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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개혁의 두얼굴/우득정 논설위원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한 직후 한 네티즌은 친노 인터넷 사이트에 참여정부의 개혁 방향이 잘못됐음을 질타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진정한 개혁이란 ‘소중한 동지와 가족을 피눈물 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해 칼날을 겨눈 탓에 참여정부의 개혁이 실패를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모든 변화와 혁신은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운 것이다. 10여년 전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칼국수로 끼니를 때우며 개혁의 선봉에 서자 국민들은 90% 이상의 지지로 화답했다. 하지만 문민정부도 김현철씨로 대표되는 측근들의 부패로 임기 막바지에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국민의 정부 역시 문민정부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자고 다짐했으면서도 똑같은 길을 답습했다. 그렇다면 개혁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잘못된 것일까.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 최근 개혁주창론자들의 실체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그는 여권의 386들이 개혁을 표방하고 있지만 속내는 중산층에 편입되기 위해 기존 중산층 이상 계층과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벌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자신들이 헤집고 들어갈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기득권층을 수구반동으로 몰며 쉴 새 없이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가 바로 개혁이다. 김 전 비서관의 폭로는 ‘짝퉁 개혁론자’들에 대한 레드 카드로 볼 수 있다. 올 초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랐다.‘신돈, 조광조, 정조, 대원군, 고종, 이승만, 김영삼, 김대중, 이들은 모두 국민을 향해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운 개혁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자기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고 극단적 이기를 충족시키는 은폐물로 삼아 왔음이 정권 말기에 드러났다.’이처럼 곳곳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으나 권력의 단맛에 취한 386에게는 짜증스러운 소음처럼 들렸으리라. 시인 신동엽은 참여시의 진수라고 불리는 ‘껍데기는 가라’(1967년 발표)에서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피맺힌 절규를 했다. 시인이 생존해 있었더라면 ‘개혁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또 다른 외침을 쏟아냈을지도 모르겠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영화 ‘강적’서 박중훈과 투톱 열연 천정명

    영화 ‘강적’서 박중훈과 투톱 열연 천정명

    2005년 ‘태풍태양’이란 작은 영화에서 사람들은 천정명을 기억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세상에 절규하듯 인라인 스케이트를 휘몰아 타던, 반항과 우수로 완강했던 청춘의 눈빛. 오목조목 깎아놓은 것같은 이국풍 이목구비. 홍콩에서 수입해온 신인(홍콩배우라는 오해를 실제로 많이 받았단다.)이 아닐까, 영화가 끝나자마자 배우 프로필을 뒤져본 기억이 기자에게도 있다. 그리고 1년. 그는 몰라보게 세졌다.22일 개봉하는 ‘강적’(제작 미로비젼)은 천정명의 영화이다. 열네살 연상의 대선배 박중훈과 투톱을 이뤘지만 드라마의 추동력은 그에게 쏠렸다. 살인누명을 쓴 게 억울해 감방에서 도망나온 탈옥수. 여자친구와 포장마차를 꾸리며 폭력세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쳤으나 꼬이기만 하는 청춘. 박중훈이 든든한 맏형처럼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판이 비좁다며 활개를 치는 주인공이 다름아닌 그이다. “전체 촬영분에서 10%쯤 삭제됐을 뿐 찍은 장면들이 거의 다 나왔어요. 꿈을 위해 끝까지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죠. 내가 봐도 심심하지 않고, 재미있게 배울 점이 많았던 영화라는 데 아주 만족해요.” 자동차에 치이는 장면 빼고는 난이도 높은 액션장면들을 거의 대역없이 찍었다.“뭔가 새롭게 도전해볼 수 있다면 그게 즐거움 아니냐?”며 “5m쯤 등 뒤에서 자동차가 폭파되는 장면을 직접 찍을 때는 정말이지 짜릿했다.”고 한다. 스물일곱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수줍은 웃음. 단답형의 느리고 어눌한 말투. 입심 좋고 민첩한 요즘 젊은 스타들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이미지이다.“낯을 가리는 성격 탓인지 연예계 친구가 없다.”는 그는 “영화든 드라마든 촬영 초반에는 수줍음 때문에 애를 많이 먹는다.”고 씨익 웃는다. 박중훈과도 생초면. 붙어다니는 장면들로 채워지다시피 한 버디무비였으니 고충이 적잖았을 것이다.“선배와는 촬영을 앞두고 처음 만났어요. 감독, 제작사 대표와 넷이서 만난 첫날 선배님이 제안하더라구요. 형이라 부르라고. 큰형처럼 편해서 대선배란 부담감을 까맣게 잊고 촬영할 수 있었어요.” 신인같은 풋내가 여전하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도 연예계 밥을 먹은 지 10년이 다 됐다.‘길거리 캐스팅’돼 고2때(97년) 처음 찍은 CF가 샤니 호빵. 몇편의 CF를 더 찍었으나 쉽게 인기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영화 ‘아 유 레디’(2002년)와 단편 ‘이공’(2004년)을 찍었어도 반응은 신통찮았다. 짧지 않은 무명세월을 거치며 만사엔 다 때가 있다는 여유를 배울 수 있었다.‘태풍태양’을 찍고나니 TV드라마, 시나리오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왔다.“드라마 ‘패션 70´s’‘굿바이 솔로’를 찍고 난 뒤 인기란 걸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NG를 내고도 주눅들지 않고 연기내공을 쌓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요즘이 즐겁다. 천정명이란 이름이 들어간 기사들은 일일이 직접 스크랩해서 챙길 만큼 부지런을 떨기도 한다. 인생 뭐 있어?(영화 속 대사)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영화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대답해줄 생각이다.“인생 뭐 있다!”고.“나중에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친구들이랑 스포츠센터를 차리는 거요. 학교다닐 때 꿈(체육학과 출신)이었는데 이룰 수 있을 것 같죠?” 꽉찬 인생에는 욕심이 많아야 할 것이다.“고만고만한 로맨틱 코미디는 싫고, 심심하지 않고 평범하지 않은 진한 사랑영화를 찍고 싶다.”고 한다. 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탈옥수와 인질 타락형사 잃을것 없는 두남자 우정 형사와 탈옥수. 대각선 꼭짓점에 맞서야 할 인물들이 한 배를 타게 되는 이야기 구도는 한국 액션치고는 그리 흔치 않은 설정이다.‘정글쥬스’로 참신한 작법을 인정받았던 조민호 감독의 신작 ‘강적’은 상반된 두 주인공 캐릭터가 빚어내는 격렬한 파열음으로 꽉 채워진 ‘쎈’ 액션물이다. 투병 중인 어린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삼류 건달들의 뒷돈까지 넘보게 된 강력계 형사 하성우(박중훈). 엉겁결에 탈옥수 수현의 인질이 되자 차라리 순직수당이나 타내자는 오기로 수현에게 바짝 다가가고 그러는 사이 수현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더이상 잃을 것 없이 추락한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리기 위해 영화는 타락한 형사와 탈옥수라는 극단적 카드를 뽑아들었다. 한때 몸담았던 폭력조직의 음모로 살인누명을 쓰게 된 수현이 억울함을 벗으려 탈옥하는 과정 등 출발부터 영화는 긴장의 고삐를 틀어쥔다. 경찰과 폭력조직에 동시에 쫓기며 막다른 궁지에 몰리는 수현, 아들의 병원비를 받는 대가로 인질범의 누명을 벗겨주기로 작정한 성우는 밑바닥 청춘의 비애와 뿌리칠 수 없는 부성애로 시종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정글쥬스’만큼의 선도를 기대한다면 실망의 여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액션을 균형있게 섞어 감상하고 싶은 관객에겐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박중훈의 변함없이 안정된 연기를 밑천으로 월드컵 기간에 개봉엄두를 냈을 만큼 대중성과 완성도를 적절히 갖췄다는 평가들이다.15세 이상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아바스 수반·하니예 총리 “내가 입양”

    “아빠, 아빠, 아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베이트 라히야에 사는 11세 소녀 후다 갈리야는 지난 9일 저녁 가족과 함께 해변 산책을 즐기다 이스라엘군의 포탄 공격을 받고 아버지와 5명의 형제자매, 의붓어머니를 한꺼번에 잃었다. 유혈이 낭자한 현장에서 13구의 시신과 다친 가족 사이를 돌아다니다 아빠 알리(49)의 시신을 찾아내 절규하는 갈리야의 모습은 방송국 카메라에 포착돼 전세계에 방영됐다. 초등학교 6학년인 갈리야가 이제 팔레스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11일(현지시간) 전했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이스마일 하니예 총리는 10일 그녀를 입양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 적대 정책에 종지부를 찍는 국민투표 실시 여부를 놓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지만 이 불쌍한 소녀를 돕자는 뜻에는 이견이 없었다. 갈리야의 생모 함디야(42)는 크게 다쳤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버지가 없을 경우 고아로 인정받는 관습이 있다. 같은 날 가자지구의 미국인 중학교 졸업식에서는 학생회장 야스민 알 쿠다리(17)의 제안에 따라 갈리야를 신입생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학교가 파한 뒤 갈리야는 아빠가 일하는 농장에 들러 함께 귀가할 정도로 그를 자랑스러워했다고 급우들은 입을 모았다. 그녀는 지금 살던 마을에 돌아와 이모와 함께 지내고 있으며 11일에는 생모가 입원해 있는 가자시티의 병원을 찾았다. 이모는 18개월 전 역시 이스라엘군의 포탄이 딸기밭에 떨어져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은 또다른 조카 하딜(8)을 키우고 있어 “난 딸기밭 순교자와 해변 순교자의 엄마”라고 개탄했다. 그녀는 “이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라고 말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슬픈 그들/오풍연 논설위원

    저녁 식사를 한 뒤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내와 함께 한강 둔치에 갔다. 그곳에는 여러 군상들이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죄다 밝은 표정이었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흘러 나왔다.2인용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손을 맞잡고 걷는 노부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 그들에게서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쁨과 생기가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슬며시 팔짱을 끼었다.20여년 전 연애시절을 빼곤 얼마만인지 몰랐다. 이방인처럼 주위를 둘러보면서 한강을 따라 걸었다. 그 때 멀리서 스피커음이 들렸다. 무슨 축하행사를 하겠거니 생각했다. 마포대교 밑에 이를 때쯤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한 무리의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생존권 투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10명이 한강으로 투신했던 그 장소다. 안마사로 일해온 장애인 1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문인지 그들의 절규는 더욱 처절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비장애인들이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함께하는 세상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Book Review] 도둑맞은 베르메르…/구치키 유리코 지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술품 도난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1911년 루브르 미술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사건을 들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작품을 되찾은 이 사건은 애국심이 발로된 하나의 ‘낭만적’ 사건이었다. 명화를 훔치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나 자기 나라 작품을 되찾겠다는 애국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유명 미술품 도난사건에는 으레 거대 범죄조직이 끼어 있다. 그들에게서 범행의 사회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난당한 명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1985년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서는 모네의 ‘인상­해돋이’를 도난당했으며,1990년에는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와 베르메르의 ‘세 사람의 연주회’를 도둑맞았다. 또 1994년에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동계올림픽 개막식날 뭉크의 ‘절규’를 도난당했고,2003년 영국 드럼랜리그 성(城)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돈나’가 관광객으로 위장한 절도범에 의해 도난당하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바그다드 미술관에서 행해진 미술품 약탈 만행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미술품 도난사건은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 대량으로 도난당했고,2002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국보 247호 ‘금동보살입상’을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은 일도 있다. 최근엔 1980년대 초 선암사에서 도난당한 불화가 경매에 나오는 등 미술품 도난의 역사는 숙명처럼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도둑맞은 베르메르-누가 명화를 훔치는가’(구치키 유리코 지음, 장민주 옮김, 눌와 펴냄)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베르메르의 대표작을 잃어버린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의 도난사건을 중심으로 미술품 절도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도난의 대상이 된 명화들을 낱낱이 제시하며 범행 동기와 수법, 도둑맞은 그림의 행방과 되찾은 사연, 미술품 컬렉터들의 열정 등을 살핀다. 수많은 미술품 도난사건 가운데 왜 베르메르를 택했을까. 베르메르의 작품은 왜 끊임없이 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일까.‘베르메르’를 훔치는 것은 종종 소설의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캐서린 웨버의 소설 ‘뮤직 레슨’에는 아일랜드계 여성이 아일랜드해방군(IRA)에 속한 한 남자의 꼬임에 의해 영국 왕실 소장의 베르메르 작품을 훔치는 계획에 동참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머스 해리스의 범죄소설 ‘한니발’에도 ‘베르베르 순례’ 이야기가 등장한다. 베일에 싸인 네덜란드 미술의 거장 베르메르(1632∼1675).17세기,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세계 해상권 제패와 식민지 개척으로 엄청난 부(富)가 네덜란드로 밀려들었다. 이같은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예술 또한 화려하게 꽃폈다. 그 중심에 바로 베르메르가 있었다. 작품의 희소성과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가려진 삶,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명성을 얻게 된 신비의 화가…. 이런 점들은 분명 베르메르의 명성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그 생애가 감춰져 있었던 데다 작품 제작연도도 모호해 끝없는 위작논란과 도난의 대상이 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1971년 ‘연애편지’가 도난당한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이후 다섯 차례나 도둑의 표적이 됐다. 저자가 베르메르에 초점을 맞춰 ‘미술품 도난사’를 전개해가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적잖이 상징성이 있다. 책은 중간중간에 미술품 도난보험 이야기도 곁들여 관심을 모은다. 모든 미술관이 도난이나 화재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도난보험에 가입한 상설 컬렉션은 전체 미술관 가운데 70∼80%에 불과하다. 네덜란드처럼 공영미술관이 도난보험에 전혀 가입돼 있지 않은 나라도 있다. 네덜란드는 이런 사실을 공개하고 있지만, 보험 가입 자체가 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만큼 보험 가입 여부를 비밀에 부치는 미술관들이 많다.‘아트 테러리즘’‘아트 테러리스트’‘아트 내핑’. 저자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행하는 테러리스트들의 미술품 절도를 설명하기 위해 이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미술품을 인질로 삼아 요구를 관철시키는 수법은 테러와 같으며, 나아가 인간 유괴사건과 흡사하다는 것. 저자는 ‘지하세계에서는 그림이 일종의 화폐로 통용된다.’는 말을 들려주며 세계적인 미술품에 대한 허술한 보안과 명화를 노리는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1만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꽃미남 이미지 벗고 ‘비열한 거리’서 건달역 조인성

    꽃미남 이미지 벗고 ‘비열한 거리’서 건달역 조인성

    푸릇한 여명을 등에 업은 청춘. 핏방울 점점이 흩뿌려진 어깨, 붕대에 동여매진 주먹, 그 손끝에서 애타게 타들어가는 담배꽁초. 새벽이 오는 낯선 거리에서 주인공이 욕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5일 개봉하는 ‘비열한 거리’(제작 싸이더스FNH, 감독 유하)의 포스터는 문득 소설적 감수성을 헤집는다.‘스타일리시’라는 형용사가 절로 튀어나오는 포스터. 시인 감독이 보여주는 농밀한 청춘비감(悲感) 에스프리. 청춘의 그늘을 누아르 스타일로 절규하는 포스터 속의 주인공은 조인성이다. 명품 이목구비의 충무로 제1 꽃미남. 유하 감독에 대한 두터운 신뢰, 멜로드라마의 우산에서 벗어난 조인성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그러나 묘하게도 기대치의 상승효과로 이어진다. 박제된 꽃미남으로만 갇혀 있을 것 같던 스타의 무엇에 시인 감독은 ‘필’을 꽂았을까. 또 스타의 어디에서 도전의 용기가 솟았을까.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무조건 시작한 작품이었죠. 유하 감독은 배우들 사이에 시나리오의 몇배로 (연기를)뽑아내주는 사람으로 통하거든요.” 뒷골목 건달이 됐다. 홀어머니에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삼류조폭. 깔끔한 이미지로 자동연결되는 그에겐 느닷없는 ‘설정’이다. 직설화법으로 물어봤다.‘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가 그랬듯 일시에 연기폭을 확장하는 지름길로 이 작품을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아니었냐고.“실은 ‘말죽거리 잔혹사’보다는 감독의 또 다른 전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더 감명깊게 봤다.”는 그는 “나란 사람은 완성을 향해 걸음마를 시작한 배우이고, 연기의 디테일을 살려줄 노련한 조련사를 찾고 있었을 뿐”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흥행은 몰라도 작품의 퀄리티만큼은 자신있다.”고 장담하는 이번 영화에는 야망과 배신, 음모, 사랑 코드가 고른 비율로 배합됐다. 검사를 손봐달라는 후견인의 무리한 제안을 받아들여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지만, 믿었던 친구에게서 뜻밖의 배신을 당해 무너지는 비운의 캐릭터이다.“고교시절 태권도 유단자였던 덕분에 일절 대역없이 때리고 맞는 액션장면을 소화할 수 있었다.”며 “액션동작의 선을 살려내라는 요구보다는 단 한순간도 감정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감독의 주문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단순한 건달 이야기가 아니라 비루한 청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겸손했다. 서너번쯤 스스로를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의 성장을 하다보니 사람들이 실제 나이보다 훨씬 노숙하게 봐요. 속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남자배우에게는 그게 오히려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에게 연기인생의 반전포인트는 어디였을까. 폐인을 만들며 인기끌었던 TV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 아니었을까 넘겨짚었다. 답은 뜻밖이다.“전도연 선배와 출연했던 드라마 ‘별을 쏘다’를 잊을 수 없어요. 저게 바로 연기라는 거구나, 그 선배한테서 진짜 연기를 봤던 거죠.” ‘마들렌’‘클래식’같은 멜로영화들을 그 드라마 이후에 찍었다면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총 100회 촬영분 가운데 그가 참여한 분량이 무려 95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화면을 채우는 ‘조인성의 영화’인 셈이다. 지금은 어떤 시나리오를 고민중이냐고 물었다.“‘비열한 거리’가 개봉돼 평가를 받을 때까진 새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한줄도 읽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순간, 그 완강함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를 또 높여놓는다. 조인성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시쳇말로 ‘각’이 나오는 연기를 보여주겠다는 완곡어법이었다. 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씨줄날줄] 집단학살/진경호 논설위원

    인류와 함께 탄생한 몇가지 가운데 전쟁과 학살이 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우면서 인간답지 않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지난 100년만 해도 숱한 전쟁으로 4000만명이 희생됐다. 총칼을 들고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음에도 무고하게 학살된 인류는 이를 훨씬 웃돈다.1999년 설립된 반전단체 ‘제너사이드 워치(Genocide Watch)’는 1억 7500만명을 학살의 희생자로 꼽는다. 전사자의 4배를 넘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보스니아·코소보의 인종청소,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동족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등이 다 집단학살에 속한다. 제주도민의 4분의1이 희생된 제주4·3사태나 거창양민학살사건도 다를 바 없다. 지난해 11월 자행된 미 해병대의 이라크 양민 학살사건에 지구촌이 몸서리치고 있다. 네살 손자부터 일흔일곱 할아버지까지 일가족 3대 7명 등 하디타마을 주민 24명이 까닭없이 희생됐다. 총을 맞아 죽어가는 남편 모습에 기절한 아내도 살해됐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오빠 밑에서 죽은 척해야 했던 13세 소녀도 있다. 미군이 돈을 건네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소식에는 치가 떨린다. 세계는 베트남전쟁의 학살사건에 빗대 ‘제2의 밀라이 학살’이라고 한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다.50여년전 이 땅에도 이런 일들이 자행됐다. 바로 노근리 사건이다.1950년 7월25일 미8군 사령부가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란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다는 방침을 세웠고, 바로 다음날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400여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지난 주말 프랑스 칸영화제를 반전영화가 휩쓸었다.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그린 반전영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이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안았고 이라크전 후유증을 다룬 ‘플랑드르’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남우주연상 공동수상을 낳은 ‘영광의 날들’도 전쟁작이다.9·11테러 이후 계속되는 반전영화 붐의 연장선이다. 한쪽에서 한 마을 주민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고, 다른 한쪽에선 이를 고발하는 반전영화가 명예가 되고 돈이 되는 것이 지금 지구촌의 모습인 것이다. 칸영화제가 열린 28일 홀로코스트의 현장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절규를 빌려 본다.‘신이시여,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열린세상] 학생인권,더이상 외면 말아야/홍덕률 대구대학교 사회학 교수

    중·고등학생 두발 문제가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학생들이 1년 만에 또 거리로 나섰다. 작년 이때쯤 학생들이 두발규제 완화를 외치며 처음 거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사이 학교 현장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학생시위를 겪은 뒤 교육부는 각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고 인권침해 가능성이 있는 규정은 시정하도록 권고했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학생들이 느끼는 인권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나 보다.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학생들의 두발자유는 기본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그것마저도 학교 현장에서는 ‘소귀에 경 읽기’였는가 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리 교육현장이고 피교육생이라고 하지만 두발 길이까지 학교가 정해 강제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의 긴 머리를 이발 기계로 싹둑 잘라버리는 일까지 있다고 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도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인격체다. 학생의 인격도 어른들 못지않게 존엄하다. 하물며 신체를 구속당하는 일에 있어서는 피치 못할 사유가 있어야 한다.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다거나 단체생활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등의 적극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두발이 단정해야 학생답다, 두발을 기르려고 하는 학생은 문제아다, 두발에 신경쓰면 공부에 도움되지 않는다, 학생에게는 마땅히 통제가 필요하다, 성인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하다, 심지어 학교 규칙이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 등, 흔히 제기되는 이유들은 두발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로는 미흡하다. 신체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구속해도 좋을 사유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두발 규제의 부당성은 우리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원회만 인정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아동 청소년의 인권 기준이 되고 있는 유엔 아동청소년 권리조약도 “아동 청소년은 신체적, 정신적 폭력과 학대, 착취를 당하지 않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학생들이 두발 규제를 문제삼아야 하는 학교 상황은 인권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우리도 인격체’라는 절규가 인권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 터져 나오는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두발 규제는 풀어야 한다. 사회의 민주화 속도와 비교해 학교는 너무 더디다. 두발 규제도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교육부도 두발 규제가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으면, 학교장에게 단순히 권고하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마땅히 강력한 지도와 행정조치를 취해야 한다. 두발 규제 문제로 불거지긴 했지만, 실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두발 규제는 학교 현장에 만연해 있는 학생 인권 침해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상 폭력에 가까운 체벌, 인격을 짓밟는 심한 욕설, 나아가 0교시에 강제 심야학습 등도 학생 인권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할 사안들이다. 이참에 두발 규제 문제를 포함해 학생 인권 전반이 사회적 토론 주제로 다뤄져야 한다. 학교 현장에 널리 퍼져 있는 반인권적 사고와 관행 등을 전반적으로 검토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얼굴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2003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며 교육부 지침과 학교 교칙을 개정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제 어른들은 학생의 말과 절규에 허심탄회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육이나 지도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학교와 교실과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교사와 교육부와 학부모가 학생과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토론할 때인 것이다. 홍덕률 대구대학교 사회학 교수
  • 9·11테러때 피랍항공기 녹음내용 첫 공개

    “제발 살려주세요. 오 신이시여.” 12일(현지시간) 2001년 9·11테러 당시 납치됐던 유나이티드항공 93기의 마지막 32분 상황이 담긴 녹음 내용이 처음 공개됐다. 93기 승객들은 테러범들로부터 비행기를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했다. 승객 33명과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했다. 미 USA투데이는 ‘9·11의 비극적인 영웅’으로,CNN은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음성을 방송했다. 뉴저지 뉴악공항에서 이륙한지 50여분이 지난 오전 9시31분, 테러범의 기내 방송으로 그날의 비극은 시작된다. 납치범은 “우리는 기내에 폭탄을 갖고 있소.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말한다. 몇분 동안 “움직이지마. 입다물어. 앉아.”라고 윽박지르는 테러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종실에서 한 조종사가 비명을 지르며 내는 신음소리가 들린다.9시35분, 한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원한다.9시37분, 한 테러범이 “됐다. 돌아가자.”고 말한 뒤 다른 테러범이 “모든 게 잘 됐다. 끝냈다.”고 말해 비행기를 장악했음을 시사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항공기는 워싱턴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9시57분,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테러범이 “싸움이 발생했느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승객들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1분 뒤 항공기는 요동쳤다. 납치범이 조종간을 마구 흔들어댔다.“(조종실)안으로 못 들어오게 해.”라는 아랍어가 들렸다. 오전 10시 “이대로 끝장내버릴까.”는 테러범의 목소리 뒤에 “아니 아직”이라는 답변이 들렸다. 잠시 후 한 승객이 “조종실 안으로…우리가 할 수 없다면 죽어.”라고 말한다.“막아.” “밀어, 당겨.”라는 고함과 함께 격렬한 싸움이 계속됐다. 10시2분, 고도 2120m에 이르자 “나에게 맡겨.”,“아래로 내려.”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항공기는 급강하했다.10시3분,“알라신이 가장 위대하다.”는 아랍어와 “노, 노, 노, 노…”라는 울부짖음이 네차례 반복됐다. 항공기는 머리 부분부터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녹음도 끊어졌다. 추락한 것이다. 미 연방법원은 9·11테러로 기소된 알 카에다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에 대한 배심원 선고공판에서 녹음을 공개했다. 검찰은 녹음뿐 아니라 비행항로, 속도 등을 가상 재현한 영상물도 함께 상영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월드이슈] 이민법 시위로 본 히스패닉 파워

    [월드이슈] 이민법 시위로 본 히스패닉 파워

    ‘인종의 용광로’로 불리던 미국이 거센 ‘히스패닉 파워’로 들끓고 있다.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라틴계 이민자 주축의 반이민법 시위가 의회의 갈지자 걸음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제2의 민권운동으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이 없으면 미국 경제의 미래도 없다는 호언도 나온다. 정부와 기업도 이래저래 눈치보기에 바쁘게 된 히스패닉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히스패닉 파워의 원천은 무엇보다 폭발적인 인구 신장에 힘입고 있다.2004년 전체 인구 2억 1200만명 중 4130만명으로 14.1%를 차지,12.2%에 머무른 흑인을 제치고 제2 인종으로 부상했다. 같은 해 7월을 기준으로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백인이 0.8% 늘어난 반면, 히스패닉은 4배가 넘는 3.6%의 폭발적 신장세를 기록했다. 영어는 ‘진공청소(vacuum)’ 한마디나 고작 내뱉던 이들이 어느 날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자던 거인 깨우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반이민법 시위를 계기로 거대한 히스패닉 이민 사회가 완전히 눈을 떴다는 분석 기사를 냈다. 그동안 인구가 적은 아시아계 이민자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작았던 이들이 이민법 논란을 거치면서 ‘제2의 민권운동’으로 키워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는 아직 없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흑인 노예와 같다.”고 절규하는 히스패닉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이민법 개정 요구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상원 법사위에서 친이민법 통과를 추진했던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10일 워싱턴 집회에서 “반세기 전 흑인 민권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감격해했다. 정·관가 진출도 이미 어느 정도 진전돼 있다. 앨버토 곤살레스 법무장관, 칼로스 구티에레스 상무장관, 헥터 바레토 중소기업청장 등 현직 장관급만 3명이다. 특히 안토니오 비아라이고사 로스앤젤레스 시장은 반이민법 시위에 강력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상원에서의 부결 사태는 이민 노동자들을 들끓게 했다.5년째 플로리다주의 뙤약볕에서 토마토를 따고 있는 멕시코계 리고베르토 모랄레스(25)는 “우리는 일하러 왔을 뿐”이라며 “범죄자가 아니다.”고 흥분했다. 그는 의회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며 애써 분노를 삭였다. ●11월 중간선거 심판론 대두 분노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히스패닉의 투표율이 크게 올라갈 전망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스앤젤레스 이민자권리 단체의 앤젤리카 샐러스는 “앞으로 거리의 함성을 어떻게 투표로 전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스패닉의 40%만이 투표권을 갖고 있다.20% 정도는 불법체류자여서 투표할 수 없고,33%는 아직 어려서 투표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선거에서 이들이 투표한 경우는 절반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잠재력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2004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승리한 뉴멕시코주의 경우, 인구의 43%가 히스패닉이지만 투표권자는 16%에 불과했다. 만약 시민권을 획득하는 자가 늘어난다면 부시 대통령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따라서 불법체류자들이 점진적으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한 친이민법을 공화당 일부가 저지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공화당 아성인 텍사스주나 애리조나주도 히스패닉이 20∼30%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투표권자는 9.6%와 6.2%에 머물러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밖에 네바다, 콜로라도, 플로리다, 유타주 등에서 부시가 승리했지만 히스패닉 유권자가 10%를 넘는다고 전했다. 또 민주당과 공화당의 박빙 지역들은 아주 적은 히스패닉 주민도 표를 결집시킬 경우 캐스팅보트를 쥐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불법이민 자녀 18세만 되면… 이민자 운동을 이끄는 단체들은 6월 밀워키에서 전미 콘퍼런스를 계획하고 있다. 노동절을 맞아 대규모 보이콧도 준비하고 있다. 학교에도, 일터에도 안 나가 ‘이민자 없는 하루’로 본때를 보여줄 심산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분산돼 있다. 킹 목사도, 지난날 서부 농장 노동자를 조직한 멕시코계 케사르 차베스 같은 인물도 없다. 흑인 민권운동은 흑인 대학과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구심점이었다. 이번 워싱턴 집회만 해도 60개 이상 단체가 제각각 참여했다. 지역 커뮤니티, 노조, 사회단체, 스페인어 방송 등이 총망라돼 한마디로 풀뿌리 네트워크에 의존한 시위였다. 시민권 획득이라는 ‘장기전’에 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남서부 투표자 교육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안토니오 곤살레스는 “우리의 ‘화력’은 젊은이들”이라며 “미국에서 태어난 수백만명의 라티노가 18세가 되는 날을 고대하라.”고 말했다. 불법체류자 부모는 투표권이 없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헌법에 보장된 속지주의 때문에 시민권자로 이 나이가 되면 투표권이 주어진다. 공화당 일부에서 속지주의를 희생해서라도 불법이민 자녀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높은 구매력·값싼 노동력 기업들 “히스패닉 모셔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의류업체 ‘갭’은 히스패닉계 경영학석사(MBA) 출신과 재학생 모임인 ‘NSAMBA’에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히스패닉 고객들의 취향을 꿰뚫어보는 인재 확보도 확보지만, 미래의 히스패닉 재목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한편, 장기적인 매출 증대도 꾀하는 것이다. 화장품 회사 셰브론이 히스패닉계 구직 네트워크로 유명한 ‘소모스(somos)’의 스폰서를 맡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 기업들이 이렇듯 히스패닉에 구애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구매력, 특히 급격히 늘어나는 청소년 소비자의 팽창을 염두에 둔 결과다. 미국 내 히스패닉 주민의 절반이 27세 이하라는 통계가 있다. 지금 10대가 결혼해 아이를 낳는 2050년쯤 백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 아래로 떨어진다는 경고도 나와 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히스패닉을 결코 홀대할 수 없는 셈이다. 이들의 구매력은 2003년 8000억달러(약 8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의 19%가 컴퓨터를,30%가 개인 휴대전화를 갖고 있어 구매력도 백인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1990년대 초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영향으로 이 시장은 중남미 진출을 타진하는 기업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히스패닉만을 위한 유선방송은 히스패닉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고취하는 수준에서 한발 나아가 중남미 시장을 겨냥한 드라마를 제작, 역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을 미국 기업들이 놓칠 리도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업은 물론 주정부 차원에서도 스페인어를 권장하는 곳이 늘고 있다. 제2 언어 대접을 받고 있으며 ‘스팽글시’란 ‘교통어(Lingua Franca)´가 등장한 것도 오래 전 일이다. 뉴멕시코주와 마이애미시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퓨히스패닉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워싱턴 주변 310만명의 노동자 가운데 30만명이 불법체류자다. 통계는 없지만 히스패닉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들이 일순간 이 일자리를 포기한다면 건물의 51%가 쓰레기 더미에 파묻힐 것이며, 건설 현장의 31%가 작업을 못하게 될 것이고, 식품점과 식당의 22%는 문을 닫게 된다. 급증하는 히스패닉 인구는 허드렛일자리에서 저숙련 백인 노동자를 쫓아낸 데 이어 숙련 노동자로 옮아가는 추세라고 일간 USA투데이가 11일(현지시간) 지적했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외국에서 변호사와 의사·회계사 등을 수입할 경우, 미국으로선 한해 2700억달러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예측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화폭에 피어난 ‘김춘수의 꽃’

    화폭에 피어난 ‘김춘수의 꽃’

    예술 장르간 어울림 중 으뜸으로 꼽히는 시와 그림. 그것도 삶의 절정을 상징하는 꽃을 테마로 한 만남이라면 더욱 멋스럽지 않을까. 우리 현대 시인들의 시 가운데 절절한 삶의 순간들을 표현한 꽃시들을 모티브로 유명 화가들이 꽃그림을 그렸다.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문학사랑)과 인사아트센터의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 나오는 시는 고은 김남조 김명인 김소월 김영랑 김춘수 박두진 박목월 박재삼 문정희 서정주 신경림 유치환 이해인 정호승 천상병 등의 시 40여편. 그림은 김일화 김형근 박항률 송수남 엄정순, 이왈종, 전병현, 홍지연 등 화가 17명의 작품이다. ‘내/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그대의/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꽃으로 설 것이다’(기형도의 ‘꽃’). 한 요절 시인의 절규는 정적과 꿈틀거림의 절묘한 대비를 보여주는 김일화의 ‘연-화조’를 통해 되살아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의 시 ‘꽃’은 수묵화가 송수남이 모처럼 수묵이 아닌 아크릴로 붉고 노랗고 하얀 꽃들이 화면 가득한 색채의 향연으로 표현됐고, 이왈종은 문정희의 시 ‘동백’을 모티프로 삼아 동백꽃 만연한 ‘제주 생활의 중도’를 선보인다.1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02)736-1020.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공포의 계절/월레 소잉카 지음

    21세기는 글로벌시대라고 한다. 경제적·문화적 국경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세계는 하나’라는 지향점에 가까워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실상 그 이면은 폭력과 테러로 얼룩져 있다. 지난 8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제3세계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윌레 소잉카는 그래서 오늘날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적 키워드로 ‘공포’를 제시한다. ‘공포의 계절’(월레 소잉카 지음, 이완기 옮김, 루비박스 펴냄)은 오늘날 일상에 스며드는 공포의 정체를 정치와 종교라는 틀을 통해 자세히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지난 2004년 BBC라디오에 초빙된 윌레 소잉카의 강연내용을 묶은 것이다. 저자는 우선 공포의 근원과 그 영향을 추적하면서 국제정세가 강요하는 국가간 갈등, 국가와 테러조직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는 오늘날의 테러조직을 유사국가로 상정한다. 소잉카가 보기에 오늘날 심화된 공포를 유포시키는 근원은 바로 이 유사국가다. 하지만 국가 역시 현실 혹은 가상의 반역세력을 낙인찍는 방식을 통해 유사국가가 득세하는 데 모종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즐기고 있다. 저자는 유사국가의 뿌리에 예속과 맹종을 강제하는 광기의 종교적 수사학이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우리는 진정 종교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소잉카의 절규는 본질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세속에 대한 권력 의지로 광기의 온상을 제공하고 있는 종교의 잘못에 대한 따가운 질책이다. 유사국가 도발은 9·11테러에서 정점을 이룬다. 하지만 소잉카는 9·11에 대해 “수십년에 걸쳐 사하라 사막 위에 무참하게 피의 글씨로 덧칠해져 왔던 전조의 귀결이었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9·11은 세계 정치학 속에 내재되었던 정치와 종교를 둘러싼 갈등의 파국적 확인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제1세계 밖에서 증식하고 있던 갈등의 전조를 무시하며 다른 한편에서 이를 부추기던 서방세계를 강력 비판한다. 소잉카가 오늘날의 인간 존재 조건을 고찰하며 내놓은 처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그가 보기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은 공포가 노리는 가장 큰 목적 가운데 하나이며 정신의 예속과 권력의 승리를 알리는 서곡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히 조명되고 복원되어야 할 게 바로 존엄성에 대한 가치라는 것이다. 존엄성은 오늘날 국가와 유사국가의 폭력, 그리고 종교의 수사학적 광기가 강제하는 ‘굴욕’에 맞설 수 있는 반(反)테제이며, 따라서 존엄성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소잉카는 거듭 강조한다.1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기도/오풍연 논설위원

    간절한 바람이 이뤄졌을 때 그 기쁨은 형언조차 하기 어렵다. 더욱이 만성질병에서 해방되면 무엇에 비하랴.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인들 못하랴 싶은 게 인간이다. 그러나 병은 늘 우리들 곁에 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병에 걸리게 마련이다. 불치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당사자는 물론이려니와 집안 전체가 초비상에 걸리게 된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제일 먼저 하는 게 기도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기도를 하게 된다.“제발 낫게 해 달라.”고 매달린다. 누구를 향한 외침도 아니다. 오로지 병마와 싸워 이기기 위해 절규하는 것이다.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인 K씨는 이를 ‘어린이 기도’와 ‘어른 기도’로 분류했다.“낫게 해달라.”고만 하면 어린이 기도라고 했다.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것이 어른 기도라고 정의했다.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든, 회복되든, 죽음에 이르든, 그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라는 설명이다. 하늘의 뜻이라 해도 죽음은 모두에게 두려운 존재다. 주위에 불치병에 걸린 이들이 적지 않다. 쾌유될 수 있다면 어떤 기도든 해주고 싶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열린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홍덕률 대구대 사회학 교수

    “우리 사회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인식이 있고, 이를 시정해야 한다.” 지난 10일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한 말이다. 모처럼 귀가 번쩍 뜨이는 반가운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사회는 틀림없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이토록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 슬픈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힘있는 유전층(有錢層)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라고 하고, 힘없는 무전층(無錢層)은 자식이라도 출세시키려고 허리띠 동여매든가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세상을 저주하게 된다. 이토록 천박하고 전도된 가치는 대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결과다. 최근 ‘홀리데이’란 영화로 다시 회자되는 18년전 지강헌 사건의 주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탈주범 지강헌은 인질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전경환이 나보다 죄가 가볍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이 556만원을 훔친 죄로 7년 징역형에 10년 보호감호형을 선고받은 것이 억울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70억원의 공금을 횡령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가 7년형을 선고받고 2년3개월 만에 풀려나는 것을 보면서 소위 법과 나라가 이럴 수는 없다고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도 절규했다.“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이 사회는 너희처럼 큰소리 치는 놈들이 망쳐 놓은 거다! 너희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돈 없는 게 죄다! 나는 돈 없고 빽 없는 놈이라 이렇게 된 거다. 돈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대한민국 법이 이렇다!” 밑바닥에서 본 사법 불의의 현실을 죽기를 각오하고 고발한 것이다. 그때 많은 국민이 ‘그래, 그렇다.’라고 공감했다. 우리 사회의 부끄럽고도 한심한 단면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지금 이시간에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그렇다고 믿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생각되게끔 만드는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예컨대 천정배장관이 기자회견을 한 바로 그날에도 역시 국민을 실소케 만든 법원 판결이 하나 보도되었다. 전주지법에서 있었던 일이다.1억원 안팎의 뒷돈을 받고 석·박사 학위를 팔아 물의를 일으킨 대학교수들에게 징역 8월에서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1500만원의 벌금형을 내린 것이다. 그 정도 죄로 교수직을 잃게 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회는, 아니 돈 없는 서민은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로구나.’ 했다. 요즘 양극화 문제가 우리사회의 중심 화두로 등장했다. 실제로 우리사회의 모든 부문과 영역에서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얼마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사회적 시한폭탄이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양극화를 해소해 가는 것이 해법이지만, 최소한 두가지만 갖춰도 사회적 위기는 막을 수 있다. 시한폭탄이 터지는 것만은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는 소득 수준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낳아서 결과적으로 가난이 자녀에게까지 대물림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과 지위가 죄의 유무와 크기까지 결정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 정의와 사법 정의는 사회 안정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이미 심각한 수준인 교육 불평등과 사법 불의의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브레이크 없는 사회 해체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장관이 직접 사법 불의의 현실을 인정하고 개혁을 다짐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결국 말로 끝나 불신만 키우는 악재가 될 것인지, 법에 대한 국민 신뢰를 세워내는 반전의 계기가 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판가름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8000억원의 거금을 내놓고 면책받고 싶어 하는 이건희 회장에게, 그리고 ‘결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겠느냐.’는 항간의 냉소에 검찰과 사법 당국이 어떻게 답할지를 보면 되기 때문이다. 홍덕률 대구대 사회학 교수
  • 증오·탐욕의 러브스토리

    증오·탐욕의 러브스토리

    오페라의 대중화, 전문화, 세계화를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이 올 시즌 개막공연으로 푸치니의 ‘토스카’를 올린다. 새달 2∼5일 오후 7시30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이번 서울 공연은 2004년 봄 도니제티의 ‘루치아’ 이후 2년 만이다. ‘토스카’는 ‘라보엠’‘나비부인’과 함께 푸치니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오페라.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략한 19세기 초 로마를 배경으로 가수 토스카와 그의 애인 카바라도시, 토스카를 차지하려는 경찰총감 스카르피아 사이의 사랑과 증오, 탐욕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작품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사실적인 대사와 주인공들 간의 팽팽한 심리전 등 극적인 요소가 많아 지루하지 않다. 오페라 중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별은 빛나건만’‘오묘한 조화’는 ‘토스카’라는 이름만큼이나 잘 알려진 곡으로, 오페라 애호가뿐 아니라 오페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마리아 칼라스 등 수많은 오페라 디바들이 앞 다퉈 불렀던 명곡. 나폴레옹 침략에 맞서 싸우던 독립투사를 도와준 화가 카바라도시를 체포한 스카르피아는 토스카에게 애인 카바라도시를 살리려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협박한다. 이때 “착하게 살면서 늘 기도하고 헌금도 열심히 냈는데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라고 신에게 절규하듯 부르는 토스카의 노래가 바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다. 이번 공연을 위해 한국오페라단은 이탈리아의 원로 연출가 베페 데 토마시를 비롯, 세계 정상급의 아티스트들을 초청했다. 지휘 김덕기, 무대디자인 이학순 등이 참여하며 토스카 역은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주역 가수로 활동하는 파올레타 마로쿠와 ‘베르디의 소리’라 불릴 정도로 베르디 오페라에서 두각을 나타낸 미카엘라 카로지가 맡는다. 무대는 무엇보다 현대적이면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둘 계획이다. 무대디자이너 이학순씨는 “‘토스카’는 푸치니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임에 틀림없지만,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것을 그대로 고증만해 보여주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며 “오늘의 시대상과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새로운 형식의 무대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입장료는 3만∼20만원. 한편 한국오페라단은 예술의전당 공연에 이어 오는 11월9∼12일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또 다른 버전의 ‘토스카’를 선보일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은다.1900년 1월14일 ‘토스카’가 초연된 이탈리아 로마극장(옛 로마콘스탄치 극장) 프로덕션을 초청해 올리는 무대. 푸치니가 직접 지시한 무대 장치, 의상 등 초연 당시 연출을 재연할 방침이다. 박기현 단장은 “100여년 전 초연 당시의 버전을 그대로 올리는 만큼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3월 공연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고전적인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민간 오페라단의 대표격인 한국오페라단은 올해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한다. 그동안 일회성으로 끝나곤 했던 작품제작 관행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 것이 그 한 예다. 이를 위해 한국오페라단은 단장1인체제에서 탈피, 최근 김덕기 서울대 음대 교수를 오페라단 상임지휘자 겸 음악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총감독은 작품 선정, 캐스팅 등 작품 제작 전반을 지휘하게 된다. 박기현 단장은 “국내에 오페라가 들어온 지 60년 가까이 됐지만 단장체제로 진행되다 보니 오페라 발전을 저해한 측면이 없지 않다.”며 “앞으로 총감독 아래 음악자문위원회를 두고, 국내 오페라 인재들을 위한 ‘작은 오페라’ 무대와 성악 콩쿠르도 꾸준히 개최할 예정”이라고 의욕을 보였다.(02)587-1950.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이슬람 문명과 도시](3)알함브라 궁전을 지닌 스페인 그라나다

    [이슬람 문명과 도시](3)알함브라 궁전을 지닌 스페인 그라나다

    그라나다를 찾아가는 길은 알함브라 궁전을 떠올리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축예술. 스페인 땅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이슬람 유산. 지상에 마련한 실존의 파라다이스. 어떤 찬사로도 모자라는 알함브라는 그라나다에 있다. 무어(Moor)라 불리는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800년간이나 이곳에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남겨 놓았다. 바로 안달루시아 문화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화가 공존할 때, 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인류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픈 역사가 도시의 언저리마다 웅크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안달루시아 문화의 중심도시가 바로 그라나다다. “그라다나라는 에메랄드에 알함브라라는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가 박힌 인류 최고의 보석” 15세기 한 아랍 시인의 표현이다.1492년 1월.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새해, 알함브라 궁전은 조용히 숨을 거둔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궁전의 새 주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결혼에 의해 아르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통합을 이루고,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의 지배를 청산하는 거룩한 사명을 천명했다. 그라나다의 마지막 아랍 왕 보아브딜은 자신의 가련한 시민들을 보호해 준다는 조건으로 금화 3만냥과 궁전을 바치고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라나다의 주민들은 무참한 학살과 추방을 당해야 했다. 예술을 사랑하고 유난히 눈물이 많았던 보아브딜은 약자의 비애를 처절하게 되뇌며 정든 알함브라 궁전을 떠나갔다. 겉으로 언뜻 보면 투박함이 어느 아랍 궁성이나 성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덕을 오르고 첫 번째 문을 들어서는 순간, 비감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아련하게 전해져 온다. 왕궁이 있던 팔라치오 레알 안으로 들어선다. 분수가 있는 전형적인 아랍식 실내 정원과 천국에서의 휴식을 설계한 시원한 공간 구조, 아라베스크 벽면 장식과 조각 예술의 극치에 나는 한참 동안 적당한 묘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알함브라구나. 네 이름만으로도 이제 충분하구나. 아랍건축의 특징은 외관의 투박함과 내부의 화려함이다. 그리고 많은 문들을 통해 실내로 연결되는데, 문 하나를 지나갈 때마다 화려함과 정교함은 점점 도를 더해간다. 속세와 천국을 건축에 표현하려는 아랍인들의 삶의 철학이 느껴진다. 왕궁 입구로 들어서면 두 벽 사이로 기다란 아라야네스의 안뜰이 이방인을 맞는다. 하얀 대리석 바닥과 벽면의 초록색 모자이크가 기가 막힌 대조를 이루고, 아치를 이루는 조각 기둥이 떠받치는 지붕에는 붉은 아도베 기와를 얹었다. 작은 연못 물위에 비친 맞은편 건물의 아치와 기둥 장식이 수중 도시처럼 느껴진다. 술탄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대사의 방에서는 뚫려 있는 아치 사이로 맞은 편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라나다의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알바이신 이슬람 마을이다. 역사와 가슴 아픈 사연이 깔려 있는 마을이다. 이슬람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그때, 스페인 병사들은 소수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보호해 주겠다는 항복 조건을 내팽개치고 마을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다. 이교도를 소탕하고 신성한 하느님의 땅을 새로 세운다는 그들의 종교적 사명 앞에 한 문명은 무참히 무릎을 꿇었다. 무슬림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이교도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그들은 죽어가면서 처참한 역사를 후세에 남기고자 그들의 피를 곳곳에 뿌렸다. 그래서 하얀 집과 벽에는 당시의 학살로 붉게 물든 핏자국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30여개에 달하던 모스크는 지금 성당이 되어 버렸다. 다만 좁은 골목과 서로의 목소리로 이웃과 통하는 가옥 구조가 전형적인 아랍 마을을 닮아 있다는 것뿐이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인 하얀 집들 사이로 성당의 종소리가 석양을 이고 나직이 깔린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잠시 떠올리다가 ‘사자의 정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내 정원과 마주하고 섰다.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는 중앙 분수와 사자의 입에서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 물은 파놓은 홈을 따라 정원 구석구석을 흐른다. 야릇한 향내를 머금은 앞뜰의 정원수가 작은 그늘을 이루고,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역동적인 종유석 조각을 담은 아치 아래에는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황량한 사막을 뚫고 온 아랍인들이 이곳에 오아시스의 정서를 그대로 옮겨 담은 것 같다. 아니면 코란에서 묘사하는 천국을 설계한 것일까? 사자의 정원을 나오니 아름다운 분수가 바라다 보이는 계단에 한 맹인이 앉아 구걸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스페인어로 팻말을 세워놓았다.“아름다운 여인이여! 자선하세요. 그라나다에서 맹인이 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스페인 시인 프란시스코 데 이카자의 시구다. 아! 동전 한 닢을 놓으면서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에서 만난 맹인의 말없는 절규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슬람의 궁성이 함락되던 1492년 그 해, 이사벨라 여왕을 후원자로 모신 제노아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무적 함대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전성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한편 이슬람의 술탄 보아브딜은 다시 스페인에서 쫓겨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800년 전인 711년, 그의 선조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할 때 의기양양하게 건넜던 바로 그 길이다. 모로코의 이슬람 도시 페스에 정착한 뒤에도 보아브딜은 꿈에도 알함브라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63세를 끝으로 눈을 감았던 그의 초라한 페스 궁전은 너무나도 알함브라 궁전을 닮아 있다. 지금 대성당이 있는 알카이세리아 주변지역은 전형적인 아랍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아랍인들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번 이슬람화 된 세계의 모든 지역이 끝까지 이슬람을 지켰지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만은 예외였다. 다시 가톨릭이 점령한 이 땅에서 이교도인 무슬림들과 유태인들이 가혹한 추방과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한 때 문화용광로로서 유럽 르네상스를 일으키게 했던 최고 수준의 지적 산실이었던 안달루시아는 문명과 학문이 소멸되면서 역사의 뒤안으로 잊혀졌다. 그리고 지금은 관광객들이 이슬람 유산을 보기 위해 다시 안달루시아로 몰려들고 있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선자령·오대산 겨울 끝자락…

    선자령·오대산 겨울 끝자락…

    신(神)들의 정원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눈가루 내려앉은 나뭇가지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처럼 피어난 설화(雪花).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맞닿아 금방이라도 파란색으로 변할 것만 같은 눈부신 설원(雪原). 단순함과 여백의 미를 한껏 드러낸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겨울산을 떠도는 매 한마리는 화룡점정. 계절은 입춘을 지나 봄을 향해 가는데, 선자령(대관령 능선) 등 강원도 산간지역엔 아직도 겨울이 한창이다. 지난 7일 내린 폭설로 다시 절정을 맞고 있는 느낌이다. 회색빛 건물들 속에 갇혀 지내는 도시인들에게 순백의 설산(雪山)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흰눈에 쌓인 채, 오는 봄을 마다하고 있는 강원 산간지역을 둘러보았다. 글 사진 평창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1 선자령 눈꽃 트레킹 한발짝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눈알갱이. 적막한 설산속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더없이 정겹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간간이 내뱉는 소리는 추임새로 손색이 없다. 하늘에서 선녀가 가족까지 데리고 내려와 노닐고 갔다는 선자령.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가르는 대관령의 능선상에 있는 봉우리다. 겨울철 대표적인 눈꽃 트레킹 코스로 많이 알려져 있다. 등산로가 완만해 초보자나 가족단위 등산객들도 어렵지 않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선자령 정상은 해발 1157m로 무척 높은 편이다. 하지만 등산을 시작하는 대관령휴게소가 해발 840m이기 때문에, 실제 표고차는 317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도상거리는 약 6㎞가량.4시간 정도면 왕복이 가능하다. 산행코스는 대관령 북부휴게소에서 시작된다. 양떼목장을 지나 대관령 기상관측소 방향으로 30여분 정도 걷다보면 왼쪽에 이정표와 함께 선자령 등산로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오르는 편이 수월하다. 본격적인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사성황당을 지나 산불감시탑까지 약 1.5㎞의 오르막코스가 다소 힘겨운 구간. 입에서 헉헉대는 소리와 함께 단내가 풍겨나온다. 머리에선 술·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절규부터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까지 별별 생각들이 떠오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산불감시탑 능선에 오르니 발아래로 눈덮인 대관령이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더 멀리는 강릉시내와 동해의 쪽빛바다. 해무(海霧)가 낀 탓인지 다소 검푸레했지만, 가슴이 탁 트일만큼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광이다. 능선 왼쪽으로는 삼양 대관령목장의 구릉지가 마치 여인의 가슴처럼 옹긋봉긋 솟아있다. 아늑(?)했던 숲길은 여기가 끝. 이곳부터 선자령 정상까지 평지처럼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지지만, 바람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거세다. 관목이 드문드문 서있는 초원지대를 지날 때, 갑자기 광풍이 몰아닥친다. 휘잉∼하는 소리가 마치 내 땅에 왜들어왔느냐는 호통처럼 들린다. 얼마나 차고 세찬지, 살갗이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이다. 고개를 숙인 채 한시간 남짓 걷다보니 어느새 산자령 정상. 살얼음이 언 물로 목을 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깨를 맞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백두대간의 험산준령들. 한눈에 담기에 벅차다. 남쪽의 발왕산, 서쪽의 계방산, 서북쪽의 오대산, 그리고 북쪽의 황병산이 눈부신 파란 하늘아래 펼쳐져 있다. 선자령 산행의 백미라 할만하다. 하산길에 즐기는 눈썰매 타기는 산행의 또다른 재미. 강릉 초막골 방향 하산로에는 바람에 몰린 눈이 많이 쌓여 있는데다 경사가 완만해 눈썰매에 적합한 코스가 곳곳에 마련돼 있다. 나이도 잊은 채 눈썰매를 타며 즐거워하는 등산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마대자루를 준비한 사람도 있지만 그냥 엉덩이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대부분이다. 준비물 : 아이젠과 스패츠 착용은 필수다. 장갑과 방한모도 마찬가지. 모자의 경우 털로 짠 것보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 진 것이 좋다. 바라클라바(안면가리개)나 목도리, 고글 등도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옷은 가벼운 것을 여러벌 준비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입는 것이 좋다. 스틱은 특히 하산할 때 도움이 된다. 기타 보온병이나 비상약, 그리고 초콜릿 등 비상식량도 지참해야 한다. 찾아가는 길 : 선자령 산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산악회를 따라 관광버스 등을 타고가는 것이 편하다. 서울 상봉터미널(02-435-2122∼8)이나 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고 횡계까지 간 다음, 대관령까지는 택시를 이용한다. 횡계에서 대관령까지 택시요금은 3000원정도. 강릉까지 가서 대관령휴게소행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다. 하루 3차례 운행된다. 승용차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북부휴게소까지 가면 된다. 자세한 현지상황 문의는 대관령휴게소 매점(033-335-2049). #2 오대산 상원사 - 고즈넉한 겨울 산사 영동고속도로 소사휴게소를 나서면서 펼쳐진 눈부신 은빛 세계는 진부IC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거리는 무려 60여㎞. 속사 등의 시골마을을 지날 때는 눈속에 파묻인 농가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도 한다. 진부읍내를 벗어나 천천히 차를 몰아가기를 10분 남짓. 눈덮인 시골길 너머로 오대산의 준봉들이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형형색색의 화려했던 가을단풍을 벗고 온통 흰색차림이다. 청량산이 오대산의 또다른 이름이라던가. 월정사입구에 들어서자 가슴에 와닿는 청량한 공기가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매표소 직원의 으르딱딱대는 말투 때문에 상했던 기분은 어느샌가 날아가 버렸다. 일주문에서 월정사 경내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겨울엔 눈꽃터널로 유명하다. 비록 며칠째 계속된 바람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 화려한 눈꽃터널을 볼 수는 없었지만 숲이 주는 청량감은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9㎞정도 떨어져 있다.‘부운종일행(浮雲終日行)’-뜬구름이 흘러 가듯 그렇게 산길을 걷는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새끼손가락만한 고드름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를 따서 먹어 보았다. 오도독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얼음조각들이 제법 갈증을 없애준다. 한시간 정도 걸었을까. 눈속에 파묻힌 고색창연한 사찰이 나온다. 바로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과 국보 제221호 목조문수동자좌상이 보존된 유서깊은 사찰이다. 부처의 정골사리가 봉안된 상원사 적멸보궁은 전국의 5대 적멸보궁 중 하나. 천천히 경내를 둘러본다. 병풍처럼 둘러싼 오대산 자락에 등을 기댄 채,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선원에서 동안거 중인 스님들만 눈에 띌 뿐,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따금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적막감을 더해준다. 주지인 나우(懶牛)스님께 가르침을 청했다.“산은 우리의 마지막 보배지요. 요즘엔 점점 산에 대한 경외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일부 등산객들이 벌이는 무분별한 환경파괴행위를 꾸짖는 말이다. 산삼동호회나 산나물동호회 등의 회원들이 와서 산을 헤집어 놓고 가면, 복구되는 데 몇년이 걸릴지 모를 만큼 피해가 크단다. “탐내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알기 위해 스스로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런 마음이 사그라집니다. 많은 생명들이 함께 잘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설차를 따라주는 나우스님의 표정 어디에서도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다소 아쉬움이 묻어 있는 듯하다. 한때 유행했던 ‘웰빙’선식으로 점심공양을 마친 다음,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수려한 풍경을 담아 눈이 즐거웠고, 단아한 음식은 입을 즐겁게 했다. 이에 더해 주지스님의 가르침마저 머리에 담았으니 이런 호사로운 산행이 따로 없다. “헛된 생각을 버리면 지혜가 깃들게 됩니다.”주지스님의 가르침이 하산길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찾아가는 길 : 승용차의 경우, 영동고속도로 진부IC~국도 6호선~446번 지방도로 순으로 진행하면 된다. 주차요금 4000원을 내면 상원사앞까지 차를 가지고 갈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진부터미널에서 상원사까지 하루 6회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문의 상원사 (033)332-6666. 평창운수 (033)335-6963. # 가볼 만한 곳 양떼목장-대관령 북부휴게소에서 도보로 5분거리. 넓게 펼쳐진 눈덮인 구릉들이 인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양들에게 건초주기와 추억의 비료포대 눈썰매 타기 등이 주요 놀거리. 입장료에 양들에게 줄 건초꾸러미 요금이 포함돼 있다. 입장료는 성인 2500원, 학생 2000원,5세이하는 무료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의 (033)335-1966. 빙등대축제(etoobee.com)-올해로 3회째인 빙등대축제는 횡계리 대관령 종고 별도부지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기간은 오는 28일까지. 얼음터널 체험, 대형 얼음미로 등 체험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빙등관에는 얼음속에 등을 넣어 제작한 각양각색의 빙등이 전시되어 있다. 화려한 오색 미끄럼틀도 설치돼 있다. 매일 오후 3시와 7시에는 평양예술단이 공연을 펼친다. 입장료는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18세미만)1만 4000원, 어린이(4세∼13세 미만)1만 3000원. 주변식당이나 행사장 입구에 비치된 행사안내 리플렛을 가져가면 50% 할인된다. 삼성, 롯데,BC 등의 신용카드와 KTF,TTL 등 통신회사 카드도 50%할인된다. 운영시간은 오후 12시부터 저녁 8까지다. 어린이 단체의 경우엔 오전 11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다. 문의 (033)336-1187. 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 횡계IC에서 횡계시내 방향으로 3㎞정도 진행하면 왼쪽편에 행사장이 보인다. 시외버스는 동서울과 상봉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서 횡계에서 내리면 된다. 횡계터미널(033-335-5289)에서 도보로 10분거리.
  • 女大앞 ‘피임약’ 광고

    女大앞 ‘피임약’ 광고

    피임약 「붐」이 한창이다. 서대문의 어느 女大 앞 약국 「쇼·윈도」엔 커다란 피임약 광고가 나붙어 오가는 여대생들을 「겁주고」있다. 「오랄·필」(경구피임제)은 말하자면 근대화 「액세서리」-. 그것의 소비량은 그나라 경제 수준과 정비례한다는 망측스런 얘기도 있다. 69년의 한국은 가위 피임약의 해. 5종의 피임약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약가(藥街)의 판매경쟁 또한 치열하다. 피임약 홍수의 수원(水原)을 찾아보니-. 「킨제이·리포트」에 의하면 사람은 일생동안 평균 5천5백회의 「섹스」를 경험한다. 이 가운데 신의 섭리대로 생식을 위해 바치는 작업은 단 50회. 전체의 99%는 「목적의 사용」이라는 결론이다.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실천되는 피임은 말하자면 이 99%를 보다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 피임 수단도 놀라게 발전했다. ■ 「피임약 시대」開幕 큰 명원 산부인과엔 요즘 혼인신고의 「잉크」조차 채 안말랐을 신부 초년생들이 찾아 온다. 임신상담, 육아상담이 아니라 그들중의 얼마는 아예 단산(斷産)상담을 하러 와 담당 의사를 놀라게 한다. 『「섹스」를 원해요. 아이는 싫습니다 』- 이것이 현대 「이브」들의 귀여운 절규. 61년부터 우리나라에선 가족계획이란 이름으로 「루프」가 대대적으로 부인들에게 공급되었다. 「루프」는 대체적으로 확실하고 안전한 피임수단이긴 하지만 삽입후 갖게되는 이물감, 출혈등의 부작용으로 그 성가(聲價)가 날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의 「바통」을 이은게 먹는 피임약. 시판되는「아나보라」, 「린디올」, 「오소로붐」, 「오브랄」외에 관수(官需)로 공급되는「오이기논」을 합쳐 모두 5종의 피임약이 각축전을 벌이고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피임약은 63년 7월에 들어온 「아나보라」가 효시 - 당시는 20정짜리였다. 67년에 「오소노붐」, 「린디올」이 들어오고 또 금년에 「오브랄」이 들어 옴으로써 한국에 있어서의 「피임약시대」는 이제 막을 올린 느낌이다. 면세 수입되는 「아나보라」, 「오브랄」, 「오소노붐」, 「린디올」의 월간 공급량은 15만「사이클」. 각 보건소를 통해서 정부가 공급하는 「오이기논」의 금년 공급목표가 32만명분이니 우리나라 전체 가임여성 3백만명의 6분의1 이 금년에 피임약을 먹게되는 셈이다. ■ 시끄러운 부작용(副作用) 논쟁 최근에 도착한 외지는 각종 피임약의 부작용 논쟁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오랄·필」이 효과면에서 1백%의 적중율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전혀 없질 않아 말썽이 되고 있다. 피임약의 부작용은 일반적으로 복용 1~3개월 사이에 나타나는 임신초기증세. 부작용 발생율은 천체의 20~30%. 치명적인 부작용은 피가 엉기는 혈전기(血展氣) 이다. 건강 「뉴스·위크」에 의하면 피임약 복요아 10만명중 10명에게서 이 형전증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밖에 간기능 장애, 발암성등의 부작용이 보고도고 있으나 그리 심각한 정도는 못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 오히려 먹는 피임약은 그 피임효과에 있어 거의 1백%의 정확성을 가지고있어「오랄·필」 인구는 세계적으로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피임 실패율을 방법별로 보면- ▷권주법 = 40% ▷월경주기 이용 = 35% ▷중절법 = 16% ▷「콘돔」= 15% ▷「루프」= 3% ▷경구피임제 = 1% 결국 많은 부작용 논쟁속에서도 경구 피임제는 지금까지 개발된 피임수단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명인좌「名人座」는 좀체로 흔들릴 줄 모르고 있는것. ■ 개발 경쟁 새 피임약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가 새끼를 낳지 못하도록 둥근 자갈을 낙타의 자궁속에 넣었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중국에서는 피임을 원해서 성교후 올챙이를 먹는 풍습이 있었고, 피임약으로 소나무 껍질이나 돌, 가죽, 5배자(培子)등을 사용했다는 얘기가 史記에 쓰여져 있다. 먹는 피임약으로 처음 개발된 것은 1958년에 타온 「에노비드」. 61년에 본격적으로 시판되기 시작하면서 이어 「아나보라」가 나왔다. 지금까지 개발된 피임약은 크게나눠 「콤비네이션」과 「시켄시얼」의 2종.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5종의 피임제는 전부 「콤비네이션」으로 이것은 난포, 황체 「호르몬」을 배합시킨 것이다. 「시켄시얼」은 15일은 난포 「호르몬」, 나머지 7일은 황체「호르몬」을 투여시키는 것으로 부작용이 적은 대신 피임효과면에서는 「콤비네이션」보다 다소 떨어지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피임약을 3세대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다. 황체「호르몬」함유량이 4㎎ 이상이던 60년 초반기를 1세대, 2㎎~3㎎이던 65년 전후를 2세대·그리고 천연황체「호르몬」함유량을 1㎎이하로 떨어뜨린 것을 3세대로 보고있다. 「오이기논」과 최근 시판 도기 시작한「오브랄」이 3세대의 것.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아나보라」가 전체 시장의 70~80%를 점유하고 있다. 정확·간편·안전을 「캐치·플레이즈」로 하는 피임약은 부작용 외에도 여러가지 먹는데 있어서의 불편한 점이 있다. 서독 「쉐링」회사에서는 SH560호라는 피임 주사제를 개발하고 있는데 이것은 1회주사로 1개월간 피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 또 미국의 어느 회사에서는 「모닝·아프터·필」이라는 난포 「호르몬」제제를 개발하고 있는ㄷ 이것은 성교후 약을 투여해 수정란의 배란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밖에 남자가 먹으면 1개월간 정자 생산이 중지되는 새로운 남성용 피임약이 미국 「업존」과 「멜크」회사에서 연구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세브란스」병원 산부인과 沈尙煥교수는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기전 반드시 전문의사와 상담을 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피임약의 부작용은 대단찮은 것이지만 당뇨병·간장병·정맥류·자궁근종·신장병·심장병환자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 沈교수의 의견. [ 선데이서울 69년 5/18 제2권 20호 통권 제34호 ]
  • “이젠 축구팀도 채울수 없어요”

    매일 들려오는 이라크의 자살폭탄 공격 소식에도 우리는 그 공격 때문에 삶이 짓밟힌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뉴욕타임스에 사진을 기고하는 작가 애덤 내덜은 올 여름 몇주에 걸쳐 병원과 시체안치소 등을 뒤져 자폭테러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나 다친 이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27일 한 면에 내덜이 찍은 사진 7장과 함께 이들의 안타까운 증언을 실었다. 내덜이 바그다드의 한 병원에서 만난 하더 레다(11)는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중 자폭공격으로 석유트럭이 폭파되는 바람에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레다는 “동생들이 절대 밖에 나가 놀지 않도록 엄마가 늘 신경쓰라고 말씀드렸어요.”라고 말했다. 쌍둥이 동생을 모두 테러 탓에 잃은 무하메드 사타르(11)는 “예전엔 11명이 축구를 했는데 이젠 3대3 게임을 하고 있다.”며 “할아버지랑 저는 죽은 아이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집의 커튼을 치곤 한다.”고 했다.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아메드 무타파르 박사는 “테러에 당한 경찰관이 이곳에서 죽자 그의 동료들이 의사와 간호사를 두들겨패고 응급실을 때려부쉈다. 몇달 후 그런 일은 일상이 돼버렸다.”고 진저리를 쳤다. 아메드 모아이다는 요르단 암만의 친척을 만나기 위해 바그다드를 떠났다가 길거리에서 미군의 총기 사격을 받아 뒷좌석의 아내와 딸이 죽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들 함자만이 그와 함께 살아남았다. 그는 “왜 미군들이 우리에게 총구를 겨눴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절규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005년 묻혀진 이슈

    2005년 묻혀진 이슈

    2005년 한해를 보내면서 좀 더 관심있게 집중 보도했어야 할 ‘묻혀진 이슈’는 없었을까. 지면의 제약에다 ‘새로우면서 흥미와 관심을 끌 수 있는’ 뉴스를 찾다 보면 정작 독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슈가 가려지거나 묻히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서울신문은 올 한해를 마감하면서 그동안 미처 부각하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대표적인 이슈 3가지를 간추려 돌아본다. ■ 1. 파키스탄 대지진 지난 10월8일 발생한 파키스탄 지진 소식이 서울신문 지면에서 사라진 것은 참사 2주째를 하루 앞둔 21일이었다. 구호단체들의 호소는 판에 박힌 것으로 치부되고 지지부진한 구조 작업은 새 뉴스를 전해야 하는 강박감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지난해 말 지진해일(쓰나미)로 인한 동남아시아 5개국의 참상과 겹쳐 보인 점,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미국의 치부가 드러난 것과 같은 사회적 의미가 미미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파키스탄의 참상은 으레 되풀이되는 재난쯤으로 여겨졌다. 우리의 관심이 멀어진 사이 희생자는 참사 직후 추산됐던 4만명의 갑절에 가까운 7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인도령 카슈미르의 1400명이 포함된 숫자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는 8만 70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 7일 웨스트 프런티어주 만세라의 난민 텐트에서 화재가 발생,4명의 어린이 등 7명이 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이를 보도한 국내 신문은 찾기 힘들었다. 특히 인도와 국경 지대인 카슈미르에 12월 평균 1.5m, 내년 1월 2.4m의 눈이 쌓일 것으로 추정되고 예년보다 훨씬 낮은 섭씨 영하 20도의 한파가 몰아칠 것이라는 거듭된 ‘제2의 재앙’ 경고도 국내 언론의 눈과 귀를 붙들어매지는 못했다. 더욱이 이 지역의 눈은 4월은 돼야 녹는다. 지난달 28일 첫 눈이 내린 뒤 8명이 얼어죽고 700명 이상이 감기와 폐렴, 저체온증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더해 동상, 피부병, 전염병 등으로 인한 어린이 희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다행히 WHO 등이 어린이 40만명에게 예방접종을 마쳐 이같은 우려를 조금은 덜었다. 그러나 40곳의 난민 캠프에 의탁하고 있는 350만명의 이재민들은 쏟아지는 눈을 피할 만한 변변한 텐트 하나 없이 겨울을 맞았다. WHO는 지금까지 제공된 구호물품은 텐트 2만개와 담요 32만장으로 집계했지만, 이들 텐트의 90% 이상이 한파를 견뎌낼 수 없는 것으로 파악돼 구호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식량 공수도 문제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450만명 가량이 구호단체가 제공하는 식량으로 갸날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각종 자선기구가 내놓겠다고 약속한 금액은 62억달러로 당초 구호기구가 호소한 금액을 훨씬 넘어섰지만, 문제는 내년 1월 이후 쓸 재원이 바닥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헬리콥터를 띄워 오지의 이재민들에게 식량을 공수하려면 7000만달러의 예산 확보가 필요하다고 구호 관계자들은 호소한다. 파키스탄의 재난구호를 총괄하고 있는 파루크 아마드 대장은 지난 18일 테드 터너 CNN 창립자 등에게 겨울을 견뎌내려면 200만개의 담요가 더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해가 바뀌더라도 파키스탄의 참상에 눈귀를 기울여볼 일이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 요르단강 서안 장벽 지난 8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하는 이스라엘 불도저들의 굉음에 파묻힌 것은 정착민들의 절규만은 아니었다. 정착촌 철거가 두 민족의 분규를 끝내기 위한 아리엘 샤론 총리의 ‘역사적 결단’으로 여겨지는 사이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요르단강 서안에 쌓고 있는 보안장벽 건설을 밀어붙였다. 지난해 6월 국제사법재판소의 ‘국제법 위반’ 판결도 한낱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서구 언론의 시각을 그대로 좇은 국내 언론은 이스라엘의 ‘반칙’을 제대로 부각시키지도, 이슈화하지도 못했다. 지난 14일 사울 모파즈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서안지구 정착촌에 290여 가구가 이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미국이 지원하는 중동평화 로드맵에 엄연히 규정된 신규 이주 동결 원칙을 어긴 것이다. 반칙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잠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샤론 정부는 2002년 6월부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 지난 9월까지 총 연장 670㎞의 절반 가까이를 완성했다. 높이 5m의 콘크리트벽 한쪽에는 철조망이, 다른 쪽에는 깊이 2m의 도랑이 파여졌다. 전자 감응장치와 발자국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 탐지로가 설치됐다. 약 8.5㎞ 구간은 무려 8m 높이의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쳐진다.1㎞를 건설하는 데 200만달러(2억여원)가 든다. 더욱 큰 문제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을 가르는 국경인 ‘그린 라인’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일부에서 요르단강 서안 쪽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고립화시켰다. 지난 2월 샤론 내각이 노선을 약간 변경하긴 했지만 여전히 팔레스타인 땅 6∼8%를 잠식한 것으로 보인다. 존 더가드 유엔인권판무관은 2003년 9월 제출한 보고서에서 “장벽과 이스라엘 사이에 거주하는 21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공공서비스, 학교, 작업장에서 격리되기 때문에 난민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일방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뜨뜻미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이 장벽은 어디까지나 보안상으로만 기능해야 하며 영구적인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어선 안된다. 테러에 가담하지 않는 팔레스타인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보안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했지만 구두선에 그쳤다. 팔레스타인은 또다른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라고 항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일방주의는 팔레스타인의 고립감을 부추겨 원치 않는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당장 내년 1월25일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마무드 아바스 총리가 이끄는 파타당이 무장세력 하마스에게 권좌를 내줄 경우, 중동평화는 험한 도전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하마스는 지난 15일 서안지역 지방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조를 드러낸 바 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3. 유럽연합 통합 |파리 함혜리특파원|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경제력을 갖춘 ‘유럽합중국’의 등장은 그 자체가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지난 5·6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유럽연합(EU) 헌법이 부결되면서 지금껏 중단 없이 달려온 통합기관차에 급제동이 걸렸다. 이후 EU 통합 관련 기사는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정보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인도 등에 밀린 측면도 있지만,EU 통합 자체가 너무 오랫동안 지루하게 진행돼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U 정상들은 지난 6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헌법조약의 비준이 부결된 뒤 비준일정을 연기한 채 ‘숙고기간’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런 가운데 유럽의회 헌법위원회는 ‘사망선고’를 받은 유럽헌법을 회생시키기 위해 지난 9월 첫 협의를 갖고 다양한 회생방안을 제시했다. 자유당 그룹의 앤드루 더프(영국) 의원은 숙고기간 중 기존 헌법조약을 일부 수정, 새로운 EU헌법조약 초안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녹색당의 보겐후버(오스트리아) 의원은 2009년까지 새로운 EU헌법조약 초안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국민당 그룹의 알렉산더 스터브(핀란드) 의원은 주요국의 선거 일정이 마무리되는 2007년 헌법조약의 수정을 위한 준비작업을 거쳐 2008년 헌법조약 수정,2009년 비준절차를 취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협의해 나가자고 말했다. 사회당의 카를로스 카르네로(스페인) 의원은 숙고기간 중 논의된 회원국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2007년 말 유럽의회가 각국 의회와 공동으로 회의를 개최하고, 헌법조약 개정방향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EU 전체 차원의 국민투표를 2009년 6월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원회의 이같은 논의가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다수 유럽의회 의원들이 2009년을 EU헌법조약 완료시한으로 상정한 점,EU헌법조약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개진된 점으로 미뤄 향후 EU 내 헌법조약 처리에 대한 논의과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헌법에 대한 논의는 독일이 순번제 의장국을 맡는 내년 상반기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와 관련, 취임 다음날인 지난달 23일 브뤼셀을 방문해 EU집행위 및 유럽의회 지도자들과 만난 뒤 “유럽은 헌법을 필요로 한다. 헌법을 포기해선 안된다.”며 헌법비준의 부활을 시도할 것임을 강력 시사했다. 메르켈 총리는 국제사회 ‘데뷔무대’였던 EU정상회의에서 2007∼2013년 EU 예산안을 놓고 갈등을 빚어온 영국과 프랑스, 신·구 회원국들간을 설득, 타결을 이끌어냄으로써 균형잡힌 ‘중재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세를 몰아 유럽헌법 문제도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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