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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 과격파,대이 보복전 선포/헤브론 총격학살사건 이모저모

    ◎아라파트 노선 맹비난… “암살하겠다”/라빈,“같은 동포로서 부끄럽다” 사과 25일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시에서 일어난 총격 학살사건은 반세기의 원한관계를 끝내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평화협상에 적신호를 던져주고 있다. 총기 사건이 터지자 팔레스타인측은 곧바로 이스라엘점령지 전역에서 폭력시위를 벌이고 있다.특히 그동안 평화협정을 둘러싸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유화적 정책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온 과격파들은 「자치협정이 파기될때까지」 이스라엘에 보복작전을 펴겠다고 선포,사태는 확산될 조짐이다. 아라파트도 이날 지난해 9월 체결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평화협정이 총기사건후 신뢰성을 잃었다며 이번 사건에는 이스라엘군이 연루돼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아라파트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사건직후 다음주 워싱턴에서 평화회담을 재개하는데 동의해놓고 있어 막바지에 이른 평화협상이 예정대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아라파트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추진하는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라는 게 서방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또 라빈총리도 이번 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 따라 과격한 유태인정착운동이 약화,고립될 가능성이 커 그의 입지가 오히려 넓어지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전세계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미국 백악관에서 아라파트와 라빈 총리가 평화협정을 선언하며 악수를 나눈지 5개월여만에 일어난 이번 최대유혈참사는 전세계적으로 비난여론을 빗발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협상을 가로막는 양측내 과격파들에 대한 대응책에 있어 어느 정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이의 성공여부가 중동평화시대를 앞당기느냐 마느냐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태확산◁ 팔레스타인 과격파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하마스」등은 이스라엘과 모든 유태인 정착민들을 합법적인 목표물로 간주하고 이를 향한 공격을 선언했다.이들은 아라파트의 평화노선이 이번 사건을 야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암살하겠다는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또 이스라엘 점령지역및 남부레바논 난민촌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차량공격,거리행진등 항의시위를 거세게 벌였다. ▷평화협상재개◁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은 25일 헤브론 사건직후 라빈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팔레스타인 자치이행협상을 위해 워싱턴에 협상대표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해 수락의사를 받아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라빈 총리는 헤브론 회교사원에서 「한 정신병자」가 저지른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만행으로 중동평화 협상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아라파트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스라엘인으로서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각국반응◁ ▲미국=빌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끔찍한 비극」이라고 말하고 중동평화의 어려운 과업이 더욱 복잡하게 꼬여지게 됐다고 했다. ▲러시아=외무부 성명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이번 학살에 대해 비난입장을 취하고 있다해서 완전히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며 과격주의자에 의한 평화회담 좌초를 막기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고 촉구했다. ▲이집트=이번 사건이 점령지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안전보장과 예루살렘의 지위문제를 중동평화협상의 의제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를 극명하게 확인해줬다고 했다. ▲이란=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남기위해서는 무장봉기로 이스라엘을 공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유엔=갈리 사무총장은 헤브론 회교사원의 만행을 신랄히 규탄하면서 유태인 정착민에 의한 또다른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에 힘쓸것을 촉구했다. ◎학살범 골드 스타인은 누구/대위 출신… 아랍인 치료 거부한 의사 헤브론시 팔레스타인인 학살사건의 범인 바루크 골드스타인(38)은 아랍인에 대한 폭력행사를 주창하고 이들을 이스라엘에서 몰아내야한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치다 지난 90년 피살된 유태교 랍비 메이르 카하네의 추종자.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골드스타인은 81년 유태계 학교인 예시바대 의대를 나와 당시 카하네가 책임자로 있던 「유태 방위동맹」에 가입했으며 이스라엘로 이주해서는 카하네가 만든 반아랍단체인 카치당의 열성분자로 활동했다. 골드스타인은 11년전 이스라엘에 정착,헤브론시 부근 과격성향의 유태인들이 모여사는 키르야트 아르바 정착촌에서 응급의로 일하면서 아랍­유태인들간 충돌로 인한 희생자들을 치료해왔다. 동료들은 골드스타인이 아랍인들을 너무도 혐오해 아랍인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료들은 골드스타인이 지난해 12월 절친한 친구와 그 아들이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살해당한데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괴로워 했다고 전했다.그후 아랍인들에 대한 테러를 염두에 둔듯한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 이단시비 8년… 법정공방 18차례/대성교회­탁명환씨의 갈등 궤적

    ◎한때 찬조설교 할 정도로 친밀/탁씨,83년부터 “독버섯” 맹비난 피살된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씨와 대성교회 설립자 박윤식목사와의 갈등은 언제,왜 시작되었을까. 숨진 탁씨는 박목사가 64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개척교회인 일석교회를 세우고 대성교회로 교명을 바꿔 목회 활동을 하던 78년까지는 절친한 사이였다.대성교회 초창기에는 찬조 설교까지 할 정도로 탁씨는 박목사와 가까웠다. 그러나 탁씨가 78년 모 종교단체로부터 돈을 받고 이 종교를 옹호하는 저술을 하면서부터 박목사와의 갈등이 시작됐으며 박목사측은 자신들이 탁씨에게 지원하던 이단교회 대책연구비를 끊었다고 교계에서는 지적하고있다.그후 83년3월 탁씨는 대성교회를 「교주우상론」을 표방하는 이단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또 탁씨가 「현대종교」지에 「박목사 그는 과연 이단인가.본처를 버린 두얼굴의 사나이」등과 같은 글을 비롯,「장로교의 가면을 쓴 이단자」,「쓰레기 더미위의 독버섯들」이라고까지 격렬하게 공격하면서 공개질의서와 폭로기사를 수십차례 게재해 갈등이 더욱 증폭됐다. 심지어 91년 현대종교 2월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박목사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위험한 것」이라며 이단성을 제기했다. 이 때문에 탁씨는 91년까지 8년동안 박목사와 계열 목사들과의 18차례에 걸친 법정공방까지 벌여왔다. 이같은 시비의 와중에서 결국 박목사가 이끄는 대성교회는 91년 9월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탁씨와의 사이는 더욱 악화됐다. 가족들에 따르면 탁씨는 지난달에도 강원도 평창군의 모교회에서 열린 강연에 참석,대성교회에 대한 슬라이드를 상영하며 박목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 서울대 합격 영광의 얼굴들

    ◎임산공학과 정훈기군/뇌성마비 딛고 진학 “만세” 『장애인이지만 정상인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은 전혀 없습니다』 올 입시에서 뇌성마비장애자로서는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임산공학과에 합격한 정훈기군(19·화곡고졸·강서구 화곡본동 59의8)은 입과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장애자이지만 집념과 노력으로 영광을 안았다. 정군이 서울대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지난해 입시에서 농학과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후기에서 K대 수학과에 수석으로 입학,장학생이 되었으나 서울대에 다시 도전한 것. 정군이 합격하기까지는 자신과 부모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숨어 있다. 정군이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 김묘분이씨(40)는 매일 아들을 업고 학교로 간 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했다. 신체장애에도 불구하고 정군은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결석한 적이 없다.자동차 개인견인업을 하는 아버지 정용정씨(45)의 적은 수입으로 14평짜리 전세집에서 네식구가 어렵게 살고 있으나 정군은 항상 밝고 쾌활해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정군은 『통일이 되면 북쪽에 있는 광대한 산림자원을 개발하는 데 힘이 될 수 있도록 임업전문가가 되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 격려전화 김영삼대통령은 22일 뇌성마비 장애자로 서울대에 합격한 정훈기군(20)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합격한데 대해 축하와 격려를 보냈다. ◎인문계수석 최지석군/친구와 주제토론… 논술 준비/1년재수 끝에 합격… 역사소설 많이 읽어 서울대 법대를 지원,인문계 전체수석을 차지한 최지석군(19·서울 잠실고졸·송파구 송파동 한양아파트6동 1002호)은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수석합격은 의외』라고 말했다. 국민교에서 고교까지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은 최군은 지난해 학력고사 3백24점으로 법대를 지원했으나 아깝게 1점차로 떨어졌으며 당시 수석합격한 민세훈군(19)과는 국민학교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최군은 재수기간 차분히 공부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학원으로 곧장 가서는 밤 10시까지 진도에 맞춰 예·복습위주로 공부를 했다. 1차수능시험에서 1백94점을 얻은 최군은 『2차수능시험은 보지 않고 새로 부활된 본고사 「논술」에 대비해 한가지 주제를 놓고 친구 5∼6명과 함께 각자 작성한 논술문을 돌려보면서 토론을 벌였으며 「문학작품의 이해와 감상」영역은 책을 읽은 뒤 이를 정리하는 식으로 대비했다』고 밝혔다. 아버지 최청평씨(51·연변과학기술대학후원회 상임이사)와 어머니 윤령희씨(42)사이의 1남1녀중 맏이로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다. ◎자연계수석 최지환군/신문·잡지 통해 사고력 넓혀/「한국의 아인슈타인」 꿈… 과학경시 입상도 『한국의 아인슈타인박사가 되어 21세기 첨단과학기술 발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올 서울대 입시에서 전기·전자·제어공학과군(군)에 지원해 자연계열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은 최지환군(18·서울과학고3·도봉구 방학3동 신동아아파트9동1101호)은 22일 상오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며 겸손해 했다. 최군은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학교수업에 충실하면서 신문·시사잡지 등을 통해 폭넓은 사고력훈련을 쌓아온 것이 본고사를 치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섬유수출업체 상신산업의 전무이사인 아버지 최충덕씨(50)와 어머니 임정숙씨(46)사이의 외아들인 최군은 1백67㎝의 단신이지만 명랑하고 리더십이 강해 3학년 학급반장을 맡아왔다.최군은 국민학교때부터 줄곧 1,2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92년10월에는 교육부가 주최하는 「제4회 전국 중고생 수학·과학경시대회」에서 화학부문 은상을 받아 청와대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 유신이후 재야 민주·통일운동 주도/타계한 문익환목사 생애

    ◎89년엔 돌연 밀입북… 6차례 옥고도 재야권 통일운동의 상징이었던 문익환목사.문민정부 출범이후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구상해온 그는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18일 7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미국 프린스턴신대 출신으로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한 신학자이지만 그보다는 재야운동권의 기수로 더 널리 알려졌다.지난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된뒤 지금까지 17년동안 6차례에 걸쳐 모두 11년3개월을 교도소에서 지냈기 때문이다.지난 89년 밀입북사건으로 징역7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그는 93년3월 정부의 대사면 조치로 3년3개월만에 풀려났다. 최근에는 재야의 최대 변신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에 진력하면서 요가로 심신을 단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면서 통일은 준비없이 맞아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정부의 전향적 통일정책에 기대를 거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가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나섰던 동기는 절친한 친구 장준하선생의 돌연한 죽음을 보고서부터다.유신이후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심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84년3월이후에는 재야조직을 통합한 민통련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특히 89년 밀입국사건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않고 95년까지 통일을 보아야겠다는 그는 결국 옥중생활의 여파와 고령을 이기지 못하고 소천했다.옥중서간 「꿈이 오는 새벽녘」등으로 문명도 날린 그는 19 18년 만주 북간도에서 문재인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동생 문동환목사 역시 재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날 통일운동을 위해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소재 「통일맞이」사무실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한후 체증이 생겨 평소보다 일찍 귀가해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던중 갑자기 졸도,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은 부인 박여사와 장남 호근씨 등이 지켜봤다.문목사의 시신을 검안한 한일병원 당직의는 문목사가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편 빈소가 마련된 쌍문동 한일병원에는 백기완·임수경씨등 재야인사와 이해찬 민주당의원등 정치인·대학생들의 분향행렬이 밤늦도록 줄을 이었다.
  • 「쌍재룡이회」 이색화제

    ◎기획원 정재룡국장­외무부 장재룡국장 별난 인연/경기고·서울대 동창… 동명 국장 공직생활/매달 어김없이 모임… 온가족까지 절친 『재룡이냐』 『어,재룡이구나』 한가한 시간,전화기를 들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주위의 여사무원이 까르르 웃는다.국장이 무슨 장난전화를 하는 줄 알고…. 경제기획원 정재용물가국장과 외무부 장재용미주국장.아는 사람들 사이엔 이들을 「쌍재용이회」라고 부른다.46년생 개띠,동갑나기인 둘다 소속부처에서 핵심국장인 점 그리고 현안으로 한창 골머리를 썩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기획원 정국장은 요즘 냉해로 농산물 값이 오름세를 보여 장바구니 물가가 어찌될지 불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물가통으로 알려진 그는 매일 출근하면 전날 농산물가격의 오르내림세부터 점검한다. 대미 실무창구인 외무부 장국장도 북한핵문제 때문에 녕일이 없다.최근 미·북한3단계 회담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뉴욕을 다녀오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경기고 61회 동기동창이다.『한번은 학교로 여학생한테 전화가 와 받았더니 전혀 모르는학생이었어요.정재용이 한테 온 것인데,내가 받은 거죠』 같은 반이던 3학년1반 때는 이처럼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고 장국장은 설명했다.담임선생님이 무심코 『재룡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하면 그때마다 서로 바꿔들어가 일이 벌어지곤 했다는 것이다.『모의고사 성적이 나쁘다고 야단을 치는데 이상해요.나중에 알고보니 정국장 성적이었어요』. 졸업후 정국장은 서울대 법대로,장국장은 문리대 외교학과로 진학했다.공무원 생활은 70년 외무고시에 합격,외교관생활을 시작한 장국장이 1년 앞섰다.한해뒤 정국장도 행정고시에 합격,처음엔 노동부에 배치돼 일하다 3년 뒤인 74년 지금의 경제기획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과장승진은 장국장이 앞서 했고,국장승진은 정국장이 먼저하는등 서로 사이좋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공직생활에 발을 내딜 때부터 「쌍재용이」 모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외무부는 해외공관 근무가 잦아 국내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적다.어쩌다 국내에 들어오면 그때나 잠깐 모여 회포를 풀 뿐이다.그러다 지난 90년 6년만에 장국장이 멕시코공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10월 귀국 환영모임에서 참석했던 동창들이 『쌍재룡이는 이렇게 만날 상황이 아니다』고 제안해 「쌍재용이회」가 결성돼 지금껏 한달에 한번 정도는 꼭 만난다.어쩔 때는 허름한 음식점에서,날씨가 좋으면 등산을 함께 한다.가족들도 무척 친하다. 『모임은 공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지금은 외무부 장국장이 도움을 받는 쪽이라고 한다.장국장은 『주로 변한 국내상황과 시중의 얘기를 전해듣지만,부하직원 다루는 법·정책결정 판단등에 있어 정국장의 조언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우연인지,장국장의 둘째아들과 10살 아래인 정국장의 둘째 딸 이름이 「우진」으로 똑같다.술은 정국장이 보다 세지만 식당 아가씨에게 질좋은 서비스와 안주를 받는 것은 순전히 장국장의 「국제신사」 감각 때문이라 한다.이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 순 한구음식 만찬장서 “우의” 건배/「대좌」 이모저모

    ◎“불 국민도 한국개혁에 기대 높다”/미테랑 14일 하오 방한한 프랑수아 미테랑프랑스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데 이어 이날 저녁 김대통령이 마련한 공식만찬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통해 한·불우의를 다졌다. 77세 노령의 미테랑대통령은 그러나 장시간 비행기 여행에 무리를 한듯 청와대 환영식이 끝난뒤 갑자기 구토증세를 보여 한동안 휴식시간을 가져 양측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1시간40분간 진행 ▷공식만찬◁ ○…김대통령 내외가 14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미테랑 대통령 내외를 위해 베푼 국빈 만찬은 양국관계자 1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40분동안 순한국식 음식으로 진행.이날 양국 정상은 각각 현안에 대해 상대국이 물러설 수 없도록 못을 박는 일에 만찬사와 답사의 상당부분을 할애해 정상회담의 연장같은 분위기. 김대통령은 만찬사 원고에는 없던 규장각도서 반환 약속을 상세하게 설명.김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미테랑대통령이 어느 외국의 문화재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나 한국과의 특별한 우의를 고려해 외규장각 도서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고 말하고 『내일 그중 두권이 도착한다』고 설명. 이날 환영행사 말미에 구토증세를 보였던 미테랑대통령은 건강을 회복한듯 20분간에 걸쳐 정력적으로 만찬답사를 낭독. ▷정상회담◁ ○…휴게실에서 나온 미테랑대통령은 1층 인왕실에서 휴식을 취하던중 숙소에서 긴급히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고 4시53분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정상회담장으로 이동. 김대통령은 미테랑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염두에 둔듯 『14시간동안이나 비행기를 타고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은 전형적 가을 날씨로 하늘이 매우 높다』며 날씨를 화제삼아 대화를 시작. 미테랑대통령은 『오랫동안 한국에 오고 싶었는데 지금에서야 방문하게 됐다』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한국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례. ○가끔씩 폭소도 터져 ○…김대통령과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은 하오 5시 청와대에서 역사적인 한불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협력증진방안등에 대해 폭넓게 협의.단독회담 50분,확대회담 40분등 모두 1시간30분에 걸쳐 진행된 이날 정상회담은 가끔씩 폭소가 터져나오는등 우호적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진행. 김대통령은 『각하의 방한전에 우리의 모든 언론이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도 했지만 우리 국민 모두는 외규장각 도서를 우리나라에서 볼수 있도록 희망하고 있다』고 반환을 간접적으로 요청. 이에 미테랑대통령은 『한국에 이것이 반환되도록 하는데 내일중으로 상징적으로 책 2권이 먼저 도착될 것이고 반환형식에 대해서는 「영구임대」형식이 될지,「문화교류」형식이 될지는 더 협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 미테랑대통령은 『과거 역사속에서 어떤 다른 나라의 물건이 평화적이 아닌 방법으로,즉 힘으로 옮겨가는 그런 역사가 있었으며 그러한 것이 옮겨간 나라의 유산이 되기도 했다』며 『따라서 과거에 가져간 물건에 대해서 돌려달라고 하는 요청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수년전 그리스 문화성장관이 방문해 물건을 돌려달라고 해 나와는 절친한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난처한 일이있었다』고 소개. ▷환영식◁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공식환영행사는 이날 하오 김영삼대통령및 미테랑대통령과 공식수행원,주한외교사절등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대정원에서 거행. ○“친근한 이웃이 될것” 환영식은 양국 대통령에 대한 경례,양국 국가연주,의장대사열,김대통령의 환영사와 미테랑대통령의 답사순으로 약 30분간 계속. 김대통령은 환영사에서 『이제 프랑스와 대한민국은 지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각하의 방한을 실현시킨 양국 국민간의 우정과 협력을 통해 더욱 가깝고 친근한 이웃나라가 될 것』이라고 강조. 미테랑 대통령은 답사에서 『국립묘지를 참배하면서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도래와 정착은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소감을 피력. ○…답사를 마친 미테랑대통령은 김대통령과 함께 정상회담을 위해 본관현관으로 향하던중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심한 구토증세를 보여 프랑스측 시종무관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본관1층 현관입구에 도착. 미테랑대통령의 구토증세가 멈추지않자 프랑스측은 주치의를 황급히 찾아 일단 화장실에 대기토록 했고 미테랑대통령은 프랑스측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안으로 들어간뒤 40여분간 휴식을 취했다. 이에 따라 김대통령은 손여사와 함께 대기실에서 미테랑대통령의 구토증세가 진정될 때까지 대기했고 당초 정상회담에 앞서 예정된 기념촬영은 정상회담이후로 연기.
  • 대만 총통밀사 방중/강민택과 극비 회담

    【홍콩 연합】 이등휘 대만 총통의 밀사가 지난 5월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중국 최고위 인사인 강택민 공산당총서기와 북경에서 중·대만관계등에 관해 회담했다고 중국소식에 정통한 홍콩의 문회보가 2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대만의 전유엔대표로 교통부장을 역임했으며 이등휘총통과 절친한 장건방이 이총통의 직접 지시에 따라 지난 5월13일부터 17일까지 북경을 극비리에 방문,조어대 14호루 전체를 차지하며 머물렀으며 붉은 양탄자가 깔린 영대에서 부인과 함께 강택민과 1시간50분 동안 회담했다고 전했다.
  • 문학·문예 평론가 이어령씨(이세기의 인물탐구:32)

    ◎평론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천부적 관찰력에 해박한 지식으로 언어조율/약관 22세 데뷔… 예봉·직설로 기성문단에 파문/문학의 전장르 석권… 「흙속에…」이후 한국 재발견에 몰두 전후 한국문학의 기린아·총아 타이틀과 함께 독설적 직설,명쾌의 명문으로 이어령씨가 평단에 데뷔했을 때는 온 문단은 마치 「화약고」인듯 경계의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불어온 미국의 비트제너레이션이나 서구의 누보로망 앵그리영맨처럼 한국의 뉴제너레이션이던 당시 22세의 그는 「집도 가족도,그리고 그 시원찮은 문명이란 것도 학식도 없이 가진 것이라곤 분노와도 같은,자엽과도 같은 광기와 젊음뿐」이었으며 「생존하기 위하여 문관노릇을 하던 교수님들 밑에서 반세기전의 증권같은 실력없는 낡은 노트의 학설을 베끼며 인생을 배웠고」 「모든 울분과 공허를 자취방에 드나드는 늙은쥐를 두들겨 잡는 것으로나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문학을 하고 있는 몇몇 문단선배들을 만나보고 「기절할 정도로 실망」하여 그의 데뷔작품인 「우상의 파괴」에서 문단사에 남을 만한 중견문인들을 향해 「미몽의 우상」 「사기사의 우상」 「우매의 우상」 「영예의 우상」,이미 문단의 큰 봉우리로 우뚝선 노대가들마저도 「현대의 신라인」으로 신랄하게 통박하여 문단을 온통 긴장시키기에 이르렀다.그때 그의 눈에 비친 작가·비평가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직무유기를 하는 한가한 문사」에 불과했으며 「불난 집에서 바둑을 두고 포탄이 터지는 전선에서 자장가를 노래하는 사람같아」 「파괴돼 마땅한 우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때 「황무지」나 다름없는 문학풍토에서 「한국작가는 세계의 고아」 「현대 문명의 외곽지대에서 서식하는 뿌리없는 버섯」,이런 「불모의 상황을 영구화하려는 듯한 기괴한 권위」를 젊은 그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우상의 파괴」로 비판 그러나 예절과 겸허가 없는 그의 패기는 당연히 무례로 간주되었고 이 「맹랑한 문제아의 출현」을 놓고 문단은 한때 「일진광풍」이니 「일진청풍」으로 의견을 대립하는 사태가 일기도 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6·25전 한자어세대인 제1세대는 「식민지역사에 반항하여 망명이나 감옥으로 가든지,친일적인 식민지인으로 순응하든지」의 선택의 여지에 놓였던 것에 비해 전쟁직후의 20대,이른바 제2세대들은 일본어도 제나라 말도 서툴고 한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어중간한 허공에 매달린 역사의 기예 같은 존재」라고 또한번 꼬집었다 이제 문단은 더이상 그를 좌시하거나 간과하려 들지 않았다.일부 문인들은 그로 인해 어쩌면 이제까지 쌓았던 공든탑이 무너지고 문인으로서의 생명인 명예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느끼는 듯했다.그의 문재와 번득이는 지성이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기성문단은 한결같이 그를 냉혹하게 외면했다. 심하게는 「전생에 그리스의 소피스트케이션」이나 견석백마의 곡론가로 매도하고 그의 날카로운 필봉을 완강하게 견제하려 들었다.그때 빛나는 재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타깝게 몸부림치는 그의 적들을 향해 「알렉산드리아」의 작가 이병주씨는 『나는 동족으로서,동시대인으로서 우리에게 이만한 사재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 『이런 재능을 우리가 가지고 있음을 거침없이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나섰다. 그의 절친한 후배인 작가 최인호도 「문학이라는 삼장법사를 모시고 예술이라는 구도의 길을 가는 손오공」,문학평론가 김현도 「단군이래 순발력과 기지가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여러글에서 밝히고 있다.「그는 과연 동서예술을 천의무봉으로 전개해나갔고 문학평론을 예술로 승화시킨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이에 대해 이어령씨 자신은 「희극과도 같은 만용을 부려야 했던 성급한 과실들은 정말 나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던가」란 글에서 「나는 문단생활을 해오면서 많은 평론을 했다.그리고 논쟁할 때마다 옷이 찢어지고 얼굴에 흙이 묻고 코피가 흐르던 어린날의 그 주먹다짐을 생각하곤 했다.그러나 그 아픈 상처자국을 통해서 나는 그 논쟁이 실은 하나의 대화이며 문학에 대한 애정이라는 의미를 확인했다」고 부연하고 있다. ○“언어 연금술사” 찬사 그후 그는 어린시절의 추억을오늘의 문화에 비쳐본 에세이와 한국문화·문명에 눈을 돌려 「흙속에 저바람속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같은 주옥의 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했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문명비평가」로서 재빠르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독일에서 돌아온 전혜린은 센세이셔널한 언어의 풍운을 몰고온 그를 보고 「놀라운 기지,번득이는 혀,해박하고 비상한 두뇌와 창의력」은 마치 아르튀르 랭보의 「언어의 연금술사」에 못지 않다고 찬탄해마지 않아 그는 다시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반짝거리면서 쏟아져 들어오는 원고청탁을 피해 신문사 캐비닛속에 숨어야 하는 행복을 누렸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흙속에…」는 1년만에 10만부,지금까지 60만부이상.한림출판사가 펴낸 영어판은 미컬럼비아대 동양학교재로 채택되는가 하면 대만 원성문화도서 공응사가 번역한 「사토사풍」표지에 쓴 영문이름자인 Lee o young으로 인해 한국에 온 중국문인들이 「이오양」을 찾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제로부터 거칠 것도 걸릴 것도없이 이어령문학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자 그는 소설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무익조」,희곡 「기적을 파는 백화점」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등 소설·희곡·시·수필에까지 문학의 모든 장르를 석권해 나갔다. 그를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노릇이다.신문에 연재되는 글 또는 강의·강연에서 보면 그는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수 있는 일초일목도 놓치지 않고 그속에 깃든 심오한 뜻과 사색의 깊이를 20 00년대를 향한 민족성 구성에 치밀하게 연결시켜 나간다.그의 천부적 관찰력은 하잘것없는 단서 하나에도 외과의사의 날카로운 메스처럼 가해져 어느부분에서든지 문화의식의 실체와 만나게 되는 기쁨을 활짝 열어준다. 그의 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 그 말속에는 그때마다 현목과 일총의 영롱함이 실려 있다. 그는 어떤 강연도 미리 준비하는 법이 없다.준비자체가 불편한 걸림돌이다.다만 청중의 눈빛 하나만으로 모두에서부터 결론을 예고해버린다. 이른바 「이어령문체」로 지칭되는 그의 글은 「말이 혹은 문체가 물이라면 또는 불이라면 또는 바람이라면 또는 화살」이라면 글속에서 「물은 위안과 씻김의 언어,불은 개혁과 새로운 건설의 언어,바람은 몽상과 생성의 언어」이고 「화살은 허무의 허공을 날아가서 마침내 사물의 핵심을 쏘아 떨구는 관통력 높은 사냥꾼의 언어」이며 「시정과 미사에 감싸인 지성의 광휘」로 그 명중률이 정확하다고 평받고 있다. ○「레인맨」 보고도 눈물 그의 창의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손꼽힌다.88서울올림픽때의 「벽을 넘어서」와 텅빈 그라운드에 은빛 굴렁쇠장면은 여백과 침묵속에서 팽팽하게 긴장감 감도는 매화 한송이를 그리는 동양화 이미지를 살려 신아시아 미학추구의 극치로 찬사된 바 있다. 「작은 것은 모두 아름답다」는 일본인과 일본문화를 비평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충격이후 그는 아사히,요미우리신문과 NHK방송이 주최하는 강연에 자주 초청되어 회장은 언제나 지성의 관객들로 넘치고 있다. 「독자를 시험하는 경구」 「서구에 치우친 일본으로 하여금 문화에 대한 반성」을 하게하는 그의 강연은 재치와 기발한 장단점 지적,상상치도 못한 한국 습속과의 비교론으로 언제나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아산의 유교적인 지주집안에서 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나 보타이에 양복,구두와 바스켓같은 가방을 들고 자주 서울나들이를 하는 도련님으로 성장하면서 막내답게 장난이 심했고 얼굴엔 노상 상처투성이,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다 두자리이상의 보태기 빼기등 숫자놀음은 딱 질색,그러면서도 컴퓨터광이라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끝없는 원고청탁으로 하루 3∼4시간 컴퓨터앞에 앉아 실은 물흐르듯 글을 쓰는 것 같지만 그처럼 어렵게,고통스럽게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정도다. 집필의 산실인 보고와도 같은 서재는 수천수만권의 서적,그가 좋아하는 CD·LD,필요한 것은 다 갖춰져 있으면서도 뜸을 들이고 갑자기 쓰고 까다롭게 다듬는다. 냉기와 온기,감성과 지성을 동시에 갖춰 남보기엔 지나치게 도시적이고 세련되어 숨막힐 듯한 완벽주의로 보이지만 그는 영화 「레인맨」을 보고 눈물짓고 수많은 넥타이중에서도 강의가 잘되던 넥타이를 다시 골라낼만큼 천진한 면이 천성이다. 흘겨보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그는 그의 책 제목인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처럼 바람불지 않아도 언제나 앞을 향해서만 똑바로 달려왔다.그리고 그는 더이상 아르튀르 랭보의 언어의 연금술사이기를 원치 않는다.자신의 푸른 생명을 증명하는 언어의 슬기,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새로운 언어탐색을 위해 그는 단지 쉬지 않고 여전히 똑바로 달려나갈 뿐이다. □연보 ▲1934년1월(음력19 33년11월15일) 충남온양 출생 ▲1956년 서울대문리대 국문과 졸업 ▲1960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1958∼60년 경기고교사 ▲1960∼66년 서울대강사 ▲1966∼67년 성균관대강사 ▲1960∼72년 서울신문·한국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 ▲1964년 경향신문 구미지역특파원 ▲1970∼71년 미국무성초청 도미 ▲1972∼73년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1967∼89년 이화여대교수 ▲1972∼86년 월간「문학사상」주간 ▲1986∼89년 이대 기호학연구소장 ▲1987년 단국대 대학원(문학박사학위) 일외무성초청 동경대 비교문학과교수(81∼82년) ▲1989년 일본대 국제문화연구원교수,환기재단초청 뉴욕체류 1982∼현재 일본생산성본부,일본문화디자인협회,NHK,일본대판JC,신일본제철,독매신문,아사히신문 초청 강연 수차 ▲19 90∼91년 초대 문화부장관 ▲1956년 「비유법논고」「카타르시스 문학론」으로 월간 「문학예술」지등단.「현대문학의 위기와 출구」「문학적 혁명기를 위하여­우상의 파괴」(한국일보)발표이래 「흙속에 저바람속에」(62년 경향신문연재) 「나르시스의 학살­이상의 시와 난해성」 「모래성을 밟지 마시오­문단 선배들에게 말한다」「조롱을 여시오­시인 서정주선생에게」 「영원한 모순­김동리씨에게 묻는다」 「자유문학상을 향하여」 「잠자는 거인­뉴 제너레이션의 위치」등 화제의 비평 1백50여편. 「저항의 문학」(59년) 「지성의 오솔길」(60년) 「고독한 군중」(61년) 「오늘을 사는 세대」(63년) 「흙속에 저 바람속에」(63년) 「이어령에세이 옴니버스」(66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75년) 「이어령 신작집(12권)」(78년) 「이어령전집(20권)」(85년) 「축소 지향의 일본인」(82년 일본 학생사) 「축소 지향의 일본인」(한국어판·영어판·불어판)(82년) 「배구□ 일본□ 독□」(PHP 일본)(83년) 「하이구(배구)문학의 연구」(한국어판 홍성사)(84년)문장대백과사전 강연집「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92년)소설집「둥지를 나는 새」 상하권(93년) 79년 대한민국예술상 수상
  • 몸매·창의력·끼 겸비한 춤의 요정(이세기의 인물탐구:30)

    ◎환상의 율동속 감성·지성 융해… 칠정묘파/「…슈퍼스타」로 데뷔… 문학성 짙은 작품 추구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한다.「우리의 걸음걸이는 너무 쉽고 익숙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스텝을 결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신기한 것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박명숙은 최근 그가 번역한 샐리 베인즈의 「포스트 모던댄스」서문에 이 글을 인용하고 있다.그는 모든 것은 춤,모든 움직임은 춤이며 우리의 일상적인 보행조차도 이미 춤임을 알고있는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보행도 춤으로 인식 지금부터 20년전 그가 「지저스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처음 맡았을때는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손가락질 받는 한낱 외롭고 초라한 여인을 표현하는데 불과했다.그 무대는 청순한 처절미로 일관돼 있었다.그러나 지난해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진 「…수퍼스타」 20주년 기념공연에서의 막달라 마리아는 인생의 고락과 희비,번뇌와 갈등을 넉넉하게 껴안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승화되어 그날 관객들은 사랑의 힘으로 신에게다가간 절실한 기원을 절감할 수 있었다. 소설이나 시,연극이나 영화처럼 언어없는 춤이 신비한 주술임을 체험한 순간이었고 특히 하이라이트를 이룬 「어떻게 그를 사랑할지(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박명숙솔로는 평자들로 하여금 「그는 해내고야 말았다」는 평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춤은 대부분 짙은 문학성과 철학성,그리고 연극적인 요소와 장식적 요소를 작품전편에 깔고있는 점이 특징이다.흔해빠진 일상적인 것을 일순간에 초월하여 의외성과 경이로움으로 역작용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빗발치는듯한 눈부신 알레그로 콘브리오의 「비둘기만 날아가다」가 그랬고,그동안 끈질기게 추구해왔던 곡선과 직선을 사선으로 붕괴한 「시간기행」「풀잎환상」등이 그렇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일에도 의연하게 대처한 것같지만 실은 그의 내면은 언제나 당황하고 망설이고 거부하는 습관이 배어있다.그것은 섬약한 감성과 투철한 지성감이 복합적으로 대립되어 어느 한쪽의 우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려는 투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한 예로73년 육친같은 스승인 육완순씨가 영국의 록오페라 「…수퍼스타」를 현대무용으로 재구성·안무하여 그에게 막달라 마리아를 맡겼을때,그래서 모든 무용계가 육완순을 잇는 제2의 스타탄생을 기대하고 있을때 그는 개막을 앞둔 몇시간전 소리없이 도망쳐버린 적이 있었다.물론 소동과 곡절끝에 어렵게 막이 올려지긴 했으나 그후 자신의 작품이 막이 오를때도 바로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두려움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성격은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다.그러나 연극계와 화단,음악 문학 사진 조각 각 분야의 사람들과 절친한 우정을 누려 공연장이나 전시장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얼굴의 하나이기도하다. 박명숙은 어릴때부터 춤췄다.사업을 하는 박승규씨와 김대순여사 사이의 3남매중 외동딸.어머니의 손에 끌려 국립국악원 김부남씨에게 고전무용,진명여중 2학년때 김정욱씨에게 발레,여고 2학년때 육완순씨의 현대무용발표회를 보고 그는 그가 선택해야 할 길을 「두눈을 크게 뜨듯」결정할 수 있었다.육완순씨는 박명숙의 극과극의 기질을 무엇보다 높이 샀다.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 모르고 자랐으나 과묵하면서도 참을성 있고 화려하면서도 겸손하고,그리고 무엇보다 욕심이 도사린 승부근성이 대성의 지름길임을 간파한 것이다.더구나 나는 듯한,출렁이는 듯한 긴 팔의 선은 마치 하늘을 비상하는 새의 선회처럼 신선하기만 했다.그의 두 팔에 대해선 같은 경희대 교수이며 무용계 대선배인 김백봉씨도 「백만불짜리」라고 칭찬한 적이 있다.무용가가 아름다운 체구에다 재능,거기에다 번뜩이는 창의력까지 지녔다면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모두들 그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고 최욱경과도 절친 단지 한사람,연전에 타계한 화가 최욱경만은 예외였다.생전에 천재화가로 불리던 최욱경의 박명숙에 대한 사랑은 좀더 끈끈하고 각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외국에 나가 마사 그레이엄을 더 배우고 싶어하면 최욱경은 『네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라.그 사람의 것은 그의 것.외국은 여행만으로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그가 결혼할 때도 「예술가의 결혼은 난센스」라고 쏘아붙였다.『춤이 있는데 결혼하다니,너는 너무 욕심이 많은가』라고.그후 결혼해서 남매를 낳고 이제부터는 「춤」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지자 『결혼과 아이가 왜 춤에 방해가 되는가? 결혼과 아이는 네 예술을 더 살찌웠다.네가 무용가라면 죽을 때까지,그리고 죽을 때도 무대에 서라』고 충고했다. 광기와 신기없이 늘 조용한 박명숙도 최욱경의 천장까지 그림으로 들어 찬 여의도 화실에 들어서면 언제라도 즉흥무를 출수 있게 되었고 최욱경은 그런 박명숙을 모델삼아 춤추는 그림들을 얼마든지 남기고 있다. 최욱경이 타계하자 친형제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던 그는 작품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화려한 장례식춤을 만들어 사랑하던 화가 친구에게 바쳤다. 박명숙은 고지식하고 외곬인 성격으로 한곳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또 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굵은 실로 뜬 숄을 두르고 앉아 연습실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만으로 「다시!」이렇게 지시하고연습한다.튀는 사람이 있으면 사정없이 몰아붙이되 상대방이 좋은 움직임을 보이면 작품에다 연결시켜 나간다.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런 그를 따르고 아끼고,그도 제자들이 「나의 재산,그래서 나는 부자」라고 말할 정도다. 1주일에 20시간의 강의,요즘은 26일로 다가온 춤발표회를 앞두고 연습에 쫓겨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지만 부군 유대렬씨는 「춤만 제일이냐?」고 나무라는 법이 없다.오히려 일만 아는 아내가 애처로운 나머지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라고 지켜보고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딸 희주(19·이화여대무용과)는 어릴때부터 남몰래 춤추어왔고 지난해엔 혼자서 동아무용콩쿠르에 나가 금상을 타왔다.그전까지는 한동작도 춤을 지도하지 않았으나 「피는 속일 수 없어」 비로소 감싸기로 마음먹었다. ○명분·사명감에 눈떠 이제 박명숙은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됐다고 말한다.한사람의 아내·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그는 무용가이고 제자를 길러내야할 교수다.단 한번도 선생이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지만 스승과선배들의 현대무용 30년을 잇기 위한 뼈저린 흔적이 자신에게 닿고 있음을 피하려들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뚜렷한 명분과 사명감에 눈뜨자 그 옛날의 두려움과 공포가 다시 움트려하고 있다.그래서 이를 씻어버리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몸속으로부터 솟구쳐나오는 묘한 힘에 이끌려 담담히 무대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다.「언제나 박명숙,나의 방식대로」 춤추고 있을 뿐이다. 더글러스 던의 「춤추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케네스 킹의 「춤추는 존재가 되는 것」,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막달라 마리아처럼 신에게 다가가는 정신의 춤을 추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꿈일 것이다. ▷연보◁ ▲1950년 서울 효자동 출생 ▲1972년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동대학원 졸업 ▲1976년 N Y 머스커닝햄 마사 그레이엄 엘빈에일리 현대무용학교 수료,뉴욕대학 대학원 무용과 박사과정이수(NYU DA코스),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81년부터 현재 경희대무용과 교수,박명숙 서울현대무용단 예술총감독,한국 현대무용 협회이사,한국무용협회이사,경희대 무용과교수 ◇공연 ▲1973년 팀라이스 작사·앤드루 웨버 작곡 육완순안무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역으로 데뷔이래 20년간 2백여회 출연.그외 박명숙 현대무용단(78년이래 해마다)제1회 한국현대무용향연(82년이래 해마다),한국컨템포러리 무용단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아시아무용제 참가,제10회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무용제,88서울올림픽 개회식(엠불렘춤)등 국내 해외공연등 수백회 ▲1993년6월26일 박명숙춤 「구십삼년6월」 문예회관대극장 예정 ◇대표작 「잿빛우울의 거리」「얇은사 하이얀 고깔은」「초혼 ⅠⅡⅢⅣ」「살풀이」「학ⅠⅡ」「소용돌이치는 영혼」「결혼식과 장례식」「그날새벽 ⅠⅡ」「비옷을 입은 천사」등 78편 안무 수 상 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 문공부장관상,대한민국 무용제 안무상(80년)·개인상(82년),86예술가상,코파나스상(86년),서울무용제 안무상(91년)
  • 외언내언

    대학입시에 내신성적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고교생들의 커닝풍조가 날로 기승을 더하는 모양이다.책상아래에다 나사처럼 돌돌 말리는 커닝페이퍼를 붙여놓거나 허벅지에 고정시키는 것,지우개 방향돌리기·빌리기는 이미 흘러간 수법이고 걸핏하면 커닝에 동참시키기 위해 친구를 협박하거나 구타하기도 한다.일부 학교에서는 학급석차를 높이기 위해 집단으로 작당 커닝을 하는 예도 있었다. 「선생님 2번문제에 4번이 안보여요」하면 정답은 ④번,또 시계초침을 4등분 하여 답이 ①번이면 1초에서 15초사이,②번이면 15초에서 30초사이를 볼펜으로 톡톡 두들겨 신호를 보내는 식이다. 이 커닝극성 때문에 밤새 책과 씨름하면서 철저히 공부한 입장에서는 여간 억울하고 불공평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자신이 노력한것 만큼의 성과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면 「열심히 해서 뭐하느냐?」는 회의가 생길수도 있다. 과연 남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를 훔치는 것은 돈이나 물건을 훔치는 일과 다를바 없다. 「커닝」은 교활·간사의 뜻을 지녔지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치팅(cheating)」(속임수)이라고 해서 사기꾼의 수준으로 취급하여 커닝이 적발되는 즉시 퇴학처분하는 엄격한 학칙을 두고 있다. 이런 좋지않은 풍조가 국민학교 교실에까지 번져 어린이들의 커닝행위는 상상보다 극심한 양상이라는 것이다.학부모와 학교측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른바 「커닝 가림판」을 사용하게 했고 이 가림판 사용은 지역구별없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가장 절친해야 할 「내짝」을 가림판으로 차단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가림판 겉면에는 「보면 죽여」「보면 고발」이라는 문구까지 쓰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아무리 「점수쟁탈」의 세상이라지만 해맑아야 할 동심에 학우불신·경계심은 살벌하고 끔찍하기만 하다.친구 협박도 마찬가지다.그런 지경이라면 「가림판」속에서 더 간교하고 교활한 커닝이 이루어지지 않으란 법도 없을 것이다.
  • 모방과 표절(외언내언)

    입체파 미술의 두 거장 피카소와 브라크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그러나 어느해 여름 자신의 시골별장에 피카소를 초청한 브라크는 오브제를 이용한 새로운 창작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손님 피카소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란다.피카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실제로 피카소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식사」,벨라스케스의 「궁정의 시녀들」등 남의 명작들을 해체,재구성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그럼에도 피카소에게 「표절」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은것은 그가 남의 작품을 그대로 베낀것이 아니라 남의 작품과 아이디어를 모방해 자신의 것으로 다시 창작해냈기 때문이다.「창작은 모방의 산물」이라고 할만큼 표절과 모방의 한계는 불분명하고 모방은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돼왔다. 그러나 우리 문화계의 고질적인 표절현상은 피카소나 모방문화론을 들먹이기도 창피할만큼 심각하다.해마다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는 미술계는 물론이고 문학,음악,무용,방송,만화등 우리문화 모든 분야에서 표절의 뿌리는 깊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이번에 13곡의 인기가요에 무더기로 표절판정을 내린것도 그 표절의 뿌리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준 셈이다.더욱 심각한 문제는 표절가요의 대상이 대부분 일본가요라는 것이다.일본가요는 국내에서 들을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마음놓고 베끼는 것이 그동안 가요계의 상식으로 통해 왔다. 예술가에게 있어 표절은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더욱이 대중예술에서의 표절은 작가 자신의 자살행위일 뿐만 아니라 대중의 정서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더 큰 범죄행위가 된다.따라서 표절을 방지하기위한 철저한 사전예방과 제재조치가 마련되어야 할것이다.만연된 표절문화를 뿌리 뽑는 일이 새시대의 공륜과 방송심의위의 기능이 아닐까 싶다.
  • 사정태풍/금융심장부 은감원 강타 “충격”

    ◎“장부원장마저”… 고위간부 전전긍긍/금융계,“다음 차례 누구냐” 불안·초조 사정태풍이 연일 금융계를 강타하고 있다.처음에는 시중은행 방향으로 진행하던 「열대성 저기압」이 진로를 국책은행 쪽으로 바꾸는가 싶더니 급기야 금융의 심장부인 은행감독원에까지 불어닥쳤다.앞으로의 진로는 예측불허이다.언제 누가 다시 사정태풍에 휘말릴지 온 금융계가 떨고 있다. 사정이 장기화 하면서 금융계는 상대방의 비위사실을 당국에 일러바치는 투서 파문에 휩싸이고 있다.사정당국간에도 건수 올리기 경쟁이 불붙어 금융계가 만신창이로 변해가는 느낌이다.과거의 해묵은 비리는 이제 일소에 부치고 그대신 새정부 출범이후 저질러진 비리에 대해서는 엄단하는 「미래지향적 사정활동」이 아쉽다는 지적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물에 스스로 걸린꼴” ◎…장기오 은감원부원장이 처음 감사원에 불려간 것은 지난 26일 하오였다.장부원장은 이용성 감독원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후 감사원에서 이날밤 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는 후문. 장부원장이 이날 저녁십여일 전부터 예정돼 있던 조 순전총재의 송별회식 모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참하면서 부터 한은의 몇몇 임원들 사이에는 그가 사정과 관련해 좋지 않은 일이 터진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돌기 시작. 장부원장은 다음날인 27일 출근하자 마자 감독원장실과 총재실로 직행,『사표를 내야 할 것 같다』고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데 이어 이날 하오 또한차례 감사원에 불려갔다 온뒤 이원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고 관계자들이 전언. 장부원장은 『수표추적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감사원이 지난달말 은행감독원에 의뢰,실시한 금융계 인사 1백14명에 대한 단자사 계좌조사에서 자신에 관한 비리의 단서가 잡힌 것 같다는 얘기다.결국 장부원장은 「자기가 던진 그물에 스스로 걸려든」셈이다. ○“이미지손상” 우려도 ◎…금융계에는 그가 절친한 친구가 경영하는 코코실크(주)에 1억원을 빌려주고 신한투금에 부인명의 예금계좌를 개설,정기적으로 이자를 받아왔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감사원은 예금계좌 조사에서 이 사실을 포착,국세청 직원과 함께 코코실업 관계자들을 불러 입금되는 돈이 뇌물인지 여부를 집중 조사했다는 후문이다. 경일투자금융으로 5백만원을 받은 사실이 적발된 경위에 대해 금융계 내부의 투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 경일투자금융에 대한 검사업무는 감독원 검사5국 소관이며,이사건 당시 장부원장은 수석 부원장보로서 검사6국을 관장했기 때문에 직접 검사업무와 관련해 경일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한은 주변의 얘기다. ◎…지난해 7월 정보사령부 부지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국민은행은 이번에 다시 두명의 전·현직 임원의 비리가 사정 당국에 적발되자 서민과 친근한 은행으로 자리 잡은 이미지가 손상받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는 모습. 국민은행은 특혜대출과 사례금 수수 등의 비리가 적발된 장태식부행장보에 대해 재무부와의 협의를 거쳐 이날자로 면직 조치했다.비자금 조성및 횡령 사실이 드러난 김재식 국민리스사장은 이 은행 부원장보로 있다가 지난 90년 3월에 자회사인 국민리스사장으로 옮겨앉은 인물.
  • 금융계사정 본격화 신호탄/「제일은행 편법대출」 공개수사 언저리

    ◎국책은간부 내사 겹쳐 장기화될듯 「사정칼날」이 마침내 금융계에도 미쳐 일파만파를 불러오고 있다. 검찰과 은행감독원이 14일 제일은행의 「학산산업개발 부정대출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수사및 검사에 착수하자 박기진제일은행장(63)이 즉각 사임했다. 동생인 경진씨(56)가 경영하는 학산산업개발도 이날 부도를 내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달말 감사원의 국책은행 임직원 1백14명에 대한 내사에 이어 검찰까지 조사에 가세해 금융계의 「사정한파」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은행등 금융기관의 고질적인 비리인 커미션수수,꺾기강요,부정편법대출 등을 바로 잡아나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제일은행에 대한 검찰의 수사착수 사실이 확인된 것은 14일 상오8시50분.서울지검 특수1부 김진태검사가 이날 상오 학산산업개발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 압구정지점이 이회사에 부정대출한 혐의가 있다며 은행감독원에 검사를 의뢰한 사실을 감독원측이 즉각 공개했다. 은행감독원은 특정법인이나 개인의신용정보를 다루는 금융감독기관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이 사실을 기자들에게 발표,검찰의 수사착수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에따라 은행감독원은 즉각 검사1국 직원3명을 제일은행 압구정지점에 보내 학산산업개발에 대한 대출금중 편법이나 규정을 어긴 사실이 있는지에 대한 특검에 착수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감독원 주변에는 이날 상오부터 박행장의 사임설이 떠도는등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끝내 이날 하오 박행장이 사임을 발표했다. ○…박행장은 이날 하오2시30분쯤 긴급히 열린 이사회에서 『사태의 조속한 수습과 사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물러나기로 했다』며 『개인적으로 은행에 물의를 끼쳐 죄송하다』고 심경을 토로. 제일은행은 이에따라 이철수현전무가 후임 행장이 선임될 때까지 행장직무를 대행하게 된다. 후임 행장에는 이전무의 기용이 확실시 된다는 것이 금융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사임한 박행장은 지난 91년2월 취임한이래 영업신장에 남다른 수완을 발휘,제일은행이 91·92년 연속 은행감독원의 평가결과 가장 우수한 은행으로 선정되는데 크게 기여해 금융계에서는 뛰어난 「은행경영인」으로 알려진 인물. 그러나 박행장은 지점장 인사는 3개월마다 수신실적을 반영해 단행하는등 일부 독선적 경영으로 행내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으며 이로인해 내부 투서로 끝내 「사정바람」에 휘말리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계에서는 박행장의 불명예퇴진이 불가피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의 능력과 업적을 고려할때 아까운 인물』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반응이다. 대구 계성고와 대구대를 나와 「TK」출신인 박행장은 지난 55년 제일은행에 입행,대구지점에서 이원조의원(민자당)과 함께 근무한이후 줄곧 인연을 맺어온 절친한 친구사이로,은행장 승진때에도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산개발은 지난 12일 교환에 돌려진 2백11억원을 막지못해 1차부도를 냈으며 13일 이중 대동은행 삼성동지점 5억원과 한미은행 무교지점 6억원은 입금이 됐지만 제일은행 압구정지점에 돌아온 2백억원은 결제하지 못해 부도처리 됐다. 14일 현재 부도를 낸 이회사외 금융기관 차입금은 대출금이 제일은행(4백14억원)·서울신탁은행(2백7억원)·보람은행(50억원)·주택은행(20억원)·한미은행(18억원)·대동은행(10억원)등 6개은행에 7백19억원이며,지급보증은 제일은행(1백56억원)·서울신탁은행(93억원)·대동은행(63억원)등 3개은행에 3백12억원이다. ○…부도처리된 학산건설은 박사장이 지난 82년 경북 달성에서 설립해 서울등 수도권지역에서 종합건설업을 해온 중견업체이다.대구 계성고와 경희대를 졸업한 박사장은 처음 현대그룹에 입사한뒤 승승장구,정주영회장 아래서 인천제철사장을 지냈으며 82년 현대측의 분가방침에 따라 독립,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해 5월에는 포항시에서 가장 높은 지하4층·지상20층짜리 학산타워를 건립,상가와 오피스텔등으로 분양중이나 실적이 좋지않아 자금압박을 받아왔다.
  • 「YS는 못말려」 유머집 화제

    ◎자칭 오른팔 불러 “내가 왼손잡이인거 아나”/정치·사회적 현실 풍자 등 2백10여건 담아 『YS가 안기부의 기구를 축소하고 안기부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말 것』을 지시하자 기자들이 배경을 물었다. 『안기부장의 국무회의 참석은 통상적인 관례였는데 불참토록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그러자 YS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몰라서 묻노.장관들이 대통령과 회의하는데 부장이 어떻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노.국장도 못끼는데』 김영삼대통령을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가 도서출판 미래사(대표 김준묵)에서 다음주 중 출간된다.이 유머집은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새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개그작가 장덕균씨(27)가 집필한 이 유머집은 대학가 등에서 떠돌던 김대통령에 관한 유머를 간추린 것.여기에 지난 대선 이후 최근까지 대통령의 동정을 기초로 창작한 우스개까지 모두 2백10건을 담았다. 이 책은 김영삼대통령을 희화한 것이나 단순한 유머가 아닌 우리의 정치·사회적인 현실을 풍자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자기가 대통령의 오른팔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심기가 불편해진 YS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들였다.「니가 내 오른팔이라고 떠들고 다닌다지」 그는 몹시 민망해 변명을 늘어 놓았다.그러자 YS는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아니다.니 내 오른팔인거 맞다」고 하자 그의 얼굴이 환해졌는데,「근데 니 내가 외손잡인거 아나」』 이 유머집은 또 김대통령의 성품이나 사생활 등 과거에는 활자화가 불가능했던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절친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축하하이.부인이 그리도 고생하더니 이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구만」그러자 YS가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고.언제는 퍼스트 아니었나.우리 집 사람은 절대 세컨드 아이다」』 이 책을 기획한 미래사 김대표는 『단순한 우스개로 웃고 넘겨도 좋지만 이 책으로 우리 사회의 새로운 바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면서 『김대통령에게도 기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금융계 “서울상대 14회시대”

    ◎재무장관·감독원장 등 임원급 30명 포진 금융계에서 서울상대 14회 졸업생들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달 홍재형외환은행장이 새정부의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발탁된 데 이어 25일 이용성중소기업은행장이 금융계의 감사원장인 은행감독원장에 제청됨으로써 서울상대 56학번 시대가 열리고 있다. 두사람은 대학 시절 각각 명문고인 청주고와 경기고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데다 재무부에서 공직생활을 똑같이 시작,외환 및 국제금융 분야에서 30여년간 선의의 경쟁을 하며 은행장을 거쳐 현직에 오른 절친한 친구 사이. 이때문에 금융계의 서울상대 14회 졸업생들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경영을 놓고 동기생간에 펼쳐지는 선의의 경쟁이 볼만하고 이들이 파워그룹을 형성할때 생기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56년 서울 종암동의 홍릉캠퍼스에 어려운 경쟁을 뚫고 입학한 3백명 가운데 현재 금융계의 임원 이상급 인사는 30여명을 웃돈다. 이들은 「56동창회」라는 별도의 모임을 결성,1년에 한번씩 우의를 다지고 있다.금융계 인사끼리의 별도 모임은 아직 없다. 금융계 인사 가운데 은행장급으로 기술신용보증기금 민해영이사장·경남은행 김형영은행장·이상철 전국민은행장·권태원전신용보증기금이사장 등이 있다. 전무급으로는 서울신탁은행 김영석전무·중소기업은행 김봉규부행장·산업리스 송용상사장·농협 천경옥부회장·국민은행 송달호부행장 등이 포진,차세대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홍장관은 이상철전국민은행장,김재기외환은행내정자와 함께 한때 금융계의 청주고 삼총사로 불렸다. 이원장은 민이사장·권전이사장·이준용대림산업부회장·노창희주영대사등 50여명의 경기고출신 상대생의 리더 역할을 하며 상대를 수석졸업했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74돌 기념일에 찾아본 박태현옹

    ◎올해도 부르는 “기미년 3월1일 정오…/「3·1절 노래」의 작곡자를 아십니까/이완용암살기도 형의 의거 악상으로/독립정신 표현… 48년 작곡공모에 당선/선열의 항일정신 퇴색이 쓸쓸한 86세 노년 혹독한 민족수난사의 하나로 기록된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유감없이 보여준 3·1운동이 1일로 74주년을 맞았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는 3·1운동 주역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3·1절 노래를 부르며 다시금 그들의 민족정기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매년 갖는 3·1절기념식에서 불려지는 3·1절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박태현옹(86)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이날이 되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박옹은 단지 우리 음악사에서 동요작곡가로 한두어줄로만 소개돼 있을 따름이다. 누가 일부러 그를 홀대하려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민족의 수난과 굳굳한 정신을 애잔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한 이 노래를 만든 박옹은 우리 기억속에 흐려진 채 성남의 한 아파트에서 쓸쓸히 다시 맞은 3·1절에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형태은씨를 생각하며 회한에 잠긴다. 그가 노후에 거처하고 있는 곳은 성남시 하대원동의 13평짜리 주공아파트 7동 202호. 그는 최근 서울아카데미 앙상블의 총감독으로 일하고 있지만 고령으로 자주 나가지는 않으며 주말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다. 부인과는 6·25때 헤어지고 2남5녀의 자식들은 모두 성장해 외국에서 살고 있어 혼자 쓸쓸히 지내는 그를 찾은 기자에게 그는 덥썩 두손을 잡으며 지나간 세월을 떠올린다. 그가 3·1절노래를 작곡하게된 계기는 48년 정부수립직후 이범석초대국무총리가 3·1정신을 기리기위해 당시 국학대학원장이었던 위당 정인보선생이 쓴 노래말에 붙일 곡을 공모하자 이에 응모,당선된 것. 그는 『훌륭한 작곡가들이 많아 응모할 생각은 없이 3·1운동의 의미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대로 작곡해 놓았다가 우연히 내놓은 것이 당선됐다』며 『이 노래가 살아 숨쉬는 독립정신을 표현할지는 자신 없었다』고 술회한다. 평양의 한 미곡상의 2남5녀 중 6째로 태어난 그는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에 진학,영문학을 공부하다 중학교선배이며 절친한 이웃 형인 안익태선생의 첼로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6년 일본 도쿄음악학원에서 4년동안 첼로를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한때 OK레코드음반회사에서 자신이 작곡한 「누가 누가 잠자나」「산바람 강바람」등 우리 귀에 익은 동요레코드도 출반했다. 이어 38년 이후 서울의 광신상고·경성고보등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지휘자로 일하던 그는 해방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음악계장·편성계장으로 6·25때까지 근무하면서 「나팔꽃」을 비롯한 창작동요보급에 앞장섰다. 민족비극의 6·25와중에서는 애국심을 일깨우기 위해 「태극기」등 전시동요도 작곡하며 이은상·윤이상씨등과 군위문공연으로 전선을 누비기도 했다.그는 55년 김동진·이흥렬·나운영 등과 함께 한국작곡가협회를 설립,전후의 메마른 우리사회에 노래로 희망을 불어넣는등 활발한 활동을 폈지만 후세사가들로부터 이렇다할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제에 의해 「좋지않은 노래」로 분류됐던 동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재명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재명사건은 1909년 12월22일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민족반역자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붙잡힌 사건으로 그의 형도 이때문에 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가 얼마후 후유증으로 병사했다. 그는 『요즘은 선열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혹독한 일제에 맞서 싸우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며 형님의 마지막 유품이라 할 사진 한장을 들고 다시 회한에 잠긴다.
  • 이항복/옳은일이면 불이익 불구,실행(역사속의 청백리)

    조선 선조때의 대신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했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회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나라의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또 역사상 민족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때 병권을 쥔 병조판서가 돼 난리를 무난히 평정했다. 그가 호조참의에 임용됐을 때 그때까지 방만하게 운용되던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고 불필요한 예산항목을 과감하게 삭감,불과 한달만에 재정적자를 흑자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이에 호조판서인 윤두수는 「문인으로서 전곡에까지 밝으니 과연 도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항복은 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비록 신분상의 불이익이 오더라도 개의치 않고 실행에 옮겼다.사화가 격렬해지면서 정철이 누명을 쓰고 한강가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평소 정철과 절친했던 친우들이 모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항복만은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정철에게 위문을 갔다.이 때문에 그도 모함을 받아 귀양가는 신세가 됐으나 그의 선비정신을 높이 산 이원익의 도움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과 재기를 발휘,주위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각오를 하고 관청에서 돌아오자 마자 형님과 누이들에게 하직인사를 하면서 「더이상 나에게 가사를 말하지 말라」고 한뒤 임금을 모시고 떠났다.속된 사람은 난리가 나면 자신의 피붙이부터 먼저 챙기지만 그는 나라와 임금의 안위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 신씨일당 광운대부정도 개입/브로커 이정택씨아들 성적조작 확인

    ◎성곡여고교사도 1명 알선/이희돈씨/중계책 거쳐 조 처장에 1억전달/이 교사,주범 신훈식과는 절친한 사이/국민대부정 김성수는 장성아들 맡아 입시브로커 신훈식씨(33·광문고 교사)일당이 광운대입시부정에도 개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광운대 입시부정사건을 수사중인 서울경찰청은 7일 부정합격자로 추가로 밝혀진 8명의 수험생 가운데 신씨의 알선책으로 활동하다 구속된 이정택씨(57·전 송민학원이사)의 아들 이모군(19)이 포함된 점을 미루어 광운대 부정입학사건에는 대리시험브로커일당이 깊숙이 개입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씨의 아들은 H실업학교를 졸업하고 광운대 전자공학과에 부정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 성곡여고 화학교사 이희돈씨(40)가 이 대학 신방과에 합격한 권모양(19·정신여고)의 어머니 정인숙씨(53)로부터 1억원을 건네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조사결과 이씨는 학부모 정씨로부터 1억원을 받은 중간 알선자 김정희씨(47·여)로부터 이 돈을 건네받아 같은 알선책인 이도원씨(33·K일보사원)에게 건네주었으며 이씨는 다시 이 돈을 조하희 교무처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또 이교사가 입시브로커 신씨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밝혀져 이들이 오래전부터 입시부정을 공모해왔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에 대한 수사도 하고있다. 이와함께 국민대 대리시험브로커로 신씨와 대일외국어고에서 88년부터 3년간 함께 일해온 대일외국어고교사 김성수씨(38)도 이번 광운대 부정입시사건의 알선책이었음이 밝혀졌다. 경찰은 이날 구속된 학부모 명혜화씨(40·경영학과 지원생 장모군의 어머니·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반포아파트 66동 403호)는 김씨에게 부정입학을 부탁,지난 1월초 5천만원을 준 뒤 합격되면 5천만원을 더 전달하기로 했었다고 밝혔다. 찰은 이에따라 광운대 입시부정에는 입시브로커 신씨와 김씨가 연계돼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신씨와 김씨의 배후조직을 캐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 김덕규 민주당 사무총장/6·3세대의 3선의원(얼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외유내강형의 3선의원.6·3세대로 송원영 구신민당 원내총무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11대때 민한당 전국구공천으로 의사당에 첫입성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특히 지난해 정기국회당시 경과위원장 내정을 통보받은뒤 당내 계파간 알력때문에 갑자기 취소됐음에도 아무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후문. 이기택대표와는 고대 선후배사이로 절친한 사이인데다 그의 원만한성품을 감안한 인선이라는게 당내의 분석. 부인 이정이여사(50)와 2남.취미는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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