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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무원 하복 일제·군정잔재 여전”

    ◎패션 평론가 김청씨,남방셔츠·새마을복 비판/남방셔츠/2차대전때 일본군의 여름 군복/새마을복/일 국민복 변형… 5공때 즐겨 착용 『옷차림은 그 사람의 삶의 거울이며 크게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한 국가 공무원들의 복장이 정치체제의 성격,국민에 대한 서비스 정도를 알게하는 가늠자란 사실은 당연한 것이지요』 계간 「패션문화」 발행인이며 패션평론가인 김청씨(54)는 공무원들이 남방셔츠를 많이 입는 여름철만 되면 할말이 많다고 한다.TV를 통해 입은 모습이 많이 보이는 남방셔츠가 「새마을복」과 함께 일제와 군부정권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남방셔츠란 2차대전때 일본군들이 남방의 여러섬에서 여름철 군복으로 입었던 셔츠입니다.문민시대에 들어선 지금도 정부관리들이 모내기나 가뭄피해를 입은 농촌에 격려차 나갈때 권위적이고 군부 냄새가 나는 남방셔츠나 새마을복을 입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일하기 좋은 밝은 색의 스포츠의류나 캐주얼의류가 시중에 많이 나와있는데 말입니다』김씨는 광복이후 오늘까지 정치인과 관리들의 옷차림변화를 보면 정치세태의 변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있다고 말한다.즉 46년 중앙청 총독부 관리들에게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식 아이비스타일의 색코트를 입은 반면,일제 티를 못벗었던 당시 관리들은 일제시대 군복이었다는 설명.또 5·16군사쿠데타후 2공화국때는 군복이,3공화국때는 일제 국민복을 살짝 변형한 재건복이 주로 입혀졌다는 사실을 들고있다. 『국민복의 특징인 목을 높이 감싸는 스탠(Soutien)칼라에서 미군의 전투복(배틀재킷)의 스포츠칼라로 바뀌고 5개이던 앞단추가 4개로,덧주머니가 조금 덜 불룩해 진것이 재건복이죠.이 재건복 착용은 전두환대통령때에도 이어졌는데 새마을복으로 이름이 바뀌어 남방셔츠위에 걸쳐 입었습니다』 6공화국 노태우대통령시기 「일하는 분위기를 진작하기위해」여름이면 남방셔츠 위에 양복을 입거나 새마을복을 껴입는 형태가 흔했는데 최근에도 상급관료들의 노타이 차림시 흔히 볼 수있는 스타일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김씨는 대민 봉사체제가 자리 잡힌 나라의 공무원들은 예의를 갖춘 옷을 입는다며 노타이 차림의 남방셔츠를 입거나 「굳이 공무원임을 나타내는 새마을복」을 입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유니폼이 꼭 필요하다면 친절한 이미지의 심미적인 옷으로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국민은 손님이니까요』
  • 주문진앞바다 발견 변사체/북한군 공작원으로 판명

    ◎국방부,사체분석 확인 지난 4일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항앞 해상에서 발견된 무장군인의 변사체는 북한 인민무력부 1군단 정찰대대 소속 정찰조원(간첩)으로 확인됐다. 국방부는 7일 이 사체를 정밀분석한 결과,북한간첩들이 주로 착용하는 국군의 구형 전투복을 입고 있었고 특히 침투와 정찰에 필요한 권총·수류탄·공기통(일명 산소통) 등을 비롯,총 37종 91점의 장비를 휴대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 곡 조경한옹(외언내언)

    백강 조경한옹.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증 마지막 생존자였다.그가 7일 영면했다.1900년생이니 93세.천수를 누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장수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하는 동안 흉악한 적탄이 그를 「피해 갔기」때문이다.「백강 회고록」속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풍성함과 전멸 당한 적군의 엄청난 수에 있어 나라 망한후 항일전사상 가장 큰 기록』이라고 자평하는 것이 왕청현 대전자대첩.그런데 이 싸움에서 『기이하고 다행한 일은 아군측에 1인의 전사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그의 바지 저고리를 뚫고간 총알은 세군데.그렇건만 사람은 안다쳤다.그는 광복후 그 전투복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6·25때 없어졌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네살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문재가 빛났던 듯하다.여섯살 때 촌숙에서 한자 석자씩 모아 한 구절을 만드는 시를 지은 것이 회고록에 적혀 있다.­운기산 하처거 풍동수 하처래 거래자 개자연(구름은 산에서 일어나 어디로 가며 바람은 나무를 흔드니 어디서 왔느냐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14살때 친구한테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빌려 읽고부터 사상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평생을 애국·우국 일념으로 고고하게 살아온 지사.그의 회고록을 읽느라면 고개가 수그러진다.그는 재작년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기자를 만나 세상을 걱정한다.돈과 권력만 생각하는 세상 풍조를.『정치인들이 권모술수만 부리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게 마련이지요』『더 늦기 전에 인륜을 바로잡아야 해요』.평소 입만 열면 민주정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백강옹.여러해 전 병석에 누워 위독했을 때는 『포용하고 조화하라』고 거푸거푸 되뇌었다.이악스러워지면서 배타로 흐르는 세속을 안타까워함이었으리라. 여섯살 어린 나이로 읊었던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는 시구 그대로 그 또한 자연으로 돌아 간다.하지만 나라와 겨레 위해 살아 왔던 생애의 빛은 이승에 남아 영원히 귀감으로 되는 것이리라.명복을 빈다.
  • “기합대신 설득” 민주 병영 가꾼다/국군의 날 르포

    ◎“구타 일소운동 28개월” 육군 「번개부대」에 가다/“강압엔 반발뿐”… 대화를 최고 덕목으로/간부들,맏형역 앞장… 가족분위기 연출/신병 교육때부터 합리성 강조… 부대내 사고예방 총력 육군번개부대 내무반에는 친형제와 같은 전우애로 화기가 넘쳐흐른다. 분대장과 소대장들은 소대원을 아우처럼 아끼고 연대장과 사단장은 소대장을 조카나 아들처럼 돌봄으로써 신뢰와 정으로 뭉쳐져있다.번개부대에서 구타와 기합을 없애기위해 전임 사단장 최승우소장은 신병훈련때부터 대화와 설득을 강조하는 미국식 민주병영운영방식을 채택했다. 대부분 고교졸업이상 대학재학생들인 신병들에게 20∼30년전의 구타와 기합에 의한 강압적인 교육은 반발이 커서 역효과를 낸다는 판단아래 내무반에 일간신문과 텔레비전을 보게하고 내무반장과 소대장의 정신교육만으로도 강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소신에서 가혹행위를 없앴다. ○정과 신뢰에 바탕 번개부대는 지난 89년6월부터 구타일소운동을 벌여 2년4개월동안 단 한건도 구타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전군의모범부대가 됐다. 그동안 강한 기강유지를 위해서 최소한도의 구타와 기합은 「필요악」이라고 인정하며 영내의 구타행위를 묵인하던 지휘관들의 의식이 크게 바뀌어 전군으로 확산되고 있다. 번개부대에는 장교가 사병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는 일도 없고 내무반에도 이른바 「빠따」가 없으며 연병장이나 훈련장에서 선착순 집합이라는 억지단체기합도 사라진지 오래다. 번개부대의 목표는 「정과 신뢰」로 일체가 된 깨어있는 민주화군대육성이다. 『기합이 심했던 일본군과 독일군도 2차대전때 민주화된 미국군과 영국군에 망하고 말았지않습니까.기합이 센 군대는 전투에는 이길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모두 졌지요』 사단장 서경석소장(ROTC3기)은 구타없이도 강한 부대를 운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우리군은 부끄럽게도 가혹행위에 대한 좋지않은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지금은 때리면 반항심만 커질 뿐입니다.사고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요』 소대장 경규상소위(25)는 『부대원의 36%가 외아들이거나 2대독자』라며 『모두가가정에서 귀한 자식으로 회초리 한대 안맞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못 기합을 주었다가는 기절하거나 자해행위를 하는등 역효과가 날수 있다』고 말했다. 경소위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병들을 야만적인 매질을 해서 공포감을 주어 소대를 지휘할 때는 지났다』면서 『이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뢰감을 줄 때 아우처럼 순종한다』고 말했다. 번개부대처럼 전군에서는 구타일소운동을 꾸준히 벌여 89년에 25건이었던 전군의 폭행치사 사건이 90년에는 15건,올해는 8건으로 줄어들고 있다. 상급자의 부당한 가혹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총기난사 사건이나 자살사고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매질 지휘는 구악 이진삼육군참모총장은 지난 8월 대대장급이상 지휘관에게 보낸 지휘서신을 통해 『전우 한사람의 생명은 전차 1천대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며 『올해는 악성군기사고를 완전 척결하는 일대 전기로 삼아 달라』고 당부했다. 지난해 12월 입대한 김민완일병(24)은 『입대하기 전에는 병영생활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으로 걱정이 많았으나 10개월이 지나는동안 한번도 구타를 당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대화와 설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입대한지 두달된 박태완훈병(28)은 『아버지와 아저씨들이 군대생활을 할 때는 춥고 배고프고 매일 얻어 맞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하는데 6주 훈련동안 한번도 배가 고프거나 맞아본 일이 없다』면서 다만 훈련이 육체적으로 고되기 때문에 잠을 좀 실컷 잤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붉은 벽돌로 된 2층 15평정도의 내무반에 10여명씩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중앙집중난방식에다 수세식화장실·대형목욕탕·세탁소·체육관시설까지 갖추어 도시의 여관급 수준이다. 인천시와 부천시 경계에 위치한 번개부대는 일제시대 때부터 군용시설이 들어서 있던 곳이어서 1백10만여평의 부지에는 수령 50∼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아 녹지공간이 부족한 인천과 부천등지의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소풍및 자연학습장으로 개방되고 있다. ○정신교육에 중점 신병처럼 짧은 머리에 전투복차림의 서경석소장은 『영국이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전쟁 때 다수의 아르헨티나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르헨티나군 장교들이 사병들에게 심한 기합을 주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해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우리 부대는 사병이 강한 나라가 전쟁에 승리한다는 확신을 갖고 매사에 사병위주의 사고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대장 경규상소위는 『사병이 주인인 민주화된 군을 유지하기 위해 부대에서도 집안의 큰 형님같은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다짐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미국(세계의 사회면)

    ◎경제계 걸프전 명암 엇갈려… 지도·스낵 호황,항공·관광 몸살 ○…걸프전쟁이 장기전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미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쳐 업종마다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첨단무기 생산업체,전투복 등 군장비를 생산하는 업체,지도·스낵류·피자 등을 생산하는 업체,케이블 뉴스네트워크 등은 갑자기 호항을 맞고 있으나 항공사·여행사·자동차업계 등은 몸살을 앓고 있다. 걸프전쟁이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옅어지면서 전쟁 초기와는 달리 대부분의 주가가 떨어지고 있으나 미사일 제조업체 등 하이테크 군수사업의 주식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는 이들 업체들의 장래가 밝은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전쟁이 탄생시킨 첨단무기중의 스타 패트리어트 미사일 제조업체인 레이시온사의 주식은 큰폭으로 올랐다. 레이시온사는 최근 걸프전쟁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수요가 급증해 생산량을 대폭 늘렸는데 세계각국으로부터 새로운 주문도 쇄도하고 있다는 것. 영국·터키 등이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주문했으며 한국도 주문의사를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토마호크미사일 제조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스사와 맥도널 더글러스사의 주식도 오름세를 보였다. 미국기·가스마스크·사막전투복과 중동관련 서적·지도·지구본 등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걸프전쟁 속보를 보느라고 TV에 매달려 스낵류와 피자를 먹는 바람에 이 업종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도미노피자사의 경우 미 전역에서 피자판매량이 업소마다 7∼40% 증가했다고 밝혔다. 케이블네트워크를 통해 방송되는 CNN이 걸프전쟁을 신속·생생하게 보도하면서 인기를 모으자 케이블TV 수요자들이 30%나 늘어 케이블TV 설치 서비스 업체들이 일손이 달려 혼이 나고 있다. 영화산업도 잠시라도 전쟁소식에서 벗어나보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힘입어 지난 주말 한해전에 비해 37%의 수입증가를 기록했다. 전자제품 판매업소들도 TV와 라디오를 사려는 고객들이 늘어 호황을 구가하고 있으며 특히 소형 휴대용 TV와 단파수신용 라디오가 인기다. 이와는 정반대로 항공업계와 관광업계는 걸프전쟁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TWA항공사가 걸프전쟁으로 승객이 격감해 해외항공편을 절반으로 줄일 계획이며 델타·유나이티드·팬암·노스웨스트사 등도 해외여행객 감소로 유럽이나 중동으로의 항공편을 당분간 줄이거나 취소하고 있다. 여행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호텔이나 여행사 등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동차 딜러를 찾는 고객도 격감했는데 앞으로 6개월간 자동차를 살 사람이 전에 비해 19%나 준 것으로 한 조사결과 나타났다. 식당이나 의류점·술집 등 소매업소들도 타격을 받고 있다.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 업종별로 점점 더 깊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이스라엘군,요르단 국경에 속속 집결”

    ◎“전시방불”… 예루살렘서 김주혁특파원/「아우슈비츠 가스악몽」속 분위기 음산/비상 각의선 대이라크 반격싸고 논란/“자위권 일단유보” 국방관리,TV성명 【예루살렘=김주혁·유재림특파원】 기자가 도착한 21일 아침 예루살렘 시가는 완전히 전시를 방불케 했다. 남녀 병사들을 가득 실은 군트럭들이 거리를 질주해 계속 동쪽의 요르단 국경을 향해 달리고 있다. 방공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고 시민들의 모습은 거의 시가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건물들이 우중충한 회색 화강암으로 지어져 암울한 인상을 주는 도시 전체는 시민들이 자취를 감추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이다. 숙소인 중심가의 라마다호텔에 여장을 푼것이 상오11시. 1급 호텔인 이 호텔 1층 로비는 기사송고를 위해 뛰어다니는 각국 기자들로 부산하다. 한 일본 기자를 잡고 상황을 물어보았다. 20일 밤도 무사히 지나갔지만 크네셋(의회)에서 샤미르총리 주재로 비상각의가 열려 이라크의 공격에 대한 반격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시민들에겐 가스마스크가 지급됐고 모두 집안에 머물며 라디오를 듣고 있으라는 당부가 내려졌다. 학교는 개전 첫날(17일)부터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평소때면 성지순례에 나선 외국 관광객과 조국을 찾은 객지 유태인들로 북적댈 호텔도 기자들 외엔 인적이 없다. 하오1시 프레스 카드 발급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호텔에 온 정부언론대책국(GPO)의 한 젊은 관리는 20일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도착,배치돼 이라크 미사일 공격에 대한 우려는 감소됐다고 말하고 그러나 화학무기 공격의 위험은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텔아비브에 두번째 미사일이 떨어진지 48시간만에 당국은 주민들에게 집밖으로 나가도 좋다는 방송을 했다고 밝혔다. 잠시 뒤 GPO에서 제공한 군용버스를 타고 예루살렘 구시가를 지나 요르단강 서안이 내려다보이는 동쪽 주데아 사마리아산까지 둘러보았다. 간혹 가스마스크를 한손에 든 채 시내에 나온 시민들이 눈에 띈다. GPO관리 말로는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도착하는대로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주변에 집중 배치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댄숍론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시민들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에 대한 공세를 가속화할 것이고 화학무기를 쓸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국적군의 작전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인내와 결의를 보여야 할 때』라며 자제를 당부했다. 이스라엘 정부도 아직은 이라크에 대한 보복공격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를 비롯한 각료 대부분,그리고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층 장년들 대부분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이다. 이라크의 추가공격이 있고 인명피해가 늘면 다국적군도 이들의 보복공격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윗성 앞 자파게이트 부근 아랍인 쿼터(거주지역)내 아랍인들도 아직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텔아비브가 첫 공격을 당한 직후 이스라엘군은 아랍인 쿼터에 병력을 추가배치해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유태인들의 이 지역 출입을 삼가시키고 있다. 외부의 공격(이라크)과 동시에 내부의 적(이스라엘 거주 아랍인)과의 충돌이 생길 것을 피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이스라엘 언론들은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도착한 뒤 약간은 누그러진 듯한 국내 여론을 보도하고 있다. TV는 전투복장의 미군들이 벤구리온 공항에서 미수송기 갤럭시기로 싣고온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내리는 장면을 되풀이 방영하고 있다. 패트리어트를 운용키 위해 소수이지만 미군이 이스라엘 땅에 주둔케 됐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의 무기가 이렇게 대규모로 온 것은 1973년 중동권이래 처음이라는 코멘트도 있다. 이스라엘 국방부의 데이비드 이브리 국장은 TV에 나와 『정부 지도자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가진 자위권을 일단은 유보하자. 결정적인 순간이 올때 그것을 쓰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개전이래 이스라엘 군당국은 모든 언론들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 기자도 도착직후 이에대한 주의를 받았다. 텔아비브가 피격된 뒤부터 그곳에 있던 외국 기자들을 비롯해 일부 시민들까지 아직은 안전한 예루살렘과 다른 지방으로 모이고 있다.
  • 군 의료단 선발대 오늘 파견

    ◎정부,26명 교민철수 특별기 편에 정부는 14일 아라비아지역 잔류교민 철수를 위한 보잉747 대한항공 특별기에 군의료진 파견을 위한 조사단 26명을 탑승,출발시키기로 했다. 조사단은 군의관과 행정요원,약제사,간호장교 등 10여명과 국방부 합참 국군의무사령부 요원과 보급·병참 관계자들로 구성된다. 조사단 일행은 전투복 차림에 개인화기를 휴대하며 화학전에 대비한 교민보호를 위해 방독면 해독제 구급약품 등 화학전장비 2천여명분을 수송하게 된다. 이들중 의료진은 2월초순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현지 병원에 머무르면서 병원 개설준비를 하게 되며 나머지 행정요원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의 외교협정 준비와 다국적군 사령부와의 협조관계를 협의한 뒤 귀국하게 된다.
  • 국군 전투복 「얼룩무늬」 통일/국방부,3군복제 내년부터 시행추진

    국군의 전투복이 내년 하반기부터 육ㆍ해ㆍ공군 장병 모두 엷은 초록색 바탕에 진한 초록색 등의 얼룩무늬가 든 복장으로 바뀐다. 국방부는 9일 군복제령개정안을 마련,91년 하반기부터 현재의 국방색 전투복대신 얼룩무늬 전투복을 사병부터 우선 1벌씩 지급하고 92년에는 2벌,93년에는 3벌을 지급해 국군복장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군의 군복은 지난48년 창군 때 미군 군복을 모방해 만든뒤 호주머니모양과 위치 등 그동안 부분적으로 몇차례 바뀌었으나 디자인과 색깔이 완전히 바뀌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는 내년도 국방예산에 피복교체비 65억원을 책정할 방침이다.
  • 모범용사를 환영하며(사설)

    노병들이 전투복을 입고 서울의 도심지를 2㎞쯤 행진했다. 24일의 일이다. 국가 유공자,6·25참전 용사,월남귀순 용사,전쟁미망인 등 4천여명의 전흔의 당사자들이 묵묵히 걷는 모습은 색다른 무게를 주었다. 집단이기주의의 투쟁수단으로 수도 없이 거듭되는 시위를 보아온 시민들에게는 색다른 인상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몸으로 막아준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고 오늘과 같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침략군 앞에서 국운이 경각에 이르러 한발을 바다에 담근 것 같은 형세에 몰렸을 때,낙동강물을 선지빛으로 물들이며 지켜준 「국군」덕에 조국은 회생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오늘의 우리 모습은 너무 당당하게 우뚝 섰다. 이런 형세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40년전,우리를 그 무서운 악몽속에 몰아넣고 반세기가 가까워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이 비극의 전쟁을,묵인하고 충동하고 지원했던 당사자 나라들이 손을 벌리며 교류하기를 자청해 오는 나라로 우리는 성장했다. 우리가 이렇게 되기까지 젊던 병사는 노병이,새 병사는 중견이,다시 젊은 병사가 뒤를 잇는 법통이 이어져 왔다. 모범적인 국군용사.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번영을 구가하며,어떻게 이 초라한 반도의 분단국이 최강대국을 불러들여 우리 문법으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겠는가. 용사들을 믿고 그들에게 전선을 맡긴 것만으로 신뢰에 가득차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고급두뇌를 양성하고 생산을 확대하고 문화예술을 부흥시키고,국위를 떨칠 수가 있었다. 국군용사들의 그같은 공훈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서울신문이 국군 모범용사내외를 초청하여 발전조국의 현장도 찾아보게 하고 위로와 격려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그 공훈에 대한 깊은 표경이다. 표경과 관계없이 성스런 조국수호의 임무에 회의도 빈틈도 없는 것이 우리 국군용사들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에게,그들을 잊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서울신문은 이 연례행사를 갖고 있다. 여기 대표로 나온 용사들만 아니라 육해공군 3군에는 이런 군인들이 가득히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우리의군은 본인이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이 땅에 남아로 태어나면 누구나가 의무로 수행해야 하는 병역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국민 모두는 군인들을 지금 가족으로 가졌거나 장차에 가족으로 지닐 것이거나,옛날에 이미 가졌었거나 하게 마련이다. 내자녀,내 동기간을 적앞에 불침번으로 세워놓고 일상을 편안하게 지내고 번영을 구가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너무 평안한 나머지 육친의 노고를 잠깐씩 잊기도 한다. 사치 낭비같은 어리석은 짓도 하고 타락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의 동기간들이 겪는 시련을 다시 알리고 싶다. 말없이 맡겨진 일에만 신명을 다하는 국군의 그 면면히 이어온 정신은 언제라도 우리에겐 교훈이 된다. 나들이 나온 모범용사들의 건강한 정신이 후방의 다소 나태한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동하는 조국의 심장소리를 듣고 돌아간 용사들이 그들이 느낀 조국의 빛나는 모습을 전해주면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그걸 믿고 있다. 국군용사들의 나들이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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