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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지만 한국 매체가 간과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본 기사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1903년 재정비한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고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한편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았다. 1918년 종교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자산과 토지가 몰수돼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고 재산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일본 당국이 조선선교회를 세르기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한반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지하에 일본 정교회의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 소속 베냐민 대주교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 말 추방당했다. 선교회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미성년부터 ‘평창’ 2개월 전까지… 선수촌 락커룸 등서 짓밟혔다

    미성년부터 ‘평창’ 2개월 전까지… 선수촌 락커룸 등서 짓밟혔다

    국제대회 전후 등 4년간 지속적 범행 “운동 계속할 생각 없냐” 협박·폭행도 조씨 측 “성폭행 말도 안 돼” 강력 부인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1) 선수를 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조재범(37) 전 코치가 심 선수를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추가 고소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심 선수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세종은 지난달 17일 조씨를 성폭력 혐의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고소했다고 8일 밝혔다. 세종은 이날 낸 보도자료에서 “지난해 12월 13일 심 선수와 조씨와의 항소심 관련 회의를 하던 중 심 선수가 만 17세의 미성년자이던 2014년 여름쯤부터 조씨로부터 무차별적 폭행과 폭언, 협박 등을 수단으로 하는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어 “심 선수로부터 처벌의사를 확인했고 신중한 논의 끝에 심 선수를 대리해 지난해 12월 17일 경찰에 조씨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강간상해) 등의 혐의로 추가 고소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세종은 “이번 사건은 국가대표 선수에 대해 그 지도자가 상하관계에 따른 위력을 이용해 폭행과 협박을 수단으로 성폭행해 온 사건으로 도저히 묵과해서는 안 될 중대 범죄”라며 “범죄 발행 장소에 한국체육대 빙상장, 지도자 라커룸,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은 국가 체육시설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해자 보복 등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심 선수가 어렵게 용기를 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소장을 낸 날은 심 선수가 구속 중인 조씨와의 2심 재판에 나와 엄벌해 달라고 호소한 날이다. 심 선수는 고등학교 2학년인 2014년부터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2개월 전까지 4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거나 대회가 끝난 뒤에도 범행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는 협박과 무차별적인 폭행에 시달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조씨는 변호인을 통해 성폭행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조씨 변호인은 SBS와의 통화에서 “성폭행 혐의는 전혀 말도 안 된다는 게 조씨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심 선수 등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씨는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됐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14일로 예정돼 있다. 고소장을 접수한 경기남부청 관계자는 “현재 조씨의 휴대전화와 태블릿PC 등을 압수해 분석하고 있으며 변호인 측과 일정을 조율해 조씨를 불러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美·日 긴급 전화 협의… 폼페이오 “방중과 무역협상은 별개 문제”

    美·日 긴급 전화 협의… 폼페이오 “방중과 무역협상은 별개 문제”

    美국무부 “자세한 것은 中에 물어보라” 무역협상·북미 회담 등 함수관계에 촉각 日 “중대한 관심 갖고 정보 수집·분석 중”미국과 일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네 번째 중국 방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급 전화 협의를 가졌다. 다만 아직 정보가 부족한 상태인 만큼 표면적으로는 반응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 국무부는 7일(현지시간) 김 위원장의 방중에 대한 서울신문의 사실 확인 질의에 “연방정부 셧다운 등으로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만 언론 대응에 나서고 있다”면서 “자세한 것은 중국 정부에 물어보라”고 답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8일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의 방중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과 관련해 “중대한 관심을 갖고 정보 수집·분석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와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이날 30분간 전화통화를 하고 북한을 둘러싼 대응에 관해 긴밀히 연대하기로 했다고 NHK가 보도했다. 미·일 양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한다는 기본 방침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정부는 중국을 등에 업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완화하기 위한 협상 공간을 넓히려는 북한과 대북 영향력을 매개로 무역협상에서 미국에 대한 지렛대를 키우려는 중국이 공조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특히 미·중이 무역전쟁 휴전 이후 첫 협상을 벌인 7~8일이 김 위원장의 방중 기간과 겹치면서 무역협상과 북·미 회담 등에 미칠 함수관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무역협상을 진행 중인 중국이 북한 비핵화에 협조할 것으로 보는가’라는 질문에 “중국은 두 문제(‘북한 비핵화’와 ‘미·중 무역협상’)가 별개라는 점을 미국 측에 명확히 밝혀 왔다”면서 “그들의 행동이 이를 보여 줬고 우리도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는 김 위원장의 방중과 무역협상을 분리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뉴욕타임스는 김 위원장이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전후에 중국을 방문했던 점을 환기시키며 “이번 방중은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북·중 간 동맹을 과시하겠다는 신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기획] 광명시·민간 공동 ‘아이와 맘 편한 도시 만들기’에 팔걷었다

    [기획] 광명시·민간 공동 ‘아이와 맘 편한 도시 만들기’에 팔걷었다

    경기 광명시가 가족친화기업 인증을 늘리고 ‘아이 안심 돌봄터’를 확대하는 등 ‘아이와 맘 편한 도시 만들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광명시의 아이와 맘 편한 정책은 전국에서 수범사례로 평가받으며 지자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광명시의 전국적인 모델사업으로 ‘아이와 맘편한 위원회’ 운영과 ‘아이 안심 돌봄터’ 사업이다. 시는 2016년 6월 전국 최초로 ‘광명시 아이와 맘 편한 위원회’ 구성과 함께 ‘아이와 맘 편한 도시만들기’ 조례를 제정하면서 효과적인 인구정책을 발굴하고 펼쳐 왔다. 지난해 말에는 전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가족친화 우수기관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가족친화기업 인증·‘아이 안심 돌봄터’ 확대 새해에는 가족친화기업 인증을 늘리기 위한 기업 컨설팅을 추진하고 아이와 함께 추억이 담긴 행복한 가족사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임신·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일과 가정 균형을 통한 가족친화적인 광명시를 만들어 나간다는 방침이다. 또 저출산문제를 극복하고 맞벌이 부부의 최대 고민인 아이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 안심 돌봄터’를 확대·추진한다. 돌봄터는 기존에 2곳에서 새로 1곳을 늘려 아이돌봄터와 맘편한 쉼터, 어린이 도서관 등 복합공간으로 이용된다. 돌봄터는 소득과 무관한 초등학교 저학년을 우선으로 방과후에 진행된다. 기존 돌봄터는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신규 돌봄터는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2시간 추가 운영된다. 특히 올해부터 추진되는 보건복지부의 ‘다함께 돌봄’ 사업과 연계해 연차별 1곳씩 추가로 설치해 확대·운영할 계획이다. ●시장·민간이 공동위원장 맡아 출산장려 총력 또 시는 정책홍보와 임신출산지원, 보육교육지원, 일자리주거지원 등 4개분과를 활성화해 아이돌봄 정책발굴을 추진한다. 시장과 민간이 공동위원장을 맡아 57명 위원으로 꾸려졌다. 위원회는 아이와 맘 편한 정책을 자문하고 의견수렴 등 시와 중앙정부 출산 정책을 공유한다. 아이와 맘편한 도시만들기 추진 동력과 출산정책 의견을 조율한다. 이 밖에 부부가 함께하는 임신출산 교실을 운영한다. 오는 3월부터 10월까지 16주 이상 임신부부중 1회 30쌍에 대해 임산부 요가와 모유수유 교육, 신생아 관리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임신 시 산전건강관리 중 선천성기형아 선별검사 본인부담금을 지원해 산모의 안전한 출산도모와 건강한 양육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시는 임신 28주 전후로 임산부 산전교육으로 임신과 출산에 관한 정보 제공과 모유수유 교육을 실시한다. 건강한 임신과 출산 준비를 위해 신혼·예비부부에게 무료 건강검진도 제공한다. 출산후 모유수유를 위해 유축기 등을 필요로 하는 산모에게는 유축기와 함몰유두 교정기, 유두상처 보호기보조용품을 무료 대여한다. ●시간연장형 어린이집 확대, 임신출산육아전문가 방문서비스 사업 추진 시는 여성의 사회·경제활동이 늘어나고 근로형태가 다양화돼 시간연장형 어린이집을 확대하기로 했다. 어린이집은 국공립 3곳을 비롯해 민간 1곳, 가정 1곳 등 모두 5곳을 운영할 예정이다. 출생 6~36개월 미만 영아들에게 전통시장 내 시간제보육실을 운영한다. 간호사나 보육교사 자격을 가진 고학력 고숙련 경력단절 여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임신출산육아전문가 방문서비스 사업을 추진한다. 출산 전후 120개 가정을 대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이들 육아 전문가들은 1주에 한 차례 대상 가정을 방문한다. 박승원 시장은 “임신·출산과 보육·교육, 일자리·주거분야에서 시민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 의견을 종합해 가족친화정책을 펼치는 등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광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꽉 막힌 동네축구…그래도 황의조가 뚫었다

    꽉 막힌 동네축구…그래도 황의조가 뚫었다

    점유율 81%-19%로 경기 지배하고도 밀집 수비에 막혀 후반 22분에야 골맛 59년 만의 정상 복귀 무거운 첫걸음 12일 새벽 1시 키르키스스탄과 2차전한국 축구가 필리핀을 상대로 진땀승을 거두며 59년 만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8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끝난 필리핀과의 조별리그 C조 1차전에서 후반 22분 터진 황의조(감바 오사카)의 한 방에 힘입어 1-0으로 이겼다. 1960년 대회 이후 우승과 인연을 쌓지 못한 한국은 이로써 59년 만의 정상 복귀 행보를 시작했다. 역대 A매치 상대전적에서도 필리핀에 8연승의 절대 우위를 확인했다. 지난해 8월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벤투 감독은 A매치 무패행진을 8경기(4승4무)로 늘렸다. 점유율 81%-19%의 기록이 보여주듯 한국 대표팀은 전후반 내내 그라운드를 장악했다. 그러나 16년 동안 이탈리아 세리에A 4개팀에서 ‘빗장수비’를 설파한 스벤 예란 에릭손 필리핀 감독의 밀집수비에 막혀 쩔쩔 맸다. 벤투 감독은 황의조를 원톱에, 좌우 날개에 황희찬(함부르크)과 이재성(홀슈타인킬)을 세웠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이 공격형 미드필더, 기성용(뉴캐슬)-정우영(알사드) 듀오가 중앙 미드필더로 나섰고, 포백 수비라인에는 김진수-김민재-이용과 주장 김영권(광저우)이 포진했다. 골키퍼 장갑은 주전 수문장 김승규(빗셀 고베)가 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3위의 한국은 필리핀(116위)을 상대로 멀티포를 기대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필리핀은 수비수 다섯 명을 세운 수비라인으로 한국의 예봉을 보란듯이 막아냈다. 한국은 공격의 흐름을 끊는 부정확한 패스와 마무리 부족으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지루한 0-0 균형을 이어갔다. 전반 32분 정우영의 왼쪽 프리킥은 골대 위로 벗어났고, 전반 39분 이용의 크로스를 받은 황의조의 터닝슛은 상대 골키퍼 선방에 막혔다. 되려 필리핀의 반격이 매서웠다. 전반 40분 다이스케 사토의 간결한 롱패스에 이은 파티뇨의 발리슛으로 한국 골문을 두드렸다. 골키퍼 김승규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실점으로 이어질 뻔했다. 후반 들어서도 답답한 흐름이 이어졌지만 18분 구자철 대신 이청용(보훔)이 투입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후반 22분 황의조가 가뭄의 단비같은 골을 터뜨렸는데, 시발점이 된 이청용의 패스가 돋보였다. 기세가 오른 대표팀은 파상공격을 이어갔지만 필리핀의 거센 저항에 막혀 추가골을 터뜨리지 못한 채 1-0 승리에 만족해야 했다. 우승후보 한국과의 첫 경기를 1실점으로 막아낸 에릭손 감독은 “경기 내용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좋은 경기를 했다. 잘 싸운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흡족함을 표시했다. 한국은 12일 새벽 1시 키르키스스탄을 상대로 2차전에 나선다. 앞서 한국과 함께 16강 진출이 가장 유력한 팀으로 꼽힌 같은 조의 중국도 필리핀처럼 사상 첫 본선 무대를 밟은 키르기스스탄에 혼쭐이 났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끄는 중국은 전반전에 먼저 실점을 허용한 뒤 후반 2골을 넣어 가까스로 2-1 역전승으로 승점 3점을 챙겼다. 중국은 전반 42분 선제골을 내준 뒤 후반 5분 상대 골키퍼의 자책골과 32분 역시 골키퍼의 판단 범실로 동점골과 역전골을 거저 얻는 행운도 따랐다. 아시안컵 사상 첫 승과 승점을 얻은 듯 했던 키르키스스탄은 황당한 실수에 고개를 숙였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비극의 시대에 싹튼 한국영화…세계의 은막서 꽃피다

    한국의 영화시장은 2013년을 기점으로 2조원대 매출, 2억명 이상 관객수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고,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도 50% 이상을 유지하는 세계적인 영화 강국입니다. 특히 1인당 연평균 극장 관람 횟수는 4.25회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영화진흥위원회 ‘2017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기준). 이 같은 한국 영화산업의 활기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던 것일까요. 2019년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선임연구원이 쓰는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한국영화의 도전과 성장, 중흥과 불황의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한국 영화산업의 역동성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기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 회는 한국영화사 100년에 대한 지도 그리기로 시작합니다.●한국영화의 탄생과 도전(1919~1945) 한국영화사의 시작은 언제일까. 중국,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서구영화의 수입과 감상으로 영화사(映史)를 시작했다. 첫 영화 촬영이 이루어진 것은 1901년 미국의 여행가 엘리어스 버튼 홈스가 내한한 때로 기록되며, 대중에게 널리 영화가 공개된 것은 1903년 6월 동대문 안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의 상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주도해 제작한 첫 영화는 1919년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다. 연극과 영화가 결합했다는 의미의 연쇄극은 연극 사이사이에 야외의 활극 장면 같은 것을 영화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의 극영화는 아니었지만, 상영된 필름에는 서구 활극영화를 염두에 둔 스펙터클한 장면과 서울의 풍경을 촬영한 실사 장면들이 포함됐다.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한 이유다. 본격적인 극영화는 1923년에 등장했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총독부 문화영화였지만, 조선인 감독 윤백남의 연출로 완결성 있는 극의 형태로 구성됐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고전소설을 영화화한 ‘춘향전’(1923)과 ‘장화홍련전’(1924)이 이어지며 무성영화 시기를 열게 된다. 조선 무성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은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처음 영화라는 매체를 알게 된 계기가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파급력이 컸던 작품이다. 이후 조선영화인들은 1935년 ‘춘향전’을 통해 토키영화(발성영화)를 개척하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지만, 1940년 8월 조선영화령 공포 이후 일제의 전시체제로 편입되면서 민간 차원의 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졌다. ●성장하는 한국영화(1945~1969)해방 이후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든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국영화인들의 극영화 제작은 멈추지 않았고, 이는 6·25전쟁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영화인들의 열정은 전후 한국영화가 성장하고 1960년대 내내 대중오락의 왕좌를 차지하는 기반이 됐다. 1950년대 한국영화사를 성장기라 일컫는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 제작 편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954년 단행된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라는 정책적 호재 그리고 ‘춘향전’(이규환·1955)의 흥행 성공이 기폭제가 돼 1954년 불과 18편을 기록했던 극영화 편수는 1959년부터 100편대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거치며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에 기반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력 삼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영화산업 역시 급격하게 외양이 넓어졌지만, 이에 비해 영화로 만들 이야기가 그 수요를 받쳐주지 못했던 시기였다. 흡족한 시나리오를 만날 수 없었던 감독들은 이미 예술성을 인정받은 소설을 각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1960년대 한국영화가 대중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인 ‘문예영화’였다. 유현목의 ‘오발탄’(1961·이범선 원작)을 비롯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1961·주요한 원작) ‘김약국의 딸들’(유현목·1963·박경리 원작), ‘안개’(김수용·1967·김승옥 원작) 등 1960년대의 많은 작품들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만희의 ‘만추’(1966·필름 유실)는 대중과 평단 모두로부터 골고루 지지받으며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통제와 불황, 암흑 속의 모색(1970~1989)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TV, 즉 안방극장과 외국영화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국적 불명의 무협영화로 연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고, 흥행 방편이었던 에로티시즘 영화가 현대부터 시대극까지 아우르며 시리즈로 양산됐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하고,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도약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의 불황은 수치로 증명된다. 1969년 관객 동원 1억 7300여명으로 정점에 도달했던 영화 관객수는 1974년 1억명 이하로 감소했다. 영화 관객은 늘어나는 TV 보급 대수에 반비례했고, 1969년 229편을 기록했던 제작 편수 역시 1971년 202편에서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인기 대중소설을 새로운 감각의 젊은 감독을 기용해 영화화한 호스티스 영화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별들의 고향’(이장호·1974)의 46만명 흥행, ‘겨울여자’(김호선·1976)의 58만명 흥행 성공(모두 단관 개봉 기준)이 대표적이다. 또한 최인호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하길종의 새로운 감수성과 영화 감각이 화학작용을 일으킨 ‘바보들의 행진’(1975)이 청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80년대에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과 맞물려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 1982년 서울극장 단관에서만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愛麻夫人, 원래 ‘愛馬婦人’이었으나 공윤 검열에서 뜻이 야한 뉘앙스를 풍긴다고 해 ‘말 마(馬)’ 대신 ‘삼 마(麻)’로 교체)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며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이 됐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은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등 세련된 멜로드라마 화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창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1988년 ‘칠수와 만수’로 데뷔한 박광수, ‘성공시대’의 장선우, ‘개그맨’으로 데뷔한 이명세, 1988년 할리우드 직배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영화운동가로서도 활약한 ‘남부군’(1990)의 정지영 등 1980년대 후반의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1990~2018)1988년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UIP 등 할리우드 직배사가 한국시장에 들어왔고, 외화 수입편수가 급증하면서 한국영화 제작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1983년 39.8%에서 1990년 20.2%, 1993년 15.9%로 하락세를 보였다. 지방흥행사로 불리는 토착 흥행 자본과 연계한 기존 영화사들도 덩달아 한국영화 제작에 등을 돌리고 외화 수입에 열중했던 시기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기획영화’ 세대다. 제작 자유화 정책의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고 합리적인 영화인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며, 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1992년 ‘결혼이야기’(김의석)가 개척한 산업의 활기는 ‘접속’(1997)의 명필름,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우노필름 같은 제작명가들이 이어받으며 한국영화의 체질을 바꿔놓았다. 이어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린 ‘쉬리’(1999)가 620만명의 흥행 대기록을 세운 후, 강우석의 ‘실미도’(2003)와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불가능해 보였던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2000년대 한국영화의 화두는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였다. 2003년 등장한 ‘살인의 추억’(봉준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장화, 홍련’(김지운) 등이 흥행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두루 만족시키자 영화저널과 비평계가 명명한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올드보이’(박찬욱)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으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과시했다. 국제영화제의 인정을 받는 작가주의 감독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편제’(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 반열에 오른 임권택이 ‘취화선’(2002)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한 이창동은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보여 준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6년을 정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한국 영화산업은 2012년 이후 관객수, 매출액, 수익성 등을 고루 만족시키며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있다. 또 2013년에는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가 성공하며 한국영화의 세계로 도약하는 기반이 됐다. 과연 한국영화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영화는 언제나 그랬듯이 국가 제도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도, 흥행성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고민을 연동시켰고,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관객과 비평가의 지지를 동시에 받아냈다. 이것이 바로 한국영화의 힘이자 역동성의 바탕일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개혁 동력 꺼질라…文, 경제 올인·속전속결 인사

    개혁 동력 꺼질라…文, 경제 올인·속전속결 인사

    개각도 2월 설 연휴 전후로 단행할 듯 지지율 급락하자 분위기 쇄신 주력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여러모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전쟁 직전까지 갔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올인’했던 지난해와 달리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국정의 무게중심을 ‘경제’ 쪽으로 급속히 옮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던 사람을 잘 바꾸지 않고 신중을 기하느라 조금씩 늦는 듯했던 인사 타이밍도 매우 빨라지고 과감해졌다. 8일 대통령 비서실장 등 청와대 참모진 개편을 단행하는 데 이어 설 연휴(2월 2~6일) 전후 개각도 단행할 전망이다. 모두 예상보다 빠른 인적 개편으로 속전속결식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문 대통령은 7일 중소·벤처기업인 간담회에서 “중소·벤처기업이 사람 중심 경제의 주역”이라며 “가장 시급한 현안이 일자리이고 전체고용의 80%의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힘을 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대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노동계 등 다양한 경제주체들을 차례로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국민경제자문회의(26일), 농업인 간담회(27일)에 이어 신년회(2일·4대그룹 총수)와 스타트업 기업 행사(3일) 등 이달 문 대통령의 공식일정은 온통 경제주체와의 소통에 맞춰져 있다. ‘문재인 정부에 국면전환용 인사는 없다’는 말이 기정사실화될 만큼 한번 발탁하면 믿고 맡겨두는 인사스타일에도 변화 조짐이 뚜렷하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약 20개월)이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 초대 비서실장의 평균임기(약 13개월)를 훌쩍 넘겼지만, 당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던 점을 고려하면 교체 시점이 당겨진 셈이다. 임 실장은 7일 열린 중소·벤처기업인 간담회에 배석하지 않음으로써 교체를 기정사실화했다. 2020년 총선에 나설 현역의원 장관 등을 대상으로 한 개각 역시 이르면 설 연휴 직전 단행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달까지 청와대 개편은 김 위원장의 답방 이후, 개각은 현 정부 출범 2주년을 맞는 5월쯤으로 생각했던 게 사실”이라며 “대통령 의지로 인적쇄신의 가속도가 붙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변화는 대선득표율(41.08%)에 수렴할 만큼 최근 낙폭이 큰 지지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집권 3년차인 올해 반전을 이루지 못하면 개혁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좌초했던 참여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오래전부터 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일해온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원래 원칙을 중시하되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심사숙고를 하되 결심이 서면 거침없는 스타일”이라며 “지난 연말부터 메시지에 ‘수용성’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정수의 B-Side] 누구를 위한 진혼굿, 무엇을 위한 ‘젖가슴’인가

    [이정수의 B-Side] 누구를 위한 진혼굿, 무엇을 위한 ‘젖가슴’인가

    지난 4일 강동수(58) 작가의 소설 ‘언더 더 씨’의 한 구절이 온라인상에서 크게 논란이 됐다. 기자는 이튿날 해당 논란을 ‘세월호 희생자 시점 소설 ‘젖가슴’ 논란… “고민 없는 개저씨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출고했고, 강 작가와 출판사 측의 힐난과 “법적 대응”이라는 심난한 상황에 처했다. 논란은 ‘개저씨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기득권 남성 중심의 기성 한국문학이 단 한 문장에 절묘하게 축약된 것에서 촉발했다. 이에 대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폭넓은 반감이 일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학 흐름이 투영돼 빚어진 사건이었다. 6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강 작가로부터 메일 한 통이 와 있었다. 원고지 19매 분량의 장문의 글이었다. “전직 기자로 30년 ‘신문밥’을 먹었다”며 대선배임을 자처한 그는 “여성의 그 부위를 지칭할 때 젖가슴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유방?”이라고 되물었다. 오랜 세월 문학담당 기자였고 등단한 소설가이자 한 대학의 교수인 그가 적은 질문이 이랬다. 강 작가의 소설 ‘언더 더 씨’ 도입부의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이라는 표현이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문장이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여고생을 화자로 한 1인칭 시점 서술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에서 여성, 생명, 풍요 등을 상징해온 닳고 닳은 상투어 ‘젖가슴’에 국한한 찬반이었다면 논란이 이 정도로 커지진 않았을 터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여고생이 결코 쓰지 않을 법한 어휘와 표현을 한데 모아 놓은 것도 모자라 자두에 앞니를 ‘박아 넣으며’ 자신의 가슴을 떠올린다는, 그 또래의 독자라면 누구도 공감 못할 발상이었기에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강 작가는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해명글에서 ‘언더 더 씨’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종의 문학적 진혼굿이라는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에게 “단편소설 전부를 읽어보지 않고 쓴 엉터리 기사”라고 비난했지만, 차라리 문제의 한 단락만을 봤던 때가 마음이 편했다. 1인칭 화자인 10대 여고생 입장에서 고민한 흔적이 좀체 느껴지지 않는 진혼굿과 바리데기 설정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아직 수습 딱지를 붙이고 있던 기자는 세월호 침몰 소식이 전해진 직후 경기 안산 단원고로 달려갔다. 강당에 모인 학부모들이 언론의 ‘전원 구조’ 오보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금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을 지켜봤다. 이후 몇날며칠 전남 진도 팽목항에 머물며 시신이 한 구씩 수습될 때마다 울부짖던 가족들의 모습, 슬픔과 분노에 몸서리치던 현장 분위기를 생생히 느꼈다. 그렇기에 더 세월호 희생자와 그들을 잃은 가족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망자가 된 10대 여고생이 누군가가 자신의 진혼굿을 한다며 ‘젖가슴’을 입에 담거나 ‘불가사리에 종아리를 한 움큼 파먹히는’ 묘사하는 걸 듣는다면 반기기는커녕 소름 끼쳐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문학에 엄숙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려는 게 아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창작의 자유를 옥죄려는 시도 역시 아니다. 강 작가가 50대 남성 화자의 시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뤘다면 ‘61년생 강동수’가 그대로 드러나는 문체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기성세대의 서사와 은유가 문학이요 예술이라고 배워왔으니까. 그러나 거의 손녀뻘인 화자를 1인칭 시점으로 삼는 어려운 도전을 선택했다면 접근 방식도 당연히 달랐어야 했다. 강 작가는 독자들이 이 문장에서 ‘생기발랄한 젊디젊은 여학생’을 떠올리길 원했지만 대다수 독자들의 귀엔 중년 남성의 탁한 음성만 들렸고, 결과적으로 불쾌한 이질감만 갖게됐다.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려 했다는 강 작가의 주장은 분명 선의였을 거라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개저씨 문학’이라는 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개저씨’는 나이와 지위를 내세워 자신이 옳다고 믿고 큰소리치는 중년 남자를 비하하는 신조어다. 강 작가는 중년 남성에게 너무도 익숙해 새삼 문제될 것 없는 시각에서 글을 썼지만 젊은 세대는 성별을 막론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조롱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수많은 지적마저 해명글을 통해 ‘파블로프의 개’에 비유해 “가련하다”며 귀를 닫은 태도는 스스로 비난을 자처한 대응이었다. 출판사는 한술 더 떠 독자와 기자의 “문해력”을 지적했고, 일련의 비판을 “대중파시즘”으로 받아들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강 작가는 지난해 8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칼럼에서 ‘홍대 몰카 사건’과 ‘안희정 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여성이 세상을 바꾼다”고 역설했다. 그는 칼럼에서 “세상이 변하고 있다”면서 “남성과 사회, 국가가 열린 마음으로 여성들의 항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글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두 ‘극렬 페미니스트’로 몰아붙인 그의 지금 모습과 대비된다. 강 작가와 출판사는 6일 오후 게재했던 각각의 입장을 이날 자정을 전후에 삭제했다. 출판사 호밀밭은 최초 입장문 삭제 후 페이스북 공지사항에 “더 듣고, 더 살펴보려 한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조만간 다시 글을 올리겠다”고 알렸다. 독자들이 강씨와 출판사에 바라는 것은 이 상황을 비껴갈 절묘한 대응책이 아닐 것이다.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진심 어린 사과와 그에 걸맞는 조치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이어령 교수 “암 앓고 있지만 방사선·항암 치료 받지 않는다”

    이어령 교수 “암 앓고 있지만 방사선·항암 치료 받지 않는다”

    이어령(87)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암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어령 교수는 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내가 병을 가진 걸 정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의사가 내게 ‘암입니다’라고 했을 때 ‘철렁’하는 느낌은 있었다”며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다”라고 근황을 전했다. 1934년생으로 알려진 이 교수는 자신의 나이에 대해 “실제 한국 나이는 올해 87세다. 호적에 이름이 뒤늦게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부른다며 “의사가 ‘당신 암이야’ 이랬을 때 나는 받아들였다. 육체도 나의 일부니까.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적상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들어가 1956년 졸업했다. 이후 1960년 같은 대학 대학원 문학석사, 1987년에는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교수는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했고, 같은 해 잡지 ‘문학예술’에 ‘현대시의 환위와 한계’와 ‘비유법논고(攷)’가 추천돼 정식으로 등단했다. 등단 뒤 ‘화전민 지역’, ‘신화 없는 민족’, ‘카타르시스 문학론’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로 등장한 그는 당대의 비평가 ‘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춘수 등과 함께 현대평론가협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경기고 교사, 단국대 전임강사, 이화여대 교수, ‘문학사상’ 주간 등을 역임했다. 1990년에는 문화부의 초대 장관을 맡아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인은 문학평론가인 강인숙 전 건국대 교수다. 서울 종로구에 이어령의 ‘령’과 강인숙의 ‘인’을 딴 영인문학관을 운영 중이다. 강 전 교수는 관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 무신론자였던 이 교수는 딸인 고(故) 이민아 목사의 ‘기적’을 계기로 2007년 기독교를 믿게 됐다. 당시 갑상선암이 재발하고 망막박리로 실명까지 했던 딸은 “남은 평생을 당신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이 교수의 기도 후 놀랍게도 7개월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그는 이 같은 경험을 2010년 펴낸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 자세히 소개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청와대 8일 인사 ‘강기정 정무·윤도한 소통’ 유력…설 전후 개각도

    청와대 8일 인사 ‘강기정 정무·윤도한 소통’ 유력…설 전후 개각도

    노영민 비서실장, 강기정 정무·윤도한 소통수석 ‘유력’김부겸·도종한·김현미·김영춘 장관, 총선 출마 ‘거론’조명균·강경화·박상기·유영민·박능후 장관, 교체설도 외교·안보부처, 대북·비핵화 문제에 교체 시기 조절론청와대는 대통령 비서실장 및 주요 수석비서관 등에 대한 인사 검증을 마무리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최종 결심만 남겨둔 상태인 것으로 7일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10일로 예정된 신년 기자회견 이전인 8일쯤 새로운 비서실장을 포함해 수석비서관급 참모진 교체 인사를 단행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연합뉴스를 통해 “검증은 끝난 것 같다”며 “비서실장 주재로 인사추천위원회(인추위)가 열린 다음 곧바로 발표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인추위가 내일 오후에 열릴 것으로 안다”며 “청와대 비서진 인선 검증 결과는 인추위와 관계없이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 있다”고 전했다. 비서실장에는 노영민 주중대사를 비롯해 조윤제 주미대사 등 복수의 인사가 추천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 대사가 낙점될 것으로 점쳐진다. 3선 국회의원 출신의 노 대사는 2012년 대선 때 문 대통령의 비서실장, 2017년 대선 때는 조직본부장을 맡아 문 대통령과 ‘정치적 동지’ 관계이다. 정무수석에는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강기정 전 의원 임명이 유력하고, 국민소통수석에는 한겨레신문 출신의 김의겸 대변인과 막판에 급부상한 윤도한 전 MBC 논설위원이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 전 위원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또 내년 총선에 나갈 비서관급에 대한 인사도 설 전후 인사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총선 출마가 예상되는 비서관급 인사는 백원우 민정비서관, 송인배 정무비서관, 조한기 1부속비서관, 권혁기 춘추관장 등이다. 그간 국회 문을 꾸준히 두드렸던 정태호 일자리수석도 출마 예상자로 꼽힌다. 지난해 8월 청와대 참모진에 합류한 김영배 정책조정·김우영 제도개혁·민형배 자치발전 비서관 등 구청장 출신 비서관들의 출마도 예상되지만, 이들은 이미 지역구를 탄탄히 다져왔다는 점에서 인사 후순위로 거론된다. 문 대통령은 2기 참모진용을 꾸린 직후 개각 인선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개각 대상으로는 내년 총선에 출마할 정치인 장관, 현 정부 초대 장관으로서 교체 필요성이 제기되는 부처가 거론된다. 많게는 10개 안팎의 ‘대폭 개각’ 가능성도 회자된다. 우선 김부겸 행정안전·도종환 문화체육관광·김현미 국토교통은 초대 장관으로,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현역 국회의원으로, 교체가 유력하다. 역시 초대 장관인 조명균 통일·강경화 외교·박상기 법무·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도 교체 가능성이 거론된다. 외교·안보 부처는 남북관계 및 한반도 비핵화 문제와 맞물려 교체 시기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초선 국회의원 출신인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재임 1년이 넘었고 출마 가능성도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특파원 칼럼] 대일 외교, 더 큰 변동성에 대비해야/김태균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대일 외교, 더 큰 변동성에 대비해야/김태균 도쿄 특파원

    한국과 일본의 ‘레이더 갈등’이 보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서로 주장하는 팩트와 정황이 상반되는 가운데 좀체 보기 드문 수준의 직설적인 공방이 양국 정부 사이에 오고 갔다. 실체가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이 사태가 미국을 축으로 전통적인 안보협력 관계에 있는 두 나라 사이에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일이었나 하는 점이다.또 하나 명백한 팩트는 상황을 심각하게 만든 정점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방위성이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며 레이더 관련 동영상 공개를 반대했음에도 아베 총리가 강행을 지시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 이후 가장 첨예하게 불거진 한국과의 갈등은 아베 총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셈이다. 2012년 8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상륙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얼어붙은 상태에서 취임한 이후 보수우익의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 온 아베 총리였지만, 한국과의 갈등을 스스로 나서 조장한 적은 없었다. 소극적인 갈등 회피를 꾀하는 이른바 ‘전략적 방치’가 그의 한국에 대한 외교 기조였다. 올해 11월 역대 최장수 재임 기록을 달성하게 되는 아베 총리의 지상과제는 뭐니 뭐니 해도 개헌이다. 지금까지 개헌을 입에 올린 총리들은 있었지만, 실제 행동에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후 총리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시절에도 헌법 개정은 단지 연구의 수준에 그쳤고, 해마다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개헌은 훗날의 일로 치부했다. 아베 총리가 자신의 임기 내 개헌을 위해 반드시 쟁취하려는 게 오는 7월 참의원 선거 승리다. 선거에서 실패하면 개헌이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이고, 더이상 총리 연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찌감치 ‘레임덕’이 찾아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베 총리는 또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 진영을 달래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4일 신년 회견을 통해 공식화한 차기 일왕 연호의 ‘4월 1일 조기 공표’다. 현 아키히토 일왕 시대의 연호 ‘헤이세이’를 이을 연호를 새 일왕 즉위(5월 1일) 한 달 전에 미리 발표해 전산 시스템 변경 등에 따르는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의 주류 보수층은 한 명의 일왕에게는 하나의 연호만을 둔다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현 일왕 재임 중 연호 공표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와 본격화할 ‘쿠릴열도 4개섬’(일본명 북방영토) 반환 협상과 관련해서도 아베 총리는 지지 세력의 공격에 직면해 있다. 아베 총리는 러시아가 수용할 수 없는 ‘4개섬 일괄 반환’을 주장해서는 영토분쟁 타결과 평화조약 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사실상 ‘2개섬 우선 반환’으로 요구 수위를 완화했다. 이에 대해 보수 진영은 원안대로 협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에 대응해 올 4월부터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로 지난해 말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수층으로부터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 정가와 관가에서는 이번 레이더 갈등에서 보인 아베 총리의 강경 대응이 그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실망한 지지층을 달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헌 등을 향한 그의 행보가 빨라질수록, 임기 말이 하루하루 가까워져 갈수록 내부 단속과 반발 무마를 위해 외교적 수단에 기대려는 유혹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일본의 ‘전략적 방치’를 넘어선 ‘전략적 갈등 유발’에 대한 우리의 대비가 필요해진 셈이다. 한·일 관계의 변동성이 커진 만큼 대일 외교 전략의 기조와 원칙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windsea@seoul.co.kr
  • 청와대, 다음주부터 참모진 대폭 교체…‘인적개편’ 핵심부터 바꾼다

    청와대, 다음주부터 참모진 대폭 교체…‘인적개편’ 핵심부터 바꾼다

    청와대가 설 연휴를 전후로 인적개편 대상을 두 팀으로 나눠 청와대 참모들을 교체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적개편의 핵심인 비서실장 인사는 이르면 다음 주, 늦어도 설(2월5일) 연휴 전인 이달 안에는 단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소통수석, 정무수석 인사도 이달 내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정태호 일자리수석, 백원우 민정비서관, 송인배 정무비서관, 조한기 1부속비서관, 권혁기 춘추관장, 김영배 정책조정비서관 등 총선 출마자로 거론되는 참모들에 대한 인사는 설 이후에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한번에 인적개편을 단행하려면 검증에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개편 규모가 애초 예상보다 더 커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4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인적개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들은 설 전에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최대한 당겨서 할 것”이라며 “검증 문제도 있고, 사람을 못 찾는 문제도 있어 두 팀으로 나눠서 하되 최대한 하는 데까지는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이르면 다음 주 참모진을 교체할 것이란 보도가 나오는데, 시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라며 “자리에 걸맞은 사람을 찾는 중이고 총선에 출마할 인사들을 언제 교체하는 게 좋을 것인지 등 정무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다”고 했다. 설 이전에 청와대 참모진 개편을 빠르게 단행해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집권 3년차 국정운영에 속도를 내는 한편, 설 연휴 밥상머리 민심을 잡겠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그러려면 적어도 국민이 납득하고 이후 국정운영에 기대를 걸게 할 만한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 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고심도 커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문 대통령이 최종 결심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후임 비서실장으로는 노영민 주중 대사가 유력한 가운데 조윤제 주미대사,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오르내린다. 청와대 관계자는 “비서실장 후보는 복수로 올라와 있는데, 현재 언론에서 ‘유력’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조금 더 유력한 것은 맞다”고 했다. 노 대사는 주중 대사가 되고서도 차기 비서실장 ‘0순위’로 거론돼온 인물이다. 총선 출마를 준비해야 하는 한병도 정무수석의 후임으로는 강기정 전 의원, 청와대 대변인 출신 박수현 국회의장 비서실장, 이철희 민주당 의원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일부에선 문 대통령이 박 실장에게 정무수석을 제안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박 실장은 “청와대로부터 언질을 받은 적도, 인사검증에 필요한 자료를 내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후임에는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승진이동하거나 김성수 민주당 의원이 갈 가능성이 거론된다. 문 대통령은 언론의 ‘경제실패 프레임’ 탓에 지난해 소기의 경제 성과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며 소통 강화를 거듭 강조해왔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유임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북·미 정상회담 등 올해 예정된 굵직한 한반도 비핵화 일정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다만 일부에선 서훈 국정원장이 국가안보실장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가축 살처분 4명 중 3명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인권위 제도개선 권고

    “가축 살처분 4명 중 3명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인권위 제도개선 권고

    가축을 살처분한 4명 중 3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가축 살처분 작업 참여자의 트라우마 예방과 치료를 위한 제도개선을 농림축산식품부와 보건복지부에 권고했다.4일 인권위가 의뢰해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한 ‘가축매몰(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축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 및 공중방역 수의사 268명 중 76.0%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다. 살처분 참여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평균점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추정하는 점수인 24~25점보다 높은 41.47점이었다. 또한 조사대상의 우울 평균점수는 14.99점으로 나타나 평균적으로 경우울증(10~15점) 증상을 보였으며, 23.1%는 중우울증(24~63점)에 해당하는 점수를 나타냈다. 가축 전염병인 구제역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공무원 및 공중방역 수의사 등은 많은 수의 가축들을 살처분 한다. 2010년 11월 경북 안동에서 발생해 전국으로 확산된 이른바 구제역 사태 때 공무원 48만 8000명, 군인 33만 8000명, 경찰 14만 6000명, 소방 공무원 30만 6000명, 민간인 69만 2000명(이하 누적 인원)이 동원돼 145일 동안 약 350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했다. 인권위는 “살처분 작업에 참여한 공무원 등이 자살이나 과로로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이에 살처분 작업 참여자가 겪는 트라우마의 심각성과 심리 지원의 문제가 대두됐다”고 제도개선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 제49조 및 시행령에 따르면 가축 살처분 참여자에게 신청을 받아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심리적·정신적 치료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권위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사건에 대해 다시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회피반응을 보여 스스로 적극적인 치료를 신청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인권위는 농림축산식품부가 가축 살처분 작업 참여자들에게 심리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무적으로 안내하고, 작업 전후로 심리적·신체적 증상 체크리스트를 등을 통해 고위험군을 초기에 발견해 치료를 지원하는 등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살처분 작업에 일용직 노동자나 이주노동자 등의 참여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가축 살처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인권위는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가 가축 살처분 작업 참여자의 트라우마에 관한 조사연구를 실시해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사설] 북·미, 2차 정상회담 실행에 옮길 협상을 서둘러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고 멀지 않은 시점에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트위터에 “나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고대한다”고 밝힌 데 이어 연초 북·미 정상회담 의사를 공식화했다. 북·미 정상이 새해 벽두 김 위원장의 신년사 발표를 전후로 해 ‘트윗 화답’과 ‘친서 외교’ 등으로 소통을 이어 가며 ‘톱다운’ 해결 의지를 분명히 함에 따라 2차 정상회담 추진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지난해 말에서 올해 초로 연기된 상태에서 두 정상이 새해 들어 회담에 대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천명함에 따라 실행에 옮길 협상을 서둘러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마주 앉으려면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가장 큰 것이 북한의 진전된 비핵화 추가 조치와 미국의 제재완화를 뜻하는 상응 조치의 맞교환이다. 김 위원장이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 우리로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힌 만큼 북·미 협상은 지난해와 달리 북한으로선 배수의 진을 친 상태가 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1일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등 유엔 결의안 위반 및 불법행위를 중단할 때까지 제재를 계속 가하도록 하는 내용의 ‘아시아 안심법안’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선 비핵화, 후 보상 원칙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 가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다. 정상들의 테이블에 올려놓을 의제를 가다듬기 위해서는 지난해 결국 성사되지 못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실무협의, 나아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고위급회담이 선결돼야 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부위원장의 지난해 11월 초 뉴욕 고위급회담은 막판에 갑작스럽게 불발한 후 두 달 가까이 재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고위급회담으로 협상 물꼬를 다시 트고, 실무회담을 시작해 정상회담 전까지 비핵화와 상응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조율해야 한다. 셧다운 상태에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대북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둘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북·미가 올바른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중재자인 우리 정부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준비 차원의 접촉·소통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란다. 북·미 양쪽을 오가며 북·미 정상회담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 오세훈·홍준표 ‘2·27전대’ 양강 구도 되나

    오세훈·홍준표 ‘2·27전대’ 양강 구도 되나

    자유한국당이 차기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다음달 27일 열기로 잠정 결정함에 따라 당권을 노리는 주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현재 당 안팎에서 자천타천 거론되는 후보는 1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오는 14일 비상대책위원회가 전대 날짜를 최종 의결하는 시점을 전후로 전대 출마 선언에 나설 전망이다. 아직 선거 초반이긴 하지만 인지도와 당내 역학 구도상 일단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홍준표 전 대표가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는 관측이 많다. 오 전 시장은 일찌감치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이미 국회의원회관을 돌며 한국당 의원 대부분과 만난 오 전 시장은 최근 신년교례회 등에 참석하며 지역 당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있다. 3일에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선을 하며 버티고 있는 서울 광진을 당협위원장 선발 면접에 참여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한때 전대 불출마설이 돌았던 홍준표 전 대표는 최근 당내 문제를 거론하며 출마를 암시하고 있다. 홍 전 대표는 3일 페이스북에 “나는 정치 입문 후 23년 동안 당내 인사들을 정적(政敵)으로 생각해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나를 정적으로 삼아야 클 수 있다고 판단한 인사들을 보면 측은하다”며 “하나 되는 한국당을 생각해 나를 보지 말고 밖에 있는 정적을 보라”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홍 전 대표가 보수결집, 대여투쟁 등을 강조하고 나선 건 결국 전대 출마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전대 출마와 관련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당장은 황 전 총리가 대선에 더 뜻을 두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막판에 전대 출마를 선언할 경우 이번 선거의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다른 후보들도 열심히 표밭을 돌고 있다. 원내에서는 심재철(5선), 정우택·정진석·주호영·조경태(4선), 김성태(3선), 김진태(재선) 의원 등이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원외의 김문수 전 경기지사, 김태호 전 경남지사도 다크호스로 평가된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1919년 3·1운동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잘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 머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상하이정부·노령정부 통합 앞서 갈등 표출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상하이 상업지역 화이하이중루. 10·20세대가 주로 찾는 거리 한 모퉁이에 글로벌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6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하비로 청사’라고 부르는 곳으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정부가 그해 8∼10월 사용했다. 당시 임정이 청사로 쓰던 2층 양옥은 1920~1930년대 철거됐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개헌을 통해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여기서 결정해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상하이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는 세 임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상하이정부는 정부 수립을 전후해 양측 인사들이 꾸준히 교류한 터라 통합에 거부감이 적었다. 한성정부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정부 안창호(1878~1938)와 협상을 벌인 이규갑(1887~1970)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양측의 우호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도산과 두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나는 상하이정부가 먼저 생겼으니 우리 한성정부가 합류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도산은 한성정부야말로 국내 13도 대표가 총의를 모아 만든 정부이니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며 (내 제안을) 사양했다.”●안창호 “해산 후 한성 밑으로 모이자” 제안 사실상 상하이정부와 노령정부 간 통합 논의만 남았다. 노령정부가 먼저 나섰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러시아에 행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정했다. 노령정부는 5월 특사 원세훈(1887~1959)을 중국에 보내 이를 제안했다. 상하이정부에서도 안창호가 본격적인 통합 협상에 나섰다. 6월 17일 상하이정부 국무원(행정부)은 노령정부와의 협의 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되, 새 의회는 러시아로 이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뒀다. 하지만 의정원은 상하이에 계속 남고 싶었던 탓인지 안건을 거부하고 국무원에 돌려보냈다.●노령정부 불만 터져 불완전한 결합 이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안창호는 새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노령정부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 밑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제3지대 창당론’이 될 것 같다. 단, 통합 정부는 ‘한성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르고,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상하이정부, 한성을 ‘우회 상장’ 통로로 여겨 노령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8월 30일 총회를 열고 의회를 해산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해산하기로 한 의회와 행정부를 그대로 둔 것이다. 정부 조직만 한성정부 형태로 바꿔놨다. 비유컨대 건설업자가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로 약속한 뒤, 실제로는 건물 도면에 맞춰 리모델링만 한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실제가 아닌) 정신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정통성은 있지만 실체가 없던 한성정부를 동등한 통합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울에서 생겨난 정부라는 법통을 흡수하려는 ‘우회 상장’ 통로로 여긴 듯 하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상하이정부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려다가 생겨난 일”이라고 분석했다.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문창범(1870~1938)과 이동휘(1873~1935)는 “상하이가 우릴 속였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문창범은 연해주로 돌아가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선언했다. 통합 임정으로서는 미래 정부 활동 자금줄이자 무장 투쟁 동력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도 새 내각 불참을 선언했다. 임정 통합 중심축 이동휘, 독립자금 좌파세력 유용으로 치명타이승만(1875~1965)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통합 임정이 시작도 전에 분열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동휘는 안창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11월 3일 통합 임정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과 재무총장 이시영(1868~1953), 법무총장 신규식(1880~1922) 등도 함께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세 임정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정부로 다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하이정부가 생겨난 4월 11일이 아니라 세 임정을 통합한 9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상하이정부가 노령정부를 모두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통합 임정에 힘 실어 준 아전의 아들 이동휘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가슴이 떡 벌어졌다. 군인답게 콧수염을 길러 마치 프랑스 원수 같았다. 민족운동의 거성인 동시에 저명한 혁명가였다. 열렬한 행동주의자였으며 불덩이 같은 신념을 지녔다. 천군만마를 노호할 듯한 기개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거인이었다.”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가 이동휘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뻔한 통합 임정에 극적으로 합류해 독립운동 중심체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에게서 받은 통합 임정 운영자금을 자파(自派) 유지비로 돌려써 독립운동 분열도 초래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통인(군수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이 됐다. 23살 때 탐관오리였던 단천군수 홍종후가 잔칫날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 추행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술상 옆에 놓인 화로를 군수에게 끼얹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했다가 함경도 명천 출신 관료 이용익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군 장교가 됐다. 이후 일제가 그의 애국심을 우려해 수차례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자 1913년 북간도로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1914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당시 일본은 러시아 영토를 탐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벌여 단박에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일본군과 맞서던 러시아 볼세비키(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북간도로 넘어가 중국과 연합해 대일 독립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도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제출한 권익 확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한편이 돼 이 역시 무산됐다. 1918년 5월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군사학교 설립과 한인적위대 조직에도 나섰다. 애초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1운동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설립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조선 지식인들이 기대를 건 파리강화회의 역시 식민지 해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상하이 측과 정치 싸움을 벌여선 대국(일본)을 파괴할 수 없다”며 통합 임정에 뛰어들었다. 그의 결단 덕분에 통합 임정은 ‘이승만(한성)-안창호(상하이)-이동휘(노령)’라는 3대 축을 갖춰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독립자금 전용 탓 신뢰 잃어… 국제사회도 외면 그는 씻기 힘든 과오도 남겼다. 1920년 1월 통합 임정은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생몰연대 미상)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보냈다. 레닌 정부와 접촉해 정식국가로 승인받고 독립 자금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받기로 하고 1차분 60만 루블을 얻어냈다. 지폐의 양이 많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일단 40만 루블을 김립(1880~1922)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을 통합 임정에 전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좌파 운동세력에게 나눠줬다. 일부는 개인 용도로도 썼다. 이동휘는 소련 자금 배달사고의 배후로 지목돼 입지가 좁아졌다. 1921년 1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사회주의 계열은 신뢰를 잃고 독립운동 주류에서 배제됐다. 통합 임정도 국제적으로 평판이 나빠져 운영 자금 마련이 더 힘들어졌다. 이후 이동휘는 연해주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주말의 커튼콜]인생이 베를린필, 가족이 베를린필인 남자…플루티스트 안드레아스 블라우

    [주말의 커튼콜]인생이 베를린필, 가족이 베를린필인 남자…플루티스트 안드레아스 블라우

    최고 명문 베를린필 전후세대 대표하는 연주자46년간 악단 인생 마무리하고 독주자로 첫 내한 ※주말의 커튼콜’은 최근 화제가 됐거나 내한을 앞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아버지 직장의 최고위직 인사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라 전체가 추모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텔레비전, 라디오에서는 모든 프로그램이 중단됐고, 하루종일 클래식 음악만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났느냐’고 아버지에게 묻자 베를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46년간 베를린필의 플루트 수석을 지낸 독일의 플루티스트 안드레아스 블라우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베를린필에 대한 기억의 한 조각이다. 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있는 첫 내한 리사이틀을 앞두고 만난 블라우는 “저는 베를린필과 함께 자랐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베를린필과 함께 자란 남자 세계 최고 관현악단 베를린필은 보통 연주자들에게는 다다를 수 없는 꿈과 같은 곳이지만, 블라우에게는 삶 자체였다. 아버지 요하네스 블라우는 베를린필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고, 어린시절 집을 오가며 만난 아버지의 지인들도 베를린필 단원들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버지 친구인 베를린필 트럼펫 수석주자의 딸이었다. 현재 베를린필 오보에 수석인 알브레히트 마이어는 그의 사위가 됐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 단원들끼리 서로 집으로 초대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연으로 이어진 사이가 됐다. 말그대로 인생이 베를린필이고, 가족이 베를린필인 셈이었다. 아버지가 베를린필 단원이 된 때는 그가 태어나기 1년전인 1948년이었고,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를린필 단원이 된 때는 1969년이었다. 예비단원이었던 20세의 블라우는 한 연주회를 앞두고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이자 ‘클래식계 제왕’ 카라얀 측의 연락을 받았다. 그날 저녁 연주회에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연주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카라얀이 낸 ‘불시의 시험’을 통과한 그는 카라얀, 아바도, 사이먼 래틀 등 거장들과 함께 베를린필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연주자로 2015년까지 베를린필에 몸담게 된다.“연주자가 지휘자에 맞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음악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따라야 합니다.” 지휘자의 리더십에 대한 존중. 블라우는 이를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직업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연주자들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지시하지 않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연주자들에게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고 소통하는 지휘자가 더 낫다고도 설명했다. 그는 “카라얀과의 모차르트 음반 레코딩 때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음반을 들어보니 (카라얀의 의도가) 이해가 됐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자기만의 색깔 찾는 연주해야” 그가 46년간 베를린필에 몸담은 사이 환경도 많이 변화했다. 베를린 내에도 터키인 등 외국인이 많아졌고, 독일 내 오케스트라에도 아시아 등 외국 단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내부적으로는 독일 고유의 사운드를 잃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블라우 역시 독일 악단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시아 연주자들의 성장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는 “유럽음악을 하는 한국학생들이 스스로 발전해 유럽 내에서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드는 것 같다”며 “더불어 베를린필 소속으로 아시아투어를 왔을 때 객석의 젊은 관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기쁨도 컸다”고 말했다. 블라우는 5일 리사이틀에 이어 6~8일 마스터클래스 일정도 소화한다. 그는 “콩쿠르 심사를 나가보면 젊은 연주자들의 스타일이 너무 한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며 “물론 음반이나 유튜브를 참조하고 연주를 시작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91억 9263만 1770번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91억 9263만 1770번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바위를 긁어 날짜를 표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늘 며칠이더라? 지금 몇 시지? 하는 질문을 늘 달고 다니는 우리는 항상 시간을 궁금해한다. 날짜를 알아야만 마음이 놓이는 존재가 인간이다.시간을 안다는 것은 사실 인류생존의 기본조건이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눈물겨운 적응 과정을 거치던 존재였던 연약한 초기 인류에게 머리 위를 빙빙 도는 콘도르를 보고 동물 사체의 위치를 찾아낸 그 순간부터 하이에나가 들이닥치기 전 한 조각의 고기라도 더 뜯어내어 도망치기까지의 시간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온갖 눈칫밥을 먹어가며 근근이 살아남아 석기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사냥하며 서서히 뇌의 크기를 키워나가던 인류는 언제부턴가 여러 번 달이 찼다 기울면 들소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에 맞춰 돌창촉을 다듬고 깊은 함정을 파야 했다. 마음껏 사냥할 수 있는 그때를 알아야만 했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기록해야 했다. 최초의 시계는 아마도 특별한 도구가 없어도 시간을 알 수 있었던 해시계였을 것이다. 발 딛고 살던 지구 자체가 시계였던 셈인데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대략적인 때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석영 결정이 3만 2768번 진동하는 시간을 1초라고 하던 때도 지나 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양자 진동하는 시간을 1초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대단한 과학의 시대다. 오늘날로 치면 달력 같은 유물이 등장한 때는 대개 3만 년을 전후한 후기 구석기시대로 알려져 있다. 손바닥만 한 뼛조각 등에 이상한 점들을 찍은 유물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점들이 달의 운행을 표시하는 달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이 시기의 동굴벽화에 털갈이 시기 들소의 특징을 정확히 묘사한 그림들도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확실히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언제나 시간은 우리 인류에게 삶 자체와 같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흘러만 간다.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수백만 년 전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언제나 시간은 앞을 향해 흘러만 갔다. 우리에게 시간은 유형이면서도 무형인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떤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어떤 때는 느리게 가는 것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고 한다. 느리게 가기도 하고 빨리 가기도 하는 시간은 마음의 시간이었다는 결론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형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늘 똑같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모두 현재다. 과거는 지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며, 미래는 우리의 기대와 전망 속에서 존재한다’고 했다. 유형의 시간은 그저 흘러가지만 무형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라니 참 멋진 말이다. 2019년 새해는 즐거운 현재가 이어지길 소망한다.
  • ‘경포대 프레임’ 경계하는 文… 올해 경제 성과 ‘올인’

    ‘경포대 프레임’ 경계하는 文… 올해 경제 성과 ‘올인’

    정부 비판 일부 언론에 정치적 의도 의심 저평가 지속 땐 참여정부처럼 국정 발목 일각 “경제정책 성과 체감도 낮다” 지적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경제 실패 프레임’을 언급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은 “성과가 있어도 우리 사회에 ‘경제 실패’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어 그 성과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며 “취사선택해서 보도하고 싶은 것만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상황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프레임’이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쓴 것은 처음이다. 경제위기가 현 정부의 정책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전에도 대통령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경제 실패 프레임’을 언급했지만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청와대가 이번에는 대통령의 ‘작심 발언’을 공개한 데는 경제 분야에서 거둔 소기의 성과마저 싸잡혀서 언론에 의해 저평가되는 현상이 지속될 경우 프레임에 갇혀 정책 추진 동력이 상실될 것이란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 야당이 퍼뜨린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프레임’에 대해 문 대통령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청와대의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경제 정책 중에 성과가 있는 것은 그것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야 하는데 ‘기승전(起承轉) 경제정책 실패, 경제 위기’라는 식으로 다루는 일부 언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꼽은 대표적 ‘왜곡 보도’ 사례는 소비 지표다. 문 대통령은 여당 지도부 오찬에서 “예를 들어 올해 소비는 지표상 좋게 나타났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소비심리 지수의 지속적 악화를 얘기하며 소비가 계속 안 되는 것처럼 일관되게 보도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제정책을 맡고 있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경제 실패론과 위기론을 계속 얘기하면 위축된 국민들이 지갑을 닫아 소비 심리가 더 악화하고 경제는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했다. 이어 “2017년 경제성장률 3.1%, 2018년은 2.7% 전후, 2019년인 올해도 2.7% 전후로 국내 가용 자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범위에서 경제가 소위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며 “올해는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산업을 육성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경제 실패 프레임’만을 탓하기에는 고용 등 체감경기가 너무 나쁘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2019년 1월 중소기업 경기 전망 조사’를 한 결과 중소기업이 체감하는 경기 지표는 전월보다 2.9포인트 낮은 81.3으로 나타났다. 이에 문 대통령 역시 최저임금과 52시간 정책을 일부 수정하는 등 여론의 지적을 시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성과를 내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며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할 것을 강조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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