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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제주, 애도/윤치규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제주, 애도/윤치규

    그러니까 빙의가 될 거라고 했다. 무당이 바다에 빠져 죽은 넋을 건져 올릴 거라고. 정확히는 무당이 아니라 심방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을 심방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양 차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굿을 한다니. 그것도 아는 사람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해 제사를 올린다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도의 밤이 푸른 이유는 어둠 속에 귀신이 섞여서 그런 거야.” 바다 위에는 아주 작은 불빛도 떠 있지 않았다. 양 차장의 말과 정반대로 하늘은 어두웠고 바다는 그것보다 더 어두웠다. 아득히 먼 곳에서 파도만 끊임없이 밀려왔다. 파도는 내 발밑에서 잠시 반짝이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 지루한 반복을 지켜보면서 돌아갈 핑계를 찾았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보다 지금 내 처지가 더 분하고 답답했다. 도대체 난 무엇을 바라고 제주도까지 내려온 걸까? 양 차장이 이렇게 변해버린 줄 알았다면 아마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따가 상주 역할 좀 맡아줄 수 있어?”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왜 못해? 현충원에서 대표로 묵념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은 꺼림칙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상주를 맡으라니.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계신데 그런 역할을 맡아도 되는 건가? 만약 그게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경험은 전혀 해보고 싶지 않았다. 상주는 심방이 칼을 들고 춤을 출 때 그 앞에서 미안하다고 흐느끼며 대신 매를 맞아야 했다. 양 차장은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딱히 그런 일을 자처해서 겪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냥 한 번 해봐. 시늉만 해보는 거야.” “진짜 싫어요. 아무리 차장님 부탁이라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남서쪽으로 내려오는 해안선을 따라 승합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켜고 다가왔다. 승합차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다 문 닫은 어촌계 앞에서 차를 돌려 해변 뒤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시동이 켜진 상태로 문이 열렸고 차 안에서 네 사람이 내렸다. 셋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한복 위에 두툼한 패딩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어깨에 저마다 북과 장구, 징 같은 악기를 하나씩 짊어지고 서로 짝을 이뤄 무거운 상자를 옮겼다. 그들은 해변에 짐을 내려놓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크기가 가장 큰 현무암 바위 앞에 모였다. 서로 손을 붙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사장 위에 멍석이 깔리고 천막이 세워졌다. 멍석은 전통방식으로 짚을 엮어서 만든 것이었지만 천막은 철제 캐노피였다. 천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네 귀퉁이 위에 큼지막한 돌멩이를 올려놓고 고정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준비하는 모습이 다들 전문가처럼 보였다. 천막 안에는 여섯 칸짜리 병풍을 펼쳤다. 그 앞에 직사각형 밥상을 놓고 놋으로 된 제기 위에 청귤과 보리빵, 고기산적을 올렸다. 작은 반상 위로 소주도 한 병 보였다. 여자는 소주를 노란색 주전자에 붓고 빈 병은 멍석 바깥쪽에 두었다. 그사이 남자들은 바지 끝단을 걷어붙이고 바다로 향했다. 현무암 바위에 오색 줄을 두르는데 뒷부분이 물에 조금 잠겨 있었다. 그들은 발이 젖어도 신경 쓰지 않고 줄을 동여맸다. 오색 줄은 어느 한 곳도 느슨하거나 처진 곳 없이 단단하게 묶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여자가 승합차로 돌아가 심방을 모셔왔다. 심방은 연세가 아주 많은 할머니였다. 흰색 고깔을 머리에 쓰고 붉은색 도복을 입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겉옷 밑단으로 삐져나온 도복이 부산하게 펄럭였다. 머리에 쓴 고깔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심방은 느리고 우아하게 한 걸음씩 바닷바람을 뚫고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내딛는 모습이 묘한 경외감을 주었다. * 휴가도 아닌데 주말에 일부러 제주도까지 내려온 이유는 양 차장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정기 인사를 앞두고 본부장이 새로 설립된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의 총괄 책임자로 양 차장을 추천했다. 본부장은 나를 따로 불러 양 차장의 의중을 알아보라고 시켰다. 전화로도 충분히 물을 수 있었던 일을 주말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이유는 나 또한 누구보다 양 차장의 복귀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양 차장은 마땅히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었다. 과수원 한가운데 귤 창고를 개조해 놓은 카페에서 양 차장을 만났다. 볕이 좋은 테라스에 앉아 청귤 라떼를 마시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남편과 아들의 장례식 이후로 일 년 반 만이었다. 그래도 표정이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대화 중에 농담도 자주 섞었고 먼저 웃음을 보일 때도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괜찮아진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게 된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오셔야죠. 이렇게 한가로운 곳에서 경력 다 썩히기는 아깝잖아요.” “제주도는 안 바쁜 줄 아니? 여기도 정신없어. 오히려 그때보다 시간이 더 부족해.” “여기는 안 어울려요. 화려하게 복귀하셔야죠. 그 덕에 저도 승진 좀 하고요.” 일부러 추켜세워주려고 한 말이 아니라 양 차장의 경력은 은행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영업점 경험은 기본이고 본부에서도 핵심 부서로 손꼽히는 자본시장부 출신이었다. 대리 때는 글로벌 인재로 선발되어 아이비리그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과장 때는 은행장의 비밀 장부라고 불리는 도쿄지점의 첫 여성 책임자로 발령받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초임지 때 사수로 만난 건 내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실제로 아무 연줄도 없었던 내가 자본시장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차장의 추천 덕분이었다. “차장님 안 계시니까 저 완전 찬밥 됐어요. 승진도 벌써 몇 번째 밀리는지 몰라요.” “나 없어도 잘하잖아. 승진은 때가 되면 하게 될 거야.” “부사수를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자꾸 이러시면 제가 제주도 따라옵니다.” 가족을 잃은 직후 양 차장은 은행을 그만두려고 했다. 그때도 설득하기 위해 제주도까지 내려온 사람은 나였다. 인사부가 먼저 고향에서 근무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전례 없는 특혜지만 그만큼 사고가 비극적이었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을 모두 잃었다.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1139번 국도의 좁은 커브 길과 군데군데 얼어붙은 빙판, 그리고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은 두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양 차장의 미래까지도 한순간에 앗아갔다. “나 지금은 여기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어머니 따라서 귤 농사라도 이어받아요?” “그런 건 아니고. 궁금하면 너도 같이 가볼래?” 양 차장이 가방에서 팸플릿을 꺼냈다. 만장굴에 대한 안내 책자였다. 유네스코 삼관왕이라느니, 세계 7대 자연경관이라는 수식어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니까 그 안에 동굴 속 사진이 여러 장 실려 있었다. 주석에는 이 동굴이 수십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화산 동굴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뭐냐고 묻자 수줍게 치아를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고향을 잃은 사람에게 고향을 다시 돌려주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을 하면 마음이 좀 나아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게 좀 도움이 되시냐고요.”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양 차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봤다. 말해 놓고 보니 마음이 뜨끔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양 차장은 잘못했다는 말을 싫어했다. 그때 당시 신입이었던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면 고개를 숙이거나 반성하지 말고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방안부터 제시하라고 다그쳤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거나 죄송하다면서 울먹거리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노력했어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책임을 질 뿐이다. 책임에는 후회와 반성이 필요하지 않다. 죄송하다는 말은 자기 연민일 뿐 상황을 개선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의 양 차장은 그런 말을 단호하게 내뱉는 사람이었다. “차장님 혹시 예전에 저한테 자주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어떤 말? 너한테 맨날 그만두라고 했던 거밖에 기억 안 나는데.” “은행원답지 않게 너무 사연에 연연한다면서요. 특히 신용평가표 작성할 때마다 그랬잖아요. 은행원은 모든 것을 숫자로 말하고, 숫자에는 구구절절한 서사가 없다.” 지점에서 처음 업무를 배울 때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취급자 의견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대출을 해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단계인데 이상하게 반려되거나 보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입이 올린 평가여서 더 까다롭게 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핵심적인 이유는 내가 그 의견을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승인권자가 궁금해하는 건 차주가 어떤 곤란한 사정으로 어디에 쓰려고 돈을 빌리는지가 아니었다. 오직 담보와 소득, 매출액과 순수 자본 비율 등을 고려해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회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양 차장은 내게 서류를 검토할 때는 숫자만 정확히 산출하면 다른 것을 고민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고객마다 털어놓는 복잡하고 어려운 사정은 계산식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매출액과 영업이익처럼 계량화할 수 있는 수치뿐이라고. 숫자가 나쁘면 대출은 진행될 수 없었다. 반대로 숫자가 좋으면 필요하지 않더라도 대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해야 했다. 반기별로 할당되는 이익 목표를 채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기업이 아니라 돈을 갚을 수 있는 기업에 더 강하게 대출을 밀어줘야 했다. 그렇게 사정이 어려운 업체는 조금씩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고 여건이 되는 업체는 기존의 대출을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는 대출을 추가로 끌어안았다. 한번은 그런 방식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정말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출이 나갈 수 없고,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대출을 밀어 넣는 일에 대해서. 당장 거래처에 문제가 생겨 대금을 회수하지 못하는 소기업 사장에게 고금리의 제2금융권을 소개해 일정 비율 원금을 변제시킨다거나, 여유 자금이 생겨 대출을 갚겠다는 사람을 내부 평가 기간에 맞춰 억지로 미루게 하는 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양 차장은 그런 걸 정상이라고 말했다. 정말 조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은행이 자선단체는 아니잖아? 그 답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영리법인의 선과 정의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신에 차 있던 사람이 이제는 제주도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 자카르타마저 포기한 채로. 아무리 사람이 쉽게 변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무책임할 정도로 변해 버린 것 같아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 굿당에 도착한 심방이 멍석 위에 고무신을 벗어 앞코를 뒤집어 놓았다. 옷매무새를 천천히 매만지며 비뚤어진 고깔부터 버선까지 다시 한번 점검했다. 덧신을 신고 멍석 위에서 채비를 갖추자 여자가 흰색 술을 가져왔다. 가닥이 풍성하고 끝이 구불구불한 술이었다. 심방은 술 안에 손가락을 넣어 위에서 아래로 몇 번 쓸어내렸다. 꼬여 있던 술이 한 올씩 풀리자 신기하게도 바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심방은 노란 주발에 쌀을 가득 담았다. 놋그릇 안에 흰 쌀을 붓고 무명으로 감쌌다. 쌀이 쏟아지지 않게 끈으로 단단하게 묶고 그 밑에 머리빗 하나와 소주병을 같이 얽어맸다. 무명천 밑에 매달린 머리빗과 소주병이 부딪치면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주변이 적막한 탓인지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 중 한 명이 그걸 들고 바다로 향했다. 물에 잠긴 바위를 지나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곳까지 걸었다. 달그락 소리는 무명천에 감싼 주발을 물속에 던져버리고 나서야 사라졌다. 바람이 그치자 파도의 기세도 한결 약해졌다. 여자가 소반을 들고 굿당에서 나왔다. 심방이 정해준 장소에 소반을 내려놓는데 제기 위에 있던 청귤 몇 개가 백사장 위에 떨어졌다. 여자는 그걸 주워 소매로 닦아 내게 하나 건넸다. 양 차장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두 손으로 받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쥐고만 있었다. 청귤은 전체적으로 녹색이었고 군데군데 노란 빛을 띠었다. 껍질은 무르지 않아 아직 단단했다. 양 차장이 내 손바닥에 놓인 것 중에 알이 작은 것 하나를 집어 향을 맡았다. “이촌역 지점에 있었을 때 모셨던 지점장님 기억나?” “저랑은 악연이에요. 그분이 고과를 긁어놔서 지금도 승진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퇴직해서 그런지 얼굴이 좋아졌더라. 청귤청도 두 상자나 사 갔어.” 이촌역 지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청귤 향이 떠올랐다. 양 차장의 어머니가 직접 담근 청귤청이 지점장실뿐만 아니라 창구에도 하나씩 놓였다. 청귤차라는 게 별것도 아닌데 고객에게 반응이 좋았다. 상담할 때면 새콤달콤한 향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덕분에 고객에게 청귤차 한 잔을 내오는 건 이촌역 지점만의 특별한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달콤한 차는 금리나 신용처럼 민감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씁쓸한 커피나 떫은 차를 대접할 때보다 더 대화가 잘 풀렸다. 설명 듣는 시간이 길어져도 불만이 적었다. 가끔은 어떤 상품에 가입해야 청귤청을 사은품으로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인기가 좋았던 청귤차가 지점에서 사라진 건 지점장과 양 차장이 언쟁을 한 이후부터였다. 두 사람이 다투게 된 원인은 내가 거절한 어떤 대출 때문이었다. 지점장은 자신의 친구라며 손님 한 명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직접 만나기도 전에 서류부터 건네는 게 처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고객이 신청한 대출은 서민구제금융 대출이었다. 재직만 확인된다면 신용등급을 따지지 않는 상품이었다. 취급하기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다. 만약 돈을 갚지 못한다고 해도 국가기관에서 대신 갚는 담보 특약이 있어 부담이 적은 대출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고객이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려 버린 것이었다. 지점장이 준 서류는 위조된 것이었다. 자신이 아는 업체 사장에게 부탁해 용역회사에서 청소직으로 근무하는 것처럼 꾸몄다. 건강보험료까지 정식으로 내고 있어 서류만으로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내가 그게 위조라는 사실을 아예 몰랐다면 전혀 꺼릴 게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상 그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 고객이 폐암 4기이며, 이미 너무 많은 종류의 항암제를 써서 더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치료밖에 남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점장님은 곧 퇴직하니까 상관없었던 거예요.” 재직 문제로 대출이 어렵다고 보고하자 지점장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러면서 유연하게 처리할 방법이 없냐고 은근히 압박을 넣었다. 외부에서 감사가 나오더라도 서민구제금융은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따져보지 않는다면서 다시 한번 판단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류에 도장을 찍고 처리하면 모든 것이 내 책임이 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진행할 수 없어 사수였던 양 차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양 차장은 길길이 날뛰며 곧바로 지점장에게 따졌다. 지점장은 한 걸음 물러서며 내 자율에 맡긴 거라며 선을 그었다. 그 말은 결국 내게 양 차장을 따를지 자신을 따를지 결정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점장이 나를 거칠게 몰아세웠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 지점장은 그 동기가 외환위기 때 어쩔 수 없이 그만둔 사람이고, 그가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다며 속사정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내게 그런 걸 상상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제비뽑기처럼 누군가는 잘리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던 시대를. 아무 잘못도 없이 운이 조금 나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평생 어떤 수모와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 그런 말을 듣는 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딱히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정은 분명히 안타까웠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 같았다. * 멍석 위에 앉은 남자들이 악기를 집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북채를 쥔 고수가 북을 두드리자 장고수가 장단을 더하며 합을 맞췄다. 징수는 징을 한 번 쳤다. 크고 웅장한 징소리가 먼바다까지 닿아 사라지면 다시 징을 쳤다. 심방은 징 소리에 맞춰 사방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장고수의 박자가 조금 빨라지자 심방이 천천히 춤사위를 시작했다. 버선발을 높게 세우고 두 팔을 하늘로 뻗었다가 무릎을 굽히면서 다시 땅 밑으로 늘어뜨렸다. 제자리에서 낮게 뛰기도 하고 절을 하듯 허리를 굽히기도 했다. 춤사위는 아주 느렸다가 갑자기 속도가 붙었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동작이 조금씩 격해지고 빨라졌다. 북과 장구의 박자도 그에 맞춰 더 급해졌다. 어둠 속에서 흰색 술은 선명하게 빛났다. 밤바다 앞에서 흰색 궤적을 그리며 허공 위에 흔들렸다. 징수가 채를 한 번 휘두르면 하늘로 치솟았고, 고수가 매화점을 두드리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잔상은 구천을 떠도는 도깨비불 같다가도 업을 풀고 승천하는 혼령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부르면서도 내쫓는 것 같았고,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그 자국을 두 눈으로 좇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갈 것 같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주변에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아 서둘러 돌아보는데 어쩐지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낮에 양 차장을 따라 만장굴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한낮이었지만 만장굴 내부는 굉장히 어두웠다.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갈 때만 해도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실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동굴이니까 어두운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두운 줄은 몰랐다. 바닥에 설치된 조명은 박쥐 때문에 밝기를 제한하고 있었다. 굴의 내부는 좁고 어두워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같은 걸 조금만 구경하려고 해도 금방 뒷사람이 다가왔다. 바닥은 또 울퉁불퉁해서 자주 돌부리에 걸렸고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군데군데 고여 신경 써서 걷지 않으면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양 차장이 인솔한 단체는 오사카 지역의 이쿠노구에서 온 재일 교포 상인회였다. 조센이치바라고 불리는 시장의 정식 명칭은 미유키모리 쇼오텡가였지만 일본에서는 코리아타운이나 조선 시장 같은 속칭으로 더 유명하다고 했다. 내가 처음 들어본다고 하자 일행 중 비교적 한국말이 유창한 어떤 노인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킨테츠선의 츠루하시역과 이마자토역 사이에 작은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조센이치바가 나온다고. 과거에 제주에서 일본으로 떠난 사람 대부분이 그 일대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양 차장은 만장굴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거북바위 앞에서 일행을 모았다. 그곳에서 마이크를 켜고 거북바위와 해안동굴에 대한 설명을 잠깐 들려주었다. 노인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양 차장의 해설을 들었다. 바위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습이 제주도와 닮아 있었다. 가운데 볼록한 부분은 한라산이 솟은 것 같았고, 전체적인 윤곽도 해안선과 비슷했다. 바위의 아래쪽에는 유선이 아직 남아 있었다. 동굴 벽면에 그려진 것과 거의 같은 높이였다. 아마도 천장에 붙어 있던 암석이 떨어졌을 때 그만큼의 수위로 용암이 흐른 것 같았다. 용암에 잠긴 부분은 모두 쓸려갔지만, 윗부분만큼은 섬처럼 남은 것이다. “화산 동굴은 용암의 겉과 속이 식는 속도가 달라서 생깁니다. 겉은 식어서 단단하게 굳지만 속은 여전히 뜨거운 상태로 계속 흘러 이렇게 텅 비는 거예요.” 설명을 다 듣고 동굴 속을 걷는데 생각보다 길이 일찍 끝나버렸다. 조류에 휩쓸리듯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더듬거리며 앞으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공간이 넓어지고 조명이 환한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있고 비상 전화기 같은 것도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무너진 천장에서 용암이 쏟아져 내려 생긴 근사한 돌기둥 앞에서 줄지어 사진을 찍었다. 그제야 뒷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겨우 유선과 종유석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데 우습게도 그곳이 반환점이었다. 반환점에서 노인은 눈을 감고 벽에 귀를 가져다 댄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용암 벽 너머로 무언가가 들리는 것처럼 두 손으로 귀를 모았다.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 손주들이 포켓몬스터와 던전 같은 단어를 내뱉으며 신나게 뛰어노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벽 안쪽의 소리를 들었다. 점자를 읽듯 조금씩 색이 다르고 층이 나누어진 선명한 가로줄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었다. 그는 그 벽 너머에 어렸을 때 들었던 소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대낮의 호루라기 소리나 새벽녘의 군화 소리, 누군가가 끌려가며 질렀던 비명. 고막을 찢는 일방적인 사격 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기억이 청각으로만 남은 이유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누군가가 눈을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그때 자신의 두 눈을 덮어주었던 주름진 손바닥에 대해 회상했다. 노인을 지켜준 손은 여러 명의 것이었다. 해변에서는 아버지였고 방안에서는 어머니였다. 마을이 불탔을 때는 삼촌이 되었다가 밀항선에 숨을 때는 이웃집 아저씨가 되기도 했다. 그는 산지항에서 무역선 배 밑창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게 너무 후회된다면서 벽에서 귀를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흐느꼈다. 관람이 다 끝나고 양 차장은 그들에게 기념품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탁자 위에 장식용으로 두는 돌하르방이었다. 돌하르방은 겨울 모자를 눌러쓰고 양손을 가슴과 배 위에 올려놓았다. 돌하르방의 모습은 어쩐지 지점장의 친구였던 그 고객과 닮은 것처럼 보였다. 그 고객은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빠진 머리털을 가리려고 모자를 썼다. 스테로이드와 호르몬 약의 부작용으로 눈과 코가 부어올랐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그와 마주 앉은 것은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그 인상은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 본격적으로 굿판이 시작됐다. 구경하는 사람은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고 진지하게 제사를 지켜봤다. 낮에 본 노인은 맨발로 천막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머지는 자리가 부족해 모래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하나같이 부모 뒤에 몸을 숨겼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붉은 도복에 흰 고깔을 쓴 심방이 무서운지 실눈을 뜨거나 아예 눈을 감아버린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돌하르방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낮에 들은 설명 때문인 것 같았다. 양 차장은 마을마다 돌하르방을 세우는 목적이 복을 기원하는 게 아니라 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심방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자가 직사각형의 종이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중간에 가짜 돈이 매달려 있고 위쪽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는 종이였다. 여자는 그 종이를 심방의 등 뒤에 붙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심방의 걸음걸이와 표정이 바뀌었다. 심방은 주위에 모인 모든 사람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짚으로 만든 인형을 내려놓았다. 파도는 작게 들이쳐 인형의 밑을 적셨다가 빠져나갔다. 인형에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단단하게 묶었다. 두꺼운 상자를 펼쳐 상여를 만들고 그 위에 인형을 시체처럼 올렸다. “인형에 염을 하고 나면 굿당 가운데 잠깐 앉아 있어 줘.” “저는 진짜 못하겠어요. 솔직히 이게 다 뭐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나 대신한다고 생각해. 나도 그런 적 있었잖아.” 최후의 일격처럼 긴 파도가 뭍 안쪽으로 깊이 밀려들어 왔다. 파도는 양 차장의 운동화를 덮치고 용왕상까지 닿았다. 파도에 두 발이 다 젖었는데도 양 차장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멍석 귀퉁이에 올려놓고 맨발로 모래를 밟고 섰다. 발이 시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심방이 염포의 끝을 넉넉하게 잡고 내게 건넸다. 그걸로 상여를 굿당까지 끌고 오라는 것 같았다. 당황해서 멀뚱히 있자 양 차장이 등을 떠밀었다. 왜 내가 이런 일까지 맡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이상했다. 시키는 대로 일단 상여를 억지로 끌고 와 굿당 앞에 놓았다. 신발을 벗어 멍석 중앙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무아지경에 빠진 심방의 무용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무악은 요란해졌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곡을 시작했다. 곡소리와 북소리가 절정에 닫자 심방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한순간에 춤이 멈추고 심방이 내 앞에 우뚝 섰다. 흰색 술을 바닥에 내려놓고 댓가지를 꺾어 만든 기다란 회초리 묶음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걸로 내 등을 내리쳤다. 댓가지가 얇아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대 두 대 맞을 때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이유로 매를 맞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지점장이 지시했던 대출은 결국 불가 판정을 내렸다. 내게는 지점장보다는 양 차장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했다. 지점장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만 그를 한 번이라도 직접 만나보고 다시 결정하라고 부탁했다. 그 고객이 직접 찾아온다고 해서 위조된 서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내 입으로 직접 거절의 뜻을 전하라는 의도였다. 자신이 맡기 싫은 역할을 내게 떠넘기는 짓이었다. 지점으로 찾아온 그 고객은 행색이 지나치게 초라했다. 오랫동안 고생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비굴함이 몸 전체에 배어 있었다. 그는 나를 계장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했다. 의례적으로 묻는 말에도 변명하듯 눈치를 보며 둘러댔다. 차라리 선배라고 거들먹거리는 부류였다면 거절하기가 더 나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대출이 어렵다는 말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양 차장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그를 칼같이 잘라내지 못했다. 그에게 대출이 거절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양 차장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양 차장이 도와주려고 다가왔다. 양 차장은 그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자리를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 고객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단 한 칸 옆으로 옮기는 것뿐이었지만 그를 비추고 있던 어떤 불빛 같은 게 꺼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한 번 더 사과했다. 창구에 앉아 그가 떠난 의자를 바라보면서 대화를 엿들었다. 대출이 안 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 듣는 동안 그는 계속 기침을 쏟았다. 입안이 바짝 말랐는지 마른 혀를 계속 다시는데도 양 차장은 능숙하게 키보드만 두드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지점에서 청귤청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지점장이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것을 치우게 하자 창구에 놓였던 것도 자연스럽게 버려졌다. 그 외에는 딱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점장과의 신경전도 끝났고 우려했던 인사 보복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나는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아무도 없는 지점에 나와 그 고객이 단둘이 마주 앉아 있는 꿈이었다. 그 꿈은 지금도 가끔 꿀 때가 있었다. 꿈속에서 그 고객은 날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앉아 기침을 쏟을 뿐이었다. 나 역시도 딱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몇 번을 곱씹어도 그날의 결정은 옳은 일이었다. 다만 후회하는 것은 그때 내가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오지 못한 것이었다. 야윈 목에서 쏟아지는 메마른 기침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에게 청귤차 한 잔을 권하지 않았다. 아무리 잘못한 게 없더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설운 어멍아 이런 변고가 어디 있수광. 구름 질로 바람 질로 고향산천 온 줄 모릅니까. 한 달을 그물고 두 달을 그물어도 경해도 원망하고 있수광. 이승에서 못한 것 저승에서 허쿠다. 잘들 삽서 하다하다 걱정말앙 잡들삽서. 살암시민 살암십서.” 심방이 백안을 뜨고 귀신에 씐 것처럼 여러 목소리를 냈다. 노인처럼 한탄하다가 아기처럼 울었고 남자처럼 화를 내다가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엎드려 있었다. 양 차장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무언가를 빌었다. 나는 시킨 대로 고맙수다 라고 말하며 심방에게 절을 해봤다. 고맙수다, 고맙수다. 기계적으로 말을 반복할 뿐인데도 내가 진짜 상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방은 매질을 멈추고 제풀에 꺾인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멀리 바다를 바라봤다. 밤하늘은 여전히 별도 없이 캄캄했지만,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그 밑이 아주 조금은 푸른 듯 보였다.
  • 80세까지 80번 풀코스 완주 도전… 난 결코 걷지 않는다

    80세까지 80번 풀코스 완주 도전… 난 결코 걷지 않는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일본 심장부인 도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한 번도 걷지 않고 고개를 들고 뛰었습니다. 마치 독립투사가 된 듯한 착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고동현(70) 서대구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이 지난해 3월 3일 도쿄마라톤대회 풀코스를 완주한 직후 평소 친분이 있는 서길수 영남대 총장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다. 고 이사장은 이 메시지에서 “하루 내내 비가 내려 저체온증으로 고생했지만 도쿄 시민들에게 보란 듯이 달렸다”고 밝혔다. 고 이사장에게 도쿄마라톤대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 대회 완주로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꿈인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다. 보스턴(2004년·3시간46분12초)을 시작으로 베를린(2010년·4시간4분29초), 시카고(2011년·4시간10분8초), 뉴욕(2014년·4시간18분2초), 런던(2016년·4시간34분24초)에 이어 도쿄까지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대회를 완주했다. 아마추어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국내 50번째 주인공이 됐다. 그의 나이 69세였다.고 이사장이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51세인 2001년 2월이었다. 동창 모임에서 마라톤을 하겠다고 ‘깜짝 발표’를 한 다음날이었다. 당시 그는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을 앓고 있었다.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50세를 넘어서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죠.” 첫걸음은 쉽지 않았다. “첫날 회사 근처 구민운동장을 3바퀴 뛰니 머리가 핑 돌았습니다. 그래도 참고 매일 달렸더니 6개월 뒤에 운동장 100바퀴를 뛸 수 있게 되더라고요.” 늦은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했지만 8개월도 안 돼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마라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마라톤 풀코스 완주는 모두 59차례 기록했다. 하프코스 등까지 합치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달렸다.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가장 큰 건 건강이다. 시작 당시 키 168㎝에 몸무게 77㎏, 허리 37인치였다. 지금은 몸무게 64㎏, 허리 33인치로 줄었고 근육도 탄탄해졌다. 그를 괴롭히던 성인병도 완전히 사라졌다. 마라톤으로 체력을 다진 고 이사장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영남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그는 섬유공학과와 의류학과를 통합한 영남대 섬유패션학부 동창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창회 장학회 기반을 다져 봄가을로 재학생 20명에게 장학금을 준다. 중소기업중앙회 윤리위원회 위원, 대구섬유제품관협동조합 이사장, 대구달성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달성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르며 비용을 절약해 동문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2013년부터 3년간 서대구산업단지 이사장을 맡았다가 지난해 3월 또다시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2500여개에 달하는 입주업체 대표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산업단지 재생사업과 서대구역사 건립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한 고 이사장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다. 이사장 재선임은 50년 서대구산업단지 역사상 처음이다. 또 고 이사장은 2015년부터 대한제면공업협동조합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조합 설립 53년 만에 처음 나온 지방 출신 이사장이다. 그는 2002년부터 4년간 대한제면조합 감사로 활동했다. 이 밖에도 대한제면공업협동조합 이사장과 전통제조업위원회 공동 이사장, 대구서구청 교육위원회 위원, 영남대 총동창회 수석부회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고 있다. 이화제면을 1983년 창립해 기능성 침구류를 생산, 판매 중이다.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고 이사장은 엄청난 기록도 갖고 있다. 55세였던 2005년 4월 3일 전주마라톤대회에서 2시간59분44초로 골인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겐 꿈의 기록인 3시간을 깨며 ‘마라톤 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를 ‘서브 스리’라고 한다. 서브 스리 달성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식이요법과 꾸준한 운동으로 체중을 3㎏ 이상 줄였다. 체중 1㎏을 감량하면 마라톤 풀코스 기록을 3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당시 그는 아침엔 삶은 계란 흰자 3개, 점심으로는 삶은 닭 반 마리, 저녁에는 소고기 샤부샤부 150g과 소금기 없는 채소를 먹었다. 이 대회 직전에 참가한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3시간8분54초로 아깝게 서브 스리 달성에 실패했다. 따라서 전주마라톤대회에서 기록을 달성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그는 “전주 마라톤 전날엔 수능시험을 목전에 둔 수험생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 5㎞ 지점에서는 몸의 균형에 신경을 썼습니다. 15㎞ 지점 기록만 보면 서브 스리 기록보다 1분 정도 빨랐어요. 이때 조금 방심했습니다. 이로 인해 반환점 지점을 1시간30분30초에 통과했어요. 나머지 절반을 1시간29분대에 들어가야 합니다. 몸 상태가 좋아 초조하지는 않았죠. 38㎞ 지점부터 치고 나갈 작전이었죠. 이때 ㎞당 4분 속도로 달렸습니다. 경북기계공고에서 동료와 훈련한 것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운동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20초의 여유가 있었죠. 37등으로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두 팔을 번쩍 들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서브 스리 후유증으로 2005년 아킬레스건이 부분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수술을 3번이나 하고 2년을 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심한 부상도 마라톤에 대한 그의 열정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재활에 성공, 2008년부터 다시 뛰기 시작해 연간 평균 5차례 정도 풀코스를 완주했다. “수술 후 모두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재활 끝에 결국 재기했습니다. 2㎏의 모래주머니를 온종일 양쪽 발목에 차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마라톤을 하면서 20만원이 넘는 고가 마라톤화 밑창이 너무 빨리 닳는 게 싫어 자동차 타이어를 운동화 뒤꿈치에 붙였다”며 “이게 부상의 지름길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자책했다. 마라톤에 대한 열정으로 고 이사장은 2005년 대구계성고등학교 마라톤 동호회 창단을 주도했다. 가장 보람된 마라톤 관련 활동으로 그는 2001년 6월 ‘대구달리네 부부 마라톤 동호회’를 만든 것을 꼽았다. ‘달리네’는 그가 작명한 것으로 ‘달리는 가족’이란 의미를 담았다. 처음에 대학 동기 등 지인 7쌍(14명)이 모여 창단했다. 지금은 17쌍으로 늘어났다. 평균 나이 67세로, 전국 최고령 부부 마라톤 동호회로 발전했다. 매주 토요일 합동훈련을 하는 것은 물론 1박 2일 하계수련회, 봄가을 국내 대회 참가, 2년에 한 번 해외 대회 참가 등을 통해 건강과 함께 형제애 같은 우정까지 다져 오고 있다. 경북 문경 출신인 고 이사장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상 3회, 대구시장상 2회, 경북지방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으며 제1호 자랑스러운 달성인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부인 이민숙씨와의 사이에 3녀 1남을 두고 있다. 고 이사장의 좌우명은 ‘달리면 영혼이 맑아진다’였다. 그런데 이 좌우명을 ‘Age Runner’로 바꿨다. 골프의 ‘Age Shooter’에서 가져온 말이다. 자기 나이만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뜻한다. 고 이사장은 80세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80번 이상 완주하는 게 목표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런 글을 남기겠다고 했다. ‘나는 결코 걷지 않았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좋은 글씨란 나를 드러내는 것”

    “좋은 글씨란 나를 드러내는 것”

    고교 시절 석당 현판 매료… 전각 입문서예 90%는 공부, 수십년째 고전 섭렵 “하하 웃고 지나가는 노인의 울림처럼중장년·청년세대 위안과 힘 주고 싶어”서예가 이처럼 다채롭고, 자유분방했던가. 고도의 정신 수양과 절제의 미학으로 상징되는 전통서예의 틀에 갇힌 이들에게 글씨와 그림의 영역을 아우르는 현대서예는 신선한 파격이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는 누구보다 앞서 현대서예의 지평을 넓혀온 한국 서단의 거목이다. 60여년 붓을 든 내공으로 온갖 서체를 자유자재로 풀어내며 다양한 조형미를 시도해 왔다. 그가 지난 2년간 준비한 신작 36점을 서울 종로구 혜화동 JCC아트센터 초대개인전 ‘하하옹치언’(何何翁言)에서 선보인다. 전시 제목이 재밌다. 개막 전날인 지난 15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옛날에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하하 웃고 지나가는 노인을 ‘하하 존사’, ‘하하옹’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이제 그럴 나이가 아닌가”라고 했다. ‘치언’은 술 취한 이의 두서 없는 말. 올해 일흔넷인 서예가는 “‘하하옹이 늘어놓는 횡설수설’ 정도가 이번 전시에 걸맞지 않나 생각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횡설수설’은 마땅히 겸양일 뿐 작품에 담긴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옹골차고, 울림이 깊다. 그는 “서예에서 운필은 10%고, 공부가 90%”라고 강조하는 학구적인 서예가다. 그에겐 다른 서예가들이 쓴 문구를 따라 쓰지 않는 원칙이 있다. 다양한 고전을 섭렵해 자기 것으로 소화한 문장들을 엮어 작품을 완성한다. 수십 년째 해온 한문과 고전 공부를 지금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다. 이번 전시에선 백세시대를 맞은 중장년 세대와 희망을 잃은 20·30대 청년세대에게 위안과 힘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단다. 전시장 벽 하나를 차지한 길이 12m 대작 ‘산거지’(山居志)는 권력과 물욕을 좇는 속세를 벗어나 자연에서 안분지족하는 이모작 삶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달 전, 전시장 바닥에 종이를 펼쳐두고 붓 다섯 자루로 2시간 30분 만에 전문 385자를 완성했다. 갑골문체, 금문체, 한간체, 광개토대왕비체 등 온갖 서체를 손 가는 대로 썼다 하여 ‘하하옹수수체’로 이름 지었다.‘주거’(舟車)는 배를 붉은색 갑골문체로, 수레를 오색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로 쓰고 중국 5대10국의 재상 풍도의 시 ‘우작’을 적었다. ‘배와 수레 어디서든 나루에 안 닿을까’라는 시구처럼 당장은 앞날이 불투명해 보이는 청년세대도 결국은 밝은 빛으로 나아갈 것이란 따뜻한 위로다. 항상 “나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인가”를 되뇐다는 그는 “좋은 글씨란 예쁜 글씨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글씨”라고 했다. 독창적인 글씨는 치열한 자기 수련에서 나온다. 전시장 한쪽에 놓인 글씨 연습 수첩들이 대가의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그는 고교 때 이종사촌 형님 집에 걸린 석당 고석봉 선생의 ‘인지위덕’(忍之爲德) 현판에 매료돼 전각에 발을 들였다. 대학은 법학과로 진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2학년 때부터 한문과 글씨를 본격적으로 배우러 다녔다. 강암 송성용, 독옹 이대목(대만),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가 그의 스승들이다. 대중들에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취화선’, ‘천년학’의 제자(題字)로 친숙하다. 전시는 12월 20일까지. 글 사진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장승과 탑으로 빚은 ‘전설’

    장승과 탑으로 빚은 ‘전설’

    지난해 10월 타계한 조각가 최충웅(1939~2019)의 1주기 초대전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미술을 평생의 작업 화두로 삼았던 작가의 유작 130여점 가운데 45점이 ‘최충웅, 우리 눈으로 조각하다’는 타이틀 아래 한데 자리했다. 1963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작가는 동시대 청년 미술인들이 서구 미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현실에 비판적이었다. 경제 개발과 산업화란 이름으로 장승과 서낭당 등 우리 전통문화가 미신으로 치부돼 사라지는 광경에도 분노했다. 전국을 답사하며 장승과 탑, 자연 풍광을 열정적으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이유다. 눈은 한국 전통의 미감을 좇았지만, 손은 혁신적이었다. 1974년 스티로폼을 재료로 한 조각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스티로폼에 석유나 휘발유를 바르면 녹아내리는 성질을 이용해 표면을 붓으로 터치하거나 분무기로 뿌려 원하는 형태를 만들었다. 세부 표현과 질감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작가는 우연적인 효과를 작업의 일부로 즐겼다. 장승과 탑을 모티브로 한 추상조각 ‘전설’과 ‘작품’ 시리즈는 이후 40년간 이어졌다. 1970·80년대에는 청동 주조 비용이 부담돼 스티로폼으로 조각을 완성했지만, 1990년대에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원형을 거푸집으로 싼 뒤 청동을 부어 주물을 떴다. 초기 스티로폼 조각들은 거의 폐기됐고, 남은 작품들은 대부분 청동 조각이다. 이번 전시에는 여인 조각상도 여러 점 나왔다. 작가가 아내와 네 딸을 위해 만든 작품들이다. 고적 답사 사진을 정리한 앨범과 슬라이드 등 유품도 소개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기중에서 교편을 잡은 작가는 1991년 서울산업대 교수로 임용돼 200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후학 양성과 작업을 병행했다. 2002년 암 발병 이후 오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작가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성품과 엄격한 자기 관리로 생전에 작품 발표를 많이 하지 않은 탓에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묵묵히 옛것을 통해 새것을 이루고자 매진했던 선생의 작업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반성한다”고 했다. 평소 작가는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대학 은사로 김종영(1915~1982)을 꼽았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전시장에서 열리는 그의 유작전이 더욱 뜻깊다. 전시는 29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다음달 4일 돛을 올립니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예년보다 3개월가량 늦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답사 횟수를 20회로 줄였고 참가자 수도 20명 이내로 제한합니다. 이에 앞서 서울신문 지면 투어로 갈증을 풀어 드립니다. 1회 인사동(4일), 2회 대학로(10일), 3회 여의도(17일), 4회 동대문(24일), 5회 성수동(7월 1일) 등 5개 지역을 찾아갑니다. 이들 지역의 유·무형 서울미래유산을 집중 탐구하고 ‘장소인문학’의 비밀을 풀어 줄 것입니다. 장태동, 최석호, 권기봉씨 등 서울역사 여행가들이 해설자와 집필자로 새롭게 나섭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이소영 동화작가, 함혜리 문화칼럼니스트, 서동철 문화재위원,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등 역대급 필진을 초빙해 투어의 격을 높였습니다. 답사투어는 다음달 4일부터 11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진행하고 예약은 투어 전주에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 홈페이지에 하면 됩니다. 관련 기사는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 지면에 게재됩니다.●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이경우의 언파만파] 광화문 현판의 글씨

    [이경우의 언파만파] 광화문 현판의 글씨

    ‘어색(語塞)하다.’ 서먹하다는 말이다. 낯모르는 사람과 있게 되면 아무래도 어색해진다. 대답이나 변명이 구차하고 궁색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뭔가를 감추고 하는 답변은 옹색하고 어색해 보인다. 격식이나 규범, 관습에 맞지 않아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갓을 쓰고 넥타이를 매거나 추리닝 바지에 신사복 재킷을 입으면 어색하다. 1968년에 복원된 광화문은 어색했다. 복원이라기보다는 옛 모습에 가깝게 새로 짓는 쪽이었다. 기준이 그런 듯했다. 그렇다 보니 치밀하지 못했다. 재료는 나무 대신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가 선택됐다. 한국전쟁 중에 타 버린 현판은 다시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글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글씨는 당시 대통령이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썼다. 현판 논란의 불씨를 낳는 일이 됐다. 이전의 현판은 1865년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이 쓴 것이었다. 그가 당대의 명필이어서 붓을 든 것은 아니었다. 광화문(光化門)뿐만 아니라 동쪽의 건춘문(建春門)과 서쪽의 영추문(迎秋門),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현판도 그 시절의 무관들이 썼다. 광화문을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이전 현판 교체를 놓고 정치적 논란이 있었고, 한글이냐 한자냐의 논쟁이 불거졌다. 2006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됐다. 복원 기준으로 삼은 시기는 고종 중건 당시였다. 2010년 8월 15일 일반에 공개된 광화문에는 철근콘크리트가 사라졌다. 본래대로 목재로 된 건축물이 세워졌고, 한자로 쓰인 현판이 붙었다. 그러나 곧바로 현판에 금이 가는 바람에 다시 제작하게 됐다. 한글과 한자, 서체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된 한자 현판이 올해 다시 걸린다. 한 시민모임이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 바꾸자고 한다.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라는 시민모임은 최근 시대정신에 맞게 한글 현판이 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화문광장이 단순한 광장이 아니라 한국의 얼굴이 됐다고 한다. 이 광장은 시민들이 역사를 써 온 곳이고, 여기에 있는 광화문의 현판이 한자여서는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중건이라고도 말한다. 문화재청은 다른 시선이다. 원형대로 복원하는 게 가치를 살리는 것이라고 본다. 복원은 말 그대로 옛날의 모습대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선택이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것일까. 무엇이 전통과 시대에 부합하는 것일까. wlee@seoul.co.kr
  • 그림인 듯 글씨인 듯… ‘서예의 진화’ 90분 영상에 담다

    그림인 듯 글씨인 듯… ‘서예의 진화’ 90분 영상에 담다

    국립현대미술관 첫 서예전격동기 거친 1세대 12인부터캘리그래피 등 현대서예까지한국서예가 걸어온 길 한눈에‘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原)은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근간이었다. ‘서’를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 한국은 서예(書藝)라 부른다. 서예란 말은 해방 이후 등장했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목인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일제강점기에 쓰였던 서도 대신 서예를 주창하면서 대중화됐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문자예술로서 서예의 위상과 정체성 변화를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1년 만에 처음 여는 서예 단독 기획전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다. 미술관이 지난 1년간 야심차게 준비한 기획전이지만 당분간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긴 어렵다. 30일 오후 4시 미술관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youtube.com/MMCA Korea)에서 영상으로 먼저 공개된다. 전시를 준비한 배원정 학예연구사가 전시장을 이동하며 주요 작품을 설명하는 90분 분량 영상이다. 원래 덕수궁관에서 이달 12일부터 6월 말까지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미술관 잠정 휴관이 길어지면서 대안으로 온라인 선공개를 택했다. 전시는 근현대 시기 한국 서예가 걸어온 길을 한눈에 보도록 짰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등 격동기를 거치며 전통서예와는 다른 서예의 변화를 이끌어온 1세대 서예가 12인을 집중 조명하고, 이들의 뒤를 이은 2세대 서예가들의 장르 융합적 실험에 주목하는 한편 캘리그래피 등 디자인적인 측면이 강조된 21세기 서예문화까지 두루 훑는다. 서예와 전각뿐 아니라 회화, 조각, 도자, 미디어아트, 인쇄 매체 등 300여 작품과 자료 70여점을 선보인다.전시는 4부로 구성됐다. 1부 ‘서예를 그리다 그림을 쓰다’에선 현대미술과 서예가 어떤 연관성을 갖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 왔는지 조명한다. “미술관에서 왜 서예전을 할까”라는 의문에 답하는 프롤로그 격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적 문인화에 관심이 많았던 김환기의 시화 작품 ‘항아리와 시’(1954), 서체를 추상회화의 요소로 활용한 남관의 ‘흑과 백의 율동’(1981), 서체추상에 기반한 김종영과 최만린의 조각 작품 등이 전시됐다. 2부 ‘글씨가 그 사람이다’는 소전 손재형을 비롯한 근현대 1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다양한 조형실험을 통해 ‘소전체’를 탄생시킨 손재형은 일본인 소장자를 설득해 추사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를 국내에 들여온 일화로도 유명하다. 서예의 회화성을 중시한 검여 유희강, 한글서예교본을 쓴 갈물 이철경, 고전미와 현대미가 어우러진 한글 서풍을 창출한 평보 서희환의 작품 10여점은 처음으로 공개됐다. 3부 ‘다시, 서예: 현대서예의 실험과 파격’에선 국전 1세대에게 교육을 받았던 2세대 서예가들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흐름을 소개한다. 붓과 먹의 역동성을 살린 황석봉의 ‘선상에서 1, 2’(2018), 고대 금문을 현대적인 조형으로 재해석한 박원규의 ‘공정’(2020) 등 문자의 가독성보다 이미지에 집중해 ‘읽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 변화를 모색한 결과가 흥미롭다. 4부 ‘디자인을 입다 일상을 품다’는 2000년대 이후 상업 광고 등을 통해 급부상한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 등으로 영역을 확장한 현대 서예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코로나19로 미술관 직접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온라인 중계로 만나는 서예전이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술관 휴관은 다음달 5일까지이지만,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재개관 일정은 유동적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문 대통령 “코로나19 피해 임차인 위해 상상력 발휘하라”

    문 대통령 “코로나19 피해 임차인 위해 상상력 발휘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와 관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작된 건물주들의 자발적 상가임대료 인하 운동이 전통시장·구도심·대학가 등 전주시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보도를 봤다”며 “‘착한 임대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참모 등에게 “소상공인들의 임대료 문제와 관련해 소극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도울 수 있을 걸 찾아보라”고 강조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앞서 전주시는 지난 14일 김승수 시장과 건물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영세자영업자를 위해 상가 임대료를 자발적으로 인하하는 내용의 ‘코로나19 극복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상생 협력 선언식’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이를 언급하며 “코로나19로 인한 극심한 소비 위축과 매출 감소, 지역경제 침체를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 뒤 “경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국민들의 ‘십시일반 운동’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도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착한 임대인에 대한 지원방안도 모색할 것“이라며 ”국민들도 적극적 소비로 호응해 주셨으면 한다“라고 말했다.이와 관련,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지난 12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만난 상인으로부터 ‘(코로나19로) 매출의 70%가 감소했는데 임대료는 오히려 올라 힘들다’는 취지의 얘기를 들은 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임대료 문제를 절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주에서 건물주들이 상생 차원에서 임대료를 10% 자율적으로 인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 대통령이 직접 SNS 메시지를 쓰게 됐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상상력’을 언급한 것은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임차인들을 위해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라는 차원”이라며 “임대료를 낮추라고 하는건 불가능한 일이고, 세제나 금융지원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한편 문 대통령이 17일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경제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등 경제활력 제고 행보에 속도를 낸다. 지난주 남대문시장 방문과 재계 간담회를 소화한 데 이어 코로나19 사태 충격 최소화를 국정 최우선 순위로 두는 모양새다. 방역대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불안심리 확산에 따른 소비 위축을 차단하는 데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13일 재계간담회에서 “경기가 살아나는 듯해 기대가 컸었는데 코로나19 사태가 경제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업무보고에서도 경제활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이 집중 논의될 전망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北 노동당 전원회의 결과 보고서 전문 공개-주체혁명 불멸의 대강 1

    주체혁명위업승리의 활로를 밝힌 불멸의 대강 우리의 전진을 저애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나가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전원회의에 관한 보도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 인민군장병들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속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전원회의가 주체108(2019)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당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진행되였다. 위대한 조선로동당의 령도따라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새로운 승리를 앞당겨가는 력사적전환기에 소집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전원회의는 전대미문의 준엄한 난국을 정면돌파하고 나라의 자주권과 최고리익을 끝까지 수호하며 자력부강의 기치높이 주체혁명위업승리의 활로를 열어나가기 위한 불멸의 대강을 제시한것으로 하여 우리 당력사와 자주강국건설사에 특기할 사변으로 된다. 조선로동당 위원장 김정은동지께서 전원회의를 지도하시였다. 전원회의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들과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들이 참가하였다. 또한 당중앙위원회 일군들과 성, 중앙기관 일군들, 도인민위원장들, 도농촌경리위원장들, 시, 군당위원장들, 중요부문과 단위, 무력기관 일군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 김정은동지께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위임에 따라 전원회의를 운영집행하시였다. 전원회의에는 다음과 같은 의정들이 상정되였다. 1.조성된 대내외형세하에서 우리의 당면한 투쟁방향에 대하여 2.조직문제에 대하여 3.당중앙위원회 구호집을 수정보충할데 대하여 4.조선로동당창건 75돐을 성대히 기념할데 대하여 전원회의에서는 첫째 의정이 토의되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 김정은동지께서 첫째 의정에 대한 력사적인 보고를 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전원회의가 있은 때로부터 지난 8개월간은 대단히 강도높은 투쟁과 과감한 전진의 련속이였다고 하시면서 우리 당이 그 기간 항상 우리 인민의 절실한 요구와 권익, 국가의 자주권과 안전보장을 중심에 두고 정확한 대내외정치로선을 수립하고 견지하며 그를 관철하기 위하여 부단히 투쟁한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기치높이 용진하여온 우리의 전투적로정을 새로운 승리에로 계속해 이어가자면 혁명적진군의 보폭을 더 크게 내짚어야 하며 현정세의 추이와 우리앞에 나선 방대한 과제들은 현실에 대한 랭철한 판단에 기초한 적실하고 과감한 대책을 요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당중앙은 우리 혁명의 거창하고도 줄기찬 전진도상에 직면한 주객관적인 장애와 난관들을 전면적으로 심도있게 분석평가하고 사회주의건설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결정적대책을 강구할 취지에서 이번 전원회의를 소집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현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정면돌파전을 벌릴데 대한 혁명적로선을 천명하시였다.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전원회의 결정관철을 위한 긴장된 투쟁속에서 자립, 자력을 원동력으로 하는 우리의 주체적힘이 일층 강화되였다고 평가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자력갱생의 기치를 더 높이 들고 사회주의건설의 일대 앙양기를 열어나갈데 대한 당의 호소따라 우리 국가와 인민이 난국을 맞받아 도도히 전진비약해나가는 강인한 기상과 막강한 잠재력을 크게 과시한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지난 몇개월동안 우리앞에 봉착한 도전은 남들같으면 하루도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앉을 혹독하고 위험천만한 격난이였으나 그 어떤 곤난도 공고한 전일체를 이루고 굴함없이 나아가는 우리 인민의 돌진을 멈춰세울수도 지체시킬수도 없었으며 국가의 힘, 국방력강화에서 거대한 성과들을 끊임없이 비축한데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시였다. 국방과학기술의 선진국들에서만 보유한 첨단무기체계들을 개발하는 방대하고도 복잡한 이 사업은 과학기술적측면에서 혁신적인 해결책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스스로 찾을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이 모든 연구과제들은 주체적력량 즉 우리의 믿음직한 과학자, 설계가, 군수로동계급에 의해 완벽하게 수행되였습니다. 이는 위대한 승리로 되며 당에서 구상하던 전망적인 전략무기체계들이 우리의 수중에 하나씩 쥐여지게 된것은 공화국의 무력발전과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보위하고 담보하는데서 커다란 사변으로 됩니다. 첨단국방과학의 이같은 비약은 우리의 군사기술적강세를 불가역적인것으로 만들고 우리 국력의 상승을 더없이 촉진시킬것이며 주변정치정세의 통제력을 제고하고 적들에게는 심대하고도 혹심한 불안과 공포의 타격을 안겨줄것입니다. 앞으로 미국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조미관계의 결산을 주저하면 할수록 예측할수없이 강대해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력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수밖에 없게 되여있으며 더욱더 막다른 처지에 빠져들게 되여있습니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경제건설분야에서도 일련의 성과들이 이룩된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적대세력들의 악착한 제재로 말미암아 많은 제약을 받고 불리한 기상기후가 계속된 조건에서도 올해 농사에서 최고수확년도를 돌파하는 전례없는 대풍이 마련된데 대하여서와 삼지연시꾸리기 2단계 공사가 결속되고 혁명전통교양의 중심지에 산간문화도시의 훌륭한 표준, 리상적인 본보기지방도시가 자랑스럽게 건설되였으며 중평남새온실농장과 양묘장, 양덕온천문화휴양지건설이 우리 당의 구상대로 완공됨으로써 우리 인민들에게 선진문명의 창조물을 선물할수 있게 된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와 순천린비료공장건설, 어랑천발전소와 단천발전소건설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대상건설들도 면밀히 추진되고 금속, 석탄, 건재공업과 경공업을 비롯한 인민경제 거의 모든 부문이 현저한 장성추세를 보인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전국에 자력갱생경쟁을 호소한 강원도에서 당정책관철의 본보기적인 경험들을 계속 창조하고 평안북도를 비롯한 다른 도들도 경쟁적으로 농산과 축산, 교육과 보건, 지방공업발전에서 뚜렷한 실적을 올리고있는데 대하여 평가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이것은 전체 인민이 당의 부름따라 한사람같이 궐기해 견인불발의 증산운동, 창조운동을 과감하게 벌려온 위대한 투쟁의 필연적결과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조성된 현정세의 추이를 분석하시면서 미국의 본심은 대화와 협상의 간판을 걸어놓고 흡진갑진하면서 저들의 정치외교적리속을 차리는 동시에 제재를 계속 유지하여 우리의 힘을 점차 소모약화시키자는것이라고 락인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우리 국가의 안전과 존엄 그리고 미래의 안전을 그 무엇과 절대로 바꾸지 않을것임을 더 굳게 결심하였다고 강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리익과 배치되는 요구를 내대고 강도적인 태도를 취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조미간의 교착상태는 불가피하게 장기성을 띠게 되여있다고 하시면서 근간에 미국이 또다시 대화재개문제를 여기저기 들고다니면서 지속적인 대화타령을 횡설수설하고있는데 이것은 애당초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하고 관계를 개선하며 문제를 풀 용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우리가 정한 년말시한부를 무난히 넘겨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수 있는 시간벌이를 해보자는것일뿐이라고, 대화타령을 하면서도 우리 공화국을 완전히 질식시키고 압살하기 위한 도발적인 정치군사적, 경제적흉계를 더욱 로골화하고있는것이 날강도 미국의 이중적행태라고 못박으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우리는 결코 파렴치한 미국이 조미대화를 불순한 목적실현에 악용하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것이며 이제껏 우리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깨끗이 다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행동에로 넘어갈것이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시였다. 우리에게 있어서 경제건설에 유리한 대외적환경이 절실히 필요한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화려한 변신을 바라며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수는 없습니다. 세기를 이어온 조미대결은 오늘에 와서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압축되여 명백한 대결그림을 그리고있습니다. 핵문제가 아니고라도 미국은 우리에게 또 다른 그 무엇을 표적으로 정하고 접어들것이고 미국의 군사정치적위협은 끝이 나지 않을것입니다. 미국과의 장기적대립을 예고하는 조성된 현정세는 우리가 앞으로도 적대세력들의 제재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각 방면에서 내부적힘을 보다 강화할것을 절박하게 요구하고있습니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적과의 치렬한 대결은 항상 자체의 력량강화를 위한 사업을 동반하며 자기를 강하게 만드는 사업이 선행되여야 주동에 서서 승리를 쟁취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자력강화의 견지에서 볼 때 국가관리와 경제사업을 비롯한 이여의 분야에서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는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자력갱생, 자급자족하자고 계속 말하고있지만 이를 실행하는 우리의 사업은 지난날의 타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있다고 하시면서 자립, 자강의 거창한 위업을 견인하고 추동하기에는 불충분하며 대담하게 혁신하지 못하고 침체되여있는 국가관리사업과 경제사업 등 현 실태에 대하여 분석하시였다. 오직 혁명임무를 스스로 걸머지고 수행하려는 높은 책임감, 오늘과 래일을 다같이 안고 정확히 개척해나가는 지혜와 용기만이 우리 위업을 성공적으로 떠밀어나갈수 있다고 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당의 령도체계가 확고히 서있고 전당이 사상정신적으로 통일되여있으며 인민들이 절실히 요구하고있기때문에 문제될것이 없다고 강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당중앙지도기관 성원들과 모든 일군들이 이번 전원회의를 계기로 자기 부문, 자기 단위에 존재하는 난관을 자기 사업에 내재하고있는 부족점들과 결부하여 심각히 분석해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현정세하에서 사회주의강국건설에 기여하고있는 자기 부문, 자기 단위의 몫을 엄밀히 따져보고 락심하거나 동요함이 없이 무거운 과제를 억척같이 떠메고 완강히 돌진해나갈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고생과 투쟁이 없이는 위대한 승리를 가질수 없으며 혁명의 승리는 필연적이지만 그 어떤 장애도 곤난도 없이 성취되는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하시였다. 적대세력들의 제재압박을 무력화시키고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한 정면돌파전을 강행해야 합니다.정면돌파전은 우리 혁명의 당면임무로 보나 전망적인 요구로 보나 반드시 수행해야 할 시대적과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제재해제를 기다리며 자강력을 키우기 위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다면 적들의 반동공세는 더욱 거세여질것이며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자고 덤벼들것입니다. 우리가 자체의 위력을 강화하고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값진 재부들을 더 많이 창조할수록 적들은 더욱더 커다란 고민에 빠지게 될것이며 사회주의승리의 날은 그만큼 앞당겨질것입니다. 모든 당조직들과 일군들은 시대가 부여한 중대한 임무를 기꺼이 떠메고 자력갱생의 위력으로 적들의 제재봉쇄책동을 총파탄시키기 위한 정면돌파전에 매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전진을 저애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나가자!》, 이것이 오늘 전당과 전체 인민이 들고나가야 할 투쟁구호입니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오늘의 정면돌파전에서 기본전선은 경제전선이라고 하시면서 나라의 경제토대를 재정비하고 가능한 생산잠재력을 총발동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에 필요한 수요를 충분히 보장하는것을 현시기 경제부문앞에 나서는 당면과업으로 제시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현시기 나라의 경제실태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국가경제의 발전동력이 회복되지 못하여 나라의 형편이 눈에 띄우게 좋아지지 못하고있으며 중요한 경제과업들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집행력, 통제력이 미약한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준엄한 난국에 부닥친 중대하고도 관건적인 시기에 경제부문의 대응이 기민하고 원만하지 못하고 자력갱생한다고 구호만 웨치면서 실지에 있어서는 인민경제의 자립적토대를 정비보강하는데 힘을 넣지 않고있는 페단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자료들을 들어 세세히 지적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경제사업에 대한 통일적지도와 전략적관리를 실현하고 기업체들의 경영관리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에서 뚜렷한 전진이 없다보니 국가의 경제조직자적역할이 강화되지 못하였으며 경제전반을 정비보강하고 활성화하여 장성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사업에서 심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있는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경제사업체계와 질서를 정돈할데 대한 강령적인 과업을 제시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우리가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경제사업체계와 질서를 합리적으로 정돈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공화국이 막강한 힘을 비축하고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발전을 지향하고있는 오늘에 와서까지 지난 시기의 과도적이며 림시적인 사업방식을 계속 답습할 필요는 없다는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나라의 경제를 재정비하자면 결정적으로 경제사업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지도와 전략적관리를 실현하기 위한 강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경제사령부로서의 내각이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있는 심각한 현 실태를 엄책하시고 국가경제사업체계의 중핵인 내각책임제, 내각중심제를 강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도들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내각은 현존경제토대를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국가재정을 강화하고 생산단위들도 활성화할수 있게 경제작전을 바로하고 조직사업을 치밀하게 짜고들어야 하며 당면하여 국가경제의 명맥과 전일성을 고수하기 위한 사업에서부터 내각의 통일적지도와 지휘를 보장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혁명적인 사상과 정신은 시대를 앞서나가야 하지만 경제사업은 현실에 발을 든든히 붙이고 진행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현실적요구에 맞게 계획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명확한 방안을 찾고 전반적인 생산과 공급의 균형을 맞추며 인민경제계획의 신뢰도를 결정적으로 높이기 위한 관건적문제들을 제시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내각사업이자 당중앙위원회사업이고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집행이자 내각사업이라는데 대하여 강조하시고 전원회의이후부터 경제사업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지도와 관리를 강화하는데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중한 문제들을 해부학적으로 분석하시였다. 경제발전을 추동하고 일군들의 역할을 높일수 있게 전반적인 기구체계를 정비하기 위한 혁신적인 대책과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신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그에 토대하여 경제관리를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강하게 밀고나갈수 있는 현실적인 방도들을 밝혀주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국가상업체계, 사회주의상업을 시급히 복원하여 사회주의상업의 본태를 고수하면서도 국가의 리익과 인민들의 편리를 다같이 보장할수 있게 상업봉사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론을 연구대책하기 위한 문제, 세계가 분초를 다투며 새 기술, 새 제품개발경쟁을 벌리고있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경제관리를 개선하는데서 불필요한 절차와 제도를 정리할데 대한 문제, 국가관리와 경제사업에서 생산활동에 제동을 걸고 사업능률을 저하시키는 요소들을 빠짐없이 찾아 바로잡기 위한 문제, 국가적으로 전문건설력량을 확대강화하고 건설장비를 현대화하여 중요대상건설을 맡아 수행하게 하는 방향에로 나갈데 대한 문제,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현실성있게 실시하는 사업을 잘해나갈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전당적, 전국가적으로 강력히 추진하여야 할 경제장성의 관건적문제들에 대한 해결방향을 명시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인민경제 주요공업부문들의 과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였다. 자립경제를 떠받드는 주요공업부문들에서부터 겹쌓인 난관을 정면돌파하고 실제적인 생산적앙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금속공업, 화학공업, 전력공업, 석탄공업, 기계공업, 건재공업, 철도운수, 경공업부문들에 산적되여있는 페단들과 부진상태를 전면적으로 분석하시고 경제사업에서 진일보를 가져오기 위한 과학적이며 실질적인 대책들을 일일이 제시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자기 힘을 믿지 못하는 땜때기식투자, 자체의 잠재력에 의거하지 않는 하루살이식투자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이며 경제사업에서 그 어떤 진일보도 가져올수 없다고 하시면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전망성있게 사업하는것이 혁명을 책임지는 마땅한 태도라는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나라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전망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10대전망목표의 지표별계획들을 과학적으로 정확히 타산하여 세우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벌려 나라의 경제토대를 차곡차곡 공고히 다져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전망목표가 확정되면 국가적으로 경제조직사업과 지휘를 짜고들고 전인민적인 생산투쟁과 창조투쟁을 맹렬히 벌려 그것을 반드시 점령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농업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일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농업전선은 정면돌파전의 주타격전방이라고 하시면서 농업부문에서 과학농법을 틀어쥐고 다수확열풍을 더욱 세차게 일으킬데 대하여 지적하시고 농업부문의 과학기술력량과 농업과학연구기관들을 튼튼히 꾸릴데 대한 문제, 농업과학기술인재육성사업에 힘을 넣을데 대한 문제, 농촌경리의 수리화를 더욱 완성하여 흉풍을 모르는 농업생산토대를 마련할데 대한 문제, 농산작업의 기계화비중을 높이고 나라의 농업토지를 한선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축산업과 과수업 등 농업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전환을 안아오기 위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과학, 교육, 보건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 언급하시였다. 오늘 우리가 의거할 무진장한 전략자산은 과학기술이라고 하시면서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지금과 같이 경제사업에서 애로가 많을 때에는 과학기술이 등불이 되여 앞을 밝히고 발전을 선도해나가야 할것이라고 지적하시였다. 조선로동당 위원장동지께서는 당조직들은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과학전선에서 돌파구를 열어제껴야 사회주의건설의 전 전선이 승리하게 되며 강국의 리상과 목표도 오직 과학의 첨단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고심어린 탐구와 투신에 의해서만 실현될수 있다는 자각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차 서울의 문학 4(외솔 최현배의 사주오 두부장수)’ 편이 지난 16일 수필의 주무대인 서대문구 행촌동과 외솔선생이 반평생을 보낸 신촌 연세대 캠퍼스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했다. 먼저 3·1독립선언 기념탑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독립문을 차례로 돌아봤다. 탐방 다음날인 11월 17일이 마침 순국선열 추모제 80주년이어서 뜻깊은 방문이 됐다. 천주교 무악동 성당은 서울에 5개 있는 빈민사목 성당이다. 단아한 ‘ㄷ자’형 한옥 성당은 안방과 마루를 튼 공간에 제대 역할을 하는 교자상이 놓였고, 건넌방에 십자가상이 설치된 소박한 초기교회의 모습이다. 석교교회~영천시장 길은 작품 속 두부장수가 외치고 다니던 길처럼 정겨운 옛 골목이다. 일행은 독립문공원 극동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7737번 버스를 타고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하차했다. 외솔선생을 기념하는 외솔관과 선생의 흉상을 보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수필 ‘사주오 두부장수’와 유형유산인 석교교회, 영천시장 등 3개였다. 해설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첫 데뷔한 김윤정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맡았다.해마다 한글날이면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지은 ‘한글날 노래’가 방방곡곡 울려 퍼진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 노래를 지은 외솔은 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고 지킨 ‘수호신’이다. 외솔은 외로운 한 그루 소나무라는 뜻이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외솔 최현배 평전’에서 “외솔이라는 자호가 선생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외솔은 조선의 사육신 성삼문의 단심가에서 취한 호”라고 풀이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단심가 중 일편단심에서 ‘붉을 단(丹)’자를 얻었듯 외솔은 단심가 중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됐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의 낙락장송에서 ‘소나무 송(松)’을 취했다. 선생의 임은 조국이었으며, 한글이 곧 목숨이라는 각오로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실제 선생은 숱한 지식인들이 친일 변절했을 때 한글을 지킨 최고의 국어학자인 동시에 독립지사였으며,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생은 “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라면서 나라흥성의 법칙이 말과 글을 지키는 데 있다고 갈파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저항해 우리말과 한글을 유지하는 말과 글을 통한 독립투쟁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한자 전용과 영어공용어 채택 주장에 맞서 한글전용, 한글 가로쓰기, 한글 자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외솔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견지에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 한흰샘 주시경(1876~1914)의 수제자였다. 외솔은 “나는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정신에 깊은 자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나는 주 스승에게 배우고 또 배워, 가위 그 당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되었다. …나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오늘날까지 갈고닦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 이 사명을 다한 뒤에는 스승에게로 돌아가서 복명을 할 작정이다”고 술회했다. 실제 숨진 뒤 평소의 바람대로 스승이 잠든 경기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묘소 옆에 안장됐다. 그러나 후학들이 무심함 탓에 스승은 2013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제자는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돼 떨어졌다. 살아서 함께했고, 죽어서도 함께했던 사제를 떼논 것이다. 주시경 선생의 묘비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세종대왕 다음으로 한글 연구에 공헌한’ 주시경 선생은 언어가 민족의 얼이라고 생각한 언어민족주의자였다. 문하에는 최현배·김두봉·김윤경·이윤재·이병기·신명균·권덕규·이상훈·이극로·김선기 등 기라성 같은 애제자가 있었다. ‘외솔 최현배 평전’에 따르면 체제는 달랐지만 남한의 최현배, 북한의 김두봉이 중심이 돼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었다. 부산 동래출신 김두봉(1889~1961?)은 울산 염포 출신 최현배보다 5살 연상이었으나 절친한 친구사이로 지냈다. 이 둘은 스승을 쫓아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 대종교에 입교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을 지낸 김두봉은 1958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할 때까지 북한의 한글전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두 분이 없었더라면 미국과 소련 두 절대강국 치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외솔의 3대 저술은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이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유학하던 32살 때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집필, 일약 유명인사가 된 외솔은 귀국하자마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어국문학과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강의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대다수가 친일로 전향했을 때도 외솔은 끝까지 신념을 지켜 학교에서 쫓겨났다. 복직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우리말본’과 ‘한글갈’을 저술했다. 우리말본은 우리말 문법 연구의 분수령을 이루는 역저이며 한글갈은 훈민정음에 관한 역사적 문제와 한글의 이론적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구한 노작이다. 외솔 선생은 1970년 3월 23일 입원 중이던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77살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평생 동지 노산 이은상(1903~1982)은 ‘마지막 드리는 노래- 외솔 최현배 님 영 앞에’를 낭송했다. “고난도 파란도 많은/이 땅에 오셔 칠십 칠년/얼, 말, 글 겨레의 성벽/한 몸으로 지키시더니/붓 놓고 입 다무시고/어디로 멀리 가시옵니까./바람찬 거친 들에/뚜벅뚜벅 걸어간 자취/바람은 가고 없어도/발자욱만은 뚜렷하구려/이 길로 가야 한다고/일러주신 노정표외다./나라 잃은 그 시절에도/조국의 말과 글이 같이 살았고…금 글자로 새기오리다/해마다 솔씨 떨어져/자라난 다복솔 보소/생전에 외솔일러니/인제는 외롭지 않소/새 솔밭 돌아다보며/웃고 가시옵소서.” 외솔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시조시인 노산은 옥중에서 “미처 다 못 배워/인제사 여기 와서/ㄹ(리을)자를 배웁니다/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제 ‘말’ 지켜라/제 ‘글’ 지켜라/제 ‘얼’ 붙잡고…”라는 ‘평생을 배우고도’라는 글을 남겼다. 외솔은 늘 검은 두루마기, 흰 고무신에 머리는 중 마냥 빡빡 깎은 시골 생원 같은 모습이었다. 미끈한 양복에, 학자나 예술가 풍채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이 실망은 갈수록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경모의 정이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사주오 두부장수’에 나타나 있는 소박한 정겨움의 실체이다. 외솔의 숨결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늘 쓰는 도시락, 반올림, 마름모꼴, 꽃잎, 짝수와 홀수, 지름 같은 숱한 고운 말을 만드신 분이다.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한글자판에도 선생의 고혈이 스며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31회 서울역 뒷동네-서계동 ■집결장소: 11월 23일(토) 오전 10시 서울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시론] 광장은 차별하지 않고 꿈꾸게 한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시론] 광장은 차별하지 않고 꿈꾸게 한다/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 그들은 춤을 추고 있다. 격렬한 동작의 춤이다. 얼마나 환희에 차 있으면 저런 자세가 나올까. 그것도 모든 사람이 같은 모습으로. 바로 이응로 화백의 ‘군상’ 작품이다. 대형 화면을 속도감 있는 붓질로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 채웠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구별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 차이도 없다. 그냥 즐거운 통일의 춤이다. 이는 개관 50주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의 포스터 작품이기도 하다. 이응로 화백의 작품은 대동 세상을 꿈꾸듯 ‘차별’이 없다. 거기는 이데올로기의 쟁투도 없고, 갈등도 없고, 반목도 없다. 모두들 동등한 입장의 존재들이다. 오늘의 광장은 춤을 필요로 하고, 또 춤은 광장을 필요로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미술관은 반세기의 전통을 바탕으로 삼아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분기점에 와 있다. 게다가 지난해 말 청주관까지 개관해 덕수궁관, 과천관, 서울관과 더불어 4관 체제에 진입했다. 이는 세계적 규모의 현대미술관이다. 하지만 ‘외형적 확장에 버금갈 만큼 내실을 다졌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규모에 걸맞은 인력과 예산 그리고 직제 등 아직 갈 길은 멀다고 본다. 물론 다양한 성향의 관객이 요구하는 미술관 역할도 채워야 할 부분이다. 현대미술이란 장르는 국제적 보편 언어로 각광받고 있고, 또 미술시장의 역할로 짐작할 수 있듯 경제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스타 작가의 작품 한 점은 자동차 수천대 이상 수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미술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한국 미술의 확장 기회와 잠재성은 매우 크다.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은 덕수궁, 과천, 서울 3관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하는 대형 전시다. ‘미술과 사회’라고 부제를 달았듯이 이 전시는 한국 근현대 역사를 바탕으로 꾸며졌다. 1900년부터 1950년대를 조명한 1부는 덕수궁에서, 1950년대부터 지금의 한국 사회를 정리한 2부는 과천에서, 광장과 개인의 관계를 살피는 3부는 서울관에서 진행 중이다. 20세기의 한국은 격동의 역사, 정말 변화무쌍한 세기였다. 일제 강점에 저항한 독립운동, 해방에 이어진 전쟁, 그리고 군부정권 등장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미술가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달리 말한다면 ‘광장’은 미술작품으로 엮은 한국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이제 4차 산업의 인공지능(AI)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국은 전쟁을 치르고 해외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 해외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급성장했다. 물론 급성장은 갈등과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20세기는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온 시대다. 봉건사회의 밀실에서 민주사회의 광장이다. 광장은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같은 종류의 나무들끼리만 있는 숲은 건강하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다양한 나무의 종류가 섞여 있는 숲이 훨씬 건강하다는 것이다. 단일 색깔보다 변화를 주는 색채 환경이 생산성을 더 좋게 한다는 연구도 있다. 획일화 현상보다 다양성이 훌륭하다. 특히 민주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웃과 함께 어울리기는 하되 각자 개성은 갖도록 하자. 우리 민족은 오방색을 선호한다. 원색의 색깔들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까망이 있으니까 하양이 돋보이는 것이다. 지옥이 있으니까 천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같은 사물도 주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슬을 소가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그렇다면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소인가, 뱀인가. 오늘날 갈등의 현장으로 바뀌고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언제 환희의 춤을 볼 수 있는가. 광장은 극단적 주장으로 갈등의 현장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은 제3의 공간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사한 ‘광장’ 전시는 아픈 과거를 헤아려 보면서 미래를 희망하게 한다. 다양한 작품과 주제로 격렬하게 움직인 한국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광장의 역사를 써야 하는 미래를 안고 있다. 전시장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이다. 무지개는 여러 색깔들로 조화를 이룬 결과다. 바로 화이부동이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바로 광장이 주는 의미다.
  • ‘경기 누들로드’ 6味… 호로록, 추억을 먹다

    ‘경기 누들로드’ 6味… 호로록, 추억을 먹다

    어릴 적 국수는 별미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직접 반죽을 해서 칼국수나 소면을 삶아 잔치국수를 해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지금도 국수는 주식이든 간식이든 우리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깃거리다. 사실 국수는 요리 방법이 간단하다는 이유로 음식문화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몇 년 전 한 공중파 방송사에서 제작한 6부작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방영되면서 국수에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국수는 각 지역에서 나는 재료와 요리법으로 다양한 맛과 형태의 국수가 만들어졌다. 전국 팔도를 여행하다 보면 지역의 별미 국수를 접할 수 있는데 경기 지역에도 나름의 향토 맛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국수가 즐비하다. 경기관광공사는 이 중 6가지 국수를 선정해 ‘경기 누들로드’라고 이름 지었다.①양평 옥천냉면 양평 용문사 인근에 형성된 ‘옥천냉면마을’은 냉면의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황해도에서 냉면집을 하던 이건협씨가 1950년대 초 옥천에 정착하면서 옥천냉면의 역사가 시작됐다. 인근 군부대의 군인과 면회객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생겨났고 냉면집도 10여곳으로 늘어나 지금의 냉면마을로 자리잡았다. 황해도식 냉면인 옥천냉면은 일반 냉면과는 달리 면발이 2∼3배 굵고 거칠지만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담백한 육수 맛에 메밀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고춧가루와 식초로 무쳐낸 짠지와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린다. 과일과 배즙을 내 만든 냉면 다대기와 생강과 감초를 우려낸 냉면 육수를 선보이는 곳도 있다. 면은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섞은 굵은 면을 사용하기 때문에 툭툭 끊기는 평양냉면과 쫄깃쫄깃한 함흥냉면의 중간쯤 되는 식감을 낸다. ②연천 망향비빔국수 군 장병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 또 있다. 연천군 청산면 한 부대 앞의 망향비빔국수집은 전국에 수많은 체인점을 거느린 맛집이다. 1968년에 문을 연 이 집은 연천 근처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들이 성지 순례하듯 다녀갔다고 한다. 도심에서 꽤 먼 거리지만 매콤·달콤·새콤한 비빔국수 맛을 잊지 못해 군 장병은 물론 면회객, 관광객까지 식당을 찾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양념에 비벼서 나오는 국수는 배춧속의 김치맛과 쫄깃한 국수 면발로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 양념장 국물이 자박하게 들어 있지만 고추장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고명으로 김치와 오이, 상추가 올려진다. 영화 ‘강철비’에서 대한민국 외교안보수석이 북한 최정예요원과 국수를 먹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③여주 천서리 막국수 막국수는 메밀을 주원료로 하는 서민 음식이다. 냉면 등 메밀 음식처럼 막국수도 겨울철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나 요즘엔 여름은 물론 사계절 언제나 즐기는 음식으로 각광받는다. 여주의 천서리막국수는 강원도 춘천막국수와 더불어 막국수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천서리 막국수는 매콤한 양념의 비빔막국수가 제맛이다. 묵직한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막국수는 육수를 자박하게 붓고 바로 삶은 메밀면을 돌돌 말아놓는다. 고명으로 신선한 오이와 무를 채 썰어 올리고 비법 양념장을 넣는다. 맨 위에 삶은 달걀을 올리고 김 부스러기를 넉넉하게 뿌리면 완성된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여주 천서리는 1978년 평안북도 강계 출신의 실향민이 이곳에 막국수 집을 열면서 막국수 밀집촌으로 변신했다. 한때 30여곳이 성업했으나 지금은 강계봉진막국수, 홍원 막국수, 천서리막국수 등 10여곳의 막국수 집이 2~3대에 걸쳐 전통을 잇고 있다. ④하남 초계국수 초계국수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의 전통음식인 초계탕에서 유래한 것으로, 차게 식힌 닭 육수에 국수를 말고 닭고기를 얹어 먹는 음식이다. 초계탕은 조선시대 연회에 접할 수 있었던 보양식으로, 초계의 ‘초’는 식초를 뜻하고 ‘계’는 평안도의 방언으로 겨자를 뜻한다. 하남시 미사리의 초계국수는 우선 푸짐한 양에 놀라게 된다. 하얀 국수 위에 백김치, 오이, 닭 가슴살을 듬뿍 준다.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를 가득 담아내면 커다란 그릇이 꽉 찬 느낌이다. 잘 삶은 면은 차가운 육수를 만나 면발이 마치 냉면처럼 탱글하고 쫄깃하다. 매콤한 양념을 더한 초계 비빔국수도 좋다. 역시 푸짐하게 닭고기가 올라가고 차가운 육수가 함께 제공된다. ⑤수원 쫄면 쫄면은 면이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냉면을 만들다가 우연히 한 가닥 불거져 나온 굵은 국수가락이 쫄면으로 탄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경기 수원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쫄면집이 여럿 있다. 수원화성 장안문 앞에 보영만두와 보용만두, 팔달문시장의 코끼리만두 집이 유명한데 모두 1977년에서 1978년에 문을 연 노포이다. 모두 상호에 ‘만두’가 붙은 만두집이지만 쫄면이 더 인기다. 쫄면은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삶은 쫄면 위에 고추장 양념을 넣고 양배추를 채 썰어 담고, 삶은 달걀을 올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재료가 단출한 만큼 양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쫄면 양념은 고추장을 기본으로, 매콤하지만 짜지 않고 오래 숙성된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더해지는 채소와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⑥안산 대부도 바지락칼국수 경기도에서 가장 큰 섬인 안산 대부도에서는 살아 숨 쉬는 드넓은 갯벌에서 온갖 해산물이 나온다. 도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아름다운 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매력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대부도의 음식 중 바지락칼국수를 으뜸으로 꼽는다. 커다란 솥에다 지척에 널린 바지락을 넣어 칼국수를 끓여 먹던 풍습이 육지와 연결되면서 소문이 났다. 대부도 인근 갯벌에서 자라는 바지락은 알이 굵고 맛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타우린을 함유해 간 기능 회복에 좋고, 핵산 성분이 많아서 별다른 부재료 없이 바지락만 넣고 끓여도 맛있다. 바지락을 푸짐하게 넣고 버섯과 채소를 더한 칼국수는 그야말로 바다의 맛으로 일품이다. 바지락 칼국숫집들은 대부도 방아머리 음식타운과 구봉도 입구 인근에 모여 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문대통령 미얀마 불교 성지 ‘쉐다곤 파고다’ 맨발로 방문

    문대통령 미얀마 불교 성지 ‘쉐다곤 파고다’ 맨발로 방문

    미얀마를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미얀마의 성지이자 대표적 불교 유적지인 쉐다곤 파고다를 방문했다. 쉐다곤 파고다는 세계 최대의 황금 불탑과 이 불탑을 품은 1만평 규모의 사원을 통틀어 일컫는다. 미얀마 국민의 정신적 상징이자 미얀마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2500년 전 승려의 기록에 따르면 불탑은 석가모니가 죽기 전인 기원전 486년에 지어졌으며 이후 몇 차례 개축을 거쳐 15세기께 현재의 98m 높이가 됐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72캐럿 다이아몬드를 포함해 총 4448개의 다이아몬드와 루비·사파이어 등 각종 보석 2317개가 보존돼 있다. 현지의 규율에 따라 문 대통령 부부는 모두 맨발로 시찰에 나섰다.세계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불탑이라는 설명에 문 대통령은 “세계 최초요?”라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문 대통령은 불탑 인근의 보리수나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부처님이 득도한 그 보리수나무인가요?”라고 물으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불탑을 중심으로 인근을 돌며 관람을 이어갔다. 문 대통령은 방명록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상생의 이름으로 미얀마와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수요일을 오전과 오후로 나눠 8요일을 따르는 미얀마 전통에 따라 불탑 인근에도 각 요일을 상징하는 불상이 설치돼 있었다. 딴조 회장의 제안에 문 대통령은 바가지에 물을 담아 토요일을 상징하는 불상에 부었다. 딴조 회장은 “부처님을 씻어드리면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을 듬뿍 받을 것 같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딴조 회장은 “복을 받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복을 받은 것”이라며 덕담을 건넸다.문 대통령은 쉐다곤 파고다 안에 있는 종을 타종해 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타종하면 타종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딴조 회장의 말에 문 대통령은 “그럼 여기 있는 모든 사람과 복을 나눌 수 있겠네요”라면서 김 여사와 종을 쳤다. 불탑을 한 바퀴 돈 문 대통령은 웃음과 함께 “저는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사찰에 가면 꼭 탑돌이를 하게 된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미얀마 국민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하고 시찰을 마쳤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해남 물결 따라가니 남도 묵객 붓끝이네…화맥 길러낸 몽유진도

    해남 물결 따라가니 남도 묵객 붓끝이네…화맥 길러낸 몽유진도

    남도는 예부터 유배의 땅이었습니다. 수많은 정객들이 유배돼 시인 묵객으로서의 삶을 살았지요. 반도의 끝이라 할 전남 해남, 진도 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재능은 고스란히 지역의 후예들에게 이어졌습니다. 밭고랑에서 풀 뽑는 아낙조차 즉석에서 절창(絶唱)을 뽑아낸다던가요. 진도에 들면 시, 서, 화는 물론 소리 자랑 말라는 말이 전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해남 역시 녹우당을 중심으로 ‘남도 문화르네상스’를 꿈꾸고 있지요. 그렇게 해남으로, 진도로, 예술이 꽃 피는 해안선을 따라 ‘남도 예술기행’을 다녀왔습니다.외지인들이 해남과 진도를 묶어 돌아볼 경우 해남을 거쳐 진도로 가는 게 순서다. 그래야 좀더 효율적으로 두 지역을 돌아볼 수 있다. 해남에선 ‘예술이 꽃피는 해안선-예술가와 함께하는 남도 수묵 기행’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박2일(2박3일) 동안 예술가, 큐레이터 등과 동행하며 예술을 체험하고 답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대흥사 수묵화 체험, 템플스테이, 해창 막걸리 체험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고산의 녹우당… 윤두서 자화상 압권 녹우당으로 먼저 간다. 해남 윤씨의 종택이다. 무엇보다 당호가 독특이다. 푸를 녹(綠) 자에 비 우(雨) 자를 쓴다. 말 그대로 ‘초록비’라는 뜻이다. 바람 불면 집 뒤 비자나무에서 우수수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녹우당이 고택 전체를 뜻하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이 집의 사랑채를 가리키는 당호였다. 녹우당은 조선의 17대 왕 효종이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한 집이다. 82세 되던 해 낙향을 결심한 고산이 당시 수원에 있던 집을 뜯은 뒤 배로 싣고 와 해남에 다시 지었다. 차양 역할을 하는 사랑채 앞쪽의 겹처마, 높낮이로 아버지와 아들의 기거 공간을 구분한 공간 배치, 회랑 형태의 나무 기둥 등이 인상적이다. 지금도 고산의 14대 손이 거주하고 있다. 집 뒤 풍경도 웅숭깊다. 300년 묵은 늙은 소나무와 고풍스런 돌담길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녹우당 아래는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다. 해남 윤씨 관련 유물을 전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전시관은 단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층 건물이다. 1층은 로비 등 손님맞이 공간이고, 대부분의 작품은 지하층에 전시돼 있다. 도드러지거나 위압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주변 풍경과 차분하게 어우러지려는 건축 의도가 읽힌다. 이곳에 국내 최고의 초상화로 꼽히는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이 있다. 강렬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 극사실주의 작품을 보듯 한올 한올 섬세하게 묘사된 수염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작품 하나만 보더라도 ‘본전’은 뽑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울림을 안긴다. 아울러 윤선도가 실제 사용한 나침반,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오우가’ ‘어부사시사’, 고려시대 유일한 노비문서인 ‘지정14년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윤두서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보던 옛 거울과 동국진체의 서예 작품 등 흥미로운 유물들을 진품으로 만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흥사서 차 한잔 대흥사는 해남을 대표하는 대가람이다. 지난해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절집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흥사에서는 사찰음식 체험, 템플스테이 등의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수묵화 체험도 재밌다. 쥘부채에 삐뚤빼뚤 자신만의 수묵화를 그려 넣는 프로그램이다. 체험장은 대흥사 무량수전이다. 추사 김정희가 편액 글씨를 남긴 곳. 오래된 건물의 그늘에 들어 저만의 부채를 만들다 보면 더위는 저만큼 물러나고 없다. 대흥사에서는 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다반사(茶飯事)다. 차 시음 행사는 저 유명한 일지암에서 열린다. 대흥사에서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닿을 수 있다.일지암은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 초의(1786~1866) 선사가 차와 더불어 선(禪)을 수행하던 곳이다. 일지암(一枝庵)이란 이름은 “뱁새는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는 중국 당나라 시승 한산의 시구절에서 따왔다. 뱁새는 흔히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지는 동물로 인식되지만 불가에서는 다소 다른 모양이다. 불가피하게 오지랖을 넓혀야 하는 재능 많은 새가 황새라면 뱁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평범한 새다. 스스로가 뱁새여서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행복한지 일지암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풍경도 빼어나다. 두륜산과 멀리 남해 바다가 네모 창틀 안에 다 담긴다. 이 정도면 뱁새의 호사라 할 만하다.●왜구 물리친 울둘목에 서린 이순신 정기 예향을 찾아가는 여정이지만 울돌목에 서면 느낌이 다르다. 일본에 난데없이 한 방 맞은 요즘엔 더욱 그렇다. ‘바다가 울면 물이 돈다’는 울돌목(명량·鳴梁)은 해남과 진도 사이를 흐르는 해협이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한 명량대첩(1597)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시속 20∼30㎞의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조류를 이용해 왜선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한다. 진도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중 하나인 ‘강강술래’(국가 무형문화재 8호)도 바로 이곳에서 비롯됐다. 해남 쪽에 우수영관광지, 진도 쪽에 녹진관광지가 각각 조성돼 있다. 실경산수화 같은 울돌목 풍경을 보려면 녹진전망대를 찾는 게 좋다. 진도대교와 주변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울돌목 인근의 우수영문화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명량대첩과 해남사람들의 이야기를 벽화 등 조형미술 작품에 담아 조성한 마을이다. 약 2㎞ 안에 갤러리, 카페 등이 밀집해 있다.우수영관광지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진도 땅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진도아리랑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이쯤에서 진도 민초들의 노래 한 자락 들어보자. ‘진도사랑 시 공모전 수상시집’에 실린 시 ‘운림산방으로 오시어요’(서지은 지음)의 한 구절이다. “노오란 울금을 곱게 빻아//(…) 첨찰산 병풍에 첩첩이 발라놓고//(…) 귀하디귀한 새빨간 보석알 닮은, 홍주(紅酒)를/ 그대 오시는 쌍계사 언덕 어귀에//(…) 비단치마 폭처럼 넓게 펼쳐 올리겠나이다//(…) 가만히 가만히/ 그대, 어서 오시어요” 이런 은근한 초대를 받고도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 ●시·서·화·창 뛰어난 진도… 첫 민속문화예술특구 진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문화예술특구다. 시·서·화·창,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진도에 전해 오는 민속음악들은 대개 섬사람의 삶과 애환을 꿰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시름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한을 눈물로 맺지 않는다. 고된 삶을 노래하면서도 결국엔 내일의 희망을 그린다. 군립민속예술단의 김오현 단장은 “다른 지역 씻김굿과 달리 진도의 씻김굿은 음악적 요소가 강하다”고 했다. 진도의 씻김굿은 경쾌하다. 장단조차 슬픔의 절정에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슬퍼도 비통에 빠지지 말라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를 여기서 본다. 진도에서는 ‘토요민속여행’ 등 상설 공연 4개를 비롯해 예능보유자와 함께 하는 ‘진도 전통 문화공연’ 7개 등 모두 13개의 민속공연과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민속공연 부자’다. 이 가운데 진도씻김굿(국가무형문화재 72호) 진도다시래기(국가무형문화재 81호) 진도만가(도 무형문화재 19호) 등에 대해 ‘진도 상·장례문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쏠린다. ‘보배섬’ 진도(珍島)의 옛 이름은 ‘옥주’다. ‘비옥할 옥’(沃) 자를 쓴다는 게 정설이지만, 어차피 그마저 불확실한 것이라면 ‘구슬 옥’(玉) 자로 바꿔 쓴다고 해서 그리 틀리지는 않을 터다. 구슬은 곧 보배다. 물론 잘 뀄을 때라야 그렇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야 보배라고 했으니 말이다. 지금 진도가 예향으로 이름을 날리는 건 역사 속 수많은 ‘구슬들’의 예기가 잘 드러나도록 섬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북돋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첫자리가 운림산방이다.●조선 대가의 화실 ‘운림산방 ’ 서지은 시인이 “겹이어 몇 대를 붓을 들던 그 옛날 조선의 대가의 화실”이라 표현했듯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소치 허련(1808~1893)에 이어 5대에 걸쳐 직계 화맥(畵脈)이 이어지고 있는 남종화의 산실이다. 오각형 모양의 연못 운림지와 소박한 정자 사이로 소치가 손수 심었다는 배롱나무가 절정의 붉은 빛을 토해 내고 있다. 정자 뒤로는 진도의 진산 첨찰산이 운림산방을 감싸고 있다. 진도 사람 몇몇은 이 같은 안온한 풍경을 두고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빗댄 표현으로, 진도의 실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운림산방 옆은 소치기념관이다. 소치 허련의 작품은 물론 미산 허형과 남농 허건, 임전 허문 등 후손들의 수묵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수묵화의 특징 중 하나는 여백이다. 여백은 단순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공간이 아니다. 전시 작품들을 꼼꼼하게 살피다 보면 여백이란 것이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림이 그려지는 매우 독특한 공간이란 걸 알게 된다. 글 사진 해남·진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지역 번호 061) →진도의 4개 상설 공연 가운데 ‘토요민속여행’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전국 15개 ‘상설문화관광 프로그램’ 중 하나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23년째 이어져 오고 있어 진도의 ‘프랜차이즈 공연’이라 할 만하다. 지난해 ‘한국관광의 별’에도 선정됐다. 진도 아리랑과 강강술래, 씻김굿 등 무형문화재 공연이 한 시간 남짓 펼쳐진다. 공연 뒤에는 관객과 출연진이 어우러지는 흥겨운 춤판이 벌어진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군립민속예술단 주관으로 열린다. 공연은 무료다. 544-8978. ‘금요국악공감’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국립남도국악원에서 열린다. 역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엔 진도군 보유 무형문화재 중심의 ‘진수(水)성찬’(1만원)이 오후 7시 30분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일요일엔 ‘일요상설공연’(5000원)이 오후 2시 해창민속전수관에서 각각 관객을 만난다. 이 밖에 ‘진도아리랑 오거리’ 등 버스킹 공연을 수시로 진행한다. →해남의 ‘예술가와 함께하는 남도 수묵기행’은 오는 11월까지 진행된다. 참가 신청은 행촌문화재단(533-3663)에서 받는다. →해남 읍내 천일식당(536-4001)은 80년을 이어온 떡갈비로, 진일관(532-9932)은 한정식으로 각각 소문난 집이다. 진도 신호등회관(544-4449)은 전복비빔밥을 잘한다. 전복의 암수 내장을 함께 쓰는 게 독특하다. 양념장이 강해 다소 맵게 느껴질 수 있다.
  • 넉넉함 품은 막걸리 길, 골목골목 인심을 맛보다

    넉넉함 품은 막걸리 길, 골목골목 인심을 맛보다

    전주의 맛을 찾아 떠날 차례다. 전주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비빔밥뿐 아니라 시장 음식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갖가지 먹거리가 풍성하다. 좋은 음식은 좋은 식재료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전주 음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장을 먼저 찾아가 보는 것도 좋다.풍남문과 전주천 사이에 전주를 대표하는 남부시장이 있는데 하천 맞은편에는 아침에만 서는 특이한 시장이 있다.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싸전다리 서쪽, 하천 남쪽 둔치에는 매일 오전 4시부터 10시까지 ‘도깨비 시장’이 열린다. 동트기 전부터 하루 내다팔 물건을 바지런히 준비해온 상인들이 하천을 따라 자리를 깔고 천막을 펼친다. 맞은편 공영주차장은 빈자리 없이 꽉 찬다. 사과, 배, 참외, 파, 가지, 파프리카 등 싱싱한 과일과 채소들이 수북이 쌓였다가 아침부터 몰려든 손님들의 손에 들려 간다. 생선, 미숫가루, 잡다한 공산품도 볼 수 있다.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 물건을 다 판 상인들은 미리 자리를 정리한다. 반짝 등장했다 사라지는 시장이라 활기가 더 넘친다.도깨비 시장을 둘러본 뒤 돌다리를 건너 남부시장으로 향한다. 남부시장은 조선 중기 전주성 남문 밖에 섰던 남문장의 역사를 이은 시장으로 4개 성문 밖 시장이 일제강점기 때 통합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국의 여느 전통시장처럼 간판 정비 등을 통해 현대화됐지만, 시장과 함께 평생을 보낸 상인들과 가게의 모습에는 옛 시절 추억이 서려 있다. 2000년대 들어 시장의 중심 건물 2층에 청년몰이라는 이름의 젊은 가게들이 둥지를 틀었다. 시장에서는 볼 수 없던 일본 카레와 우동, 피자와 파스타, 미국식 브런치 등을 파는 음식점과 예쁜 카페, 디자인 용품 가게가 생기면서 전통시장을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늘었다. 오랜 역사의 전통시장 위에 청년몰이 공존하는 풍경이 재미있다.남부시장에는 전주만의 특색을 품은 먹거리가 풍성하다. 콩나물국밥은 전주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삼백집, 현대옥, 왱이집을 3대 맛집으로 꼽는다. 그중 ‘토렴’을 한 국밥을 내는 것으로 유명한 현대옥이 남부시장에도 있다. 전국 곳곳에 지점을 두고 있지만 전통 방식의 토렴에 ‘남부시장식’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원조 맛집을 자랑한다. 시장 좁은 골목골목을 따라 들어가 봤다. 뜨끈한 김이 새어나오는 커다란 솥을 마주하고 주방을 보며 일렬로 앉는 좁은 좌석에 아침부터 손님이 빼곡하다. 그릇에 밥을 퍼담고 그 위에 국물을 반쯤 붓는다. 국물을 적당히 따라낸 뒤 다시 솥에서 뜬 국물을 가득 붓는다. 또다시 국물을 덜고 이번에는 콩나물을 듬뿍 올린다. 붓고 덜기를 한 번 더 반복하고 양념장을 얹은 뒤 다시 국물을 채운다. 현대옥에서는 이렇게 세 차례 국물을 더는 방식으로 토렴을 한다. 여름철 금세 쉬는 쌀밥을 장기간 보관하기 힘들던 과거에 찬밥을 국물로 따뜻하게 데워 내놓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 토렴이다. 밥을 계속 끓여 걸쭉하게 되는 것을 막고 국물을 부었다 따르는 걸 반복하면서 밥알 사이사이마다 국물이 배게 해 맛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시원한 콩나물국밥에 쫄깃한 오징어가 섭섭지 않게 더해진다. 여기에 김을 직접 손으로 찢어 넣고 수란을 곁들이니 국밥이라고 얕볼 수 없는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된다. 남부시장에서 먹어 봐야 할 음식 중 하나는 피순대다. 두부, 채소, 곡류 등 순대소를 선지에 버무려 색이 검은 피순대는 일반 순대보다 두툼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부추·고추·마늘 등 쌈채소와 초장, 쌈장이 함께 나와 입맛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전주는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술 문화로도 유명하다. 유행을 타고 지금은 서울에도 전파된 ‘가맥’ 문화가 전주 태생이다. 가게에서 파는 맥주를 뜻하는 ‘가맥’은 1980년대 전주의 작은 슈퍼들에서 조촐한 안주를 팔면서 시작됐다.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렴한 술과 안주를 즐기는 것이 전주만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가맥으로 유명한 가게가 여럿 있지만 제일 이름난 곳은 ‘전일갑오’다. ‘전일슈퍼’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평일에도 애주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연세 지긋한 사장님이 발갛게 타고 있는 연탄불에 직접 황태를 굽는다. 맥주 한 병과 함께 식탁에 오른 황태구이의 은근히 풍겨 오는 냄새에 절로 군침이 돈다. 손으로 쭉 찢어 입에 넣자 포슬포슬한 식감이 입속 가득 퍼진다. 이어 고소한 맛이 혀를 타고 전해진다. 맥주잔과 황태를 오가는 손이 그칠 새 없다.‘가맥’과 쌍벽을 이루는 재미있는 음주 문화를 막걸리 골목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막걸리 두 주전자에 푸짐하다 못해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안주가 나오는 가게들이 300여m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다. 튀김, 조림, 전 등 20가지 이상의 음식으로 구성된 상차림이 막걸리와 함께 나오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도란도란 담소를 즐기다 보면 홍어삼합, 산낙지, 게장밥, 삼계탕, 홍합탕 등이 빈 접시를 치울 틈도 없이 차례로 나온다. 넉넉한 전라도 인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젊은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개성 있는 카페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객리단길은 침체해 가던 구도심에서 최근 몇 년 새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거리다. 전주객사길 일대로 서울 경리단길의 이름을 빌려 객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색 맛집과 카페가 하나둘씩 생기면서 어느덧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북서쪽 외곽 산업단지 내에는 독특한 카페 하나가 들어섰다. 25년간 방치되던 카세트테이프 공장이 ‘팔복예술공장’으로 새 옷을 입고 지난해 3월 개관했다. 1층 카페는 옛 공장 ‘썬전자’와 노동자 소식지 ‘햇살’에서 이름을 따 ‘써니’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당시 여공을 닮은 대형인형 ‘써니’가 카페에서 오는 이들을 반긴다. 2층과 옥상 전시실에는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야외 컨테이너에는 만화방과 그림방이 있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전주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그리며 동심의 예술가로 돌아가 보는 것도 기억에 남는 여행의 괜찮은 마무리일 것이다. 글 사진 전주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애달픈 국민 위로한 변사, 문화재로 등록 않으면 크나큰 문화 상실”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애달픈 국민 위로한 변사, 문화재로 등록 않으면 크나큰 문화 상실”

    마지막 ‘변사’ 생활 30년 최영준이 말하는 ‘목소리 마술사’“인간문화재 등록요? 좋죠! 무성영화 변사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인정받고 계승 발전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면 더 없이 반가운 일이죠. 나라잃은 설움에 가득찬 식민지 백성을 통곡하게 하고 목놓아 아리랑을 노래하며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과 변사는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을 발했던 문화적 횃불입니다. 변사의 역사가 짧다고요? 제가 마지막 변사가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30여년 전 무성영화가 단 한편밖에 남지 않던 시절 사명감 하나로 사재를 털어 변사공연을 이어왔습니. 100년 전통을 가진 무성영화와 변사를 하찮게 여겨 이 시대에 소멸시킨다면 크나큰 문화상실이자 후손에게 잘못이 될 것입니다.”변사, 일제시대 탄생한 광대… 무성영화, 관객에 전달애달픈 대사에 심금 올리는 목소리… 관객 울리고 웃겨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동영상을 만들 수 있고, 영화관에 들어서면 선명한 고화질 화면에 서라운드 음향이 펼쳐지는 디지털시대다. 이런 와중에 무성영화를 해설하고 연기하고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변사(辯士)가 아직도 활동한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끓어올랐다. 호기심으로 수소문한 최영준씨. 자신을 광대(廣大)라고 부르는 그는 한국에서는 유일한 ‘목소리 마술사’라는 변사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한국영화 백년사에서 빠질 수 없는 무성영화 변사. 애달픈 스토리에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세파에 시달린 관객을 웃겼다 울리는 변사. 그러나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변사가 전국을 다니며 전성기를 누리듯 공연을 이어 간다니 그의 애환과 비결을 듣고 싶었다. 지난 3일 최영준씨를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광대의 나이는 늘 철없는 열 살”이라며 굳이 나이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30여년전 우연히 본 ‘검사와 여선생’에 꽂혀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 제작해 변사로 나서새로운 장르여서 ‘무성영화 변사극’이라 명명”- 변사극에 빠지게 된 계기는. “30여 년 전, 모노드라마 1인극 연극배우로, 인천에서 ‘약장수’, ‘팔불출’을 직접 제작하고 출연해 서울로 진출하였죠. 그 당시 연극의 중심이었던 이대입구 소극장에서 한 작품 당 2년씩, 장장 4년간 장기공연을 마치고 차기작품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5년 전에 작고하신 변사 신출 선생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을 보게 됐어요. 무성영화와 변사를 보는 순간 ‘아, 이거다’ 싶었죠. 제 눈에는 변사가 1인극 배우로, 무성영화는 훌륭한 무대장치로 보였던 겁니다.” 이걸 꼭 해야겠다 마음먹고 그 시절의 다른 흑백무성영화가 또 있는지 찾았다. 당시 한국에 ‘검사와 여선생’ 외에는 무성영화가 단 한편도 없었던 상황. 신파극으로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를 무성영화로 직접 제작해서 변사로 나섰다. 그때가 1986년. 그 때부터 전국 순회공연과 미국 공연도 갔다. 장르에 대한 구분이 필요해서 그는 직접 장르 이름을 ‘무성영화 변사극’이라고 붙였다. - 무성영화 변사극이란 뭔가요.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시대를 주도하는 문화가 있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문화도 있어야 합니다. 무성영화 변사극은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의 아픈 역사 속에서 위로 받고 싶었던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신파극, 악극, 그 시절 대중가요, 흑백 무성영화, 그리고 변사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이 시대의 관객과 함께 어울리고 소통하는 마당극이라는 그릇에 담았습니다. 저의 연출기법이죠. 장르의 융합이랄까, 하이브리드 콘텐츠라고 할 수 있지요. 각기 독립된 장르의 장점을 섞어놓은 비빔밥 같은 장르이니 그 이름을 새롭게 붙인겁니다.” -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변사 연기에 도움이 되나. “한 우물만 파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죠.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라는 용어가 생소했던 시기에, 저는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살아 왔죠. 극단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연극배우, 연출, 시나리오 작가, 영화배우, 작사, 작곡, 가수, 개그맨…, 라디오 DJ도 재작년까지 25년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을 부른 가수가 바로 접니다. 글쓰기, 연기, 연출, 노래, 작사, 작곡…. 발표한 음반도 열장이 넘습니다. 음반 한 장에 제가 만든 신곡이 평균 10곡이니 거의 미친 듯이 열정을 쏟아 붓는거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말이 쉽지 완전히 맨땅에 헤딩 하는거죠. 전사의 심장으로, 독학으로, 가시밭길을 헤쳐 가는 겁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저의 학습이고 노하우를 터득하는 방법입니다. 파란만장한 제인생의 이런 모든 것이 자양분이 되어 ‘1인36역’의 변사를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변사극 매력?…관객과 소통, 무성영화와 호흡마당놀이 형식… 관객 호응 일본 영화사도 놀라주 관객은 노령층… 노인 증가에도 콘텐츠 부족”- 무성영화 변사극의 매력은 무엇인가. “관객과 대화하고 함께 얼싸안고 울고 웃는, 접촉을 통한 소통입니다.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무성영화와 변사의 환상적인 호흡인거죠. 변사의 연기술과 웃음을 주는 애드립은 젊은 관객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르신을 위한 공연입니다. 또한 마당놀이 형식을 도입해서 관객의 적극 참여를 유도합니다. 지난 2월에 일본 마츠다 영화사를 방문하였는데 무성영화 1000편을 보유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변사는 5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지만 대중의 주목도가 떨어져 정부의 지원사업에 의지하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제 공연 영상을 보더니 어떻게 이렇게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지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9월에 초청공연을 갖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무성영화 상영이 역사적인 콘텐츠의 재연이라면, 저의 무성영화 변사극은 변사와 관객이 함께 어울리고 즐기는 공연입니다. 제가 이렇게 지극히 한국적으로 변사극을 만들고 틀을 잡아 놓으면 후대에 누군가에게는 초석이 되고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화 영역이 더욱 확장되는 것이죠.” - 변사극 공연, 지방에서 많이 하던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서울 보다 지방이 문화 소외지역이라고 해서 그쪽 문화단체나 지자체에서 많이 초청을 해줍니다. 이게 아날로그 콘텐츠이다 보니 관객층은 주로 저를 알아봐 주시는 어르신들이죠. 그런데, 사실 진짜 문화소외 지역민은 서울에 사는 어르신들이예요. 노인을 위한 구경거리가 없다면서 어쩌다 변사공연을 보시고는 ‘자주 보고 싶다, 많이 아쉽다’고 하시더군요. 우리나라도 노인 인구가 많아지지만 즐길 문화 콘텐츠가 부족하잖아요. 앞으로 방방곡곡 더 많은 공연으로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고, 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시간 넘게 계속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썼다는 미발표곡 ‘목포항’도 불렀고, 조금 뒤에는 ‘목포의 눈물’도 구성진 가락으로 읊조렸다. 아이들 같은 목소리로 동요도 여러차례 불렀다. 물론 변사의 역할을 소개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와 유독 인연이 깊다고 했다. 연극배우 시절 극장 개봉영화 ‘엘리베이터 올라타기’, ‘랏쉬’에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개그맨 데뷰 후에는 어린이 영화 십여편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어린이 영화 시나리오 두 편을 썼는데요, 한 편은 지난달에 경주에서 촬영을 마쳤고요, 또 한 편은 8월에 제주도에서 촬영할 예정입니다. 배우들의 대사는 전부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영화음악도 제가 다 작사 작곡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올해가 한국 영화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변사 배우러 오면 말려…엄청 노력에도 돈은 안 돼그래도 배우겠다면 1인극 ‘팔불출’ 공연하라면 안 와10년 노력해야 제대로 된 변사… ‘노랑목’ 나와야 해”- 변사, 하고 싶다는 사람이 혹시 있나. “가끔씩 찾아옵니다만 제가 말리죠. ‘변사극 쉽지 않다. 떼돈 버는것도 아닌데 노력은 엄청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변사를 해보겠다고 하면 제가 30년 전에 공연했던 모노드라마 ‘팔불출’의 대본과 동영상을 주면서 ‘이 작품, 한번 공연하고 오라’고 합니다. 90분 동안 혼자 공연한 작품이거든요. 그러면 다 기겁을 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더군요. 변사가 되려면 어느 정도 나이도 있고 타고난 재능에 연기가 익어야 합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한 10년은 해야 제대로 된 변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랑목이 나와야합니다. 변사 연기의 신의 한수는 노랑목입니다.” - 노랑목?, 이게 뭔가요. “이게 뭐냐하면요,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을 가만히 들어보시, 모기소리처럼 들릴 듯 말 듯 아주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이 소리가 애달프면서도 심금을 울립니다. 발성이 달라요. 노랑목 연습은 입을 작게 벌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노래하고 말합니다. 그러자면 목구멍을 딱 막아야 합니다. 보통은 목을 열고 말하는데 이건 목구멍을 닫아야 해요. 그래야 비성, 두성 가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게 됩니다. 변사는 흘러간 옛 노래도 불러야 되고, 모든 배역의 목소리를 연기해야 하는데, 특히 남자 변사가 여자 주인공 목소리를 예쁘게 구사해야 합니다. 노랑목이 가능해지면 실제 여성보다 더 여성스런 목소리, 변성기 이전의 어린아이 같은 예쁜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랜 연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언제부터 이런 엔터테이너 소질을 보였나. “제가 어릴 때부터 연극을 시작할 무렵인 20대 중반까지는 내성적이고 말도 없었습니다. 남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연극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 잠깐 연극부에서 활동을 했지만, 처음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할 때 연기는 모르고 자의식은 강해서 많이 힘들었죠. 더구나 대학을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아서 1년 다니다 그만두었으니, 전공이 완전 다른 연극 문외한 이었죠. 그래도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당시에 최고의 연극배우 이호재씨를 롤모델로 삼았어요. 그때 마침 그 분이 1인극 약장수를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그 배우의 ‘약장수’ 대사를 전부 몰래 녹음해서 숨구멍은 어디인지, 억양은 어떻게 하는지, 소리는 어떻게 내는지 연구하고 따라했습니다. 그의 공연을 매일 봤고, 그의 대사를 전부 외웠습니다. 그 명배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벤치마킹 한 셈이죠. 그러다가 결국 제가 살던 인천에서 소극장을 만들어서 개관 기념공연으로 최영준 모노드라마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습니다. ‘약장수’에 이어서 ‘팔불출’을 했는데, 한 작품을 2년씩 하루 두번 계속 공연하니 그 작품에 대해서는 도가 트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서울 서대문 푸른극장에 있는 공연기획사인 ‘태멘’으로 스카우트되어 모노드라마를 푸른극장 지하 말뚝이 소극장에서 계속 했습니다.” - 모노드라마 당시 반응은. “처음 인천에서 할 때는 객석이 텅 비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관객 없이 연습도 하는데 …. 연기 공부를 한다’ 하는 심정으로 독하게 계속하니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서 극장이 미어터졌습니다. 그래서 한달에 400만원 줄테니 서울의 말뚝이 소극장에서 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서울로 진출했던 거죠. 당시 선배들이 저를 두고 ‘너같은 어린 놈이 무슨 일인극이야. 일인극은 베테랑들이 하는 거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형, 나이 먹으면 힘이 없어서, 체력이 딸려서 못하는 게 일인극이예요’라고 받아치면 선배들이 저보고 ‘저런, 당돌한 녀석’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 “연극배우 이호재가 롤모델…대사 몰래 녹음해 연습고 강계식 선생의 한마디 충고가 신의 계시처럼 꽂혀‘희극 배우는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울릴 줄 알아야’전유성도 고마운 사람… 인맥 동원해 영화도 만들어줘”- 그래도 격려해준 선배는 없었나.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민재 형이 약장수 공연 당시에 연출을 봐 주셨는데, 저의 연기 개인지도 교사였죠. 연기에 눈을 뜨게 해주신 은인이죠. 변사를 체계적으로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습니다만 강계식, 고설봉 두 분이 생각납니다. 영화계에선 이향, 이런 분들과 신파극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80년대 초반이니 당시 이분들이 70대를 넘겼거나 80대에 가까웠습니다. 이분들이 신파시대의 마지막 세대예요. 제가 빨리 같이 작업하지 않으면 이분들이 갖고 있는 신파극의 유산을 놓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연기도 연출도 같이 하면서 그분들하고 여러 작품 신파극을 만들면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뭡니까’하면서 많이 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강계식 선생이 저보고 ‘여보게 미스터 최, 자넨 말이야, 희극배우야. 희극을 전문으로 연기를 하라는 거야. 근데, 희극배우는 웃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을 울릴 줄도 알아야 돼.’라고 하신 말씀이 신의 계시처럼 제게 팍 꽂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하염없이 웃기다가 끝에는 관객을 반드시 울립니다. 슬픔으로 끝나야 그게 예술적이라는 거죠. 카타르시스도 있고. 그 당시 신파극에 대한 것을 많이 배우고 터득했죠. 또 한분은 개그맨 전유성씨예요. 어느 날, 저의 무성영화 변사극 계획을 들으시더니 감독을 맡아 주시고 당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영화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시고 제가 변사로 나설수 있도록 해주신 결정적인 귀인이자 은인이죠.” - 우리나라에 변사극 레퍼토리가 많나. 무성영화가 있으면 변사극이 가능한가. “무성영화라고 해서 다 변사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변사가 없어도 상영할 수 있습니다. 변사의 개입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도 완벽한 영화입니다. 변사극의 무성영화는 반드시 변사가 개입해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예컨대 ‘검사와 여선생’을 변사 없이 무성영화로만 상영한다면 이상하고 싱거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변사는 영화와 관객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합니다. 변사의 능력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변사극의 핵심입니다. 현재 저의 변사극 레퍼토리는 세편입니다. 1948년작 ‘검사와 여선생(감독 윤대룡) 1986년작 ‘이수일과 심순애’(감독 전유성), 2002년작 ‘나운규의 아리랑’(감독 이두용) 입니다.” - 남기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올해안에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를 제가 무성영화로 제작, 감독할 예정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 무성영화에서 시도했던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경우 예를 들면, 변사가 영화속 배우들의 싸움을 말린다. 영화 속 김중배 얼굴에 두루말이 화장지를 던진다. 이수일이 돈을 뿌리는 장면에서 변사도 같은 동작으로 돈을 뿌린다… 등등. ‘홍도야 우지마라’에서는 변사가 영화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쁜놈을 때려주고 화면 밖으로 나오고, 비맞는 영화 속의 홍도에게 변사가 우산을 건네주고, 화면 속 홍도의 편지를 변사가 받아서 홍도 남편에게 건네주는 등의 가상현실 같은 장치를 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애수를 자아내는 장면을 그대로 살려낼 겁니다.” “올해 신파극 ‘홍도야 우지마라’ 무성영화 제작 예정제작비 구애없이 다음 세대 위해 작품 남기는 게 할일언젠가 무성영화 박물관 설립하고 변사 양성하고 싶어”- 무성영화 제작에 큰 돈이 들텐데 제작비 조달은 어떻게 하나. “1억원정도 예상하는데, 변사극 공연으로 벌어서 영화 제작할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제작비용이 부담이 되긴 하지만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손익 분기점이 올 때까지 계속 울궈 먹을수 있으니 그렇게 무식한 투자라고 생각하진 않는거죠. 많은 분들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면 좋겠다는 요구도 있고요. 다음 세대, 후학들을 위해 제가 살아있는 동안 여러 작품을 남겨놓는 것이 이 시대 마지막 변사로서의 할 일이죠.” -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10년 전, 2009년에 미국 LA에서 공연기획을 하는 이광진씨 초청으로 미국 서부지역 한국교민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떠났어요. 서울 촌놈이 샌디에고, 오렌지카운티, LA, 산호세,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태평양을 따라 죽 거슬러 올라갔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미국에서도 오지라는 알래스카에서 공연을 마치고, 공연장 출입구에 서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며 관객 배웅을 하는데,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분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20달러를 차비에 보태 쓰라고 주시는 거예요. ‘마음만 받겠다’고 해도 한사코 주시면서 ‘나, 집에 가고 싶어. 한국에 가고 싶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가시던 그 할머니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분들에게는 저의 공연이 고국의 추억이며, 그리움이었던 거죠.”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살 무렵 서울로 왔단다. 함경도가 고향인 부모님이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것이었다. 서울에선 휘문중고를 다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세가 기울어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했다. 대학을 그만두는 바람에 배워야 한다며, 지금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그는 늘 학생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언젠가는, 때가 되면 무성영화 박물관을 만들어 전 세계의 무성영화를 수집, 보관, 상영하고 변사학교를 만들어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변사를 양성하고 싶습니다. 물론 무성영화 제작도 계속할 겁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돈의 시대에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16일 개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첫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는 근대 화단을 이끌었던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100주기를 맞아 마련한 전시다. 안중식을 비롯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화단을 이끌었던 근대 서화가들과 안중식 사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서예와 산수·인물·화조도에 두루 능했던 안중식은 1880~1890년대 중국과 일본에서 머무르다 190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에 함께 참여한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과 함께 국내 화단을 이끌면서 191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안중식의 화려한 청록산수화나 근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명절지도는 당시 젊은 서화가들에게 계승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악산과 경복궁을 묘사한 ‘백악춘효’, 전남 영광의 풍경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영광풍경’, 녹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무릉도원을 나타낸 ‘도원행주’ 등 안중식의 대표작과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그림, 글씨, 사진, 삽화 등 작품 100여건이 소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안중식의 걸작을 비롯해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의 소장품인 김옥균 친필 글씨도 공개된다. 전시는 오는 6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이어진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동학혁명 관광자원·첨단산단 날개 펴 ‘주식회사 정읍’ 키울 것”

    “동학혁명 관광자원·첨단산단 날개 펴 ‘주식회사 정읍’ 키울 것”

    내장산 경관·먹거리 등 고부가가치 상품화 문화재만 116건… 정읍 알리는 ‘방문의 해’ 동학혁명, 5·18과 연계해 ‘민주화 성지’로 ‘100년 먹거리’ R&D 특구로 경제 활성화 산업·농축산·관광 조화 서남권 거점 부흥 “27년 정치 경험으로 비즈니스 시장될 것”“희망이 넘치고 더불어 잘사는 정읍을 만들기 위해 ‘비즈니스 시장’이 되겠습니다.” 유진섭(52) 전북 정읍시장은 ‘주식회사 정읍’의 대표이사를 자임한다. 정읍시가 보유한 모든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상품화하여 침체의 늪에 빠진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의미다. “정읍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원팀(one team) 정신과 동료애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축구광인 그는 “시정도 운동경기처럼 민관이 한 팀이 되어 협업하고 자기 위치에서 책임을 다해야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며 줄탁동시(啄同時)의 자세를 주문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어미 닭과 함께 안팎에서 쪼아야 하듯 시와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상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위와 혜택을 누리는 시장이 아니라 희생과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시민들께 꼭 필요한 리더가 되겠습니다.” 시민생활 현장 곳곳을 누비며 낮은 자세로 민심을 경청하는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역사적 교훈을 새기며 공복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27년간 정치활동을 하며 쌓은 경험을 지역 발전을 위해 쏟아붓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목표를 세우면 흔들리지 않고 기어이 끝을 보는 굳센 의지와 추진력도 남다르다. 지역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여야를 넘나들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 시장의 열정적인 행보가 시민들의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다음은 유 시장과의 일문일답.-초선 단체장이다. 시장으로서 제시하는 정읍시의 중장기 비전은. “정읍은 현재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인구는 줄고 지역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1960년대 28만명이던 인구가 11만명 선으로 후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변화와 희망이 있는, 시민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고향을 만들 방침이다. 첨단산업과 전통, 농축산과 관광이 조화를 이루는 서남권 거점도시로 발전시키겠다.” -3선 시의원과 시 의장을 역임한 데 이어 정읍시의 수장이 됐다. 정치철학과 가치관은. “약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 빈부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 시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읍, 시기와 질투가 아닌 배려와 상생 그리고 풍요가 공존하는 정읍을 만들겠다.”-시장으로 취임한 지 9개월이 지났다. 실제 들여다본 정읍시의 위상과 발전 방안은. “사실 안타까운 점이 많다. 하지만 정읍은 발전 잠재력이 큰 지역이다. 동학농민혁명과 백제 가요 정읍사, 호남우도농악의 발원지이자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고장이다. 공식 지정된 유무형 문화재만 116건이고 자연경관도 빼어나다. 국책연구소와 연계·조성한 첨단산단은 전북연구개발특구로 지정돼 성장 동력도 탄탄하다. 문화자원의 고품질 콘텐츠화로 관광을 부흥시키고 기업유치와 구도심 활성화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 좋은 일자리를 창출해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짧은 재임 기간이지만 성과가 있다면. “전북도 대표 관광지 육성 평가 최우수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올해 국가예산도 5547억원 확보하고 국토부 주관 도시재생뉴딜사업에 3년 연속 선정돼 736억원을 지원받는다. 사계절 토털관광 기반을 구축했고 첨단과학산업 기반 구축과 연구 역량 강화 성과도 거두었다. 생활밀착형 시민공간 확충, 시내버스 요금 단일화, 저소득층 상하수도 요금 감면 등 소외계층 배려에도 노력했다.” -비즈니스 시장이 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배경과 계획은. “시민이 행복해질 수 있고 지역 발전에 필요하다면 어디든, 누구든 찾아가는 비즈니스 시장이 되겠다. 지역에 돈이 모이고 모인 돈이 건전하게 순환되도록 하겠다. 국가예산 확보를 위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출향 기업인들의 기업유치에도 체면을 따지지 않겠다.”-5개 분야 82개 공약사업을 확정했다. 내용과 실현 방안은. “공약사업은 민선 7기 정읍시가 나아갈 방향이자 시민들과 약속이다. 일자리·경제 분야 8건, 농축산 분야 11건, 문화·관광 21건, 도시·건설 21건 등이다. 공약사업 추진에 총 1조 1152억원이 투입된다. 74건은 임기 내 마무리할 계획이다. 재정이 열악해 국비 확보가 절실하다. 중앙부처와 정치권 어디든 찾아가 예산지원을 호소하겠다. 꼼꼼하게 추진상황을 점검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겠다.” -2019~2020년을 정읍 방문의 해로 정했다. 지역의 풍부한 역사, 문화, 자연자원을 활용한 관광산업 육성 방안은. “정읍 알리기에 주력하면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 확보와 질을 높이는 데 힘을 쏟겠다. 문화·역사 자원, 내장산과 구철초를 비롯한 수려한 자연경관, 100년이 넘는 전통시장, 다양한 먹거리를 엮어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겠다. 동학농민혁명, 백제가요 정읍사, 태산 선비문화 등 정읍만의 특색 있는 문화자원을 활용한 마케팅 노력도 강화한다. 도시재생 뉴딜사업도 시티투어와 연계시켜 추진한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황토현전승일인 5월 11일로 선정됐다.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위상 제고와 지역발전과 연계 방안은. “동학농민혁명 애국·애족 정신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겠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과 연계해 정읍을 세계적인 민주화 성지로 키우겠다. 동학농민혁명과 유적들을 역사관광자원으로 콘텐츠화하면 정읍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과 기록물의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한다.” -전북연구개발특구와 연계해 첨단과학산업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은. “연구개발특구는 정읍의 100년 먹거리를 책임질 곳간이다. 1단계 첨단과학산단이 모두 분양되면 2단계 사업을 추진하겠다. 이곳에 우량기업들이 둥지를 틀도록 하겠다. 연구소 기업 10개, 100대 선도기업 육성, 일자리 5000개 창출이 목표다.” -뿌리 산업인 농축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응방안은. “농업·농촌 살리기와 농업인 지원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공약사업인 농민수당은 전북도의 공익형 직불제와 연계해 추진하겠다. 축산은 분뇨 처리, 질병 예방, 악취 해결을 위해 에코축산 클러스터 사업단을 출범했다. 실효성 있는 해결방안을 찾겠다.” -원도심 활성화가 과제다. 도시재생사업 추진 방안은. “3년 연속 국토부 도시재생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총사업비 1222억원이 투입된다. LH전북본부와 추진하는 수성·연지동 일대 도시재생사업은 농산물 직거래 장터, 한우·다문화음식 마당, 청년 주거공간 확보 등이 포함된다. 도시재생사업이 인구 유출 등 어려움에 직면한 정읍을 단번에 개선시킬 수는 없으나 장기적인 자생 동력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먹거리도 유명한 고장이다. 대표 음식은. “한우 특유의 풍미가 가득한 단풍미인 한우, 갖가지 한약재를 달여 만든 쌍화차가 유명하다. 전설의 쌍화차 거리가 형성돼 있다. 태인의 떡갈비, 참게장 백반, 최근 이름값이 오른 볶음짬뽕이 인기다. 조선 3대 명주인 ‘죽력고’, 10대 수퍼 푸드인 귀리도 정읍의 대표 먹거리다.” -대학 신입생 축하금과 구직지원금 시책이 눈길을 끈다. “올해부터 고교 졸업생들에게 100만원씩 지급한다. 대학 생활 조기 정착과 사회 초년생의 생활 안정읍 돕기 위한 공약사업이다. 정읍에 주소를 둔 군복무 장병들에게는 상해 보험료도 지원한다.” 정읍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유진섭 시장은 ▲전남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열린우리당 정읍시 청년위원장▲정읍시의회 5~7대 의원▲정읍시의회 7대 후반기 의장▲민주당 전북도당 부대변인▲4050정책네트워크 지방자치 담당 부대표▲제19대 대통령선거 문재인 후보 국가정책자문단 중앙위원
  • 휴일 맞이 전통시장 나들이 어때요?

    휴일 맞이 전통시장 나들이 어때요?

    시장은 지역의 삶이 담긴 공간이다. 그 지역의 입맛을 담은 특산품과 먹거리에서부터 주민들의 소식과 정보, 희로애락이 모이는 곳인 까닭이다. 서울시내에도 곳곳에 세월과 이야기를 간직한 전통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편의성에 밀려 쇠락해왔지만 최근에는 과거의 향수를 추억하려는 중장년층과 숨은 ‘맛집’을 찾아 나서는 젊은층의 나들이 장소로 다시금 각광받기도 한다. 명절 연휴를 맞아 마치 여행을 떠나듯 도심 속 시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영등포구 대림중앙시장 지하철 7호선 대림역 12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대림중앙시장은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도 명성이 높다. 근처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림동 일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중국의 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대림역에서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한글보다 한자로 적힌 간판이 더 많을 정도다. 좌판에 펼쳐진 중국식 만두와 소시지, 연변 순대 등 이국적인 음식에 눈과 코를 빼앗기고 중국어로 흥정하는 소리를 듣다보면 마치 중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 영화 ‘범죄도시’의 배경이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함께 가면 좋아요 문래 창작촌 : 지하철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로 나와 걷다 보면 철재 기계나 부품들로 만들어진 독특한 조형물을 맞닥뜨리게 된다. 문래 창작촌은 200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로와 홍대 등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철공소가 밀집한 문래동으로 이주해 온 예술가들이 형성한 자생적 예술가 마을이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마다 낡은 철공소와 예술가들의 공방, 카페, 음식점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동작구 남성사계시장 지하철 4호선 총신대입구역 14번 출구 바로 앞에 자리잡은 남성시장은 아파트단지와도 인접해 평일에도 찾는 사람이 많은 활기찬 시장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테마로 시장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시장의 시작점인 봄 구역은 공산품을 주로 판매하고, 여름 구역은 과일, 채소, 정육 등 식료품을 파는 점포가 늘어서있다. 가을 구역은 아파트 단지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간편한 먹거리들이, 겨울 구역은 먹자골목이 각각 들어섰다. 이곳에는 팥앙금과 버터, 백설기로 만든 ‘앙버떡’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정애맛담’과 알록달록한 ‘사색 인절미’가 유명한 ‘몰랑이수’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탄 명물 떡집 두곳도 자리잡고 있다. △함께 가면 좋아요 국립서울현충원 :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이들이 안장된 국립묘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묘역도 자리하고 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수양벚꽃 때문에 꽃구경 명소로 유명하지만, 산책로가 잘 조성돼있어 겨울철에도 차분하게 거닐기 좋다.■서대문구 영천시장 영천시장은 안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냇가 위에 만들어진 곳이다. 옛부터 안산의 약수가 질병을 고치는 효험이 있다고 해 ‘신령한 물이 흐르는 샘’이라는 뜻으로 영천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과일부터 해산물까지 다양한 식자재를 판매할 뿐 아니라 문구점, 헌책방까지 한데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또 다양한 길거리 음식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영천시장 꽈배기’는 저렴한 가격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맛으로 SNS에서 입소문을 탄 명물이다. 수산시장에서나 볼 법한 신선한 킹크랩, 랍스타 등을 판매하는 이색 점포도 인기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함께 가면 좋아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독립 투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들었던 서대문형무소를 활용해 1998년 11월 역사교육의 장으로 개관했다. 3·1운동 직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돼 숨을 거둔 지하 옥사와 감시탑, 고문실, 역사전시관 등을 실감나게 재현해놨다.■은평구 연서시장 연서시장은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2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해 인근 주민과 함께 북한산을 오고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미로처럼 복잡한 시장 곳곳에는 생선이나 홍어회, 족발 등을 비롯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잔치국수, 김밥 등 다양한 먹거리가 즐비해있어 허기를 달래준다. 현미와 귀리를 각각 넣어 만든 현미가래떡과 귀리현미가래떡은 이곳의 명물이다. △함께 가면 좋아요 은평한옥마을 : 북한산 자락에 자리해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전통 한옥과 현대 주택의 장점을 혼합한 ‘퓨전 한옥’을 구경할 수 있다. 역사박물관, 문학관, 한옥 카페 등도 마련돼 있어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에도 적합하다.■성동구 금남시장 금남시장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금호동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온 시장이다. 금호동 일대가 재개발되는 와중에도 금남시장과 그 주변은 90년대의 풍경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는 지장수를 이용해 떡을 만드는 떡집 ‘백미당’이 유명하다. 지장수는 황토에 구덩이를 파서 물을 붓고 기다린 뒤 입자들이 가라앉으면 위에 뜬 물만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해독 작용이 좋다고 동의보감에 실려있다. 지하철 3호선 금호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함께 가면 좋아요 응봉산 : 서울에서 가장 먼저 개나리를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 해발 94m의 작은 바위산이지만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 일대의 한강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여 장관을 이룬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충주호 물길따라 요녀석들 내속 풀어주네

    충주호 물길따라 요녀석들 내속 풀어주네

    내륙에 자리한 충북은 민물고기 천국이다. 마치 바다를 곁하지 않은 서러움을 달래는 듯 아름다운 호수와 강이 안긴 선물이다. 쏘가리, 잉어, 붕어, 가물치, 동자개, 메기 등 20종에 가까운 민물고기가 서식한다. 땅덩어리(7407㎢)는 9개 도 가운데 가장 넓은 경북(1만 9033㎢)에 견줘 절반을 밑돌고 제주(1850㎢) 다음으로 작지만 민물고기 어획량(748t)은 16개 시·도 가운데 네 번째로 많다. 경기(1701t), 경남(1684t), 강원(1397t)이 1~3위를 달린다. 아무튼 충북엔 민물고기 요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충북의 물길 따라 맛 좋은 민물고기 요리를 즐기자. 푸근한 인심은 덤이다. ●굵게 썬 민물고기에 갖은 야채 섞은 비빔회 ‘청풍호’를 품은 제천시 청풍면은 물과 산으로 절경을 뽐낸다. 매력에 푹 빠져 청풍면 속으로 들어가면 새콤달콤한 민물고기 비빔회가 손님을 반긴다. 음식은 원조를 최고로 치는 법. 비빔회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알려졌다. 비빔회는 큰 대접에 굵게 썬 민물고기와 오이, 당근, 양배추, 미나리, 쑥갓, 깻잎, 풋고추, 초고추장 양념을 넣은 뒤 골고루 버무리면 완성된다. 간단해 보이지만 양념 비법을 갖춘다는 게 쉽지 않다. 고소한 맛을 원하면 콩가루를 뿌린다. 비빔회로 많이 먹는 민물고기는 송어다. 소나무 마디처럼 붉다고 해 송어(松魚)라고 부른다. 칼슘 함량이 높고 비타민 A와 B가 풍부해 단백질 공급원으로 그만이다. 제천에선 제1회 송어비빔회 축제가 지난달 10일 개막해 다음달 10일까지 열린다. 축제위원회 원승희 사무국장은 “초고추장 찍은 회를 상추에 싸서 먹는 게 복잡하다고 여긴 식당 주방장이 회와 야채, 초고추장을 함께 비벼 손님들에게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은 뒤 시작된 것”이라며 “축제 때 제천에 오면 2만원에 송어 한 마리를 비빔회로 맛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육쪽마늘로 비린맛 싹 잡은 쏘가리매운탕 갖가지 야채와 함께 끓이는 민물고기 매운탕은 추위를 녹이는 겨울철 최고 별미다. 충북에서 가장 북쪽인 단양군에선 쏘가리매운탕이 유명하다. 하천과 여울, 담수 지역이 골고루 발달해 쏘가리 서식지가 많아서다. 전혀 비리지 않다. 지역 특산품인 육쪽마늘을 다져 넣은 매운탕 양념이 비린 맛을 완벽하게 잡는다. 1급수 남한강에서 잡은 어른 팔뚝만한 쏘가리와 명품 마늘로 버무린 양념의 조화는 단양 여행을 즐겁게 만든다. 쏘가리는 씹는 맛에 회로 먹어도 훌륭하다. 살이 돼지고기처럼 맛있다는 뜻의 ‘수돈(水豚)’, ‘맛잉어’로 불릴 정도다. 그냥 먹어도 맛난 쏘가리에 양념까지 더해졌으니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단양의 쏘가리 사랑은 뜨겁다. 군은 2012년 쏘가리를 군어(郡魚)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민물 어류를 상징 물고기로 삼은 곳은 처음이다. 국내 최대 민물고기 전시관인 ‘단양 다누리아쿠아리움’ 앞에 가면 대형 쏘가리 조형물이 입을 떡 벌리고 있다.●양념 밴 시래기에 붕어살 한 점 얹으면 천국 중부권 최대 낚시터로 알려진 진천 초평저수지 쪽엔 붕어마을이 있다. 현재 11개 붕어찜 식당이 영업 중이다. 주민들은 2009년 11월 제1회 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붕어마을 주차광장에서 초평붕어마을 붕어찜 축제를 펼친다. 시래기, 버섯, 깻잎, 쑥갓, 수제비와 함께 갖은 양념을 넣어 매콤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칼집을 낸 커다란 참붕어와 양념을 얹어 30분쯤 끓인다. 부드럽고 쫀득쫀득한 육질이 양념의 매운맛을 적당히 녹여 준다. 양념이 고르게 밴 시래기와 붕어살을 함께 먹으면 더욱 좋다. 가시 때문에 먹기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등쪽에서 갈비뼈를 따라 배 쪽으로 살을 발라 먹으면 가시를 빼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 황근자 마을 번영회장은 “식당에 오면 먹는 방법을 자세히 귀띔해 가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붕어찜 맛을 즐기는 데 이어 마을 인근에 생긴 둘레길과 전망대를 보려는 타 지역 사람들로 북적거린다”고 자랑했다. 붕어엔 불포화지방, 비타민, 단백질이 풍부해 성인병과 피부미용에 좋다. ‘본초강목’에는 “생선이라면 모두 화(火)에 속하지만 붕어는 토(土)에 속해 비위를 고르게 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한다”고 적혀 있다.●푹 곤 육수에 국수 술술 풀면 해장엔 그만 생선국수는 민물고기를 찜통에 넣고 4~5시간 끓여 만든 육수에 국수와 양념고추장을 풀어 만든다. 파, 애호박, 깻잎, 미나리, 풋고추도 들어간다. 면 요리를 좋아한다면 강추다. 충북에선 금강과 보청천이 흐르는 옥천군이 유명하다. 주민들이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해 먹은 뒤 남은 국물에 면을 넣어 끓인 게 생선국수로 발전했다. 군은 최근 청산면 일대에 생선국수 거리를 만들었다. 식당 8곳이 모였다. 한 그릇에 6000원 정도이지만 가성비 최고다. 생선을 뼈째 푹 우려낸 국물이어서 단백질, 칼슘, 지방, 비타민이 풍부해 모두에게 좋다. 애주가에겐 해장국으로 딱이다. 그릇째 들고 얼큰한 육수를 들이켜면 쓰린 속이 편안해진다. 생선국수로 양이 차지 않으면 밥을 말아 먹는다. 옥천 생선국수 원조는 청산면 지전리에 있는 ‘선광집’이다. 서금화(92) 할머니가 1958년 시작했다. 지금도 아들, 딸과 함께 장사를 한다. 할머니는 “육수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 정성을 버무린 음식이다. 보양식으로 권장한다”며 활짝 웃었다.●재미난 이름에 맛도 일품 도리뱅뱅이 맛 좋고 이름까지 재미난 민물고기 요리도 있다. 도리뱅뱅이다. 피라미나 빙어 같은 작은 민물고기를 손질한 후 번철에 동그랗게 돌려 담아 살짝 익힌 다음 식용유를 넣어 노릇노릇하게 튀긴다. 그 다음엔 식용유를 따라내고 번철 위에 올려놓은 채 양념을 바른 후 당근, 대파, 고추 등을 고명으로 돌려 담고 살짝 익힌다. 식당들은 도리뱅뱅이를 다른 접시에 담지 않고 번철 그대로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기름에 튀겨 양념을 바르는 게 양념통닭과 비슷하다. 고소하고 바삭하다. 아이들에게도 인기다. 단백질과 칼슘 등이 풍부해 영양 보충에 좋다. 도리뱅뱅이를 즐겨 먹는 옥천지역 사람들에 따르면 음식점을 하는 이북에서 온 어느 할아버지가 생선조림이라는 이름으로 이 음식을 시작했다. 그 후 생선튀김 등으로 불리다가 어느 날 찾아온 손님이 “동글동글 돌려 놓은 도리뱅뱅이 주시오”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도리뱅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삶은 시래기에 졸이면서 먹는 참매자조림 ‘내륙의 바다’로 일컬어지는 거대한 충주호(67.5㎢)와 남한강을 품은 충주엔 참매자조림이 유명하다. 여섯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먼저 냄비에 육수를 붓고 무와 감자를 넣는다. 손질한 참매자를 가지런히 올린다. 양념장을 넣는다. 삶은 시래기를 넣는다. 쪽파를 넣고 조린다. 끓이면서 먹는다. 충주에선 엄정면 새동네길에 위치한 실비집이 유명하다. 충북도 대물림전통음식계승업소로 지정된 곳이다. 가격은 1인분 1만 5000원. 오금석 사장은 “생선을 구수한 시래기에 싸 먹으면 담백하다”며 “잉어과에 속하는 참매자는 참마자, 마지, 마디로도 불린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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