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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범여권 배틀 로열/이용원 수석논설위원

    ‘배틀 로열’ 하면 일본의 만화·영화부터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학원 폭력이 극심해지자 일본정부는 ‘배틀 로열법’을 제정한다, 이에 따라 군대는 전국의 중3 학급 가운데 한개 반을 무작위로 골라 학생 전원을 무인도로 끌고간다, 각종 무기를 지급받은 주인공 일행은 친구들을 모조리 살해해야 홀로 살아남게 되는 서바이벌 게임을 강요 받는다는 줄거리이다. 극단적인 상황 설정에 폭력·선정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기성세대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아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소설로 먼저 발표된 뒤 잇따라 만화·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혼전, 큰 싸움’등을 뜻하는 영어 배틀 로열(battle royal)은 옛 로마제국 검투사들의 결투 형태에서 유래했다.3명이상의 검투사들에게 난투극을 벌이게 해 ‘마지막으로 우뚝 서 있는 자’를 승자로 뽑는 방식이었다. 이같은 방식은 서양 문명에 길이 이어져,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 5∼6명에게 눈을 가린 채 떼싸움을 벌이게 하고 이를 즐기는 ‘게임’이 19세기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하긴 옛날 일만도 아니다. 미 프로레슬링계는 초대 챔피언을 뽑거나 챔피언이 공석이 됐을 때, 숱한 희망자 가운데 챔피언 도전자를 가릴 때 지금도 배틀 로열을 한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어제 대선출마를 선언해 범여권 주자 대열에 정식 합류했다. 유력후보 중 한명으로 거론돼온 그의 출마선언은 익히 예상된 일. 문제는 범여권에서 출마를 선언했거나 곧 선언할 사람이 스무명 가까이 된다는 데 있다.2007년 대선 정국을 보면서 배틀 로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배틀 로열에는 장점이 있다. 흥행성을 최대한 높이고, 참가자의 특장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그 역사에서 보듯 배틀 로열에는 오락성·야만성이 혼재돼 있다. 스무명 가까운 주자군(群)에서 국민 기대를 모을 만한 대선후보를 선정하는 일은, 범여권을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떠맡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이 희화화해 국민에게 정치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범여권은 지혜와 의지를 모아야 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완전한 승리 추구해선 분쟁 해결 안돼”

    “완전한 승리 추구해선 분쟁 해결 안돼”

    “분쟁은 한 쪽이 다른 쪽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해서는 절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30년에 걸친 북아일랜드 신·구교도간 유혈사태를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트림블(63) 경은 분쟁종식의 필수조건으로 ‘평화를 향한 각 세력들의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완전한 승리의 추구는 대량학살과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했다. ●북아일랜드 30년 유혈사태 종식 19일 오전 서울의 한 호텔에서 트림블 경을 만났다.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윤덕홍) 주최로 이날부터 사흘간 열리는 ‘2007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의 기조강연(주제 ‘평화에 이르는 길’)을 위해 한국에 왔다. 트림블 경의 정치경력을 정점으로 이끈 땅, 북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분쟁의 상처로 신음했다.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분쟁은 싹텄다. 영국의 신교도 이주민이 다수인 북아일랜드가 영국 관할로 남으면서,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등 구교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신교도에 무력저항했다.1972년 ‘피의 일요일’ 대참사가 발생했고, 지난 30여년간 양측 충돌로 3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IRA에 대한 강경발언으로 신교도계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트림블 경은 1995년 신교도계 얼스터연합당 당수로 선출됐다. 많은 이들은 평화협정이 난항에 부닥칠 거라 우려했지만 예상은 어긋났다. 트림블 경은 폭력종식에 합의한 98년 4월10일 금요일의 ‘굿 프라이데이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구교도계 정당 지도자였던 존 흄과 같은 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뒤이어 구성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초대 수석행정장관을 지냈으며, 지금은 영국 상원의원이다. “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협정 체결 전후 IRA에 늘 반대했고 지금도 반대합니다. 다만 오랫동안 폭력을 행사해온 IRA도 전쟁을 그만두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정부도 IRA가 폭력을 그만두면 정치적 대화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으로 화답했습니다.‘분쟁의 장’이 아닌 ‘정치의 장’으로 발전했기에 협정이 체결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평화협정이 가능했던 핵심 이유로 트림블 경은 “협정을 맺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꼽았다. 그는 “평화협정은 어느 한 쪽의 제안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면서 “모든 정당에서 요구했고 IRA를 포함한 모든 세력이 염원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분쟁의 심층을 살펴라” 트림블 경은 “분쟁의 심층을 살피라.”고 주문했다. 분쟁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해법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주요 원인이 종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 같은 해석을 경계했다. “종교는 융화되기 힘듭니다. 아일랜드 분쟁을 종교분쟁으로만 파악하면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지기 마련입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민족간 분쟁입니다. 북아일랜드를 영국 영토로 볼 것인지 아일랜드 통일국가의 영토로 볼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트림블 경은 또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지적했다. 산업화가 집중된 신교도 지역과 배제된 구교도 지역의 차별이 분쟁 저변에 깔려 있다는 지적은 사회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가 필수적이란 얘기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주장하는 IRA나 스리랑카 반군인 ‘타밀 타이거’의 저항을 단순 테러행위로 간주한다. 정치적 소수자의 저항이라도 민주적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도 IRA에 대한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지는 않았고, 그 경험을 한국이 참고할 것을 조언했다.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한국은 북아일랜드의 경험을 참고해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현명하게 남과 북의 갈등을 해결하기 바랍니다.” 트림블 경은 한국 상황을 언급할 때마다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한국 현실을 잘 모른다는 이유였다. 한국에 ‘굿 프라이데이’가 올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북아일랜드와 한국 상황을 대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가능할지 알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입니다.” 글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사진 손형준기자 bolta@seoul.co.kr
  • [열린세상] 연좌제의 망령을 경계하며…/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열린세상] 연좌제의 망령을 경계하며…/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좌제란 어떤 사람이 특정 사건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인과 혈연적, 즉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다하여 연대 책임을 묻는 봉건시대의 처벌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 사상에 관련해서는 광범위하게 연좌제를 실시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울리고 그들의 미래를 짓밟은 적이 많았다. 다행히도 민주화와 더불어 매카시즘적 반공주의가 그 세력을 잃으며 연좌제는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연좌제적 의식이 우리 시민들과 지도자들에게 아직도 뿌리 깊게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 때면 조상 문제가 단골 메뉴이다. 과거 어떤 대통령 후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한국인이 아니다.”,“출생지가 일본이다.” 등에 대한 소문이 돌았었다. 박근혜씨에 대해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것 자체가 공격의 소재가 된다. 박근혜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폭압정치를 지지하거나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모를까, 그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공격받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지난번 서울대 총장 선거 때는 한 후보의 할아버지에 대한 친일 논쟁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문명국가에서 왜 이런 것들이 상대방의 흠집을 내는데 사용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얼마 전 버지니아 공대 총기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연좌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신질환이 있는 교포 한 사람이 벌인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유감을 표시하고 언론도 뭔가 사과해야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한국의 대미 수출에 대해 염려하는 예측까지 있었다. 한국계 이민자 한 사람이 벌인 사건에 대해 전 국민이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마치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최근 친일행위자들의 재산에 대한 환수조치 발표가 있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친일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토지를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비록 6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국가의 기강을 살리는 것은 물론, 독립 투쟁에 몸을 바친 의인들과 그 후손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후세에 교훈이 되는 조치가 되리라 본다. 그러나 그 과정은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며 진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작성하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가계도가 공개될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 감안하면 이에 대해 극도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친일파 자손들은 그들의 조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나이가 40세인 시민이 그의 3대 할아버지쯤 되는 사람이 친일파였다는 사실 때문에 90여년이 지난 현재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불이익을 당한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근대국가가 아닐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민족정기를 중요시 여기는 모 국회의원의 아버지가 일제하에서 헌병이었다는 것이나 모 인사의 조상이 동학혁명의 원인제공자인 고부군수라는 사실이 이들을 비아냥대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좌우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조상의 행적과 연루하여 공격하는 비열한 행위는 없어야 한다. 역사 바로잡기를 감정적으로 처리하면, 그 때 사용된 단죄의 칼날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고, 현재는 과거의 유령이 지배하게 될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조상이 누구든,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집안이 아무리 가난하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사회의 최고 명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이런 나라를 사랑할 것이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몸을 바쳐 지킬 것이다. 연좌제적 사고방식은 정부나 제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온 시민이 선진 문화인이 되어 척결해야 할 원시적 씨족사회의 잔재이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사설] 언론에 빗장 걸고도 참여정부인가

    참여정부의 ‘기자실 정리 방안’이 오늘 국무회의에 상정된다.13개 정부부처의 37개 브리핑실과 기사송고실을 중앙청사, 과천청사, 대전청사 등 3곳의 브리핑실로 통합하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정부부처에 대한 언론의 취재 공간을 싹 없애겠다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발언이 나온 지 넉달 만에 국정홍보처가 이 ‘죽치는 공간’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대통령의 비뚤어진 언론관과,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더 비틀고 키우는 몇몇 참모들의 과잉충성이 어떻게 국정을 일그러뜨리고,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알권리를 위협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참여정부는 마치 기자실(기사송고실) 폐지가 언론의 담합구조를 깨고, 언론이 누려온 특혜를 철폐하는 개혁인 양 주장하는 모양이다. 노 대통령부터가 지난해 말 언론을 재계·검찰과 함께 ‘3대 권력집단’으로 규정하고, 언론을 불량상품으로 몰아간 바 있다. 그러나 기자실은 기자들이 죽치는 담합의 공간도, 특혜의 공간도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모든 언론에 열려 있으며, 각 언론은 이 공간을 통해 정부 정책을 국민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것은 물론 정부를 감시하고, 국민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기도 한다. 정부·국민의 소통의 장이며, 국민의 최소한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잖아도 국정TV에 국정브리핑, 청와대브리핑 등을 통해 과거 어느 정권보다 정부 홍보에 열을 올려온 참여정부다. 몇몇 언론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어떻게 전체 언론에 빗장을 걸고 쌍방향 소통을 거부하는 반민주 전체주의적 발상이 나오고, 현실이 되는지 경악스럽다. 정보의 일방통행은 국민뿐 아니라 정부도 피해자로 만든다. 언론 자유를 탄압한 정권이라는 오명만은 피하길 바란다.
  • [열린세상] 어떤 5·18/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열린세상] 어떤 5·18/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토론 사회를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광주 문화중심도시를 둘러싸고 지역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란다. 제안에 응했을 때만 해도, 사업 콘텐츠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놓고 서로 다투나 했다. 그런데 정작 나가 보니 논의의 수준이 어이가 없다. 논란의 요체는, 앞으로 설립될 아시아문화전당이 이른바 ‘랜드마크’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것. 공모에 당선된 설계안은 유선형의 유리 파사드를 끼고 지붕과 바닥이 서로 이어지는 구조다. 건물을 위로 올리지 않은 것은 무등산의 윤곽을 드러내고,5·18 기념물들을 보존하려는 배려일 게다. 오스트리아 건축가 훈데르트바서도 유치원 건물을 지을 때에 이와 비슷한 생태주의 컨셉트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역의 일부세력이 당선된 계획안에 대해 ‘벙커’ 운운하며 반발하고 있다.‘랜드마크’의 역할을 하려면 건물이 위로 치솟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을 무조건 지상으로 높이 올려야 한다는 발상도 한심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그 뒷얘기다. 그 밖에도 5·18을 기념하는 518m짜리 탑을 쌓자,3000석짜리 오페라 하우스를 짓자, 혹은 거대한 규모의 박물관을 짓자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단다. 5·18 기념비가 무슨 주체사상탑도 아니고, 자유와 민주를 위한 희생을 굳이 전체주의 거석문화로 기려야 할까? 또 대한민국에 오페라 단이 몇 개나 된다고 3000석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를 짓는단 말인가. 그러잖아도 전국 지자체에서 화려하게 지은 공연장들은 막대한 관리비만 잡아먹으며 텅텅 비어 있다. 게다가 거대한 박물관을 지으면 뭐 하는가. 거기에 전시할 컬렉션은 어디서 구하고? 그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역의 여론’이라 부르며, 이를 증명하려고 관제 데모 비슷한 것을 조직하기도 했다. 당연히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질 수밖에. 듣자 하니 데모에 참여한 노인들의 대부분은 ‘랜드마크’가 뭔지도 모른 채 자리에 불려나왔고, 어느 할머니는 ‘그런 건 모르겠지만, 지역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단다. 심지어 이 논란을 정치 문제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즉 중앙정부가 지역주민을 무시하고 사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 한다고 선동을 하는 것이다. 관제데모에 동원된 어느 노인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노’자 다음에 ‘ㅌ’자까지 썼다가, 거기에 x표를 하고 다시 ‘무현’ 이라고 적어 넣었다고 한다. 아직도 ‘노태우’씨가 대통령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런 것이 광주가 그 중심에 서려고 한다는 ‘문화’의 실체다. 문화는 ‘문화관’을 짓는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작더라도 그 건물에 채워 넣을 콘텐츠의 문제다. 이것을 논의해도 시원찮을 판에, 논의 자체가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2조원의 예산을 누가,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물론 이게 광주시민의 일반적 정서일 리 없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이 해프닝의 배후로 낡은 지역주의 정당, 거기서 관급공사 따는 건설업체, 그 광고를 받는 지역 언론으로 이루어진 공고한 이익집단의 존재를 지적한다. 그들은 지역의 여론을 빙자한 지역권력의 망발을 막을 길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주민을 지역주의의 볼모로 잡고, 그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놓고, 지역의 이해를 내세워 실은 자기들끼리 야합하여 주민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배반하는 수법.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5·18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를 소백산맥 건너편의 지역주의만이 아니라, 그쪽을 그대로 빼닮은 산맥 안쪽의 지역주의로부터도 해방시켜야 한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옴부즈맨 칼럼] 포털·댓글·UCC, 신문의 역할/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신문이 사실보도, 아니 진실보도를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멀지 않은 과거에는 정치권력이 입을 막고 사실을 비틀었다. 요즘은 자본이 언론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도 신문에 유언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권력과 자본은 정직한 편이다. 권력과 자본보다 훨씬 무섭게 신문의 귀와 입을 틀어막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실 여부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래야만 되는 것으로 믿어버리는 지배적인 신념이다. 수십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이데올로기는 무수한 사람의 인권과 생명을 앗아갔지만 신문은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의 횡포에 완장을 차고 나서기까지 했다.‘황우석 논문조작’ 사태가 터지기까지 발동한 국익이데올로기를 보라.‘국익’이란 이데올로기에 압도당한 신문은 진실추구가 아니라 신화와 환상, 허위를 만드는 데 급급했다. 요즘 유행하는 ‘포털’ ‘댓글’ ‘UCC’에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우려스럽다. 이들 신매체는 시민이 적극 참여하는 쌍방향의 하의상달식이기 때문에 분명 ‘민주적’이다. 하지만 ‘민주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따라서 해야 하고, 또 ‘민주적’이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면 자칫 몰매를 맞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매체가 종종 부화뇌동을 부르는 전체주의와 비판을 불허하는 독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포털은 국내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 등 대부분의 언론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언론공간을 창출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댓글과 토론광장 공간도 갖춘 포털은 제법 ‘민주적’이다. 하지만 인터넷공간에서 상업적 이해를 추구하는 포털은 뉴스사이트를 연예, 오락, 스포츠물 위주로 선정적으로 편집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이상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포털을 찾는 이들이 많은 경우 공공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민주적 시민이 아니라 선정과 흥미 위주의 포털뉴스의 소비자일 뿐이다(3월28일자 1면 ‘e권력 포털 대해부, 통제되지 않는 언론’). 엉겁결에 다수의 포털 뉴스공급자의 하나로 전락한 신문들은 독자들이 포털로 이탈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스스로가 이탈의 원인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있다. 정치권도 포털의 영향력을 관찰하면서도 우려보다는 편승에 관심이 더 많다(3월30일자 1면 ‘e권력 포털 대해부, 대선 주무르는 제5권력’). 소위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한다는 ‘댓글’이 가장 비민주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댓글이 남의 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자기 말만 ‘지껄이고’ 공격과 비방, 욕설을 ‘내뱉는’ 악성 감정의 분출구가 된 지 오래다. 신문들은 저간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댓글이 ‘민주적’ 공간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경쟁사들도 하고 있기 때문에 악성 댓글공간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댓글제도가 없다. 여론마당(forum) 공간만 열고 그것도 욕설, 비방, 명예훼손 발언 등은 삭제·관리한다. 관리의 이유는 민주적 시민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제 이용자 창작 콘텐츠(UCC) 열풍이 불고 있다. 신문들은 또 ‘민주’의 꼬리를 달며 UCC를 선전하고 있다. 댓글 도입 때처럼 많은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UCC를 자사 서비스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과연 UCC는 민주적인 매체인가? 최소한 신문들의 UCC 보도는 민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신문들은 UCC를 보도하기보다 선전하고 있고, 감시하기보다 옹호에 급급하다. 이러한 정황에 비춰볼 때 지난주 서울신문이 시작한 ‘e권력 포털 대해부’란 탐사보도 시리즈는 용기있고 의미있는 기획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이 없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日 도덕교육 강화한다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이 도덕 교육 강화에 나섰다. 현재 초·중·고교의 특별활동 교과로 편성된 도덕을 정식 교과에 채택하는 데다 성적 평가대상에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다. 30일 교육재생회의(교육혁신위원회)는 초·중·고교에서 도덕 교육을 국어와 수학 등의 주요 교과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 정식 교과로 채택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교과명은 ‘덕육(德育)’으로 하자는 의견도 제기됐다. 도덕교육 강화는 공중 도덕을 바로 세우고 애국심을 높이려는 아베 신조 총리의 교육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야당과 교육계 일각에서 “전쟁 전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신(修身) 교육의 부활”이라고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 또 아부키 문부과학장관은 이날 이와 관련,“장관으로 있는 한 지금까지의 룰을 지켜가겠다.”면서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 현행 학습지도요령에는 도덕 교육은 국어·수학 등과 달리 음악·체육 처럼 별도의 교육과정으로 편성돼 연간 35시간(초·중등학교)을 가르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수업에서도 정식 교과서가 아닌 부교재를 사용하고 있다. 고교는 아예 도덕 시간이 없다. 도덕이 정식 교과가 될 경우,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사용이 의무화된다. 교과 지정은 법개정 없이 중앙교육심의회의 심의만 거치면 된다. 위원회측은 “전체주의가 되거나 우익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베 총리는 회의에서 “저항이 있겠지만 교육개혁은 내각 전체가 힘쓰고 있다.”고 힘을 실었다. 회의는 대학·대학원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대학의 9월 학기제를 검토하기로 했다.hkpark@seoul.co.kr
  • [열린세상] 300/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세스의 수십만 대군을 테르모필(뜨거운 문)의 협곡에서 저지했던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300인의 전사.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침공을 맞았을 때,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가 멸망하거나, 아니면 스파르타의 왕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후예는 물론 후자를 운명으로 선택한다. ‘300’은 바로 이 전설적인 전투를 다룬 영화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이 영화를 보고 발끈했다고 한다. 이란 대통령의 문화정책 보좌관은 “이 영화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했을 뿐 아니라 이란을 모욕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란의 유력한 신문들 역시 “할리우드가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다.”거나,“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하며 격앙된 입장을 보였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며 나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대사는 미국의 전투적 우익들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 스파르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런 대사들의 바탕에 ‘가상의 적을 향해서는 선제적, 공격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깔려 있음을 모르고 이 영화를 보려면 정치의식이 어지간히 무뎌야 한다. “파병을 해야 한다.”는 왕비의 대사는 수렁에 빠진 이라크 미군을 위해 병력을 증파하라는 주문일 수도 있고, 크세르세스의 후예들을 혼내주기 위해 페르시아만에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전쟁 대신 외교적 해결을 주장하는 이는 적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테론 의원이 되고, 자국 군대가 밖에서 싸우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우회로를 알려준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될 판이다. 영화 ‘300’에 깔려 있는 멘탈리티는 이라크전 4주년을 맞아 워싱턴 거리로 몰려나온 찬전론자들의 피켓 위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힘을 통한 평화를”,“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다”,“자유주의자들은 적을 돕고 있다”. ‘300’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은 이 전투적 우익들이 들고 나온 피켓 위에 적혀 있다. 대한민국의 어느 모자라는 평론가는 이 영화에 “병역 기피자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는 평으로써 우울하던 내게 오랜만에 폭소를 선사해 주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동양의 전제주의에 대한 서양 민주주의의 승리’로 해석하는 틀은 역사가 깊은 편견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 역시 노예제에 기초해 있었다. 거기서 자유민들 사이에서나마 민주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선진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문자문화의 도입이 늦어 구술문화 단계에 있었던 그리스 사회의 후진성의 결과였다. 그게 나중에 운 좋게 인류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된 것일 뿐. 영화 속에 스파르타인들이 아테네인들을 ‘게이’라고 무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사를 들으며 전쟁으로 지켜야 한다는 미국의 그 ‘자유’가 과연 아테네를 닮았나, 스파르타를 닮았나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약한 아이를 죽여 버리는 스파르타의 관습은 나치 독일의 우생학을 닮았고, 일곱 살부터 전투훈련을 시키는 스파르타의 제도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소총 들고 달리게 하는 북조선 군사문화를 닮았다. ‘자유’를 생명으로 한다는 미국이 이제 와서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국가의 이상으로 여기게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역설이다.‘300’은 컴퓨터 생성 이미지로 된 새로운 유형의 정치의식, 즉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디지털 시대의 ‘판타지형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그냥 백인우익 마초 근성을 비웃으며 디지털 기술의 미학성을 즐기면 될 일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집배원·6번째출마… 佛대선 이색후보 많아

    |파리 이종수특파원|집배원, 전체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후보등록 마감을 하루 앞둔 15일(현지시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 군소후보들의 이색 경력이 눈길을 끈다. 현재 대선 국면은 집권당 니콜라 사르코지,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중도파 프랑수아 바이루 등 3강과 극우파 장-마리 르펜의 1중 구도로 압축되고 있다. 그러나 군소후보들은 당선 가능성 여부를 떠나 저마다의 정치 철학과 특이한 경력을 내세워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출마를 선언한 후보는 모두 39명. 이 가운데 극좌파인 공산주의혁명동맹의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대통령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33세의 우체국 집배원이다.2002년 대선에서 최연소 후보로 출마,4.3%를 득표하며 기염을 토했다. 같은 극좌파인 노동자투쟁당의 아를레크 라기예(67)는 ‘영구 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주의자로 유명하다.1974년 여성으로는 처음 대선에 출마한 뒤 6번째 출마했다. 두 후보와 함께 ‘반자유주의 동맹’을 구축하려다 실패한 조제 보베(54)는 맥도널드 체인점을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등의 과격한 행동으로 유명한 농민 운동가다.이브-마리 아들린은 군주제를 내걸었고, 프레데릭 니우스(40)는 수렵인 정당의 대표다. 언론인 니콜라 미게(46)는 속임수로 선출직 공무원들의 추천을 받으려다 이틀간 감옥 신세를 졌다. 비즈니스맨인 라시즈 네카즈(35) 후보는 선거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98.5㎡짜리 집을 경매에 부쳐 화제를 모았다.vielee@seoul.co.kr
  • ‘빅 브러더’ 논란 휩싸인 유럽

    유럽연합(EU)이 27개 회원국이 보유한 모든 범법자의 지문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개인 정보를 공유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영국 더 타임스 인터넷판은 16일 유럽 집행위원회(EC)의 ‘2008 연례정책보고서’에 실린 이런 계획이 유럽 전역에 ‘빅 브러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문 데이터베이스 작업은 내년 말 완성을 목표로 추진되며, 민감한 정보는 미국 사법당국 등 제3국과 공유할 수도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올해 초 전 국민의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 방안을 발표하는 등 정보 통합·공유에 앞장서온 영국 정부는 경찰 당국이 갖고 있는 모든 지문 자료를 EU에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뿐 아니라 단순 혐의자나 기소없이 석방된 사람들의 지문 정보가 포함돼 있다. 영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내무부가 속도위반 및 쓰레기 투기 사범에게까지도 지문을 채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신문은 보도했다. 피란코 프라티니 EU법무담당 집행위원 대변인은 EU의 지문 데이터베이스 계획이 “9·11테러 사건 이후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조직과 테러리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며 “필수불가결하지는 않을지라도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럽통합 찬성자와 반대자 양쪽 모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회의론자들은 전체주의국가의 행태라며 비난을 퍼붓는 반면 통합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들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위협을 문제삼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의 바로네스 러드포드 자유민주당 의원은 “유럽의 ‘빅 브러더’가 날뛰고 있다.”면서 “우리 의원들도 범죄와 테러에 맞서 싸우기를 바라지만 개인의 사생활도 반드시 보호돼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Book Review] 레비는 왜 화학자 아닌 증언자였나

    “…,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객차 안에서는 남녀노소가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無)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 이번엔 그 객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는 점만 달랐다.…, 나와 같은 객차에 탔던 45명 중 다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네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객차가 가장 운이 좋은 경우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이 예고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행 객차의 풍경은 이랬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역저 두권이 동시에 출간됐다.‘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기록으로 증언했다.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등과 함께 나치즘과 유대인 학살의 진실을 전하는 증언문학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이것이 인간인가’. 극한의 폭력에 노출된 인간의 존엄성과 타락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프리모 레비는 2차 세계대전 말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로 이송당했다.‘이것이 인간인가’는 그가 체험한 10개월간의 수용소 기록이다. 제3수용소는 화학공장과 붙어 있는 강제노역 수용소였다. 화학박사였던 그는 건강한 체력과 몇번의 행운으로 극소수의 생존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레비는 1945년 힘겨운 여정 끝에 고향인 토리노로 돌아와 수용소 시절 비밀리에 기록한 메모들을 토대로 ‘이것이 인간인가’의 집필에 들어갔다. 47년 첫 출간 때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7년 재출간되면서 문제작으로 떠올라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8개 국어로 번역됐고,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레비는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히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곳, 독일 연구실에서, 추위와 전쟁속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며 이 책의 초고였던 ‘메모’를 작성하게 된 까닭을 밝혔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의 독일인에 대한 증오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너무나 차갑게 실상만 전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계 독일인 한나 아렌트가 미국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저술하면서 파시즘 등 전체주의의 재등장 가능성을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로 레비도 “파시즘은 죽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아우슈비츠의 증인’ 레비는 87년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 끝까지 세상에 물음을 던져줬다. 1975년에 저술한 ‘주기율표’는 화학자인 레비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열정이 엿보이는 독특한 구성의 회고록이다. 아르곤부터 탄소까지 주기율표상의 원소들을 설명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와 연관된 자신의 삶, 조상의 연원 등을 재미있게 회고한다. 유년 시절의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 역사적·윤리적 성찰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철’이라는 장에서 레비는 청춘시절 자신에게 화학이나 물리학이 ‘파시즘의 해독제’였다고 말한다.21장으로 구성된 ‘주기율표’는 대중적으로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340쪽 1만 2000원,‘주기율표’ 383쪽 1만 4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Book Review] 히틀러·스탈린 광기 사라지지 않았다

    올해는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1906∼1975)가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이다. 지난 10월 국내에서는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리는 등 아렌트 사상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홀로코스트 등 ‘이해할 수 없는 절대 악(惡)’을 경험한 유대인 사상가로서 아렌트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전체주의 해부에 보냈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에서 시작된다. 하버마스가 아렌트의 지적 계보를 잇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아렌트는 수십년간 ‘국외자’였다. 아렌트 사상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말∼90년대초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한다.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뀜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이론가로서 아렌트의 존재가 부각된 것이다. 아렌트는 이미 전체주의 정권의 만행을 가져온 ‘옛 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로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제시했던 터였다. 아렌트 사상은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이데거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아렌트의 첫 저서로서 아렌트를 정치사상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펴냄, 이진우·박미애 옮김)이 출간됐다. 이 책은 1951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난 아렌트는 동프로이센의 수도이자 ‘칸트의 고장’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다.1929년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아렌트는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함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자 33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상황이 악화되자 41년 다시 미국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다. 미국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1부 반유대주의,2부 제국주의,3부 전체주의로 구성돼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반유대주의,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전체주의에서 그는 전체주의를 다른 독재정치와 구분,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만이 전체주의적 성격을 온전히 드러낸 정치체제라고 역설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 체제가 언제든 재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또 계급사회의 붕괴로 인한 대중의 등장을 전체주의의 실질적 배경으로 파악했다. 전체주의 정권은 인간 개개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각각의 개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때 국민은 하나의 집단에 불과해진다. 나치즘의 광기도 여기서 시작되는 셈이다. 이와 관련,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실행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아이히만은 나치즘의 명령을 수행한 소시민에 불과하다.”며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설파한다. 전체주의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재등장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자유’를 수호해야 하며, 이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덕목을 주지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결론을 맺는다.1권 2만 5000원,2권 2만 2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문화마당] ‘영향력’있는 허구속 인물들/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과 교수

    최근 미국에서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허구속 인물의 순위가 발표된 책이 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책의 제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101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신화와 전설과 TV와 영화의 인물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역사의 진로를 설정했는가?”라는 거창한 부제가 달려 있다. 서구 문화권을 중심으로 선정된 것이어서 더러는 처음 듣는 이름들도 있으나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름들이 이 리스트의 상위를 차지했다. 전직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과학 기술 저술가인 저자들은 각각의 리스트에 선정이유를 밝히는 짧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는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 그리고 영향이 얼마나 깊었는가가 선정 기준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상 인물 리스트에서 1위의 영광은 미국의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의 말보로 담배 광고에 등장하는 말보로 맨이 차지했다. 수상 이유는 전세계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암으로 사망하게 한, 지난 200여 년간 가장 악명 높은 살인자라는 것이다.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채 담배를 물고 거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 사나이 중의 사나이의 모습에서 이상적 남성의 전형을 찾은 많은 남자들이 그 대가로 일찍 이 세상을 하직했다.2위를 차지한 빅 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정치적 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선정이유는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정치체제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의 중심, 미국과 빅 브라더의 친연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풍자이다. 오늘의 미국 사회가 시장 전체주의의 징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 풍자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로 들린다. 그것은 이 책이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의 호사가적 관심을 넘어서 어떤 종류의 문명비판을 지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산타 클로스는 매년 4·4분기 미국 경제를 지배한 공로로 4위에 올랐고, 인형 바비(43위)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미의 기준을 세운 죄로,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55위)는 아름다움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속성으로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99%에게 모욕을 준 죄로, 신데렐라(26위)는 이혼이 보편화된 시대에 계모들을 멸시하고 사람들을 마법에 의존하게 만든 죄로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가 현실을 모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이 이야기를 모방한다. 이야기가 먼저 있고 현실은 그것을 모델로 구성된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틀을 통해서만 현실을 보고 알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정신 분석학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어떤 충동과 욕망과 에너지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물적 존재를 정치적·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닮고 싶고, 그것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자아 이상이라고 불렀다. 이 자아 이상과 닮아 가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다.‘나’는 수많은 자아 이상들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이 자아 이상을 만났을 때 환호에 차서 소리친다.“저것이 바로 나구나.”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 하나의 축복이다. 따라서 이야기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은 우리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상징적 자원이다. 말보로 맨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죽어가게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목숨을 걸고 담배를 피우게 만든 말보로 맨의 그 흡인력을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는 멋있고 재미있는 인물들이 살고 있다. 다시 한 번 삶을 긍정해 본다. 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과 교수
  • [송두율칼럼] 부동산 자본주의를 넘어

    [송두율칼럼] 부동산 자본주의를 넘어

    부동산 대란이 북핵문제보다 더 무섭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한국적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일종의 자연법칙처럼 시장의 법칙이 경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보편성이다. 그러나 역사·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라 이러한 보편성도 일정한 제약을 갖게 마련이며 이에 따른 유형별 특징도 드러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알베르(M Albert)는 우선 ‘영미’ 자본주의와 ‘라인강’ 자본주의를 구별한다.‘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후자의 자본주의와 달리 전자는 보다 더 개인주의에 기초한 시장철학을 신봉한다고 두 유형의 차이를 그는 풀이한다. 이 두 유형의 자본주의가 모두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이른 바 ‘아시아적’ 자본주의 또는 ‘유교’ 자본주의로 불린, 또 하나의 다른 자본주의 유형에 대한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세 가지 유형의 자본주의는 나름대로 각각 강점과 약점을 지녔으며 그에 따른 부침을 최근까지도 보여주었다.IT산업을 주축으로 세계경제의 주동력이었던 미국경제도 주식시장의 거품이 걷히면서 어려움에 봉착했고, 재원의 고갈로 인해 유럽형의 복지사회도 위기를 맞고 있다. 아시아의 자본주의도 역시 90년대 중반부터 심한 위기에 빠졌다. 이제 ‘세계화’는 어떤 유형의 자본주의도 비켜갈 수 없는 새로운 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얼마전 스웨덴 총선에서 보수연합이 승리하자 일부 국내언론이 이를 시장보다 국가를, 성장보다 분배에 중점을 둔 복지정책의 실패라고 아전인수격으로, 사회적 맥락도 무시한 해석과 주장을 폈다. 이는 새로운 과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 단순히 경제영역에 제한되어 있지 않은, 총체적인 삶과 사고도 지배하려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도전을 맞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나 그렇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국경을 넘나드는 역동적인 자본의 재생산과정이 국가나 시민사회의 통제영역 밖에서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가 갈수록 무력화되는 데 있다. 이윤극대화 자체가 목적이 된, 한계를 모르는 자본과 권력의 축적과정은 일찍이 하나 아렌트(H.Arendt)가 분석한 전체주의의 전개과정과도 흡사하다. 즉 개별적 이해관계나 전통과 문화적 특징으로부터 분출하는 저항들은 획일화하는 정치적 강제력에 의해서도 억압되지만 시장의 연옥(煉獄) 속에서도 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영역에서 보다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대량소비 문화는 지적인, 그리고 비판적 안목을 키울 수 있는 일종의 ‘고급문화’를 추방하고 있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본성적인 거부감보다 삶의 영역에서 자유스러운 기획을 애초부터 파괴하는 자본의 본성에 더 기인한다.‘산업자본주의’를 뒤이을 ‘문화자본주의’의 도래를 예견한 리프킨(J Rifkin)도 문화자본주의의 중요한 전제조건인 사회구성원의 감정이입 문제나 신뢰성과 같은 개인의 예민한 정서 자체도 시장과 상업성으로 인해 곧 바로 분해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문화자본주의의 단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동산이 개인이나 가정의 삶의 공간확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재테크의 수단이 되다 보니 시장의 연옥도 이제 어찌 못하는 ‘부동산 자본주의’ 앞에서 온 세계가 주목하는 북핵문제도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그저 ‘안보불감증’이라고 지탄하기 전에 한국 자본주의의 현주소와 미래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독일통일이후 구 동독지방에서 일확천금을 기대하고 부동산사업에 뛰어 들었던 주위의 독일인들이 많이 도산했다. 부동산값이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밀려들었던 일본의 부동산자금이 거품이 빠지면서 그 곳에 남기고 간 앙상한 건물도 많이 있다. 온 국민을 하나같이 신들리게 만드는 위력을 지닌, 흡사 전체주의적 모습조차 보이는 ‘부동산 자본주의’를 대신할 ‘인간적인 모습을 한 자본주의’의 길에 대해서 진지한 생각을 나눌 때다.
  • [씨줄날줄] 국가 제창/황진선 논설위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다. 당시 초·중·고교를 다닌 학생들에겐 이를 외우기 전에는 집에 못가게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땐 몰랐는데 요즘 읽어보니 전체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이 되어서야 황국신민교육을 위해 만든 일제의 ‘교육칙서’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행정기관·학교·기업·단체에서 공식행사를 할 때는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순으로 국민의례를 거행한다.‘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신정권이 탄생한 1972년부터 전국 학교에서 시행해오다 1980년 지금과 같이 국기에 대한 경례 때 함께 낭송하는 형태로 정착됐다.1984년엔 대통령령인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으로 법제화됐다. 국민의례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달에는 경기도 부천시 S고교의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편향적 가치관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2004년에는 종교 때문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수 없다는 학생에 대해 고교 입학을 불허해 논란이 일었다. 최근엔 경례보다 맹세에 반감을 표현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유신정권의 유물로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법률로 격상하되, 애국심과 국기에 대한 존경을 포함하고 개인의 양심과 신념에 따른 행동도 함께 보장토록 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엊그제 도쿄 지방법원이 학교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국기를 향해 일어서게 하고, 국가인 기미가요 제창을 강요하는 것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우리나라에선 우경화와 군국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일본 사회에 양심의 목소리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국민의례에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소수다.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4) 자연적 사실주의의 인식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4) 자연적 사실주의의 인식

    지난주에 인격적 정신주의에 대한 철학적 문제점이 논의되었다. 그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인격적 정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주재한다면, 세상은 그 인격이 쓴 책과 같다. 그런 경우 세상의 그 숱한 역사적 무의미와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 인격적 정신이 절대적이라면, 그 정신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부가 분열되지 않는 절대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정신의 인간적 주체인 의식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지난번 글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인격적 정신주의에 대하여 자연적 사실주의는 세상을 책으로 보지 않는다. 해체철학자 데리다는 세상을 책이 아닌 ‘텍스트’(text)라고 규명했다. 여기서 ‘텍스트’는 흔히 말하는 교재의 뜻이 아니다.‘텍스트’는 직물(textile)과 같은 어원을 가진 것으로 단지 책과 대비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인 ‘표지학(문자학)’에서 유명한 명제를 던진다.“텍스트 바깥은 없다.” 저 구절은 이 세상이 온통 가로 세로 실이 엮어지면서 천짜기(텍스트)를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차연(差延=differance)의 법칙만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차연의 의미를 몇 차례(14·26·27·30회 글) 설명했으므로 여기서 더 설명하지 않겠다. 간단히 예시하자면, 부부로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르지만 제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남편 속에 아내의 흔적이 연기 또는 연장되어 있고, 그 역도 그러하다고 보는 것이 차연적 세상보기다. 세상이 다 그런 상관관계로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사가 일방적으로만 결정되지 않고 다 작용과 반작용이 함께 왕래하므로 일방은 100% 옳고, 타방은 100% 그르다고 흑백으로 결판내릴 수 없는 셈이다. 그리고 세상에 순수와 비(非)순수가 선명하게 쪼개지지도 않는다. 순수와 비순수는 서로 연기법처럼 얽혀 있어서 순수와 비순수가 노자가 말한 화광동진(和光同塵=빛과 먼지가 서로 뒤엉켜 있음)처럼 뒤엉켜 있다. 인격적 정신주의는 말과 소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문자를 천시한다고 지난번 지적됐다. 말과 소리는 신과 영혼의 내면적 일치를 표현하는 인격적 정신의 영역인데, 문자는 외적 정보만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적 사실주의는 문자(writing)나 표지(mark)를 말소리(speech & voice)보다 더 진리의 본질에 적합하다고 여긴다. 말소리는 단가적이다. 내가 진실을 말하든지, 거짓을 말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문자나 표지는 두 가지를 동시에 알린다. 즉 문자와 표지는 차연과 천짜기처럼 이중적이다. 종이 위에 내가 줄을 그으면, 거기에 대뜸 차이가 나누어진다. 하나의 종이에 두 공간이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원효대사가 자주 쓰던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두 공간이 중간의 선으로 말미암아 생겼지만, 그 두 공간은 서로 상대방이 있기에 자기가 성립하는 그런 차연의 상관성과 같다. 도장의 양각과 음각도 이중적 현상이지만, 그 두 개가 완연히 이원론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긴 줄과 짧은 줄도 서로 상관적이므로 한 사실의 이중성이다. 일방이 없으면 타방도 생기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인간들의 자기중심적 이기심 때문에 자기 것만 보려고 하지만, 자연의 사실은 늘 이처럼 이중성을 동시에 머금고 있다. 상생과 상극은 자연의 생명세계에서 이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상생현상을 보면 상극현상이 뒤에 숨어 있기에 비동시적이나, 상생은 상극과 늘 함께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죽음을 초래하는 상극은 늘 삶의 생기를 촉진하는 상생을 가능케 한다. 삶과 죽음이 비동시적이지만, 동시적으로 상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적 사실이다. 자연적 사실은 문자(writing=이것을 ‘글쓰기’로 잘못 생각하는 학계의 풍조가 있음)나 표지처럼 같음(同)과 다름(異)이 서로 의지해서 동시에 이루어지는(32회 글) 의타기적(依他起的=다른 것에 의거해서 생김)인 차연적 사실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 문자를 또 ‘글자’(letter)와 같은 의미로 좁게 읽어서도 안 된다. 씌어진 모든 흔적과 표지를 데리다가 문자나 문자학(표지학=grammatology)으로 사용하고 있다. 말소리 대신에 문자나 표지가 해체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주의 자연적 사실을 상징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보통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만을 연상한다. 객관적 사실이외에 자연적 사실이 있다.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위적 사실’(arte-fact)과 자연적 사실(fact)을 구분했다. 전자는 어떤 데이터를 얻기 위하여 제한된 시공의 범위 안에서 일어난 일과 행위의 결과를 제3자적 입장에서 검토해 보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사건을 인위적으로 제한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사건을 일체 세상사와의 연관 구조 아래서 함께 읽는 태도를 말한다. 예컨대 교통사고를 조사하는 경찰관은 제한된 시공 안에서만 일어난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동을 가리고 교통법의 위반여부를 조사한다. 이것이 인위적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은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한 모든 직간접적인 원인들, 즉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제반사항 등의 연관관계를 다 보는 사고방식이다. 자연적 사실은 사법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기 위한 행정적 조치로써는 전혀 쓸모가 없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다 얽혀 있다는 일체 연관의 사유방식으로는 세상사를 판단할 수 없다. 세상사의 일체 연관구조는 자연적 사실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서, 예컨대 남미의 자연적 사실이 남미의 것으로 제한되지 않고 전 지구적 차원의 충격으로 다가오고, 이것이 또 다른 행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과 같다. 사법적 판결은 시비고리의 문제를 푸는 제한적이고 인위적 제도지만, 그런 판단의 진리가 전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길이 아님을 자연적 사실주의가 말하려 한다. 사법적 판결은 인격적 독립성의 실체를 인정하는 가설에서 출발한 제도다. 저 제도가 인격적 정신주의의 문명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 동안 인격적 정신주의 철학은 판단으로 진리가 구성된다고 주장해 왔다. 전통적 서양철학의 진리론은 곧 판단론이었다. 이것은 동양의 주자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도덕판단을 통해서 선악 시비를 가리고, 악의 교정을 도덕의지가 수행해야 한다고 서양의 도덕철학과 주자학은 다 역설해 왔다. 모든 판단적 진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한 사유에서 파생됐다. 진리의 절대성은 절대적 선과 호환되므로 진리와 선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사유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판단에 의지해서 불순한 사회악을 도려내야 한다. 철학적 판단론은 외과적 수술론과 같다. 정사(正邪)와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한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의 절대성이 없으면, 판단이 의지해야 할 권위가 사라진다. 순수성(절대성, 불변성)은 판단적 진리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주의는 그런 순수성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20세기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가 정신의 순수성을 찾으러 모든 철학적 노력을 경주했다. 그가 순수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하면 할수록, 원초적 순수가 있기는 커녕 모든 것은 다른 것들에 의하여 이미 매개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라는 의식은 너라는 것이 있기에 생겼고, 나(I)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는 커녕 나자신(myself)과 어떤 간격을 늘 운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차이에 불과함을 시인 발레리는 깨달았다. 순수가 허상이고 낭만적 환상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자연적 사실주의는 절대주의가 철학적 신화라는 것을 폭로한다.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는 국가전체와 사회공동체를 각각 다 대표하는 불변의 유일한 진리로서의 절대선이 있다고 믿는 점에서, 이들 사상은 순수주의적 절대주의의 신화에 현혹된 허상이라고 자연적 사실주의는 생각한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절대주의를 다소 부드럽게 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상대주의이므로 유일 절대주의의 허상을 떨쳐버린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상대주의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기실 다양한 개인적 절대주의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경연장에서 승리자가 되기를 갈망하므로, 나를 절대시하는 자아성의 철학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말소리와 달리 문자표지가 세상을 동시적 이중성으로 보게 하듯이, 세상은 노자가 말한 바처럼 ‘화광동진’이다. 세상은 늘 명/암(明/暗), 정/염(淨/染), 선/악(善/惡), 약/독(藥/毒) 등이 직물처럼 한 쌍으로 짜여져 있다. 이것은 흔히 쉽게 생각하듯이 암/염/악/독(暗/染/惡/毒) 등의 국면을 어쩔 수 없이 용인하자는 패배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세상이 진리의지와 선의지의 판단으로 정화될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깨끗한 빛은 더러운 먼지가 있음으로 반사되어 빛난다. 세상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선택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젠 체하거나 오만하지 않고 일체 자연의 사실처럼 사실의 이중성을 다 수용하고, 그러면서 그 이중적 가치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지 않고 초탈하면, 세상은 이미 그리고 늘 공평무사하게 있어왔다는 것이다. 밝음에 집착하는 이는 밝음을 좋아해도 자기를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되고, 깨끗함에 집착하는 이는 그 깨끗함으로 인하여 고고한 귀족주의에 젖게 되고, 선에 집착하는 이는 그 선을 감당하지 못해 위선이 되고, 약에 집착하는 이는 그 약으로 죽는다. 그래서 자연적 사실주의는 가치의 양가성을 수용하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일체개공(一切皆空=모든 것이 다 공임)의 진리를 터득한다. 데리다가 그의 저서 ‘산종’(散種)에서 세상이란 텍스트(직물)가 ‘파르마콘’(pharmkon=약이 곧 독)의 사실이라고 밝히면서, 또한 그 ‘파르마콘’이 ‘코라’(khora=빈 공간)를 자궁으로 해서 태어난 일란성 쌍생아처럼 언급한 것은 세상을 ‘파르마콘’의 이중적 존재와 ‘코라’의 공(空)사상으로 읽기를 종용하는 것이겠다. 공은 절대주의적 진리의 해체를 뜻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토요일 아침에] 지도자는 길 안내자일 뿐/현고 스님 조계종 전총무원장 대행

    지난 1일 속초항을 출발해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비록 공해지만 북한 앞바다를 지나 삼국의 역사가 교차한 연해주를 밟은 심정은 미묘했다. 연해주는 한민족의 치열한 삶의 역사가 깃든 땅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서부터 구한말 안중근 의사와 이상설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으로서도 수천㎞가 접경돼 있고, 전조(청나라)의 국토였던 땅이다. 그럼에도 베이징조약(1860년) 이후 자신들이 써온 역사를 들추는 것은 물론 자유로운 왕래마저 감시받는 억울한 땅이기도 하다. 우리 세계청년봉사단(Copion) 임원진이 연해주를 방문한 것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의 연해주 귀환과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로 내몰린 고려인들이 3대에 걸쳐 피와 땀으로 개척하고 정착한 땅을 뒤로 하고 다시 연해주로 되돌아온다는 소식에, 그들이 대체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서구화에 짓눌린 우리의 원형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고려인들의 귀환 발길은 더뎠고 정착노력도 활발하지 못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표본이라 할 전체주의 공산국가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이 10여년의 짧은 자본주의 경험을 통해 이미 민족사상보다는 개인, 가치보다는 돈을 중시하며, 개인의 행복을 위해 치열한 선택을 하는 것을 봤다.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게 한 70년의 세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0여년의 짧은 자본주의 경험이 벌써 그렇게 변화시켰다니….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민족이라는 깃발 아래 눈물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는 식민시대의 헌신적인 민족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추상하고 미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성직자인 나 자신의 내부에도 민족주의에 대한 동경이 숨쉬고 있어 개인의 안전과 행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국가주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연장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도발과 항전을 정당화하는 집단의식이 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분쟁을 장기화시켜 수많은 동족이 살상되는데도 멈추지 못하게 되는 동일한 의식구조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출가 35년을 다하도록 내 안에 아직 씻지 못한 극단과 전제의 무서운 업을 느꼈다. ‘나와 우리는 모든 국민 자신이 잘 조어(調御)되는 자기 확립과 자기 형성의 길을 갈 때 궁극의 자유와 안정이 있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내 안에서 자유와 안정을 찾는 데 가일층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가장 불교적인 국가 형태가 모든 사람이 말 그대로 평등해 계급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통솔되는 자도 없고, 대통령과 지도자마저 그 속의 한 일원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고 할 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전체 속의 개인보다 개인을 위한 전체를 이룩해가는 조화로운 노력을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민족과 개인의 행복, 전체와 개인의 행복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조정돼야 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뒤척거리다 텔레비전을 통해 들려온 대통령의 8·15 경축사 “민주주의 원리와 핵심은 상대주의와 관용입니다.”라는 언급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상대주의의 근원은 불교의 연기관이며, 존재에 대한 연기적 사고만이 대통령이 짧은 경축 연설문에서 12번이나 언급한 ‘평화’를 담보할 근본사상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역할을 정리한다. 이를 본받아 우리 지도자도 구제자(메시아)라고 말하지 말고, 모든 국민의 ‘좋은 벗(善友)’이 되고 대통령이 좋은 길 안내자가 되는 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날개를 접고, 절대주의자의 극단적 선택은 발 붙일 곳을 잃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다. 현고 스님 조계종 전총무원장 대행
  • [Book Review] 표현 자유의 역사/로버트 하그리브스 지음

    고대 로마시대에 주피터 신전의 계단 꼭대기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외친 사람은 바로 체포돼 사자밥이 되었다. 그로부터 1500년 후 같은 장소에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사람 역시 체포돼 화형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 시대의 이단은 종종 다음시대에는 폭압적인 정통성으로 둔갑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 시대로부터 2500년이 흐르는 동안 서구사회는 사실 관용보다는 권위와 억압 쪽에 더 가까웠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구 역사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역사, 바꿔 말하면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표현 자유의 역사’(로버트 하그리브스 지음, 오승훈 옮김, 시아출판사 펴냄)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인터넷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2500년 역사를 거슬러 ‘말할 자유’의 족적을 짚어본 책이다. 이 책의 원제 ‘첫번째 자유(The First Freedom)’는 표현의 자유가 곧 다른 모든 기본권의 전제조건임을 말해준다. 영국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한 저자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시대조류에 맞선 자유인들의 치열한 삶의 여정을 생동감 있게 엮어내고 있다. 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어떠한 법 조항도 인용되지 않았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오로지 그의 가르침과 믿음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 이 재판은 소크라테스의 언론 자유의 권리에 대한 시험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언론자유에 관한 한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 이가 영국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존 윌크스이다. 그는 1762년 런던에서 ‘노스 브리튼’이란 신문을 창간하고, 창간호 첫 줄에 ‘출판의 자유는 영국인에게 생득권(生得權)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자유의 가장 견고한 보루로 간주된다.”고 선언한다. 이후 그는 국왕을 모욕했다는 글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오랜 법적투쟁을 벌이는 등 권력자들에 대한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같은 그의 삶은 그 자체가 말할 자유의 질곡을 써내려간 ‘육필원고’로 후세에 전한다. 18세기 중후반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떠돌았던 토머스 페인은 ‘언론 자유를 위한 순교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774년 영국에서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그는 식민지의 독립 선언을 요구한 소책자 ‘상식’을 펴내 미국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혁명 즈음 영국에 돌아온 그는 전제정치와 귀족정치를 비판한 ‘인간의 권리’란 책을 내 법정에서 법익피박탈자 선고를 받았다. 때문에 프랑스에 망명했으나 기독교를 비판한 책 ‘이성의 시대’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그는 독립된 미국에서조차도 ‘건국의 아버지’ 신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책은 이밖에도 로마시대 성인과 순교자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재판 법정에 선 갈릴레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등 종교와 출판,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할말을 다하기 위해 싸웠던’ 인물들의 삶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적 민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보급된 오늘날엔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보호되고 있을까? 저자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9·11과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 현대 시민사회가 지닌 가치가 얼마나 쉽게 야만성에 의해 뒤집어질 수 있는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세뇌나 강요를 통해 반대자들을 배제하려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용납되어선 안되며,‘반대할 자유’는 어떠한 법에 의해서도 제한되어선 안된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2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민국 대한민국/진경호 논설위원

    수백만명이 쏟아져 나온 월드컵 거리응원에 놀란 집단이 둘이다. 세계가 그 하나고, 하나는 우리 자신이다.‘이게 우리였나?’하며 놀라고,‘이게 우리다.’라며 어깨를 폈다. 수백만명이 일제히 외친 ‘대∼한민국’에 담긴 자화상, 즉 시대의 코드를 찾아내려는 사회학자와 문화평론가들의 담론도 쏟아졌다. 대략 ▲신(新)애국주의 ▲열린민족주의 ▲광기적 파시즘 ▲단순한 재미 추구 등 넷으로 정리된다.‘카니발 민족주의’‘오렌지 민족주의’라는 융합적 개념도 있기는 하다. ‘신애국주의’로 해석하는 쪽에선 거리응원을 ‘젊은이들의 잠재된 애국심의 폭발’로 본다. 한국민의 잠재력, 공동체 의식, 국가발전, 자랑스러운 조국 등의 키워드가 논거를 형성하는 데 주로 동원된다. 대개 보수진영의 시각이다. 반면 ‘열린민족주의’는 거리응원을 저항의 산물로 본다. 분단과 독재 등 불행한 역사를 털어내는 ‘씻김굿’이고, 자연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접목된다는 시각이다.‘광기적 파시즘’으로 보는 쪽은 두 해석을 비웃는다. 그저 권력과 자본이 만들어낸 집단 히스테리(박노자)라는 것이다. 한 인권단체는 “붉은악마 현상은 파시즘을 가능케 하는 병적 현상”이라고까지 비난했다. 마지막 담론은 민족주의나 전체주의의 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한다. 그저 한바탕 신나게 놀자는 축제일 뿐, 애당초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엊그제 나온 한·중·일 세 나라 청소년 의식조사 결과가 화제다. 일본 청소년의 41%가 ‘전쟁이 나면 앞장서 싸우겠다.’고 한 반면 우리는 10%에 그쳤다고 한다. 태극기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애국가를 록 버전으로 불러제친 청소년의 상당수가 전쟁이 나면 피하고 보겠다고 답한 것이다. 거리응원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미화하고 찬양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격이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거리를 다시금 꼼꼼히 살펴야 한다. 서울시청 앞을 메운 ‘거리의 애국심’에 감격하거나 ‘아이들 애국심이 없어서 큰 일’이라고 개탄하는 자세로는 답을 찾기 어렵다.‘국가가 뭘 해 줄 건가’부터 찾는 아이들이 국가를 위한 일을 찾도록 하자면 기성세대의 코드가 더 복잡해져야 할 듯하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2)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2)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

    우리는 오랫동안 ‘같다는 것’(同)과 ‘다르다는 것’(異)이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사회생활을 해 왔다. 이런 생각은 아주 긴 세월동안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같다는 것(同)은 다르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反-異)이 아니고,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非-異)이고, 다르다는 것(異)도 같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反-同)이 아니고, 같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非-同)이다. 이 말은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대립적 사이로 읽지 말고, 상관적 사이로 읽어야 함을 말한다. 같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적대적 대립의 관계로 읽는 논리는 내가 이 글을 통하여 줄곧 비판해 왔던 택일적 사유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택일적 사유는 분별력을 귀하게 여겨온 지성의 논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과거의 철학사상에서 지성보다 더 고귀한 가치로 취급받은 개념이 없었다. 대학을 ‘지성의 전당’으로 명명했던 종래의 사고방식이 지성에 최고의 예우를 우리가 전통적으로 바쳐 왔다는 증거가 아닌가? 지성의 논리는 택일적 판단에서 빛난다. 택일적 판단은 늘 정/오와 선/악의 대결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그 대결이 자의적인 개인적 심리에 기인한 호/오 대결이 아님을 과시하기 위하여, 전통적 지성의 논리는 그 대결을 보편적 논리에 의거한 정/오 대결인 양 호도해 왔었다. 그래서 심리적 호/오 대결은 비이성적 감정적 대결이라 폄하하고, 논리적 정/오 대결은 이성적이고 품격이 높은 지성의 대결이라고 사람들은 착각해 왔다. 서양철학은 이런 지성적 판단의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개인의식이 아닌 ‘의식일반’(consciousness in general)인 보편의식을 논리적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의식일반은 개인의식의 심리적 호오 판단을 아주 희석시키기 위한 먼 우회의 전략을 수행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의식일반도 심리적 호오 판단을 아주 깊숙이 무의식에 감춘 논리적 명분이라는 것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이 그의 저작 ‘심리학적 유형론’에서 이미 통찰했듯이, 논리적 정/오 판단의 가장 깊은 저변에 심리적 호/오 판단이 숨어 있다 하겠다. 심리적 호/오이든, 논리적 정/오이든, 거기에는 자기동일성(self-identity)에 대한 강한 애착이 숨어 있다. 자기 것에 대한 감정적 동일성이든 이성적 동일성이든, 자기동일성은 다른 것과 대립된 자기 것이 실재한다는 착각에 근거해 있다. 자기동일성이 자기중심주의를 낳는다. 이 자기중심의 논리는 타자중심의 논리와 반드시 대결한다. 소유론적 사회생활은 마르셀이 잘 통찰하였듯이(29회 글), 자기중심주의(heauto-centrism)와 타자중심주의(hetero-centrism)를 동시에 생산한다. 이 자/타의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같음과 다름의 대립적 사이는 꼭 경제적 물질적 이해관계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종교적, 정치이념적 차이가 대립을 자아내는 경우도 많다. 정신적 대립이 경제적 대립보다 더 극렬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단순한 물질적 대립은 이해관계 당사자들 사이에 타협의 길을 찾게 하지만, 정신적 이념적 대립은 타협의 길을 거의 배제하는 자가성(自家性) 충족률로 채워지기 쉽다. 이런 충족률이 역사상 잔혹한 종교전쟁과 정치이념전쟁을 초래했다. 특히 종교전쟁은 늘 절대적 진리의 이름으로 싸운다. 이 말은 정신적 이념의 동일성이 자기와 다름을 상관적 차이로 보지 않고, 적대적 차이로서 여기는 공격성을 더 강하게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위험성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오는 것보다 더 정신적 이념들이 나라를 산산이 파편화시켜 가는 데 있다 하겠다. 소유는 물질적인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정신적 소유론이 더 위험하다. 정신적 소유론은 형이상학적이고 이념적이어서 소유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신적 소유론은 자가성의 사회적 지배를 위하여 같음과 다름을 적대적 차이로서 생각하도록 만인을 선동한다. 여기서 사회적 여론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사실상 여론은 철학적으로 사유하기가 단순치 않다. 자연에는 자연적 필연성이 있듯이, 사회에도 그 사회가 어겨서는 안 되는 규범이 있다. 이미 내가 앞 글(19회)에서 그 규범을 여론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론이 곧 사회적 진리 자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진리는 여론으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곳에 외롭게 실존할 수 있다. 특히 여론이 일진광풍(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나치즘, 페로니즘)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때, 진리와 여론과의 괴리현상이 생긴다. 그러나 사회적 진리가 여론과는 다른 곳에 존재하더라도, 사회적 진리는 결코 여론을 등지고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리는 만인이 싫어하는 바를 거슬러서 결코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론이 진리 자체는 아니지만, 진리가 여론의 틀을 떠나서 현실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론이 완전지배나 점유를 위한 열광의식(fanaticism)으로 미쳐 있을 때에, 그 여론은 약성보다 독성을 더 강하게 분비한다고 생각한다. 열광적 소유의식으로서의 의견들은 자기와 다른 것을 적대감으로 대한다. 이것은 정치적 견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이런 정치투쟁과 신앙행위를 용기있는 신념으로 존중해 왔다. 다행히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의 도입으로 열광적 정치투쟁과 의견이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고 반대방향의 의견 개진도 가능하게끔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가 자기중심주의와 타자중심주의와의 상충적 소유론을 다 허용한 점에서, 그것은 대립적 내지 적대적 차이론의 상대화를 이끈 소유론적 제도이지, 같음과 다름을 상관적 차이로 엮어주는 존재론적 사유를 구체화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종교적 세력확장의 문제에서 자가성의 절대주의가 대단히 심각하다. 초월적 절대자를 믿는 종교에서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사고가 급한 곡선을 긋고 상승한다. 그 절대자는 사랑인데, 다른 종교를 배척하며 신도수를 확장하고 점유하려는 열광의식과 그 사랑과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신도수의 확장점유는 정치적으로 다수의 지지를 양적으로 얻으려는 정치투쟁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같은 것과 다른 것, 동일성(同一性)과 이타성(異他性)이 대립적 차이가 아니고, 상관적 차이로 엮어지는 그런 존재론적 사유를 구체화할 수 있을까? 이것은 꿈꾸는 또 하나의 공상적 낭만주의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나는 앞 글(2회)에서 세상을 헌집 수리하듯이 고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세상을 보는 만인의 마음이 그리는 사이버(cyber) 시공간이므로 마음을 소유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하지 않으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적, 종교적 소견을 소유론에서 존재론으로 어떻게 바꾸나? 나는 여기서 가톨릭 철학자 마르셀이 그의 저작 ‘존재의 신비’(II)에서 한 사유를 도입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적, 종교적 소견이 소유론적인 마음에서 발동하는 것일수록, 그 소견은 남들 앞에서 선전하듯이 이 생각은 국민의 생각이나 민족의 생각이나 민중의 생각, 또는 어떤 절대자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pretending)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적어도 남들 앞에서 자기 믿음의 ‘확신’(conviction)을 전파하여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자들을 ‘국민’,‘민족’,‘민중’이나 또는 ‘절대자’의 이름으로 소유하려는 ‘열광적 추상의 정신’(the spirit of fanatic abstraction,19회 글)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정치적 종교적 확신은 이미 그가 소유하고 있는 소견을 개진하여 자기 소견과 다른 소견을 확실히 적대적으로 구분하여 문을 빗장으로 잠가버린 ‘판결선고’나 ‘내적 철책’을 치는 것에 비유된다. 아무리 민족적, 정치적, 종교적 통일을 주장해도 그 주장은 겉으로 떠드는 명분이고, 속으로는 다름을 완전히 거세시켜 버린 자기들만의 끼리끼리 잔치에 불과하다. 독재를 싫어한다는 독선주의보다 더 무서운 소유주의는 없다. 결국 소유론에서 존재론적 사회를 일구는 길은 마음을 존재론적으로 전향시키는 길밖에 없겠다. 그러기 위하여 정치도 종교도 다 소유론의 수압에서 잠자는 인간본성을 일깨워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미래의 종교는 신자수의 양적 확대를 겨냥하기보다 종교건물의 벽을 넘어 오히려 인간본성의 자각을 도와주는 것으로 집약돼야겠다.(6회 글) 어떤 이가 무슨 종교신자라는 것은 전혀 부차적이다. 무종교의 종교가 최적의 종교겠다.20세기 가톨릭 성녀 테레사는 일생을 인도에서 빈자들의 간호사로 생애를 바쳤는데, 그녀는 단 한 번도 힌두교 빈자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선교하지 않았다 한다. 성녀 테레사, 그녀는 존재론적 사유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기 종교를 소유물 자랑하듯 타인들에게 선전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존재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같음과 다름은 단지 상관적 차이에 불과했으리라. 이 점에서 그녀의 사유는 중국 화엄학의 3대 조사인 법장이 그의 ‘화엄경의해백문(華嚴經義海百門)’에서 ‘지금 자타(自他)라고 말하지만, 별도로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곧 타자의 자기고(自是他自), 타자도 곧 자기의 타자다(他是自他). 자타가 한 사이(一際)에 불과하다.’고 언명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 20세기 프랑스의 해체 철학자인 데리다가 그의 저서 ‘표지와 차이’에서 밝힌 ‘같음은 다름의 다름이고, 다름은 같음과 다르게 같은 것’이라는 사유와 맞먹지 않는가? 즉 같음은 다름의 타자고, 다름도 같음과 다르지만 같이 동거하는 사이라는 의미가 데리다의 정의이리라.7세기 중국의 법장과 20세기 프랑스의 데리다는 분명히 같은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이 사유를 그동안 인류는 비사회과학적이라고 도외시해 왔다. 근대세계는 소유론적 사회과학이 지배적이었다. 개인주의/전체주의, 자유주의/사회주의의 대결에서 전자가 이겼다.21세기 사회과학은 전자의 소유론마저 극복하는 지혜를 모색하는 시절로 접어들 것이다. 그 지혜는 필연코 존재론적인 사유를 화두로 삼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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