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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에 친환경 노면전차 도입 검토

    제주도에 친환경 노면전차 도입 검토

    제주도에 ‘노면전차(TRAM)’ 철길이 들어설 전망이다. 이에 따라 현재 추진 중인 경전철 건설 사업의 궤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우근민 제주지사 당선자는 도지사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노면전차가 혁신적인 대중교통 수단으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민선 5기 도정에서 이를 교통문제의 중요한 정책으로 다뤄줄 것을 18일 제주도에 요청했다. 인수위는 노면전차 도입의 타당성에 관한 기초조사부터 시작할 것을 주문했다. 노면전차는 열차보다 가벼운 철도 개념의 수송수단으로 지하철의 정시성과 버스의 유연성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수송용량은 시간당 1만~1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환경적이어서 제주 녹색 대중교통 수단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제주에 노면전차 도입이 추진되면 제주공항과 제주시 옛 시가지 및 신시가지를 잇는 노선이 우선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인수위는 지난 16일 서울대 임삼진 교수(건설환경공학부)를 초청, ‘제주 대중교통의 새로운 대안 - 노면전차(TRAM)’를 주제로 워크숍을 열었다. 임 교수는 이 자리에서 “바람직한 대중교통은 이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건설비를 적게 들이면서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제주에는 노면전철이 최적의 교통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 건설비용은 지하철은 1300억원, 경전철은 500억원이지만 노면전철은 200억원 정도면 가능하다.”며 “모노레일이나 경전철은 매우 무겁고, 교통 효율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스위스 취리히는 도심의 역전 광장과 폭이 좁은 도로를 노면전차와 버스 통행, 그리고 보행 몰(보행전용광장)로 제한해 도심 살리기에 성공했다.”며 “노면전철을 도입하면 역세권이 생겨나 도심 상권이 활성화되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제주도는 현재 제주시∼한라산 어리목∼영실 등산로 입구∼서귀포시 중문 1100도로 구간 35㎞에 경전철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욕망의 괴물/김성호 논설위원

    인간의 원천적 본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대의 고금과 양의 동서를 관통해 발전해온 철학, 인문학의 요체도 인간본성의 천착이다. 고대 중국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본성을 선과 악으로 명쾌히 구분한 대척의 사상. 당대엔 정치·사상과 연결돼 치열한 논리싸움이 있었을 터. 하지만 본성의 선하고 악함을 떠나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루라는 공동의 논지는 탁월한 울림으로 전한다. 성악설과 닮아 보이는 기독교의 원죄설도 운명적인 숙죄의 해제를 강조하는 신학설. 출생과 더불어 짊어진 죄를 털기 위한 사함과 구제노력은 신학의 교리를 떠나 인류공동의 목표로 자리잡아왔다. 성선·성악설이건 원죄설이건 바탕엔 욕망이란 공통의 단초가 자리한다. 누구나 태어나 죽을 때까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몸을 실어 부대끼는게 삶이다. 욕망을 제어할 근기를 타고 난다는 성선설이나, 감성적 악에 치우치기 마련이라는 성악설도 모두 욕망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타력구제의 신학설인 원죄설도 욕망의 경계와 응징에선 다르지 않을 터. ‘삼계(三界)가 모두 불타는 집(火宅)’이라는 불교경전에서도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중 가장 경계할 으뜸의 해악은 욕망(貪)이다.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을 어찌 선과 악의 간결한 이분 잣대로만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엔 양의 탈을 쓴 이리도 많고,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 모순의 악어도 숱하다. 로마신화 속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두 얼굴의 신 야누스며, 선인과 악한을 오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역시 헷갈리는 인간 본성의 고발과 다름없을 것이다. ‘내 속에 욕망의 괴물이 있다.’ 최근 초등학생을 납치, 성폭행한 피의자 김수철이 현장검증서 남겼다는 말. 끔찍한 범행 이후 사죄와 회한치곤 철학적이다. 욕망의 끝에 뱉어낸 말의 진의가 알쏭달쏭하기만 한 것이다. ‘내 속에 살아온 욕망의 괴물’은 남의 것일까, 자신일까. 불교계의 환경운동을 이끌다 최근 잠적한 수경 스님.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더라.’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일갈이 회자된다.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의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다.’는 말의 속내를 알기엔 시간이 꽤 걸릴 것만 같은데. 욕망에 휘둘리는 세상을 향한 고언인지, 세상에 속고 나 자신을 배신했다는 뒤늦은 발견인지. 두 사람이 세상을 향해 던진 욕망의 화두가 어렵기만 하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욕망의 괴물은 어떤 것일지.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1차전이 낳은 샛별들을 기억하라

    1차전이 낳은 샛별들을 기억하라

    난세(難世)일수록 영웅의 가치는 돋보인다. 지구촌 축구전쟁인 월드컵이야말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기에 최적의 무대다. H조를 제외한 28개국이 1라운드를 마친 16일 현재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새 얼굴은 ‘전차군단’ 독일의 메주트 외칠(22·베르더 브레멘)과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엘례로 엘리아(23·함부르크SV)다. 부상으로 빠진 미하엘 발라크(첼시)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신세대 에이스 외칠이 있기 때문이다. 호주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독일은 90년대 후반 프랑스를 연상케 하는 세련된 패싱게임을 뽐냈다. 강력하지만 투박한 느낌은 더이상 없었다. 외칠의 발끝에서 시작된 포돌스키의 선제골 장면은 달라진 독일 축구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호주 골키퍼 마크 슈왈처를 살짝 넘기던 센스있는 슛은 남미의 테크니션을 떠올리게 했다. 후반 25분 카카우(슈투트가르트)의 쐐기골 역시 외칠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격이다. 후반 29분 교체될 때까지 독일의 공격을 완벽하게 조율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좌우 날개를 오가는 외칠은 폭발적인 스피드와 현란한 발재간을 지녔다. 창조적인 플레이는 덤이다. 터키계인 그를 잡으려고 독일과 터키가 갈등을 빚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지난해 11월 노르웨이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를 데뷔한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느새 전차군단의 심장이 됐다. A매치 9경기에 나서 1골. 아르연 로번(바이에른 뮌헨)과 라이언 바벌(리버풀) 등 ‘특급 윙어’들의 산실인 네덜란드에도 따끈따끈한 샛별 엘리아가 등장했다. 덴마크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 후반 22분 라파얼 판데르바르트(레알 마드리드)와 교체 투입된 엘리아는 경이적인 스피드와 수비 1~2명이 들러붙어도 가랑이 사이로 교묘하게 공을 빼내는 발재간, 정교한 크로스, 침착한 마무리까지 윙어의 모든 것을 보여 줬다. 상대의 자살골로 힘겹게 앞서가던 네덜란드는 엘리아가 투입된 이후 비로소 ‘오렌지군단’의 면모를 드러냈다. 후반 40분 디르크 카위트(리버풀)의 쐐기골은 엘리아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온 것을 ‘주워 먹은’ 것에 불과했다. 부상 회복이 더뎌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본 로번의 표정이 불안해 보일 만큼 완벽한 월드컵 데뷔전. 처음 성인 대표에 발탁된 지난해 9월5일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로번과 교체 투입된 엘리아는 2개의 어시스트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두 번째 A매치인 9월9일 스코틀랜드전에서는 마수걸이 골을 터뜨렸다. A매치 통산 7경기 1골. 아직 로번의 레벨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미 바벌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네덜란드에서 최고의 신인에게 주어지는 ‘요한 크루이프상’을 받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日학자가 본 한국전쟁] “60년전 동북아 정세 지금과 판박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과 관련해 일본내 진보적인 학자로 꼽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5일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와다 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당초 전공은 러시아 근대사였지만 1980년대부터 북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은 와다 교수와의 일문일답. →한국에선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해 북침설과 남침유도설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있던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왕래 편지가 공개됐지만 한국전쟁은 북한이 명확하게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남한을 침입한 것이다. 북한의 남침을 스탈린과 마우쩌둥이 지지했고 이제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의아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순하게 북한이 남한을 갑자기 침입한 전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48년 당시 남한도 북한도 분단된 상황에서 서로를 유일한 합법 단일 국가로 생각했다. 당시 북한은 국토완정(國土完整·국토완전통일)을, 남한은 북벌통일(北伐統一)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서로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세 번 정도 스탈린에게 남침을 요청했는데 결국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스탈린은 원래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거절해오다 입장을 바꿨는데. -미군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38선 유지 등 동북아시아에 대한 협정을 맺었다. 소련은 당시 미국의 파워가 너무 세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요한 요청이 있었고, 마우쩌둥의 중국 통일이 스탈린에게는 상당한 자극이 됐다. 이런 와중에 미국 국무장관인 딘 에치슨이 1950년 1월12일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을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밝히자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을 해도 미군이 지원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허락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한국전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참가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규정하는 전쟁이다. 남북한은 물론 일본, 중국 등도 이후에 많이 변했지만 정치적인 상황은 60년전과 비교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반도는 아직 휴전상태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전쟁과정에서 일·미 안보조약을 맺어서 자위대가 생기고 오키나와에서는 사실상의 미군점령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과 타이완의 역할은 뭐였나. -일본과 타이완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 아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사실상 전쟁에 참여해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봤다. 미군은 전쟁기간 일본 군사기지를 활용했다. 한반도로 출격한 미군 전투기들은 일본 군사기지에서 출발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전차상륙탱크(LST)들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움직였다. 미군은 또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타이완을 방어하기 위해 제7함대를 파견했다. 타이완은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지지로 일본과 국교를 맺고 지위를 확립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지금 동북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 파탄과 북·미관계 정체 등 두 가지가 겹쳐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런 것을 해야 했는지 의문이 많다. 북한이 했다면 국제적 비난을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군사적 긴장상태를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정부가 유엔을 통한 북한제재에 나서고 있지만 북한이 저렇게 막무가내인 상황에선 제재를 한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국 정부가 제재를 하고자 하는 심정은 알겠지만 숨을 고르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지자체 선거 결과 예상외로 여당이 패했는데. -한국 국민이 현명하게 대처한 결과다. 한국 국민은 대단한 선택을 했다. 더이상의 냉전을 원치않는다는 신호인 셈이다. 한반도에 또 한번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 성남시, 신교통수단 도입 추진

    성남대로 한가운데 노면전차가 다닐 날도 머지않았다. 성남시는 구시가지 중심의 현 8호선을 보완하고 새로 조성되는 판교와 기존 분당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 2004년부터 신교통수단 도입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벌여왔다. 신교통수단은 버스와 전철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버스처럼 타기 쉬우면서 전철의 쾌적성을 모두 갖춘 노면전차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자가용에 의해 점령된 도시공간을, 대중교통과 함께하는 보행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가 시발점이 됐다. 아울러 요즘의 노면전차는 중앙버스전용차로처럼 전용공간으로 달리기 때문에 안전성이 높고 속도도 빠르다는 것도 도입 이유가 됐다.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노면전차의 부활을 가져오고 있다. 노면전차는 길 바닥에 궤도를 깔고 일반차량과 함께 달리는 전기열차로, 예전의 노면전차는 성능이 좋지 않고 자동차의 운행을 방해하다 보니 자동차의 급증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요즘 노면전차는 성능이 크게 개선됐다. 속도가 빨라지고 저상형으로 설계돼 일본과 미국, 유럽 등에서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노선은 서판교 지역인 운중동에서 출발해 신분당선 및 분당선 전철과 환승하며, 분당신도시의 핵심 도로인 성남대로를 따라 분당 남쪽의 상업중심지인 미금역까지 가는 노선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선이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시가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노면전차는 중앙에 한 가닥의 선로를 붙잡고 고무바퀴로 달리는 방식이어서 소음이 없고 주행성능도 개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는 노면전차가 도입되면 그동안 승용차에 의해 점령된 성남대로를 자전거도로와 대중교통, 그리고 보행자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시원한 전철 안 천국 같아요”

    “시원한 전철 안 천국 같아요”

    지난 8일 필리핀 마닐라 수캇 전철역. 3량짜리 전동차가 역사에 들어서자 탑승객 수십명이 우르르 올라탔다. 우리나라 경춘선 간이역보다 한적했던 이곳은 최근 주변 부지가 개발되고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마닐라 중심가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밖의 날씨는 30도가 넘고 후텁지근하지만 노상전철 안에 들어서니 쾌적한 분위기에다 에어컨 덕분에 그야말로 ‘살 것’ 같았다. 마닐라 남쪽 알라방에서 북쪽 칼루칸을 잇는 통근열차 구간(34㎞)은 대우인터내셔널이 2007년 공사를 시작해 97%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거의 전 구간이 개통됐고 마무리공사를 거쳐 10월에 완공된다. 2시간 걸리던 통근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되고, 시민 16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속도는 시속 40~50㎞. 마닐라 시민들은 대부분 낡은 버스나 군용 지프차를 개조한 ‘지프니’를 타고 다닌다. 경제 성장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고 있다. 그런 곳에 새 전차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다. 탑승객 리카 산토스(21·여)는 “버스를 타면 수캇에서 에사까지 1시간이나 걸리지만 전차를 타면 20분 만에 갈 수 있다.”면서 “낡고 무더운 버스 등에 비하면 전차 안은 천국”이라고 말했다. 전차의 기본요금은 10페소로 시내버스 7.5페소에 비하면 조금 비싸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란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한진중공업, 현대로템과 컨소시엄을 맺고 마닐라와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4900만달러 규모의 통근열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로템이 제작한 전동차는 우리나라 지하철과 비슷한데, 여성전용칸도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알라방에서 칼람바까지 2차 사업을 추진한 뒤 3차 사업 구간도 검토하고 있다. 박석용 대우인터내셔널 마닐라지사장은 “지난해 7월에 열린 개통식에는 아로요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사였다.”고 전했다. 글 사진 마닐라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월드컵의 사나이’ 클로제와 포돌스키의 두 얼굴

    ‘월드컵의 사나이’ 클로제와 포돌스키의 두 얼굴

    월드컵에만 나가면 득점력이 폭발하는 두 선수가 있다. 클럽에선 주전 경쟁에 밀리거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지만 대표팀 유니폼만 입으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맹활약을 펼친다. 바로 ‘전차군단‘ 독일의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33·바이에른 뮌헨)와 루카스 포돌스키(26·쾰른)의 얘기다. 독일이 호주를 상대로 첫 승을 신고했다. 독일은 14일 새벽(한국시간) 더반 스타디움에서 열린 호주와의 ‘2010 남아공 월드컵’ D조 예선 1차전에서 포돌스키, 클로제, 뮐러, 카카우의 연속골에 힘입어 4-0 대승을 거뒀다. 특히 클로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이어 3대회 연속 득점의 대기록을 달성했고, 포돌스키는 2대회 연속 득점포를 가동했다. ▲ 3대회 연속 득점, WC최다골에 도전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클로제는 머리로만 5골을 터트리며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발 보다는 머리를 잘 쓰며 헤딩밖에 할 줄 모른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클로제는 소속팀은 물론 대표팀에서 연일 득점포를 가동하며 전차군단의 해결사로 급성장했다. 충분한 경험을 쌓은 클로제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또 다시 5골을 성공시켰다. 이번에는 머리 뿐 아니라 발까지 사용하며 전천후 공격수로서 이미지를 쌓았다. 특히 아르헨티나와의 8강에서 천금과 같은 동점골을 터트리며 승부차기 끝에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독일이 3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호주전 득점으로 클로제는 3번의 월드컵에서 모두 11골을 성공시켰다. 현재 월드컵 최다골의 주인공은 15골을 터트린 브라질의 축구황제 호나우두다. 만약 클로제가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6골 이상을 성공시킨다면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잡이가 되는 셈이다. 현재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 2006년 신인왕, 2010년 골든슈를 꿈꾸다! 포돌스키 역시 클로제 만큼이나 대표팀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 왔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3골을 터트리며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선정한 베스트 영 플레이어 어워드를 수상했고, 유로2008에서도 클로제와 호흡을 맞춰 3골을 성공시키며 독일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소속팀에선 좀처럼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이어가지 못했다. 득점포는 침묵했고 팀플레이마저 실종되며 그라운드 보단 벤치에 앉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결국 친정팀 쾰른으로 복귀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시즌 내내 2골을 넣는데 만족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주전에서 보여준 포돌스키의 활약은 그러한 우려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왼쪽 공격수로 나선 포돌스키는 강력한 왼발 슈팅과 적극적인 문전쇄도를 통해 호주를 완벽히 공략했다. 소속팀만 가면 침묵하던 득점포는 전반 8분 만에 호주의 골네트를 흔들었고, 후반 23분에는 정확한 패스를 통해 뮐러의 쐐기골을 돕기도 했다. 클로제와 포돌스키는 그야말로 두 얼굴의 사나이다. 소속팀에선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대표팀에서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과연, ‘월드컵 사나이’ 클로제와 포돌스키의 활약은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을까? 두 선수의 머리와 발 끝에 축구 팬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멀티비츠 서울신문 나우뉴스 유럽축구통신원 안경남 pitchactio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각국 팀 애칭 무슨 뜻 담겼나

    각국 팀 애칭 무슨 뜻 담겼나

    ‘바파나’는 아프리카 줄루족 말로 ‘소년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파나 바파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최고라는 뜻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대표팀의 별명이다. 1996년 남아공 대표팀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우승한 뒤 팬들이 붙여 줬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나선 32개국 면면을 살펴보면 별명도 축구 스타일만큼 다채롭다. 유니폼이나 국기 색깔에서 따온 별명이 많다. 국내 언론은 우리 대표팀을 흔히 ‘태극 전사’라고 지칭하지만, 해외에서는 ‘붉은악마’의 이름값이 더 높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고 악착같이 강호를 물고 늘어져 4강 신화를 이룬 뒤 붙여졌다. 아르헨티나 역시 흰색과 하늘색 줄무늬 유니폼에서 비롯된 ‘라 알비셀레스테’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뢰블레’나 이탈리아의 ‘아주리’는 모두 푸른 유니폼 색깔을 상징하는 별명이다. 우루과이도 유니폼의 하늘색을 표현하는 ‘라 셀레스테’가 별명. 네덜란드의 ‘오렌지 군단’, 브라질의 ‘카나리아 군단’도 모두 유니폼에서 비롯됐다. 주로 흰색 유니폼을 입는 뉴질랜드는 ‘올 화이트스’로 불린다. 파라과이의 ‘라 알비로하’와 멕시코의 ‘엘 트리’는 국기 색깔에서 따온 애칭이다. 국기 중앙에 커다란 별이 있는 가나는 ‘검은 별’로 불린다. 동물도 자주 등장한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8강 돌풍을 일으켰던 카메룬은 ‘불굴의 사자’로 불린다. 1972년 카메룬축구협회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애칭을 공모한 결과라고 한다. 호주는 사커(축구)와 캥거루의 합성어인 ‘사커루’를 별명으로 갖고 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삼사자 군단’이라는 별도의 애칭이 있다. 북한 별명은 ‘천리마’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쉴 새 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나이지리아는 ‘슈퍼 이글스’. 독수리는 유럽에도 있다. ‘벨리 올로비(하얀 독수리)’ 세르비아다. 코트디부아르는 ‘코끼리 군단’, 알제리는 ‘사막의 여우들’. 유로64에서 4강에 오른 뒤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덴마크처럼 국가나 팀 이미지에서 애칭을 따온 경우도 있다. 독일은 흔히 ‘전차 군단’으로 불리며 ‘무적 함대’ 스페인은 정열적인 기질 때문에 ‘붉은 분노’라는 별도의 애칭이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클로제의 폭발력 VS 베어벡의 사커루

    독일은 ‘토너먼트의 제왕’으로 불린다. 18차례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16번 본선 무대를 밟았고, 이중 세 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4강 이상의 성적만도 11번이나 된다. 특히 1954년 스위스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뒤, 단 한 번도 8강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전차군단’ 독일은 14일 오전 3시30분 남아공 더반 모저스 마비다 스타디움에서 최약체로 꼽히는 ‘사커루’ 호주와 조별리그 D조 1차전을 치른다. 예선 10경기에서 독일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본선에 올랐다. 4강에 오를 만한 전력을 갖췄음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독일의 전력이 정상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독일 주장 미하엘 발라크(34·첼시)와 지몬 롤페스(28·레버쿠젠)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해 미드필드 공백이 우려된다. 2006년 대회 득점왕 출신인 미로슬라프 클로제(31) 역시 소속팀 바이에른 뮌헨에서 부진을 겪었지만, 요아힘 뢰프 독일 감독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클로제는 월드컵 예선 8경기에서 7골을 폭발했고, 최근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대표팀 청백전에서도 두 골을 넣으며 건재를 과시했다.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끄는 호주는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32년 만에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이후 2회 연속 본선 무대를 밟는 쾌거를 맛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독일을 비롯해 세르비아, 가나와 한 조에 편성되면서 16강 진출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호주 대표팀의 ‘에이스’ 팀 케이힐(31·에버튼)이 부상을 당해 전력 공백이 우려된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한국 B조 2위? 4위?… 누가 맞힐까

    한국 B조 2위? 4위?… 누가 맞힐까

    한국의 16강 진출에 대해 해외 도박 사이트가 서로 다른 결론을 내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해외 베팅업체인 윌리엄힐은 한국이 B조 4위로 탈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베트온월드컵2010에서는 한국이 B조 2위로 아르헨티나와 함께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32개국 중 16강에 진출할 나라는 누구일까. 온라인베팅업체인 윌리엄힐과 베트온월드컵2010 등 해외 베팅업체들은 일찌감치 각조 1, 2위 16개국을 점찍어 뒀다. 우선 윌리엄힐의 예상이다. 개최국 남아공(FIFA 랭킹 83위)이 포함된 A조는 개최국이 무조건 16강에 진출한다는 징크스를 완전히 무시했다. 조 1, 2위는 프랑스(9위), 멕시코(17위)다. 이변을 일으킬 다크호스에도 남아공이 아닌 우루과이(16위)를 선정했다. 한국(47위)이 끼어 있는 B조는 지난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득점왕 리오넬 메시가 있는 아르헨티나(7위)가 무조건 1위. 나이지리아(21)가 2위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2위인 그리스와 한국을 각각 3, 4위로 잡았다. 잉글랜드와 미국의 승부가 관심을 끄는 C조는 잉글랜드(8위)와 미국(14위)이, D조는 ‘전차군단’ 독일(6위)과 세르비아(15위)를 각각 1위와 2위로 예상됐다. E조는 ‘오렌지군단’ 네덜란드(4위)는 당연 조 1위, 1990년 ‘검은 돌풍’의 주인공 카메룬(19위)은 조 2위다. 일본(45위)은 명함도 못 내민 4위. F조는 ‘수비 축구의 황제’ 이탈리아(5위)가 1위, 파라과이(31위)는 2위다. 우승 후보 브라질(1위)이 속한 ‘죽음의 조’ G조는 포르투갈(3위)이 2위로 예상됐다. ‘인민 루니’ 정대세가 활약하는 북한(105)은 4위로 탈락,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득점왕 디디에 드로그바가 소속된 코트디부아르(27위)는 3위밖에 안 된다. H조는 FIFA 랭킹 2위의 스페인이 1위, 칠레(18위)가 2위다. 반면 베트온월드컵2010에서는 A조의 1, 2위에 멕시코와 남아공을 넣었다. 또한 B조에서도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함께 2위로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G조의 1, 2위도 브라질과 코트디부아르로 예상해 윌리엄힐과 차이를 보였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아프리카시대 열렸다”

    “아프리카시대 열렸다”

    “아프리카 시대가 열렸다.” 제이콥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11일 오후 11시 요하네스버그의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제19회 월드컵의 개막전에 앞서 감격적인 목소리로 공식 개막을 선언했다. 요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함께 개회를 선언한 주마 대통령은 “지구촌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전쟁과 갈등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평화와 조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조별리그 A조인 개최국 남아공과 북중미 강호 멕시코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31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포토] 2010 남아공월드컵 개막식 아프리카의 첫 주최국인 남아공과 7회 연속 출전하는 한국,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 축구종가 잉글랜드 등 총 32개국이 참가해 결승전까지 모두 64경기를 펼치며 전 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치안불안, 준비소홀 등 갖가지 악재 속에서도 한국의 붉은악마를 비롯한 각국의 열혈팬들이 속속 남아공으로 몰려들어 화려한 응원전을 준비하고 있다. ●개막식장 뒤덮은 8만관중 함성 사커시티 스타디움과 A조 두 번째 경기인 우루과이-프랑스(12일 오전 3시30분) 경기가 치러질 케이프타운의 그린포인트를 비롯해 모저스 마비다 스타디움(더반), 엘리스파크 스타디움(요하네스버그), 로프투스 페르스펠트 스타디움(프리토리아), 넬슨만델라베이 스타디움(포트엘리자베스), 피터 모카바 스타디움(폴로콰네), 음봄벨라 스타디움(넬스프뢰이트), 프리스테이트 스타디움(블룸폰테인), 로열 바포켕 스타디움(루스텐버그) 등 총 10개 경기장은 일찌감치 손님맞이 준비를 끝냈다. 8만여 관중의 함성과 전통악기 ‘부부젤라’ 소리로 뒤덮인 가운데 시작된 개막식은 아프리카 특유의 화려함과 생동감으로 68억 지구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아공 9개 부족을 상징하는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무용수들은 전광판의 개막식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경기장 출입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무대 중앙에 설치된 단상에 오른 추장 복장의 사회자는 “세계인이여, 우리의 땅에 왔도다. 여기는 월드컵이 열리는 아프리카다. 아름다운 아프리카인이여 일어나서 세계인을 맞으라.”고 외치며 개막을 선언했다. 개막식은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에 착안한 ‘세계인의 집에 온 곳을 환영합니다(Welcoming the World Home).’는 테마로 진행됐다. 1000여명의 무용수들이 대형 통천으로 세계지도를 만들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류를 상징하는 발자국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했고, 아프리카의 전통 그릇인 ‘칼라바시’를 그라운드 중앙에 설치, 요리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번 월드컵에 참가하는 선수들과 각국 응원단을 따뜻하게 맞이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6개 아프리카 나라의 대표적 음악가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축하 연주를 펼쳤다. 마지막으로 미국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19차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던 인기 가수 알 켈리가 등장해 대회 주제곡인 ‘사인 오브 어 빅토리’를 열창하며 개막식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번 월드컵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태극전사들이 ‘원정 16강’이라는 새로운 신화 창조를 기대하면서 국민들을 더욱 열광케 하고 있다. 그리스와의 첫 경기가 열리는 포트엘리자베스에 지난 10일 입성한 허정무호는 마지막 담금질을 하며 승리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태극전사들은 12일 오후 8시30분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유로2004 우승팀인 그리스를 상대로 16강 도전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만델라 증손녀 사망… 개막전 불참 한편 남아공 넬슨 만델라(91) 전 대통령은 개막식에 참석하는 대신 영상 메시지를 전달했다. 증손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탓에 개막식에 불참한 만델라 전 대통령은 경기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인류의 너그러운 마음은 모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의 증손녀 제나니 만델라(13)는 이날 소웨토 올랜도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을 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경찰 대변인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도 증손녀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으며, 사고 발생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나니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셋째 딸인 진드지 만델라의 손녀로 지난 9일 13번째 생일을 맞았다. 황비웅 박건형기자 stylist@seoul.co.kr ☞관련기사 쏘아라! 외쳐라! 즐겨라!… 어게인 2002 유쾌한 도전 시작 “그리스 국민들 박지성 무섭다고 해” 한국 B조 2위? 4위?… 누가 맞힐까 태극전사·사커루·전차군단…각국 팀 애칭 무슨 뜻? 밴쿠버 氣 받고 16강 꿈★ 이루세요
  • 정대세 “북한 정신력, 독일 닮았다”

    정대세 “북한 정신력, 독일 닮았다”

    “북한의 정신력, 독일을 닮았다.” ‘아시아의 루니’ 정대세(26·가와사키 프론탈레)가 2010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하는 북한을 ‘세계 최고 정신력의 팀’이라고 설명했다. 정대세는 지난 9일(한국시간) 공개훈련에 앞서 가진 공식 인터뷰에서 “북한은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신의 핵심은 독일의 그것과 닮았다.”며 ‘전차군단’ 독일과 북한을 비교하며 “정신력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고 거듭 강조했다. AP·AFP 등 외신 기자들 앞에서 정대세는 “북한은 폐쇄적”이라는 질문에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고 답했다. 이어 “이번 월드컵에서 북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특히 브라질을 이길 수 있다는 정대세의 호언이 화제가 됐다. 그는 “우리는 브라질에 승리할 수 있다.”면서 “우리에겐 용기가 있다. 강철 같은 심장과 정신력이 있다.”면서 정신력으로 브라질을 앞서겠다고 다짐했다. 또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비디오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며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싶다.”고 전의를 다졌다. 사진=syukyu.com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엄복동 자전거’ 근대문화재 된다

    ‘엄복동 자전거’ 근대문화재 된다

    일제 시대 ‘스포츠 영웅’이었던 사이클 선수 엄복동(1892~1951)이 타던 자전거가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8일 엄씨가 은퇴 전까지 타던 경주용 자전거를 근대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엄복동은 1910년 조선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수많은 대회에서 일본인들을 누르며 월등한 기량을 뽐냈다. 암울한 시대 그의 활약은 민족 일체감과 자긍심을 심어줘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 ‘엄복동 자전거’는 그가 1929년 은퇴하면서 후배에게 물려준 것으로 국내에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자전거로 평가받는다. 영국 러지사가 1910~14년 사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자전거 전면 상표에 7자리 숫자 ‘1065274’가 새겨져 있는 희귀 제품이다. 문화재청은 30일 동안의 의견 수렴과정을 거쳐 8월24일 문화재로 공식 등록할 계획이다. 이날은 1977~99년 개최된 ‘엄복동배 전국사이클경기대회’ 마지막 개최일이다. 문화재청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전차 381호’, 고종황제의 순헌황귀비 엄씨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고)에 하사한 ‘명신여학교 태극기·현판·완문(完文·증명서의 일종)’도 문화재로 함께 등록 예고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2010 남아공월드컵 D-3] 다음날 지각해도 이 경기만은 꼭 본다!

    [2010 남아공월드컵 D-3] 다음날 지각해도 이 경기만은 꼭 본다!

    30억 축구팬들을 흥분시킬 남아공월드컵 개막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11일 밤 11시30분 요하네스버그의 사커시티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남아공-멕시코 간의 A조 1차전을 시작으로 다음 달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결승전까지 총 64경기가 열린다. 총성만 없을 뿐 이만한 전쟁도 없다. 최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32개국 간의 창과 방패 등 모든 무기가 총동원되는 ‘남아공 전투’가 경기장 10곳에서 발발한다. 어떤 대결을 선택한다 해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이 가운데 으뜸은 한국의 ‘원정 첫 16강’ 대업이 기대되는 B조와 ‘미리 보는 결승전’으로 손색이 없는 G조 경기다. 여기에다 각 조마다 팀과 선수 간에 얽혀 있는 운명의 고리도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과연 어느 경기가 남아공월드컵의 ‘빅매치’일까.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축구전쟁 베스트 10’을 꼽아본다. ●각각 “필승”… 16강 운명의 시작 B조 1차전 한국-그리스 (6월12일 오후 8시30분·포트엘리자베스)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에 도전하는 태극전사들의 첫 경기다. 국내 전문가들은 엇비슷한 전력인 그리스와의 맞대결 결과가 16강 진출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스 역시 가장 만만한 상대(?)인 한국전을 무조건 승리로 가져간다는 입장이어서 혈전이 점쳐진다. ●축구 종가 60년전 치욕 갚을까 C조 1차전 잉글랜드-미국 (6월13일 오전 3시30분·루스텐버그) 60년 만에 조별리그에서 다시 만난 두 팀이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줄곧 본선을 보이콧해 오다 처녀 출전한 1950년 브라질월드컵에서 미국에 0-1로 패하는 망신을 당했다. 반 세기가 지난 현재 북중미 최강으로 성장한 미국의 주전 대부분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 중이다. 잉글랜드가 다시 미국에 발목이 잡힐지 주목된다. ●日, 목표 이루려면 에투 잡아야 E조 1차전 일본-카메룬 (6월14일 오후 11시·블룸폰테인) ‘4강 진출’을 목표로 남아공에 입성하는 ‘오카다 재팬’의 첫 경기다. 상대인 ‘불굴의 사자’ 카메룬은 사무엘 에투(29·인테르 밀란)가 버티고 있는 만만치 않은 팀이다. 2차전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일 일본은 카메룬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 승점 3점을 먼저 쌓아놓겠다는 각오다. ●北, 피파랭킹 104계단 넘을 수 있나 G조 1차전 북한-브라질 (6월16일 오전 3시30분·요하네스버그) ‘천리마 군단’ 북한이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랭킹 1위이자 월드컵 최다 우승국(5회)인 ‘삼바군단’ 브라질을 상대한다. 1966 잉글랜드월드컵 8강 이후 44년 만에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데다, 축구 외적으로도 관심을 받고 있는 북한인 만큼 전세계 축구팬의 이목이 쏠린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라도나 이번엔 실력으로 괴롭힌다 B조 2차전 한국-아르헨티나 (6월 17일 오후 8시30분·요하네스버그) 1986멕시코월드컵에서 선수로 맞대결했던 허정무 감독(55)과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51)이 24년 만에 지도자로 변신해 일전을 벌인다. 리오넬 메시(23·바르셀로나)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면면과 비교해보면 한국의 열세는 분명하지만 허 감독은 이젠 ‘태권 축구’가 아닌 ‘실력’으로 승리하겠다는 의지다. ●힘·기술 균형잡힌 명승부 기대 D조 2차전 독일-세르비아 (6월18일 오후 8시30분·포트엘리자베스) 200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서 3위를 했던 ‘전차군단’ 독일이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동유럽의 강호’ 세르비아와 힘겨운 일전을 벌인다. 양 팀 모두 넘치는 힘과 정교한 기량을 두루 갖추고 있어, 명승부를 연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천리마·호날두 누가 빠를까 G조 2차전 포르투갈-북한 (6월21일 오후 8시30분·케이프타운)잉글랜드월드컵 당시 에우제비오의 현란한 발짓에 무너지며 4강행에 실패했던 북한이 44년 만에 포르투갈을 상대로 복수를 노린다. 하지만, 앞선 브라질전만큼이나 힘든 경기가 예상된다. 북한이 에우제비오를 뛰어넘는 기량으로 전 세계 팬을 매료시키고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5·레알 마드리드)를 어떤 방법으로 막아낼지가 관심사다. ●16강 진출 여부 여기서 결정 B조 3차전 나이지리아-한국 (6월23일 오전 3시30분·더반) 태극전사들의 목표인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행이 결정되는 경기다.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크다. 허정무호가 과연 목표를 달성하고 한국축구사에 또다른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지 대한민국 전 국민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경기다. ●아프리카축구 vs 유럽축구 D조 3차전 가나-독일 (6월24일 오전 3시30분·요하네스버그)두 팀은 각 대륙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는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나는 아프리카 특유의 유연성과 개인기, 스피드를 갖췄고, 독일은 힘을 앞세운 파워 넘치는 경기력과 세트플레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경기에서 D조 1, 2위 팀이 갈릴 가능성이 크지만, 앞선 경기에서 거둔 성적과 같은 시간에 펼쳐지는 세르비아-호주 간 맞대결 결과에 따라 ‘벼랑 끝 혈전’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호날두·카카 진검승부… 꿈의 경기 G조 3차전 포르투갈-브라질 (6월25일 오후 11시·더반) 몇년 전 한 스포츠 용품업체의 TV광고에도 등장했던 양 팀의 맞대결이 현실로 펼쳐진다. 개인기와 개인기의 싸움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경기는 세계 축구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레알 마드리드의 양대 스타로 자리매김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카가 동지에서 적으로 만나 진검승부를 펼친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2010 남아공월드컵 D-8] 각국 최종엔트리 발표 잇따라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각 나라에서 최종엔트리 23명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1966년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축구대회 정상을 노리는 잉글랜드는 2일 최종 명단을 발표했다.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는 21세의 젊은 공격수 시오 월콧(아스널)을 제외하고 부상 중이던 개러스 배리(29·맨체스터시티)를 포함했다. 월콧은 2006년 17세에 당시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 발탁돼 화제가 됐었다. 반면 지난달 초 발목을 다쳐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배리는 카펠로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빗장수비’로 유명한 2006년 우승팀 이탈리아는 신예의 패기보다 노장의 경험을 중시했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백전노장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과 파비오 칸나바로를 비롯해 마우로 카모라네시, 빈첸조 이아퀸타(이상 유벤투스), 잔루카 참브로타, 안드레아 피를로, 마우로 카모라네시(이상 AC밀란), 알베르토 질라르디노(피오렌티나), 다니엘레 데로시(AS로마) 등 4년 전 월드컵 정상에 섰던 스타급 선수들을 재호출했다. ‘깜짝 발탁’은 파비오 콸리아렐라(나폴리)가 쟁쟁한 공격수인 마르코 보리엘로(AC밀란), 주세페 로시(비야레알)와 펼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것. 부상으로 훈련에서 제외된 미드필더 카모라네시(34)도 최종명단에 포함됐다. ‘젊은피’는 수비수 레오나르도 보누치(23·바리)와 미드필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24·유벤투스) 등 소수만 선택하는 데 그쳤다. 반면 ‘전차군단’ 독일은 20대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요아힘 뢰브 감독은 마누엘 노이어(24·샬케04)를 주전 골키퍼로 정했고, 수비진에서 데니스 아오고(23)와 제롬 보아텡(22·이상 함부르크)을 포함해 발라크의 공백을 메울 사미 케디라(23·슈투트가르트)와 미드필더 메수트 외질(21·베르멘) 등을 선택했다. 또 공격수를 6명으로 해 공격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짰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스타의 차⑫] 피겨스타 아사다 마오, 쏘나타 탄다!

    [스타의 차⑫] 피겨스타 아사다 마오, 쏘나타 탄다!

    일본 피겨스타 ‘아사다 마오’가 ‘쏘나타’를 탄다. 현대차는 오는 5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현대카드 슈퍼매치X 메달리스트 온 아이스’(Medalist on ice)에 의전차량을 지원한다고 3일 밝혔다. 현대차는 쏘나타 2대와 제네시스 1대, 스타렉스 2대, 의전용 버스 1대 등 총 6대를 메달리스트들이 국내에 체류하는 2일부터 7일까지 의전용 차량으로 지원한다. 이번 아이스쇼는 에반 라이사첵(Evan Frank Lysacek, 남자 싱글 금메달)과 아사다 마오(Asada Mao, 여자 싱글 은메달), 조애니 로셰트(Joannie Rochette, 여자 싱글 동메달) 등 벤쿠버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대거 참가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이들이 국내 일정을 원활히 소화할 수 있도록 쏘나타를 제공해 브랜드 인지도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세계적인 피겨스타들의 의전 차량 지원으로 쏘나타의 상품성을 알리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해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연아 선수도 국내외 체류 시 베라쿠르즈 등 현대차를 지원받아 애용하고 있다. 서울신문 M&M 정치연 자동차전문기자 chiyeon@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에이타, ‘속도위반’으로 키무라카에라와 결혼

    에이타, ‘속도위반’으로 키무라카에라와 결혼

    일본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의 주인공 에이타(永山瑛太, 27)가 가수 키무라 카에라(木村カエラ, 25)와 전격 결혼한다.일본 일간지 닛칸스포츠 1일 보도에 따르면 에이타의 연인 카에라는 현재 임신 5개월로 11월에 출산예정이다. 두 사람은 결혼 의사를 소속사에게 이미 전했으며 이들의 소속사가 결혼을 인정하고 있어 곧 정식으로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이들은 2005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처음 만났고 그 후 지인의 소개로 다시 만나 2009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실력파 배우와 인기 가수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은 이들은 한 여성지에 둘의 데이트 사진이 실리기도 해 현지 언론은 두 사람의 결혼여부에 대해 주목해 왔다.에이타는 일본에서는 이미 톱스타로 자리 잡아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영화 ‘소녀검색 아즈미’ ‘전차남’,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너는 펫’을 통해 이미 수많은 국내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결혼소식을 접한 국내 팬들은 “아침부터 왠 날벼락이냐”, “에이타도 이제 유부남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너무 팬이었는데 씁쓸하다.” 등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한편 에이타는 1999년 잡지모델로 데뷔해 2003년 후지TV드라마 ‘워터 보이즈’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기무라 카에라는 2004년 싱글 ‘레벨42’(Level 42)로 가수 데뷔한 후 여러 앨범을 통해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사진 = 닛칸스포츠(JP)서울신문NTN 김수연 인턴기자 newsyouth@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日 톱스타 에이타-카에라, 전격 결혼..‘속도위반’

    日 톱스타 에이타-카에라, 전격 결혼..‘속도위반’

    일본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의 주인공 에이타((永山瑛太, 27)와 가수 키무라 카에라(木村カエラ, 25)가 결혼한다.일본 일간지 닛칸스포츠 1일 보도에 따르면 에이타의 연인 카에라는 현재 임신 5개월로 11월에 출산예정이다. 두 사람은 결혼 의사를 소속사에게 이미 전했으며 이들의 소속사가 결혼을 인정하고 있어 곧 정식으로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이들은 2005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처음 만났고 그 후 지인의 소개로 다시 만나 2009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실력파 배우와 인기 가수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은 이들은 한 여성지에 둘의 데이트 사진이 실리기도 해 현지 언론은 두 사람의 결혼여부에 대해 주목해 왔다.에이타는 일본에서는 이미 톱스타로 자리 잡아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영화 ‘소녀검색 아즈미’ ‘전차남’,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너는 펫’을 통해 이미 수많은 국내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결혼소식을 접한 국내 팬들은 “아침부터 왠 날벼락이냐”, “에이타도 이제 유부남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너무 팬이었는데 씁쓸하다.” 등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한편 에이타는 1999년 잡지모델로 데뷔해 2003년 후지TV드라마 ‘워터 보이즈’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기무라 카에라는 2004년 싱글 ‘레벨42’(Level 42)로 가수 데뷔한 후 여러 앨범을 통해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사진 = 닛칸스포츠(JP)서울신문NTN 강서정 인턴기자 sacredmoo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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