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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키스탄 탁실라:하(세계 문화유산 순례:11)

    ◎거대한 수투파엔 혜초의 숨결이… 그 넓은 고원지대 탁실라의 옛 이름은 탁사실라(Taksasila)다.탁사는 석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고,실라는 도시를 의미했다.굳이 의역하면 「돌의 도시」라고나 할까.탁사실라라는 고유명사는 1918년에 발굴한 은판,새김글씨(명문)에서 확인되었다.은판에는 다르마르지카(Dharmarjika)라는 새김글씨도 함께 나와 탁실라 근본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실라의 유명한 수투파(불탑)유적 가운데 하나인 다르마르지카는 은판 새김글씨에 나오는 고유명사 그대로다.은판은 오늘날 다르마지카로 부르는 수투파 유적에서 실제 출토되었다.유적은 탁실라박물관 동쪽 냇물 건너에 있다.수투파 다르마르지카는 아주 거대했다.두 층의 원형돌기단위에 쌓아올린 수투파는 우리나라 경주 천마총만큼 크고 높아서 야산처럼 보였다. 그 수투파 가장자리 공간을 좀 비워두고 자리잡았던 예불당들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수투파 원둘레 바깥을 따라 빙 돌아간 예불당 건물터들은 정연했다.그 잔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수투파 뒤뜰에는 승려들이 살았던 돌담벽 승방들이 벌집마냥 들어앉았다.촘촘한 승방들을 몇차례나 손가락을 펴고접어 헤아리다 그만두었다.그까짓 폐허를 헤아려 무엇하랴.불교가 융성했던 시절,독경소리가 요란했을 다르마르지카에는 정적이 흘렀다. 다르마르지카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시대 유적으로 보고 있다.그의 치세기(BC 269∼232년)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수투파 1만8천기를 쌓았다고 한다.물론 전설적 기록이기는 하나,다르마르지카에서 아쇼카왕의 불심을 보았다.다르마르지카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왕의 사원」이다.과연 왕의 사원다운 다르마르지카는 탁실라의 또다른 수투파유적 쿠나라스 등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했다. 탁실라고원의 불교역사는 퍽 오래되었다.이는 자울리안산 높은 언덕에서 오랜 세월을 버티어온 사원유적 자울리안(Jaulian)역사를 들추어 보면 알 수 있다.간다라지방을 먼저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가 그토록 깊고넓은 인더스강을 기어이 건너 자울리안을 공략하지 않았던가.서력기원이 아직 멀기만 했던 BC 325년쯤의 일이다.아쇼카왕 이전에 벌써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그러고 나서 만난 돌계단을 다시 올라 자울리안에 다달았다.절집 승가람마가 분명한데,여기 사람들은 자울리안대학이라 부르면서 인도 나란다에 비유했다.불교교리나 경전은 물론 다른 여러 학문을 가르친 교육기관이 자울리안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정복자 알렉산더는 점성술,수학,의학 따위의 학문적 지식과 심지어는 병법까지 자울리안에서 빼내갔다. 자울리안은 돌을 쌓아 만든 석조건축물 가람이다.가람 자리가 산등성이라서 그런지,앞뜰은 옹색했다.몇 걸음을 걸어서 뜰을 비켜서자 수투파를 봉안한 불당이 나왔다.메인 수투파를 중심으로 키 작은 수투파들이 옹기종기 들러리를 섰다.진흙반죽에다 작은 불상들이 들어갈 감을 조각하여 말린 뒤 대개 세층으로 쌓아올린 수투파는 걸작의 예술품들이었다. 불당에서 승방을 향한 골목 한쪽으로 작은 방들이 따라 붙었다.석굴이 연상되는 방에 불상이 띄엄띄엄 좌정했다.홀로 앉은 이들 불상은 단독불상이 출현한 1세기말 이후 작품일 것이다.그러나 온전한 불상이 거의 없다.어떤 테라코타 불상 하나는 머리가 달아났는데,배꼽이 뚫려있다.성치 않은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때문에 배꼽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비록 목이 달아난 부처일지라도 이타행만큼은 실천하는 모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승려 혜초(AD704∼787년)도 그 옛날 자울리안을 다녀갔다.이 책에 기록한 탁사국은 탁사실라일 것이다.그는 책에 쓰기를,「탁사국에 가면 절도 많고,승려도 많다」고 했다.구도여행에 지쳤던 혜초가 하룻밤 발을 뻗고 누웠을 승방도 자울리안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해거름에 탁실라박물관 근처 레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저녁식사 카레라이스에 앞서 요구르트와 쌀가루를 섞어만든 죽 키르가 식탁에 올랐다.고타마 싯달다가 고행에서 나오자,한 처녀가 그에게 바쳤다는 유미죽이 연상되었다.「대장엄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릴리프로 표현한 탁실라 출토품 불전도가 탁실라박물관에 있다. ◎여행 가이드/이슬라마바드서 약 40㎞/승용차 하루 전세 한화 3만원 고대유적이 광범위한 지역에 널린 탁실라는 파키스탄 라발핀디현에 속한다.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40㎞,현소재지 라발핀디에서는 35㎞가 떨어져 있다. 고대의 불교유적과 도시유적 말고도 국립탁실라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하루일정으로 돌아보기가 어렵다.그래서 탁실라에서 숙박을 하든가,아니면 이슬라마바드를 거점으로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탁실라박물관 바로 앞에 레스트 하우스가 있으나 소규모다. 이런 현지사정을 고려해서 이슬라마바드에 묵는 사람이 많다.이슬라마바드에서 탁실라를 왕복하는데 드는 승용차대절비는 기름값을 포함,하루 40달러(한화 3만원정도).이슬라마바드에는 국제체인의 관광호텔과 국영호텔 등 숙박시설이 많다.문의는 인더스 가이드(전화 92­42­872975).
  • 천년문화유산 한시대 법의 잣대로 재서야/이병기(서울광장)

    오늘처럼 서구 문물로 꽉 채워진 일상생활을 살면서 새삼 한국의 고유 문화를 생각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오히려 국제화·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마당에 한국 고유 문화를 거론하는 것은 너무 국수주의적인 자세가 아닌가 반문당하기 쉽다.우리 문화를 너무 고집하지 말고 넓은 아량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세계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그러나 기실 국제화가 진전될수록 각 나라와 민족에게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 바로 자신의 고유문화이다.스스로의 문화가 없이는 세계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여하는 바가 없게 되고,다른 한편 자기 고유문화의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창의적인 제품이 없이는 세계 산업경쟁 대열에 서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구한말 격변기와 일제 강점기를 통해서 단절되었던 한국의 고유 문화는 해방후 민족갈등기와 산업개발기를 지내면서 아직도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그 결과,이제는 무엇이 한국 문화인지 알기 어렵고,이를 배태한 정신문화가 무엇인지는 더욱 알 수 없게된 시점에 이르렀다.이따금 사극속에 나타난 선조들의 생활양식을 보며 이를 가늠해 볼 따름이다.그러나 현실과의 괴리가 깊어 공감하기가 어렵거니와,더욱이 오늘의 생활 속에 되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사극 속의 생활양식은 그 시대의 정신문화가 구체화한 것으로서 그 정신문화를 이해하지 않는한 이를 공감하거나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속 격랑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아직 우리 고유문화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바로 불교 사찰들이다.불교 사찰들은 지난 1천6백년의 역사속에 우리 고유문화를 가장 잘 보존,계승해 왔다.절집 그 자체가 기와집 한옥 양식이요,식생활·의생활에 있어서도 전혀 서구양식의 침투없이 과거의 우리 고유양식을 보존하고 있다.몇해전 송광사 대웅보전의 중창불사시에도 당시의 무형문화재 목수,기와공들을 모셔다가 순수한 재래식 한옥 양식을 그대로 살렸다고 한다. 이와같은 외형적인 문화양식도 물론 중요하지만,불교 사찰이 계승하고 있는 더욱 소중한 부분은 한국 정신문화이다.그곳에는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출가한스님들이 모여 치열한 수도정진을 하면서 쌓아올린 높은 경지의 정신문화가 있다.그속에 신라 원효스님,고려 보조국사를 비롯한 이나라 정신적 스승들의 가르침이 이어진다.천년 역사의 거친 세파속에서도 불교가 항상 새롭게 피어나온 것은 이와같은 불타는 구도정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이것은 결코 불교만의 것일 수 없으며,꺼뜨릴 수 없는 한국 정신문화의 소중한 불씨일 것이다. 철저한 고행과 구도 수행을 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진리가 있다.애욕을 끊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전해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이 세상에 이러한 사람들이 있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 넉넉해지고 희망에 차게 된다.이것은 대량 소비,물질만능의 혼탁한 현세 삶을 정화시켜 줄 청정한 샘물이요,정신적 물질적으로 짓눌려 살아온 우리 민족의 장래를 밝혀줄 희망의 등불이다. 최근 들어 합천 해인사 인근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문제를 두고 파문이 일고 있다.해인사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는 위치에 골프장을 건설하겠다는 업자측의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주민,불교계,각종 문화·환경·시민단체의 주장이 엇갈려 오다가 법정 투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서울 고등법원은 이미 골프장 개발업자측의 승소 판결을 내린바 있고,이제 대법원의 최종 판결만 앞두고 있는 상태라 한다. 단순한 법의 논리에 입각하면 법원이 업자측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은 공정한 일이었을는지 모른다.그러나,천년을 잇는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이렇듯 짧은 시대를 풍미하는 법의 잣대로만 잴 수는 없다.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 문화유산인 점도 그러하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해인사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소중한 보루이기 때문이다.이 정신문화의 보루는 속세와 격리되어 자연환경속에 묻혀 있을 때에만 그 맥통이 이어진다.개발은 불가역의 일방 통행과정이다.골프장 건설을 통해 일단 개발의 도화선이 점화되면 번져가는 개발열기속에 이 보루는 멀지않아 와해되고 말 것이다.골프장 건설 하나 때문에 천년을 지켜온 정신문화의 불꽃을 꺼뜨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전북 남원 실상사 절장승(한국인의 얼굴:63)

    ◎커다란 안경 쓴 듯 “왕방울 눈 인상적”/키 230㎝의 수장승… 국내 최대급 우리 조상들의 심성에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던 돌장승은 한강이남에 주로 분포되었다.호서지방에서 시작하여 호남과 영남지방에 주로 밀집했다.이 가운데 호서와 호남지방에 돌장승이 치중된 이유를 미륵신앙의 토착화현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발전적으로 재편된 농업경제가 석조물 조성을 부추겼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왔다. 전북의 경우 남원지역에 많이 몰려 현존하는 돌장승이 12기에 이른다.남원시 산내면 백일리와 입석리 실상사 일대의 돌장승들이 특히 유명하다.실상사 입구 해탈교 못미처에 1기,해탈교 건너 절 초입의 2기를 합뜨려 모두 3기가 있다.해탈교 못미처의 돌장승도 본래 한쌍이었으나 1930년말 장마에 넘어가 없어져 버렸다.그런데 짝을 잃은 외장승이 국내 최대급인 수장승 옹호금사축귀대장군이다. 이 옹호금사축귀대장군이 선 자리는 산내면 백일리다.해탈교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일리와 입석리가 구획되었다.그래서 옹호금사축귀대장군은 백일리 장승인 동시에 입석리 장승 한쌍과 더불어 절장승인 것이다.백일리 장승은 암장승이 자리했던 서북쪽 빈자리를 향해 서있다.국내 최대급 답게 2백30㎝나 되는 헌칠한 키를 하고도 다리건너 입석리의 금실좋은 돌장승 한 쌍이 부러울이만큼 외롭다. 그래도 백일리 돌장승은 나도 한 때는 암장승을 거느린 적이 있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다.장승의 웃음은 양볼에 보조개마냥 패어 오목새김을 통해 지어냈다.가장자리를 깊게 새겨 마치 테 넓은 안경을 연상할 만큼 큰 눈을 했다.그러나 얼굴에 머금은 빙긋한 웃음으로 해서 사납지 않은 왕눈이 되었다.눈은 내면세계를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마음의 창이다.그 창에 칼을 세우지 않았으니 백일리 장승 눈은 무서울리가 없다. 콧날이 서지 않게 큰 코를 새기고 코방울 역시 둥글둥글하게 커서 얼굴은 온통 눈치레 코치레다.이빨이 입술 밖으로 드러났다.더구나 송곳니를 여덟 팔자형으로 구부려서 내려뜨렸으니 무서울 법도한데,수염 정도로 보인다.긴 송곳니가 무섭지 않은 이유는 입가에도 웃음을 담아서일 것이다.돌장승들은 벙거지를 좋아해서 끝이 뾰족해보이는 벙거지 모자를 어색하지 않게 눌러썼다. 이름이 축귀대장군인지라 절집에 범접하는 잡귀를 쫓는 일이 백일리 돌장승의 임무다.그런데 웃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을 보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대강대강 쫓아버릴 모양이다.하기야 해탈교를 건너 조금만 가면 영험한 실상사 부처님들이 계시니까 잡귀들이 우르르 몰려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 백석리 옹호금사축귀대장군에는 새김글씨 명문이 없다.그러나 해탈교 건너 입석리의 돌장승 대장군과 상원주장에는 만든 연대를 새겼다.옹정삼년을사삼월과 신해년오월이라는 명문이 각각 들어있다.1725년과 1731년에 해당하는 명문이다.그래서 옹호금사축귀대장군도 같은 무렵에 세운 절장승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 경남 함양 벽송사 장승(한국인의 얼굴:60)

    ◎“밥그릇 엎어놓은듯” 뭉툭한 코 인상적/눈썹·입언저리에 닭벼슬 같은 무늬 새겨 장승의 기원을 아직은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다만 고대로부터 절에 세웠다는 장생표를 장승의 원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해왔을 뿐이다.따라서 오늘날 전해 내려온 귀신이나 사람얼굴 모습을 한 장승이 출현한 시기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입으로 장승을 말하기 시작한 시기는 어렴풋이나마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15세기말에 서거정이 쓴 「태평한화골계전」(서울신문 1995년 12월8일자 13면)이 그 최초의 기록이다.이어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에는 「후」자를 써 넣고 「댜ㅇ(장)승 후」로 풀이한 대목이 보인다.또 금표로 절 근처에 세웠다는 「명종실록」기록 장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시기에 사용한 어휘 장생의 생자에 나무 「목」자가 더 붙는다.이는 사람얼굴 모습의 절장승이 16세기에 보편화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듯 오랜 내력을 이어온 절장승 1기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있다.그 절장승은 수장승 호법대신인데 암장승 금호장군은 어느해 산불에 타버렸다.벽송사어귀의 이 절장승 나이는 반세기를 훨씬 넘겨 고색창연했다.나이가 너무 들어 얼굴 한복판이 쩍 벌어졌다.그래서 애초부터 무섭게 만들려고 한 목수의 솜씨가 오히려 뒷날 한껏 살아났다고나 할까….주변 잡목과 어울려 스산한 분위기를 제대로 잡았다. 수장승 호법대신은 눈과 코가 두드러지게 튀어나왔다.끌을 깊이 대어 눈과 코의 양감을 한껏 살렸다.조각기법이 능숙한 것은 물론 끌을 놀린 솜씨가 굵어 수장승 호법대신은 문자 그대로 큰 신장얼굴이 되었다.두 눈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그저 소담하게 만들어 놓은 퉁방울처럼 생겼다.그래서 왕눈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데가 있다.코 역시 주먹코의 경지를 넘어서 마치 상머슴의 막사발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 우람했다.그 코가 두 쪽으로 터져버린 통에 더 넓어지면서 콧구멍을 드러냈다.영락없는 벌렁코다. 눈썹은 닭벼슬 모양을 했는데 입 언저리에도 닭벼슬 같은 무늬를 둘렀다.입 언저리의 닭벼슬은 수염을 과장한 모양이다.그런데 턱쪽에 공간을 두고 턱수염을 소담하게 따로 또 새겼다.그러니까 터럭이 몰린 부위는 뭉뚱그려 닭벼슬이다.이유야 두말할 나위없이 장승이 무서워 보이라고 그랬을 것이다.장승의 머리는 절장승답게 민머리다.절집에 사는 스님들이 별다른 관모가 없으니 절장승이라고 머리갖춤이 있겠는가.당연한 일이다. 벽송사 절장승은 본래 색을 칠했다는 것이다.얼굴과 몸뚱이는 온통 붉은 색이고 눈은 흰색이었다.그 퉁방울 눈이 흰색이었다니까 눈알이 빠져 튕겨나온 듯 지금보다는 더 무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어느 장승을 막론하고 몸뚱이에 색칠을 할 경우 으레 붉은색을 썼다.우리네 전통관념에서 붉은 색은 귀신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기능을 가졌다.잡귀가 혹시 붉은색을 몰라보고 범접할 것을 염려하여 장승 이름까지 써 넣었다.「호법신장」을 달필로 쓰고 그것도 오목새김으로 각자한 것이다.
  • 경남 하동 쌍계사 목장승(한국인의 얼굴:57)

    ◎주먹코·송곳니의 “사찰 수호신”/눈썹·콧수염은 문양처리… 우스꽝스러/흐트러진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친듯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어귀에 서 있었던 목장승 한 쌍.지금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 와 있는 쌍계사 목장승을 보노라면 지혜로운 솜씨가 엿보인다.그것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다 물구나무 세워 장승으로 다듬은 기발한 착상이다.도끼 목수의 솜씨는 아닌 듯 하다.절집과 인연이 닿은 어떤 도목수가 소박한 영감을 불어넣어 만든 신앙대상물일 것이다. 쌍계사 목장승은 나무 뿌리가 하늘을 향한 특이한 모습을 했다.아름드리 밤나무를 아예 뿌리가 달리게 뽑아다 뿌리를 머리삼아 장승 한 쌍을 깎고 다듬어 냈다.그래서 장승의 머리는 봉두난발한 꼴이 되었다.머리칼이 가닥 가닥 헝크러졌다기 보다는 한데 뭉쳐 사방 팔방으로 흩어졌다.이 때문에 귀신을 형상화 할 때 흔히 그려넣는 뿔처럼 보이기도 한다.머리칼이 아닌 뿔로 여겨도 사실상 무리가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을 닮은 인태신으로 제작 되었다는 점에 있다.쌍계사 목장승은 인태신으로 조각한 신장상인 것이다.높이는 자그마치 3백30㎝나 되어 그야말로 키가 장승이다.왕방울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낸 이들 장승은 신장상이 분명하지만,그리 무서운 귀신이 아니어서 공포분위기를 자아내지는 못했다.오히려 전통무늬로 도안화한 눈썹과 수염 등 얼굴 다른 부분들이 우스꽝스럽다. 눈알이 왕방울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것은 암수 장승이 서로 닮았다.콧방울은 말 그대로 방울인데,암장승은 콧마루를 사이에 두고 두 개가 붙어있다.수장승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고 왕방울 눈위에 당초문으로 눈썹을 새겼다.눈썹이 왜 당초문이가 했더니,웬걸 콧수염은 구름무늬(운형문)다.인중이 길어 바보스러울까봐 구름무늬를 새긴 모양이지만 본래 인상은 끝내 바꾸지 못했다.수염은 댕기머리 가꾸듯 총총 따 내렸다. 무섭기로 말하면 암장승이 더 하다.아랫니를 내놓은 입가에 송곳니를 위로 솟게 올려붙여 윗송곳니가 팔자로 아래를 향한 수장승과 대조를 이루었다.눈썹도 닭벼슬처럼 새겨올렸다.또 할망구 노파의 성난 얼굴을 표현할 요량으로 턱에다 톱니꼴 주름살을 길게 새겼다.그렇지만 험상궂은 얼굴이라고 가슴을 철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엉뚱하기 짝이 없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다가 설 뿐이다. 이들 쌍계사 장승은 사실상 착한 신장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수장승은 가람선신이고 암장승은 외호선신이다.그러니까 쌍계사 장승은 절 안팎을 지키는 사찰장승기능을 지닌 것이다.또 풍수지리설에 따라 절 주변 사방산천가운데 헛점이 보이는 부분은 채운다는 이른바 비보기능도 공유했다. 사찰장승은 때로 절땅 경계표시물이 되어 바깥 세상과 절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었다. 지금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쌍계사 목장승 한쌍은 1백30여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모은암에서/이병기 서울대 교수·전자공학(굄돌)

    모은암은 무척산 우거진 숲속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암자다.바위밑으로 뒷 지붕을 바짝 밀어넣어 대웅전의 앞뜰이 넉넉하고 양옆의 요사채와 범종집이 포근히 감싸준다.2천년의 세월을 서민속에 숨쉬어온 이 절집에는 오늘도 가야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법당 옆에는 연못이 있어,50∼60 마리의 잉어가 살고 있다.아침 저녁으로 잉어밥을 「공양」할 때면 그 연못에는 잠시 진풍경이 벌어진다.발걸음 소리만 나도 잉어가 떼지어 수면위로 몰려들고,잉어밥을 한 움큼 퍼서 물위로 던지면 일제히 먹이를 향해 뛰어오르며 휘정대,연못 속은 순식간에 생명감으로 가득찬다. 어느 날,아침에 보니 잉어 한 마리가 죽어 연못 바닥에 누워 있었다.꺼내서 땅속에 묻어 주고 명복을 빈 후,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잉어밥을 들고 연못가로 갔다.그런데 바닥에 낮게 가라앉아 있는 잉어들은 좀처럼 수면위로 올라오질 않았다.연못 속에는 괴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그래도 밥을 보면 달라지겠지 싶어 밥을 뿌려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일이었다.여느 날과 달라진것이라고는 잉어 한마리의 죽음 뿐이었다.그렇다면 잉어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인가. 생각해 보면 육식동물도 같은 종족을 잡아먹지는 않는다.이것은 곧 동종의 생명을 중시한다는 뜻이다.그렇다면 동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생존 본능과도 맥을 같이 하는 동물의 원초적 본능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삼풍 대참사때,뉴스 화면에 나타난 노사장은 수많은 무고한 죽음들에 대해 오열을 터뜨리기는 커녕,「내 재산이 날아갈 판인데 내가 알면서 그랬겠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이렇듯 인간이 때로는 다른 동물만도 못하게 되는 것은,다른 동물이 갖고 있지 않는 욕심들 때문일 것이다.이 경우에는 재물욕이 되겠다만,이 노사장이 평소 산사라도 찾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여유를 가졌더라면 욕심의 때가 그렇게 심하게 덕지덕지는 않았을 것인데.
  • 익산 미륵사 출토 기와인물상(한국인의 얼굴:23)

    ◎용의 눈에 도드라진 눈자위/볼·턱에 구름무늬… 이상향 상징 고대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래서 정치는 때로 민중의 종교적 심성과 영합했다.또 종교는 통치이념으로도 작용하여 삼국시대 가람들은 국가경영 차원에서 창건되었다. 오늘날 폐허로 남은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는 그러한 백제의 대가람이었다.지금은 절반쯤 허물어진 석탑 1기와 철당간이 남아 있을 뿐 백제 최대의 가람모습은 오간데가 없다.그러나 지난 1980년부터 정부가 문화재연구소를 통해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미륵사 본래의 실체에 어느정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미륵사의 옛 명성을 뒷받침하는 유물도 6천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유물 가운데는 인물상기와가 3점이나 있다.그 하나가 인물상·수막새기와다.현재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소장한 이 기와는 머리와 귀가 달린 부분은 떨어져나갔다.하지만 눈,코,입과 귀 한쪽은 살아있는 터라 얼굴 전체윤곽은 알아볼만하다.인물상의 본래 기능인 벽사를 고려하면 무서워야할텐데 무서운 구석을찾아보기 힘들다.이는 경주(신라) 영묘사 출토 인물상 기와와 공통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륵사 인물상 기와의 얼굴은 사실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다.눈의 생김새를 안상이라고 한다.이 인물상 기와 얼굴에 나타난 눈을 그 안상에 적용해 보면 용의 눈(용안)을 닮았다.눈 가장자리와 눈자위를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다.이를 그림의 형상(도상)을 빌려 설명하면 귀신을 쫓아버린다는 용목무늬(용목문)다.무늬를 통해 벽사기능을 부여하고 막상 무서움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거기에는 백제의 은유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이 인물상에는 수염이 나 있다.수염 몇가닥을 표현하고 볼과 턱 사이에 구름무늬를 넣었다.구름은 불가에서 상서로운 사물(상운)의 의미를 지니지만,도가에서 더욱 중요시하는 사물의 하나다.도교적 관념의 구름은 안개와 더불어 이상향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수염이 난 기와의 인물상은 선계의 신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절집에 웬 신선인가,하는 의문도 앞설 수 있으나 이 시기가 되면 백제불교는 도교와 습합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지난 1993년 12월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사비시대 유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이를 뒷받침한다.이 향로에는 도교적 요소가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상기와가 나온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AD600∼640년)이 창건한 가람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 행차길에 용화산 아래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고 한다.왕비의 간청을 받아들여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미륵사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미륵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륵불은 미래에 중생들 곁으로 내려올 유토피아적 희망의 부처다.왕은 민중이 갈망하는 미륵하생 신앙에 영합,이 절을 지었는지 모른다.그리고 이상향을 추구하는 도교사상이 미륵신앙과 맞물려 돌아갔을 것이다.
  • 경주 영묘사 출토 기와인물상(한국인의 얼굴:22)

    ◎도톰한 입술·광대뼈 “전형적 신라인”/눈·코·입 윤곽 뚜렷… 콧마루 긴 들창코/만면에 웃음… 온화한 여성적 이미지 우리나라 고대유물 중에는 인물상이 들어간 기와가 있다.흙인형 인물상처럼 흙으로 빚은 얼굴이다.다만 흙인형과 같이 인체 또는 머리부분 전체윤곽을 형상화한 조소와는 달리 양각의 릴리프형식을 빌려 얼굴을 표현했다.인물상 기와로는 삼국시대의 영묘사와 미륵사 절터 출토품,통일신라시대의 황룡사 절터 출토품 등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 유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은 경북 경주시 성건동 영묘사 절터에서 나온 인물상 기와다.흔히 「신라인의 얼굴」로 회자되어 요즈음의 각종 서적이나 유물도록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은 수막새 기와 마구리에 들어있다.얼굴 왼쪽의 볼 밑부분과 턱이 일부 떨어져 나갔으나 인물을 알아보기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뒷부분에는 수키와 흔적을 남겨 절집의 지붕을 이는데 실제 사용된 기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얼굴은 활짝 밝다.눈 언저리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 더욱 밝아보인다.맑게 갠 서라벌 하늘을 배경으로 휘청하니 굽은 절집 지붕에 썩 어울렸을 막새기와의 얼굴.다른 귀신얼굴의 기와(귀면와)와는 대조를 이룬 온화한 얼굴이거니와 여성적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눈과 코,입의 윤곽이 뚜렷하다.눈꺼풀이 두꺼워 보이나 흉하지 않고,조금 벌어진 입술이 도톰하다. 콧마루를 위로 서서히 올려 눈썹과 연결시켜 놓아 코가 유난히 길다.자연스럽게 내놓은 콧구멍은 그 기다란 코를 부드럽게 잡아주어 얼굴인상 전체가 순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진 이 얼굴은 오늘도 길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대가람추녀 끝에 매달려 잡귀를 물리쳤다(벽사)는 막새기와속의 얼굴이 그토록 잔잔할까.그 해답은 인물상 기와가 나온 영묘사의 역사적 분위기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이다. 영묘사는 당대의 신라 고승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았던 절이다.선덕여왕대에서 문무왕대에 걸친 7세기 중반쯤에 활동한 승려로 추정되는 양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다.이들 사서는 재예를 겸비한 그가 영묘사불사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기록했다.특히 영묘사에서 그가 장육삼존상을 만들 당시 장안의 선남선녀가 다투어 흙을 날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양지는 그 불사현장에서 노래(공덕가)를 지어 선남선녀들에게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왔도다/왔도다/공덕을 닦으러 왔도다」라는 내용의 노래다.예술적 감각은 물론이고 높은 수행력으로 덕이 가득했던 양지의 불사에 자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은 공덕가를 합창했을 것이다.여기서 양지는 모든 불사의 공덕을 이들 민중에게 돌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영묘사 출토 막새기와의 인물상은 민중의 한 사람인지 모른다.또 민중 모두를 뭉뚱그려 표현한 전형적 신라인의 얼굴일 수도 있다.그래서 막새기와 속의 얼굴에는 민중의 힘을 빌려 재난을 막고자 한 뜻이 담겼을 것이다.
  • 방학·휴가철 /역사·문화·예술기행서 인기

    ◎「문화유산 답사기2」「무량수전…」등 베스트셀러/대형서점들,관련서적 특설코너 마련 각급 학교의 방학과 직장인들의 휴가가 본격 시작되면서 서점가에 역사및 문화·예술기행 서적을 찾는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 이에 맞춰 대형서점들은 관련서적들을 한데 모은 특설코너를 마련해 독서애호가들을 맞고 있으며 몇몇 책들은 빠른 속도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고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유홍준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 이 책은 나온지 1주일도 채 안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1위에 오른 것을 비롯,종로서적·영풍문고·을지서적등 각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를 차지했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란 부제를 단 이 두번째 권은 지리산 동남쪽,강원도 평창·정선 일대,불국사·부석사등 경북,민통선일대,전북 부안의 농학농민전쟁 현장등을 다뤘다. 또 답사일정표및 안내지도를 덧붙여 실제 여행을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으며 첫째권을 정정·보완해 부록으로 실었다. 지난해 발간 이후 50만부가 넘게팔리면서 문화기행문의 유행을 불러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첫권도 지금까지 꾸준히 나가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2」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관련도서로는「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최순우 지음·학고재 간)가 꼽힌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선생의 글 1백30여편을 모은 이 책은 한국의 유형문화재를 두루 소개하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은이의 찬탄이 저절로 읽는이의 마음으로 옮겨지는 빼어난 글이다. 이 책도 발간 한달여 만에 교보문고 종합 10위에 들어서는등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혔다. 이밖에 국내의 유명사찰들을 소개한 「명찰순례 1∼3」(최완수·대원사),「절로 가는 마음」(신영훈·책만드는집)은 종교공간으로서의 절집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에 깊숙이 자리잡은 문화유산으로서 사찰과 부속문화재를 다뤄 인기가 높다. 한편 이 책들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우리 것」을 찾는 발자취를 기록한「한국의 토종 기행」(홍석화 지음·사계절 간)이 새로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타결된 뒤 우리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토종산물에 어떤 것이 있는지,그 토종의 효능과 이용방법은 무엇인지를 자세히 밝힌 책이다 대표적인 토산품 생산지 27곳을 중심으로 그곳까지의 행로,그 지방의 풍물을 소개해 문화기행문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이다.
  • 절로가는 마음/신영훈지음(화제의 책)

    ◎전국 유명사찰 건축기법·배경 등 설명 종교적인 공간으로서의 절집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가 응집한 문화공간으로서의 절을 소개한 문화기행서. 전국의 유명사찰을 중심으로 대웅전·일주문등의 건축물,탑·불상등 조형물,그리고 불화·단청에 이르기까지 절의 영역에 포함된 모든 문화재를 다루었다. 4·4조 우리말 가락이 섞여 있는 유려한 문장으로 그 문화재를 만든 기법과 사상적 배경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다. 문화재전문위원이자「한국 최고의 목수」로 불리는 지은이의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해박한 지식이 느껴진다. 책에 나오는 절 55곳의 소재지와 연혁,소장문화재들을 일목요연하게 담아 여행안내서로도 무난할 듯. 책만드는집 6천원.
  • 월하스님(조계종 개혁회의장)의 종풍혁신 설법

    ◎“청규실천의 불교로 환골탈태해야”/종단분규 오랜 권력독점이 빚은 결과/불타의 이상은 무애… 첨예대립 피해야/절에선 중아닌 부처님 찾도록… 사부대중도 개혁 동참을 경남 양산군 하북면 신평리 영취산.석존이 법화경을 설했다는 산 이름이다.만법을 통달하여 일제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의 통도사가 그 산자락에 있고,절 안쪽 깊숙한 정편전에는 월하스님(81)이 주석한다.불교 조계종 소용돌이 속에서 개혁회의를 이끌고 나온 노장이다.평상시 대로 대중들과 더불어 아침공양(식사)을 마친 참이니까,노장을 만난 시간은 상오6시반을 좀 비켜섰다. 『어디 세상일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가요.개혁을 하겠다고 앞장선 새 사람들이 명분을 앞세워 내 이름을 써 넣고 불러낸 것이지요.그래서 이 늙은이 얼굴 한번 내 비추고 오자,하는 생각에서 서울을 다녀왔습니다.산중에만 산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틀을 묵는데도 퍽이나 혼이 났어요』 노장이 털어놓는 개혁회의 의장식 수락 동기속에는 스스럼이 없다.표정이나 말솜씨가 여느시골 할아버지다.원로종교인에게 카리스마적 권위는 물론 베일에 가린 신비가 어느정도는 배어있어야 할텐데,그런 구석이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다. ○평범한 촌로의 모습 『괜찮습니다.사시사철 문을 열어 놓고 사는걸요.별 사람들이 다 찾아옵니다.문을 열어놓고 살다보니 거북한 일도 있지요.젊은 여신도들이 내왕할 때 남보기가 안 좋더라구요.그렇다고 오지말라는 말은 못하겠고….절집에서는 연세가 높은 모친도 같이 못 사는걸 법도로 여기니까요』 본래 시자도 없이 사는 노장앞에 불쑥 나타난 점을 사과드렸더니 농담 반에 진담 반을 곁들여 정편전만큼은 대문에 빗장을 걸지 않는 거처임을 애써 강조했다.노장을 가리켜 「열려진 고승」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제사 들여다 보였다. 『이번 시비는 한 사람이 오래 종단의 권력을 거머쥔데서 나온 당연한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지금까지 종단풍토는 총무원장한테 손을 번쩍 안들어주면 다 적이 되었지요.그 장본인은 하지말라고 말려도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이제 그 사람이 종단을 자진 탈퇴했다니까 파행의 세월이 끝난 것으로보아주시오.새 사람들이 더 이상 지탄받지 않게 노력할 겁니다.그런 일을 생전에 보는 것이 기실 소원이기도 했어요』 이번 개혁이 종단의 종풍을 바로잡는 파사현정의 기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서의현 전총무원장을 「그 사람」으로 지칭하는 가운데 개혁세력인 「새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대화내용을 곱씹으면 노장은 「새 사람들」이 불러서 업힌 것이 아니고,스스로 앞장을 섰다는 결론이 나온다. ○파야현정의 기회삼아 『정치적 독재자들은 국가 존립과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조차 떡 주무르듯 하지않습니까? 총무원을 장기적으로 차고앉았던 그 사람도 예외로 볼 수는 없어요.종헌·종법을 맘대로 고쳤지만 종당에는 치욕적 말로를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지요.권불십년이라고나 할까요.탐욕이 승했던 탓이 아닌가 합니다.운거선사가 남긴 선문답의 참뜻을 일찍 새겨들어두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테지만….그 사람 종단을 떠났더라도 마음 고쳐먹길 바라요』 ○종단떠나 거듭나길 노장은 중국 운거선사(?∼902년)의 선답구절을상기시켰다.평소 솥하나에 떡을 쪄서 세 사람이 먹어도 모자라는데 천 사람이 먹으면 남는 까닭,그것은 「다투면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는다」는 해답으로 귀결된다.탐욕과 다툼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노장은 「사람은 열번 된다」는 우리 속담을 빌려 전서원장이 거듭 태어나는 것도 희망사항이라고 했다. 『누가 중 보러 절에 오랬나요.부처님 뵈러 오시오.그러다 보면 중도 그럴싸하게 보이고 절도 절로 좋아질 겁니다.이번 사태로 불심이 시들해졌다면 신도님들 다시 힘내셔야 합니다.불교는 이타종교이고 또 스스로 깨우침을 가르치는 자아의 종교여서 바로 여러분의 종교입니다』 조계종사태로 불자들의 불심이 떨어지고 특히 초발심자들이 불교를 외면하고 있다는 말에 대해 비관론 보다는 낙관론 쪽에 비중을 실었다.「승려가 아니라 부처님 뵈러 절에 오라」는 노장의 표현이 오히려 해학적일 뿐이다. ○자기정진 진력 촉구 『승풍의 진작은 정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정진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지요.이번 사태를 몰고온 종단 파행운영도 정진보다는 잿밥에 눈이 먼 탐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헛된 망념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농사도 자경을 하고 있습니다.돈이 되는 것은 아니나,일일불작일일불식의 청규를 실천해보고자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이번에 우리 불교가 생산종교로 환골탈태하는 모습도 보여주어야겠다는 욕심도 부려봅니다.그것이 다 개혁이 아니겠습니까…』 통도사 스님들이 직접 짓는 농사는 논만도 2만평에 이른다.스님 모두가 트랙터나 경운기를 몰고 나서면,노장은 감농이다.그러는 동안 통도사의 영취총림 학인 60여명은 학풍을 일으키는데 전념한다.그 총림의 방장이기도 한 노장은 아직도 행자시절 처럼 웬만한 옷가지는 손수 빨아입는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둥글둥글하게 한데 어울리는 것이 좋아요.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첨예한 대립은 아무쪼록 피해야 됩니다.그래야 막히는데가 없는 법(무애)입니다.우리 불교가 바라보는 이상의 한가지도 거기 있고…』 불교를 평화의 종교로 해석한 노장은 더불어사는 사회상 정립도 원융무애정신에 기초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말씀을 더 드리자면 이번 개혁을 제2정화 불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사부대중이 개혁작업에 함께 참여할 때 개혁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앞으로 불교가 할 일은 참으로 많아요』 노장은 비구와 대처승을 가리는 지난 54년 시작된 불교정화 당시 대표 다섯비구 가운데 마지막 남은 인물이다.동산,김오,청담,소봉은 이미 입적했다.지난 70년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다는 이후락씨가 권력형 전국신도회장으로 있을무렵 노장과 얽힌 일화 하나.그가 종단 일에 사사건건 뛰어들자 『그러려면 머리를 깎고 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어떻든 노장은 덕과 지혜,용기를 겸비한 이 시대의 큰 스님임에는 틀림이 없다. 법랍 61세.충남 부여에서 보낸 소년시절 청정비구가 우러러 보여 18세에 출가,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그이후 통도사 주지,조계종 감찰원장,동국학원이사장,총무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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