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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통일운동 할일 다했다”전태일 연구소장 자살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에 30여년간 헌신해온 전태일사상연구소 오경환 소장(65)이 최근 “이 세상에서 할일은 모두다했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17일 뒤늦게 밝혀졌다. 오 소장은 지난 15일 저녁 10시쯤 지병으로 요양차 혼자머물던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리 거처에서 “쓰고 싶은 책도 다 썼고 민주화도 이뤄졌다”는 요지의 ‘유서’를남기고 목을 맸다.고인의 시신은 아들 한빛씨(35·넝쿨 기획실장·경북 구미)에 의해 발견돼 원주 세브란스병원으로옮겨졌다가,이날 고인의 뜻에 따라 원주 상지대 한의예과에 연구용으로 기증됐다. 한빛씨는 “지난 화요일(12일) 토요일에 들르라는 전화를주셔서 토요일 아침에 도착해 보니 이미 작고하신 상태였다”면서 “유서 등에 사망시간,원인,시신기증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오 소장은 농촌운동을 하다가 지난 86년 전태일사상연구소를 설립한 뒤,‘전태일사상’ ‘100인의 민족사상’ 등의저서를 남겼으며 몇년 전부터 직장암에도 불구하고,기독교불교 천주교 등 종교의 문제점을다룬 ‘진실 Ⅰ·Ⅱ’를집필,지난해 8월 책을 내고는 “내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주변에 말해왔다는 것이다.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장기표 신문명연구소장은 “얼마전 편지를 받고 걱정이 돼 지난 14일 횡성을 다녀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다”면서 “평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을 더러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황망히 떠날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유족으로는 한빛씨 등 1남1녀가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오늘의 눈] 그들만의 파업

    ‘장군 한명의 승리는 병졸 만명의 희생을 딛고 쟁취된다. ’ 중국의 대표적 고전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있는 말이다.화려한 영광 이면에 있는 숱한 고난을 잊지 말라는 경구다. 한강의 기적이란 찬사를 받으며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 경제 역시 수많은 근로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졌다.누가뭐래도 한국 경제의 주역은 화려한 성장의 열매를 따먹은 재벌,사용자가 아니라 근로 대중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 근로자의 진정한 대표를 자임하는 민주노총의연대파업을 지켜보면 착잡한 마음이 앞선다. 항공기 결항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시민과 비즈니즈맨들,병원 파업에 애를 태우는 환자와 가족들,꽉 막힌 도로에서 분을 삭히는 시민들….시민들의 눈초리는 파업의 강도만큼이나 차갑게 냉각되고 있다.왜 이렇게 됐을까. 70년대 가혹한 근로조건에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생존권 보장을 외치며 전개된 노동운동은 적지 않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일정한 역사적 당위성 속에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때 비로소 임금·복지 개선과 사회적 영향력확대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다른 것 같다.21세기를 맞아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경제 패러다임 속에서 각국의 노동운동도 변화가 일고 있다.한때 강성 노조를 대표했던 영국과프랑스 노조들의 유연한 변화가 이를 입증한다.프랑스 제2노조(CFDT)를 이끌던 여성 지도자 니콜노타는 “지금은 전투적 행동보다 협상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노동운동이 군사독재시대에나 적합한투쟁방식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감스러운 생각이든다. 더구나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노조의 정치 세력화는 물론 언론개혁법,모성보호법 등 사회개혁의 관철은 국민들의 지지를 떠나서는 이뤄질 수 없는 사안들이다.강경 투쟁만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는 노동계의 판단은 참으로 근시안적시각이다. 노동계도,노동운동도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심심찮게 집단이기주의를 표출하는 정치권은 ‘그들만의 국회’로 지탄받는다.국민을 볼모로 하는 ‘그들만의 파업’은결국 어렵사리 전진한 우리의 노동운동을 후퇴시킨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오일만 행정뉴스팀기자 oilman@
  • ‘통일음악회’ 통일운동과 대중음악의 만남

    9일 오후 7시30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통일운동과 대중음악의 주체들이 만나는 이색 음악회가 열린다. ‘노나메기를 위한 통일그날 음악회’.가수 전인권과 김정환 시인이 주축이 돼 통일문제연구소(소장 백기완)가 발행하는 계간지 ‘노나메기’에 대한 자금 지원을 위해 마련한 후원 콘서트다. ‘노나메기’란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그러나 바르게잘 살자는 뜻.콘서트는 계간지 ‘노나메기’의 함의대로 다양한 대중가수들이 출연료 없이 무대에 선다. 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 들국화,노래로 펼친 민주화운동의첨병 정태춘,토속적인 노래의 늦깎이 장사익,재즈와 록을 넘나드는 가창력의 가수 이은미,록의 선구 그룹 사랑과평화가주역이다.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과 영화배우 장미희도 게스트로 초청된다. 프롤로그는 지난 80∼90년대 노동현장을 누볐던 춤패 불림의 팡파르 춤.두명의 춤꾼이 무대에 올라 무소르그스키의 ‘키에프의 문’에 맞춰 한 시대의 마감을 알리고 통일로 간다는 의미를 담은 ‘문’을 연출한다.가수들이 혼자,혹은 관객들과 함께 80∼90년대 대학가와 노동계에서 애창된 노래들을부르며,‘운동권 가수’로 통하는 윤선애의 선창으로 가수와 관객들이 분신열사 전태일 추모곡 ‘그날이 오면’을 합창하면서 막이 내려진다. 김성호기자
  • [편집자문위원 칼럼] ‘채찍’ 겸허히 수용하는 신문

    편집자문위원단이 출범한 지 어느새 3개월이 지나 4개월 째로 접어들고 있다.짧은 기간이지만 그 동안 대한매일은 상당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솔직히 말해 당초 대한매일 편집자문위원단에 합류할 때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정부기관이나 여타 기구들의 자문위원회가 형식적 자문기구에 그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던 경험 때문이다.물론 외부 자문위원들이 내부 속사정에 어둡고 금방 실천하기 어려운 제안을하는 경향이 있지만,나름대로 내부에서 진지하게 받아 실행에 옮기려는 노력이 별반 보이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대한매일은 이러한 나의 예상을 뒤엎고 참여에의 뿌듯함을 준다.편집자문위원들의 간담회 그리고 각 위원들의칼럼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와 편집 방향이 반향없는 외침으로 가라앉지 않고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매주 목요일 자신문에 새로운 지면으로 자리잡은 비정부기구(NGO)란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대한매일의 강점이자 단점으로 지적되어온 행정뉴스지로서의 칼러와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변화시키고 타 신문사와의차별성을 갖출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NGO를 하나의 새로운 주 독자층으로 설정할 것을 4월 칼럼에서 제안했는데 5월 10일부터 NGO 지면이 신설되는 신속함에경탄과 찬사를 보내면서 대한매일의 변화에의 진지함과 의지를 읽게 된다. 또한 NGO 지면에서 일본 교과서 문제,새만금 문제등 현재우리사회 사회적 핫 이슈가 되고 있는 현안과 맞닿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환경운동을 하는 갯벌 지킴이들을 먼저다룬 안목도 돋보인다.또한 대한매일이 성공회대학교와 공동 주최로 과거 청산문제를 다룬 것도 그렇다.관계자들과 시민단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토론회를 연 것은 획기적 기획이자 뛰어난 순발력으로 보인다. 대한매일의 달라진 모습은 NGO면 신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 하다.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으로 가난한 여성 노동자에서 영국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로 변신한 전순옥씨를 여타 신문과는 달리 전면 인터뷰기사로 다루었고 장애인이나 일반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기사도 많아졌다.여성,장애인 등 소외 된 이들에 대한 기사를 보다 많이 실어야 한다는 편집자문위원회의 제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성문제 관련 사설에서 보여주는 대한매일 논설위원들의진보성과 합리성 또한 고무적이다.“가족관련법 손질할 때”(5월 25일)사설에서 호주제 폐지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합리적 관점에서 전개해주었다.또한 씨줄날줄 칼럼(6월 2일)에서 이경형 수석 논설위원은 자칫 선정적으로 다루어 질 수 있는 모 대학 교양과목에서의 성 계획서 리포트 제출 문제를진지하게 접근하여 성 담론의 활성화의 필요성을 차분하게제기하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이 진정한 변화,개혁으로 거듭나려면 이제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싶다.소유구조 개편작업을 앞두고 대한매일의 철학,방향성 설정에 만반의 준비를 철저히 해 주었으면 한다.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너무 앞서나가는 발언인지는 몰라도 예컨데 정부로부터의 독립구조 이후의 대한매일의 방향성에 대한 폭넓은 의견수렴을 위한 기획 특집을 시리즈로 엮어보거나 일반 시민,공무원,정부 관련자 등 기존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같은 것도 필요할 것같다. 최영애 한국성폭력상담소장
  • [이사람] 英초빙교수된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박사

    암울한 고통의 세월을 견뎌내고 노동학 박사가 되어 돌아온 전순옥씨(47).억압받던 가난한 여성 노동자가 영국에서11년간 공부하여 박사가 됐다.그의 인간승리는 오빠 전태일열사가 31년전 밝힌 희망의 횃불을 찬란하게 빛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시대적 모순 속에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열어주려는 희망의 횃불이었다.그러나 그 횃불은 구조적 억압과 사회의 불합리한현실 속에 가물거렸다.전순옥씨와 어머니 등 가족은 전태일열사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가물거리는 횃불에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전순옥씨는 밖으로도 눈을 돌려 89년 11월 35세라는 늦은 나이로 유학을 떠났다.노동운동 등을 공부하고 지난 3월 영국 중부지방에 있는 워릭대학에서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다.노동현장의 밑바닥 인생과 학문의 길을 모두 경험하며 굴곡의 모진 세월을 살아온 그의 얼굴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배어있다.그러나 그의 눈빛은 맑고 찬란했다.그 눈빛 속에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오빠의 마지막절규가 살아 있는 듯했다. ■ 전태일 열사는 전 박사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오빠는 저의 가족 마음 속에 늘 살아 있습니다. 저희들의버팀목이죠.힘들고 고달플 때는 늘 오빠를 생각했어요.오빠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67년 2월에는 150원을 주고 ‘연합 중고등 통신 강의록 중학1’ 과정을 샀어요.입고 있던 바지와 사용하던 곤로를 380원에 판 돈으로 샀다고 해요.오빠에 비하면 저는 선택받았죠. 오빠를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했어요.그것도 오빠의 유업을 계승하는 길이라 생각했죠.‘전태일 평전’등 오빠에 관한 책 등을 영어로 번역하여 널리 알리는 작업도 할 예정입니다. ■유학의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다국적기업들이 싼 임금을 찾아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며 실업자가 발생하는 현실을 보고 세계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됐어요.우리도 누군가 외국으로 나가 밖의 세상과 세계의 노동운동을 봐야한다고 생각했죠.처음엔 제가 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왜 영국으로 갔습니까. 영국은 산업이 발달하고 노조활동이 활발한 나라로 알고있었습니다.노동당도 있고요.그래서 영국을 택했죠. ■영국생활은 어떠했습니까. 기숙사에 머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평일엔 학교에 가고일요일엔 교회에 가고….보통의 유학생들과 비슷한 생활이었죠.한국노동운동에 대한 강연회를 다닌 것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등록금과 생활비는 독일의 미재리오 재단,한국의 두레장학재단,영국 외무부,워릭대학 등으로부터받은 장학금으로 주로 충당했습니다.그밖에 여러사람들의도움도 있었어요.저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의 공부를 했습니까. 처음 6개월간은 영어 공부에 전념했습니다.그 이후는 노동운동,경영,노사관계 등을 공부했죠.처음에는 언어(영어)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어요.1년6개월쯤 지나니까 언어 문제가어느정도 해결됐습니다.그러나 워릭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민에 빠졌어요.노동현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박사과정을 공부할 것인가….학자가 되려고 영국에 온것도 아닌데 계속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그러나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교수 등 주위의 권유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지요. ■학위 논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한국경제성장의 값은 누가 치루었나’이고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70년대 한국여성노동자와그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위한 투쟁’입니다. 박사논문에는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부제를 달았죠.오빠가 죽으며 절규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했습니다.논문에 오빠의 열정과 혼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논문준비를 위해 7개월간 한국에 머물며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하던 많은 노조지도자들,일반 노동자들,기업주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죠.김영삼 전대통령도 만났어요.박사논문은 기업주의 착취와 구조적 억압의 틀에 갇혀 있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정을 담고 있습니다.70년대 초한국 노조운동은 여성 중심이었어요. 섬유·의류·신발·가발 공장등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민주노조운동한가운데 있었습니다.그들의 투쟁은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박사논문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박사논문은 통상적인 형식의 틀을 깼어요.많은 노동자들과의 집중적인 면접을 통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했습니다.노동자들의 현실과 통계가 많이 달라 기존의 통계를 사용할 수 없었죠.노동시간의 예를 들면 공식통계에는 한국 노동자의 70년도 근로시간이 1주일에 56.4시간으로 돼 있지만1주일에 90시간 이상씩 일하는 영세업체 노동자들도 많았어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석하는데도 기존의 이론으로는한계가 있음을 알았어요.어떤 이론도 적용할 수 없었죠. 그래서 탈이론적인 방법론으로 접근했습니다.그러한 방법론과공식통계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한 분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창조적인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았죠.박사논문은 수정없이 통과되어 워릭대학의 이번 학기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됐습니다. 심사위원들로부터 꽃다발까지 받았어요.논문은 영국·호주·미국 등 영어권과 한국·일본 등 아시아에서도 출판될 예정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대사관의 끊임없는 감시였어요.요주의 인물이 되어 늘 감시를 받았습니다.감시를 받게된 결정적인 일은 90년 7월에있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남아일랜드 노총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게됐는데 그 때 당시 강영훈 총리가 남아일랜드 새한비디오 공장을 방문했어요.그런데 남아일랜드의 대표적신문인 ‘아일리시 타임즈’가 저의 강연내용은 대문짝만하게 싣고 강영훈 총리의 방문은 그 기사 한구석에 조그맣게보도했어요.한국대사관이 발칵 뒤집혔죠.그 보도이후 제가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대사관 직원이 미행했어요.대사관의끈질긴 감시는 96년까지 계속됐죠. ■한국 노동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몰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그러나 원론적으로 말하면 노사가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공존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사측은솔직하고 투명하게 실상을 공개하고 노조도 포용력 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동자였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노동관에 어떤 변화가있습니까. 노동자 시절에는 노사분쟁이 있을 때 기업가가 노동자들의요구를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노동조건이 열악했었죠.지금은 열악한 작업환경의 영세 기업주들에게도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들의 문제를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그러나 약한 위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주는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5년간의 프로젝트로 영세사업체의 노동조건을 연구할 예정입니다.30년전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교하여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분석하려 합니다.아직도 많은 영세업체들의 노동조건이 열악한 것 같아요.왜 그들의 노동여건이 여전히 나쁜지를 추적하고 개선 방안을 찾고 싶습니다. 그런 연구를 통해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지금까지 국가의 공식통계에서 소외된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에 관한 다양한 통계자료를 만들어그들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싶습니다.영국 학자들과 함께 한국·중국·영국 등 7개국의 노동현장을 비교하는 프로젝트에도 참여 할 예정입니다.영국의 카디프 대학 사회과학부 초빙 교수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생각입니다. ◆ 전순옥 박사의 삶. ■1954년 부산 출생■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오빠 분신후 가족들 노동운동 참여.전씨는 당시 야간중학생인 여공이었다. ■1973년 양복제조업체 동광산업 입사■1974년 가죽제품업체 남양물산 입사■1977년 어머니(이소선 여사) 구속후 노조에 전력투구■1982년 한국성서신학대학 입학■1983년 장로회신학교 입학■1985년 비영리 탁아소 설립■1986년 10대 여성노동자를 위한 공동체 구성■1988년 미혼모를 위한 사람사는 정을 심는 모임 만듦■1989년 영국 유학■1990년 6개월간 영어 연수후 사우스 뱅크 대학 2년코스야간과정 입학■1993년 옥스포드 라스킨 대학 입학■1995년 워릭대학 석사 과정■1997년 워릭대학 박사과정■2001년 박사학위 받음. 4월24일 귀국.1954년 부산 출생■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오빠 분신후 가족들 노동운동 참여.전씨는 당시 야간중학생인 여공이었다. ■1973년 양복제조업체 동광산업 입사■1974년 가죽제품업체 남양물산 입사■1977년 어머니(이소선 여사) 구속후 노조에 전력투구■1982년 한국성서신학대학 입학■1983년 장로회신학교 입학■1985년 비영리 탁아소 설립■1986년 10대 여성노동자를 위한 공동체 구성■1988년 미혼모를 위한 사람사는 정을 심는 모임 만듦■1989년 영국 유학■1990년 6개월간 영어 연수후 사우스 뱅크 대학 2년코스야간과정 입학■1993년 옥스포드 라스킨 대학 입학■1995년 워릭대학 석사 과정■1997년 워릭대학 박사과정■2001년 박사학위 받음. 4월24일 귀국. 이창순편집위원 cslee@
  • “영세근로자 삶 추적 오빠 뜻 이을것”

    “가족의 입장에서 연극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느껴집니다.”지난 12일 극단 한강이 동숭홀 무대에 올린 연극 ‘전태일’ 공연이 끝난뒤 분장실에서 만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순옥씨(47)의 표정은 상기돼있었다. 영국 유학을 마친 뒤 지난달말 귀국한 순옥씨는 오빠의 일생을 다룬 연극이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에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자칫 오빠의 분신과정이 지나치게미화돼 본질을 흐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빠가 분신할 때 저 역시 평화시장 근처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만큼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연극은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와 노동자들의 고뇌를 잘 표현한 것 같아 반갑습니다.”순옥씨가 이 연극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빠의 희생을 다룬점 말고도 자신의 삶이 오빠의 죽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89년 11월 친구들과 주변의 뜻있는 이들의 도움아래 영국으로 건너가 노동관계 공부를 계속했고 마침내 워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논문의 제목은 ‘한국 여성노동자와 민주노동조합 운동론­그리고 1970년대’. “오빠의 죽음은 제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노동,특히 여성노동은 지난 7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역사에서 빠져있습니다.이 부분을 제대로 챙겨 자리매김할 것입니다.”순옥씨의 논문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영국의 컨티니엄 출판사가 그의 논문을 영국·미국·호주에서 번역 출판할예정인 데 이어 아시아권에서도 출판계약이 쇄도한다. 귀국할 때 영국 워릭대로부터 간단치 않은 2년짜리 프로젝트를 맡아왔다.한국 중국 영국 호주 브라질 터키 남아공화국등 7개국의 다국적 기업 작업장의 고용관계와 생산구조를 비교해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이것 말고도 개인적으로 한국의영세 사업장을 집중조사해 30년전과 지금의 노동자 생활실태를 비교해 정책입안자들이 노동정책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자료를 구축해낼 것이라고 한다. “오빠는 당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인간이하의’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자기 한 몸 바쳐 풀려고 했습니다.여전히 관심 밖에 있는 영세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 오빠의 뜻을 잇는 길일 것입니다.”김성호기자 kimus@
  • ‘전태일’ 통해본 비정규직 노동자 애환

    극단 한강이 12일부터 동숭홀에서 공연하는 ‘전태일’(김해자 박수정 작,장소익 연출)은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노동자 전태일을 소재로 한 작품. 지난 7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 열악한환경에서 일했던 재단사 미싱사들의 삶을 통해 요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실적인 소품과 음악을 택해 전태일의 삶을 솔직하게 그린 게 이번 무대의 특징.전태일이 죽은뒤 평화시장에 희망의 물결이 일어남을 코러스로 처리해 그의 죽음이 헛되지않았음을 강조한다.23일까지 월∼금 오후8시 토·일 오후4시·8시,(02)762-6036. 김성호기자 kimus@
  • 전태일 여동생 ‘노동 박사’ 됐다

    한국 노동운동의 여명을 열었던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영국유학 11년만에 노동문제 박사가 되어 최근 돌아왔다. 지난 3월 영국 워릭(Warwick)대에서 노사관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순옥씨(47)의 학위논문 제목은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 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와 민주노조 운동을 위한 그들의 투쟁’.70년대 확대된 여성 민주노조운동이 박정희 정권의 종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이다. 기존 자료를 의존하지 않고 청계피복노조 등 당시의 여성노동자 등 106명을 직접 만나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담았다.이런 노력 끝에 완성된 논문은 이례적으로 무수정 통과됐고 심사위원들의 추천으로 현재 영국과 미국,오스트레일리아 3개국 동시 출간이 진행되고 있다. 영국 카디프대학의 전임교수직 제의를 마다한 순옥씨는 8일 “단순한 유명 연구자,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며‘밑에서부터 일하는 것’을 통해 주위의 도움에 보답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류길상기자 ukelvin@
  • 베를린, JSA에 플래시 세례

    “판문점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남북한 병사가 대치하는곳입니다.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에는 긴장이 흐르죠.안과 겉에 모순이 있는,그 자체만으로도 무대장치같은 극적인 공간입니다.”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박찬욱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제작 명필름)가 지난 12일 오후9시(현지시각 12일 오후1시) 포츠담광장 내 복합영화상영관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첫 기자시사회를 가졌다.시사가 끝난 직후 200여명의 취재진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넘게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박감독은 판문점을 휴먼드라마의 소재로 잡은 배경을 “판문점이 가진 이중성에 주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기자회견에는 박감독을 비롯해 송강호 이영애 신하균 김태우 등 출연진과 이은 명필름 제작이사가 함께했다.남한 병사 이수혁 역을 맡은 이병헌은 TV드라마 촬영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지구촌 마지막 분단국가의 분단영화인 점을 주목한 질문이 주류를 이뤘다.그 중에는 “이런 영화가 제작될만큼 한국의 관객 분위기가 성숙해 있느냐”는 등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질문도 눈에 띄었다.“영화를 처음 만들무렵에는 제대로 완성해서 개봉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많았다”는 박감독은 “그러나 남북 정상이 만나는 등 해빙무드를 타면서 분단영화를 바라보는 한국내 분위기가 급속히성숙해졌다”고 답했다. 한 외신기자가 “남북 병사들의 우정이란 주제를,유머가 곁들여진 덕분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같다”고 하자 박감독은 준비하고 있었던 듯 자세히 답하기도 했다.“어떡하면외국인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네 병사들의 우정을 통해 남북이 얼마나 다르고 또 같은지를 말하고싶었고,그것을 극의 긴장요소로 연결하자고 결론지었다.남한의 인기 여배우와 가수를 북한 병사가 몰라보는 설정 등이그렇다.그리고 외국인들을 극에 몰입시키는 데는 유머만큼좋은 장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북한 병사 오경필 역의 송강호에게도 관심이 집중됐다.한 아시아영화 전문기자가 “영화제에 두 편의 영화를 내놓은 주인공인데,소감이 어떻냐”고 묻자 그는 “무척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답했다.그가 주연한 ‘반칙왕’도 포럼부문에 출품됐다. 베를린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우리 영화가 진출하기는 이번으로 8번째.지난 96년 박광수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후로는 5년만이다.‘JSA’는 영화제 기간에 일반관객과 마켓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모두 6차례 상영될 예정이다. ◆한국 영화사상 최다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JSA’는 영화제에서도 꾸준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베를리날레 팔라스트’2층에 마련된 첫 기자시사회장에 참석한 관계자는줄잡아 2,000여명.영화가 끝날 때까지 차분히 자리를 지킨이들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11년째.‘JSA’는 베를린이 가진‘공간적 상징성’덕을 한몫 단단히 챙기는 분위기.행사기간에 영화제측이 날마다 발행하는 소식지 ‘무빙 픽처스 데일리’는 지난 12일자에서 박찬욱감독 인터뷰에 한면을 할애했다.“한국영화사상 최대 규모의 세트를 짓는데 80만달러를들인 영화”“최근까지 (한국에서)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흥행작”등등 상세한 내용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제작사인 명필름이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속앓이한 문제가 자막처리.“우리 정서를 다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영어표현을 고르느라 신경썼다”는 심재명대표는 시사가 끝난 후 “(외국인들이)웃을 때 웃어줘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가수 김광석은 ‘singer 김광석’으로,북한 병사 오경필이 즐겨 먹던 초코파이는 ‘moon pie’로 표현하는 등 제작사측의 고심 흔적이 곳곳에서 역력. 베를린 황수정기자 sjh@
  • [씨줄날줄] 민주인사 전태일

    1970년 11월12일 아침,전태일(全泰壹)열사는 이미 분신(焚身)을 결심하고 있었다.밥상이 들어왔다.라면이었다.만일 어머니와 여동생이그 아침이 최후의 조찬인 것을 알았더라면 아마 라면은 아니었을 것이다.가슴이 북받쳐 잘 넘어가지 않는 라면 가닥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그에게 여동생 순옥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오빠,… 15일까지 돈 좀 안돨까?”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눈물을 감추느라 고개를들 수 없었다.젓가락을 놓았다.“순옥아,… 미안하구나.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돈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조르지 마라.” 그는 이 말한마디를 남기고 일어섰다.그렇게 집을 떠난 아들을 어머니 이소선(李小仙)여사가 다시 만난 것은 다음날 오후 3시경,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형상이었다.“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중환자실을 찾아온 어머니에게 그가 당부한 말은 이것이었다.그는 세번씩이나 어머니의 다짐을 받았다.친구들에게도 같은 다짐을 몇번씩 받았다.전태일은 그날밤 10시가 조금 지나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12일 아침 라면 몇가닥 입에 넣은 후 빈속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로부터 30여년,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생존권 차원을 넘는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했다.이제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이번 결정은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시에서 난색을 표명해왔던 추모 표석 설치,전태일거리 지정 등 역사적 재평가작업에 새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위원회측은 보상금 액수와 관련,민주화보상법에 따라 사망 당시 평균임금에 취업 가능기간을 곱해 산정한 호프만식 계산법을 적용하면 보상금이 너무 적다는 지적에 따라 보상금액은 추후 결정하고 구체적 명예회복 조치는 계속 논의키로 했다. 그의 부활은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그와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불순세력’으로 매도하던 사람들만이 아니다.그의 눈부신 부활 앞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우리 모두 부끄러울 뿐이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전태일 열사의 부활이 이 진리를 다시한번 확인해 준다.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전태일 민주화운동 공식 인정

    지난 70년 근로기준법 개선을 외치며 분신 자살한 전태일(全泰壹)씨가 30여년 만에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인사로 공식 인정됐다. 21일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열린 제10차 본위원회 심의결과 전씨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및 보상금 지급결정을 내렸다. 위원회 관계자는 “전씨는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넘어 권위주의적통치에 항거하며 노동운동에 기여한 점이 명백한 만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됐다”면서 “보상 금액은 사망 당시 재단사 평균 임금을 기준한 호프만식 계산법을 적용할 경우 800여만원에 불과해 너무 적다는 지적에 따라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에 따라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울시에서 난색을 표명해 왔던 전씨 추모 표석 설치,전태일거리 지정 등 역사적 재평가 작업에 새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발족한 위원회는 지금까지 모두 8,440건의 보상금 및 명예회복 신청을 접수해 현재 137건(107건 인정,30건 기각)을 처리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YS 한국 최고의 ‘꼴통株’

    한국의 최고 ‘꼴통’은 누구일까.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분야별 최고의 꼴통을 가리는 인터넷 사이트 꼴통스탁(www.goltongstock.com)이 네티즌들의 인기를한몸에 받고 있다. 전태일씨 30주기 기념일인 지난해 11월13일 오픈된 이 사이트에서는 사회에서 퇴출시켜야 할 정치인과 사회,경제단체,법률 및 제도 등이 실제 주식처럼 거래되고 있다. 8일 현재 황제주는 최근 급등세가 이어지고 있는 김영삼주로 20만2,310원이다.김종필주(8만5,800원),전두환주(7만2,600원),김현철주(7만45원)가 2∼4위에 올랐다.SOFA가 법률·제도 중에서 유일하게 5위를차지했다. 이곳에 상장된 주식들은 해당 정치인이나 단체의 ‘비상식적’ 행동에 즉각 반응한다.고려대 강의사태를 전후해 YS의 주가가 급등했으며 ‘민주당은 조선노동당 2중대’ 발언을 했던 김용갑주는 ‘주가 상위베스트 5’에 오르기도 했다. 이 사이트에 주식을 상장하려면 네티즌의 추천을 받아 100명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한다. 회사측은 최근 김대중주와 이회창주에 대한 긴급 공모를 실시할 계획이며 공모가는 7,000원으로 결정됐다고 밝혔다.박맑음 대표는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잘못된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안을 모색할 수있는 인터넷 놀이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균미기자 kmkim@
  • 印尼版 ‘여성 전태일’ 살해범 濠서 DNA검사로 규명시도

    수하르토 철권통치 시절 근로자들의 노예같은 삶을 개선하기 위해노동운동을 주도하다가 처참하게 숨진 여성 노동운동가 마르시나의사인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위한 유전자(DNA) 검사가 호주에서 실시된다.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 집권 후 마르시나 사망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한 합동조사팀은 최근 고인의 혈흔을 채취,범인 색출을 위해조만간 호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DNA분석을 의뢰키로 했다.마르시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그는 25살이던 지난 93년 4월 자카르타시 포롱 소재 시계제조업체카투르 푸트라 수르야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파업을 주도하다가실종됐다.마르시나는 그로부터 수주 후인 5월 8일 공장에서 200㎞ 떨어진 동부 자바 응안죽 부근의 오두막에서 온 몸이 토막난 주검으로발견됐으며 부검 결과 심한 고문과 성폭행 후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녀의 사인이 알려지자 국내 노동계는 물론,세계 각국에서 인권유린 행위를 강력 규탄했으며 결국 정부는 진상규명과 함께 근로자들의노동조건 개선을 약속했다. 당국의 수사로 지난 95년 9명의 군인들이용의자로 검거돼, 살인혐의로 기소돼 하급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은 증거부족을 이유로 이들을 전원 석방했다. 합동조사팀은 마르시나가 감금된 곳으로 추정되는 동부 자바 군사령부 사무실에서 발견된 혈흔이 마르시나의 것으로 드러날 경우 자바군사령부 요원들의 범행임을 입증할 중요한 물증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있다. 자카르타 연합
  • MBC ‘이제는‘ 내년 봄개편때 부활

    억압적 권위주의 정권아래 가려지거나 왜곡돼온 현대사를 재조명해오피니언 리더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모았던 MBC-TV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10월22일 ‘고문,끝나지 않은 전쟁’편으로막을 내린 ‘이제는…’이 2001년 버전으로 되살아난다. MBC측은 회사의 공영 이미지를 대변했다는 상징성과 그간의 사내외호평 등을 감안,이 프로를 2001년에 연장 방영키로 했다.이에 따라‘이제는…’은 3월말∼4월초 봄편성에서 부활해 1차 아이템 15편을내보내게 된다. 지난해 9월12일 ‘제주 4.3’으로 테이프를 끊은 이래 ‘이제는…’은 현대사의 민감한 부분을 끊임없이 건드리며 잇단 안타를 터뜨려왔다.‘여수 14연대 반란’‘박정희와 핵개발’‘일급비밀!미국의 세균전’‘94년 한반도 전쟁위기’‘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등.10년 전만해도 지상파에서는 상상조차 못했을 사안들이다.‘○○사단의 사라진 작전명령서’‘…세균전’등을 통해 6·25전후 양민학살 및 세균전 의혹의 진원지로 미국을 지목했으며 ‘…방화사건’에서는 광주사태에 관한 미국의 역할을 들춰내 보수회귀 분위기에 쐐기를 박기도했다.‘땅에 묻은 스캔들-정인숙 피살사건’‘KT공작의 실체­김대중납치사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전태일과 그 후’등으로는 현대사 수레바퀴에 짓밟힌 피해자들을 위무했다. 방송위원회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PD연합회의 ‘이달의 PD상’,시청자연대회의의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등을 휩쓰는 등 반응도 좋았다.평균시청률은 99년도분 13편이 8.3%,올해 15편이 7.2%. 일요일 밤11시30분의 교양프로치곤 선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은 한계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왜곡된 역사 핵심을 치열하게 물고 늘어지기보다 상반되는 당사자 넋두리의 평면적배열에 그치곤 했던 밀도 문제는 제작진 내부에서도 자성한다.말할수없던 시절 내내 침묵하다가 이제 말할 수 있게 되니까 입을 연다는방송 맥락 자체도 김빠진다.지상파 방송이 행한 ‘오욕의 과거사 정리’는 될 수 있었을지언정 방송의 책무라 할 동시대 역사에 대한 올곧은 비판과는 동떨어져 보인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2001년분 제작을 맡은 김채훈CP도 이를 상당히 의식한 듯 했다.김씨는 “한·미,한·일,남북관계 등을 축으로 놓되 시점을 보다 가깝게가져와 현대사에서의 미국,북한 내부의 권력관계와 인맥,재일교포 인권문제 등 발언의 파급효과가 큰 아이템을 다루는 데 주력하겠다”고말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 全태일열사 30주기 추도식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민중 앞에 던지고 우리에게 삶의 힘을 보여주었네” 진관(眞寬) 스님의 추도시로 시작한 전태일(全泰壹) 열사 30주기 추도식이 13일 오전 노동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에서 열렸다. 행사는 추모가 합창,추도사,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전 열사의여동생 전순옥(全順玉·46)씨는 ‘오빠에게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행사 공동대표인 단병호(段炳浩) 민주노총위원장은 “전태일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옮긴투철한 행동력의 소유자였다”면서 “700만 노동자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지금이야말로 전태일의 염원을 엄숙하게 돌이켜야 한다”고말했다. 70년 당시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이소선씨를 찾아가 함께 싸우기로 다짐했던 장기표(張琪杓·55)씨는 “30년동안 농축된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여 고인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단번에 이루어내자”고 강조했다. 윤창수기자 geo@. *全태일 열사 어머니 李소선씨 . “처음에는 같이살지 왜 갔는가 싶었지만 이제는 노동자 세상이 올 때까지 내가 도우려고 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71)씨는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아들의 3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30년동안 노동현장을 뛰어다닌 어머니답게 밥은 챙겨 먹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을 때가 일생 중 가장 기뻤다는 이씨는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려지는 걸 보면 아직도 세상은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태일이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기까지 버텨올수 있었다는 이씨는 “숨지기 전에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명예회복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고 싶다”고말했다. 윤창수기자
  • ‘미즈엔’ 이옥경씨 “아줌마와 얘기 나누면 안되나요”

    “사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설자리가 없는 ‘낀 세대’아줌마들이 고민을 나누고,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함께 하는 공간을 마련해주고싶습니다.”내일신문이 지난주 창간한 여성시사주간지 ‘미즈엔’의 초대 편집장 이옥경(李玉卿·52)씨는 “주변에서 ‘책 한권 읽지 않을 것 같은 40∼50대 아줌마를 상대로 무슨 모험이냐’고 걱정을 많이 한다”면서 “그러나 푹퍼진 몸매와 뻔뻔스러움 등으로 희화화한 아줌마상과는달리 높은 학력과 경제력,원숙한 식견을 갖춘 신(新)중년여성층이 이미 등장했다”고 자신했다. 이편집장은 지난 90년 타계한 인권변호사 조영래(趙英來)씨의 부인.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때 일간지에 기고한 전태일(全泰壹)관련 글을 보고 조변호사가 만나자고 전화해 처음 대면했다. ‘남편을 잃고는 아무 일도 하기 싫어’2년동안 쉰 것을 빼고는 여성운동을 계속해 여성민우회 부국장,내일신문 편집위원을 지냈다.두 아들은 현재 대학에 다닌다. 미즈엔은 결혼에 상관없이 여성을 호칭하는 ‘미즈’에 내일·네트워크 등의 의미를 덧붙여 연음으로 표기한 것.중년여성을 겨냥한 시사잡지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전례가 없다.사회활동은 못했지만 똑똑하고 문화적 소양이 풍부한 ‘아까운’여성을 필진으로 적극 참여시킬 계획도 마련하고 있다. 그는 “늙어보니 이만큼 인생을 넉넉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도 없더라”며 역시 50대인 최영희(崔英姬)내일신문 사장도 미즈엔에 상당한 애정을 쏟는다고 귀띔했다. 허윤주기자 rara@
  • [네티즌 이슈] 朴正熙 전대통령 평가

    *”혹평은 지나친 편견이다”. 역사의 전개는 결코 논리적이거나 인과적이지 못하다는 예를 본다.만주군관학교 출신·친일파라는 식으로 비판하며 박정희 흉상에 일장기를 씌우는 것은 국수주의 짓이고 철없는 행동에 불과하다.국수주의적인 관점과 민족주의적 관점의 싸움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한다고 해서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상반된 관념이 싸우면 어느 한쪽이 이기기보다 엉뚱한 제3자가 득을 보기도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박정희 출현은 단연 혁명에 가깝고,항일과 친일의이전투구 판을 종식시킬 수 없던 역량부재의 시대에 등장한 한국현대사의 ‘개척자’라는 점이다.그런데 먹고 살만해져서 인지 물질과 정신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까지 들이밀면서 그를 혹평한다.일본제국주의니 미국제국주의니 하는 류는 식민주의사관의 연장에서 한치도벗어나지 못한 딸깍발이들에 다름아니다. 이런 목소리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히는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한국전쟁을 일으킨 북쪽 책임자의 거대한 동상들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된다.그가 항일운동을 했다고 해서 그런가?역사적으로 기억하고 추억할만한 인물이라면 기념관이 무에 대수인가.국민 상당수 심지어 대학생들까지 손에 꼽는 지도자로 박정희가빠지지 않는다.반대 여론은 그야말로 소수의 운동권적 시각이라고 본다. 혁명은 그 자체로 한 시대를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인 것이다.분단의 상처와 그로 인해 만연한 이데올로기 싸움도 박정희가 종지부를찍었다.그뿐인가.모두가 가난에 허덕일 때,뭔가 총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했던 시대에 그가 등장한 것이다. 사실 경제개발이다 뭐다 하는 건 박정희시대가 이룬 이념에 비춘다면 각론에 불과한 것이다.특히 유감인 것은 특정정파나 지역색마저 가미된 듯한 점이다.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일단의 시류에 휩쓸려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보이지 않는 국가의 손실이다.이런 일들은 이제 멈춰야 할 것이다. 박종환 GTVnet이사. * “청산위한 행동 정당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훌륭한 지도자였는가?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1970년대에만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260여명,긴급조치9호위반으로만580명을 구속했다.‘인혁당 재건 주동자’라는 덫을 씌워 사형선고받은 양심수들을 다음날 바로 사형시켜 ‘(국제)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오명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테러·납치도 서슴지 않았다.김대중대통령도 당시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중앙정보부로 대변되는 고문·공작 정치는 바로 그의 유산이다. 경제성장만큼은 이뤘지 않느냐며 칭송하는 사람이 있다.경제성장은가난한 노동자·빈민·농민의 뼈빠지는 노력이 이뤄낸 것이다.그럼에도 박정희는 성장의 과실을 국민에게 주지 않고 소수 자본가에게 나눠주었다.당시 100대 기업에는 세금으로 세운 공기업이 많았는데 이것이 몇사람에게 헐값으로 넘어가 오늘날 재벌이 성장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정권 말기 빈부격차는 사상최대에 이르렀다.이에 따라전태일의 분신으로 시작된 노동자의 생존권 저항은 점점 커져 79년저 유명한 YH사건으로 이어지며 박정희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경제성장에 성과가 있다 해도 권력유지를 위한 인권유린이 용서받을 수는없다. 70∼80년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처벌을 요구받지 않은가. 우리는 단 한번 박정희의 인권유린을 평가하지 못했고 오히려 현정부는 박정희기념관을 지원하겠다고 한다.세금으로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기념관'을 지원하겠다니 당연히 항의해야 하는 것이다.이번 철거는 지역감정을 무마하려고 독재자 미화에 앞장서는 현정부를 규탄하는 성격도 매우 크다.더구나 흉상은 5·16쿠데타,즉 불법적 역사를찬양하는 기념물이다.이런 기념물을 철거하지 않는 것은 ‘쿠데타를하더라도 그 뒤 잘하면 그만'이라는 역사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흉상철거를 계기로 박정희시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 오늘날겪는 고통을 극복하는 데 교훈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종철 민주노동당 부대변인.
  • 민노총 1만명 집회… 100여명 부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위원장 段炳浩) 소속 노조원과 학생 1만3,000여명(경찰추산)은 12일 오후 2시 서울 대학로에서 ‘전태일 열사정신계승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노동법 개악저지 전국노동자대회’를 가진 뒤 종로일대에서 가두행진을 하다 산발적으로 격렬한 시위를벌였다.이 과정에서 노조원과 경찰 등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이일대 교통이 오후 내내 완전마비됐다. 경찰은 대학로와 종로 일대에 전투경찰 등 96개 중대 1만2,000명을배치했으며 현장에서 쇠파이프와 각목 등 1,000여점을 수거했다. 민주노총 선봉대원 500여명은 오후 4시50분쯤 종로5가에서 곤봉과각목,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경찰과 충돌,최태일씨(39·대구버스노조)등 30여명이 다쳤다.이들은 이어 종로3가 인근 차도에서 가로 3m,세로 4m 크기의 ‘근로기준법’ 책자 모형을 불태우는 ‘노동법 화형식’을 가졌으며 7시20분쯤 종로2가로 진출,정리집회를 가진 뒤 자진해산했다. 전태일 분신 사망 30주기를 하루 앞두고 열린 집회에서 단 위원장은대회사를 통해 “불안정한 고용상태를극복하기 위해 한국노총에 공동투쟁본부의 구성을 공개 제안한다”면서 “정부도 그동안의 잘못된정책을 즉각 철회하고 노조,회사,채권단,정부가 참여하는 4자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촉구했다.또 월차·생리휴가 폐지,초과근무수당 할증률 25% 인하 등을 골자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 중단도 요구했다. 전영우기자 ywchun@
  • [외언내언] 전태일 부활

    1970년 11월13일,그 날은 아침부터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낮 1시30분경,청계천 평화상가 앞 도로.500여명의 노동자들은 경비원과 경찰의 몽둥이 앞에 이리저리 밀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놓고 형사들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이던 전태일(全泰壹)이 친구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불을 붙이라고 부탁했다.친구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설마’하는 생각으로 성냥불을 켰다.순간 전태일의 전신에 불길이 치솟았다.그는 미리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나왔던 것이다.불덩이가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고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그러다쓰러졌다.그와 함께 그가 품고 다니던 ‘근로기준법’ 소책자가 활활 타들어갔다.자신의 몸을 불살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른 셈이다.전태일은 그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운명했다.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여사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주십시오”.그리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받은 후였다. 30년 전,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을 하던 날.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의 하루로 지나갔다.화염에 숨이막혀 비명으로 변해버린 전태일의 외침은 조국근대화의 굉음 속에서모기 소리로 묻히고 말았다.하지만 그 외침이 영영 묻힌 것은 아니었다.이듬해 1971년에는 10배가 넘는 1,656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일상의 소음 속에 묻히고 말았던 그의 외침이 몇천,몇만배 함성으로되살아난 것이다.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웠다.그의 죽음은 무수한사람들의 말문을 열어주었다.응당 그러려니 하고 주저앉아 있던 이들을 일으켜 세워 외치게 했다.그가 경전처럼 애지중지 품고 다니던 ‘근로기준법’은 그와 함께 타서 없어지더니 노동자들의 복음으로 되살아났다.그리고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났다. 전태일 열사 기념사업위원회(공동위원장 段炳浩·金錦守)는 30년전청계천 피복노조가 시위를 시작한 10월24일부터 전태일이 분신한 11월13일까지 20일간을 전태일 추모기간으로 정했다.기념사업회는 첫날인 24일 분신자리 표지석 설치와 평화시장에 전태일 거리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청계천 8가,30년 전 전태일이 자기 몸을 불사른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는 일이 “사후 100년이 지나야…”라는서울시 지명위원회 규정에 묶여 속수무책인 모양이다.도로명칭은 몰라도 표지석 정도는 규정을 바꿔 세워봄직도 해보인다.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민주화 보상’8,395건 접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李愚貞)는지난 8월21일부터 두달 동안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보상을위한 1차 신청을 마감한 결과 전국적으로 8,395건이 접수됐다고 23일 밝혔다. 이 가운데 보상금 신청은 901건,명예 회복 신청은 7,494건으로 집계됐다.보상금 신청 중에는 사망 185건,부상 708건,행방불명이 8건이며 명예 회복 신청에서는 해직이 2,942건,유죄 판결 4,266건,학사징계286건이다. 유형별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 1,002건 ▲긴급조치 위반 600건 ▲노동운동 관련 582건 ▲독재정권 반대시위 448건 ▲해직 언론인 437건 ▲유신 반대 198건 ▲3선개헌 반대 50건 ▲부마항쟁 35건 등이다. 시·도별로는 서울이 2,315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 1,299건,광주 740건,부산 595건,전북 519건 등이었다.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이 4,050건으로 전체의 48.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청자중에는 전태일,박종철,이한열씨 등 민주열사와 91년 사노맹사건으로옥살이를 했던 시인 박노해씨,언론 통폐합 당시 강제 해직된 박준영청와대대변인,90년 전노협 사수투쟁을 주도한 단병호 민주노총위원장 등이 포함돼 있다.또 전·현직 의원으로는 김상현,양순직,양성우,송석찬,장영달,이미경,김부겸씨 등과 김창현 울산동구청장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전교조 교사 1,500여명을 비롯,민노총·유가협·민가협·동아투위·최루탄부상자회·부마항쟁기념사업회 등 민주화운동 단체가집단으로 신청서를 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접수한 신청건에 대해서는 60일 이내에 기초 사실조사를 마친 뒤 보상심의위원회에 넘겨진다.이후 위원회는 30일 이내에 관련자 여부 및 보상금액 등을 지급하게 된다. 한편 ‘민주화보상법’에 의한 최종 신청기한은 내년 12월31일까지이며,2차 신청은 내년 상반기에 공고할 예정이다. 최여경기자 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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