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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대현변호사 헌재재판관 내정

    조대현변호사 헌재재판관 내정

    열린우리당은 임대소득 탈루 논란 끝에 퇴임한 이상경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임으로 20일 조대현(53·사시 17회) 변호사를 내정했다. 충남 부여 출신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인 조 변호사는 용산고, 서울법대를 나와 1980년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인사관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친 뒤 지난해 2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었다.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조 변호사가 헌재 재판관에 임명되면 지난해 첫 여성 재판관으로 선임된 전효숙 재판관에 이어 노 대통령과 사시 동기인 헌재 재판관이 2명으로 늘게 된다. 서상홍 헌재 사무차장까지 모두 3명의 사시 17회가 ‘한지붕’ 아래 근무하는 셈이다. 조 변호사는 노 대통령의 사위가 있는 법무법인 화우 소속인데다 지난해 탄핵심판 당시 대통령측 대리인으로도 활동, 노 대통령과 인연이 각별하다. 실제 그는 노 대통령 사시 동기 중 사법연수원(7기)의 같은 반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인사들의 친목모임인 이른바 ‘8인회’ 멤버의 한 명이기도 하다. 8인회는 노 대통령과 조 변호사를 비롯, 정상명 대검차장,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 이종왕 삼성 법무실장, 강보현 변호사, 손용근 법원도서관장, 서상홍 헌재 사무차장 등으로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 정상명 당시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이 법무부 차관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①-창업 최종건·종현씨

    “윤원아, 신원아, 월요일자 신문 꼭 봐라. 우리 회사가 크게 나온다.”(고 최종건 SK 창업주) “아버지,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최신원 SKC 회장) “그때 보면 알 수 있어, 이놈들아.”(고 최종건 창업주) 최신원 SKC 회장이 공개한 워커힐호텔 인수 직전 부자간에 오갔던 대화다.1973년 1월 선경(현 SK)은 정부로부터 서울 워커힐(현 쉐라톤 워커힐)호텔을 26억 3200만원에 인수하며,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선경이 국민과 재계에 던진 ‘무명의 반란’이었다. 최종건 선경(현 SK) 창업주가 맨손으로 선경직물을 일으킨 지 20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최 창업주는 같은 해 11월 폐암으로 별세,‘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원대한 꿈을 동생인 고 최종현 SK(당시 선경직물 부사장) 회장에게 맡긴 채 ‘짧고 굵은’ 인생을 살다갔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최 창업주가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25년간 SK를 이끈 고 최종현 회장은 ‘석유’를 개척하고,‘이동통신’의 길을 터놓았다. 고 최종현 회장의 50년 지기(知己)인 언론인 홍사중씨가 본 형제는 이렇다.“형(최종건)은 좋은 의미의 ‘보스형’이었다. 의논할 상대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는 모든 일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동생(최종현)은 ‘리더형’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좋은 짝이었다.” 소리없이 일을 꾸미는 사람은 동생이요, 밖에서 뛰는 사람은 형이었다. 그래서 회사 돌아가는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형을 가리켜 ‘용장’이라 했고, 아우를 가리켜서 ‘지장’이라 했다. 형제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SK를 자산규모 재계 4위의 대그룹으로 일궈냈다. ●‘원조 불도저’ 최종건 창업주 최근 재계 CEO(최고경영자) 가운데 강한 추진력과 남다른 승부 근성 때문에 ‘불도저’라 불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 불도저라는 애칭은 최 창업주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의리파, 불같은 추진력, 강한 뚝심’은 최 창업주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비’ 같은 성격에 ‘조조’의 꾀도 많았다. 이런 점을 잘 드러낸 에피소드 하나.1966년 선경직물은 차관 도입 문제로 일본 정부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중소기업에 불과한 선경직물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며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싶었던 최 창업주는 일본 대사관 관계자들을 단골 술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술집 마담에게 거짓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하라는 것. 술집 마담은 때가 되자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전화가 왔다고 말을 건넸다. 최 창업주는 일본 관계자 앞에서 “급한 일이 있으니 잠깐 나가겠다.”고 밝힌 뒤 2시간 가량 단잠을 자고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거, 죄송합니다. 저 위에 좀 다녀 오느라 늦었습니다.”고 설명했다. 일본 관계자들은 최 창업주가 정부 최고위층의 부름을 받고 나간 것으로 모두 오해했다.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선경직물이 정부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구나.’를 암시하며, 차관 도입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그의 장비 같은 성격은 또 이렇다. 최 회장의 지인들은 그가 다혈질인 데다 성미가 급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화가 나면 앞뒤 생각없이 퍼부었다. 그러나 뒤끝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화난 얼굴로 “누구 불러오라.”고 불호령을 내리면 서울에 있으면서도 일본으로 출장갔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고 회고한다. 최 창업주는 1926년 수원에서 최학배 공과 이동대 여사의 4남4녀(양분, 양순, 종건, 종현, 종분, 종관, 종순, 종욱)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견습기사로 취직, 사회 첫 발을 내디뎠다.24세 때인 1949년에는 교하노씨인 노순애(77)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선경직물을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상반된 스타일의 ‘안주인’ 노순애 여사가 넉넉한 시골 인심을 느끼게 한다면, 최종현 회장의 부인인 고 박계희 여사는 세련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풍긴다. 노 여사는 시동생과 시누이 등을 거느린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만만치 않게 했다. 차남 최신원 SKC 회장의 얘기다.“100마지기 농사 일에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셨으니 고생이야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부친은 사업 때문에 공장에서 먹고 자며,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오시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었습니다.” 노 여사의 조용하고, 얌전한 태도에 반한 최 창업주의 누나 최양분(83) 여사는 그를 맏며느리감으로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고 박 여사는 박경식 전 해운공사 이사장의 넷째딸로 1953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 베네트칼리지를 거쳐, 칼라마주대학을 졸업했다. 최종현 회장과 만났을 때는 시카고 미술대학에서 응용미술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그는 내성적이고, 자기 의사를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태원에 가서 1만∼1만 5000원짜리 옷을 사 입을 정도로 검소하고, 깍쟁이였다. 고 박 여사가 모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내가 ‘이태원표’ 옷을 입고 있으면 모두들 몇십만원짜리로 아는데, 그래서 더욱 그런데 가서 사 입어도 불편한 게 없어요.” 최 회장도 부인을 깍쟁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병마와 씨름하던 그는 먼저 간 박 여사를 두고 “자기 성격 따라 깍쟁이처럼 죽었다.”고. 박 여사는 1997년 6월18일 최 회장의 폐암 수술 경과가 좋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두 ‘안주인’은 상반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나서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특히 가정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박 여사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도 최 회장이 일찍 퇴근하면 아무리 중요한 미술관 행사를 주재하는 중이라도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은 “모친은 외출도 좋아하시지 않고, 조용한 성격”이라며 “두 분께서 같이 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골프였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과 혼맥 고 최종현 회장의 연애론은 이렇다. 그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책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에서 “나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지켜본 바에 따라 나는 남녀간의 연애과정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연애는 ‘date→steady date→I love you’, 이렇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처음에 호감을 가지고 ‘데이트’를 하다가 다른 사람과는 데이트를 하지 않는 ‘스테디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것이 발전되면 ‘아이 러브 유’가 되어 결혼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헤어진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너 없이는 못살아.’가 되는데 이것은 병이다.” 최 회장 본인의 경험 때문일까. 최씨가의 2세들은 정략이나 중매 결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특히 최종건 전 회장이 일찍 별세한 이후 최종현 전 회장이 사실상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자임했던 만큼 ‘큰집’ 조카들도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신원 SKC 회장은 “숙부는 자식들 결혼과 관련해서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면서 “예물 등도 가능한 한 안 주거나 받지 않는 주의였다.”고 설명했다. 장남인 최태원(45)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결혼했다. 부친과 똑같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 관장을 만나 연애했다. 차남인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의 부인은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다. 막내딸 최기원(41)씨는 당시 ㈜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46)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큰집’인 고 최종건 회장의 일가 혼맥도 학계부터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지만 정략적인 냄새는 없어 보인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인 채헌(51)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원(50)씨의 남편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54)씨며, 차녀 혜원(48)씨는 박주의 전 금융인 아들인 박장석(50) SKC 사장과 결혼했다. 막내 아들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은 변호사 집안인 최유경(38)씨와 결혼했다. 4녀 예정(43)씨의 남편인 이동욱(43)씨가 최종건가(家)에서는 눈에 띈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의 부친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 양가가 둘의 결혼을 일찍이 약속을 했고, 결혼은 최 창업주 사후에 이뤄졌다. 고 최종건 회장이 각별하게 지냈던 재계 인물로는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었으며, 언론계에서는 고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방계로 넘어가면 장녀 최양분 여사는 한때 종건·종현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고 표현구 전 서울대 농대 학장과 결혼했다. 표문수(52) 전 SK텔레콤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3녀 최종분(73) 여사는 고 이한용 신아포장 대표와 혼인했으며, 막내 사위인 정재현(46)씨는 현재 SK C&C 전무로 일하고 있다. 차녀 최양순(82) 여사는 고 여운창 경기개발 대표와 결혼했으며,4녀 최종순(69) 여사는 해군 중령 출신인 고 조제동씨에게 시집갔다. 3남 최종관(71) 전 SKC 고문은 장명순(71) 여사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3녀 경원(42)씨가 김연준 전 한양대 이사장 아들인 김종량(55) 한양대 총장에게 시집갔다. 또 4녀 은성(40)씨는 나웅배 전 부총리 아들인 나진호(42)씨와 짝을 이뤘다. 장녀 순원(47)씨는 존 캐리 퍼크너(47)씨와 국제 결혼했다. 장남인 최철원(36) 마이트엔메인 대표이사는 한숙진(34)씨와 인연을 맺었다. 4남 최종욱(66) 전 SKM 회장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 딸인 조동옥(59)씨와 결혼했다. 조씨의 남동생이 조동성 서울대 교수다. 미혼인 장남 준원(30)씨는 현재 SK C&C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차녀 윤선(29)씨도 통신·방송장비 전문업체인 SK텔레시스에서 일하고 있다. ●섬유에서 석유…정보통신 SK그룹의 모기업인 선경직물(현 SK네트웍스)은 1930년대 일본인이 조선에서 만주 일대를 대상으로 직물을 수출하던 선만주단(鮮滿綢緞)과 일본의 교토(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였다. 교토직물은 현물출자하고, 선만주단은 공장 부지를 비롯한 건물 공사비 등을 투자했다. 상호도 선만주단의 ‘선’자와 교토직물의 ‘경’자를 따서 ‘선경(鮮京)’이라고 지은 것이다. 고 최종건 회장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을 재건하기 위해 1953년 부친 몰래 빼낸 땅문서로 공장을 불하받는다. 이후 선경직물은 나일론 생산을 계기로 본격적인 섬유기업으로 탈바꿈한다. SK의 성장사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보면 3단계로 나눠진다.1단계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현 SK케미칼) 건설.2단계는 유공(현 SK㈜) 인수,3단계는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다. 소프트웨어로 볼 때 최종현 회장의 경영 참여와 이순석과 손길승, 김항덕 등 1세대 전문경영인의 합류 등이다. 1980년은 유공 인수로 선경의 숙원 사업을 달성한 해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울산을 오가며 국내 유일의 정유사였던 유공을 넘본 지 10년 만이다.‘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위해 매진한 결과, 돌아온 보상이었지만 당시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선경은 유공을 손에 넣자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선경이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구상한 것은 80년대 초반까지 올라간다. 당시 국내 어느 기업도 정보통신사업에 대해 꿈도 꾸지 않을 때,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방문길에서 통신사업에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미국 현지에 경영기획팀을 만든다. 이것이 훗날 한국이동통신 인수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하는 밑거름이 됐다. golders@seoul.co.kr ■ 풍수지리 거부한 최씨 형제 “집터보다 내 기가 더 세니까 염려들 말어.” 국내 재벌가(家)가 최근 서울 한남동과 이태원동에 둥지를 트는 까닭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곳은 남산을 베개삼아 한강으로 다리를 곧게 쭉 뻗어 복록과 자손복이 대대로 넘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아예 재벌가 ‘집성촌’으로 불린다. 이처럼 집터의 풍수지리를 꼼꼼히 따지는 재벌가에서 유독 이에 무관심한 집안이 있다.SK그룹 최씨가이다. 고 최종건 회장이 1968년 서울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 데이진 오야 사장의 부인이 풍수지리를 잘 안다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삼청동 자택의 지형 사진을 보내달라고 연락해왔다. 당시 최 회장과 오야 사장은 비즈니스를 떠나 개인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오야 사장은 당시 일본 정·재계의 거물로 최 회장의 호탕한 성격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야 사장 부인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 탓에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잠옷만 두 박스를 가지고 왔으며, 매일 밤 우유로 목욕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최 회장은 이들이 한국에 머물 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을 본 오야 사장 부인은 “지형이 사나워 좋지 않다.”며 “다른 집으로 이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이를 무시하고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삼청동 자택은 화재로 가정부가 화상을 입어 숨진 데 이어 여름 장마철에 큰 물난리를 겪었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집터의 기가 세서 그런 것이니 이사가는 게 좋다고 자주 권했다. 그래도 최 회장은 “내 기가 집터보다 더 세니 염려말라.”고 했다고 한다. 고 최종현 회장도 집터와 관련된 고집은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암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 풍수지리 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최 회장이 사는 서울 워커힐 호텔 내 빌라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인 탓에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며 이사를 권했다. 그는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전 회장이 풍수지리 연구를 위해 교수직을 내던진 최 전 교수의 소식을 듣고, 아무런 조건 없이 연구비를 지원하면서 맺어졌다. 최 회장은 그러나 “집이란 어차피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며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최 회장은 훗날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여기서 산 지가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느냐.”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golders@seoul.co.kr ■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 ‘그룹부흥 한몫’ “손길승 실장은 단순히 내가 부려먹는 사원이 아니라 나의 비즈니스 파트너, 동업자입니다.” 고 최종현 회장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서 조사 받을 때 일개 그룹 기획실장이 거액의 정치헌금을 다룰 수 있느냐는 검사의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손 회장을 경영 참모가 아닌 동반자로서 얼마나 믿고, 의지했던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정태수 한보 회장의 ‘머슴론’과 비교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SK그룹이 오늘날 재계 서열 4위의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순석 전 ㈜선경(현 SK네트웍스) 부회장과 손길승 전 SK 회장, 김항덕 고문 등 1세대 전문경영인 3인방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들의 역할은 이 전 부회장이 ㈜선경, 김 고문은 유공(현 SK㈜), 손 전 회장은 경영기획실로 나눠진다. 특히 손 전 회장은 20년간 기획실에서만 근무해 직업이 ‘기조실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59학번 서울대 상대 동기 출신으로 때로는 ‘맞수’로 경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회장이 1995년 가장 먼저 SK를 떠났으며, 한때 ‘좌(左)길승, 우(右)항덕’으로 불렸던 전문경영인 체제도 결국 손 전 회장의 단독 체제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김 고문은 손 전 회장이 당시 그룹 회장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최종현 회장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룹 회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 격론을 벌인 결과, 그룹 전반을 꿰찬 사람은 손길승 전 회장 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명분이나 이치에도 맞았고요. 그리고 나는 사심없이 회사를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손 전 회장은 1998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뒤, 야인으로 물러났던 김 고문을 회장대우 상임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는 회장 집무실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김 고문에게 제공했고, 경영 현안이 있을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 그러나 3인방 가운데 ‘SK호’에 가장 먼저 탑승한 사람은 이 전 부회장이다. 그는 1965년 4월 고 최종건 회장의 설득에 못이겨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수원 출신으로 최종욱 전 SKM 회장과는 초등학교 동기다. 김 고문은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69년 선경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는 39세 때 대한석유공사의 수석 부사장에 올라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 전 부회장의 강력한 권유로 65년 12월에 입사한 손 전 회장은 지난 40년간 고 최종현 회장의 평생 동지이자, 경영 전도사였으며, 일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였다. 그는 대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그룹 회장에 오른 최초의 전문경영인인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중앙PSAT연구소 실전풀이]

    문제1. 다음 글의 뒤에 이어질 내용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담배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이 공식 발효됐다. 전세계 성인 사망원인의 10%, 한해 100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는 담배에 대해 보건위생 분야 최초의 국제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이 협약에 우리나라가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은 협약을 주도한 세계보건기구(WHO)의 이종욱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 협약채택 두 달 만에 서명을 하고서도 비준절차를 미뤄 최초의 협약 당사국 지위를 놓쳤다. 공공장소 금연구역 확대, 담뱃값 인상 등 최근 우리나라가 확고하고 강력한 금연정책을 펴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담배의 해악으로부터 국민을 충분히 보호해 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60%대를 간신히 면한 성인흡연율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 수준이며 중학생, 여학생 등의 흡연율은 오히려 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규제 기본협약이 제시하고 있는 강력한 경제적·비경제적 판매규제, 경고 강화, 보건교육, 청소년 보호조치 등이 우리에게도 시급한 이유다. (1)국민의 흡연율을 낮추기 위해 정부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정부와 국회는 하루빨리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 (3)청소년들을 담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4)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다. (5)많은 사람들이 협약의 비준을 원하고 있다. ●풀이 및 정답 윗글의 논리상 ‘전세계에서 담배규제기본협약 공식 발효→한국은 비준절차를 미뤄 협약 당사국 지위를 놓침→현재 한국에서의 흡연 실태→신속한 협약 비준이 필요’의 흐름으로 가는 것이 적당하다. 정답은 (2) 문제2. 다음 보기 중 (가)의 내용에 들어갈 가장 적당한 것은 1774년 독일의 문호 괴테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약혼한 여성을 사랑한 끝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괴테 자신의 실연 체험에 절친한 친구의 자살을 접목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주제는 연애담이라기보다 사랑·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성을 추구하던 18세기의 시대적 열정 그 자체였다. 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그에 못잖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주인공 베르테르를 흉내내 권총 자살하는 젊은이가 급증한 것이다. 책은 다음해 판매금지됐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세상에 나온 지 딱 200년 뒤인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자살에도 일종의 전염 현상이 있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자살 소식이 신문 1면 머리기사로 나온 뒤의 두 달 동안 자살자 수가 평상시보다 평균 58명 더 많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베르테르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립스의 가설이 나오자 구미 각국의 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했지만 결론은 찬반으로 확연히 갈렸다. 어쨌거나 그 뒤로 베르테르 효과라는 불길한 용어는 사회학과 정신의학의 영역에 자리를 마련했다.(가) 베르테르 효과의 특징은 전염성에 있다. 저명인사의 자살 소식을 접한 충격이 바이러스처럼 내재해 있다가 특정한 자극이 가해지면 충동적으로 발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 뉴스를 전하는 언론매체, 또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네티즌 모두가 선정성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로써 자살 대책이 완료되는 것은 아니다.‘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까닭이 시대상황에 있듯이, 현재 우리 사회에 드리운 어둠을 함께 걷어내 자살이라는 악질(惡疾)을 잠재울 것이다. (1)‘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난 실례들 들어준다. (2)‘베르테르 효과’의 사회악적인 면을 보여준다. (3)‘베르테르 효과’가 사회적으로 옳은 가설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4)자살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5)언론과 인터넷에 나타난 자살의 양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풀이 및 정답 앞에서 ‘베르테르 효과’의 정의를 제시했고, 마지막에서는 ‘베르테르 효과’의 특징과 대책에 대해 이야기했으므로 (가)의 부분에는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난 실례를 들어주는 것이 글의 흐름상 가장 자연스럽다. 정답은 (1)
  • 닉슨·펠트家의 기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지난 1974년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형 도널드의 손자가 이 사건의 ‘딥 스로트’ 마크 펠트 연방수사국(FBI) 전 부국장의 손자와 대학 동문으로 함께 강의를 들은 기연(奇緣)을 맺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헤이스팅스 법대 동문인 자렛 A 닉슨(28)과 다섯살 연하인 니콜라스 T 존스로 두 사람은 지난해 스페인어 강의를 함께 들으며 친해졌다고 신문은 전했다. 두 사람은 자렛이 태어났고 니콜라스가 여행을 즐겼던 코스타리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자렛은 말했다. 자렛은 이런 인연으로 니콜라스를 이 대학 법률잡지에서 일하도록 추천하기도 했다. 자렛은 지난해 이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변호사 실무 교육을 받고 있고 니콜라스는 재학 중이다. 자렛은 니콜라스에 대해 “참 좋은 녀석”이라며 “우리는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두 사람이 그 전부터 서로의 할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두 사람이 현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심각하게 대립했던 할아버지들의 자손이란 점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남궁연·신해철·싸이 영화 만든다

    남궁연·신해철·싸이 영화 만든다

    독창적인 음악세계와 강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뮤지션 남궁연, 신해철·싸이가 의기투합해 영화를 만든다. 이들은 케이블 채널 OCN의 영화 정보 프로그램 ‘오씨네 영화잡기2’를 통해 단편영화를 만들며 영화 제작 과정도 선보인다. 남궁연이 메가폰을 잡고 신해철과 싸이가 주인공으로 나선다. 이들이 만드는 영화의 제목은 ‘더 밤 네버 라이즈(The Bomb Never Lies:거짓말 폭탄)’.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거짓말을 하는 남자들의 좌충우돌 사랑을 그린 코믹 멜로물. 영화 ‘간큰가족’의 김영탁 작가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여주인공으로는 ‘오씨네 영화잡기1’에 출연했던 김민선이 출연한다. 남궁연과의 절친한 관계로 인해 영화 작업에 참여하게 된 신해철과 싸이는 “남궁연에게 스토리를 직접 듣고 내용에 매료돼 출연을 결심했다.”면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OCN은 이들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5일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9시30분에 방영하고, 완성된 영화는 새달 중순 선보일 계획이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그 영화 어때?] 2일 개봉 ‘태풍태양’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 한편으로 2001년 영화판에 ‘예술영화 다시 보기’ 운동을 불지폈던 정재은 감독. 그가 4년만에 두번째 영화 ‘태풍태양’(제작 필름매니아·2일 개봉)으로 팬들을 찾아왔다. 여성감독의 차분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동요하는 청춘을 묘파했던 데뷔작과 이번 작품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전작이 스무살 여자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잡았다면, 새 영화 역시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엉거주춤하는 스무살 언저리 청년들의 시행착오에 주목했다. 청소년과 성년의 모호한 경계에 일군의 캐릭터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설정까지도 닮았다. 이란성 쌍둥이인 듯 ‘고양이를‘의 팬들을 덮어놓고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에는 그러나 분명 에너지는 더 많아졌다. 내내 바퀴가 멈추지 않는 영화 속 소재(인라인 스케이트)도 에너지의 폭발력을 화면 밖으로 뿜어내는 장치로 효과만점이다. 학교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고교생 소요(천정명)의 유일한 즐거움은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원들과 어울리는 시간이다. 신들린 스케이팅 실력을 가졌으나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곤 손톱 만큼도 없는 자유주의자 ‘모기’(김강우), 그런 무계획한 면모 때문에 모기를 좋아한다는 여자친구 한주(조이진), 모기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나 그와는 딴판으로 강한 리더십을 보이는 ‘갑바’(이천희). 학교 밖으로 뛰쳐나온 소요는 한동안 자신에게 인라인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주는 모기를 친형처럼 따른다. 그러나 스케이팅을 맹목적으로 즐기는 일 말고는 세상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으려는 모기의 폐쇄적 행동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얼핏 청소년들의 방황에 카메라를 들이댄 그렇고 그런 청춘영화로 접어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의 설득력은 특별하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으로는 뭣 하나 반듯할 것 없는 캐릭터들의 파열음은, 후반부로 갈수록 ‘소음’이 아니라 영화를 위한 ‘질서’임을 분명히 밝힌다. 모기와 갑바의 충돌, 그 사이에서 좌표를 정하지 못하고 불안한 소요의 눈빛, 감정기복 없이 그들 모두를 바람처럼 껴안는 한주의 캐릭터가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이 끝까지 톱니를 물고 돌아간다. 스타배우 없이도 드라마의 흐름에 몸을 맡길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좋은 점수를 얻을 것같다. 그러나 ‘고양이를‘이 그랬듯 완성도와 흥행의 함수관계가 꼭 비례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의 생명력이 얼마나 길지는 미지수다.12세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 ②-구인회 3代 경영

    지난달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출장길에 오른 구본무(60) LG 회장을 수행한 사람은 차장급 직원 한명뿐이었다. 계열사 사장들과 같이 가는 출장이 아니면 수행은 늘 직원 한명이 담당한다. 공항으로 임원들이 배웅이나 마중을 나오는 것도 금지한다. 구 회장은 지난 12일 LG 계열사 사장단 20여명과 함께 국내사업장 ‘혁신투어’를 나서면서 자신의 차량인 ‘벤츠S600’을 놔 두고 대형 관광버스 2대를 빌렸다. 사업장간 이동중에도 사장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지난 2003년에도 구 회장은 버스로 2박3일간 전국의 사업장을 누볐다. 이처럼 ‘격식’을 따지기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구 회장을 두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다.’는 평이 따라다닌다. 사람좋아 보이는 눈웃음 등 구 회장의 외모도 이같은 이미지 구축에 한몫했다. ●몸에 밴 검소한 생활 구 회장의 소탈한 모습은 아버지 구자경(80) 명예회장이나 할아버지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구인회 회장은 창업초기인 40년대 후반 부산 서대신동 시절 활동하기 편하다며 미군 파카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외출할 때를 제외하곤 공장내에서 늘 입고다녀 소매가 닳고 기름때가 반지르르 묻은 옷이었다. 구 회장은 또 비싼 담배와 싼 담배를 같이 갖고 다니면서 손님에게는 좋은 담배를 권하고 자신은 값싼 담배를 피웠다.“돈이란 벌 때 아껴야 하는 법”이라는 지론이다. 사돈이자 동업자인 고 허준구 회장도 당시 판매와 구매일을 맡으면서 수금하러 거래처를 다닐 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찰떡궁합’인 셈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사업장이나 계열사 사무실을 즐겨 찾았는데 어떤 때는 사전통보없이 불쑥 고객서비스센터 등 현장을 방문해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럭키증권(현 우리투자증권) 객장을 방문했을 때는 고객들이 좁은 객장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데 반해 임원실이 한 부서보다 큰 것을 보고 “무슨 임원방이 내 방보다 커요?”라며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소탈한 이미지 때문인지 LG의 회장들은 삼성이나 현대에 비해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시사저널’이 지난해 발표한 가장 영향력있는 기업인 순위에서도 구본무 회장은 삼성 이건희 회장은 물론 현대차 정몽구 회장보다 순위가 낮았다. 재계에서 LG가 차지하는 비중이 현대차그룹보다 낮지 않은데도 그룹총수의 영향력은 현대차가 높게 나온 것이다. LG관계자는 구 회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는 허씨와의 동거기간이었고 2년전까지만 해도 삼촌뻘 되는 집안어른들이 계열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또 취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국제통화기금(IMF) 직격탄을 맞았고 99년에는 반도체 빅딜로 주력사업을 빼앗기는 고초를 겪었다. 사실 구 회장의 총수로서의 경영능력은 올해부터 검증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LG의 상징, 인화(人和) 구인회 창업회장은 포목상, 청과·어물전, 운수업 등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 47년 럭키크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인생을 걸었다.6형제의 장남(4명의 여자형제도 있었으나 일찍 사망함)이자 6남4녀의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돕기 위해 초기 가족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영도 대부분 가족이나 사돈(허씨)들이 도맡아 했다.47년 락희화학 설립당시 생산담당이었던 김준환씨를 제외하면 구 회장, 부사장 고 구정회(둘째 동생)씨, 영업담당 허준구(첫째 동생 철회씨 사위)씨 등으로 사실상 ‘가족기업’이었다. 이후에도 아래로 다섯 동생과 여섯 아들, 조카, 허씨들이 대거 경영에 참여했는데 LG의 ‘인화정신’은 이같은 독특한 가족사와 무관치 않다. 친인척들을 잘 다독여 가며 경영을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경영이념으로 발전시킨 것이 인화다. 창업회장부터 내려온 인화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과 함께 했던 방송사업. 구인회 회장은 60년대 초반 사돈인 고 이병철 삼성회장으로부터 방송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50대 50 합작으로 64년 ‘라디오서울’과 ‘동양TV’를 설립했다. 하지만 방송사 경영이 시원치 않은 와중에 두 그룹에서 파견된 임직원간 알력이 심해졌고 결국 TV는 LG가 라디오는 삼성이 맡아서 하기로 잠정 합의를 봤다. 이후에도 TV와 라디오 사업의 정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구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 회장을 만나 TV사업까지 삼성에 넘기기로 결정한다.LG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았지만 구 회장은 사돈간의 ‘불화’가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80년대에는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가 사돈과의 정리를 생각해 포기했다. 당시 기획조정실에서는 21세기 물류산업의 꽃이라고 불리는 택배사업을 유망한 신규 사업으로 선정, 일본의 택배사업을 벤치마킹하고 계획을 수립했지만 사돈인 한진그룹에서 택배(한진택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구자경 회장이 사업중단을 지시했다.LG와 한진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학(75) 아워홈 회장의 2녀 명진(41)씨가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의 4남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하면서 사돈으로 맺어졌다. ●창업주의 사람들 구인회 창업회장은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다 열네살때인 1921년에야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24년에는 서울로 상경,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19세때인 26년 처가에서 보내주던 학비가 끊기고 본인의 뜻도 있어 낙향, 사업의 꿈을 키운다. 구 회장은 사업을 키워가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고 동생들은 좋은 학교를 졸업한 뒤 형의 사업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한때 구씨, 허씨 일가가 너무 많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구씨, 허씨들 가운데는 경영능력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창업회장의 동생들은 초창기 외국원서를 번역해 기계 작동법을 알아내고 수출, 기술도입 등 형이 할 수 없는 해외업무를 도맡아 했다. 첫째 동생 고 구철회씨는 형과 함께 첫 사업인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세웠고 둘째 고 구정회씨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잠시 근무하다 형의 사업을 도왔다. 구태회(82) LS전선 명예회장은 일본 후쿠오카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쳤다. 그는 경영보다는 정치권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4대 민의원과 6,7,8,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구평회(79) E1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마치고 51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구두회(77)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은 진주고보와 고려대 상대,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일은행에서 잠시 일하다 63년 금성사 상무로 입사했다. ‘골프멤버’였던 사돈인 이보형 제일은행장·홍재선 전경련 회장·경방 김용완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 등도 구인회 회장과 교우가 깊었다. ●제2의 창업주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경 LG명예회장은 삼촌인 구평회 명예회장과 진주고보에 같이 입학한 뒤 진주사범을 마치고 고향인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50년까지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는데 제자들 중에는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부인인 한인옥씨 등이 있다. 구 명예회장은 한씨에 대해 “얼굴도 예쁜데다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신 전 부의장은 모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구 명예회장에게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구 명예회장은 50년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지만 공장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구인회 회장은 생전에 왜 장남을 그토록 고생시키느냐는 질문에 “대장장이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데도 담금질을 되풀이해 무쇠를 단련한다.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그는 현장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69년 12월31일 구인회 회장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직후인 1970년 1월6일 열린 럭키그룹 시무식에서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본인의 경영 퇴진과 구자경 당시 금성사 부사장의 회장 추대를 제안했고 이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통과됐다. 구 회장 취임 이후 1년간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준 사람은 삼촌인 고 구정회 사장이었다. 조카를 ‘보필’하는 삼촌은 LG가의 저력을 잘 말해준다. 구자경 신임회장은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인화단결과 상호협조를 통해 그룹의 부드러운 기업풍토를 조성하는데 힘쓰고 급속한 확대보다는 내실있는 안정적인 성장에 주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락희화학, 금성사 등 11개 계열사를 갖고 시작한 구자경 회장은 95년 2월 이임할 때까지 LG를 한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다. 취임 첫 해인 70년 520억원에 불과하던 그룹매출은 94년 30조원을 넘어섰고 수출은 3100만달러에서 147억달러로 474배나 늘어났다. ●늘 꿈이었던 농사일에 매진 구 명예회장은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겨주면서 “앞으로 여의도 본사에는 일주일에 한번만 출근할 것이다. 모든 경영은 신임 회장에게 맡긴다.”고 약속했다. 구태회·평회·두회씨 등 창업주 형제들과 허준구·허신구 회장도 고문으로 물러났다. 충남 천안의 ‘천안연암대학’으로 내려간 구 명예회장은 버섯재배 등에 심혈을 기울이며 10년전 약속을 지키고 있다. 주중에는 천안에 머물다 주말에는 서울 성북동 집으로 올라오는데 매주 월요일에만 트윈타워로 출근한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 집무실인 30층 대신 32층으로 직행, 본인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복지재단·문화재단 업무만 보고 오후에는 천안으로 내려간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구 회장 얼굴을 보지 않고 그냥 가는 경우가 많다. 분재, 장미재배를 거쳐 버섯재배로 이어진 구 명예회장의 왕성한 취미활동은 요즘 된장, 생면, 만두 등 유기농 먹을거리로 확대되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선친이 두산, 경방그룹 회장과 함께 1956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발족한 ‘단오회’와 진주중 15회 동창회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있으며 능성구씨 대종회장을 맡고 있다. 단오회에는 김각중 경방 회장, 김상홍 삼양사 명예회장, 선친을 치료했던 이동렬 박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진주중 동창인 고 이규호 전 문교부 장관도 생전에 절친한 사이였다. 고 정주영 회장도 전경련 회장단 활동 등을 통해 남다른 친분을 쌓았다. ●20년 경영수업 받은 ‘구병장’ 구본무 회장은 연세대 상학과에 다니다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재벌 총수 가운데 현역 출신은 쉽게 보기 어렵다. 보병으로 만기 제대후에는 미국 애슐랜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구 회장은 30세때인 75년 럭키(현 LG화학)의 심사과(사업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부서로 사업전반을 이해할 수 있음) 과장으로 입사했다. 당시 심사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구 회장의 ‘핵심참모’인 강유식(57) ㈜LG 부회장이다. 강 부회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72년 럭키에 입사했다.97년 회장실(구조조정본부)로 소속을 옮겼고 99년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으면서 그룹 구조조정과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했다. 구 회장은 아버지처럼 ‘험한’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81년에야 금성사 이사로 승진할 정도로 차곡차곡 경영수업을 받았다. 럭키 심사과장, 수출관리부장, 유지사업본부장을 거쳐 80년 금성사(현 LG전자)로 옮겨 기획심사본부장을 맡았고 83∼84년에는 도쿄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입사 10년만인 85년에야 기획조정실 전무로 그룹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95년 회장 취임사에서 ‘초우량 LG’를 약속했던 구 회장은 인터넷, 홈쇼핑, 이동통신, 통신 등에 잇따라 진출하며 사세를 넓혀갔고 필립스와 합작으로 LCD사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빅딜’과 ‘LG카드 사태’로 반도체, 금융사업에서 손을 떼는 등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1등LG를 이끄는 사람들 지금까지 LG그룹을 상징해 온 ‘인화’는 구본무 회장 대에 이르러 사실상 ‘일등주의’로 바뀌었다.LG는 그동안 ‘인화정신’이 결코 ‘온정주의’가 아니라고 항변해 왔지만 삼성그룹에 비해 LG그룹의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요즘 LG가 거의 매일 쏟아내는 ‘강한 승부욕’,‘독종정신’,‘다이내믹’ 등은 LG가 온건하고 점잖은 반면 보수적이고 느린 조직에서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구 회장이 주력 계열사인 LG전자를 김쌍수(60)부회장에게 맡긴 것도 생활가전사업을 1등으로 만든 그의 ‘뚝심’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김 부회장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부진을 면치 못하던 휴대전화 사업을 ‘비전문가’인 박문화(55) 사장에게 맡겨 새로운 도약을 주문했다. 오디오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박 사장은 LG의 ‘광스토리지’ 사업을 7년 연속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LG에서 독립한 다른 친척이나 형제와 달리 주력사인 LG필립스LCD 부회장을 맡고 있는 둘째동생 구본준(54) 부회장 역시 1등에 대한 집념이 남다르다. 경복고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구 부회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 미국 AT&T를 거쳐 86년 금성반도체에 입사했다. 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빼앗기다시피 넘겨주는 것을 눈으로 지켜본 뒤 99년부터 LG필립스LCD 대표를 맡아 세계적인 LCD업체로 키워왔다. ●숨어있던 승부사기질 발휘되나 소탈하고 인자해 보이는 구 회장의 이면에는 무서울 정도의 집념과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평이다. 구 회장의 집념은 그가 하늘을 나는 모습만 보고도 무려 150여종의 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조류학’에 조예가 깊은 것에서 잘 나타난다. 중학교때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다친 새 한 마리를 발견, 집에 데려와 치료해 준 인연으로 새에 관심을 갖게 된 구 회장은 2000년에는 ‘조류도감’을 낼 정도로 새에 관해서는 전문가다. 여의도 LG트윈빌딩에 둥지를 튼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구 회장의 각별한 보살핌덕에 무사히 새끼를 낳은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동생 구본능(56) 희성그룹 회장도 최근 ‘사진으로 보는 한국야구 100년’을 발간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보통이 아닌데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좋아 보이는 구 회장이 거의 ‘경멸’할 정도로 싫어하는 부류가 있는데 준비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다. 구 회장은 연습장에서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무작정 골프장에 나타나는 초보자를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더 싫어하는 부류는 ‘트리플보기(이븐파보다 3타를 더 치는 것)’를 하고도 ‘히죽히죽’ 웃는 사람이다. 다시는 트리플보기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열사 사장들을 평가할 때도 이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구 회장은 특별히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끈질기게 연습에 매달려 한때 핸디캡 5∼6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고 한다. 환갑을 맞은 지금도 핸디 8∼9 정도를 친다. 구 회장은 지난 3월 구 명예회장 시절 선포한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인간존중의 경영’에 ‘1등LG’를 더한 ‘LG Way’를 새로운 기업문화로 천명했다.10여년에 걸친 계열분리를 마무리지은 구 회장은 ▲고객이 신뢰하는 LG▲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LG▲인재들이 선망하는 LG▲경쟁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배우고 싶어하는 LG를 목표로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의 집념과 승부사기질이 앞으로 어떻게 발휘될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구 회장은 지난해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이례적으로 참석할 정도로 장세주 회장과는 친분이 깊은 편이다. 장 회장의 숙부인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딸 인영(37)씨가 구 회장의 당숙인 구자은(41) LS전선 상무와 결혼해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만화가 허영만씨와도 교류가 있는데 허씨는 인기작 ‘식객’에서 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맛있는 삼계탕을 사주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단출한 네식구 구 회장은 72년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의 딸인 김영식(53)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재원’으로 서구적인 외모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시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은 “보수적인 며느리를 원했는데 맞고보니 맏며느리는 개방적이고 아래 며느리들이 보수적이었다. 뒤바뀐 감도 없지 않지만 그만하면 잘 맞는 편”이라며 만족하는 분위기다. 구 회장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내외’가 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이 주말에 곤지암에서 골프를 치다 부인이 일행들과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나무랐다는 일화도 있다.LG 소유인 곤지암은 주말에 주로 계열사 임원들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애용하는데 ‘회장 부인’이 나오면 임원들이 불편해 한다는 이유다. 김씨가 다른 그룹 회장 부인과 달리 미술관을 맡지 않은 것이나 여의도 트윈타워에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도 LG가의 엄격한 ‘단속’ 때문이다. 구 회장은 지난해 양자로 들인 구광모(27)씨와 연경(27)·연수(9) 두딸을 두고 있다. 광모씨는 병역특례인 산업기능요원으로 국내의 한 IT솔루션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올해 병역을 마치면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인스티튜트공대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양자로 입적된 뒤 ㈜LG와 LG상사 지분을 대폭 늘려 ‘경영승계’가 가시화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LG측은 “광모씨의 양자입적은 ‘제사 지낼 장손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4세 경영’과는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마치고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경(27)씨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26)씨와 함께 재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붓감’이다. ukelvin@seoul.co.kr ■3공화국서 “소총 만들어보라” 권유 구인회 “유망해도 무기는 싫다” 거절 LG화학은 한때 자회사를 통해 ‘비데’사업을 하다 그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타일, 욕조 등 욕실 인테리어사업에 비데를 함께 취급하면 고객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했지만 구본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첨단기술로 해외시장을 노리는 제품도 아닌데 돈이 된다고 해서 ‘품위’에 맞지 않는 제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LG에서 계열분리된 지 1년이 지난 지난해 말에도 LG카드의 부실이 해결되지 않자 채권단은 또 한번 LG그룹의 지원을 요청했다.LG측은 “이미 1조원이 넘게 지원을 한데다 그룹에서 분리된 회사를 무슨 근거로 지원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구 회장의 ‘결단’으로 출자전환을 결정했다. 구 회장은 LG카드 기업어음(CP)을 갖고 있던 친척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해가며 출자를 부탁했다고 한다. 삼성과 공동으로 시작했던 방송사업을 넘겨준 것이나 택배사업 진출을 계획했다 직전에 포기한 것도 ‘사돈간의 불화’로 세인들의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LG가 이처럼 ‘세간의 평판’을 신경쓰는 것은 엄격한 유교가문의 장손인 고 구인회 창업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회장은 도박이나 술 등 사행산업은 물론 이른바 ‘먹고 마시는’일과 연관된 소비성 사업, 부동산 투자도 금지할 정도로 엄격했다. 나중에야 필요에 의해 인터컨티넨탈호텔을 설립했지만 한때는 호텔사업도 LG의 ‘금지리스트’에 올라 있을 정도였다.3공화국 당시 정부로부터 “소총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도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라도 무기는 만들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을 정도다. 하지만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같은 ‘체면 경영(정도경영)’은 자칫 수익성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공격적인 확장에도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LG관계자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일등할 생각은 없다.”면서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갖추면 무리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고객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 구 회장의 지론”이라고 말했다. ukelvin@seoul.co.kr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병돼 설립된 하이닉스반도체의 ‘새 주인’이 누가될 것인지를 놓고 재계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매각대금이 3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이는 이 대형 매물의 유력한 새 주인으로 전 주인인 LG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LG는 하이닉스 인수설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검토할 일도 없다.”며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구씨 3대의 반도체 인연이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LG는 구인회 창업회장 생전인 69년 미국 NSC의 기술제공으로 반도체 회사인 금성전자를 설립했다. 초대 사장은 구자두 현 LG벤처투자 회장이었다. 금성전자는 1차 오일쇼크 등으로 73년 금성사에 흡수합병되면서 주춤했지만 74년 삼성 이건희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 등에 ‘자극’받아 75년 반도체팀을 만들고 미국 AMI와 합작 공장을 설립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79년에는 대한전선의 대한반도체를 인수, 금성반도체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은 구자경 현 명예회장, 사장은 이헌조 현 LG그룹 고문이었다. 금성반도체는 이후 85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1메가롬(ROM)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금성일렉트론으로 이름을 바꾼 뒤 90년 1메가 D램,91년 4메가 D램을 잇따라 내놓으며 삼성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LG는 98년 정부의 ‘빅딜정책’의 ‘희생양’이 되면서 반도체사업을 현대그룹에 양보하게 된다.99년 1월6일 청와대를 방문한 구본무 회장은 전자사업이 주력인 LG에 반도체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지만 이미 현대측과 ‘얘기’가 끝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귀에 구 회장의 ‘절규’가 들릴 리 만무했다. 이날 밤 이헌조, 변규칠, 성재갑 등 LG의 원로들이 마련한 위로자리에서 구 회장은 모처럼 통음을 했다. 일부에서는 구 회장이 ‘통곡’을 했다고 하지만 ‘통한의 눈물’을 보인 정도였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서울 한남동 구 회장의 집앞에 진을 친 기자들은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구 회장을 붙들고 ‘소감’을 물었고 구 회장은 “다 버렸습니다.”는 말로 3대를 내려오며 30년간 이어진 반도체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들에게 물어봐] 리얼리티 잃어가는 드라마

    [★들에게 물어봐] 리얼리티 잃어가는 드라마

    리얼리티가 없다? 드라마는 판타지다. 판타지 효과는 현실보다 반걸음 정도 앞서 나가 있을 때 가장 크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는 두세걸음은 예사고 심지어는 열걸음 정도는 저만치 나가 있다. 드라마에서 리얼리티는 이제 호화 해외 로케 때나 쓰는 단어인 듯 하다. 리얼리티는 단순히 방금 잠에서 깬 여배우가 진한 화장을 하고 있더라는 사소한 설정의 문제 뿐만 아니다. 설정의 오류 외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복잡한 관계를 통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화려한 영상? 물론 화려한 영상이 죄는 아니다.‘보는 재미’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화려함만 유독 강조된다는 것. 그나마 리얼리티를 살렸다는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KBS 2TV의 성장드라마 ‘반올림2’는 예전 성장드라마와 달리 잔잔하게 이야기를 꾸며 호평을 받고 있다.MBC ‘단팥빵’처럼은 아니지만 일요일 아침프로그램임에도 시청률이 꽤 높다. 그런데 정작 등장인물 가운데 고등학생같은 사람은 드물다. 종영된 MBC ‘한강수 타령’ 역시 어머니 고두심과 딸 김혜수·김민선의 차림새가 대비됐다. 김민선이야 허영끼있는 캐릭터였다치더라도 맏딸 김혜수의 감각적인 옷차림은 캐릭터와도 잘 맞지 않았다.‘고두심은 70년대 홀어머니상, 김혜수는 최첨단 딸’이라 불릴 정도였다. ●과도한 간접광고? 간접광고도 리얼리티를 죽인다.SBS ‘그린로즈’,MBC ‘신입사원’은 협찬사 제품을 연상하는 내용을 넣었다가 문제가 됐다. 그나마 그렇게 눈에 띄어 주는게 고마울 정도다. 한 외주제작사 PD가 “은근슬쩍 스쳐지나가게 제품을 비추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고 실토할 정도다. 세트장이 아니라 상품진열장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SBS ‘패션70s’도 이런 면에서 관심거리다. 패션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69∼70년대까지 사회상을 담는다는 점은 참신하다. 지난 16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화면은 이런 참신함을 한껏 과시했다. 그런데 극이 진행되면 결국 제작을 지원한 의류업체 홍보에 치우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외주제작사들은 ‘열악한 제작비’를 거론하지만 그런 부각방식이 리얼리티를 깎아먹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전한 ‘만수산 드렁칡’ 스토리? 지나칠 정도로 꼬여놓은 관계 설정도 위험요소다.KBS ‘위험한 사랑’이 대표적 예다. 남편의 무정자증 때문에 인공수정을 하는데 그 정자제공자가 마침 아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다. 또 이 남자는 남편과 절친한 친구여서 갈등을 빚는 구조다. 병원이 정자 제공자의 신분을 어떻게 노출시킬 수 있는지, 병원이 정자제공자를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선정하는 지에 대해서는 모르쇠다.“아침드라마는 다 그래.”라는 비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드라마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리얼리티에 대한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MBC 이은규 드라마국장은 “시청률 측면에서 호응도가 낮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가벼운 트렌디물이 인기를 끌다보니 기획단계에서부터 리얼리티를 외면하고, 리얼리티를 살리는 드라마 작가 자체가 도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이런 경향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국장은 그나마 ‘단막극’에서 희망을 걸었지만 단막극의 대표주자격으로 꼽히던 MBC ‘베스트극장’마저 잠정 중단된 상태다. 그런데 이런 경향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한류 열풍을 몰고 온 ‘겨울연가’에 대해 NHK 오사와 준코 부장PD는 “리얼리티가 없으면 안된다는 일본 드라마의 오랜 공식을 깼다.”고 평가했다. 드라마와 리얼리티, 문화적으로 혹평할 지, 산업적으로 칭찬할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조태성 홍지민기자 cho1904@seoul.co.kr
  • ‘고도완화’ 20억 광고로비 의혹

    청계천변 재개발 사업과 관련, 양윤재(56·구속) 서울시 행정2부시장에게 광고를 미끼로 재개발 사업자가 로비를 한 정황이 포착됐다. ●세운상가 32지구 로비 정황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유재만)는 17일 세운상가구역 32지구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H사가 양 부시장과 친분이 있는 광고업자에게 20억원대 분양광고를 몰아주는 대가로 양 부시장에게 고도제한을 완화해 주도록 로비를 했다는 정황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H사 대표 장모(50)씨 등에 대한 조사에서 이같은 단서를 포착했으며 광고업체인 S사 대표 서모(52)씨를 불러 양 부시장에 대한 청탁 명목으로 분양광고를 수주했는지 등을 집중 조사했다. 이들 업체간에 아직 돈은 오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지난 4일 회의에서 세운상가구역 32지구의 고도제한을 85m(지상 21층)에서 109m(지상 32층)로 완화해주고, 용적률도 789%에서 1000%로 높여주는 안건을 승인했다. 검찰은 당초 10일로 예정됐던 회의가 4일로 앞당겨진 경위도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있다. ●양 부시장,“타워팰리스 100층은 올렸어야” 검찰은 양 부시장이 학계에 있을 때부터 ‘도심 고층화론’을 주장한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양 부시장과 절친한 사립대교수 O씨는 “1980년대 중반부터 도심개발과 관련,20∼25층짜리 건물을 병풍식으로 짓지 말고 40층 정도의 건물을 타워형으로 쌓고 중간중간 공원 등 트인 공간을 만들자는 게 양 부시장의 구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양 부시장은 타워팰리스(42∼69층)도 최소한 80∼100층으로 지었어야 했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덧붙였다. ●층고완화 과정에 ‘입김’? 양 부시장은 2002년 초 청계천복원 관련 연구포럼에서 건물을 높이 짓게 하되 녹지공간을 확보하는 자신의 구상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시의 청계천 주변 고도제한 완화 과정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날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나온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정모 연구위원은 “지난해 3월 서울시 주택국이 갑자기 모든 도심재개발 지역에서 고도제한 완화의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진술했다. 이 방안은 청계천복원추진본부 등을 거쳐 같은 해 9월 확정됐다. 당초에는 전략재개발지역(미래로RED의 을지로2가 5지구 등)에만 고도제한 완화의 인센티브를 주도록 돼 있었는데 서울시가 ‘공공용지를 제공할 경우, 기준 높이의 최대 50%까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 층고제한 완화가 모든 도심재개발 지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정씨는 당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가 해당 연구에서 배제됐다. ●U사 역할 궁금 양 부시장이 2001년 5월 설립한 U사에도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U사는 주로 주상복합아파트 사업자, 아파트 건설업체 등으로부터 단지 설립계획, 도시환경계획 등의 연구용역을 수주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서울시에 발탁된 이후에는 제자인 정모씨가 운영을 맡아왔으며 그는 이번 사건 수사 이후 잠적했다. 검찰은 또 다른 제자 명의 통장 2개에 입금된 1억원과 U사 압수수색에서 발견한 장부에 기재된 1억원 등 2억원의 출처를 쫓고 있다. 또 양 부시장과 함께 서울시 도시계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사립대 교수가 U사의 등기이사로 등재된 사실을 확인,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김유영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세운상가 재개발도 내사

    세운상가 재개발도 내사

    서울 종로구 주도로 추진중인 세운상가 재개발 사업에 서울시가 시세보다 100억원 이상 높은 설계비를 합동 설계단에 지불하도록 권고한 사실이 포착돼 검찰이 내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세운상가 4구역 합동설계단에는 최근 구속된 서울시 양윤재 부시장의 친구가 운영하는 D사가 포함돼 ‘서울시가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건축설계회사 편든 서울시? 세운상가 재개발 사업은 종로구 예지동 85 일대 세운상가 4구역에 2009년까지 건물 8개동을 짓는 것이다. 사업시행자는 종로구청장이며, 땅을 신탁받아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완공 뒤 신탁자들에게 분양을 해 주는 신탁사로는 대한토지신탁㈜이 선정됐다. 현재 10개 건축설계회사들이 합동설계단을 구성, 설계를 진행중이다.4개 업체는 외국계 회사이고, 양 부시장과 중·고교 동창으로 절친한 L씨가 운영하는 D사도 포함돼 있다. 합동설계단은 설계비로 396억원을 요구하고 있고, 대한토지신탁은 160억원 이상은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가 이 과정에 개입, 올 1월11일 공문을 통해 279억 700만원의 조정 금액을 양측에 제시했다. 조정권고 공문에는 발신자가 서울시가 아닌 종로구청장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종로구에서 설계비에 대한 시의 의견개진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설계비를 산출했다.”면서 “서울시는 종로구와 이 지역 재개발에 대한 협약을 맺고 있기 때문에 조정권한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합동설계단은 서울시의 조정액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대한토지신탁은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한토지신탁 관계자는 “서울시가 업자들에게 휘둘려 상식을 넘는 금액을 조정안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업계 관계자도 “시세보다 100억원 이상의 조정액을 낸 서울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담당부서인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 고위관계자는 “외국계 회사가 포함된 합동설계단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조정금액이 문제가 된다면 제3의 기관에 원가분석을 의뢰할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확대되는 재개발 수사 서울시의 세운상가 설계비 개입 의혹은 검경의 수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한토지신탁은 ‘서울시가 설계업자들의 로비에 휘둘리고 있다.’는 진정서를 청와대와 검·경 등에 제출했고, 경찰에서 이를 내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도 “세운상가 재개발 사업도 수사 대상”이라고 이날 밝혔다. 한편 청계천변 재개발 특혜의혹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유재만)는 이날 양윤재 서울시 부시장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 역삼동의 도시설계용역회사를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지난 6일 양 부시장의 사무실에서 이 회사 이름의 차명계좌가 발견된 점에 주목하고 있다. 또 서울시 시정개발연구원의 선임연구위원을 지낸 국립대교수 김모(52)씨와 청계천복원추진본부 간부 출신인 모 구청 도시관리국장 박모(52)씨를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검찰은 이들이 부동산개발업체인 미래로RED측으로부터 중구 삼각동·수하동 주상복합건물 신축 사업의 편의 제공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의 금품을 챙긴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김씨가 재개발 관련 토론회 등에서 “개발인센티브가 필요한 전략재개발지구의 용적률을 1000%까지 풀어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 시행사측의 금품로비와 관련이 있는지 캐고 있다. 박씨는 청계천복원 추진본부에서 고도제한 완화 결정의 결재라인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미래로측이 대표이사에게 대여한 71억여원이 불법 로비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사용처를 추적하고 있다. 김기용 홍희경기자 kiyong@seoul.co.kr
  • ‘셜리 발렌타인’으로 만난 배우 손숙·연출가 글렌 월포드

    ‘셜리 발렌타인’으로 만난 배우 손숙·연출가 글렌 월포드

    서울 홍익대 앞 산울림소극장 3층 연습실.“글렌, 이 대사를 빼면 어떨까요?”“그건 안돼요, 숙. 극의 흐름상 아주 중요한 대사예요.”“음, 알았어요. 그럼 이 부분을 자르면 어때요?” 두사람 사이에 흐르는 약간의 긴장. 그러나 대화를 통해 금방 합의점을 찾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대본을 고친다. 넉넉한 웃음이 인상적인 금발의 중년 여성은 영국에서 온 연출가 글렌 월포드, 그리고 날아갈 듯 가벼운 몸매로 이리저리 동선을 연습하는 이는 중견 배우 손숙이다.17일부터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셜리 발렌타인’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모노드라마(1인극)인 탓에 연습 멤버도 단출하다.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조연출. 셋 다 여자다. 연습 때의 진지함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인터뷰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유쾌한 입담을 풀어놓는다.1994년 국내 초연 무대에 섰던 손숙은 “꼭 한번 더 해보고 싶은 역할로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11년 만에 그 소원을 이루게 돼 기쁘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절친한 친구인 극작가 윌리 러셀에게서 작품을 건네받아 영국 리버풀에서 첫 공연(1984년)을 연출했던 글렌 월포드에게도 이번 무대는 감회가 남다르다.“어떤 배우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손)숙을 보는 순간 ‘아, 셜리구나’라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온화함, 유머감각,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 등이 딱 셜리를 닮았어요.” ●17일부터 두달 간 산울림소극장 공연 셜리는 순종적인 아내, 헌신적인 엄마라는 ‘자동인형’같은 역할에 갇혀 집안의 벽하고나 대화를 나누는 40대 주부다. 어느 날 친구의 제안으로 감행한 ‘나홀로’ 그리스 여행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자신과 대면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손씨는 “한때 어머니였고, 아내였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되찾는 셜리는 이 시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주로 힘들고, 신산한 삶을 사는 여성들을 맡아온 그는 “유쾌하고 귀여운 셜리는 연기할수록 매력적인 여인”이라고 말했다. 월포드는 “부엌에 갇힌 주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스스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셜리를 가장 좋아하는 여인으로 꼽은 이유도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연출가로, 배우로 한평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삶은 사실 평범한 주부 셜리와는 거리가 멀다. 연출가 겸 배우로 활동중인 월포드는 영국뿐만 아니라 홍콩, 일본, 러시아, 그리스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 나라 언어로 공연하는 걸 즐긴다.“너무 바빠서 남자친구 만날 시간조차 없다.”고 농담처럼 얘기하던 그녀는 “사람이든 장소든 한 곳에 정착하는 인생은 흥미없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평범한 40대 주부의 자아찾기 오랜만에 1인극을 연습하느라 밤잠을 설친다는 손씨는 “남들처럼 쉬운 인생 놔두고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나 싶을 때도 많다.”면서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거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말했다.“대사도 잘 안 외워지고,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어 이번이 마지막 모노드라마가 될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을 연출가가 재빨리 가로막는다.“숙, 당신은 그러지 못해요. 산고의 고통처럼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걸요? 내가 그렇듯이 말이에요.” 손씨는 “한국어 대사도 어디가 틀렸는지 귀신같이 잡아낼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한 연출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요즘도 가끔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연출가에게 ‘좋은 배우, 좋은 연출가’의 조건을 물었다.“참을성, 용기, 유머감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7월17일까지.(02)334-5915.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시내트라가 마피아?

    프랭크 시내트라가 한때 마피아의 자금운반책으로 일했으며 350만달러의 현금이 든 가방을 갖고 있다 체포될 뻔한 적도 있다고 베너티 페어 잡지를 인용, 로이터통신이 4일 보도했다. 이 일화는 ‘마이 웨이’를 부른 시내트라의 ‘시내트라:그의 인생’이란 전기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전기는 오는 16일 출간될 예정이다. 시내트라는 항상 마피아와의 연관설을 부인했다. 하지만 시내트라 사망 후 7개월 뒤인 1998년 12월 발표된 FBI 기록에서는 그가 시카고의 마피아 보스 샘 지안카나의 절친한 친구로 묘사돼 있다. 시내트라의 친구이자 코미디언인 제리 루이스는 “그는 자금 운반책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시내트라는 현금 가방을 들고 공항 세관을 통과하다 세관 직원이 가방을 열었으나 스타를 보기 위해 밀치는 군중 때문에 가방 검사가 중단됐다고 덧붙였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⑧-현대산업개발

    올해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77) 명예회장과 정몽규(43) 회장이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째 되는 해다. 자동차를 운영하던 경영인이 과연 건설을 잘 이끌겠느냐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대산업개발은 빠르게 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일찌감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정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에 인생의 32년을 묶어두는 바람에 뒤늦게 독립했다. 정주영가의 다른 형제들이 현대건설에서 땀 흘리며 가꾸던 회사를 발판으로 분가한 것과 달리 정 명예회장의 ‘왕회장’ 독립은 2세 경영체계 구축과 함께 갑자기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만들어야 팔린다.”면서 ‘현대자동차 신화’를 건설에 접목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교수하면 배고파”, 현대와 인연 정 명예회장이 현대와 인연을 맺은 때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이다. 고려대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 명예회장은 왕회장 밑에서 잡역부 아르바이트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손을 도왔다. 이미 두 형님(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 정순영 현대시멘트 명예회장)은 현대건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은 큰형의 메시지가 작용했다.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당리당략에 빠진 현실 정치에 빠져들기 싫어 정치 지망생의 꿈을 접고 대신 대학 교수의 길을 찾았다. 욕망은 모교 강단에 서고 싶었으나 우선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채용 사실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왕회장은 “나랑 같이 일하자.”고 소매를 잡았다. 늘 그랬지만 그에게 맏형의 말은 제의나 권유가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었고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내 사업으로 생각하고 32년 동안 일궜던 현대자동차도 왕회장이 사실상의 장조카 MK(정몽구)에게 넘겨주라는 한마디에 순순히 따랐을 정도다. 첫 직책은 신입사원 채용위원장. 동시에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하는 일도 겸했다. 왕회장이 처음 맡긴 프로젝트는 시멘트 공장 건설에 필요한 국제개발국차관(AID)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둘째형(인영·85)과 함께 충북 단양의 광산을 사들이는 한편 미국과 국내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교섭을 벌여 어렵사리 성사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보다 더 무서운 시련이 찾아왔다.30대 초반인데도 건강에 이상이 감지됐다.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마와 씨름하느라 회사를 나가지 못했다. 아내의 정성어린 간병과 용기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일에 뛰어들었다. 새로 부임한 곳이 단양 시멘트공장 공장장이었다. 사선을 넘나들던 건강을 되찾으면서 일에 미쳤다. 65년 대한건설협회 해외시찰단 일원으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마침 태국에 세계은행 자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정보를 캐낸 그는 이 사실을 서울 큰형님에게 보고한다. 정 회장은 왕회장으로부터 “태국에 그대로 눌러앉아 공사 진행상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방문단에서 빠져 관련 정보 입수에 본격 나선다. 이렇게 해서 현대건설 방콕지점장이 됐고 파타니∼나리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고속도로건설 경험도 없었던 현대였고, 국내 최초의 해외건설 공사 수주로 기록됐다. ●‘포니 정’,32년의 자동차 인생 시작 1967년 시멘트 공장 기계를 사기 위해 미국에 있던 중 본사로부터 포드자동차와 접촉하라는 전보를 받는다. 포드 자동차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조사단이 방문했는데 서울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미국에서 포드측에 관심있다는 뜻을 전하라는 메시지였다. 즉각 움직여 자동차 산업에 대한 현대의 관심을 전달하고, 포드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둘째형의 적극적인 협상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같은 해 말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는 현대자동차 회사가 설립됐고, 초대 사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이렇게 해서 ‘포니 정’의 32년 자동차 인생이 시작됐다. 자동차 진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드와의 조립계약을 맺은 뒤 68년 3월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자동차 공장 구경도 못하고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를 수출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워갔다. 본격적인 공장 건설과 함께 인재 사냥에 나섰다. 급한 대로 현대건설에서 유능한 사람을 빼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양섭 부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 부장은 20년 넘게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면서 사장까지 역임했다. 윤주원씨도 현대건설에서 스카우트해 사장까지 지냈다. 신동원씨는 당시 상공부로부터 추천받은 경우다. 신입사원도 뽑기 시작했다. 이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달리는 오늘의 현대차를 있게 한 일꾼들이었다. 마침내 68년 11월 제1호 ‘코티나’가 나왔다. 공장을 짓고 자동차를 생산하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다음해 5월부터는 중형 승용차 포드 20M도 생산했고,8월에는 자체 설계한 첫 버스를 출고하는 저력을 발휘하면서 쾌속질주를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대차의 질주를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소리도 들렸다. 경쟁사인 신진자동차와 정치권의 압박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70년초 1차 석유파동에 휩싸이면서 판매도 급감했다. 할부로 판매한 자동차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 막내 동생 상영(KCC명예회장·69)씨가 잠시 금강슬레이트 경영을 접고 부사장으로 와서 채권회수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 한 마디에 자동차 인생 종지부 언제까지 단순 조립생산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포드와 50대50 합작회사를 만들어 엔진 공장을 짓고 기술을 이전받아 자립의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포드가 약속한 지분 50%에 대한 자본 납입을 미루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웨이’를 외쳤다.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74년 국산 1호차 조랑말 ‘포니’가 탄생했고 이를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내놓는 기염을 토했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76년 2월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고 중남미를 중심으로 수출까지 이끌어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는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세계 기업으로 커갔다. 아울러 96년 MK(정몽구 현대차 회장)가 그룹 회장을 맡을 때까지 9년 동안 왕회장을 대신해 현대호를 이끌었다. 이즈음 현대가의 2세 경영체제가 이뤄지면서 자동차 회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았다. 정 회장은 용산고, 고려대 경영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 때부터 현대자동차를 몰고가는 드라이버는 몽규 회장이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 허가, 외환위기라는 거센 풍랑과 맞서 싸워야 했다. 여기에 노사분규 시련도 덮쳤다. 젊은 정 회장에게는 경영자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정 회장은 의연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방주, 김수중, 김판곤 등의 임원이 정 회장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하지만 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뒤 경영 구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MK가 현대차와 기아차의 새 회장으로 오면서 몽규 회장은 부회장으로 내려앉는다. 장차 밀어닥칠 일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었다. 마침내 99년 3월3일 왕회장은 명예회장을 부른다. 왕회장은 “MK한테 자동차 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말로 자동차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잘못된 것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그렇게 해.”라는 왕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내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이끌었던 사업이었지만 거역하지 않고 “예”라는 한마디로 32년 자동차 인생을 접었다. 아울러 왕회장의 생각과 달리 아들 몽규도 함께 자동차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파트도 자동차처럼 지어야 한다 새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몽규 회장과 전문 경영인이 맡았다. 명예회장은 경영 자문만 할 정도다. 정 회장은 아파트에 자동차 제조업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사소한 하자가 나와도 불량품이 완전히 고쳐질 때까지 모든 공정을 멈추는 것이다. 현장 중시와 품질경영 기치를 내세웠다. 체면 따위는 내팽개쳤다. 경쟁사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삼성래미안 아파트 강남 일원동 주택전시관을 찾은 적도 있다. 지난해에는 용산 시티파크 모델하우스를 찾아 경쟁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파트 이름을 ‘I-PARK’로 바꾸는 등 변신도 꾀했다. 무리하게 덩치를 키우지 않는 것도 다른 건설사와 다르다. 안정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수주·매출 목표를 줄이는 것도 그에게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자동차에서 건설로 배를 갈아탄 지 6년 만에 부동산 박사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서울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아이타워)사옥 매각도 그의 판단이었다. 부채를 갚아 정상적인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로는 최고의 조건으로 넘겼고, 부동산 개발회사가 특정 사옥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돈이 된다 싶으면 정든 사옥도 팔 수 있고, 부동산 회사가 개발 이익을 남기고 사옥을 옮기는 것은 결코 흉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부동산업자는 시장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만적인 ‘포니 정家’혼맥 ‘포니 정’과 정 회장은 결혼 과정이 비슷하다. 낭만적이다. 처음부터 명문가를 골라 배필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소개해준 여성과 사랑을 싹 틔우다가 결혼에 골인했다. 정 명예회장은 대학 시절 왕회장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한때 사무실 여직원에게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유학길에 오르는 바람에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유학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봤고 현대건설 입사 이후에는 일에 파묻혀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뉴욕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의 소개로 박영자(69) 여사를 만난다. 박 여사는 부산에서 올라와 이화여대 3학년에 다니던 귀여운 단발머리 학생이었다. 첫눈에 사로잡혀 매일 데이트를 할 정도였고 세 번째 만나던 날 프러포즈를 했다.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큰형님과 형수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어했다. 명문대가를 따지지 않는 현대가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으로 내려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뒤 만난 지 100일이 안돼 약혼하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정 명예회장은 큰딸을 결혼시키면서 노신영 전 총리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사위 경수(51)씨가 노 전 총리의 장남이다. 노씨는 서울대 교수로 국제정치 전문가다. 노 전 총리 차남은 중앙일보 고 홍진기 회장 딸 홍라영씨와 결혼했다. 이로 인해 노신영가는 국내 굴지의 그룹인 현대, 삼성가와 동시에 사돈 관계를 맺었다. 정 회장의 결혼도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순수함 그대로였다. 역시 반 중매 반 연애로 이뤄졌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김나영(39) 여사를 만났다. 결혼 얘기를 잘 꺼내지 않는 몽규 회장이지만 몇몇 절친한 친구한테는 결혼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나영씨는 연대 수학과를 나온 재원. 키도 크고 미인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 회장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정 회장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키도 크고 집안도 좋고 미인인 데다 마음까지 곱다.(아까운데)친구 중 누구 소개 시켜주면 안 될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격려해 줬다.“너보다 키 작은 여성을 만나면 어떻게 하느냐. 천생배필이다.”며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영씨는 당시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이다. 하지만 당시 대한화재는 기울어가는 회사였다. 정략적 결혼이었다면 잘나가는 집안과 결혼했을 터이지만 현대 집안에서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정씨 일가의 결혼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계기로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회장 시절 사돈인 대한화재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위장계열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중점 관리 대상으로 지정돼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회사는 뒤에 대한생명으로 인수된다. 범 현대가의 경영 특징이지만 현대산업개발에도 처가쪽 사람이 없다. 정 회장 처남이 잠깐 현대자동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근무했으나 지금은 독립,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 딸 유경(35)씨는 김석성 전 전방회장의 1남4녀중 막내인 종엽씨와 결혼했다. 몽규 회장에 이어 재계 인맥을 형성한다. 유경씨는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한 뒤 현대산업개발에서 잠시 근무했다. 종엽씨는 미국 벨뷰대학 출신으로 전방 계열의 내의류 생산업체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역시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1년 동안 사귀다가 결혼하게 됐다. ●다재다능한 전문 경영인 포진 현대산업개발 전문 경영인은 삼각편대로 구성됐다. 자동차에서 정 회장과 함께 현대차를 키웠던 전문 경영인과 현대산업개발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통이 주력부대다. 여기에 금융기관 등에서 스카우트한 전문가 그룹이 한 축을 버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사장은 정 명예회장과 정 회장의 핵심 브레인. 전형적인 재무통. 현대자동차 재경본부장과 사장을 거쳤다. 정 회장이 현대산업개발로 옮길 때 함께 배를 갈아탔으며 현대차·현대산업개발을 키운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너의 신임이 남달리 두터워 자동차에 이어 건설회사에서도 대표이사 사장을 6년째 맡고 있다.ROTC 포병장교 출신. 연극계 대부 고 이해랑씨가 부친이며 문화계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건설업계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주택협회회장을 맡을 정도로 부동산과 건설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보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정 명예회장과는 고교·대학 동문인 셈이다. 김정중 사장은 77년 현대산업개발에 입사, 국내외 현장을 누빈 건설업계 산증인. 기술연구소장, 건축본부장, 영업본부장을 거쳤다. 과거 현대아파트는 물론 I’PARK까지 그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대산업개발이 지은 아파트다. 마케팅팀 및 영업기획팀을 신설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을 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전고와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김택 현대역사 사장은 현대산업개발 에 입사해 관리본부장, 리모델링 사장을 거쳐 2003년부터 현대역사 사장을 맡고 있다. 고속철도 용산역에 8만 2000평 규모의 복합쇼핑몰 ‘스페이스9’를 운영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다. 소탈한 성격에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용산고, 고려대를 나와 정 회장과 고교·대학 동문이다. 인텔리전트 빌딩, 첨단 홈네트워크 시스템 구축 업체인 아이콘트롤스는 김대철 사장이 맡고 있다. 주거 공간의 유비쿼터스 환경을 구축, 주거혁명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현대산업개발 자재담당 임원과 기획실장을 지냈다. 서라벌고와 고려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출신이다. 장동열 아이앤이 사장은 음악·시·영화 등에 관심이 깊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감성경영을 한다는 평을 받는다. 의사결정까지는 심사숙고하지만 일단 정해진 일은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을 지녔다.2년전 현대산업개발의 기계·전기팀에서 떨어져 나간 회사다. 광주고와 전남대 건축공학과를 나왔다. 현대엔지니어링플라스틱 이건원 사장은 현대차 부품개발분야에서 27년 동안 몸담으면서 국내 자동차 부품 및 자동차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현대산업개발 유화사업부로 출발,2000년 분사한 회사. 충남 당진에 공장을 갖고 있으며 자동차 내외장재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 분야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제품 사용 범위를 밥솥, 김치 냉장고 등 생활가전으로 넓혀가는 중이다. 아이앤콘스는 부산 아이파크 프로축구단장과 현대산업개발 영업기획 임원을 역임한 곽동원 사장이 이끌고 있다. 경남고, 성균대를 나왔다. 중·소규모 아파트와 빌라를 짓고 건물 리모델링, 개발사업 등 부동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업체다. 유일한 금융관련 회사인 아이투자신탁운용도 있다. 유가증권 투자·운용과 투자자문 업무를 하면서 신뢰받는 금융서비스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표는 글로벌에셋운용 총괄본부장을 역임한 우경정 사장이다. 프로축구단 아이파크스포츠는 이준하 사장이 책임진다. 정 회장과 용산고 동문이자 오랜 친구다. 어려서부터 양쪽 집안끼리 가까웠다. 연대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MBA를 받았다. 현대차와 현대산업개발에서 영업·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모험적이고 개척정신이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경영 목표를 ‘한국형 클럽스포츠의 성공적 사업 모델 구축’으로 정했다. 우승과 동시에 스포츠단에도 사업 마인드를 접목시키기 위해 사업다각화와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있다. chani@seoul.co.kr ■ ‘만능 스포츠맨’ 정몽규 회장 현대산업개발 CEO들은 유난히 스포츠에 애착을 갖는다. 스포츠로 뭉친 인맥경영을 보는 듯하다. 특히 정몽규 회장은 스포츠광이다.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다. 선수 수준인 종목만 5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수영은 프로급이다. 승마, 수상스키, 스키(요즘은 보드를 탄다)도 수준급이다. 수상 경력이 있는 종목도 있다. 그는 격한 운동을 좋아한다. 철인3종경기,MTB(산악 자전거타기) 마니아다. 기업인 중심으로 구성된 철인3종경기 동호인이다. 얼마전에는 스키장에서 보드로 스피드를 즐기다가 안전 펜스를 뛰어넘으면서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기계 위에서 하는 운동은 별로다. 가끔 한강변이나 남산에서 뛰기도 한다. 정 회장은 “콧구멍이 시커머지더라도 밖에서 운동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한다. 골프는 할 줄은 알지만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운동할 때는 운동에 전념해야 하는데 골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도 싫다. 정 명예회장도 30년 이상 수상스키를 즐겼다. 바쁜 일정 중에도 양수리에서 물 위를 활주하곤 했다. 이런 인연으로 수상스키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선수 육성과 보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이방주 사장도 스포츠를 즐기는 CEO다.1년에 3∼4회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다. 최근 10㎞를 1시간 안에 뛰었다. 시간이 나면 등산을 한다. 회사 차원에서는 프로축구 아이파크 스포츠단을 운영한다. 회사 차원의 지원도 대단하다. 부산에 연고를 두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10여곳의 재개발단지를 수주하는데 상당한 보탬이 됐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단이 그렇듯이 아이파크 축구단도 해마다 적자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적극 밀어준다. 스포츠단 이준하 사장은 재미있는 스포츠에 사업성을 가미한 경영을 한다. 올해 적자폭을 줄이고 돈을 벌 수 있는 별도 사업을 추진, 스포츠단을 모회사에 손을 내밀지 않을 정도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chani@seoul.co.kr ■ 정세영·몽규 父子 ‘막노동 경영수업’ 정세영 명예회장과 몽규 회장은 경영 수업의 첫 출발도 비슷하다. 이 때 형성된 인맥은 건설이나 자동차 회사의 초석을 다지는 주역이 됐다. 정 명예회장은 부친이 부산 피란시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막 벌여놓은 현대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큰형(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둘째형(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이 미군 공사를 수주해 오면 시장에 나가 현장에 투입할 인부를 모아오고 자재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이 때 만난 이춘림씨는 훗날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다. 이 전 회장은 그래도 건축도(당시 서울대 건축학과 3학년생)라서 설계를 하고 공사 감독도 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잡역부이자 막노동꾼이었다. 막노동판에서 만난 인맥은 현대건설을 떠날 때까지 끈끈하게 유지된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외아들 몽규에게 혹독하게 경영 훈련을 시켰다. 대학생이었던 정 회장은 방학 때면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고된 잡일을 해야 했다. 임직원들도 모르게 했다. 땡볕 아래서 리어카를 끌고 숙식도 독신자 기숙사에서 해결하는 생활이었다. 정 회장은 울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것을 가장 기억이 남는 과거로 떠올린다. 자식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에게도 가혹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강한 저력을 발휘할 수 있게 훈련시켰고 인맥을 관리했다. 자동차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경영인들을 잘 관리했고, 그 뒤에 현대산업개발로 모셔와(?) 중역을 맡겼다. 이방주 사장을 비롯해 김판곤 전 현대역사 사장 등이 자동차에서 날리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정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키운 베테랑 경영자들이다. 정 회장 역시 자녀 교육에 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생인 큰아들 준선(13)이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영국으로 홀로 유학보냈다. 준선이는 재능을 인정받아 당당히 이튼스쿨에 자력으로 입학했다. 따로 돌봐주는 사람 없이 기숙사에서 생활토록 하고 있다. 호랑이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식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김일성 秘史 전하는 조선족 항일투사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리민(李敏·81) 여사는 10년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을 지낸 천레이(陳雷·90)의 부인으로 조선족이다. 12살에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1942년부터 45년까지 3년여 동안 김일성·김정숙 부부, 김정일과 함께 당시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인근 브야츠크 마을의 소련군 야영지에서 88특별여단에 편입됐다. 리 여사는 이 곳에서 김일성, 최용건, 안길, 강건, 최현, 김일, 최광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빨치산 대원들을 만났다. 리 여사는 후에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다. 리 여사는 하얼빈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노전사답게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60년이 넘는 과거사임에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42~45년까지 김일성부부와 활동 리 여사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북한 지도자로 옹립됐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리 여사는 “당시 88여단 내에서 최용건과 김책 등이 김일성보다 상급자였다. 이들은 해방 후 투쟁 방향과 진로를 모색하는 내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은 해방 후 중국과 북한의 공산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88여단의 소련측 책임자가 ‘조선인 가운데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것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최용건 등은 비밀회의에서 ‘김일성의 군사적·정치적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우리보다 젊다. 그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한다.’고 추대 이유를 설명했다고 회고했다. ●문학적 재능 많았던 김일성 김일성은 88여단 시절 ‘단결무’라는 가무극을 직접 만들어 조선인 부하들과 함께 공연하고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리 여사는 “정열적이고 활달했던 김일성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줬으며 문학적 재능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여사는 당시 김일성이 직접 작사했다는 ‘사향가(思鄕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 내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던 말씀. 아아 귀에 쟁쟁해….”라는 노래인데 당시 조선인 전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다고 한다. ●김일성의 결혼 주례 김일성과의 일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결혼 주례 사건이다. 당시 리 여사는 중국인 천레이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다. 천레이는 자아비판과 함께 공산당에서 제명된 상태였고 조선인 동지들도 리민의 장래를 위해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가 아닌 ‘혁명적 동지의 결합’이란 김정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일성이 중국인 지도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결혼을 성사시켰다.1943년 섣달 그믐날 리민 부부는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날 최광·김옥순 부부도 백년가약을 맺었다. 리민 부부는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환대를 받는 각별한 관계였다.9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통역없이 이들을 단독 접견했다. ●김정일은 전쟁놀이 즐겼던 골목대장 리 여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첫 만남을 42년 가을로 기억하고 있다.“42년 가을 강보에 싸인 젖먹이 김정일을 처음 봤다. 이후 45년 8월15일까지 김정일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당시 리 여사는 통신대대에 근무, 상관인 최용건을 자주 만났다. 당시 최용건은 김일성과 같은 막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막사에 가면 가끔 어린 김정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피부가 검은 데다 키가 작고 총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김정일은 아버지의 큰 모자를 쓰고 목총을 갖고 군대놀이를 즐겨했다. 큰 모자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뛰어다니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고 막사에 손님이 찾아오면 중국말과 한국말로 번갈아 ‘엄마, 아빠’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전해지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파티가 벌어지고 흥에 겨워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평소 바지를 입기 싫어하던 김정일이 이날만은 스스로 바지를 찾아 입고 또래 유치원생들을 이끌고 전선에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워 주위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94년 7월20일 김일성 주석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리민 부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우리 부부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갖다 대는 무례를 범했다.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김 위원장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라서였다.”고 회고했다. 김 위원장의 천레이 부부 접견 사진은 이례적으로 노동신문에 공개됐다. 리민 부부는 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만주 항일전사 리민 리 여사의 항일 투쟁은 남한의 역사책에 공백으로 남아 있는 30년대 만주 항일 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조선의 좌익계열은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휘하에 들어갔고, 그들과 함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창립했다. 이 부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았고 45년 종전 당시 1000여명 가운데 3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리민은 중국인 리자오린(李兆麟) 장군이 총사령인 3로군 예하 부대에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조직개편 끝에 활동지역에 따라 1로군(동만주),2로군(지린성 동부),3로군(북만주)으로 재편된다. 당시 김일성은 1로군 제2방면 6사장(師長·대대장급)으로 일본군에 의해 동북항일연군이 와해되는 시점인 41년 전후로 상급자들이 대부분 사망, 지도적 위치에 올랐다. 최용건은 2로군, 김책은 3로군 소속이었지만 김일성보다 나이는 물론 직책도 높았다. 1924년 헤이룽장 오동하에서 태어난 리 여사는 부모 고향인 황해도 사리원 인근에서 살다가 압록강을 건너 헤이룽장 삼강평원에 정착했다.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사망했고 천레이는 오빠와 절친한 전우였다. 리 여사는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 무장투쟁 부대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에 유격대원들의 취사 보조원, 간호원 등 비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리 여사는 소총이나 기관총 사격은 물론 말타기에도 익숙해져 완전한 전투원으로 임무를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7∼38년 무렵 일본군의 토벌공세가 거세지면서 송화강 유역 삼강평원 일대의 부금이나 밀산·완달산 등지에서 큰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3로군은 기병대가 주력인 일본군에 맞서 수목이 울창한 삼강평원의 늪지대로 퇴각하는 유격전술을 폈다. 1938년 여름 완달산 전투에서는 300여명의 부대원 가운데 고작 60여명이 살아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군인과 개척단 수천명을 동원, 동서남 3면을 포위하고 고립 전술을 폈다. 서서히 좁혀 오는 포위망 속에서 6일간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결국 북쪽 절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상당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가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리 여사는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가던 전우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고 회상했다. 일본군은 30년대 말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유격대가 숨을 만한 산림을 아예 불태워 근거지를 없앴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런 대로 참았지만 일본군의 교활한 귀순작전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 전우들의 배반이 가장 가슴 아팠다. 리 여사는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그가 속한 3로군은 41년 국경선을 넘어 옛 소련령으로 들어갔다. 천레이 부부는 문화대혁명(66∼76년) 당시 반동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실권 장악과 함께 복권됐다. oilman@seoul.co.kr ● 리민 여사는 1924년 중국 헤이룽장성 오동하에서 태어나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1942∼1945년 김일성 주석과 부인 김정숙 등 북한 핵심 인사들과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중국인 지주 출신인 천레이와의 결혼식 주례를 김일성 주석이 할 정도였다.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반동으로 몰렸다가 복권됐으며, 남편 천은 후에 헤이룽장성 성장을 10년간 지냈고, 리 여사 역시 헤이룽장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설훈 전의원 만난 리민 여사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항일 전사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천레이(陳雷·90) 전 헤이룽장(黑龍江)성 성장의 부인이자 정협 부주석을 지낸 리민(李敏·81)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리해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기 위해 찾아온 설훈 전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 항일동북연군에서 10년 가까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던 리 여사는 지난 2000년 역사적인 ‘남북 6·15 공동선언’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고 한다. 리 여사는 “2002년 6·15선언 2주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도자기’ 2개를 만들어 그 중 하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냈지만 김대중 선생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해 그동안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통일 도자기를 전달받은 설 전 의원은 “리민 여사의 통일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남은 여생 동안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말했다. 리민 여사가 기증한 통일기원 도자기는 김대중 도서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oilman@seoul.co.kr
  • [혁신 공기업탐방] ④공민배 지적공사 사장 인터뷰

    [혁신 공기업탐방] ④공민배 지적공사 사장 인터뷰

    대한지적공사가 대내·외적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공공성 때문에 생산성은 뒷전이었다. 전체적으로는 흑자이나 12개 전국본부 가운데 8곳이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독점적으로 해오던 지적업무도 외국과 민간에 개방됨으로써 ‘독점’이란 울타리가 없어졌다. 공민배 사장은 17일 “이런 여건 등을 고려, 올해를 창조적 경영기반 조성의 해로 정했다.”면서 “혁신적 기반기축과 전략적 사업추진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오풍연 공공정책부장이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공 사장을 만났다. 정부 차원에서 혁신의 바람이 강하게 분다. 공기업도 예외는 아닌데. -우리는 행자자치부 산하기관이다. 이미 기존 조직과 다른 방향으로 조직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본사 조직도 중요하지만 지사가 많다. 일반적인 조직기법으로 하면 느슨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소규모 조직에 대한 관리가 효율적이라야 한다. 그래서 혁신이 필요하다. 조직의 경쟁력은 어떤가. -공기업이다보니 그동안 공공성에 치우쳐 경영이나 효율성을 너무 쉽게 본 측면이 있다. 공기업은 공공성도 확보돼야 하지만 이제는 생산성 확보도 중요하다. 경영이나 효율성에 좀더 비중을 둬야 한다. 기존엔 너무 안이했다. 지적업무에 대해 독점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조직이 상당히 큰데 슬림화를 말하는가. -직원이 3808명이다. 비정규직까지 포함하면 4000여명이 된다. 조직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으로 업무 영역을 확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조직을 줄이기보다 사업확대에 비중을 둔다. 대표적인 것이 해외시장 개척과 지적재조사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우리의 지적 제도를 이식하면 된다. 그런 시점에서 효율성을 증대해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인력을 해외에 투입할 예정이다. 지난해 경영성과를 설명한다면. -75억 7200만원의 흑자를 냈다.2003년에 비해 6.5배 증가했다. 경영혁신을 통해 달성했다. 하지만,12개 본부 가운데 4개본부만 흑자다. 적자를 내는 지역본부의 흑자경영을 위해 적자폭을 줄이는 신경영마이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각 본부별로 독립채산형태로 책임경영제를 도입할 생각이다. 완전한 독립채산제는 불가능한가. -현재의 상태로는 바로 갈 수 없다. 서울이나 부산은 대규모 개발 수요가 없다. 과거에는 강성했지만 지금은 사업이 없어 계속 적자다. 옛날에 하던 규모를 줄이지 못해 그렇다. 그런 것 때문에 독립채산제가 안 된다. 서울이나 부산 등 남는 인력을 빼내 해외투자사업에 투입할 방침이다. 성과에 따라 보수차이는 있나. -성과급제도를 실행하는데 차이가 크지 않다. 생활급적 요소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이제는 성과급의 폭도 넓게 조정할 생각이다. 상여금 가운데 200%를 성과급에 따라 배분한다. 성과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눠 40%씩 차등화한다. 최하위가 120%를 받고, 최고는 280%를 받아 최고와 최저가 160%의 차이가 생긴다. 앞으로는 더 늘리려고 한다. 더불어 성과배분 방식도 바꿀 생각이다. 본부는 적자 소속 지사가 흑자인 경우, 흑자지사에 성과급을 인정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못해준다. 본부와 지사가 연대를 하도록 해야 성과를 늘릴 수 있다. 고객만족도는 어떤가. -업무상 근본적으로 좋을 수 없다. 지금은 중하위권이다. 우리의 경우, 민원이 있는 부분만 고객이 있다. 그러다 보니 고객만족도 평가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에 고객만족도를 다른 조직과 같은 방법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계속 불만이 있는 곳과 혜택만 베푸는 곳을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문제다. 이런 것을 감안해 줘야 한다. 수수료에 대한 불만은 없나. -있다. 비싸다고 한다. 수수료를 매년 고시한다. 사업의 영역이 커지면 수수료를 올릴 필요가 없다. 현재는 내릴 생각은 없고, 다른 사업을 해 수수료를 동결할 생각이다. 업무가 개방되면 경쟁력이 중요한데. -해외기업과의 경쟁은 자신 있다. 좀더 갈고 닦으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민간은 견해가 다르다. 민간의 경우, 대부분 영세업자나, 전직 공무원, 지적공사 근무자 출신이다. 그들이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사업체 규모가 작기 때문에 큰 사업을 수행할 수 없다. 우리가 지나치게 견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외진출을 하면 공백이 생긴다. 그런 분야를 민간이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고액은 우리가 하고, 저가의 사업은 민간이 하도록 해 서로 ‘윈-윈’으로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도 경영혁신 노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서비스 개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터넷 접수시스템 구축, 신용카드 결제제도 도입 등의 제도를 앞으로 더욱 확대하겠다. 현재 팀제를 운영하는가. -모든 부를 일률적으로 팀으로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처장급 팀과 부장급 팀 등 행자부와 같이 팀의 규모도 다양화할 생각이다. 팀제와 성과관리를 연계할 것이다. 행자부 산하기관이기 때문에 혁신의 바람이 거센 행자부를 벤치마킹하기가 쉽다. 자체적으로 팀제 연구를 위해 조직을 만들 생각이다. 조직의 경쟁력을 키우는 작업을 추진중인데. -전문성과 창의성, 개혁성을 키우기 위해 인력관리부장을 내부 직위공모제로 선발했다. 법무·홍보·영업 등 전문분야에는 경험이 우수한 외부인력을 스카우트하고 있다. 공사의 미래 핵심사업 준비 및 사업다각화에 따른 법령·제도 연구를 위해 ‘지적연구원’을 오는 7월 발족할 예정이다. 경영혁신을 위해 우선 역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인사관리의 합리화에 비중을 둔다. 신규직원 채용 때 학력과 연령 제한을 폐지했다. 여성 및 지방인재의 고용도 확대할 생각이다. 보수도 합리적으로 재편할 예정이다. 인건비 구조를 단순화하기 위해 수당을 일부 조정할 예정이다. 정리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한국 지적 수준 세계적 라오스등 이미 성사단계 대한지적공사가 경영혁신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은 ‘해외진출’이다.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머지않아 결실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민배 사장은 “현재의 조직을 줄이는 것보다는 효율적인 업무 확대차원에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기로 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퇴조하고 시장주의로 가는 국가가 많은데, 사유재산을 인정하게 되면 지적업무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란 설명이다. 때문에 남는 인력을 활용해 다른 나라에 가서 우리의 지적 제도를 이식하고, 사업을 따낸다는 구상이다. 지적공사는 외교부와 코트라 등을 통해 해외개척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미 아프리카 기니공화국으로부터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라오스와는 고속도로 개설에 따른 측량문제를 논의 중이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사하공화국과 캄보디아도 접촉하고 있다. 공 사장은 “100개국과 접촉을 해 한 곳만 성공하더라도 우리나라 전체를 하는 것과 규모가 비슷하다.”면서 “우리나라의 지적수준도 세계적이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자신했다. 지적공사는 해외에서 사업을 따낼 경우 다른 사업도 함께 참여할 수 있으므로 국내 다른 기업의 진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기술력은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옛날 일본식 지적공부를 그대로 쓰다보니 외국과의 접촉에 한계가 있다고 실토한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공민배 사장은 공민배 사장은 지적업무와는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하지만 공직에 들어온 뒤 경남도에서 지방과장, 문화공보담당관, 관선 함양군수 등을 거치며 지방 행정과 지적 관련 업무를 많이 경험했다. 또 지방자치가 시작된 뒤에는 민선 창원시장을 2차례나 지내면서 지적과 관련해 각종 민원인을 만났다.1기 민선시장 때는 41세로 전국 최연소였다. 공 사장은 “과거 민선 시장때 불부합지 때문에 주민간, 주민과 행정기관간 마찰을 빚는 것을 많이 보았으며, 지금업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좌우명은 ‘자기능력이나 가치를 스스로 수양’(自信自修)이다. 축구와 탁구 등 구기 종목을 좋아한다. 매일 공원을 10바퀴 정도 속보를 하며 몸을 관리한다. 하지만 고위 관료나 CEO들이 즐기는 골프는 하지 않는다. 민선시장 시절 절친했던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 등과 자주 만난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고교·대학 각각 1년 선배다. ▲경남 창원(51) ▲경남고·경희대 ▲행시22회 ▲함양군수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민선1·2기 창원시장.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어바웃 러브’-미지의 러브레터 남편이 보낸게 아냐?

    영화 ‘어바웃 러브’(The truth about love·21일 개봉)는 ‘노팅힐’ ‘브리짓존스의 일기’ ‘러브 액추얼리’로 이어지는 맛깔스러운 영국산 로맨틱코미디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는 작품이다. 사랑에 관한 리얼리티와 팬터지 사이의 황금비율을 교묘히 유지하는 스토리, 남녀의 심리를 콕 집어내는 촌철살인의 대사, 그리고 해피엔딩에 이르는 아슬아슬한 라스트신까지. 물론 불가항력의 매력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여주인공의 존재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밸런타인 데이에서 비롯된다. 술에 취해 밤거리를 걷던 아치(더그레이 스콧)는 술김에 짝사랑하는 여인 앨리스(제니퍼 러브 휴잇)에게 러브레터를 보낸다. 문제는 그녀가 절친한 친구 샘(지미 미스트리)의 아내라는 것. 게다가 샘과 앨리스는 누가 봐도 샘낼 만한 닭살 커플이니 아치가 우체통에 카드를 떨어뜨리자마자 후회하는 건 당연한 일. 그나마 이름을 적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 하지만 폭탄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익명의 러브레터를 남편이 보낸 것으로 지레 짐작한 앨리스는 둘 사이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남편에게 ‘미지의 여인’이란 이름으로 노골적인 유혹의 편지를 보낸다.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한 앨리스의 행동은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의 외도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앨리스는 배신당한 사랑에 절망한다. 이제 남은 일은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 존재했던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 러브레터의 발신자가 아치임을 뒤늦게 깨달은 앨리스는 멀리 떠나는 아치를 붙잡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영화의 일등공신은 단연 제니퍼 러브 휴잇이다. 지난해 ‘이프 온리’로 관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그녀는 가냘프면서도 육감적인 몸매에서 드러나는 섹시함과 귀여움의 이중적인 매력으로 여성 관객조차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로맨틱코미디의 새 히로인을 발견하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을 하는 영화다.15세 관람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버핏 신화’ 무너지나

    기업혁신을 강조하는 투자의 귀재 ‘버핏 신화’가 깨질까.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11일(현지시간) 계열사의 보험거래와 관련해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를 받았다. 물론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자격이었다. 그러나 회계 투명성을 위해 스톡옵션까지 비용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가 회계부정 문제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은 결코 떳떳하다고 볼 수 없다. 특히 버핏은 문제의 거래가 이뤄진 2000년 말과 2001년 초 사이 계약 당사자인 AIG가 보험 수신고 감소로 고민하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이는 버핏이 회계부정에 이용된 보험거래가 이뤄진 시점을 전후해 계열사 관계자로부터 보고받고도 이를 상당기간 감췄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계열사로 재보험사인 제너럴 리는 당시 한정보험상품 거래를 통해 AIG에 5억달러를 건넸다.AIG는 이를 재무실적과 무관한 부채 항목인 보험금 지급대상으로 잡아야 했으나 자산 증가인 매출실적 증대에 포함시키는 수법으로 분식회계했다. 일각에선 제너럴 리가 AIG에 5억달러를 제공하는 대가로 AIG의 중요한 내부정보를 얻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주식투자에 활용될 이같은 정보의 수혜자는 당연히 지주회사인 버크셔 해서웨이의 회장인 버핏이라는 것. 그러나 버핏은 당시 거래와 관련한 상세한 내역은 거의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절친한 사이이자 당시 AIG의 회장인 모리스 그린버그가 보험 수신고 문제로 격앙됐던 점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그린버그 회장이 부정거래를 획책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준 증언이다. 버핏은 조사를 받은 뒤 기자들에게 “거래와 관련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밝혔다.”고 말했다.AIG에 돈을 주고 기업정보를 받은 게 아니냐는 질문은 일축했다. 부정거래가 입증되면 AIG의 시장가치는 곤두박질칠 수 있다. 버핏의 명성도 그 ‘후폭풍’에서 안전할지는 불투명하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남편, 대권 도전 안했으면…” 슈워제네거 아내, 토크쇼서 언급

    미국 공화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부인 마리아 슈라이버가 남편의 대선 출마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슈라이버는 8일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연방헌법이 개정돼 외국 태생 시민권자의 대선 출마가 가능하게 될 경우 슈워제네거는 출마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길 원한다.”고 말했다.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슈라이버는 수차례에 걸쳐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슈워제네거는 주지사에 당선된 뒤에도 로스앤젤레스 인근 브렌트우드에 있는 부인과 네 자녀와는 떨어져 1주일에 3∼4일을 주지사 선거 당시 임대한 새크라멘토의 한 호텔에서 보내고 있다. 이들 부부는 오는 26일 결혼 19주년을 맞는다. 내년 주지사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선거자금 모금에 나선 가운데 부인 슈라이버의 이같은 발언이 나오자 그녀가 남편의 출마 포기를 설득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새크라멘토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슈라이버는 남편의 정계 입문을 애초부터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2003년 슈워제네거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자 함께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지지를 호소했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기왕 변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 영조 때 태진(太眞)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빠뜨릴 수가 없다. 그는 남원에서 발생한 불온 벽보 사건에 연루됐었고 그 사건은 조선왕조의 정사(正史) ‘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반역죄인을 취조한 기록을 엮은 ‘추안급국안’이란 책자에도 상세하다. 태진은 반역에 관한 혐의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던 것인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 ‘실록’ 등엔 태진이 부안 변산에 있던 월출암(月出菴)의 승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찾아본 부안 지방의 고문헌에는 월출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절의 스님이 역모사건에 관련됐던 관계로 폐찰(廢刹)이 되고 만 게 아닐까 짐작되기도 하지만, 꼭 옳은 짐작일지는 모르겠다. 그런 식이었다면 역사상 큰 절치고 문 닫지 않고 배겨날 절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절의 이름이 잘못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절 이름이 다소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대역부도 사건 등이 발생한 다음엔 고을의 명칭이 바뀐 사례가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참조된다. 그런 점에서 일단 혐의를 둘 만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월명암(月明菴)이 바로 그 경우다.‘달이 뜬다.’는 뜻을 가진 월출(月出)이나 ‘달이 밝다.’는 월명(月明)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한 월명암은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하필 월명(月明)인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태진 역시 당대의 ‘명승(名僧)’으로 존경받던 스님이었다.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그는 양반가 출신이었는데 참선수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돼 태진은 결국 조정으로부터 엄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몸담았던 불교계조차 그를 영구히 추방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해도 나는 태진을 비난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태진은 부조리한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변혁시킬 꿈을 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뒷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월명암을 찾았던 강증산, 소태산, 백학명 등 근대 종교계의 큰 별들과 일맥상통했고, 그가 연루됐던 사건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영조가 직접 심문 나선 ‘괘서’ 사건 때는 영조9년(1733) 음력 7월 말이었다. 한여름 불볕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구중궁궐에 계신 영조임금부터 강원도 두메산골 김첨지네 복슬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다들 살맛을 되찾아 가고 있던 차에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서울에서 700리나 떨어진 전라도 남원에 괴문서 한 장이 나붙은 거였다. 먼 시골 도시 성벽에 밤새 어떤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붙였기로 그게 무슨 큰 야단이라고들 호들갑인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선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괘서’(요즘말로는 벽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문제의 벽보는 우선 그 내용이 ‘매우 흉악했다.’ 지엄하신 상감마마와 동궁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세상이 곧 뒤집어진다는 믿기 어려운 소리가 가득했다.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게 느껴지는 ‘불충한’ 글이었다. 더구나 이 괘서의 상당부분은 이미 4년 전에 진압된 ‘무신란(戊申亂·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하며 소론과 남인들이 일으킨 반란)’의 주동세력이 각지에 퍼뜨린 소문이나 선동적인 구호와 일치했다. 영조로선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무신 잔당’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로 의심해볼 만했다. 영조는 몹시 긴장했으며, 그를 보좌해 국정을 이끌던 조정대신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급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전담하는 의금부며, 사건발생지역의 수장인 전라감사, 그리고 조정에서 현지로 파견된 관리인 남원부사 등이 열흘 이상 이 사건에만 매달리다시피 했다. 피의자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날마다 계속되었고 그동안 영조는 몸소 수사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했으며, 직접 신문에 나서기도 했다. 일반에는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정조 때는 실상 이런 역모 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해 조정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월출암 승려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 비결’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예언서는 ‘남사고 비결(南師古秘訣)’이었다. 태진이 가지고 있었던 그 책은 갑자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일어날 사건들이 예언돼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년체 예언서였다. 이 책엔 역모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했던 무신년에 대해서 “또한 좋지 않다.”든가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길이 막히며 민호에 연기가 끊긴다.”는 예언이 적혀 있었다. 실제 영조4년(1728) 무신년엔 하3도(충청, 전라, 경상)에서 반역사건이 있었으나 곧 진압됐었다. 그러므로 ‘남사고’의 예언은 그런대로 잘 들어맞은 셈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편년체로 돼 있다. 그러나 예언서의 시작은 갑자년이 아니라 경인년으로 돼 있어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와는 분명히 다르다. 위에서 예로 든 무신년에 대해서도 “제갈량(諸葛亮)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성 한쪽에 금성(錦城)이 피폐하구나. 경시(更始)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했다. 자구상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그 해의 운이 무척 나쁘다고 본 점에선 우연히 일치한다. 그밖에도 태진이 소장한 ‘남사고’엔 백저 안답(白猪按答), 봉목 장군(蜂目將軍), 승입병도(僧入丙都), 노색연절(路塞煙絶), 만가여일(萬家如一) 등의 표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글귀는 현재의 ‘남사고’엔 전혀 없다. 책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똑같지 않은 줄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평소 태진이 소지했던 ‘남사고’에는 무신년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돼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그런 내용이다. 예컨대, 무신년으로부터 4∼5년이 지나면 “세상일이 이미 끝이로다.”라고 했다. 그 참상은 “백 가호에 소가 한 마리요, 열 계집에 한 남편이로다.”라는 구절에 가장 잘 압축돼 있다. 요컨대, 세상은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는 것인데, 햇수를 따져보면 영조9년이 바로 그 말세운이었다. 영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로선 이런 ‘남사고’의 예언을 그저 웃으며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의 금지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사고’를 비롯한 ‘정감록’의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조정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태진이 ‘남사고’를 손에 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했는데, 충남 보령의 오서산(烏棲山·791m)에 들른 적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도승(道僧) 자명(自明)을 만났다고 했다. 태진은 그것이 기유년(1729)의 일이라고 회상했는데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태진은 오서산에 이틀 동안 머물렀고 그 때 자명이 가진 ‘남사고’를 처음으로 구경했단다. 태진이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이자 자명은 필사해 주었다. 태진은 평소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어딜 가나 늘 ‘남사고’를 휴대했다. ‘남사고’의 예언은 현실로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태진의 변함없는 믿음이었다. 어서 빨리 세상이 바뀌어 현세가 미륵세상으로 바뀌기를 그는 열렬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예언서를 무척 좋아했다. 더욱이 변산은 한국 미륵신앙의 출발점이었고, 태진은 그런 사상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남사고’의 내용을 들려주었고, 그 예언을 시세에 맞게 적절히 풀이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태진의 주위에는 ‘남사고’를 베껴 나눠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진, 남원 양반 최봉희를 사귀다 태진은 기회가 되는 대로 속세의 여러 사람들과 사귀었다. 때론 산사를 찾아온 양반들과도 자연스레 친교를 맺었다. 그는 그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유년(1729) 10월, 전북 진안의 팔공암(八公菴)에 있을 때야. 그 암자가 경치 좋고 한가한 곳이란 소문이 있어 찾았던 게지. 내가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지. 젊잖아 뵈는 세 양반이 그 절간엘 들렀어. 무슨 약초를 캐러 왔던 모양 같아. 한 분은 이름을 최봉희라 했는데 남원서 온 가난한 양반이었고, 또 한 분은 윤징상이라고 했지 아마. 그리고 또 정원덕이라는 분이었을 거야. 이 양반들은 서로 친구사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팔공암의 노스님을 모신 승방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 진지하게도 나누었지. 부처님의 법이 공자의 가르침과 과연 다른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가, 부모에게 효를 다한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등등 얼핏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어. 승방 한담이란 게 흔히 그러하듯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가 자연 정치 문제에 미쳤지. 무신년(영조4년 1728)에 있었던 난리에 대해 또 한참을 이야기하게 됐어.‘그때 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게 중론이었어. 난 빙그레 웃기만 하고 별 말을 안 했지. 그래도 영 암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는 좀이 쑤셔, 내가 소장하고 있던 ‘남사고’에 관해 몇 마디만 들려주었어. 그 이튿날 세 양반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글쎄 날더러 ‘남사고’를 보여 달라는 거야. 암자에 계시던 노스님도 한 번 보여주라고 자꾸 권하셔서 나중엔 바랑에서 그 책자를 꺼냈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더군. 이 왕조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챘던 모양이야.” 그날 오전 최봉희가 일행을 대표해 태진에게 이렇게 물었다.“선사(禪師)께선 양반 자제로 불가(佛家)에 입문하셨고 덕이 높아 평소 많은 불자들이 대사(大師)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옛날 강원도에 머무실 때는 여러 지방관들이 선사께 서찰(書札)을 보내 시문(詩文)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도 하더군요. 시사(時事)가 장차 어찌 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남사고’의 예언을 가지고 계신단 말씀을 잠깐 들었습니다만, 저희는 시골의 무식한 선비라 아직 그런 책을 한 번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선사께서 아시는 대로 설명을 좀 해 주실 수가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극진한 예의를 갖춰 간청해 마지않는 세 양반들의 겸손한 태도에 태진은 거의 감격했다. 그는 평소 가슴에 조용히 담아둔 몇 마디 말을 꺼냈다.“이런 말세(末世)를 당해서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은 산림(山林)뿐인데, 선비님들께선 야지(野地)를 버리고 산협으로 들어오셨으니 진실로 살 길을 얻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윤징상이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이란 산림이다.’라는 말씀은 어느 책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태진은 마치 그 말이 있기를 기다렸단 듯 ‘남사고’에 그런 말이 나온다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태진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양반은 최봉희였다. 최는 가문은 매우 훌륭했으나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 가엾은 시골의 한사(寒士)에 불과한 처지였다. 서글픔 속에서 끼니 걱정을 하고 지내는 최봉희인지라 세상에 대해 유난히 불평불만이 많아 보였다. 마침내 최는 젊은 정원덕의 도움을 받아 ‘남사고’ 한 벌을 베낄 수 있었다. ●김원팔, 최봉희의 ‘남사고’를 베끼다 남원으로 돌아온 최봉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사고’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김원팔과 김원하 형제, 김태기, 김중기 등 7명이 필묵계(筆墨契)를 맺어 서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김원팔 등은 최봉희의 이야기를 듣자 ‘남사고’를 구경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남사고’를 ‘무신년 난서(亂書)’라고도 불렀다. 무신란에 대한 예언이 기막히게 잘 들어맞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계원들 중에서도 최봉희와 특히 친했던 사람은 김원팔 형제였다. 원팔의 아우 김원하는 마침 논밭이 최의 집 근처라 매일 같이 만나는 형편이었고, 김원팔은 당시 전주(全州)에 살고 있어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최봉희의 입장에선 우정을 핑계대어 출입이 잦은 편이었다. 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상쩍은 소문을 수집해다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김원팔은 그 점을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영조8년) 10월 최봉하가 내 아우 김원하(金元河)를 찾아가서 중국 서쪽의 양만족들이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측이 조선에 청병(請兵)했다고 말했고, 물가가 급등한다는 등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북부 지방에선 소가 기린(麒麟)을 낳았으므로 이제 성인(聖人)이 나올 차례라고도 했다. 하여간 남원 제일의 소식통은 최봉희다.” 남원의 선비들 가운데는 최봉희를 통해 세상사를 알아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황당한 이야기에 왠지 가장 솔깃해하는 사람은 김원팔과 그 아버지 김영건이었다. 원팔은 최봉희를 줄기차게 졸라 가지고 ‘남사고’를 모두 필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좀 신기하다 싶은 남의 글이나 책자를 베끼는 일은 보통이었다. 아들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김영건은 한문을 제대로 읽을 만한 실력이 없어 그 책을 그저 무신란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하는 정도였다. 김원팔이 아버지에게 바친 책자엔 ‘남사고’ 외에도 ‘요람(要覽)’이란 예언서가 포함돼 있었다.‘요람’의 주인 역시 최봉희였는데, 김원팔은 양반의 서얼인 이서방(李書房)에게 위촉해 책의 대부분을 필사하게 했다. 그러나 그 책의 마지막 대목만은 원팔이 자필로 베꼈다.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 김원팔 부자는 태진 등이 소장했던 예언서를 구해다 도대체 무엇에 이용할 생각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 또는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예언서를 필요로 한 것일까? 태진 사건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드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호를 기약한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쉬어가기˙˙˙

    절친한 친구를 잃고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가수 바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최근 보석 브랜드와 광고모델 계약을 맺은 바다는 지난 27∼28일 지면광고 촬영을 끝내고, 계약금 일부를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전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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