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록이후 첫발-중국 고구려유적지를 가다] (상) 첫 수도 홀본성
지난 7월1일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 처음으로 지난 12일부터 18일까지 고구려 유적지를 두루 다녀온 고구려연구회 서길수(서경대 교수) 회장이 본지에 답사기를 보내왔다.중국 중앙정부와 관련 지방도시들은 세계문화유산 등록 이후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면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강조하는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세계유산 등록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난해 초부터 관광객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통제했으나,등록 이후에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까지 새롭게 단장한 유적지들의 사진 촬영까지 허용하는 등 고구려사의 자국 역사 편입을 자신하는 듯한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등재 이후 현지의 움직임,고구려 첫 수도인 환런현(桓仁·홀본성)과 두 번째 수도인 지안시(集安·국내성) 유적지들의 변화 모습을 사진과 함께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외국인 단체로서는 이 팀이 처음입니다.”
답사 첫날인 12일 창춘(長春)에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고구려 나통산성의 관리가 우리 일행에게 던진 말이다.나통산성은 고구려 북방개척의 전진기지이자 현재 지린(吉林)성에서 가장 큰 고구려 산성이다.성벽이 잘 남아 있어 그동안 여러 차례 답사를 시도했지만 현지 공안국의 제지로 실패했다.
●곳곳에 ‘중화민족 찬란한 역사’ 플래카드
하지만 중국은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뒤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한국 단체의 나통산성 답사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두번 모두 고구려연구회에서 주최한 만큼 그 변화를 분명하게 비교할 수 있었다.첫 답사 때에는 현지 문화국에서 일일이 따라다니며 사진 촬영을 철저하게 금지했으나 이번 답사에는 마음대로 사진을 찍도록 했다.고구려 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뒤 생긴 첫 변화를 확인한 것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이자 오녀산성이 있는 환런에 들어서자 올 들어 말끔하게 단장한 가로등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우리나라의 읍에 해당하는 환런현은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뒤 마치 새롭게 태어난 도시처럼 바뀌었다.거리와 주요 건물에는 ‘고구려 수도의 유적을 보호하고,중화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전시하자(保護高句麗都城遺迹 展示中華民族輝煌歷史)’‘오녀산산성 세계문화유산 등록 성공을 열렬히 경축한다(熱烈慶祝五女山山城申報世界文化遺産成功)’는 플래카드들이 곳곳에 걸려 있어 세계유산 등록에 대한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환런에서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기 이전인 6월15일부터 경축행사가 시작돼 7월15일까지 계속됐다고 한다.정부에서 행사를 위해 200만위안(3억원)을 지원했다.지원금은 고구려와 오녀산성을 주제로 한 그림전시회와 춤·노래공연을 한달 동안 계속하는 데 쓰였다.농촌의 각 마을과 랴오닝(遼寧)성에서 참석하거나 파견된 공연팀들이 한달 내내 대축제를 벌였다.조선족들도 우리 춤을 추며 참가했다고 한다.“순리대로 한다면 환런이 고구려 첫 수도이니,평양보다 먼저 신청해야 되는 것 아닌가?” 현지에서 만난 순진한 한 조선족 노인의 반문은 가슴을 때렸다.
환런현 외곽을 돌아흐르는 훈강(고구려 비류수) 가의 행사장에는 행사가 끝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각종 조명과 음향시설이 설치됐던 대형 가설무대가 남아 있어 당시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남아 있는 플래카드에는 ‘고구려 문화예술 주(周) 오녀산의 여름-고구려 첫 왕도 환런 오녀산성’(주최:중국환런만족자치현 위원회,중국환런만족자치현,후원:중국환런만족자치현 위원회 선전부,중국환런만족자치현 문화국)이라 적혀 있었다.
세계유산에 등록된 뒤 환런현의 현장,부현장 등 3명은 1등 공(功),선전부장·문화국장 등 3명은 2등 공,부선전부장 등 3명은 3등 공으로 9명이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중국이 세계유산 등록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역사 왜곡의 심각성은 환런현이 세계유산을 신청하면서 만든 ‘오녀산산성 사적진열관’에서 그대로 드러났다.진열관은 세계유산 심사를 받기 한달 전인 2003년 7월 초에 시작해 8월11일까지 급조해 같은 달 30일 개관했다.그러나 발굴 당시의 평면도와 시대별로 분류한 유물을 전시해 오녀산성의 발굴 결과를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전시 출토유물 202점과 복제유물 145점을 전시했는데,화살촉 같은 유물을 빼놓고는 대부분 복제유물이었다.진열관에는 고구려가 중국 땅에서 건국됐음을 집중 부각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 보였다.
●‘고구려왕 中조복 받았다’ 기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박물관 안내문에는 “문헌에 흘승골서라고 기재된 오녀산성은 랴오닝성 환런현 오녀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중국 동북지구의 고대 소수민족 고구려가 창건한 초기의 수도이다.”라고 돼 있다.바로 옆에 있는 고구려사 연표는 중원왕조기년-고구려 왕계 및 재위기간-중요 사실로 나누어 맨 앞 머리에 중국의 왕조에 따라 고구려사를 분류하고,중요 사실은 중국과 관련된 사실만 뽑아 적었다.
먼저 BC 108년 한나라가 현토를 세웠다는 사실을 쓰고,이어서 BC 82년에 현토를 고구려현으로 옮겼으며 바로 그 한나라 현토에 BC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나머지 중요 사실도 대부분 고구려가 조공한 사실과 책봉 받은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전시장 안에 있는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사실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기원 전 108년 한사군이 설립됐다.그 가운데 현토군 아래 고구려현이 설립됐다.오녀산 주위는 이 고구려현에 속했다.선진적인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현지 주민의 생산력이 빠르게 높아졌다.기원 전 37년 부여왕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오녀산에 성을 쌓고 도읍했다.고구려 왕은 (중국의)중앙정권이 내린 조복(朝服)을 받고 그 호적을 고구려 현령이 관장했다.여기서 고구려 민족과 중앙왕조의 예속관계가 확립됐다.”
이 설명을 보는 사람들은 한눈에 고구려가 한나라의 지방정권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교묘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더구나 중앙정권이 임명한 고구려 현령이 고구려의 호적을 관리했다는 주장은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진열관에는 이러한 중국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구려 유물이 아닌 한나라의 기와(현토) 같은 중국계 유물을 특별히 전시하고 있었다.앞으로 박물관이 될 이 진열관은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임을 국내외 관광객에게 주입하는 교육장으로 개발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14일 오전 8시 서둘러 오녀산성으로 찾아갔으나 거기에는 정말 뜻밖의 ‘장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녀산성 위에 있는 주차장은 물론 서문과 남문으로 가는 갈래길까지 차들이 꽉 들어차서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우리는 비교적 덜 밀리는 남문 쪽을 택해 올라갔으나 예정보다 1시간이나 늦게 올랐다. “국경절에는 하루에 5000명이 몰린다.”는 가이드의 말이 실감났다.
세계유산 등록 이후 ‘이제는 관광사업’이라는 중국의 의도가 한눈에 읽혔다.국가등급 관광지(별 4개)로 변했고,새로 새운 오녀산산성 표지판에는 유네스코와 세계유산 휘장이 선명하게 부각돼 있다.
●관광객 줄서…시장바닥 방불
전에 갔을 때는 조선족중학교 교사들을 안내원으로 활용해 우리말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식으로 안내원 교육을 받은 안내원을 앞세워야 했다.그러나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뒤 경계심이나 신경질적인 제약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입구의 울타리도 뜯어버렸고,일일이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첫 수도 환런에서는 이제 관광객을 끌어들여 수입을 올리면서,찾아오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 목표 달성에 총력을 기울이는 큰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