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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종 부리듯 언행 ‘실망’ 성적 수치심 당해 ‘절망’

    몸종 부리듯 언행 ‘실망’ 성적 수치심 당해 ‘절망’

    경기 과천시에서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는 진미희(54·여·가명)씨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람과 굴욕이라는 감정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경력 4년차의 베테랑 활동보조인인 그조차도 하루종일 장애인의 손발 역할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다. 진씨는 “거동이 힘든 장애인을 옆에서 부축하다 보면 어깨와 허리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보다 무리하게 집안일이나 심부름을 강요할 때나 보조인을 몸종 부리듯 대하는 언행을 접할 때 인격이 무시되는 느낌이 들어 힘들다”고 털어놨다. 장애인의 자립과 원활한 생활을 돕는 장애인 활동보조인들이 일상 생활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합리한 관행과 장애인 이용자와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다들 사회적 약자의 재활과 자립을 도울 수 있어 의욕적으로 뛰어들곤 하지만 장애인들의 무리한 요구와 중재 기관의 무시가 더해지면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활동보조인들이 적지않다. 우선 활동보조인을 파출부로 여기고 마구 부리는 일부 장애인들의 횡포가 빈번해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경력 10개월의 활동보조인 최모(47·여)씨는 “시간제로 하루 2명의 지체 장애인을 보조하고 있는데, 어떤 날은 집안일을 하다가 하루가 다 간다”면서 “식사와 위생관리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몫이지만, 장애인 가족의 밥상을 차리라거나 100포기가 넘는 김장김치를 담그는 일을 시키면 내가 가정부인지 활동보조인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전체 80%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 활동보조인의 경우 남성 장애인들의 무리한 요구와 신체 접촉 때문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사례도 종종 있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모(43·여)씨는 남성 지체장애인이 욕창 방지 연고를 바를 때마다 도를 넘는 신체 접촉을 요구해 결국 일을 접었다. 고미숙 전국활동보조인노조 사무국장은 2일 “활동보조인의 역할 한계와 이용자와 보조인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매뉴얼 등이 없어 직업 의무를 넘어서는 과도한 역할을 요구해도 대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지역의 사회복지센터마다 활동보조인과 장애인 이용자 간 매칭과 중개를 담당하는 코디네이터가 있지만 담당해야 할 인원이 워낙 많은 탓에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센터마다 1~2명의 코디네이터가 활동보조인 수십명의 임금 업무 등 잡다한 행정 절차를 처리하는 실정이다. 활동보조인노조 측은 보건복지부에 활동보조인의 고용 안정성과 처우 개선, 고충처리위원회 개설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수용될지 여부는 미지수다. 복지부 관계자는 “시급 인상과 4대보험 가입 등 활동보조인의 처우 개선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면서 “특히 이용자와 보조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활동보조인 입장에 서서 접근하겠다”고 밝혔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두창·마마·천연두…괴질·고레라·호열랄·콜레라…질병이 변했나? 시대가 변했지!

    두창·마마·천연두…괴질·고레라·호열랄·콜레라…질병이 변했나? 시대가 변했지!

    이광수는 소설 ‘흙’에서 “염병할 자식, 제 집에는 계집도 없고 딸자식도 없담”이라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은 당시 암울한 상황에 대해 “국병(國病)이 깊도다. 매국의 무리들이 일어나 외국 오랑캐들에게 아첨하여…”라며 울분을 토했다. 전염병을 뜻하는 염병(染病)은 요즘도 자주 쓰일 만큼 검질긴 생명력을 지닌 단어다. 돌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나라가 불안해진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 질병은 정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병의 개념, 변천사를 통해서도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짚어볼 수 있다. 병의 영향력은 개인은 물론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문집이나 실록, 신문과 잡지, 사전에 나타난 어휘, 서양의 의학과 위생학 텍스트, 민속학 보고서, 문학 작품 등의 기록물을 섭렵해 병의 개념을 추적했다. 또 병이 전통 한의학에서 서양의학의 범주로 편재되면서 우리나라는 위생, 검역 등 근대적인 개념이 도입됐지만 식민지배가 강화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콜레라,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1821년 처음 발병해 1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Cholea)는 한글학회가 해방 후 펴낸 큰사전을 보면 ‘고레라’ ‘코레라’ ‘호역’ ‘호열자’ 등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이 콜레라를 ‘고레라’로 음역하고 한자어로 ‘호열랄’(虎列剌)로 썼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호역(虎疫)이라고 했다. 호열랄이 ‘호열자’(虎列刺)가 된 것은 랄(剌)을 비슷한 글자인 자(刺)로 읽었기 때문이다. 콜레라는 처음에는 정체가 파악되지 않아 괴질(怪疾)이라고 불렀다. ‘변강쇠가’를 보면 “아 그놈의 신사년(1821년) 괴질, 괴질”이라는 대목이 나와 대역병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천연두는 두창(痘瘡)과 함께 마마라고 했다. 저자는 두신(痘神)이 만주어로 ‘마마’인 것으로 미루어 이 말은 병자호란 이후 생겨난 것 같다고 추측한다. ‘사람을 고치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다’라는 ‘의국’(醫國)과 ‘병든 나라를 고치자’는 ‘국병’(國病)의 개념은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인체의 병과 나라의 폐단에는 서로 상통하는 구조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병의국의 사상이 정점에 이른 때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이다. 저자는 다른 연구자들의 자료를 인용해 “독립신문, 황국신문에서도 국병담론이 적잖이 나왔지만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남달랐다”고 말한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천하의 명의를 모셔 국병의 위급함과 원인을 짚어내자는 ‘진찰국맥’(診察國脈·1908년 2월 14일자), 희망이라는 알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줄 테니 절망병을 깨자는 ‘희망보단’(希望保丹·1909년 4월 28일자) 등 1905년부터 1910년까지 74개의 기사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임태순 선임기자 stslim@seoul.co.kr
  • [케이블 하이라이트]

    ■몬스타(tvN·Mnet 밤 9시 50분) 설찬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세이 때문에 선우는 힘들어하고 설찬과 선우의 신경전은 계속된다. 칼라바 아이들은 올포원과의 파이널 대결을 위해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공연에 함께하지 못하는 설찬은 칼라바 친구들을 돕는다. 한편 칼라바 아이들의 사생활을 취재하던 변 PD는 세이에 관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더 임파서블(캐치온 밤 11시) 마리아와 헨리는 휴일을 맞아 세 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평화로운 리조트에서 다정한 한때를 보내던 크리스마스 다음 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쓰나미가 그들을 덮친다. 10분 만에 물살에 휩쓸려 그 속에서 행방을 모른 채 흩어지는 헨리와 마리아, 그리고 세 아들. 서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데…. ■현대사 산책 순간(국회방송 오전 9시 20분)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은 수많은 전쟁 미망인의 애달팠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엄청난 반향과 커다란 사회변화를 일으켰던 영화 ‘자유부인’을 살펴보고,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고통받았던 전쟁 미망인들을 돌아본다. 당시 사회의 여성상을 국회방송 ‘현대사 산책 순간’에서 만나 본다. ■마스터셰프 코리아 2(올리브 밤 9시 50분) 결승전에서 절대미각 김태형과 천재 최강록이 맞붙는다. 김태형은 얼마 전 일본에서 정식 데뷔한 음악 밴드 에덴의 보컬이자 리더로 절대미각 싱어라 불리며 이번 시즌 최대 복병으로 떠올랐다. 초반에는 깔끔한 외모에 노래 잘하는 가수로만 인식됐으나 중반 이후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며 우승까지 노린다. ■다이어트 마스터(스토리온 밤 11시) ‘하체 비만 10주 만에 각선미 찾기’를 주제로 심각한 하체 비만으로 고민 중인 일반인 도전자 2명을 찾는다. 스키니진과 짧은 치마를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인 두 도전자를 위해 헬스 트레이너, 요리 전문가, 비만클리닉 전문가, 한의사 등 국내 최고의 다이어트 전문가 10인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도전자들의 10주 체험기를 함께한다. ■날아라 호빵맨 극장판-구하라! 코코링과 기적의 별(애니맥스 오후 4시 30분) 먼 우주 신기별에서 코링이라는 친구가 호빵맨 마을을 찾아온다. 코코링은 신기별을 움직이는 신기 에너지가 바닥나 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다. 한편 호빵맨이 세균맨을 혼내 주고 있는 동안 코코링은 호빵맨을 보지 못하고, 크림판다를 영웅으로 오해해 그를 신기별로 데려간다.
  • [영화 프리즘]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영화 프리즘] 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1988년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반전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45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가 가난과 절망 속에 죽음을 맞는 과정을 담담하게 응시했다. 다카하타 감독은 전쟁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획을 넘어 인류 모두에게 얼마나 끔찍하고 무용한 것인지 증명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바람이 분다’는 ‘반딧물의 묘’의 잘못된 프리퀄(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속편)로 보인다. 실존 인물인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그린 ‘바람이 분다’는 ‘반딧물의 묘’에 이르기 직전인 1920~194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반딧물의 묘’가 전쟁의 참상을 고통스럽게 직시해 반성과 깨달음에 다다랐던 반면 ‘바람이 분다’는 전쟁을 외면하고 낭만은 부풀린다. 지로는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를 동경한 인물이다. 미쓰비시에 들어가 전투기 ‘제로센’의 설계를 맡는다. 간토대지진 당시 기차에서 만났던 나호코와 재회해 사랑에 빠진다. 나호코가 앓던 결핵이 악화되면서 지로는 사랑을 지키고 비행기 설계도 마쳐야 하는 상황이 된다. 스스로도 인정하듯 감독은 비행기와 군사 무기에 ‘오타쿠’ 수준의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다. 전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붉은 돼지’ 역시 비행기가 등장하는 전투 장면을 속도감 있게 그리면서도 주제 면에서는 반전의 메시지를 내포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한다.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되는 숙명”이라는 말에 주인공은 에둘러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전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로 시작하는 작품은 같은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보여준다. 지로가 존경하는 이탈리아의 비행기 설계사 카프로니는 지로의 꿈에 등장해 “아직도 바람이 불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 바람은 비행기를 향한 지로의 꿈과 일본의 실패한 제국주의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읽힌다. 감독은 작품 기획서에 “자신의 꿈에 충실하게, 정직하게 전진했던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살인 무기를 향한 그 꿈은 한국의 관객에게는 불시착한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 126분. 9월 개봉 예정. 등급 미정.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기고] 기념관 운영관리비 지원방식 개선을/윤주 매헌기념관 관장

    [기고] 기념관 운영관리비 지원방식 개선을/윤주 매헌기념관 관장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의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뿐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를 세웠다.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각오란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 부수려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글을 읽다 보면 당시 식민지 상태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큰 뜻을 세우고 대의(大義)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불사른 의사의 뜨거운 조국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민족의 영웅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1988년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국민의 성금만으로 서울 서초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을 건립했다. 현재 매헌기념관은 건립된 지 20여년이 지나 건물 벽 곳곳에 금이 가고 떨어져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심지어 비가 온 다음에는 기와가 자주 떨어져 안전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 기와가 자주 떨어지는 기념관 뒤쪽에 임시방편으로 시민의 접근을 금지하는 표시를 했으나 우기를 맞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급히 보수공사가 필요하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정부(국가보훈처)로부터 운영 관리비를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회원의 회비로는 보수공사는커녕 기념 사업을 추진하기에도 벅찬 실정이다. 정부는 기념관의 소유권이 국가(국가보훈처)에 있는 순국선열 기념관에만 운영 관리비를 지원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국민의 성금으로 건립해 지방자치단체(서울시)에 기부채납했기 때문에 기념관의 건물이 국가 소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가 실질적으로 자체 예산으로 건립해 준 순국선열 기념관은 그 건물이 국가 소유라는 이유로 운영 관리비를 지원해 주고, 국민이 건립한 윤봉길기념관은 소유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원을 하지 않는 현행 지원 방식은 부당하다고 생각된다. 순국선열기념사업회는 국가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보훈처는 국가 소유 건물을 관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 부처가 아니다. 당연히 현행 운영 관리비 지원 방식은 기념관의 건립 목적 및 규모, 순국선열의 공훈 등을 고려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선돼야 한다. 그동안 순국선열 기념관 운영 관리비 지원 방식을 바꾸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보훈처에서 관장하는 제도(편제)조차도 쉽게 바로잡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한 번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빠지곤 했다. 정부에 다시 한번 호소한다. 안전사고가 우려되고 있는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즉시 보수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정부는 현행 순국선열 기념관 운영 관리비 지원 방식을 합리적으로 바꾸길 바란다. 오늘도 비가 내리고 있다. 이번 비는 며칠간 이어지고 바람도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 떨어질 기와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 건반위의 별들, 스승 위한 멜로디 빛낸다

    건반위의 별들, 스승 위한 멜로디 빛낸다

    “‘빗방울 전주곡’ 어떠세요? 제가 따라갈게요. 선생님 먼저 치세요.” 여든을 훌쩍 넘긴 노스승과 이순(耳順)을 앞둔 제자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을 힘있게 두드리는 사제의 호흡이 전날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척척 맞아들어갔다. 두 사람의 시계는 순간 47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피아노를 막 알아가던 열 살 소년과 그에게 열정을 불어넣어준 30대 후반의 젊은 교수로 말이다. 스승에게 소년은 야단칠 일이 없는 영민한 제자였다. 소년에게 스승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1966~1968년 서울 약수동에서 앞뒤 집에 살며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어느덧 1·2세대 대표 피아니스트로 한국 피아노 역사를 떠받치고 있다. ‘피아노의 대부’ 정진우(85)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영호(57)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다. 정 교수는 ‘정진우 사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자들을 몰고 다닌다.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이대욱 한양대 교수, 강충모 줄리아드음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익주 서울대 교수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제자들의 선생님 사랑은 극진하다. 스승의 회갑·고희·팔순 음악회를 일일이 다 챙겼다. 매년 1월 8일 정 교수의 생일에는 어김없이 생신축하 겸 신년회 자리가 벌어진다. 그런 제자들이 이번에도 스승을 위해 뭉쳤다. 새달 17~24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여는 제2회 ‘피스(평화) 앤 피아노 페스티벌’에서 정진우 교수를 위한 ‘오마주 콘서트’를 마련한 것. 피아니스트 15명 등 20여명의 연주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정 교수에게 소감을 묻자 “미안하다”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고맙고 미안하죠. 다들 대학 교수들이고 바쁜 사람들인데 일부러 이런 행사까지 열어주니 미안할 따름이죠.” 스승의 무안함을 제자가 지우려 나섰다. “전원이 너무나 흔쾌히 응했는 걸요.”(김 교수) 오마주 콘서트에서는 정 교수의 인생 역정도 사진과 영상으로 펼쳐진다. 본디 그는 의학도였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1949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터지자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1951년 중공군이 포위한 강원도 성지봉 전투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동상으로 썩어버린 두 발을 결국 잃고 말았다. 발등까지 잘라낸 그는 절망을 딛고 1952년 전쟁 통에 부산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언론은 그런 그에게 ‘비운의 삶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피아니스트’라는 헤드라인을 붙여줬다. “‘아버지 하라는 대로 해서 발을 다쳤으니 이젠 정말 나 하고 싶은 거 하겠다’ 해서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졸업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당시 현제명 서울대 음대 학장이 빈까지 쫓아왔어요. 음대 교수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공항에 도착하니 음대 교수들이 다 마중을 나왔더라고.”(웃음) 그렇게 그는 피아노계의 큰 스승으로 후배 피아니스트들의 밑거름이 됐다. 반주에 그쳤던 피아노의 역할도 실내악 연주, 레퍼토리의 다양화 등으로 어엿한 악기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는 요즘도 제자들의 연주회가 있으면 지방까지 쫓아다닌다. 반세기를 건너 세계 무대에서 놀랍도록 성장한 국내 피아니스트들에게 ‘정진우’라는 이름 석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제자마다 추억이 다 다르겠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모든 제자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다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전주全州 부채 이야기- 초여름, 바람이 분다

    전주全州 부채 이야기- 초여름, 바람이 분다

    음력 5월5일, 단오端午다. 부채를 선물하던 풍속은 어디에서 왔을까? 1,000년 역사의 자존심을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고장. 바람을 일깨우는 자리, 전주에서 답을 찾았다. 전주 부채, 바람을 다스리다 전주의 수많은 자랑거리 중 부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예부터 전주 부채는 전국 최고로 평가받았다. 질 좋은 한지와 곧고 단단한 대나무, 전주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이 더해져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지금도 담양과 전주 일대의 대나무와 한지 산지를 중심으로 명맥을 잇는 장인들의 작품이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했던 조선시대 전라감영에는 선자청이라는 부채를 제작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었던 것은 부채가 전주의 특산물로 단오 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단오 선물은 부채, 동지 선물은 책력’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당시에는 단오가 가까워질 무렵에는 부채를 선물하고 동지가 가까워 오면 책력을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런 풍속은 조선말까지 이어져 해마다 공조에서 단오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은 그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주 부채는 그중 가장 으뜸으로 쳤다. 이후 일제강점기, 단오 부채를 공납하는 제도가 없어지면서 선자청에서 일하며 부채를 만들던 경공장과 선자청에 납품하던 외공장의 장인들은 지금의 전주 중앙동에 터를 잡게 된다. 중앙동에는 부채를 도매로 전국에 공급하는 중간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광복과 함께 외곽지역인 가재미골과 안골 등으로 장인들이 터를 옮겨 전주 부채는 장인들의 손끝에서 이어져 왔고 지금은 조충익, 김동식, 방화선 선자장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맥을 이어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일깨우는 선자장 부채의 ‘부’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고, ‘채’는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를 의미한다. 즉,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선자扇子’라고 하고 선자, 즉 부채를 만드는 장인을 ‘선자장扇子匠’이라 한다. 예부터 부채에 사용하는 대나무와 한지는 모두 음의 기운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선비들은 부채를 ‘첩’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선비들은 의관을 갖추고 합죽선을 들고서야 외출을 했다. 또 서민 여성들은 평평하고 둥근 형태의 단선을 사용했는데, 부들이나 왕골 같은 재료를 사용해 방석 대신 깔고 앉기도 하고 햇빛을 가리거나 불을 일으키고 곡식을 거르는 데도 사용했다. 부채는 크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선’과 자루가 달린 ‘단선’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방구부채’, ‘둥근부채’라고도 불리는 단선은 모양이나 용도에 따라 대표적인 태극선을 비롯해 공작선, 대륜선, 선녀선, 파초선, 학우선, 오엽선, 듸림선 등 다양하게 나뉜다. 단선은 부챗살이 손잡이 중심에서부터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모습 때문에 아침 햇살이 천지 만물을 일깨우는 형상을 지녔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또 부챗살이 자루 부분에 모아지기 때문에 윗부분은 얇고 자루 박는 부분은 튼튼해야 한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 시원한 바람을 불러오던 옛 부채에 비해 현대의 부채는 예술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다. 해서 단선은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부챗살을 구부려 미적 감각을 창출하기도 한다. 부채 하나를 만들기까지는 온갖 정성과 숙련된 손길이 필요하다. 다른 부채에 비해 공간의 면 분할과 강한 색상대비가 돋보이는 태극선의 경우 2년 이상 묵은 왕대나무를 겨울에 베어내 1mm 두께로 부챗살을 만들고, 이에 고급비단인 양단을 붙여 응달에서 말린다. 그리고 각종 모양으로 끝을 오려내 한지로 테두리를 치고, 소나무 재질로 손잡이를 끼우는 등 일곱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전주에서는 예술성 뛰어난 선자장들의 작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한옥마을 안에 자리한 전주 부채 문화관을 둘러보면 인위적인 바람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부채의 아름다움과, 느리고 비우는 철학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한국관광협회중앙회 02-757-7485 전주 부채에 바쳐 온 외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방화선 선자장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국제회의장 1층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10호 선자장 방화선 선생의 작업실이자 대중들과의 소통공간이다. 40년 외길로 전통 부채를 제작해 온 방화선 장인은 부친이자 스승인 고故 방춘근 선생(대한민국 명장,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으로부터 유년시절부터 단선기술을 익혀 가업을 계승했다. 방화선 장인의 작업은 전통의 멋을 충실히 재현하되 현대에 맞게 재조명해 격조 높고 고졸한 자태가 일품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산이 밀려드는 중에 전통의 맥을 이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최고의 재료로 더 다양한 부채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방화선 장인의 소망이다. 방화선 선생의 태극선은 전래방법으로 수작업에 의존해 전통 한지로 만들어 고유한 빛깔과 질감이 뛰어나다. 방화선 장인에게 부챗살은 곧 자신의 뼈다. 그 뼈 위로 햇볕과 세월, 바람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어우러져 부채로 탄생된다고 말한다. 방화선 선자장은 특히 올해 전주한옥마을 전통창작예술공간에 입주작가로 선정되면서 작품창작활동과 함께 1년간 기획전시와 아카데미운영, 부채 제작시연 등 대중들과 보다 다양한 소통을 다지고 있다. 이로써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과 시민들은 단선 부채의 단순함에 깃든 미학과 실용적 가치를 보다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부채 체험은 부채공예연구실과 창작예술공간 두 곳에서 모두 가능하니 사전에 문의하면 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방화선 부채공예연구실┃주소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1-1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국제회의장 1층 문의 063-277-7947 방화선 창작예술공간 | 주소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51-5 체험문의 010-6608-1790 선자장 방화선 쇼케이스 전시 | 5월24일부터 3개월간.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 하루 40명 비극… 한강변 뛰는 사람 늘수록 자살 인구 줄 수 있다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9년 연속 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에서는 시간당 1.6명, 1일 평균 40여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며, 자살자의 80%가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우울증 환자의 자살 시도가 뇌의 생물학적 변화와 연관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박영민 교수는 우울 정도가 비슷한 38명의 우울증 환자를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그룹(17명)과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그룹(21명)으로 나눠 뇌파분석법(LDAEP)으로 세로토닌 활성도를 측정했다. 뇌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은 평온감과 위로감 등 정서적 본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불안·우울·죄책감·자살 등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 결과,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던 환자의 세로토닌 활성도가 0.90이었던 반면 자살 시도자는 1.45에 그쳐 자살 시도자의 세로토닌 활성도가 50%가량 낮았다. 이 수치가 높을수록 세로토닌 저하 상태가 심하다. 또 비슷한 수준의 우울 상태라도 세로토닌 활성도가 낮으면 자살시도자에게서 절망감 점수는 1.6배(8.7점→13.7점), 자살사고 점수는 무려 2.8배(7.1점→19.8점)나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박영민 교수는 “이는 세로토닌 활성도가 저하된 사람이 자살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같은 수준의 우울증이라도 세로토닌 수치가 낮은 환자가 자살에 더 취약하므로 자살 시도를 반복하는 환자는 반드시 세로토닌과 관련된 약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특히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살에 대한 정신건강의학적 치료와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벼운 우울증의 경우 꾸준한 운동요법이 세로토닌 분비를 늘려 도움이 된다”면서 “운동을 하면 세로토닌의 모태가 되는 ‘BDNF’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기분장애학회(ISAD) 정동장애 학술지(Jouranl of Affective Disorders) 최근호에 게재됐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中공항서 장애인이 “억울하다” 자폭

    중국 베이징 서우두(首都)국제공항에서 사제 폭발물을 이용한 자폭 사건이 일어나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21일 신경보 등에 따르면 산둥(山東)성 허쩌(?澤)시 출신의 장애인 지중싱(冀中星·34)은 지난 20일 오후 6시 24분쯤 서우두공항 3터미널의 국제선 입국장 앞에서 직접 만든 폭발물을 터뜨려 부상했다. 휠체어에 탄 그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전단을 뿌리려다 공안이 제지하자 폭발물을 터뜨렸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폭발 당시 현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없어 다른 사상자는 없으며, 그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지는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한 내가 2005년 6월 28일 둥완(東莞)시에서 오토바이에 손님을 태우고 가다가 공안(경찰)의 불심검문을 받는 과정에서 공안들로부터 쇠파이프로 맞아 반신불수의 장애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호사 쉐차오후이(薛朝輝) 등을 통해 둥완시 공안당국에 33만 위안(약 6026만원)의 행정배상 신청서를 제출하는 한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고 남방도시보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가 24일 밤 전했다. 이에 따라 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베이징공항에서 시위를 하려다가 공안의 제지를 받자 절망감에 빠진 나머지 준비한 사제 폭발물을 터뜨렸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에서 항공 관련 폭발 위협이 잇따라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지난 5월 둥팡(東方)·선전(深?)·지샹(吉祥) 등 3개 항공사의 난징(南京)·시안(西安)·베이징발 항공편과 충칭(重慶)시 장베이(江北)·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바이윈(白雲) 등 2개 공항에 폭파 위협이 신고되는 등 지난해부터 중국 항공기 국내선에 최소 10건의 폭파 위협이 전달되면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상실·부재·망각…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어느 가난한 농부가 악마에게 아이를 빼앗긴다. 몇 년 뒤 아이를 잊지 못한 농부는 악마를 찾아가 결투를 요구한다. 악마는 농부에게 아이를 보여준다. 예상과 달리 아이는 악마의 정원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 악마는 제안한다. 아이를 데리고 가도 좋지만 아이는 두 번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없다. 아이가 가난한 삶을 물려 받게 될 거라 생각한 농부는 절망스럽게 울면서 악마를 떠난다. 농부는 악마에게 망각의 약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아버지가 어린 남매에게 들려주는 우화로 시작한다. 1952년, 아버지는 세 살 난 딸 파리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있는 부잣집에 입양시키러 떠날 참이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오빠 압둘라는 아버지를 따라 나선다. 파리는 카불에 남고 압둘라는 아버지를 따라 가난한 시골 마을로 돌아온다.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버지의 우화는 환영처럼 평생 남매의 삶을 따라다닌다.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호세이니는 ‘그리고 산이 울렸다’에서 남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전작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렀던 배경은 미국과 그리스, 프랑스로 폭을 넓혔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이야기꾼의 재능은 더욱 깊어졌다. 작품은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2년 가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3세대를 거치며 1949년과 2010년, 1974년을 오간다. 궁극적인 중심 인물은 파리와 압둘라이지만 9개 장의 주인공은 모두 다르다. 파리를 입양하는 진보적인 여성 시인 닐라, 닐라를 사랑하는 운전사 나비, 카불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그리스 의사 마르코스 등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작품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60년을 훑는다. 각 장은 독립적인 단편이라 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각각의 이야기를 엮어 가면서 호세이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밀과 상처가 있고, 세계의 뒷면은 고통과 연민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은 그것들을 지금 당장 이해하거나 아물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위로할 수는 있다는 낙관이다. 작품은 상실과 부재, 망각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9개 장 중 어떤 조각을 떼어놓아도 슬프고 아름답다. 호세이니는 인물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한다. 이야기의 부피가 커지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쉽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주말 영화]

    ■가케무샤(EBS 토요일 밤 11시) 16세기 중엽 일본의 전국시대.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은 견고하고 신중한 전략을 바탕으로 무적의 기마대를 앞세워 당대의 무장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덴쇼 원년 1573년, 50대에 접어든 신겐은 첫 상경전을 시도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다성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지만, 어이없이 저격을 당해 치명상을 입는다. 죽음을 예견한 신겐은 자신의 죽음을 적어도 3년간은 비밀로 하고, 그 기간에 영토 방비에만 힘쓰고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유언을 지키고자 측근들은 신겐의 가케무샤, 즉 ‘그림자 무사’를 내세우기로 한다. 좀도둑 출신의 사형수였던 가케무샤는 자신이 신겐의 대역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신겐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신겐의 풍모는 물론 위엄까지 드러낼 정도로 변모한다. ■케빈 코스트너의 미스터 브룩스(OBS 일요일 밤 10시 15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둔 성공한 사업가 미스터 브룩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엄지 지문 외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예술적인 살인으로 유명한 연쇄살인마 섬 프린트다. 어느 날, 미스터 브룩스가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살인현장이 이웃에 사는 사진작가에게 목격되고 살인현장을 포착한 사진작가 스미스는 미스터 브룩스를 협박한다. 스미스가 살인현장을 목격했다는 단서를 발견한 강력계 베테랑 여형사 앳우드는 스미스를 미끼로 미스터 브룩스의 존재를 추적해 오고, 앳우드 형사와 미스터 브룩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게임이 시작된다. ■독립영화관-굿바이 홈런(KBS1 토요일 밤 1시 5분) 고교야구 경기장에는 프로구단 입단의 문턱 앞에 선 선수들의 사활을 건 승부와 관중석 사이에 앉아 있는 학부모, 몇몇 동료의 열띤 응원소리가 어우러져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어느덧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인 이곳에서, 인생을 건 승부를 펼치는 선수들이 있다. 거듭된 패배 속에서 만년 꼴찌 타이틀을 거머쥔 원주고등학교 야구부. 한편 자조 섞인 푸념만 내뱉는 선수들의 의지를 고양시켜야 하는 감독과 코치 또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휩싸인 원주고 야구부는 기적 같은 끝내기 홈런을 꿈꾸며 마지막 시합에 도전하는데….
  •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김문이 만난사람] 야구 입문 50년…살아 있는 전설의 타자 백인천

    다 알지만 지구는 둥글다. 해와 달도 둥글다. 그리고 공도 둥글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모형은 둥근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원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수레바퀴를 이용해 힘의 균형, 힘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뉴턴의 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원은 힘의 균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도형으로 여긴다. 수박, 토마토, 사과 등 대부분의 맛있는 과일이 둥근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둥글기 때문에 이변도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더욱 그렇다. 야구 경기에서는 어떨까. 공도 둥글고 방망이도 둥글다. 파울도 많고 땅볼도 많다. 그러나 둘 다 제대로만 맞으면 큰 이변이 생긴다. 경기를 뒤집는 홈런이다. 까닭에 야구에 열광하는 팬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의 높아진 수준도 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추신수나 류현진 선수의 경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기면 짜릿하고 지면 안타까워한다. 에라, 비오는 날 공통분모나 다름없는 야구 얘기나 실컷 해 보자. 전설의 타자가 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4할 1푼 2리.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주인공은 백인천(70)씨다. 그가 올해로 야구에 입문한 지 50년이 됐다.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여전히 영원한 야구 선수처럼 살아간다. 야구장을 직접 찾기도 하고 집에서 TV를 시청하면서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후배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한다. 우리나라 홈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1960년 6월 제15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서울시 예선에서 경동고와 휘문고가 맞붙었다. 경동고의 선공으로 시작된 경기에서 4번 타자 겸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 선수는 3회 초 휘문고 투수 이명우의 볼을 받아쳐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터뜨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홈런은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가 터뜨린 첫 홈런이 됐다. 이후 백인천 선수는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쑹산(宋山) 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이 역시 쑹산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이었다. 주최 측은 홈런상으로 은 트로피를 수여했고 홈런공이 떨어진 지점에 기념패를 박아 백인천의 홈런을 기렸다. 이 대회 이후 백인천은 1963년 일본 프로야구계에 진출했고 곧바로 3할대를 유지하는 수위 타자가 됐다. ‘프로야구 일본 진출 1호’인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일본 프로야구 생활 18년간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40세 때에는 한국으로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어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 기록을 세웠고 아직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원년 최다 안타, 타격왕, 득점왕, 최고 출루율, 최고 장타율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전설의 타자를 만났다. 아파트 입구에서 동호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백씨와 마주쳤다. 동네 헬스클럽에서 막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중이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건강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제가 프로야구 생활을 한 지 벌써 50년이 됐네요. 현역 선수로 뛴 20년 동안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습니다. 이제는 건강해지는 프로선수가 되려고 합니다. 1996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의료원에 입원했거든요. 그때 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새삼 알았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절망 속에 허덕이다가 건강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야구에 미쳤듯 운동에 미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젠 보다시피 이렇게 다 좋아졌어요.” 그의 집 안에는 현역 시절 야구공이며 배트, 모자, 각종 트로피 등이 진열돼 있었다. 건강을 과시하듯 MBC청룡 시절 4할 타율을 기록했던 배트를 꺼내 왕년을 회상하면서 스윙 자세를 취한다. 과연 운동만으로 그의 건강이 회복됐을까. 물었더니 침과 운동 요법을 병행하면서 구운 소금을 꾸준히 섭취했단다. 1년 전에 다친 고관절도 다 붙었고 뇌경색으로 가물가물했던 기억력도 완전히 회복했다며 웃는다. 18년 가까이 건강 찾기에 공들인 끝에 지금은 골프도 치고 사그라졌던 근육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나이 70이지만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라며 팔뚝 근육을 자신 있게 드러내 보인다. 야구 얘기로 화제를 바꿨다.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발전했지만 섬세한 면에서 아직 부족하고 프로답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현역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공의 반발력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이 때문에 번트를 잘 안 하고 한 방 날리는 것을 자주 노린다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 출신 선수들에 대해서는? “외국에 나가면 길게 가는 선수가 있고 짧게 가는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는 밑바닥(마이너리그)부터 출발해 오래갈 수 있었고 추신수도 그렇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2군부터 시작했습니다. 밑바닥에서 고생한 경험 때문에 오래갈 수 있었지요.” 요즘 타율이 내려앉은 추신수 얘기를 꺼냈더니 “타율은 바뀌지만 타점과 홈런은 안 바뀐다”고 하면서 원 포인트 레슨을 한다. 추신수는 5월까지만 해도 타율이 3할 3푼 3리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2할대로 떨어졌다. 백씨는 한국야구 최고의 이론가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타격할 때 발사 자세에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추신수는 전형적인 어퍼스윙 타자이기 때문에 밑에서 위로 퍼 올리는 타격을 합니다. 이런 유형의 타자들은 장타력을 지녔지만 체력적 부담이 크게 됩니다. 시즌 초반 체력에 문제가 없을 땐 홈런과 타율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5월에는 3할대 타율과 7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수가 늘고 원정의 피로가 겹치면서 퍼 올리는 타격 자세는 부담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배트를 쥔 손이 떨어지는 것, 지나치게 넓은 보폭, 어깨가 먼저 열리는 자세에서는 결코 좋은 타격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살인적인 경기 스케줄을 잘 견뎌내야 살아남는다고 했다. “홈런보다 정확도를 높이는 쪽이 추신수에게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트를 쥔 손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몸쪽 공을 좀 더 공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현진 선수에 대해서는 어떤 지적이 나올까. “류현진도 원정 경험을 잘 견디는 것이 관건이다. 팬들은 이기길 바라지만 상대가 있다. 프로는 냉정하며 그에 따른 정신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야구 중독자가 돼야 한다. 심한 중독자가 돼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뛰고 있는 이대호 선수에 대해서는 “성격도 좋고 비교적 적응을 잘하고 있다. TV를 통해 경기를 쭉 지켜보고 있다”면서 일본 감독들이 대부분 후배인데 만나면 힘도 좋고 수준이 높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한국 야구의 수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본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야구 인생 50년을 회고한다. “처음 일본 갔을 때 일본 무대에서 통할 수 있을까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야구 중독자가 되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방망이에 무거운 쇠붙이를 붙이고 계속 스윙 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그걸 개발했는데 요즘에는 많은 후배 선수들이 그렇게 하더군요. 결국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었습니다. 후회 없는 야구 인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4할 타자는 미국에 4명이 있고, 일본에는 없다. 그만큼 그의 기록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타자와 투수의 대결에서 누가 유리할까 물었더니 “그건 모릅니다. 잘 맞은 공도 수비수가 잡아 버리면 아웃되는 것이 아니냐”며 웃는다. 그의 고향은 평북 철산이다. 아버지가 중국에 사업차 갔을 때 출생했고 3세 때까지 중국에 살다가 북한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해주를 통해 바닷길로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장충초등학교에 다니다 한국전쟁 때 피란을 갔고 졸업은 효제초등학교에서 했다. 중학교는 성동중학에 입학했다가 경동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친형의 권유로 전학을 했다. 그가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경동고에 진학하면서 야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광복 후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홈런을 친 선수가 됐다. “그때부터 야구에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질은 별로 없었어요. 스포츠는 반복 연습입니다. 집에서 타이어 매달고 연습하다 보니 팔에 힘이 생기더군요. 시간만 되면 공을 쳤죠. 나중에는 저절로 신 나더라구요.” 그는 1983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리고 2002년 롯데 감독을 끝으로 야구장을 떠났다. 지금은 건강 관리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앞으로 야구 아카데미를 만들어 야구팬, 그리고 야구 꿈나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1982년 당시 4할 1푼 2리를 기록했던 방망이를 들고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백인천은 누구 1943년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시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북한 철산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광복 이듬해 가족들과 함께 월남했다. 성동중학에 입학했으나 경동중학으로 전학하면서 야구 방망이를 잡게 됐다. 1960년 경동고 시절 서울운동장에서 개장 이후 첫 홈런을 쳤다. 1962년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쑹산(宋山)구장 개장 첫 홈런 타자가 됐다. 1963년 일본 프로야구 진출 1호 선수가 됐다. 일본에서 타격왕과 최다 2루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운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귀국해 MBC청룡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이때 기록한 4할 1푼 2리의 시즌 타율(80경기)은 현재까지 경신되지 않고 있다. 이후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역임했다. 1999년과 2006년에는 각각 SBS와 tvN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건강 관리에 힘쓰면서 한국 프로야구은퇴선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영민 타격상(1959년),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우수선수상(1962년), 일본 프로야구 수위 타자, 베스트나인(1975년),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전 출장(1967, 1970, 1972, 1979년), 한국 프로야구 최우수감독상(1990년) 등을 받았다.
  • 사상 초유 압수수색…박근혜-전두환의 ‘악연’

    사상 초유 압수수색…박근혜-전두환의 ‘악연’

    검찰이 16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을 집행하기 위해 자택의 재산 압류 및 시공사 등 관련 업체 17곳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압수수색이라는 초유의 상황인 만큼 박근혜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의 얽히고 설킨 인연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인다. 박 대통령도 최근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에 대해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고 할 만큼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번 압수수색을 두고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박 대통령의 이러한 의지가 담겼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의 사이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둘의 인연은 지난 1976년 전 전 대통령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면서 시작됐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11기 후배였고, 박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였다. 1979년 10·26 직후 전 전 대통령은 합동수사본부장을 지냈다. 박 대통령이 9일장을 치른 뒤 청와대를 나오면서 전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청와대 금고에서 발견한 6억원을 박 대통령에게 건넸다. 이 6억원은 지난해 대선에서 박 대통령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아무 문제 없으니까 배려 차원에서 해주겠다고 할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은 것”이라면서 “저는 자식도 없고 아무 가족도 없으니 나중에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악연’으로 변질됐다. 당시 5공화국이 박정희 정권을 폄하하는 정책들을 펼치면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확실히 선을 그었다. 박 대통령의 당시 일기들을 보면 권력의 무상함, 가깝고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아버지(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폄훼에 대한 불만 등이 집중적으로 나와있다. 특히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는 “세상 인심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도 있는 것”이라면서 “18년간 한 나라를 이끌어온 대통령으로서 사후에 정치적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권력에 줄을 서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과 추측, 비난 일색으로 매도되고 왜곡된다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토로했다. 박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 추도식도 6년동안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1989년 전두환 정권 말기, 박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를 맞이해 박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박정희기념사업회에 뛰어들며 은둔생활을 마치고 공개적으로 나서 폄하정책에 대한 반박, 박정희 정권에 대한 공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후 박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했고 2004년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대표 취임 직후 박 대통령은 연희동 자택을 찾아 전 전 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이 “야당 총수가 됐으니 (여당으로부터)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또 당내에서 그런 일이 있더라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당부도 건네고 “여성 대표가 돼 국민의 기대가 크다”는 등의 덕담도 전했다. 그 뒤에는 두 사람이 단독으로 만남을 가진 일은 한번도 없었다.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찾아 권양숙·이희호 여사를 만났고 전직 대통령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전 전 대통령은 찾지 않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설] 고엽제 피해 보상 미국정부가 적극 나서야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피해자 1만 6579명이 미국 제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베트남전이 막을 내린 것이 1973년이니 피해자들은 최소한 40년 이상의 세월을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고엽제 제조회사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 1999년이라 판결을 기다린 세월만 14년이다. 더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2006년 제조사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2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당시의 희망이 오히려 피해자들에게는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만 재판부가 피해자의 일부지만 고엽제 노출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은 의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상은 39명에 불과해 실망감을 털어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미국, 베트남의 고엽제 피해자들은 그동안 고엽제 제조회사와 미국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받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미국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대부분 법리에 가로막혀 기각되거나 패소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가 1994년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외국인은 전쟁 중 발생한 어떤 피해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자국 법률을 근거로 패소 판결했다. 베트남고엽제피해자협회가 2004년 미국 뉴욕주 연방법원에 낸 소송에서도 기각 논리는 “고엽제가 베트남에서 사용될 당시에는 국제법상 독극물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미국 법에 따라 패소하고, 우리 법원에서도 사실상 패소했으니 피해자들은 이제 하소연할 곳조차 사라진 셈이다. 판결과 관계없이, 젊은 시절 전장에서 피흘린 것도 모자라 평생을 질병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고엽제후유의증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로 이들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인식이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어떤 방식이든 미국 정부에 고엽제 피해자의 고통에 책임감을 갖도록 촉구해야 한다. 한·미동맹도 상대를 존중할 때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 정부의 성의를 기대한다.
  • [시론] 국정원 사건에 대한 헌법기관의 책무/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론] 국정원 사건에 대한 헌법기관의 책무/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가 위원회 구성 때문에 난항을 겪고 있다. 검찰 수사와 별개로 국회가 조사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 헌법적 임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정조사권은 국회가 입법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기 위해 필요하다. 검찰은 법 위반의 내용을 다뤄 직접관련자를 처벌하는 데 그친다.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국회의 몫이다. 헌법은 국가의 주요 사항을 반드시 국회가 법률로 정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국회가 입법조치를 필요로 하는 사태의 진상을 직접 규명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답을 낼 수 없다. 국정조사의 실시 자체는 여야 간에 다툴 문제가 아니다. 국회가 입법기관으로서 헌법적 책무를 다하는가의 문제이다. 다만, 제도 개혁의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는 여야 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국정원 개혁을 놓고 수사권을 폐지하자는 점에 합치하되, 국내 보안정보 업무 중에서 대북 업무를 남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여당의 태도는 직무유기다. 대통령과 입을 맞춘 듯이 ‘전 정부의 일’이라고 외면했다. 정권은 단속적이지만 국정은 연속적이라는 상식이 없었다. 대통령제에서 여당과 대통령의 관계는 가깝다. 그렇지만 여당이 청와대와 한통속이 된다면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여당이 국회의 입장에서 견제의 책무를 다할 때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민주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여당이 청와대에 충성을 다하면 제왕적 대통령제로 변질이 일어난다. 한편 국회가 국정원을 개혁하는 법률개정안을 만들어 내는 일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지금 상황에서 국정원 개혁은 정보권력 분립의 문제이다. 각종 정보기관의 업무가 비밀리에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국정조사의 범위는 국정원만이 아니라 경찰과 검찰, 군의 정보기구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국회는 이 기관들의 예산·업무 등에 대해 필요하다면 비공개로 조사하고, 결과에 따라 국가안보 차원의 비밀을 유지하면서 각 정보기관을 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국회가 국정조사 및 입법 활동을 하는 동안 대통령은 할 일이 따로 있다. 집행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국정원 개혁안을 제시하는 일이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헌법 제66조 제2항)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정원은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직속기관이며, 국정원의 조직은 국가정보원장이 대통령 승인을 받아 정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절망스럽다. ‘국정원 개악’의 지침이다. 국정원법은 국내 보안정보를 ‘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으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이 “대북정보 기능을 강화하고 사이버테러 등에 대응하고 경제안보를 지키는 데 전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테러와 사이버테러는 다른 개념이다. 경제안보로 표현한 기업의 비밀은 국가기밀과 다르다. 이는 법이 정한 국정원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국정원은 법을 어기고 정치 및 선거에 개입함으로써 본연의 의무를 위반하고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고려하면, ‘3·15부정선거의 사이버 버전’이라 부를 만한 중대한 사건이다. 대통령은 인사권자로서 관련자들에게 지휘감독의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정보기관은 비밀주의 속성 때문에 인권 또는 민주주의와 친할 수 없다. 최소한의 업무와 권한만을 주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헌법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의 공정성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헌법을 경시하는 국회와 대통령의 행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국가기관이 헌법적 책무를 저버린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때에는 유책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관련 기관은 그 무책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유권무책 무권유책’이라는 분노의 신조어를 만들어내려 하는가.
  • “절제의 미 찾는게 더 중요”… 이번엔 블랙코미디

    “절제의 미 찾는게 더 중요”… 이번엔 블랙코미디

    “전에는 급했어요. 어떻게든 임팩트를 주려고 했죠. 악역일 때는 더 그랬어요. 요새는 좀 달라졌어요. 아름다운 것이 추할 수 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보다는 절제의 미를 찾는 게 더 중요해졌죠.” 배우 김병옥(52)의 입에서 ‘부드럽다’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어쩐지 낯설었다.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 ‘신세계’ 같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에서는 물론 ‘야수와 미녀’나 ‘원더풀 라디오’ 등의 밝은 영화에서도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배역의 크기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TV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영화 ‘감시자들’에서도 김병옥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다. 11일 개봉하는 영화 ‘콩가네’에서 그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가 연기하는 장백호는 4년에 한 번씩 감옥을 들락거리는 전과자이자 가부장적인 아버지다. 영화는 국숫집을 차리기 위해 모은 500만원이 출소한 지 하루 만에 사라지자 아내와 세 자식을 이 잡듯이 추궁하는 장백호를 그린 블랙코미디다. 그는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해 변화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장백호는 애정에 목 마른 사람이죠. 전과자인 자신의 미래가 달라질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꿈은 가지고 있어요. 치밀한 듯해도 허점이 많은 모습이 재미있었죠.” 그는 “작은 영화지만 의기투합해 찍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했다. ‘콩가네’는 20여회차 만에 완성한 독립영화다. 2011년 촬영했지만 배급사를 잡지 못해 이제야 어렵게 개봉한 만큼 기쁨은 더욱 크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추웠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독립영화의 열악한 환경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는 배우든 감독이든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어렵게 완성하고 개봉한 영화지만 자신의 연기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만족을 얻기란 죽을 때까지 힘들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릇을 빚는 장인이든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든 숙련된 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연습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성실히 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데 아직도 산 넘어 산”이라고 덧붙였다. “연기는 끝까지 미완성으로 남는 실험 같아요. 조금 더 흐뭇하거나 용기를 얻을 때도 있지만 절망할 때도 많죠. 결국 스스로 다독거리고 타이르면서 갈 수밖에 없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면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꼽는다. 연극 무대에 먼저 섰던 그는 이 영화에서 이우진(유지태)의 경호실장 역으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이후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전도사로 출연하며 확고한 발판을 다졌다. 연기에서는 섬세하고 미묘한 결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는 여전히 강렬한 캐릭터에 끌린다. 맡고 싶은 배역을 묻자 ‘자토이치’(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맹인 무사와 ‘요짐보’(구로사와 아키라)의 떠돌이 무사, ‘유주얼 서스펙트’(브라이언 싱어)의 ‘절름발이’ 카이저 소제 같은 인물을 줄줄 읊는다. “주연이야 왜 안 하고 싶겠어요.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웃음) 30년 넘는 연기 경력이지만 생각대로 연기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그럴 때면 넋 나간 사람처럼 술 마시면서 혼자 떠들고, 커피 마시면서 떠들고, 그것도 안 되면 밤에 촛불을 켜놓고 가만히 있는다”고 했다. 자면서도, 목욕탕에 가서도 대사를 중얼거린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찾자. 할 수 있어.’ ‘느낌’이 올 때까지 대사를 외우고 머릿속으로 자기 최면을 건다. “재밌어서 이러냐고요? 재미라기보다는 고통을 즐기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왜 저렇게 힘든 일을 할까 싶겠지만 사실은 고통을 이기고 성취감을 느끼려는 게 아닐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자기 수양? 저한테 연기는 그런 것 같아요.”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세계서 가장 나이많은 97세 아빠 ‘아들 유괴’ 절망

    세계서 가장 나이많은 97세 아빠 ‘아들 유괴’ 절망

    100세를 얼마 앞두고 아빠가 된 ‘세계에서 가장 나이많은 아버지’가 최근 절망에 빠졌다. 보통 사람들은 증손자를 볼 나이에 첫 아이를 얻은 아빠는 인도 뉴델리 인근 하야나에 사는 올해 97세의 람지트 라가브. 평생 독신으로 살다 10여 년 전 결혼한 그는 지난 2010년 전세계 주요언론의 해외토픽을 장식했다. 당시 94세 나이에 부인 샤쿤타라(60)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기 때문. 그러나 2년 후인 지난해 10월 라가브는 두번째 아이도 출산하는 기염을 토하며 솟구치는 ‘정력’을 만천 하에 과시했다. 마치 회춘한 듯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리던 라가브와 부인은 그러나 지난 5월 초 장남 비크람지트(3)를 유괴당하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당시 아이가 열병이 나 도시 병원에 데리고 간 엄마가 치료를 마친 후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잠든 사이 누군가 아이를 납치해 간 것. 엄마 샤쿤타라는 “몸이 피곤해 15분 정도 깜빡 잠든 사이 누군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면서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주위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아이를 찾지 못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라가브는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를 찾았지만 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장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현지 경찰은 “사건 현장을 조사했지만 목격자 및 범인이 남긴 단서 조차 없다” 면서 “전국 경찰서에 사진을 배포해 아이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현지언론에 따르면 인도 내에서는 아이를 유괴해 팔아 넘기는 범죄가 횡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함께 살아낸 10대의 기억 속 그들의 특별했던 1990년대

    함께 살아낸 10대의 기억 속 그들의 특별했던 1990년대

    ‘김정일이 죽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011년 12월 19일 정오, 나는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역사적 사건은 예측할 수 없고 장대하고 극적이나 개인의 일상은 지극히 범상하고 단조롭다. ‘밥 한 공기와 그저께 끓인 감잣국, 멸치볶음’으로 식사를 하고, ‘세제 거품을 많이 내어 천천히 설거지를’ 하고, 출근을 위해 ‘도봉산행 7호선 전철’을 타는 것이 필부들의 삶이다. 화자는 읊조린다.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정이현의 새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창비)은 미래가 조금 더 특별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이현에게 그것은 1990년대이고, ‘생에 대해 어떤 기대도 품지 않’게 된 열아홉살 이전의 3년이다. 소설은 그 안에서 특별한 서사를 얽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그 시기를 살아낸 이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정서와 흔적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시곗바늘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으로 돌아간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지존파가 붙잡히고, 거액의 유산을 타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이 체포된 그해다. 삐삐와 PC 통신이 유행하고, 극장에는 ‘뮤리엘의 웨딩’과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걸려 있다. 1990년대 후반 환란을 맞기 직전까지 부동산 개발과 소비의 광풍이 막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인 세미와 지혜, 준모는 예민하고 불안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세미는 부모와 떨어져 부유한 조부모 집에 얹혀 산다. 지혜는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을 잊지 않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지만 친구들을 빼놓고는 누구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준모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투렛 증후군에 시달린다. 준모는 세미를 좋아하지만 세미는 준모의 과외 선생을 좋아한다. 세미의 가세가 기울고, 지혜가 입시학원에 가고, 준모가 유학을 결정하면서 세 친구는 조금씩 엇갈린다. 1990년대와 10대라는 시간을 축으로 전개되던 소설은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 세미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세 사람은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의 휘장을 걷어내고 죽음의 풍경을 엿본 이들에게 미래는 약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이현은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밀어내면서, 이들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곧 어디엔가 도착할 것이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訪中후 朴대통령 관련 책 中서 인기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이후 박 대통령의 중국어판 자서전이 중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2일 중국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 따르면 지난 5월 출시된 박 대통령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킨다’가 방중 직후 신간 판매 서적 인기 순위 5위에 랭크됐다. 이린(譯林)출판사가 펴낸 책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박 대통령의 자서전 가운데 유일하게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인기가 높다. 이린출판사 셰산칭(謝山靑) 사장 조리(비서실장)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출시 1개월여 만에 이미 5만~6만부가 팔렸으며 현재 추세로 볼 때 10만부가 넘게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전기 때와 비슷한 기록을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온갖 시련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박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가 중국인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는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계약금과 추가 인쇄에 따른 인센티브 등 박 대통령에게 주는 인세 등은 기밀 사항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박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 판권에 대한 계약을 끝냈다”고 말해 인센티브는 지급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날 런민(人民)출판사의 ‘절망은 희망을 창조한다-박근혜의 인생 전기’도 인기 인터넷 쇼핑몰 당당망 도서 부문 8위에 오르는 등 두 달째 상위 순위에 이름을 올리며 선전 중이다. 6월 말 현재 총 2만 3000부가 팔렸다. 두 권 이외에도 ‘박근혜-한국과 결혼한 여인’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 ‘나는 박근혜다’ ‘박근혜 일기’ ‘절망 속에서 걸어나온 불패의 여인: 박근혜’ 등 총 7권의 박 대통령 전기가 중국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신용불량 15년, 악몽 그 자체 아내·형까지 빚더미…이렇게라도 마음의 짐 덜어”

    “신용불량 15년, 악몽 그 자체 아내·형까지 빚더미…이렇게라도 마음의 짐 덜어”

    “환갑을 넘긴 나이에 10년을 갚아 나간다고 해도 일흔 살을 넘기겠지만 이렇게라도 오래 묵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됐으니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드네요.” 외환위기 당시 도산한 중소기업의 연대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11만명에 대한 채무조정 접수가 시작된 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3층 접수처에서 만난 김명수(62·가명)씨. 그는 오전 9시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의 손을 잡고 왔다. 그에게 지난 15년은 악몽 그 자체였다. 외환위기 당시 운영하던 소규모 기업체가 자금난으로 도산하면서 대표였던 자신은 물론 아내와 형까지 연대보증의 늪에 빠져버렸다. 돈을 벌어 빚을 갚고 싶어도 부부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금융 거래는 물론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날 시작된 외환위기 연대보증 피해자 채무조정 접수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채무조정안에 따르면 남은 보증채무액 약 3억원을 보증인 3명으로 나눠 최대 70% 감면을 적용해 10년간 상환할 경우 한 달에 약 25만원씩 갚아 나가면 된다. 캠코 관계자는 “외환위기 연대보증 피해자들에게 이날 채무조정 접수 개시는 절망의 구덩이 속에 내려진 구조의 사다리가 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접수 첫날인 만큼 오전에는 신청자들이 눈에 띄게 많지 않았지만 오후 들어 점점 늘어났다. 이날 오후 6시 마감된 상담 건수는 전국적으로 방문 상담 64건, 콜센터 상담 171건을 더해 모두 235건으로 집계됐다. 상기된 표정으로 접수 대기표를 들고 기다리던 이도진(59·가명)씨에게도 이날은 15년간 기다려온 날이었다. 이씨는 외환위기 때 다른 사람과 운영하던 중소기업이 도산하면서 수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현재 남은 빚은 1억 6000만원이다. 동업자가 연락을 끊고 잠적, 그 빚은 모조리 이씨에게 넘겨졌다.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된 이씨는 빚도 빚이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다. 그는 “어떻게든 빚을 갚을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연대보증 피해자 채무조정 접수는 캠코 본사 외에도 지점 23곳과 서민금융종합지원센터 16곳에서 가능하다. 신청 때 신분증과 주민등록등본, 외환위기 당시 도산기업임을 증빙하는 서류를 가져오면 된다. 문의전화 1588-3570.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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