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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가 서울과 개성을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혜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가 한양에서 개성은 물론 평양, 의주를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삼국시대 한강과 임진강 일대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각축을 벌이던 당시 임진강을 넘나드는 통로는 오늘날의 적성·연천 일대였다. 임진강에서 갈수기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다. 옛 장단 땅인 연쳔 장남면에 고구려의 호로고루, 적성에 신라의 칠중성 등 국방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남북 통행로는 당연히 수도인 개경, 즉 개성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고려는 장단대로에 위치해 갈수록 규모가 켜져가던 양주를 문종 21년(1067)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킨다. 이후 남경의 중심이 한양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거리를 돌아야 하는 장단길보다 개성에서 임진나루를 거쳐 곧바로 남하하는 ‘의주대로’를 자연스럽게 선호하게 된다.  혜음령은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흔히 용미리공동묘지로 불리는 서울시립용미리공원묘지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는 걸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혜음령과 광탄면 사무소 사이에는 혜음원(惠陰院)터와 용미리석불입상이 있어 의주대로의 역사를 알려준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예종 17년(1122) 세운 국립 숙박 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한자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동서 104m, 남북 106m에 걸친 9개 석단의 27개 건물터와 연못터를 비롯한 놀라운 규모의 유구가 확인됐다.  혜음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우람한 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구로 이루어진 용미리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불상에 남아있는 명문을 토대로 성화 7년(1471) 조성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의 연호다. 명문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줄줄이 면면도 적혀있으니 석불입상의 조성과 연관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석불입상에 얽힌 구전설화와 혜음사 창건 배경을 담은 김부식의 글을 찬찬이 읽다보면 석불입상의 고려시대 조성설(說)에 다시 마음이 기운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는데,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궁주의 말을 들은 왕이 그들이 있다는 곳을 찾아가게 했더니 과연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불공을 드렸더니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혜음사 신창기’(惠陰寺 新創記)에서 이 길을 두고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 범과 이리가 떼 지어 모이고, 도둑의 무리도 숨기 쉬워 통행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해 (혜음령을) 지나가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해 수백 명’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실상을 파악한 신하가 ‘허물어진 절을 새로 지어 중을 모으고, 그 옆에 집을 지어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킨다면 짐승과 도둑의 해는 절로 멀어져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언하고, 왕이 그대로 따르자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미리석불입상 창건 설화와 혜음사 신창기는 의주대로 주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산도적을 토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빈민의 배고픔을 막아 도둑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배울 만하다.  석불입상의 창건 설화는 상징성의 강한 설화의 특성상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신창기 방식의 사고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미리석불입상은 의주대로의 안전을 위해 비슷한 시기 혜음원과 일종의 세트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일시에 깨달을 것을 미륵에 기원했다’는 명문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창건설(說)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박기량 “사실무근” 성희롱+야구선수 A씨 폭로글에 결국..[공식입장 전문]

    박기량 “사실무근” 성희롱+야구선수 A씨 폭로글에 결국..[공식입장 전문]

    박기량 사실무근 치어리더 박기량의 소속사가 최근 한 네티즌이 온라인에 폭로한 A선수 관련 글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박기량의 소속사 RS컴퍼니는 11일 “지난 4일간 입장표명과 해명을 위해 sns에 폭로성 글을 올린 이의 신원과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데 주력했고 정황을 파악했다”라며 “공개된 메신저의 내용은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부터는 법적 조치 등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대응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해명할 것”이라며 “추측성 음해 글과 확대재생산 글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SNS에는 A선수의 전 여자친구가 A선수에 관해 폭로했다. A선수의 전 여자친구는 A선수와의 메신저를 공개했고, 박기량을 언급한 성희롱 발언과 다른 선수, 감독들에 대한 좋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어 논란이 됐다. [박기량 소속사 공식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박기량 씨의 치어리더 소속사 알에스 컴퍼니 입니다. 지난 10월 8일 목요일 sns상에 올라온 A선수 관련 폭로성 글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혼란스럽고 걱정 하셨을거라 생각됩니다. 먼저 늦은 해명에 사과 드립니다. 해명이 늦은 이유는 A선수 관련 폭로성 글에 다수의 피해자 분들이 계셨고 저희의 발언으로 인해 2차,3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정확한 사실 파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저희 소속사에서는 지난 4일간 입장표명과 해명을 위해 sns에 폭로성 글을 올린이의 신원과 사실여부를 파악하는데 주력 하였습니다. 올린이의 신원과 이 일의 정황을 파악 하였습니다. 공개된 메신저의 내용은 사실무근임을 말씀드리고 밝혀드립니다. 다시 한번 강력히 말씀드립니다. 절대 사실무근의 낭설입니다. 지금부터는 법적조치 등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대응할 것이고 적극 해명 할 것입니다. 또한 추측성 음해 글과 확대재생산 글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 할 것입니다. 박기량 씨는 수년 간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본인의 자리를 지켜온 25살의 여성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만큼 더 노력하여 발전해가는 모습 보여드리도록 할 것입니다. 걱정해주시고 응원의 메시지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박기량 팀장과 치어리더들에게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박기량 사실무근, 박기량 사실무근, 박기량 사실무근, 박기량 사실무근, 박기량 사실무근, 박기량 사실무근 사진 = 서울신문DB (박기량 사실무근)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7] 봉선사의 한글 이름 ‘큰법당’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7] 봉선사의 한글 이름 ‘큰법당’

      봉선사 큰법당의 이름은 대웅전도 극락전도 아닌 그냥 ‘큰법당’이다. 교종의 으뜸사찰(首寺刹)로 권위를 가졌던 큰 절이니 여간한 파격이 아니다. 경기 남양주시 광릉 숲 속에 있는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것으로 ‘봉선사 본말사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름도 전해지지도 않을 만큼 당시에는 작은 규모였던 듯 한데, 조선 예종 원년(1469)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무덤인 광릉(光陵)의 수호사찰로 중창하면서 면모를 일신한다. 봉선사라는 이름도 이 때 붙여졌는데,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명종 6년(1551) 봉선사는 교종의 수사찰에 오르게 된다. 봉선사는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16개동 150간의 절집이 모두 잿더미가 되다시피했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됐다. 삼성각(三聖閣)말고는 무엇하나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큰법당’은 1970년 운허가 옛 대웅전을 복원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운허(1892∼1980)는 중국 봉천에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에 힘쓴 데 이어 한족신보 사장으로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산문(山門)에 들어선 뒤에는 불교경전을 파고들었는데, 광복 이후 봉선사에 머물며 불경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옮기는 데 힘썼다. 큰법당이라고 이름도 이런 노력의 연장선상이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불경 번역은 세조가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법화경언해’ 등 9종의 경전을 한글로 옮긴 데서 비롯됐다.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도 봉선사와 불교의 한글화 작업은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운허는 “한문을 배우는 것은 경전을 보기 위해서인데, 대학 다닌 사람들에게는 번역해서 가르치면 모두 다 이해하니 꼭 한문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뜻만 알면 되지 않는가. 역경사업은 지금 불교경전을 보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구자적인 안목이 놀랍다.  그는“다음 생에도 내 마음대로 태어난다면 한문을 배운 뒤 중이 되어 역경사업을 또 하고 싶다.”고 했는데, 유언 역시“한글로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법사의 관’이라고 써 주시오. 이 몇자가 나의 생애를 다 표현할 것이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큰법당은 편액뿐 아니라 기둥글(柱聯)도 한글이다. ‘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큰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부처님 공덕 다 말못하고’라는 한문 선시(禪詩)를 한글로 옮겼다. 순수한 한글로 최대한 풀어쓰고, 의미전달을 위해서는 의역(意譯)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는 운허 번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큰법당 안에는 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놓았다. 봉선사 큰법당은 그저 옛 것을 이어가는데 그치지 않고 시대 정신에 부응해 가려는 불교의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운허의 봉선사 이후 불교 언어의 한글화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봉선사의 새로운 전통이 봉선사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⑦ 스님들이 외국어 경연대회?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⑦ 스님들이 외국어 경연대회?

     ‘스님들이 외국어 실력을 겨룬다’ 조금 생뚱맞게 들릴 수 있겠다. 그런데 실제로 14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2층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있을 행사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아니 불교도 달라졌다고 생각할 이들이 많을 성 싶다. 선방과 절집에서 참선, 염불만 하는 줄 알았던 스님들이 외국어 경연대회를 연다니…. ● 14일 조계종 학인 스피치대회, 예선 거친 64명 ‘일전’  조계종 교육원이 여는 ‘제1회 조계종 학인 외국어 스피치대회’ 학인, 즉 사찰 승가대나 중앙승가대, 동국대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영어·중국어·일어로 사찰문화며 불교교리, 승가대학 생활과 관련한 내용을 대중 스피치하는 대회란다. 예선을 통과한 개인 13명, 단체부 6팀 등 모두 64명이 외국어 실력을 겨룬다고 한다. 단체는 춤과 노래, 연극 요소까지 곁들인 오페라 형식의 공연까지 선보인다니 일단 실력들이 녹록치 않아 보인다.  ‘스님 외국어스피치대회’가 일반에겐 생뚱맞아 보이는 게 당연할 터. 일반인들이 의아해하는 만큼이나 불교계, 특히 ‘한국불교 맏형’ 격인 조계종 입장에선 오랜 고심 끝에 낸 고육지책으로 여겨진다. 화두를 들고 참선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조계종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다. 1700년 선(禪) 불교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자부심과는 달리 정작 외국에서 한국불교를 알아주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 불교는 티베트불교나 일본불교, 남방불교가 대종을 이룬다. 한국 선불교를 아는 이란 아주 드물고,서점에서도 한국불교 관련 책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서방세계에서 한국불교는 한마디로 ‘뒷 전의 불교’인 셈이다. ●’뒷전’ 한국불교 위기감 반영... 더딘 ‘세계화’ 노력 첫 발걸음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염두에 둔 채 외국 유학중인 한국 스님들이야 어디 한 둘일까. 세계 각지에 흩어져 공부하는 한국의 학인들이 많다지만 정작 한국불교에 깊숙이 빠져 귀의한 외국인 입장에선 불교 공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이 땅에 들어와 공부하는 외국인 스님들은 한결같이 교리 이해며 절집 생활 적응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한국 절집이며 선방에 들어와 산 지 불과 몇 년 안에 한국을 떠나는 푸른 눈의 수행자도 숱하다. 말로만 ‘한국불교 세계화’를 외칠 뿐, 그 실천의 행보는 소걸음처럼 더디기만 하다고 조계종 스님들 스스로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사실이다.  조계종이 전대미문의 ‘스님 외국어대회’를 여는 데는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사정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대중들의 불교 외면과 이탈이다. 교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수행 탓에 점점 멀어져가는 썰물의 신행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의 표출이 만만치 않다. 신자들의 이탈에 더해 출가자의 급격한 감소와 고령화까지 겹치고 있는 상황이니 더 말해 뭣할까.  어쨌든 스님들의 외국어 경연대회는 불교계에선 큰 변화의 싹으로 비쳐진다. 세계화를 염두에 둔 외국어 포교의 토대를 쌓든, 대중들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마케팅 성격의 행사이든, 그 발상의 싹은 일단 고상해 보인다. 14일 오후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에서 스님들 외국어 겨루기를 한번 지켜볼까.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거람 김반석 개인전 ‘글그림? 한글! 품다’

    거람 김반석 개인전 ‘글그림? 한글! 품다’

    한글날을 맞아 한글로 우리 전통과 선비정신을 한국화로 풀어낸 ‘글그림? 한글! 품다’ 전이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미술전문잡지 ‘미술세계’가 기획한 거람 김반석 개인전이 7일 개막되어 오는 13일까지 서울 인사동4거리 미술세계 빌딩 5층에서 열린다.  경남 울주군 치술령 자락에서 24년째 작업을 해온 작가는 사물의 형상을 추상적인 한글로 풀기도 하고, 한국의 전통을 자유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장지에 자연 채색의 한국화 느낌을 담은 ‘꿈’ ‘절’ ‘밝음’ ‘나비 꽃’ 등은 작가의 말 대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상징을 시각화”한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 그의 작품은 ‘장욱진 풍’의 간결미와 검은 먹 선이 주는 절제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작가 김반석은 은행원 출신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초야의 비주류 화가이다. 스스로 주변부에서 맴도는 그림쟁이라고 일컫는 그의 작품은 언제나 정신이 자유롭고 꾸밈이 없는 순수한 열정이 묻어나고 있다. 이경형 기자 iseoul@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6] 예산 화암사와 추사의 불교관(觀)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6] 예산 화암사와 추사의 불교관(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만나러 충남 예산으로 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추사고택을 목적지로 삼는다. 추사를 비롯한 일가의 무덤이 주변에 몰려 있고 추사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도 널찍해 아무런 불편이 없다. 예술가의 옛집을 이만큼 가꾸어 놓은 사례가 다른 나라에도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고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나타나는 사랑채에서도 정작 추사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줄줄이 걸려있는 추사체의 기둥글(柱聯)은 오히려 조금 지나치다 싶다  그의 체취는 오히려 화암사(華巖寺)에서 훨씬 진하게 느껴진다. 추사고택의 뒷산인 오석사(烏石山)의 서남쪽 자락이다. 추사고택과 화암사는 산길로 이어지지만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고 있자면 같은 산자락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오석산은 해발 97m에 불과하니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주변이 모두 야트막한 구릉지대이다 보니 정상까지 오를 필요도 없이 화암사 뒷편 능선에만 올라도 앞뒤가 모두 멀리까지 훤히 트여 눈이 시원해 진다. 추사가 소봉래(小蓬萊)라고 써서 뒷산 바위에 새겨놓은 것도 과장이 아니다. 봉래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부마, 곧 사위다. 영조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왕실로부터 별사전으로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받았다. 그 땅에 화암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월성위(月城尉)에 책봉된 김한신은 화암사를 중건하여 집안의 원찰(願札)로 삼는다. 한마디로 화암사는 경주 김씨 집안의 개인 절이었다.  그래선 절집 배치도 일반적인 사찰는 조금 다르다. 앞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이 합쳐진 듯한 요사채가 가로 막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분위기를 풍긴다. 요사채 오른쪽에 붙인 누각에는 추수루(秋水樓)라는 추사 필적의 현판이 걸려있다. 추사를 포함해 이 집안의 바깥주인들이 공부도 하고 손님도 맞는 기능을 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중간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이 달렸다. 관음보살을 모셨다는 뜻인데 비구니 절 요사채 문을 무작정 열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요사채 왼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석축 위에 지은 큰법당이 보인다.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역을 달고 있는 것은 조금 의아하다. 추사가 제주 대정에 유배되어 있던 1846년 화암사는 다시 한번 중건됐다. 이때 추사가 써서 보낸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과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이 자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화암사에 무량수각과 시경루는 간데 없고 대웅전과 추수루만 남아있다. 큰 법당의 편액인데도 무량수전이 아니라 무량수각이라고 쓴 것을 보면 온전한 절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국가에서 사대부 집안에 원찰은 어색한 것도 사실이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화암사는 수덕사 말사의 지위를 갖고 있는 만큼 두 현판은 수덕사 근역성보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화암사에서 추사의 흔적이 가장 진한 곳은 대웅전 뒷마당이다. 절 뒷편으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이쪽저쪽에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고 각각 새겨놓았다. 천축고선생댁은 ‘천축 옛 선생의 집’이라는 뜻이다. 추사가 말한 ‘인도의 옛 선생’이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재치가 넘치는 표현이지만 화암사를 본격적인 절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뒷마당에 이런 글을 새기지는 않았을 듯 싶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는 있지만 신앙의 대상은 아니라고 구태여 변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10년에는뒤 와병중에도 서울 봉은사에 판전(板殿) 현판을 쓰는 추사다. 하지만 환갑 언저리까지만 해도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 걸음 쯤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시경’을 새긴 배경에도 설명이 필요하다.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78세의 대학자 옹방강을 만난다. 그에게서 받은 것이 남송 시인 육방옹의 ‘시경’의 탁본이었다. ‘시경’ 각자(刻字)나 ‘시경루’ 편액은 모두 옹방강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병풍 바위를 바라보면서 글씨에 얽힌 고사(故事)를 되새기고 있으면 마치 추사가 옆에서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추사고택이 그 집안의 기념물이라면 화암사는 추사 개인의 기녈물이라는 느낌이다. 추사는 화암사를 ‘정신적 놀이터’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산은 사과가 한창이다.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화암사가 추사고택으로 이어지는 도로변도 붉게 익어가는 사과가 지천이다. 이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에 화암사만한 곳도 흔치않을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⑥ 달라이라마가 한국에 온다고?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⑥ 달라이라마가 한국에 온다고?

     불교계에 달라이라마 방한(訪韓) 설이 쏠쏠 흘러나온다. 전국 각 지에서 달라이라마 방한을 위한 법회며 서명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진데 이어 최근 달라이라마의 환생 스승인 7대 링 린포체가 달라이라마 방한추진회(준비위원장 금강스님)를 방문해 격려하는 등 부쩍 분주해진 모습이다. 일부 불교 신자들은 ‘후년 봄쯤 달라이라마가 방한할 것’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낙관론까지 퍼뜨리고 있다. ● 추진위 방한 서명운동 등 전개... ’2017년 봄 방한’ 낙관  달라이라마의 방한은 따져보면 불교계 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인도 동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정치적 지도자이자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영적 각성과 새로운 삶을 이끌어주는 정신적 리더이기도 하다. 1950년 중국의 침공으로 120만 명 이상이 희생된 티베트. 그곳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저 다람살라의 달라이라마를 보기 위해 몇 달씩 걸리는 희말라야의 험한 순례 길을 오체투지로 넘는다.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은 그의 사진 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쳐 바라보지 못할 만큼 달라이라마의 위상과 영적 힘은 위대하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회도 방한의 목적을 불교계에 국한하지 않고 있는 눈치다.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한국사회의 각성과 발전에 대한 멘토겸 대화자라는 거시적 명제를 방한의 동기로 삼았다고 한다. 조만간 그 목적에 맞춘 달라이라마 추진위의 구성과 방한일정을 공표할 것으로 전해진다. ● 과거 몇차례 불발... 외교적 이해관계 얽혀 성사여부 불투명  그런데 지난 2000년의 일을 비롯해 이미 몇 차례의 방한 추진이 불발에 그쳤던 과거사를 돌이켜보면 지금의 열망과 열기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외교적으로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정부의 단골격 방한 불허 이유가 우선 떠오른다. 중국과 한국 정부의 밀월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도타운 상황이고 보면 이번 방한 추진의 결과 또한 장밋빛 보다는 어두운 색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그런데도 불교계는 “종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며 낙관적이다. 양국간 신뢰가 충분히 쌓인만큼 양국 정부의 양해가 있을 것이란 기대가 우선 크다. 여기에 방한추진회를 이끌고 있는 구성 인원들이 정치적, 종파적 특색을 띠지않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중국과 한국 정부에 방한 불허의 빌미를 제공할 요소를 미리 차단했다는 주장이다. 현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불교계의 상황도 곁들인다. ●불교계 ‘필생의 과업’ ... 실추된 한국불교의 각성도 과제  지금 상황을 종합해보면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향한 불교계의 입장은 ‘낙관’을 넘어 ‘반드시 성취해야 할 필생의 과업’이다. 그리고 그 과업에는 명예와 위상이 실추된 한국불교의 각성과 개선이란 큰 과제도 얹혀있다. 그 과업 달성의 이유며 과제 청산이란 의욕이야 탓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8월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처럼 ‘티베트 승왕(僧王) 달라이라마에도 신경 써 달라’는, 정부를 향한 간절한 요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해와 공감의 한 켠에 자리를 틀고있는 묵직한 덩어리가 자꾸 걸린다. 돈과 권력에 휘둘리는 출가자들이며 절집의 세속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 방한 문제가 들먹여질 때마다 ‘왜 달라이라마여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곤 하는 것일까.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18] ‘추억의 구충제’ ‘산토닌’을 아세요?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18] ‘추억의 구충제’ ‘산토닌’을 아세요?

     우리 민족의 의약관은 ‘병을 치료하는 모든 처방은 자연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약관을 우리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마존의 인디오, 예전의 사라센인들과 그들이 프랑크족이라 불렀던 독일 등 유럽의 백인 사회에서도 통용되었던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을 일군 서양의 주류 사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역사를 바꾼 업적’으로 평가하는 아스피린도 실은 버드나무 추출물인 살리실산을 가공한 것이고, 인류를 구원한 항생제 페니실린도 플래밍이 우연히 곰팡이를 살피다가 찾아낸 것이지요. 동서양의 의약이 발원과 발상은 흡사했다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그 발상을 치료에 적용하기 위한 경로는 전혀 달랐고, 서로가 다른 길을 걸었던 탓에 결과도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나고 말았지만, 자연이라는 거대한 유기체는 그 안에 병과 약을 함께 갖고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만은 다르지 않았던 셈이지요.    베일 속 ‘비전(秘傳)’의 한의학 이후  그렇다고 제가 한의학 예찬론자는 아닙니다. 저는 의학을 볼 때 먼저 과학적 효과와 공공성에 주목하는 편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는 한의학은 확실히 우리의 문명 체계가 작동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수많은 목숨을 살렸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약전이 한의사마다 제각각이고, 모든 약제와 성분 배합이 아직도 ‘비전(秘傳)’이라는 모호함 속에 감춰져 있어 애매하기 짝이 없으며, 그 모호성을 얄팍한 상술로 이용해 왔던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일부에서는 한의학의 표준화를 외치기도 하지만 많은 한의사들이 참여를 꺼리고 있습니다. 이유야 많겠지요. 그게 가능한 일이냐는 회의론도 있을 것이고, 총대는 누가 멜 것이냐는 현실론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의학도 ‘모호’와 ‘애매’의 베일을 벗고 상찬과 비판이 모두 가능한 공론의 장으로 나설 때라는 게 저의 믿음입니다.  예전, 시골 텃밭에 흔했던 당귀를 예로 들어보지요. 전래되는 한의서에 당귀는 ‘심한 기침으로 기(氣)가 위로 솟구치는 증상, 학질, 피부가 오싹오싹한 증상, 유산, 모든 종기나 부스럼, 금창 등에 끓여서 즙을 마신다’, ‘속을 따뜻하게 하고, 통증을 멎게하며, 어혈을 제거한다. 또한 풍사가 침범해 땀이 나지 않거나 습사로 저린 증상, 독한 사기가 침범한 증상, 몸이 차고 허한 증상을 치료하며 오장을 보하고 살집을 좋게 한다’, ‘구토를 멎게 하고 피로로 인한 쇠약, 한열왕래, 설사, 복통, 치통, 부인의 요통과 자궁출혈을 치료하며, 모든 허약한 증상을 치료한다’, ‘모든 풍병과 혈병을 치료하고, 모든 허약을 보충하며, 어혈을 제거하고, 새로운 피가 생성되게 하며, 위와 장이 차가운 것을 치료한다’ 등등 효험을 한, 두 가지로 정리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이런 식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당귀의 어떤 성분이, 어디에, 어떻게 작용하고, 독성이나 부작용은 무엇이며, 그랬더니 치료율은 얼마나 되더라는, 이른바 서양 의학이 말하는 엄정한 임상시험의 결과가 함께 제시되어야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도대체 한방에서 말하는 기(氣)란 무엇인가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의사나 한의학자 등이 이런 문제를 모를 리 없지만 이런 경로를 밟아 약리성을 규명하는 문제는 여전히 지지부진합니다.     ‘의약 혁명’으로 각인된 ‘산토닌’  물론, 현대 의약도 이런 냉철한 비판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아직도 효능은 과대포장하고, 부작용이나 독성은 한사코 축소하거나 감추려는 약제도 적지 않고, 의사들 중에는 자기가 아는 치료법만을 고집해 다른 영역의 치료법을 백안시하는 못된 버릇을 고질병처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튼, 자연에서 모든 치료법을 구하려 했던 이런 노력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자생하는 시나쑥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해 만든 ‘추억의 구충제 산토닌’으로 이어집니다.  아침을 거른 채 학교에 가 선생님으로부터 이 산토닌을 받아먹은 아이들이 “어지럽다”며 마치 외꽃처럼 노랗게 시들거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낼은 회충약 먹는 날이니 밥 먹지 말고 와라. 대신 오전수업만 할테니, 절대 뭐 먹으면 안 돼”  속내 모르는 아이들은 그 ‘오전수업’에 현혹돼 일제히 ‘와’하고는 책보를 싸서 교실을 나섰는데, 지금처럼 배에 기름이 잔뜩 낀 것도 아니고, 먹는 게 너무 많아 항상 배가 더부룩한 터라 한 끼 정도 굶어도 티도 안 나는 때와 달랐습니다. 요즘 애들은 “그게 뭐지.”라고 할 그 밥냄새만 맡아도 회가 동하던 배고픈 시절, 막상 자고 나 아침을 거르자니 헛헛한 공복감을 이기기 어려워 몰래 감자나 고구마로 얼요기를 하고 학교에 간 놈들이 태반이었지요. 선생님이 정말 아무 것도 안 먹었냐고 물으면 “밥은 안 먹었다”며 얼버무리던 아이들의 겸연쩍어 하던 얼굴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한 끼 밥을 거른 건 일도 아닙니다. 사단은 산토닌을 받아먹은 뒤에 벌어졌으니까요. 마치 분필 가루에 설탕을 넣고 버무린 듯 퍽퍽한 산토닌을 씹어 삼킨 뒤 한식경쯤 지나면 아이들이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축축 늘어지기 시작하지요. 끼니조차 거른 뱃속에서 지렁이 같은 회충 무리가 약에 취해 마치 오뉴월 무논에서 악머구리 들끓듯 준동을 해대니 가뜩이나 곯아빠진 아이들이 견뎌내지를 못한 것입니다. 어떤 놈은 그냥 책상에 머리를 누인 채 어지럽다며 가라앉고, 어떤 놈은 맨침을 질질 흘리며 배를 감싸쥐고 나뒹굴기도 했습니다.  참,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책상에 머릴 얹고 끙끙대던 한 여자애의 목구멍을 타고 ‘약 먹은’ 회충이 밀고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선생님이 들쳐업고 교무실로 달려갔는데, 교무실에 간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냥 나무로 짜맞춘 간이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 오가는 선생님들 죄 한마디씩 해대는 게 면구스러워 “이제 괜찮다”며 털고 나와 다시 교실에서 한나절을 엎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수업이 되지 않는 건 당연하지요. 모두들 시들시들하니 선생님도 “그래. 부대낄테니 가만히 엎드려 있거라”시며 수업을 면해 주었지요. 그렇다고 숙제까지 면한 건 아닙니다. 선생님은 “낼 아침에 똥 눌 때 회충이 몇 마리 나왔는지 세어서 와라”는 엄명을 전합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타는 노을이 붉어서 더 먼 귀갓길이었습니다.    똥 속에서 회충 찾던 시절  다음날, 측간에 걸터앉아 볼 일을 봅니다. 어떨까 싶어 유심히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동 면발 같은 허여멀건 회충이 연방 밀려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놀랍기도 하고, 또 남우세스러워 뭐라고 말도 못한 채 볼일을 본 뒤 선생님에게 대충 마릿수를 보고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길에 동무들끼지 정보를 교환한 터라 아이들 마릿수가 얼추 비슷합니다. 어떤 놈은 ‘여덟 마리’, 어떤 놈은 ‘아홉 마리’ 이런 식이지요. 어디 선생님인들 그게 ‘구라’라는 걸 모르시진 않았을 겁니다. 아니, 똥통 속으로 떨어진 똥을 누가 뒤지며, 안 그렇단들 구린 똥을 헤집으며 누가 징그런 ‘벌거지’ 수를 세겠습니까. 그러니 보고용으로 대충 마릿수를 집계한 것일텐데, 산토닌을 먹여놓고 회충의 마릿수를 세어 보고하라고 한 그 행정적 발상이 더 웃기는 일이지요.  그 시절엔 기생충에 대한 인식이 확실히 부족했습니다. 눈에 안 보이면 괜찮다고 믿는 미개함이 지배했던 때이니까요. 그러니 민물고기를 잡아 대충 씻은 뒤 회로 먹었고, 측간에서 퍼낸 곰삭은 시동(똥의 방언)을 척척 뿌린 밭에 무·배추·상추를 키워 먹었으니 그런 세상을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생충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지요.  그 때는 시동 뿌린 밭에 맨발, 맨손으로 들어가 흙을 일군 뒤 채독(菜毒)이 올라 손발은 물론 얼굴까지 퉁퉁 부어 오른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절박하기도 했지만,나라 꼴이 우스워 누구도 기생충이 무섭다느니,어찌어찌 하면 감염 된다느니 하는 정보를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그러니 동네방네 ‘반공 방첩’을 새기고, 벽이란 벽마다 ‘때려잡자’느니 ‘무찌르자’느니 하는 살벌한 슬로건을 붉게 새겼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현실적 위협인 기생충은 그냥 외면한 것이지요.    구충의 개가는 문명을 바꿨지만  산토닌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그게 구충할 수 있는 기생충은 회충, 촌충, 편충 정도가 고작이어서 정작 무서운 디스토마류나 다른 흡충류에는 듣지도 않았고, 그나마 학생들에게만 줬지 일반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어서 더 오래, 더 치명적으로 기생충에 노출됐을 많은 사람들은 정책 부재의 사각지대에서 수많은 종(種)의 기생충에 뜯어먹히다가 생을 마치기도 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활문화 자체가 기생충에 취약한 면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생활권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수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에 감염돼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전문적인 구충제를 먹거나 기생충 감염을 의심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회 등 생식을 즐기고, 무·배추·상추를 날로 먹으면서도 스스로 충분히 위생적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가 ‘퇴치’ 선언을 했던 결핵이 다시 창궐하고 있듯 기생충에 감염된 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이 병원, 저 약국을 전전하며 엉뚱하게 돈을 뿌리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근거 없이 자신하지 마시고 가족들 기생충 검사부터 해 볼 것을 권합니다. 마치 거대한 댐이 개미 구멍으로 무너지듯 건강도 아주 작고, 소소한 것에서 허물어지니까요.  마침, 어제 발표된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공교롭게도 기생충 감염 치료법을 찾아낸 미국 드류대 캠벨 명예교수와 일본 기타사토대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 등 3명이었습니다. 노벨상 위원회가 앞으로만 내달리는 생리의학 분야의 수많은 공적을 뒤로 하고 어떻게 기생충 연구자에게 상을 줄 생각을 했는지, 참 재밌는 일이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생충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노벨상 수상자의 면면을 보면서 옛적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기억이 새삼스러운 것은 기생충 속에서 살아낸 우리의 삶이 그만큼 절실하고 절박했게 때문일 것입니다.  jeshim@seoul.co.kr
  • “기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 후 재혼 15년 새 6배

    “기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 후 재혼 15년 새 6배

    순종적인 가장이었던 김모(62)씨가 그녀를 만난 건 2010년 여름 등산 모임에서였다. 괄괄한 성격의 아내와 달리 50대 초반의 그녀는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했다. 김씨는 그녀에게 급속도로 끌렸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년 전 이별한 그녀도 김씨에게 호감을 비쳤다. 그렇게 둘은 위험한 관계를 3년가량 지속했다. ‘밀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남편의 잦은 외출을 수상하게 여긴 아내가 결국 불륜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씨는 외려 잘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김씨는 2013년 가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인생을 찾으라”며 응원했다. 평생 어머니의 기에 눌려 온 아버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황혼 이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김씨는 곧바로 그녀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애할 땐 둘도 없이 참했던 그녀가 이기적으로 변했고,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여왕처럼 떠받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녀의 성격에 김씨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바가지는 긁었어도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던 그때가 그리워 전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재결합을 거절당했다. 동거 2년 만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우울증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황혼 이혼을 결심했지만, 행복이 꼭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통해 불행의 요소를 잘라냈지만, 그건 어쩌면 남은 인생에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잘라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혼 전문가들은 특히 고령 남성은 은퇴 후 사회적 관계가 협소하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고, 아내가 없으면 돌봄을 받기 어려워 이혼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4 노인 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는 확연히 다르다.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우울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43.0%였지만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26.9%에 그쳤다. 영양 상태가 양호한 비율도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60.4%에 달한 반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35.8%에 그쳤다. 김혜경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5일 “고령에 이혼한다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돌봐 줄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라면서 “특히 부부가 다투든 화목하게 지내든 배우자가 없어지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사라지는 것과 같아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의 존재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65세 이상 남녀 노인의 ‘이혼 후 재혼’ 건수가 2000년 457건에서 지난해 2689건으로 5배 이상 증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혼 후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2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농의 꿈’을 이뤄 현재 달콤한 인생 2막을 보내는 최모(55)씨가 그런 경우다. 최씨는 아내와 성격,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내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은 불교 신자였다. 아내는 주말마다 교회에 가기 바빴고 제사 때 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씨가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부부는 2012년 갈라섰다. 최씨는 직장인인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제외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애초에 귀농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이들은 전 아내와 함께 살지만 틈나는 대로 연락해 관계도 회복했다. 최씨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니까 이웃 주민들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반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혼한 50대 여성과 교제를 하면서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수명은 길어지고 자식들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시대에 배우자는 돌봄의 중요한 주체가 된다”며 “노년 이후 자신의 삶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75세 이후엔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신중하게 고려한 후 황혼 이혼 결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기 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후 재혼 15년새 6배

    “기 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후 재혼 15년새 6배

    순종적인 가장이었던 김모(62)씨가 그녀를 만난 건 2010년 여름 등산 모임에서였다. 괄괄한 성격의 아내와 달리 50대 초반의 그녀는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했다. 김씨는 그녀에게 급속도로 끌렸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년 전 이별한 그녀도 김씨에게 호감을 비쳤다. 그렇게 둘은 위험한 관계를 3년가량 지속했다. ‘밀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남편의 잦은 외출을 수상하게 여긴 아내가 결국 불륜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씨는 외려 잘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김씨는 2013년 가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인생을 찾으라”며 응원했다. 평생 어머니의 기에 눌려 온 아버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황혼 이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김씨는 곧바로 그녀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애할 땐 둘도 없이 참했던 그녀가 이기적으로 변했고,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여왕처럼 떠받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녀의 성격에 김씨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바가지는 긁었어도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던 그때가 그리워 전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재결합을 거절당했다. 동거 2년 만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우울증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황혼 이혼을 결심했지만, 행복이 꼭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통해 불행의 요소를 잘라냈지만, 그건 어쩌면 남은 인생에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잘라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혼 전문가들은 특히 고령 남성은 은퇴 후 사회적 관계가 협소하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고, 아내가 없으면 돌봄을 받기 어려워 이혼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4 노인 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는 확연히 다르다.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우울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43.0%였지만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26.9%에 그쳤다. 영양 상태가 양호한 비율도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60.4%에 달한 반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35.8%에 그쳤다. 김혜경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5일 “고령에 이혼한다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돌봐 줄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라면서 “특히 부부가 다투든 화목하게 지내든 배우자가 없어지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사라지는 것과 같아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의 존재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65세 이상 남녀 노인의 ‘이혼 후 재혼’ 건수가 2000년 457건에서 지난해 2689건으로 5배 이상 증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혼 후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2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농의 꿈’을 이뤄 현재 달콤한 인생 2막을 보내는 최모(55)씨가 그런 경우다. 최씨는 아내와 성격,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내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은 불교 신자였다. 아내는 주말마다 교회에 가기 바빴고 제사 때 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씨가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부부는 2012년 갈라섰다. 최씨는 직장인인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제외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애초에 귀농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이들은 전 아내와 함께 살지만 틈나는 대로 연락해 관계도 회복했다. 최씨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니까 이웃 주민들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반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혼한 50대 여성과 교제를 하면서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수명은 길어지고 자식들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시대에 배우자는 돌봄의 중요한 주체가 된다”며 “노년 이후 자신의 삶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75세 이후엔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신중하게 고려한 후 황혼 이혼 결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대륙의 명절’ 이모저모…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들

    ‘대륙의 명절’ 이모저모…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들

    중국 최대 명절인 국경절이 절반 이상 지나간 가운데, 여전히 중국 전역은 명절을 맞아 여행 중인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한국에서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 쓰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인파가 이동하는 중국 최대의 명절에는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다양한 풍경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지시간으로 3일, 국경절 3일차에 쓰촨성 청두시 두장옌시(市)에서 포착된 사진 수 장은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산 속에 자리잡은 관광명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강을 가로지르는 수 십 m 길이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 위로 관광객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은 물론이거니와, 좁지 않은 다리의 폭을 가득 채운 사람들 탓에 다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는 어린아이 한 명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소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관광객들의 표정이 매우 밝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관광지에는 ‘돈다발’이 가득이다. 허난성 뤄양시의 한 절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돈을 던지고 소원을 비는 ‘소원 연못’이 있는데, 명절을 맞아 갑자기 늘어난 관광객 탓에 연못 내부에는 지폐와 동전이 한가득 차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연못에 던진 지폐들은 연못 뿐만 아니라 주변 돌 사이에서 잔뜩 끼어 있고, 그 양이 매우 많아 연못에 사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한편 현지 언론은 이번 국경절 기간 동안 6억 4000만 명이 대이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했으며, 한국관광공사는 한국을 찾는 유커가 전년 대비 30% 증가한 2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World 특파원 블로그] 가도 가도 인해전술 문명의 흔적은 실종… 中 황금연휴를 견디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3일 오전 6시 베이징 근교 유서 깊은 사찰 훙뤄쓰(紅螺寺)를 향해 출발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소설 ‘백세노승의 미인담’의 무대가 됐던 절이다. 연휴 중간에 낀 날을 골라 새벽부터 서둘러 중국인이 별로 찾지 않는 곳을 찾는다면 혼잡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버스가 간선도로에 들어서자 1분에 50m씩 움직였다. 버스 기사는 “바퀴가 움직이면 막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6억명이 나서는 국경절 황금연휴(10월 1~7일) 관광길에 끼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했다. 한국 등으로 빠져나간 해외파 유커(遊客·관광객) 400만명은 국내파 유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1~3일 베이징을 찾은 중국인만 600만명이다. 하루 8만명으로 제한하는 구궁(古宮)박물원(자금성) 입장권은 2시간 만에 동났다. 베이징 후퉁(胡同·전통골목) 거리인 난뤄구샹은 폭이 10m에 길이가 800m에 불과한데 10만명이 몰렸다. 신년맞이 행사 때 36명이 깔려 죽는 대형 참사를 빚은 상하이시는 시내 주요 관광지의 여행객 밀집도를 알려주는 웨이신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배포했다. 관영 인터넷 언론 펑파이는 가장 붐비는 여행지 10곳의 시간대별 밀집도를 공개해 관광객 분산에 나섰다. 인파보다 더 큰 문제는 ‘비문명 관광객’의 꼴불견이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팠다는 시안의 화칭츠(??池)를 찾은 남성들은 관리원들의 저지를 뚫고 양귀비 동상에 올라가 가슴을 만지며 인증샷을 찍었다. 시안 시후(西湖)의 자원봉사자 20명이 단 한 시간 동안 모은 담배꽁초는 3500개에 이르렀다. 구궁박물원은 전통 구리항아리에 하트 모양을 그려 넣은 연인 등 비문명 블랙리스트 관광객 2500명의 출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6시간 만에 도착한 훙뤄쓰. 경내는 물론 둘레길도 인산인해였다. 5년째 이 절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한 아주머니는 “쓰레기 더미를 지고 오늘 하루에만 10번이나 이 산을 오르내렸다”고 말했다. 중국의 10월 황금연휴는 인구 대국이 연출하는 한 편의 ‘인해전술 드라마’였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덤프트럭 추돌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아찔’

    덤프트럭 추돌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아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들’ 덤프트럭 추돌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행인들의 영상이 화제다. 4일(현지시간) 영국 동영상 공유사이트 ‘라이브릭’(liveleak.com)에 게재된 영상에는 지난 3일 러시아 옴스크주(州)의 주도 옴스크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순간이 담겨 있다. 외곽의 왕복 4차선 도로 위. 두 명의 행인이 주황색 덤프트럭이 다가오는 도로 위를 횡단한다. 행인들로 인해 급정거한 덤프트럭 뒤를 뒤쫓아오던 덤프트럭이 들이박는다. 추돌로 인해 뒤따르던 트럭 앞부분이 부서지며 행인들을 덮친다. 하지만 행인들은 가까스로 트럭을 피하고 트럭은 아슬아슬하게 행인들 바로 앞에서 멈춰 선다. 운 좋게도 사고를 면한 행인 중 한 여성이 반대편 도로에 쓰러져 있는 행인을 살피는 사이, 앞 덤프트럭 운전자가 다리를 절며 뛰어와 트럭에 있는 운전사를 구조한다. 한편 하마터면 행인들 덮칠 뻔한 큰 사고 임에도 불구 이번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영상= RoadCams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5] 불국사에 인공 산 쌓은 이유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5] 불국사에 인공 산 쌓은 이유

     볼 것 많은 불국사에서 관음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마당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 대웅전과 무설전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나타나는 작은 전각이 관음전이다.  우리 절집을 두고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려 지은 것이 특징라고도 한다. 그런데 불국사는 전체적으로 밋밋한 오르막에 지어졌지만 관음전에 이르면 갑자기 지형이 산처럼 치솟는다. 관음전 계단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라면 오르기가 망설여질 만큼 매우 가파르다. 한마디로 높이 솟은 산을 상징하려 땅을 돋운 흔적이 역력하다. 급격한 계단의 기울기 또한 의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기는 한국의 ‘3대 관음성지’는 모두 섬이나 바닷가의 산처런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이 모두 그렇다. ‘4대 관음성지’로 여수 향일암을 추가하면 입지의 공통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개 보살은 진리를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지만, 관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무한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베푸는 존재다. 절대적 자비심으로 중생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권능을 실행하는 존재다.  관음신앙은 대승불교의 많은 경전에 담겨있다. ‘화엄경’의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의 흰꽃이 만발한 산에 머물면서 사랑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법화경’의 관음보살은 마음깊이 그 이름을 간직하고 염불하면 큰어떤 어려움에서도 능히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아미타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보살이다. 아미타불의 뜻을 받들어 중생을 보살피고 극락정토에 왕생하도록 인도한다. ‘능엄경’의 관음보살은 ‘법화경’에 나오는 현실에서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는 존재로 거의 같은 권능을 갖고 있다.  불국사는 바닷가 아닌 내륙에 자리잡고 있지만 관음전은 ‘화엄경’에 나타난 관음보살의 상주처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려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 가장 낮은 곳의 한미한 중생들도 위안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진정한 불국(佛國)일 수 없다는 의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관음전은 교과서에 나오는 문화재가 지천인 불국사에서 눈에 띄는 존재일 수 없다. 더구나 관음전과 내부의 관음보살상은 1973년 복원된 것이니 오래 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관음신앙의 상징성을 살린 건축의 가치는 지금보다는 더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노비 비석부터 천연기념물 숲까지… 옛이야기 따라 도는 전남 함평 한 바퀴

    노비 비석부터 천연기념물 숲까지… 옛이야기 따라 도는 전남 함평 한 바퀴

    시골 어느 마을이건 옛이야기 한 자락 전해오지 않는 곳은 없을 겁니다. 대개 이야기의 얼개나 결말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전남 함평은 좀 다르더군요. 마을 곳곳마다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많던지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습속으로 이어지고, 이야기 담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을도 있었습니다. 함평은 그렇게 전설 따라 돌아야 제맛인 듯합니다. 노비에게 제를 올린다? 해보면 모평마을을 먼저 찾는다. 함평 북쪽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가자는 뜻이다. 파평 윤씨 집성촌인 마을에 들면 수벽사가 먼저 객을 맞는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은 고려 장수 윤관(1040∼1111)을 모신 사당이다. 그 옆 제각에는 열녀비가 있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다 목숨을 잃은 신천 강씨를 기리는 비다. 더 흥미로운 건 제각 옆의 이끼 낀 비석이다. 키 작고 볼품도 없지만 사연은 절절하다. 신천 강씨 부부가 죽고 어린 아들만 남자 충노(忠奴) 도생과 충비(忠婢) 사월 부부는 주인의 아들을 보살피고 키워 과거급제까지 시켰다. 아들은 노비 부부의 비를 세우라 유언을 남겼고,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여태껏 노비에게 제를 올려주고 있다고 한다. 모평마을은 한때 고택촌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함평 하면 모평마을을 연상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소 적막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도 둘러볼 곳은 여전히 많다. 천년 세월을 넘어선 안샘과 산비탈에 고즈넉하게 터를 잡은 고택 영양재, 귀령재 등이 마을의 명물. 해보천을 따라 인공방풍림도 조성돼 있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이 군락을 이룬 숲이다. 저물녘이면 해보천 위로 물안개가 흐르고 늙은 나무들 사이로 해가 진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굽어보는 모습도 멋들어지다. 영양재에 오르면 저만치 해보천이 반짝이고 마을 숲과 어우러진 임곡정이 도드라진다. 조선시대 천석꾼의 집이었다는 김오열 가옥과 파평 윤씨 제실인 임천정사도 멋스럽다. 영양재 옆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마을 뒤를 돌아가는 숲치고는 제법 깊다. 오죽(烏竹)군락지와 야생죽로차밭, 편백나무, 왕대나무, 조릿대 숲을 줄줄이 지나 마을 뒤편 정자로 이어진다. 천년간 마르지 않은 샘! 마을에서 가장 이름난 집은 모평헌(牟平軒)이다. 바닷물에 7년 동안 담근 후 15년 동안 건조시킨 소나무로 지었다는데, 견뎌낸 세월이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집 앞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천년샘물’ 안샘이 있다. 옛 관아의 우물로 사용됐던 샘인데, 조성된 지 10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여태 한번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물은 임천산의 대나무와 야생차 수액이 흘러들어 물맛 좋기로 소문 났다. 모평마을에서 밀재가 멀지 않다. 영광과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로, 근동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새벽녘이면 옅은 안개와 어우러져 인상적인 해돋이 장면이 펼쳐진다. 밀재휴게소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용천사도 가깝다. 가을이면 꽃무릇이 무리지어 피는 절집이다. 지금 꽃무릇은 끝물이고 맨드라미 등 가을꽃들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대전리 수문마을로 넘어간다. 함평만에 접한 갯마을로 일년에 한 번 열어보는 물항아리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들머리는 ‘옷밥골재’다. 마을 할머니가 일러주는 고개의 유래가 기막히다. “여그가 땅도 좋고 물도 걸어. 긍께 숭년(흉년) 걱정이 없고 옷도 밥도 절로 난다 그말이여.” 이런 유래를 한자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니 식의동(食衣洞)이란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 되고 만다. 항아리는 고개 넘어 파출소 앞에 묻혀 있다. 각각 상촌, 중촌, 하촌이라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물항아리가 묻혀 있다. 액운을 막기 위한 조치인데, 사연은 이렇다. ‘불맥이제’ 유래는… 옛날 한 스님이 적당한 절터를 찾다 옷밥골재 아래 펼쳐진 마을을 보게 됐다. 첫눈에 명당 자리를 알아본 스님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으나 곧 앞산 자락에 화귀(火鬼)가 서려 있는 걸 확인하고는 탄식하며 돌아가려 했다. 이때 마을사람들이 스님에게 화를 막을 방법을 물었고, 스님은 “산마루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바닷물과 우물물을 반반씩 넣은 뒤 무덤처럼 해두었다가 불이 나거든 열어 보라”고 일러줬다. 주민들은 스님의 주문대로 항아리 세 개를 묻고 물을 채운 뒤 일년을 기다렸다가 매년 2월 초하루에 뚜껑을 열었다. 이게 ‘불맥이제’의 시작이다. 해마다 같은 날 같은 양의 물을 넣어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면 항아리마다 물의 높낮이가 다르다고 한다. 이때 수위가 가장 낮은 마을이 그해 각별히 조심한다는 의미에서 ‘불맥이’를 연다는 것이다. 이 습속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천연기념물에 담긴 이야기도 전해온다. 대동면 향교리에 있는 ‘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108호다. 숲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향교리는 이름 그대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자 대동면 소재지다. 왕을 모실 만한 명당터라 알려져 욕심 내는 이들이 많았으나 공자를 모시는 향교가 앉아야 지기(地氣)에 맞다 해서 향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한데 향교터 남쪽의 신흥동 뒷산이 화국형(火局形)인 것이 문제였다. 풍수사들은 화국을 누르려면 수국(水局)을 만들어야 한다며 향교와 화산 사이에 숲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일대에 팽나무, 느티나무 등 수림 조성에 적합한 나무가 많아 이를 향교 앞에 옮겨 심었다. 이처럼 길가나 도로변에 줄처럼 길게 심어져 가로수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줄나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줄나무는 무안 청천리 줄나무와 함평 등 두 곳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도 향교와 신흥동 사이 300여m에 걸쳐 40여 그루의 늙은 나무가 남아 있다. 숲그늘이 제법 깊어 쉬어가기 딱 좋다. 효녀전설 빠지면 아쉽지~ 이 밖에 대동면 덕산리의 수호신인 ‘아차동 미륵할머니’, 물레방앗간 집 딸 돈내가 마을과 부모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나산면 ‘돈내보’, 효자의 전설이 깃든 신광면 ‘장산들 백비’ 등도 묶어 돌아볼 만하다. 특별한 전설은 없지만 고막천석교(보물 1372호)는 자체로 볼거리다. 고려 때 축조된 다리로 돌을 정교하게 짜맞춘 형태가 퍽 인상적이다. 학교면 고막리에 있다. 저물녘 풍경은 돌머리(石頭) 해변에서 맞는다. 주민들 표현처럼 ‘기가 맥혀 불’ 정도의 해넘이 장면과 마주할 수 있다. 이름이 독특하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육지의 끝이 바위여서 돌머리란다. 돌부리가 해수명당과 연결돼 있다 해서 광산김씨들이 묏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함평만 너머로는 해제반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글 사진 함평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용천사(322-1822), 모평마을(323-8288) 등을 먼저 보겠다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다소 빠르다. 영광읍내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함평 해보면의 해보교차로까지 간 뒤 옛 24번 국도로 접어들면 모평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공주서천고속도로 함평나들목으로 나와 영광 방향 23번 국도, 838번 지방도 순으로 갈 수도 있다. ▶맛집:나비만큼 유명한 것이 함평 소고기다. 한때 전라도 소값을 쥐락펴락했다는 함평 우시장 덕에 한우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다. 금송식육식당(324-5775), 해보면 문장리의 해월축산한우직판장(324-6692) 등이 이름났다. 읍내 함평시장 주변에 음식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육회비빔밥으로 이름난 초록식당(322-5287) 등 다양한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잘 곳:모평마을 모평헌(323-6078) 등에서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읍내에 샹젤리제호텔(324-1200) 등 모텔들이 밀집해 있다. 손불면 궁산리 일대는 해수찜으로 유명하다.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된 돌과 삼못초 등 약초를 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가열한 후 해수가 든 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한다. 주포해수찜(322-9489), 함평신흥해수찜(322-9487), 신흥해수찜(322-9900) 등이 있다. 오후 5시 이전에 가야 한다.
  • 노비 비석부터 천연기념물 숲까지… 옛이야기 따라 도는 전남 함평 한 바퀴

    노비 비석부터 천연기념물 숲까지… 옛이야기 따라 도는 전남 함평 한 바퀴

    시골 어느 마을이건 옛이야기 한 자락 전해오지 않는 곳은 없을 겁니다. 대개 이야기의 얼개나 결말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전남 함평은 좀 다르더군요. 마을 곳곳마다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많던지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습속으로 이어지고, 이야기 담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을도 있었습니다. 함평은 그렇게 전설 따라 돌아야 제맛인 듯합니다. 해보면 모평마을을 먼저 찾는다. 함평 북쪽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가자는 뜻이다. 파평 윤씨 집성촌인 마을에 들면 수벽사가 먼저 객을 맞는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은 고려 장수 윤관(1040∼1111)을 모신 사당이다. 그 옆 제각에는 열녀비가 있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왜병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으려다 목숨을 잃은 신천 강씨를 기리는 비다. 더 흥미로운 건 제각 옆의 이끼 낀 비석이다. 키 작고 볼품도 없지만 사연은 절절하다. 신천 강씨 부부가 죽고 어린 아들만 남자 충노(忠奴) 도생과 충비(忠婢) 사월 부부는 주인의 아들을 보살피고 키워 과거급제까지 시켰다. 아들은 노비 부부의 비를 세우라 유언을 남겼고, 파평 윤씨 문중에서는 여태껏 노비에게 제를 올려주고 있다고 한다. 모평마을은 한때 고택촌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함평 하면 모평마을을 연상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소 적막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도 둘러볼 곳은 여전히 많다. 천년 세월을 넘어선 안샘과 산비탈에 고즈넉하게 터를 잡은 고택 영양재, 귀령재 등이 마을의 명물. 해보천을 따라 인공방풍림도 조성돼 있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왕버들이 군락을 이룬 숲이다. 저물녘이면 해보천 위로 물안개가 흐르고 늙은 나무들 사이로 해가 진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굽어보는 모습도 멋들어지다. 영양재에 오르면 저만치 해보천이 반짝이고 마을 숲과 어우러진 임곡정이 도드라진다. 조선시대 천석꾼의 집이었다는 김오열 가옥과 파평 윤씨 제실인 임천정사도 멋스럽다. 영양재 옆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마을 뒤를 돌아가는 숲치고는 제법 깊다. 오죽(烏竹)군락지와 야생죽로차밭, 편백나무, 왕대나무, 조릿대 숲을 줄줄이 지나 마을 뒤편 정자로 이어진다. 마을에서 가장 이름난 집은 모평헌(牟平軒)이다. 바닷물에 7년 동안 담근 후 15년 동안 건조시킨 소나무로 지었다는데, 견뎌낸 세월이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집 앞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천년샘물’ 안샘이 있다. 옛 관아의 우물로 사용됐던 샘인데, 조성된 지 10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여태 한번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물은 임천산의 대나무와 야생차 수액이 흘러들어 물맛 좋기로 소문 났다. 모평마을에서 밀재가 멀지 않다. 영광과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로, 근동의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새벽녘이면 옅은 안개와 어우러져 인상적인 해돋이 장면이 펼쳐진다. 밀재휴게소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용천사도 가깝다. 가을이면 꽃무릇이 무리지어 피는 절집이다. 지금 꽃무릇은 끝물이고 맨드라미 등 가을꽃들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대전리 수문마을로 넘어간다. 함평만에 접한 갯마을로 일년에 한 번 열어보는 물항아리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들머리는 ‘옷밥골재’다. 마을 할머니가 일러주는 고개의 유래가 기막히다. “여그가 땅도 좋고 물도 걸어. 긍께 숭년(흉년) 걱정이 없고 옷도 밥도 절로 난다 그말이여.” 이런 유래를 한자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니 식의동(食衣洞)이란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 되고 만다. 항아리는 고개 넘어 파출소 앞에 묻혀 있다. 각각 상촌, 중촌, 하촌이라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물항아리가 묻혀 있다. 액운을 막기 위한 조치인데, 사연은 이렇다. 옛날 한 스님이 적당한 절터를 찾다 옷밥골재 아래 펼쳐진 마을을 보게 됐다. 첫눈에 명당 자리를 알아본 스님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으나 곧 앞산 자락에 화귀(火鬼)가 서려 있는 걸 확인하고는 탄식하며 돌아가려 했다. 이때 마을사람들이 스님에게 화를 막을 방법을 물었고, 스님은 “산마루에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바닷물과 우물물을 반반씩 넣은 뒤 무덤처럼 해두었다가 불이 나거든 열어 보라”고 일러줬다. 주민들은 스님의 주문대로 항아리 세 개를 묻고 물을 채운 뒤 일년을 기다렸다가 매년 2월 초하루에 뚜껑을 열었다. 이게 ‘불맥이제’의 시작이다. 해마다 같은 날 같은 양의 물을 넣어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면 항아리마다 물의 높낮이가 다르다고 한다. 이때 수위가 가장 낮은 마을이 그해 각별히 조심한다는 의미에서 ‘불맥이’를 연다는 것이다. 이 습속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천연기념물에 담긴 이야기도 전해온다. 대동면 향교리에 있는 ‘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 숲’으로 천연기념물 제108호다. 숲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향교리는 이름 그대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자 대동면 소재지다. 왕을 모실 만한 명당터라 알려져 욕심 내는 이들이 많았으나 공자를 모시는 향교가 앉아야 지기(地氣)에 맞다 해서 향교가 들어섰다고 한다. 한데 향교터 남쪽의 신흥동 뒷산이 화국형(火局形)인 것이 문제였다. 풍수사들은 화국을 누르려면 수국(水局)을 만들어야 한다며 향교와 화산 사이에 숲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일대에 팽나무, 느티나무 등 수림 조성에 적합한 나무가 많아 이를 향교 앞에 옮겨 심었다. 이처럼 길가나 도로변에 줄처럼 길게 심어져 가로수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줄나무라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줄나무는 무안 청천리 줄나무와 함평 등 두 곳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도 향교와 신흥동 사이 300여m에 걸쳐 40여 그루의 늙은 나무가 남아 있다. 숲그늘이 제법 깊어 쉬어가기 딱 좋다. 이 밖에 대동면 덕산리의 수호신인 ‘아차동 미륵할머니’, 물레방앗간 집 딸 돈내가 마을과 부모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나산면 ‘돈내보’, 효자의 전설이 깃든 신광면 ‘장산들 백비’ 등도 묶어 돌아볼 만하다. 특별한 전설은 없지만 고막천석교(보물 1372호)는 자체로 볼거리다. 고려 때 축조된 다리로 돌을 정교하게 짜맞춘 형태가 퍽 인상적이다. 학교면 고막리에 있다. 저물녘 풍경은 돌머리(石頭) 해변에서 맞는다. 주민들 표현처럼 ‘기가 맥혀 불’ 정도의 해넘이 장면과 마주할 수 있다. 이름이 독특하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육지의 끝이 바위여서 돌머리란다. 돌부리가 해수명당과 연결돼 있다 해서 광산김씨들이 묏자리를 잡은 곳이기도 하다. 함평만 너머로는 해제반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글 사진 함평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61) ▶가는 길:용천사(322-1822), 모평마을(323-8288) 등을 먼저 보겠다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다소 빠르다. 영광읍내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함평 해보면의 해보교차로까지 간 뒤 옛 24번 국도로 접어들면 모평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공주서천고속도로 함평나들목으로 나와 영광 방향 23번 국도, 838번 지방도 순으로 갈 수도 있다. ▶맛집:나비만큼 유명한 것이 함평 소고기다. 한때 전라도 소값을 쥐락펴락했다는 함평 우시장 덕에 한우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다. 금송식육식당(324-5775), 해보면 문장리의 해월축산한우직판장(324-6692) 등이 이름났다. 읍내 함평시장 주변에 음식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육회비빔밥으로 이름난 초록식당(322-5287) 등 다양한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잘 곳:모평마을 모평헌(323-6078) 등에서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읍내에 샹젤리제호텔(324-1200) 등 모텔들이 밀집해 있다. 손불면 궁산리 일대는 해수찜으로 유명하다.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된 돌과 삼못초 등 약초를 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가열한 후 해수가 든 탕에 넣어 데워진 물로 찜질한다. 주포해수찜(322-9489), 함평신흥해수찜(322-9487), 신흥해수찜(322-9900) 등이 있다. 오후 5시 이전에 가야 한다.
  •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 구조 밝힌 ‘가난한 수학자’...100년 난제 풀고도 100만弗 거절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 구조 밝힌 ‘가난한 수학자’...100년 난제 풀고도 100만弗 거절

    우주의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수학 난제를 100년 만에 푼 수학자가 화제가 된 것이 지난 2010년이었는데, 이 수학자가 여전히 갖가지 기행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올해로 49살인 그레고리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다. 그는 이른바 밀레니엄 문제를 푼 업적으로 100만 달러 상금의 수여자로 지명되었을 때부터 그 기이한 면모를 드러냈다. 무려 1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상금을 헌신짝 차듯이 뻥 차버렸던 것이다. 이유는 '상 받으러 밖에 나가기 싫다'는 거였다. 한화로 12억 원이나 되는 돈이라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렇다고 12억을 필요없다고 차버린 그 친구가 무슨 재벌이나 억만장자도 아니다. 재벌은커녕, 바퀴벌레 기어다니는 콧구멍만한 아파트에 사는 노총각 수학자이다. 그런데, 그 아파트도 자기 것이 아니다. 교사를 하다가 퇴직한 후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살아가는 노모의 아파트에 얹혀살고 있는 주제인 것이다. -노모 집에 얹혀사는 러시아 49세 페럴만 이런 인물이 12억이나 되는 돈을 받게 된 사연은 무엇이고, 또 그 돈을 뻥 걷어차버린 연유는 또 무엇일까? 먼저, 그에게 12억 원을 주겠다고 인심 후한 결정을 한 주체는 미국의 한 연구소다. 미국의 부호 랜던 클레이가 세운 클레이 수학연구소(CMI)는 2000년 수학 분야에서 이른바 밀레니엄 문제라고 불리는 중요한 미해결 문제 7개를 내걸고, 학력이나 경력도 상관없으니, 누구든 풀기만 하면 한 문제당 100만 달러씩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밀레니엄 문제 중 페렐만이 푼 '푸앵카레 추측'을 제외한 6개 난제는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으니, 당신도 머리에 자신만 있다면 그 문제들에 한번 도전해볼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당신이 그 문제들을 풀지? 초야에 고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그 일곱 문제 중 우리가 사는 이 우주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푸앵카레의 추측’이란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낳은 불세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앙리 푸앵카레(1854-1912)가 1904년에 세상에 툭 내던진 것이었다. 그가 문제를 제기한 이래 100년간 수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 씨름했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 난제 중의 난제였다. 도대체 무슨 문제길래 지구상의 기라성 같은 수학 천재들이 한 세기 동안 끙끙거리면서도 못 풀었단 말인가? 인간 지성의 무기력함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다. 문제는 단 한 줄짜리다. 하지만 그 뜻은 심오하다. 이런 내용이다. "단일연결인 3차원 다양체는 3차원 구와 위상동형이다"라는 것이다. '다양체'란 임의의 점 근처의 공간은 유클리드 공간과 비슷하지만, 다양체의 전체적인 구조는 유클리드 공간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구면은 충분히 가까이에서 보면 평면(2차원 유클리드 공간)처럼 보이지만, 전체는 구면이다. -"단일연결인 3차원 다양체는 3차원 구와 위상동형이다"...'푸앵카레 추측' 이른바 위상 기하학의 얘기인데, 좀더 풀어서 말하면, "어떤 닫힌 3차원 공간에서 모든 폐곡선(닫힌곡선)이 수축되어 한 점이 될 수 있다면, 이 공간은 반드시 3차원 구로 변형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만약 광속의 우주선 꽁무니에 무한 길이로 풀리는 끈을 하나 매달고 전 우주를 헤매고 다닌 후 지구로 귀환했다고 칠 때, 그 꽁무니 끈이 무엇에도 걸리지 않고 모두 회수될 수 있다면 우주선이 헤매다닌 공간은 3차원 구와 같다는 뜻이다. 이런 공간의 우주는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다고 한다. 잘 이해가 안 가면 구면을 생각해보면 된다. 구면은 유한하나 경계가 없다. 개미가 한없이 그 위를 기어가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4차원 시공간은 이보다 2차원 높은 것이기는 하지만, 유한하나 끝이 없는 공간인 것이다. '뫼비우스 띠의 4차원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내용의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해내면 12억 원을 주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페렐만이 증명함으로써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2010년 3월, 밀레니엄 상과 더불어 상금 수여 대상자를 페렐만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페렐만은 수상 소식을 들고 집을 찾아온 기자들을 향해 현관문도 열지 않은 채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외침으로써 상받기를 거부했다. 이 은둔의 천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허름한 아파트 문 밖에 대고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돈을 원치 않는다. 증명이 옳다면 남들의 인정은 불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원래 천재 중에는 괴짜 아닌 사람이 드물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등급을 뛰어넘는 그레고리 페렐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1966년 구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페렐만은 1982년 레닌그라드 중등학교 때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만점으로 금메달을 받았다. 이후 레닌그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수학 및 역학 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페렐만은 러시아 일간신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는 학창 시절 ‘물 위를 걷는 예수’ 같은 성경 속 기적을 수학적으로 풀이하곤 했다고 회상하며, “예수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얼마나 빨리 걸어야 하는지 계산했다. 까다롭긴 했지만 풀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테클로프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그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까지 미국의 여러 대학을 방문, 연구하다, 1995년 스탠퍼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을 포함한 미국 유수 대학들의 교수 영입 요청을 거절하고, 자기가 처음 연구를 시작한 스테클로프 연구소로 돌아갔다. 연구원이던 2003년, 페렐만은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논문을 인터넷에 올린 결과, 국제적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복수의 연구팀이 검증한 결과, 그 증명이 참으로 밝혀지면서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연구팀은 페렐만이 단 3쪽으로 정리한 풀이법을 검증하기 위해 수백 쪽이 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페렐만의 기행은 밀레니엄 상 거부 이전부터 있었다. 200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수학 분야의 노벨 상이라고 불리는 필즈 메달 시상식에도 수상자인 그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불참의 변은 이랬다. "나는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상금이나 상 보다 버섯 따는게 좋아"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집 근처의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갔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부의 지저분하고 허름한 방 2칸짜리 아파트에서 77세의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의 좁은 아파트는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고, 때에 절은 매트리스와 식탁 외에는 가재도구라고는 거의 없으며, 바깥 출입 하는 것을 보기 힘들다고 이웃들이 전한다. 페렐만은 2003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서 해고된 후 현재까지 무직으로 지내며, 수학 연구도 완전히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학은 논의하기에 고통스러운 주제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됐다"는 게 친구들의 전언이지만, 자신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수학계 일부의 알력에 크게 상처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고정적인 직장이 없는 페렐만이 가끔 개인 과외로 버는 많지 않은 돈과 노모의 연금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렐만이 가장 행복해하는 일은 숲속을 거닐며 버섯을 따는 것이라고 한다. 지난 2011년에는 과학자로서는 최고 영예인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 추대를 거부해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은 페렐만은 요즘도 가끔 근교의 숲으로 버섯을 따러 다니는 것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은둔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중세 고행 수도사의 DNA를 지닌 듯 은둔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수학사 속에 괴짜 수학자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초월수 파이(π) 같은 기인 그레고리 페렐만-. 그런 아들을 보는 엄마의 속은 어떨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가 행복하게 그리고 침해받지 않은 고요한 삶을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사설] 수능 변별력 더 떨어뜨릴 영어 절대평가

    교육부가 현재 고교 1학년부터 절대평가로 치르기로 한 수능 영어 성적을 9등급으로 평가한다고 어제 발표했다. 현행 상대평가에서는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이 제공되지만, 절대평가를 도입하면 등급만 표기된다. 1점 차이로 과목 등수가 매겨지던 제도가 등급제로 바뀌니 변별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수능 영어의 절대평가제는 지난해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영어 사교육비 부담을 대폭 경감해야 한다”고 지시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돼 왔다. 절대평가제로 바뀌면 수능 영어는 90점 이상이면 모두 1등급이 된다. 4개까지 틀려도 1등급이다. 올해 9월 모의평가 수준의 난이도라면 절대평가로 바뀐 수능 영어는 상위 23%가 1등급을 받게 된다고 한다. 수능 응시생 60만명 중 약 14만명에 해당한다. 현행 상대평가 9등급제일 때 상위 4%까지가 1등급인데, 지금 3등급 수준의 성적을 받으면 2018학년도부터는 모두 1등급이 된다. 수능시험이 이미 쉽게 출제되고 있는 마당에 영어 절대평가제까지 도입하면 변별력은 더 약화될 것이다. 변별력이 사라지면 우수한 학생이 제대로 실력을 평가받지 못한다. 이런 부작용을 잘 알 텐데도 교육 당국은 마이동풍이다. 학생부 중심의 전형 방식을 정착하기 위한 것이라 하지만 학교별 격차가 있는 현실에서 대학들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가령 우수한 학생을 뽑으려는 대학들로서는 영어 심층면접, 영어논술 등을 통해 변별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수능시험만 잘 쳐도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교육 오지 학생들의 진학 기회를 줄일지 모른다. 교육부는 다른 과목의 절대평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찔끔찔끔 제도를 고칠 게 아니라 차라리 모든 과목을 절대평가하고 대학에 선발자율권을 주는 방안을 체계적으로 연구 검토하는 게 옳다. 절대평가를 한다고 사교육이 줄어든다는 보장도 없다. 영어 사교육은 줄지 몰라도 ‘풍선효과’로 수학, 국어 등의 사교육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대학별 영어시험에 대비한 사교육이 새롭게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영어 사교육을 줄이려면 공교육 현장인 학교에서 영어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잘 가르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게 정도(正道)다. 절대평가제 같은 편법에 의존해서 될 일이 아니다. 결국 사교육도 못 잡고,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하향 평준화된다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게 된다.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저잣거리 포교 10년’ 열린선원장 법현 스님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저잣거리 포교 10년’ 열린선원장 법현 스님

    서울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 2층에는 허름한 불교 선원이 하나 있다. 산속의 고즈넉한 선방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래서 선원이라기보다는 종교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은 채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는 ‘만남의 장소’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는 공간. 2005년 종교계의 이름난 마당발인 태고종 법현 스님이 저잣거리 포교를 시작한다며 이곳에 자리를 틀어 줄곧 지역 주민들과 부대끼며 도심 속 포교원 역할을 해온 곳이다. 지난 12일 개원 10주년을 맞은 열린선원을 찾아 선원장 법현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기자가 찾은 열린선원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이 지역 어른 100여명을 초청해 공양(식사)을 대접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 행사는 어떻게 열게 됐나요. -열린선원 열돌 기념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조계종 적문 스님이 직접 사찰음식을 제공해 어르신들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10년을 맞아 지역 주민들께 식사 한 끼 대접하며 얼굴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열린선원의 신도들이 정성껏 끓인 미역국과 송편을 맛있게 드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합니다. 적문 스님은 원래 사찰음식 전문가로 바로 이 자리에서 사찰음식을 오래 하셨는데 저에게 장소를 물려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제가 그 자리를 담마(法) 요리 장소로 탈바꿈해 놓은 셈이지요. 벌써 10년이 지났군요. →담마를 요리하는 ‘열린선원’이란 어떤 의미를 갖나요. -1990년대 후반 인터넷카페에서 ‘열린 절’을 운영하다가 오프라인 사찰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어, 들어와서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깨달음이 송송 열리게 된다는 뜻을 갖고 있지요. 한자로 덧붙여 보자면 이웃을 즐겁게 한다는 뜻도 되고요. 물론, 이웃은 모두를 뜻합니다. 음식을 잘 먹어야 건강해지는 것처럼 담마를 잘 먹으면 건전해져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다가 괴로움을 영원히 떠나게 되지요. 요즘 말로 하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50년 된 재래시장 안에서 선원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시장은 상인들 입장에선 가게 지키느라 여유가 전혀 없고, 손님은 물건 사서 돌아가기 바쁜 곳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역촌중앙시장은 골목이 좁고 시설이 오래되고 낡아 더 복잡하고 사람들이 자주 엉키는 곳입니다. 평상시 누구도 절이나 스님에겐 관심이 전혀 없기 마련이지요. 처음에는 천도재를 지내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시끄럽다 고함치는 이도 있었고, 기도 시간 겹치지 않게 하라는 목사님, 개종을 약속해 달라는 목사님도 계셨지만 이제는 모두 정답게 지내고 있어요. 문 열고 고함쳤던 그분은 신도가 되어 잘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동네를 다니다 보면 신자 아닌 분들도 거의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10년 동안 정이 들어서지요. 주민들의 복지 사각을 줄이고 보다 행복한 마을로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복지두레위원회라는 단체에, 저도 종교인이 아니라 주민의 일원으로 참여합니다. 차상위 계층이나 어르신, 청소년들을 연결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별도의 복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활동합니다. →스님의 명성과 위상이라면 번듯한 공간에서 포교도 가능할 텐데 굳이 저잣거리로 뛰어든 이유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산속에 있지 말고 저잣거리로 나가 전법활동을 하라는 대승불교 선사들의 말씀을 오래전부터 새기고 살았어요. 비단 그 말씀이 아니더라로 청년시절부터 생활 속 불교를 위해 뭘 할지를 고민해 왔습니다. 저잣거리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언제 깊은 산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집중 수련을 얼마나 해야 열반을 체험하고 견성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선원이라면 불교 신행의 유지가 어렵지 않을까요. -바르게 아는 것을 전제로 한 바른 명상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린선원에서는 아는 불교, 깨닫는 불교를 지향합니다. 누구든 찾아드는 이를 반갑게 맞지만 4개월 과정의 참선문화아카데미를 수료한 이들을 정회원, 나머지를 준회원 불자로 부르지요. 수료하면 정회원이라는 의미에서 불명(계명)을 주는데 불명은 남녀 모두 두 글자로 평등하게 합니다. 수료자들이 복습을 겸해 함께 참선하고 공부하는 ‘마음닦는 수요모임’도 진행하고 있고요. →열린선원에서 한글 법요집을 만들었다는데. 한글법요집이 굳이 필요한가요. -불교의식문이 인도 말과 한문으로 돼 있어 불자들은 물론, 진행 스님들도 뜻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어요. 이것을 개선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한글로 편성하되 원문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우리말, 제대로 된 뜻을 담은 우리말로 구성했고 필요한 경우 법회와 불공 성격에 맞는 경전을 읽도록 했어요. 열린선원의 신도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스님은 차례에 술 대신 차를 올리자는 운동도 벌여 화제가 됐는데. -돌아가신 조상님을 위한 명절 차례는 그 이름에 차(茶)가 들어 있으므로 당연히 차를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차례(茶禮)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종교, 전통에 관계없는 일입니다. 특히 불자라면 불교식 차례를 올리자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급하게 돌아가는 시대에 조금 천천히 차를 올리는 차례는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1990년대부터 삼국유사 등 자료를 근거로 제가 제안해 20여년 운동을 펴왔고 이제 꽤 많은 가정에서 차를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쁜 일이지요. →얼마 전 탈핵과 관련해 강한 입장을 펴 주목받았는데 불교에서 탈핵은 어떤 의미인가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어느 존재라도 다른 존재를 불행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럴 권리도 없고 결과적으로 그 불행이 자기에게도 돌아오게 된다는 게 인과의 법칙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원자력입니다. 불교사상은 원자력 발전을 반대합니다. 불교에는 모든 존재에 무한 사랑을 보내는 자비관(메타바와나)이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게 바로 불교의 소통이고 생태사상입니다. →최근 펴낸 수상집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속 벼슬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많은 출가자들은 중 벼슬이 닭 벼슬보다 훨씬 화려하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제는 그 자리에 걸맞은 마음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봉사하는 정신으로 소임을 맡아야 하고요. 책임은 언제든지 맡을 수 있고, 권한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면 어느 소임이라도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추워도 향기를 팔아서는 아니되지요. →종교계에서 스님은 마당발이란 별명으로 유명한데, 이웃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불교 안에서 먼저 소통, 화합하고 이웃종교에까지 관심을 넓혀야 한다고 봅니다. 2005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세계종교평화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도의 힌두교 대표가 말하더군요. ‘모든 전쟁의 원인은 아가씨 하나 때문이다. 그 아가씨의 이름은 미스언더스탠드(오해)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시사하는 점이 있어요. ‘하나만 아는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는 말처럼 내 종교를 제대로 알려면 이웃종교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이웃종교라는 이름을 쓰는 세계 유일의 나라입니다.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내 종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분쟁지역마다 종교갈등이 자리하는 것을 보면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아 보자, 함께 먹어 보자, 머물러 보자, 부대껴 보자’는 것이 종교 교류의 실질적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린선원의 저잣거리 포교를 통해 스님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게 무엇인가요.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가 제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무엇을 해도 쉽고 재미있게 해서 삶에 유익하게, 내게도 이웃에게도 유익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저의 분야는 모든 삶을 다루는 불교입니다. ‘쉬운 불교 여는 도량, 바른 불교 닦는 도량, 밝은 불교 펴는 도량, 모두 함께 웃는 도량’으로 가꿔 가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선교방편(善敎方便)연구소를 만들어 전법의 방법을 개발하고 전하는 일도 하고 싶고,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경전과 법요의식, 찬불가를 함께 엮은 불교성전을 만들어서 널리 보급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뤄 놓은 것도 없고 수행결과도 보잘것없는 저와 열린선원에 대중들이 정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열심히 수행하도록 지도하고 전법하겠습니다. →새 도량을 꾸밀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열린선원은 선원 안에 화장실도 없어서 시장이 문을 닫는 밤이나 휴무일 때는 옥상의 화장실이나 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써야 해요. 주차장도 없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지요. 신도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환경에서 수행하고 전법할 수 있도록 새 도량을 마련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시장이냐 산속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불편하고 어려운 이들이 많은 곳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시장 주변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도저히 선원 자리를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변두리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찰이나 교회에서 ‘한 평 사기’운동이라는 것을 많이 하지만 저희는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한 뼘 불사’라는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볼까 합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무상(無相) 법현 스님은 교무·기획국장, 총무·교무·사회부장, 교류협력실장, 교무부원장 등 한국불교 태고종단의 주요 소임을 두루 거친 종교계의 소문난 마당발. 2005년부터 서울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에서 저잣거리 포교를 주창하며 열린선원을 운영해 오고 있다. ‘마당발 스님’이란 별명 그대로 종교 간 대화와 협력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스님. 종단협의회 사무국장과 상임이사 등 불교종단 종무행정 활동을 하면서 불교생명윤리협회 집행위원장, kcrp(한국종교인평화회의) 종교간대화위원장을 맡거나 맡아 왔다. 대사회 활동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서울시 에너지살림홍보대사, 국가인권위원회 생명인권포럼위원, 생명존중헌장 제정위원, 한국사찰림연구소 이사 등을 맡아 학술, 사회활동을 하면서 전법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불안정성(엔트로피 증가)원리 연구’, ‘틀림에서 맞음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 ‘불교의 관점에서 본 원자력과 생명, 그리고 평화’ 등 논문과 ‘놀이놀이놀이’, ‘부루나의 노래’,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등의 저서가 있다. 중앙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를 신행과 전법의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오래전부터 레크리에이션 포교로 명성을 떨쳤다. 2001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사무국장 시절 한림대 정무형 교수의 제안을 받아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해 템플스테이를 처음 기획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 [新국토기행] 경남 거제시

    [新국토기행] 경남 거제시

    경남 거제시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면적은 402.26㎢, 해안선 길이는 386.74㎞에 이른다. 해금강을 비롯해 섬과 해안의 기암괴석,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그림 같다. 곳곳에 해수욕장이 있고, 한국전쟁 당시 17만여명의 포로를 수용했던 포로수용소 등 구석구석에 유적지와 관광명소가 있다. 특히 동부면 학동고개에서 노자산 전망대 사이 1475m 구간에 한려수도 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케이블카가 내년 상반기 완공되면 거제도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거제 주변 청정해역은 수산물의 보고다. 사시사철 싱싱한 해산물을 공급한다. 세계 3대 조선소 가운데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있는 조선산업 중심지다. 거제도는 1971년 통영시와의 사이에 거제대교가 놓여 육지와 처음 다리로 이어졌다. 1999년 신거제대교에 이어 2010년 부산 가덕도와 해저터널·다리로 잇는 거가대교가 개통됐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한려해상권의 거점 해양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시민 평균 연령이 36.2세, 해마다 5000여명씩 인구가 늘어나는 젊고 성장하는 도시다. [볼거리] ●바다의 금강산 명승 제2호 ‘해금강’ 거제 관광을 대표하는 명소로 남부면 해금강마을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해상에 있는 무인도다. 원래 이름은 갈도(葛島)다. 생김새가 칡뿌리가 뻗어 내린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경관이 빼어나 바다의 금강산이란 뜻으로 해금강이라 불린다. 1971년 명승 제2호로 지정돼 ‘거제 해금강’으로 등재됐다. 수억년에 걸쳐 파도와 바람에 씻긴 바위섬의 환상적인 비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사자바위, 미륵바위, 촛대바위, 신랑바위, 신부바위, 해골바위 등 천태만상의 기묘한 바위가 깎아지른 듯 수십m 높이로 절벽을 이뤄 섬을 둘러싸고 있다. 열십자 모양으로 뚫린 십자동굴 사이로 배가 드나든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서불을 갈도에 보냈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 설화도 전한다. ●바다 풍경이 한눈에 ‘바람의 언덕&신선대’ 남부면 갈곶리 도장포마을 북쪽 해안에 있는 언덕으로 사시사철 바닷바람이 분다. 언덕이 바다 쪽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 앞이 탁 트여 있다. 언덕에서 보면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지명은 띠밭늘이었다. 2002년 바람의 언덕으로 불리며 여러 드라마 촬영을 통해 알려졌다. 신선대는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길목 입구인 남쪽 해변에 있는 기암괴석 지역이다. 신선이 내려와 풍류를 즐겼다고 할 정도로 해안 경관이 절경이다.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 기암괴석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이 장관이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안 따라 굴러다니는 흑진주 ‘몽돌해변’ 흑진주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 몽돌이 덮인 몽돌밭 해변이 1.2㎞에 걸쳐 있다. 몽돌밭은 폭 50m로, 면적은 3만㎢에 이른다. 바닷물이 밀려들고 나가면서 몽돌의 ‘자글자글’ 굴리는 소리는 우리나라 자연 소리 100선에 선정될 만큼 아름답고 감미롭다. 바닷물이 맑고 깨끗해 가족 피서지로도 알맞다. 땅 모양이 학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학동으로 불리게 됐다. 해안을 따라 3㎞에 걸쳐 천연기념물 제233호인 동백림이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팔색조 번식지로도 유명하다. ●740여종의 식물과 공룡 흔적 간직한 ‘외도’ 해상식물공원이 조성된 개인 소유 섬으로 거제도에서 4㎞ 떨어져 있다. 해안선 길이는 2.3㎞에 이른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외딴섬을 이창호(2003년 작고)·최호숙 부부가 사들여 식물공원을 조성했다. 1976년 관광농원 허가를 받은 뒤 30여년에 걸쳐 개간과 조경을 해 1995년 외도해상농원을 개장했다. 희귀 아열대 식물을 비롯해 740여종의 식물을 정갈하게 가꿔 놓은 식물원과 전망대, 조각공원 등이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조성돼 있어 이국적 정취가 느껴진다. 개발되지 않은 섬 동쪽 끝에 공룡굴과 공룡바위, 공룡발자국화석이 있다. 외도 관광은 오전 8시~오후 5시(여름철은 6시)이며 숙식은 할 수 없다. 장승포동이나 일운면 구조라, 동부면 학동리, 남부면 갈곶리, 일운면 와현리 등의 선착장에서 해상관광유람선이 다닌다. ●섬 전체가 동백나무로 뒤덮인 ‘지심도’ 섬 전체가 동백나무 숲이라 동백섬으로도 불린다. 일운면 지세포리에 딸린 섬으로 지세포에서 동쪽으로 6㎞ 떨어져 있다. 면적은 0.356㎢, 해안선 길이는 3.7㎞다. 섬 모양이 군함처럼 생겼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97m쯤 된다. 조선 현종 때 주민 15가구가 이주해 살기 시작한 뒤 현재 10여 가구, 20여명이 거주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1개 중대가 광복 직전까지 주둔했던 군 요새였다. 섬을 덮은 동백나무는 12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 꽃이 핀다. 동백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3월이다.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20분쯤 걸린다. 섬 안에 민박집도 있다. ●닭과 용을 닮은 해발 566m 명산 ‘계룡산’ 거제 본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명산이다. 해발 566m로 꼭대기에는 의상대사가 절을 지었다는 의상대 터가 있다. 산 형상이 닭과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88년(숙종 14년)에 현령 김대기가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을 개설했다. 이를 기리는 김현령치비가 서문고개에 있다. 계룡산 아래에 6·25전쟁 때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포로수용소 건물 돌담 벽이 보존돼 있다. 정상에 서면 거제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부산 가덕도와 태종대도 볼 수 있다. 맑은 날에는 대마도까지 보인다. 산행코스 가운데 계룡사에서 계곡을 따라 송신탑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해 힘들다. 능선을 따라 불이문바위, 장군바위, 거북바위, 장기판 바위 등 기암괴석이 줄지어 있다. 가을 억새도 아름답다. ●대통령이 남긴 발자취 ‘김영삼 대통령 생가’ 장목면 대계리 외포마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태어나 13살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거제시는 오래된 김 전 대통령 생가를 헐고 2001년 새로 지었다. 566㎡의 대지에 팔작지붕으로 된 본채와 사랑채, 시주문을 건립하고 돌담도 만들었다. 생가 옆에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이 있다. ●시인 유치환의 숨결 ‘청마 생가&기념관’ 거제도는 ‘깃발’ 시인 청마 유치환이 태어난 곳이다. 청마는 1908년 거제시 둔덕면 방하마을에서 태어나 1910년 통영으로 이사했다. 시는 2000년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근처에 청마 묘소가 있다. 청마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청마기념관을 생가 옆에 2008년 건립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 35분 부산 동구 좌천동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부산대학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했다. 처음에는 부산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기슭에 장지를 마련했다. 그 뒤 양산시 백운공원묘지로 이장했다가 1997년 4월 5일 이곳으로 옮겼다. [먹거리] ●청정해역서 자란 바다의 우유 ‘굴’ 거제 연안에서 바다의 우유로 불리는 굴이 많이 생산된다.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된다. 미국은 식품의약국(FDA)이 거제 연안을 엄격하게 심사해 청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굴을 수입한다. 굴은 남성에게는 정력 식품, 여성한테는 미용 식품으로 알려졌다. 성장발육과 학습능력 향상에 효과가 크고 소화흡수가 잘되는 타우린, 아연 등의 성분이 많아 어린이들에게 최고 영양식이다. 고혈압, 뇌졸중, 당뇨, 관절염, 골다공증 등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 겨울이 제철이다. 껍질째 익힌 뒤 까서 초장 등에 찍어 먹으면 향긋한 맛이 느껴진다. ●진한 색과 강렬한 향의 유혹 ‘유자’ 거제는 기후·환경이 유자 생산에 알맞다. 연평균 기온이 13도 이상 온화한 기후에서 자란 거제 유자는 색깔이 진하고 껍질이 두꺼워 향이 강하고 오래간다. 생산 시기는 11~12월이다. 껍질이 두껍고 울퉁불퉁한 못난 것일수록 품질이 좋은 것이다. 유자는 비타민C를 비롯해 유익한 성분이 많아 스트레스 해소, 피로회복, 통증·염증·기침완화, 혈액순환, 위암·폐암·피부암 억제 등에 효과가 있다. 잘게 썰어 설탕에 재어 유자청을 만들어 차로 마신다. 빵도 만든다. ●추워질수록 맛 좋아지는 ‘대구’ 대구는 머리와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고 부른다. 동해·서해 깊은 바다에 떼 지어 사는 한대성 고기로 겨울철 산란을 하기 위해 냉수층을 따라 남해 진해만으로 회유한다. 동해·남해안에서 잡히는 대구는 서해에서 잡히는 대구보다 크다. 특히 진해만 일대(거제해안)에서 겨울철에 잡히는 무게 7.5㎏이 넘는 대구를 최상품으로 꼽는다. 겨울 거제에서 잡은 대구로 요리하는 대구탕은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대구는 산란기에 암수가 사랑을 나누면서 서로 볼을 비벼대는 특성이 있어 살이 더욱 쫄깃하다. 대구볼찜 요리는 쫄깃한 대구 고기 식감을 음미할 수 있다. 대구는 고단백질 저지방 식품으로 간세포 재생 및 해독작용, 노폐물 배출, 피로회복 등에 효험이 있다. 황산화 영양소인 비타민 A는 살보다 알에 6배쯤 많다. 대구탕에 내장과 알을 함께 넣어 먹으면 간 보호 효과가 크다. ●싱싱함이 살아 있는 거제 별식 ‘멍게·성게 비빔밥’ 거제 지역 별미 음식 가운데 하나다. 멍게 비빔밥은 4~6월 거제 해안에서 채취한 싱싱한 멍게를 재료로 쓴다. 멍게를 양념과 버무려 저온에서 숙성시킨 뒤 참기름·깨소금·김가루 등을 넣고 밥과 함께 비빈다. 비빔밥과 함께 내놓는 싱싱한 생선으로 끓인 담백한 국 맛도 으뜸이다. 멍게에는 항균·항암과 체력보강, 식욕증진, 노화방지, 숙취해소를 비롯해 감기·기침을 멎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 성게는 밤송이 조개라고도 한다. 성게는 5~6월이 산란기이며 여름이 제철로 가장 맛이 좋다. 해녀들이 직접 잡은 성게를 재료로 요리하는 거제 성게 비빔밥은 특유의 향긋한 향과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식욕을 돋운다. 성게는 빈혈예방, 결핵 완화와 거담작용, 암 예방 및 노화방지 등에 효능이 있다. ●자연이 키우고 전통 방식으로 채취한 ‘돌미역’ 거제 자연산 돌미역은 사등면 견내량 지역과 남부면 여차 지역 등에서 생산된다. 물살이 빠른 암반에서 자라 맛이 쫄깃하고 영양이 뛰어나 최고의 상품으로 꼽힌다. 3~5월 봄철에 전통 방식으로 채취한 뒤 바닷바람에 건조한다. 견내량에서 채취하는 미역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미역은 혈압을 낮추고 암세포를 억제하며 나쁜 콜레스테롤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몸 안의 중금속이나 농약, 발암물질 등을 밖으로 배출하며 체질개선과 노화방지 효능이 있다. 거제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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