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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살 장타소녀 LPGA 첫 도전

    지난 12일 아마추어로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여자오픈 최종 예선을 통과한 장하나(15·대원중)가 역대 국내 출전 선수 가운데 최연소인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골프협회(KGA)는 13일 “장하나가 지금까지 US여자오픈 본선을 밟은 선수 가운데 프로는 물론 미국 지역 예선을 거친 아마추어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선수”라고 밝혔다. 장창호(52)·김연숙(52)씨의 늦둥이 무남독녀로 태어난 장하나는 서울 반원초등학교 시절부터 ‘장타소녀’로 이름을 날리며 각종 국내 주니어대회를 석권한 골프 꿈나무다. 다섯 살때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검도를 시작, 초등학교 2학년 때 공인 4단을 따낸 장하나는 1년 뒤 골프채를 잡았다. 검도를 통해 얻은 팔힘으로 때려내는 드라이버샷은 성인 프로를 능가할 정도.1년 뒤 평균 290야드 가까이 날리며 ‘장타소녀’의 별명을 굳혔다. 2005년 익성배매경선수권과 이듬해 호심배선수권 등 굵직한 아마대회 상위 입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장하나는 2004년 한국여자오픈 최연소로 컷을 통과,‘될 성부른 떡잎’으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US여자아마추어선수권 16강에 올랐고,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크라운CC오픈 아마추어 부문에서 우승했다. 한 살 많은 한국계 ‘천재소녀’ 킴벌리 김과도 절친한 사이.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애리조나주에서 열린 지역대회에서 둘은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 가지는 등 ‘선의의 라이벌’로 크는 중.US여자오픈 본선 티켓을 따낸 장하나는 내년 미국골프협회(USGA)가 주관하는 모든 대회 출전권까지 자동으로 챙겨 향후 프로 진출을 위한 미국무대 적응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생애 처음으로 LPGA 무대에, 그것도 메이저대회에 나선 장하나는 “나흘 동안 이븐파 안팎을 목표로 잡고 치겠다.”면서 “12일 최종 예선을 치른 코스의 난이도가 77.6이었는데 US여자오픈이 열리는 파인니들스골프장은 71이 조금 넘는 만큼 쇼트게임만 더 연습하면 목표 달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오늘은 세계 금연의 날] 30년 애연가서 ‘전국구 금연왕’ 된 김낙연씨

    “피는 물보다 진하더군요. 고등학생 아들이 담배 피우는 모습에 충격받아 딱 끊었습니다.” 31일 제20회 세계금연의 날을 맞는 김낙연(54·버스기사)씨의 감회는 남다르다.17세부터 시작한 30년 애연가 생활을 접고 금연전도사로 변신한지 올해로 7년째. 구청에서 ‘금연모범시민상’을 받았고, 한 지상파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금연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국립암센터, 금연운동협의회 관계자 등으로부터도 판정을 받은 만큼 김씨는 전국구 ‘금연왕’인 셈이다. 그러나 7년 전 김씨의 모습은 요즘처럼 밝지 않았다. 시커먼 얼굴에 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부인과 아이들은 냄새가 역하다며 그를 멀리했다. 원인은 하루 2갑 이상 피우던 담배때문이었다. “중독성을 누구보다 잘 체감했다.”는 김씨는 2000년쯤 처음으로 금연에 도전했다. 절친한 친구가 폐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아 서울 원자력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다. 친구는 뒤늦게 담배를 멀리한 채 삶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얼마 안돼 숨을 거뒀다. 이 충격으로 김씨도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담배와의 이별은 8개월을 넘기지 못했다.“한개비의 유혹을 못 넘기니 8개월치 밀린 담배까지 다 피웠습니다.” 그런뒤 그의 금연 욕구에 불을 댕긴 것은 둘째아들이었다. 어느 날 수첩을 찾으러 들어간 고교생 아들의 방에서 숨겨둔 유리병 재떨이를 발견한 것이다.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위에서 ‘담배 피우는 아들 뒤에 아버지가 있다.’고 한 말을 듣고 며칠 뒤 김씨는 정말 담배를 딱 끊었다.2000년 10월12일의 일이다. 덕분에 26세 직장인으로 장성한 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 김씨가 ‘담배와의 전쟁’에 성공한 데는 식사한 뒤 바로 소금물로 양치질을 하거나 호두 2개를 손에 쥐고 굴리는 등의 습관이 큰 도움이 됐다. 이같은 방법은 금연운동협의회에서도 인정한 만점짜리 행동요법이다. 된장을 이용한 쑥무침, 볶은 검은콩, 순무와 복숭아 주스 등은 니코틴 등 담배 독을 해소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10월17일 지금까지 잘 참았다.’,‘18일 이제 성공한 것 같다.’ 등 처절한 사투가 기록된 금연일지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김씨는 “항상 청결한 덕분에 부부금슬도 좋아졌다.”면서 “무엇보다 아들에게 건강을 물려주게 돼 뿌듯하다.”고 힘줘 말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블레어에 격노와 좌절

    엘리자베스 2세(위 사진) 영국 여왕이 10여년 간 집권한 토니 블레어(아래) 총리에게 격노와 좌절을 느껴왔다고 여왕의 친구가 폭로했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은 27일 여왕의 절친한 친구의 말을 빌려 그녀가 블레어 총리의 국정 현안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노동당의 새로운 정책을 크게 우려했다고 보도했다. 왕실소식통은 여왕이 블레어 총리와 내각이 상원개혁을 포함해 영국 전통에 대해서도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전했다.그녀는 영국 군대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외국 주둔을 확장하는 데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으며, 블레어 총리가 국익을 희생하면서까지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또 블레어 부부는 매년 스코틀랜드에서 여왕 부부를 알현했는데 서로 공통된 화제가 없어 어색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81세로 55년간 통치하며 10명의 총리와 일한 여왕은 영국과 영연방의 원수이자 군대의 수장이다. 여왕의 친구는 블레어 총리가 임기를 마칠 때 여왕만찬에서 전임자인 윈스턴 처칠이나 해럴드 윌슨의 선례를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총리와 여왕이 그의 임기가 끝나는 6월27일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어 그런 이벤트는 아직 예정돼 있지 않다고 전했다. 왕실 내부관계자는 이와 관련,“여왕과 총리 사이에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며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나 여왕은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에 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禪수행 50년 지리산 황매암 일장 스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禪수행 50년 지리산 황매암 일장 스님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 쑹산(嵩山)의 소림사 토굴에서 9년 면벽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40대 승려가 찾아와 무릎 꿇고 뵙기를 간곡히 청했다. “바다와 같은 자비심으로 제게 불법을 깨우쳐 주십시오.” “법을 구하려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야 한다. 부질없는 소리 말고 돌아가거라.” 승려는 갑자기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왼팔을 댕강 잘랐다. 달마대사가 다시 물었다. “네가 구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내게 가지고 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찾았다 해도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느니라. 하하하.” 그 말 한마디에 승려는 평생의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어 “마음이라, 형상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을 붙잡고 왜 그리도 스스로를 할퀴었던가.”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승려는 달마대사에게 넙죽 엎드렸다. 달마대사에서 시작한 선불교가 중국에 비로소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이 승려가 바로 중국 선불교의 제2대 조사인 혜가(慧可·487∼593)스님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서산대사 또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통해 부처의 마음을 선(禪), 그 말씀을 교(敎)라고 설파했다. 말없음으로 말없는 데 이른 것은 ‘선’이요, 말로써 말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라고 하면서 선과 교의 독특한 차이점을 밝혔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새삼 ‘마음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표를 던져본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내 마음’은 과연 어디쯤 가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 노여운 마음은 자꾸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반가운 마음, 푸근한 마음은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이 문득 찾아든다. 지난 14일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며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은 한 암자를 향해 떠났다. 차로 4시간 남짓, 남원시 인월면 사거리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암자의 그 스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라는 설명과 함께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지리산 실상사 방향으로 30분쯤 오르다 해발 600m 지점에 이르러 외길 숲 사이로 ‘황매암(黃梅庵)’이 나타났다. 출가한 지 50년째 선수행(禪修行) 중인 일장(日藏)스님, 한라산 자락 토굴산방 ‘목부원’에서 15년 동안 수행안거하다가 2004년 이곳에 ‘황매암’을 창건, 조용히 참선 정진 중이다. 성철스님의 스승이기도 한 동산 큰스님의 막내상좌로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가장 귀감으로 삼는다. 그래서 2005년 ‘선가귀감’의 언해본을 쉽게 한글로 번역·출간해 그 뜻을 폈다. 또 1999년에는 생전의 성철스님한테 받은 ‘만선동귀집’을 편역했다. 이 두권은 불교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특히 스님은 선서화(禪書畵)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의 불사전(佛事展)과 장학모금전에 참여하면서 이같은 존칭을 얻었다. 스님은 속세와 담을 쌓고 토굴수행을 하기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의하지 않는다. 까닭에 별도의 약속도 없이 무작정 황매암을 찾아 합장했다. 지리산 중턱을 감아도는 맑고 고운 바람과 풍경(風磬)소리를 배경으로 차방에서 스님과 마주 앉았다. 주위에는 온통 5월의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어제는 백초(百草)를 캤지요. 취나물, 다래넝쿨, 오미자, 감잎 등 새잎이 돋아나니까 그걸 캐서 몇 단지 만들어 발효를 시켜 둡니다. 여름에 냉수 타서 마시면 속이 깨끗해요.” 스님은 출가 후 얼마 있다가 심장병이 악화돼 참선방에서 나와 일찍부터 토굴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고독과 절망을 이기는 것이 간단치 않았다. 하루는 성철스님한테 찾아갔다. 순 한문으로 된 ‘만선동귀집’을 건네받았다. 그날로부터 옥편을 옆에 끼고 공부에 몰입했다. 출가 초기에는 한 성당에서 호주 출신 신부와 1년 동안 지내며 교리공부를 했다. 이해되는 대로 몇줄씩 써서 벽에 붙였다. 이것을 볼 때마다 마음의 고향을 느꼈다고 했다. “스님,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형체도 없는 것을 사람들은 닫아 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진실해지면 표현도 진실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식과 위선이 많아집니다. 매일 있는 오늘이지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환경은 두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바로 처음의 모습을 (마음에)담는 것입니다. 매순간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또 여한 없이 밝은, 닫힘이 없이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 속이 내 속이고, 그 사람의 삶이 없이 결국 내 삶도 없지요.” “스님이 그리는 ‘선서화’도 그런 맥락인가요?” “달마스님의 9년 면벽이 천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살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어느날 말이 곧 허구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붓으로 써서 절방 여기저기에 붙여 놨습니다. 나중에는 ‘웃는 기왓장’도 넣었고, 색칠도 해봤더니 그림쟁이라고 하더군요. 본업이야 중노릇인데, 지나가는 누구나 그걸 보면서 잠시 마음의 고향을 느끼면 그만이지요.” 스님은 20년 전 내원사에 있을 때 잘 아는 지인이 암에 걸려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병문안을 갔다. 이때 촛불이 그려진 연하장 크기의 선서화를 선물했다. 환자는 세상의 빛을 본 것처럼 좋아하며 머리맡에 붙였다. 얼마 후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적처럼 살아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화제를 돌렸다. 첩첩 산중의 암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해졌다. 갈등과 분열, 대립과 양극화, 도덕성 상실 등등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스님은 지체없이 “그건 다 우리의 거울이지요.”라고 말했다. 남을 탓할 필요 없이 각자 자신의 거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 어떤 캠페인으로 고쳐질 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성장과정이 너무 쉬워요. 그러다 보니 우여곡절도 있고 혼란한 모습을 보이지만 나아집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유한이 아니라 무한입니다. 오늘의 발전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봄직하지요. 산은 무질서합니다. 수많은 가시덤불과 높고 낮은 언덕이 있거든요.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온갖 개성들이 함께 모여사는 사회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운명은 우리 각자가 하나씩 풀면서 꾸려나가야 합니다. 빈그릇을 보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가득차 있으면 유한한 법입니다. 때를 닦아내려면 걸레가 깨끗해야 합니다.” “스님,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더는 어떠해야 합니까?” “능한 사람이 아닌 스스로 나의 허물을 돌아보고 고칠 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어두운 알 속을 깨고 나오는 것이지요. 어둡다는 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으면 전체를 못봅니다. 전체를 밝게 봐야지요. 촛불이 방안에 하나 있는 것보다 10개 있으면 더욱 환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림 하나를 꺼낸다. 촛불 하나가 힘차게 그려져 있고 일휘등명(一 燈明), 보공시방(普供十方)이라는 글씨가 휘갈겨 있었다. 스님은 “밝은 등불(꿈, 희망, 용기) 하나, 이웃들에게 공양합니다.”고 풀이했다. “종교는 주변이 행복해져야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바탕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나 1년에 천끼 넘게 먹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먹습니다. 다만 라면을 만날지, 아니면 진수성찬을 만날지는 지나온 밥그릇의 바탕에 따라 정해지겠지요. 생활습관이 바로 ‘업’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경남 울산 출생(속성 천씨). ▲1958년 13세때 출가, 범어사 ‘동산스님’의 막내 상좌(上佐). 이후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80년 제주 한라산 자락에 ‘목부원’을 창건하고 수선.10여년간 경전 강독.‘청화스님’이 입적 직전 목부원(현 자성원)에 머물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한 곳으로도 알려짐. ▲2004년∼현재 전남 남원의 지리산 산중에 ‘황매암(黃梅庵)’을 세우고 참선정진 중. ▲주요 저서 편역으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1991년 불광출판)과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2005년 불광출판)이 있다. ▲그외 숙생의 화업(畵業)으로 여러 차례 불사전(佛事展)과 장학모금전에 참여, 현존 선서화의 대가로 유명함. 실상사의 연관스님과는 절친한 도반. 성철스님을 사형(師兄)으로 모심(성철스님은 1936년 ‘동산스님’한테 사미계를 받았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태어날 애기까지 영화에 동원

    태어날 애기까지 영화에 동원

    『남(男)과 여(女)』『파리의 정사』등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프랑스」의 「클로드·를루쉬」감독이 새 영화 『깡패』의 「로케」에 한창이다. 이 영화엔 「를루쉬」감독의 아내인 「크리스틴」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더욱 화제. 각본(脚本)서부터 분장까지 자신이 직접 도맡아서 「클로드·를루쉬」하면 귀재(鬼才)가 많은 「프랑스」영화계에서도 제1급의 귀재로 손꼽힌다. 새 영화를 만들었다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데가 없다. 줄거리를 정하고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가하면 「로케이션·헌팅」은 물론 감독과 촬영, 심지어는 분장까지 자신이 도맡는다. 『물론 내가 천재이거나 욕심장이는 아니지요. 그러나 영화가 완성되어 일단 상영되면 그 영화에 대한 잘, 잘못은 모두 내게 향해져요. 그러니까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선 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지요』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만사를 제쳐놓고 몰두 「를루쉬」감독의 숨김없는 고백이다. 지방흥행사나 거물배우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우리나라의 감독들과는 생각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대전제속에 「를루쉬」감독은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만사를 제쳐놓는다. 아내와의 저녁약속, 친구들과의 「포커」약속쯤은 아예 지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연 아내인 「크리스틴」은 불만이 많기 마련.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새 영화『깡패』에선 아내 「크리스틴」을 주연여배우로 씀으로써 이제 이 두 부부는 24시간동안 함께 지내게 되었다. 「프랑스」감독으로 자기 아내를 곧잘 영화에 출연시켜 온 사람은 「로제·바딤」. 그의 아내였던 「브리지드·바르도」「아네트·스트로이버그」「제인·폰다」「캐더린·드뇌브」등은 모두 「바딤」이 주연여우로 쓰던 얼굴들. 『사실 그 역을 아내에게 주자고 마음먹고 쓴 것은 아니었죠. 그러나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난 뒤 그 역을 맡길 여배우를 찾아보니 아내밖엔 없더군요』 그러니까 자신은 아내의 연기력을 전혀 몰랐던 것. 전직 「패션·모델」이며 잡지의 표지아가씨였던 「크리스틴」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 「를루쉬」감독의 「카메라·테스트」에 손쉽게 「패스」했다. 영화에 출연한 아내를 가정서도 연기자 취급 『일단 영화에 출연하니까 그이는 절 아예 아내가 아니라 영화속의 여인으로 만들려고 들더군요. 영화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예요. 때로는 이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죠. 하지만 영화에만 몰두하는 그이의 성격을 아니까 제가 참지요』-「크리스틴」이 아내로서 하는 말이다. 올해 33살의 한창 나이인 「를루쉬」는 처녀작『남과 여』(「아누크·에메」「장·루이·트랭티냥」주연) 한 편으로 명성을 얻은 귀재. 이 영화가 개봉된후 세계각국에선「모노크롬」(단색(單色)화면)의 촬용이 활발해졌다. 그후『파리의 정사』(「이브·몽땅」「아니·지라도」「캔디스·버겐」주연),『나를 좋아하는 남성』(「장·폴·벨몽도」「아니·지라도」주연』등을 발표하여 영상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새 영화『깡패』는 지금까지의 「로맨스」영화와는 달리 「갱」영화. 「를루쉬」감독으로선 처음 변신을 꾀하는 셈이다. 스토리는 개봉전 까지 절대로 밝힐수 없다고 「스토리」는 실제 있을 뻔했던 사건을 그대로 빌어온 것. 「스위스의 시몬」이란 별명을 가진 한 전과자가 1백만「달러」를 갖기 위해 6년간 옥중에서 계획한 치밀한 완전범죄다. 『바로 그 「시몬」이 저와는 군대시절 친구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를 설득했죠. 다시 범행을 하다가 감옥엘 가느니 차라리 내게 상세한 계획을 알려주면 영화수입의 얼마를 떼어주겠다고요』 이런 「를루쉬」의 설득에 「시몬」은 범행을 포기하고 자신의 기발한 범죄계획을 털어 놓았다. 각본은 물론 「를루쉬」자신이 쓰고. 「스토리」가 이런 것이고 보니 궁금증도 대단한데 「를루쉬」감독은 개봉전 까지는 절대 밝힐 수 없다고. 「시몬」역을 맡은 배우는 「를루쉬」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1급 연기파배우인 「장·루이·트랭티냥」 (남과 여). 그의 어렸을 때부터의 꿈은 「오토·레이서」(자동차경주선수)와 변호사였는데 『남과 여』에선 「오토·레이서」역을, 이번『깡패』에선 전직 변호사역을 맡게 되어 어렸을적의 꿈을 「스크린」에서나마 이룬 셈이다. 「로케」장소는 「파리」에 있는 「를루쉬」의 「스튜디오」와 「파리」의 변두리 거리들. 그러나 야외 「로케」일 경우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는 주연 배우들에게도 알리지 않는 「를루쉬」의 취미다. 그저 배우들은 「를루쉬」가 일러주는대로 행인들 틈사이를 빠져 나갈뿐. 이 부부합작을 기념하기 위해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까지 「시몬」으로 미리 정했다니까 말하자면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도 영화에 동원했으면 하는 눈치. [선데이서울 70년 9월 27일호 제3권 39호 통권 제 104호]
  • [20&30] 경조사비 문화

    [20&30] 경조사비 문화

    ‘계절의 여왕’ 5월은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계절이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결혼식 소식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축복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돈 쓸 일이 많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날 등이 겹친데다 한 주에 2∼3개씩 결혼식이 몰리다 보면 축의금 부담에 지갑은 어느새 홀쭉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잔치나 지인이 상(喪)이라도 당한다면 지갑은 텅빌지도 모른다.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이나 박봉에 시달리는 월급쟁이들에게 5월은 ‘잔인한 달’인 셈이다. 그렇다고 1만∼2만원을 봉투에 넣을 수도 없다. 경조사비는 ‘3만원,5만원,10만원’이라는 인식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경조사비에 대한 20&30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중장년층들은 대부분 경조사비와 관련된 ‘장부’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쌓이면 기억하기 쉽지 않고 자칫 실수할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상부상조 전통을 지켜온 어르신들은 경조사비를 언젠가는 꼭 되갚아야 하는 ‘빚’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기성세대에 일반화된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는 생각은 20∼30대에서도 여전히 지지를 얻고 있다. 회사원 임모(29)씨는 아직 조의금 부담은 별로 없지만 한 달 평균 10만원가량을 축의금으로 지출한다. 임씨가 봉투 두께를 결정하는 기준은 철저한 ‘상대주의’다. 임씨는 “내가 결혼할 때 준 사람한테, 받은 만큼만 낸다. 보통 5만원 정도가 적정 수준인 것처럼 돼버렸지만 거래처 사람이나 안면만 있는 경우에는 3만원으로 끝낸다.”고 밝혔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친분도 없는 사람에게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내는 경우도 늘었다. 임씨는 “체면 때문에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의식이 문제인 것 같다. 꼭 봉투가 오가지 않더라도 외국처럼 친한 사람끼리 모여 의미를 새기고 조촐하게 치르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머니 사정 고달파도 인간관계 유지 위해 필요” 고등학교 교사인 강모(32·여)씨는 학교 상조회비로 매달 2만원씩 내는 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평균 월 10만∼20만원 정도의 경조사비를 지출한다. 강씨의 지출 기준은 친소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직접 참석하는 경우에는 3만원, 아주 끈끈한 사이일 땐 5만원을 낸다. 물론 가족이나 친지의 경조사가 있을 때는 훌쩍 뛴다. 사촌동생의 결혼에는 20만원, 시동생이 결혼할 때는 50만원을 냈다. 시아주버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0만원을 냈다. 강씨는 “경조사비를 낼 때마다 버거운 게 사실”이라면서도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꾸려가고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다. 돌려받을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어려울 때 보태준다는 데 의미가 강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송모(31·여)씨도 친분관계에 따라 지출을 결정한다. 송씨는 “결혼 후 시댁 친지까지 챙겨야 하니 (경조사비가) 더 많이 나가는 것 같다.”면서도 “나도 그만큼 받기 때문에 손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조사비라는 게 결국은 돌고 도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가끔은 경조사비 때문에 치사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내가 낸 만큼 받지 못하거나, 내가 못 받은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내야 할 때 은근히 기분 나쁘다. 경조사가 끝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장부’에 액수를 적는 일인데, 가끔씩 (너무 조금 받아서) 상대방을 괘씸해 하거나 (너무 많이 받아서) 과분한 생각이 들 때면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서구처럼 현금 대신 선물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송씨는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경조사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할까 고민할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친소관계로 봉투 두께 달리하는 것은 야박” 5년차 회사원 홍모(31)씨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떠나 무조건 5만원을 봉투에 넣는다. 홍씨는 “그냥 좀 아는 친구나 절친한 친구나 5만원을 한다. 친소관계에 따라 돈을 달리하는 것은 너무 계산적”이라고 말했다. 진짜 친한 친구들이 좀 섭섭해할지도 모르지만, 신혼 때 집들이 선물로 만회한다는 게 홍씨의 전략이다.4∼5월이면 한 달 평균 20만∼30만원이 지출돼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경조사비 문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는 않다. 홍씨는 “일부에서 다소 변질된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큰 일이 있을 때 서로 돕자는 뜻 아니냐.”면서 “부모님들 입장에선 그 동안 자식농사 지으면서 뿌리신 만큼 거둘 수 있는 기회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직장인 김모(26·여)씨는 꼭 형편이 안 좋을 때 경조사가 몰려서 생기는 징크스가 있다.5월에만 결혼식과 돌잔치, 어버이날, 어머니 생신까지 줄줄이 겹쳐 ‘목돈’ 80만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여느 때 경조사비가 20만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허리가 휠 정도다. 김씨 역시 봉투 두께는 ‘5만원’으로 한결 같다.3만원은 너무 적은 듯하고 그 이상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김씨는 경조사 때 반드시 돈으로 해결하는 게 결코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본 다음에 선물 또는 현금으로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으로 봉투를 내미는 것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건강한 거래’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원 송모(36·여)씨는 일괄적으로 3만원에 끝내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버겁지 않고 분수에 넘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것이 부조의 의미에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특별히 친하거나 친척인 경우에는 5만∼10만원까지 낼 때도 있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에는 봉투만 인편에 보내고 참석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상가에는 열 일을 제쳐놓고 달려가는 편이다. “결혼식이나 회갑잔치, 돌잔치 때는 돈은 냈어도 안 가는 경우가 있지만, 안 좋은 일에는 잠시라도 들러서 얼굴을 비추고 오는 편이죠. 십시일반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진짜 품앗이고 계속 지켜가야겠죠.” ●“축의금은 NO, 조의금은 Yes” 프리랜서 기고가인 강모(29)씨는 축의금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동안 친구들의 결혼식에는 특기를 살려 축가를 불러주거나 사회를 맡는 등 몸으로 때웠다. “아까워서가 아니다. 나중에 내가 결혼할 때도 안 받을 생각이다. 결혼이든 돌이든 그냥 축하할 일이지 반드시 돈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관례적으로 남들이 해왔다는 이유로 나까지 그러고 싶진 않다.” 주위에서도 대체로 강씨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런 일로 욕을 하거나 화를 낼 사이라면 아예 결혼식에 안 가는 게 낫다고 강씨는 말한다. 물론 그도 조의금은 꼬박꼬박 낸다. 결혼은 오랜 기간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는 것이라서 특별한 도움이 필요없지만, 조사는 대부분 갑작스럽고 경황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임일영 강아연 정서린기자 argus@seoul.co.kr ■ “장례식은 꼭 참석” 男>女, 기혼>미혼 한국 직장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조사는 장례식이고, 남성에 기혼일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장례식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평균적으로 내는 결혼식 축의금은 4만∼5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12월 말 직장인 16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꼭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조사’로 50.2%가 장례식을 꼽았다. 결혼식이 40.6%로 뒤를 이었고 돌잔치는 8.3%였다. ‘장례식’이라 답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보면 ▲남자 52.7%, 여자 47.7% ▲기혼 56.0%, 미혼 47.8% ▲40대 63.5%,30대 52.6%,20대 46.1%를 기록했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기혼이 미혼에 비해, 나이가 많을수록 장례식을 가장 중요한 경조사로 생각했다. 반면 꼭 참석해야 할 경조사로 ‘결혼식’을 꼽은 사람들은 ▲남성 38.7% ▲여성 42.4% ▲기혼 35.5% ▲미혼 42.7% ▲40대 이상 32.4% ▲30대 38.5% ▲20대 43.5%로 나타나 장례식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였다. 결혼식 축의금은 4만∼5만원을 내는 사람이 전체의 57.5%로 가장 많았다. 남성(61.7%)이 여성(52.5%)에 비해, 기혼(67.3%)이 미혼(30.4%)에 비해,40대 이상(66.7%)이 20대(51.4%)와 30대(63.2)에 비해 높았다.1만∼3만원(응답 비율 25.2%)의 경우엔 여성(28.9%)이 남성(22.1%)에 비해, 미혼(30.4%)이 기혼(14.7%)에 비해,20대(30.3%)가 30대(21.1%)와 40대 이상(15.6%)에 비해 높게 나타나 대조를 이뤘다. 경제력에 따라 축의금 액수도 차이 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지난 7일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수지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인 이상 전국 가구의 경조비 지출 규모는 한 달 평균 3만 8188원으로, 연간 45만 8000원을 조금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中 축의금 내고 부의금 NO, 美 ‘샤워파티’서 선물 전달 축하객이 많을수록 경사(慶事)는 더 기쁘고 조문객이 많을수록 조사(弔事)는 덜 슬프다고 믿는 한국과 달리, 외국의 경조사는 아주 친밀한 사람만 초대해 간소하게 치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은 경조사에 친척, 친구, 회사동료 등 모든 지인을 다 초청하는 대신 아주 친한 사람만 초대하고 참석자에겐 꼭 답례품을 챙겨준다. 축의금은 보통 3만엔(약 24만원)∼7만엔(약 56만원)가량, 부의금은 축의금보다 적은 1만엔(약 8만원)가량 낸다. 중국은 축의금으로 200(약 3만원)∼300위안(4만 5000원)을 내지만 부의금은 내지 않는다.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란 이유다. 서양도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결혼식의 경우 신부 친구들이 ‘샤워파티(shower party)’를 열어 토스트기, 수건 등 신부가 필요로 하는 저렴한 물품을 사서 선물한다.‘우정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의미에서 ‘샤워’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반면 장례식에서는 카드나 꽃을 주고, 필요한 경우 1만원 정도의 돈을 모아 전달하기도 한다. 카드나 명함 문화가 발달한 것도 특징이다. 생일을 맞은 사람이나 상을 당한 사람에겐 보통 카드나 명함으로 축하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명함으로 축하인사를 보낼 때에는 명함 하단 좌측에 소문자 ‘p.f(pour feliciter : 축하합니다)’를 연필로 적어 보내는데, 명함 모서리를 접어놓으면 당사자가 없는 사이에 직접 다녀갔다는 의미다. 상대방은 고맙다는 카드를 보내거나 ‘p.r.(pour remercier : 감사합니다)’라고 적은 명함으로 답례한다. 장례식 때 받은 부의금을 기부금으로 사용하는 예도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한때 장례식 때 돈을 냈지만 식장 밖에 마련된 모금함에 넣기 때문에 누가 얼마를 냈는지 알 수 없고, 이런 돈은 주로 불우이웃에게 전달됐다. 미국 회사에서도 가족이 암으로 사망한 동료 직원을 위해 돈을 걷으면 “지금 모금하는 돈은 암 정복을 위해 수고하는 암센터로 보내질 것입니다.”라는 공지를 함께 받게 된다고 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월드스타 장쯔이, 데뷔초 눈물 뚝뚝 흘린 사연

    월드스타 장쯔이, 데뷔초 눈물 뚝뚝 흘린 사연

    장쯔이가 데뷔 초 펑펑 운 사연이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8일(한국시간) 중국의 한 프로듀서는 장쯔이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 출연한 이후 자신을 찾아주는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장쯔이. 그런 그에게 TV드라마 ‘소오강호’에서 출연료 200만위안(약 2억4000만원)을 주겠다며 출연제의가 들어왔다. 흥분한 장쯔이는 평소 절친하던 장이머우(장예모)감독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곧바로 알렸다. 하지만 장이머우 감독은 “톱스타가 될 기회를 주려고 하고 있는데 단 200만위안을 위해 2000만 위안(약 24억)의 기회를 놓쳐버릴테냐. 이 이야기를 더 하려면 두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갑작스런 호통에 주눅이 든 장쯔이는 울음을 터뜨렸다는 후문. 장이머우 감독은 덧붙여 “영화 ‘영웅’이 아직 준비가 덜 됐기 때문에 다른 출연할 만한 영화를 소개해주겠다”고 한 후 이안 감독에게 장쯔이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장쯔이는 세계적으로 대흥행을 기록한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출연하며 월드스타 대열에 들어섰다. 한마디로 장쯔이에게 장이머우감독은 은인인 셈. 때문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요즘도 장쯔이는 장이모우 감독 앞에서는 항상 깍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서울닷컴 고재완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MLB] 위기의 제국 로켓, 구할까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45)가 미프로야구 사상 최고 연봉을 받고 4년 만에 ‘친정’ 뉴욕 양키스로 돌아왔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7일 사이영상을 7차례나 받은 클레멘스가 2800만 22달러(약 260억 4000만원)에 양키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고 보도했다.22달러는 자신의 등번호 때문에 받은 것. 이로써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구단답게 올해 연봉 상위 1∼4위를 휩쓸게 됐다. 현재 1위는 제이슨 지암비(2342만 8571달러). 알렉스 로드리게스(2270만 8525달러)와 데릭 지터(2160만달러)가 뒤를 따른다. 클레멘스는 마이너리그에서 4경기에 선발 등판해 몸을 푼 뒤 빅리그에 올라올 예정이다.2004년부터 은퇴를 고려해 1년씩 계약해오고 있다. 1984년 보스턴에 입단한 클레멘스는 토론토를 거쳐 1999년 양키스로 옮겼다. 양키스가 1999년과 2000년 거푸 월드시리즈를 제패할 당시 큰 역할을 했다.2003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절친한 친구 앤디 페티트(35·투수)가 휴스턴과 게약하자 마음을 바꿔 따라갔다. 페티트가 올해 양키스로 돌아오자 또 뒤를 쫓는 우정을 과시했다. 불혹을 훌쩍 넘긴 클레멘스는 지난해 19경기에 선발 등판,7승6패에 방어율 2.30을 기록했다. 개인 통산 348승178패에 탈삼진 4604개, 방어율 3.10의 클레멘스는 역대 다승 8위, 탈삼진 2위. 양키스는 선발진이 30경기 중 23경기에서 6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부진에 빠져 클레멘스가 큰 보탬이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양키스는 클레멘스의 영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날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애틀전 7회에 전격 발표했다. 클레멘스는 “돌아와 영광이다.”며 5만여 관중에게 인사했다. 양키스는 5-0으로 이겨 클레멘스 복귀를 축하했다.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김승연회장 보복폭행 혐의 수사] ‘모르쇠 도련님’…“내 전화번호 모른다”

    “휴대전화 번호가 어떻게 됩니까?”(경찰) “모릅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김승연 회장 차남)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과 관련,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밤샘 조사를 받은 김 회장 둘째 아들(22)의 지능적인(?) 답변이 베테랑 수사팀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김 회장 차남은 수사에 대비해 철저한 사전 교육을 받은 듯 단서가 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소한 것이라도 ‘전혀 모른다.’로 일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청담동 G가라오케와 청계산 공사현장, 북창동 S클럽에서 김 회장 부자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친구 이모씨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다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초등학교 동창으로 사건 당일 단둘이 술을 마시러 갈 정도로 절친한 사이지만 집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 등 기초 정보도 모른다고 잡아뗀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의 차남은 또한 지인들의 연락처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 경찰 출두 때 휴대전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심지어 “내 휴대전화 번호도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 조사실에 있던 경찰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길섶에서] 부조금/육철수 논설위원

    사람 구실 제대로 하며 사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지인들의 경조사 챙기기일 것이다. 부조금을 결정하는 일도 때론 고민거리다. 물론 봉투를 늘 두둑하게 만들 여유가 있으면 그럴 필요조차 없겠지만…. 절친한 친구의 부친상을 접한 J가 어느날 고민을 털어놨다.2년전 J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친구는 부조금 300만원에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문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처지가 뒤바뀌니 그만큼 성의를 보일 엄두가 나지 않더란다. 월급에 가까운 돈을 부조하기도 어렵거니와, 평일에 지방까지 가서 조문하려니 시간도 여의치 않아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부조금이란 원래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는 게 관행이다. 하지만 사는 형편이 어디 똑같은가. ‘부자 만 등, 빈자 한 등´ 이라고, 그저 형편 닿는 대로 부조금 마련해서 기쁜 일에 가서는 맘껏 축하해주고, 궂은 일엔 슬픔을 나누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삶의 실전에서 부조 금액은 사회적 체면이자 친소·갑을 관계를 가늠하는 엄연한 잣대인 걸 어찌하랴.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김미려, 생방송 촬영 중 울면서 퇴장

    김미려, 생방송 촬영 중 울면서 퇴장

    사모님’의 깜짝 눈물에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개그우먼 김미려(25)가 터트린 방송 사고를 두고 갖가지 추측과 의혹이 불거지면서 파장 역시 커지고 있다. 사건은 26일 오후 케이블 채널 엠넷(Mnet)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엠카운트타운’에서 벌어졌다. 방송 도중 김미려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무대를 뛰쳐나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TV에 방영돼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날 그룹 에픽하이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 김미려는 가수 서인영이 “사모님 버전으로 다음곡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이번에 가수로 섭외돼 너무 기뻤는데 사람들은 아직까지 저를 그냥 웃긴 김미려로 보는 것 같다”고 울먹이면서 무대를 내려갔다. 방송 사고 이후 김미려의 눈물을 두고 갖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처음에는 서인영의 발언을 비롯해 “김미려씨가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말한 가수 남규리의 나이 시비 때문에 속이 상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방청객 중 일부가 김미려를 모욕하는 고함을 질렀다는 증언이 새롭게 밝혀졌고 급기야 당시의 상황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의혹마저 불거졌다. 특히 일부 방송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김미려가 개그 활동을 임시 휴업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의견마저 나오고 있다. 김미려가 개그활동 보다는 가수 활동에 욕심과 미련이 크다는 것이다. ‘사모님’으로 유명세를 얻기 오래 전에 그룹가수 ‘하이봐’로 먼저 데뷔했던 사실이 이같은 추측의 근거다. 절친한 동료 역시 “김미려는 자신이 개그우먼의 자질이 부족한데도 ‘사모님’으로 큰 인기를 끌게돼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일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김미려가 개그우먼보다는 뮤지컬 가수나 대중 가수로 활동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실제로 개그계를 떠나 다른 예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개그맨들이 적지 않다. ‘개그콘서트’의 원조 멤버 백재현과 ‘리마리오’ 이상훈이 연극계에서 활동 중이고 ‘출산드라’ 김현숙도 영화계와 뮤지컬계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김미려의 소속사와 MBC ‘개그야’의 제작진은 김미려의 은퇴설을 일축하고 있다. ‘개그야’의 노창곡 PD는 “개그계에서 스타로 성공한 이후에도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하면서 “개그계는 한명의 개그 스타가 아쉬운 상태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문은 항상 열려있다”고 덧붙였다. /스포츠서울 제공@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님은 갔지만 우리엔 거울 같은 존재”

    “님은 갔지만 우리엔 거울 같은 존재”

    “저뉘는 어드메련가. 믈옥(수정)으로 순정하였으므로 아릿다운 글지(작가)였거늘, 아지못게라(알 수 없어라). 비롯됨도 없고 마침도 없음이여. 그대의 나그넷길 소솜(잠깐)하였다 누가 말하는가.…해는 져서 달이 뜨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뵤-뵤-(새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도는 모양)산 새 한 마리 갑션무지개(쌍무지개) 사이로 날아가누나. 창밖의 흙바람 소리 들으며 천근번뇌를 보태고여.” 서른넷의 나이로 요절한 소설가 고 김소진(1963∼1997)씨의 묘비에는 ‘월헝청(옆눈 팔지 않고 후다닥 닿듯이 걸어가는 모양) 어디로 가시는가’라는 제목의 비문이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적혀 있다. 적지 않은 문단지기들이 우리 문학에서의 ‘김소진 부재’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는 가운데 김씨 10주기를 맞아 동료 및 선후배 문인 30명이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글을 엮었다.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문학동네 펴냄)은 그렇게 태어났다. “통유리창에 내리는 비는/아무것도 내리지 않고/전망을 가로막는 아파트 몇 동도/그 끄트머리 산등성이도/저 아래/가로수도 우산도 자동차도/골목길도 내리지 않고/무거운 것이 스스로 내려앉으며/흐려지는 것이다.//천둥 번개 다 지나고 헐벗은/한 여인이/남는 것처럼.//김소진,/죽은 지 십 년.//이 놀라운 기적./” 시인 김정환씨는 이렇게 ‘김소진 죽은 지 십년’을 아쉬워했고, 김기택, 신현림, 이진명, 장대송, 장철문, 안찬수씨 등이 시를 보탰다. 소설가 이혜경씨는 산문에서 생전 한번도 본적 없는 김소진을 꿈속에서 두번이나 만난 기억을 소개하면서 그에게 ‘쐬주’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토로했다. 소설가 천운영씨도 자신의 습작 ‘쥐덫’과 김소진의 등단작 ‘쥐잡기’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그와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은 김소진이 아닌 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만 만났다며 아쉬워했다. 소설가 전성태, 권여선, 조헌용, 윤성희, 김중혁씨 등은 소설을 헌정했다. 절친한 동료였던 안찬수, 정홍수, 진정석씨 셋이 엮은 추모문집에서 편자들은 ‘김소진 소설’이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어떤 편향과 맹목을 되비쳐 주는 하나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07년 현재 시점에서 김소진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의례적인 추모행위를 넘어 한국소설의 좌표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당대적 실천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소진은 1991년 ‘쥐잡기’로 등단한 이후 6년 동안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글을 썼다. 네 권의 소설집과 장편 2권, 한 편의 미완성 장편, 콩트집 2권, 동화 1권, 산문집 1권 등을 남겼다. 작품들은 대부분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적인 것들에 대한 본래의 애착과 공감을 담았다. 그가 타계한 4월22일 하루 전인 21일 낮 경기도 용인공원묘원 그의 유택에서는 문우들이 모여 또다시 그를 추모했다. 김정환 시인의 추도시 발표에 이어 등단작 ‘쥐잡기’와 유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후배 작가들이 낭독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한 수천만원의 보조금으로 만든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가 참전 유공자들의 공적보다는 현직 자치단체장의 공적을 지나치게 부각해 유공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18일 경북 군위군 등에 따르면 군위읍 오곡리 872의1 일대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 현지에서 오는 24일 주민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훈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충훈비는 6·25 참전유공자회군위군지회가 2004년 11월 6000만원(도·군비 각 3000만원 보조)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제막식이 늦어진 것은 주변 조경이 늦어진 때문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충훈비가 전쟁 참전자들의 유공보다는 단체장의 건립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나라를 지킨 유공자비’가, 후면 전면에는 비문과 단체장의 이름이 비교적 큰 글씨(사진 위쪽)로 새겨졌다. 또 좌측면은 지역 유지들인 당시 경찰서장, 교육장, 농협장, 관변단체장 등 비 건립추진위원 26명의 명단이 차지했다. 정작 비의 주인공들인 전사자 및 상이용사 등 군위지역 8개 읍·면 참전 유공자 1525명의 명단은 비신을 떠받치고 있는 좌대(座臺)에 작은 글씨(사진 아래쪽)로 올라 있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군위군지회가 2001년 이 비석에서 5m 떨어진 지점에 세운 ‘무공 수훈자 전공비’의 수훈자 명단이 비신에, 단체장과 건립위원들의 명단이 좌대에 새겨진 것과도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참전 유공자와 유족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충훈비가 군수 공적비로 전락했다.”면서 “보조금을 지원한 군의 직·간접적 간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또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대해 참전유공자회 홍영삼(74) 군위군지회장은 “비 제작 당시 추진위원들과 협의해 명단을 배치했다.”면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홍 회장은 이 지역 단체장과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보조금은 지원했지만 충훈비가 어떻게 제작·건립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꼭 햇볕을 다시 찾아야죠

    꼭 햇볕을 다시 찾아야죠

    월드컵의 열풍이 막 지나간 3년 전, 고교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학창 시절 둘이 학교에서 사고란 사고는 모두 도맡아 치고 다녔다고 할 만큼 절친한 사이였기에 가슴이 뛰었다. 바로 그날 약속을 잡아 우리는 13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간 것처럼 당시 별명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 서로 살아온 얘기도 나누고 또 학창시절 추억도 되살렸는데 자리를 파할 무렵 친구 얼굴이 매우 굳어졌다.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친구한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우거지상이냐고 했더니, 요즘 회사가 너무 안 돌아가서 죽겠다고 끙끙거렸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계속 안주도 없이 소주만 들이키는 녀석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 혹시 내가 도울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내 손을 꽉 잡더니, 안 그래도 꼭 부탁할 일이 있었다며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보증은 서주기 힘든 현실이지만 술이 머리끝까지 올라 있던 터라 남자는 의리라며 사내자식이 뭔 그깟 일로 눈물까지 흘리냐고 큰소리를 쳤다. 뒤돌아서서 후회했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어려운데 녀석이 모른 체하면 얼마나 섭섭하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총각도 아니고 이미 가정을 꾸린 몸인데 이런 일을 혼자 결정하기는 곤란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보증 얘기를 꺼내자 아내는 펄쩍 뛰었다.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돈을 빌려주는 게 낫지 보증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만약 자기 몰래 보증을 섰다가는 당장 이혼할 줄 알라고 말하는 아내를 보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차일피일 만남을 미루자 친구가 달려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마음이 무너졌고, 바로 그날 우리 집을 담보로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친구는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곧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녀석과의 마지막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와의 우정을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녀석이라 나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친구는 은행에서 4억을 받자마자 이미 정리된 회사를 내팽개치고 자기 가족까지 나 몰라라 하고 내연의 여자와 외국으로 사라졌다. 친구와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지만 회의 때문에 전화를 못 받는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이자 납부가 나에게 떠넘겨지고 계속 소식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래서 회사로 찾아갔더니 이미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곧장 친구네 집으로 갔지만 가족들 모두 친정으로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연이어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동태처럼 바짝 얼어붙은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힐끗힐끗 쳐다보고 개가 짖어도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남의 집 대문을 막지 말라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전신주에 등을 기댄 채 밤을 꼬박 샜다. 아내에게 쉼 없이 전화가 걸려왔지만 차마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숨을 쉬면 쉴수록 목이 더 막혀오는 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동료들이 몇 번씩 불러도 듣지 못했고 계속 죽고 싶은 마음만 들어 엉뚱한 층에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퇴근을 했는데 아내가 왜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왔냐고 걱정을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아내는 무슨 일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은행 직원의 전화로 아내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불 꺼진 방을 홀로 멍하게 지켰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유산과 은행 빚으로 겨우 마련한 우리 집을 불과 1년 만에 다시 뺏겨야 한다는 사실에 아내는 넋을 놓고 울기만 했다. 당장 사라지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큰 죄인이었다. 다른 건 우리 손으로 다시 하면 된다지만 돌아가신 아버님의 마지막 사랑을 어찌할 거냐고 항변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우리 형편에 4억은 하늘보다 높은 산이라 결국 정든 집에서 내쫓겼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매 하루 전 아내가 아무 말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동네 인근을 샅샅이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두 시간쯤 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경찰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달려갔더니 정말 아내가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내는 이미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건 절대 눈 뜨고 볼 수 없다며 그냥 놔두지 왜 다시 살렸냐고, 아내는 링거병을 깨고 그 파편으로 팔뚝을 내리그으며 2차 자살을 시도했다. 결국 아내는 사지가 모두 묶인 채 강제 입원이 됐고 퇴원 후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몸은 완치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추락했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아이한테 맡기고 출근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나마저 집에 있으면 우리 생활이 완전히 끝장날 것 같아 회사에 나갔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울면서 전화를 거는 딸의 다급한 목소리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내의 입원비와 남은 빚을 정리하기 위해 사표를 썼다. 꽤 많아 보이던 퇴직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도 빚은 남아 있었고 생활비와 아내 병원비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글렀고 또 아내와 아이도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시간대별로 나눠서 일을 했다. 새벽엔 도시락 배달차를 운전하며 배달 일을 했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엔 전기배선 공장에 나가 건설현장을 따라다니며 일했다. 두 가지 일을 해도 아내의 입원비와 생활비 대기가 벅찼다. 그래서 형의 도움으로 얻은 중고 1톤 트럭을 개조해 붕어빵과 떡볶이 장사에 나섰다. 장사를 마치고 나면 새벽 2시,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곧장 도시락 공장으로 달려갔다. 하루에 너덧 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매일 육체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하루쯤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자포자기하고픈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아내와 엄마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걸 해내는 딸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죽어라 고생했는데도 이자와 병원비를 내고 나면 손에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유치원에서 하는 연극에 출연하는 딸의 모습을 보러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딸에겐 멀어서 못 갔다고 변명했지만 마음만 먹었다면 갈 수 있었는데 일당 5만 원 때문에 포기했다. 세상 모든 게 암울했고, 또 마음속으로 수천 번도 더 넘게 자살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눈물 흘릴 시간도 내겐 사치였다. 그러나 항상 어둠만 들진 않았다. 아무리 긴 터널도 때가 되면 밝은 태양을 만나듯 우리에게도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1년이 지나도록 차도를 보이지 않던 아내가 작년 2월 초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제 발로 병원 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온 아내를 본 순간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비로소 우리 집은 사람 사는 모습을 띠었다. 지금도 아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지만 그래도 한자리에 우리 가족이 다시 모였다는 것이 행복하다. 강력한 태풍이 우리 집을 휩쓸고 지나간 지 벌써 3년, 친구는 여전히 소식이 없고 가족들도 친구를 포기한 지 오래이다. 가끔씩 친구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나한테 가져간 돈을 돌려주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개꿈에 불과하다. 아직도 아내는 완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했다. 힘을 모으면 우리 집에 머문 먹구름이 빨리 사라지지 않겠냐며 월 70만 원을 받으며 대형 할인점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아내…‘…. 지난 일은 이제 가슴에 묻고 우리의 행복을 되찾을 일만 생각하자는 아내가 고마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직도 우리의 불행은 그치지 않았지만 이제 내리막길은 끝난 것 같다. 다 내려왔으니 이제는 다시 올라갈 일만 남았다. 흩어지지 않고, 깨지지 않고, 한자리에 모인 우리의 행복을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2006) ‘이승욱‘_ 작은 트럭에서 어묵을 팔고 도시락 배달을 하며 사랑스런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을 뻔했지만 가족들에게 밝은 웃음을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그는 “이 세상 최고의 보물은 가족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예보 <오늘은 맑음>
  •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앙드레 말로 지음

    소설 ‘인간 조건’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앙드레 말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실참여 지식인이다. 1958년 드골이 재집권한 뒤 문화장관을 10년이나 지낸 그는 발튀스, 샤갈, 브라크 등 많은 화가들과 절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책까지 쓴 화가는 피카소가 유일하다. 그의 책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박정자 옮김, 기파랑 펴냄)는 말로가 피카소와 나눈 대화, 마그 재단에서 열린 ‘상상미술관’ 기획전에서 했던 연설 등을 소개하며 피카소의 예술세계를 분석한다. 말로는 피카소가 입체파의 서막을 연 ‘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의 구도를 그대로 그린 것이며,80세 때인 1961년에도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재해석했으며,‘한국에서의 학살’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모방의 천재’인가. 저자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이렇게 앞선 시대의 예술을 모사하면서 그림과 그림들의 대화, 화가와 화가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냈고 결국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후보와 측근 사이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후보와 측근 사이

    대선 국면에서 각 후보와 캠프 측근들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또 의사결정 구조에서 후보의 비중은 얼마나 되나. 이것이 후보 지지율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질까. 올 대선을 향해 뛰는 각 후보의 캠프를 들여다 보면, 후보가 측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행태는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측근들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되 결정은 후보가 직접 내리는 유형이다. 둘째는 측근들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는 햄릿형이다. 세번째는 아예 측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유형이다. 첫째 유형은 YS(김영삼 전 대통령)형이라고도 하는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가깝다.YS형은 측근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위임하되, 최종 결정은 자신이 내린다. 이 전 시장 캠프에선 예상치 못한 돌출 발언으로 측근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을 보기 어렵다. 사전 회의에서 충분한 의견 개진이 있었던 탓이다. 이 전 시장이 주재하는 캠프 회의에서 측근들은 허심탄회하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한 핵심 측근은 “우리는 마음껏 의견 개진을 하고 있다.”며 자유로운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 뒤에 결정은 이 전 시장의 몫이다. 특이한 것은 이 전 시장이 ‘여의도풍(風)’의 아이디어나 보고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권에 물들어 있는 행태를 싫어한다. 아직까지 캠프 사무실을 여의도로 옮기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중빈(정치학) 국민대 교수는 “이 전 시장은 국회의원 생활을 6년 했지만, 여의도 정치에 물들지 않은 ‘정치 신인’으로 국민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결국 정치인이면서 정치인답지 않은 행태가 이 전 시장의 고공행진 비결이 아닐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전체적인 틀은 이와 비슷하다. 측근들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 다만 의사결정이 이 전 시장에 비해 늦은 편이다. 또 하나 박 전 대표가 비선조직의 의견을 좀 더 비중있게 듣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로 인해 보수와 중도를 왔다갔다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비선조직의 작동은 후보의 일관성과 정체성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귀가 얇은 ‘이회창형’과도 통한다.”고 말했다. 햄릿형은 김근태 의원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해당된다. 측근들의 의견에 휘둘리는 형이다.‘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과 통한다.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면 어쩔 줄 몰라한다. 더욱이 측근들의 의견이 극과 극을 달릴 경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맥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뚜렷한 이미지 구축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측근 의사 무시형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해당된다. 한나라당 탈당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 핵심 측근은 “탈당과 관련해 캠프 인사들은 적지 않은 무력감을 느꼈었다.”고 토로할 정도다. 손 전 지사는 측근들의 얘기는 듣지만 중요한 결정 때엔 자신과 절친한 지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같은 유형에 따라 지지율도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강한 리더십을 가진 후보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통치권자가 되면 훨씬 중요한 결정을 수시로 내려야 하는 까닭이다. 김형준 교수는 “어떤 리더십을 가졌느냐에 따라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극복 방법에서 큰 차이가 난다.”면서 “아직 우리 정치는 리더십에 대한 전형이 확립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YS형이 바람직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후보들이 잘 참고했으면 한다. jthan@seoul.co.kr
  • ‘블레어 연극배우 변신’ 만우절 장난 기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퇴임 후 연극배우 변신’ ‘도시 하수 네트워크를 통신망으로 활용하는 온라인 서비스 개발’…. 선뜻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뉴스의 출처가 영국 유력지 가디언과 세계적 정보기술업체 구글의 공식발표라면 어떨까.1일 공개돼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던 이들 뉴스가 사실은 만우절을 맞아 독자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기사였던 것으로 판명됐다. 가디언은 2일자 지면에서 전날 자사가 발행하는 일요신문 옵서버에 실렸던 블레어 총리 기사가 만우절 기사라고 보도했다. 옵서버는 블레어 총리가 절친한 친구인 런던 올드빅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배우 케빈 스페이시의 권유로 올 가을 아서 밀러의 연극 ‘더 크루서블’에 출연할 계획이라고 전했다(서울신문 2일자 29면). 구글도 1일 자사 웹사이트에 화장실을 경유하는 기발한 인터넷 접속방법을 개발했다는 기사를 게재했지만 알고보니 만우절 농담인 것으로 밝혀졌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블레어 퇴임후 연극무대 선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퇴임 후 연극배우로 변신한다. 연내 퇴임이 확실시되는 블레어 총리는 절친한 친구인 런던 올드 빅 극장의 예술감독 케빈 스페이시의 권유로 올 가을 아서 밀러의 연극 ‘더 크루서블’에서 중요 배역을 맡기로 했다. 일요신문 옵서버는 1일 블레어가 17세기 세일럼 마을의 마녀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근본주의 종교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 작품에서 마녀 사냥가(존 헤일 목사)역을 맡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블레어 총리는 10대 시절 페티스 컬리지 학교를 다닐 때 R S 셰리프의 연극 ‘여로의 끝(Journey’s End)’에서 스탠호프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그후 러시아 멜로드라마에서 단역을 맡았고, 만화영화 ‘심슨’에서 블레어 총리 자신의 목소리 배역을 맡기도 했다.런던 연합뉴스
  • [책꽂이]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비채 펴냄)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한 이국적인 역사 미스터리. 유럽에서의 잇단 패배로 점차 세력이 축소돼 가는 오스만 제국. 술탄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근대적인 개혁칙령과 군대 열병식을 추진한다. 갑자기 장교들이 실종되고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할 사람은 당대 최고의 환관탐정 야심뿐. 그는 궁정의 하렘과 문서보관실, 하맘(목욕탕) 등을 누비며 진상을 파헤친다. 오귀스트 뒤팽, 셜록 홈즈, 에르큘 포와로, 필립 말로를 잇는 또 한명의 명탐정의 활약이 눈부시다.1만 2000원.●카프카 문학론(안진태 지음, 열린책들 펴냄) 독일 작가 카프카는 절친한 친구이자 비평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으면 유고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브로트가 그 유언을 어기는 바람에 ‘성’ 같은 장편소설을 우리가 지금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브로트는 오독의 실수를 범했고 자의적으로 첨삭을 하기도 했다. 카프카 문학의 핵심 개념인 ‘소외’의 문제를 면밀히 살핀 연구서.2만 5000원.
  • 멀쩡한 처녀가 유부녀로 둔갑한 기막힌 내막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멀쩡한 처녀를 유부녀로 둔갑시키다니!” 중국 대륙에 한 30대 여성이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가 자신이 이미 결혼한 여자로 등록돼 있는 사실을 알고 법원에 소송을 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져 주변 사람들이 황당해 하고 있다. 이 ‘황당한 사연’의 주인공은 중국 중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에 살고 있는 장훙(張紅·여·31·가명)씨.그녀는 지난해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정저우시 진수이(金水)구 인민법원을 찾았는데,자신이 이미 10년전 혼인신고된 유부녀임을 알고 화가 나 명의도용자를 상대로 법원에 소송을 냈다고 정주만보(鄭州晩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장씨가 동네친구 리메이(李梅)씨에게 신분증을 빌려주면서 촉발됐다.이씨가 장씨의 신분증을 가지고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지난 1996년 6월4일,리씨는 성인나이트클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다며 절친한 동네친구인 장씨로부터 신분증을 빌렸다.이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소꿉놀이를 하며 커온 터수라 워낙 친한 덕분에 장씨는 흔쾌히 신분증을 리씨에게 빌려줬다. 친구의 신분증을 빌린 리씨는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장씨’로 행세했다.이어 정저우시 진수이구 인민법원으로 달려가 애인과 혼인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사실 이전부터 직장에 취업할 때도 ‘장훙’씨 이름으로 등록하고 장훙씨로 행세를 해왔다.리씨의 동료들은 모두 그녀를 ‘장훙’씨로 잘못 알고 있을 정도다. 리씨가 ‘장씨’행세를 한 것은 후커우(戶口·주민등록에 해당)에 자신의 생년월일이 몇년 어리게 등록돼 있어 성인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이 때문에 그녀는 미성년자로 취급돼 직장에 취업하거나 혼인신고 등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리씨는 “훙의 신분증을 도용해 혼인신고한 사실은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하지만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었는데 나이가 어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린 마음에 할 수 없이 이같은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장씨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은 도용한 리씨를 상대로 공식 사과와 함께 정신적 피해보상금 2만위안(약 240만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정저우시 진수이 인민법원은 리메이씨부부는 최근 장씨에게 구두 사과를 하고 인명 도용에 따른 정신적 피해보상금 5000위안(60만원)을 주라고 판결했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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