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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여행 |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

    해외여행 |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섬, 조선통신사 외교의 징검다리였던 섬, 일제강점기의 한恨이 서린 섬, 조선 마지막 황녀의 흔적이 남은 섬. 대마도를 여행한 시간은, 대마도를 ‘애증’한 시간이었다. 그 섬을 찾는 이유 부산에서 배를 타고 1시간 10분이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일본 대마도對馬島에 닿는다. 일본에서는 쓰시마つしま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겐 대마도로 더 익숙한 섬이다. 행정구역상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는데, 거리로는 부산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 142km여서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훨씬 가깝다. 그래선지 여권을 들고 출국심사를 받으면서도 기분이 영 얼떨떨하다. 그래도 외국은 외국이라 면세 쇼핑의 기회는 똑같이 주어진다. 부산항 여객터미널엔 양손에 바리바리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뱃삯만 내면 되니 부산 사람들은 면세 쇼핑을 위한 당일치기 대마도 여행을 자주 한단다. 멀미약을 입에 털어 넣고 꾸벅꾸벅 졸았더니 금세 도착이다. 배에서 읽으려고 가져간 책이 민망할 정도로 금방이다. 거리 분위기는 영락없는 일본 시골마을인데, 가는 곳마다 온통 한국어 표지판이라 한국 같기도 하다. 식당과 호텔 직원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한국말을 구사하고, 주요 관광지마다 있는 조그마한 커피트럭에서는 한국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있을 정도다. 알고 보니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를 여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마도를 찾는 여행객의 95%가 한국인이란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한 해 대마도를 여행하는 한국인은 10만명 이상. 사실 오늘날 대마도가 한국인의 인기 여행지로 개발된 것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도발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최초의 대마도 전공 박사이기도 한 발해투어 황백현 대표가 대마도 여행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독도 앞바다에 찾아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 외치는 운동을 수십 번 하다가, 그냥 놔둬도 우리 땅인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 방식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히려 대마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이 독도를 사수하는 더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1997년,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한국 땅’이란 슬로건을 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 14명과 대마도로 갔다. 당시엔 부산-대마도 뱃길이 없었기 때문에 후쿠오카를 경유해 가야 했다. 4박 5일 일정 동안 배를 탄 시간만 왕복 42시간. 첫 순례 이후 부산의 선사들을 찾아가 부산-대마도 직항 운항을 적극 권유했고 마침내 1999년 부산-대마도 뱃길이 생겼다. 지금은 발해투어 말고도 많은 여행사들이 대마도 여행 상품을 팔고 있고, 낚시·캠핑·등산 여행지로도 인기를 끌게 됐다. 이번 여행에선 대마도 여행길을 처음 열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황백현 박사와 함께 대마도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훑었다. 대마도는 실제로 우리 땅이었다 솔직히 대마도를 가기 전까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말이 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무관심했고 무지해서였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우리 조상들이 대마도에 남긴 수많은 흔적들이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황백현 박사는 그의 저서 <대마도 통치사統治史>와 <대마도에 남아 있는 한국문화재>를 통해 대마도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우리 영토였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기록들을 세세히 소개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일본 천태종 승려 현진이 1197년에 집필한 <산가요약기>에는 “대마도는 고려가 말을 방목해 기른 곳이며,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1419년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대마도를 정벌했고, 이듬해인 1420년 대마도 8대 도주島主가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니 대마도 사람들을 조선에 의탁한다”는 문서와 함께 대마도를 조선에 바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켰으니 앞으로 모든 보고와 문의는 반드시 경상도를 통해 하도록 하라”는 답서를 보냈고 그때부터 대마도는 공식적인 조선의 영토가 되었다. 황 박사는 ‘대마도’와 ‘쓰시마’라는 이름도 우리말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 말馬이 없었던 2세기에 ‘말 마馬’자가 들어가는 ‘대마도對馬島·말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의 섬’라는 지명이 생길 수 있었던 건, 고대부터 말을 키우던 우리나라에서 붙여 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쓰시마’라는 이름 또한 ‘두 섬Tu-Sem’이라는 한국어 발음이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말한다.대마도에서 1,500년 전 백제 사람이 심은 은행나무를 만났다. 나이로는 일본에서 첫 번째, 크기(높이 23m, 둘레 12.5m)로는 두 번째다. 본래는 ‘백제 은행나무’라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몇 해 전 일본이 그중 ‘백제’라는 말을 삭제했다고 한다. 일본은 ‘일본 고유의 영토 쓰시마는 역사와 관광의 섬입니다’라고 쓴 안내판도 새로 설치했다. 이 은행나무는 1789년 벼락을 맞아 나무속이 불타기도 했고, 1950년 태풍으로 줄기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모습으로 생명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은행나무 앞에 서서 생각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우리 역사를 잊지 말자.’ 대마도의 생명줄이었던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1607년부터 200여 년간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이다. ‘200년 동안 겨우 12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한 번 일본을 오가는 데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걸렸고, 매번 300~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이 움직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횟수가 아니다. 이 조선통신사의 길을 연 것이 대마도다. 평지가 없고 땅이 척박해 쌀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식량을 공급 받아 먹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조선과 교역이 끊기자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됐다. 당시 대마도 도주였던 소宗 요시토시義智는 국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일본 막부와 조선 왕실의 외교 회복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렇게 성사된 조선통신사는, 말하자면 대마도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였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가 반드시 거치는 기항지였다. 한양에서 출발한 일행은 부산을 거쳐 대마도에 상륙했다가 다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해 에도(지금의 도쿄)로 갔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조선 왕실에서는 통신사의 출발일이 결정되면 관리 3사(정사, 부사, 종사관)를 궁으로 불러 어사주를 내렸고, 그날 밤에는 영의정이 남대문 밖에서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출발 전날엔 마포나루터에 통신사 일행과 그 가족들이 모두 모여 송별연을 가졌고, 부산에 도착하면 무사왕복 기원제를 올렸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그 숙소에는 조선의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으려는 일본 문인들과 유학도들이 몰려들었다. 조선 선비들의 한시漢詩 한 수를 보물처럼 여기는 일본인들도 많았다고. 그러니 한류가 최초로 전해진 곳이 대마도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테다. 대마도에서 가장 번화한 이즈하라에는 지금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조선국통신사의 비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다. 그 앞의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길이 16.58m에 달하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소장되어 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하는 ‘아리랑 마쓰리’ 축제도 개최된다. 친일의 기록과 항일의 흔적 대마도 사람들은 한국어 공부도 참 열심히 했다. 과거 이즈하라에는 한국어 학교가 두 개나 있었다. 먼저 1727년 세워진 한어사韓語司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먹고 살던 이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던 곳이다. 3년 동안 하루 4시간씩 한국어 수업을 듣고 매달 월말고사를 치렀던, 속된 말로 ‘빡센’ 학교였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일본인들은 조선 선비들보다 한글을 더 잘 썼다는데, 당시 조선 양반들은 한글을 천시하며 잘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한어사 건물은 지금도 개인주택으로 대마도에 남아 있다. 한어사에서 불과 200m 거리에 1872년 세워진 한어학소韓語學所는 설립 취지가 불순했다. 조선 침략을 준비하기 위해 통역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한국어를 공부한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역비서로 일했다. 고쿠분 쇼타로는 을사늑약 조약문 초안과 한일 합병문 초안을 작성하는 일까지 맡았고, 조선총독부 인사국장을 거쳐 내부차관까지 지냈다. 그런 사람이 죽자 통탄해 하면서 묘비명을 쓴 사람이 바로 매국노 이완용이다.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하나로 꼽혔던 이완용은 그 묘비 왼쪽 아래에 ‘후작 이완용 쓰다侯爵 李完用 書’라고 자랑스레 새겼다. 스스로가 매국노라는 증명을 길이길이 남긴 셈이다. 이 묘비를 황백현 박사가 대마도에서 2007년 발굴했고 3년 동안 다수의 서예가들과 학자들의 검증을 거쳐 이완용의 필체임을 밝혀냈다. 한국에는 없는 이완용의 매국 증거물이 대마도 땅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그런 친일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대마도에는 항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즈하라의 절 ‘슈젠지修善寺’에는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들의 선봉장이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과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선생은 항일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대마도 감금 3년 형을 받고 이송당하면서도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양쪽 짚신 바닥에 고국의 흙을 한줌씩 담아 신고 갔다고 한다. 결국 “원수가 주는 끼니로 몸과 입을 더럽힐 수 없다”며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대마도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슈젠지는 최익현 선생의 시신이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나흘간 장례를 치른 곳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한국전망대에 올랐다.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 부산이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전망대다. 일제강점기 대마도에 잡혀 온 우리 선조들은 명절만 되면 이곳에 올라 바다 건너 고향땅을 하염없이 바라다보며 설움을 달랬다 한다. 그 자리에 1997년 한국에서 공수한 자재를 이용해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을 본뜬 모양으로 이 전망대를 지은 것이다. 찬 바닷바람이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는 한국전망대에 서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절대로, 절대로, 이 역사를 잊어선 안 되겠다고. *이토 히로부미 | 조선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었다. 조선 마지막 황녀의 눈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나. 기울어 가는 국가의 왕녀로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대마도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대마도에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있다. ‘결혼 봉축’이라고 하니 축복받은 결혼인 건가 싶었는데, 그 반대였다. 덕혜옹주는 19살이던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인 ‘소宗 다케유키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말하자면 시댁이 대마도였던 셈인데, 결혼식은 도쿄에서 올렸고 덕혜옹주가 대마도를 찾은 건 결혼한 해에 단 한 번 인사차 방문한 것뿐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연고로 대마도에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가 세워지게 됐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1세 때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 7살 때 약혼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일본은 덕혜옹주를 13살 때 도쿄로 강제 유학을 보내 고종황제와 떼어 놓았다. 덕혜옹주는 식민지의 공주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갖은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정신질환까지 얻게 됐다. 일본은 그런 덕혜옹주를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과 일본이 완전히 하나의 국가라고 주장했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과 결혼시켰다. 덕혜옹주의 딸 정혜 역시 갖은 차별 대우와 따돌림을 당하다 어머니처럼 정신질환을 얻었다. 결국 정혜는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써 놓고 실종되었다. 그 일 이후 덕혜옹주의 우울증과 몽유병은 날로 더 악화되었다. 1955년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했고,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외롭게 수감되었다. 그 사실을 조선일보 기자가 폭로해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귀국시킴으로써 마침내 덕혜옹주는 고국에 돌아왔다. 7년간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라고 쓰여 덩그러니 놓인 회색 비석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맺혔다. 탄생부터 결혼, 출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도 축복받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의 인생. 그와 너무나 상반되는 ‘결혼 봉축’이라는 이름의 비석이 그 삶을 더 기구하게 비추는 듯했다. 때마침 흩날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꼭 덕혜옹주의 눈물 같아 더 속상했다. *대마도 도주島主 | 오랜 세월 대마도를 지배했던 ‘소宗’가家는 에도시대 이전까지 도주였고, 이후에는 번주藩主가 되어 대마도의 모든 것을 통치한 지방 토착세력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조선의 교류 재개에 노력을 기울여 조선통신사의 길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등의 임무도 수행함으로써 당시 일본 막부와 조선 모두에게 공을 인정받았다. ▶travel info 대마도 FERRY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과 대마도 히타카츠항, 이즈하라항을 연결하는 쾌속선이 매일 운항된다. 히타카츠까지는 1시간 10분, 이즈하라까지는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다수의 페리회사가 부산-대마도 노선을 하루에도 수차례 운항하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다. Shopping대마도 대형마트 티아라 쇼핑몰 대마도 이즈하라에는 대형마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도 티아라 쇼핑몰은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입구에는 큼지막한 한국어 안내문도 붙어 있다. 마트에는 일본 본토에서 만날 수 있는 식료품과 생활용품 등이 모두 들어와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PLACE5,000엔 화폐 속 여인의 사랑 나카라이 도스이 기념관 대마도 이즈하라 태생 소설가이자 기자인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의 생가를 개조해 만든 기념관이다. 나카라이 도스이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5,000엔 화폐 속 인물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의 문학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나카라이 도스이는 아버지의 근무지인 부산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한국말에 능통했고, 서울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에 입사한 뒤에는 <춘향전>을 번역해 20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1891년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나카라이 도스이를 찾아가 소설 지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히구치 이치요는 20살, 나카라이 도스이는 32살이었다. 히구치 이치요는 어린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을 그린 <흐린 강>,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나 때문에> <매미> 등 작품들을 쏟아내고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도스이를 연모한 그녀의 마음은 사후 발표된 일기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대마도판 하롱베이 에보시다케 전망대 에보시다케烏帽子岳 전망대는 아소만의 수많은 섬이 펼쳐진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발 176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에 그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들쑥날쑥한 해양 지형이 특징인 아소만은 진주 양식으로 유명하다. 이 전망대는 석양과 일출이 아름다워 연말연시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오키나와를 닮은 해변 미우다 해수욕장‘일본 해수욕장 100선’에 속하는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의 바닷물은 마치 오키나와의 해변인 듯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낸다. 물이 맑아 물고기, 성게 등 해양 생물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도 하기 좋다. 근처엔 캠핑장도 있어 여름철엔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캠핑과 해수욕을 하러 찾아온다. Food대마도 도주가 좋아했던 간식 카스마키‘대마도 명물’이란 별명이 붙은 카스마키는 달콤한 팥소를 카스테라로 돌돌 만 것이다. 대마도 도주가 특히 좋아했던 간식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커리로 유명한 일본답게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대마도 여행 중 간식으로 먹거나 선물용으로 사 가기에 좋다. 글 고서령 기자 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 취재협조 발해투어 051-253-5887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한국, 12월 국제 핵안보회의 의장국 맡는다

    한국, 12월 국제 핵안보회의 의장국 맡는다

    美서 中企 58곳 1935억원 계약 체결 朴대통령, 멕시코서 문화·세일즈 외교 박근혜(얼굴) 대통령은 3일 멕시코동포 만찬간담회를 시작으로 대멕시코 문화·세일즈외교에 돌입했다. 박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멕시코는 우리 기업들의 중남미 시장 진출 거점으로, 300여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한국과 멕시코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동반자 관계를 확대해 가고 있다”면서 “4일 양국 정상회담에서 에너지와 인프라, 정보통신기술(ICT), 보건의료, 문화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박 대통령은 “멕시코 한인들은 과거 역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자금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학교를 세웠으며, 지금도 한인시민경찰대와 한글학교 등을 통해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동포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격려하고 지역별 맞춤형 영사서비스 확대, 차세대 정체성 교육 지속 강화, 동포 사회 네트워크 기반 확대 등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멕시코의 일간지 ‘엘 우니베르살’과의 인터뷰에서 한·멕시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강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으며, ‘문화창조산업협력 양해각서(MOU)’ 체결을 통해 양국 간 콘텐츠 교류 활성화 기반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멕시코시티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한·멕시코 문화교류 공연’에는 현지 언론 25명이 취재를 신청했으며 인터넷 관람 신청 과정에서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일 미국 워싱턴에서 폐막한 핵안보정상회의를 통해 오는 1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보 국제회의 의장국을 수임했다. 의장직은 외교부 장관이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코뮈니케 및 5개 행동계획의 성안 과정에 적극 참여했고 ‘핵·방사능 테러 대비 및 대응 역량 강화’, ‘유엔안보리 결의 1540호 보편적 이행 강화’ 등의 공동 성과물 도출을 주도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청와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마련된 정상외교 경제사절단의 1대1 비즈니스 상담회에서 우리 중소·중견 기업 58개사와 미국 바이어 108개사 간에 소비재, 기계 및 자동차 부품 등 분야에서 17건, 1935억원 규모의 계약이 체결됐다고 밝혔다. 이 중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 조달, 1대1 비즈니스 상담회를 통해 해외에 진출한 첫 사례가 나왔으며, 청와대는 이를 “정부의 창조경제 프로그램이 선순환적으로 작동된 대표 사례”로 꼽았다. 멕시코시티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朴대통령 오늘 美서 핵안보정상회의

    朴대통령 오늘 美서 핵안보정상회의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31일(현지시간) 워싱턴에 도착해 핵테러 위협에 대한 대응 방안과 국제 핵안보 체제 구축 방안 등을 놓고 각국 정상들과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박 대통령은 이틀간의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되는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단합된 노력을 촉구하는 한편 새달 1일(현지시간) 미국, 중국, 일본 정상과 연쇄적으로 양자 및 3자 회담을 갖고 북한의 핵 포기를 겨냥한 구체적인 정상 외교에 나선다. 이후 박 대통령은 다음달 2∼5일 145명의 대규모 경제사절단과 함께 멕시코를 공식 방문한다. 박 대통령은 4일 한·멕시코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북한·북핵 문제에 대한 구체적 협력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이어 동포간담회, 문화행사, 비즈니스 포럼 등의 행사를 소화한 뒤 6일 귀국한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쇠사슬에 묶인 어린 형제…아동학대 범인은 이모

    쇠사슬에 묶인 어린 형제…아동학대 범인은 이모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잔인한 아동학대사건이 발생했다. 쇠사슬에 묶여 지내던 어린 형제가 이웃들에게 극적으로 구조됐다고 현지 언론이 최근 보도했다. 아이들은 쇠사슬에서 풀려난 뒤 어디론가 사라져 여지껏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브라질 바이아주의 마쿠리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구조된 형제는 각각 9살과 7살 흑인으로 쇠사슬에 묶여 집안에 갇혀 있다가 가까스로 문을 열고 길로 나왔다. 27일(현지시간) 벌어진 일이다.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 흑인형제가 길에 나타나자 이웃주민들과 행인들은 깜짝 놀랐다. 영락없이 19세기 노예의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선 1888년 노예제도가 영구 폐지됐다. "21세기에 길에서 쇠사슬에 묶인 노예어린이들을 보다니..." 이런 생각에 이웃주민들과 행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형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웃들이 달려들어 아이들을 풀어주려 했지만 쇠사슬을 끊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한 주민이 와이어절단기를 들고 달려오면서 아이들은 쇠사슬에서 풀려났지만 이웃들은 또 한번 놀랐다. 두 아이를 쇠사슬로 묶어 가둔 건 보호자인 이모였다. 두 형제는 이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모는 여행으로 집을 비워야 했다. 이모는 마땅히 조카들을 맡길 곳이 없자 두 아이들을 쇠사슬에 묶어 집에 가두고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이 쇠사슬에 묶인 모습, 이웃들이 쇠사슬을 풀어주는 모습을 누군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인터넷에 올리면서 사건은 브라질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문제가 커지자 아이들의 이모는 "아이들에게 도벽이 있어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모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있지만 알코올중독자라 자식들을 돌보지 못한다"면서 "사실상 고아인 조카들을 돌보고 있는데 속사정도 모르면서 무작정 욕만 한다면 곤란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편 아이들은 쇠사슬에서 풀려난 뒤 행방에 묘연하다. 이웃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사이 형제가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지 언론은 "구조된 날 이후 형제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면서 "아무도 행방을 몰라 경찰이 아이들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페이스북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대만 4세 여아, 엄마와 길가다 ‘끔찍 참변’…CCTV 화면 속 당시 상황은?

    대만 4세 여아, 엄마와 길가다 ‘끔찍 참변’…CCTV 화면 속 당시 상황은?

    대만에서 엄마와 함께 길거리를 지나던 4세 여자 아이가 30대 남성에 의해 참수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범행 직전의 모습이 담긴 CCTV 화면이 공개됐다. 환구시보 등에 따르면 28일(현지시간) 오전 타이베이시 네이후구에서 이같은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CCTV 화면 속에서 피해 여아는 자전거를 타면서 엄마와 함께 길을 나서고 있었다. 이 때 뒤따라 온 한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렸고 아이 엄마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아이의 머리를 절단한 뒤에야 행동을 멈춘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인근 자동차 수리소 직원이 달려가 남성을 제압했고 지나가던 행인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다. 이 남성은 피해 아동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것으로 확인됐다. 남성의 행적이 찍힌 CCTV 화면에서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어슬렁대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찰은 자세한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사건 현장이 피로 가득했다”면서 “여자 아이는 즉사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남성은 1983년생 왕모 씨로 마약 관련 전과로 병원에 입원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지 언론은 “이 남성에게서 정신적으로 이상 소견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대만 중앙통신은 경찰이 이 남성의 집에서 ‘반공반러’ ‘혈통을 잇는 쓰촨 여자 구함’ 등의 문구가 적힌 수첩 29개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발견된 수첩에는 ‘강간 살해’라는 단어와 함께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내용 또한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가상현실’, 비디오게임 뿐?…건축, 의료 등 다방면 활용

    ‘가상현실’, 비디오게임 뿐?…건축, 의료 등 다방면 활용

    많은 IT업계 종사자들은 가상현실(VR)이 차세대 콘텐츠 시장의 큰 지분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VR 기기는 머리에 고글 형태로 착용하는 영상출력장치다. 사용자의 고개 움직임에 맞춰 3D 그래픽 영상을 출력해줌으로써 가상현실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현재 VR 개발업체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콘텐츠 시장은 단연 비디오 게임 시장이다. 가상공간 속에서 사용자가 직접 소프트웨어와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삼는게임의 특성상 VR과 맞아 떨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 그러나 VR 기기의 잠재력은 게임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그렇다면 향후 VR기술이 접목될 가능성이 높은 다른 분야로는 무엇이 있을까? 2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자체 웹사이트에 게재한 분석 기사를 통해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1. 건축 건축가들은 고객에게 자신의 건축설계를 생생히 설명하기 위해 2D 도면이나 컴퓨터 3D 그래픽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존 방식들은 결국 종이나 스크린을 통해 2차원적으로 전달되는 만큼, 고객에게 충분히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VR 기기는 이러한 상황을 바꿔줄 수 있는 적합한 수단으로 기대대고 있다. 실제로 미국 건축기업 ‘아이리스VR’(IrisVR)은 이미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고객들이 직접 VR 기기를 쓰고 ‘관람’할 수 있는 3D 건축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덕분에 고객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건물 내부를 누비는 것은 물론 건물주변 경관까지 감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2. 의료 지난 1월 미국 플로리다의 한 병원 의료진이 구글의 저가형 VR 기기 ‘카드보드’를 이용, 생후 4개월 아기의 목숨을 구해내는 일이 벌어지면서 의료 분야에서 VR기기가 지닌 잠재력이 간접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의료진은 희소 심장기형을 지닌 아기 티건 렉센을 신속히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수술에 앞서 의료진은 렉센의 장기 이미지를 스캔, 3D 프린터로 모형을 출력해 심장 상태를 상세히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3D 프린터는 고장 나 있었고 의료진은 좌절에 빠질 뻔했다. 수술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과정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의료진 중 하나였던 버크 박사는 자신이 가진 카드보드 VR장치를 떠올렸다. 의료진은 이 장치를 통해 심장을 모습을 생생히 확인하며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VR기기는 수술에 앞서 환자의 내부장기 상태를 가상으로 미리 확인하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이외에도 수련의 훈련이나 원격 수술 등 다양한 의료 분야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3. 정신 치료 VR을 이용한 정신치료는 ‘VRT’(Virtual Reality Therapy)라는 전문 용어가 벌써 만들어졌을 정도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한 예로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앨버트 리조 박사는 VR기기를 이용해 미군 병사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이 프로젝트는 PTSD 치료법 중 하나인 ‘노출 치료’(exposure therapy)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외상과 관련된 기억과 정서에 환자들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는 치료방식을 말한다. 박사는 VR기술을 통해 충격적 전장상황을 통제된 환경 하에 병사들에게 재경험 시킴으로써, 그들의 불안감 해소 및 장애 극복을 돕고 있다. 더 나아가 팔 또는 다리를 잃은 환자들의 환상지통(절단된 팔다리가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그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증상) 치료에도 VR이 활용되고 있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환자들은 VR 속에서 자신의 절단부위를 ‘다시 얻는’ 경험을 하고 나자 환상지통이 경감됐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아이리스VR/비메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월요 정책마당] 개성공단 기업, 근로자, 정부가 함께 가는 길/이상민 통일부 남북협력지구발전기획단장

    [월요 정책마당] 개성공단 기업, 근로자, 정부가 함께 가는 길/이상민 통일부 남북협력지구발전기획단장

    최근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 A사는 국내 공장의 신축 공사를 진행하면서 개성에서 같이 일했던 B사에 1억 2000만원 상당의 공사를 발주했다. 이로 인해 B사는 공단 중단으로 휴직해야 했던 근로자 2명을 복귀시킬 수 있었다. C사를 비롯한 9개의 개성공단 입주 기업이 공단 내에서 영업을 해 왔던 소규모 유통·서비스 업체들과의 기존 거래대금 결제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공단 중단 40일을 지나고 있는 지금 기업인들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 도와 가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들의 자구 노력에 대한 정부 지원 정책의 목표는 기업들이 공단 중단으로 발생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경영 정상화를 이루도록 하는 데 있다. 개성공단 개별 기업들의 업종, 규모, 국내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20회 이상 장·차관 기업 간담회, 현장 방문 등을 통해 기업 맞춤형으로 적극 해소해 나가는 데 주력해 왔다. 정부 지원을 추진하면서 우선시했던 원칙은 ‘신속성’이다. 공단 중단 직후 긴급경영안정자금 지원, 기존대출 상환유예, 국세·지방세 및 공과금 납부유예 등의‘우선 지원대책’을 마련해 기업 피해 최소화를 위해 시급한 조치들을 실시했다. 경협보험금 지급 소요 기간도 3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해 현재 전체 보험가입 기업 중 약 25%가 보험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또한 기업에 한층 유리해진 금리와 상환 기간을 조건으로 특별 대출을 시행하고 있으며, 3%를 넘나들던 남북협력기금의 기존 대출금리도 이번과 동일하게 1.5%로 인하했다. 기업 의견을 적극 수용해 국내 대체생산을 위해 1년간 임대료를 면제하는 한편 수도권에 대체 공장을 마련하는 경우에도 수도권 인접 지역과 동일한 조건으로 지방투자촉진지원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입주 기업들의 판로 확대를 위해 정부 조달 참여 시 1년간 가점을 부여하기로 했으며,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들을 위해 해외 유망 지역 설명회 등을 개최하고, 조만간 해외투자사절단 형식으로 입주 기업들의 해외 현지 방문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기존의 고용유지지원금 이외에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휴업·휴직수당의 일정 부분을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고용 유지가 보다 수월하도록 했다. 기업에서도 이 지원의 취지에 따라 근로자 해고를 자제할 것으로 기대한다. 실직한 근로자에 대해서도 취업상담·교육·알선 과정을 패키지로 지원하고, 청·장년인턴제 지원 요건도 완화해 적용하고 있으며, 직업훈련 생계비 대부와 긴급생계비 지원을 통해 근로자들이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목표로 하는 경영 정상화를 이루고 근로자들의 고용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 근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협력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정부가 기업의 불가피한 직접적 피해에 대해 지원한다는 기본적인 방향하에 현재 피해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합리적인 원칙과 기준이 마련될 수 있도록 관련자 모두가 조사에 적극 협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에서 성급하게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는 등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당면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대다수의 기업인과 근로자들은 개성공단 중단이 북한의 거듭된 핵·미사일 도발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던 만큼 그 책임이 북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정부와 함께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 이후에도 대남 핵공격 위협을 지속하고 있는 북한을 제대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의 위협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기업 경영 정상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서로 양보하고 지혜를 모아 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대한민국의 모습이자 현재의 어려움을 가장 빠르고 현명하게 극복하는 길일 것이다.
  • ‘오체불만족’ 오토다케 불륜 사죄

    ‘오체불만족’ 오토다케 불륜 사죄

    아내 “나에게도 책임… 함께 반성” “아내에게 다 털어놓았다. 평생 걸려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이지만 아내는 나를 용서했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다시 한번 가족과 마주 보고 갈 생각이다.”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난 ‘선천성 사지절단증’을 이긴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자 베스트 셀러 ‘오체불만족’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 오토다케 히로타다(39)가 24일 불륜 보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공식 사이트와 트위터를 통해 사과했다. 오토다케는 이날 발매된 주간신조의 “오토군, 5명과 불륜”이란 보도를 인정한 뒤 사과했다. 아내 히토미의 코멘트까지 공식 사이트와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다시 한번 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한 아내에게 보답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와세다대 후배인 부인 히토미는 “이런 사태에 아내인 저에게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느낀다”면서 “3명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부부가 함께 걸어나가기를 결심했다. 본인은 물론 나도 깊이 반성하고 있다. 이번 보도건으로 여러분에게 폐를 끼친 점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24일 발간된 주간신조는 “오토다케가 지난해 말 20대 후반 여성과 함께 튀니지, 파리를 여행했다. 위장을 위해 다른 남성 1명을 동행시켰다”면서 “이제까지 결혼생활 중에 5명의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그가 고백했다”고 전했다. 주간신조는 의혹을 부인하던 그도 결국 “육체관계도 있었다. 불륜이라고 인식해도 좋다”며 “그녀와는 3, 4년 전부터 사귀어 왔다”고 시인했다고 전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일본 주간지는 불륜 취재 전문?…유명인사, 연예인 줄줄이 날려

    일본 주간지는 불륜 취재 전문?…유명인사, 연예인 줄줄이 날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유명인사의 불륜 스캔들을 파헤쳐 줄줄이 낙마시킨 일본 주간지의 취재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일본 주간지 주간신조는 24일 발행한 최신호를 통해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39)가 2001년 결혼 이후 5명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폭로했다. 오토다케는 지난해 말 20대 후반의 여성과 함께 튀니지,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다고 전했다. 자신의 모교인 와세다대 후배 히토미와 결혼해 2남 1녀의 자녀를 둔 오토다케는 처음에는 불륜 의혹을 부인했으나 나중에 “육체관계도 있었다. 불륜이라고 인식해도 좋다”며 시인했다. 오토다케는 또 “결혼 생활 중에 5명의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간신조에 털어놨다. 선천성 사지 절단증으로 팔다리 없이 태어난 오토다케는 대학 재학 중 자서전 형식의 오체불만족을 펴냈다. 이 책은 일본에서 500만부가 팔렸으며 한국에도 1998년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오토다케는 오는 7월 치러질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의 공천을 받을 것으로 유력시됐지만 이번 불륜 보도로 없던 일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이날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와 트위터를 통해 “평생 걸려도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과하면서 주간신조의 보도내용을 링크로 올렸다. 그의 아내 히토미는 “남편의 불륜에 책임감을 느낀다. 가정을 지킬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주간지의 ‘불륜 특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는 30대 일본 얼짱 정치인이 한 주간지의 불륜 폭로로 의원직을 내려놨다. 주간문춘은 미야자키 겐스케(35) 중의원 의원이 교토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여성 탤런트와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보도했다. 가네코 메구미(金子惠美) 중의원과 결혼한 미야자키는 지난해 연말 아내의 출산에 맞춰 한두달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그러나 언론 보도로 정치 생명이 위기를 맞았고 결국 여론에 밀려 사퇴했다. 앞서 1월에는 역시 주간지의 보도로 유명 배우이자 방송인 벡키(33)와 인기 록밴드 게스노키와미오토메의 리더 가와타니 에논(29)의 불륜이 탄로났다. 주간문춘은 두 사람이 모바일메신저 라인으로 주고받은 사진과 대화를 공개했다. 지난해 여름 오래 사귄 일반인 여성과 결혼한 에논은 벡키에게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거나 이혼서류를 ‘졸업논문’에 비교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도로 벡키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죄했으며 연예계 활동을 접었다. 산케이신문은 지난 20일 주간문춘의 특종 비결로 과감한 인력 투입과 장기 취재를 꼽았다. 주간문춘에는 60명의 취재진이 있고 그중 40명이 특종 취재를 전담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큰 사안에 대해서는 10명 가량의 취재진을 꾸려 장기간 잠복 취재를 하는 등 공을 들인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현장 행정] 살림 쪼들려도 CCTV 예산 지키는 구로

    [현장 행정] 살림 쪼들려도 CCTV 예산 지키는 구로

    매년 평균 288대 설치… 안전 확보·환경 보호에 ‘한몫’이성 구청장 “더 늘려 ‘안전한 구로’ 만들것” 이성 구로구청장은 지역 주민들을 만날 때면 대부분 손을 잡혀 어디론가 끌려간다. 인적이 드물거나 쓰레기가 무단으로 버려진 곳이다. 이어 “이곳에 제발 폐쇄회로(CC)TV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이 이어진다. CCTV 한 대를 설치하려면 800만~1500만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그래도 CCTV 민원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이 구청장은 “아동과 여성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확보하고 지역 환경을 보호하면서 주차 질서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어려운 살림에도 매년 꾸준히 CCTV를 200대 이상 설치하는 이유다. 22일 구로구에 따르면 올해 13억 8200만원을 들여 CCTV 222대를 추가로 설치한다. 올해 예정대로 설치된다면 주민의 안전과 환경을 지키는 CCTV는 총 2106대가 된다. 이 구청장은 민선 5기 이후 ‘안전한 구로’를 지향하면서 2012년부터 매년 평균 치를 따지면 CCTV 288대, 설치비 13억 5240만원을 들인 셈이다. 구의 재정자립도가 25% 수준이라 사업 재정이 빠듯한 데도 CCTV 설치·유지에는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올해는 공원 내 방범 강화를 위해 3곳에 9대,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 확보를 위해 6곳에 18대, 고척돔야구장 접근도로에 2대를 각각 설치한다. 가리봉동, 구로2·3·4동 등 주택가 밀집 지역에도 184대를 새로 설치한다. 불법 주정차 무인단속 시스템용으로 9개 CCTV를 신설하거나 교체한다. 설치 장소는 운영위원회 심의와 행정예고를 통해 확정할 예정이다. CCTV 기능 강화에도 신경 썼다. 카메라 화질을 200만 화소 이상으로 높이고, 적외선 기능을 탑재해 밤낮으로 선명하게 관제할 수 있다. 구는 효율적 운영을 위해 목적과 기능에 따라 적절하게 설치하고 총괄 관리를 홍보전산과가 맡는다. 지역의 모든 CCTV는 2011년 조성한 U구로통합관제센터에서 모니터링한다. 통합관제센터에선 33명이 교대로 24시간 근무하면서 범죄, 쓰레기 투기, 불법주차 등을 감시·관리하고 있다. 이 구청장이 국내외 사절단이 구를 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데리고 가는 곳이다. 이 구청장은 “CCTV 역할이 다양한 분야에 점점 확대되고 막중해지고 있다”면서 “예산 여건은 늘 어렵지만, 주민들이 안전하고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도록 CCTV 확대와 성능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서울포토] ’길고양이 중성화의 날’

    [서울포토] ’길고양이 중성화의 날’

    중성화 수술후 왼쪽 귀에 일부분을 절단해 중성화 표식을 한 길고양이가 서초구 한 주택가에서 있다. 2016. 03. 06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8) 김도연 포스텍 총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8) 김도연 포스텍 총장

    서울의 낮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올랐던 지난 4일, 덕수궁 근처의 식당에서 만난 김도연(64) 포스텍 총장은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전에는 진짜로 190㎝였는데 나이 먹더니 좀 줄어든 것 같다”며 유쾌하게 웃는 그에게 척박했던 국내 공학연구의 토양을 개척하고, 교수와 행정가의 길을 거쳐 한국을 대표하는 두뇌집단인 포스텍을 이끌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들어 봤다. -“헤이, 무슈(미스터) 김. 여기 신문 좀 봐봐. 너네 나라 얘기 맞지?” 얼마 전에도 그러더니 기숙사에 같이 있는 녀석이 또다시 아침부터 자존심을 긁었다. 기사 제목이 대략 ‘한국은 세계에서 아기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다. 버려진 한국 아기들의 해외 입양에 대한 특집기사였다. 그 프랑스인 학생이 아시아 후진국에서 온 유학생을 조롱할 목적으로 기사를 보여준 건지, 단순히 관심을 나타낸 것뿐인데 내 자격지심이 옹졸하게 받아들인 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976~79년에 걸친 3년 반의 프랑스 유학생활 동안 나는 ‘해외에 나가면 자기 나라 국력만큼 대접받는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절감해야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결심했다. “열심히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서 너희들이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만들어 다시 돌아오마.”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석사를 마친 1976년 초,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해외 유학은 당초 나의 인생 로드맵에 존재하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면 돈을 벌고 싶었다. 어려서 나의 장래희망은 ‘과학자’도 ‘선생님’도 아닌, 오직 ‘부자’였다. 석사 졸업을 앞두고 박사과정에 진학할지, 취업을 할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카이스트 졸업생 중 프랑스로 유학하는 학생들에게는 프랑스 정부에서 특별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당시 대한항공이 자국산 에어버스 여객기를 구매해 준 데 대한 프랑스의 정부 차원의 보답이었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그때 나와 같은 케이스로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돈을 벌려고 해도 석사보다는 박사 학위를 받고 와야 기회가 많이 생기지 않겠나.” 당시 프랑스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는 달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미국의 달 착륙을 평가절하했던 프랑스였다.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나중에 한국에 수출한 초고속 열차 ‘TGV’, 세계 최고의 원자력 발전 기술 등이 다 프랑스의 대학과 연구실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6개월의 프랑스어 랭귀지 스쿨을 거쳐 그해 가을 미셰린타이어 공장으로 유명한 소도시 클레르몽페랑의 블레즈파스칼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산학협력 연구학생을 자원했기 때문에 유학 생활의 대부분을 파리에 있는 르노자동차 중앙연구소에서 보냈다. 산학협력 과정을 택했던 건 기술의 현장 응용에 관심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현지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생존 차원의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유학 시작 6개월 만에 한국에서 아내가 건너 왔는데, 프랑스 정부가 주는 장학금으로는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했다. 산학협력 연구학생을 하면 르노자동차에서 추가로 연구비와 생활비를 줬다. 자동차 생산공장에 딸린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다 보니 어떻게 특허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생산라인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실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평안도의 기독교 집안이었던 우리 가족은 북한 정권의 종교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나는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태어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는 반에서 중간 정도만 해라. 대신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라.” 아버지는 중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왜 다른 집들처럼 공부하라고 얘기를 안 하시지?’ 어린 마음에 섭섭함까지 들 정도였는데, 결과적으로 그 말씀만큼은 참 잘 지켰다. 경기고 우리 교실 60명 중에 30등을 왔다 갔다 했다. 동창 중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며 천재 소리를 듣던 친구가 나노 분야 최고 전문가로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우리 학교의 임지순(65) 석좌교수다. -1974년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마치고 카이스트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 당시 카이스트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대단했다. 20대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인 병역 의무가 면제됐고, 석사 과정인데도 나라에서 당시 직장인 평균 월급(4만 5000원)의 3분의1이나 되는 1만 5000원을 다달이 생활비로 보조해 줬다. 카이스트 교수들의 월급은 서울대 교수의 3배였고, 아파트도 나왔다. 외국 유학을 마치고 카이스트 교수로 부임하면 대통령이 공항까지 관용차를 보내 줬을 정도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1979년 7월 돌아옴과 동시에 아주대 기계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그때 나이 27세. 아주대는 1971년 우리나라와 프랑스 정부의 한·불 기술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 이행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는데, 1977년 당시 김우중 대우실업 사장이 인수를 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을 교수로 많이 채용했다. -아주대에서 나는 ‘빡빡이 교수’로 불렸다. 병역은 면제받았지만 3주 군사훈련은 필수였다. 귀국하고 얼마 후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지금과 달리 그때는 박사 학위 소지자를 거의 볼 수 없었다. “박사님이 그 정도밖에 못하나.” 남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고 들어온 나를 훈련소 조교들이 얼마나 괴롭히던지. 훈련소를 나오고 얼마 되지 않은 그해 9월 1일 첫수업을 하러 들어왔을 때 학생들은 내가 교수라고 하자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다. 군인 머리를 한 멀대 같은 청년이 허여멀건 얼굴로 다니면 먼 발치에서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수 임용 2개월도 안 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사태’가 일어났다. 이듬해 5월까지 대 학이 문을 닫았다. 계엄령 초기에는 교수들까지 완전히 통제했는데, 얼마 후 교수들은 연구실 출입이 허용됐다. 학교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연구실로 들어가는 식이었는데, 어느 날 버스에 올라온 계엄군이 출입증을 검사하더니 내 직위에 ‘조교수’로 돼 있는 걸 보고는 “야, 조교는 내려. 교수도 아닌 게 왜 여기에 타고 있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옆에 있는 다른 동료 교수가 ‘조교’가 아니라 ‘조교수’라고 말해 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1982년 서울대 재료공학과에서 학과 졸업생을 교수로 유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덕에 1969년 재료공학과 창립 이후 2회 입학생이었던 나는 서울대 교수로 옮길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 이외 대학 이공계에서는 인문사회 계열처럼 그냥 강의만 이뤄졌다. 실험실이 갖춰진 대학이 거의 없었다. 절삭공구 하나 변변한 걸 찾기 힘들었다. 아주대에 있을 때도 학교에서 연구를 위한 실험은 거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견기업과 손잡고 기술 실용화 연구를 함께 했었다. 사실 아주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기술회사를 창업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꿈을 버렸다.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좋은 논문을 쓰는 공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비로소 하게 됐다. -당시 연구환경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는 상상도 못 한다. 요즘에야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이 국내에서 연간 5만건 넘게 나오지만 서울대에 부임하던 해에는 전체 100건이 안 됐다. 제대로 된 첫 논문은 일본 정부의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1984년 일본이 전 세계 청년 학자들을 초청해 일본 문화를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나는 2개월 반 동안 일본무기재료연구소에 갔다. 거기서 현지 연구원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그때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울대로 자리를 옮겨 1986년에 처음 SCI급 논문을 낼 수 있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0년대, 대학은 그 중심에 있었다. 학생과 전투경찰이 아침에 캠퍼스에 같이 등교하던 시절이었다. 1987년 부교수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배 교수가 연구실에 찾아와 종잇장 하나를 꺼내 놓았다. “김 교수, 여기에 사인해. 나만 믿고 그냥 하면 돼.” 그 선배가 시키는 일이라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 흔쾌히 사인을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서울대 교수 4·13 호헌반대’ 성명이었다. 사인을 한 다음날 모든 신문 1면을 그 기사가 장식했고, 해당 교수들 이름이 모두 실명으로 게재됐다. -아침부터 연구실 전화가 불이 났다. 가족이며 친척, 친구들이 “큰일 난 거 아니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은 됐지만 특별히 겁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리면 잘리는 거지. 그런데 해직교수가 되고 나면 나는 뭘 먹고살아야 하지? 당초 꿈대로 돈이나 벌까?’ 그러나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 아래 우리 서명 교수들에게 특별한 불이익을 주는 조치 같은 것은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수시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나의 현실을 한탄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교내에 경찰이 들어와 제자들을 폭력적으로 체포해 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나는 30대 나약한 젊은 교수일 뿐이었다. 마음이 참담했고 학생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4·13 호헌반대 성명에 서명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의 괴로움은 한층 더 컸을 것이다. -조용히 연구나 하던 사람이 2005년 갑자기 동료 교수들의 추천으로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으로 뽑혔다. 1990년대 초에도 학생 담당 부학장이라는 보직을 맡기는 했는데 공대 학장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과학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2007년까지 공대 학장을 했었는데 졸지에 2008년 과학기술부와 교육인적자원부를 합친 교육과학기술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됐다. 6개월 정도 하다가 그만두고 울산대 총장으로 갔다. 그러다 다시 2011년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도 않지만 일이 주어지면 싫다고 거부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학생들에게 ‘과학’과 ‘기술’은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한다. 당연히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역할도 다르다. 과학자는 ‘새로운 지식과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고 엔지니어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테크닉을 만들어 돈을 벌게 해주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노벨상은 엔지니어들이 받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의 영역이다. 그런 개념도 없이 매년 10월 노벨상 시즌이 되면 기술을 전공한 공학자들에게 “왜 노벨상을 받는 연구를 못 하느냐”고 질타하는 사람들이 있다.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얘기다. -충북 감곡에서 주말농장을 하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과학기술은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하다. 씨를 뿌리고 움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빨리 채소나 과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씨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계속 흙을 뒤적이거나 이제 막 싹이 텄는데 키를 키우겠다고 잡아 늘이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노벨상 수상자가 당장 몇 년 안에 나오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지금처럼 사교육이 공교육을 넘어서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북돋우지 못하는 교육을 시키는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과학기술 정책이나 교육시스템을 지금처럼 운영해도 문제 없구나’ 하는 착각을 낳을 수밖에 없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술이 적당히 센 편이다. ‘논어’의 ‘유주무량불급란’(唯酒無量不及亂)이란 말을 자주 인용한다. 내가 좇는 공자의 주도를 압축한 말이다. 공자의 주량은 거의 무한대였는데, 어지러운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나 역시 실제로 이른바 ‘필름’이 끊겨 본 기억은 없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블레즈파스칼대(클레르몽페랑 제1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료의 물성을 연구하는 재료공학 중 무기재료(세라믹) 공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발표한 논문이 200편이 넘는다. 세라믹은 전자재료, 내열재료뿐만 아니라 강철을 절단하는 재료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물질이다. 연구자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초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초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내 행정가로서 경험이 풍부하다. 다양한 이력 때문에 고든리서치 콘퍼런스를 포함해 세계적인 학술회의에 40회 이상 초청받아 강연자로 나섰다. 서울대 공과대학 학장 시절에는 공대 학생들의 결혼식 주례를 도맡다시피 했다. ▲1952년 부산 출생 ▲아주대 기계공학과 교수 ▲서울대 재료공학과 교수·공과대학 학장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울산대 총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장관급)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포스텍 제7대 총장
  • 한국서 보신탕 될 뻔했던 개, 미국에 가더니 새 삶

    한국서 보신탕 될 뻔했던 개, 미국에 가더니 새 삶

     한국에서 보신탕이 될 뻔했던 개 한 마리가 태평양 건너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새 삶을 찾았다. 우리로서는 너무도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골든레트리버 잡종인 ‘치치’는 지난 13일(현지시간) 피닉스의 새 집 정원에서 새로 얻은 네 다리로 첫걸음을 뗐다.  서울의 한 동물병원에서 의족으로 걷는 훈련을 받은 치치는 이제는 리처드 하웰 씨 부부, 12살 딸 메건과 함께 살게 된다.  메건 양은 “치치는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다”면서 “계단 오르기를 빼고는 개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동물구조 단체인 ‘동물 구조 미디어 교육’(ARME)은 치치가 한국에서 식용으로 도살되려다 한국 동물단체에 구조됐으며, ARME가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밝혔다.  2살 2개월인 치치는 지방의 한 정육시장 밖에서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발견됐다. 당시 네 다리가 단단히 묶여 힘줄과 뼈가 보일 정도였다.  구조자들은 이 개를 즉시 동물병원으로 데려갔고, 수의사는 목숨을 살리려면 네 다리를 모두 절단해야 한다고 진단해 결국 의족을 달았다.  ARME는 치치가 회복하는 과정을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으며 하웰 씨는 이를 통해 치치를 데려오게 됐다.  하월 씨는 “치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갈 곳이었다”면서 “우리가 치치의 역경과 함께하면서 치치와 인연이 있음을 느꼈다. 치치는 아마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다리 자를테니 제발 가석방을”…강도용의자의 부성애

    “다리 자를테니 제발 가석방을”…강도용의자의 부성애

    강도 혐의로 붙잡힌 남자가 신체 절단을 제안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메르세데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오마르 페랄타(44)는 강도 혐의로 체포된 미결수다. 강력히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페랄타는 최근 법원에 엉뚱하지만, 간절하게 제안했다. 두 다리를 절단하는 대신 당장 풀어달라는 게 페랄타의 요구다. 아들을 위해 더 이상 재판을 기다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강도 전과가 있는 페랄타는 2014년 또 다른 강도 혐의로 체포돼 기소됐다. 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1년 5개월째 철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최근 재판날짜가 통고됐다. 사법부가 알려준 재판날짜는 2017년 9월이다. 이 일정대로라면 페랄타는 앞으로 1년 6개월을 더 꼼짝없이 미결수 신세로 지내야 한다. 페랄타는 변호인을 통해 두 다리를 자르겠다며 법원에 석방을 요청했다. 페랄타는 "자라는 아들 곁을 지키고 싶다"면서 "교도소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백을 주장한다. 과거 범죄세계에 빠진 건 사실이지만 이번엔 억울하다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페랄타는 "아들을 위해 손을 씻고 막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던 참에 경찰에 붙잡혔다"면서 "진심으로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페랄타는 "아무리 무죄라도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다면 아들에게 본보기가 되겠냐"고 반문하면서 "휠체어를 타더라도 옆에 있는 게 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페랄타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현지 언론은 "법원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도했다. 사진=자료사진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병아리 치던 소년 이달 기능한국인에

    병아리 치던 소년 이달 기능한국인에

    전남 해남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7남매를 건사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0년 셋째는 중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입학시험 성적이 전교 20등 안에 들지 못하면 학교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런데 입학 성적은 40등이었고, 꼼짝없이 일 년 동안 집안일을 돕고 지냈다. 미래가 걱정돼 스스로 병아리를 장에 내다 판 돈으로 2년 만에 전남 목포의 한 중학교로 갔다. 거기서도 문제가 있었다. 미션스쿨을 어렵게 졸업했지만 목회자는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일 년을 또 준비해 전남기계공고에 입학했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고교 졸업 후 바로 입영 명령이 나왔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였다. 군에서 배운 통신 기술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육군통신학교 조교를 거쳐 1981년 첫 직장에서 그는 서울시 행정통신망 유지·보수 업무를 맡았다. 임성주(59) 케이엠디지텍 대표는 29일 인터뷰에서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당시는 서울시에서 한창 자동 무전통신망으로 교체하고 있을 때였다”며 “그때 필요했던 기술과 지식이 모두 군대에서 배운 것이었는데 정말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경험부족으로 쪽방에서 시작한 첫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일 년 만에 자본금을 모두 날렸다. 그때 고향 친구가 ‘전선 절단기’ 개발을 권했다. 1991년 전선 절단기 국산화에 처음 성공했고, 제품 가격을 40% 인하하는 성과를 얻었다. 덕분에 2001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0년 상호를 광명전자에서 케이엠디지텍으로 바꿨다. 자동차의 신경계로 불리는 ‘와이어링 하네스’ 장비도 국산화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 60% 이상에 이르렀다. 회사는 매출 130억원 이상, 직원 수 70여명의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임 대표는 이날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2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에 선정됐다. 세종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이란 10년 만에 테헤란서 경협채널 재가동

    한국과 이란이 10년 만에 경제협력 채널을 재가동한다. 95개 기업과 단체로 이뤄진 대규모 경제사절단도 파견된다. 정부와 민간이 손잡고 ‘기회의 땅’ 이란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오는 29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관계부처 합동으로 10년 만에 ‘제11차 한·이란 경제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고 25일 밝혔다. 한·이란 경제공동위는 양국의 주요 경제협력 이슈를 논의하는 범부처 경제협력체다. 2006년 제10차 회의 개최 이후 이란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 등이 겹치면서 중단됐다. 이번 경제공동위는 그동안 위축된 양국의 경제협력 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제협력을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우리 기업의 본격적인 이란 진출을 위한 기반도 다진다. 금융·관세, 산업·투자, 에너지, 건설·해운, 보건·환경, 문화·과학기술 등 총 6개 분과를 구성해 양국의 협력 방향을 논의할 예정이다. 우리 측 수석대표는 주형환 산업부 장관이다. 주 장관은 이란 산업광물무역부 장관을 비롯해 에너지부 장관, 석유부 장관 등과 잇따라 만나 이란산 원유 수입 확대 등 정부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주 장관은 이란 측에 우리 기업의 참여 확대를 요청할 계획이다. 대규모 경제사절단도 파견된다. 경제사절단은 39개 대기업, 6개 공공기관, 27개 중소기업 등으로 구성됐다. 무역협회와 코트라(KOTRA)는 현지에서 ‘한·이란 비즈니스 포럼’을 열어 투자 환경과 합작 투자, 금융 지원, 에너지·인프라 개발 계획 등을 발표한다. 무역상담회 등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도 이끌어 낼 계획이다. 산업부는 “이번 행사가 양국 간 경제협력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고 밝혔다. 세종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서울포토]정릉천 고가교 현장 방문한 국민안전처 장관

    [서울포토]정릉천 고가교 현장 방문한 국민안전처 장관

    23일 서울 내부순환로 정릉천 고가교 케이블 절단 현장을 방문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교각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서울포토]정릉천 현장 방문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

    [서울포토]정릉천 현장 방문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

    23일 서울 내부순환로 정릉천 고가교 케이블 절단 현장을 방문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교각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개통 20년도 안 돼 부식… 부실 시공 여부 점검

    개통 20년도 안 돼 부식… 부실 시공 여부 점검

    한진건설 PSC 공법으로 건설 “국내서 부식 절단 사례 처음” 서울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 지역을 반원으로 잇는 내부순환로는 서울 동북부와 서북부를, 또 경기도 의정부와 강남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다. 하루 평균 차량 9만 5000여대가 오가는 정릉천 고가도로가 폐쇄되면 시민들의 큰 불편은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가 긴급 폐쇄를 결정한 것은 내부순환로의 중대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 17일 해빙기 안전점검 중 내부순환로 가운데 정릉천 고가교 구간 고가도로를 지지하는 강철 케이블이 부식돼 끊어져 나온 것을 확인했다. 강철 케이블은 15개의 강철선이 하나로 묶여 텐던(힘줄)을 형성하는데 콘크리트와 함께 고가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20일 오전부터 긴급점검에 나선 한국시설안전공단은 결국 이날 오후 11시 40분 서울시에 “교통통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제원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21일 “텐던 안에 시멘트를 채워 넣어 노후화나 부식을 막는 것이 이 공법의 중요한 부분인데 시간이 지나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면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확인해 봐야 한다”면서 “교통량이 많다고 빨리 부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부실 공사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점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폐쇄되는 정릉천 고가 구간은 한진건설이 콘크리트상자형 공법(PSC·Pre-Stressed Concrete)으로 건설한 PSC교로, 1999년 개통됐다. 문제가 된 현장에서 박성우 한국시설안전공단 부장은 “PSC교량의 강연선이 부식되어 끊어진 것은 국내 첫 사례”라며 “해외에서 강연선 파단 사례가 여럿 있었으나 국내 원인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해외 선진국의 강연선 부식 원인은 제설제가 대부분이다. 서울시 안에서 또 다른 PSC교량은 내부순환로 홍제천 구간과 강변북로 서호교와 두모교 구간이 있다. PSC공법은 고가도로를 떠받치는 내부를 속이 텅 빈 거대한 콘크리트로 만든다. 콘크리트 상자를 어른 팔뚝 굵기의 텐던 5가닥이 양 방향으로 모두 10가닥이 지지하는 형태가 PSC교다. 고가 내부로 빗물이 새는 구조도 아니어서 교통량과 빗물은 이번에 끊어진 정릉천 고가의 사고 원인이 아니다. 내부순환로는 구간별로 개통시기와 공법이 다르다. 폐쇄 구간은 출퇴근 시간대에 버스 11개 노선 89회 운행이 늘고 지하철 1, 4, 6호선도 하루 16회 운행 횟수를 늘린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서울시의회, 내부순환로 신속보수 당부

    서울시의회, 내부순환로 신속보수 당부

    서울시의회 도시안전건설위원회(위원장 김진영)는 22일 오후 4시경, 같은 날 0시부로 전면 교통통제된 내부순환로 정릉천고가(텐던 1개가 파단되는 중대결함 발생현장) 현장을 방문하여 긴급점검을 실시하고 명확한 원인조사와 신속한 보수를 주문했다. 이 날 비회기중 현장을 긴급 방문한 도시안전건설위원회는 서울시 안전총괄본부와 관리위탁을 맡고 있는 시설관리공단 측으로부터 간단한 현장 상황설명을 듣고 현장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준공한지 17년 밖에 안 된 교량에서 중요 구조부재인 텐던이 파단되는 사고는 그리 흔한 사례가 아니라면서 설계 및 시공, 그리고 안전점검 등 유지관리 전반에 걸쳐 총체적 부실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 서울시로 하여금 정릉천고가에 대한 설계 및 시공, 안전점검 전반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시민들의 부실의혹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놔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한편, 내부순환로 고가는 1종 교량으로 1999년도에 개통 이래로 2001년부터 정밀점검 6회, 정밀안전진단 2회가 이뤄졌으며,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정밀안전점검에서는 B등급을 받았었으나 이번 서울시의 해빙기 안전점검에서 절단된 1개의 텐던 외에 나머지 텐던에서도 부분 절단 또는 부식이 발견된 것에 대해 도시안전건설위원들은 그 간에 이뤄져 온 안전점검의 신뢰성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피력했다. 또한, 정릉천고가처럼 텐던(강연선이 묶여 하나의 케이블을 형성)을 사용하는 PSC공법을 채택한 서울시내 유사 교량들에 대해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이번에 폐쇄된 내부순환로 구간은 일평균 통행량이 9만7천대이고 출‧퇴근시간대 교통량은 각각 시간당 4,500대, 5,500대에 이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중대결함이 발생한 정릉천고가에 대한 신속한 원인조사와 보수로 시민 통행불편을 최소화할 것을 함께 당부했다. 정릉천고가교는 1999년 3월 31일 준공한 1종 교량으로 총 연장 9,889.5m에 폭은 6.75m~33.8m로 결함이 발생한 2공구의 경우는, 시공사는 한진건설(현 한진중공업), 설계사는 유신코퍼레이션, 삼우기술단, 제일엔지니어링 공동이며, 감리는 1․2공구 모두 유신코퍼레이션이 담당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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