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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자문으로 조선 엿보기

    ‘하늘천 따지’ 서당에서 읊던 천자문이 새로운 우리 고전 작품으로 태어난다. 6세기 중국 주흥사가 만든 천자문이 고려말 조선초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단순히 중국문화의 산물로 여겼던 천자문. 또 조선시대의 학습 교재서로만 평가 절하됐던 천자문. 이 천자문이 조선 500년의 역사·문화·철학을 살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자 ‘보고’로 변신했다. 조선중기의 서예가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작고 400주년 기념으로 오는 16일부터 다음달 19일까시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하늘천 따지-천자문과 조선인의 생각·공부·예술전’이 열린다. ●조선왕실 제왕교육의 출발은 천자문 왕실은 물론 문인사대부, 민간에 이르기까지 천자문은 교육의 첫 걸음마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박팽년, 이황, 정약용 등 유학자 및 실학자의 천자문을 비롯, 중국 당·송·원·명대의 천자문, 석봉 천자문의 여러 판본 등이 전시된다. 우리나라 천자문의 경우 조선 500년과 개화기, 일제시대 만들어진 100여종의 서로 다른 천자문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들 천자문을 통해 내용은 물론 천자문과 결부된 인쇄문화, 글씨 예술, 한자 구성원리, 한글변천과정, 전통교육제도, 일제시대 민족교육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예를 들어 천자문에는 한글로 토를 단 것이 있어 한글연구에 도움이 되고, 일본어로 토를 단 것도 있어 슬픈 우리의 식민역사가 느껴지기도 한다. 알기쉽게 한자를 그림으로 설명한 도상천자문도 있다. 특히 선조의 어명을 받아 석봉이 쓴 ‘석봉천자문’은 국가에서 찍어내고 보급해 가장 널리 쓰였던 천자문이기에 따로 전시장이 꾸며진다. ●이항복 천자문 등은 처음 선보여 봉선사 간인의 천자문(사찰본,1471년, 성종2))은 현존하는 천자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한글 토가 없는 이 천자문은 해서체로 판본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처음 공개된다. 교서관 간인 중보본(1650년, 효종1)은 한석봉의 천자문으로 ▲한자서체 ▲한글표기 ▲책판본 등에 있어 3가지 표준을 제시하고 있어 중요한 문헌이다. 일본을 비롯해 현재 3권밖에 없어 더욱 귀중하다. 성주 간인의 백사 이항복 천자문(1734년, 영조 10)은 유학자 이항복이 손자의 교육용으로 쓴 것으로, 처음 공개된다. 한석봉이 직접 쓴 ‘대자 해서 천자문’은 사찰·궁궐 현판이나 비석문에 쓰이는 글씨‘원조’격이다. 천자문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천자에 천자를 더해 이천자문을 쓴 정약용의 ‘아학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천자문. 너무 학문적이다 싶으면 한자 컴퓨터 놀이를 할 수 있는 이상호의 ‘게임을 이용한 한자여행’과 ‘천자문 탁본찍기’등 다양한 놀이공간에서 쉬었다 가도 좋다. 예술의전당 전시팀 이동국 차장은 “천자문의 1000자 250구 125절의 방대한 서사시 안에는 인간의 도리와 기강, 역사등이 담겨 있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종합교재”라고 평가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웰빙,‘참살이’ 그리고 ‘잘살이’/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웰빙은 우리말로 ‘잘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참살이’라고 한다. 불교집안에서 ‘잘산다’는 말은 일과 수행이 조화를 이루고 마음이 평화로우며 언어와 사고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반듯한 삶의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이번 결제 때는 참 잘 살았다.’라고 평가를 내렸다면 그건 치열한 수행과 함께 구성원의 화합을 동시에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세간에서 ‘잘산다’고 하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추구라는 어찌 보면 다소 욕심이라는 의미가 더 도드라지는 뉘앙스로 다가온다. 그래서 혹 그런 잠재되어 있는 탐하는 마음은 살짝 감추면서 조금은 품위있는 의미가 포함된 ‘참살이’라는 단어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잘살이’와 ‘참살이’는 웰빙의 물질적 정신적 만족이라는 두가지 면을 동시에 반영한다. 하지만 동시에 가치적으로는 또 다른 긴장관계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집안의 모든 가구와 장식소품을 이른바 ‘젠 스타일’로 꾸미고 또 그것을 자기의 독특한 살림살이라는 빛깔을 외적으로 아무리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참선(參禪)’이 될 수는 없는 것에 비유될 수 있겠다. 따라서 잘살이인 ‘젠 스타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참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참살이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젠 스타일이라는 하드웨어만으로 ‘선 수행’이라는 소프터 웨어까지 담아낼 수는 없다. 어느 해 겨울 깊은 산중 암자를 찾았을 때의 그 씁쓰레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뜨락에 내린 눈을 그대로 오래도록 바라보기 위한 방편으로 그 안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새끼줄을 쳐놓은 것이었다. 흥에 겨워 들어가서 밟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가만히 안으로 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것도 잘못된 젠 스타일의 또 다른 고착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나치게 빗자루 질이 잘된 이른 아침의 절집 안마당을 가로지르기가 부담스러웠던 그 풍경과 오버랩되었다. 그래서 설총이 깨끗하게 쓸어놓은 뒤란에서 원효대사는 모아놓은 낙엽을 한 움큼 다시 가지고 와서 흩뿌리고 난 후 아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모습에서 이미 ‘젠 스타일화’되어버린 마당을 선 수행 공간으로 바꾸어버린 지혜의 또 다른 반전을 발견하게 된다. 인사동의 어느 식당은 그 촌스러운 내부 세간살이에도 불구하고 밥맛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그 밥맛을 빨리 누리겠다고 독촉이라도 할라치면 그 주인장은 당장이라도 내보낼 듯한 표정을 짓는다. 손님이 주문을 넣으면 그제서야 밥을 솥에다가 안치기 시작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이 집 나름대로 손님들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즐기도록 만드는 독특한 경영철학으로, 이집을 다시 찾게 만드는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맛있는 밥은 ‘잘살이’이다. 하지만 그 밥맛의 완성을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는 ‘참살이’이다. 많은 사람들은 눈앞에서 당장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길 바라는 시대의 대세에 괘념치 않고 이 식당은 기다려야 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수행의 현장이다. 인스턴트 시대에 슬로 푸드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기다림 후에 나온 그 따뜻한 밥 한그릇을 통하여 ‘잘살이’에서 ‘참살이’로 나아가는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에 비한다면 몇천원의 수업료와 몇십분의 인내는 사실상 비싸다거나 긴 시간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은 ‘잘살이’를 ‘참살이’로 착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참여하느냐에 따라 모든 곳이 웰빙처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산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웰빙처가 따로 있거나 별도로 시간을 만들어야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만 제대로 뜨고서 모든 것을 살펴보고 함께할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곳곳이 잘살이를 향한 웰빙처요, 모두가 참살이를 가르쳐 주는 웰빙스승인 것이다. 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 [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 (3)진대제 vs 진영

    [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 (3)진대제 vs 진영

    ‘고교 동기가 국회에서 창과 방패로 다시 만났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의 한나라당 진영 의원은 경기고 66회 동기생이다. 그런데 진 의원이 두살 더 많다. 진 장관은 생일이 빨라 1년 일찍 입학했고, 진 의원은 재수를 해 한해 늦게 입학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엔 이과·문과로 나뉘어 아주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졸업 뒤 우리 사회의 대표적 네트워킹 공간인 고교 동기 모임에서 만나 ‘늦깎이 우정’을 키워왔다. 그러다 진 장관이 지난 2003년 정통부 장관에 부임하고 진 의원은 17대 국회에서 과기정위에서 활동하면서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격이 됐다. 정통부는 과기정위의 주요 감사기관이기에 ‘질의와 답변’ 등 두 사람의 공방이 불가피해졌다. 비유하자면 같은 고교 축구부에서 한솥밥을 먹다 다른 대학으로 진학해 공격수와 수비수로 격돌한 셈이다. 경기고 시절 서로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진 장관은 진 의원을 “키가 크고 또래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고 기억한다. 진 의원도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희귀 성인 같은 여양 진씨(매호공파)에다 공부를 잘해 얼굴을 알고 지냈다.”고 말한다. 졸업후 진 장관은 서울대 공대(전자공학과)로, 진 의원은 법대로 진학했다. 진 장관이 대학졸업 뒤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진 장관은 다시 국내로 돌아와 ‘반도체 신화’를 창조했고, 진 의원은 법조계에서 입지를 다져오다가 80년대 중반 동기회에서 재회했다. 역시 고교 동기인 장대환 매일경제 회장과 김승연 한화 회장 등이 주선한 자리였다. 진 의원은 “삼성전자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는데 실력과 겸손을 겸비했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기억한다. 이에 진 장관은 “언제나 신뢰가 절로 가는 친구”라며 “개인적 능력과 온화한 인품이 큰 정치적 자산”이라고 화답한다. 지난해 과기정위 국정감사에서 진 의원은 가슴이 짠한 경험을 했다. 친구가 동료 의원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을 지켜 보기란 쉽지 않았던 것. 당시 마음을 진정시키려 끊었던 담배를 한 개비 피웠을 정도였다. 처음으로 국감을 맞았던 당시 상황에 대해 진 장관은 “여야 의원들의 질의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당황하기 때문에 질의 주체가 친구인지 일반 의원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면서도 “그런 가운데 진 의원이 답변이 잘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는 느낌은 들었다.”고 말한다. 어려운 질의에 당황해 쩔쩔맨 진 장관을 보고 진 의원이 “어떤 분야든 모르는 게 없는 줄 알았던 진 장관도 막히는 게 있더구만!”이라며 격려성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진 의원은 “우정도 중요하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정보통신 업계의 차세대 화두인 통신과 방송의 융합, 즉 ‘유비쿼터스’와 관련해 정통부의 준비 현황이 미흡함을 지적하며 날선 질의를 던지기도 했다. 그 논거는 “통신과 방송 융합이 늦어지면 연관 산업의 발전도 지연된다.”는 것이다. 이어 진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 장관이 여권의 유력한 서울시장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는데 휘말리는 것은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정어린 충고도 잊지 않는다. 진 장관은 “진 의원의 중후한 인품은 ‘부전자전’인데 이 자산을 바탕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진 의원 부친인 진기홍 옹과 얽힌 미담을 소개했다. 진 장관은 “진 옹은 광주체신청장을 지낸 분인데 사재를 털어 ‘대조선국우정규칙’ 등 172점의 정보통신관련 자료를 평생 모아 지난 4월 우정박물관에 기증해 감격한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정기홍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사회주의계열 47명 포함 독립운동 214명에 서훈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국제적 여론으로 환기시킨 미국 작가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과 조선노동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1893∼1986)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이 추서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3·1절에 이어 이달 8·15 광복절을 계기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해 일제 강점기 3·1운동과 항일운동 등을 전개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대해 건국훈장 등 서훈을 추서했다고 3일 밝혔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지리산 반달곰 복원 중간점검

    지리산 반달곰 복원 중간점검

    지리산 골짝과 등마루에 곰 발자국이 갈수록 무성하게 찍히고 있다.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으로 방사된 반달가슴곰(1급 멸종위기종, 천연기념물 329호)들의 족적이다. 연말쯤이면 지리산 반달곰이 20여마리를 웃돌게 된다.“산에서 곰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은, 적어도 지리산에선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올해 5년째 접어든 복원사업이 거둔 성과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물음도 동시에 던져지고 있다. 복원사업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곰은 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며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복원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간간이 제기돼 온 이런 물음은 요즘 더욱 진지해졌다. 몇 가지 사례 때문이다. #1 연해주 반달곰 ‘칠선’이의 실패 10개월 전 연해주산 6마리에 이어 북한산 8마리도 지난달 지리산에 방사돼 야생에 적응 중이다.14마리 모두 생후 20개월 안팎.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못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4살 정도까지 호기심이 물오르고 활동력도 왕성해져 사람과 마찰로 이런저런 사고가 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보름 전, 그만 우려했던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지리산 탐방객 등에 따르면 칠선(암컷)이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탐방로 계단을 내려가는 등산객의 배낭을 뒤에서 붙잡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배낭 실밥이 뜯어지기도 했고, 등산객의 모자를 뒤에서 갑자기 낚아채 도망가는 일도 벌어졌다. 대피소 근처에 둔 잔반통의 나사를 돌려 뚜껑을 연 뒤 그 속의 음식물을 먹어 치우는 영리함도 보였다. 어린 반달곰의 앙증맞은 행동으로 여겨선 곤란하다. 복원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틀림없는 실패작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야성을 상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칠선이는 마취총을 맞고 회수돼 계류장에 갇힘으로써 야생의 삶을 중도 마감하게 됐다. 한상훈 반달곰관리팀장은 “언젠가 칠선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한 달 정도 치료받는 과정에서 사람 냄새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칠선이뿐 아니라 또 다른 반달곰도 최근 대피소 인근을 배회하며 쓰레기 더미를 뒤진 흔적이 포착됐다. 반달곰팀은 현재 대피소 근처에 잠복하거나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사실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 팀장은 “(반달곰이 사람 근처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면)등산객들의 탐방문화가 달라져야 한다.”면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 음식을 먹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곰들에게 귀엽다고 과자를 줘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2 일본 반달곰,2년 넘도록 종적 못찾아 지리산 노고단 아래 문수사란 절에서 기르던 반달곰 4마리 가운데 2마리가 지난 2003년 7월 자취를 감추었다. 사찰 측은 “반달곰이 도망쳤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산중에 풀린 경위에 대해선 여러 의혹이 분분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들 곰은 만 2년이 지나도록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탈출한 곰이 일본아종이라는 점이다. 지리산 동부지역에서 서식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야생 반달곰이나 최근 방사된 연해주산·북한산 반달곰과는 교배가 되면 안 되는 종이다. 그럴 경우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탈출한 곰의 생사여부 등 사실관계의 확인이 요구되고 있지만 당국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환경부 김홍주 사무관은 이에 대해 “그동안 (문수사 곰을 봤다는)신고가 일절 없었던 점 등에 비춰 지리산에 살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야생곰과의 교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정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일본 반달곰을 봤다는 신고가 없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관계자는 “일반 등산객이나 탐방객, 주민 등이 곰을 목격하더라도 일본 반달곰인지, 연해주 혹은 북한산 반달곰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면서 “이들 반달곰의 한 쪽 귀에 달린 인식표가 한결같이 노란색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달곰이 실제로 지리산에 풀린 것은 맞는지, 생사여부는 어떤지 등에 대한 당국의 철저한 사실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3 지리산은 ‘위험지대’? 지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에겐 ‘위험한 곳’으로 바뀌게 된다. 우선 내년 이맘때쯤 탐방로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반달곰은 100㎏가량의 육중한 체구를 갖춘 녀석들이다. 귀여운 반달곰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지게 된다. 지리산 등산을 하려면, 최악의 경우 곰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만큼은 필수적으로 알아둬야 할지도 모른다. 반달곰을 당국이 일일이 관리해 주도록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 올해부터 2008년까지 해마다 6마리씩 24마리를 추가로 들여와 방사할 계획인데, 숫자가 많아지면서 인위적 관리는 갈수록 힘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방사 후 1∼2년까지는 반달곰의 이동경로 파악 시스템을 운용할 계획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수컷 곰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반달곰을 방사하면서 귀에 매단 위치추적용 발신기 배터리의 수명이 끝나더라도 이를 교체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한상훈 팀장은 “암컷은 새끼를 배기 때문에 앞으로도 집중 추적해 배터리를 교환할 예정이지만, 수컷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지리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반달곰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사람의 안전에 대한 정교한 대책 마련이 필요함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반달곰과 맞닥뜨리면 일본의 산간지방 에서는 때때로 곰이 주민들을 습격하기도 한다. 우리도 전혀 남의 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됐다. 지리산 깊은 숲속에서 반달곰과 맞닥뜨릴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단 반달곰과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지 말고 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천천히 떨어져야 한다. 당황한 나머지 곰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가는 것은 절대 금물. 이럴 경우 곰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로 판단해 공격해 온다. 산속에서 곰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생각도 오산이다. 곰은 영리하기도 하지만 민첩하기 이를 데 없다.100m를 7초에 주파할 정도다. 심지어 차를 타고 있더라도 산속에선 제 속도가 나오지 않으니 안심할 수 없다. 반달곰은 금속성 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방울소리를 내거나 호각을 크게 불며 자리를 피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대로 반달곰이 접근해 오면 손을 크게 휘두르거나 높은 바위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집요하게 접근할 경우 우산이나 배낭 등으로 적극 방어를 해야 한다. 그래도 공격을 멈추지 않아 급박한 위험에 빠질 경우엔 최후의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신체의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반달곰관리팀은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단독산행을 피하고 지정된 탐방로 이용 ▲곰에게 먹이를 주거나, 비디오 촬영 금지 등을 당부하고 있다.
  • 김철수·김산 8·15때 ‘복권’ 된다

    김철수·김산 8·15때 ‘복권’ 된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가 중 최고 거목으로 꼽히는 김철수(1893∼1986)와 소설 ‘아리랑’의 실존 인물인 김산(1905∼1938)이 8·15 광복절에 정부로부터 서훈 수여와 함께 정식 ‘복권’된다. 정부 관계자는 28일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최근 독립운동가 공적심사를 실시해 이들이 비록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긴 했지만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돼 이들을 서훈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며 “청와대 재가 절차 등을 거쳐 다음달 3일쯤 명단을 확정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에게는 건국훈장 가운데 세번째 등급인 독립장이 수여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1절에 서훈이 수여된 몽양 여운형에게는 건국훈장의 두번째 등급인 대통령장이 수여된 바 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의 순으로 모두 5개 등급이 있다. 이번 8·15 전체 서훈 수여자는 300여명으로, 지난 3·1절 때의 165명보다 많다. 김철수는 192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낸 거물급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일본과 러시아·중국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본명이 ‘장지락’인 김산은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조선혁명가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으며,1년 뒤엔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미국 신문기자 애드거 스노의 부인 님 웨일스를 만나 3개월 간 20여회에 걸쳐 나눈 대화가 그의 혁명적 생애를 그린 소설 ‘아리랑’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번 서훈 대상에는 이들 외에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낸 한위건과 무산자동맹회장을 지낸 김한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특히 김한은 현직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W씨의 외조부로 확인됐다. 정부는 그동안 매년 광복절에 한 차례 실시해 오던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작업을 광복 60주년인 올해에는 3차례(3·1절, 광복절, 순국 선열의 날·11월17일)에 걸쳐 실시하기로 한 바 있다. 한편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이들에 대한 서훈 수여는 사회주의계열이라도 항일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면 적극 발굴해 유공자에 포함시키는 게 옳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라며 “하지만 광복 이후 북한 건국에 기여했거나 책임있는 직책을 맡았던 인물은 공적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승진 구혜영기자 redtrain@seoul.co.kr
  • 군사외교 첨병, 무관을 아시나요

    군사외교 첨병, 무관을 아시나요

    최근 국가간 군사교류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재외공관에 파견되는 ‘무관(武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무관은 공관 책임자인 대사(大使)의 군사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군사외교 활동을 수행한다. 군사외교의 ‘첨병(尖兵)’인 셈이다. ●군사정보 수집에 방산 수출 지원도 1차적으로 본국 정부를 대신해 주재국과 우호적인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 게 해외 파견 무관들의 주임무다. 하지만 이는 ‘기초사항’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재국 관련 군사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일이다. 정보수집 활동이 지나쳐 주재국의 법을 어길 경우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예컨대 수년 전 미 국방정보본부에 근무하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에게 군사 기밀을 누출한 혐의로 구속돼 한·미간 파장을 불러온 로버트 김(한국계 미국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무관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나 덕목은 주재국 여건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주재국과 본국 사이에 군사적 ‘현안’이 걸려 있을 때는 당연히 현안 관련 업무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다. 최근 한·미 동맹을 둘러싸고 양국간 마찰이 심화됐을 때 워싱턴 주재 한국 무관들에게는 동맹관련 사안이 국내 보고 1순위였다고 한다. 국내에서 현지로 출장을 가는 군 고위 관계자들의 일정 관리나 지원 업무도 역시 이들의 몫이다. 최근엔 본국의 방위산업 지원이 주요한 임무로 격상됐다. 본국의 무기나 방산 물자 등을 주재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2∼3년 전 터키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던 육군의 K대령은 국내에서 개발한 K-9 자주포를 현지에 수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이 인정돼 꿈에 그리던 ‘별’을 달았다. ●주재국별로 선호도 편차 커 군내에서 무관은 비교적 인기가 높다. 안정된 외교관 신분에, 가족들과 함께 외국 문물을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임기는 3년. 무관은 상당한 경쟁률을 통과해야 한다. 각 군의 추천을 받아 합동참모본부가 최종 선발한다. 무관으로 확정되면 모두 합참 정보본부 소속이 된다. 무관에는 국방부를 대표하는 국방무관(Defence Attache)과 각군을 대표하는 육군 무관(Army Attache 또는 Military Attache), 해군 무관(Navy Attache), 공군 무관(Air Attache) 등 군 무관, 그리고 무관 보좌관 등이 있다. 이들을 모두 무관이라고 통칭한다. 현재 미국과 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강과 방산 수요가 많은 터키 등 5개국에는 장성이, 기타 국가에는 영관급이 무관으로 나가 있다.42개 재외공관에 66명이 파견돼 있다. 매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 전체의 3분의1가량인 20여명이 교체된다. 하지만 파견국별로 선호도 차이가 크다. 한반도 주변 4강과 영어권은 비교적 인기가 높지만, 군소국가의 경우 희망자가 그리 많지 않다. ●여군·군무원·부사관도 무관으로 파견 국방부는 지금까지 남성 장교로만 국한했던 재외공관 무관요원 선발 대상을 여군과 군무원, 부사관에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지난해 재외 공관에서는 외교관과 현역 군인 간의 의전상 직급을 놓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외교부가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된 현역 군인들의 의전상 직급을 현실화하겠다며 직급을 내리려는 과정에서 국방부측과 적잖은 마찰이 일었던 것. 당시 국방부 쪽에서는 주재국의 아그레망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은 대사와 국방무관 2명뿐이라며 무관과 일반 외교관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줄을 세우는 것은 무리라며 반발했다. 절충 끝에 장성급은 공사급, 대령급은 참사관급, 영관급 군 무관은 1등 서기관으로 각각 조정됐다. 종전보다 1∼2단계 낮아진 셈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무관이 직업 외교관인 대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만큼 ‘끗발’을 부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주한 외국 무관:상주 24개국, 비상주 13개국 현재 서울에는 24개 국가에서 파견된 38명의 외국 무관이 상주하고 있다.13개 국에서는 비(非)상주로 무관을 운영하고 있다. 러시아와 영국·베네수엘라에서는 장성급을, 나머지 국가에서는 대부분 대령급이 나와 있다. 이들이 국방부나 합참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합참에 면담을 신청해야 한다. 절차가 간단치 않은 셈이다. 그래서 대부분 각종 모임이나 파티 등 사적인 장소를 정보 취득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생각나눔] 21세기 명절 된 복날?

    복(伏)날과 밸런타인데이가 새로운 ‘절기’의 하나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 날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특수’ 또한 웬만한 명절 못지않다. 중복인 오는 25일에도 전국의 보신탕, 삼계탕집들은 문전성시를 이룰 전망이다. 청소년들 사이에 밸런타인데이가 축제의 날인 것처럼 어른과 직장인들에겐 복날이 큰 명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활문화가 지역공동체에서 사회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생활문화의 변화가 낳은 21세기 명절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는 복날인 삼복(三伏)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있는 속절(俗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절기나 명절은 아니다. 그러나 복날 풍습은 설이나 한가위 등 명절때 행해지는 세시풍속처럼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안동대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는 “설과 한가위 이외에 단오, 보름, 동짓날조차 현대인의 기억속에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대신 복날과 밸런타인데이를 21세기 새로운 명절로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그 이유를 생활문화가 지역공동체에서 사회공동체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시말해 개인이나 가족, 이웃을 중요시하던 문화에서 직장동료 등 사회생활속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임 교수는 또 아침을 중요시하던 우리의 식생활패턴이 점심과 저녁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복날 특수는 명절과 맞먹어 초복때 영계·황기 등 삼계탕용 품목의 판매량이 평소보다 3∼4배정도 늘었다. 보신탕 삼계탕집만의 특수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복날을 즐긴다는 방증이다. 농협 하나로클럽 양재점의 경우 초복인 지난 15일과 하루전인 14일 이틀 동안 수박 영계 인삼 찹쌀 마늘 황기 등 복날 관련 상품의 판매량은 10억원대로 평소 3억원대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이마트도 이날 닭 매출이 평소보다 386%나 신장됐다. 하나로클럽 이유신씨는 “복날 관련품목의 특수 규모는 명절때와 비슷한 양상”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씨는 “동료들과 초복날 식사를 하면서 올 여름 무더위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해가 갈수록 일상화되고 있다.”면서 “초복날은 어느 덧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계절의 전령사가 됐다.”고 말했다. 1998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보신탕을 취급하는 업소는 전국 6484곳에 달한다. 소비량은 연간 10만 2000여t으로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에 이어 4위다.20년째 서울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연 매출의 30%는 복날을 전후한 여름철에 이뤄지는 한철 장사”라고 말했다. 한편 우리 조상들은 삽살개나 진돗개 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애완견은 먹지 않았다.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오로지 황구(黃狗)였다는 게 중앙대 민속학과 김선풍 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우리조상들은 견(犬)은 먹지 않고 구(狗)만 식용으로 했다.”고 강조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몰락하는 ‘속리산 관광’

    몰락하는 ‘속리산 관광’

    “대한민국에서 상권이 이만큼 죽은 데가 어디 또 있을까.” 속리산 입구에서 음식점을 하는 박화용(44)씨는 “주5일 근무제도 전혀 약발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속리산 관광객이 급감하고 있다. 볼거리가 단조롭고 시대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1970∼90년대 단골 수학여행지로 인기를 끌던 속리산 관광이 법주사와 문장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바래듯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숙박업소 절반·상가 20% 문닫아 20일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법주사 입구 상가단지. 점심 때지만 식당마다 파리만 날렸다. 손님이 있어도 2∼4명에 그쳤다. 거리는 적막감마저 감돈다. 박씨는 “평일엔 손님이 하루 10명도 안 된다. 주말에도 30명이 고작이다.”고 말했다. 그는 “일이 없는 데다 재료값이나 아껴보려고 음식점 주인들이 산으로 나물을 캐러가는 판”이라며 혀를 찼다. 옆집 기념품가게 주인 김헌수(62)씨도 “하루 매상이 고작 2000∼3000원”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음식점, 여관, 기념품가게, 슈퍼마켓 등 300여개의 상점이 있지만 20%인 60여곳이 문을 닫았다. 숙박업소는 60여개 중에 절반이 폐업했다.Y호텔은 3년 전에 문을 닫았고 C모텔은 폐업한 지 5년이나 됐다. 상인끼리 연대보증을 서 한군데가 망하면 연쇄 부도가 나 함께 무너졌다. 해주모텔 종업원은 “방이 48개나 되지만 평일에는 손님 한명 없는 게 대부분이고 나가도 기껏 방 한칸 정도”라며 “주말에도 2∼3칸이 나가면 운이 좋은 날”이라고 허탈하게 웃었다. ●수학여행단 기피… 법주사도 노심초사 법주사 종무소 안춘석 과장은 “세월 좋을 때는 아침부터 3시간 만에 40∼50개의 수학여행단이 밀어닥쳤는데 요즘에는 1개도 보기 힘들다.”며 “150여명이나 되던 사진사도 관광객이 줄고 디지털카메라 등의 보급으로 2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속리산은 1970년 3월 국립공원이 됐다. 법주사, 화양·쌍곡계곡, 문장대 뒤쪽 등 4개 매표소를 통해 입장한 관광객이 90년에는 연간 208만여명에 이르렀지만 95년 193만명,2000년 119만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는 98만명 정도로 국립공원 지정 후 처음으로 100만명 아래로 떨어졌다. 법주사만 따지면 60만여명이다.80년대에는 이곳만 100만명이 넘었다. 올해 상반기 4곳에서 21만 5237명만 찾아 지난해의 3분의1로 감소추세가 뚜렷하다. 입장료는 공원이용료 1600원과 문화재관람료 2200원을 받는다. 문화재관람료는 법주사 입구 매표소에서만 받고 있다. 법주사는 문화재관람료 전액과 공원이용료의 30%를 가져간다. 안 과장은 “절 식구 130명이 먹고사는 데도 벅차 예전과 달리 장애인단체 등을 돕기가 쉽지 않다.”며 “연 입장객이 40만명 아래로 떨어지면 절도 죽는다.”고 말했다. ●주변도로 4차로 없는 80년대 수준 속리산은 법주사를 구경하고 문장대까지 오르면 관광이 끝난다. 설악산처럼 주변에 리조트나 바다가 없다. 지리산처럼 온천도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안 과장은 “묵으면서 보고 즐길 만한 게 없어 주5일제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학생들도 체험 위주로 수학여행 등을 하다 보니 인근 유스호스텔에 와도 법주사까지 오지 않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수학여행이 ‘현장체험학습’으로 이뤄지면서 제주도 등이 선호되고 있다. 이런 판에 지난해는 정부가 금강산 관광까지 권장하자 속리산 상인들은 같은 해 2월 반대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국토의 중심에 있다는 이점도 사라졌다.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변했지만 속리산은 접근성이 제자리 걸음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사무소 관계자는 “주변에 4차로가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도로 수준이 80년대에 머물러 있다.”며 한심스러워했다. ●“리조트·불교성지·체험형 관광지 추진을” 전성기 때 속리산은 피서철 해수욕장변 여관처럼 바가지 요금이 판을 쳤다. 박씨는 “종업원을 3∼4명이나 두었어도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여관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꽉꽉 찼다.5∼6명이 한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먼저 들어가려고 학생들이 새벽부터 입구 법주사 매표소까지 뜀박질하는 장면도 자주 연출됐다. 90년대 후반부터는 관광객이 급감하고 전망도 안 좋자 개보수나 신축을 포기했다. 시설이 80∼90년대 그대로다. 장사가 더 악화돼 집집마다 수천만원의 빚만 졌다. 관광특구지만 밤 9시면 문을 닫아 거리 곳곳이 깜깜하다. 속리산관광협의회 최석주 회장은 “투자가 중단돼 관광산업이 30년째 제자리”라며 “최근 관광패턴에 맞춰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체험형 관광지로 조속히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인들도 “리조트나 불교성지로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보은군 관계자는 “상가 부지가 조계종 소유이고 자연공원법에 묶여 있어 개발이 어렵다.”면서 “현재로는 별다른 개발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보은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룰루~” 김정은 안방 컴백

    “룰루~” 김정은 안방 컴백

    “저는 정말 심한 로맨티스트예요.” 선이나 소개팅에는 끌리는 유전자가 없단다. 무엇인가 우연한, 그리고 로맨틱한 만남에 유혹을 느끼는 체질이라는 김·정·은. 그래서인지 꿈결 같은 사랑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스스로 그런 역할이 어울린다고 설명한다. 지난해 신드롬을 일으킨 ‘파리의 연인’ 이후 1년 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재벌가에서 곱게 자란 ‘공주’ 역할이다. 오는 27일 시작하는 SBS 수목드라마 ‘루루공주’(연출 손정현·극본 권소현 이혜선)를 통해서다. 지난해처럼 푹푹 찌는 안방의 여름을 시원하고 달콤하게 바꿔주리라는 기대가 진작부터 쌓이고 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기다리는 팬들을 생각하면 부담돼요. 하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죠.” 본의 아니게 ‘공주’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민망스럽다는 그녀는 “좋은 옷과 스포츠카, 멋드러진 선글라스로 상징되는 부잣집 딸은 아니다.”면서 “스쿠터를 타고 싶어하고, 그래피티에 꿈이 있는 소탈하고 귀여운 역할”이라고 전했다.‘파리’를 촬영할 때는 걷기 아니면 버스 타기에 “다음에는 잘 사는 역할을 할거야.”라고 다짐했더니,‘루루’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다닌다며 농담 섞인 푸념을 한다. ●‘파리의 연인’과는? 여러모로 ‘파리’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나오고, 또 ‘파리’에서 공동연출을 맡았던 손정현 프로듀서가 메가폰을 잡았다. 김정은-박신양-이동건으로 이어지는 삼각 관계는 김정은-정준호-김흥수로 변신한다. 차이점은? ‘파리’의 강태영은 가진 게 없어도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고, 느끼는 역할이었다.‘루루공주’의 고희수는 겉으로는 가진 것이 많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온실 속 화초’로 곱게만 키워진 조금은 슬픈 캐릭터. “처음에는 소극적이고 조신한 모습을 많이 보이죠. 천방지축 태영이와는 달라요.” 특히 ‘파리’에서는 에너지 넘치는 김정은으로 인해 남자 주인공 박신양이 달라지지만,‘루루’에서는 정준호 때문에 김정은이 껍질을 부수고 나와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는 “태영이와 희수가 겉은 다른 듯해도 마음이 순수하고 해맑은 점이 같다.”고 귀띔했다. 상대역 박신양과 정준호의 차이점을 물었다.“정말 곤란한 질문이네요.”라며 허허 웃더니 “신양 오빠는 배울 점이 많아요. 준호 오빠는 연기하기에 너무 편하고요.”라고 답했다. ●삼순이 언니 최고죠∼! 절친한 사이인 김선아와의 맞대결은 피했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이 한 주 앞서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신이 나서 삼순이를 응원했다는 그녀는 “솔직히 김삼순과 맞물렸으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김정은은 “선아 언니 연기는 스타일이 다르다.”면서 “요즘 여성들을 대변하는 삼순이를 보고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고 전했다. 하지만 연예인 봉사모임 ‘따사모’(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의 같은 회원 김민종이 출연하는 MBC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와 마주치게 됐다.“서로 살살 하자고 했지요. 호호.” 김정은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 시간 동안이라도 시청자들을 달콤한 꿈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진심을 가지고 찍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루루공주는 어떤 드라마? ‘루루공주´의 주인공 김정은과 정준호. 이들은 이미 영화 ‘가문의 영광´으로 흥행 커플임을 입증한 바 있다. 김정은은 국내 최고 그룹 KS 그룹 회장의 손녀딸 고희수를 맡았다. 어려서부터 재벌가 자녀로 교육받았다.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화를 내서도 안 되고, 마음대로 웃지도 못한다. 제대로 연애도 한 적 없고, 심지어 뚱뚱해져서도 안 된다. 정준호는 박우진을 연기한다. 한마디로 왕자다. 능력도 있고, 리더십도 탁월하다. 또 사람에 대한 편견도 없다. 고희수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건설회사 사장의 외동아들이다. 주변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한다. 너무 자유분방한 것이 탈. 게다가 플레이보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잊은지도 오래됐다. 이들이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되며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킨 끝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습이 안방에 전달된다. 제목에서 ‘루루’(lulu)라는 단어는 뛰어난 사람이나 미인, 또는 괴짜 등의 뜻을 지녔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영화속 휴양지 Best10

    영화·드라마 촬영지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화면속에서 보았던 세트장은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세트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주변에 펼쳐진 풍광이 아름답다. 전국에서 가볼 만한 영화·드라마 촬영지 10곳을 소개한다. (1) 국내 최초 드라마 기념관…올인의 제주 섭지코지 넓고 푸른 바다에 웅장한 성산 일출봉이 한눈에 보이는 제주 섭지코지의 올인하우스는 국내 최초의 드라마 기념관이다. 이병헌·송혜교 주연으로 지난 2003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올인 세트장이 당시 태풍 매미로 철거되자 지난 6월 사업비 30여억원을 투입해 복원했다. 지하 2층, 지상 1층의 연건평 270평 규모의 올인하우스는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성당과 야외공원은 물론 촬영당시의 소품, 카지노를 재현해 관광객들이 직접 드라마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또 ‘수연(이병헌) 이야기’,‘인하(송혜교) 이야기’ 등 주인공과 관련된 전시장도 있다. 주변에 있는 신양해수욕장은 적당한 수심과 수온, 바람, 안전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는다. 남제주군 관광진흥과(064-730-1720). (2) 예배당과 김민준 나무… 폭풍속으로의 아름다운 울진 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정성스럽게 지어진 현준(김석훈)과 현태(김민준)의 집. 돛대에 샌드백을 걸어놓고, 그 옆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벌써부터 김민준 나무라 불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빨간색 지붕이 매력적인 그림 같은 예배당도 세트장이다 죽변항 주변에는 덕천리 백사장, 봉평해수욕장 등 동해의 푸른 물과 깨끗한 모래는 해수욕장으로 즐기기에 좋은 곳들이 많다. 주변 명소로는 덕구온천, 유황온천, 성류굴, 민물고기 전시관 등이 있다. 울진군 문화관광과(054-782-1501). (3) 끝없는 백사장… 파이란의 강원 고성군 화진포해수욕장 화진포 해수욕장은 영화에서 파이란(장백지 역)이 백사장에서 자전거를 끌고 서 있었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화진포해수욕장은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숲, 맑은 호수, 기암괴석 등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자연풍광이 수려하다. 화진포에 매료된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은 앞다투어 전용 별장을 세우기도 했다. 김일성 별장과 이승만, 이기붕 별장 등이 각기 들어서 있다. 주변에는 백도해수욕장, 삼포해수욕장, 송지호해수욕장, 건봉사, 세계잼버리수련장, 고성왕곡마을, 울산바위, 통일전망대, 간성향교, 청간정, 청학정, 화암사 등이 있다. 고성군 문화관광과 (033-680-3352). (4) 竹 펼쳐졌네… 청풍명월의 전남 담양 대나무골 테마공원 인조반정을 소재로 한 무협영화의 무대인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서리 대나무골 테마공원(061-383-9291·www.bamboopark.co.kr)은 청정호수 담양호를 중심으로 고지산 골짜기에 부채살처럼 펼쳐진 분지에 자리잡았다. 때문에 청량한 대숲 바람속에서 시원한 죽림욕을 즐길 수 있다. 영화 포스터의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다. 드라마 ‘다모’와 영화 ‘흑수선’, 전설의 고향 ‘죽귀’를 비롯해 수많은 CF이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주변 관광지로는 금성산성과 추월산, 담양호, 소쇄원, 가사문학관 등이 있다. 담양군청 문화레저관광과 (061-380-3150). (5) 나 다시갈래…박하사탕의 충북 제천 진소마을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첫 장면에서 영호(설경구)가 양팔을 벌리며 철교위에서 절규하며 기적의 기차소리에 묻힌 그 장소.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진소마을은 고즈넉한 산자락 등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곳으로 여름철 피서지로도 좋은 곳이다. 특히 영호가 20년전 첫사랑과 함께 소풍갔던 충북의 동강인 제천천(영화속 진소천)은 여름 무더위를 날리기 충분하다. 주변에는 월악산과 청풍문화재 단지, 배론성지, 청풍호반 수경분수와 번지점프장 등이 있다. 제천시 문화관광과(043-640-5681). (6) 바다세트의 제왕…해신의 전남 완도군 위대한 해상제국을 꿈꿔왔던 장보고의 파란만장한 인생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해신’은 완도군 볼목리 세트장(신라방)과 소세포세트장(청해포구) 등 두곳에서 주로 촬영됐다. 볼목리 세트장은 중국거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으로 붉게 칠한 외벽과 건물, 도로 등이 벽돌로 만들어져 마치 중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소세트세트장(청해포구)은 1만 6000여평의 부지에는 부두와 선박, 저잣거리, 군영 막사, 망루 등 42동의 건물이 완공되어 있다. 앞 바다 풍경은 12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마치 장보고의 시대로 돌아와 있는 듯하다. 바다 멀리에는 보길도 등 섬이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주변에는 장도 청해진 유적지와 난대수목원, 예송리해수욕장, 금일해수욕장, 중리해수욕장 등이 있다. 완도군 문화관광과(061-550-5224). (7) 끝없는 갈대밭 사이…JSA의 충남 서천군 신성리 영화의 첫머리에 남한 이수혁 병장(이병헌)이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중 한치 앞도 안보이는 우거진 갈대밭에서 오줌을 누려고 대열을 이탈했다가 지뢰를 밟고, 이를 북한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구해주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갈대밭이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금강 하구둑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부여 방면으로 14㎞가량 달리다 보면 만날 수 있다. 금강하구둑 주변에는 놀이시설인 리버사이드 파크랜드와 자동차 야외극장 등 즐길거리와 마량리 동백나무숲, 비인관광농원, 춘장대해수욕장이 있다. 서천군 문화관광과(041-950-4224). (8) 슬프도록 아름다운…엽기적인 그녀의 강원 정선 백운농장 ‘엽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이 영화에서 견우(차태현)와 그녀(전지현)가 헤어지면서 큰 나무아래에 타임캡슐을 묻는 장면을 촬영했던 곳은 강원도 정선군 함백면 세비재의 백운농장. 고랭지 채소밭 사이로 서 있는 ‘엽기 소나무’는 젊은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파란 하늘과 맞닿는 고랭지채소밭 풍경을 찬찬히 살펴 본다면 그 목가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지그시 감게 된다. 주변에는 화암동굴과 몰운대, 용마소, 화암약수, 소금강, 광대곡의 12용추폭포, 정암사, 가리왕산, 아우라지, 민둥산 등이 있다. 정선군 문화관광과(033-560-2365). (9) 조용한 산사…달마야 놀자의 경남 김해 은하사 스님과 조폭(조직폭력배)의 유쾌한 소동을 담은 이 영화가 촬영된 무대는 경남 김해시 삼방동 은하사(055-337-0101·www.eunhasa.net)다. 신어산 기슭에 위치한 이 곳의 높은 계단을 올라 가면 영화속 조폭 재규(박신양)와 청명 스님(정진영)이 기와 많이 깨기·깨진 물독 채우기 등 서로 기싸움을 벌이던 대웅전 등을 만날 수 있다. 가락국 수로왕때 장유화상이 중건한 이 절은 가야불교의 성지로 도유형문화재 238호로 지정된 사찰이다. 주변 명소로 신어산 산림욕장, 동림사, 가야랜드, 장척계곡 등이 있다. 김해시 문화체육과 (055-330-3251). (10) 웅장한에 압도되다…태조왕건의 경북 문경새재문경새재의 제 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면 나타나는 ‘태조 왕건’ 드라마 촬영지는 2만평에 왕궁 2동과 기와집 41동, 초가집 40동을 지어 그 규모가 마치 민속촌을 방불케 한다. 고증을 통해 고려왕궁과 백제왕궁, 고려의 서민가옥과 양반가옥 등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아이들과 배우는 여행을 하고 싶은 가족에게 인기가 특히 많다. 문경새재관리사무소(054-571-0709). 인근에 문경온천과 문경도자기전시관, 석탄박물관 등도 둘러보면 좋다. 문경시 문화관광과 (054-550-6393).
  • [확바뀐 야간문화] 청계천·공원 변천사

    지난 100년 동안 서울의 외형적인 환경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청계천과 공원이다. 땅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된 우여곡절만큼이나 청계천은 서울의 환경 변화를 대변하고 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그저 개천(開川)이었다. 이름 그대로 개천을 덮고 있던 뚜껑이 열린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청계천을 덮으려는 복개 구상은 1935년 일제에 의해 마련됐다. 당시 경성부의 마치다 토목과장은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로 만들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를 내세운 조선 철도국의 거부로 좌절됐다. 일제는 결국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통교까지를 부분 복개했다. 우리 손으로 실시한 청계천 첫 복개공사는 1955년 광교 상류의 135.8m구간이다. 이후 본격적인 복개공사는 광교∼동대문 오간수다리(평화상가측)구간에서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진행됐다. 길이 2358.5m, 폭 16∼54m의 규모다.1960년부터 1969년까지는 동대문의 오간수다리∼제2청계교 구간이 추가로 복개됐고,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0년부터 시작돼 1978년에 완성됐다. 따라서 청계천 전면복개는 40년동안 단계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1970년대 말까지 천천히 땅속에 묻힌 청계천은 서울의 ‘개발중심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첫 복개공사가 시작된 지 68년만에 청계천 전 구간이 다시 열리게 됐다. 서울의 공원도 변화를 거듭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은 1902년 문을 연 탑골공원이다. 탑골공원이 있는 곳은 조선 초에는 한양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원각사가 있던 곳이며, 조선 중기에는 절이 없어지고 오히려 장락원(掌樂院)·연방원(聯芳院) 등 기생방으로 변할 만큼 우여곡절이 있는 곳이다. 올 6월 개장한 뚝섬 서울숲도 탑골공원만큼이나 사연이 많다. 서울숲 터는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문화관광타운·복합레저단지 등 활용방안이 다양하게 구상됐던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공원으로 결정됐다.1902년 시작된 서울의 공원사(史)는 100여년 동안 서울의 환경변천사와 동일시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현재 서울의 공원은 소규모 어린이공원을 포함해 1600여개가 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삶속의 차 (1)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삶속의 차 (1)

    필자와 차(茶)의 인연은 벌써 35년 가까워 진다. 참으로 비릿하고도 아련한 생의 출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초의스님과 차는 마치 벼락치듯 나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먼 생의 출구에서부터 윤회의 물결과 인연의 흔적들이 내 생(生) 내면에 깊이 잠재했었던 것 같다. 갓 출가를 한 필자는 선방수좌들이 공부하는 남해 용문사에서 공부를 했다. 초 겨울 추위가 절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원주스님을 감기에 들게 했다. 당시 남해는 남해대교가 없던 시골이어서 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약이 없어 고민을 하는 나에게 한 보살이 넌지시 ‘민간담방약’을 일러줬다.“지난 겨울 안거때 보니까 스님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 후원 찬장에 있는 무슨 풀을 달여 마시고 몸이 낫는 것을 봤습니다.” ●처음 대한 이상한 풀잎의 약효 나는 급히 찬장을 뒤졌다. 보살의 말처럼 찬장 깊숙한 곳에 대나무가 그려진 푸른 통에 푸르스름하게 말린 아주 작은 풀잎들이 반통 넘게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질그릇 약탕기를 꺼내고 숯불을 지펴 그 풀잎을 전부 쏟아붓고 부채로 부쳐 달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푹 삶은 그 풀잎국물은 농익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녹색이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쓴 냄새가 코를 독하게 찌르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소중한 약은 약인 모양이다. 이렇게 독하게 쓴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골라 달인 게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정성스럽게 체에 걸러보니 사발로 반쯤됐다. 나는 좋은 감기몸살약이라며 원주스님에게 드렸다. 단숨에 약사발을 마신 원주스님은 얼굴을 찡그리며 ‘도대체 무슨 약이기에 이렇게 소태보다 쓴가.’라고 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일을 자초지종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원주스님은 갑자기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여보게 행자 그 차가 얼마나 귀한 차인 줄 아는가. 큰 스님 공부하시는데 가끔식 드리려고 소중하게 보관해온 것인데. 그걸 전부 다 달이면 어쩌란 말인가. 자네는 차도 모르나.” 도대체 매미 날개 같기도 하고, 감나무잎을 말려놓은 것 같기도 했던 ‘이상한 풀잎’들이 차인지 그 무엇인지 알기나 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쓸 만한 차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던 시절 한약으로 고았으니 얼마나 쓰고 어이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나의 차 생활의 첫 경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뉘라서 차 한잔의 깊은 맛을 헤아릴 수 있으랴. 잡것이 한번 스치면 차의 오롯한 진성(眞性)을 잃나니….”하며 한국의 다성 초의스님이 ‘동다송´에서 노래한 이시가 내 삶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차는 이렇게 마치 천둥번개처럼 삶을 통째로 관통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차는 곧 우리의 정신문화 대변 우리의 삶속에 차(tea)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내재적 가치이며 문화이며 시간이기도 하다. 차는 약용, 음식, 기호음료, 수행의 매체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왜 차를 마셔야 하는가를 잘 모르고 살고 있다. 차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왜 차를 마셔야 하는가를 모르고 마시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 ‘고서’(古書)에서는 “차를 마실 때 사람을 가려 마시고 아무 때나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차는 곧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삶에 대해 나는 가만히 한번 묻고 싶다. 우리곁을 지키던 맑은 달,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던 반짝이는 별, 깊은 호흡으로 온 육신을 상쾌하게 하던 맑은 공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며,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던 삶의 도리는 실종된 지 오래다.‘금전’의 논리와 욕망의 극대화는 인간을 철저하게 자본의 노예로 귀속시켜버린다. 생명이니 환경이니 사랑이니 하는 전통적인 삶의 명제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밖에 없다. 우리시대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문화와 문화사이, 조직과 조직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생존’논리에서 빚어지는 스트레스다. 현대인의 만병의 원인은 바로 ‘스트레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도한 긴장과 흥분, 마라토너처럼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여유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시대에 차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고, 조직과 조직의 긴장을 풀어주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삶에 촌각의 여유를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차인 것이다. 초의스님은 영혼을 일깨우는 인간의 찻 자리에 대해 일갈했다.“밝은 달 촛불이 되고 또 벗이 되니/흰 구름 자리되고 또 병풍이 되어주네/솔 솔 솔 찻물 끓는 소리 시원하고 고요하니/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영혼을 일깨우네/오직 흰 구름 밝은 달 두 벗을 삼으니/도인의 찻 자리 이보다 빼어날 소냐.” 가만히 감상해 보라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 우리마음에 자리를 잡으며 ‘하얀 도라지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텃밭에 톡톡 빗방울을 튀겨내며 서있는 도라지꽃, 사무실 책상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능수버들처럼 휘어진 풍란을 보며 차를 한잔 마실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바로 ‘삶의 찻자리요, 도인의 찻자리’인 것이다. ●차의 미덕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차의 미덕은 어디에 있는가. 명나라 도륭은 ‘고반여사´(考槃餘事)에서 “차는 행실이 바르고 덕을 닦은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음료다. 백석의 맑은 샘물을 길어 끓이는 절차를 법도에 맞게 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그 법식을 완전히 익히고 깊이 음미하여 정신이 융회하고 심취해서 제호나 감로에 비교할 만한 참다운 맛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서 다도를 휼륭하게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모처럼 좋은 차를 마시면서 그 사람 됨됨이가 미흡하다면 마치 좋은 샘물을 퍼서 잡초에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보다 더 큰죄가 없을 것이다. 차의 멋을 모르고 꿀꺽 단숨에 마셔 맛의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 속될 수가 없다.”고 했다. 차는 육우의 ‘다경´에서도 나와 있듯이 하늘아래 그 귀함을 손꼽을 수 있을 만큼 신령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뜬 구름처럼 하늘위에서 노니는 신비스러움이 아니다. 여기에서 ‘신령’이라 함은 인간의 영혼을 맑고 담백하게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현존하는 필요충분한 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차는 또 적요(寂寥)한 것이다. 적요라는 것은 고요하고 그윽한 평안한 경지에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시대 우리문화는 이른바 ‘들뜸’의 문화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참을 줄도 기다릴 줄도 모른다.‘원 스톱 문화’시대에 자신의 뜻과 목적을 관철시킬 일방통행의 ‘들뜸’의 문화를 차분하게 가라앉힐 또 하나의 정적인 작용인 것이다. 우리가 ‘차’를 단순히 ‘차’라 부르지 않고 ‘다도’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차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을 ‘차’요 ‘다도’라고 하는 것이다. 산과 들을 달리며 활과 검을 쓰며 심신을 단련했던 신라의 화랑들도 차를 통해 문과 무의 품격있는 조화를 이루었으며, 고려시대 스님들과 문인들도 “한잔의 차는 곧 참선의 시작. 차의 맛은 선의 맛”이라며 차를 진리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키는 ‘도의 동반자’로 봤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도 “차를 끓여마시는 것이 바로 도의 본체를 체득하는 것이다.”며 차의 진리적 가치를 극찬하고 있다. ●삶과 문화 바꿀 새로운 인연으로 차는 또 그 과학적 효능에 있어서 이 시대의 삶과 또 다른 동반자적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도륭은 ‘고반여사´에서 “진짜 좋은 차는 갈증을 없애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가래를 제거하고 잠이 들게 하며, 소변이 잘 나오고, 눈을 맑게하여 머리가 좋아지게 한다. 식사가 끝날 때마다 차로 입안을 가시면 기름기가 말끔히 제거되며 뱃속이 저절로 개운해진다. 이(齒)사이에 낀 것도 차로 씻어내면 다 삭아 줄어들어서 모르는 동안 없어지기 때문에 번거롭게 이를 쑤실 필요가 없다. 이에는 쓴 것이 좋기 때문에 자연히 이가 튼튼해져서 충과 독이 저절로 없어진다.”고 적고 있다. 차는 또 모든 음식 가운데 으뜸이다. 단순한 으뜸이 아니라 희(喜)로(怒)애(哀)락(樂)애(愛)오(惡) 등 인간의 모든 성정을 통칭해 으뜸이라는 것이다. 초의스님은 ‘동다송´에서 “모든 음식 가운데 차만이 홀로 육정의 으뜸이다.”고 격찬한다. 진나라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장맹양도 “정식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갖은 요리는 그 맛이 절묘하고 뛰어나네. 향기로운 차는 육정의 으뜸이어서 넘치는 맛이 천하에 퍼진다.”고 품평하고 있다. 신농은 또 ‘식경´에서 “차를 오래마시면 사람이 힘이 있고 뜻을 즐겁게 한다.”고 적고 있다. 음식중의 으뜸인 차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하루 하루의 삶을 즐겁게 하는 약리적인 작용을 한다. 차는 만병지약(萬病之藥)이라는 말이 있다. 차가 실생활에서 약용으로 식용으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차의 강물은 여전히 깊고 멀다. 우리시대 문화코드로 새롭게 복원되고 있는 차는 우리시대의 삶과 문화를 바꾸는 새로운 인연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오늘 우리가 차를 마시고 차를 생각하고 차를 곁에 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여연스님은 ▲ 1970년 연세대 철학과 졸업 ▲ 1971년 해인사에서 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82년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문헌도서관 수학, 스리랑카 게라니야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 근본불교와 팔리어 연구 ▲ 1984년 불교잡지 ‘해인’ 창간 편집주간 ▲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사무처장 ▲ 11·12대 조계종 종회의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주간,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역임 ▲ 현재 해남 대흥사 일지암 주석, 사단법인 일지암초의차문화연구원 이사장
  • [토요일 아침에] 참생명의 물 ‘淸水’/최미숙 증산도 부산당리도장 수호사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을 신성시하지 않는 민족이나 종교는 거의 없다. 하물며 과학과 철학에서도 생명의 기원이 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한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물을 신성시한 민족이다. 동의보감에는 물의 종류만도 서른 몇 가지라고 하니 우리 조상님의 물에 대한 고찰은 참으로 경이롭다. 기도를 할 때 모시는 정화수를 증산도에서는 천지를 받는 청수로 여기며, 이를 경건히 모시고 생명의 율려인 태을주를 읽으며 새벽을 열고 밤을 닫는다. 처음 증산도 도문에 입도하여 왜 청수를 모시고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듣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체험적으로 확연히 와닿진 않았었다. 단순히 예법으로 받아들였고, 교육을 통해 기본적인 원리만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왜 청수를 모시고 기도해야 하는지 명백히 체험하게 되었다. 오래 전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피곤하였고, 뭔가 가슴이 사무치는 날이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피곤하고 지친 심신을 일으켜 목욕재계를 하고 청수를 모셨다. 흰 사기그릇에 채워진 물은 내 묵은 마음이라 여기며 비워내고 새로 길어온 맑은 청수를 새마음이라 생각하며 채워넣었다. 그러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으로부터 샘물 같은 밝음이 퐁퐁 솟아나는 듯하였다. 신단 위에 청수를 올리고 읍을 한 후 절을 하였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 되는 반천무지의 절 법으로 천천히 대자연의 기를 느끼며 절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나는 매우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마치 융단과도 같은 빛의 폭포가 청수물과 절 하는 나를 이어주고 있었다. 뭔가 알 순 없었지만 신성한 기운이 청수그릇으로부터 절하는 나의 머리로, 어깨로, 팔·다리로 내려와 나를 감쌌다. 피곤은 싹 사라지고 오히려 등줄기로부터 전율이 오르며 머리는 청명해지고 마음은 한없는 경건함과 기쁨으로 가득차 올랐다. 청수에서 나온 융단 같은 신성한 기운이 마치 양수가 태아를 감싸듯 나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물은 우주 만유의 생명의 근원이기에, 정성스레 모신 물에서는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을 낳고 기르는 조화 성신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그로 인해 나의 묵은 영혼이 정화되고 새롭게 태어남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청수 모시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이른 새벽 도장의 여섯 그릇의 청수를 모시며 벅찬 충만감으로 기도하고 수행했다. 도전의 어려운 부분도 쉽게 읽히고 기도와 수행의 기운으로 신도들의 병을 치유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맑은 이른 아침의 샘물처럼 청명했고 즐거웠으며,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이 청수물을 복록수라고 하셨다. 천지의 복을 가져다주는 복록수. 삶의 풍요를 가져다 주는 복록수. 무엇보다 건강한 생명을 내려주는 복록수. 그 복록수를 마시라고 하셨다. 얼마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보았다. 그 책은 물이 바로 생명, 신 그 자체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에, 문자에, 음성에 반응하는 살아 있는 물! 증산도 수원도장에서 청수로 모시기 전의 일반물과 기도하고 태을주 수행을 한 청수물의 샘플을 에모토 마사루 씨에게 전한 일이 있다. 지금도 그때 찍힌 두 가지 물의 결정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도 아름답고 선명하던 그 육각수의 물! 이전의 파괴된 수돗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환경 오염으로 육각의 결정이 파괴된 물이, 정성스럽게 모시고 천지의 생명주문인 태을주를 읽었을 때 살아 있는 생명력 넘치는 육각의 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우리 몸 또한 한 덩이의 물과도 같다. 스스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한 덩이의 고귀한 생명수다. 하지만 오염된 환경과 각박한 삶으로 인해 우리의 몸과 마음은 파괴되고 숨가빠하고 있다. 기실 마음 놓고 먹을 물도, 안심하고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도, 제대로 된 먹을거리도 찾아보기 힘든 현실 아닌가? 우리 몸은 갈수록 독소로 채워져 변형되어가고 있다. 청수(淸水)! 글자 그대로 맑은 물, 우주 생명의 물이다. 이와 하나 되어 천지의 율려인 태을주를 읽어 혼탁해진 우리 영혼의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면,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건강한 활력이 넘치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아울러 깊은 장막으로 가려졌던 우주 조화의 신비의 문을 열어, 천지와 함께 영원불멸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최미숙 증산도 부산당리도장 수호사
  • 29번국도-기암괴석과 해변

    29번국도-기암괴석과 해변

    올 여름은 29번 국도를 따라 달려보자. 충남 서산에서 전북 군산·부안을 거쳐 전남 담양·보성으로 이어지는 총연장 308.772㎞. 시원하게 뚫린 이 길은 우리를 위풍당당한 옛 성으로, 인자한 ‘백제의 미소’를 지어주는 마애불의 세계로, 고즈넉한 천년고찰의 품으로 안내한다. 기암괴석과 하얀모래가 절경을 이루는 해변과 끝없이 펼쳐진 대나무숲도 길손을 반긴다. 간월도의 어리굴젓, 부안의 백합죽, 담양의 대통밥 등 지역의 별미도 맛볼 수 있다. 길따라 맛따라 떠날 요량이라면 서해안을 끼고 있는 29번 국도를 택하는 게 제격이다. 이 나라 산하 어느 한 곳 버릴 게 있으랴만 이 곳은 특히 세상의 때가 덜 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더욱 정겹다. 오랜만의 여유와 낭만을 되찾아 보자.29번 국도가 바로 그에 이르는 길이다. 글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역사길을 따라 서산을 넘다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읍성 29번 국도를 타고 충남 아산을 지나 서산 방향으로 해미고개를 넘으면 해미시내다. 여기서 조금만 직진하면 사거리에서 개심사 방향으로 해미읍성(사적 116호)이 나온다.1417년 태종대에서 1421년 세종대에 걸쳐 축조된 이 석성(石城)은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읍성으로, 남쪽에는 정문격인 진남문이 있고 동서로 각각 동문과 서문이 자리잡고 있다. 해미(海美)라는 이름은 15세기 초 조선 태종때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치면서 가운데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지은 것. 성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 성벽 둘레에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예전에는 ‘지성(枳城·탱자성)’이라 불렸다. 해미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충무공 이순신이 충청병사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한 서린 천주교 성지 해미읍성은 더없이 평화롭게 보이지만 역사의 한이 서린 곳이다. 대원군 시절부터 천주교 박해로 1000여 명의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집단 순교했다. 진남문을 들어서면 수령이 300년이 넘는 회화나무(일명 호야나무)가 슬픈 역사를 증언하듯 버티고 서 있다. 천주교도들을 매달아 고문하고 교수형에 처하거나 활을 쏘아 처형했던 비운의 나무다. 지금도 이 나무에는 머리채를 매달았던 철사줄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서문 앞 쪽 순교지에는 팔다리를 잡아들고 머리를 메쳐 살해한 ‘자리갯 돌’이라는 사형대와 생매장 순교지인 진둠벙이 그대로 남아 있다.‘진’은 죄인이 줄어 변한 말,‘둠벙’은 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다. 진둠병 맞은 편에는 거대한 해미순교탑과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가 있어 해마다 수많은 교인들이 찾아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고귀한 넋을 기린다. 해미읍성 문화유산해설사인 조성옥(44)씨는 “해미읍성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와서인지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 줄을 잇는다.”며 “주말에는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라고 설명한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은은하게 퍼지는 ‘백제의 미소’ 서해안고속도로 서산나들목으로 진입해 운산을 지나 해미읍으로 가면 삼거리에 서산마애삼존불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회전해 용현 저수지를 지나 계곡으로 들어가면 마애삼존불 입구가 나온다. 국보 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은 가야산의 끝자락인 수정봉 북쪽 산중턱 거대한 절벽을 파내 만든 부조형식의 불상. 중국으로 가던 백제 사람들이 먼 길의 안녕을 빌었던 부처님이다. 백제 후기 작품으로 자연암벽에 새겨진 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부처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리 보이도록 조각돼 있다. 보호각 안에 들어 있어 자연광 속의 미소는 만날 수 없지만 내부에 조명기구가 갖춰져 각도에 따라 비춰보면 변화무쌍한 미소를 엿볼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 위쪽에 있는 수림가든(041-663-3557)은 민물새우탕(1인분 7000원)을 시원하게 잘 끓인다. ●서산마애불 vs 태안마애불 서산마애삼존불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태안읍 백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태안마애삼존불(국보 307호)도 찾아가볼 만하다. 태안읍 로터리에서 원북·이원 방면으로 700m쯤 올라간 뒤 우회전해 1㎞남짓 가면 나타난다. 태안마애삼존불은 백제 초기 작품으로 우리나라 마애석불의 선구로 꼽힌다. 천진난만한 미소의 서산마애석불과는 또 다른 분위기. 뭔가 엄숙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태안마애석불 보호각 앞에는 일소계(一笑溪)라는 물줄기가 있어 산중의 운치를 더해준다. ●간월도 간월도는 원래 창리 포구에서 똑딱선을 타고 가야하던 섬이었다.1980년대말 천수만을 가로지른 서해안 방조제가 건설됨에 따라 육지와 이어졌다. 하지만 간월도 전체가 육지로 변한 것은 아니다. 남쪽 봉우리는 아직도 섬으로 남아 있다. 그 손바닥만한 섬에 간월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다 어느날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치고 난 후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으로, 섬 이름을 간월도라 했다고 한다. 이곳은 옛 삼국시대에는 피안도 피안사로,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루 두번씩 밀물 때는 물이 차서 섬이 됐다가 썰물 때는 물이 빠져 작은 자갈길로 육지와 연결된다. 물이 가득 차면 마치 한 송이의 연꽃, 혹은 한 척의 배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썰물 때를 기다려 간월암으로 건너가는 스릴이 있다. 해안을 끼고 있는 간월도 오뚜기횟집(041-662-2708)에서는 강낭콩·밤·은행·버섯 등을 넣은 영양굴밥(8000원)을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 ■ 강의 끝·바다의 시작 부안전라북도 서남쪽에 위치한 부안땅은 국립공원인 변산반도를 끼고 있는 서해안 최고의 관광휴양지다.1988년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변산반도는 크게 해안가의 외변산과 내륙쪽의 내변산으로 나뉜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국내 국립공원 가운데 유일하게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한다. 특히 격포 일대에는 채석강과 적벽강, 격포해수욕장 등이 모여 있어 관광명소로 이름이 높다. 국립공원 입장료는 성인 16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변산반도 최고의 절경 채석강 변산반도의 절경은 역시 외변산의 채석강. 격포항 북쪽 닭이봉 아래 위치한 채석강은 강이 아니다. 해식단애로 말미암아 생긴 지층을 말한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던 중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에서 이름을 따왔다. 썰물 때 드러나는 해안단층은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신기한 형상이다. 격포해수욕장에서 격포항 등대가 있는 곳까지 펼쳐져 있는 채석강은 물 빠진 바위에 붙은 바다생물과 해식동굴 등 이국적인 풍광이 눈길을 끈다.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는 간조 때 채석강을 거닐어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이 될 듯. 해질 무렵 격포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숫사자의 모습 닮은 적벽강 채석강에서 약 1㎞에 이르는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적벽강에 이른다. 적벽강은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가 노닐며 적벽부를 지었다는 적벽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채석강 북쪽의 적벽강 역시 강이 아니다. 후박나무로 유명한 격포리로부터 용두산을 감싸는 약 2㎞의 해안선을 일컫는다. 천연기념물 123호인 후박나무 군락과 수성당을 거느리고 있다. 적벽강 여울골절벽 위에 서 있는 수성당은 칠산바다를 수호하는 ‘계양할미’라는 여신을 모신 해신당. 절벽위의 수성당에서 굽어보는 위도와 칠산바다는 한 폭의 그림이다. 만물의 형상을 한 붉은 색의 기묘한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동굴이 조물주의 조화를 실감케 한다. 바다에서 바라본 적벽강의 모습은 숫사자를 닮았다. 그래서 ‘사자바위’라 불린다. 석양을 받으면 바위가 진홍빛으로 물든다. 채석강에 비해 찾는 이가 드물어 호젓한 휴가를 즐길 수 있다. 석강과 적벽강 사이에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변산반도 서쪽 끝으로, 채석강과 적벽강의 절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격포해수욕장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물이 맑고 모래가 부드러워 인기다. 백사장 길이는 약 500m.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경사가 완만해 해수욕장으로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백제고찰 격포해수욕장을 지나 석포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능가산 자락에 전나무 숲길로 유명한 내소사가 나타난다. 백제 무왕 34년 633년에 승려 혜구두타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절에 들러 시주를 한 이후 내소사로 불려졌다는 설도 전한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사이 600m 가량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의 전나무 숲처럼 울창하진 않지만 산책코스로는 그만이다. 내소사에서는 관음봉을 올라 바위 능선을 타고 월명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특히 유명하다. 월명암 뒤쪽에 자리한 낙조대에서 보는 서해 일몰 또한 장관이다. ●뭘 먹을까 부안의 맛은 이곳 특산물인 백합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백합은 조선시대부터 임금의 진상품으로 귀하게 여겨져온 명물. 부안군 변산면 새만금전시관 근처의 갈매기집(063-583-6060)은 백합죽의 일번지다. 백합죽은 보통 백합속살과 불린쌀, 김 등을 재료로 만든다. 하지만 이 집에는 특유의 비법이 있다. 이곳에서는 백합죽(8000원)외에 백합회·백합무침 등 백합과 관련된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 竹 펼쳐지는 담양 ●마을 있는 곳에 대숲 있다 “마을이 있는 곳엔 대숲이 있고, 대숲이 있는 곳엔 마을이 있다.” 이같은 말이 있을 정도로 전라남도 담양은 예로부터 죽향(竹鄕)으로 유명하다. 그런 대숲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 찾지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금성면 봉서리 대나무골 테마공원이다. 영화 ‘청풍명월’‘흑수선’, 드라마 ‘여름향기’ 등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청정호수 담양호를 중심으로 추월산과 금성산성 맥을 따라 고지산 골짜기로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숲이 장관이다. ●죽림욕과 송림욕을 동시에 고지산 남서방향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진 3만여 평의 야산에는 맹종죽과 왕죽, 분죽, 조릿대(산죽) 등 각양각색의 대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청량한 대숲 바람 속에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대밭 샛길과 맨발로 황토 마사길을 걷는 소나무 산책로가 포인트. 대밭으로 둘러싸인 공터에는 그동안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와 영화 장면들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5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영시설도 갖추고 있다. 입장료 어른 2000원, 학생 1500원, 어린이 100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061-383-9291. ●담양의 먹을거리 담양읍 백동리 담양공고 옆 죽향(061-382-0684)은 대나무통 영양밥을 잘 한다. 이곳의 대나무통 영양밥은 대통에 쌀과 대추, 은행, 밤을 넣고 불에 구워내 만드는 게 특징. 압력솥에서 쪄내는 것보다 한결 향기가 은은하고 씹히는 맛이 쫄깃쫄깃하다.1인분에 1만원으로 반드시 2시간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대나무골 테마공원에서 자동차로 5분거리, 담양온천 입구 삼거리에 있는 맛선한정식(061-383-9393)에서는 갈치정식(1만원), 병어조림(1만 3000원)등 신선한 생선요리를 내놓는다.
  •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아직 없다. 그래서 충남 보령∼경북 울진을 잇는 36번 국도에는 멋과 맛이 남아있다. 시발점은 보령, 점점이 박힌 섬과 아스라한 낙조에 누구에게나 고향같은 푸근한 곳이다. 숨가쁘게 내달린 36번 국도가 내륙의 바다 충주호에서 긴장을 푼다. 푸른 하늘을 담은 충주호를 따라 단애절벽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연이어 36번 국도는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으로 내달린다. 클라이맥스는 봉화. 인간의 발길에 의해 유린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석천계곡,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계곡과 바위를 굽이치며 휘돌아 백두대간을 넘은 36번 국도는 울진 불영계곡을 따라 동해로 곧장 치닫는다.289㎞ 대장정은 환호성을 내지르다, 자연의 경외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결국엔 겸허한 인간의 자세까지 가르친다. ■ 초록이 넘실대는 보령·충주 ●대천해수욕장과 다보도 무더운 한여름이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대천해수욕장이 기다린다. 서해안에서 백사장 길이(3.5㎞)가 가장 길다. 특히 조개껍데기 가루가 모래와 섞인 패각해수욕장이 자랑거리다. 석양이면 백사장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수욕장앞 4㎞쯤에 있는 무인도인 다보도는 바다낚시터로 이름난 돌섬. 유람선이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대천해수욕장에는 생선회와 꽃게탕, 홍합구이 등으로 유명한 충남수족관(041-933-8077)과 부산횟집(041-933-9898) 등이 있다. ●성주사지와 보령냉풍욕장 성주산은 석불과 최치원, 신도비와 성주사지, 백운사, 휴양림, 활공장 등 보고 즐길 거리가 많다. 한낮에도 깜깜할 정도로 울창한 산림과 맑고 깨끗한 화방골, 삼연동계곡 등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돼 신라시대에는 9대 선문 가운데 하나로 번창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탑, 석등, 돌계단 등만이 옛날을 말해준다. 인근의 보령냉풍장(041-934-8154)은 폐광을 이용한 것으로 한여름에도 섭씨 영상 12도의 찬바람이 불어나와 땀방울을 식혀준다. ●칠갑산과 한치고개 보령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쉬엄쉬엄 한 시간가량 나오면 칠갑산이다.‘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칠갑산자연휴양림(041-943-4510)은 맑은 공기와 울창한 숲이 자랑이다. 휴양림에서 7㎞ 남짓 떨어져 있는 냉천계곡은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발을 담그면 채 5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원하다. 청양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한치고개는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주통로였다. 꾸불꾸불한 옛길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코스로 그만이다. 산책하기에도 좋다. 정상에는 구한말 의병장 만암 최익현선생과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있다. 별미로 칠갑산장(041-942-3298)에서 멧돼지 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충주호 남한의 중심부에서 굽이치는 산줄기를 따라 나라의 강줄기 맥이 모인 곳이다. 백두대간의 장엄한 산자락과 유유한 물줄기가 잠시 긴장을 놓는 곳이다. 충주호는 청명한 하늘을 담고 푸른 산을 닮아 더없이 푸르다. 낙조 하면 서해를 떠올리지만 충주호 유람선에서 맞는 일몰도 그만이다. 하늘에 맞닿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을 고스란히 붉게 물들이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해를 품는다. 대형 유람선을 타고 뱃길을 따라가면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제비봉 등 호수를 둘러싼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충주호는 충주, 제천, 단양을 연결한다. 면적은 97㎢. 국내에서 담수 면적이 가장 넓다. 댐 나루터에서 운행하는 쾌속관광선을 이용해 단양권을 관람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충주호의 수상관광을 즐기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충주호유람선(043-851-5771) ●단양팔경 단양군 남쪽에 위치한 상·중·하선암을 비롯해 사인암 등 8곳의 절경이 영동의 관동팔경과 쌍벽을 이룬다. 으뜸은 한폭의 동양화와 같은 도담삼봉.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 단양에서 북쪽으로 12㎞지점에서 남한강 수면을 뚫고 솟은 세 봉우리.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도담삼봉에서 자신의 호를 본떠 삼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삼봉 중에서 가운데 봉이 남편봉이고 그 옆에 다정한 작은 봉이 첩봉, 좀 떨어진 곳에 딸들을 품에 안고 돌아앉듯 자리한 봉이 처봉이란다. 남편이 딸만 낳은 아내를 내쫓고 첩과 다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옛날이야기도 전한다. 단양관광협회(043-423-5044,421-7114). ●탄금대 신라 진흥왕 때 가야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충주에서 서북쪽의 3㎞에 있으며 달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격전을 벌였던 곳. 탄금대의 12대는 당시 계속된 전투로 뜨거워진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12번이나 오르내렸다는 바위들이다.30∼40분 발품을 팔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 ■ 절로 넘어가는 봉화·울진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36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 봉화읍에서 조금만 빠져가면 석천계곡이다. 울창한 소나무 원시림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맑고 시원하다. 기암괴석으로 자연경관은 수려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산에서 부는 솔바람소리에 잡념이 확 씻기는 듯하다. 계곡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옆에서는 봉화의 춘양목(금강송)으로 조선 중종때 문신 청암 권동보(1518∼1592)가 지은 석천정자가 계곡과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천계곡을 들어서면 바로 나오는 절벽 바위에 신선이 사는 곳 이란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석천계곡에서 나와 36번 국도를 따라 울진방향으로 2㎞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단아한 한옥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풍수지리상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 즉 ‘금계포란’이라 하여 닭실마을(酉谷里)로 불린다. 닭실마을의 압권은 청암정. 충재가 도학연구에 몰두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머리가 동쪽으로 향한 거북 형상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청암정을 지어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울었단다. 지나던 스님이 “거북 등딱지 위에 불을 피우면 거북이 죽는다.”며 “거북에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뒤 아궁이를 모두 막고, 둘레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퇴계 이황의 글도 남아있다. 닭실마을엔 이외에도 유적지와 박물관도 있다. 개인 박물관인 까닭에 잠긴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때 집안에 전해오던 각종 자료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몰래 묻어 보관해왔던 것들이다. 박물관과 청암정 등을 들어가는 입장료는 없다. 닭실마을에는 식당은 없다. 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는 전통방식대로 만드는 한과를 살 수 있다. 여름철엔 한과가 쉬 눅눅해져 만들지 않는 게 아쉬움이다. 봉화문화원(054-673-2350) ●청량사와 청량산 봉화에 갔다면 들를 만한 곳으로 청량산을 들 수 있다. 봉화읍에서 40분 정도 걸린다.918번 국도를 따라 가는 드라이브 코스도 그만이다. 논길을 가다가 운곡천을 따라간다. 운곡천이 깨끗해 수달이 사는 수달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계곡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은 천애절벽의 장관이 파노라마친다. 청량산은 12개 봉우리들이 있다. 정상에서 거대하게 솟아오른 암봉으로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일명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청량산 일주 산행은 4시간 정도. 청량사 일주문을 지나자 나오는 청량폭포가 시원하기 그지없다. 청량산도립공원(054-679-6321) 봉화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인 재래종 검은 돼지로 만드는 돼지구이. 봉성면 가는 초입에는 돼지구이를 하는 집이 20여집 몰려있다. 이 가운데 원조는 아니지만 현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상봉숯불회관(054-672-9783)이다. 숯불구이(180g·5000원)는 돼지고기에 소금만 뿌리고 솔잎을 얹혀 찌듯이 구워냈다. 기름기가 쪽 빠지고 솔향이 은근히 배였다. 텃밭에서 기른 야채에다 돼지구이를 싸 먹으면 정말 일미다. 매콤한 맛을 원한다면 양념구이(6000원)도 괜찮다. 이외에도 봉성숯불식당(054-672-9130)도 유명하다. 불고기가 조금 곁들여 나온다. ●불영계곡과 불영사 36번 국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불영계곡이 아찔하다. 올려다 보면 천애 같은 절벽과 그 위에 곧게 뻗은 소나무가 위태위태해 보인다.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물은 너무 차서 발이 금방 시려진다. 더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불영계곡이 끝날 즈음이면 불영사(054-783-5004)가 나온다.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고찰이다. 대웅전 앞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불영사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뒤로는 오밀조밀한 경관이 펼쳐져 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봉화를 조금 못미친 영주시 풍기에서 시간이 있다면 유·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있다. 울창한 숲속의 소수서원(054-633-2608)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입장료는 어른은 3000원, 어린이는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소수서원에서 10분 남짓이면 부석사(054-633-3464)에 닿는다. 풍기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우리나라 전통 건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사찰.‘부석’이란 돌이 떠 있다는 뜻으로 무량수전 뒤편에 실제로 땅과 약간 떨어져 있는 바위인 뜬돌 즉 부석이 있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다른 자아 찾아서 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분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느끼는 여유로움이다. 마음에 여유가 들어앉으면 그동안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에 한번쯤 마음의 돋보기를 갖다 대보게 된다. 요즘엔 아예 단순한 관광이나 휴식의 개념을 넘어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휴가, 방학을 앞두고 집을 떠나 차분히 삶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보는 여행 이야기를 담은 신간 세 권을 소개한다.●걸어서 히말라야(김인자 지음, 눈빛 펴냄) 시인인 저자는 말한다.“히말라야를 걷고 난 이후 나는 예전의 나와 남이 되었다.”라고. 무엇이 그를 달라지게 했을까? 책은 저자가 지난 2001년 한 달간의 여정으로 베시샤하르를 출발해 마낭을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이르는, 총 350㎞의 길을 오직 두 다리에만 의지해 걸으며 일기를 쓰듯 써내려간 글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심신의 아픔과 그 극복을 통해 스스로 낮아지는 겸허함을 체득했다. 그 여정에서 만난 자연에 닿아 있는 사람들과의 감정 공유를 통해 세상의 깊이를 이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되지 않았을까?’이같은 경험이 있기에 필자는 자신있게 권한다.“가슴이 답답하고, 때로 정신을 가다듬지 않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생이 어느 변방으로 휩쓸려갈지 모른다는 조급증이 난다면 히말라야를 걸어보라.”고.1만 2000원.●나를 찾는 암자여행(정찬주 지음, 마음향기 펴냄) ‘산사는 내면의 접속부사다.’10년 넘게 암자를 순례해온, 저자의 사유가 응집된 말이다. 그는 이야기한다.‘산사의 기호는 침묵의 덩어리 같은 적막이다. 그 적막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하게 하고, 자연과 가까이 하게 하는 접속부사다. 사람이 입을 닫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금언을 잊지 말 일이다.’라고. 이미 ‘암자로 가는 길’ 등 세 권의 암자 기행서를 낸 저자는 이번 책이 아마 마지막 암자기행의 책이 될 것 같다고 한다. 무안 승달산 목우암, 영광 모악산 해불암, 장성 백암산 약사암, 양양 오봉산 홍련암, 김천 천덕산 삼성암 등 이번에 소개된 32곳의 암자들은 지친 자식을 보듬어주는 어머니처럼 포근한, 그리고 깊은 명상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들이다.1만 2000원.●세계 성지여행 108선(브래드 올슨 지음, 최검열·전준호 옮김, 밀알 펴냄)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중 으뜸은 성지순례다. 존경심과 경외심을 품고, 맑은 의식으로 성지를 찾는다면, 훨씬 더 많이 이해하고 깨닫고 돌아올 것이라는 게 저자의 충고. 책은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 주요 종교와 함께 모슬렘, 원시종교 등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가 성스럽게 여겨왔던 곳 108곳을 소개한다. 신전, 교회, 절, 사원 등 전통적 성지는 물론 동굴, 산, 호수 등 천연성지도 망라했다. 성지에 얽힌 역사와 지리, 과학, 전설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풍부하게 실었다.1만 2000원.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talk talk talk] 김성수의 ’맛있는 영어’

    ■ Now I’ll write it on the blackboard for you 이번에는 미국인이 서투른 젓가락로 네번만에 칠판위의 검은콩을 집는 대회에 출전한거죠~ Now I’ll ▶“나 오우! 아이!” 젓가락질이 안되서 힘들죠. 고행접속사의 연발이죠. 그럼 ll은 당연히 젓가락이죠~ 한번 실패했죠. write it ▶ 젓가락질이 계속 헛방이죠. “나 잇! 잇!” 두번째 실패죠. on the blackboard▶ 드디어 화가났죠. 그래서 소리치죠. “칠판에 불켜봐!” on은 스위치 올리는 감탄사죠. 반칙이죠. 심판 실격시키러 다가가네요. for ▶ 미국인 항의하죠. “네(포)번 아니에요?” you ▶ “왜(와이) 오유” 여기서 ‘오유´는 ‘오는거유´의 축약접속사가 되는거죠. ■ 웃기는 영어(6) Taxi Drivers’ Favorite Jokes On the first day of school a teacher is introducing herself to her new third-grade class.“Children,” she says,“My name is Miss Prussy.Now I’ll write it on the blackboard for you.” As she does this,she says,“An easy way to remember my name is that it is spelled just like ‘pussy’ but with an ‘r’…” The following day she asks her class,“Boys and girls,can any of you remember my name?” “I know,” says one boy eagerly.“It is Miss Crunt.” (Words and Phrases) introduce ∼ to …: ∼를 …에게 소개하다 third-grade: 3학년의 easy way to do ∼: ∼하기 쉬운 방법 be spelled like ∼: ∼와 같이 철자하다 pussy: 고양이,(이 글에서는) 여자의 성기 following day: 다음날(과거의 시점으로만 쓰임) eagerly: 간절히, 열심히 (해석) 개학 첫날 한 선생님이 3학년 자기 반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얘들아” 선생님이 말했습니다.“내 이름은 Prussy예요. 여러분을 위해 칠판에 이름을 쓰겠어요.” 이름을 쓰면서, 선생님이 말했습니다.“내 이름을 기억하기 쉬운 방법은 내 이름이 ‘r’자가 빠진 상태로 ‘pussy‘처럼 쓰인다는 거야. 다음날 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얘들아, 너희들 중 누구 내 이름 기억하니?”한 소년이 간절하게 말했습니다.“내가 알아요.Miss Crunt예요.” (해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Prussy(prusi)라는 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학생들에게 ‘r’를 빼면 pussy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pussy라는 단어는 고양이라는 뜻 외에 여성의 성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잘못 이해한 학생이 다음날 선생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Miss Crunt’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학생은 두 가지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첫째, 선생님이 의도한 뜻과 다른 뜻으로 pussy를 이해했고, 둘째 pussy를 기억하지 못하고 의미가 같지만 형태가 다른 cunt를 기억했습니다. 잘못 기억한 cunt에 ‘r’자를 넣어, 의기양양하게 “Miss Crunt”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 영작문 두려워말라(4) 최근의 한·일 관계는 문화적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지만 정치적으로 상당히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한 다음 글을 영어로 옮겨본다고 가정해 보세요. “많은 일본인이 최근의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 폭발 규모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4월에 일어난 중국에서의 반일 폭동이 뉴스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또한 두 나라가 2002년 월드컵을 공동으로 주최한 이후 한국의 음식, 문화, 오락이 일본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첫 문장을 영어로 옮길 때, 다음과 같은 영어 표현이 필요할 것입니다. 좀처럼 ∼하지 않다: be slow to do ∼ 최근의: recent, 규모: scale (감정의) 폭발: flare, 이해하다: grasp 반일 감정: anti-Japanese sentiment 이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복합 명사구 “최근의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 폭발 규모”를 어떻게 영어로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국가나 시간을 가리키는 수식어가 소유격으로 표시되고 장소를 나타내는 수식어가 곧잘 명사 뒤에 옵니다. 따라서 문제의 명사구는 scale of South Korea’s recent flare in anti-Japanese sentiment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반일 감정의 폭발을 좀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현재완료형을 써야합니다. ▶Many Japanese have been slow to grasp the scale of South Korea’s recent flare in anti-Japanese sentiment. 둘째 문장과 셋째 문장은 첫째 문장에 대한 이유를 나타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구문과 표현을 써야합니다. 부분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that is partly because ∼ 폭동: riot 좌우하다: dominate 또한 ∼하기 때문이다: it is also because ∼ 오락: entertainment 유행하다: be in fashion ∼한 이래로: since ∼ co-host: 공동으로 주최하다 월드컵: the World Cup 둘째 문장의 복합 명사구 “4월에 일어난 중국에서의 반일 폭동”은 April’s anti-Japanese riots in China로 표현하면 되겠습니다. 또한 한국의 음식, 문화, 오락이 지금까지 계속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셋째 문장에서는 현재완료형을 써야하고,since-절에는 과거의 명백한 시점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과거 시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That is partly because April’s anti-Japanese riots in China dominated the news.But it is also because South Korean food,culture and entertainment have been in fashion in Japan since the two countries co-hosted the World Cup in 2002. ■ 절대문법을 알려주마(6) 동사 바로 앞·뒤 친구가 중요해요 영어 학습의 핵심은 동사를 중심으로 앞, 뒤에 어떤 단어들이 위치하게 되는지를 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 과정은 올바른 문장의 쓰임을 통해 이해하는 지속적인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I kicked. 동사 ‘kicked’를 중심으로 행위의 주체인 주어 ‘I’가 동사 앞에 위치하여 기본적이 문장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 내용을 궁금해할 것이다.‘무엇을 찼을까?’이렇게 동사의 행위가 어떤 대상에 영향을 주었을까 하고 궁금해 한다면 그 궁금한 내용이 동사 뒤에 당연히 와야 한다. 이렇게 동사의 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대상이 되는 말을 목적어라고 한다. 위의 문장에서 궁금한 다음의 내용을 해결하기 위한 내용을 덧붙여서 문장을 쓰게 되면 다음과 같이 의미가 확장되게 된다. I kicked the ball. 문장은 이제 ‘내가 찼습니다. 그 공을’이라는 의미로 기본적인 문장 구성을 위한 자리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공을 차서 어디로 보냈는데?’ ‘어디에서 공을 찼는데?’ 등으로 더 많은 내용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문장에서 기본 의미의 확장과 함께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말들을 수식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식어 자리는 자유롭게 위치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앞에 쓰인 영어 문장의 의미를 보다 확장시키기 위해 ‘공을 차서 운동장으로 보냈다’는 내용을 덧붙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 I kicked the ball ground. 그러나, 이 문장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운동장에 해당하는 명사 ‘ground’가 차지해야 될 자리가 kicked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명사는 주어와 목적어 자리에 위치할 수 있게 되는데 이미 이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는 다른 명사들로 채워져 버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사 ‘ground’는 혼자서 이 문장의 의미를 구체화시켜주지 못하고 ‘∼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전치사 ‘to’와 함께 쓰여 문장 전체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수식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I kicked the ball to the ground. 그렇다면 ‘공을 찼는데 어디서 찼는지’에 대한 의미를 더해 주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누구나 다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I kicked the ball in the ground. ■ (주)무무잉글리시(www.moumou.co.kr) 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6)북창 정렴과 ‘정감록’

    ‘북창비결’은 조선 명종 때 도사(道士)로 유명한 북창(北窓) 정렴(鄭 1506-1549)이 썼다고 하는 비결인데, 난해한 부분이 많다. 이 예언서는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때부터 줄곧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창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奇人)으로 손꼽힌다. 꽤 흥미로운 인물인 셈이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북창비결’을 비롯해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 보는 것도 한낱 쓸데없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북창 정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정렴은 다재다능한 선비였다. 그는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는 물론, 불교와 도교에 모두 정통하였고, 음악과 그림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문집인 ‘북창집(北窓集)’ 외에도 ‘북창비결(北窓秘訣)’,‘용호비결(龍虎秘訣)’,‘동원진주낭(東垣珍珠囊)’,‘유씨맥결(劉氏脈訣)’ 등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전호에서도 인용한 ‘궁을가(弓乙歌)’ 역시 정렴의 글이라 한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글을 보면, 정렴은 유·불·선 3교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사상적 중심은 유교에 있었다고 한다. 도사라기보다는 유학자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말에 불과한 것 같다. 장유가 정렴을 위해 지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렴은 “한 번 산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00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 맞혔다.”고 했다. 굉장히 높은 수준의 점쟁이였다는 말이다. 정렴에겐 남다른 풍모가 있어 성수익(成壽益)과 같은 조선후기의 학자는 정렴을 신인(神人)이라 평했다. 성수익은 일찍이 정렴이 중국에 가서 유구(琉球·오키나와)의 사신을 만난 이야기를 예로 든다. 당시 유구 사신은 정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다고 한다. 유구 사신이 소지한 책자에는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시(某時)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유구 사신은 정렴을 바로 그 진인(眞人)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구 사신은 여러 시간 동안 정렴에게서 주역(周易)을 배웠다. 그와 대담하는 동안 놀랍게도 정렴은 일본말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삼현주옥 三賢珠玉’). 정렴이 과연 언제 어디서 일본어를 배웠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렴이 대단한 인물이라 믿었고, 특히 지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언젠가 한 번은 정렴의 사촌이 아버지 묏자리를 부탁하러 왔다고 한다. 사양하던 끝에 정렴은 묏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는데, 땅을 파자 온통 물구덩이였다. 모두들 당황했으나 정렴은 시종일관 그 자리만을 고집했다. 결국 구덩이에 큼지막한 돌멩이 몇 개를 채워넣고 장례를 마치게 됐다. 이것은 이른바 수중명당(水中明堂)이었다. 훗날 무덤 안에 채워넣은 돌멩이 숫자만큼 무덤 주인공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정렴이 수중명당을 정했다든가 일본어에 능통했다, 또는 100리 안팎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아 맞혔다는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유구의 사신을 만난 것, 주역과 풍수지리에 밝았던 점 그리고 도가적 수련을 즐겼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정렴은 점술에 능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많은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중 특이한 이야기 하나가 있어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본래 그는 슬하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이들을 좀체 귀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의 불평이 무척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렴의 어린 자녀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렸다. 가족과 친지들은 깜짝 놀라서 죽은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큼지막한 구렁이였다. 소년 시절 정렴은 길을 가다 우연히 구렁이 하나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한다. 그 구렁이가 정렴에게 복수하려고 둔갑술을 빌려 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이런 사실을 미리 눈치챘기 때문에 아이들을 전혀 귀여워하지 않았다 한다. 구렁이가 변해 아이들이 될 이치는 없다. 방금 말한 이야기는 정렴이 세상살이에 만족하지 못해 후세에 혈육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맞을 것 같다. 뒤에 다시 말하듯 정렴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불화하였다. 정렴은 여러 면에서 재능이 빼어났지만 불우했고, 그래서인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때이른 죽음에 대해서도 이를 미화하는 설화가 있어 주목된다. 요컨대 정렴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떼어줬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정렴의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윤두수는 어디선가 자신이 단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아는 친구 정렴에게 매달렸다. 정렴은 친구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 마침내 신선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서 수명을 빌라고 했다. 덕분에 윤두수는 수명을 연장하게 됐다. 그러나 신선들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정렴의 수명을 줄이기로 했고, 정렴은 친구를 위해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일 정렴이 오래 살았더라면 윤두수에 못지않은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후대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정렴의 능력은 특히 방외(方外)에서 빛났던 모양으로,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에서 정렴을 김시습·권극중·이지함·곽재우에 비견되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손꼽았다. ●정렴은 정치에 희생된 불우한 인물 위에서 간단히 암시했듯이 도사 정렴은 말년이 무척 불우했다. 그가 39세 되던 해, 명종 즉위년(1545)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은 윤원형, 이기 등 세력자들과 함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억울하게 죽이고 귀양보냈다. 정순붕은 이른바 소윤의 핵심세력으로서 명종 초년 세도가로 행세했다. 하지만 정렴은 이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컸다. 그는 사화로 인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했다. 아울러 권력을 잡기 위해 그런 일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말로가 평탄하지 못할 줄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렴은 곧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다시피 했다. 그는 아버지를 만류해 사화를 막아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불만을 술과 시로 달래며 소일했다. 그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정렴은 성품이 명민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아비가 하는 짓을 그르게 여겨 일찍이 간(諫)하여 말렸으나 아버지 정순붕이 따르지 않았다. 동생인 정현이 부자간에 이간질하여 온 집안에 변고가 일어나려 하였다. 정렴은 아버지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양주(楊州)의 시골집에 가 있거나 산사(山寺)에 머물러 지낸 것이 실로 여러 해였다(명종 즉위년 8월28일 무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아버지 정순붕은 둘째아들 정현과 공모하여 큰아들 정렴을 죽이려고까지 했다.‘집안에 변고’란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정렴은 현실정치에 관해 아버지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와 아우로부터 버림받은 정렴은 산중에 파묻혀 지내다가 슬픔을 안고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고,‘이 점을 지금까지 선비들은 슬퍼하고 있다.’고 할 지경이었다(실록, 명종20년 10월29일 임진). 자세히 알고 보니 정렴은 너무도 불우한 재사였다. 집안의 저버림을 당한 그는 불교와 도교에 침잠했고, 천문, 풍수지리, 수학, 음악 및 미술로 마음을 달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초인적 능력에 대한 호평은 대부분 사후에 내려진 것이었을 뿐, 그의 인생은 처참했다. ●‘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최우선으로! ‘북창비결’은 말세의 한 가지 조짐을 음주의 폐습과 음란한 풍토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에서 인터넷 성매매와 호스트 바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런 해석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북창비결’에선 말세가 되면 남쪽에서부터 나라가 망한다고도 했다. 좀더 정확히 말해 “물과 물이 있는 서남쪽의 독이 궁궐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남쪽이라면 제주도와 전라남도에 해당한다. 이 구절은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운동 또는 이재수의 난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드시 이런 사건을 미리 염두에 둔 예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딱 들어맞는 예언은 도리어 그런 사건이 일어난 뒤 소급해서 조작된 예언서라는 증거가 될 뿐이다. 어쨌거나 말세가 되면 ‘쥐의 아비 시체가 온 나라에 누워 있고, 뱀의 형 집 연기가 천리 밖에서 나리라.’고 했다. 쥐의 아비와 뱀의 형이 누군지 모르겠다. 혹시 쥐의 해와 뱀의 해보다 한 해 앞선 시점 또는 해당 되는 해의 첫머리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경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임진왜란은 뱀해보다 한 해 전인 용해에 일어났고, 병자호란은 쥐해에 있었다.‘북창비결’의 독자들은 이 두 전쟁이 정확히 예언됐다며 이 예언서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환란이 닥치면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 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을 것이요, 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시절이로다.’ 요점은 말세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구절을 나름대로 짐작해보면 이렇게도 풀이된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을 이끌고 와서 싸운 이여송(松)과 이여백(栢) 형제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제비와 기러기가 가고 오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포로와 사신들의 연행(燕行)길이 잦아졌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행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비가 간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포로와 사신 행차가 기러기 떼마냥 연이어 서울과 연경을 오갔기 때문에, 이를 암시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창 정렴이 과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창비결’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난세를 극복할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만 난세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북창비결’의 대답이다. 지혜와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애써 십승지(十勝地) 같은 데를 찾아 피난해도 결국 아무 ‘쓸데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기러기 신세를 후회하리라.’고 했다. 정리하면,‘북창비결’은 덕과 지혜를 처세의 으뜸으로 친다는 사실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에서도 전혀 없지는 않다. 어쨌든 말세에 피난할 장소를 거론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덕성을 온전히 갖추는 일이라고 말한 점은 인상적이다. ●곡식이 풍부한 평야지대로 가라! 그러면서도 ‘북창비결’은 말세의 피난지에 상당한 비중을 할당하고 있다.‘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피난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북창비결’이 선호하는 피난지역이 다르다는 점이다.‘충청도와 강원도는 살 수가 없고, 경기도 동쪽에서는 어육(魚肉)이 난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강원도, 특히 오대산 이북을 위험지역으로 선포한 점은 쉽게 확인된다. 하지만 강원도에 이웃한 경기도 동부 및 충청도까지 위험지역으로 본 것은 ‘북창비결’의 특징이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흰 것에 의지하는 자는 살겠고, 풍년 든 곳에 가까이 있으면 살리라.’ 이른바 십승지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백두대간의 명산대천을 말하며 다른 예언서에서는 피난지로서 중시된다. 그러나 ‘북창비결’엔 그와 전혀 다른 의견이 제시돼 있다. ‘흰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풍년’을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보았던 점으로 미루어 물산이 풍부한 평야지대를 선호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돈과 곡식이 쌓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구조할 것이네.’라고도 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흰 것’은 백미, 즉 흰쌀이나 당시의 화폐였던 무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북창비결’이 말세의 조짐을 흉년에서 읽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흰쌀과 흰 베가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면 우리나라의 지리적인 조건상 서쪽일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북창비결’은 말세에 ‘기강은 서쪽에서 지탱한다.’고 하였다. 서쪽의 곡창지대라면 전라북도의 김제 만경평야를 비롯해 충청남도의 내포평야, 경기도의 김포평야, 황해도의 연백평야 등이 생각난다. 그런데 황해도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조선시대는 서북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고,‘정감록’은 어느 예언서에서나 이를 기정사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북창비결’은 경기도와 충청도 역시 피난지로 삼지 말라고 심각하게 경고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나라가 지탱해야 될 서쪽은 김제 만경 평야로 대표되는 호남평야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마땅한 피난지와 관련해 ‘명승지(名勝地)라는 곳이 먼저 혹독한 화를 당한다.’고 말한 대목도 유념할 만하다. 정감록의 다른 예언서와는 전적으로 달리 ‘북창비결’은 십승지 자체를 부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양쪽으로 끊어진 산맥, 물이 깊은 곳 섬에 숨어라.’고 말한 구절이 있다. 명산대천 또는 섬에서 말세의 피난처를 구한 흔적이 다소나마 감지된다. 그런 충고는 산에 올라가지 말고 물에 들어가지 말라던 ‘북창비결’의 또 다른 구절과 모순된다. 하지만 내용상의 이 같은 모순은 예언서의 역사를 감안할 때 도리어 당연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예언서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베껴 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개작(改作)돼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언서의 논지가 중층적이거나 상호 배치된 경우가 없을 도리가 없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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