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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구공이 수박 만하게 보인다’ 연구결과 사실

    ”야구공이 수박 만하게 보인다.” 절정의 타격감을 보이는 야구선수들이 종종 하는 이 말이 연구결과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영국 UCL(University College London) 인지신경과학연구소는 “어떤 빠른 행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더 천천히 간다.” 며 “프로선수들은 중요 순간에 더욱 그렇게 느낀다.”고 밝혔다. 이 현상은 축구선수, 야구선수, F1 드라이버, 테니스 선수등의 발언을 통해 널리 알려져 왔다. 과거 테니스 스타 존 맥켄로는 “공을 치는 순간 시간이 느려진다.”고, F1 드라이버는 “상대 차량을 추월하는 순간 시간이 느려진다.”고 밝힌 바 있다. 이같은 연구결과는 화면을 터치하는 실험으로 증명됐다. 1그룹의 피실험자들에게는 화면에 있는 모양이 바뀔 때 터치를, 2그룹에게는 모양이 바뀌어도 가만히 있게 했다. 그 결과 행동을 취하는 그룹이 시간에 대한 인지가 길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이끈 노부히로 하구라 박사는 “과거 일본에 있을 때 야구 선수들의 일화가 생각나 연구를 시작했다.” 면서 “행동을 하기 위한 정보가 증가하면서 뇌의 기능이 향상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같은 이유로 선수들은 시간이 더 길어지거나 혹은 느려진다는 인식을 얻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결과는 ‘영국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최신호에 게재됐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꾸밈없는 고운 얼굴 쑤이창 遂昌

    꾸밈없는 고운 얼굴 쑤이창 遂昌

    산 아래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워 보이는 난젠옌 산장. 난젠옌풍경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발 아래로 자욱하게 펼쳐진다 꾸밈없는 고운 얼굴 쑤이창 遂昌 한 폭의 동양화. 이 진부한 표현이 진부하지 않았다. 꼿꼿한 대나무 무성한 산자락과 그 사이로 떨어지는 아찔한 폭포 줄기, 그 아래로 계단식 논밭이 그림처럼 하나로 포개졌다. 수려한 산천이 숨쉬고 비옥한 땅에서 좋은 먹을거리가 나는 쑤이창현은 사색하며 거닐기 좋은 산과 계곡, 넉넉함이 느껴지는 산촌마을 사람들의 환대만으로 충분히 여행자를 달뜨게 만든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취재협조 쑤이창현 인민정부, 홍싱핑온천리조트, 난젠옌풍경구, 쑤이창현 인민위원회, ㈜레드팡닷컴 02-6925-2569 www.redpang.com 쑤이창은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리수이시?水市, 여수시 쑤이창현遂昌縣. 약 2,539km2의 면적에 인구 23만여 명. 성-시-현-향의 순서로 이어지는 중국의 행정단위로 봤을 때 그리 넓은 지역은 아니다. 그 가운데 해발 1,000m 이상의 산이 703개나 솟아, 현 전체의 80% 이상이 산지로 빼곡하다. 쑤이창현은 관광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음에도 아직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저장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을이다. 중화 제1고폭 션롱구 1 두 손바닥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만큼 거센 물보라가 내리쳤던 션롱구. 멀찌감치에서는 이렇듯 고즈넉하니 정자 하나 두고 유유자적하고자 한 그 마음을 알겠다 2 쑤이창에서는 차보다 배가 더 익숙해 보였다. 언젠간 이 위로 다리가 놓이고 산중턱을 가로지르는 길이 뚫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에도 산의 품에 안긴 호수를 가로지르는 이 물길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3 쿤취 <목단정>의 한 장면. 말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충분했다 쑤이창 풍경 안에 노닐다 비행기가 매끄럽게 활주로 위에 내려앉는다. 닝보寧波, 영파에 도착했다. 이제 곧 대륙의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잠시, 비행기를 탄 시간의 곱절 동안 버스 안에서 오도카니 앉아 있어야 했다. 논과 밭, 그사이사이 인적 드문 작은 마을, 우리네 시골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 풍경을 그렇게 4시간여 감상하고 나서야 드디어 쑤이창에 들어섰다. 시곗바늘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늦은 투숙객을 기다리는 호텔 외에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든 듯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낯설고도 깜깜한 여행지라니. 어딘지 서글픈 기분이 들어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개운치 않은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배를 채우고 난젠옌풍경구南尖岩?景?, 남첨암로 향하는 셔틀버스에 오르니 이미 해가 중천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몸이 쉴 틈 없이 흔들리는 구불구불 비포장 산길은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비켜가기도 힘들 만큼 좁다. 1시간 남짓 올랐나 보다. 산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드디어 시야가 탁 트인 난젠옌풍경구가 지친 여행자를 맞아준다. 풍경구 초입에 위치한 난젠옌 산장이 오늘의 잠자리다. 너른 호텔 앞마당 끝으로 가니 그 아래 작은 마당이 하나 더 있다. 깨끗하게 빨아 넌 침대시트가 시원해 보인다. 그 옆으로 작은 정원을 지나니 아득하게 멀어지는 첩첩산중 아래로 차곡차곡 계단을 만든 논밭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테라스가 이어진다. 이곳이구나. 이제야 트인 시야만큼이나 시원하게 숨통이 뚫린다. 난젠옌풍경구는 다음날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오후 반나절은 션롱구神?谷, 신룡곡에서 보내기로 했다. 션롱구는 쑤이창현 남쪽의 국가삼림공원 계양림장桂洋林? 내의 골짜기. 낙차가 300m에 달하는 폭포 ‘신룡비폭神??瀑’은 이곳 비경의 절정을 이루는데 바위 절벽에 걸린 폭포 줄기가 마치 한 마리의 용이 계곡을 따라 오르는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폭포는 3단으로 내려오는데 맨 위의 탕공폭포는 60m, 가운데 장군폭포는 80m, 하단부 신룡폭포는 무려 120m나 된다. 폭포 가까이 다가가니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온 몸을 적셨다. 중화 제1고폭中?第一高瀑이란 별칭이 붙을 만하다. 그러나 폭포는 멀찍이 물러나 산세와 더불어 관망하는 편이 더욱 멋스럽다. 산허리를 한참 둘러 뒤돌아본 션롱구. 아무래도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라 용이 승천하는 기분은 덜했지만 수려하다는 말은 이럴 때 붙이는 모양이다. 5km에 달하는 계곡 길을 걷는 내내 뒤를 돌아보느라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한밤의 난젠옌을 만월이 비춘다. 달빛 아래 구성진 가락이 퍼지기 시작한다. 쿤취昆曲, 곤곡. 경극, 천극 등 중국 전통 연극의 원조라고 하는 오랜 전통의 연극 무대가 열렸다. 션롱구를 거닐며 공자인지 맹자인지 갸웃하고는 석상 하나를 스쳐 지났는데 중국 명나라 후기의 문장가이자 희곡가인 탕현조라고 했다. 동방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인물을 몰라봤네. 마침 그가 쑤이창현 관리로 재임하면서 쓴 대표작 <목단정牡丹亭>을 쿤취 형식으로 연주한다니 뜻 모를 극이지만 맨 앞에 앉아 연주자들의 소리와 몸짓에 귀와 눈을 맡긴다.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익살맞은 장면들. 둘러앉은 이들과 함께 웃고 박수치는 동안 밤은 저대로 깊어 간다. 온자한 미륵의 미소 치엔포샨 千佛山 1 치엔포샨의 미륵불. 높은 곳에 있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따라 미소 짓게 만드는 그의 온화한 미소 때문이 아닐까 2 산 위의 미륵불과 꼭 닮은 미래사 명경스님의 미소. 멀리서 온 여행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앞날의 복을 빌어주었다 1년에 200일 이상 비가 내린다고 해서 품 넉넉한 우비를 둘이나 챙겨갔는데 다음날 아침에도 해는 짱짱하기만 하다. 배낭을 가뿐하게 메고 난젠옌 트레킹에 나섰다. 남쪽에 있는 산봉우리가 뾰족뾰족하다고 해서 ‘난젠옌南尖岩, 남첨암’이라 했다니 꽤나 까다로운 길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트레킹 코스는 난젠옌산장에서 계곡을 따라 잘 정비된 내리막이다. 그러나 갈라진 바위 사이 깎아지른 계단 앞에서는 다리가 후들후들한다. 역시나 수직절리가 갈라져 형성된 거대한 천주봉과 그 맞은편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천장암은 올려다보기에도 고개가 아플 정도로 가파르고 아찔하다. 무성한 대나무와 아열대 침엽수 사이,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산 아래와 달리 상쾌한 공기가 가득 차 있으니 양껏 욕심을 내본다. 숲길 곁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진다. 1,000m가 넘는 고지대에 많은 비가 내리고 마르지 않는 폭포가 있으니 안개가 자욱한 날이 많단다. 기이한 형태의 운해와 계단식 논밭 위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안개는 난젠옌풍경구 특유의 경관이다. 저장성 최초의 생태여행시범구이자 문명풍경여행구역, 유네스코와 중국 민속촬영협회가 공동으로 지정한 국제민속촬영창작기지, 저장성 5A급 삼림여행지이자 국가 4A급 풍경구 등 난젠옌풍경구에 수많은 훈장을 달아준 이 절경은 쨍한 날씨 덕에 물 건너갔다. 날씨가 좋아도 탈이다. 대신 산자락 가득 펼쳐진 계단식 논밭을 보다 또렷하게 마주할 수 있었으니 비긴 것으로 하자. 계곡이 흐르는 산책길은 매한가지였지만 치엔포샨千佛山, 천불산은 난젠옌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아마도 산 정상 바위에 나타난 미륵불 때문이지 싶다. 300m 높이의 바위에 무려 33m 크기의 부처님 얼굴. 청나라 광서제 때의 지방지 <쑤이창현遂昌?지>에 ‘산 위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 천존 불상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쑤이창현의 개은?恩 그룹이 계곡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이 기록에 착안하여 형상만 있던 바위에 지금과 같은 미륵불을 조각하고 계곡 아래에 미래사未?寺라는 사찰을 지었다. 계곡 입구에서 온화하게 미소 짓는 미륵불이 굽어 살피는 미래사까지 왕복 4km의 산책길을 걸었다. 해질녘 산보는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출발했지만 미래사 명경明?스님이 두 손 모아 복을 빌어 준 덕분일까, 절 입구의 작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내려오는 길은 종일 걸은 탓에 조금은 풀어질 법도 한데 깨달음을 얻어 하산하는 이의 걸음마냥 야물었다. 오늘 밤은 달달한 잠을 자겠구나. 쑤이창 여행은 오우강?溪江, 오계강댐 건설로 형성된 호수를 건너 도착한 홍싱핑?星平, 훙성평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이곳에서는 온천욕이 기다리고 있다. 홍싱핑온천리조트는 한 민간 광산업체가 은광을 탐사하던 중 온천수를 발견하면서 쑤이창현 정부와 함께 리조트로 개발했다. 정부는 광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마을의 폐교와 인민위원회 토지 일부를 제공하여 리조트 개발에 힘을 실어줬다. 이곳 온천은 일본식 온천과는 달리 파라솔과 테이블, 일광욕 의자를 비치해 잘 꾸며놓은 수영장처럼 보이지만 물의 온도는 41도를 유지한다. 별도로 물을 데우지 않는 100% 천연 온천이다. 태양 아래 뜨끈하게 익은 벽돌 바닥 위를 까치발로 걸어 온천수에 손을 넣어 본다. 후텁지근한 바깥 공기 덕에 40도가 넘는 온천수도 그리 뜨겁진 않았다. 산을 오르내리며 몸에 밴 땀과 호수를 지나며 머금은 눅눅함을 씻어낸다. 산 좋고 물 좋고. 아, 쑤이창에서 산수유람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낯선 대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다소 서글펐던 초행길 끄트머리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이야.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travie info 쑤이창현 풍경구로 향하는 셔틀버스 난젠옌을 포함하여 션롱구, 천불산 등 쑤이창현을 대표하는 풍경구는 비포장의 좁은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가야 하기에 되도록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쑤이창현 중심가에서 약 18km 떨어진 석련진石??마을로 가면 인원수만 차면 바로 출발하는 풍경구행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쑤이창현 중심가에서 석련진까지는 버스 또는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약 20분 정도 걸린다. 산속 깊은 곳에서 흐르던 계곡이 막다른 길에서 갈 곳 없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션롱구의 폭포 줄기. 산 좋고 물 좋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1 무료한 듯 그늘 아래에 앉아 무언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노파가 낯선 목소리에 놀란 듯 몸을 일으킨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오르지도 못한 아침나절인데 동네를 어지럽히는 이가 누군고 하는 표정이다 2 황니령 마을에 위치한 궁경서원. 궁경은 자신의 허리를 굽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3 아직 말이 서툴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모두 알아듣는 아이. 옷차림도 말도 이상하기만 한 사람이 손을 내밀자 생글생글 웃다가 멈칫한다. 외국인은커녕 외지인도 발길이 드물었던 마을이기에 아이는 나를 외계인이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4 지지고, 볶고, 튀기고 삶고. 마을 사람들이 기르고 다듬은 건강한 먹을거리로 보기만해도 배부른 점심상이 차려졌다 이심전심 以心傳心 쑤이창 사람들 산수 좋은 곳이 어디 쑤이창뿐이랴. 그저 산 좋고 물만 좋은 곳이었다면 “좋구나” 하고는 며칠 못 가 새로운 여행지를 탐색했을 텐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어딘가 먹먹했다. 체한 듯 답답한 것이 아니라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데 달리 해줄 것이 없어 애단 심정이랄까. 그간 나도 모르게 화려한 여행에 젖어 있었나 보다. 난젠옌풍경구 아랫마을 빤링춘半?村, 반령촌과 따껑춘大坑村, 대갱촌을 거쳐 오우강댐 호수변의 황니령 마을에 이르기까지 쑤이창의 산골마을, 쑤이창의 산골사람들은 한결같았다. 그들이 내어준 지붕 그늘 아래,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땀으로 지어 준 밥상과 마주했던 쑤이창은 이제까지 보아 온 중국과 사뭇 다른 때깔로 얼굴을 내밀었다. 난젠옌 아래로 펼쳐진 계단식 논밭 한가운데 자리한 빤링춘은 일반적인 한족 마을로 약 50호의 가구가 모여 산다. 좁다란 골목 양쪽으로 황토 벽돌로 벽을 쌓고 진흙을 구워 만든 회청색 기와를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집과 집 사이엔 담장이 없다. 한 사람 겨우 지날 만큼의 좁은 통로가 전부.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우리네 집성촌도 이처럼 집집이 가깝진 않은데 경사가 있는 산지 환경에 탓에 마을을 촘촘하게 구성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외에 골목을 오가는 이가 드물었던 이곳에 최근 사진가들의 출몰이 잦아졌다. 주로 난젠옌풍경구로 출사 나온 사진가들인데 마을 사람들은 꺼리는 표정 하나 없이 손님 대접을 한다. 불청객이 아닌 반가운 길손으로. 차 대접이 후하다. 차 맛도 좋거니와 마을 인심이 차 맛처럼 은은하다. 한 술 더 떠서 봉지 가득 차를 담아 내민다.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더 미안해지는 탓에 봉지를 받아든 이가 여럿이다. 차는 물론 양매, 장두 등 마을에서 재배하는 작물 대부분은 쑤이창현 일대 여러 정부에 공급할 만큼 품질 좋은 무공해 농산품이라 한다. 빤링춘과 이웃하고 있는 따컹춘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 잔치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멀리서 온 손님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었다. 아침나절 농가에서 기르는 토종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단다. 신선한 채소를 곁들여 부위별로 다르게 조리한 요리를 그득그득 담은 접시들이 줄을 잇는다. 식기도 집집마다 가장 깨끗한 것을 가져와 차려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허리로 땀이 미끄러지는 날씨에 불 앞에 앉아 수십 명 분의 요리를 하려면 얼마나 진이 빠질까. 뭐 그리 중한 손님이라고. 다시 볼 일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은데. 그렇기에 더 정성껏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같은 상황에서도 마음 씀씀이가 이래 다르다. 손님들이 먹느라 정신없는 사이에도 저 쪽 부엌은 끊임없이 왁자지껄하다. 그 속이 궁금해 부엌 문턱을 넘어 들어서니 손큰 아낙들이 세숫대야 크기만한 양푼이 빌세라 땀 닦을 여유 없이 요리 삼매경이다. 졸지에 제 밥상을 빼앗긴 동네 아이들은 부엌 귀퉁이에 서서 허기를 채운다. 요리는 아낙들의 몫이지만 접시를 나르고 정리하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혹여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큰일이다 싶었는데 웬걸. 간이 조금 달짝지근했지만 우리 입맛에도 맛깔났다. 푸짐한 점심 식사는 다음날 황니링, 황니령 마을에서도 맛볼 수 있었다. 천불산풍경구 인근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우강댐 호수를 1시간여 떠 내려와 한적한 부두에 닿으면 친환경 농사기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세 곳의 유기농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첫 마을이 황니링이고 이어서 삼절령三??과 저부양?埠洋 마을이 자리한다. 오늘의 메인은 닭요리. 쑤이창현의 대표적인 토종닭 사육지인 만큼 닭고기 맛은 두말 할 것 없거니와 모든 음식에 조미료를 넣지 않았으니 식재료도 조리법도 제대로 된 건강식이다. 황니링, 삼절령, 저부양 세 마을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이 훤히 내다보일 만큼 지척에 있어 하나의 마을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세 마을 모두 합해 500여 가구. 적지 않은 가구 수인데 더없이 한적하다. 마을 가운데 위치한 꽁껑슈위엔躬耕?院,, 궁경서원이 세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꽁껑슈위엔은 이 일대 마을에 친환경농법을 도입한 뚜따오셩杜道生, 두도생 교수가 마련한 곳으로 농경학습과 연구를 위한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연구 개발한 무공해 농법은 주변 마을에도 적극적으로 보급한다. 대표적인 친환경 농법으로 농약 대신 매운 고추를 삶은 물을, 화학비료 대신 오리와 닭의 배설물과 퇴비를 사용하는데 여기에 고대의 농서에 기록된 전통 농사기법까지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꽁껑슈위엔은 일반에 개방하지 않지만 저명한 문인, 화가 등 예술가들에게는 문을 열어두었다. 작품 활동을 하며 머물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고 있다. 최대 10명이 이용 가능한데 별도의 비용은 필요치 않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 일종의 재능기부이다. 몸소 궁, 밭갈 경. 궁경躬耕은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농사일이나 글을 쓰는 일이나 다 똑 같다. 결국 제 몸을 부려야 편히 먹고 잘 수 있다. 황니링에서 삼절령을 지나 저부양을 뒤로한 꽁껑슈위엔까지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본다. 밀짚모자 눌러 쓴 농부들은 모내기 끝낸 논두렁을 살피느라 바쁘다. 매미 소리 요란하고 나비도 이리저리 잘 노니니 쌀알은 분명 야물게 익고 있으리라. 마을 사람들이 내밀던 산열매에 쭈뼛했었는데 이젠 “이것도 먹어도 되요? 저것도 맛있어요? 도전!” 이라 외치고 있다. 쑤이창현의 마을을 걷는 내내 론리 허스 밴드Lonely H’s Band의 <고향에 살어리랏다>가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부터였을까. 하늘의 별을 의심하고, 탐스런 딸기를 의심하고, 고운 장미를 의심하고도 모자라 정겨운 골목마저 의심하는 도시의 일상. 한때는 꿈이었고, 가장 맛있어했고, 사랑의 다른 말이었으며 어린 날의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내가 변해서 그런 건지 세상이 변한 건지. 생각보다 더 많이 메마르고 고독했었구나. 그 마음 어떻게 알아챘는지 쑤이창의 산골 마을 사람들은 소박하나 푸짐하게, 수줍지만 정겹게 다독여 주었다. Travel to Suichang 저장성 날씨 열대계절풍기후대에 속하는 저장성은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여름엔 동남아처럼 매우 무더운 반면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편이다. 비 내리는 날도, 강우량도 많은 편이니 쑤이창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날씨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쑤이창 가는 길 올해 6월22일부터 진에어가 쑤이창현과 인접한 닝보寧波, 영파로 매주 월, 금요일 주 2회 운항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닝보에서 쑤이창현까지는 차로 4시간 거리. 결코 만만한 여행길은 아니다.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 쉽게 길을 터주지 않는 쑤이창현은 덕분에 자연도 사람도 티 없이 맑고 순하다. 쑤이창현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면 지난 7월2일 쑤이창현 인민정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난젠옌풍경구, 홍싱핑온천리조트의 한국총판으로 현지에 홍보 및 여행대리사무소를 개설한 (주)레드팡닷컴을 통해 상품을 예약하거나 여행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월요일 항공편을 이용한다면 4박5일, 금요일 항공편을 이용한다면 3박4일간의 쑤이창현 힐링캠프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여행상품 ‘죽림竹林의 향연 난젠옌南尖岩·석모암·천불산·홍싱핑온천’ 3박4일 49만9,000원부터, 4박5일 54만9,000원부터. 02-6925-2569 인천-닝보 항공 스케줄 매주 월요일(4박5일 상품), 금요일(3박4일 상품) 출발. LJ731 15:30 인천 출발, 16:30 닝보 도착 LJ732 17:30 닝보 출발 20:30 인천 도착 닝보-쑤이창현 간 교통편 닝보공항에서 버스 또는 택시로 이동하여 닝보버스터미널에서 쑤이창으로 가는 직행 장거리 버스를 이용한다. 매일 아침 8시45분 출발. 약 4시간 소요, 102위안. 직행버스는 1일 1회뿐이므로 닝보에서 리수이?水, 여수를 거쳐 쑤이창으로 이동하는 것을 추천. 닝보에서 리수이행 버스는 오전 9시55분부터 2시간 간격으로 운행. 3시간 30분 소요, 105위안. 리수이에서 쑤이창행 버스는 오전 6시10분부터 1시간 간격으로 운행. 1시간 30분 소요, 32 위안. 1, 2 쑤이창현 따껑춘 마을의 모습, 대나무와 계단식 논밭, 그 아래 한적한 농가가 쑤이창의 분위기를 전해 준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3) 인천 영종도 용궁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3) 인천 영종도 용궁사 느티나무

    1300살 된 느티나무를 찾아간 인천 영종도 백운산 자락의 용궁사에는 손님이 여럿 있었다. 전각에 남은 현판에서 백여 년 전 이곳에 머물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손길을 확인하기 위해 죽은 나무의 나이를 측정하려는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박원규 교수와 죽은 나무가 다시 사람의 곁에서 오래 살도록 나뭇결에 혼을 불어 넣는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 한봉석 선생이다. 약속도 없이 같은 시간에 스님의 요사채에 모여 앉아 살아 있는 나무에서부터 죽은 나무, 죽어서 사람살이와 더불어 더 긴 세월을 살아가는 문화재로서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나무의 일생에 대한 갖가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대관절 사람살이에 나무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를 짚어 보게 하는 특별한 광경이었다. ●원효대사가 지은 용궁사를 지켜온 상징 “오래된 목재에서도 50년 정도의 나이테만 확인할 수 있으면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어요. 나이테에는 기후를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변화가 고스란히 남거든요. 기후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나이테가 형성된 시기를 확인하는 겁니다.” 용궁사 현판의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 절집을 찾은 박원규 교수는 죽은 나무의 나이 측정법을 그렇게 설명했다. 세도정치의 풍랑을 피해 흥선대원군은 한양에서 가깝지만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은 영종도에 자주 들렀고 이곳 용궁사에 머물렀다. 용궁사 편액은 그가 남긴 뚜렷한 흔적이다. 첨단 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천년 고찰을 찾을 수 있다는 건 의외일 수 있다. 그러나 용궁사는 흥선대원군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적잖이 찾을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편액이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리키는 증거는 바로 13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갖고 서 있는 인천시 기념물 제9호 용궁사 느티나무 한 쌍이다. “언제 심은 나무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어요. 아마 우리 절을 처음 세운 분이 1300년 전의 원효대사라는 걸 바탕으로 짐작한 이야기이지 싶어요. 나무가 그때부터 저 자리에 있었다고 보는 거죠.” 용궁사에 주석한 지 1년 됐다는 주지 능해(能解) 스님의 이야기다. 스님은 절집의 여러 전각 못지않게 나무가 용궁사를 지켜온 상징이라고 덧붙였다. ●전각 사이에 두고 마주한 할배·할매나무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인 서기 670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구담사(瞿曇寺), 백운사(白雲寺)라고 불렀는데 조선 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용궁사(龍宮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천년 고찰 용궁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명은 역시 요사채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다. 절집을 찾는 사람들은 나무를 할배나무 할매나무라 부른다. 할매나무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둘로 갈라졌는데 갈라진 두 줄기 모두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둘로 나뉜 줄기 가운데 비교적 굵은 줄기에서 뻗어나온 몇 가닥의 가지에만 간당간당 생명이 붙어 있다. 할배나무는 내외하는 노부부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무뚝뚝하게 우뚝 선 채로 할매나무 쪽을 흘금거리는 눈치다. 예전에 나무가 젊었을 때는 더 많은 가지가 할매나무 쪽으로 뻗었다고 한다. 전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나 서로를 향해 가지를 뻗은 모습에서 사람들은 정겨운 부부의 인상을 얻은 것이지 싶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낙네들이 할배나무에 기원을 올리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부부처럼 정겨운 나무 풍경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부부의 연을 가진 나무가 적지 않다. 이번 태풍 볼라벤의 습격으로 큰 가지가 부러진 보은 정이품송과 그의 정부인으로 불리는 보은 서원리 소나무가 대표적인 예다. 또 1500살 된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와 1100살 된 영주 금성단 은행나무도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나무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남성형의 나무는 중심 줄기가 우뚝 서고 여성형의 나무는 작은 키에 줄기가 둘로 갈라진 형태이기 십상이다. 옛 사람들의 성(性)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용궁사 느티나무도 그렇다. 하나의 줄기가 우뚝 선 나무가 할배, 줄기가 둘로 갈라진 채 다소곳이 서 있는 나무가 할매나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 품어 할배나무는 키가 20m쯤 되고 줄기 둘레는 6m쯤 된다. 줄기의 상당 부분은 썩어 문드러져 충전물로 메운 수술 흔적이 줄기의 절반이 넘는다. 할매나무는 할배나무에 비하면 왜소해 보인다. 물론 할매나무도 젊은 시절에는 할배나무 못지않게 우람했겠으나 이제는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지경이다. 용궁사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였다고 한다. 용궁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나무에 절을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절집에서 가장 공경받는 상징이라 할 만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게 중도(中道)예요. 산에서는 산이 주인인 것처럼 마을에는 당연히 마을의 수호신인 나무가 주인이지요. 삼라만상 모두에 담긴 불성을 찾아나가는 게 불가의 도리입니다. 하나의 테두리 안에 널리 포용해야 하겠지요.” 능해 스님은 ‘중도’ 이야기를 들어 세상의 모든 생명을 함께 품어 안고 살아가는 게 불가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나무가 긴 세월 동안 절집을 평안하게 지켜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글 사진 영종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인천 중구 운남동 667번지 용궁사 내. 서울에서 출발해 영종도에 들어가려면 영종대교를 이용하는 게 좋다. 영종도에 들어선 뒤 처음 나오는 교차로인 금산교차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 금산교차로에서 중산동 방면으로 1.3㎞쯤 가면 운남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에서 우회전해 마을 길로 들어선다. 길이 좁아 마주 오는 차와 교행이 되지 않으니 조심해서 700m쯤 간다. 길 양옆에 자그마한 식당이 나오는 지점에서 유턴하듯 우회전해서 산길로 800m 들어가면 용궁사에 이른다.
  • “베니스가 상 준다면 애국가 1절 부르겠소”

    “베니스가 상 준다면 애국가 1절 부르겠소”

    “수상을 한다면 해외에 영화가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기회가 열리니까 상을 주신다면 거절할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이번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 1절을 부르겠다. 무엇보다 다음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 29일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서 열린 ‘피에타’ 베니스 국제영화제 출국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기덕(52) 감독은 수상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에타’는 김 감독의 18번째 영화이며 한국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것은 ‘친절한 금자씨’ 이후 7년 만이다.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피에타’는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사는 남자 강도(이정진) 앞에 어느 날 엄마라는 여자(조민수)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 감독은 “잔인한 아들과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돈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고 사회구성원 간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라면서 “엄마로서의 미안함과 아들이 느끼는 엄마에 대한 부재가 충돌하면서 다이너마이트처럼 연쇄적으로 폭발해 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대전 동춘당로·동춘당 생애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대전 동춘당로·동춘당 생애길

    대전 대덕의 원래 이름은 ‘덕을 품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회덕(懷德)이다. 삼국시대에 우슬군으로 불리다 고려 태조때부터 회덕으로 불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대동여지도에도 대전 일대가 회덕으로 표기돼 있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에 대전의 앞글자와 회덕의 뒷글자를 따 붙인 지명이다. 대덕은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 청백리로 유명한 설봉 강백년 등 선현들이 우정과 학문을 닦던 곳이다. 대덕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은 동춘당이다. 회덕은 대덕의 뿌리이고 회덕의 뿌리는 선비정신, 선비정신의 뿌리는 우암과 동춘당에서 시작된다고 회자된다. 동춘당의 상징성은 도로명에도 반영됐다. 법동과 송촌동을 잇는 ‘동춘당로’가 생겼고 지자체가 동춘당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스토리가 있는 녹색길인 ‘동춘당 생애길’을 지난 5월 23일 조성했다. 두 길은 ‘동춘당’에서 교차한다. ●대덕의 중심길 ‘동춘당로’ 법2동 주민센터에서 송촌고등학교를 잇는 동춘당로(1.7㎞)는 지역 상권의 중심지다. 상권면적은 넓지 않지만 점포가 많이 밀집돼 있다. 동춘당로 입구인 법2동 주민센터(동춘당로 187)와 보람아파트 입구에는 예사롭지 않은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있다. 대전의 민속문화재 1호로 대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돌장승으로 꼽힌다. 거친 자연석에 눈·코·입 등을 다듬어 표현한 남·여 한 쌍으로 높이는 각각 153㎝, 126㎝다. 남장승은 강인하고,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푸근함이 느껴진다. 여장승은 둥글고 넓적한 것이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의 모습니다. 나무장승이었으나 300여년 전 마을의 부자가 사재를 털어 다시 돌로 세웠다고 전한다. 음력 정월 14일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고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거리제를 지낸다. 동춘당 옆 동남쪽에 있는 소대헌(동춘당로 70)은 동춘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해 살던 가옥이다. 큰 사랑채인 소대헌은 증손인 송요화가 지어,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송요화는 조선후기 회덕의 여류시인 호연재 김씨의 남편이며 김씨는 소대헌 안채(호연당)에 살면서 194편의 시를 남겼다. 대덕이 대전 역사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무형문화재 전수관(동춘당로 78)도 위치해 있다. 2009년 39억원을 들여 조성한 전수관은 대전의 무형문화재 17개의 체계적인 전승활동을 목적으로 공연장(200석)과 연습실(2곳),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기·예능보유자와 전수생들의 교육의 장이 마련됐다는 의미와 함께 각종 공연 및 전시에 필요한 장소 섭외 불편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 동춘당로에는 해마다 광복절이면 화제가 되는 아파트가 있다. 동춘당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선비마을이다. 은진 송씨 집성촌이던 송촌동과 선비정신의 상징인 동춘당과 어우러져 널리 알려졌다. 지난 15일에도 100가구가 넘는 아파트 한 동 전체가 태극기를 내걸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선비마을(1554가구) 주민들은 광복절에 한 집도 빠짐없이 태극기를 단다는 계획을 세워 자체적으로 참여 운동을 벌이고 있다. ●큰 선비의 장구지지 동춘당 생애길 동춘당 생애길은 동춘당의 출생과 학업, 향촌활동 등 전 생애를 길과 연계해 스토리로 표현했다. 하나로병원~봉황마당의 전체 구간은 5㎞에 달하나 동춘당~옥류각 구간이 ‘진미’다. 길에서 처음 만나는 유적은 삼강려(三綱閭)다. 송촌리 마을에 삼강을 지킨 사람이 많음을 알려주는 기념석으로 충신 이시직과 열부 고흥 유씨, 3대가 효자로 유명한 송병창을 기리고 있다. 죽창 이시직과 유씨 정려각이 있는데 유씨 정려비의 비문은 동춘당, 글씨는 우암이 썼다. 동춘당을 거쳐 옥류각으로 가는 길은 동춘당이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산에 오른 길(杖?之地)’이다. 곳곳에 선생의 시를 담은 조형물이 전시돼 있는데 일부 구간의 작품에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덕구가 동춘당을 상징화하는 것에 대해 다른 문중이 반발하면서 이뤄진 행태로 선비의 고장 대덕을 명소화하겠다는 계획에도 좋지 않은 결과가 되고 있다. 생애길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비래암은 동춘이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운 것으로 현재는 사찰이 들어섰다. 비래암 현판은 우암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절 입구에는 석주를 세워 건립한 옥류각이 있다. 제월당 송규렴이 동춘을 기념해 1693년 지은 누각으로 누각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다. 옥류각이란 이름은 동춘이 읊은 시 가운데 “층층 바위에 날리는 옥 같은 물방울(玉溜)”에서 따왔다고 한다. 현판은 ‘팔분체’로 곡운 김수증이 썼다. 옥류각 안에는 ‘來遊諸秀才愼勿壁書以?新齋’(내유제수재신물벽서이오신재)라는 편각이 붙어 있다. 동춘당이 비래암을 짓고 벽에 써 붙인 글이라는데 “놀러오는 아이들아, 삼가서 벽에 글을 써서 새 집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옥류각 앞 바위에는 ‘초연물외’(超然物外)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동춘당의 글씨로 획이 정확하고 활달하다. 세속의 바깥에 있고 인위적인 것에 벗어나 있다는 뜻으로 선비의 초연함을 느끼게 한다. 향토사학자 김정곤씨는 “동춘당 생애길에 역사와 문화유적이 집중돼 있다.”면서 “회덕은 예부터 ‘대를 이어 영원히 살만한 곳’으로 다양한 문중 문화와 선비들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17회는 충북 단양군 삼봉로를 소개합니다.
  • ‘민주화 사제’ 함세웅 신부의 마지막 미사

    ‘민주화 사제’ 함세웅 신부의 마지막 미사

    민주·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창립을 주도한 함세웅(70) 신부가 26일 은퇴했다. 함 신부는 오전 11시 서울 신당6동 청구성당에서 44년의 사제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미사를 집전했다. 700명 이상의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함 신부는 “남북 겨레를 기억하며 제주 강정마을을 비롯해 한반도의 정의·평화를 실현해 주소서.”라며 미사를 시작했다. 마지막 강론은 마태오복음 11장 28절이었다. 그는 “사제생활 동안 ‘예수님은 누구인가’란 본질적 질문에 답을 구하려 했다.”면서 “예수님은 33세 때 타살당한 고통받는 존재였고 청년예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내 삶의 주제어이자 핵심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잘못된 사회·정치제도는 교회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1970년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이끌었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투옥됐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인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문정현 신부와 함께 또 구속됐었다. 함 신부는 “서울대교구 사제 인사발령에 내 이름이 제일 위에 올랐다.”면서 “이제 나는 노땅”이라며 미사를 마무리했다. 교회법상 신부의 은퇴연령은 만 75세지만 함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이 물러나면 퇴임하겠다는 약속대로 지난해 4월 정 추기경이 은퇴하자 일찍 미사전에서 내려왔다. 함 신부는 은퇴 후 원로 사목자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현재 맡고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 공동대표 등은 계속할 전망이다. 함 신부는 정치활동에 나설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 “예수님 정신으로 한결같이 선후배 동지들과 함께 길을 걸어갈 뿐이지 정치적으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군대 성희롱 심각” 누드로 고발한 스페인 여군

    미모의 여군이 군대 내 성희롱을 고발하며 옷을 벗었다. 절대 미모와 폭로로 주목을 받고 있는 화제의 인물은 스페인의 여군 메리트셀 마르티네스. 과감하게 누드모델로 변신한 그는 “군대에 남녀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입대한 마르티네스는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 육군본부 차량관리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꿈을 이뤘다는 기쁨도 잠깐. 거친 남자들과 함께 근무하는 건 금세 고통이 됐다. 잘 보관했던 속옷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남자숙소에서 발견되는 등 수난이 시작됐다. “자연 가슴이 맞냐? 수술한 것 아니냐?”는 성희롱 농담을 듣는 건 다반사였다. 마르티네스는 “여자라고 희롱을 받고 있다.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직속 상관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군에 대한 성희롱 폭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마르티네스는 재판까지 받게 됐다. 판결은 24일(현지시간) 나온다. 억울한 심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스페인의 성인잡지 인터뷰에 표지모델로 데뷔했다. 사회의 이목을 끌면서 군대 내 남녀평등이란 완전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군대와 실체는 완전히 다르다.”며 “군인이 되면 기본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렇다.”고 군대 내 성차별을 고발했다. 누드사진을 찍은 게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에 마르티네스는 “나는 나”라며 “누드를 찍었다고 내게 돌팔매질을 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고 잘라말했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이번 주 불볕더위 가고 ‘가을장마’ 온다

    ’18년 만의 폭염’으로 기록된 올여름 더위가 이번 주부터 눈에 띄게 꺾이고 ‘가을장마’가 찾아올 전망이다. 19일 기상청에 따르면 화요일인 21일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22일은 남부 지방에 비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절기상 처서(處暑)인 23일부터 다음날까지는 전국에 걸쳐 비가 예상되고 중부지방은 25일까지 이어지겠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도 구름이 많아 햇볕이 따갑지는 않겠다. 이 때문에 이번 주 내내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28∼30도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막바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남부지방도 낮 기온이 평년 수준인 30도 안팎으로 떨어질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더위가 수그러드는 이유는 지난달 하순부터 우리나라를 완전히 뒤덮어 폭염을 불러왔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이 정점을 찍고서 점차 물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빠지면서 그 둘레가 우리나라에 걸치면 대기가 불안정해 소나기가 내리기 쉽다. 북서쪽에서 기압골이 주기적으로 접근하면서 때때로 강한 비가 내리기도 한다. 가을 직전에 찾아오는 2차 우기, 이른바 ‘가을장마’다. 가을장마는 보통 8월 하순에서 9월 초순까지 우리나라에 자주 비를 뿌리다가 북태평양 고기압이 완전히 물러나면서 끝난다. 최근에는 이 시기에 내리는 비의 양이 크게 늘었다. 1961∼1990년 서울의 8월 하순 강수량은 평균 85㎜, 9월 초순은 100.1㎜로 장맛비가 집중되는 7월 중순 152㎜와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나 1981∼2010년에는 8월 하순 평균 강수량이 127.8㎜로 크게 늘어 7월 중순(159.3㎜)에 근접했다. 이는 가을장마가 강해졌다기보다는 여름 내내 비가 많이 내리는 형태로 기후가 변화한 결과라고 기상청은 분석했다. 1980년대만 해도 8월 하순이면 우리나라 상공에 정체전선이 형성되면서 비가 며칠 동안 계속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한여름에도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잦아져 두 번의 우기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기상청 이우진 예보국장은 “과거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약해지는 시기에 장마와 유사한 패턴의 강수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났다”며 “요즘은 여름 후반부에 국지성 호우가 내리면서 휴식기 없이 내내 강수가 이어지는 해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북태평양 고기압이 우리나라 상공을 장악한 지난달 하순부터 이달 초순까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을장마가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날씨를 보면 중부지방은 이미 가을장마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된다. 지난주 서울에는 16일 하루를 빼놓고 모두 강수가 기록됐다. 15일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차갑고 건조한 상층 기압골과 부딪혀 강수대가 동서로 길쭉하게 형성되고 전국을 남북으로 오르내리면서 제법 ‘장마다운’ 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진짜’ 장마처럼 비가 자주 오는 날씨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기상청은 예상했다. 김현경 기후예측과장은 “9월 초순까지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해 그 가장자리에서 대기 불안정에 의한 소낙성 강수가 자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 [대한민국은 힐링중] 버티던 삶, 집착 비우고 행복 채우다

    [대한민국은 힐링중] 버티던 삶, 집착 비우고 행복 채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첫 여성 사무총장을 역임한 정연순(46) 변호사는 지난 6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14일간 다녀왔다. 가장 유명한 코스는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스페인식 이름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에 이른다. 정 변호사는 그 중 후반부에 해당하는 400㎞가량을 걸었다. 1980년대 변호사가 된 이후 정 변호사는 ‘늘 자신이 잘해야 한다, 사명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이 힘들어도 견뎠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정 변호사는 “어느 순간 지나온 인생을 돌아 보니 강박관념을 지닌 채 너무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반성이 들었다.”고 말했다. 순례에 나선 뒤 8일 정도 묵언 수행을 했다. 비행기 표 값 300만원에 150만원쯤 더 들었지만, 돈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고 했다. 순례에서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자신이 맨 배낭의 무게가 곧 인생의 무게라는 점. 그는 “배낭 안에 각종 생필품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욕심이더라. 배낭의 무게와 가야 할 거리를 생각하니 몸이 반응하더라. 길을 가다 어떤 마을을 지나면 그 마을이 소개된 안내 책자를 찢어버린다든지 짐을 하나씩 버리며 욕심을 버리게 됐다.”고 말했다. ●걷고 기도하고 침묵하는 ‘나만의 힐링’ 종교의 힘을 빌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뿐 아니라 오로지 힐링을 목적으로 하는 무신론자의 참여도 부쩍 늘었다. 외국계 컴퓨터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 김회중(35)씨는 인간관계에서 큰 상처를 입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본래 가톨릭신자인 그는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지난 6월부터 가톨릭 피정(避靜·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묵상과 침묵기도를 하는 종교적 수련)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마음의 상처와 시련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모여 상담을 하고, 아픔을 경청하면서 치유를 받았다.”고 말했다. 피정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피정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로 매일 에세이를 쓰고 있다. 단순한 일기가 아닌 하루에 대한 반성과 위로, 격려가 주된 내용이다. 그는 “매일 스스로 힐링을 하며 치유와 성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피정보다 대중화된 종교의 힐링프로그램으로는 불교의 ‘템플스테이’(전통사찰에 머물며 몸과 마음을 치유)가 있다. 카네기연구소에서 리더십 교육 강사로 활동하는 김은주(40)씨는 지난 4일 1박 2일 일정으로 쌍둥이 아들, 남편과 함께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했다. 벌써 여섯 번째다. 김씨는 “도시에서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힘든 상황도 많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특히 리더십 강의를 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집착을 한 시간도 있었다. 절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을 찾고,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10년 전, 한국사회는 ‘웰빙’(심신의 행복 추구)을 꿈꿨다. 미디어, 광고, 산업계 등은 발 빠르게 웰빙을 강요했다. 각종 서적과 관광상품에 웰빙이 범람했고,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웰빙라이프를 위해 노력했다. 강산이 변했다. 한국사회에서 웰빙은 실패한 결과물로 남았다. 몸과 마음의 행복은 차치하고, 너도나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겠다고 난리다. 대세는 10년 만에 웰빙에서 ‘힐링’(몸과 마음의 치유)으로 옮겨졌다. 10년 전처럼 모든 분야에서 힐링을 강요하는 모양새다. 사람들도 과거와 달리 공공연히 아픔을 드러낸다. 한때 국민드라마로 사랑받았던 ‘다모’의 명대사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묻고 고백하기를 반복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소통의 부재를 한국 사회의 고질병으로 거론했건만,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에 힘입어 ‘소통 과부하’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보 공유의 속도와 규모가 커졌다. 인터넷에 ‘힐링’이란 미끼를 던져 ‘검색’이라는 낚싯줄만 당기면 월척 수준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무한하다. ●경제성장 따른 심리적 피폐가 힐링 불러 사람들은 왜 힐링을 필요로 할까. 전문가들은 최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 힐링 열풍의 근간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가 ‘이스털린의 역설’(경제성장이 낮은 수준에서는 소득이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지만,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론)의 단계에 진입한 점에 주목했다. 신 교수는 “청년 실업자라든가 비정규직, 명예퇴직자 등 삶에 불안을 겪는 계층이 늘면서 위안과 희망, 위로와 격려를 원하는 사회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돼 힐링 문화가 급속도로 퍼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국민건강공단이 발표한 ‘2007~2011년 건강보험 진료비 지급자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심한 스트레스 반응 및 적응장애로 의료기관을 찾은 진료환자의 수는 2007년 9만 8083명에서 2011년 11만 5942명으로 4년 새 18.2% 증가했다. 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규섭 교수는 “해마다 스트레스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은 100만~200만 명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는 분들이 호소하는 고통이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대개 젊은 세대들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고, 중·장년층은 조기 실직에 따른 사회·경제 스트레스를, 연세가 드신 분들은 건강상의 이유에 따른 고통 및 외로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치유에 집중하는 데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심리적 피폐함이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인터넷 발달로 세계적으로 성공한 1% 사람들의 삶의 정보가 쉽게 노출됐고, 이를 접한 많은 사람의 꿈과 이상이 커지면서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이 깊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한 때 젊은 세대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됐다. 하지만 그만 아픈 척해야 할 시점이 왔다. 어느 세대나 힘들고 시련은 있다.”며 쓴소리를 했다. 힐링이 키워드로 부각되면서 이를 주제로 한 상품도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고 있다. ‘힐링 산업’의 등장이다. 힐링 전문여행사를 표방한 일부 업체에서는 가이드 대신 심리치료사를 동행시켜 명상·걷기 등을 주 프로그램으로 하는 상품을 내놓았다. 공연계는 지난해부터 아티스트의 이름이 아닌 ‘힐링 콘서트’ 등의 공연까지 내놓고 있다. 강원 평창, 충북 청원·제천, 경북 경주 등에서는 ‘힐링랜드’ 등의 이름을 붙여 치유의 숲, 상담시설을 건립할 계획이다. 하지만, 힐링의 지나친 상업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요가 커지면서 여러 형태의 힐링 상업주의가 판치고 있다.”면서 “저마다 각자의 고민과 욕구가 있고, 또한 각자의 치유 방식이 있다.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다룬다는 발상의 힐링 산업은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광복절 67돌] 위안부 ‘전시 女인권’으로 규정… 양국 긴장의식 ‘독도’ 빠져

    [광복절 67돌] 위안부 ‘전시 女인권’으로 규정… 양국 긴장의식 ‘독도’ 빠져

    전격적인 독도 방문(10일), 일왕(日王)에 대한 사과요구 발언(14일) 등으로 잇따라 대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임기 마지막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내놓아야 한다는 점을 단호한 어조로 촉구했다. 하지만 독도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일본 정부를 거듭 압박하면서 분명하고도 단호한 대일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군대 위안부 문제만큼은 여러 현안 중에서도 조속히 마무리해야 할 인도적 문제”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양국 차원의 문제가 아닌 ‘전시(戰時) 여성 인권문제’로 규정한 것도 주목된다. ●위안부 문제 해결 日정부 압박 최금락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은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한·일 양국 차원이 아니라 전 인류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면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으로, 독도문제는 이미 행동으로 보여 준 만큼 경축사에 굳이 담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는 “위안부 문제는 더 강경하게 나갔어야 하는데, 일왕 발언의 여파가 커지자 수위조절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송석원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대일문제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뭔가 서두르는 느낌이 있다.”면서 “다만 위안부 문제를 전시여성 인권문제라고 한 것은 한국이 제기할 수 있는 최상의 마지막 카드라고 본다.”고 밝혔다. 독도문제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조용한 외교’라는 대일외교 기조를 전면적으로 바꿀 계획이 없는 만큼 이 대통령의 독도방문 이후 고조된 한·일 간 긴장관계를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한·일 재무장관 회담이 일본의 요구로 연기됐고, 일본 민주당 정부에서 처음으로 일부 각료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일본 쪽 반발이 지속되고 있어 당분간 한·일 간 갈등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北 변화 촉구 선에 그쳐 이명박 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는 선에서 그쳤다. 임기 마지막 해인 만큼 역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경제공동체 실현’(2008년), ‘대북 5대 개발 프로젝트 제안’(2009년), ‘통일세 도입’(2010년) 등 구체적인 대북 정책을 제시한 것과는 달랐다. 대북관계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양상과는 다르게, 그동안의 원칙있는 대북정책은 실질적으로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자평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임혁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 북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다는 것은 지나친 자가당착”이라면서 “우리 정부의 압박과 관계없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새로운 개방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며, 오히려 ‘화해와 협력’이라는 정책기조는 적어도 10년은 뒷걸음쳤다.”고 지적했다. 송석원 교수는 “대통령이 말한 ‘원칙 있는 대북정책’의 효과는,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중국방문이라든가, 중국과 북한의 경협 등 최근 북한의 경제개혁을 염두에 둔 발언인 것 같다.”면서 “그러나 북한의 그런 움직임이 이명박 정부의 4년에 의해 이뤄졌는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경제분야 치적 상당부분 할애 이 대통령은 또 올해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밝히면서 연설의 상당부분을 집권 4년 반 동안 자신의 경제치적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극복했으며, 국가채무 비율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양호한 편이라고 밝혔다. 또 대부분 선진국이 금융 위기 이전 국내총생산(GDP)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만 10%이상 성장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했으며, 세계핵안보정상회의도 서울에서 열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김성수·하종훈기자 sskim@seoul.co.kr
  • [여야 대선주자들의 8·15] ‘어머니의 꿈’ 강조한 박근혜 “정치 근본개혁”

    [여야 대선주자들의 8·15] ‘어머니의 꿈’ 강조한 박근혜 “정치 근본개혁”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는 15일 ‘어머니의 꿈’을 강조했다. 박 후보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故) 육영수 여사 제38주기 추도식’에서 유족대표 인사말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고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둘 다 이루면서 꿈을 이뤄갈 수 있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어머니의 꿈이었고, 이제 저의 꿈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신 지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어머니를 기억해 주시는 것은 생전에 어머니께서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따뜻한 곳보다는 추운 곳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폭우속 친박 등 9000여명 참석 박 후보는 이어 “국민의 삶을 챙기고 나라를 바꾸는 데 중심이 돼야 할 정치가 오히려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정치권을 강타한 공천헌금 파문과 관련, 강도 높은 개혁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행사에는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박 후보를 보기 위해 9000여명(경찰 추산)의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박 후보는 내빈들과 눈을 맞추며 일일이 악수했다. 그중 한 내빈이 “(합동연설회가 열린) 김천체육관에서 김문수 때린 게 접니다.”라며 박 후보에게 인사를 하자, 박 후보는 “아, 저 분이구나….”라며 놀라는 해프닝도 있었다. ●안상수, 애국가부르기 플래시몹 추도식에는 박 후보 캠프의 김종인·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과 최경환 총괄본부장 등 캠프 인사들과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이 총출동했다. 박 후보의 동생 지만씨도 추도식에 참석해 박 후보 옆자리에 앉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지난 11일 귀국한 지만씨의 부인 서향희 변호사는 불참했다. 서 변호사는 영업정지된 삼화저축은행 고문 변호사를 맡은 전력 때문에 저축은행 비리 연루 의혹이 제기됐었다. 한편 안상수 후보는 이날 오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한 뒤, 낮 12시쯤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애국가 부르기 플래시 몹’ 행사에 참여, 폭우 속에서도 시민 10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김문수 후보는 경기도지사 자격으로 수원 현충탑을 참배한 뒤, 수원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행사에 참여했다. 김태호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남산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참배했다. 황비웅·최지숙기자 stylist@seoul.co.kr
  • 美 버지니아주 ‘해병 선셋 퍼레이드’ 가보니…

    美 버지니아주 ‘해병 선셋 퍼레이드’ 가보니…

    14일 오후 6시 30분(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해병 전쟁 기념비’(이오지마 기념비) 근처에 단체버스 4대가 도착했다. 아프가니스탄전 등에 참가했던 해병과 가족, 그리고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 등이 버스에서 내렸다. ●참전용사·외국대사 200명 초청 56년 전통의 ‘해병 선셋 퍼레이드’에 초청받은 이들 200여명은 도열한 해병들의 경례를 받으며 연병장 중앙의 귀빈석으로 안내됐다. 주변 잔디밭에는 이미 도착한 시민과 관광객 400여명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객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니 연병장 끝으로 유명한 이오지마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1945년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군이 많은 사상자(2만 4000여명)를 냈던 이오지마 전투에서 해병대원 6명이 성조기를 세우는 실제 모습을 모델로 만든 기념비다. 사회자가 1956년부터 이곳에서 해병 군악대와 의장대의 선셋 퍼레이드가 시작됐다는 역사를 설명했다. 퍼레이드는 매년 6~8월 매주 화요일에 펼쳐지며 올해의 경우 이날이 마지막 행사라는 사실, 그리고 최영진 주미 한국대사가 이날 특별히 초청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해병대 측은 지난달에는 일본대사를 초청하는 등 근래 차례로 외국 대사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윽고 기념비 뒤편에서 붉은색 제복 차림의 군악대가 서서히 등장하면서 퍼레이드는 시작됐다. 관악기와 타악기를 든 100여명의 군악대원들은 절도 있는 몸동작과 함께 남북전쟁 당시 북군 군가(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 등 귀에 익은 노래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는 듯 ‘율동’이 화려했다. 군악대가 옆으로 비키자 이번엔 기념비 뒤에서 검은색 제복의 의장대가 카리스마 있는 보폭으로 나타났다. 성조기와 해병기를 든 병사들이 가운데 자리하자 미국 국가가 연주됐고 관객들은 모두 일어섰다. 이어 의장대의 절도 있고 화려한 의장 시범이 펼쳐졌다. 시범이 끝난 뒤 의장대 지휘 장교가 귀빈석의 최영진 대사와 미 해병대 장성을 연병장으로 안내했고, 의장대의 분열이 펼쳐졌다. ●석양 뒤로 의장대 조총발사 ‘장관’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병들을 추도하는 순서임을 알리면서 분위기는 일순 차분해졌다. 의장대가 허공에 조총을 발사한 데 이어 기념비 위에 해병 한 명이 올라가 나팔로 구슬픈 곡조를 연주했다. 나팔을 든 해병이 석양과 어우러진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라 왔다. 일부 관객이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40여분 만에 행사는 모두 끝났다. 객석을 빠져나가던 중년 여성은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한 해병 장교는 “세계적으로 오직 미 해병만 이렇게 정기적이고 큰 규모의 공연을 한다.”고 했다. 애국심도 관광 상품으로 파는 나라, 외국 귀빈을 초청해 미국의 정신을 소개하는 나라 바로 미국이었다. 글 사진 알링턴(버지니아주)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1)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1)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

    고향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마을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둥구나무를 연상하기 십상인 것처럼, 어린 시절의 학교를 떠올릴 때에도 대개는 학교 안의 나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딱히 시골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웬만한 학교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학교의 상징처럼 서 있게 마련이다. 학교마다 교목(校木)이나 교화(校花)를 지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게다. 교목, 교화의 의미를 강렬하게 남기기 위해 학교에서는 그 나무를 교정 앞 화단이나 울타리에 줄지어 심어 키운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며 매일 나무를 쳐다볼 때에는 나무를 그리 대수로이 여기지 못한다. 나무가 오롯이 떠오르는 건 필경 학교를 떠난 뒤 어린 시절의 풍경을 추억할 때다. ●한재초등학교의 상징이자 자랑 전남 담양 대전면 대치리, 한재초등학교에는 그러나 지금 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조차 매우 특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무 한 그루가 교정 안에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이들로서 나무 없는 학교를 떠올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만큼 나무가 크고 아름다운 까닭이다. 한재초등학교 교정 한편에 서 있는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다.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서는 키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된 이 나무의 키는 무려 34m나 된다. 도시의 일반적인 건축물에 견주면 무려 12층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나무다. 사람의 가슴높이에서 잰 나무의 줄기 둘레도 8.78m라는 엄청난 수치를 나타낸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라면 예닐곱 명이 둘러싸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다. 규모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몇 그루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교정을 가득 채울 듯 치솟은 나무의 융융한 높이 탓에 학교 건물이 실제보다 더 낮아 보일 수밖에 없다. “동문들 누구라도 학교를 이야기할 때면 이 나무를 먼저 떠올리지요. 느티나무 없이 우리 학교는 그려지지 않아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느티나무는 우리 마음의 기둥이에요. 동창회 때면 모두 나무 그늘부터 찾지요. 한결같은 우리 학교의 상징이자 자랑이니까요.” 한재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인 이봉근 칠성건설 대표는 총동창회의 주요 행사는 운동장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기본 행사만 마치면 동창들 누구나 느티나무 그늘부터 찾아든다고 한다. 동창회 기념 사진의 배경에 반드시 느티나무가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손수 심은 나무 동창회뿐 아니라, 한재초등학교 교장실을 비롯한 곳곳에 걸린 학교 풍경 그림이나 사진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등장한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나무가 이 학교의 상징임은 금세 알 수 있다. 하긴 이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라면, 굳이 이 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싶다. 물론 학교 이웃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대치리 느티나무는 마을의 자랑이며 상징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대치리 느티나무는 크기뿐 아니라, 전해 오는 유래까지 남다르다. 나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손수 심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명장이던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들러 치성을 드리고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대로라면 나무의 나이는 620살을 조금 넘는다. 이만큼 오래 살아온 나무치고는 생육 상태가 무척 건강한 편이다. 오래 전에 학교 운동장을 정비하던 때에 나무가 있는 자리를 조금 높여 나무 뿌리 부분에 복토를 한 흔적이 뚜렷하지만, 생육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대치리 느티나무 외에 이성계가 심은 것으로 전하는 나무는 한 그루 더 있다. 전북 진안 마이산의 아늑한 절집 ‘은수사’ 경내에 서 있는 청실배나무다. 은수사 청실배나무는 이성계가 건국의 기원을 다지기 위해 백일기도를 올린 뒤 손수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운 나무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한재초등학교 아이들은 나무 앞에서 이 나라의 역사를 배우면서, 태조 이성계가 심은 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나무에 대한 혹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을 것이다. 나무는 그냥 그늘만 드리운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이 나라 역사에 대한 자긍심까지 불어넣은 것이다. ●여전히 방과후 수업의 교실로 활용 “한국전쟁 때 우리 학교가 완전히 불에 타서 무너진 적이 있었어. 그래도 학교는 계속 유지됐는데, 교실이 죄다 불에 탔으니 당장에 공부할 자리가 없잖아. 그때 아이들이 모여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가 바로 이 나무 그늘이었어. 그래서 선생님들은 이 그늘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하듯이 서두르곤 했지.” 한재초등학교 졸업생인 정정수(89) 어르신은 당시 이 학교에서 가장 좋은 천연의 교실이 바로 느티나무 그늘이었다고 강조한다. 전쟁 통에 교실을 잃고 느티나무 그늘을 찾아 공부했던 때와는 다르지만 요즘도 느티나무 그늘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실로 활용된다. 이즈음처럼 무더운 날, 느티나무 그늘은 자연과 어우러진 더없이 좋은 교실인 까닭이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삶과 역사를 배우고, 지금 이곳의 문화를 이뤄가는 아이들의 삶이 아름답기만 하다. 나무가 키워내는 사람살이의 현장이다. 글 사진 담양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7-1 한재초등학교 내. 서해안고속국도와 호남고속국도를 연결하는 고창~담양 간 고속국도를 이용하면 담양 지역을 빠르게 갈 수 있다. 북광주나들목의 요금소를 나가서 우회전하여 1㎞쯤 간 뒤, 대전면 대치리 마을로 들어서는 오른쪽 도로로 빠져나간다. 곧바로 좌회전하여 도로 아래로 난 길로 들어선다. 1.2㎞를 직진하면 대치사거리가 나오고 한편에 한재초등학교가 있다. 사거리 모퉁이의 농협 뒤편에 공용주차장이 있다. 나무는 한재초등학교 교정 안에 있다.
  • [15일 TV 하이라이트]

    ●수요기획(KBS 밤 11시 40분) 일본 최고의 극작가 정의신은 일본 문화계에서 말 그대로 ‘핫’한 인물이다. 고향인 히메지의 조선인 부락 신작로는 ‘연극의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히메지 문학관에선 그의 육필 원고와 대본이 전시돼 있다. 일본인이 사랑하는 일본 문화의 자랑, 정의신. 하지만 그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거부하고 여전히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각시탈(KBS2 밤 9시 55분) 슌지는 온갖 멸시와 부당함을 견뎌내면서 경찰서에서 버티는 강토의 모습을 예사롭지 않게 느낀다. 라라를 찾아간 슌지는 각시탈을 놓친 경위를 조사하고 무언가 숨기는 듯한 라라의 태도에 석연찮음을 느낀다. 한편 아버지 담사리의 편지를 받게 된 목단은 담사리가 양백선생과 함께 곧 경성에 온다는 소식을 강토에게 전한다. ●일본을 춤추게 한 스님, 김묘선(MBC 오후 6시 50분) 일본 절의 주지는 단가를 관리하며 마을의 제사와 장례를 책임지는 일을 도맡아 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단 한 번도 여성이 주지가 된 적이 없다. 프로그램에서는 한국 무용가인 김묘선이 자신을 거부하는 일본 사회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며, 외국인 여주지로 마을의 존경받는 큰 어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도산 안창호(KBS2 오전 11시) 8·15 아침 도산 안창호의 말들이 가슴을 찌른다. 60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혁명가, 학생과 청년교육에 몰두한 교육자, 국민의 심금을 울린 탁월한 웅변가, 민족의 원대한 이상을 제시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도산 안창호. 민족 수난기 모든 애국애족 청년들의 정신적 멘토였던 도산의 삶을 되돌아본다. ●헬스 투데이(EBS 오전 6시)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를 이용해 골다공증 예방을 위한 근육 강화 운동을 준비했다.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면 무릎과 허벅지 근육이 강화되고 골다공증으로 척추가 굽어지는 증상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의자 뒷부분을 잡고 다리를 옆으로 들어 올려 허벅지 뒤쪽 근육까지 강화할 수 있는 동작도 배워 본다. ●18세 이선경, 독립운동의 꽃으로 지다(OBS 밤 10시 55분) 독립운동가 이선경은 꽃다운 열여덟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동포의 아픔과 조국의 굴욕을 씻기 위해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국 광복의 초석을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그동안 구체적인 증언과 내용 등이 확인되지 않아 역사학계로부터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 참전유공자 명예수당 2014년 5만원으로 인상

    참전유공자 명예수당 2014년 5만원으로 인상

    서울 시내 참전유공자 명예수당이 오른다. 서울시는 14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훈종합계획을 발표했다. 5만여명에 이르는 참전유공자 명예수당은 월 3만원에서 매년 1만원씩, 2014년까지 5만원으로 인상된다. 애국지사 44명에게는 예우수당이 월 10만원씩 새롭게 지급된다. 애국지사 사망 때 조의금 100만원도 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이날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현장설명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과 후손들이 정당한 대우와 품격 있는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애국지사 사망땐 조의금 100만원 시는 현재 1만 8800명인 3·1절, 8·15광복절 등 각종 기념일 위문대상자도 내년부터 매년 2000여명씩 늘리고 위로금 3만~10만원을 지급한다. 아울러 저소득 보훈가족 국내여행 보내드리기, 보훈회관 여가프로그램 연계운영, 찾아가는 행복콘서트 개최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또 2014년부터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중앙보훈병원 인근 3개 지구(고덕 강일, 오금, 위례 신도시)에 건설되는 공공임대주택 물량의 10%인 755가구를 보훈가족에게 특별 분양한다. 서울에 살면서도 멀거나 지방에서 상경해 중앙보훈병원 통원치료를 받는 가족이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전세주택 ‘보훈의 집’도 세운다. 현재 시립병원 5곳으로 지정된 독립유공자 병원은 내년 9개 시립병원 전체와 25개 보건소로 늘린다. 시는 일자리를 원하는 국가유공자에게 보훈해설사, 환경정리, 교육강사 등 모두 1000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지원할 계획이다. ●보훈 테마거리도 조성 보훈단체들의 숙원사업인 ‘명예의전당’(가칭)과 서울시 보훈회관 건립공사도 2014년 시작한다. 서울시 보훈회관은 지방으로 이전할 예정인 한국산업인력공단 부지에 5층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명예의전당은 서대문 독립공원에 순국선열들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시민이 일상생활 속에서 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도록 보훈 테마거리를 조성하고, 새롭게 조성되는 공원이나 도로 등에 보훈 관련 명칭을 부여한다. 시는 9개의 공법 보훈단체별로 운영비 연 600만원을 신규로 지원하는 한편 사무실이 없는 2개 단체에 사무실 임대료를 지원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바티리크스’ 공범 IT 전문가도 기소

    교황청의 권력암투 정황 등이 담긴 내부문서 유출사건인 ‘바티리크스’(바티칸+위키리크스의 합성어) 스캔들이 새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문건을 유출시킨 혐의를 받아온 교황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46)이 법정에 서게 됐고, 또 다른 바티칸 직원도 절도 공범으로 기소됐다고 AFP통신 등 외신이 13일 보도했다. 공범의 신원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 신부는 “교황의 숙소에서 수백장의 문건을 빼돌린 가브리엘이 가중절도 혐의로 재판을 받을 예정”이라면서 “바티칸의 IT 전문가인 클라우디오 시아펠레티도 가브리엘의 절도를 도운 혐의로 기소됐다.”고 말했다. 시아펠레티는 바티칸 사무국에서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직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인 가브리엘은 지난 5월 베네딕토 16세의 아파트에서 기밀문서 수백건을 훔친 뒤 이탈리아 기자에게 전달한 혐의로 체포됐다. 문건에는 교황청의 세금 문제와 정치적인 갈등, 권력투쟁 등의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가브리엘은 교황청의 특수 교도소에서 53일간 구금된 뒤 지난 7월부터 가택연금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교황청 측은 가브리엘이 6년 징역형을 받을 예정이며 판결은 빨라도 오는 10월 전에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가브리엘은 현재 자신이 문서를 유출했음을 시인한 채 조사에 협조하고 있다고 교황청 측은 전했다. 최재헌·유대근기자 goseoul@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일본군 위안부할머니 전문 안세홍 사진작가

    [김문이 만난 사람] 일본군 위안부할머니 전문 안세홍 사진작가

    얼마나 기다리고 사무쳤으면 ‘흙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라고 했을까. 해마다 맞이하는 광복절이지만 올해만큼은 타국에서 떠도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고향마저 잃은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한 젊은 사진작가가 발품을 팔며 온몸으로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 내고 있다. 안세홍(42)씨는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9일까지 도쿄 한복판, 그러니까 신주쿠(新宿)에 있는 사진 전시관인 니콘살롱에서 일본 우익단체들의 갖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난해 12월 안씨가 처음 사진전 신청을 했을 때만 해도 니콘살롱은 “도쿄뿐 아니라 오사카(大阪)에서도 사진전을 열자.”고 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전시를 코앞에 두고 갑자기 ‘사진전 개최 불가’ 통보를 해 왔다. 이유는 “일본군 위안부 사진전은 정치색이 강하다.”는 것. 그러자 안씨는 도쿄지방법원에 사진전 개최 불가를 취소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사실 니콘살롱이 갑자기 방침을 바꾼 까닭은 니콘의 주요 주주인 미쓰비시(三菱)가 전쟁물자 제조로 성장한 회사인 만큼 주주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도쿄지방법원은 “위안부 사진전이 일정한 정치성을 띠고 있지만 사진 문화의 향상이라는 목적도 함께 있다. 니콘은 사진전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라.”며 안씨의 손을 들어 줬다. 이렇게 해서 안씨는 일본에서 무사히 전시를 마쳤고 이번에는 광복절을 앞두고 서울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통의동에 위치한 ‘갤러리 류가헌’에서 26일까지 ‘겹겹-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라는 제목으로, 눈물로 살아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한을 달래고 있다. 그는 이번 서울 전시에 이어 앞으로 오사카와 히로시마, 삿포로 등 일본에서만 12개 도시 순회 전시를 할 예정이며 뉴욕, 파리, 베를린, 런던 등 국제 사진전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10여개 도시를 순회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그 실상을 알리고 있다. 지난 6일 오후 ‘갤러리 류가헌’에서 안씨를 만났다. 전시장 입구에 박대임 할머니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깊게 파인 주름이 겹겹이 쌓여 있고 양손은 자신의 고향 지도를 매만지며 시름에 잠겨 있는 표정이었다. 일본에 이어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을 ‘겹겹 프로젝트’라고 한 것은 ‘한 많은 세월 속에 주름이 겹겹이 쌓였다.’고 해서 그렇게 정했다면서 사진 설명을 해 준다. “박대임 할머니가 지금 살아 계셨으면 100세인데 5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1934년 22세 때 한 살 된 아들을 업고 중국에 있는 일본군 주둔 지역으로 끌려갔지요. 2003년 중국 산둥반도 요산현 지역에 살고 계신 박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같이 살고 있더군요. 할머니 집에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의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지도를 만져보며 고향(청주)을 그리워하곤 했지요.” 박 할머니를 어떻게 만났느냐는 질문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곳에 가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를 찾다가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됐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가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12명. 그 가운데 벌써 8명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살 전후이기 때문에 아마 몇 년 후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70여년 전 한반도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우리나라 처녀들은 몇날 며칠이고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막한 오지에 내던져진 꽃다운 처녀들은 또다시 일본군의 트럭에 실려 총칼의 공포에 떨며 만주에서 윈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전장의 위안소로 내몰렸지요. 그들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한국과 북한, 타이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위안부 할머니를 단순히 ‘위안부’가 아닌 ‘전쟁과 여성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의 의미도 그런 차원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에는 박 할머니의 사진을 비롯, 13세 때 위안부로 차출당한 고(故) 배삼엽 할머니, 19살 때 위안부로 끌려간 뒤 현재 헤이룽장성 오지에 살고 있는 이수단 할머니, 20살 때 사시키라는 일본 이름으로 끌려간 고 박서운 할머니 사진 등 모두 40점이 눈물로 걸려 있다. “지난해부터 일본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를 잘 모르더라구요. 정보가 차단돼 있고 왜곡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동안 찍은 위안부 할머니 사진전을 열어 그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쿄에서 전시를 열었고 이번에 서울에서 전시를 하게 됐지요.” 도쿄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8000명에 가까운 관람객들도 기대 이상이었지만 특히 20~30대의 젊은이들이 전시장을 많이 찾았다. 또 일부 뜻있는 관람객들은 ‘겹겹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싶다고까지 할 만큼 관심을 보였으며 위안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지에 대한 앙케트 조사에는 1200명이 응답을 했다. “홍보는 제 스스로 했습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무당을 주제로 사진전을 두 번 열었고 강연 등을 통해 나름대로 인프라를 구축했지요. 이러한 인맥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시 내용을 알렸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고 난 관객들 중 일부는 전시 불가를 통보한 니콘살롱 측에 거친 비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맨 처음 위안부 할머니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나눔의 집’(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집)에서 자원봉사할 때였다. 당시 월간 ‘사회평론’에서 나눔의 집을 대상으로 화보를 찍었고 이 과정에서 안씨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역사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안씨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인터뷰에도 응했다. 2년 뒤인 1998년 창원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연 이후 지금까지 15년째 거의 매년 ‘위안부 할머니’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많이 아는 듯하지만, 중·일전쟁 때 중국으로 끌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들은 일제에 의해 청춘을 짓밟혔고, 지금도 가난과 외로움에 타국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서나마 그분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전태일평전’을 읽으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항상 사진에 관심을 가졌다. 눈으로 본 것을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학생 신분에 무작정 ‘사회사진연구소’(사사연)를 찾아가 사진을 배우고 ‘사사연’이 문을 닫을 때까지 3년 동안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후 절집과 무당집을 찾아다니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위안부 할머니로 방향 전환을 했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오는 10월 중순 다시 중국 후베이성과 헤이룽장성 등지로 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 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중국뿐만 아니라 타이완,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 지역에 사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3년 후에는 전쟁과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는 세계 각국 사진작가들과 함께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등을 순회하는 투어 사진전을 열겠다고 말했다. 이미 일본과 북한, 미국 등의 여러 사진작가들과 뜻을 함께해 놓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한·일 간의 감정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이슈화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파인더 속의 할머니는 한 사람의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깊이 파인 주름에서, 사방에 널브러진 손때 묻은 물건에서, 글썽이는 눈망울에서, 할머니의 한 맺힌 가슴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안세홍 그는… 1971년 강원도 옥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학생 시절부터 탈춤 사진을 찍기 시작해 장애인, 인권사진, 일본군 위안부 등 사회 소외계층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의 뿌리를 바탕으로 무속, 불교, 민속 등 전통문화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배우고 사진 작업을 해왔다. 현재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샤머니즘을 심도 있게 작업 중에 있으며 일본 10여개 도시를 중심으로 강연회와 ‘위안부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1998), ‘겹겹-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2003), ‘영혼을 부르는 몸짓’(2011), ‘겹겹-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2012) 등이 있다. 저술로는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2002), ‘눈밖에 나다’(2003), ‘일본군 위안부’(2004)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주제로 한 영상작업이 다수 있다.
  • 시 읽어주는 사회교사 노영민 첫 시집 ‘어떤 도둑’ 펴내

    “무얼 바라세요?/ 저는 애기똥 누는 거랍니다”(‘애기똥풀’) 소박하고 편하다. 부산 신정고에서 ‘시 읽어주는 사회선생님’으로 유명한 노영민(56) 교사가 낸 첫 시집 ‘어떤 도둑’(호밀밭 펴냄)은 그가 20여년간 보고 겪은 교실 안팎의 일상이다. ‘벚꽃 학교’와 ‘학교’, ‘대책 없이 나를 바라본다’에서는 학교와 학생을 향한 절절한 애정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늙은 은행나무’나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비를 사랑하는 법’에서는 매일 115번 절을 한다는 시인의 달관이 느껴진다. 가끔 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도 한다. 1989년 전교조 결성으로 대량 해직사태가 벌어졌을 때 교직을 떠났다가 1994년 금정여고에 복직한 뒤에도 시인은 세상을 걱정하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듯하다. “‘운동’이라는 말, ‘노동, 투쟁, 싸움’이라는 말/ 나는 겁나데/ 모임 장소를 옮길 때마다 쓰던 ‘비선’이라는 말도/ 나는 겁나데”(‘지는 하늘을 날고 나는 땅에서 빌빌거리고’ 중)로 시작하는 3부의 작품들은 이 시대의 고민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현우 “오른 눈 안보여…정신력으로 했다”

    김현우 “오른 눈 안보여…정신력으로 했다”

    상대 선수의 머리에 얼굴을 얼마나 받혔는지 그의 오른쪽 눈은 터질 듯 부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왼쪽 눈으로만 싸우고도 승리했다. 8일 엑셀 런던 노스아레나에서 끝난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66㎏급 결승에서 터마시 로린츠(헝가리)를 세트 스코어 2-0로 물리치고 한국 레슬링에 8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김현우(24·삼성생명) 얘기다. 다음은 일문일답. →금메달을 목에 건 소감은. -너무 기쁘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다. 감독·코치님들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같이 고생한 선후배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나 혼자 이뤄낸 게 아니기 때문에 응원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눈이 많이 부었는데 지장 없었나. -결승 때 한쪽 눈이 안 보였다. 정신력으로 했다. 많이 거슬렸는데 개의치 않고 정신을 집중하자고 했다. 예선부터 계속 부딪혀서 준결승 때는 거의 안 보이는 상태가 됐다. →런던에 오기 전에 금메달을 예상했나. -솔직히 과연 내가 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좋아지고 자신감도 생긴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몇년 전부터 시상대에 올라서는 것과 세리머니를 어떻게 할까 상상했는데 막상 올라가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안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훈련을 버텨낸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뿌듯하다. →금메달을 확정짓고서 매트 위에서 절을 했는데. -감독·코치님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태극기 앞에서 절한 것은 모든 국민이 응원해 주신 만큼 감사해서였다. 관중석에 삼성생명 코치님(김인섭)이 계셨는데 태릉에는 안 계시지만 밖에서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김현우에게 레슬링이란. -삶의 전부다. 레슬링으로 내 인생이 바뀌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열심히 했고 고생도 많이 했다. 체중 감량을 9~10㎏ 할 정도였다.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 런던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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