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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 her story] 인어자매, 아름다운 기적

    [런던 her story] 인어자매, 아름다운 기적

    6일(현지시간)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이하 싱크로) 듀엣 예선 자유종목(프리 루틴)이 끝난 순간, 대표팀 관계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박현선(24)-현하(23·이상 수자원공사) 자매가 87.460점을 얻어 전날 규정종목(테크니컬 루틴) 점수 86.700점을 합해 174.160점, 전체 24개조 중 12위에 오른 것. ●등록선수 80명뿐인데… 등록선수가 80명에 불과한 한국 싱크로가 12개 팀이 겨루는 올림픽 결선에 진출한 것은 작은 기적이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장윤경(현 싱크로 대표팀 코치)-유나미 조 이후 12년 만이며 역대 두 번째. 한국 싱크로는 2000년대 초반까지 아시아 1, 2위를 다퉜다. 하지만 2005년 대표 선발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선수의 이탈로 촉발된 학부모와 대한수영연맹의 힘겨루기와 파벌 싸움으로 침체에 빠졌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고, 베이징올림픽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자매에 대한 기대가 각별하다. 언니가 일곱 살이 됐을 무렵 어머니의 권유로 먼저 시작했고, 곧 동생이 뒤를 따랐다. 둘 다 곧 두각을 드러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동기화’(synchronized)돼야 하는 종목 특성상 ‘DNA’를 공유한 친자매만큼 좋은 구성도 없었다. 언니가 2003년, 동생은 이듬해 솔로 부문 대표로 뽑혔다. 그리고 2009년 초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다. 재수를 하느라 2년의 공백도 있었다. 둘은 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2009년 1월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2009년 일본오픈 5위, 이듬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장윤경-김민정 조가 동메달을 딴 이후 8년 만의 대회 메달이었다. ●4년동안 공부도 미룬 열혈 자매 자매는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해 2009년 14위, 지난해 15위를 기록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올림픽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룬 것. 둘 다 런던올림픽 때문에 4년 동안 학업을 접은 상황이라 대회가 끝나면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올림픽에서 ‘인어자매’의 어릴 적 꿈을 이룬 것.12년 전에는 선수로, 이번에는 지도자로 결선 진출을 이끈 장윤경 코치는 “싱크로 종목에서는 순위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규정종목에서 13위를 해 같은 등수로 예선을 마칠 줄 알았다.”며 “결선까지 올라 너무 기쁘다.”고 했다. 김경선 수영연맹 이사는 “지난 4년 동안 올림픽을 위해 올인해 준 것만으로 고맙다.”며 “싱크로는 나이가 들수록 표현력이 좋아지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아기를 낳고도, 30대에도 현역으로 뛰는데 국내 저변이 척박하다 보니 일찍 은퇴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남자 하키는 4강 좌절 한편 남자하키 대표팀은 7일 오전 런던 리버뱅크 아레나에서 열린 B조 예선 5차전에서 강호 네덜란드에 2-4로 지며 2승3패(승점 6)로 조별리그를 마감, 4강 진출이 좌절됐다. 육상 남자 세단뛰기에 출전한 김덕현(27·광주시청)은 16.22m의 기록으로 11위에 그치며 탈락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3) 광주 육판서길 & 대구 북성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3) 광주 육판서길 & 대구 북성로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소년 어니스트는 마을 바위 골짜기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에 대한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란다. 마을 사람들 역시 평생에 걸쳐 훌륭한 인물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실망하기를 반복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얘기다.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부와 명예, 권력 등 출세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지역과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 대구 중구 북성로와 광주 동구 육판서길 역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부와 출세에 대한 갈망의 얘기를 담고 있다. 타관으로 떠나 출세한 이는 마을의 자랑이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고향 길을 따라 대처로 떠난 이 대부분은 으리번쩍하게 출세하기보다 여전히 퍽퍽한 삶 속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광주 육판서길 깜빡이는 30촉 전구를 올려다보며 박수를 치고 처음으로 전화를 들여놓은 집에 모여 감격스러워했던 것이 20년 남짓 전의 일이다. 지하수가 아닌 수도꼭지에서 졸졸거리는 수돗물에 감격했던 것은 불과 7, 8년 전이다. 광주 도심에서 20분 안쪽 거리에 있는 마을이건만 발전은 더뎠다. 온 나라가 난리던 6·25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을 정도였다. ‘전라도판 동막골’ 같은 곳이다. 광주에서 화순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길 입구에 커다란 바윗덩어리 표석이 보인다. ‘六判里’(육판리)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부터 육판서길이다. 시멘트로 닦인 길이긴 하지만 쉬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구불구불한 산길, 논길, 밭길이다. 다른 곁길도 없다. 육판서길 중간쯤 왼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절(법림사)이 하나 있어 육판서길 143번길이 하나 따로 나와 있는 정도다. ●평산 신씨·광산 김씨 집성촌 시작점에서 2004m를 가니 거짓말처럼 마을이 하나 나왔다. 500년 정도의 나이를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마을 어귀에서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광주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이다. 하지만 내지마을이 아닌 육판마을로 흔히 쓰인다. 풍수지리학적으로 3정승 6판서가 나올 지세라고 해 붙은 이름이다. 정승에 판서라니…. 정승은 요즘으로 치면 총리급이고 판서면 장관급인데 진짜 판서를 여섯 명이나 배출했던 것일까. 아니면 대처를 꿈꿔 온 궁벽한 마을의 바람이 담겼던 걸까. 이 마을은 평산 신씨와 광산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육판서길을 도로명 주소로 쓰는 집은 모두 82곳이 있지만 외지로 많이 떠나 빈집이 20곳 가까이 된다. 마을에서 가장 젊어 이장을 맡고 있다는 김성중(64)씨는 “아주 옛날부터 지관들이 마을을 보고 나면 한결같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지세가 아주 좋아 3정승 6판서가 나올 곳이라고 했다.”면서 대처로 나간 육판마을 출신 인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는다. 어디 병무청장, 어느 지역의 지법원장에 4성 장군, 큰 리조트를 운영하는 사업가…. 광주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귀향한 신현덕(70)씨도 “풍수지리학에서는 길지의 조건 중 ‘산진수회 필유음택’이 있는데 우리 마을이 딱 들어맞는다. 외지인들도 묘를 쓰기 위해 여기로 들어온다.”고 거들었다. 산진수회 필유음택(山盡水回 必有陰宅)은 산으로 막히고 물이 감아 도는 곳에 묘를 쓴다는 뜻이란다. ●내지천 마을 감싸고 분적산 병풍처럼 실제로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니 무등산 자락에서 뻗어 내린 분적산이 병풍처럼 든든히 버티고 있고 내지천이 마을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총리, 장관까지는 아니라도 궁벽한 마을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마을회관 앞에서 삶은 감자를 먹으며 마을 내력을 살펴보니 꼭 풍수지리학적 지세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비밀은 육판마을의 놀라운 교육열이었다. 단순히 자식들의 교육열이 아니라 어른, 아이 가릴 것 없는 배움의 열기 그 자체였다. 그저 먹고사는 것에만 매달려야 했던 1955년부터 육판마을에서는 한문서당을 운영했고 1961년에는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었다. 공식 학력은 보잘것없는 촌로들이 문자속이 기특할 수밖에 없는 것도, 마을회관 벽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역사를 빼곡히 기록해 놓은 것도 그에 따른 당연한 이치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도 순리에 가까웠겠다 싶다.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훌륭한 인물의 출현을 기다렸던 어니스트와 마을 사람들이 말년에 이르러서야 새삼 깨달았듯이 육판마을 역시 마찬가지 가르침을 준다. ‘출세’는 돈이나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성찰할 줄 아는 겸손한 성품과 순결한 노력에 따른 부수적 산물이다. 글 사진 광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대구 북성로 일제강점기 때 대구 읍성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허물어진 읍성 자리에 신작로를 냈다. 북쪽에 낸 신작로가 북성로다. 대구역 사거리 대우빌딩에서 달성공원 입구까지 1.42㎞ 구간이다. 지역 최초로 포장된 도로였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제일 먼저 일본 사람들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도로이기도 하다. ●대구 읍성 헐고 낸 신작로 1.42㎞ 구간 자연스럽게 북성로 일대는 일본인들의 상점으로 채워졌다. 조경회사인 스기하라합자회사, 목재회사인 구로가와 재목점, 대구 최초의 목욕탕인 조일탕, 대구 곡물회사, 마쓰노 석유회사, 철물점 등이 생소한 일본어 간판을 내걸고 늘어섰다. 식당, 요릿집, 영화관, 여관 등이 있던 무라카미초(향촌동)와 연결돼 대구 최고의 번화가를 이뤘다. 특히 이곳에 자리 잡은 미나카이 백화점(현재 대우 주차장 자리)은 대구 본점을 시작으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일본 도쿄에 이르기까지 18개 지점을 거느린 백화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1940년 당시 종업원 4000여명에 연 매출이 1억여엔인 공룡 기업이었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5층으로 지어질 당시 대구 최고층 건물이었다. 기둥 사이에 붉은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였으며 안에는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꼭대기 층에는 카페가 있어 지방의 재력가들이 드나들었다. 최근 이 백화점을 내용으로 한 ‘북성로의 밤’이라는 소설이 출간됐다. 일본이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부설한 철도도 북성로를 당시 최고의 번화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철도가 멈추는 대구역 주변에는 물류가 모이고 빠져나가는 대형 창고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거래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주식인 쌀의 거래는 일제의 수탈 강화와 함께 투기성을 띠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북성로는 사교와 문화의 거리로 변모한다. 백조다방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향토 음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향토 음악인의 연습 공간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6·25전쟁 시절에는 북성로 일대에 이름난 다방이 많이 있었다. 모나미, 청포도, 백조, 백록, 호수, 꽃자리 등이다. 모나미다방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으며 꽃자리다방에선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상권이 변하면서 1970년대 들어 북성로에는 공구 골목이 들어섰다. 북성로 거리 양쪽에 500여개 점포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공구, 호스, 농기구, 베어링 등의 산업용품을 판매한다. 이곳에서 대구 경북 산업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3산업공단, 이현공단 등 도심 산업단지가 들어선 1970년대 후반 전성기를 맞았다. ●30년 넘은 여인숙·쪽방 다닥다닥 이후 공구 골목은 부침을 거듭했다. IMF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1998년에는 검단동 유통단지로 상당수 업체가 빠져나가면서, 최근에는 인터넷 쇼핑몰이 생겨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반복되는 위기에도 굵직한 회사들이 여전히 북성로를 지켜 공구 골목은 건재하다. 하지만 공구 골목 주변은 개발에서 소외돼 도심의 빈촌으로 전락했다. 북성로에는 아직도 30년이 지난 낡은 여인숙과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래도 북성로에서 변화한 곳이 있다. 1904년 건설된 대구역사다. 당시 오두막 형태의 임시 역사였지만 1913년에 다시 지어졌다. 목조 2층으로 일본, 서양 절충형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역 앞 광장은 민중 집회와 축제, 선거 유세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장소였다. 대구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별하는 추억을 시민들에게 남겼다. 그 광장은 2002년 대구역이 롯데백화점 민자역사로 바뀌면서 시민들의 품을 떠나고 말았다.북성로에서 50년째 살고 있다는 김정규(75)씨는 “북성로는 대구의 모든 돈과 쌀이 모였던 곳이었다. 이제는 대구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해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14회는 제주 서귀포시 ‘이어도로’를 소개합니다.
  • 펜싱 신아람 준결승서 억울한 패배…AFP “역대 5대 오심 중 하나”

    펜싱 신아람 준결승서 억울한 패배…AFP “역대 5대 오심 중 하나”

    팡트(찌르기) 공격이 들어왔다. 동시 공격으로 득점이 인정되지 않았다. 재차 찌르기 공격이 들어왔다. 역시 동시 공격이었다. 마지막 찌르기 공격이 들어왔고, 상대의 득점으로 인정됐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이 모든 상황이 단 1초 동안 일어났다. ●1·2차 방어후 ‘1초’ 3차 공격뒤에도 ‘1초’ 31일로 열전 나흘째를 맞은 런던올림픽이 경기를 거듭할수록 상식 이하의 오심으로 얼룩지고 있다. 수영 박태환과 유도 조준호에 이어 이번에도 피해자는 한국 선수였다. 이날 새벽 펜싱 여자 에페 개인전 준결승에 오른 신아람(26·계룡시청)이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한 최악의 오심으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신아람은 준결승에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을 맞아 연장 접전 끝에 분패했다. 준결승은 3회전까지 승부가 나지 않아 연장에 들어갔고 연장 스코어도 종료 1초를 남긴 상태에서 5-5 동점이었다. 경기가 그대로 끝나면 연장전 우선권을 얻은 신아람이 승리해 결승에 진출하는 상황. ●오심 충격에 신아람 동메달 획득도 좌절 하지만 1초를 남기고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하이데만이 세 차례 공격을 하는 동안 전광판 시계는 1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선방하던 신아람은 결국 하이데만의 세 번째 공격에 실점했고, 경기는 마치 하이데만의 득점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종료됐다. 심재성 펜싱대표팀 코치가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30분 동안 심판진의 논의가 이어졌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신아람은 피스트(펜싱경기장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심 코치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한국선수단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대한체육회(KOC)도 국제펜싱연맹(FIE)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FIE는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내고 “올림픽 기간 항의에 대응하는 공식 기구인 기술위원회는 한국 팀의 항의가 근거 없다고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해외 언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반응을 보였다. AFP통신은 ‘신아람이 흘린 통한의 눈물’이란 제목 아래 “제대로 판정이 나왔더라면 신아람은 결승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충격에 빠진 신아람은 피스트를 떠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다 에스코트를 받고서야 내려갔다.”고 전했다. AFP는 이 소식을 역대 올림픽에서 일어난 5대 오심 중 하나로 꼽았다. 오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아람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세계랭킹 1위인 쑨위제(중국)에 시종 앞서 나가다 3라운드 중반 역전당하며 11-15로 져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한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권택용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하이데만의 세 차례 공격에 걸린 시간은 각각 0.06초와 0.19초, 1.17초 등 모두 1.42초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개되지 않은, 뒤로 빠지는 동작까지 고려하면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라는 게 권 박사의 지적이다. 런던 김민희·조은지기자 haru@seoul.co.kr
  • [런던올림픽] 金 놓쳤지만 銀 더 빛났다

    [런던올림픽] 金 놓쳤지만 銀 더 빛났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으로 들어온 박태환(23·SK텔레콤)은 처음에 취재진을 보고 웃었다. 울음을 감추려는, 한숨이 섞인 울음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눈이 벌게지더니 5분쯤 지나자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을 참아 보려고 애쓰던 박태환은 결국 “인터뷰 내일 하면 안 돼요? 죄송해요.”라며 황급히 짐을 챙겨 들었다.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경기가 열린 28일(현지시간). 박태환의 인생에서 가장 기나긴 하루였다. ●“인터뷰 내일하면 안돼요” 눈물 이날 오전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센터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박태환의 표정은 밝았다. 예선 3조 4번 레인에 선 박태환은 3분46초68로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그런데 전광판에 보이는 것은 실격을 알리는 ‘DSQ’란 글자였다. 멍해진 박태환은 자리를 떴다. 실격 이유에 대한 취재진의 물음에 “내용을 정확히 몰라서….”라고만 답했다. 대한체육회와 마이클 볼 코치를 비롯한 SK텔레콤 전담팀 관계자들이 상황 파악을 하고 이의 제기를 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박태환은 숙소에 앉아 있었다. “계속 기다렸다. 시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했다.”고 박태환은 상황을 전하면서 가슴을 쳤다. 전담팀 관계자는 숙소로 전화를 걸어 “내일(자유형 200m)을 준비하자. 그래도 아직 모르니 포기하진 말자.”고 했다. 옛 스승인 노민상 SBS해설위원은 “전화를 해보니 숙소에서 울고 있다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오후 4시 국제수영연맹(FINA)이 한국 측의 이의를 받아들여 판정을 번복했다. 극적으로 결선 진출이 가능해졌다. 소식을 들은 박태환의 표정은 담담했다. 서둘러 몸을 풀었다. 결선까지 채 5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 그러나 예민한 박태환에게 실격 소동의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쑨양에 뒤져 올림픽 2연패 좌절 오후 7시 51분. 다시 아쿠아틱센터에 선 박태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몸을 풀고 물 앞에 섰다. 6번 레인을 배정받았다. 4번에는 쑨양(21·중국)이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스타트를 했다. 250m 지점까지 앞서며 올림픽 2연패의 꿈을 부풀렸던 박태환은 쑨양의 무서운 뒷심에 밀려 두 번째로 터치패드를 찍고 말았다. 박태환은 경기 뒤 “지금 내겐 은메달도 값지다. 마음먹은 만큼 (기록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며 “내 수영 인생에서 2009년에 가장 밑으로 내려갔는데, 그런 상황이 오늘 하루 다 이뤄진 것 같다. 그게 좀 힘들다.”고 했다. 런던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한국 저임금자 비중 25.9% OECD국 1위 불명예 여전

    한국 저임금자 비중 25.9% OECD국 1위 불명예 여전

    우리나라의 저임금 근로자 비중이 또다시 상승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이 OECD 주요국에 비해 낮은 데다 이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업주들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6일 OECD의 ‘2012 고용전망’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저임금고용 비중은 전년(25.7%) 대비 0.2% 포인트 상승한 25.9%로 나타났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전년인 2009년에도 우리나라의 저임금 고용 비중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였다. 2010년 기준 OECD 회원국의 평균 저임금고용 비중은 16.3%로 우리나라보다 9.6% 포인트 낮았다. 특히 이탈리아(9.5%), 스위스(9.2%), 포르투갈(8.9%), 핀란드(8.1%), 벨기에(4%) 등은 저임금 고용 비중이 1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집계됐다. 통상 저임금노동 비중은 최저임금 수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2010년 우리 최저임금의 상대적 수준은 임금 평균값 대비 33%, 임금 중위값 대비 41%로 각각 OECD 평균인 37%와 48%에 비해 4∼7% 포인트 낮았다. 절대적 수준을 비교해도 소비자물가지수(CPI)를 고려한 우리나라의 실질 최저임금은 2010년 기준 3.06달러로 OECD 평균(6.66달러)의 47%에 불과했다. 구매력평가지수(PPP)를 반영한 실질 최저임금(4.49달러) 역시 OECD 평균(6.86달러)의 65%에 그쳤다. 문제는 낮은 최저임금조차 지키지 않는 사업장들이 많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2만 3760개 사업장의 최저임금법 준수 여부를 점검한 결과 10곳 중 1곳꼴인 2077개 업체가 최저임금 미만을 근로자에게 지급했다. 고용노동부는 이에 “OECD가 발표한 저임금 기준은 나라마다 조사 범위와 임금 성격이 다름에도 단순 서열화한 것으로 문제가 있다.”며 “객관적 비교를 위해선 경제 수준과 근로자의 임금 수준을 상대적으로 반영한 지표를 활용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오일만기자 oilman@seoul.co.kr
  • 태권도 찾아 한국 온 외국인 수련생들

    태권도 찾아 한국 온 외국인 수련생들

    “정말 놀랍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미국에서 온 양팔 없는 태권도 수련생 실라 래지위츠(34)의 말이다. 래지위치는 선천성 혈소판 감소증으로 양팔 없이 태어났지만 장애를 딛고 태권도 유단자가 됐다. 케이블채널 서울신문STV에 27일 저녁 8시 방송되는 ‘TV쏙 서울신문’에서는 태권도를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 태권도 캠프 수련생을 만날 수 있다. 지난 23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앞에 모인 외국인 태권도 수련생들은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며 멋진 태권도 동작을 보여줬다. 참가자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절도 있게 품세도 하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적은 송판을 힘차게 격파했다. 이 행사는 지난 19일부터 6일간 서울과 무주에서 열린 ‘2012 세계청소년태권도캠프’의 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태권도 진흥재단과 세계태권도연맹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전 세계 33개국에서 선발된 청소년 수련생 210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태권도의 본고장인 한국에서 태권도 품세와 겨루기 등 기술을 익히고 전통혼례와 절하는 방법, 풍물놀이 등 다양한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했다. 배종신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태권도의 가치를 체득하면 자신의 삶이 완성될 뿐만 아니라 사회나 그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다.”며 “앞으로 태권도가 세계인의 보편적인 스포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미래 여군 장교의 꿈을 안고 2박 3일간 특전사 캠프에 참가한 여고생 및 여대생 100명들의 훈련 현장을 찾았다. 성신여대 주최로 9공수 특전여단에서 실시된 캠프는 실제 공수지상훈련이 포함된 병영체험과 정신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김영은 성신여대 입학사정관은 “성신여대 같은 경우 지난해 ROTC 설치대학으로 지정이 됐기 때문에 리더십 전형 중 안보분야에서도 리더로 활약할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고 말했다. 성민수PD globalsms@seoul.co.kr
  • 2년간 시신과 같이 산 70대 할머니 “외로워서…”

    2년간 시신과 같이 산 70대 할머니 “외로워서…”

    ”남자친구를 보내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고독함이 두려웠던 70대 할머니가 사망한 남자친구의 시신과 줄곧 함께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미국 미시간 남부에 살고 있는 72세 할머니 린다 체이스. 할머니의 엽기적 행각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시작됐다. 절친한 남자친구였던 찰스 지글러(사진·사망 당시 67세)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다가 숨을 거두자 할머니는 시신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체이스 할머니는 사망한 남자친구에게 깨끗한 옷을 입힌 뒤 의자에 앉혀놓고 평소 두 사람이 즐겨봤던 자동차경주대회를 함께 시청하는 등 엽기적인 생활을 했다. 충격적인 시신과의 동거는 행방이 묘연한 할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가족의 신고를 받고 단서를 찾던 경찰에 의해 드러났다. 할머니는 들이닥친 경찰에 “잔인해서 한 짓이 아니라 그저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라며 “찰스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다정다감했던 남자였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찰스와 함께 TV를 보며 (시신에게) 말을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부검 결과 찰스 할아버지는 67세 나이로 할머니의 집에서 자연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시점은 2010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추정됐다. 할머니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지만 결국은 처벌을 받을 전망이다. 서명을 위조해 남자친구의 연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쩌면 교도소에 갈지 모르지만 경찰에 진실을 털어놨다.”며 “외로운 나에게 찰스는 유일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사건은 최근 뉴욕 데일리뉴스, 뉴스원 등 현지 언론에 보도됐다. 사진=뉴스원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장충동 족발쿠키’ 그것이 알고싶소

    ‘장충동 족발쿠키’ 그것이 알고싶소

    중구 ‘장충동 족발쿠키’의 성공 사례를 배우려는 전국 자치단체들의 견학이 줄을 잇고 있다. ●주민 17명 기획·판로 직접 개척해 성공 25일 중구에 따르면 지난 24일 강북구 주민자치위원과 마을공동체 관련 공무원 등 40명이 장충동주민센터를 방문해 벤치마킹하는 등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강북구 직원과 주민자치위원들은 장충경로당 내에 있는 제과제빵실을 찾아 족발쿠키 만드는 과정도 체험했다. 앞서 4월 19일에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서 연수 중인 부산시, 전남 여수시, 인천 남동구, 충북 청주시 등의 공무원들이 주민센터를 찾았다. 현재도 전국 각지에서 견학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족발쿠키가 마을공동체의 대표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은 주민들 머리로 직접 기획하고, 발품을 팔아 가며 판로를 개척한 덕분이다. 장충동 주민자치위원들은 지난해 장충동을 널리 알릴 사업을 펼치자는 데 의기투합해 주민 17명이 420만원을 모아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쿠키 만들기에는 사업 아이디어를 낸 이승옥 장충동주민자치위원장과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장전덕씨 등 주민 10여명이 참여했다. ●축제·장터 판매 때마다 순식간에 품절 지난해 5월 쿠키 판매를 시작했는데 알뜰장터에서 600봉지가 2시간 만에 동났다. 이어 10월 남산골 전통축제 때도 순식간에 품절됐다. 주민들은 족발쿠키의 캐릭터 ‘엔젤피그’를 직접 개발해 저작권 등록까지 마쳤다. 최창식 구청장은 “주민 스스로 지역 자원을 활용해 소득을 얻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공동체 사업의 취지에 걸맞아 더 관심을 끄는 것 같다.”면서 “족발쿠키 덕분에 지난해 서울시 자치회관 평가에서 3년 연속 우수구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쓰시마 단상/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7월16일부터 18일까지 쓰시마에 다녀왔다. 제주도보다 가까이 있는 이 섬은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풍광이 좋은 고요한 섬으로 남아 있다. 쓰시마 이즈하라(嚴原)의 슈젠지(修善寺)에서 고 황수영 선생께서 발의해 세운 ‘대한인 최익현 순국지비’를 보고는 울적해졌다. 정토종의 이 절은 지금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는데, 순국비는 그 납골원 어구에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관광 안내문이나 답사 보고문은 대개 최익현이 슈젠지에서 순국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최익현이 함께 갇힌 문생들에게 치포관을 만들어 쓰라고 권했던 엄수영(嚴戍營)은 아니다. 최익현은 엄수영에 갇혀 있으면서 문생들이 상투를 드러낸 채 염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상투를 싸맬 크기의 검은 베 조각을 구해 머리를 덮으라고 했던 것이다. 엄수영은 이즈하라에 있던 병영이었고, 슈젠지는 최익현의 시신이 일단 안치됐던 절이다. 광무 10년인 1906년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의 감옥에 갇혔다. 최익현은 일본의 문물이 크게 흥성한 것을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온순한 통역과 보병들을 만나 보고 타국에도 이웃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최익현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단식을 했다.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쓰시마로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 년 뒤에 병사했다. 슈젠지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최익현의 시신은 부산 초량으로 운구됐다. 1907년 1월 11일의 일이다. 나는 최근 ‘국왕의 선물’을 집필할 때 최익현이 고종의 뜻을 따라 대원군을 탄핵해 고종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지식인들과는 소원해져서 의병을 일으킬 때 호응이 낮았던 사실을 적었다. 위정척사의 논리는 같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적 파벌 의식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한편 쓰시마 와니우라(鰐浦)의 한국전망대에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 정역과 부역이 탄 배가 조난하면서 112명이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쓰시마 도주 소게(宗家)의 문서에서 실려 있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면서, 격군은 물론 성씨 없는 많은 종자들의 이름을 추도비 앞의 부비(副碑)에 하나하나 새겨 두었다. 거기에는 112명 이외에 기록에 없으나 시신을 수습한 한 사람의 이름을 추기해 두었다. 그런데 ‘숙종실록’의 숙종 29년(1703) 2월 19일(갑오)의 기록에 “일본 도해선이 침몰하여 역관 한천석 등 113명이 모두 빠져 죽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을 별도로 거행하게 하였다.”라고 돼 있다. 곧 한천석 등 113명은 계미사행 때 풍기포(?崎浦)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왜인이 우리 측의 지참 물품을 조사하려 하자 한천석 등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크게 일어나 조난을 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거늘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을 번역한 책에는 계미를 인조 21년 즉 1643년으로 잘못 설명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와니우라에 우리 통신사들이 오가며 조난자들을 제사 지낸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도비가 선 것은 저들의 호의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공동체든 공통의 역사 기억을 가질 때 비로소 서로 결속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은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체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 학교교육에서 역사 과목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게티즈버그의 전몰자 수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게 할 만큼 자잘한 사실까지도 공통의 기억으로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쓰시마는 왜구의 거점이었고, 동아시아 감합무역의 중개 지점이었으며, 교린외교의 흑막 지역이었다. 우리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 섬에 대한 역사 기억들을 뚜렷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 [중국통신] 중국 비키니걸, 대낮에 광장에서 단체 체조

    중국 우한(武漢)에서 10여명의 젊은 여성들이 대낮에 비키니를 입고 체조를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23일 우한완바오(武漢晚報)의 보도에 따르면, 22일 오후4시 30분경 십여명의 여성들이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갑자기 3열로 서더니 앞에 있던 여성이 녹음기를 틀었고 녹음기에서 나온 선율은 귀에 익숙한 제8방송체조. 제8방송체조는 우리나라의 국민체조와 비슷한 것으로 60,70년대 거리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틀어주었고 중국인들은 학교, 공장, 가정집 할 것 없이 모두 일어나 그 선율에 맞춰서 체조를 하였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이 익숙한 선율에 귀를 기울였고, 공안들도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이 여성들은 옷을 벗었고, 옷 안에 입고 있던 비키니 수영복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멍하게 쳐다보았고, 공안들은 처음에는 당황해하다가 담당자를 향해 “무슨 활동이냐, 우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고 소리쳤고, 앞에서 녹음기를 만지던 여성은 “2분이면 된다.”며 계속 체조를 했다. 이내 보안이 부른 지원병력이 도착했고 이들은 직전에 제8방송체조의 초반 3절까지 하고는 준비된 버스에 모두 타고 사라졌다. 관중들 몇몇은 “이건 플래시몹으로 행위예술”이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번 활동은 모 여행사가 주최한 미인대회에서 조직한 것으로 담당자 리(李) 총감은 “70년대, 80년대생은 보통 제8방송체조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이번에 참가한 선수들은 90년대 생들이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 이 체조를 하게 했고 이를 통해 관중들에게 지난 시대 기억을 되살리려 했다.”고 설명했다. 중국통신원 홍진형 agatha_hong@aol.com
  • 나라 뒤흔든 고려왕실 ‘남녀상열지사’

    ‘만둣집 상인에게, 절 지주에게, 술집 남정네에게, 심지어 우물 용(왕을 은유한다)에게 손목 잡히고, 잠자리를 한다.’ 고려가요 ‘쌍화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내외의 법도가 지엄한 조선시대 사대부가 보면 헛기침을 하면서 남세스럽다고 할 만큼 후끈하다.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에 비해 고려 사회는 재산상속이나 부모 봉양 등에서 남녀의 권리와 의무가 비등했다. 이혼과 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철저히 소외된 계층이 왕실이다. 순수 혈통을 이어 가기 위한 족내혼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서민들은 남편과 사별하면 어렵지 않게 재혼했지만, 왕후는 여생을 홀로 살아야 했다. 고려의 왕 34명 가운데 천수를 누린 왕은 몇 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남은 젊은 왕후들이 ‘소박한 애정’을 찾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고려왕가 스캔들’(이경채 지음, 현문미디어 펴냄)은 그런 고려 왕실의 남녀상열지사가 고려 정사(政事)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했다. 책은 고려왕실의 대표적인 스캔들로 꼽힐 만한 천추태후(헌애왕후)와 김치양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려 6대 왕 성종의 동생 천추태후는 남편 경종과 사별한 뒤 외척 김치양과 사통(私通)했다. 대로한 성종이 김치양을 귀양 보냈으나 천추태후가 목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김치양은 부활했다. 심지어 둘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서 왕부(王父)의 포부가 커졌다. 문제는 경종의 비 헌정왕후가 사가로 나온 지 10년 만에 숙부 왕욱 사이에서 낳은 순혈 대량원군(왕순)이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역모를 꾸미고 고려 왕실은 정치 소용돌이에 빠졌다. 고려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자겸이다. 이자겸은 고모 셋이 모두 11대 왕 문종의 비가 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누이 장경궁주가 순종의 비가 되면서 이자겸의 영화는 영원무궁해 보였다. 하지만 순종이 즉위 석 달 만에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스물도 안 된 장경궁주는 사가에서 독수공방을 시작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노비 태산이니, 많이 아는 식으로 말하자면 둘이 영화 ‘변강쇠’ 한 편 찍었다. 이 소문이 선종의 귀에 들어가 이자겸의 파직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자겸은 22년간 와신상담한 끝에 외손자 인종이 즉위하자 자신의 딸들을 안기면서 다시 권력을 탐했다. 책은 의종의 둘째 딸 안정궁주의 외도를 꺼내들어 왕실 여인들도 여염집 아낙들과 다르지 않은 욕망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충혜왕과 부인 덕녕공주의 일화로 치열하고 어지러운 고려말 조정의 상황을 살핀다. 근친혼과 불륜 수준이 막장 드라마 이상이지만 고려왕실 일탈의 기록 정도로 넘기기엔 왕실정사와 인물열전이 꽤 흥미롭게 진행된다. 1만 3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엄마, 뽀로로 케이크가 자꾸 쳐다봐요

    엄마, 뽀로로 케이크가 자꾸 쳐다봐요

    CJ푸드빌의 베이커리 브랜드 ‘뚜레쥬르’는 인기 만화영화 ‘로보카폴리’의 주인공들을 활용한 케이크를 지난 1월 첫 출시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한 달 만에 10만개가 순식간에 나갔는데 지금까지도 매월 평균 10만개씩 꾸준히 팔린다. 아동화 브랜드 스트라이드 라이트는 지난해 애니메이션 ‘카2’ 개봉에 맞춰 ‘라이트닝 맥퀸’ 운동화를 내놨다. 아동화치고는 비싼 7만원에 육박하는 이 운동화는 현재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출시 두달 만에 품절돼 올 6월 다시 입고했으나 조만간 완판을 앞두고 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7만원 고가 아동화 두달 만에 품절 고물가와 불황에 꽁꽁 언 소비심리가 풀릴 기미가 없다. 싼 제품만을 찾는 불황형 소비가 대세지만 금액에 상관없이 마음과 지갑을 열게 하는 데 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없다.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얘기다. 뚜레쥬르는 로보카폴리 케이크 성공에 힘입어 로봇 카드를 또 빼들었다. 바로 추억의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 국내 최초의 극장판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1976년 개봉 당시 탄탄한 스토리와 실감나는 영상으로 서울 관객 18만명이라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디플레이션의 그림자가 짙어질 때마다 복고·향수가 뜨는데 이런 점에서 태권V 케이크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로보트 태권V’와 ‘깡통 로봇 철이’ 캐릭터가 장식된 원형 초콜릿 케이크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V’와 주인공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 넣은 딱지로 장식된 사각형 초콜릿 케이크 ‘돌아온 로보트 태권V’ 등 2종은 부모 세대는 물론 아이들까지 단번에 사로잡을 만하다. 뚜레쥬르 관계자는 “로보카폴리 케이크의 구매자들을 살펴보면 생일을 맞은 아이가 있거나 본인의 생일인데 아이가 있는 성인들이 대부분”이라면서 “로보트 태권V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부모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호기심 어린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 수십년 충성고객 양산 태권V처럼 오래된 만화 캐릭터 ‘둘리’의 영향력도 여전하다. 동서식품은 최근 어린이용 시리얼 ‘포스트 오곡코코볼 우주탐험대’를 내놓으면서 아이들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포장 박스에 우주 비행사가 된 둘리와 그의 친구들인 도우너, 또치 등을 넣었다. 어린이를 주소비층으로 하는 과자업계에서 각종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캐릭터 마케팅을 강화하는 추세다. 2010년 미국 예일대 연구팀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연구에 참여한 어린이의 73~85%는 캐릭터가 그려진 과자를 선택했다. 또한 50~55%는 캐릭터가 그려진 과자가 없는 과자보다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 개발은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 케이크’를 판매하는 파리바게뜨가 2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캐릭터, 라이선싱 페어 2012’에 참가했다. 특히 귀여운 뽀로로 제품으로 꾸며진 부스를 찾은 어린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이런 제품 만들어 주세요’ 설문을 진행 중이다. 여기서 나온 반응을 토대로 향후 제품 기획, 개발에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잘 키운 캐릭터 하나가 충성 고객을 양산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온 지 20~30년 된 미국 ‘마블코믹스’의 캐릭터들이 영원불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온라인몰 G마켓(www.gmarket.co.kr)은 국내에서도 대박 난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의 캐릭터가 그려진 갤럭시S3 케이스를 단독으로 판매한다.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등이 그려진 케이스가 강력한 캐릭터의 힘과 갤럭시S3의 인기 덕에 불티나게 팔릴 것으로 기대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7)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7)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생명은 한순간도 정체되지 않고 성장과 소멸을 거듭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매한가지다. 한 부분이 수굿이 성장하여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뿌리는 또 하나의 새 생명을 일으킨다. 새로 태어나는 세포와 죽어가는 세포가 하나의 몸에 공존한다. 삶과 죽음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생명의 원리다. 무릇 모든 생명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간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의 경우는 더 그렇다. 줄기가 부러진 뒤에도 나무는 새로 난 줄기로 그의 생명을 이끌어간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에서 태어나던 때의 세포를 찾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나이를 측정하는 것도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강원도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1500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그러나 비슷한 연륜의 다른 은행나무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중심 줄기가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지고 죽은 줄기 곁에서 촘촘히 돋아난 여러 개의 맹아지(萌芽枝)가 수백 년을 자라서 새로운 모습으로 20m의 높이까지 솟구쳐 올랐다. 새로 태어난 삶이 죽음을 에워싸고 하늘을 우러러 큰 생명을 이룬 것이다. 맹아지는 줄기나 가지에서 불규칙하게 솟아나는 새 가지로 대부분의 나무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유독 은행나무의 맹아지는 기존의 줄기와 가지 못지않은 크기로 발달하는 특징을 가졌다. 1500년 전에 뿌리를 내린 늑구리 은행나무의 줄기는 죽어 없어졌고, 그 곁에서 새로 돋은 10여개의 크고 작은 맹아지가 우람하게 자랐다.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굵은 맹아지에서부터 고작해야 10여년쯤 돼 보이는 가늣한 맹아지까지 다양한 연륜과 크기의 맹아지가 서로 어울렸다. 이처럼 다양한 맹아지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돋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새로 자란 맹아지들은 줄기가 있던 텅 빈 가운데 자리를 촘촘히 메웠다. 자연히 나무 전체의 생김새도 애당초 이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여겨진다. 꽤 어지러워 보이는 나무의 생김새는 한 그루가 지어낸 결과가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크기의 은행나무가 사람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외따로 서 있다는 것도 이 나무의 특이한 점이다. 은행나무는 저절로 번식하지 않고,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의 손을 타고 자라는 나무라는 이유에서다. 나무 곁에서 오래된 사람살이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고작해야 몇십년도 안 돼 보이는 낮은 지붕의 살림채가 하나 있을 뿐이다. ●절집 자리에서 스님들이 심어 키운 나무 “30년 전에 딸아이가 산 아래의 소달초등학교에 들어갔지. 읍내에 살았는데, 학교가 멀어서 아이가 힘들어했어. 그때 마침 이곳에 친척이 살다 떠나려던 집이 있어서, 맞춤하다 싶어 들어와 살게 됐지.” 나무 앞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김명환(70) 노인은 이 외딴 집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일곱 남매를 키웠다.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내보내고 지금은 노부부만 남았지만, 김 노인은 ‘신령스러운 나무가 지켜주는 든든한 집’이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은행정’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 마을을 ‘절골’이라고 불렀대. 나무에 스님들과 관계된 전설이 있다고도 하지만 연유는 몰라. 절골이라면 절이 있었다는 이야긴데, 그런 흔적이 없거든.” 절집의 흔적도 없는 자리에서 1500년을 자란 나무에 얽힌 오래된 전설을 톺아보면, 늑구리 은행나무는 절집 마당에서 스님들이 정성껏 심어 키우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한 동자승이 이 나무 줄기에 기어오르기를 좋아했다. 어린 동자승은 줄기에 기어오르다 떨어져 다치는 일이 잦았다. 동자승을 돌보던 큰스님은 동자승이 아예 나무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나무줄기를 반들반들하게 깎아내려 했다. 스님이 나무의 몸집에 날카로운 칼을 밀어넣는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줄기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스님은 법당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때 불상에서 “나무의 피를 받아 마셔라.”라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스님은 뛰어나와 나무가 흘리는 피를 받아마셨다. 그러자 스님은 창졸간에 커다란 구렁이로 변해서 나무 줄기 가운데에 똬리를 틀고 나무를 지키는 지킴이가 됐다.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변증의 생명체 나무를 신성하게 잘 지키려는 의도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틀림없겠지만, 이야기에 굳이 스님과 동자승을 등장시킨 건 아무래도 이 나무가 절집과 관계 있는 나무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생각된다. 김 노인의 말처럼 절집의 흔적은 없지만 나무는 필경 절집의 나무였던 것이다. “예전에 개를 키웠던 적이 있어. 그런데 이 나무의 신령한 기운을 개도 알았는지 신통하게도 이 나무 아래에서는 절대로 똥을 싸지 않더군. 그뿐이 아냐. 이 산에 뱀이 많았지만 우리 은행나무 그늘에는 뱀이 다가오질 못 했어.” 가늠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생명체 앞에서 과학의 잣대로 노인이 건네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지는 건 애당초 옳지 않다. 나무 곁에서 30년 동안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에 의지해 살아온 산골 농부의 나무 자랑이고 자연 사랑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인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는 그렇게 과학 그 너머의 세계에서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변증의 생명체로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 나무의 유장한 생명력에 가만히 고개 숙일 따름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늑구리 210-2. 영동고속국도의 강릉교차로에서 동해고속국도로 갈아탄 뒤 동해고속국도의 개통구간 중 남단인 동해나들목으로 나간다. 국도 7호선을 타고 삼척 방면으로 4.4㎞ 가면 국도 38호선과 이어지는 단봉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28㎞ 쯤 남하한다. 영동선 철도의 고사리역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오십천을 건너는늑구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 뒤, 고사리역 안으로 들어간다. 역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1㎞ 쯤 가면 언덕 위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 대박 복권 당첨, 아내에 비밀로 숨긴 男 결국

    거액이 걸린 복권에 당첨된 남편이 아내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를 숨긴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자 아내가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15일 타이완 TVBS의 보도에 따르면 타이완에 사는 리(李)씨는 5년 전 800만 위안, 우리 돈으로 14억 40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됐다. 하지만 리씨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당첨금의 상당액수를 절에 기부했으며, 남은 돈 역시 자신의 유흥에 모두 써버렸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씨의 아내는 남편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고 법원에 이혼신청소송을 냈다. 아내는 “결혼 후 남편빚 상당 부분을 내가 대신 갚아줬다. 하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평소에도 가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복권에 당첨된 것과 관련해 수 년 간 내게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리씨는 “복권은 친구와 함께 돈을 모아 샀으며 당첨사실을 안 후 친구가 절에 기부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법원 측은 “조사 결과 리씨가 장기간 가계 생활에 전혀 보탬을 주지 않은 채 아내에게 의지해 왔으며, 복권 당첨사실조차 알리지 않은 것은 부당한 행동”이라면서 “부부는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눠야 하지만 도리어 아내에게 상실감만 준 것이 확실하다.”고 전했다. 이어 “가계를 돌봐야 할 의미를 다하지 않고 아내의 감정을 무시했으므로 아내의 이혼신청은 타당하다.”면서 아내의 손을 들어줬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연극리뷰] ‘니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연극리뷰] ‘니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인터넷 뉴스를 도배하고 있는 학교 폭력 및 왕따, 그리고 피해 학생의 자살 사건. 기사를 읽을 때마다 ‘어머,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걱정하며 가해 학생들을 비난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다. 만약 내 아이가 같은 반 친구를 왕따시키고, 한 아이가 자살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또한 평소 학교 폭력 피해 기사를 접했을 때처럼 가해 학생들을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연극 ‘니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강남의 한 중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이 왕따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자살한 학생은 자살 직전 지인 3명에게 유서 형식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피해 학생이 왕따를 당했던 사실과 가해 학생 5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결국 학교에서 가해 학생의 부모를 소집한다. 상황파악을 한다는 이름으로 대책회의를 가진다. 5명 아이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고자 극도로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편지만 없어지면 우리 아이가 가해자라는 증거는 없지 않으냐며 편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심지어 편지를 잘게 잘라 먹어 없애기까지 한다. 그들이 10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나누는 대화는 객석에 앉아 있는 청소년 관객들을 분노하게 했다. 단체관람을 온 학생들은 극에 몰입해 가해자 부모의 비이성적 행동에 ‘어휴’,‘아, 뭐야’ 등 적극적인 야유를 퍼부었다. 특히 배우 박지일과 서이숙의 몰염치한 캐릭터 연기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비이성적이고 비윤리적인 발언을 해도 되는 것이냐?”고 비난하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가해 부모들이 ‘어차피 죽은 아이, 바보로 만들고, 살아있는 내 아이에게 피해만 없게 하면 된다.’라는 식의 잘못된 의식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얼굴에 여드름이 많다는 이유로, 그냥 싫다는 이유로, 친구들은 그의 급식 식판을 뒤엎었다. 돈을 빼앗겼고,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에게 원조교제를 강요받았던 피해자는 죽기 전 남긴 3통의 유서에서 ‘아이들이 절 싫어해요. 제가 뭔가 잘못한 거 같아요. 이유를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명확한 왕따의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잘못된 군중심리에 휘말리거나, 피해를 보지 않으려는 이기심에서 왕따 문제를 계속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내내 생각하게 된다.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4만~6만원.(02)399-1700.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야유받은 롬니

    밋 롬니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적진’(敵陣)에 뛰어들었다가 야유 세례를 받았다. 롬니는 11일(현지시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NAACP) 전국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과 경제 성적을 비판했다가 흑인 청중들로부터 거센 야유를 받았다.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가 흑인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흑인 단체인 NAACP에 참석하는 게 롬니로서는 편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연설하는 25분 동안 시끄러운 야유가 세 차례나 쏟아지자 롬니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절제된 박수와 태도로 경청하던 흑인들은 롬니가 오바마 건강보험개혁법을 ‘오바마케어’로 지칭하며 반대한다고 했을 때, 오바마의 경제 정책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자신이 흑인 가족에게 더 나은 대통령감이라고 했을 때 야유를 보냈다. 롬니의 흑인 유권자 담당 고문인 타라 월은 “롬니의 메시지는 대담했고 꼭 해야 하거나 필요한 말을 한 것”이라고 한 반면 오바마 캠프는 “흑인들이 롬니의 경제론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2008년 대선 때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는 이 단체에서 연설하면서 오바마 당시 후보를 치켜세우는 데 주력했다. 이날 발표된 퀴니피액대학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바마는 흑인 유권자 지지율에서 롬니를 92%대2%로 압도했다. 2008년 대선 때는 출구조사 기준으로 흑인 표 가운데 95%를 얻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사설] 이래서야 누가 19대 국회 특권버리기 믿나

    특권을 버리겠다던 19대 국회가 첫 시험대에서 기만적인 속살을 드러냈다. 국회는 어제 본회의를 열어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고, 무소속 박주선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만 통과시켰다. 국회의원의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며 쇄신의 목청을 돋운 지 얼마나 됐다고 이 같은 행태를 보이는가. 두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는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대로 19대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그래서 국민은 이번만은 국회가 제 식구 감싸기의 구태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야당의 거센 비난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번 사태는 정치 불신을 가중시킬 것이 분명하다. 특히 새누리당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새누리당은 19대 국회 개원과 함께 의원 특권포기를 앞장서 주창했다. 그러나 결국 구태를 답습하고 말았다. 여전히 특권의식에 절어 있고 쇄신과 개혁은 정치적인 수사에 불과했음을 드러낸 꼴이다. 일부 중진의원들이 “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는 것은 국회가 피의사실을 인정해 주는 꼴”이라며 부결을 주장한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동안 입만 열면 외치던 쇄신은 도대체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달라지겠다는 것이었는가. “새누리당이 말하던 쇄신의지는 어디로 갔느냐. 여당은 무죄이고 야당은 유죄인가.”라는 민주당의 항변에 새누리당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한구 원내대표 등 원내지도부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국민은 전혀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는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대권 행보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되레 기만한 데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그동안 쇄신과 변화를 외쳐 왔지만, 정작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자성하고 새롭게 자세를 다잡아야 할 것이다.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여당이 언제까지 국민을 맥빠지게만 할 것인가.
  • [씨줄날줄] 스님의 유행가/최용규 논설위원

    일본이 약탈해 간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려불화가 외교적 노력이 아닌 절도범의 손에 의해 국내로 돌아온 사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무속인이 낀 당시 50대 중반의 원정 절도단은 2002년 일본 효고현의 사찰 가쿠린지(鶴林寺) 소유의 ‘아미타삼존도’를 훔쳐 국내 중개상에게 팔았다. 아미타삼존도는 화려함과 치밀함이 특징이며 감정가만 10억원에 달하는 일본의 국가지정문화재다. 한·일 공조수사로 2004년 범인들이 붙잡혔지만 이들의 절도행각은 ‘애국절도’로 미화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는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46호), 갑사 삼신불 괘불탱(국보 298호) 등 10점 안팎의 불화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예술품인 고려불화는 대부분 해외로 유출돼 일반인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는 전세계에 160점 정도이며, 우리나라엔 20여점밖에 없다. 학계에선 고려불화는 고려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이는 고려시대의 일반 회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불화는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백미로 꼽힌다. 단아한 형태와 원색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의 조화,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힘 있는 선묘는 세계적인 종교예술품이라는 찬사가 결코 과하지 않다. 재작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고려불화대전-700년만의 해후’는 고려불화가 명불허전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이때 전시된 작품 중 일본 센소지(淺草寺) 소장 수월관음도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 고려 문화의 진수로 소개되기도 했다. 물방울 관음으로 불리는 수월관음도는 일본 현지에서도 공개하지 않아 일본 학자들조차 보기 어려웠다. 이런 찬란한 고려불화는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으로 급속히 퇴조했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됐던 만큼 불화는 절 이외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다. 30년 넘게 고려불화 재현과 대중화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고려화불연구소 이사장 혜담 스님이 고려화불(스님은 불화를 화불이라고 표현했음)에 얽힌 속내를 털어놓았다. 구슬픈 유행가 한 자락을 통해서다. 수월관음도와 500나한도를 국내 최초로 재현한 고려불화 재현의 독보적 존재다. 300여점의 고려불화가 참선하듯 몰입한 그의 붓놀림으로 재현됐다. 스승 없이 일궈낸 일이라 더욱 값지다. 재현은 했지만 작품 보관이 큰 걱정이다. 찬란한 문화유산의 명맥을 잇는 스님의 뜻이 단절되는 일 없이 천년이 가도록 꽃 피울 수는 없을까.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北김정은, 다른남자와 결혼한 옛여인 찾아낸뒤

    北김정은, 다른남자와 결혼한 옛여인 찾아낸뒤

    지난 주말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모란봉악단 공연관람 장면을 공개한 가운데 김정은 옆에 앉은 젊은 여성의 정체를 놓고 각종 추측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중앙TV는 7일 김정은이 하루 전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눈길을 끈 것은 20대로 추정되는 미모의 여성이 김정은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단발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이 여성은 김정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공연을 지켜봤다. 당시 김정은의 왼쪽에는 군부 최고 실세로 알려진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앉아있었다. 조선중앙TV는 최 국장 등 공연을 관람한 고위간부의 명단을 밝혔지만 이 여성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았다. 하루 뒤 김정은이 할아버지인 고(故) 김일성 주석 사망 18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할 때도 이 여성은 김정일 옆에 함께 있었다. 김정은과 이 여성은 다른 당·군 간부보다 한 걸음 앞에 나와 절을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여성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여정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오빠의 옆을 수행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행사 때 김정은의 옆에서 상복 차림의 젊은 여성이 문상객을 맞는 장면이 나오자 우리 정보당국이 김여정으로 추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탈북자 인터넷 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는 이 여성이 김여정으로 추정되는 여성과 생김새가 다르고 나이도 많아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의 부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가정보원 등 정보당국은 “김정은의 결혼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김정은이 이미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북한 뉴스 전문매체인 데일리NK는 지난해 10월 ‘청진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하기 직전 김일성대 박사과정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당과 군 간부 사이에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한때 김정은과 염문설이 나돈 보천보전자악단 출신 가수 현송월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현송월은 2005년 ‘준마처녀’(잘 달리는 말처럼 일 잘하는 여성을 의미)란 노래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상하던 2006년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북한 예술단원 소속이던 한 탈북 여성은 “장군님(김정일)이 김정은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활동 중단 지시를 내렸다.”면서 ”현송월은 김정일의 지시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김정은의 요구로 관계를 지속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연녀를 할아버지 추모행사장에 동행한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손광주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산권 국가에서 최고지도자 부인이 사회적 지위 없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는다.”면서 “(그 여성이) 김정은의 부인, 혹은 내연녀일 가능성은 낮아보인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통섭의 시대에 춤과 소리와 이야기를 아우르는 큰 별이 스러졌습니다.” 전통 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예술감독은 고(故) 공옥진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한과 해학을 담아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 창무극’의 창시자이고 곱사춤과 동물춤으로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인이기도 했다. ●최승희 일본집서 문틈으로 춤 배워 호적으로는 1933년생이지만 고인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공대일(1910~1990) 선생이고 아버지의 팔촌형 공창식(1887~1936)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으뜸가는 소리꾼이자 명창 임방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라도 유명 예술인 집안에서 자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환경에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접했다. 아버지에게는 단가(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하는 짧은 노래)를 배웠다. 단가를 모두 뗀 뒤에야 사설을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 때문에 사랑채 심부름을 하거나 부엌에서 흥얼거리면서 판소리 사설을 익혔다. 일곱 살쯤에 옥진은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본으로 가던 ‘신무용의 대가’ 최승희 선생에게 아버지가 1000원을 받고 부엌데기로 판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강제 징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옥진은 최승희의 일본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문틈으로 춤을 배웠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고, 열일곱 살에 경찰관과 결혼했다. 6·25전쟁 통에 경찰관 가족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야속한 세월 견디며 삶의 애환을 예술로 전쟁 뒤에 딸을 하나 낳아 어엿한 가족을 꾸리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동네 처자와 눈이 맞아 버렸다. 미련 없이 딸을 둘러업고 집을 나와 세상과 맞닥뜨렸다. 절에 얹혀살면서 스님들 밥을 지어 주고 때때로 절 뒤편에서 즐거운 일, 슬픈 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 울었다. 1960년대에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 단체에 참여하면서 무대를 만들었다. 야속한 세월을 견디면서 몸에 익은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풀어낸 것이 ‘1인 창무극’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 공연에서 첫선을 보인 ‘1인 창무극’은 그야말로 ‘빅히트’를 쳤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은 수십년간 서민을 웃기고 울렸다. 그 후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 공연하면서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는 ‘1인 창무극’ 전성기였다. 1995~1996년 서울 대학로 두레극장 공연에서는 500석 공연장에 1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쯤이면 국악계 어르신으로 대접을 누릴 만도 한데 고인은 한사코 호텔 숙식을 거부했다. 최고의 스타였지만 올 때마다 김치를 담아 와 제작진을 일일이 불러 먹이는, 그저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서울 종로3가에 있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에서 늘 묵었고 함께 올라온 아주머니와 직접 밥을 해 드셨어요. 방값도 못 내던 무명의 서러움을 생각하면서 이만큼이나 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면서요.” 당시 공연기획을 한 진옥섭 대표의 말이다.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8년 고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듬해 ‘1인 창무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0년이 지난 2009년 재신청을 할 때는 건축물이 주로 대상이 되는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 2010년 무형문화재로 인정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가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되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2010년 6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고인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 온 힘을 다해 생애 마지막 춤을 췄다. “공옥진 선생 하면 ‘곱사춤’부터 떠올려요. 하지만 이건 본질이 아닙니다. 곱사춤은 심청가에 나오는 맹인잔치에서 공 선생이 표현한 많은 맹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곱사춤이나 동물춤은 공 선생만이 할 수 있고 그분밖에 못 하는 ‘1인 창무극’의 일부인 거죠. 어떤 공연을 봐도 관객의 눈물과 콧물을 쏙 빼는,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느냐면서 웃겨주는 명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게 우리 문화계에는 큰 상실일 겁니다.” 빈소는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로 잠정 결정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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