 미·일 등의 일방적 대북접근 독주가능성을 특히 경계하게 하는 역설적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심의·논설위원〉
  • 중국 한글전용 일간지 「흑룡강신문」 칼럼

    ◎조선족은 「한국드림」서 깨어나야/일확천금의 환상 벗어날때 초청사기 근절 중국 흑룡강성 한글전용 일간지인 흑룡강신문은 최근호에서 무분별한 한국행 시도와 일확천금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때 한국초청사기가 근절될 수 있다며 「한국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조선족 동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본사 평론원」이 쓴 것이라는 익명의 이 칼럼은 조선족들도 한국의 가해자들과 함께 이 문제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대책마련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다음은 내용 요약. 중국 조선족에 대한 한국초청사기가 한국내 주요 현안문제로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한국정부도 재외동포 관련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사기수사와 함께 피해보상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민간차원의 모금운동도 활발히 진행중이다.늦은감은 있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문제해결에 착수했다는 것은 잘된 일이다.이에 여기 조선족들은 한국민들의 동포애와 아량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돌이켜보면 중·한간에 죽막이 걷힌뒤 우리 동족관계도 발전해 왔다.서로 얻은 것이 잃은것보다 많다.우린 그 잃어버린 부분에 대해 간과할 수 없다. 사기가 개개인의 거래로 이뤄졌다지만 사정이 이정도에 이르면 그것은 개인간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한국인에 대한 조선족 거간꾼들의 사기도 빼놓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다.어찌됐건 조선족과 한국국민및 한국사이에 갈등과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이같은 상황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한국측에도,조선족에게도 다 있다.한국측은 친지방문,인력송출 등의 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종합적 제도적 장치를 준비하지 못했다.그것이 조선족 입국 혼란과 사기꾼 개입의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다. 한국정부는 사기꾼에 대한 수사·응징의 착수서부터 재외동포들에 대한 종합 대책마련에 들어갔다.어린학생들을 포함한 전 한국민들이 모금등 조선족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다.조선족뿐아니라 한국과 전민족을 위해 중·한 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우리는 사기꾼들에 대한 응징과 피해보상 그리고 종합적인 제도장치의 대안마련이 용두사미격이 되지 않고 실속있고 효과적으로 이뤄지길 기대한다. 무엇보다 「한국 가 돈벌겠다」는 생각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맹목적인 조선족들의 「한국꿈」이 이 모든 참담한 결과를 낳은 모태라 할 것이다.불법체류의 근원도 그것이고 위장결혼·밀입국의 근원도 그렇고 사기의 근원도 맹목적인 「한국꿈」임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한국꿈에 취해 정당한 절차를 잊었음은 물론이요 개개인간 거래에서 되짚어봐야 할 것조차 「한국꿈」에 눈멀어 생각할 수 없는 바보가 돼버린 것이다.자기 처를 위장결혼시키려다 돈떼고 한국도 못가고 가정불화가 생긴 예도 있다.돈벌이에 제정신을 잃어버린 행위이며 사기피해라기보다 공모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린 사기피해를 통해 교훈을 찾아야 한다.「죽어도 한국가서 돈벌어야 한다」는 「한국꿈」에서 벗어나야 한다.맹목적인 「한국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불법행위는 근절될 수 없으며 사기피해도 계속될 것이다.이젠 「한국꿈」에서 깨어날때다.「더러운 한국놈」을 욕하기전에 자신부터반성해보자.각급 당조직과 정부,군중단체들은 「한국꿈」에서 깨어나도록 대책을 세워야 한다.사기피해자들이 고소하고 보상을 받도록 도와야겠지만 「한국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보상도 헛된 것이 될 것이다.사기행각이 쌍방으로 이뤄졌고 조선족 거간꾼및 사기꾼이 참여한 상태에서 (한국정부 등의)보상에 대한 지나친 환상은 갖지 말아야 한다. 양국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한국방문,한국 돈벌이가 보다 정상화 될 것이며 그폭도 넓어질 것으로 기대된다.합법적이며 질서있게 「한국행」을 추진해야 한다.사기피해 문제해결을 계기로 우리와 한국국민 사이의 불신과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신뢰와 협조,공동번영의 새 장이 펼쳐지기를 빌고 싶다.〈정리=이석우 북경특파원〉
  • 제야의 종소리(외언내언)

    서른세번 은은한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96년 병자년은 끝나고 97년 정축년 새해가 밝아 온다.하늘끝 구석구석까지 긴 여운을 남기며 울려퍼질 보신각종소리는 지난해의 질곡과 어둠을 모두 밀어내고 새로운 출발의 힘찬 신호음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서울 종로 네거리에 걸려있는 보신각종은 조선조 세조 14년(1468년)부터 파루(새벽4시)와 인정(밤10시)때 종을 울려 서울 도성문을 여닫으면서 서민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그러나 이종은 일제의 민족정기말살정책으로 36년 동안이나 벙어리가 됐었다. 해방후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보신각종은 새해첫날,3·1절,광복절등 한해에 3차례 온누리에 우리민족의 굳은 기상과 맑은 심성을 전해 왔다.3·1절 타종에서 우리는 나라를 되찾기위한 선열들의 우렁찬 함성을 들었고 광복절 타종에서는 해방의 기쁨을 되새기면서 조국광복에 몸바친 선열들의 명복을 빌어 왔다.그러나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새해 새출발을 다짐하는 제야의 타종이다. 이 유서 깊은 보신각종이 제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것은 지난 84년.종안쪽에 금이가고 부식이 심해 이해 첫날에는 부득이 타종을 중단 해야만 했다.그래서 서울신문사는 보신각종 복원운동에 앞장섰고 국민들은 너도 나도 이 운동에 동참 했다.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앞다퉈 성금을 냈고 모아진 성금은 8억여원이었다.보신각종이 복원된 것은 그 이듬해인 85년.무게 20t,높이 4m의 거대한 범종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맑고 은은한 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게 됐다.천수를 다한 노종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1997년 첫날 0시.보신각종은 제야의 종소리로 우리국민의 가슴마다에 또다시 희망과 새로운 결의를 안겨 줄 것이다.
  • 백만장자(외언내언)

    백만장자들의 생활을 다룬 「이웃집 백만장자」라는 책이 미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한다.이 책에 나타난 백만장자의 특징은 근검절약이다.순자산이 3백70만달러(약 31억원) 이상인 3백50만명의 백만장자를 표본추출해 조사한 결과 사치스럽고 호사스런 생활은 억만장자(빌리언에어)에 국한됐을 뿐 백만장자는 중산층보다도 오히려 더 검소했다.일반의 선입견과는 영 딴판이다. 백만장자들이 애용하는 백화점은 값이 싸고 주로 실용품을 취급하는 시어즈백화점이다.니만이나 마르크스 등 호화 백화점을 이용하는 백만장자는 거의 없다.자동차는 1만∼2만달러의 중형차가 대부분이고 중고차를 사는 비율도 절반에 가깝다.고급차와는 영 거리가 멀다. 절반 이상은 4백달러가 넘는 옷을 산 적도 없다.자녀에게는 학비만 대줄뿐 용돈은 직접 벌어 쓰도록 함으로써 자녀들 대다수는 자신이 백만장자 집안에서 태어난 줄을 전혀 모른다.반면 풍요하게 자라난 자녀는 다음 대에 백만장자에서 대부분 탈락하는 사실도 밝혀졌다. 우리나라 정상급 재벌인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은 구두 가죽이 쪼글쪼글해져 곧 터질 지경이 되도 뒤축만 갈아 다시 신는다.게다가 먼지만 털고 약칠만 해서 솔로 몇번 문질러 신기 때문에 반짝반짝 광이 나는 법도 없다.와이셔츠의 깃과 소매가 해지면 그 부분만 뒤집어대서 계속 입는다.그가 일군 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국내의 대기업을 일으킨 다른 창업자들도 대부분 지독할 정도로 검소하다.사람이 없는 사무실에 전등이 켜진 것을 보면 불호령을 내리고,이면지는 반드시 메모지로 활용한다.몸이 불어 바지의 허리가 작아지면 허리 뒤를 터서 색깔이 다른 천을 대서라도 입는다.결국 백만장자가 되는 길은 동서고금이 아끼고 절약하는 것 뿐이라는 얘기다. 실속도 없으면서 때로는 회장님들보다 흥청망청하기도 하는 우리 월급쟁이들도 새해에는 백만장자의 꿈을 키워보자.그러려면 우선 근검절약부터 실천해 보자.
  • 월정사 석탑 금동향합 천왕상(한국인의 얼굴:89)

    ◎마주 선 두쌍 동자티 못벗은 천진한 표정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장 큰 절은 월정사다.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자리잡은 이 절에는 신라의 석탑과는 아주 딴판을 한 고려시대 팔각구층석탑이 있다.고려시대에 접어들면 신라시대 네모꼴 탑이 다각형으로 바뀌었다.층수 역시 여러 층으로 높이 올라갔다.그래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키는 자그마치 15.5m나 되었다. 그 생김새가 참으로 아름다운 석탑이다.층층이 갸름갸름하여 미끈한 여인을 연상시켰다.신라 석탑이 남성적이라면,고려 석탑은 여성적인 것이다.일찍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48호로 지정되었다.탑이 더욱 유명해지기까지는 그 안에서 나온 사리구 역할이 컸다.지난 1970년 10월 탑을 손질하기 위해 해체했을때 나온 사리구는 그만큼 수준 높은 공예품이었다.더구나 향을 담아두었던 금동향합은 뛰어난 세공미로 해서 번쩍 눈에 들었다. 향합은 위아래가 맞물린 납작한 상자형이다.상자 윗뚜껑과 밑바닥 거죽에는 정교하게 새긴 사천왕상이 들어있다.줄을 그어 새긴 선각기법의 도안으로 사천왕상을 그렸다.그러니까 무늬 효과를 낸 문양으로 사천왕상을 표현한 것이다.가로와 세로가 4.4㎝에 지나지 않는 윗뚜껑과 밑바닥 금동판에 각각 두 천왕상을 새겨 모두 네 천왕상을 담아냈다. 그 비좁은 공간을 차지한 천왕상들 표정은 다 살아있다.절집 사천왕문 문간에서 만난 다른 사천왕들처럼 눈을 부릅뜨지 않았다.그렇다고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지도 않은 이 금동향합의 사천왕들은 여리기 한량 없다.아이들이 즐겨 들여다 보는 순정만화속의 착한 소년쯤으로 여겨도 좋을만한 인상을 했다.천진스러운 동자상 티를 벗어나지 못한 금동향합의 천왕상들 표정은 천왕상 속마음을 그대로 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금동향합 윗뚜껑의 두 천왕상은 마주 쳐다보고 서있다.모두 갑옷을 입고 칼처럼 생긴 무기류를 손에 잡았으나 어떤 천왕상인지는 뚜렷이 구분하지 않았다.아주 좁은 공간에 새기느라 본보기로 만들어 놓은 의궤대로 천왕상을 그려내지 못한 모양이다.이들 천왕상은 쇠붙이 모형에 금동판을 대고 두드려서 모형에 나타난 그림 모양을 그대로 찍어낸 이른바 타출문으로 되어있다. 왼쪽 천왕상은 짐짓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검은 눈동자가 너무 또렷한 동그라미를 그려 놀란 인상이 되었다.천왕상은 작은 입속에 감추었던 총총한 이빨을 드러냈으나 그까짓 이빨쯤을 보고 무서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히려 상대방에 기가 질린 사천왕 자신이 먼저 겁을 먹고 소리를 칠 판이다.그렇듯 아직은 어려서 귀엽기만한 천왕이다.
  • 미얀마 연쇄폭탄테러/사찰서… 22명 사상/군정 “반정세력 소행”

    【양곤 AP AFP 연합】 「부처의 이」를 전시중이던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불교사원에서 25일밤 두시간 간격으로 폭탄 두개가 터져 4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했다고 26일 미얀마 국영 언론매체들이 보도했다. 이날 저녁 8시20분께(현지시간)절의 남쪽 계단부근에서 폭탄이 터져 보안요원들이 「부처의 이」가 전시된 「카바 아예」 탑과 마당을 점검하고 있던중 밤 10시35분 화분에 장치돼 있던 또다른 폭탄이 폭발했다. 미얀마정부는 『중국과 미얀마관계를 해치고 국민들 사이에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지극히 사악하고 잔인한 의도를 가진 비열한 파괴분자 일당』이 저지른 짓이라고 공식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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