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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창한 추석 연휴, 수서동 역사탐방로 산책 오세요”

    “화창한 추석 연휴, 수서동 역사탐방로 산책 오세요”

    서울 강남구가 지난 4일 ‘수서동 궁마을 역사 탐방로’ 새단장을 마치고 새로운 산책로를 조성했다고 10일 밝혔다. 추석 연휴 기간 새롭게 발견된 조선시대 ‘사찰 유적지’와 ‘기와 가마터’도 만나 볼 수 있다. 수서역-궁마을-가마터 유적지-봉헌사 절터-광평대군 묘역을 잇는 이 역사 탐방로는 대모산의 자연과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광평대군 묘역을 한 걸음에 만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총 길이 약 2.6km로 도보로 약 40분 가량 소요된다. 조선시대 ‘사찰 유적지’와 ‘기와 가마터’는 2013년 수서동 540번지 일대 아파트 부지를 개발하다가 발굴된 유적지로 조선시대 봉헌사로 추정되는 절터와 그 절을 유지보수하기 위한 기와 가마터 4기가 있다. 이번에 탐방로가 새롭게 조성되면서 원형 그대로 복원해 향토유적 관람시설로 조성됐다. ‘궁마을 비원’은 가마터 옆 무단경작지를 궁마을이 숨겨 놓은 아름다운 비밀정원처럼 꾸며 탐방로를 찾는 이들의 즐거움을 더했다. 백일홍, 복자기 등 우리나라 고유 수종의 수목 및 초화류 1만 3000본을 직접 볼 수 있다. 데크 쉼터 등을 통해 산책의 편의성도 높였다. 지난 7월 지역주민들이 직접 심은 장미 2724주가 조성된 ‘궁마을 공원’은 탐방로를 찾은 이들의 눈을 더 즐겁게 해 줄 예정이다. 아울러 궁마을 근린공원에는 ‘궁마을 앞마당’에 다양한 전통놀이 공간을 구성해 추석에 이 곳을 찾는 시민들에게 체험의 기회도 제공한다.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내외가 모셔진 광평대군묘역은 사당, 재실, 종회당, 종가 등이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신도비를 비롯한 묘비와 석조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조성명 강남구청장은 “새롭게 조성된 탐방로는 자연과 역사문화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도심 속 쉼터가 될 것”이라면서 “추석 연휴 뿐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이 곳을 찾아 휴식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 경주 황룡사 절터, 야경 명소로 탈바꿈

    경주 황룡사 절터, 야경 명소로 탈바꿈

    경북 경주 황룡사 절터가 야경 명소로 탈바꿈했다. 경주시는 9월 1일부터 구황동 사적 6호 ‘황룡사지’ 탐방로 조명등을 정식 운용한다고 31일 밝혔다. 시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지난 4월부터 조명등 설치에 들어가 이번에 완공했다. 앞서 지난해에는 황룡사 역사문화관 북서면 2만2천300㎡ 땅에 잔디광장, 산책로를 조성했다. 또 황룡사 9층 목탑을 옆으로 눕혀 놓은 모양의 탐방로도 만들었다. 시는 이 조명등 탐방로가 경주의 새로운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때 만들어진 대규모 사찰로, 고려 13세기 몽골군 침입으로 불타 지금은 터만 남았다. 황룡사지 탐방로 경관조명 점등시간은 일몰 후부터 오후 11시까지다. 주낙영 시장은 “천년고도 경주 황룡사지에 경관조명이 설치되면 은은한 조명이 코스모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주 가을밤을 찾는 시민과 관광객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툇마루 오르니 봄 담은 수묵화… 한여름 꽃단장 얼마나 고울까

    툇마루 오르니 봄 담은 수묵화… 한여름 꽃단장 얼마나 고울까

    500여년 이어온 집성촌 한개마을정갈한 담장 따라 늘어선 고택들정선의 그림 빼닮은 한수헌 연못 윤동마을엔 단차 두고 선 사우당꽃잎 같은 돌계단 품은 덕천서원성밖숲엔 500년 된 왕버들 군무도경북에 고택이 많은 고을이 몇 곳 있다. 성주도 그중 하나다. 신록을 예찬해도 모자랄 이 계절에 거무튀튀한 고택이라니, 어림없는 여정이란 생각을 했다. 한데 착각이었다. 외면하려 할수록 옛집들은 발을 붙잡고 마음을 흔들었다. 급기야 기품 있게 늙은 것들을 찾아 여정 전체를 바꾸고야 말았다. ‘쌍도정도’(雙島亭圖)란 그림이 있다. 겸재 정선이 대구 인근의 하양군수로 재직 중일 때 그렸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이다. 상상 속 장소를 그렸을 것 같았는데, 실제 배경이 있었다. 쌍도정은 조선시대 성주관아의 객사였던 백화헌 앞 연못의 정자다. 네모 형태의 연못 속에 석축으로 둘러싼 2개의 섬이 조성돼 쌍도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사라졌다. 듣자니 쌍도정의 축소판이라 할 아름다운 연못이 성주 한개마을에 남아 있단다. 지금 그 집을 찾아가는 중이다. 한개마을은 500여년을 이어 온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동네 자체가 국가민속문화재다. 70여 호의 전통가옥 가운데 200~300년 된 열 곳의 고택은 따로 경북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한개마을은 담장이 아름답다. 황토와 자연석을 번갈아 얹어 정갈하게 쌓았다. 비탈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담장의 전체 길이는 3㎞가 넘는다고 한다. 이 담장을 따라 고택들이 즐비하다.마을 끝자락에 한주종택이 있다. 고택 한편엔 한수헌(한주정사)이 날아갈 듯 서 있다. 둥치 굵은 소나무와 수양버들이 에워싼 자태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는 집을 말한다. 그러니까 한수헌은 학당과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춘 공간인 셈이다. 한수헌 누마루 옆엔 연못이 있다. 바로 여기가 쌍도정과 닮았다는 곳이다. 정확히는 섬은 하나고 연못이 두 개다. 소나무가 있는 작은 섬과 위아래의 연못은 두 개의 돌다리로 연결돼 있다. 소나무가 자라는 작은 섬에 정자 하나 지어 올렸다면 쌍도정이라 여길 법도 하겠다. 고택과 어우러진 연못은 기품이 넘친다. 우리나라 정원의 연못은 대개 네모 형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세계관에 따라 조성됐기 때문이다. 연못 안엔 보통 한 개, 혹은 세 개의 인공섬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섬이 두 개였다는 쌍도정은 그런 점에서 독특하다. 한수헌의 연못엔 섬이 하나다. 전설 속 성지 봉래산을 상징한다.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은 섬을 빙글 돌아 아래 연못에 잠깐 멈춘 뒤 담장 옆 고랑으로 빠져나간다. 관리상의 어려움 때문인지, 아쉽게도 연못에 물은 없었지만 당시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다. 읍내 성주역사테마공원에도 쌍도정이 있다. 역사테마공원은 2020년 옛 성주 읍성의 일부를 복원해 조성한 곳이다. 이때 쌍도정도 원형에 대한 고증을 받아 함께 복원했다. 다만 시간의 깊이가 너무 얕아 고풍스런 느낌은 찾기 어렵다. 한개마을에선 ‘북비고택’이라 불리는 응와종택을 꼭 찾아봐야 한다. 북비(北扉)는 북쪽으로 낸 사립문이란 뜻이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1713~1773)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영조의 명을 거역한 죄로 관직에서 쫓겨나 낙향했는데, 이후 북쪽으로 문을 내고는 사도세자의 묘를 향해 매일 새벽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 문이 여태 남아 지금도 북비고택이라고 불린다. 가야산 아래 수륜면 윤동마을엔 사우당 종택이 있다. 의성 김씨 종가다. 집은 평지에서 마을 뒷산까지 여러 채의 건물이 단차를 두고 길게 늘어서 있는 형태다. 평지에 넓게 펼쳐진 여느 종택들과 확연히 다른 구성이다. 집 뒤쪽의 가장 높은 곳엔 영모재가 있다. 이 건물 마루에 오르면 중첩된 기와지붕 너머로 성주의 유순한 들녘이 펼쳐진다. 그 모습에 외지를 방문했다는 긴장감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흙담장 여기저기엔 ‘선비 나무’라 불리는 배롱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한여름이면 붉은 꽃들이 후드득 피어날 텐데, 그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윤동마을은 자체가 명당인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이자 풍수가였던 두사충이 성주 지역의 으뜸가는 길지로 꼽았다고 한다. 사우당 종택 외에도 덕천서원, 서계정, 첨모재, 원암재 등 기품 있는 고택들이 십여 채나 몰려 있다. 특히 꽃잎을 여러 개 겹쳐 놓은 듯한 덕천서원의 낭만적인 돌계단은 지금도 뇌리에 선연하다. 이 일대를 돌다 보면 한강(寒岡) 정구(1543~1620)라는 이름과 유난히 자주 마주하게 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을 이어받은 이 지역 출신의 대학자다. 회연서원은 그가 후학들을 길러내던 초당 자리에 들어선 서원이다. 신록의 이파리로 객을 맞고 있는 앞마당의 4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인상적이다. 서원 옆으로는 대가천이 흐른다. 한강은 이 물길을 따라 산재한 아홉 곳의 절경을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 불렀다.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에 빗대 지은 이름이다. 서원 뒤편 언덕의 제1곡 봉비암부터 한강대(2곡),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배바위(3곡), 꼿꼿이 선 자세가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는 선바위(4곡), 찾는 사람마다 인연을 맺는다는 사인암(5곡) 등이 성주 쪽에 있다. 6~9곡은 김천시에 속했다. 대가천을 따라 느긋하게 드라이브를 즐기며 아홉 경치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야산 동쪽 자락의 법수사 옛 절터도 느긋하게 찾을 만한 곳이다. 법수사는 한때 합천 해인사보다 더 위세가 당당했던 절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옛터, 그리고 당간지주 등 유물 몇 점이 남았을 뿐이다.아, 읍내 성밖숲도 잊지 말고 찾아야 한다. 500년을 넘게 살았다는 왕버들 노거수 수십 그루가 군무를 추듯 늘어서 있다. 늙고 야윈 가지 위로 싱싱한 연둣빛 이파리를 내놓은 모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하다. 성밖숲은 원래 밤나무 비보림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밤나무는 싹 베고 왕버들을 심었다고 한다. 왕버들은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여행수첩→아소재(我蘇齋)는 ‘나를 살리는 집’이란 뜻의 고택이다. 평일엔 한옥 스테이로 쓰이다가 목~일요일엔 고택 카페로 변신한다. 수륜면 소재지에 있다. 읍내의 카페 옐롱은 참외 가공식품(사진)을 내는 집이다. 참외청으로 만든 달고 시원한 음료와 참외앙금으로 속을 채운 참외빵 등을 맛볼 수 있다. 성주할매국수는 국수를 전문으로 파는 집이다. 맛있는 칼국수, 잔치국수 등을 저렴한 가격에 듬뿍 내놓는다. 읍내에 있다. →성주하늘목장 팜0311은 이른바 ‘팜크닉’ 명소로 입소문 났다. 팜크닉은 영어 팜과 피크닉의 합성어다. 시골 목장에서 즐기는 소풍을 테마로 조성한 4만평 규모의 휴식공간이다. 지역 먹거리 키트를 팔고 여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텐트도 있지만 숙박은 안 되고, 한나절 머물다 갈 수 있다.
  • 문 대통령 부부 앉은 절터 초석 논란에…조계종 측 “문화재청장·국민소통수석 사퇴하라”

    문 대통령 부부 앉은 절터 초석 논란에…조계종 측 “문화재청장·국민소통수석 사퇴하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지난 5일 북악산 산행 도중 법흥사터 연화문 초석을 깔고 앉은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계종 측이 김현모 문화재청장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의 사퇴를 요구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대변인이자 기획실장인 법원 스님은 8일 성명을 내고 “천박한 문화재 인식을 드러낸 문화재청장과 국민소통수석은 즉각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법원 스님은 “사찰터는 단순한 유허지가 아닌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문화유산으로 가장 긴 시대성을 가진 유적 가운데 하나이며 다양한 분야의 변천사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대표적인 비지정문화재”라면서 “사찰터는 비지정문화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가적 보호와 관리가 더욱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법흥사 사찰터는 1960년대 당시 정부가 북악산을 폐쇄하면서 스님과 신도의 불사노력이 무산된 아픔이 있는 곳”이라면서 “그러한 아픔의 흔적이 담긴 법흥사터에 현 정부는 북악산 남측면 전면 개방을 결정하고,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 부부가 산행하면서 법흥사 터 초석에 앉은 것은 불자들에게는 다시 한 번 큰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스님은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업무를 총괄하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고 발표하고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버려져 있던 그냥 그런 돌’이라고 밝힘으로써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는 비지정 불교문화재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확인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문화유산은 국가적 역량을 모아 보존해 나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정부 관계자들이 보여준 이러한 사고는 자칫 국민들에게 지정문화재가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상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법원 스님은 또 “청와대와 문화재청에서 비지정 불교문화재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면 불교계에서도 포용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자들이 변명으로 일관하다 보니 또 다른 실언과 논란이 지속되는 것”이라고도 꼬집었다. 법원 스님은 김현모 문화재청장과 박수현 국민소통수석의 사퇴를 요구하며 “문화재청의 지정 및 등록문화재 중심의 문화재 정책에서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 또한 정책에 적극 반영될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정책변화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 문재인 대통령 “천주교 교리·불교 진리는 하나”…청와대, 불심 달래기

    문재인 대통령 “천주교 교리·불교 진리는 하나”…청와대, 불심 달래기

    “文대통령, 절터 초석 관련 기사 보고 난감한 것 같았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일 산행 도중 절터 초석에 앉은 사진이 보도돼 불교계서 ‘불교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청와대는 7일 불심(佛心) 달래기에 나섰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문 대통령의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불교에 대한 존중은 한결같다”며 문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전했다. 박 수석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참모회의 도중 “청와대 관저 뒤편에 부처님 한 분이 계시다. 저는 이 부처님께서 꼭 경주 남산에 계시다가 어떤 연유로인지 지금의 이 자리에 오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한 유지가 경주 남산에서 부처님을 모셔왔는데 해방 후 총독이 이 불상을 일본으로 모셔 가려 했으나 우리 국민의 눈이 무서워 그대로 두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에 있는 불상이 경주에서 온 그 불상이 맞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불교계의 의견과 참여가 아주 중요하다”며 “조사와 심의 결과 ‘경주 남산의 부처님이 맞다’는 결론이 나서 경주로 모셔가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더라도 불교계의 의견이 최우선 돼야 한다”고 했다.조사 결과 실제로 이 불상은 일제 시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이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한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으로 드러났다. 박 대변인은 “대통령의 안목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처님과 대통령의 인연이 꽃피운 연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지난 5일 산행을 마치고도 문 대통령은 그 불상 앞에서 합장하며 예를 올렸다고 박 수석은 전했다. 또 문 대통령은 이날 참모 회의에서도 “저는 천주교인이지만 천주교의 교리와 불교의 진리는 결국 하나로 만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 부처님(불상)을 제대로 모시게 된 것 역시 부처님의 가피(불교에서 부처나 보살이 중생에게 힘을 주는 일)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박 수석은 강조했다. 박 수석은 “문 대통령은 ‘절터 초석에 앉은 것이 적절치 않다’는 취지의 언론 기사를 보고받고 참 난감한 것 같았다”며 “문 대통령과 청와대 관저 부처님의 인연 얘기는 언젠가는 공개하고 싶었다. 소중한 얘기의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말씀드려 아쉽다”고 했다. 앞서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지난 5일 북악산 남측면 개방 기념 산행 도중 법흥사로 추정되는 절터의 연화문 초석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이 모습이 보도되자 불교계의 비판을 받았다 . 문화재청은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초석은 지정·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면서도 “사전에 행사를 섬세하게 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공감하며 앞으로 유의하겠다”고 밝혔다.
  • [속보] 문화재청 ‘문재인 대통령 북악산 절터초석 착석’에 “지정문화재 아냐”

    [속보] 문화재청 ‘문재인 대통령 북악산 절터초석 착석’에 “지정문화재 아냐”

    불교계 ‘문화유산 인식 낮아’ 비판 목소리문화재청 “초석, 중요한 문화재 아냐”문재인 대통령이 북악산 남측면 개방 기념 산행 도중 절터 초석에 앉은 사진이 공개된 후 불교계를 중심으로 논란이 일자 문화재청은 7일 “초석은 지정·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지난 5일 김현모 문화재청장 등과 북악산 남측면을 산행했고 법흥사로 추정되는 절터의 연화문 초석에 앉아 설명을 들었다. 불교계에서는 초석 착석 모습을 두고 소중한 불교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이 낮아 벌어진 일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 문화재 보존 업무를 총괄 지휘하는 문화재청장이 당시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문화재청은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통해 초석이 중요한 문화재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사전에 행사를 섬세하게 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공감하며 앞으로 유의하겠다”고 했다. 이어 “법흥사터의 소중한 가치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불교 문화유산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 부부가 앉은 초석은 지난 1960년대에 놓인 것으로 문화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법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됐다고 전하나 구체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지금은 건물터, 축대, 주춧돌만 남아 있다.
  • 봄의 수도… 천년의 시간 넘어, 황리단 꽃길 따라 [이우석의 미시 여행]

    봄의 수도… 천년의 시간 넘어, 황리단 꽃길 따라 [이우석의 미시 여행]

    명랑 고도… 벚꽃 터널 따라 BTS 노래 흥얼흥얼봄비 내린 지난주, 봄맞이에 한창인 경북 경주를 다녀왔다. 경주는 지금 거대한 컬러링북이다. 이 근사한 옛 도시는 봉긋한 고분에 연둣빛 수채물감을 채색하는 중이며 가녀린 가지마다 새하얀 꽃망울을 틔울 준비를 마쳤다. 곧 천지에 흩날리며 명경 같은 호수에 고혹적인 네일팁처럼 떠다닐 연분홍 꽃 이파리를 떠올려 본다. 과연 ‘봄의 수도’가 따로 없다.봄꽃이며 바다, 즐거운 체험과 재미 가득한 박물관, 맛난 음식, 향긋한 커피와 디저트, 그리고 아이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무엇하나 빠뜨릴 게 없다. 누가 뭐래도 완벽한 관광종합선물세트 경주다. 요즘은 어떤지 살짝 들여다보고 왔다. 꽃샘이 나서 심통을 단단히 부리던 봄날의 초입이었다. 경주시. 미추홀(인천)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도시다. 경주에 있었던 사로국(斯盧國)만 계산에 넣어도 2100여년에 이른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불변 수도로 보낸 기간만도 약 1000년이다. 신라와 경주를 ‘천년’으로 수식하는 이유다. 잉카 마추픽추(페루)의 역사와 비교하면 깜짝 놀랄 게다. 마추픽추는 조선 세조 초인 15세기 말에 건설됐으며 고작 80여년 후에 멸망했다. 경주에 비하면 ‘신도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주엔 집(戶數)이 약 18만채 있으며 최대 90만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바그다드(아바스), 장안(당), 콘스탄티노플(동로마제국)과 함께 세계 4대 메트로폴리스였다. “절이 별처럼 이어지고 탑은 기러기떼처럼 몰려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실크로드의 궁극적 종착지이자 불교가 융성했던 부자 왕국의 수도에 대한 삼국사기의 설명이다. 환경 때문에 숯을 연료로 쓰라고 했을 만큼 당시 서라벌은 풍요롭고 호화로웠다. 서울 보라매공원만한 절터(40만㎡)에 무려 81m 높이의 건축물(황룡사지 9층 목탑)을 지었다. 645년 완공한 이 ‘당대 최고 랜드마크’는 1238년 몽골의 침략으로 불탔다. 이후 한반도에는 1319년 동안 이보다 높은 건축물은 없었다. 1967년 서울 중구 소공동에 83m짜리 한진빌딩(KAL빌딩)이 세워지며 그제야 신라인의 기록이 깨졌다.조선 때는 계림부(鷄林府) 또는 경주부로 불리며 영남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전 대의 불교와는 별개로 유교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양동마을에서 조선 중·후기 양반 문화를 오롯이 지켜 오고 있다. 대한민국 1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더니 600년 전통 양동마을도 과거에 비해 외양이 조금 달라졌다. 우선 마을 어귀에 탐방객용 문이 따로 생겼다. 양동마을 박물관을 거쳐 입장할 수 있다. 박물관을 먼저 둘러보면 양동마을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마을 역사는 600여년 전 혼인으로 맺어졌다. 풍덕류씨가 명문가 여주이씨를 만나 처가에 장가를 들며 시작됐다. 당시는 조선 전기로 양반 남자가 처가로 장가를 드는 처가입향(妻家入鄕)이 관례였다. 다음, 경주손씨가 풍덕류씨에 장가를 들고, 또 여주이씨가 경주손씨에 장가를 오며 씨족사회를 만들어 갔다. 양동은 여주이씨와 경주손씨 등 양성의 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영남 남인의 종장이자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언적(1491~1553)이 여주이씨로 양동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의 이름은 원래 이적이었지만 ‘훗날 등장할 가수 탓에 검색이 안 될까 염려한’(?) 중종에 의해 피휘자로 선비 언(彦)자를 가운데 넣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이후에도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를 총 116명이나 배출했고 근현대에 들어서도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명문 마을로서 그 명성을 전국에 떨쳤다.양동마을은 경제활동과 제례 등을 자체 해결할 수 있는 독립적 구조로 이뤄졌다. 양반과 평민이 주변에 붙어서 살 수 있도록 기와집과 초가집이 공존하고 있다. 가운데 흐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뒤편 문장봉으로부터 물(勿)자 형 산줄기가 뻗어내려 온다. 풍수에서 길지로 꼽는 지형이다. 각각의 언덕 줄기에 올라 보는 지형지세가 모두 다르다. 마을 내 수많은 고택들은 이런 자연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배치되어 있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해 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단일 마을 기준 전국 최다(26점)이다. 이언적이 지은 무첨당(無堂)은 별채가 유명하다. 역사 속 수많은 선비와 관인이 이곳을 찾아 남긴 현판과 죽편 등이 보물에 보물을 더하고 있다. 의병장 이의잠이 지은 수졸당, 양동에서 가장 먼저 지은 손소의 종가 서백당(송첨고택),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이정덕이 살았던 상춘헌 등과 해저고택(물 밖에 있다) 등 우리 역사 이야기가 서린 건축물이 ‘옛 마을의 새봄’을 무심히 지켜보고 섰다. 인근 옥산서원과 독락당도 함께 들르면 졸졸 이끼를 굴리며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더욱 봄에 가까워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경주는 국내에서 2번째로 면적이 넓은 시다. 주요 강만 해도 4개가 흐른다. 형산강 지류 서천과 북천, 기계천, 낙동강 수계인 동창천이 경주를 누비며 물을 공급한다. 덕분에 차를 달리는 재미가 있다. 굳이 감포 해변까지 가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시원한 물 구경을 할 수 있다. 교동 교촌마을이나 보문관광단지에도 나지막한 실개천 둔치 트레일 코스나 보문호를 돌아 나가는 수변 산책로를 즐길 수 있다.요즘 전국에서 가장 뜨는 ‘핫플’ 여행지가 바로 ‘황리단길’이다. 대릉원 뒤쪽 황남동 일대, 포석로 쪽 한옥마을을 이르는 말이다. 천마총, 대릉원, 포석정 등 관광지와 명물 황남빵 가게가 있어 원래부터 관광객들이 몰리던 곳인데 요즘은 특유의 고전적 감성에 현대적 인테리어가 결합돼 독특한 분위기의 편의 상업지구로 발전한 경우다.비슷한 느낌의 전북 전주 한옥마을과 비교해도, 최근에 조성된 곳이라 뭔가 세련된 분위기가 더하다. 예쁜 카페에서 쉬다가 근사한 한옥 레스토랑에 들러 맛있는 것 챙겨먹고 돌아오는 여행이 가능해졌다. 경주 관광이 ‘문화재만 보고 오는’ 유적관광 이미지가 강했다면, 이젠 이런 즐길거리가 킬러 콘텐츠가 됐다. 특히 도심, 버스터미널 등과 가깝고 사진찍기에 좋아 MZ세대 여행객의 주목을 단단히 받고 있다. 500번 버스가 지나는 도로를 중심으로 약 700m 정도의 상점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대릉원 담벼락을 돌아 제과점과 기념품 숍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황리단길이 시작된다. 한옥호텔 황남관까지 이르는 길가에는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 개성 있는 카페와 빵집, 기념품이나 신기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 사진관 등이 이어진다. 책꽂이처럼 군데군데 좁은 골목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골목 안에는 여러 술집과 레스토랑, 사주카페, 한옥 게스트하우스, 서점 등이 나오는데, 이를 찾아 혈관처럼 고불고불한 골목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일본 규슈의 유후인 마을이나 동유럽 옛 도시의 플라자 마켓 거리를 닮았다.경주 동쪽에는 관광 특구로 유명한 보문단지가 있다. 인공호 보문호를 가운데 두고 호텔과 리조트, 상업지구로 빙빙 두른 형태로 조성됐다. 진입하는 길부터 호반 산책길, 어디서나 봄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 수 있다. 50년 이상 수령의 벚나무가 길가에 도열해 4월이면 온통 벚꽃 터널을 이룬다. 호반에는 화사한 신록의 수양버들이 가느다란 가지를 늘어뜨리며 봄바람에 산들산들 흩날린다. 호숫가 산책로를 이용하면 어디나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자전거길도 잘 닦아 놓았다. 보문단지 안에만 있어도 며칠 잘 쉬어갈 수 있다. 공연과 컨벤션을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부터 골프 코스, 레포츠 시설, 테마파크, 워터파크, 다양한 사설 박물관, 체험장 등 즐길거리가 빼곡히 들어섰다. 몇몇 리조트에는 온천수도 나오니 휴양에 최적화된 곳이다. 요즘은 식물원과 조류 동물원을 겸한 동궁원, 미디어 파사드를 즐길 수 있는 정글의 법칙 등이 들어서는 등 좀더 다양한 놀거리가 생겨나 재방문객을 불러들이고 있다.이 중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은 방대한 자료와 수집물, 멀티미디어 전시기법으로 우리 대중음악을 즐기며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1925년 발매된 최초의 음반 ‘내 고향을 리별하고(안기영)’ 앨범, 최초 걸그룹 ‘저고리 씨스터즈’와 최초 아이돌 ‘아리랑 보이즈’ 등 희귀 음반부터 가왕 조용필, 들국화, 소방차, 현재 대중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방탄소년단(BTS)까지, 그 오랜 시간을 스치듯 한번에 만날 수 있다. 장르별 시대별로 총망라한 여러 음반 자료를 해설과 함께 실제 들어볼 수 있다. 3층 오디오 전시관에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하이엔드 앰프와 초대형 스피커를 통해 신청곡을 들어볼 수 있는 오디오 감상실이 마련되어 있어 ‘음악세계’에 푹 빠져들 수 있다.필자가 경주와 처음 맺은 인연은 35년 전 수학여행 때였다. 서울 서부역에서 출발과 동시에 낱낱이 기록된 그 여행의 각인은 우루루 몰려다니며 유적과 유물을 훑듯 돌아다닌 ‘시찰’에 불과했다. 1987년 봄의 경주는 2022년 봄의 문턱에서 만난 인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천년 고도는 좀더 젊어졌고 더욱 화사해졌다. 게다가 올해는 스마트 관광도시 사업 대상지에 선정됐으니 이후 만나는 경주는 지금보다 똑똑하고 명랑할 듯하다. 이번엔 때가 일러 꽃바람을 맞아보진 못했지만, 조만간 편안한 휴식 속에 수많은 즐거움을 찾으러 갈 테다. 경주에서 찍은 사진을 뒤척이며 즐거운 상상을 한다. ‘고도(古都)를 기다리며’. 놀고먹기연구소장■ 여행수첩 ●황리단길 오스테리아 밀즈는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 고풍스러운 기와집에 입점한 레스토랑은 분위기도 그 맛처럼 근사하다. 블랙트러플을 넣은 크림 파파델리는 넓적한 면에 농후한 송로버섯 향이 진하게 배어있다. 면도 쫄깃하니 제대로 삶았다. 감칠맛 깃든 한치먹물리조토도 전국 어느 곳에서 맛보기 어려울 정도로 진한 풍미를 뽐낸다.●안강할매고디탕은 경주에서도 특별한 음식이다. 전형적 농촌 문화가 녹아든 다슬기탕인데 들깨가루를 넣어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낸다. 투실한 고디(다슬기의 지역 방언)에다 배추, 부추 등을 썰어 넣고 끓여 든든하다. 곁들인 젓갈과 봄동김치, 더덕무침 등도 자꾸 젓가락이 가는 별미다. 양동마을과 가깝다.●천년한우는 한우 맛있기로 소문난 경주에서도 좋은 고기를 취급하는 식육식당이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상차림비(5000원)를 내면 숯과 반찬을 가져다 준다. 서울에선 등심을 선호하는 데 비해 경주 지역에선 보통 갈빗살을 많이 먹는다. 갈빗살 이름은 같지만 평소 보던 부위가 아니다. 이외에도 채끝, 부채, 업진 등 다양한 부위가 있다.
  • ‘多多益山’ 이리저리, 거닐수록 빠져든다… ‘一喜一味’ 요리조리, 먹을수록 입맛돈다 [이우석의 미시여행]

    ‘多多益山’ 이리저리, 거닐수록 빠져든다… ‘一喜一味’ 요리조리, 먹을수록 입맛돈다 [이우석의 미시여행]

    미륵도 탐냈을 사통팔달의 도시… 기름진 땅만큼 걸음마다 보물… 이리역 폭발 아픔 뒤로하고 보석처럼 반짝반짝전주 뺨치는 황등비빔밥·칼칼 낙지곱창볶음 일품… 40년 노포 안줏거리·곰돌이 호두파이에 ‘훈훈달달’전북 익산시는 도내에서 두 번째, 호남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기준이다. 약 28만명으로 광주광역시, 전주시, 전남 순천시에 다음간다. ‘다다익산’(多多益山)이다. 철도와 도로 교통도 좋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고 충남 천안부터 이어진 장항선이 이곳에 종착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비롯해 1번과 23번 등 국도와 지방도가 사방팔방 얽혀 있다. 금강과 만경강이 흐르는 너른 땅이다. 옥토의 드넓은 곡창지대 호남평야가 펼쳐졌다. 1970년대엔 이리수출자유지역이 생겼다. 당연히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익산군과 이리시는 1995년 통합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리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그만큼 유명했던 까닭이다. 이리는 산짐승 이름과 같아 기억하기 쉽다. 이리는 원래 솜리, 솜니, 솝리 등으로 불렸다. 이리(裡里)의 뜻이 ‘속 마을’이란 뜻이라 그랬다. 작은 농촌 마을이던 솜리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 계획에 따라 갑자기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며 부쩍 성장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차례로 놓이고 군산항까지 연결해 호남평야의 쌀을 깡그리 거둬 일본에 실어날랐다.●옛이름 ‘이리’와 지금의 ‘익산’ 하지만 익산이 중요한 지정학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사실 그보다 2000년 이상 먼저 일이다. 마한과 백제의 여러 유적으로 미뤄 볼 때, 이 지역은 일찌감치 발달한 고도(古都)였다. ‘익산 출신’인 무왕이 사비성(충남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까지 시도했을 정도다. 앞서 기원전 청동기 시대에는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건마국을 세웠고 이는 마한의 첫 수장국(수많은 소국 중 맹주 역할을 하는 국가)으로서 국력을 과시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된 미륵사지를 비롯해 왕궁리 궁성 유적, 익산 쌍릉 등은 한반도 고대사에서 익산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를 알려 주는 유적이다. 익산(益山)의 뜻은 ‘첩첩 산이 많다’는 의미지만 실제 익산에는 그리 높은 산이 없다. 오히려 김제와 더불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활한 들이 많다. 북부 함열과 동부 금마 쪽이 원래 익산의 중심이었는데 이리역이 생겨난 이래 시내 중심이 바뀌었다. ● 지역 역사 송두리째 바꾼 ‘폭발사고’ 살기도 좋은 땅이다. 큰비도 눈도, 심지어 태풍도 거의 없고 강이 둘이나 지나니 가뭄 걱정도 없는 곳이다. 폭염과 혹한도 없다니 얼마나 좋은가. 재해라고는 딱 하나, 굉장히 유명한 ‘인재’(人災)가 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는 사망 59명, 부상 1158명에 이재민 1647가구 7800여명이 발생한 국내 최악의 화약 폭발 사고였다. 당시 한국화약의 화물열차에 실려 있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등 폭발물 40t에 호송 책임자가 켜 놓은 촛불이 옮겨붙어 대형 폭발로 이어졌다. 반경 500m 이내 건물이 깡그리 무너지고 폭발 지점인 이리역에는 지름 40m에 깊이 15m의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초대형 폭격을 맞은 정도의 규모다. 기관차가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갔다. 이 사고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라진 역사(驛舍)는 물론이며 지역의 역사(歷史)까지 달라졌다. 코미디언 고 이주일도 이 사고와 인연이 깊다. 사고 현장과 가까운 삼남극장 지붕이 무너졌다. 이날 ‘가수 하춘화 리사이틀’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하춘화를 당시 무명이던 이주일이 들쳐업고 구해 낸 것. 이 인연으로 이주일은 하춘화 전속 사회를 맡게 됐고 이후 국내 최고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공중분해된 이리역은 1년 후 당시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 지었다. 인근 창인동 익산군청은 건물에 금이 가 2년 후 함열읍으로 이전했고 남성여중과 남성여고, 남성고도 영등동 소라산으로 옮겨야 했다. 건물 9000여 채가 무너졌으니 한마디로 폭발 사고 한 방이 도시 자체가 재건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통합시가 익산시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에도 당시 재난이 연상된다는 여론도 한몫했다고 한다. ●고대사 품은 ‘국보급 도시’ 풍요의 땅 익산에는 보물도 많다. 앞서 언급한 고대 한국사의 국보급 문화재는 국가가 공인한 보물이다. 여기에다 ‘보석 도시’란 예명에 맞게 금은보석 세공 등 보석가공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석재로 유명한 황등석도 보석이다. 국가 공인 4대 종단 중 하나이자 국내 최대 토종 종교인 원불교를 열고 익산 땅에 잠든 소태산 대종사, ‘원불교의 바티칸’ 격인 익산 중앙총부도 익산시의 보석이라 할 수 있고, 호남에서 가장 큰 사학인 원광대학교도 미래의 보석이 아닐 수 없다.● 대각의 종교 ‘원불교’ 성지 익산을 설명하며 원불교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현재 국방부에서 군종 병과를 인정하는 종교는 가톨릭, 불교, 개신교, 원불교뿐이다. 원불교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대각(大覺)의 종교로 1916년 소태산 대종사가 창시해 100여년의 역사를 지켜왔다. 이 원불교의 중앙총부가 익산 신룡동에 있다. 원불교의 교법을 편 전법성지(傳法聖地)인 이곳엔 중앙총부뿐 아니라 영모전, 대각전, 박물관, 원음방송 등이 함께 있다. 소태산 대종사 성탑, 정산종사 성탑, 성비 등도 자리하고 있다. 주변엔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상주선원, 문화원, 퇴임 교무 정양소 수도원, 원로원 등이 갖춰져 있다. 일반인도 언제나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이라 익산시 관광 스탬프 코스로 지정돼 있다. 익산 시내 중심가와 가깝고 탁 트인 가람의 경내 분위기나 박물관, 솔숲 산책로 등이 좋아 이른 봄기운을 받으며 둘러보기에 딱이다. 원불교가 창시된 4월 28일 대각개교절에 맞춰 시민 참여 행사도 열 계획이다. 원광대가 시작된 ‘유일학림’ 등 건축물들은 조선 말기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건축사적 가치도 높다. 소태산 대종사가 설법에 사용했던 탁상과 수첩, 교전 등 성품, 물품들이 박물관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원광대 교정은 봄꽃과 건축물, 인공호수 등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인터넷과 언론 등을 통해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로 여러 번 선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상징인 봉황탑을 재치 있게 해석해 ‘닭다방’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호수 위 카페와 산책로, 오솔길, 대학박물관 등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돼 있어 교정을 둘러보다 쉬어 가기 안성맞춤이다.●모양도 이야기도 빛나는 보석박물관 국정교과서에 익산이 여러 번 나온다. 국사 교과서엔 마한·백제·미륵사지·원불교 등이, 지리 교과서엔 보석산업이 나온다. 보석 광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석 가공업체가 몰려 있다. 백제의 귀금속 가공술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보석박물관에는 11만점의 보석과 원석, 공예품 등이 있다. 옆에는 보석을 보고 구입할 수 있는 보석산업센터가 함께 위치했다. 보석이라 하면 그저 반지, 목걸이와 왕관에 붙이는 형형색색의 돌덩이만 연상했는데 둘러보니 참 많은 종류가 있다. 식물성 호박부터 동물성 산호, 여러 광물이 보석의 범주에 든다. 다이아몬드, 수정, 옥 등 다양한 보석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보석은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바다색을 표현할 때 주로 쓰는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색조차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던 필자가 매우 똑똑해져서 나올 수 있었다. 얼마나 현명해졌는지 살짝 자랑하자면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슈퍼맨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북극으로 부모의 유물을 찾아갈 때 등장하는 크립토나이트는 수정이 아니라 집섬(Gypsum)이나 녹주석의 일종인 아쿠아마린을 닮았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또한 영화에서 마녀들이 요술이나 예언을 행할 때 쓰는 둥근 구슬은 호랑이 눈알을 의미하는 호안석(虎眼石)이 분명하다.● 익산의 상징 ‘미륵사지’ 익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보물은 역시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다. 백제 사찰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된다. 무려 3탑3금당 방식으로 다른 절터에 비해 2~3배 이상의 규모와 형식을 자랑한다. ‘서동’ 백제 무왕이 639년 창건했다는 기록까지 등장하니 이래저래 익산의 상징이다. 신라 황룡사와 고구려 금강사에 대응할 만큼 백제 대표 호국사찰로 꼽히는 절이며 백제의 가장 거대한 석탑을 품은 옛 절터다. 무너져 내려 반만 남은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더할 익(益)자를 모티브로 한 익산시 로고로도 쓰일 만큼 강력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서동요’의 진실은 과연 실제 보물도 쏟아졌다.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 과정에서 첫 번째 심주석 안에 봉안된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사리장엄구 9900여점이 나왔다. 세세하고 정교한 조각과 문양으로 가득한 사리병은 백제금동대향로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걸작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히 금판에 붉은 글자를 새긴 사리봉영기는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이로써 미륵사가 백제 무왕 재위 시절인 기해년(639년)에 창건됐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무왕의 왕후가 신라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인 사택씨 가문임도 함께 드러나 ‘서동요’ 이야기가 허구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백제판 남자 신데렐라’ 서동의 성공담이 사라질 수 있는 ‘불상사’를 낳은 셈이다. 이후 일부다처설, 후처설 등이 대두되며 아직까진 서동 설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사리봉영기에 선화공주 이름이 정확히 기록돼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무왕릉으로 추정되는 익산쌍릉에선 신라제 토기가 출토돼 서동·선화공주 결혼설이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아무튼 미륵사는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조선 중후기까지 건재했지만 숭유억불책과 자연재해,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17세기 들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1990년대 초반 동탑을 서탑의 모양에 상상을 더해 복원(?)했지만 고증에 대한 근거도 없고 너무 급조해 만든 티가 난다. 21세기 들어 복원에 들어간 서탑만큼은 원래 석재를 최대한 사용하며 없는 형태를 상상해 만들지 않기로 했다. 젠가(블록빼기 게임)를 하다 망한 것처럼, 그나마 무너진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형식으로 복원을 마친 후 2019년 일반에 공개한 서탑에 더 많은 이들이 몰린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로, 미륵사지당간지주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2015년에는 유네스코위원회가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5층 석탑 등 유적, 공주·부여의 유적들을 ‘백제역사 유적지구’란 이름으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지난해 초 미륵사지 지하 공간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은 미출토 유물과 백제의 여러 유물을 모아 전시 중이다. 내부엔 다양한 전시기법을 사용해 한눈에 익산의 여러 유적과 그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세대불문 미각 깨우는 맛의 고장 물산이 풍요롭고 도시 규모가 제법 되는 익산이라 ‘먹는 보물’도 많다. 전주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황등비빔밥을 파는 여러 노포를 비롯해 푸짐한 인심이 돋보이는 부송국수, 칼칼한 낙지곱창볶음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동서네 낙지, 수제만두로 유명한 태백칼국수, 매콤한 콩나물국밥을 파는 별미집 등이 유명한 식당들이다.곰 얼굴 모양의 귀여운 호두파이와 다양한 종류의 타르트를 만들어 파는 ‘빵곰언니와 호두파이 공장’은 전국적으로 젊은층에게 널리 알려진 디저트집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입소문을 타고 순례객을 양산하고 있다. 1982년 ‘역전할머니맥주집’에서 출발한 ‘호프 노포’ 엘베강도 익산역 앞을 지키고 있다. 맛집들은 창인동 중앙시장과 영등동, 원대입구(대학로), 모현동, 부송동, 황등면 등에 골고루 분포돼 있어 이동하기 편리하다. 마한의 첫 수장국으로 시작,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 됐을 곳. 그리고 근대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 이리로부터 지금의 보석 도시 익산. 역사를 거슬러 봐도 언제나 풍요로움이 넘쳐나던 곳이다. 이리저리 돌아보며 ‘다다익산’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가기 전에 이건 꼭! -미륵사지와 익산박물관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눈높이를 낮춘 전시물부터 다양한 체험까지 가능한 어린이박물관도 함께 있다. 왕궁리 유적 박물관은 현재 휴관 중이다. -서동공원 경내 마한박물관에는 율촌리 고분 출토 옹관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 중이다. 웅포면 입점리고분전시관은 익산 지역에 살았던 백제 귀족의 무덤에서 발굴한 금동관모와 장신구 등의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원광대 박물관도 알짜배기다. 마한과 백제 유물부터 옹기, 회화, 민속, 불교 예술 등을 모아 놓은 종합박물관이다. 천주교 유적지도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나바위 성지가 익산에 있다. 백제의 석불로 국가 중대사에 앞서 땀을 흘린다는 익산석불좌상도 삼기면 석불사에 있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신라 시대 승려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황룡사 ‘등잔’의 비밀

    신라 시대 승려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황룡사 ‘등잔’의 비밀

    신라 최고·최대 사찰로 알려진 경주 황룡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등잔이 무더기로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연차 발굴조사 중인 황룡사터 서회랑(西回廊) 서편지구에서 폐기물 구덩이에 묻힌 신라 등잔 150여 점을 찾아냈다고 25일 밝혔다. 사찰에서 불을 밝히던 등잔이 한꺼번에 매립되었다가 이번에 드러난 것이다. 등잔 지름은 10㎝ 안팎이며,제작 시기는 8∼9세기로 추정됐다. 황룡사에서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뤄진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많은 등잔이 발견됐으며,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도 백제 등잔 80여 점이 출토된 바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폐기물 구덩이에서는 주로 기와나 토기가 나오는데, 이번에 조사한 구덩이에는 특이하게도 등잔이 한꺼번에 묻혀 있었다”며 “구덩이는 건물터가 아닌 곳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어 “등잔을 일괄적으로 묻은 이유를 알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며 “등잔 그을음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도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이번 조사에선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건물터, 배수로, 담장터도 확인됐다. 조사단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땅이 높아진다는 사실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위에 흙을 덮고 고려시대 건물을 건립한 양상이 드러났다”며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특정 공간이 변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사 지역인 황룡사 서회랑 서편지구는 사찰 운영시설이나 승려 생활공간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1980년대 발굴조사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사무실로 사용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연구소는 8700㎡에 달하는 이 지역에 대해 2018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해 건물터와 배수로 등을 확인했고, 길이 6㎝인 금동봉황장식 자물쇠도 출토했다.
  • [씨줄날줄] 17세기 조각승 색난/서동철 논설위원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조각이라면 누구나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으뜸으로 꼽을 것 같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아무래도 본존불을 비롯한 일련의 경주 석굴암 조각이 먼저 생각난다. 공통점은 작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양지(良志)라는 통일신라시대 조각승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양지가 영묘사 장륙삼존상·천왕상·전탑 기와와 천왕사탑 아래 팔부신장, 법림사 주불 및 삼존과 좌우금강신을 만들었다”고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679년(문무왕 19) 창건된 천왕사, 곧 사천왕사는 일제강점기 동해남부선 철길이 절터를 관통하면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목탑지에서 소조 파편이 많이 나왔는데, 그것을 복원한 것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양지의 녹유신장상이다. 반면 고려시대 이후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는 조각가를 알 수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목조 불상의 배 부분에 공간을 만들어 불경 등을 넣는 복장(腹藏)이 일반화되었는데 누가 발원하고 누가 조각했는지를 기록한 조상기(造像記)를 남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불교 조각가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색난(色難)이다. 1640년 전후 태어나 1660년대 수련기를 거치고 1680년 이후 조각가 그룹의 우두머리인 수조각승(首彫刻僧)이 되어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유명 조각승이 10건 안팎의 작품을 남긴 반면 색난의 작품은 알려진 것만 해도 20건에 이르는데, 불상 조각가로 활동한 기간이 40년이 넘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미술사학자들은 색난 작품의 특징을 세부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대 조각 양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여래상과 보살상에서 ‘작가의식’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아마도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을 나한상과 시왕상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가섭존자상이 매력적이고, 16나한상으로 세트를 이루어 메트로폴리탄 것과 함께 조성했다는 영암 축성암 나반존자상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 짓게 한다. 색난이 제작을 주도한 불상 가운데 4건이 보물로 지정됐다.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이다. 그의 작품은 시도 지정문화재도 13건에 이른다. 이제 ‘색난 조각을 따라가는 문화유산 탐방’ 같은 주제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공주 송산리·부여 능산리 고분군, 이젠 ‘왕릉원’

    공주 송산리·부여 능산리 고분군, 이젠 ‘왕릉원’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각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문화재청은 이런 명칭 변경을 오는 17일 관보에 고시하고, 공주시·부여군과 함께 안내판 정비와 문화재 정보 수정 등 후속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두 사적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둔 웅진 도읍기와 부여로 천도한 뒤인 사비 도읍기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고적으로 지정하며 송산리, 능산리 고분군으로 이름을 지었다. 문화재청은 “고분군은 옛 무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두 사적의 성격과 위계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면서 “무덤 주인을 병기해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왕릉급 무덤의 역사·문화재적 위상을 세우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주요 무덤 7기가 조성돼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으며, 왕과 왕비가 묻힌 내력을 기록한 지석(誌石)을 통해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이 밝혀졌다. 17기의 무덤이 확인된 능산리 고분군은 1990년대 무덤들 서쪽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와 석조사리감이 출토돼 왕실 무덤임이 드러났다.
  •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이름 바뀐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이름 바뀐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각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문화재청은 이 같은 명칭 변경을 오는 17일 관보에 고시하고, 공주시·부여군과 함께 안내판 정비와 문화재 정보 수정 등 후속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9일 밝혔다. 두 사적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둔 웅진 도읍기와 부여로 천도한 뒤인 사비 도읍기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고적으로 지정하며 송산리, 능산리 고분군으로 이름을 지었다. 문화재청은 “고분군은 옛 무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두 사적의 성격과 위계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면서 “무덤 주인을 병기해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왕릉급 무덤의 역사·문화재적 위상을 세우는 취지”라고 설명했다.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해 주요 무덤 7기가 조성돼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으며, 왕과 왕비가 묻힌 내력을 기록한 지석(誌石)을 통해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이 밝혀졌다. 17기의 무덤이 확인된 능산리 고분군은 1990년대 무덤들 서쪽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와 석조사리감이 출토돼 왕실 무덤임이 드러났다.
  • 경남 함안 강명리사지서 고려시대 금동불상 출토

    경남 함안 강명리사지서 고려시대 금동불상 출토

    경남 함안군은 함안면 강명리사지에서 고려시대 금동불상(金銅佛像)이 출토됐다고 19일 밝혔다.강명리사지는 문화재청 ‘2021년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의 하나로 지난 4월부터 문화재청과 함안군,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하고 있는 절터이다. 함안군은 지난 4월 실시된 시굴조사 결과 강명리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를 중심 시기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지난 4월 시굴조사 당시 출토된 명문기와를 통해 절 이름이 ‘의곡사(義谷寺)’임이 확인됐다. 이후 지난 6월부터 진행된 정밀발굴조사 과정에서 고려시대 금동불상이 출토됐다. 이번에 출토된 금동불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불상을 받치는 연꽃 모양 자리)를 갖춘 높이 8㎝ 소형 불상으로 의복과 손 모습 등 형태가 잘 관찰된다. 불상 뒷면에는 작은 고리가 있어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를 꽂았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또 불상 대좌의 좌·우측에서 연결흔이, 연화대좌 바닥에서 촉(鏃)이 확인돼 제작 당시 삼존불(三尊佛·중심이 되는 불상과 그를 좌우에서 모시는 불상을 함께 부르는 말)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번 발굴에서는 청동그릇 조각과 함께 중심 불상만 출토됐다. 함안군 관계자는 “함안은 통일신라시대 지방의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승관직(僧官職)인 군통(郡統)이 파견된 곳으로, 한국 불교사 연구에 있어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돼야 할 지역이다”며 “연구를 위한 자료가 적은 상황에서 금동불상이 출토된 것은 매우 귀중한 성과다”고 말했다.
  • 일제가 명명한 송산리·능산리 고분군 명칭 바뀐다

    일제가 명명한 송산리·능산리 고분군 명칭 바뀐다

    일제가 충남 공주와 부여의 백제 왕릉급 무덤 떼를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명명한 ‘송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고분군’ 명칭이 변경된다. 문화재청은 14일 사적인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이름을 각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밝혔다. 두 유적은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둔 웅진 도읍기(475∼538)와 부여로 천도한 이후인 사비 도읍기(538∼660)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고적으로 지정했고, 우리 정부가 1963년 사적으로 다시 정했으나 역사적 성격에 맞는 명칭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송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발굴조사가 이뤄져 일부 무덤의 축조 방법과 규모가 확인됐고, 금제 장식과 은제 허리띠 장식 등 유물도 나왔다. 1971년에는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 중에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지금도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명확하게 드러난 유일한 고분인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가 묻힌 내력 등을 기록한 지석(誌石)을 포함해 문화재 46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12건 17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능산리 고분군은 1990년대 서쪽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와 석조사리감이 출토돼 왕실 무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명칭을 통해 문화재의 역사가 잘 알려지고 위상이 높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서울광장] 문화유산 보고 원주 부론과 시인 손곡 이달/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문화유산 보고 원주 부론과 시인 손곡 이달/서동철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에는 양평 양동에 갔다가 내친김에 맞붙은 원주로 차를 몰았다. 시간도 넉넉하니 부론이나 한번 가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경기와 강원의 경계를 넘어 문막읍에 접어들고 보니 흥법사 터도 가본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법사 터는 섬강이 지척인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았다. 작은 절처럼 보이지만 마당 끝 진공대사탑비와 마주치면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 전성기에는 결코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겠다 싶다. 탑머리와 받침 조각만 남아 있음에도 국가적 공력을 기울인 당대의 대표작임을 알 수 있다. 흥법사 터는 발굴조사를 잠시 쉬고 있는 듯 보였다. 단계적 발굴조사 마무리되어 전성기 흔적이 모두 드러났을 때를 기대하게 된다. 절터 한쪽에는 발굴 과정에서 수습했을 옛 기와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데, 그 옆 소나무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흥법사지 국가사적 지정 청원합니다’라 크게 씌어 있었다. ‘남한강 유역 폐사지 세계유산 등재 국민운동본부’라는 작은 글씨는 플래카드를 건 단체 이름이겠다. 이런 모임도, 이런 운동을 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국가사적 지정’의 희망은 발굴조사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져도 순조로울 것이다. 그렇게 성과가 축적되면 ‘세계유산’도 넘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지광국사현묘탑의 고향인 법천사 터로 간다. 충주로 방향을 잡아 지방도를 타고 달리면 부론면에 접어들고 오른쪽으로 ‘흥원창’ 표석이 나타난다. 고려 및 조선 시대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나르던 12조창의 하나다. 왼쪽의 남한강과 오른쪽의 섬강이 합쳐져 정면의 여주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이곳은 은섬포라고도 불린다. 은두꺼비 포구라니 유래가 궁금하다. 부론(富論). 이 땅이름은 흥미롭다. 흥원창이 지역 중심지로 떠오르고, 많은 사람이 왕래하면서 언론의 중심지가 돼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흥원창 주변 흥호리는 지금 한적하다. 조창 폐지 이후에도 번성했지만 1936년 대홍수로 주민들이 법천리로 이주하면서 면사무소도 옮겨 갔다는 것이다. 남한강은 강원도와 충청도를 개경과 한양으로 잇던 물길이었다. 경상도 세곡도 육로로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배에 실렸다. 조운의 역사를 보여 주는 박물관이 전국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서운하다. 흥원창 주변은 ‘남한강 수운 박물관’의 적지가 아닐 수 없다. 남쪽으로 더 달리면 법천리 삼거리다. 왼쪽으로 3~4분 가면 법천사 터가 나타난다. 세계유산 등재 운동의 핵심이다. 발굴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 고려시대 절터는 그야말로 광활하다. 지광국사현묘탑이 돌아오면 유물 전시관도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절터를 돌아보는데 청자 사금파리가 발부리에 채인다. 청자 파편이 흔한 것은 고려시대 전성기 스님들이 일상적 공양구로 이 그릇을 썼다는 증거다. 현묘탑비만 있고 현묘탑 자리는 비어 있는 부도 권역에 오르니 전에 없던 ‘문화재 보호 CCTV’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감시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들려온다. 신기해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아예 요란스러운 경고음을 토해 낸다. CCTV를 연결한 케이블 저 끝에서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고음이란 곧 나를 ‘문화재 훼손 가능자’로 보고 있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 효과는 있을 것이다. 가던 길을 3~4분 더 달리면 손곡리다. 염두에 두었던 목적지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이라 생각하는 손곡 이달(1539~1612)이 고향이 아님에도 고향처럼 아낀 동네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문학사에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홍길동전’을 지은 고산 허균과 누이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한데 법천사의 문화재 안내판에는 허균이 방문한 흔적도 남아 있어 반가웠다. 허균은 스승 이달을 만나러 손곡으로 가는 길에 법천사에 들렀을 것이다. 허균은 스승의 삶을 그린 ‘손곡산인전’도 남겼다. 그런데 이달을 기려 손곡리 동네 밖 저수지 둑방에 만들어진 조각공원 철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부론은 흥원창 터와 법천사 터 말고도 세계유산을 추진하는 또 하나의 고려시대 절터인 거돈사 터도 가진 문화유산의 보고다. 이달이 손곡에 남긴 삶과 문학의 자취도 그 못지않은 문화자원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좋겠다. 법천사 유물 전시관과 함께 흥원창에 남한강 수운 박물관, 손곡리에 이달 시문학 박물관이 세워지는 모습도 보고 싶다. 작은 고을 부론이 원주와 강원을 넘어 한국 대표 문화 관광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장담한다. sol@seoul.co.kr
  •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이 5년의 보존 처리 작업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며칠 전 들렸다. 20년 전쯤 법천사터를 찾았을 때 주변은 모두 논밭이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절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절터 초입의 당간지주도 동네 한복판에 숨어 있듯 자리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찾은 법천사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체계적인 발굴조사로 옛 절터의 전모가 드러났고, 당간지주도 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부도권역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련된 조각을 자랑하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나란한 현묘탑 터의 빈자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마침내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이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현묘탑은 비운의 문화재다.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돌아온 뒤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에 세워 놓았는데, 6·25전쟁 중 포탄에 맞아 지붕돌 위쪽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탑을 1957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옆으로 옮겼고 보수 작업 끝에 1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한강변에는 고려시대 대찰(大刹)의 옛터가 즐비하다. 경기 여주 고달사터와 강원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충북 충주 청룡사터가 그렇다. 한결같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대부분 불교국가 고려의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은퇴하고 머무른 하산소(下山所)였다. 일대는 개경에서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유사시에는 물길로 빠르게 오갈 수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은 ‘거물 스님’의 거처로 각광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편리한 남한강 수운은 역설적으로 이 일대 사찰의 석조 문화재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수탈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법천사를 비롯해 앞서 거론한 사찰 가운데 청룡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부도며 탑비를 빼앗겼다. 고달사터 쌍사자석등과 흥법사터 진공대사탑 및 석관, 거돈사터 원공국사승묘탑 등이 그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이 탑의 관리 주체인 문화재청의 결단 덕분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높은 진정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실제로 원주시는 법천사터를 정비한 데 이어 지광국사현묘탑을 돌려받아 ‘완전체’가 되면 새로운 역사문화 관광지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을 채우고 있는 남한강변의 다른 석조 문화재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다. 법천사터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거돈사터는 2만 5000㎡ 남짓한 사역의 정비가 일찌감치 이루어졌다. 거돈사터에도 해동공자 최충이 비문을 지었다는 원공국사승묘탑비만 남아 있을 뿐 정작 승묘탑이 없는 것은 법천사와 닮은꼴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에는 모조탑을 세워 놓았는데 기계자국 선명한 새하얀 탑이 폐사지 분위기와 어울릴 수는 없다. 흥법사터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변에 있다. 섬강은 법천사가 있는 흥원창 주변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흥원창은 강원 서부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이다. 진공대사 충담이 머무른 흥법사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지었다는 진공대사 탑비가 역시 진공대사탑을 잃은 채 남아 있다. 이 밖에 남한강 하류인 양평 보리사터의 대경대사탑비와 상류인 제천 월광사터 원랑선사 탑비도 중앙박물관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이들 석조 문화재를 제자리에 보내면 훼손이 염려된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시만 해도 지광국사현묘탑을 제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는 방안과 전시관을 새로 지어 내부에 탑과 탑비를 옮기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을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다. 무엇보다 ‘너무도 귀중한 문화유산인 만큼 훼손되어선 안 되니 돌려줄 수 없다’는 논리는 서구 박물관이 약탈 문화재의 반환 요구를 거절할 때 쓰는 어거지일 뿐이다. 중앙박물관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서는 조만간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개성 경천사터 십층석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중앙박물관은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도 갖고 있으니 고민은 크다. ‘훼손 염려’ 논리로 붙잡고 있는 게 가능하겠는가. 석조 문화재를 과감하게 제자리에 보내는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어렵다면 처리 원칙이라도 마련해야 할 때다. sol@seoul.co.kr
  • “가야산을 신성장 동력으로”… 불교문화관광 사업 힘쏟는 성주

    “가야산을 신성장 동력으로”… 불교문화관광 사업 힘쏟는 성주

    “‘해동 제일의 명산’인 가야산을 성주 발전의 신성장 동력으로 만들겠습니다.” 이병환 경북 성주군수는 30일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주와 경남 합천, 거창군 등 3개 군에 걸쳐 있는 가야산은 수려한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고대문화, 민족종교, 역사유적이 산재한 지역으로 관광산업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군수는 이어 “하지만 지금까지 가야산의 무한한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륜면과 가천면, 금수면 등 성주 서부지역 일원의 보존가치가 없는 사유지가 대거 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돼 50년 가까이 심각한 재산권 침해를 받고 있다”면서 “앞으로 가야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경남 합천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야산(총면적 60.56㎢)은 실제 절반 이상인 37㎢(61%)가 성주군에 속해 있다. 가야산의 주봉인 칠불봉(해발 1433m)도 성주군에 자리잡고 있다. 1972년 10월 가야산과 주변 산을 포함한 76.256㎢가 우리나라 아홉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다음은 이 군수와의 일문일답.-최근 성주군이 가야산 불교문화역사자원을 활용한 관광거점화 계획을 마련했다. 어떤 내용인가. “내년부터 2030년까지 총사업비 1100억원을 투입해 성주 수륜·가천면 등 가야산 일원의 다양한 불교유적 조사 및 정비를 통해 불교문화관광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는 게 핵심이다. 구체적으로는 폐사지(절터)인 백운사지, 용기사지, 미륵사지, 법림사지, 안국사지 등에 사찰을 복원하고 수륜면 백운리에 ‘가야산 산림휴양문화단지’를 조성한다. 산림휴양단지에는 수목원을 비롯해 자연휴양림, 산림박물관, 녹재문화체험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또 성주 가야산~합천 해인사 6.9㎞ 구간에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 문화유적 탐방로를 만들고, 가야산 선비산수길, 역사신화공원, 야생화식물원 등 기존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등 일대를 체험·체류형 관광거점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가야산 역사·문화·자연 보전’ 양해각서 체결 -국내 3대 사찰 중 하나인 법보종찰 해인사, 국립공원공단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와 ‘가야산 역사 문화 자연보전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추진 배경과 협력 분야는. “3개 기관은 가야산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 및 개발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 군의 가야산 관광거점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호 이해와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 이번 협약으로 해인사는 가야산의 역사·문화유적 등을 잘 복원하고 그 혜택을 주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협력을 아끼지 않기로 했고,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는 성주군과 해인사에서 추진하는 친환경적 사업 등에 적극 협조하고 가야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기로 했다. 각 기관의 특성을 활용한 공동 탐방프로그램 운영 등 교류·협력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번 협약을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 “성주 군정을 책임진 군수가 43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해인사를 찾아 108배를 하며 해인사와 성주군의 공동 번영과 발전을 기원했다. 또 가야산국립공원 인근 골프장 조성 등 각종 개발을 둘러싼 해인사와 성주군 간 해묵은 갈등과 반목을 조속히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저의 이러한 전향적인 태도를 해인사 측이 깊이 이해하고 대승적 결단을 내려 준 데 대해 거듭 감사드린다.”-정부에 가야산국립공원 구역 재조정을 요청해 놓고 있다. 경과는. “환경부는 국립공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주민 불편 해소를 위해 10년 주기로 보전 가치에 따른 해제 또는 편입 대상지를 정해 공원구역 경계를 조정한다. 우리 군은 이런 기회를 활용해 성주 수륜·가천 일대 사유지 1.8㎢ 정도를 가야산국립공원 구역에서 해제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장기간 사유권 침해로 인한 주민생활 불편과 재산상 불이익 등 민원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중장기적으로 침체된 지역경제 및 가야산 일원 관광 활성화를 위해서도 해결돼야 할 과제다. 대신 같은 면적의 공원 연접 공유림을 국립공원관리단에 제공해 국립공원 보존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철도 역사 유치 지역 기관·단체 등 서명운동 -남부내륙고속철도 성주역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지난해 1월 정부가 남부내륙철도 건설 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으로 발표한 직후 성주역사 유치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유치 대응팀(TF)을 중심으로 지역 기관·단체 등이 힘을 모아 결의대회와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정치권 인사와 국토교통부, 국무조정실 관계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성주역사 유치에 대한 지역 여론과 역사 설치의 필요·당위성을 적극 설명하고 있다. 국토부가 현재 시행 중인 ‘철도 기본계획 용역’ 등에 성주역사가 반드시 반영되도록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성주역사 유치와 연계한 중장기 종합발전계획 수립에도 나서고 있다. “역사가 유치되면 성주미래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성주형 뉴딜사업이 될 역세권 개발과 레저·스포츠 관광산업 육성, 성주3일반산업단지 및 신주거단지 조성 등에 대한 연구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 대구·경북 행정통합, 대구취수원 이전 등 대외 환경변화에도 적극 대응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주미래 100년을 위한 청사진을 마련할 것이다.” -성주의 주산인 ‘성산(星山) 되찾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어떤 운동인가. “성산은 성주 읍내가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성주의 안산이다. ‘별고을’로 풀이되는 성주(星州) 라는 지명도 성산에서 나왔다. 도한기의 ‘읍지잡기’에는 ‘성주 읍내는 풍수상 와우형이다. 안산을 성산이라고 한 까닭은 소가 별을 보며 누워 있는 모양 때문이다’고 기록돼 있다. 또 성산에는 1600여년 전 가야문화를 꽃피운 성산성이 있다. 하지만 1967년 이 지역에 군사기지(포대)가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주민이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지역이 됐다. 하루빨리 성산을 되찾아 주민들의 품에 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조만간 국방부, 경북도, 성주군,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민·관·군 상생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다.” -군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올 한 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전 국민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루빨리 이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함께 노력하고 있다. 우리 군은 코로나19 차단을 위해 전 행정력을 동원해 방역관리를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코로나19로 큰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 및 저소득 계층 등의 위기 극복을 위해 힘쓰고 있다. 군민들도 좀더 힘을 내셔서 마스크 착용 등 개인 방역수칙을 반드시 준수해 주시고, 연말연시 각종 모임이나 회식 등은 자제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다가오는 기축년 새해에는 모든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드시길 기원한다.” 성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무장봉기 이끈 승려… 만세운동 주도 고교생… 일제 수탈 맞선 해녀들

    무장봉기 이끈 승려… 만세운동 주도 고교생… 일제 수탈 맞선 해녀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몽골이나 왜구의 지배와 침략을 받았던 지역으로 외부 세력에 대항하며 독자적으로 존립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제주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풍부한 어족자원을 가진 주요 약탈 지역이었다. 한일병합으로 일제의 수탈이 격심해지자 항거하는 주민들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거세게 일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배를 온 유학자들이나 개화파들은 제주도민들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제주 지역에서는 광복 때까지 크고 작은 항일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3대 항일운동으로 일컬어지는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현장을 찾아보았다. ●1914년부터 김연일 주지 “일본인 축출” 설법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인 제주도 서귀포 옛 법정사 터는 해발 680m나 되는 한라산 중턱에 있었다. 물이 마른 계곡을 건너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산속에 일제가 불태워 버린 절터가 나타났다. 집 한 채 크기도 안 되는 작은 터에는 무너져 내린 벽체의 흔적인 돌무더기만 나뒹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3·1운동보다 다섯 달 앞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승려들이 주도하고 주민 700여명이 참여한 제주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1914년 무렵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이 부당하며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설법을 통해 주장하고 있었다. 김연일은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거사 6개월 전부터 곤봉과 화승총을 마련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1918년 9월 말 정구용은 “면장과 이장은 장정을 모아 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고 8일에는 제주향을 습격해 일본 관리를 체포하자”는 격문을 붙였다. 총지휘자 김연일을 필두로 좌대장, 우대장, 선봉대장, 중군대장, 후군대장 등의 의병과 비슷한 군사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김연일은 1871년 경북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에서 태어나 출가한 뒤 경북 경주 기림사의 승려로 있었다. 같은 절에 있던 승려 방동화와의 인연으로 제주도로 와서 1914년쯤 법정사 주지가 됐다. 김연일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할 목적을 갖고 제주도로 왔다고 한다. 왜 하필 제주도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했느냐는 의문에 유족들은 “우리나라 모습에서 제주도가 닻이라서 거기서부터 들어 올려야 독립 바람이 육지까지 분다고 (김연일이) 말했다”고 설명한다. 김연일은 조상의 묘까지 제주도로 옮겼다. 이를 이용해 군자금과 물자를 갖고 제주도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드디어 거사 당일인 7일 새벽 법정사 마당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김연일은 “일본인을 쫓아내어 원래의 한국 시대를 회복하자”고 선언했다. 선봉대장 강창규와 좌대장 방동화, 우대장 강민수, 모사 장임호와 박주석 등의 지휘에 따라 승려와 신도 등 34명은 깃발을 흔들며 마을로 내려갔다. 미리 참여를 독려하고 격문을 붙여 놓아 참여자는 순식간에 700여명에 이르렀다. 도순·하원·월평·영남·대포·상예리 등 서귀포의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일제를 몰아내자고 소리 높여 외쳤다. 중문리에 도착한 군중은 전선을 자른 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일본인 일행을 구타하기도 했다. 이어 현재 중문파출소 자리에 있던 경찰 주재소로 가서 몽둥이로 기물을 부수고 문서를 불태운 다음 건물을 소각했다. 오전 11시쯤 일경의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왔다. 함성을 지르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경들은 법정사로 올라가 절을 불태웠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모두 66명이 검거됐고 김연일이 1심에서 10년형을 받는 등 46명이 형을 선고받았는데 감형과 가출옥으로 실제 수감 기간은 줄어들었다. 김연일은 3년 3개월, 강창규는 6년가량 옥살이를 했다. 박주석, 강수오, 강춘근 등 5명은 고문 후유증과 가혹한 감옥생활로 옥사했다. 특히 강춘근은 재판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 고문사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정황은 남아 있지 않다. 김연일은 출옥 후 고향 영일로 돌아가 항일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다시 붙잡혀 투옥되기도 했다. 정부는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 가운데 32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김연일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창규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日 주도자 모두 연행, 거사 계획 미리 파악한 듯 제주시의 동쪽에 있는 조천은 일제강점기에는 육지에서 사람과 물건이 활발하게 오가던 제법 큰 항구였다. 조천은 신촌·함덕·신흥 등의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제주시와 서귀포로 파급된 제주도 만세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제주항일기념관과 삼일독립운동기념탑 등이 들어선 조천만세동산(미밋동산)이 조성돼 있다. 평일인 지난달 17일 찾은 조천읍내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다. 마침 애국선열추모탑 앞에서는 임시정부가 1939년 법정기념일로 정한 제81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및 제18회 제주 지역 애국선열 합동추모식이 제주도 독립운동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었다. 조천만세운동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이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들어오며 시작됐다. 아버지 김시학은 일본 유학파로 1차 세계대전 중에 사회 각계각층 1만명의 연서를 받아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인물이다. 김장환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지켜보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보름 후인 16일 조천에 내려온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과 당숙 김시은에게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들려주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이튿날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어 김용찬, 김형배, 고재륜, 황진식 등 14명의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 4본과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시범 등은 거사일을 제주도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학자인 맏형 김시우의 소상(小祥·첫 기일)인 3월 21일로 잡았다. 21일 아침 8시쯤. 미모치에 14인 동지를 비롯, 조천 주민들과 이웃 마을인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주민과 서당 생도 등 200여명이 모여들었다. 미모치는 오름의 이름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한라산 정기가 마을 동쪽 끝으로 흘러 우뚝 솟은 성소(聖所)로 전해지던 곳이었다. 대형 태극기가 미모치 정상에 꽂히고 ‘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꼈다. 김시범은 독립선언서를 20여분 동안 낭독했다. 낭독을 마친 김시범은 “조선을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시키기 위해 한국독립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라”고 소리쳤다. 김용찬도 “일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도록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마을 안을 행진하자”고 외쳤다. 이어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선창하자 군중도 따라 외쳤다. 어떤 이는 창호지에 ‘한국독립만세’라는 혈서도 썼다. 시위대는 일제의 본거지인 제주성으로 행진했다. 조천은 제주성의 동쪽 약 12㎞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2~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신촌·삼양·화북·건입마을을 거치면 참가자가 더 늘어날 수 있었다.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500~600명이 된 시위대는 조천오일장터를 거쳐 비석거리에 도착해 ‘한국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는 계속 행진해 신촌리에 다다랐다. 일경은 급히 제주경찰서에 증원을 요청했고 오후 늦게 무장한 순사 30여명이 도착해 시위대와 맞부딪쳤다. 일경은 공포탄을 쏘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로 타격하며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3명이 다쳤고 김시범, 김시은, 김용찬, 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됐다. 이들이 모두 주모자였음을 볼 때 일경은 거사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시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 조천오일장터에서 김필원, 백응선, 박두규 등이 중심이 돼 200여명이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신촌리를 향해 2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여기서 박두규와 김필원이 체포됐다. 시위 소식은 함덕리까지 전해져 다음날에는 조천과 함덕 양쪽에서 3차 시위가 벌어졌다. 이문천·백응선·김연배 등이 계속해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문천은 조천오일장터에서 주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 100여명을 이끌고 오일장이 열리던 함덕리로 이동했다. 함덕리에 이르자 시위대는 8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날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참여했다. ●김장환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국가 서훈 없어 시위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일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을 체포했다. 또 신흥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귀동이라는 여성이 “대한독립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라는 구호를 외치자 제주경찰서로 연행했다. 여성까지 무차별로 체포한 데 대해 도민들이 격앙하자 부담을 느낀 일제 경찰은 사흘 뒤 여성을 석방했다. 3월 24일 4차 만세운동은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날은 조천오일장날이었는데 상인과 장을 보러 온 부녀자들까지 약 15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투석전까지 벌어지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경은 발포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김연배 등 4명을 체포했다. 일경은 군 병력까지 불러들여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네 차례의 시위에서 주도자 14명은 모두 검거됐다. 이들을 포함해 기소된 사람은 모두 29명이었고 2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5월 김시은, 김시범, 김장환 등 주도자 14명은 징역 6개월에서 1년을 받았다. 그보다 옥고와 고문에 따른 희생이 컸다. 백응선은 고문과 옥고로 1920년 3월 순국했다. 김연배도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옥고로 가출옥했지만 1923년 11월 27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김시은과 김시범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장환에 대한 서훈 기록은 없다. 월북했다는 이유다. 백응선과 김연배는 대통령표창을 받았을 뿐이다.●일제 해녀 요구 들어준다고 해놓고 약속 어겨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제주시 구좌읍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옆 해녀 노래비에 쓰인 마지막 절이다. 제주 우도 출신 독립운동가 강관순이 지은 노래다. 제주 해녀 투쟁은 연인원 1만 7000여명이 참여하고 238차례의 시위가 벌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해 구좌읍 하도리에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찾은 공원에는 운동 삼아 왔다갔다하는 여성만 보일 뿐 참배객은 아무도 없었다. 일제의 수탈에 제주도 해녀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제주에서는 해녀들의 채취 활동이 일제로서는 독보적인 수입원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일제는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만든 제주해녀어업조합을 어용화했고 해녀들이 힘들게 거둔 해산물을 헐값에 매입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입거 수수료와 세금도 과다 징수했다.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12월에는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정하고 대표를 선출했다. 이듬해 1월 7일 세화리 장날에 해녀 300여명이 1차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구좌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사무소 측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마침 신임 제주도사 다쿠치 데이키가 1월 12일 세화장날 시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날 세화리 장터에 해녀들이 모여들었다. 구좌면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와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 등 6개 마을 해녀들이었다. 손에는 호미와 비창(전복 따는 도구)을 들었다. 해녀들은 다쿠치가 탄 차량을 에워쌌고 다쿠치는 굴복한 척하며 요구 조건을 5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짓 약속이었음은 금세 드러났다. 일제는 제주 지역 청년운동가들을 배후세력으로 규정했다.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23일부터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을 각종 죄목을 붙여 검거하기 시작했다. 24일에는 이에 격분한 해녀 1500여명이 세화주재소로 몰려들었고 일경은 무장경관을 출동시켜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체포했다.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진압당하고 말았다. 주동자로 찍힌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은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들 말고도 일제에 검거돼 고초를 겪은 해녀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세 명의 해녀는 항일운동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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