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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분벽화서 찾은 고구려 흥망성쇠

    고분벽화서 찾은 고구려 흥망성쇠

    고구려 벽화고분/전호태 지음/돌베개/448쪽/3만 5000원 쌍영총,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장천1호분, 개마총…. 많은 이들이 역사책에서 만났을 고구려 벽화고분들이다. 그런데 이 고분들에 대한 일반 인식은 이름과 존재의 알음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학계의 연구 진전도 그 일천함을 크게 넘지 못한다. 이 책에선 30년 넘게 고구려 벽화고분에 천착한 울산대 교수가 절박함을 토로해 눈에 띈다. ‘고분벽화는 종교·신앙의 세계를 담은 동시에 무덤 주인이 살던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그림’ 그 정의대로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세계관, 내세관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타임캡슐로 본다. 그리고 그 타임캡슐을 미술영역에 가두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벽화고분 10기의 양식 발전에 얹어 당대의 정세며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들춰 흥미롭다. 가장 도드라진 점은 대표 벽화고분들을 시기별, 지역별로 명쾌하게 구분 지은 것이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분으로 대표되는 4세기~5세기 초 무렵 생활풍속 중심의 초기 벽화들을 보자.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일상생활을 묘사한 듯한 화풍이 특징이다. 무덤 주인이 현재와 큰 차이 없는 세계에서 내세 삶을 꾸린다고 믿었던 경향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실제로 현세보다 내세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기 바랐던 때문인지 인물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기도 한다. 고구려 전성기랄 수 있는 5세기 중엽~후반기 수십 기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벽화고분은 불교와 전통신앙의 공존을 강하게 드러낸다. 안악2호분, 수산리벽화분, 쌍영총, 삼실총, 장천1호분이 그것들이다. 그 무덤들에선 불교의 여래(如來·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운 존재)가 주관하는 정토를 그린 그림과 함께 음양오행론에 바탕을 둔 사신도(四神圖)가 두드러진다. 당시 동아시아를 관류하던 보편적 문화요소와 고구려적 개성이 함께 묶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멸망 무렵인 7세기 전후의 후기 무덤 속 벽화들은 사신도 일색이다. ‘사신도 무덤’으로 불리는 개마총,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사신도들은 화려하지만 일관성과 방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수왕 서거 후 피지배층의 불만과 불안이 곳곳에서 피어났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현미경 들이대듯 구조, 양식의 변화상을 세밀하게 풀어 놓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분들에 스며 있는 개연성에 자연스럽게 눈뜨게 된다. 북에서 1949년·1957년 발굴한 안악3호분과 1976년 수습한 덕흥리벽화분은 대표적 사례이다. 무덤 주인공에 따라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서쪽으로 시안까지 이어지는 유주지역의 지배 여부를 가릴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안악3호분 한문 묵서명 속 ‘동수’라는 인물이 당시 전연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수와 같은 인물인지, 고구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덕흥리벽화분 묵서명 속의 유주자사 진이라는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중국 왕조 관료였는지 고구려 출신 대귀족이었는지도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정에 따라 고구려 영역이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1000년 넘게 잊혔던 문화유산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될 무렵 벽화 속 그림이 알려져 뒤늦게 관심을 끌게 됐고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2004년 북한·중국 소재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고구려 벽화고분을 중심 연구과제로 삼은 연구자는 국내외를 통틀어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고대의 특정시기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뛰어난 미술이자 건축물이 광범위한 지역에 이토록 많이 다채롭게 남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저자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여전히 기초 조사와 발굴보고 정리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유물들은 급속도로 훼손되어 가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우리’ 몸값 올려 해외투자 잡으려면 성과연봉제 절실

    ‘우리’ 몸값 올려 해외투자 잡으려면 성과연봉제 절실

    “해외 투자자들이 지원하는 많은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성과보상제도를 운용합니다. 우리가 민영화를 하려면 그들이 인정할 만한 시스템을 서둘러 갖춰야 합니다. 몸값 높여 해외투자자 모셔와야 하는 우리 입장에선 그래서 성과연봉제 수술이 다른 은행보다 더 절실합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보상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살아남기 위해 더 늦출 수 없어” 지난 29일 서울 중구 소공로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이사회. 한 이사가 민영화 진척 사항을 묻자 이광구 행장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격정적으로 답변을 쏟아냈다. 홍일화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이호근 연세대 경영학 교수, 김성용 성균관대 법학과 교수 등 사외이사와 이동건 우리은행 영업지원그룹장 등 사내이사들이 참석한 자리였다. 윤종규 KB국민은행장이 성과연봉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 적은 있지만 아예 도입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우리은행이 처음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은 금융 당국의 성과연봉제 도입 추진 방침에 맞서 오는 9월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그만큼 성과연봉제는 금융권의 ‘뜨거운 감자’다.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기업들은 이미 성과연봉제를 도입했지만 ‘민간 영역’인 시중은행들은 노조의 거센 반발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행장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은행의 ‘절박함’이 배어 있다. 민영화를 하려면 해외 투자자 유치가 절실하다. 이 행장은 “그러자면 투자자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데 인력 운용이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우리은행은 올 상반기 순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5.2%나 늘어나는 등 2분기 연속 어닝 서프라이즈(깜짝실적)를 기록했다. 부실여신 비율도 떨어졌다. 이 행장은 “수익성과 건전성은 (투자자 기준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고 남은 것은 효율적인 인력 운용인 만큼 다른 은행 눈치 볼 것 없이 먼저 성과연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핀테크 기업과 인터넷 전문은행 등 새로운 상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성과보상 체계 구축은 늦출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이다. ●사외이사들 “노조 만나 설득” 질책도 사외이사들은 “그럼 노조를 직접 만나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 행장을 질책했다. 우리은행 노조는 성과연봉제와 관련해서는 그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성과연봉제는 개별 노조가 아닌 금융노조(산별노조)가 전국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 단체교섭할 사안이라는 이유에서다.이 행장은 이사들의 질책에 고개 숙이면서도 “우리는 다른 시중은행과 처지가 다르다는 점을 (우리은행) 노조가 인식해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예보 등 일부 금융 공기업처럼 시중은행도 금융노조 방침과 별개로 각자 사정에 맞는 성과연봉제를 합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관측도 내놓는다. 노사 합의 없이 이사회 의결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할 가능성도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한은행이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KEB하나은행이 1000명을 대거 승진시키는 등 은행마다 성과주의 도입 기반을 조성해 가는 분위기”라면서 “그렇더라도 성과연봉제 도입 방침을 대놓고 밝힌 시중은행장은 없었던 만큼 (이 행장의 언급은) 파장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건물주님, 우리 대화로 풉시다“ 상인들 협동조합·상인회 조성

    “건물주님, 우리 대화로 풉시다“ 상인들 협동조합·상인회 조성

    “법대로 하면 가로수길 상인들 다 쫓겨납니다. 이렇게 모이는 것도 건물주 눈치가 보이지만 똑같이 장사하는 처지에서 모른 척할 수 없죠.” 11일 오후 3시 가수 리쌍이 건물주인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상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성호(49) 신사가로수길문화협동조합 대표는 “건물주를 욕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임차·임대인이 대화로 해결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합은 다양한 식당의 주인 20여명이 모인 친목단체였지만 다음달 협동조합 신청을 내고 임대료 인상, 건물주 횡포 등에 맞설 조직으로 만들기로 했다. 지난 7일 리쌍 건물의 곱창집 ‘우장창창’에 대한 법원의 명도 집행이 이뤄졌지만 상인 및 시민단체의 반발로 4시간 30분 만에 중단됐다. 리쌍은 ‘우장창창’을 내보내고 직접 식당을 열 계획이었다. 리쌍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고, ‘우장창창’ 측은 건물주의 횡포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 곳곳에서 젠트리피케이션(구도심이 번성해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임대료를 대폭 올리고 상인을 쫓아내는 건물주에게 대항하기 위해 곳곳에서 상인협동조합·상인회 등이 생기고 있다. 상인들의 절박함과 건물주의 법적 재산권 행사 사이에서 뾰족한 사회적 해법이 나타나지 않자 이들이 직접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홍대 문화의 산실로 불리던 마포구 상수동 ‘이리카페’도 논란의 중심이다. 올 초 건물주가 바뀌면서 임대료 인상을 요구하자 상수상인회가 결성됐다. 상인회는 임대료 동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건물주는 ‘임대료 7.5% 인상에 2년 계약’을 제안했고, 상수상인회는 ‘임대료 1년 동결 뒤 7.5% 인상, 5년 계약’을 주장하고 있다. 상수상인회 김남균(44) 간사는 “원래 건물주와 친분을 쌓아 쫓겨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며 “건물주를 상대로 임대료를 공동 교섭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동료 상인들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을 공부하면서 건물주가 임대료를 연 9%만 올릴 수 있고, 5년간 임차권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다고 했다. 용산구 해방촌은 도시재생사업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3.3㎡당 2000만원이었던 상가건물 매매가가 2배로 치솟았다. 최근 상인 15명이 모여 상인회를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 상인은 “상인들이 만든 상권 때문에 임대료가 올라 쫓겨난다는 건 모순”이라며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주장했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건물주의 계약 해지 금지 기간을 현재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고, 임대료 인상 한도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2배로 제한하는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반면 건물주의 입장도 강경하다. 리쌍 건물 사건의 경우 서울중앙지법은 ‘임차인(우장창창)이 계약을 연장해 달라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과거 합의 내용을 볼 때 리쌍이 피해를 보았다’며 건물 명도소송에서 리쌍의 손을 들었다. 지난해 용산구 한남동 가수 싸이의 건물에서도 같은 갈등이 있었는데 싸이 측은 5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못했다고 항변한 바 있다. 종로구의 한 건물 주인은 “상인들의 세력화로 법적인 재산권도 행사하지 못할까 우려된다”며 “건물주라고 앉아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장남종 서울연구원 도시재생연구센터장은 “상인회나 상인협동조합은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키고 건물주에 대한 대항력을 키운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아직 실험적인 움직임인 만큼 갈등을 조장하기보다 임차인의 권리를 공부하고 화합하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사진작가 김중만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사진작가 김중만

    김중만(62)과의 만남은 금요일인 지난 1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예정돼 있었다. 그 주 수요일부터 수영 박태환을 리우올림픽에 내보내자는 1인 시위를 국회 정문 앞에서 벌여 온 그가 일단은 그곳에서 보자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후에 쏟아진 폭우로 그는 철수를 해야 했고 결국 청담동 스튜디오로 장소가 변경됐다. 폐렴 증세가 있는데 비까지 흠뻑 맞은 그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좀 있으니 그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법원에서 박태환의 올림픽 출전 자격을 인정했다는 뉴스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이제 정말 사자도 보고 침팬지도 보고 하마랑 코뿔소도 보고 그러는 거예요?” 1970년 여름 어느 날 저녁 나는 만세를 불렀다. 끓어오르는 희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홍대부고 1학년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충남 한산에서 외과의원을 운영하셨는데, 가족들을 불러 앉혀 놓고 상상도 못했던 말씀을 하셨다. “정부에서 아프리카 봉사활동 파견 의사들을 모집하는데, 거기에 지원했다. 거기 가면 여기에서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나와 동생은 기뻐 날뛰기만 했지, 아버지의 입가에 흐르는 씁쓸한 미소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대접받는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안 되는 나라로 떠나갈 결심을 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번민의 산물이었을지는 나중에 좀더 철이 든 뒤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6·25 참전 군의관이셨다. 내가 휴전 이듬해 강원도 철원에서 2남1녀의 맏이로 태어난 건 그래서였다. 아버지는 군인들이 이 땅을 계속 통치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요즘 ‘헬조선’이라며 이민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46년 전에 그걸 몸소 실천에 옮기셨던 것이다. 그것도 가난과 모래폭풍이 지배하는 아프리카 오지에 가는 걸로 말이다. -아버지는 전역 후 당신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 군산 대신에 어머니의 고향인 한산에 정착해 의원을 차리셨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만 해도 우리 집이 양계장을 하는 줄 알았다. 아픈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닭을 가져왔고 아버지는 늘 그걸 웃으며 받아주셨다. 매일 닭 요리가 밥상 위에 올라왔는데, 그때 물리게 먹어서 지금도 닭을 안 좋아한다. -내가 아프리카행에 그토록 환호했던 것은 탐험 소설가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대니얼 디포의 고전 ‘로빈슨 크루소’를 주셨는데, 난생처음 밤을 새워 읽은 책이었다. 이후 내 머릿속에는 무인도나 정글 생활 같은 것들이 꽉 들어찼고, 중학생이 돼 서울로 올라와서는 틈만 나면 청계천 8가 헌책방 거리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중대 발표가 있고 보름 후 부모님과 우리 형제, 이렇게 네 식구가 탄 비행기가 서아프리카 오트볼타 상공에 도착했다. 오트볼타는 지금은 부르키나파소로 개명된 옛 프랑스 식민지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랜딩 기어를 내릴 즈음 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창밖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밀림이나 사자는커녕 아래로 온통 시뻘건 모래사막뿐이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사하라 남쪽에 위치한 오트볼타는 거대한 사막의 끝자락이었다. ‘아프리카면 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게다가 우리가 살 곳은 수도인 와가두구에서 버스로 20시간도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였다. 철판으로 벽을 세운 묘한 형태의 집에 방 두 칸과 나무침대가 전부였다.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시는 아버지가 야속했고, 할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은 여동생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그 길로 평생을 아프리카 사람으로 사셨다. 오트볼타에서 의료 활동을 마친 후에는 더 남쪽에 있는 보츠와나로 옮기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계셨다. “내 통장에 2000풀라(보츠와나의 화폐 단위)가 있는데, 그 정도면 괜찮겠냐.” 1999년의 어느 날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직감한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와 병 수발을 들고 있는 나에게 물으셨다. 그게 장남인 나에게 남겨 주시는 전 재산이란 얘기였다. 아버지의 표정은 대단했다. 2000풀라면 우리 돈으로 200만원 정도인데, 거의 200억원을 물려주시는 듯한 그 당당함이란. 얼마 후 돌아가셨을 때 당신이 남긴 거라곤 정말로 그 2000풀라와 양복 2벌, 청진기 3개, 모자 3개, 모터 달린 자전거 1대 그리고 ‘김정’이란 이름 두 글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유산이 그리고 이만큼 멋진 분이 또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나는 동생보다도 아프리카 생활을 못 견뎌했다. 일단 마을에 학교가 없어 답답했다. 불어를 익히는 것 말고는 나를 채워 줄 것이 없었다. 신물 나게 양배추 김치만 먹어야 하는 것도 싫었고, 독거미에 물려 사경을 헤맸던 일도 끔찍했다. 1971년 나는 아버지가 수소문한 끝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숄레로 보내져 고1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의 황금기가 열렸다. 사방이 포도밭이었는데, 모두가 와인을 만들어 먹고살았다. 학교건 기숙사건 와인이 넘쳐났다. 그리고 1500명 학생 중에 유일한 동양인인 나에 대한 남녀 학생들의 관심과 배려는 한이 없었다. 꿈결 같은 3년을 보냈다. -원래 꿈대로라면 문학을 전공해야 했는데, 그러기엔 수학 실력이 너무 달렸다. 수학 시험을 안 보고 갈 수 있는 대학 전공은 미술밖에 없었는데, 그건 자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으로 숱하게 상을 받은 나였다. 1974년 니스에 있는 국립응용미술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1년을 보내고 난 어느 날, 기숙사에서 사진을 취미로 하는 법대생 친구가 인화 작업을 도와 달라고 했다. 사진 한 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 처음으로 보게 됐다. 3~5분 만에 인화지에 그림이 새겨지는 건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내 그림은 석 달이 걸려도 완성이 될까 말까인데. “맞다 저거야. 내 성격엔 저게 딱이야.”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렸다. 잠자고 씻을 때를 빼고는 카메라를 품고 살았다. 풍경, 얼굴, 동물 등을 닥치는 대로 찍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몇 푼 손에 들어오면 무조건 필름 가게로 달려갔다. 늘 필름에 목이 말랐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누드도 찍었는데, 이는 내가 작가로서 초기에 명성을 얻게 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데뷔 시절 나의 주제가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대학 2학년 때 일찌감치 아들을 보았다. 아이의 엄마는 특수교육을 전공하던 한 살 어린 프랑스인 여자친구였다. 가장이 됐으니 생활비가 필요했고 필름값도 벌어야 했다. 돈을 아끼려고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아이를 몰래 돌보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주말이건 심야건 닥치는 대로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디스코텍에서 DJ도 했다. 점심때 식당 주방에 설거지를 하러 가면 늘 4~5m 높이 분량의 접시들이 쌓여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아프리카 의료 활동으로 받는 돈은 고작 석 달에 500달러였다. 멀리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사진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얼마 안 돼서 나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사진에 과감하게 미술적인 프레임을 접목한 게 먹혀들었다. 주어진 것을 찍는다는 생각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장소를 정하고 모델을 세웠다. “니스에 동양인이 한 명 있는데 사진을 잘 찍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를 찾는 곳이 늘어갔다.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 등 몇몇 중요한 상을 거머쥐고 나는 파리로 진출했다. 자연히 니스에서의 학업은 더이상 이어갈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는 유명작가들 밑에서 패션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당시는 세계적인 대가일수록 동양인 어시스턴트를 두는 게 유행이었다. 이게 나에게는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어떠한 다른 동양인 사진작가도 나만큼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다. -1977년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23세 때였다. 칸 미술제 참석을 위해 프랑스에 온 우리나라 화가들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 사진을 보더니 “한국에는 이런 사진이 없다”며 전시회를 열어 보라고 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인연으로 한국에 계속 머물게 됐다. 이듬해 배우 오수미(1950~1992)를 만났다.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고 혼자 살고 있던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름다움에 현기증을 느꼈다. 얼마 후 한국에 같이 머물고 있던 첫 번째 아내에게 “새로운 운명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아내는 별말 없이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녀는 지금도 니스에서 전공을 살려 정신지체아들을 돌보고 있다. 지금도 아내와 아들과는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그녀는 가히 천사다. 방학이면 해마다 인도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 나는 테레사 수녀님을 따서 그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른다. 지금도 우리들은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아들은 나와 같은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이 땅에서 두 번의 추방을 당했다. 1985년에는 프랑스 국적의 외국인이면서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1986년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정보당국에 붙들려가 일본과 미국행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 보내졌다. 두 번째 추방은 신상옥 감독이 북한을 탈출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걸 계기로 오수미와는 자연스레 결별을 하게 됐다. -1988년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됐다. 당시 나는 프랑스에서도 톱클래스에 있었다. 그런데 오기가 생겼다. 두 번이나 나를 추방한 이 나라에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해 당시 톱 모델이던 이인혜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995년 5월에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됐다. 검찰이 일부 마약사범의 진술에 의존해 나에게 대마초 흡연 혐의를 씌웠는데, 나는 이미 2년 전에 같은 혐의로 구속돼 55일 동안 구치소 생활을 했고, 이후로는 완전히 절연한 상태였다. 검찰은 소변 검사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자 13일간 나를 정신병원에 가뒀고, 이는 인권탄압 사례로 신문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어쨌거나 이 일로 나는 국립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강사에서 잘리고 아내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갔다. 1년을 아이와 둘이 살고 있으니 아내가 다시 찾아왔다. LA에서 3년 동안 패션사진, 상품 카탈로그 등을 찍으며 세 식구가 괜찮게 먹고살았다. 그런데 1997년 말 한국 외환위기의 파고가 멀리 LA까지 밀려왔다. 주된 고객이던 한국 기업들이 도산을 하거나 경영난에 빠지면서 일감이 뚝 끊겼다. 결국 월세 3000~4000달러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빈민들이 사는 300달러짜리 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꼬박 1년을 살면서 전당포를 세 번을 갔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500달러에 카메라를 잡히면 그날은 LA갈비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서 얻은 건 가족애였다. 극심한 가난 속에 우리 셋은 정말로 하나가 됐다. 너무도 소중한 가치였다. -“형, 처자식 고생 그만 시킬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형이 사진전 좀 열 수 있도록 주선해 줘.” 1999년 LA라디오 사장이던 가수 이장희에게 귀국을 고했다. 떠나기 전에 라디오코리아에서 내 작품들의 전시회를 열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사람들에 신세진 것들 좀 갚고 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부모님 계신 보츠와나를 거쳐 서울로 오는 티켓이었다. 그런데 카메라 장비며 책이며 옷가지 등 해서 짐이 250kg이나 됐다. 추가 화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수중에 남은 돈이 고작 400달러 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사진 5장을 별도의 휴대용 박스에 넣고 우리가 예매한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카운터를 찾아갔다. 책임자를 보자고 했다. 후덕해 보이는 여성이 나왔다. “저는 사진을 하는 예술가입니다. 짐이 좀 많은데, 추가 비용을 낼 형편은 안됩니다. 저의 작품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게 힘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는 내 사진을 한 장, 두 장 보더니 곧바로 ‘오케이’ 사인을 냈다. 이에 더해 우리 가족의 티켓을 이코노미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내가 절실할 때, 진실할 때 정성이 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진의 힘이란 걸 새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보츠와나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그의 30년 아프리카 여정을 기리는 뜻에서 카메라 장비를 챙겨 초원으로 나갔다. 요하네스버그, 세렝게티, 타랑기레 등의 동물들을 담아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에 돌아왔다. -막상 귀국을 하니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한 몸은 고사하고 아내와 아들이 머물 수 있는 집 한 칸이 없었다. 상업사진을 시작했다. 명함을 만들고 압구정동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패션, 영화포스터, 음반표지 등 닥치는 대로 작업을 했다. 3년을 일하니까 서울 전농동에 아파트 한 채를 살 돈이 모였다. 3년을 더 하니까 한 해에 15억원 정도가 손에 들어왔다. -‘이게 내가 추구하던 삶인가? 맹목적으로 일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먹고 살 만 해지니까 또 다른 생각에 발동이 걸렸다. 2006년 고비 사막으로 여행을 갔다. 보름 동안 50대, 60대의 김중만은 어때야 할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 상업사진 그만할게. 그래도 괜찮겠지?” 6년 동안 상업사진을 찍으면서 50억원 이상을 벌었는데 남은 건 거의 없었다. 빌딩 한 채 사 두라는 주위의 말들 무시한 채 어려운 나라에 학교 지어 주고, 카메라 장비 사고, 스튜디오 운영하고, 먹고 놀고 했더니 남은 게 없었다. -2008년 관광공사의 외주를 받은 것을 계기로 한국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한국의 이미지는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이미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느날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에 갔다. ‘600년 된 학교인데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있고, 옆에는 숲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600년 전에 이런 학교를 지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우리나라를 너무 피상적으로만 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이미지 촬영은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됐다. 무엇보다도 해외에서 호평이 이어졌다. ‘극단적으로 동양적인 본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극단적으로 서양적인 표현력을 갖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겸비한 이중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작가’ 등 평가들이 나왔다. -예술사진으로 다시 돌아와 시간이 흐르니 내 작품 가격이 2500만원, 5000만원, 7500만원 등으로 해가 다르게 뛰었다. 대부분 외국에서 구매하는데 3개월 전에 처음으로 작품 하나를 파리에서 1억원에 계약했다. 작품의 가격은 작가의 자존심이다. 5억원까지는 올려보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건 나의 철칙은 지키려 한다. 작품의 영역에서 만큼은 그 누구보다 순결해지자는 것이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사진작가 김중만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다. 10대 중반 아프리카를 거쳐 프랑스에 유학해 21세 때인 1975년 니스에서 개인전을 열고 데뷔했다. 1977년 ‘프랑스 오늘의 사진’에 역대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면서 주목받았다. 인물, 동물, 꽃, 풍경, 패션 등 다양한 주제에서 틀에 짜인 관습과 앵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 왔다. 현재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부터 상업 활동을 중단하고 예술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아프리카 어린이 지원과 캄보디아, 베트남 학교 건립 등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다. ▲1954년 강원 철원 출생 ▲한산초, 홍익중, 프랑스 숄레 고등학교, 니스 국립응용미술대 서양화과 중퇴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페스티벌 젊은 작가상(1977), 올해의 패션사진가상(2000),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2010),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2011) ▲ 작품집 ‘불새’, ‘인스턴트 커피’, ‘동물왕국’, ‘아프리카 여정’, ‘애프터 레인’, ‘네이키드 소울’, ‘오키드’ 등
  • 서울시의회 양준욱의원, 9대 후반기 의장 출마

    서울시의회 양준욱의원, 9대 후반기 의장 출마

    서울시의회 양준욱(3선, 강동3) 의원이 6월 14일 후보등록을 마치고 제9대 서울시의회 후반기 의장에 출마했다. 의장에 출마한 양준욱의원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하며, 지방자치를 훼손하려는 불손한 시도에 맞서, 선배들의 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숭고한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때라고 피력했다. 지방재정개편 저지를 위해 오늘로 9일째 광화문광장에서 무기한 단식을 진행 중인 이재명시장의 절박함과, 누리과정 싸움과정에서 느낀 지방분권과 교육자치의 험난한 과정들이 본질을 같이 하는 것으로, 지방자치를 위해 분명히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이야기 했다. 아울러, 서울시의회는 지방자치의 바로미터이며 척도이다. 친환경무상급식 싸움이 보편적복지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지방분권과 교육자치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에 서울시의회 의장은 지방자치를 위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뽑아야 함을 이야기 했다. 양준욱의원은 의장은 서울시의회의 얼굴이고, 시민들의 자존심이라며, 보편적복지가 새로운 가치기준이 된 친환경무상급식 싸움과정에서 8대의회의 전반기 부의장과 대표의원으로서 동료의원들의 신뢰를 받았던 능력, 지난 2년간 낮은 자세로 동료의원들과 함께 만든 서울시의회발전을 위한 정책, 그리고 30년 정치인생 동안 오직 시민을 위해 일 해왔던 청렴함과 도덕성으로 서울시의회를 위해 일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양준욱의원은 출마선언문에서 의장후보 공약으로 2가지 목표와 7가지 약속을 제시했다. 두 가지 목표는 의장으로서 “지방자치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는 시의회의 위상을 제고하고, 의원들의 재 등원을 위해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제대로 알리고 지원하는 것” 이고, 일곱가지 약속으로는〈지방자치 숙원과제인 정책보좌관제, 인사권독립 관철〉,〈꼭 필요한 지역예산 공평하게 분배〉,〈차기 지방선거시 현역의원의 공천 및 등원 지원〉, 〈지역 활동 시 의원의 위상을 강화하고 지역활동 지원〉, 〈민원관리팀과 공약이행팀으로 구성된 ‘공약이행전담科’신설〉, 〈ONE-STEP 통합네트워크 프로그램 도입으로 의원 간 소통 확대〉, 〈정책위원회 강화 및 공보실을 홍보담당관으로 개편〉의 공약이다. 양준욱의원은 “청렴하고 정의로운 의장, 동료의원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의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시민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는 의장. 의원들과 서울시민께 부끄럽지 않은 의장이 될 것임을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라도 출신 청년들 생존 위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 만들겠다

    전라도 출신 청년들 생존 위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 만들겠다

    “연봉 3600만원을 받는 제3지대 자동차 법인을 세워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 윤장현(67) 광주시장은 지난 7일 시장실에서 한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면서 “자동차 100만대 생산 도시는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고, 지난 4월 총선에서 여야가 모두 확인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의사 출신인 윤 시장은 군 복무 2년을 제외하고 광주에서 나서 광주에서 자란 토박이로 지난 30여년간 ‘시민운동’을 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의 적극적인 지지로 전략공천을 받아 행정가로 전환했다. 그러나 안철수 대표가 국민의당을 창당할 때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변화에 휘둘리기보다는 시민 생활을 꼼꼼히 챙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치인·관료 출신의 역대 민선 시장들과 달리 광주시청의 문턱을 낮추고 관행은 깼지만 행정이 더디고 가시적 성과가 부족하다는 일부의 평가는 돌파해 가야 할 과제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시민단체 활동하다 광주시장이 돼 보니 어떤 차이가 있나. -한국 사회는 그동안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지상목표로 전진했지만, 경제가 한없이 상승곡선을 탈 수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민생에 절실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게 됐다. 광주는 역사적 전환의 고비마다 의로운 일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편견에 휩싸이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정치·사회적 접근뿐 아니라 지역의 자구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지방정부로 중앙정부 못지않게 시민의 생명과 재산,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지난 총선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나. -광주를 포함한 호남은 늘 생존적 선택을 해 왔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걸 딛고 일어서려는 정치적 행위와 결정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선택의 대전제는 누가 광주의 ‘오월정신’이나 가치를 소중하게 인정해 주느냐가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지역의 미래와 민생문제를 책임져 주는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이번 총선도 그런 잣대가 적용됐을 거란 생각이다. →여소야대라는 결과가 나올지 모르고 총선 내내 ‘광주정신이 사라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먹물 좀 튄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밑바닥 민심의 차이가 컸다는 걸 확인한 선거였다. 광주시민들의 선택은 늘 웬만한 정치 분석가들도 놓치기 쉬운 그런 면이 있다. 정권교체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구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반영됐다고 본다. →지역의 주류 정당과 당적이 달라 불편하지 않나. -나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 아니다.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거나 주도하지 않겠다. 어느 정당에 소속돼 있든지 광주의 미래에 진정성 있게 응답할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겠다. →당적을 바꿀 가능성은. -‘시장은 살림하는 데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시장통의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재선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역 살림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오월대’로, ‘녹두대’로 광주 청년들 할 만큼 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현대사 속에서 광주의 젊은이들은 의롭게 싸웠고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그런데 가장 빈궁하게 살고 있다. 충장로와 금남로를 걷고 있는 저 아이들이 전라도 출신, 광주 출신으로 어떻게 생존해 나갈 수 있을지가 본질적인 문제이다. 호남이 기울어진 상태라면 한국 사회는 바로 갈 수가 없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이름이 광주형이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광주시장으로 지난 2년 동안 한 일은 무엇인가. -민선 6기를 시작해 보니 에너지 관련 기업들을 유치할 공단도 준비되지 않았다. 한국전력 등이 혁신도시로 해 내려오기로 했으니 민선 5기에서 이주 후속 조치를 마련했어야 했다. 중앙정부의 배려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구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정권 교체를 통해 예산을 많이 따오는 구조를 만드는 데 역량을 쏟기에는 시대가 너무 변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철강·조선·중화학 등 기존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를 먹여살렸던 모든 구조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느슨하게 정치적 상황 변화만 기대하며 관리형 모드로 일관할 수 없다. 미래의 먹을거리 문제는 정부의 정책 하나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만드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연봉 1억원대의 임금구조 속에서 어떤 제조업체도 어느 대기업도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다. 광주 노사정은 광주시민과 합의를 바탕으로 연봉 3600만~4000만원대의 일자리 모델을 만들고 있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등의 사례를 연구 중이다. 이를 토대로 최근 중국의 조이롱 자동차와도 2020년에 전기차 등 10만대 생산을 위해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1998년 기아차 부도났을 때도 자동차가 6만 8000대였는데 현재는 62만대 생산하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지만 광주의 노사정은 이를 포기했다. 노사 문제가 가장 안정된 제3지대 법인을 만들면 현대·기아차의 통 큰 결단과 투자를 기대한다. 미국과 일본처럼 제조업이 리턴해야 한다. →‘달빛동맹’을 맺은 대구는 지역적 특수성 덕분인지 국책 사업들을 많이 따가더라. -우리도 기획재정부 사무관들 쫓아다니면서 프로젝트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의 협력도 필요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운영 주체는 문화체육관광부이지만 우리 시가 직영하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전당이 위치한 동구 금남로와 충장로 등 옛 도심과 주변의 재래시장, 예술의 거리, 남구 양림동 근대역사문화권을 도심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방침이다. 아직은 관람객이 부족하다. 주말과 휴일 등에 문화전당 주변에서 프린지페스티벌을 정기적으로 펼친다. 코레일 등과 협의해 외지 관람객을 유치하고자 전당 관람객에게 교통비를 할인하는 내용의 ‘문화전당 투어’ 개발도 검토하고 있다. →유치 과정에서 말썽이 났던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준비는 잘되나. -유치 때 힘든 과정(정부 공문서 위조 사건 지칭)이 있었지만 정부와 국회가 이미 30여억원의 예산을 반영했다. 1200억원가량의 비용 가운데 정부에 600여억원의 지원을 요청했다. 광주는 전 세계 500개 도시 중 스포츠 영향력이 16위인 도시다. 하계 유니버시아 대회(U대회)를 치르고 월드컵 4강을 치른 덕분 같다. 지난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해 치른 U대회 시설을 활용해 저비용 고효율 대회를 치를 수 있다. 당시 대회에 2000억원의 예산을 줄여 모범사례가 아니었나. 국제수영연맹(FINA)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호남고속철(KTX)이 개통됐고 수서발 고속철도 올 연말 개통한다. -이용객이 늘면서 주변 교통혼잡으로 민원이 많이 발생했다. 광주의 관문인 송정역을 너무 작게 지어서 문제다. 이 일대의 역세권 개발이 절실해 송정역복합환승센터를 내년 중 착공한다. 코레일이 해당 부지를 민간사업자에게 최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는 환승센터와 주차장, 판매시설 등 문화복합센터가 들어선다. 광산구도 주변 일대의 전통시장을 단장하고 주차장도 확충한다. →2년 전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작가의 그림을 철거해 논란이 됐다.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시장이 표현의 자유를 제어해서는 안 되지만 광주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지 않도록 하려고 한 일이었다. 홍 작가는 중매까지 섰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 뒤로 만나지 못하고 있어 개인적인 아픔도 크다. →윤 시장에 대한 광주 시민의 평가와 만족도는. -만족도가 많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자체 분석됐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지난해 치러진 U대회도 성공적이었고 자동차 100만대 생산기지 조성과 에너지밸리 구축 사업 등도 시민의 호응을 얻고 있다. 소수자·약자 배려로 시의 비정규직 83%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비정규직 896명 중 743명이다. 서울의 스크린도어 비정규직 사망과 같은 일이 광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정리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수탉이 울면 안되니?” 유로 2016 출입 금지된 발타사르

    “수탉이 울면 안되니?” 유로 2016 출입 금지된 발타사르

     20년 가까이 프랑스 축구의 마스코트로 비공식적으로 활동해온 수탉 발타사르(Balthazar)가 정작 자국에서 오는 10일 막을 올리는 유럽축구선수권(유로) 2016 경기장에 발을 못 붙이게 됐다.    4일 영국 BBC와 주간 선데일리에 따르면 발타사르의 주인인 골수 축구팬 클레망 토마스제프스키(68)는 최근 안전 상의 이유로 이 수탉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유럽축구연맹(UEFA)으로부터 받았다. UEFA는 경호 책임자들이 어떤 동물도 대회 경기장에 입장시킬 수 없다는 엄격한 안전 대책을 수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서한을 통해 “당신 수탉이 경기장에 출현하면 경호팀과의 관계에서 당신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건 점잖은 표현이고, 선데일리에 따르면 “동물 입장 불허 방침을 어겼을 때는 당신을 경기장에서 내쫓겠다“는 노골적인 위협도 담겨 있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토마스제프스키는 1982년 이후 220차례 A매치를 관전했는데 자국 대표팀이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우승하면서 발타사르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원래 로마인과 프랑크인들이 프랑스인의 뿌리인 고대 갈리아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갈리아의 수탉’이라고 했는데 현대에 들어와 수탉이 국가의 상징으로 적합한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2002년 월드컵부터 프랑스 대표팀 유니폼에 1998년 대회 우승을 상징하는 별 하나 아래에 새겨질 정도로 여전히 국가의 상징으로 대접받고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동방박사 셋 중의 한 명 이름인 발타사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토마스제프스키의 수탉 이름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바뀌어왔다. 축구 경기 뿐만아니라 2007년 럭비월드컵 준경승에서 잉글랜드와 만났을 때 프랑스 대표팀 응원에 나섰다.   토마스제프스키는 “우리 닭은 프랑스축구의 레전드 중 하나인데도 경기장에 데려가지 못하게 됐다”고 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최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박물관 개관식에 24명의 축구계 유명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초대받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는데 이런 대우를 받는다고 정색을 했다. 그는 “내게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유로 대회일지 모른다”고 절박함도 드러냈다.    10일 파리 외곽 스타드 생드니에서 열리는 루마니아와의 개막전을 비롯해 프랑스가 결승에 올라갈 때까지 열릴 수 있는 모든 경기 입장권을 미리 사두었다고 밝힌 그는 수탉 없이는 경기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발타사르는 유로 2016이 열리는 내내 경기장에 있을 것”이라면서 “만약 그 녀석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 혼자 가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BBC 방송은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한 반면, 일간 선데일리는 그가 경호팀과의 충돌을 불사할 것이란 쪽으로 접근했다. 아울러 발타사르가 그동안 일부 경기장 출입이 금지됐고 호텔 등에서 꼭두새벽에 울어제껴 투숙객들의 잠을 설치게 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神·인간의 만남 승화시키는 1000년 축제… 강릉이 들썩인다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神·인간의 만남 승화시키는 1000년 축제… 강릉이 들썩인다

    ‘신과 인간의 만남’ 1000년 축제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13호)가 화려하게 막이 오른다. 음력 5월 5일을 전후한 이달 5~ 12일(양력) 8일간 강원 강릉 남대천 단오장 등 시내 곳곳에서 펼쳐진다. 백두대간 대관령에서 시작한 신(神)과의 교감이 강릉 단오장으로 이어져 신명 나는 한바탕 축제로 승화된다. 올 단오제는 작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열리지 못했던 아픔을 달래고자 더욱 다채롭고 풍성하게 마련됐다. 모두 12개 분야 75개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때도 열리며 1000년 동안 면면히 맥을 이어 온 단오제가 지난해 간단한 행사로 끝나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2005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가 더이상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도 있다. ‘단오와 몸짓’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단오제는 신을 향한 몸짓, 나와 당신을 위한 몸짓, 세상의 모든 몸짓으로 의미를 나누었다. ‘신을 향한 몸짓’은 산세가 험하고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는 강릉지역 주민이 예부터 신에게 정성껏 제례를 지내던 풍습이 단오제의 태동이라 보고 있다. 지금도 신주를 빚고, 단오굿을 펼치는 것은 신에게 나와 가족의 안녕을 비는 몸짓이다. ‘나와 당신을 위한 몸짓’은 농사를 끝내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오기 전 단오(수릿날)를 맞아 서로 한바탕 즐기며 또다시 힘을 얻는다는 의미가 있다. 어울림의 문화답게 신통대길 길놀이와 국내 유일의 무언 가면극인 관노가면극, 단오제 체험촌이 있다. ‘세상의 모든 몸짓’은 민속놀이 등으로 잊히는 전통을 만나고, 전국 최대 규모의 난장과 국내외 무형문화재 공연·전시를 통해 세상 모두가 하나가 되자는 취지다. 이렇듯 강릉단오제는 신과 인간의 교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오제의 시작이 되는 신주빚기부터 단오제의 마지막 행사인 송신제까지 이어지는 33일 동안의 모든 행사는 신과 인간의 한바탕 신명 나는 한판 놀이다. 산신제에 등장하는 대관령산신은 신라 김유신 장군을 모델로 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시절 대관령에서 무예를 닦은 것이 인연이 돼 강릉지역 주민들에게 ‘대관령 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고승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불법을 전수받고 나서 귀국해 강릉 구정면 굴산사지에 머물며 강원 영동지역의 불교중흥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모시고 있다.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성황사도 범일 국사와 사랑을 나누었던 정씨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런 신들을 사람들 세상으로 모셔와 축제로 승화한 것이 강릉단오제다. 단오제는 단오날 꼭 한 달 전에 신주빚기로 시작된다. 주민에게 십시일반 거둔 신성한 쌀을 갖고 지금의 강릉대도호부관아 칠사당에서 단오제보존회 제례부 회원들이 모여 단오제에 사용할 술을 담근다. 올해 단오제는 지난달 11일 이미 신주 빚기를 끝냈다. 이후 열흘 뒤 대관령 산신제와 함께 대관령국사성황제, 봉안제가 이뤄진다. 봉안제는 대관령국사성황을 모셔와 홍제동 국사여성황사와 합방하는 행사다. 이때 대관령국사성황은 대관령에 자생하는 단풍나무를 신목으로 정해 신목잡이가 베어 들고 국사여성황사까지 이동하게 된다. 모든 행사는 지난달 21일 있었다. 이렇게 모신 국사성황과 국사여성황사는 보통 보름 안팎의 합방을 끝내고 영신제를 시작으로 강릉 단오장 굿당으로 옮겨진다. 8일간의 굿판과 함께 본격 단오제가 시작되는 신호이다. 올해 단오제 영신제는 이달 7일 펼쳐진다. 영신제를 끝내고 국사성황신 부부의 위패와 신목을 굿당으로 모시는 영신행차는 강릉지역 시민들이 청사초롱(단오등)을 들고 행사에 함께 참석하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신을 맞이하려고 단오등을 들고 영신행차를 뒤따르는 강릉 주민들의 길놀이 퍼포먼스 ‘신통대길 길놀이’는 장관을 연출한다. 마을마다 보통 1년을 준비하며 참석해 한국 길놀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행사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강릉의 몸짓이라는 주제로 좀더 역동적이고 풍성하게 치를 예정이다. 굿당으로 모셔진 국사성황과 국사여성황사는 단오제가 끝날 때까지 유교식 제사인 조전제를 통해 아침마다 사람들의 알현을 받게 된다. 또 이 기간 굿과 관노가면극 등 다양한 볼거리가 펼쳐져 신과 인간들의 한판 어울림이 매일 펼쳐진다. 강릉단오제를 찾은 관광객들은 축제 기간 다양한 행사를 보고, 즐기고, 체험하고, 맛볼 수 있다. 신주빚기· 대관령산신제· 영신제· 조전제 등 지정문화재 행사를 비롯해 ‘단오의 몸짓 날개를 달다’를 주제로 펼쳐질 기획공연, 사물놀이· 관노가면극 등 중요무형문화제 공연이 알차게 선보이는 전통연희 한마당이 행사기간 내내 거방지게 열린다. 특히 ‘춤· 단오 그리고 신명’을 주제로 역동적이고 활기찬 강릉단오제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굿 위드어스’ 기획공연이 추천 볼거리다. 굿이 가진 여러 예술적 요소를 춤으로 재구성했다. 이번 단오제는 몸짓이라는 주제에 맞게 중요무형문화재 공연, 교류와 초청공연도 몸짓이나 춤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대부분 채워졌다. 청소년가요제 등 청소년어울림한마당, 중국 길림성· 몽골 튜브도· 프랑스 공연단의 해외 초청공연도 선보인다. 프랑스 가나 지역의 전통음악과 민속춤을 볼 수 있는 가나 페스티벌, 몽골의 전통음악 ‘흐미’를 선보이는 몽골 튜브도, 중국 지린성, 일본 지치부시 등의 전통공연을 비롯해 다문화 체험촌과 가요제 등 세계와 소통하는 강릉단오제를 선보인다. 단오체험 행사로는 수리취떡 맛보기, 단오신주 맛보기, 창포 머리감기, 관노탈 그리기, 단오 캐릭터 탁본하기, 단오부채 그리기, 단오차(茶)체험, 한복입기 체험, 단오 컬러링체험, 오륜주머니 체험, 신주교환, 관노탈 목걸이 만들기 등이 다채롭게 열려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한복 체험을 통해 우리 전통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줄 예정이다. 한복 입기 체험, 한복 사진 콘테스트, 신통대길 길놀이에 한복 입은 시민과 단체의 참여, 한복 풍류단의 한복 퍼레이드와 한복인 팸투어 등을 진행한다. 그네와 씨름 등 다채로운 전통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시민들이 행사에 참여하는 신주미 봉정행사, 신주빚기 체험행사, 단오 소원등(燈) 행사, 주민자치센터 발표회도 열린다. 특히 강릉단오제의 영원한 볼거리인 군웅 장수굿, 관노가면극, 신통대길 길놀이, 불꽃놀이, 강릉사투리경연대회도 인기 프로그램이다. 전주 세계소리축제, 정선 아리랑제, 인천 부평풍물대축제, 제주 탐라문화제 등 강릉단오제에서 또 다른 축제를 만날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송파산대놀이, 양주소놀이굿, 평택농악, 수영야류, 은율탈춤 등 국가무형문화재를 한곳에서 볼 수 있다. 임상술 강릉시 홍보계장은 “청소년에게 강릉 DNA를 심을 수 있는 단오 골든벨, 아세안 스쿨투어, 청소년가요제, 관노가면극 인형극, 한·중·일 세계시민교육 페스티벌 등 젊어진 강릉단오제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연정 강릉시 단오문화계장은 “강릉단오제에서 강릉의 전통문화와 생태환경, 관광산업의 창조적 연계를 찾아 2018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인 문화올림픽이 될 수 있도록 지역 문화예술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면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창조적 콘텐츠를 발굴해 세계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사설] 정규직 고용보호 완화 권고한 OECD

    프랑스 사회당을 이끄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최근 핵심 지지 세력인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대에도 노동개혁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의회의 표결을 거치지 않고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각료회의에서 직권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개정안은 기존의 주 35시간 근로제를 폐기하는 것은 물론 기업이 경영난에 처하면 근로자를 좀더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업의 경영 상황에 따라 근로자의 임금과 출산·결혼 휴가마저 줄일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고 한다. 좌파 정부가 정체성 훼손을 감수하면서도 노동개혁 법안을 강행 처리한 것은 고(高)실업 저(低)성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은 벽에 부딪혀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프랑스보다 좋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청년층의 체감실업률은 이미 24%를 넘어서 명목상 실업률의 두 배에 이르고, 실업자 역시 실제로는 명목상 실업자 52만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120만명을 뛰어넘었다. 생산 활동이 가능한 청년 4명 가운데 1명꼴로 사실상 직업이 없는 상태이니 경제 성장도 기대하기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엊그제 ‘2016년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7%에 그칠 것이라고 목표치를 수정했다. 지난해 11월 전망치 3.1%에서 0.4% 포인트나 하향 조정한 것이다. 내년 성장률 전망치도 3.6%에서 3.0%로 0.6% 포인트나 낮추었다. 그럼에도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의 노동개혁 법안은 악법”이라며 저지에 나선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야당인 국민의당도 보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은 민생 경제의 위기 국면이다. 청년 취업의 위기이자 성장 정체의 위기다. OECD는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치를 크게 낮추면서 “정규직 고용 보호를 완화하고 비정규직 보호를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이른바 ‘노동귀족’은 고용 세습까지 일삼는데도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OECD가 근로자는 물론 사용자에게도 일종의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사·정은 이번 기회에 노동 분야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경쟁력이 떨어진 제도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 “판결 늦춰라” “수사 서둘러” 法·檢 안 가리는 ‘전관 로비’

    정운호(51)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수사 및 재판 과정을 둘러싼 의혹들을 계기로 법원·검찰에 대한 전관 변호사들의 로비 실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보석 허가나 집행유예 로비 의혹뿐 아니라 재판 지연 및 증인 채택 등 다양한 목적을 노린 로비가 난무한다고 법조인들은 지적하고 있다. ●中企 오너 3년간 1심 선고 안 나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언뜻 단순해 보이는 재판 기간의 조정만으로도 피고인이나 변호사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이를테면 피고인이 이미 다른 범죄를 저질러 집행유예가 선고된 상태라면 판결이 늦춰질수록 유리하다. 집행유예 기간에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으면 집행유예의 효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정하는 건 거의 전적으로 재판부의 재량이다. 이런 이유로 전관 로비가 대표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가장 큰 분야는 ‘재판의 지연’이라고 법조계 인사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판사 출신 A변호사는 “최근 중소기업 오너가 집행유예 상태에서 다른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3년 가까이 1심 선고가 나지 않고 있다”며 “법원장 출신 전관 등이 낀 7명의 변호인단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의 B판사도 “집행유예의 실효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라 재판을 1~2개월이라도 연기하려고 피고인이 눈물로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법리에 밝은 전관 출신 변호사를 쓰면 변론의 질이 높아져 선고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증인 채택 때도 전관의 위력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서울 지역 C변호사는 “재판부는 보통 변호사가 증인 채택을 요청하면 깐깐하게 따지는 것은 물론 엉뚱한 사람을 부르면 ‘법 공부를 제대로 한 게 맞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전관이 요청하는 증인은 재판부가 큰 문제를 삼지 않고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수도권의 D검사도 “재판 기간이나 집행유예, 법정 구속, 증인 채택 등은 모두 최소한의 기준만 있을 뿐 사실상 재판부 재량으로 결정되는 구조”라며 “이런 점이 개선되지 않으면 전관에 기대는 풍조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檢 수사 과정에도 민원 무시 못 해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전관들의 입김은 큰 것으로 지적된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정 대표의 항소심 구형량을 1심보다 낮췄다. 보석 신청 땐 ‘사안에 맞게 처리해 달라’는 의견까지 냈다. 비수도권 지역의 E검사는 “수사를 ‘빨리 해 달라’, ‘늦게 해 달라’ 등등 전관들의 민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차장이나 검사장과 함께 일했던 변호사들은 검사에게 유독 당당하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의 F검사는 “전관들을 아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인사 때 인사부서에서 검사장 출신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하는 데다 완전히 아웃된 줄 알았던 분이 총장이나 장관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라며 “전화로 ‘잘 봐 달라’고 하면 아무래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의뢰인 절박함 파고드는 법조 브로커 전관의 위력이 여전하다 보니 정 대표 사건에 연루된 건설업자 이모씨와 같은 ‘법조 브로커’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판사 출신의 G변호사는 “브로커들은 검찰 방범위원이나 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판검사들과 다양한 자리를 함께한다”면서 “다급한 의뢰인들에게 접근해 ‘전화 한번 해 보겠다’며 거액의 뒷돈을 받곤 한다”고 귀띔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여·야·정 협의체 구성… 국정운영 큰 틀 변화 예고

    국정교과서 등 당위성 호소… 내각보다 靑 인적개편 가능성 박근혜 대통령은 26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정국 운영에 큰 틀에서의 변화를 예고했다. 사안에 따라 여·야·정 협의체를 만들어 정치권·정부 간 소통의 창구로 쓰겠다는 것과 3당 대표와의 만남을 정례화하는 일 등이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선거 패배에 대한 소회도 일부 내비쳤다. 모두 발언에서 “지나고 보니 아쉬운 점도 참 많이 있다”고 한 것이나, 세금 문제를 언급하다 “(세금 인하 불가를) 계속 얘기하다 지금까지 오고 말았지만…”이라고 한 대목 등이다. 그러나 당장 여야가 각을 세우는 현안들이 당장 합의에 이를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박 대통령은 대부분 현안에서 정부 방침이 어떤 이유에서 중요하고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언론의 협조를 구했다. 국정 교과서나 법인세 인하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통해 당위성을 호소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그렇게 애원하고 몇 년을 호소하고 하면 ‘그래 해 봐라. 그리고 책임져 봐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 해봐’ 그렇게 놓고서 나중에 안 되면 ‘하라고 도와줬는데도 안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잘못해서 욕을 먹는다면 한은 없겠다”면서 “그런데 손도 못 대보고 ‘내가 이러려고 하는 건 아닌데’ 하는 마음의 아픔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토로했다. 박 대통령은 곳곳에서 ‘시간’에 대한 절박함을 드러냈다. 특히 개각과 인사 문제에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경제적으로 할 일도 많고 무엇보다 북한이 5차 핵실험에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사출에 여러 가지 안보가 시시각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지금 변화해서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내각을 바꾼다 하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여권에서는 ‘여·야·정 협의체’와 ‘3당 대표 만남 정례화’ 등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협상의 틀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다. 여권의 한 인사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 협상 아니냐”면서 “이제 본격적인 정치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인적 개편도 필요에 따라 일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내각보다는 청와대가 그 대상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27일 총선후 첫 당정 일자리 창출 챙긴다

    새누리당이 오는 27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매머드급 당정협의를 여는 등 20대 총선 참패 이후 국정 주도권 되찾기에 나선다. 청년·여성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이날 당정은 4·13 총선 이전부터 잡혔던 일정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선거 참패 직후 야권에 기업 구조개혁 등 정책 이슈를 선점당하면서 정책 이니셔티브를 되찾아 올 계기라는 게 당 안팎의 관측이다. ●유일호 부총리 등 총출동 ‘매머드급’ 당정에는 정부 경제사령탑인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이준식 사회부총리,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당에서는 원유철 원내대표와 김정훈 정책위의장 등이 자리한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24일 “여야 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청년 일자리 창출 등 민생경제 법안들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한다’고 제1항에서 합의한 만큼, 야당도 정부·여당의 발목만 잡고 늘어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여당으로서는 그동안 중점 추진해왔던 노동개혁 4개 법안 및 경제활성화법안들이 여소야대 정국으로 뒤바뀐 뒤 19대 국회 내 처리가 불투명해진 마당에, 국민 체감도가 높은 일자리 분야에서만큼은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는 절박함이 크다. ●노동개혁 불씨 살려 주도권 회복 포석 아울러 새누리당은 당정협의에서 야권에 ‘기업 구조조정은 물론 노동개혁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역제안을 통해 노동개혁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도 주력하겠다는 복안이다.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이날 통화에서 “기업 구조조정은 원래 정부·여당이 주도해왔었고, 야당이 이번에 호응한 데 대해 적극 환영한다”며 “노동개혁도 구조조정에서 빠질 수 없는 화두이므로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새누리당은 19대 국회 내 처리해야 할 우선법안으로 이날 여야 원내지도부가 합의한 규제프리존 특별법을 비롯해 노동개혁 4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사이버테러방지법, 자본시장법, 누리과정 예산편성 근거를 규정한 지방교육정책지원특별법, 행정규제기본법, 면세점 갱신기간 연장에 관한 개정안 등을 꼽고 있다. 정책위 관계자는 “총선 패배 직후 당정협의마저 자취를 감췄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여야정협의체’ 구성 등을 통해 19대 국회의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그린벨트 지정 이전 물류창고도 40%증축 허용

     개발제한구역 지정 당시부터 있던 공장을 물류창고로 용도변경한 경우도 건폐율 40%증축이 허용되고, 아파트 주차장에 카셰어링 주차 공간을 설치할 수 있게 된다.  국토교통부는 21일 서울 LW컨벤션센터에서 현장점검회의를 열고 국토교통 관련 12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9월부터는 그린벨트 지정 이전에 지어진 공장을 물류시설로 용도변경했더라도 건폐율을 40% 늘리도록 허용했다. 지금은 그린벨트 지정 당시 공장에 대해서만 건폐율을 40%늘려 증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공동주택 주차장을 영리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한 규정도 고쳐 입주민이 동의하면 카셰어링 사업자의 공유차량 주차를 허용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입주민 동의비율, 주차대수, 위치, 이용자 범위 등을 정한 주택법시행령을 8월까지 개정할 방침이다.  농림수산업용 시설에는 조경설치 면적을 면제하고, 산업단지 입주기업이 전기공급시설을 매설할 경우 도로점용료를 50% 깎아줘 공공기관 점용료 수준으로 맞추기로 했다.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 구역을 모든 저층주거지역 및 재개발사업 해제 예정지역으로 확대, 서울 구로·영등포구 일대 준공업지역 노후주택 밀집지역 주거환경개선사업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현재 3m까지만 허용된 물류창고 돌출 차양 길이를 6m까지 인정해주고, 피난·화재 예방 차원에서 인접대지경계선을 6m까지 떼어 짓도록 하는 공지기준을 주변 상황에 맞춰 완화하기로 했다.  확장형발코니 외부에 단열재를 시공한 경우 건축 면적 산정을 기존 건축물 외벽을 기준으로 삼도록 했다. 지금은 확장 발코니에 외부 단열재를 사용하면 발코니 부분부터 건축면적으로 산정, 에너지절감 건축물을 짓는데 방해가 됐다.  공장 집단급식소내 카페 설치가 허용하고, 미착공 상태에서 경매로 소유권이 이전될 경우 소송을 거치지 않고도 기존 건축 허가를 취소할 수 있게 했다. 자연취락구역에 주차장·세차장 설치를 허용하고, 모든 건축물에 들어서는 장애인용 편의시설은 건축면적에서 빼주기로 했다.  강호인 장관은 “많은 공무원들이 현장 규제의 절박함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역지사지의 자세로 현장애로를 풀어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세종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美 공화 ‘뜨거운 감자’ 라이언 의장 “대선 불출마” 쐐기

    “나는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제발 나를 빼달라.” 미국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46) 하원의장이 기자회견까지 열고 대선 출마 가능성을 다시 한번 일축했다. 공화당 지도부가 경선 선두주자인 부동산재벌 도널드 트럼프를 낙마시키고자 오는 7월 ‘중재 전당대회’를 열어 자신을 제3의 후보로 추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당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자 스스로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라이언 의장은 12일(현지시간) 워싱턴DC 당 전국위원회 본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대선 후보를 원하지도 않고 (중재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더라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우리 당의 후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려면 선거에 출마했어야 한다. 실제 경선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나는 빼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만약 대의원들이 (경선 후보들 대신) 나를 뽑는다면 경선에 참여한 유권자들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나는 고려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더는 얘기할 것도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라이언 의장의 중재 전당대회 추대설은 공화당 주류의 절박함이 반영된 것이다. 당 주류는 ‘아웃사이더’ 트럼프와 경선 2위인 테드 크루즈 텍사스 상원의원 둘 다 선호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두 명 모두 최종 후보가 되는 데 필요한 대의원 수인 1237명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재 전당대회를 열어 라이언 의장 등을 추대할 것이라는 설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미 언론은 라이언 의장이 거듭 불출마를 밝힌 것에 대해 “공화당 규정상 최종 후보는 최소 8개 주 경선에서 대의원 과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며 “이를 충족하는 후보는 트럼프나 크루즈 밖에 없는데 규정을 고쳐 자신이 후보로 추대될 경우 당이 분열돼 결국 민주당에 패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작용했다”고 해석했다. 이런 가운데 19일 열리는 뉴욕주 경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가 최대 43% 포인트 차로 1위를 고수, 대의원 95명의 대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트럼프 대세론이 다시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김성곤의 빅! 아이디어] 거버넌스 프리존을 두자

    [김성곤의 빅! 아이디어] 거버넌스 프리존을 두자

    1990년대 말 이란 사우스파섬에 있는 가스플랜트 건설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건설은 댐이나 다리, 도로, 아파트 건설쯤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테헤란과는 남쪽으로 멀리 있는 사우스파까지는 두바이에서 로컬 항공을 이용한 뒤 버스로 갈아타고 사막을 한참 달려서야 도착했다. 페르시아만 해저의 가스전은 건너편 카타르에서 뽑으면 카타르산, 이란에서 뽑으면 이란산이어서 주변국들이 경쟁적으로 파이프를 꽂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우리나라도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등이 현지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건설 현장이라기보다는 기계조립 현장이었다. 해저에서 뽑은 가스를 끌어와 기름과 나프타 등으로 정제하는 이 시설은 50m 안팎의 탱크와 굴뚝들, 이를 거미줄처럼 감싼 파이프로 이뤄진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건설이 아니라 큰 덩치의 기계네요.” 당시 현장소장에게 던진 우문이었다. 발전소는 가스나 정유 플랜트보다 정도가 더하다. 이런 현상은 요즘 들어서는 더 심화됐다. 전체 건설 공사에서 기계설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금액 기준으로 70%쯤 된다. 설비의 비중이 커지면서 중공업이 플랜트 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담수화 시설은 오히려 조선이 주력인 중공업 몫이었다. 가끔 해외에서 건설사가 담수화 공사를 놓고 현대중공업이나 두산중공업과 경쟁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플랜트가 산업의 영역인지 건설의 영역인지를 놓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원래 해외건설은 국토교통부(당시엔 건설교통부)의 소관으로 해외건설협회가 있었지만, 플랜트 비중이 커지면서 산업자원부 소관의 플랜트협회가 생기면서 소관 업무를 놓고 업계는 업계대로, 정부 부처는 부처대로 힘겨루기를 했다. 기술의 진보로 전통적인 의미의 업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으로 자동차는 반쯤 가전의 영역에 들어섰고, 위성항법장치(GPS) 등과 결합한 자율주행 자동차도 등장했다. 전기차 기술도 가속도가 붙으면서 내연기관 중심의 전통적인 자동차 업체와 전기차 업체가 경쟁하고 있다. 이세돌을 눌러 충격을 던져 준 인공지능(AI)도 우리가 새롭게 인식한 업종이다.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가 내놓은 세단형 전기차 모델3가 일주일 만에 32만 5000대의 주문을 받았단다. 2017년 말 인도 예정인데도 모델3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제로백(출발해서 시속 100㎞까지 걸리는 시간)이 6초에 불과하고, 한 번 충전으로 346㎞까지 달릴 수 있는 뛰어난 성능에다가 가격도 4000만원 안팎이어서 수요자들이 예약 보증금 1000달러를 주저없이 지르는 것이다. 이처럼 신기술들이 수출로 지탱하는 우리 산업을 위협하면서 기업과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바쁜 것은 정부다. 자율주행 관련 과를 만들고, AI 관련 지원책도 내놨다. AI와 관련해 향후 5년간 1조원을 투자하고,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KT, 네이버, 현대자동차 등이 30억원씩 투자하는 민간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모아 놓는다고 시너지가 생길까.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자동차, 정보기술(IT),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 5위 안에 드는 경쟁력을 갖췄다. 테슬라나 자율주행차를 선도하고 있는 구글 등에 비해 다소 늦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정부의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이들 신기술 분야는 정부가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봐 주면 어떨까. 이 영역만큼은 협의적 ‘규제 프리존’이 아니라 포괄적인 ‘거버넌스 프리존’으로 두면 어떨까. 그 안에서 삼성과 LG가 눈치 보지 않고 전기차에 뛰어들고, 현대차는 전기차 배터리 사업과 GPS나 이통사업에 투자를 하고, SK나 네이버도 자율주행차 시장에 뛰어들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구글·애플과 경쟁하는 것은 어떨까. 기술 개발의 절박함은 정부보다 기업이 더하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등이 정부의 지원 때문에 세계적 선도 기업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편집국 부국장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8) 김도연 포스텍 총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8) 김도연 포스텍 총장

    서울의 낮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올랐던 지난 4일, 덕수궁 근처의 식당에서 만난 김도연(64) 포스텍 총장은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전에는 진짜로 190㎝였는데 나이 먹더니 좀 줄어든 것 같다”며 유쾌하게 웃는 그에게 척박했던 국내 공학연구의 토양을 개척하고, 교수와 행정가의 길을 거쳐 한국을 대표하는 두뇌집단인 포스텍을 이끌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들어 봤다. -“헤이, 무슈(미스터) 김. 여기 신문 좀 봐봐. 너네 나라 얘기 맞지?” 얼마 전에도 그러더니 기숙사에 같이 있는 녀석이 또다시 아침부터 자존심을 긁었다. 기사 제목이 대략 ‘한국은 세계에서 아기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다. 버려진 한국 아기들의 해외 입양에 대한 특집기사였다. 그 프랑스인 학생이 아시아 후진국에서 온 유학생을 조롱할 목적으로 기사를 보여준 건지, 단순히 관심을 나타낸 것뿐인데 내 자격지심이 옹졸하게 받아들인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976~79년에 걸친 3년 반의 프랑스 유학생활 동안 나는 ‘해외에 나가면 자기 나라 국력만큼 대접받는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절감해야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결심했다. “열심히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서 너희들이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만들어 다시 돌아오마.”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석사를 마친 1976년 초,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해외 유학은 당초 나의 인생 로드맵에 존재하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면 돈을 벌고 싶었다. 어려서 나의 장래희망은 ‘과학자’도 ‘선생님’도 아닌, 오직 ‘부자’였다. 석사 졸업을 앞두고 박사과정에 진학할지, 취업을 할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카이스트 졸업생 중 프랑스로 유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프랑스 정부에서 특별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당시 대한항공이 자국산 에어버스 여객기를 구매해 준 데 대한 프랑스의 정부 차원의 보답이었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그때 나와 같은 케이스로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돈을 벌려고 해도 석사보다는 박사 학위를 받고 와야 기회가 많이 생기지 않겠나.” 당시 프랑스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는 달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미국의 달 착륙을 평가절하했던 프랑스였다.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나중에 한국에 수출한 초고속 열차 ‘TGV’, 세계 최고의 원자력 발전 기술 등이 다 프랑스의 대학과 연구실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6개월의 프랑스어 랭귀지 스쿨을 거쳐 그해 가을 미셰린타이어 공장으로 유명한 소도시 클레르몽페랑의 블레즈파스칼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산학협력 연구학생을 자원했기 때문에 유학 생활의 대부분을 파리에 있는 르노자동차 중앙연구소에서 보냈다. 산학협력 과정을 택했던 건 기술의 현장 응용에 관심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현지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생존 차원의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유학 시작 6개월 만에 한국에서 아내가 건너 왔는데, 프랑스 정부가 주는 장학금으로는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했다. 산학협력 연구학생을 하면 르노자동차에서 추가로 연구비와 생활비를 줬다. 자동차 생산공장에 딸린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다 보니 어떻게 특허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생산라인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실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평안도의 기독교 집안이었던 우리 가족은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나는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태어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는 반에서 중간 정도만 해라. 대신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라.”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왜 다른 집들처럼 공부하라고 얘기를 안 하시지?’ 어린 마음에 섭섭함까지 들 정도였는데, 결과적으로 그 말씀만큼은 참 잘 지켰다. 경기고 우리 교실 60명 중에 30등을 왔다 갔다 했다. 동창 중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며 천재 소리를 듣던 친구가 나노 분야 최고 전문가로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우리 학교의 임지순(65) 석좌교수다. -1974년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마치고 카이스트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 당시 카이스트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대단했다. 20대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인 병역 의무가 면제됐고, 석사 과정인데도 나라에서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4만 5000원)의 3분의1이나 되는 1만 5000원을 다달이 생활비로 보조해 줬다. 카이스트 교수들의 월급은 서울대 교수의 3배였고, 아파트도 나왔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카이스트 교수로 부임하면 대통령이 공항까지 관용차를 보내 줬을 정도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1979년 7월 돌아옴과 동시에 아주대 기계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그때 나이 27세. 아주대는 1971년 우리나라와 프랑스 정부의 한·불 기술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 이행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는데, 1977년 당시 김우중 대우실업 사장이 인수를 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을 교수로 많이 채용했다. -아주대에서 나는 ‘빡빡이 교수’로 불렸다. 병역은 면제받았지만 3주 군사훈련은 필수였다. 귀국하고 얼마 후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지금과 달리 그때는 박사 학위 소지자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박사님이 그 정도밖에 못하나.” 남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나를 훈련소 조교들이 얼마나 괴롭히던지. 훈련소를 나오고 얼마 되지 않은 그해 9월 1일 첫수업을 하러 들어왔을 때 학생들은 내가 교수라고 하자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다. 군인 머리를 한 멀대 같은 청년이 허여멀건 얼굴로 다니면 먼 발치에서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수 임용 2개월도 안 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태’가 일어났다. 이듬해 5월까지 대 학이 문을 닫았다. 계엄령 초기에는 교수들까지 완전히 통제했는데, 얼마 후 교수들은 연구실 출입이 허용됐다. 학교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연구실로 들어가는 식이었는데, 어느 날 버스에 올라온 계엄군이 출입증을 검사하더니 내 직위에 ‘조교수’로 돼 있는 걸 보고는 “야, 조교는 내려. 교수도 아닌 게 왜 여기에 타고 있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옆에 있는 다른 동료 교수가 ‘조교’가 아니라 ‘조교수’라고 말해 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1982년 서울대 재료공학과에서 학과 졸업생을 교수로 유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덕에 1969년 재료공학과 창립 이후 2회 입학생이었던 나는 서울대 교수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 이외 대학 이공계에서는 인문사회 계열처럼 그냥 강의만 이뤄졌다. 실험실이 갖춰진 대학이 거의 없었다. 절삭공구 하나 변변한 걸 찾기 힘들었다. 아주대에 있을 때도 학교에서 연구를 위한 실험은 거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견기업과 손잡고 기술 실용화 연구를 함께 했었다. 사실 아주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기술회사를 창업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꿈을 버렸다.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좋은 논문을 쓰는 공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비로소 하게 됐다. -당시 연구환경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는 상상도 못 한다. 요즘에야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이 국내에서 연간 5만건 넘게 나오지만 서울대에 부임하던 해에는 전체 100건이 안 됐다. 제대로 된 첫 논문은 일본 정부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1984년 일본이 전 세계 청년 학자들을 초청해 일본 문화를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나는 2개월 반 동안 일본무기재료연구소에 갔다. 거기서 현지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그때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울대로 자리를 옮겨 1986년에 처음 SCI급 논문을 낼 수 있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0년대, 대학은 그 중심에 있었다. 학생과 전투경찰이 아침에 캠퍼스에 같이 등교하던 시절이었다. 1987년 부교수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배 교수가 연구실에 찾아와 종잇장 하나를 꺼내 놓았다. “김 교수, 여기에 사인해. 나만 믿고 그냥 하면 돼.” 그 선배가 시키는 일이라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 흔쾌히 사인을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서울대 교수 4·13 호헌반대’ 성명이었다. 사인을 한 다음날 모든 신문 1면을 그 기사가 장식했고, 해당 교수들 이름이 모두 실명으로 게재됐다. -아침부터 연구실 전화가 불이 났다. 가족이며 친척, 친구들이 “큰일 난 거 아니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은 됐지만 특별히 겁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리면 잘리는 거지. 그런데 해직교수가 되고 나면 나는 뭘 먹고살아야 하지? 당초 꿈대로 돈이나 벌까?’ 그러나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 아래 우리 서명 교수들에게 특별한 불이익을 주는 조치 같은 것은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수시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나의 현실을 한탄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교내에 경찰이 들어와 제자들을 폭력적으로 체포해 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나는 30대 나약한 젊은 교수일 뿐이었다. 마음이 참담했고 학생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4·13 호헌반대 성명에 서명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의 괴로움은 한층 더 컸을 것이다. -조용히 연구나 하던 사람이 2005년 갑자기 동료 교수들의 추천으로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으로 뽑혔다. 1990년대 초에도 학생 담당 부학장이라는 보직을 맡기는 했는데 공대 학장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과학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2007년까지 공대 학장을 했었는데 졸지에 2008년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를 합친 교육과학기술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됐다. 6개월 정도 하다가 그만두고 울산대 총장으로 갔다. 그러다 다시 2011년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도 않지만 일이 주어지면 싫다고 거부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학생들에게 ‘과학’과 ‘기술’은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당연히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역할도 다르다. 과학자는 ‘새로운 지식과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고 엔지니어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테크닉을 만들어 돈을 벌게 해주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노벨상은 엔지니어들이 받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의 영역이다. 그런 개념도 없이 매년 10월 노벨상 시즌이 되면 기술을 전공한 공학자들에게 “왜 노벨상을 받는 연구를 못 하느냐”고 질타하는 사람들이 있다.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얘기다. -충북 감곡에서 주말농장을 하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과학기술은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하다. 씨를 뿌리고 움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빨리 채소나 과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씨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계속 흙을 뒤적이거나 이제 막 싹이 텄는데 키를 키우겠다고 잡아 늘이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노벨상 수상자가 당장 몇 년 안에 나오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공교육을 넘어서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북돋우지 못하는 교육을 시키는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과학기술 정책이나 교육시스템을 지금처럼 운영해도 문제 없구나’ 하는 착각을 낳을 수밖에 없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술이 적당히 센 편이다. ‘논어’의 ‘유주무량불급란’(唯酒無量不及亂)이란 말을 자주 인용한다. 내가 좇는 공자의 주도를 압축한 말이다. 공자의 주량은 거의 무한대였는데, 어지러운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나 역시 실제로 이른바 ‘필름’이 끊겨 본 기억은 없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블레즈파스칼대(클레르몽페랑 제1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료의 물성을 연구하는 재료공학 중 무기재료(세라믹) 공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발표한 논문이 200편이 넘는다. 세라믹은 전자재료, 내열재료뿐만 아니라 강철을 절단하는 재료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물질이다. 연구자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초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초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내 행정가로서 경험이 풍부하다. 다양한 이력 때문에 고든리서치 콘퍼런스를 포함해 세계적인 학술회의에 40회 이상 초청받아 강연자로 나섰다.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 시절에는 공대 학생들의 결혼식 주례를 도맡다시피 했다. ▲1952년 부산 출생 ▲아주대 기계공학과 교수 ▲서울대 재료공학과 교수·공과대학 학장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울산대 총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장관급)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포스텍 제7대 총장
  • 금융·이통사 제휴 활발… “고객 유치 넘어 생존 전략”

    은행 가세… 수익모델 개발 주목 금융사와 이동통신사 간 짝짓기가 한창이다. 과거 통신요금 납부의 ‘창구’와 ‘판매자’라는 소극적인 협력 관계를 넘어 전용 상품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공조하는 모습이다. 삼성카드는 SK텔레콤과 제휴를 맺고 휴대전화 구매 시 할부금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T 삼성카드 2 V2’를 출시했다고 9일 밝혔다. 해당 카드로 삼성 신형 갤럭시 S7(엣지 포함) 또는 이후 출시되는 신형 스마트폰 단말기를 구매하면 카드 실적에 따라 단말기 할부금 등을 할인받는 구조다. 전달 카드 결제액 따라 월 최대 2만원(2년간 48만원)의 단말기 할부금을 할인해준다. 현대카드도 이달 초 LG유플러스와 손잡고 쌓인 카드 포인트로 단말기 할부금 또는 이용요금을 납부할 수 있는 ‘LG유플러스-현대카드 M’ 카드를 출시했다. 현대카드 M포인트로도 단말기 구매 대금을 결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은행들도 이통사와의 협력에 분주하다. 지난 8일 KB국민은행은 LG유플러스와 신상품 개발 및 공동 마케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아직 구체적인 상품은 발표하지 않았지만 다음달쯤 휴대전화 구입 시 기기나 이용요금 할인 혜택을 담은 온·오프라인 상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SK텔레콤과 제휴한 신한은행은 통신요금을 자동이체하면 휴대전화 데이터를 추가로 제공하는 ‘신한 T 주거래 통장’과 ‘신한 T 주거래 적금’을 각각 출시했다. 양측 모두 생존을 위해 연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두 업권 모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반면 영업환경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는 절박함이 있다”면서 “한편으론 서로 상대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을 앞두고 은행에 이통사들과의 포괄적 연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면서 “당장의 이익을 넘어 한 방을 기대할 만한 미래 수익 모델을 누가 먼저 만드느냐가 향후 관전포인트”라고 말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없어질라” 사시 경쟁률 최고… 로스쿨 등록금 인하 “없던 일로”

    “없어질라” 사시 경쟁률 최고… 로스쿨 등록금 인하 “없던 일로”

    국회·정부 사시 존치 논의는 계속‘돈스쿨 논란’ 로스쿨 등록금 동결 전국 25곳 모두 당초 약속 어겨 계획대로라면 마지막이 될 제58회 사법시험 1차 시험이 23년 만에 최고 경쟁률을 보이며, 지난 27일 전국에서 치러졌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 도입에 따라 현행법대로라면 1963년 처음 시작된 사시는 1차 시험이 올해로, 2·3차 시험은 내년을 끝으로 반세기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사시 존치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시 존치를 주장하는 측과 로스쿨 제도로 법조인 양성 일원화를 주장하는 측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는 이와 관련해 범정부 협의체 형식의 자문위원회 구성을 완료하고, 사시 존치 등에 대한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등 5개 도시 11개 시험장에서 치러진 사시 1차 시험의 응시인원은 5453명(1차 시험 면제자 310명 미포함)으로 집계됐다. 올해 최종 합격인원이 100명선에 그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응시자 대비 최종 합격자 경쟁률은 54.5대1에 이른다. 이는 63대1을 기록한 1993년 이후 23년 만에 최고치다. 선발 인원 자체가 크게 줄어든데다 올해가 사시 1차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마지막 해라는 수험생들의 절박감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1963년 ‘사법시험령’ 제정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시는 그동안 이른바 ‘희망의 사다리’로 통했다. 학벌 등 차별 없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법조인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시가 ‘고시 낭인’을 양산한다는 지적과 법률서비스 시장 개선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사시 폐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7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로스쿨법)이 확정·공포됐고, 2017년 사시를 폐지(1차 시험 기준)하기로 정해졌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법무부의 입장 발표로 사시존치 논란이 불거지자 이를 둘러싼 논란이 법조계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로스쿨 학생들은 ‘수업 및 시험 거부’ 의사를 밝히며 격렬히 저항했다. 사시존치를 주장하는 측도 소송 등으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국회 법사위는 이날 대법원·법무부·교육부 3개 기관과 관련 단체 등이 포함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의에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사시 폐지를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사시의 대안으로 도입된 로스쿨에서는 고액 등록금에 따른 ‘돈스쿨’, ‘법조계 금수저’ 등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로스쿨들은 지난해 말 “등록금 인하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날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25개 로스쿨 모두 이번 학기 등록금을 내리지 않고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로스쿨협의회 측은 사립학교 로스쿨들이 다음 학기부터 등록금을 15% 인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협의회 관계자는 “10개 이상 사립 로스쿨들이 등록금을 15% 인하하기로 했고 인하 여력이 충분치 않은 일부 대학은 장학금을 더 늘려 균형을 맞출 것”이라며 “등록금을 인하하면 1년 등록금이 2000만원 이상인 로스쿨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두려움… 좌절감… 절박함… 세계의 마음을 움직인 한 컷

    두려움… 좌절감… 절박함… 세계의 마음을 움직인 한 컷

    유럽의 난민 위기가 세계 최고의 보도사진을 선정하는 제59회 월드프레스포토 콘테스트 주요 부문에서 수상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둔 월드프레스포토 재단은 지난해 촬영됐거나 매체에 게재된 보도사진을 심사해 18일 수상작을 발표했다. 피플 인 더 뉴스 부문 수상작으로는 슬로베니아 출신 매틱 조르만이 지난해 10월 7일 세르비아 프레세보의 한 난민캠프에서 찍은 난민 어린이 사진이 선정됐다. 아이들이 우비를 뒤집어쓴 채 두려움에 찬 눈으로 철창 밖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장기 프로젝트 부문에서는 마리 F 칼버트가 촬영한 미군 내 성폭행 문제를 고발한 주인공의 사진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제너럴 뉴스 부문 수상작도 난민 사진으로, 뉴욕타임스의 세르게이 포노마레프 기자는 지난해 9월 18일 크로아티아 국경마을 토바르니크에서 수도 자그레브로 가는 열차에 필사적으로 탑승하려는 난민의 모습을 담았다. 암스테르담 AP EAP 연합뉴스
  • [데스크 시각] 어떤 강남 스타일/안동환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어떤 강남 스타일/안동환 문화부 차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오전 찾은 서울 한남동의 문화예술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 2010년 5월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근처에 문을 연 이 카페는 요즘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의 최전선으로 여겨진다. 카페 앞과 내부에는 ‘STOP 싸이’라는 팻말이 여기저기 내걸려 있다. 커피 한 잔을 팔아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각종 전시와 음악 공연이 열렸던 테이크아웃드로잉은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는 건물주 싸이와 4년째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홍대에서 쫓겨난 예술가들과 인디 음악인들이 이곳을 최후의 망명지(亡命地)로 선택할 정도로 그 싸움은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격화되고 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은 2010년 일본인 건물주와 계약했다. 특약도 있었다. “임차인이 원하는 경우 해마다 계약을 연장한다.” 그러나 싸이가 2012년 2월 또 다른 중간 매입자로부터 이 건물을 사들인 후 퇴거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면서 특약은 휴지 조각이 됐다. 싸이 측은 법원이 강제집행 중지 명령을 내린 전후인 2015년 3~4월, 9~10월 4차례에 걸쳐 집행을 시도했다. 싸이 측이 테이크아웃드로잉 운영자를 상대로 제기한 형사 고발만 특수공무집행방해와 재물손괴 혐의 등 7건이나 된다. 그러나 싸움의 본질이 ‘내 재산을 내 맘대로 처리하겠다는데 세입자가 왜 재산권을 침해하느냐’는 월권 차원만은 아닌 듯하다. 이태원뿐 아니라 홍대, 신촌, 서촌, 연남동, 경리단길, 강남 가로수길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핫플레이스마다 번지는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 등이 쫓겨나는 현상)의 폭력성과 이에 맞선 소상인들의 저항, 보금자리를 잃고 변두리를 전전하는 예술가들의 절박함이 난마처럼 얽혀 있는 게 본질이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5년 만에 한강진역에서 이태원역까지의 거리 풍경은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국적인 음식점들과 동네 슈퍼, 세탁소 등 이태원 골목길을 지켜 온 터줏대감들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커피 전문점, 패션 브랜드들에 터전을 내주고 말았다. 싸이뿐 아니라 적지 않은 연예인과 대기업들이 이태원 건물들을 앞다퉈 사들였다. 월 40만원대였던 임대료는 4~5년 만에 수백만원으로 치솟았다. 이 지역의 3.3㎡당 매매가는 1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살아온 ‘실존적 공간’이 사라지는 대신 자본이 그 공간을 욕망하면서 황폐화시키는 모습이다.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마치 ‘부루마블 게임’처럼 보인다. 주사위를 굴려 은행으로부터 증서(땅 문서 혹은 대출)를 사들인 후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건물을 세워 올리느냐, 자본의 속도와 밀도 경쟁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치킨게임 말이다. 현실도 부루마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작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소외되고, 은행과 건물주의 ‘투기적 결합’만 도드라진다. 이 게임의 실체는 건물주들의 재산권만 앞세울 뿐 을(乙) 중의 을인 세입자들의 임차권은 존중받지 못하는 비정한 자본주의다. 싸이와 테이크아웃드로잉이 공생(共生)하며, 골목길을 이루는 식당 하나, 공간 하나가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는 건 불가능한 꿈일까. 싸이가 돈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면…. 한국을 대표하는 케이팝 가수로 ‘특별한 사랑’을 받아 온 만큼 스스로가 그 건물을 이태원을 대표하는 케이팝 공간과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만들면 어떨까. ‘오빤 강남 스타일’로, 쿨하게 말이다.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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