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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기자가 본 종교 만화경] 도둑과 숨은 손

    사미승 둘이 서로 제 절 자랑을 한다.“우리 절에선 동짓날 팥죽을 쑬 때 스님 둘이 배를 타고 저어야 한다.”“우리 절의 요사채(숙소)에 스님들이 누우면 반대쪽 끝이 안보인다.” 절 집이 크면 얼마나 크고,그 속의 인총이 많아야 얼마나 많다고 자랑일까.세인들의 우물안 개구리격 허욕을 빗댈때 절집에서 우스갯소리로 흔히 하는 말이다. 속인들과는 다르다는 스님들의 인정이 이럴진대 사바세계의 욕심을 탓해 무엇할까.인류의 역사가 모두 욕심의 점철이다.“의인(義人) 10명이 없어 망했다”는 구약 성서의‘소돔과 고모라’구절은 욕심의 끝을 경계함이다.불교의‘적멸’이나 ‘열반’도 모든 욕심의 소멸 경지를 뜻한다. 전북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의 서쪽 벽이 휑하게 비워진데에는 흥미있는 전설이 얽혀 있다.절을 찾은 한 나그네에게 대웅보전의 벽화 그림을 맡겼더니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절대로 들여다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작업에 들어갔다.그러나 스님 하나가 참지 못해 창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새 한마리가 몸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신빙성을 떠나,하릴 없는 욕심을 버리라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누구인들 더 갖고 싶고,더 누리고 싶은 욕심이 없을까.하지만 세인들의 ‘새우젓 구경하기가 어렵다’는 절집 넘보기는 욕심의 도를 넘은 것 같다.조계종이 견디다 못해 마침내 전국 사찰에 무인 방범 시스템을 설치키로 했다고 한다.국보·보물급 불교 문화재들이 있따라 훼손되고 도난당한 끝에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낸 방책이다. 불교의 회향(回向)다짐은 고행중인 싯달타의 헐벗은 모습에 감동한 한 천민출신의 여인이 누더기 옷을 벗어바친 게 계기가 됐다.절집 도둑막이 소식은 석가모니와 불교의 회향 의미를 거꾸로 쫓는 것 같아 씁쓸하다.지난 봄 “문화재를 도난당한 절의 주지직을 박탈하겠다”던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그런가 하면 구세군 자선냄비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100만원이 든 익명의 봉투가 담겼다고 한다.10여년 전부터 꾸준히 전해지는 미담이 세밑 인심을 훈훈하게 덥혀준다. 절집의도둑 방책이 과도한 욕심 탓에 생겨난 비극이라면,구세군 자선냄비의 ‘숨은 손’은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는 실천의 전형이다.욕심도 욕심 나름이라고 하지만 웬만하면 그욕심도 좋은 쪽으로 부릴 일이다. 김성호기자
  • [김성호기자가 본 종교 萬華鏡] 입시에 불타는 信心

    서울 송파동에 사는 J씨(47·여)는 요즘 마음이 편치가 않다.대학입시 수능시험을 망쳤다며 풀이 죽어있는 큰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짝이 없다.도진 허리병도 잊은 채하루도 빠짐없이 흑석동 D사(寺)를 버스로 오가며 100일 기도를 올렸건만….“혹시 정성이 부족한 탓인가?” 입시철이면 수험생 못지않게 노심초사,타들어가는 게 부모들의 마음과 애간장이다.시험이 임박할수록 아들 딸,손주 시험 잘보게 해달라며 108배며 1,000배,심지어는 3,000배 정진도 마다않는 불심(佛心)으로 전국의 사찰은 덩달아 부산해진다.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이른바 유명 사찰도량엔 100일불공을 드리려는 열성 신도들로 으례껏 붐비기 마련.시험당일 크고 작은 사암의 대웅전이며 법당,산신각 등 도량 구석구석에서 시험이 끝나는 시각까지 무릎이 끊어져라 절을 하는 치성도 항다반사다.이맘때면 사부대중에 항시 열려 있다는 절집 공양간의 인심도 더욱 넉넉해지곤 한다. 부처님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정도야 조금 다르지만크고작은 교회의 이런저런 예배,기도회에서도 입시철 절체절명의 화제는 단연 시험이다.‘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우리의 아들 딸들이 실력발휘해 좋은 성적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류의 기도가 넘쳐나기 마련이다. 수험생들의 집중력을 위해 시험시간중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는 나라.‘이 시험 망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수능시험 당일 외국 방송의 스케치 기사가 낯설지 않은 나라.공무원 출근시간이 늦추어지고 경찰 차가 수험생을 실어나를 정도로 중요한 대학입시 판에서 절집에 넘쳐나는 치성객쯤이야 무어 그리 탓할 게 있을까마는 그래도 무언가 아쉬워진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맞아 팔만대장경을 새길 때마다 구국의 일배일배(一拜一拜)를 한 것이나,아들 딸 소원성취를향한 무념의 108배나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함이 있을까. 절집에서 내가 가진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중생들이 항상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회향’(回向)의 정신은 자비심의 극치로 여겨진다.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며 넘실대는 절집들의 떠들썩한 움직임을볼 때마다,설교자의 ‘…기도합나이다’가 요란한 ‘아멘’ 소리에 파묻힐 때마다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새벽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으는,소박한 회향의 합장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김성호기자 kimus@
  • “달마야 놀자” 조폭이 스님이랑 친구됐네

    최근 조폭영화의 폭력성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제작사 씨네월드의 이준익 대표는 새 영화 ‘달마야 놀자’(감독 박철관)를 두고 “조폭영화가 결코 아니다”라고 애써 강조한 적이 있다.오는 9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실제로 폭력물은 아니다.별난 캐릭터의 조폭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뿐 난투극자체를 소재로 삼지는 않았다. 조직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밀린 재규(박신양)일당이 숨어든 곳은 첩첩산중의 암자.평화롭던 절은 불청객들의 기습으로하루아침에 난장판이 될 참이다.일주일만 숨어있을 요량으로 “절을 접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5명의 조폭들.하지만 스님들도 눈썹 하나 꿈쩍 않는다. 영화의 전체 분위기는 제목 만큼이나 여유있고 낙천적이다. 재규를 말 끝마다 “형님”이라 부르며 어깨힘을 주는 조폭들이지만 위협의 느낌이라곤 어디에도 없다.절을 지키려는혈기왕성한 젊은 스님 넷과 시시콜콜 벌이는 신경전은 오히려 조폭들을 어리벙벙한 순진남으로 돌려놓는다.큰스님(김인문)의 중재로 계속되는 ‘조폭 대 스님’의 기싸움에서 양쪽의 중심축은 재규와 청명스님(정진영).고스톱,1,000배 예불,배구,잠수 등의 게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존심 대결을벌이는 장면장면에는 코미디 영화의 재치와 익살이 골고루담겼다.조폭과 스님의 즐거운 우정쌓기에는 조연들의 돌발코믹연기도 한몫했다.박상면(불곰 역),김수로(왕구라),이문식(대봉스님) 등이 그들. 영화에서 담백한 웃음 이상의 메시지를 건지기는 어렵다.제목만 보고 종교적 성찰을 기대했다면 더더욱 곤란하다.심각한 폭력이 없다 뿐,그런 점에선 ‘신라의 달밤’이나 ‘조폭 마누라’류의 가벼워서 부담없는(?) 코믹물 수준을 뛰어넘진 못한다. 영화의 특장은 엉뚱한 데서 엿보인다.정물화같은 화면이 대목대목 복병처럼 펼쳐지는데,덕분에 ‘사찰영화’의 넉넉한정취가 뭉실뭉실 피어난다.승복차림의 재규가 절집 지붕 꼭대기에 달랑 올라앉아 핸드폰 주파수를 맞추는 모습 등은 꿈인듯 현실인듯 몽롱해지는 탈속(脫俗)의 재미를 안긴다. 현재 영화가의 최대 관심거리.조폭소재의 이 영화가 보란듯 대박 신드롬을 이어갈까.관객의 입맛을 종잡을 수 없으니정답이야 ‘며느리도 모를 일’.하지만 대체적인 시사평가는 ‘조폭 마누라’의 그것을 살짝 웃돈다. [촬영지는 어디?] 이 영화에는 스튜디오 촬영장면이 일절 없다.절경으로 내내 찬사를 쏟아내게 하는 영화속 암자는 경남 김해시 신어산 기슭의 은하사.김수로왕이 세운 고찰이지만,불교건축 전문가들의 자문아래 오상만 미술팀이 개보수까지했다.극중 조폭이 오줌누는 장면을 위해 석탑 하나를 새로세웠는데,벌써부터 불자들에게 명소가 되고 있다는 후문. 황수정기자
  •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주연 이영애

    나이 서른에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선 이영애.‘8월의 크리스마스’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건드려놓고는 소리소문없이 3년을 보낸 허진호 감독(38). 나란히 앉은 두사람은 꼭 오누이같다.한참을 뜸들여야 내놓는 어눌한 대답하며,답이 궁하면 소리없이 웃고마는 숫기없는 품새 하며….새 영화 ‘봄날은 간다’(28일 개봉·제작싸이더스)에서 둘이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기자가 슬쩍 농을 던져본다.“말수 적기로 소문난 유지태씨까지 가세했으니 촬영장 분위기 참 썰렁했겠어요.” 이영애는 농담도 조용조용 진담처럼 받는다.“아뇨,재미있었어요. 촬영현장에서 작품 얘기 하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는걸요. 셋이서 의견을 나누면 뭐든 못 만들어낼 게 없다 싶었구요.” 그러고 보니 영화는 감독과 남녀주인공의 차분한 이미지를쏙 빼닮았다.아주 느린 호흡의 사랑을 담아낸 멜로.지방 라디오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와 녹음기사 상우(유지태)의만남에는 처음부터 왁자한 진동같은 건 없다.숙명이니 운명이니 하는 묵직한 의미가 끼어들지도않는다.소리 채집을 하느라 함께 다니던 남자와 여자는 장난처럼 사랑에 빠진다.그리고 불꽃처럼 열정을 키웠다가,다가가고 머뭇거리는 서로다른 사랑법에 혼돈스러워 한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어느 순간 변하고 그래서 힘들어지고,그런 일상의 감정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죠.처음부터 배우들의 본래 색깔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 보일 작정이었어요.두 주인공의 분위기가 극중 캐릭터와 실제로 많이 닮았지요.그 점,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감독) “한가지 설정만 갖고 덤벼들었어요.은수는 한번의 이혼경력과 이전에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상처를 가진 여자라는 것.사랑하다가 어느날 싸늘히 돌아서는,극단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를 살려내는 게 힘들면서도 흥미로웠어요.장면이바뀔때마다 대사톤을 바꿨을 정도였거든요.”(이영애) “맞아요.영애씨나 지태씨에게 특별히 어떻게 연기해달라고 주문한 적이 없었으니까.”(감독) 주거니 받거니 두사람의 얘기에 가속이 붙는다.그럴만도 하다.“자고 갈래요?”(은수)-“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상우)로 시작된 사랑이 “헤어지자”(은수)-“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상우)로 안타까운 매듭을 짓는 영화다.단선적인 대사들로 만남과 이별의 감정선을 일궈내는,까다로운 작업이었다. 5개월을 매달린 작품에 두사람 모두의 기대가 각별하다.‘공동경비구역 JSA’,‘선물’로 잇따라 흥행작을 터뜨린 이영애는 부담도 적지 않다.“촬영분의 90% 정도를 강릉에서 찍으며 한뎃잠을 잤어요.이제 좀 쉬어야겠다,그런 생각이 드네요.” 부담스럽기는 허감독도 마찬가지.‘8월의 크리스마스’와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지적들에는 특히 그렇다.“다르게 만들고 싶었는데,같은 사람이 찍다보니 그랬나 봐요.(웃음)” 하지만 감독이나 배우나 똑같이 자신있어 하는 대목이 있다.“‘눈으로 듣는’ 영화”라고 매력포인트를 찍어낸다.소리 채집 여행에 나선 영화속 남녀의 풍경에는 언제나 꿈결같은 소리들이 함께 한다.바람부는 대숲,눈내리는 뜨락,풍경소리 그윽한 절집,봄바람에 서걱거리는 보리밭….“소리의 느낌에 반해 찍은 영화였어요.” 이영애의 커다란 눈망울이 영화속에서처럼 가늘게 감겼다 떠진다. 황수정기자 sjh@
  • 해인사 원철·현종스님 인터뷰

    “해인사가 해인총림만의 사찰이 아니라 국민사찰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세계 최대의 청동좌불 건립을 둘러싸고 선원 수좌 등 승려의 폭력사태를 일으킨 경남 합천 해인사의 중역 스님들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절 밖으로 나왔다. 10일 밤 서울 조계사 앞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난 해인사 대변인 원철 스님(해인지 편집장)과 재무 현종 스님은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해인사 대불은 오랜 숙원사업인 ‘불교 신행·포교 복지문화단지’ 조성불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데 대불의 크기가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아 문제가 불거졌다고 봅니다.”“절집 안의 문제가 자꾸만 밖으로 새어나가 회자되면서 죄스런 마음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원철 스님은 “불사의 원뜻이 아무리 좋아도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제대로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현종 스님도“앞으로 모든 불사에 대중의 뜻을 철저하게 반영할 것을 총림에서 결정했다”고 전했다. 두 스님은 “처음 문제를 야기한 실상사 스님들이 이미 지난 15일부터이번 사태를 참회하는 단식 기도회에 들어갔고 해인사 스님들도 21일부터 28일까지 참회 용맹정진 기도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며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밝혔다.대불 건립을 둘러싼 승려 폭력사태는 실상사 수경스님이 해인사의 대불 건립에 대해 부당하다는 내용의 글을 쓰자,해인사 선원 스님들이 실상사로 찾아와 수경 스님의 방을 부수면서 비롯됐다. 현종 스님은 “대불 건립 시주자와 관련해 온갖 소문이 나돌지만 정·재계와 아무 관련이 없는 독실한 80대 일반 불자로,60억원을 시주하면서 좌불 내용에 대해선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이 신도는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과 30여년간 맺어온 인연으로 거액을 해인사에 내놓게 됐으며 조만간 신원을 밝힐 것이라고 스님은 덧붙였다. 특히 원철 스님은 “400만달러에 달하는 좌불건립 비용의 거액 기부자 가운데 다음 대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물정치인이 있으며 해인사의 책임있는 모 스님도 이를 분명히알고 있다”는 내용의 최근 뉴욕타임스 보도는 사실무근임을 분명히 밝히고 강력 대응할 뜻을 비쳤다. 두 스님은 축소조정된 대불의 규모와 양식에 대해 “전문가들로 하여금 처음의 계획을 평가하도록 한 뒤 축소 조정안을 마련,최종 검토작업에 들어갔으며 조감도가 완성되면 모형도를 만들어 조만간 일반에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호기자 kimus@
  • 경북 문경 봉암사

    일년에 단 하루,부처님 오신 날 뿐이다. 굴삭기에 할퀴고 관광객 발길에 짓밟히는 우리네 사찰 환경에서 유일무이한 청정도량의 자존과 기백을 지켜 온 경북 문경 봉암사.고고한 한국 선종(禪宗)의 명맥을 옹골차게 잇고 있는 봉암사 빗장이 새달 1일 열린다. 새재(조령)를 넘어 문경읍에서 점촌 쪽으로 남하하면 한때 광산촌으로 각광받던 가은읍이 나온다.이곳에서 속리산 뒤쪽 선유동계곡으로 내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흰머리산이 눈에 들어온다.바위 하나로만 오똑한 희양산(998m). 바로 이 산 자락에 봉암사가 깃들었다. 개산조사 지증이 879년 산문을 열 때 “운수납자(雲水衲子·불가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스승에게 학문을 구하는 스님을 가리키는 말)들이 이곳에 머물지 않으면 도적떼 소굴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천혜의 요새.동쪽으로 열린 마을 입구만 막으면 진입할 길이 없으니,스님들 진진찰찰(津津察察)에 이만한 곳이 없다. 봉암사 앞 산자락에 올랐다.능선을 2시간이나 이리저리헤매도 절집 지붕을 구경할 수 없다.울창한 소나무숲 탓이다.여기소나무들은 쭉쭉 뻗고 가지에 기품이 묻어나는 게 울진 소광리에 비길 만하다. 선종 구산 선문의 맏형 격인 희양산문의 총찰로 8년 전입적한 성철 큰스님과 지금의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등이 깨달음을 얻었던 선맥의 고향.조계종은 지난 82년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해 사바세계로 난 문의 빗장을 걸었다.봉암사에는 전두환씨를 불가의 한 귀퉁이에 안기게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백담사와 함께 거론됐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전한다.전씨 고향이 근처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하마터면 자성청정심의 도량에 흠집이날 뻔했다. 계곡을 따라 1㎞쯤 거슬러 오르면 어른 수백명이 앉을 만한 널따란 반석이 나오고 거기 마애불좌상이 있다.높이 4. 5m에 폭 4.4m로 바위에 양각된 불상 앞에서 스님이 합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하나의 놀라움이다.불상 옆에 새겨진 글씨 ‘백운대’는 고운 최치원이 남겼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명을 떨쳤던 함허득통은 시 ‘희양산에서’를읊조렸다. 산 깊고 나무 가득 차 고요히 머물기 좋으니 경계는 고요하고 사람은 드물지만 흥이 넘치네 이 산중에 맑은 진리 가득 차 떠도는 이 내 처지 몰록 잊고 홀로 기뻐하네 이런 비경만이 봉암사의 고고함을 있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철,혜암을 비롯해 청담,자운,향곡,월산,법전 등젊은 수좌들이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 보자’며 47년부터 4년 간 결행했던 ‘봉암사 결사(結社)’ 덕이다. 결사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 4명의 종정,6명의 총무원장이 나왔으니 가히 조계종에서 차지하는 봉암사의 무거움을 짐작할 수 있다. 천년을 훨씬 넘긴 고찰이지만 고색창연한 건 없다.가람(절집) 대부분이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기 때문. 봉암사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경내와 동쪽 암자 옆 수풀에 흩어져 있는 보물들.최치원이 쓴 지증대사비문과 3대 주지 정진대사의 부도와 탑비,3층석탑 등 보물 5점과 각종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산문을 닫은 지 20년.기자는 옆구리로라도 들어가 볼 요량으로 산을 헤맸지만 4시간 만에 포기했다. 사하촌이랄 것도 없는 작은 마을의 구멍가게 할아버지는“젊은이,봉암사를 꼭 봐야겠다는 욕심부터 버리게”라고말했다.그 말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오로지 한 무리 숲으로 남은 봉암사.그곳에서 부처를 만날 일이다.물론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문경 임병선기자 bsnim@. *여행 가이드. ◇가는 길 = 동서울터미널에서 문경행(30분 간격)과 가은읍 직행(하루 3차례) 버스가 있다. 승용차는 중부고속도로 음성 나들목∼금왕읍∼충주∼수안보(3번 국도)∼문경 또는 중부고속도로 증평 나들목∼괴산∼연풍∼문경을 이용한다.굽은 길이 많아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가은읍은 이정표를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괴산에서 34번 도로를 따라 가다 쌍곡계곡 입구에서 922번 지방도로를 타고 속리산국립공원 복판을 거쳐 선유동계곡을 통과하는 드라이브코스도 있다. 화요문화답사회(02-2275-4333)와 국학연구소(02-921-2212)는 1일 봉암사와 주변 명소를 돌아보는 여행상품을 판매한다.화요문화답사회는 ‘태조 왕건’ 촬영지를,국학연구소는 김룡사와 황희 정승의 종택을 각각 둘러본다.모두 3만2,000원. ◇둘러볼 곳= 가은읍과 봉암사 중간의 문경석탄박물관(054-550-6424)에서는 광산에서 사용하던 장비와 광물 등을 전시한다.길이 230m의 갱도에서 갱내 생활을 체험하고 붕괴현장을 직접 볼 수 있다. 가은읍을 나와 점촌 쪽으로 가다 보면 강 아래 어엿한 소나무숲이 나타난다.진남교반.승용차로 이동하는 이들이라면 한번 들를 만하다. 붉은 담갈색 온천수로 유명한 문경온천은 국내 온천 중보기 드문 칼슘 중탄산온천.물이 끈끈한 게 신기한 보양천이다.피부염과 각종 신경질환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054-572-3333)봉암사 사하촌(寺下村)에는 별 다른 먹거리가 없다.산채비빔밥과 묵밥을 잘 하는 가은집(054-571-9080)이 고작.
  • 여수 영취산 내일부터 축제 “”화전 맛 보세요””

    4월은 과연 ‘잔인한 달’일까. 능선을 온통 수놓은 연분홍 진달래의 커튼은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기 까지 하다.국내 진달래 군락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전남 여수 영취산(해발 510m).경남 창녕 화왕산,마산무학산의 진달래 군락지도 화려하기로 소문나 있지만 이 곳보다는 다소 떨어진다는 게 상춘객들의 평이다.나무그늘 아래 숨어 새색시처럼 수줍게 미소를 짓는 줄로만 알았던 진달래가 이곳 영취산 기슭에선 진하게 화장한 중년의 아줌마처럼 돌변한다.대담하리 만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영락없는 마을 뒷산이다.유장하면서도 노래부르는 듯한 전라도 사투리를 닮아 펑퍼짐한 능선이 이어진다.기암괴석이놀라운 것도 아니고 계곡이 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4월 영취산은 놀랍게 변신한다.질긴 생명력으로 민족과 함께 해온 진달래가 5만평 능선을 그득 채우며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전라도 사투리 일색인 진달래밭에서 소리낮춘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경남 진주에서 왔다는 김인석씨(37).“와,마산 무학산을 여러번 안 올랐십니까.하지만도 여기 영취산허리 아래에도 못 미치는 것 같어예”라며 혀를 끌끌 찬다. 영취산 아래 흥국사에서 산길에 나섰다.최근 옮겨 심은 왕벚나무 100여그루가 관람객들을 포근히 맞는 가람을 애써비껴 안으며 ‘휴대폰을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카피가 떠올려지는 한적한 길을 올랐다.군데군데 진달래가 눈에 띄긴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애걔’하는 소리가 맴돌았다. 그러나 봉우재에 오르자 탄성이 터져나왔다.이건 분홍빛 궐기.정신을 잃을 것같은 현란함이다.철쭉처럼 요란한 진홍빛은 아니다.꽃망울을 가장 먼저 터뜨린다는 지리산 바래봉의 철쭉이 진한 핏빛 아름다움이라면 영취산 진달래는 색깔을 안으로 감춘 봄햇살을 닮았다. 자그만치 3㎞ 산길에 진달래가 만개해 있다.정상 아래 봉우재부터 임도를 따라 월례로 이어지는 비탈마다 진달래가 피어난다.“워메 좋은그.앗따 진달래가 이렇게 한 데 모여있는 건 처음 보네잉” 정말 전국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진달래 아니던가.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여린 꽃망울들이 한 데 뭉쳐 온산을 태울 듯 화려하다.그진달래들 뒤로 여수반도에 딸린이름모를 섬들과 광양만,그리고 멀리 경남 남해의 망운산산마루가 얼굴을 내민다. 축제가 6일부터 벌어진다.진달래 축제.마침 여수시내 한 유치원생들이 소풍을 나왔다.어머니들은 찹쌀가루를 준비해와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부쳐 아이들은 물론 길가는 사람에게 맛보라고 건넨다.“하나씩만 맛보시오잉.어렸을 때 생각하면서 말이요.이게 다 우리 민족의 피울음 아니것소”한다. 옳거니.진달래는 그냥 꽃이 아닌 것이다. 산을 내려와 법흥사 일주문을 나서면 다시 번잡한 세상이다.뒤를 돌아본다.화사한 진달래 웃음이 벌써 그리워진다. 여수 임병선기자 bsnim@. *여수 영취산 이렇게 가세요. ◆가는 길=호남고속도로 순천 나들목를 나와 17번 국도를갈아 탄 뒤 외곽도로로 여수까지 온다.산단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산업단지로 들어와 흥국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한다.직진해 2.7㎞ 정도 달리면 LG칼텍스 공장.다시 1.5㎞를 가면 임도가 나오므로 차량 이용도 가능하다.축제기간에는 자동차로 봉우재까지 오를 수 없다.강남 센트럴시티에서 여수행 버스가 많다.여수시외버스터미널에서 52번 시내버스가 자주 다닌다. 김포에서 아침 9시 비행기를 이용하면 하루 나들이로도 충분하다. ◆먹거리=여수도 맛의 고장으로 유명하다.여수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중앙동 쪽에 훌륭한 식당들이 많다.중앙동 파출소앞 구백식당(061-662-0900)은 막걸리 식초를 이용,이지역 특산인 서대를 야채와 버무려 회로 내놓는다. 교동 국민은행 옆 여흥식당(061-662-6486)도 느끼한 밀물장어와 달리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기 그지 없는 바다장어탕을 잘 끓인다.장어탕 백반 5,000원,장어구이백반 7,000원. 여수 갓김치도 독특한 향과 매운 맛으로 인기높다.갓김치공장 (061)644-2185.여수농협 죽포지점 (061)644-2187. *흥국사 왕벚꽃에 번뇌 사라지고…. 영취산의 명물은 진달래뿐만은 아니다.흥국사로 인해 영취산은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백년 후 왜침을 예견해 ‘흥국’이란 이름을 달았다는 호국가람.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운 승병 수군 700명이주둔했다는 절은암자가 14곳,법당이 수십개에 이른 큰 가람이다.우리 역사처럼 수차례에 걸쳐 호된 전란을 거친 탓에 지금은 살림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번다(煩多)하지 않은 게 우선 마음에 든다.이곳 절집은 빛바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퇴락한 듯 색바랜 단청,정갈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듯한 빗살무늬 문살이 아름다운 대웅전.마당에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가람을 둘러싸고 왕벚꽃나무 100여그루가 서있다. 대웅전과 그 안의 후불탱화 등이 보물로 지정돼 있고 앞마당의 석등과 화사석(火舍石)도 여느 절과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봉우재에서 진달래 흐드러진 북쪽능선을 바라보며 오르면도솔암.기도 도량으로 소문난 곳답게 바다를 한눈에 조망하는 아름다움이 대단하다.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26)유배지의 한 끼니

    *구치소 '사식' 반찬 10가지도 넘는 진수성찬. 미셸 푸코는 권력의 전형들을 다루면서 군대와 감옥을 예로 들었다. 군대와 감옥은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규율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길을 들이는’ 곳이다.이러한 체제가 병원과 학교의 통제까지 형성한 셈이다. 규율이라면 소싯적부터 지긋지긋해 오던 터에 군대 석삼년에 감옥 다섯해를 지냈으니 한번 맛좀 보라는 팔자였던 모양이다. 구치소에 있을 적에는 그래도 식사가 좋은 편이었다.그도 그럴 것이아직은 재판 결정이 안났으니 죄인은 아닌 셈인 데다 날마다 가족 친지들이 면회를 오고 걸핏하면 변호사와 접견을 하게 되어 있어서 관에서도 신경을 써주는 편이었다.이른바 검사는 불러 조지고,판사는때려 조지고,가족은 팔아 조지고,피의자는 먹어 조진다는 말처럼 친지들이 차입해준 구매물이 넘쳐나고 영치금도 쌓이기 마련이다.그래서 돈도 빽도 없고 가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개털’ 잡범들의 신세도 구치소 시절에는 영치품과 구매물의 인심이 후해서 살도 통통 찌고 속옷 같은 징역 준비도 구치소에서 마련하던 것이다.사식도 여러종류가 있어서 그야말로 경제사범 같은 ‘범털’들은 관식을 거의 먹지 않아도 입맛대로 골라 먹는다.범털들은 구치소 식사를 ‘법무부한정식’이라고 불렀는데 구매물에 없는 것이 없어서 그야말로 밥과국 그리고 찬 두 가지의 규정식 외에 김,각종 나물,젓갈,장조림,장아찌,통조림,등등 한 열 가지 이상을 주욱 늘어놓고 먹는다.그야말로진수성찬이라 교도관들도 점심에 직원 식당으로 가지않고 ‘소지’라고 하는 봉사원이 차려주는 백반상을 받기 마련이다.반찬 가짓수가얼마나 다양한가 하면 젓갈 한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오징어젓,꼴뚜기젓,명란젓,어리굴젓,새우젓 등속이 있으니 이건 징역을 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가족들이 팔아 조져다가 수인을 먹는 일에 전념하도록 만든 꼴이었다.이런 게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 때에 정착이 되어 ‘사식’이랍시고 번성하여 왔던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민간정부로 넘어온 뒤 한 해가 지나서 이 제도는 부조리의 온상이 된다고 하여 폐지가 되어 버린다.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로 이감을갔는데 낯선 것은 그렇다치고 우선식사가 형편 무인지경이 되어 버린다.사식은 아예 없고 구매물도 생활 필수품 위주로 한정되어 있다.그리고 교도소 당국은 먹을 것으로수인들을 교묘히 통제하기 마련이다.다른 무엇보다도 지방 교도소는시설도 열악하고 수인의 숫자도 많지 않아서 부식 구입에 불리하다. 하루 부식비가 수인 일인당 천원 정도 되는데 거기에 연료비가 포함되어 있으니 매끼 삼백원도 채 못되는 셈이었다.이전 같으면 구매물의 품목이라도 많아서 관급 부식이 신통찮아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텐데 부조리를 없앤다고 대폭 줄여서 일식 삼찬이라는 원칙으로 또박또박 관식을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수인들은 모두 규율면에서도 그렇고 의식주도 교도소 안에서는 풍성하고 헐렁했던 군사정권 시절이 훨씬 살기 좋았다고 원망 섞어 말했다.그렇지만 형편이 나쁘면 나쁜대로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방도가 생기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다. 나는 주요인물 취급을 받아서 일반수들은 물론 다른 젊은 정치범들과도 분리되어 징역을 살았다.처음 몇 년 빡빡하던 시절에는 일반 잡범들의 사동 맨 끝에 복도를 철창으로 막고 독방을 만들어 수용했다.그것은 일반수들 십여명이 합방하는 3.5평짜리를 세 칸으로 나눈 방이었는데 벽 두께며 창과 문짝 등속으로 방 하나가 그야말로 0.8평 정도의 넓이였다.일반수들은 모두가 취역수들이라 낮에는 소내 공장에나가고 드넓은 사동에 나 혼자 남기 마련이었다.그러니 아래층 미취역수들 방이 있어서 교도관이 지키고는 있지만 수시로 나를 시찰하러 이층으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독방에 혼자 있으니 사람 속을 알 수가 없어 언제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이라도 할지,혹은 화가 나서 자해라도 하든지,아니면 기묘한 수를 내어 탈옥을 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그래서 관구에서 생각해낸 것이 나에게 봉사원을 붙여 주게된 것이다.교도관도 높은 사람이나 그들을 봉사원이라고 부르지 사실은 수인부터 담당 교도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일제시대 그대로의 이름인 ‘소지’라고 부른다.한자말로 청소라는 뜻의 소제를 뜻하는 일본 발음의 말이다.제도가 말을 규정한다고도 하고 그 거꾸로라고도 하지만 일제시대 거의 그대로의 행형제도가 아직도 옥내용어를 일본말로 남겨두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그래서 평균 육개월씩 잡아서 나와 함께 생활한 소지가 오년동안 십여명이 되었다.그들은 사동 안팎의 청소를 하고 하루 세 끼니의 배식을 하며 안에서 갇혀있는 수인들과 복도에서 수직하는 교도관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다.그리고 수인들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거일동을 담당에게 알려 주는 은밀한 임무도 맡는다.특별 독거수가 된나 하나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는 셈이어서 소지들은 서로 내 담당이되려고 애를 썼다.그들은 대개가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 내게는 거의 아들뻘이나 마찬가지였고 죄명도 갖가지였다.겪다보니 내 소지로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절도가 아닌가.같은 죄수 신세로 그들의 수발을 받는데 별다른 불평이 있을 리가 없지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관구계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게 보내는 아이들은 모두 절도 출신입니까?왜요,머 불편하세요?아니 점잖게 탈영병이라든가 교통사고라든가 있지 않소.모르시는 말씀입니다.오죽 게으르면 군대생활도 제대로 못견디고 탈영을 했겠어요.교통사고 출신도 젊은 애들은 거의가 음주에 뺑소니에 인명사고인데 놀기만 좋아하고 뺀질뺀질 하지요. 그럼 절도는?도둑질 그거 부지런해야 먹구 삽니다.미리 미리 털 집 봐 둬야죠,시간 맞춰 현장 도착해 망 봐야죠,숨어서 기다려야죠,직접 털어야지요,무거운 짐 지고 도망가야죠,장물애비 찾아서 처분해야지… 한 두 가집니까.그애들 여기 오면 참 양순한 애들입니다.부지런하고 순하고아주 소지로 맞춤하지요. 나는 계장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다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였기 때문이다.교도소 수인들 사이에서도 절도는 그냥 ‘도둑놈’이라고 하여서열상 맨 아래다.그것은 교도관들이 수인들을 멸시하여 부르는 총칭이 ‘도둑놈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맨 위가 깡패들을 부르는‘조폭’이며 우습게 취급 받는 이들은 ‘물총’이라고 하는 강간범인데 처음에 신입으로 입방했을 때만 그렇지 결국은 이들도 절도 취급은 받지 않는다.절도는 결국 서럽고 배고픈 놈들이란 점에서감옥먹이사슬의 맨 하위 계층인 셈이다. 나는 이 단순한 젊은이들과 매일의 끼니를 의논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을 친 조카나 자식처럼 사랑하게 된 경우도 여럿이었다.언젠가는 ‘소지열전’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정도다. 건오라고 해두자.건오는 문화재 절도로 들어왔다.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계모 밑에서 시달리다가 부산으로 가출을 했다.중국집 배달소년에서 시작하여 음식점을 전전하면서 경양식기술을 익혔다.부지런히 벌어먹고 살만한데 전에 같이 일하던 녀석이 절도로 몇번 소년원이며 교도소를 들락거리더니 유명한 절집에 가서 금불상이며 탱화며 하는 값진 것들을 털어왔다.그래서 그 장물들을건오 자취방에 맡겨 두었다.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같이 동거하던 술집에 나가는 여자 친구가 돈이 궁색하여 몰래 금불상 하나를 내다가 골동품 점에 팔려고 했다.주인은 대번에 이것이수배된 장물인 것을 알아보고 신고했다.그래서 건오는 영문도 모르고 일망타진된다.내가 건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차례의 단식을했던 중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십이 일 간의 본단식과 한 달 남짓한 복식을 치른 그 긴 긴 겨울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황석영
  • 고성 화암사 “설악 깊숙한 절집… 외로움 달래네”

    가을을 떠나보낸 설악(雪岳)은 그리움에 몸을 떨었다. 그 외로움을 달래는 것은 산정에 쌓인 흰눈이 아니었다.외려 늦가을정취를 품에 안은 고즈넉한 사찰과 황량한 들판에 일렁이는 억새가떠나는 가을의 고독에 답하고 있었다. 설악이라면 모두들 제 손바닥 보듯 안다고 지레짐작한다.그만큼 서울이나 타관 사람들의 발길이 일년내내 끊이지 않는다.하지만 설악 자락에 이처럼 예쁜 절집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않다.화암사(禾岩寺).44번 국도가 확장돼 길이 많이 짧아졌다고는 하나 서울에서 3시간을 쉼없이 달려야 미시령.흰눈 덮인 고개를 넘어 20여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대명콘도 안내판과 함께 ‘금강산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들어온다.화진포를 거쳐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길이라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스쳐 지나간다.하지만 화암사로 발길을 돌린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겨울나무의 열병식을 구경하며 5분을 더 내쳐달리면 왼쪽에 군부대가 보이고 그 뒤로 큼직한바위가 눈에 확 들어온다. 꼭 두꺼비 같기도 하고 계란을뒤엎은 것 같기도 하다.수(秀)바위.그아래 널찍한 평지에 절집이 틀어 앉아있으니 수바위는 곧 이 절집의얼굴인 셈이다. 신기하게도 이 절집은 바위를 향해 들어앉아 있다.절집에선 바다가보이지 않고 마당에 내려와야 동해 바다가 훤하다.절과 바다 사이 영랑호가 있고 양양과 간성의 모든 산줄기와 평원이 절집의 품에 들어온다.절 앞으로는 신선골이 흐른다.무려 30리를 흘러흘러 동해로 접어든다.그 물은 결코 많지 않지만 내는 소리는 벽력같다.시원하다. 신선봉이라 불리운 이 산자락은 미시령의 바로 오른편 봉우리.금강일만이천봉이 시작되는 봉우리로 오래전부터 여겨져왔다.이를 반증하듯 절집의 서북쪽 삼성각에는 상팔달,세존봉 등 금강산 봉우리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금강에는 8만9개의 암자가 있었다하니 이 절집은 그 암자군의 첫째인격. 신라 진흥왕때 지장율사가 화엄경을 설법했다 하여 처음에는 화엄사로 불렸단다.추사 김정희의 글씨체로 쓴 현판 ‘무량수’가 완당이라는 호와 함께 새겨져있어 눈길을 끈다. 또 이 절집에는 한가지 특이한 게 있다.신선골 계곡에 기둥을 곧게박고 전통찻집 ‘란야원’(033-633-9998)이 들어선 것.요사채에 절집이라니.단청은 적당히 퇴색해 낯선 이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저푸근하게 차향의 감미로움에 빠져들게 한다. 안에 들어앉아 동해바다를 감상하며 차를 마실 수 있다.눈이라도 내리면 그 삼삼한 정경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절집을 나와 500m를 달리면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렸던 신평벌.농사를짓던 땅이 분명한 구릉에 억새물결이 일렁인다.때마침 울산바위에 해가 얹어지자 그만 억새는 눈이 되고 만다.하늘하늘 춤추다가 이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음을 토하고 만다.“눈이 부셔.”이곳은 강원도 양양의 여운포 억새밭(대한매일 10월19일 18면)과 함께 드라마 ‘가을동화’를 찍었던 곳으로 알려져있다.극중 준서(송승헌)와 은서(송혜교)가 키스를 나누던 장면이란다. 산봉우리에 걸친 햇살은 더욱 예광을 발하고 그 빛을 받은 억새는 더슬프게 흐느낀다.자동차를 몰고 억새밭을 누빌 수 있다. 다음날 낙산 앞바다에서 일출을 만끽함으로써 산과 계곡,사찰,평원,바다가 어우러진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어떻게 가나] 설악산 가는 길이야 다 아는 것이고,미시령 넘어 20여분 달린다.금강산 가는 길에 들어서 5분 정도만 조심스럽게 내려가면왼쪽으로 수바위가 눈에 들어와 쉽게 찾을 수 있다. 수바위가 가까워질 무렵,화암사 일주문도 눈에 들어온다. 군부대 앞에서 3분 정도를 더 달리면 신평벌 억새밭.여기에서 15분정도 더 내려가면 방포항.방파제에 부서지는 거친 파도를 보며 겨울바다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가을동화의 위력]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의 ‘순례’인파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우리여행사(02-335-7137)는 2∼3일(무박) 화암사를비롯,가을동화 촬영지를 돌아보는 여행상품을 판매한다. 열린답사(02-2282-0624)와 옛돌(02-2266-1233)도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 속초 임병선기자 bsnim@
  • 단풍에도 품격이… 때깔이 다르다

    일주일만에 달려나간 영동고속도로는 ‘때깔’부터 달랐다.그야말로화염 바다,온 산을 불태울 듯 단풍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충주호에서 단양쪽으로 내쳐 10여분을 달리니 금수산 아래 능강구곡이펼쳐진다.노란색과 붉은 색 단풍의 경염(競艶)이 요사스럽기까지 하다.그러나 호남고속도로는 아직 푸른빛으로 넘쳐났다.하지만 산속깊은 곳,장성 백양사의 애기단풍은 붉은 빛의 옷으로 갈아입느라 여념없었다.이곳 단풍은 이번 주말에 절정을 이룬다. ■제천 능강계곡. ‘높음이 하늘보다 높은 곳 없으나 도리어 밑으로 돌아가고/담수보다맑은 것 없으나 깊으니 오히려 검도다/스님은 불국정토에 있으니 조금도 욕심이 없고/객이 신선사는 곳에 들어오니 늙음 또한 슬프지 않구나’충주호는 물론,건너편 월악산과 왼편에 산자락을 늘어뜨린 소백연봉을 한눈에 굽어보는 천년고찰 정방사 주련(柱聯)에 새겨진 싯귀.절집뜰에 서면 이 싯귀가 가슴에 다가온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세운 이 절집은 현재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 뜰이랄 것도 없다.크고 널찍한 바위가 뒤에 떡 버티고 서있어 인파의북적임을 막고 있다. 보살이 미소 짓는 저편에 호수가 있고 산이 있고 우리네 인심이 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능강계곡에 흰 구름이 학처럼 내려앉는다.능강계곡은 제천시 수산면과 단양군 적성면 경계에 서 있는 금수산(1,016m)의 서북사면에 자리한 계곡으로 남북으로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햇볕드는 시간이 짧다.그래서 능강계곡 오른쪽,한양골이라고도 불리는 얼음골에는 한여름 복날에도 얼음이 언다.초복에 얼음이 가장많고 중복에는 바위틈에 있으며 말복에는 바위를 들어내고 캐내야 한다.이곳 얼음은 만병통치약으로 이름있다.왕복 4시간 소요. 맑고 청명한 가을 아침,계곡은 온갖 색의 향연을 풀어헤친다.단풍나무와 갈참나무,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볼만하다. E.S리조트를 지나 조금만 달리면 들머리가 나온다.단풍터널로 이루어진 3㎞를 1시간동안 오르면 정방사. 여기에서 절집 뒤로 20분 내쳐 오르면 족두리봉.가파른 경사면을 10분 정도 내려가면 암릉지대가 나타난다.여기에서 청풍호반을 바라본다.큼직한 호반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감은 가히 환상적이다. 다시 족두리봉으로 나와 한숨 돌린 뒤 리조트 위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날듯이 내려온다.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폭신하다.산길은 편안하고 넉넉하다.단지 길이 쉽다는 게 아니라 마음을 느긋하게 다림질하는 매력이다. 정방사 그루터기에서 산하를 내려다본다.“늙음도 슬프지 않구나”.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서제천 들머리에서 나와 사과로 유명한 금성단지를 지나 청풍면을 거쳐 청풍대교로 향한다.청풍대교에서 청풍문화재단지쪽을 버리고 10분 정도 내쳐 달리면 E.S리조트가 나온다. 동서울고속터미널에서 제천까지 간 뒤 제천시에서 청풍까지(하루 20회) 온 다음 청풍∼수산면 상천까지 하루 3회 운행된다. □E.S리조트 지난 96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회원 전용 콘도로 알프스식 별장콘도 개념을 도입했다. 110여개 콘도하우스 중 어느 하나 같은 설계가 없을 정도로 개성을살린 공간으로 이름높다. 결고운 잔디가 깔린 바비큐 파티장에서 주말마다 파티가 열리고 영화도 상영된다. 닭·오리·토끼·사슴 등이 뛰어놀아 어린이가 뛰어놀기에 그만이다. 콘도 구석구석에 그네식 벤치가 놓여있어 충주호와 월악산,금수산 등을 바라볼 수 있고 전망탑에서 맥주와 커피를 즐기는 맛도 일품이다. 서울사무소(02)508-0118. ■백암산 백양사. 정말 아기 손바닥만 했다. 얼마전 무차대법회(스님과 일반 신도 구별없이 불법(佛法)을 논의하는 법회)가 열린 조계종 고불총림의 본사인 장성 백양사.뜰에 핀 단풍나무 잎새 크기는 꼭 아이 손처럼 작았다.이름하여 애기단풍. 단풍잎 사이로 학바위가 얼굴을 드러낸다.때마침 지는 해에 반사돼붉은 빛을 띠는 학바위는 학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정상에 오르면 변산반도 곰소가 발아래 펼쳐진다. ‘백암산 황매화야 보는 이 없어/저 혼자 피고 진들 어떠하리만/학바위 기묘한 경 보지 않고서/조화의 솜씰랑은 아는 체 마라’노산 이은상은 이곳 백양사를 품고 있는 백암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연 리드미컬한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꽂힌다.“아따,내장산이 최고라 하지만 여그 백양사만 헐까요이.산세나 뭘로 보나 백양사가 최고지라.”육당 최남선도 그랬던가 보다.학바위 봉우리를 보고 “흰 맛,날카로운 맛,맑은 맛,신령스러운 맛이 있다”했으니. 조화미다.내장산이 온통 붉은 빛 일색으로 아줌마·아저씨부대들의얼굴을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들여 놓는다면,이곳 백양사 단풍은 비자림의 푸른 빛,은행나무의 노란 빛,감나무의 선홍빛과 어울려 애기단풍이 더욱 붉게 빛난다.번쩍거림이 아니라 질감있는 붉음. 절집 맞은편.마치 백암산 계곡이 양팔을 벌리고 앉은 듯한 곳에 옛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는 쌍계루가 있다.그 아래 물이 흐른다.주위를 빙 둘러 단풍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예전에 물이 넘쳐 흐를 땐 그만한 절경이 없었단다.물에 비친 단풍과 누각,학바위의 붉은빛, 가히 절경이었다.고려말 목은 이색이 ‘참으로 좋은 경치’라는찬사를 보냈단다.하지만 지금은 물이 없다.진입로에서 쌍계루까지 단풍터널도 혼을 빼놓기 십상. 다시 백양사 경내를 나와 절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비자나무 군락이 푸르게 펼쳐져있다.천연기념물 153호인 비자림은남방계 식물로제주도와 전남 경상도에만 있으므로 여기 백양사는 북방한계선에 해당하는 셈.애기단풍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조연을 이 가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들머리를 나와 9㎞ 달리면 약수리 3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좌회전하면 백양사 진입로가 나온다.기차를 이용할 경우 백양사역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27일부터 단풍축제가 열린다.28일 오후11시40분 서울역을 출발하는내장산등산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하거나 오는 30∼11월5일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내장산단풍열차(무궁화호)를 이용할 수도 있다.오전8시55분 서울역 출발.축제추진위원회(061)390-7224□들러볼 곳 한나절 거리인 내장산에 이르는 길이 좋다.하루 정도를각오해야 한다. 자신없으면 한여름 물놀이로 유명한 남창계곡을 들어서면 좋다.백양사 2㎞ 못미친 곳에 진입표시가 있다.몽계폭포로 유명한 계곡과 암석이 무너져내린 너덜의 조화미가 빼어나다.백양사 매표소 바로 지나왼편에 있는 가인마을에서 민박할 수도 있다.이곳 꿀은 품질 좋기로유명하다.황룡면 금곡마을의 영화촌도 영화 ‘태백산맥’과 ‘내 마음의 풍금’ 촬영지로 이름짜하다. 장성 임병선기자.
  • 기찻길 영상에세이‘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온다’

    지난 여름 들머리에 사진작가 마동욱씨는 불쑥 철길여행을 떠나기로마음먹었었다.탐진댐으로 수몰되는 고향마을을 몇년째 찍어온 덕에‘수몰마을 사진가’란 별명을 얻은 그다.철길 최남단에서 최북단,목포에서 문산까지.7월 한달동안의 철길대장정에는 이대흠 시인이 함께 했다.기찻길 영상에세이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온다’(다지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두 사람이 걸은 철길은 469㎞.79만여 개의 침목을 신성한 ‘의식’처럼 일일이 디디며 자국자국마다 심고 돌아온 건 사람에 대한 사랑과,통일에의 염원이었다. 107개의 역을 거치는 동안의 감상은 발끝마다 달랐다.서울역이나 대전역처럼 거대도시도 지났을 테지만,발길이 붙들린 곳은 역시 역장마저 없는 낯선 간이역들이었다.철길옆에서 무공해 채소를 가꾸는 농부,스쳐지나는 길손에게 주저없이 농을 거는 팔순 노파,고요히 역사를쌓아가는 철길가의 이름없는 절집….때로 넘치는 감상은 몇줄 시(詩)로도 표현됐다. 이대흠씨는 길에서 만난 이야기를 그날그날 일기처럼 수첩에 옮겼다. 덕분에,115편의글들이 낯선 여행지에서의 단상을 생으로 되살렸다. 한여름 신록을 담은 111장의 천연색 사진들은 기행의 여운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황수정기자 sjh@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10) 낯선 땅에서

    *짜고..맵고..투박하고..'경상도 맛'은 원색적. 공양 법회에 참례하지 않고 부엌에 달린 찬방에서 보살님들과 밥을 먹으면더욱 격식없이 이것 저것 해먹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두부를 만들 때에도 삶은 콩을 맷돌에 가는 일을 도우면 따로 순두부 찌개를 해먹었고 독상을 받는 큰스님들 밥상을 준비할 제 갖가지 특식을 얻어 먹곤 했다. 내가 특히 맛있다고 기억하는 건 여러 가지 푸성귀로 싸먹는 쌈밥들이다.상추 쌈이야 늘 먹던 것이니까 아예 말할 것도 없고 너푼너푼하게 잘 자란 곰취 잎에 된장 쌈을 해서 먹는 맛은 그 싱그러움이며 쌉쌀한 뒷맛이 그만이다.나중에 백두산 갔다가 양념장을 쳐서 싸먹던 야생 곰취의 맛은 잊을 수가없다.아예 밥을 참기름과 깨소금에 잘 버무려서 한입만큼의 주먹밥을 만들어,살짝 데친 취 잎으로 싸서 김밥처럼 한덩이씩 먹는 맛도 좋다.도토리나무잎을 데쳐서 싸먹기도 하고 깻잎을 쑥갓과 어울려서 고추장 넣어 싸먹기도한다.생 다시마를 데쳐서 향그런 쑥갓과 더불어 싸먹는다.뒤란의 호박잎을따다가 껍질을 대충 벗기고 찜통에 살짝 쪄서 풀기만 죽여서,마늘을 얇게 썰어 곁들여서 막된장을 넣어 싸먹는다.배추나 양배추 쌈은 여름날 집에서도흔히 해먹던 것이고,특이한 것은 고구마잎도 쌈밥을 해먹을 수 있다.이것은잎을 끓는 물에 아주 삶아낸다. 조금 쓴 맛이지만 머위 잎도 먹을만 하다.잎을 데쳐 내는데 쌈장과 함께 풋고추 쑹덩쑹덩 썰어낸 것과 곁들여 싸먹으면 쌉쌀하고 매운 맛이 어우러진다.근대는 적당히 자란 것은 나물이나 국을 끓여 먹지만 웃자란 잎들은 역시끓는 물에 슬쩍 데쳐서 싸먹어도 좋다.아욱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큰스님의 심부름으로 오래간만에 부산 시내에 나갔다.신부님이나 스님이 대개 어슷비슷한데 아마 군인들도 마찬가지일테지만 외출 나와서 세상과 만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하나는 영화 구경을 하는 일이고 자장면을 사먹는 일이 그 두 번째다.호주머니가 가벼운 탓도 있겠지만 아무도 동행한 사람이 없이 혼자라 그 두 가지 일 외에는 별로 할 일도 없는 셈이다. 내 기억으로는 ‘오케스트라의 소녀’라는 흑백 영화였는데,늙어서 일자리를 잃은 노인 악사들로 교향악단을 꾸린 소녀가 실제 인물로 출연하는 스토콥스키를 찾아가 지휘를 부탁하고 드디어 화려하게 데뷔한다는 내용이었다.영화를 보고 눈부신 극장 앞 광장으로 몰려 나오는데 인파 속에서 내 얼굴을아는 이를 만났다.큰 자형의 가까운 친구되는 이였다.그는 내 승복 차림을보고 놀라서 손을 잡으며 물었다.너 어느 절에 있느냐,느이 어머니가 지금눈물로 세월을 보내신다,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한꺼번에 묻는 것이었다.나는 부산 근방에 있다고 겨우 둘러대고는 달아나듯이 그이와 헤어졌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한 보름 되었을까.그날도 아침을 먹고나서 법당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나를 불렀다.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산문을 나서고 오솔길을 지나 절집 어구에 상가가 늘어선 곳까지 나가 보았다.바로 앞쪽에 기념품 상가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이쪽을 향하고 서있는 여자가 보였다. 멀리서도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가까이 다가가는데 자세히 보니 모친이었다.어머니는 대뜸 내 손을 잡고 눈물바람이었다. 그렇게 되어서 산문을 나선 그 길로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산 국제시장 들러서 사복과 모자 하나를 사서 승복 벗어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부산역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거의 일 년만에 불고기 백반을 먹었는데 맛이 있다기 보다는 누린내 같은 고기 냄새가 역했던 것 같다.아마도그동안 풀과 푸성귀로 오감이 바뀌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어머니는 자형 친구로부터 승려가 된 나를 부산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부산에 당장 내려와 어느 곳에 무슨 절이 있는지 수소문하여한군데씩 찾아 다녔다고 한다.드디어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만나게 된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는데 그이는 냉정하게 거절하더라는것이다. 이미 출가한 사람이라 아무리 모친이라 하여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저는 홀어미이고 아들이라고는 그것만 믿고 살아왔습니다.비록 제가 기독교인이지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가엾은 일에 대하여는 다 같겠지요.제 아들을 돌려주십시오. 어머니가 그렇게 울며불며 사정을 하니 광덕 스님은 한참이나 묵묵히 앉았다가 제안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번 만나는 보세요.아들이 어머니를 따라가면 어머니 자식이 될 것이오 만약에 절로 돌아오면 부처님 자식이니 다시는 찾지 마십시오. 그랬는데 나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두 말할 것 없이 손 잡고 따라서 집으로돌아왔으니 속세의 아들로 되돌아온 셈이다.이제는 모친이나 광덕 스님이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데 나는 시방 누구의 자식인고. 나와 경상도 땅의 인연은 어려서 전쟁 시절에 대구로 피난 가서 소학교 다니던 데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군대생활까지 보내게 되었다. 경상도의 음식을 들라면 우선 짜고 맵고 투박하며 원색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래도 다른 지방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부산에 갔을 적에 이른 아침에 아낙네들이 ‘재칫국 사이소!’를 외치며 창밖을 지나는 소리에 잠이 깼다.재첩 조개를 넣고 소금으로 간하여 끓여낸 국은 개운하고 속풀이에 좋았다.요즈음 점심참에 먹기 좋지만 우뭇가사리 묵을 채썰어서 콩가루와 갖은 양념을 치고 식초 섞은 냉국을 부어서 먹는 우무냉국도 속이 씨원해진다.대구의 따로국밥은 예전에는 대구탕이라고 불러서 생선 대구탕과 혼동이 될 정도로 유명했다.연변에서 수십년만에 귀국했던 소설가 김학철 노인도 친지에게 옛날식으로 대구탕이 먹고싶다고 했다가 생선 대구탕 집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부산의 고래고기 회나 포항 지방의 과메기는 술꾼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과메기는예전에는 청어를 썼지만 요새는 청어가 드물어져서 꽁치로 대신한다.꽁치를바닷바람에 꾸득꾸득하게 말려서 그대로 찢어 먹는데 길게 찢어 돌돌 말아서 초장에 찍어 먹는다.전에는 그물에 걸리면 재수 없다고 그대로 바다에 버리던 생선이었는데 요즘에 와서 맛을 내게된 것 두 가지가 있으니 쥐치와 아구가 그것이다.그중에서도 아구는 아구찜이라는 독특한 마산 요리가 개발되어값 비싼 생선이 되어 버렸다.아구찜은 콩나물과 미더덕이라는 멍게 비슷한갯벌 생물과 만나야만 완성이 된다.매운 양념에 톡톡 씹히면서 터지는 미더덕과 뼈다귀채로 씹는 아구 맛이 입맛을 확 돌게한다.경상도의 막장은 찌개로 좋고 집장은 가지 무 오이 장아찌를 함께 담그기에 좋다.골짠지는 다른고장의 무말랭이 장아찌 비슷한데 무말랭이와 고춧잎을 검은 깨와 강엿과 갖은 양념에 매콤 달콤하게 무쳐서 항아리에 담가 두고 겨우내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늦봄에 꺼내 먹는다. 황석영.
  • [황석영의 맛따라 추억따라](8)낯선 땅에서

    *첫 가출길 절집서 먹어 본 쑥밥엔 매캐한 향내... 내가 절집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열 아홉 살 무렵이었다.어느 잡지의 신인상을 받고나서 오랜 숙원이던 고등학교 자퇴와 가출을 동시에 해냈다.나중에대학에 가서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한창이던 때에 유치장에서 만난 부랑 노동자와 간석지 공사장엘 찾아갔던 것은 본격적인 방랑이 되었지만. 하여튼 첫 가출은 거의 한 해가 걸렸다.동행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전여행비슷한 출발이었고 기차를 타고 그렇게 오랫동안 국토를 누벼 본 적이 없었다.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이 중학교 삼학년 무렵이었는데 부둣가에 서자마자 배를 타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겠다는 강열한 소망에 들떴다. 동행과 청주 대구 마산을 거쳐서 진주 어름의 농가에서 보리 베기를 하며 밥을 얻어 먹다가 중국집에서 -그때는 철가방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상자로 배달을 했는데- 자장면도 배달하다가 빵공장에서 빵 목판을 나르는 일도 했다. 청주에서는 아이스케키 집에서 합숙을 하면서 얼음통을 메고 거리로 나가 팔기도 했다.칠북이란 작은 면에 갔다가 야산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절집에 불목하니로 들어앉게 되었다.우연히 주지 스님과 이야기 해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산하겠다는 말이 나와 버렸던 것이다.스님은 거의 달포 가까이 나를 절에 두고 관찰해 본 다음에 일봉서신과 함께 부산으로 보내 주었다. 내가 절에서 난생 처음 먹어 본 음식이라면 쑥을 넣어 지은 밥과 엉겅퀴로끓인 된장국이다.쑥밥은 그냥 산야에 널린 쑥을 뜯어다가 콩나물밥이나 무밥처럼 넣고 지은 밥을 양념장을 쳐서 비벼 먹는다.역시 들판에 지천인 엉겅퀴를 캐다가 냉이국처럼 된장과 들깨를 넣고 한소끔 끓일 뿐인데 입안에 싱싱한 풀향기가 가득찬다.푸른 물이 든 쑥밥의 매캐한 향내도 입맛을 돋운다. 그리고 내가 끝내 맛을 들일 수 없었던 것은 산초라는 이상야릇한 향내가 나는 열매를 가지 채로 간장에 담근 장아찌였다.열매의 알알이 약간 여물게 씹히는데 입 속에서 톡톡 으깨지면서 독특한 향내를 진동 시킨다.나중에 이 열매나 잎을 가루로 내어 미꾸라지 추어탕에 쳐서 먹던 것이 생각났다. 보살 할머니가 정성을 들여서 가죽잎을 말리던 것도 생각난다.너푼너푼한 가죽나무 잎을 따서 땡볕에 바짝 말린 다음에 찹쌀로 풀을 쑤어서 마른 나뭇잎에다 정성껏 바른다.앞 뒤에 찹쌀풀을 발라서 채반이나 자리에 널어 놓고 다시 말린다.이것을 저장해 두고 먹을 때에 기름에 튀겨낸다.마치 튀긴 미역이나 다시마처럼 아삭거리고 고소했다. 스님은 나를 동래 범어사에 있는 그의 도반이던 고광덕 스님에게 보냈다.광덕은 나중에 대학생불교연합의 지도법사를 거쳐서 불광이라는 잡지도 만들던분이다. 그는 당시에 범어사의 원주를 지내고 있었다.조실은 저 유명한 하동산 스님이었다.편지를 찬찬히 읽어 보고나서 그는 나를 동산 스님에게로 데려 갔다. 어린 아이처럼 곱게 늙은 노스님이 나를 힐끗 보고 나서 한마디 했다. 이 집에 있으면 얼마나 있을라고 그러는고…?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묵묵히 앉았을 뿐이었다.절하고 나오기전에 한 말씀 올렸다. 갈 데가 없으면 쭉 있을랍니다. 그것이 아마 면접에 해당이 되었던지 광덕은 나를 말없이 재우고 나서 이튿날 범어사를 방문한 스님에게 붙여서 보냈다. 그것은 아마도 울산 거의 다 가서 후미진 바닷가에 있는 작은 암자였을 것이다.바로 지척에서 바위를 때리는 세찬 파도 소리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나를 데려간 스님은 불을 때라 밥을 해라 시키더니 저녁 밥으로 밥 한 사발씩에 고구마순 나물과 시어 터진 김치에 국 한 가지로 저녁을 먹고 나서 건너가 자랜다.단칸 오막살이인 줄 알았더니 부처님 모셔 놓은 법당 마루를 지나 왼편에 길죽하고 비좁은 변소 같은 토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방은 그대로흙을 바르고 오래 되어 꺼풀이 일어난 멍석 한 장이 깔렸다. 파도 소리에 잠을 못이루고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호통소리가 들렸다.부처님에 귀의하겠다는 놈이 예불 시간도 모르고 쳐질러 잔다고 그 꼭두새벽에 나가라는 소리였다.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을 달려 와서 걷고 또 걸어서 당도한 곳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지만 쫓아내니 가방을 달랑 들고 길을 찾아 나오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걷다가 타다가하며 겨우 제 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미 끼니 때가 넘은 저녁무렵이었다.가방을 들고 산문에 들어서니 누구 하나 아는 체 하는 이가 없었다. 마침 요사채 툇마루에 얼굴 아는 동승이 앉아 있었다.그는 내가 범어사를 찾아올 제 버스에서 내려 십여릿길을 함께 걸어오며 이야기를 나눈 아이였다. 나이는 한 열 대여섯쯤 되었을까,살결이 희고 코가 오뚝하며 눈이 맑은 미소년이었다.그는 지금쯤 한소식 하고 큰 스님이 되어 있을지.내가 마루에 가서털썩 주저앉으니 그는 내가 멀리까지 다녀온 것을 모른 모양이었다. 내 얘기를 듣고는 동승이 빙긋이 웃었다. 문을 세 개쯤 지나야 입산이 되어요.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그가 나에게 왜 스님이 되려느냐고 물었다.나는 표를내는 건 어려서부터 질색이었으므로 이렇게 답했다. 어디 가서 밥 먹을 데가 없어서 여기나 들어오려구 해요. 엊그제 여기서 처음 자려고 할 적에 행자 하나 들어오더니 제법 능숙한 자세로 합장하고 나서 내게 자기를 찾으려고 왔느냐는 둥 소크라테스 같은 폼을잡길래 한마디 했다.집이 없어서찾아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는데 동승도 그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일은 집에 갈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뺑뺑이를 돌리는 시험은 몇 번 더 계속 되었고 나는정말 세상에서 아무 데도 갈곳이 없는 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정처를 정하여 주었는데 거기가 참선 공부의 산실인 해운대 금강원이었다. 하루 세 끼를 먹는 공양의식에 참례하기 시작했다.스님들은 모두 목기로 만든 자신의 발우를 보자기에 싸서 대중방 선반에 올려 두고 있었는데 공양 때에는 그것들을 펼쳐 두고 모두 벽을 등지고 늘어 앉는다.제일 먼저 물을 받아 그릇을 씻고 밥과 국과 찬을 자기 먹을 만큼만 덜어 내어 각기의 목기에담아 공양한다. 국은 언제나 채소 된장국이고 찬은 나물 두 가지에 김치다.행사가 있거나 특별한 날에는 기름기 있는 전붙이나 튀김도 나온다.식사를 끝내면 남은 음식물을 모두 제 뱃속으로 버린 다음에 물을 받아서 남겨 둔 김치 쪽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밥풀이며 음식 찌끼들을 말끔히 닦아내고 그 물을 마신다.그리고 다시 맑은 물을 받아헹구고 또 마신 다음에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깨끗이 닦아서 보자기에 싼다. 나는 머리를 깎고 계를 받기 전까지 겉 모양은 스님과 같지만 아직은 연습중인 행자가 되었다.내가 맡은 일은 주로 절집 안팎의 청소와 허드렛일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마당과 앞 뒷뜰을 쓸고 법당에서 선원에 이르기까지 비질 걸레질을 하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스님들도 빨래는 각자가 알아서 했지만 각 방에 큰 스님들 밥상을 나른다거나 잔심부름 할 일도 만만치 않았다.부엌에 들어가 밥과 반찬을 만드는 일은커녕 불을 때는 일도 내게는 차례가오지 않았다. 황석영.
  • [사설] 都心과격시위 제한해야

    최근 도시기능을 마비시키는 잇따른 과격시위로 시민들의 고통이 크다.지난주말 서울역광장 노동절집회는 일부 참가자들이 광화문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도로를 점거하는 격렬시위로 이어져 종로·을지로·퇴계로 등 서울일원의 교통이 밤늦게까지 마비되는 사태를 빚었다.지난 1일에는 종묘공원노동절집회에 참가하려던 학생들이 안암동 일대를 점거하고 화염병시위를 벌여 시민들이 또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올봄은 이른바 ‘춘투’로 불리는 근로자와 학생 집회가 잦을 것으로 예상된다.때문에 시민들은 벌써부터 과격시위로 인한 생업 지장과 불편을 크게우려하고 있다.시민을 볼모로 한 시위는 여론을 끌어들이기는 커녕 악화시킨다는 점을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 잘 안다.1년만에 재발된 화염병과 투석시위로 국민들은 착잡한 심경이다.지난날 군사·권위주의 정권시절 민주화요구시위가 때로 과격성을 띠어도 용인된 것은 국민의 암묵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다양한 계층의 이익과 관심을 옹호하고 민주사회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무시하고 탈법과 폭력을 통해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한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민주사회를 지탱하는 기본틀은 법과 상식이며 여론의 힘이다.그럼에도 여론을 등돌리게 하는폭력시위로 시민에게 불편을 준다면 집회의 당위성은 사라진다. 근래의 시위양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경찰청이 국민들에게 불편을 주는도심집회 허가요건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움직임이다.우리는 시민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격·폭력시위를 사전예방하려는 도심집회의 허가요건을 강화할 필요성에 동감한다.그러나 도심집회 허가요건 강화도 여론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도 국민기본권이 침해받을 위험이 있는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되지 않도록 사전검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개정의 방향을 집회의 편의적 제한에 두기보다는 서민생업에 지장을 주거나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제도 마련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폭력·탈법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집회의 도심허가를제한하는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고 불허 이유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평화적 집회라도개최 시기와 규모면에서 시민불편의 소지가 있으면 도심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선진사회의 집회질서이다. 우리는 합법적 집회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한 국민의 정부 약속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본다.과격시위에도 끝까지 최루탄 사용을자제한 것도 선진집회질서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로 이해한다.공권력 개입을 최소화하고 정부의 약속이 좋은 결과를 맺기 위해서는 도심 대규모 집회는 피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깨우침의 회초리 ‘죽비’ 전시회

    ‘죽비거사’ 정중화(鄭中華·67)씨의 죽비작품전이 10∼16일 서울 종로구견지동 웅전갤러리에서 열린다. ‘죽비’란 절집에서 입선(入禪)과 방선(放禪)을 알릴 때, 또 예불 입정 참회 공양 청법을 할 때 사용되는 일종의 나무막대이다. 정씨는 여기다가 불보살의 명호나 각종 경구,고승들의 게송,연꽃 코끼리 등불교의 상징물을 새겨넣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 등을 하다가 퇴사한 정씨는 퇴사후 매주말 사찰을 순례하며 죽은 나무등걸 등을 모아 작은 호신진언이나 윷을 만들다가 3년여 전부터 본격적으로 죽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선 80여점의 갖가지 모양의 죽비를 비롯해 100여점의 장식용 옷걸이,윷과 승경도(절집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윷놀이 그림),목침,등긁이,지팡이,목탁채 등이 선보인다. 요즘도 매일 아침 예불을 마치고 나면 사포와 줄을 들고 잘 매만진 나무막대에 조심스럽게 갖가지 불경의 경구를 새긴다는 그는 “버려진 나무를 요긴하게 쓰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필생의 업이 되어 버렸다”며 “내가 만든 죽비들이 인연닿는 곳에 전달돼 혼탁한 세상을 깨우는 소리를 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02)734-3851. 朴燦
  • ‘주제가 있는 답사기’출간 바람

    ◎일본을 걷는다­일이 뺏어간 우리문화재/나의 문화유산3­4개 문화권에 서린 미학/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쓰여지지 않는 문화’ 조명 ‘주제’가 있는 답사기가 여름 독서계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최근 출간된 중국 선불교 답사기 ‘밥그릇이나 씻어라’‘한국의 묘지기행’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세권의 역사·문화답사기가 새로 나왔다.‘일본을 걷는다’(한양출판)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창작과비평사),‘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일본을 걷는다’는 건축학자인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의 도도부현을 직접 돌아다니며 쓴 역사체험기다.모두 3부로 1부는 일본이 탈취해간 우리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였던 자선당을 비롯,평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애련당,지금도 남아있는 관월당,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 총독이 탈취해간 박물관을 만들 정도로 많은 문화재들,조선을 사랑한 인사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수집해간 문화재로 가득한 일본 민예관 등을 소개한다.2·3부에서는 조선침략의 자취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현장들과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한이 서린 장소들을 찾아간다.게이오 의숙,도쿄대학,오이소(대기)의 통감도,백제인이 지은 오사카의 진자(신사),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기사 게오르그 데 라란데,일본의 기차역들,히비야(일비곡)공원,미츠비시 재벌의 상징 마루노 우치 빌딩,일본 국회의사당 등 일제침략의 현장을 낱낱이 살핀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는 서산 마애삼존불로부터 출발해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부여에서 끝난다.지난 93년 발간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1백만부이상 팔려나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강조했던 지은이는 2권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줬다.이번의 3권에서는 우리 문화유산의 미학을 이야기한다.이 책은 답사장소를 네개의 문화권으로 나눠 접근한다.부여 공주 익산 서울 등지에 남아있는 백제 문화유산의 미학,경주 불국사가 보여주는 통일신라의 ‘조화적 이상미’,안동문화권에 서려있는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미학,그리고 섬진강·지리산변의 옛 절집들에 녹아있는 산사의 미학 등을 다룬다.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은 그의 또다른 저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와 맥을 같이 하는 인문기행서.‘어디를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의 답사기를 지양했다는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려청자처럼 보란듯이 번듯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쓰여지지 않은 문화’‘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다.외면도의 당숲에서부터 수원 화성에 이르기까지의 여로가 담겼다.
  • 월정사 석탑 금동향합 천왕상(한국인의 얼굴:89)

    ◎마주 선 두쌍 동자티 못벗은 천진한 표정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장 큰 절은 월정사다.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자리잡은 이 절에는 신라의 석탑과는 아주 딴판을 한 고려시대 팔각구층석탑이 있다.고려시대에 접어들면 신라시대 네모꼴 탑이 다각형으로 바뀌었다.층수 역시 여러 층으로 높이 올라갔다.그래서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키는 자그마치 15.5m나 되었다. 그 생김새가 참으로 아름다운 석탑이다.층층이 갸름갸름하여 미끈한 여인을 연상시켰다.신라 석탑이 남성적이라면,고려 석탑은 여성적인 것이다.일찍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48호로 지정되었다.탑이 더욱 유명해지기까지는 그 안에서 나온 사리구 역할이 컸다.지난 1970년 10월 탑을 손질하기 위해 해체했을때 나온 사리구는 그만큼 수준 높은 공예품이었다.더구나 향을 담아두었던 금동향합은 뛰어난 세공미로 해서 번쩍 눈에 들었다. 향합은 위아래가 맞물린 납작한 상자형이다.상자 윗뚜껑과 밑바닥 거죽에는 정교하게 새긴 사천왕상이 들어있다.줄을 그어 새긴 선각기법의 도안으로 사천왕상을 그렸다.그러니까 무늬 효과를 낸 문양으로 사천왕상을 표현한 것이다.가로와 세로가 4.4㎝에 지나지 않는 윗뚜껑과 밑바닥 금동판에 각각 두 천왕상을 새겨 모두 네 천왕상을 담아냈다. 그 비좁은 공간을 차지한 천왕상들 표정은 다 살아있다.절집 사천왕문 문간에서 만난 다른 사천왕들처럼 눈을 부릅뜨지 않았다.그렇다고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지도 않은 이 금동향합의 사천왕들은 여리기 한량 없다.아이들이 즐겨 들여다 보는 순정만화속의 착한 소년쯤으로 여겨도 좋을만한 인상을 했다.천진스러운 동자상 티를 벗어나지 못한 금동향합의 천왕상들 표정은 천왕상 속마음을 그대로 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금동향합 윗뚜껑의 두 천왕상은 마주 쳐다보고 서있다.모두 갑옷을 입고 칼처럼 생긴 무기류를 손에 잡았으나 어떤 천왕상인지는 뚜렷이 구분하지 않았다.아주 좁은 공간에 새기느라 본보기로 만들어 놓은 의궤대로 천왕상을 그려내지 못한 모양이다.이들 천왕상은 쇠붙이 모형에 금동판을 대고 두드려서 모형에 나타난 그림 모양을 그대로 찍어낸 이른바 타출문으로 되어있다. 왼쪽 천왕상은 짐짓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검은 눈동자가 너무 또렷한 동그라미를 그려 놀란 인상이 되었다.천왕상은 작은 입속에 감추었던 총총한 이빨을 드러냈으나 그까짓 이빨쯤을 보고 무서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히려 상대방에 기가 질린 사천왕 자신이 먼저 겁을 먹고 소리를 칠 판이다.그렇듯 아직은 어려서 귀엽기만한 천왕이다.
  • 감은사 삼층탑 시리구 지국천왕(한국인의 얼굴:88)

    ◎갑옷무장 큰 칼 들고 악의없는 느긋한 웃음 초기불교에서 탑은 오늘날 불상처럼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아쇼카왕시대(BC 264∼232년)에 8만4천기의 탑을 인도전역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그러나 탑을 예배했다기보다는 사실은 탑속에 봉안한 부처의 진신사리가 예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그러니까 부처를 형상화하지 않았던 무불상시대의 일이지만,불상이 조성되고 나서도 사리신앙은 면면히 이어내려왔다. 그 사리신앙은 사리를 넣는 사리기나 사리기를 담는 외함 등 사리구에 반영되었다.사리구는 최상의 재료와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낸 종교적 공예품이어서 사리장엄구)라고도 일컫는다.그래서 언제고 그 시대의 공예수준을 드러냈다. 통일신라 사리구 중에 명품 하나를 골라보면 AD682년에 세운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자리 서삼층석탑에서 나온 유물이 있다.보물 266호인 이 사리구는 지난 1966년 탑을 해체할 때 나왔다.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다.릴리프형식을 발려 외함 네면에 붙여놓은 사천왕상이 그것이다. 사천왕상 모두가 온전하지는 않다.불법을 지키기 위해 동쪽을 맡았다는 지국천왕과 서쪽을 책임진 광목천왕만이 본래 모습으로 남아있다.청동주물을 틀에 부어 만든 이들 사천왕상은 우리가 절집 입구 천왕문에서 흔히 만나는 덩치 큰 사천왕상들만큼 허풍스럽지 않았다. 지국천왕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칼을 왼손에 잡은 천왕은 육덕이 그런대로 좋은 얼굴에 느긋한 웃음을 가득 담았다.하도 느긋한 웃음이라서 악의 없는 심술패기 같은 구석도 보인다.더구나 웅크린 짐승 등허리를 밟고 「나 몰라라」하는 웃음을 짓지 않았는가.그러나 전적으로 심술을 부릴 지국천왕은 아니다.지국천왕은 열여섯 선신의 하나이니까,발에 밟힌 짐승에게 일시 벌을 내렸다가 언제인가는 죄업을 소멸시켜 줄 것이다. 그런 웃음을 짓느라 얼굴의 볼륨이 완만하게 살아났다.부리부리한 눈매를 치깔고 입을 꽉 다물었는데도 웃음을 짓느라 엄한 기운은 모두 빠져나갔다.알고보면 너그러운 웃음이다.서양으로 말하면 뮤즈라 할 음악의 신 건달파를 휘하에 두었다니,지국천왕의 심성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갑옷으로 무장한 지국천왕의 몸꼴 어디에선가 간다라미술의 체취가 우러나고 있다.그러나 얼굴 윤곽은 동양적이다.건장하고 잘 생긴 신라인이리라.
  • 오대산 상원사 범종 비천상(한국인의 얼굴:86)

    ◎천상에서 주악에 심취/신라여인의 아름다운 자태 우리 민족문화유산 가운데 종은 뛰어난 공예품의 하나다.주종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거니와 반드시 미적 감각이 뒤따랐다.종은 대체로 동종을 의미했다.그런데 동종의 큰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범종이 차지했다.예불용 법구사물중에 으뜸인 범종은 그 소리로 절집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렸다. 범종의 생명력은 소리에 있다.떨림으로 우는 울음과 울고 나서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소리가 매력이다.그러니까 서로 다른 두 파장의 진동이 겹칠때 일어나는 소리가 강약을 거듭하는 맥놀이를 따라잡을 종은 세계 어느 구석에도 없는 것이다.오죽하면 지옥중생도 구제할 수 있는 소리라 했겠는가.인간들 일백여덟가지 번뇌마저도 소멸시킨다고 했다.날 저문 산사에서 저녁 종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면 다 안다. 그 범종의 소리는 자태가 빼어난 몸통에서 울려나왔다.과연 공예품다운 범종의 조형미,거기에는 환상의 세계가 있다.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8세기 초반 통일신라시대 범종(국보 36호)이 그러했다.범종 몸통에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을 나는 천인을 돋을새김해 놓았다.이를 가리켜 주악비천상이라 했다.대단히 경쾌하면서도 아름답다. 천인은 머리에 보관을 써서 보살인 듯싶다.두 천인은 입으로 부는 악기 생과 손가락으로 줄을 타는 악기 공후를 연주하는 중이다.하늘을 날면서 주악에 심취한 나머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무아의 경지에 들지 않고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없다.동그란 얼굴에 그리 높지 않은 코가 작은 입과 오목조목 이웃했다.눈매와 눈썹이 뚜렷한데,눈두덩이 좀 소복하고 보면 동양의 미인을 그린 모양이다.신라의 여인일 것이다. 구름을 무릎으로 밟고 몸을 일으켜 세운 천인들의 자태는 육감적일 수 있다.무릎 세운 다리는 미끈하고,흘러내린 어깨 곡선이 가히 여성적이다.생을 연주하는 천인은 목에 치레걸이를 주렁주렁 매달았다.젖가슴이 드러날 법도 하나,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 고리가 살짝 감추어 주었다.엉덩이를 매듭지어 돌린 옷자락 끈이 다리 사이를 휘감고 돌아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범종에는 개원13년에 주성했다는 새김글씨가 들어있다.통일신라시대인 성덕왕 24년에 해당하는 AD 725년의 일이다.본래 경북 안동에 있었던 것을 무슨 연유에서인지,조선 예종때인 1469년 왕명에 따라 이 절로 옮겨왔다.
  • 전남 흥국사 독성탱화 나반존자(한국인의 얼굴:83)

    ◎홀로 수행전진… 신인의 풍모 불화는 전집을 장엄하게 꾸몄다.주로 본존부처를 모신 법당 전면에 그려 걸었다.그러니까 불상이 앉은 뒤쪽 벽이 불화가 걸리는 자리다.이를 후불탱화,또는 그냥 탱화라고도 부른다.요샛말로 하면 탱화는 신앙이 깃든 절집 필수의 인테리어용 그림이다.그러나 오늘날 절집에 전해내려 오는 작품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탱화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후불탱화는 고타마 싯다르타,곧 석가모니 부처의 영취산 설법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불·보살 탱화,여러 신상을 그린 신중탱화,조상숭배를 위한 영단탱화 등은 영산회상도에서 떨어져 나간 불교회화인 것이다.이는 신앙이 한 군데로만 쏠리지 않고 나누어지는 이른바 신앙분화 현상을 의미했다. 전남 여천시 중흥동 흥국사가 소장한 독성탱화는 비단바탕에 물감으로 그린 견본채색의 그림이다.그림에 대한 기록인 화기에 「동치12년계유8월26일」에 완성했다는 사실을 남겨놓았다.그러니까 1873년에 제작한 탱화다.그리고 탱화속의 주인공을 남무나반존자로 밝히고 시주자의 이름까지 적었다. 독성은 바로 나반존자다.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에서 혼자서 도를 닦아 깨달았다고 한다.스스로 깨달아 연각에 이른 것을 보면 나반존자는 퍽 지혜로웠던 모양이다.혼자서 늘상 살아온 수행의 삶을 대접해주느라 독성각을 따로 지어 독성탱화를 모시는 절도 있다.그러나 흥국사 독성탱화에는 보광전에 봉안하기 위해 탱화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흥국사 독성탱화의 나반존자는 나이가 들어 연로한 모습이다.그래도 깨끗하게 늙어 맑은 인상이 와닿는다.머리꼭지의 머리칼은 빠진지 오래이나,가장자리로 돌아간 백발마저 시원하게 밀어버렸다.그러지 않아도 숱 많은 흰눈썹이 나이 탓으로 마냥 웃자라 눈두덩을 덮었다.나반존자답게 지혜로워 보이는 눈은 아직도 총명을 잃지 않았다.날이 무디지 않은 코 밑으로 알맞게 자란 콧수염이 붉은 입술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책상다리로 결가부좌한 자세가 부드러워 보이는 나반존자.어딘가에서 선인의 풍모가 우러난다.홀로한 수행이 몸에 배어 그러려니도 해보지만,보면 볼수록 신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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