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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암벽 위 진달래가 꽃그림자를 드리울 즈음이면, 숭어떼가 몰려온다. 봄이왔다는 증거. 숭어만이 그러한가. 강과 바다를 오고가는 모든 고기들이 입춘만 지나면 봄을 알아차리고 운동량이 부쩍 증가한다. 거제도 최남단의 그림 같은 해금강이 건너다 보이는 남부면 다포리로 숭어잡이를 찾아나섰다. 숭어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가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도 제주로부터 동서남해를 막론하고 없는 곳이 없으나 거제도 숭어잡이는 남다르다. 일명 숭어둘이, 혹은 육소장망(六張網)이라 불리는 전통어법은 부산 가덕도로부터 거제 남동해 곳곳에서 펼쳐진다. 가덕도는 TV 등을 통해 간간이 소개된 반면 거제도는 일반에 알려져 있질 않다. 신항 건설로 급속히 가덕도 어장이 사라졌지만 거제도의 지세포, 양화, 학동, 다포, 도장포에서는 현행 어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산길 30분 올라가자 얼기설기 엮은 망통이… 어민 임성덕(59세)씨가 천장산 기슭의 망통으로 안내했다. 족히 30분 이상 산길을 걸었다. 바닷가 가파른 벼랑의,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소로가 동네사람들이 오랜 세월 오고가던 숭어잡이 길이다. 동백 팔손이를 비롯한 상록수들이 남도임을 실감시켜준다. 망통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서 있다. 바다 사나이 하나가 묵묵히 망을 응시하고 있다. 얼기설기 엮은 헛간이 벼랑에 의지하여 간신히 바위에 매달려 있고 그 안에 사내들 몇몇이 둘러앉아 바다를 응시한다. 하늘에서 움직임을 굽어보면서 숭어떼가 들이닥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물로 둘러싸서 잡는 글자 그대로 ‘둘이(두르다)’이다. 숭어는 2월1일부터 5월30일까지 날을 정해놓고 잡는다. 소머리 받치고 고사부터 지내는데 예전에는 무당까지 모셔다가 날 받는 날, 즉 낙망일을 정하였다. 그물은 포구를 향하여 ‘ㄷ’자 형으로 놓는다. 아가리가 포구를 향해 있어 외해로 나가는 길목을 차단하게끔 입을 벌려놓았다. 강철안 어촌계장은 “갯가를 문전문전 타고 다니지요.”라고 한다. 가덕도 쪽에서 내려온 숭어가 건너편 해금강에서 다포리 내만으로 접어들면서 육지로 바짝붙어서 골골이 만을 들른다는 설명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민물을 받아먹으려고 골에서 머물다가 어느날 갑자기 커다란 숭어 대군이 몰려오면 떼거리에 합세하여 포구의 모든 숭어들이 일제히 이동한다. 광장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출구에서 몰려드는 일련의 군중을 만나게되면 갑자기 합세하는 심리와 같다고나 할까. 수만마리 숭어들이 바다로 내려가는 통로는 어느 해나 일관되게 산 아래 육지쪽이다. 숭어 길목에 정확하게 그물을 놓는다. 어느 시각에 대군이 지나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망쟁이는 바다 빛깔의 변화를 보고서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입춘 직후에는 숭어가 ‘바닥을 기기 때문’에 여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봄빛이 짙어지면 숭어가 물 위로 뜨기 때문에 웬만한 어민들도 알아차린다. 망쟁이(어로장)는 고도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금년에도 건너편 해금강에서 어민 최봉조(33)씨를 돈까지 주고 모셔왔다. ●숭어 몰려오면 물색 짙어져 ‘나이 젊어도 고기를 잘 보기 때문’이라나. 노련한 어부들도 숱하겠건만 고기도 아무 눈에나 띄는 것은 아닌가보다. 고기가 몰려오면 물색이 짙어진다. 고기 눈이 밝은 어로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어민 17명이 한 팀을 이루어 전형적인 어촌 공동체의 협업정신을 발휘한다. 예전에는 그물을 돈 있는 선주가 담당하였으나 어촌계 몫으로 바뀌었다. 육소장망은 여섯 척의 배에서 비롯되었다. 좌우로 세 척씩 여섯 척이 진을 짜듯 벌려 있다가 숭어가 들어온다는 신호가 망통에서 내려오면 바짝 조여서 빈틈없이 에워싼다.‘독 안에 든 쥐’가 이것이다. 가덕도에서는 근래까지도 배를 이용하는 반면에 거제도에서는 10여년 전부터 고정적으로 그물을 쳐두는 것으로 개량화되었단다. “얼마나 잡힙니까.” “많게는 2만마리고요, 엊녁에도 5000마리 잡았어요.”그물질 한번에 2만마리라니. 마침 찾아간 날은 고기가 들지않았다고 울상이었는데 그래도 족히 500여마리는 잡혔다. 어촌계에서 10%를 제하고 나머지는 참가자들이 공평하게 분배한다. 객주가 전량 수거하여 부산권역으로 팔려나간다. 양이 많으면 노량진수산시장까지도 나가는데, 문제는 숭어값. 예전에 마리당 7000∼8000원 하던 것이 금년에는 마리당 1600원이다. 그래도 숭어잡이철은 비수기인지라 어민들로서는 제발로 찾아들어 잡혀주는 숭어가 고맙기만 하다. 숭어가 제 대접을 받지 못함은 흔하기 때문이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남의 영산강, 평북의 청천강, 경기의 한강 등에도 많이 회유한다. 어릴적과 성어 이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재미있다.1000여개의 토속이름이 분포하고 있으니 그만큼 흔하다는 증거다. 모치, 모쟁이 같은 어린 숭어 이름이 그것이다. 식성이 까다로워 양식이 어려우며 95% 이상이 자연산인데다가 기름진 숭어는 피로회복에도 그만이니 하대할 수산물이 아니리라. 지역명산으로 출시되는 영산강 몽탄의 숭어알로 만든 영암어란은 임금님 진상품이었으니 지금도 웬만한 가격을 치르지 않고는 서민들은 접할 수 없는 진미이다. 망을 보아 고기를 잡는 어법은 멸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에 오른 망쟁이가 회유하는 멸치떼를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어 일제히 후리로 끌어당겨 많은 양의 멸치를 잡곤 하였다. 고래잡이에서도 고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잡은 고래몫에서 일정 부분을 발견한 이에게 먼저 떼줄 정도였다. 고기들이 몰려들어옴을 눈으로 발견할 수 있음은 그만큼 자원이 풍부했다는 증거. 사람들은 사람의 눈 대신에 첨단 어군탐지기로 ‘싹쓸이어법’을 감행하고 있으니, 육소장망 같은 어법은 하루에 1만마리씩 많은 양이 잡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다림의 어법’이란 점에서 쫓아가서 잡는 ‘싹쓸이어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갯가로 몰려드는 숭어떼마저 사라지고 육소장망마저 멈춘다면 거제 바닷가의 봄은 꽃은 피웠으되 봄은 오지 않은 셈이 되어 레이첼 카슨의 표현대로 ‘침묵의 봄’으로 변하리라. ●멸치·대구·감성돔… 경남 최대의 어장 거제는 경남 최대 어장 중의 하나다. 멸치, 대구는 물론이고 감성돔, 볼락, 도다리 같은 고급어종이 많이 잡힌다. 우리나라 두 번째로 큰 섬답게 해안이 제주도보다도 크며 61개섬이 퍼져 있어 넓은 어장을 자랑한다. 관광객에게는 해금강이 관광명소로만 여겨지겠지만 고기들에게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정거장 같은 곳들이다. 봄철에는 갓 잡은 도다리와 쑥을 끓인 쑥국을 식당에서 마주칠 수 있는 행운이 뒤따라 진한 봄내음을 식탁에서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거제바다다. 이곳은 전통시대부터 어업규모가 만만치 않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오죽하면 ‘아배가 멸치를 잡기 때문에 멸치값이 올랐다.’는 소문까지 났을까. 거제도뿐 아니라 전라도까지 진출하여 잡아들이고 있다. 동지를 전후하여 찾아가면 대구 전진기지로 분주하다. 거제도를 중심으로 진해만과 거제 외포리 근해 통영해안에서 잡아들여 대구국과 내장탕을 끓이고, 대구포도 말린다. 예로부터 고급음식이었으니 돈 없는 사람은 명태를 사먹고 돈 있는 이나 대구를 먹었다고한다. 식당에서 볼락젓을 내오는 경우가 있다. 어린 볼락으로 담근 젓갈인데, 일찍이 김정은 우해이어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보라어’를 ‘보락’이나 ‘볼락어’라 부른다. 방언에 엷은 자주색을 보라(甫羅)라고 하는데 ‘보’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보라는 아름다운 비단이다. 보라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해마다 거제도 사람들이 보라어를 잡아 젓갈을 담아 배로 수백 항아리씩 싣고 와서 포구에서 팔아 생마(生麻)와 바꾸어갔다고 전해진다. ●日침탈·포로수용소… 모진 역사도 견뎌내 어업이 활발한 반면에, 생필품이 늘 부족하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산이 많고 거칠며 농토는 적은 반면에 고기는 흔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어업이 성했으니, 장승포나 지세포 같은 포구는 동서해안의 작은 포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1995년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합쳐서 거제시로 재탄생하였다. 김광수 거제수협전무는,“고현으로 기관이 다 옮겨갔어도 어업의 본부격인 거제수협만큼은 장승포에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옥포대첩이 이루어진 옥포성, 임진왜란 당시에 우수영이던 개배량성, 왜구들이 쌓은 견내량 같은 왜성 흔적은 일찍부터 일본의 침탈이 집중화된 해변임을 말해준다. 옥포조선소가 들어선 옥포에서 보자면 대한해협과 대마도가 빤히 보이니 임란 전에도 왜선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하였다. 본격적 어업침탈은 합방 19년 전인 1891년에 시작된다. 에히메켄(愛媛縣) 우오시마무라(魚島村)에서 어민 수백명이 구조라로 집단이주하여 멸치잡이에 종사한다. 합방도 되기 전에 일본인회, 학교조합이 들어선다. 일제의 폭압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어민들은 어장을 내주어야 했다.‘일제36년’이라 하는데 틀린 계산법이다. 이후에 구조라 북쪽의 지세포, 장승포가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다. 조선시대의 지세포성이나 구조라성이 모두 왜적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는 바, 하필 그곳에서부터 일제의 어업침탈이 시작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용했던 섬에 미군들이 몰려들고, 한때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360여만평에 수용되었다. 좌우 대립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전국의 유명 관광지로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이 아름다운 섬에도 외세의 개입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셈이다. 수용소는 유적지로 변신하여 역사교육 현장으로 뭍에서 온 이들을 맞아들인다. 조만간 거제 장목과 부산간의 거가대교까지 개통된다고 하니, 거제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 용산선 지하화 마포·용산구청 희비

    용산선 지하화 마포·용산구청 희비

    1929년 개통돼 화물열차 선로로 이용됐던 용산선이 7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이르면 2008년까지 용산선 철로를 철거하고 지하화해 경의선 복선전철로 이용할 계획이다. 그런데 폐선되는 하나의 용산선을 두고 철로가 지나는 용산구와 마포구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용산∼효창공원 구간 약 2㎞가 포함된 용산구는 철로가 지상에 건설될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다. 그러나 공덕∼가좌구간 5㎞가 지나는 마포구는 지상 철로가 철거되고 지하로 옮겨진다. 마포구는 유휴부지 활용방안을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 마포, 테마공간 활용 야심 서울 마포구에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같은 명물 보행로가 생길까. 1929년 화물철도로 건설돼 마포구를 동서로 관통했던 용산선(용산∼가좌)이 폐선되고 이르면 2008년까지 경의선 복선전철로 바뀐다. 특히 용산선 가운데 마포구간(공덕∼가좌)은 지상철로가 모두 없어지고 지하화됨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지상부지 활용방안에 대한 논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유휴부지는 공단 소유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따르면 ‘경의선 용산∼문산 복선전철사업’(48.6㎞)가운데 지하화되는 곳은 마포구에 해당하는 ‘공덕∼가좌’구간 약 5.1㎞다. 이 구간은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10m에서부터 가장 넒은 곳은 약 70m에 이른다. 이 지상철로를 모두 걷어내면 약 18만㎡(약 5만 5000평)에 해당하는 유휴부지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땅은 일단 건설교통부가 소유하게 되지만 실질적 관리나 운영은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맡게 된다. 공단 관계자는 “유휴부지 활용방안에 대해 올해 중 구체적인 용역연구를 맡길 방침”이라면서 “지하에 철로나 역사가 들어서기 때문에 안전상 지상부분을 매각하거나 양도하는 것은 곤란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마포의 ‘샹젤리제 거리’만들자.” 실질적 소유자인 한국철도공단은 유휴부지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마련하지 않은 반면, 부지 활용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는 마포구는 ‘잰걸음’을 걷고 있다. 구는 새롭게 만들어지는 부지 활용을 통해 구세(區勢)를 확장할 기회로 만들 복안이다. 박도식 마포구 도시관리과장은 “용산선은 마포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공단이 부지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활용에 대해서는 우리구의 입장이 가장 크게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체적으로 용역을 발주해 결과가 나오면 공단과 건설교통부에 건의할 계획”이라면서 “일단 마포의 명물이 될 수 있도록 테마가 있는 ‘그린 스트리트’로 꾸민다는 것이 기본방침”이라고 밝혔다. ●마포, 다섯가지 테마로 개발 구상 마포구는 이미 지난해 12월 발간된 ‘2020 마포구 도시발전 종합관리계획’을 통해 용산선 유휴부지 활용방안에 대해 큰 틀의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구 역시 공단 측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지하 시설물들의 안전을 고려해 지상에 대규모 건물이나 기타 복잡한 시설들은 들어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구는 일단 ‘공덕∼가좌’구간을 A∼E까지 5개 테마로 구분해 개발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A는 공덕역과 홍대입구역이 들어서는 구간으로 지하에는 역사와 주차장이 들어서며 지상에는 다목적 광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본 계획으로 하고 있다. 현재 지하철 5·6호선이 지나는 공덕역과 지하철 2호선이 지나는 홍대입구역은 앞으로 경의선역과 신공항철도역이 동시에 들어서게 돼 지하철과 철도로 만들어지는 초대형 역세권을 형성하게 될 전망이다. B구간은 ‘문화체육’이 테마가 된다. 구는 이곳에 인라인 스케이트장이나 X게임 경기장 혹은 농구장 등을 건설해 청소년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구상을 하고 있다. 또 체육시설과 연계해 청소년 문화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공연장 등을 들여놓을 계획이다. C구간은 주민들의 산책과 보행을 위한 공원으로 꾸밀 구상이다.D구간은 마포구의 명물인 ‘웨딩종합문화타운’과 연계해 ‘웨딩’을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들 방침이다.E구간은 철도의 중심지인 용산구와 접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철도를 테마로 한 공원을 만드는 안을 마련했다. 마포구 도시계획 관계자는 “용산선 유휴부지 활용에 관해서는 서울시와 건설교통부, 한국철도시설공단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기관끼리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여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용산구 “지상화 안된다” 줄다리기 서울 마포구가 경의선 복선전철 사업 때문에 유휴부지가 생겨 ‘쾌재’를 부르고 있는 반면, 용산구는 경의선 용산구간(용산∼효창공원)을 지하화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지난해 9월부터 계속하고 있다. 용산구는 구의회 김근태(원효1동·한강1동) 의원이 위원장, 용산출신 진영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고문을 맡는 ‘경의선 및 용산구 관내 철도 지하화 추진위원회’(이하 ‘지하화 추진위’)를 구성해 주민간담회를 잇달아 개최하는 등 지속적인 여론 확산에 힘쓰고 있다. 구는 특히 공단이 경의선 복선전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교통영향평가를 받아야 하고, 교통영향평가 전에는 반드시 주민설명회를 2회 이상 거쳐야 한다는 점을 이용해 설명회를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공단에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공단 관계자는 “용산∼효창 구간이 지하로 될 경우 신공항철도와 부딪치게 되는 ‘종단선형 경합’이 발생하게 되고 또 용산역에서 열차 운행계획을 물리적으로 세울 수 없게 된다.”면서 “경의선 용산구 통과구간은 기술적으로 지하화가 불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또 “주민들에게 지하화의 기술적 문제들을 설명해가며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하는데 용산구에서 무조건 반대만을 고집하고 있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용산구의 입장은 단호하다.‘지하화 추진위’에 따르면 경의선 용산구간은 당초 지하화하기로 한국철도시설공단 측과 약속돼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공단측이 지상에 건설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이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웃 마포구는 전부 지하화로 방침이 정해졌는데 유독 용산구만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는 것도 용산주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키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경의선 용산∼문산 복선전철 사업은 노선 지하화 여부와 유휴부지 활용 방안을 두고 이해관계가 첨예해 시행 7년째 접어들었는 데도 공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 개통시점은 오는 2008년으로 계획돼 있지만 현재 진행상황으로는 개통 시점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사업은 수도권 서북지역 교통여건 개선 및 남북 통일에 대비한 전진기지 마련을 위한 것으로 총 사업비만 1조 1429억원에 달한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어촌은 지금 구조조정중] ③반발하는 어민들

    [어촌은 지금 구조조정중] ③반발하는 어민들

    어민들은 고테구리 어업이 불법이지만 수십년 넘게 생계를 유지해온 생업인데 정부가 전업 등에 필요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단속만 해 살 길이 막막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어민들은 전업을 하거나 자구책으로 영어조합설립과 수산양식장 조성, 조업구역 확대, 어업허가권 변경 등 정부 지원과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부산지역 어민들은 수자원 보호를 위해 고테구리업을 포기하고 전업을 고려하고 있으나 해안쓰레기 수거와 같은 생계지원 사업이 극히 형식적이고, 전업자금 지원 역시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전국어민총연합 전 회장 정남준(69 부산 서구 암남동)씨는 “부산은 주로 통발업 허가를 갖고 있는데 이 방법으로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며 “부산앞바다 실정에 맞는 연승업으로 허가를 바꿔줄 것”을 주문했다. 경남 통영지역 어민들은 영어조합 법인을 구성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사천지역 어민들은 수산양식장 및 어장 피해의 주범으로 떠오른 불가사리 퇴치를 위한 퇴비공장과 대형양식장 면허를 각각 희망하고 있다. 이들은 사업비의 일부를 자신들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정부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전남 지역 어민들은 어선과 어구에 대해서만 보상키로 한 정부방안에 강력하게 반발해오다 최근에는 감척 배에 대해 시가수준으로의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또 ▲새우조망허가 및 조업구역 확대▲인공어초 사후관리사업 용역을 영어조합법인에 발주▲현재 10t 미만인 낚시어선을 20t 미만으로 상향 조정해줄 것과 실뱀장어 안강망어업을 끌망어업으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국어민 총연합회 여수지구회 이영춘(51·여수시 돌산읍 우두리)회장은 “소형기선저인망 어선을 갖고 있는 어민들은 위판실적이 없어 일반감척 보상기준처럼 3년치 어업손실을 받을 수 없다.”며 “감척 대상 어선에 대해 시가대로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800여척의 소형기선저인망이 있는 전남 여수지역은 관광낚시어선, 체험관광단지 개발, 수산물 가공공장 유치, 관광숙박시설 확대 등 지역 특성에 맞는 정부의 차별화 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부산 다대어민회 박상규(55)회장은 “고테구리가 불법어업이지만 어민들은 정부의 묵인아래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배를 뺏는 것처럼 정리해서는 안 된다.”며 “어민들이 전업을 준비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뒤틀린 ‘활어회 문화’ 불법어로 부채질 전남 여수시내 어느 횟집과 식당에서도 세코시(뼈코시)가 나온다. 세코시는 아직 덜 자란 어른 손바닥만한 도다리·노래미·광어·돔·농어·숭어 등을 뼈째로 썬 것. 된장이나 초장에 찍어 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진하게 배어나와 술 안주로 그만이다. 활어회보다 값이 싸고 “믿고 자연산을 먹는다.”며 애주가들이 즐겨 찾는다. 일부 양식장에서 빠져 나온 돌돔이나 도다리 새끼도 있지만 세코시 재료는 자연산으로 보면 맞다. 여수시청 앞 횟집의 남자 주인은 “요즘 고테구리 단속으로 수족관에 고기가 없을 정도여서 값이 큰폭으로 올랐다.”며 “하지만 우리 집은 자연산 아니면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집에서는 도다리 세코시를 1인분에 3만원 받다가 물량이 달리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 4만원으로 33%나 올렸다. 자연산 치어를 선호하는 뒤틀린 활어회 문화가 귀중한 어족자원의 남획을 부추기고 있다. 수요만 있다면 공급은 물불을 안 가리기 마련. 산란기인 금어기에 연안으로 모여드는 어린 고기는 표적 대상이다. 소형기선저인망뿐 아니라 연안에서 조업이 금지된 대형기선저인망과 트롤어선 등도 가세해 1㎝ 이하 치어까지 모조리 쓸어담고 있다. 이들과 연계해 ‘자연산’ 치어만을 전문으로 식당이나 횟집, 회센터에 공급하는 중간상들은 점조직으로 활동한다. 고테구리로 모아 온 치어 운반선을 인적이 뜸한 곳에 대고 활어차로 옮긴다. 좀 크다 싶으면 횟집으로 넘기고 더 작은 것은 양식장으로 넘기기 때문에 이문이 쏠쏠한 편이다. 이런 까닭에 살벌한 단속에도 “돈이 된다.”며 불법조업이 기승을 부린다. 적발된 어선의 절반 가까이가 소형기선저인망이다. 목포해경 직원은 “지난해 뜰망으로 치어만을 잡은 어부를 잡아 여죄를 추궁했더니 100번 이상 조업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고테구리 조업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한다. 무전기 이용은 기본이고 바람 부는 밤에 어로작업을 하는 것이 철칙이다. 특히 도피로 확보와 판매망 점조직은 안전판 역할을 한다. 잡혀서 벌금을 무느니 그물을 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고 새 그물을 사는 게 오히려 더 싸다는 얘기다. 전남도청 단속직원은 “지난해 말 여수와 고흥반도 사이에서 고테구리 배를 적발했다.”며 “그러나 바람이 세고 날이 어두워 단속선에서 보트를 내려 쫓아가니 양식장 사이로 달아나 버렸다.”고 털어놨다. 수백만원 벌금을 물게 된 김모(56)씨는 “고테구리로 잡은 고기를 트럭으로 옮겨 싣다가 대기중이던 해경에 적발됐다.”며 자신의 재수없음을 탓했다. 여수해경 관계자는 “육지에서 적발하는 경우는 십중팔구 어민들이 신고한 덕분”이라고 어민들의 신고를 당부한다. 안강망 선장 김모(50대 초반)씨는 “조업을 마치고 들어오는데 완도 청산도 근방에서 고테구리 배들이 단속망을 피하면서 조업하는 무전 내용을 여러번 엿들었다.”고 귀띔했다. 여수시내 몇몇 횟집 주인들은 “병어나 삼치·농어·돔 등은 냉동했다가 회로 치거나 이를 냉장고에서 숙성하면 육질이 쫄깃쫄깃해진다.”며 “선어회가 활어회보다는 깊은 맛이 더 난다.”고 강조했다. 생선회의 원조격인 일본에서도 활어보다는 선어회를 즐긴다고 하는데 우리들만 유달리 활어회를 고집하고 있다. 여수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정영훈 해양부 어업지도과장 해양수산부 정영훈 어업지도과장은 소형기선저인망어선(일명 고테구리) 정리특별법 시행과 관련,“어장을 보호하고 영세어민도 지원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지원금 수준 등은 전문가·어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특별법이 제정된 배경은. -고테구리 어업은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배를 사들여 정리하려는 것이다. 고테구리 어업을 금지한 수산업법에 따라 단속하다 보니 영세어민들이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반발도 컸다. 이에 따라 특별법을 통해 정부 예산으로 어민들의 배를 사들이고 이들의 어업활동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어민들은 보상가가 낮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데, 보완할 점은 없는가. -처음에는 배만 감정가만큼 보상하려고 했지만 입법과정에서 어민들의 의견을 반영, 어업허가 폐지에 따른 지원금을 최고 2000만원까지 더 주게 된 것이다.5t짜리 배의 경우 배 감정가 2000만원에 지원금 2000만원까지 최고 4000만원을 받는다. 배를 정부에 팔지 않고 보유하면서 합법어업으로 전업할 경우 5000만원까지 융자해준다. 또 고테구리 어업을 못하게 된 어민들이 해안 쓰레기수거사업에 참여하면 1인당 하루 3만원씩 준다. 특별법에 따른 보상금은 전문가와 어민 대다수가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일부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예산이 없어 5년간 연차 정리할 경우 완전 근절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예산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나. -5년 한시법이지만 올 4월부터 1년간 신청을 받기 때문에 1년내 대부분 정리가 될 것이다. 폐기처리 등 사후관리를 위해 5년이란 시한을 둔 것이다. 올해는 기존 예산 전용을 통해 집행하고 내년에는 국회에서 새 예산안에 반영할 것이기 때문에 예산 확보에는 문제가 없다. 지자체와의 예산 분담비율 문제는 현재 협의 중으로, 사업 수행을 위해 원만히 해결될 것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고테구리어업 소굴’ 오명 듣던 부산 다대포 얼마전까지만 해도 불법어로인 고테구리어업의 소굴이라는 오명을 들었던 부산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 연안. 지난해 8월 정부의 소형기선저인망(고테구리)에 대한 단속이 실시된 이후 된서리를 맞았다. 전성기(?)였던 지난 1995,96년도에는 고테구리 어업에 종사하던 배만 무려 400여척에 달했을 정도로 다대포는 불법어업의 전진기지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부산 미식가들에게는 ‘자연산 활어를 맛보려면 다대포로 가라.’ 는 말이 돌 정도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자연산 고기가 넘쳐나는 등 불법어획물이 판을 쳤다. 횟집들도 ‘자연산 전문 취급’이라는 글귀를 내걸고 손님을 끌어왔다. 특히 겨울철이면 불법으로 잡은 ‘돌가자미회’맛을 보기 위해 먼 외지에서도 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97년 IMF(국제통화기금)체제로 경기가 나빠지고 단속이 강화되자 고테구리업도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현재는 전성기때의 4분의 1수준인 99척이 남아 있으나 이중 일부만 허가를 받은 자망업을 할 뿐 거의 다 배를 매달아 놓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어민 오학갑(47·부산 사하구 다대동)씨는 “바다에 고기가 나지 않아 정상적인 조업으로는 고기가 안 잡힌다.”며 “기름값과 인건비 빼고 나면 적자.”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어민들 대부분은 이곳보다 다소 사정이 나은 포항, 울산 등 외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주인 잃은 텅빈 배들만이 정리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 횟집들도 덩달아 타격을 입고 있다. 장사가 안돼 문을 닫는 업소가 여러곳 생겨나는 등 지역 경제도 꽁꽁 얼어붙었다. 양식활어는 집 가까운 횟집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어 구태여 멀리 다대포까지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 S횟집 주인 김모(48)씨는 “경기불황 등 여파도 크지만 자연산 횟감의 공급 감소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었다.”며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씨줄날줄] 대방군(帶方郡)/이용원 논설위원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예상대로 한·일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새로 삽입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대방군(帶方郡)을 ‘중국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 서울 근처’라고 기술한 대목이다. 한반도의 정중앙에 일찌감치 한의 군현이 자리잡아 그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됐다는 인상을 주려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한국 고대사에서 대방군이 갖는 위치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방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이래 우리 역사서에서 산견된다. 이를 정리하면 대방은 우선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의 하나는 아니었다. 처음엔 임둔(또는 진번)에 속한 현(縣)이었는데, 낙랑을 제외한 세 군(郡)이 바로 흐지부지되자 낙랑군으로 편입되었다. 서기 200년 전후해 대방군으로서 독립한다. 위치는 황해도 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다산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서’ 지리지 기록을 근거로 임진강 하류 일대로 추정했고, 실제로 봉산의 양동리 3·5호 고분을 발굴한 결과 전형적인 중국계 전축분(塼築墳)으로 밝혀졌다. 삼국사기에도 남쪽의 백제·마한,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공격 받는 기록들이 등장한다. 대방군의 위상은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 따라 자주 바뀌었지만 중국 왕조가 태수를 파견해 직접 다스린 기간은 짧았다. 지배세력은 토착화해 소 왕국 노릇을 했다. 그런데도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멸망 당할 때까지 존속한 까닭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고구려·백제가 직접 맞붙기 전에는 황해도 일대가 힘의 공백지역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방군이 수행한 무역기지 역할이다. 대방군은 낙랑군과 더불어 중국 문물을 들여오는 전진기지 구실을 했다. 특히 중국-가야-왜를 잇는 중간기지로서 중요했다. 따라서 4세기 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대방군이 서울 근처에 있었다는 후소샤 교과서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최근의 풍납토성 발굴 성과에서 보듯 대방군이 존재한 기간에 서울 일대에는 이미 강력한 국가인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일본 극우세력의 어거지라면 다음 개정판에서는 풍납토성이 대방군의 치소(治所)였다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지역플러스] 울산 남구의회 “제한적 포경 허용을”

    울산시 남구의회는 3일 성명을 내고 “오는 6월 울산서 열릴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제한적 포경이 허용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남구의회는 성명에서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울산시 남구 장생포가 고래잡이를 하지 못하게 된 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며 “장생포 발전을 위해서 상업포경은 아니더라도 연구를 위한 포경 등 제한적 포경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우리지역의 어민들이 포경 금지이후 고래가 오징어 정어리 멸치 등을 잡아먹고 있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며 “어민들이 어족자원 보호 등 생존을 위해 고래를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 전에 포경은 허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삼성·LG 대리점 ‘장군멍군’

    삼성·LG 대리점 ‘장군멍군’

    최근 들어 백색가전은 물론 TV, 휴대전화 등 전방위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지난해 직영 대리점 ‘성적표’가 공개됐다. 결과는 삼성이 매출에서는 LG를 눌렀지만 ‘실속’은 LG가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쟁탈전 30일 두 회사의 직영대리점(디지털프라자, 디지털LG)을 관장하는 자회사인 리빙프라자(삼성)와 하이프라자(LG)에 따르면 리빙프라자의 지난해 매출은 8044억원으로 2003년 8610억원에 비해 줄었지만 하이프라자(6664억원)를 크게 앞질렀다. 하이프라자는 2003년 9898억원의 매출로 리빙프라자에 앞섰지만 1년만에 추월당했다. 리빙프라자가 지난해 5월 휴대전화 애니콜을 대리점에 입점시키며 규모를 키웠고 백화점 유통물량을 하이프라자 대신 LG전자 본사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2003년부터 백화점 물량을 본사에서 맡고 있다. 리빙프라자와 하이프라자의 격차는 2001년 8009억원 대 6090억원에서 2002년 1조 414억원대 9459억원으로 좁혀진 뒤 2003년 뒤집어졌었다. 매출에서는 주로 리빙프라자가 앞섰지만 영업은 하이프라자가 나은 편이다. 리빙프라자는 2003년 40억원에 이어 지난해에도 38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한 반면 하이프라자는 2003년 79억원, 지난해 47억원으로 흑자기조를 유지했다. 직영대리점의 영업성적은 일반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는 접점의 성과를 말해주는 것이어서 양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반도체,LCD 등 부품을 제외한 제품만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가전사로서의 양사의 국내 위상을 간접비교할 수도 있다. 제조업이 유통업보다 먼저 성장한 한국 가전시장에만 존재하는 직영대리점은 가전업체가 야심차게 내놓은 신제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체크하는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대리점이 나란히 위치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1996년 설립된 리빙프라자는 현재 240여개의 직영대리점을,97년 출범한 하이프라자는 175개를 운영중이다. ●‘진검승부’는 올해부터 삼성전자는 반도체 등 부품을 제외하고 올해 국내 매출 10조원을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디지털프라자를 대형화·복합화해 ‘지역상권내 1등점’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브랜드 강화, 각종 정책지원, 인센티브 제도, 시스템 인프라 지원 등을 총동원한다. LG전자는 지난해 12월 ‘총각네 야채가게’와 제휴를 맺고 하이프라자 대방점에 ‘총각네 야채가게’를 입점시켰다.3개월만에 매출이 30%나 늘어나는 등 ‘대박’을 터트리자 최근 가양점에 2호점을 내는 등 매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나란히 ‘디지털프라자’,‘디지털LG’ 광고를 처음으로 공중파 방송에 내보낸 데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한편 반도체,LCD, 휴대전화 등을 포함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지난해 내수 전체 매출은 각각 10조 360억원,5조 862억원으로 2003년(9조 348억원,4조 7937억원)에 이어 2배 가까운 격차가 났다. 지난해 사상 최악의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의 내수매출은 오히려 늘어났지만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고래잡이 꿈꾸는 장생포] 포경선 고동소리 다시 울릴까

    [고래잡이 꿈꾸는 장생포] 포경선 고동소리 다시 울릴까

    “상갓집에도 고래고기를 내놓았던 울산인데….” 우리나라 대표적인 포경(捕鯨) 전진기지였던 울산 장생포항 주민들은 고래를 잡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1986년부터 상업포경 중지를 선포한 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국제포경위원회)가 2002년 일본 총회 때부터 포경 재개를 본격적으로 논의함에 따라 고래잡이가 행여나 허용될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 ●주목되는 울산 IWC 총회 특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울산에서 열리는 올해 제57회 IWC 연례총회(5월27일∼6월24일)에 국내외 고래 관계자 등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포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일본은 올해 총회에서 포경을 허용하는 쪽으로 진전이 없으면 조직 탈퇴 의사까지 내비치며 반포경국가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포경반대국가를 지지하는 그린피스가 울산 IWC 총회기간에 맞춰 반포경 활동을 벌이기로 해 장생포 주민들과 다툼이 우려된다. 그린피스 회원 20여명은 반포경 분위기 확산을 위해 환경운동용 선박 ‘레인보 워리어(Rainbow Warrior)Ⅱ’를 타고 지난 18일 인천항으로 입국, 다음달 4일 울산항에서 이틀 동안 반포경 활동을 벌일 예정이나 장생포 주민들은 울산항 진입을 막을 방침이다. ●개도 지폐 물고 다녔던 부촌 상업포경이 금지되기 전만 해도 장생포는 울산에서 첫째가는 부자마을이었다. 당시 울산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포경업자였다고 한다. 길거리에 다니는 개도 10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돈이 넘쳐났던 장생포, 지금은 10여곳의 고래고기 음식점이 명맥을 지키며 포경 재개를 기다리고 있다. 상업포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고래음식점에서는 그물에 걸려 죽은 혼획(混獲) 고래나 죽어서 발견된 좌초(坐礁) 고래 고기를 판다. 쇠고기보다 2∼3배쯤 비싼데도 부위에 따라 12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 맛을 잊지 못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30여척의 포경선이 많을 때는 하루에 20마리도 넘게 고래를 잡아 북적거렸던 장생포의 영화는 상업포경 금지와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공단으로 둘러싸인 오지로 전락했다.7000여명에 이르던 인구는 1879명으로 줄었고, 포경선 대신 대형 유조선에 생활용품을 보급하는 용달선이 장생포항을 드나들고 있다. 오는 5월10일 개관 예정인 고래박물관과 항구 주변에 늘어선 10여곳의 고래음식점,1995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는 고래축제 정도가 포경기지 장생포를 짐작케 할 뿐이다. 장생포항 바닷가에 자리잡은 4층 규모의 고래박물관에는 망망대해를 누비며 고래를 잡았던 실제 포경선 2척과 길이 12m가 넘는 대형 고래인 브라이드 고래 뼈를 비롯해 고래 관련 갖가지 유물과 자료가 전시된다. ●고래 연구 인프라 확충 시급 최형문(49·전 울산 남구의원)씨는 “옛날부터 울산에서는 상갓집에 고래고기가 나올 만큼 고래는 울산의 전통음식이었다.”며 “정부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고래자원 조사를 해 포경 재개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99년부터 해마다 고래자원 조사를 하고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은 포경금지로 고래류 수가 많이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래류는 이동경로가 워낙 방대해 몇명의 연구관이 몇년 동안 조사한 자료를 갖고 IWC에 연구용 포경 허용을 요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고 밝혔다. 국내 고래전문가로 꼽히는 국립수산과학원 김장근 연구관은 “우리나라는 고래 연구 인프라가 매우 열악하다.”며 “바다의 지배 동물인 고래와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고래 연구기반 확충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돌고래류 포획 허용 방침 일부 고래학자들은 포경금지로 고래류가 지나치게 늘면 오히려 해양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어 해양자원의 균형과 합리적인 관리차원에서 적당하게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세계 고래가 1년 동안 먹어치우는 해양동물은 5억t으로 세계 연간 어획고 9000만t을 5배 이상 웃돈다는 것이다. 장생포 주민들은 IWC 규제를 받지 않고 연안국가가 포획권을 갖고 있는 돌고래류라도 우선 잡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관계기관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어업정책과 윤분도(38) 사무관은 “몇년째 실시하고 있는 고래류 자원 조사자료를 분석해 남아도는 돌고래류에 대해서는 솎아내기 포획을 허용할 방침이나 합리·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조사와 분석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IWC나 우리 정부가 제한적이나마 고래류나 돌고래류 잡이를 허용하는 순간 장생포항에는 20년만에 포경선 고동소리가 다시 울리게 된다. 장생포항 고래잡이 꿈★이 언제 이루어질까….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국제포경위원회(IWC) IWC는 미국·영국·호주·프랑스·네덜란드·노르웨이 등 구미(歐美) 포경국이 중심이 돼 1946년 12월 미국 워싱턴에 모여 설립했다. 목적은 고래자원을 합리적으로 보존·관리해 포경산업을 질서있게 발전시키자는 것. 1949년 런던에서 제 1차 연례회의를 개최한 뒤 해마다 회원국을 돌아가며 회의를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회원국은 우리나라(1972년 가입)를 비롯해 59개 나라. 일본·노르웨이·아이슬란드를 중심으로 한 포경지지 국가와 미국·영국·호주 중심의 포경반대 국가로 양분돼 대립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포경국이 1982년 영국 브라이트에서 열린 제 34차 총회에서 회원국 4분의3 이상 찬성을 얻어 상업포경 모라토리엄(Moritoium, 일시정지·1986년부터 시행)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지금까지 최대 논란이 되고 있다. 상업포경 금지대상 고래는 수염고래류 10종과 이빨고래류 2종 등 모두 12종. 노르웨이는 금지령이 통과되자 이의신청을 한 뒤 상업포경을 계속하고 있고, 일본도 연구용으로 해마다 400여마리 안팎의 밍크고래와 IWC 규제를 받지 않는 돌고래류 수만마리를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IWC는 모라토리엄 채택 당시 1990년까지 과학적인 조사를 한 뒤 일정량을 정해 포경을 재개하기로 조건을 달았으나 반포경국 반대로 재개되지 않고 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0)명태잡이의 본산 강원도 고성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0)명태잡이의 본산 강원도 고성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강원도 최북단 고성 거진항이 부른다.2월 말이면 늘상 열리는 명태축제가 올해로 일곱회 째다. 올해는 24일에 시작해 바로 어제인 27일에 끝이 났다. 그런데 축제랍시고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것이 그 많던 명태들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이랄까. 올해는 축제가 열릴 무렵 명태가 기대보다 많이 잡혀 그럭저럭 외지 손님들에게 ‘우리 것’을 팔 만큼은 되었다. 명태들이 잔치 분위기를 미리 읽고 잔치판을 기웃거리다 그렇게들 잡힌 것일까. 도대체 그 많던 명태는 어디로 갔을까. 서울에서 곧장 고성 거진항으로 가지 않고 먼저 속초엘 들렀다. 속초에서 1-1번 시내버스를 탔다. 이따금 버스 차창가에 자리 잡고 창문 너머의 동해 풍경을 음미하면서 떠나는 바다여행은 나름의 운치와 여유가 있다. 물론 바다쪽에 앉아야만 바다를 볼 수 있지만…. 이 노선버스의 특징은 속초항을 출발해 천진, 아야진, 공현진, 그리고 간성읍내와 반암리를 거쳐 거진항까지 끊임없이 정차, 발차를 반복하되 반드시 옛길로만 달린다는 점이다. 동해안에서 군생활을 한 독자라면 기억날 것이다. 이 시내버스가 달리는 옛길이야말로 일제시대부터 있던 바로 그 ‘신작로’다. 왜 느닷없이 버스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30여년 전에 이곳 동해안 포구마다 가득 쌓여 있던 명태 생각이 떠올라서다. 거진항에도 당시 거짓말 보태지 않고 무슨 동산처럼 명태가 쌓여 있었다. 거진항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산동네 성황당에 오르면 명태를 말리느라 읍내 전체가 명태밭이었고, 그래서 낯선 이에게 생태 한두마리 건네 주는 것으로는 셈도 치르지 않았다. 30여년 전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나.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명태가 그런 대로 잡혔다. 그러다가 최근 5년여 전부터는 급격히 어획량이 줄어 지금은 그 ‘동해명태’를 구경하기도 어렵다. 서울 등지의 값비싼 생태는 대부분 북한산 아니면 일본산이다. 온난화 때문에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떤 문제만 생기면 온난화를 앞세우는 그런 주먹구구식 견해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노가리와 명태는 다른 종자? 근자에 심각한 오해가 있었다.“노가리는 명태와 다른 종자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잡아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바람에 명태가 씨마를까 걱정하던 어부들도 주저없이 노가리를 잡았으며, 해마다 엄청난 양이 술안주로 사라졌다. 정부의 공식 견해도 “노가리는 명태새끼가 아니다.”는 것이었으니 민·관 합동으로 명태의 씨를 말린 꼴이다. 결론은 뻔하다. 노가리의 부모가 틀림없이 명태임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새끼들을 잡아들이고서야 어찌 큰고기가 남아 잡히기를 기대할 수 있으야. 남획은 어김없이 인간에게 보복을 가하여 ‘국민의 생선’이었던 명태는 이제 특수 계층의 생선이 되고 말았다. 만약에 원양태마저 사라진다면, 명태는 역사책에서나 만나게 되리라. 명태는 우리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생선이다. 그 자리를 넘보는 생선은 없다. 서해안 조기가 여기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기는 하지만, 미안하게도 굴비는 총어획량에서 북어에 훨씬 못미친다. 조기와 명태의 공통점은 ‘절받는 물고기’란 점이다. 조기는 제사상 같이 격식이 필요한 곳에서나 대접을 받지만 명태는 시도때도 없이 상전대접이다. 전국 어딜 가나 ‘북어 대가리’ 하나 안걸린 곳이 없으며, 굿판·고사판의 단골이기도 하다. 의례의 주역으로 자리잡았음은 그만큼 품격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며, 그 사실 만으로도 역사문화적 권위를 담보한다. 고려나 조선 전기에는 명태라는 말이 확인되지 않는다. 문헌상의 ‘무태어’가 명태라는 주장이 있으나 입증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300여년 전 명천의 태씨 성을 가진 어부가 최초로 잡았다 해서 명태라고 부른다.”는 속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전설이 최소한의 진실은 가진다. 함경북도의 명산인 칠보산에 면한 명천에서 남쪽의 원산 근역까지가 천혜의 명태잡이 어장이었다.“함경도 명천군에서는 주로 낚시로 잡다가 어장이 남북으로 넓혀진 것”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북청 신포는 지금도 북한의 동해어업 전진기지이며, 그 앞에 마량도가 있다. 이 마량도에 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북어’란 본래 북쪽 바다에서 잡은 것 일제 때부터 명태잡이 본산으로 이름난 섬. 신포읍에서 불과 10리 거리다. 섬에는 12곳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인구는 300여호에 달했다. 동해에 섬이 없다는 통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문암리만의 마천포 등이 유명했으며 도민들 대다수가 어업에 종사하였으니, 한국전쟁 와중에 월남해 속초 청초동 아바이마을에 정착한 이들 중에 상당수가 바로 마량도와 신포 출신들이다. 그들이 함경도식 어법도 가지고 내려와 남한땅에서 함경도식 어법으로 명태를 잡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 마량도 근역은 산란을 위해 몰려온 명태들로 ‘물반 고기반’이었다. 말린 건태를 북어, 생태를 명태라 부른다. 그러나 원래는 북어와 명태는 동의이어(同意異語)였을 것이다. 리만영의 ‘재물보’에는 “북쪽 바다에서 잡으므로 북어”라고 했으며, 유희는 ‘물명고’에서 “대구어의 작은 것인데 동해의 북쪽 끝에서 잡으므로 북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우리나라 동북해 중에 일종의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북어라 하며 세속에서는 명태라 한다.”고 했다. 그런 것이 오늘날에는 말린 것을 북어라고 부르니 어찌된 일인가. 본디 남쪽에서는 생태 구경을 못하고 고작해야 말린 것만 먹었다. 이 때문에 북쪽에서 내려온 북어라면 오로지 말린 건태만을 뜻하는 것이 되어 급기야는 북쪽에서까지 건태를 모조리 북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생것을 명태, 마른 것을 북어라 한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18세기부터 그렇게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태는 대구과에 속하는 한류성 어종이다. 일본의 중부 이북, 중국 연해, 북대서양의 동서 연해에도 분포한다. 일본 것은 우리와 비슷하거나 같은 종이지만, 베링해의 명태는 길이와 몸집이 크고 맛도 많이 달라 일부 수산학자들은 종이 다르다고 여기기도 한다. 명태는 여름에는 200m 이상의 바다 깊은 곳에서 살다가 겨울이 되면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떼를 지어 몰려든다. 산란기는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보통 한마리가 낳는 알 수는 25만∼40만개 가량. 그러니 우리가 즐겨먹는 명란젓 한 젓가락이 얼마나 많은 명태의 생명인지 스스로들 가늠해 볼 일이다. ●명태는 ‘밑물고기’… 낚시·그물 늘어뜨려 잡아 명태는 ‘뜬고기’가 아니라 ‘밑물고기’이기 때문에 잡는 방식도 이에 따라 발달했다. 낚시를 밑으로 늘여 놓는 연승바리, 그물을 밑으로 드리우는 그물바리로 잡는 게 일반적이다. 전통적으로 명태잡이배 선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낚시나 그물을 어느 깊이로 드리우는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명태 떼가 노는 적절한 수심을 노련하게 잡아내야 속칭 ‘대박’이 터지기 때문이다. 같은 어장에서도 이 배는 만선인데, 저 배는 텅 비어 있는 수도 있다. 명태축제 현장체험에서 명태낚시 찍기대회가 열렸는데, 이는 바로 연승낚시를 준비하는 여성들의 노동분업을 놀이화한 것이다. 연승배 선장의 노하우는 고단수의 경험적 지식체계인지라 만만찮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GPS 같은 어군탐지기가 등장하면서 어부들의 체험적 지식은 뒷전으로 밀렸으며, 잘 나가던 선장들은 실업자로 전락했다. ‘바리’라는 말은 고기잡는 방식을 뜻하거나 아니면 ‘다금바리’처럼 어종 자체를 뜻하는 독특하고 순수한 우리 말이다. 낚시의 경우는 명태어족이 감소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줄어들어 지금은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낚시로 그때그때 잡아올리는 연승바리 명태가 그물에 걸린 채 밤새 뻣뻣하게 죽어 나오는 그물바리 명태보다 값이 비쌀 것은 뻔한 이치다. 비교하면서 먹어보니 신선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명태는 동해에서 가장 많이 잡히고, 그래서 산업적 가치가 가장 큰 어족자원이었다. 생태는 물론 냉동, 말림, 소금절임을 해서도 먹는다. 명태지리, 고명지짐이, 매운탕, 무왁찌개, 알탕, 생태김치, 아가미깍두기, 생태김치, 창란젓, 명란젓, 명태식해, 아가미식해, 명태전, 명태완자 등등 요리법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간장에는 비타민A가 많아서 간유를 뽑아 낸다.1911년에 308만여 관을 잡았던 것이 1919년에는 무려 2066관이나 잡았다. 짧은 사이에 어획량이 무려 7배나 증가했다. 건어물은 이동성이 좋아 북어는 전국 각처로 실려 나갔으니, 명태와 상관없는 서해안에서도 명태는 사람들의 입을 떠나지 않았다. ●다양한 이름만큼 널리 사랑받은 물고기 이 즈음의 명태축제 때 잡히는 명태는 ‘춘태바리’다.‘동태바리’는 음력 시월부터 동지·섣달에 잡히는 것,‘춘태바리’는 설날을 지나 잡히는 명태를 말한다. 크기에 따라서도 대태, 중태, 소태, 그리고 아주 작은 앵태, 혹은 노가리로 나뉜다. 본디 노가리는 부산지역 말이다. 이 밖에 산란을 마쳐 뼈만 남은 꺾태, 마지막 어기에 잡힌 막물태, 초겨울 도루묵을 쫓는 은어바지, 섣달에 잡히는 섣달바지 등 다양한 이름이 존재한다. 낚시로 잡은 조태, 그물로 잡은 망태, 여기에다 싱싱한 생태, 말린 북어(건태), 얼었다 녹은 황태, 딱딱하게 마른 깡태, 내장과 아가미를 빼고 4∼5마리씩 한 코에 꿰어 반쯤 말린 코다리까지 가지각색이다. 북한의 민속학연구소 김희권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명태의 다른 이름도 들려준다.4월의 사태,5월의 오태, 아침해가 올라오기 직전과 저녁에 해 떨어질 무렵 잡은 때기물, 강원도에서 잡은 강태, 배를 가른 피태 등등이 그것이다. 이름이 다양함은 명태가 보편적 어류여서 서민 생선으로 폭넓게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오죽하면 이규경이 “일상 반찬에 쓰이며 여염집과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마른 고기를 제사에 쓸 정도로 흔하고도 쓸모있는 물건이다.”고 했을까. 축제에는 20여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든다. 화려했던 옛 추억을 기려서일까. 축제의 팡파르는 우아하게 바다로 퍼지는데 정작 주인공은 그곳에 없다. 만약 거진항이 폭파된다면 온 국민이 난리일 것이나 오랫동안 먹어온 ‘국민생선 제1호 명태’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말들이 없다. 명태의 소멸은 바로 한때 흥청거리던 거진읍내를 여지없이 폭파시킨 꼴이니, 일손 빼앗긴 어민들은 시름없이 방황만 하고 있다. 누구의 책임일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많던 명태는 모두 어디 가고, 값비싼 금태만 남아 있을까.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8) 서산 창리 영신제·위도 원당 띠뱃굿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8) 서산 창리 영신제·위도 원당 띠뱃굿

    조상에게 드리는 차례보다 소중히 여기는 제사가 있다. 사람들은 조상 차례가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기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유교적 의례가 철저히 요구될 때도 이곳 민중들은 무속적인 굿을 앞 줄에 놓았다.‘동네 제사’라 할 수 있는 마을굿이 그것이다. 지금도 전국의 바닷가에서는 새해 정초만 되면 동제, 동신제, 당산제 따위의 이름으로 마을지킴이를 모시는 제를 올린다.‘못생긴 놈들은 얼굴만 보아도 반갑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오랜만에 똑같이 ‘못생기고’ 낯익은 이웃들이 모여 들었다. 객지로 떠돌다 재산을 몽땅 털어먹고 돌아왔어도, 외항선 선원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도, 당산은 거기 제자리에 우뚝서서 지친 이들을 넉넉하게 품어 주었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설맞이 마을굿을 찾아나섰다. 충남 서산의 부석면 창리 영신제, 태안군 황도의 붕기 풍어굿, 서천군 서면 마량의 도둔리 당제, 부안군 위도의 원당제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마을굿이 설날을 기해 일제히 열린다. 몸이 하나라서 모두 돌아볼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다. 다행히 각각의 제마다 시간차가 있어 요령있게 일정을 짠다면 두어 군데 정도는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모진 환경이 만든 작품 ‘창리 영신제’ 충남 바닷가에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창리 영신제는 어쩌면 모진 환경이 만들어낸 ‘작품’일는지 모른다. 천수만 A·B간척지가 조성될 당시 현대건설 간척본부가 부석면의 끝자락인 창리포구에 자리잡았다. 정확하게 공사 중간지점이라서 몸살을 앓았다. 1982년, 처음으로 포구를 찾아 들어갔을 때 한적했던 포구는 중동 공사현장에서 되돌린 엄청난 중장비 덕분에 흡사 기갑부대의 야전사령부 같았다. 얼굴 맞대고 살던 이들끼리 지내던 영신제에 공사장 잡부를 비롯한 외부인의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마을굿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지형이 변했지만, 외딴섬에 자리잡아 최소한 300년 이상 자란 소나무들이 장대숲을 이룬 곳이었다. 당산 꼭대기에는 임경업 장군 내외를 모신 영신당이 자리해 포구를 지켜왔다. 대개의 당산이 그러하듯 이곳의 나뭇가지 하나만 건드려도 탈이 난다. 예전에 비하면 영험이 형편없이 추락한 오늘날에도 함부로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섣달 그믐이면 생기복덕을 엄정히 가려서 부정없는 이로 당주를 삼는다. 당주는 부정을 피해 상갓집 문상도 가지 않으며, 추운 겨울에도 얼음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마을지킴이를 받드는 일인지라 한 치도 마음 놓을 수 없다. 금기는 당주만의 몫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 전체가 성스러운 시간으로 접어든다. 동구와 공동우물에는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둘러 뿌려 잡귀를 쫓는다. 폭풍 전야의 침묵이라고나 할 고요가 마을을 감싼다. 우스갯소리조차 주고받지 않는다. ●굿당, 에너지 발산하는 해방구 역할 정월 초이튿날, 이윽고 날이 밝으면서 마을 공터에서는 꽹과리 소리 요란하게 새해가 왔음을 알리는 파열음이 터진다. 당줏집 마당에서는 기세를 돋우면서 당줏굿을 친다. 배마다 1개씩 오색기를 앞장 세워 당에 오르는데, 참으로 볼 만한 풍경이다. 당오름 자체가 하나의 경관을 만들어 낸다. 당에 오르면 부정풀이부터 시작해 지토굿, 각시굿, 손님굿, 오방굿 등 각각의 굿거리로 연출되는 영신제가 봉행된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영신제 내내 울려퍼지는 배치기다. 배치기는 만선의 기쁨을 노래하며 ‘배에서 치던 소리’.‘연평바다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들여라, 에~에헤여~에헤에헤.’ 구성진 목소리가 울려퍼지면 ‘칭칭칭칭’ 징소리로 화답하며 밤새도록 그렇게들 논다.‘흑인들은 동일한 곡조를 밤새도록 반복하면서도 지겹지 않게 놀 곤한다.’고 격찬할 때, 잠시 우리의 배치기도 생각해 볼 일이다. 제3세계의 음악이 대개 그러하듯, 그 단순하게 반복되는 곡조만 가지고도 며칠밤을 지새울 수 있는 음악이다. ●“환경이 변하니 우리라도 뭉쳐야죠” 배치기의 신명은 놀이의 해방력을 웅변하며, 엄청난 에너지로 발산된다. 굿당이 해방적 놀이공간으로 변하며 굿놀이 자체가 한판의 열린 신명으로 폭발하는 것. 창리의 영신제가 그러하며 여타 마을굿이 대부분 그러하다. 무엇보다 푸근한 것은 커다란 가마솥에 족히 두어말은 됨직한 떡국을 끓여서 공동체가 나눔의 잔치를 벌인다는 점. 천수만이 막히고 어장이 시들해지면서 더러는 양식업으로 전환하고, 더러는 횟집 운영으로 버티는 까닭에 예전 같은 떠들썩함은 사라졌다. 그래도 면면히 굿의 맥락을 이어감은 주변 환경이 예전 같지 않음에 대한 역반응일 수도 있다.“자꾸 환경이 변해 가니까 우리라도 똘똘 뭉쳐서 지켜야 허지 않겠어유.” 당주를 대물림해 온 김석준씨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당주를 대물림 받았으니, 그이처럼 대물림으로 당주를 맡는 이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지난해까지 당을 지켜왔던 배남복(1924년생)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그 옛날 당제의 전통을 아는 이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전통이란 게 묘한 것이어서 외압을 받으면 소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전통으로 지속, 발전해 나가는 양면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핵폐기장에 몸살 앓은 ‘위도 띠뱃굿’ 영신제가 간척으로 몸살을 앓아 왔다면, 위도 띠뱃굿도 핵폐기장으로 몸살을 앓았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핵폐기장 수용 여부로 부안 주민들 간에 골깊은 갈등이 빚어졌고 핵폐기장은 끝내 물 건너 갔지만 위도에는 아직도 그 때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았다. 파장금에서 만난 어떤 주민은 “페리호 사건보다 더 큰 상처”라며 머리를 내저었다. 일부 주민들이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서면서 육지 주민들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위도 내에서도 패가 갈렸다. 정부야 손을 떼면 그만이지만 계속 그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민들로서는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격포항에 들어가도 예전처럼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한 주민의 말에서 핵폐기장이 남긴 상처를 어림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같은 부안군민이되, 전혀 이질적인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마을제사는 지내야 했으므로 몸과 마음을 추슬렀고 저마다 제기의 먼지를 털어냈다. 섣달 그믐밤에는 모두 모여 장단을 맞추며 손발을 가다듬기도 했다. 어김없이 배치기 소리가 바다로 퍼져나갔다.‘황금 같은 내조기야 어낭청 가래질이야/어디 갔다 인제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만경창파 너른 바대 어낭청 가래질이야/질을 잊어 인제 왔냐 어낭청 가래질이야.’ ●당산 높아 오르는 것만으로도 장관 지도책을 보면 전라도 칠산바다 너른바다 위에 점으로 나타나는 섬들. 위도, 치도, 식도, 상왕도 등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위도로, 칠산어장의 전진기지였다. 파장금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가면 곧장 대리에 이른다. 칠산은 조기잡이 어장으로 유명했던 곳. 지난 시절, 한반도 최대의 어장답게 칠산바다 위도에는 지금도 대리의 높은 당제봉에 원당이 있어 칠산바다를 지켜준다. 원당마누라와 장군서낭, 애기씨 등 12서낭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제관을 뽑아 정월 초사흗날 오색 뱃기를 들고, 풍물을 치면서 무당과 제관, 짐꾼들이 모두 정갈한 마음으로 당에 올라 제를 모신다. 높은 당산에 오르는 그 일만 해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산을 오르다 보면 대리포구는 물론이고 칠산바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 마을공동체가 신년맞이를 이처럼 집단적으로 맞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성주굿, 산신굿, 서낭굿, 깃굿 등 원당굿을 마치면 배마다 돌아가며 축원 덕담과 풍어를 기원해 준다. 굿이 파하면 하산하여 용왕밥을 던지고서 ‘주산돌기’라 하여 마을의 요소요소 지킴이들에게 고하는 절차를 밟는다. 이 때에 맞춰 앞바다에서는 띠배를 만들어 용왕제를 올린다.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만든 띠배에는 과일, 떡, 밥, 고기 등 제물을 넣고 허수아비를 여러개 태운다. 물론 돛대도 세우고 닻도 만들어 배 형체를 갖춘다. ●떠나가는 배… 모든 액 싣고 멀리 가기를 띠배는 망망대해로 떠나간다. 저마다 한해 소원을 비는 가운데 온갖 액운을 가득 싣고서 바다로 먼 길을 떠난다. 이때쯤이면 바다가 어둠에 잠겨들고 제축을 끝낸 마을은 다시 일상의 평온함에 묻힌다. 이같은 행위를 띠뱃놀이라 하였으니, 본디는 띠뱃굿이 정확한 명칭이리라. 위도뿐만이 아니라 제주도를 비롯하여 평안도 바닷가에도 이런 유형의 굿놀이가 있었다. 액을 실어보내고, 사해 용왕을 달래서 만선의 풍요와 안전을 기원하려는 신심이 깃들어 있다. 위도 어업의 몰락과 더불어 소박한 민중의 의례조차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마음속으로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를 부르며, 그 띠배에 핵폐기장 문제를 비롯한 모든 재액도 함께 실려 가기를 기원했다. 창리나 위도 어민이 실제 뱃전에서 불러댈 힘찬 배치기를 언제나 들을 것인가. 영영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렇게 마을굿에서나 들어야 하는 것인가. 망연한 바다는 말이 없다.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선배가 바다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은 천수만과 칠산바다에 그 옛날 고기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 [경제플러스] 양재동 하이브랜드빌딩에 통합사옥

    모토로라코리아는 2일 단말기 전문업체인 어필텔레콤과의 합병작업을 마무리짓고 서울 양재동 하이브랜드 빌딩에 통합 사옥을 마련했다. 모토로라측은 통합사옥이 10% 이상 생산성 증대, 초히트 모델 개발 등 모토로라 제품의 글로벌 CDMA 전진기지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경의선 복선전철공사 어디쯤 왔나

    경의선 복선전철공사 어디쯤 왔나

    수도권 서북부를 북으로 관통하는 경의선 복선전철공사가 올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다. 대부분의 공정이 끝나는 2007년이면 ‘추억과 낭만’을 간직했던 기존의 미니 ‘역사(驛舍)’들은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난 96년 부터 시작된 용산∼문산간 48.6㎞ 경의선 복선전철사업은 당초 올해 완공 예정이었다. 그러나 행신∼탄현간 일산 구간과, 서울시 구간 가좌∼성산간 지하화 요구로 공정이 지연됐다. 최근 일산구간은 지상화하고 가좌∼성산간 구간은 지하화하기로 가닥이 잡혀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 됐다. 그동안 투입된 공사비는 2900억원에 이른다. 일산구간 지하화가 좌절된 고양시의 횡단시설물·방음벽 등 설치 요구와 이에 따른 설계변경 등을 포함해 앞으로 최소 8000억원의 추가 공사비가 소요될 예정이다. 총 공사비가 1조원을 훌쩍 넘지만 신설공사에 비하면 약과다. 일제는 지난 1906년 대륙경영의 야욕을 품고 서울∼사리원∼평양∼신의주간 518.5㎞의 복선 군용철도인 경의선을 부설했다.1945년 해방이후 서울∼개성간 74.8㎞ 구간만 단축 운행되다 51년 6월12일 전쟁의 와중에서 남북간 운행이 중단됐고 이후 복선 레일 한쪽을 걷어내고 단선으로 운행됐다. 복선전철 공사는 100년전 기존 노반을 활용해 선형을 최소 회전 반경으로 보강, 복선레일과 교량·고가철로·전철주 등을 신설해 현재 디젤 열차 대신 전기철도가 다니도록 하는 공정이다. 경의선 복선전철의 설계속도는 120㎞에 이른다.50m마다 전철주가 세워지고,10m에 16개씩 강선이 들어있는 콘크리트 침목이 깔린다. 노반의 폭은 12m30㎝. 현재 하루 편도기준 26회 운행이 가능하고 실제론 20회(운행시간 1시간 10분)만 운행 중인 선로용량이 288회로 늘어 수도권 전철 수준인 5∼6분에 한 대씩의 여객열차와 화물열차의 통행이 이뤄진다. 소음·진동이 심한 현재의 ‘디젤 통근형 통일호열차’도 쾌적한 전기열차로 모두 교체된다. 이렇게 되면 용산∼문산간은 현행 1시간 10분에서 50분으로 운행시간이 단축된다. ●한반도∼유럽을 잇는 중심철도로 남북통일 전진기지인 고양·파주 등 신도시와 대규모택지개발지구,LG필립스 LCD 등 산업단지를 서울과 연결하는 출·퇴근 교통수단뿐 아니라 개성공단 등 남북간 인력·물자수송의 주 통로가 된다. 미래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계, 한반도와 유럽을 잇는 대동맥을 지향할 수 있게 된다. 경의선 복선전철은 1공구(용산∼가좌) 6.89㎞는 인천공항∼서울 연결 철도를 시설중인 인천국제공항철도주식회사에서 지하 7∼8m에 시공한다. 공항철도는 같은 노선 지하 30m 지점에 시설된다.2공구(가좌∼행신) 10.462㎞,3공구(행신∼탄현) 13.998㎞,4공구(운정∼문산) 17.25㎞는 각각 쌍용토건·남광토건 컨소시엄을 시공자로 한국철도시설공단 수도권지역본부에서 시행하고 있다. 철도시설공단과 시공사 관계자들은 “금촌시가지를 우회하는 3.8㎞의 금촌고가철로 공사 등 난공사 구간이 있지만 예산만 제때 조달된다면 기술적인 애로점은 없다.”며 “다만 기존 운행구간에서 시공 작업이 이뤄지므로 안전을 완벽하게 확보하는게 가장 큰 관건”이라고 말한다.2007년까지 대부분의 토목공정이 끝나지만 이후 레일부설과 신호·전기시설, 시운전(6개월)이 필요해 개통까지 1년이 더 걸릴 예정이다. ●남북 열차 통행 1년후 가능 지난해 6월14일 경의선 군사분계선상에서 남북철도연결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이후 개성공단 인력과 물자 등 남북교류는 남북연결도로로만 이뤄졌다. 남측은 문산∼군사분계선까지 12㎞의 경의선을 복구하고 임진강·도라산역을 신설하는 공사를 2000년 9월 착공해 완공했으나, 북측은 분계선∼개성간 15.3㎞를 복구하고 판문·손하역을 신설하는 공사를 2002년 시작, 현재 궤도 공사만 마친 상태다. 신호·통신·전력과 역사공사가 안돼 있다. 남북은 지난해 6월5일에 열린 9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2004년까지 나머지 공사를 마치기로 합의했었다. 철도공사는 도라산역을 증축하고 개성공단 교류협력을 위해 마련한 임시 출입국관리시설(CIQ)을 영구시설로 대체하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북측의 공사진척을 가다리고 있다. 문산 이북은 북측이 공사를 완료해도 일단 단선으로 운영하고 복선 건설은 추후 논의될 예정이다. 파주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기존 철로는 어떻게 되나 경의선 복선전철이 완공되면 현재의 서울∼신촌∼가좌역 구간 기존 철로는 KTX와 새마을·무궁화호 열차 등이 수색차량기지와 화전∼행신 사이 KTX 차량기지를 오가는 선로로 활용된다. 여객과 화물은 다니지 않고, 청소와 수리·대기후 출발을 위해 서울·용산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송열차들만 이용한다. 지하 구간인 용산∼성산구간 중 용산∼가좌간의 기존 지상 철로는 폐선될 예정이다. 용산∼수색간은 원래 용산선으로 운영됐으나 현재는 그중 용산∼서강 사이는 상당부분 레일을 걷어내 이미 폐선된 상태이고, 서강∼가좌 구간은 대·소화물과 연탄 등의 화물전용 수송노선으로 쓰이고 있다. 폐선되는 노선의 노반과 주변 철도부지의 장기적인 활용 방안을 놓고 철도공사와 서울시는 공원조성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중이다. 경의선 복선 1공구의 신설되는 공덕역과 연남역(홍대입구역)은 인천국제공항철도와 경의선복선전철역으로 함께 사용된다. 공덕역은 지하 2층 5000평, 연남역은 지하 4층 4500여평의 역사가 지어진다. 경의선 복선은 당초 용산∼가좌 구간만 지하화할 예정이었으나 도심지 지역 단절과 소음·교통장애 등을 지적한 주민들의 요구로 가좌∼성산간도 지하화하기로 했다. 철도공사가 일산구간은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에도 지하화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가좌∼성산은 수용한 것은 지상 철도부지 매각 등을 통해 지하화 사업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파주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낭만의 미니驛舍 추억속으로 경의선 서울역∼도라산역까지 모두 19개의 역이 있다. 복선전철이 완공되면 기점이 서울역에서 용산역으로 바뀐다. 용산역부터 북쪽으로 효창·공덕·서강·연남·가좌·성산·수색(이상 서울시구간), 화전·강매·행신·능곡·대곡·곡산·백마·풍산·일산·탄현(고양구간), 운정·금릉·금촌·월릉·봉암·문산·운천·임진강·도라산(파주구간)까지 27개역이 운영된다. 복선전철은 문산역까지이다. 공덕·연남·성산·풍산·탄현·금릉·봉암·운천 등 8개 역은 새로 생긴다. 나머지 역도 지난 2001년말 준공된 문산역을 제외하고 모두 개량된다. 이때 기존역은 모두 원형을 잃게 된다. 경의선의 기존역들은 대부분 지난 1938년을 전후해 지어져 60년을 넘은 낡은 건물이다. 커봐야 100평을 넘지 않는 단층 역사에 들어서면 전면의 개찰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매표창구와 승객들이 잠시 열차를 타기 전 쉬거나 이별과 만남이 이어지던 빛바랜 나무 장의자들이 배치돼 있다. 때론 술취한 이들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뉘었고, 수많은 이들의 추억과 낭만, 삶의 고단함이 오랜 세월 함께 배었던 공간이다. 그나마 곡산·탄현·운정·월롱 등엔 역무원도 배치되지 않고 승차권도 철도청 매표대행소에서 구입하거나 그냥 승차한 후 열차 객실 승무원에게 정산한다. 그러나 복선전철이 완공되면 이들 미니역과 주변은 상전벽해처럼 변하게 된다. 현재 새 역사 신설공사가 이미 착수된 곳은 수색·행신·월롱역이다. 나머지도 앞으로 3년간 모두 신설되거나 지상·지하·선상·선하역으로 바뀐다. 개량대상으로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금촌역은 고가철로 아래 연면적 1000평짜리 현대식 선하역사로 탈바꿈한다. 백마역도 2000평 규모로 개량되고, 운정역도 700평 규모로 커진다. 지하에 신설되는 연남역은 무려 4000여평 규모에 이른다. 경의선복선구간은 용산에서 경부선·경의선, 공덕역에서 5호선 전철, 서강역에서 2호선 전철이 연결되고 성산역은 6호선 환승역이다. 대곡역에선 서울지하철 일산선이 연결된다. 경의선 주변 역세권 개발과 관련해 부동산은 이미 오를만큼 오른데다, 토지거래 허가구역이고 경기위축까지 겹쳐 현재는 땅값의 추가 상승이 멈칫한 상태다. 그러나 역사들이 새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주변에 산재한 전원주택지 매기까지 합쳐 여건변화에 따라서는 추가 상승여력이 충분하다는 것이 부동산업계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파주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기고] 디지털산업단지 효율적 개편을/한인수 서울 금천구청장

    ‘산업단지’에서 시민들이 주로 ‘옷’을 사고 쇼핑을 한다면 이곳은 이미 산업단지가 아니다. 서울에서 유일한 국가산업단지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의류 할인매장이 집중되면서 산업단지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있다. 오히려 서울 서남권의 패션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도 국가산업단지를 다른 용도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1960년대 구로공단으로 출발해 한국 수출의 전진기지역할을 했던 곳이다.1990년대 중반부터 벤처산업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을 변경했다. 공단은 1,2,3단지로 나눠져 있으며 금천구 가산동에 속하는 2단지가 공단전체 면적의 20%,3단지가 57.1%, 구로구에 속하는 1단지는 22.9%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은 국가공단이어서 금천구가 아닌 ‘한국산업단지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따라서 공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데도 지자체에서 체계적인 개발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단지는 벤처기업,3단지는 지식정보산업단지로서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제는 2단지다. 이곳은 외환위기 이후 봉제업체들이 재고물량을 처분하기 위해 물류창고를 의류할인매장으로 바꾸면서 대형 쇼핑타운을 형성했다. 입소문으로 쇼핑인파가 몰리면서 몇년전부터 활기 넘치는 상업지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부족한 도로망, 주차난, 전력난, 환경문제, 높은 땅값 등으로 총체적인 부실 덩어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구청에서는 국가단지여서 자체 개발을 할 수 없다. 아울러 국가산업단지는 각종 세제감면 지역으로서 이곳의 2002년 지방세 감면액은 약 3억원에 달하며, 아파트형 공장이 모두 건립되면 지방세 감면액은 연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금천구는 서울에서 지역여건, 재정형편 등이 매우 어려운 자치구 가운데 하나다.2단지를 굳이 국가산업단지로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디지털산업단지를 효율적으로 개편해 지역균형개발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4가지 발전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디지털2단지를 우선적으로 국가공단에서 지정 해제해야 한다. 이곳은 1·3단지를 지원하는 업무주거 및 상업지역으로 용도변경해 도시 전체와 조화된 개발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정부에서 추진 중인 지역특화발전 특구, 이를테면 ‘패션로데오 특구’ 등으로 지정해 자치단체 책임하에 패션의 중심지로 개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5개 전략산업 육성계획’에 포함시켜 산업단지 전체를 IT중심으로, 패션매장이 밀집되어 있는 2단지는 의류패션 중심의 전략거점으로 육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넷째, 자치단체의 도시관리계획과 연계해 아파트형 공장 설립 기준 강화 등 도시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 금천구와 국가산업단지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의 조속한 개정을 촉구한다. 한인수 서울 금천구청장
  • “남극서 한국의 미래 캔다”

    “남극서 한국의 미래 캔다”

    한반도에서 직선거리로 1만 7000㎞ 떨어진 곳. 남극대륙이 대서양으로 길게 꼬리를 드리워 빚어낸 사우스 셰틀랜드군도의 대표 섬 ‘킹 조지’에 대한민국 과학미래의 희망이 숨쉰다. 우리나라 남극탐사와 개발의 전진기지인 ‘세종과학기지’에도 을유년 새해의 첫 동이 텄다. 눈앞을 가리는 블리자드(폭설풍)와 영하 20도의 혹한이 살을 에지만 세종기지 대원들의 임무에 쉼이란 있을 수 없다. 어려운 경제사정과 혼란스러운 정치·사회 분위기로 어느 해보다 버겁게 시작한 2005년. 제18차 월동대의 홍성민 대장과 이상훈 대원이 1일 서울신문에 보내온 2통의 이메일 편지에서 우리는 새해의 희망과 각오를 읽을수 있다. ●홍 대장 “희망을 이야기 합시다” 고국의 반대편 남쪽 끝으로 날아온지 벌써 20여일이 지났습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건 빙벽에서 떨어져 기지 앞 바다를 떠도는 유빙(流氷)만은 아닙니다. 자원부국(富國)으로, 과학 선진국으로 거듭나는 우리의 미래가 펼쳐져 있습니다. 처음 짐을 내려놓는 순간, 거대한 설원과 빙원 앞에서 대원들의 눈가가 뜨거워졌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문명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과학 실험장’입니다. 만년빙으로 축적된 빙하는 수십억년 지구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입니다. 대원들은 올 한해 땅과 바다에서 다양한 탐사와 연구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경제가 어려워 모두들 한숨 짓고 있는 상황에서 이국만리 긴 여정을 시작한 우리들입니다.1분1초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멀리서나마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 국력에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을 더욱 채찍질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킹 조지섬 안에는 세종기지 말고도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여러나라의 남극전진기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운 이곳에서 거기 사람들은 앞으로 1년간 귀한 친구가 되어줄 겁니다. 보수니 진보니, 왼쪽이니 오른쪽이니 하는 복잡한 의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화합’이란 말을 신년벽두에 떠올려 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화합을 바탕으로 머지않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대원 “문명밖 미개척 세계로의 도전” 건혁 엄마. 아빠가 펭귄나라에 간다고 좋아하던 건혁이,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했을 건한이, 그리고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난해 12월5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 지구 최남단에 위치한 ‘문명세계의 종착역’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 닿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습니다. 다시 칠레 공군수송기에 몸을 싣고 3시간, 킹 조지섬에 도착한 우리를 반기는 건 초속 20m의 칼바람과 검푸른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뿐이었소. 미래 과학한국의 기반을 다지겠다는 일념만으로 문명 밖 세계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눈과 얼음, 광활한 바다는 자연 그 이상의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은 역시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며칠 전 16명의 월동대원 이외에 식구가 한명 더 늘었습니다. 고 전재규 대원의 1주기를 맞아 추모흉상이 건립돼 기지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혹한의 날씨에도 사랑으로, 희생정신으로 둘러싸인 세종기지는 훈훈합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종교플러스] 파주에 ‘민족화해센터’ 세운다

    천주교가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참회와 속죄의 성전이자 남북 화해운동의 전당이 될 ‘민족화해센터’(가칭)를 세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남북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전진기지로 활용할 민족화해센터를 짓기로 했다. 민족화해위원회는 이를 위해 ‘민족화해센터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봉두완)를 조직했다. 추진위는 내년 봄까지 민족화해센터의 설계를 완료하고, 늦어도 2006년 말까지 완공한다는 방침이다. 센터는 파주 통일동산 내 2400평 부지에 세워질 예정. 센터 안에는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성당을 본뜬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들어서며 ▲탈북자 교육을 위한 연수시설 ▲민족화해를 위한 교육장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한 연구와 활동센터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 [문학이 머문 풍경]채만식 ‘탁류’ 무대 군산

    [문학이 머문 풍경]채만식 ‘탁류’ 무대 군산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 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중략……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려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의 고향’ 군산에는 아직도 소설속의 흔적 많아 채만식(蔡萬植·1902∼1950)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다가 1939년 단행본으로 출판된 ‘탁류’는 금강하구의 항구도시 전북 군산에 살고 있는 ‘초봉’이라는 여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일제 식민시대의 어둡고 혼탁한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풍자한다.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무질서의 격류속에 휩쓸린 인간의 탐욕과 죄악, 파멸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 재물의 노예가 돼 도덕, 윤리, 양심을 내팽개쳐버린 내일이 없는 탁류속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가난, 싸움, 투기, 간통, 흉계, 횡령, 탐욕, 추행, 살인 등으로 짓밟힌 여인 초봉. 죽자고 해도 죽을 수 없고 살자고 해도 살 수 없는 파란만장한 우리 민족의 사회적 현실을 ‘탁류’는 다각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탁류’의 고향 전북 군산시에는 지금도 소설속의 흔적들이 두루 남아있다. 일제가 호남미를 반출하면서 경제적 침탈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군산이 번창일로를 걸으며 화려한 영화를 구가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망동 월명공원에 오르면 군산시가지와 도도히 흐르는 ‘탁류’ 금강을 굽어볼 수 있다. 온갖 사연들을 쓸어담은 흐린 물줄기가 서해로 들어가는 하구에 크고 작은 선박들이 그림처럼 오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강건너 멀리 소설의 주인공 ‘정주사’의 고향 충남 서천이 보인다. 1984년 8월 공원 중앙에 ‘채만식 문학비’가 세워졌다. 아직도 일제시대 목조주택과 건물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군산시 금암동, 장미동, 선양동 일대에서는 작품속의 ‘째보선창’,‘콩나물고개’,‘조선은행’ 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주 무대인 째보선창은 선창 앞에 째보처럼 골이 갈라진 물길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현재는 복개돼 째보의 물길은 볼 수 없다. 90년대 들어 서부어판장에 현대식 건물과 횟집이 줄줄이 들어서 옛 명성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군산시민들은 아직도 이곳을 째보선창이라고 부른다. 콩나물고개는 소설속의 정주사가 출퇴근길에 넘던 고개다. 판잣집이 콩나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선양동 동사무소 뒤 산자락을 따라 빽빽히 들어선 달동네 주택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둡고 혼탁한 사회상 신랄하게 풍자, 고발 고태수가 다녔던 은행으로 추정되는 조선은행은 장미동에서 해안쪽으로 가다 보면 눈에 띈다. 우뚝 솟은 2층 석조건물이다. 고태수는 이 은행에 다니며 은행돈을 유용해 주색잡기에 빠지고 미두에 손을 대다 손해를 본다. 조선은행 건물은 해방후 한때 나이트클럽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현재는 폐가로 변했다. 건물 바로 옆에는 군산항 개항 100주년 기념광장이 조성됐지만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하다. 2001년에는 내흥동 금강하구둑 옆에 ‘채만식문학관’이 건립됐다. 깔끔한 2층 건물에는 탁류 초판본,43년에 쓴 배비장전 육필원고 등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채만식의 일대기에 대한 정보를 영상물로 볼 수 있다. ●가난했지만 품위 잃지 않은 ‘불란서 백작’ 백릉(白菱) 채만식은 1902년 6월17일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출생했다.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가세가 기울어 1년 반만에 중퇴했다. 귀국후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개벽사 기자를 전전했고,1925년 단편 ‘새길로’로 조선문단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초반에는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등 동반작가적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0년대 들어서 ‘레디메이드 인생’ 등 풍자성 짙은 작품을 발표했다.‘탁류’는 풍자적 기법이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45년 고향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해 익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1950년 6월11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향년 49세. 묘지는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 선산에 마련됐다. 가난했지만 항상 감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단정히 입고 모자까지 쓰고 다녀 ‘불란서 백작’으로 불렸다. 장편, 단편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 등 29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채만식에 대한 친일논란이 일고 있지만 군산시는 2002년 ‘채만식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사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2003년부터 ‘채만식 문학상’을 제정해 우수한 소설작품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조선은행 자리는 박물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군산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5)구로시오난류와 나로도 삼치잡이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5)구로시오난류와 나로도 삼치잡이

    겨울바다가 따뜻하다. 해풍이 강해 체감온도는 낮아도 실온은 높다. 구로시오(黑潮)난류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아예 ‘흑조문화권’이란 문화권역을 설정하기도 했다. 가령,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평북 철산의 가도까지 동백이 자생하는 것은 이 난류 때문이다. 이 무렵 방어·삼치·참치 등이 남도의 바다를 찾는 것도 이 난류 영향이다. 삼치 하면 대개 ‘구이’를 생각한다. 점심시간, 도심의 뒷골목을 지나칠 때면 구수한 냄새가 잡아끈다. 구이용으로 쓰이는 길이 30㎝, 무게 800g 정도의 삼치는 현지에서 ‘고시’라 부르는 새끼들.“고시가 삼치 축에나 든다요?”라고들 한다. 일본 수출품이라 일본어인 ‘고시’가 일상어로 남아 있다. 이런 ‘고시’는 삼치로 쳐주지도 않는다. 적어도 삼치 반열에 끼려면 1㎏은 넘어야 한다. ●1㎏은 넘어야 삼치반열에 낀다니… 삼치를 찾아서 멀리 고흥의 나로도까지 내려갔다. 요새야 길이 좋아 어디든 어렵잖게 갈 수 있지만 나로도는 정말 멀다.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유장한 득량만을 보고 싶어 장흥쪽 수문리로 접어들었다. 보성 율포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하지만 반지락회로도 익히 알려진 곳. 살짝 데쳐서 야채를 넣고 매운 양념으로 버무리는데 이 정도의 선도라면 맥주집의 통조림 골뱅이 정도는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다. 득량만은 곳곳에 개막이그물이 들어차 흡사 개막이의 본향 같은 느낌이다. 나로도는 외나로도와 내나로도 2개의 섬이 모두 다리로 연륙됐다. 고흥 자체도 육지 남단에 고구마처럼 매달린 반도 지형인 데다 나로도는 그곳 읍내에서도 장장 1시간여 거리다.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완벽한 오지의 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로도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나로도를 모르면 삼치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돌 법도 하다.‘모든 삼치는 나로도로 통한다.’고나 할까. 언뜻 이런 농담 같은 구호가 떠오른다.‘외국인은 참치, 우리는 삼치, 삼치는 나로도!’. 축정항, 일명 나로도항에서 봉래면 수산담당 김영우씨와 군청의 정상태씨를 만났다. 그들의 안내로 어판장에서 5㎏짜리 삼치부터 샀다. 가격은 ㎏당 1만원. 무게가 자그만치 5㎏인데도 ‘중치’란다. 큰 것은 10㎏도 넘는다니 뒷골목 구이집에서 굽던 삼치는 ‘삼치 반열’에 끼지도 못한다는 말을 이해하겠다. 삼치에 관한 기존 상식이 모두 깨진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어린 것들만 먹고 살아 왔다.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수산연구소의 김진영 박사가 “키워서 먹어야 하는데 1년짜리들을 무턱 대고 잡아들인다.”고 개탄하지 않던가. 그중 맛있는 놈은 3∼5㎏짜리다. 모든 고기가 그렇듯 너무 크면 맛이 없다. 맛으로 보면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중간치가 좋다. 어린 삼치는 ‘덜 여문 격’이라 비린내가 심하고 9월 중순 이후 10월 말까지 수확기에 잡힌 놈들이라야 살집이 딴딴하고 영양가도 차올라 맛있다. 나로도 사람들은 삼치구이를 잘 모른다.“이 비싼 고기를 어떻게 날름 구워 먹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씨알이 아주 잔 놈들만 구워 반찬을 삼는다. 회를 먹어 보니 냉동 참치와 맛이 비슷하다. 삼치는 달리는 뱃전에서 미끼 없는 ‘공갈낚시’로도 연방 낚인다. 물위를 미끄러지는 낚시 미끼를 보고 달려들다가 잡히곤 한다. 채낚기는 주로 낮에 하고, 자망은 해질 녘에 놓았다 아침에 거둬들인다. 푸른 등을 가진 물고기가 모두 바다 윗부분에서 놀듯 삼치도 윗물 고기다. 햇빛을 듬뿍 받는 등 푸른 생선이 몸에 좋은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격은 낚시로 잡은 고기가 그물로 잡은 고기보다 위다. 그물에서 발버둥치다가 살이 뭉그러지기 때문에 그만큼 상품의 격이 떨어진다. 그래서 삼치 채낚기가 많다. 그러나 중국의 대형 쌍끌이어선이나 정치망에 잡힌 고기가 국내에 다량 유입되면서 이 삼치가 고작 냉동식품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냉장 기술의 발달은 보존이란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이 기술을 믿고 필요 이상으로 무한정 잡아들인다는 점에서는 반생태적이다. 냉동 기술의 발달이 거꾸로 인간의 욕심을 무한대로 극대화시켜 생태계를 얼어붙게 한 꼴이다. ●“외국인은 참치, 우리는 삼치, 삼치는 나로도” 활어가 아닌 다음에야 삼치 맛은 저장 기법이 좌우한다. 일단 잡은 삼치는 얼음에 묻는다. 그러나 냉동은 금물. 냉동하면 연한 살이 녹아내려 씹을 것이 없다. 층층이 얼음을 깔고 살이 다치지 않게 비닐을 깐 다음에 삼치를 한 겹 놓은 뒤 그 위에 다시 얼음을 까는 식이다. 삼치는 잡은 즉시 먹는 것보다 두어 시간 얼음에 재워 놓았다가 먹어야 시원한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활어가 아닌 선어여서 적당히 숙성시켜 먹어야 맛이 좋음을 나로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깨닫고 있는 셈이다. 지난 60∼75년 연간에 나로도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흥청거렸다. 파시가 열려 엄청난 양의 삼치가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삼치와 함께 대하, 중하, 서대 등도 덩달아 일본에 팔렸다. 이 어류는 파시가 막을 내린 뒤에도 부산을 거쳐 속속 일본으로 팔려 나갔고, 본토 사람들은 그 바람에 삼치를 맘껏 먹기 어려웠다. 그랬던 삼치의 수출길이 막히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삼치에 맛을 들였다. 재미있는 것은 삼치회를 즐기는 이들은 대부분 보성 고흥 순천 여수 등 전남 동부권 사람들이라는 점. 서울에서도 주문이 밀리지만 주로 출향 인사들에 국한된다.“서울에 올라갈 게 없지요. 물량이 달리는 데다가 그쪽 사람들은 삼치회를 모르잖아요.” 그렇다. 서울 사람들이 아는 삼치는 오로지 ‘구이’뿐이다. 부산이나 인근 하동에서도 회는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서부두 횟집 등에서 심심찮게 삼치회를 맛볼 수 있다. 삼치의 문화권역이 지극히 토속적이며 남방적임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두어시간 얼음에 재웠다 먹어야 제맛 값도 애매하다. 많이 잡히면 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금값이다. 명절 무렵, 출향 인사들이 귀향할 때면 집집마다 삼치를 준비한다. 적절하게 때를 맞춰 먹으려고 시간까지 맞춰 가며 냉장을 한다. 그래서 그때는 값이 뛴다. 광주에서는 아예 ‘차떼기’로 사들인다. “회는 살이 흐물거려 맛이 좀 그렇다.”고 했더니 “서울에서 먹던 딱딱한 ‘고시’에 익숙해서 그렇다.”는 핀잔이 돌아온다. 서울에 올라가는 새끼 삼치는 대부분 배를 가른 냉동 삼치인데, 냉장고에 오래 둬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딱딱해졌다는 것이다.“요것이 막 낸 것인디, 이것을 드시고 서울 가서 묵어 보믄 아마 돌 씹는 맛일 것이오.”한다. 같은 횟감이라도 가공처리 방식에 따라 전혀 맛이 달라질 수 있음을 금방 깨닫는다. 여기에서 횟감의 생명은 처리방식이란 배움을 얻는다. 먹다 남긴 회를 거둬 간 주인이 계란 풀어 옷을 입힌 튀김으로 튀겨 내놓는다. 생선전과 비슷하다. 배가 불러 젓가락을 들고 엉거주춤하자,“4명 가족이 오면 잘 먹는 사람들은 5㎏도 부족해요. 한 10㎏는 묵어야 삼치회 좀 묵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삼치 맛을 아는 마니아들은 몇몇이서 두어 상자쯤 간단히 먹어 치운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삼치회를 보면 사족을 못쓸 정도로 선호도가 높다. 한국인들은 씹히는 맛이 강한 회를 즐기는 반면, 입에 넣으면 녹아내리는 맛이 드는 남방계 회는 덜 좋아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의 식습관에 길들여진 까닭이다. 기름기가 거의 없어 참치에서 느껴지는 그런 느끼함이 없다. 살을 발라낸 뼈와 머리는 무를 숭숭 썰어 넣고 푹 끓여낸다. 일종의 어죽인데, 국물이 시원해 술안주 겸 식사 대용으로 그만이다. 삼치에 관한 한 나로도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인근 여수에서도 많이 잡히지만 제값을 받지 못한다. 아귀가 마산에 가야 제값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같은 고흥땅에서도 녹동항에서는 제값을 못받는 대신 나로도 축항에서는 제 대접을 받는다. ●8월말부터 12월초까지 삼치잡이 절정기 삼치는 거문도와 나로도 사이가 주어장이다.7∼8월 중순까지는 대개 어린 새끼잡이다. 찬바람 부는 8월 말부터 12월 초까지가 삼치잡이 절정기. 인근 완도 청산도에서도 삼치가 많이 난다. 그러나 청산도 삼치도 반드시 나로도를 거쳐서 위판되므로 ‘모든 삼치는 결국 나로도로 통한다.’ 고흥의 주요 항구는 나로도항과 풍남항, 그리고 녹동항이다. 소록도가 지척인 녹동항은 아주 조그마한 어촌이었다. 반면 나로도항은 일제시대부터 어업전진기지였다. 나로도항은 수심이 7m나 돼 배가 드나들기에 별 장애가 없다. 어장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사실 오지의 섬에서 어로 아니면 해 먹을 것이 없었던 것도 이곳에서 어업이 발달한 이유가 된다. 이제 나로도는 우주항공센터로 발돋움하고 있다. 발사대는 물론이고 우주체험관이 생기면 관광객들이 떼지어 몰려들 것이다.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 발전에 이만한 희소식도 없다. 그러나 보상도 만만찮다. 발사 소음 때문에 사람은 물론 가축들도 섬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나로도의 본디 이름은 ‘나라의 섬’에서 비롯됐다. 흥양현(興陽縣)에 딸린 국영 목장이었다는 뜻인데, 다시금 ‘나라의 섬’이 되고 말 것이란 씁쓸함이 없지 않다. 나로도와 여수 화양면을 연결하는 연륙교도 착공됐다. 지도가 바뀔 판이다. 그러나 나로도 사람들의 삼치회 선호도는 바뀔 것 같지 않다. 오랜 역사문화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작은 포구마다 각각 자랑하는 해산물이 있어 사랑받고 있으며, 나로도의 삼치문화도 이런 토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경기도나 충청도에서는 삼치 선호도가 낮다. 남방어류답게 남방에서 선호가 높다. 바로 구로시오난류가 배태한 보다 큰 차원의 난류문화권임에 틀림없다.
  • [산하기관 탐방] 코리아 디자인센터

    [산하기관 탐방] 코리아 디자인센터

    “코리아 디자인센터가 뭐하는 곳인가요.” 2년여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자리잡은 ‘코리아 디자인센터’. 각종 전람회와 작품 공모전 등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코리아 디자인센터는 문화공간으로, 서울 혜화동에 있던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옮겨와 건물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산하기관인 센터의 건물은 연건평 1만 4201평(지하 4층, 지상 8층)규모의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디자인 정보센터, 디자인 체험관, 디자인 인큐베이터,e-디자인 아카데미 등 각종 디자인 지원시설을 갖췄다. 디자인협회 및 단체, 디자인회사와 함께 탄탄한 디자인 정보망을 형성해 한국 디자인산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코리아 디자인센터 건물로 이전한 뒤 각종 행사의 질 향상과 양적인 증가를 가져오면서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두드러지고 있다. 우수 산업디자인 상품,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 한국 청소년디자인전람회, 대한민국 디자인·브랜드 대상, 디자인대학박람회, 코리아 국제포스터비엔날레, 벤처디자인상 선정, 국가상징 디자인공모전, 성남 국제디자인포럼 등 다양한 행사로 국내 디자인 업계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저렴하게 전시관 대여도 한다. 이 곳에서는 디자인 공부도 하고 선진 디자인 문물도 직접 체험할 수 있다.‘글로벌 디자이너 양성과정’을 통해 온라인 이론교육과 해외 연수를 지원한다. 3년 이상 경력의 디자이너와 대학생(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하며,80%를 정부가 지원한다.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는 ‘리빙디자인 페스티벌 2004’가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주관으로 열렸다.‘Fun(즐겁고 재미있는)’이라는 주제로 일상에서 벗어난 공간을 구성,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 즐기도록 꾸몄다. 이번 행사에서는 김진수씨 등 실내디자이너 8명이 주부들로부터 일상적인 주거공간 인테리어에 대한 질문을 받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8인의 유명 실내디자이너 세미나’도 마련됐다. 오는 12월21일부터는 제2회 코리아국제포스터비엔날레가 내년 1월 말까지 열린다. 포스터디자인의 세계적 흐름과 발전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국제적 행사다.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제19회 일러스트레이션 전국공모전이 개최되는 등 내년 초까지 각종 전시·공모전이 계획돼 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9)속초 아바이마을의 삶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9)속초 아바이마을의 삶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도 보고, 찾아도 봤던 그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던 무수한 그 ‘아바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속초시의 바닷가 마을 청호동의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더 유명한 ‘함경도촌’을 찾아가면 그네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속초에서 서울로 오자면 미시령을 넘게 마련인데, 그 고갯목에 차를 세우고 굽어보면 속초 시내와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의 영랑호, 오른쪽의 청초호, 그 뒤편으로 동해가 배경막처럼 놓여져 산과 바다와 호수의 동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초호의 길이 1㎞, 너비 80여m 남짓한 백사장에 함경도 피란민들이 처음 피란선의 닻을 내렸다. 그럭저럭 살다보면 돌아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으나 영영 불귀의 몸이 되어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1세대 세상은 거의 막을 내렸고,2세대도 이제는 거의 중년을 넘겼다. 그렇게 50여년을 청초호 바닷가에 뿌리 내리고 살았다. 속초는 본디 자그마한 읍내였다. 속초면이 속초읍이 된 시점이 1942년, 해방 이후는 38선 이북에 포함되어 있었다. 설악산을 병풍처럼 끼고 있고, 석호가 그야말로 그림같이 펼쳐져서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주민들은 어업보다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1930년대, 정어리떼가 청초호로 몰려들어 배들이 새까맣게 닻을 내렸을 때도 정작 속초배들은 별로 없었다. 전쟁은 중앙의 역사만이 아니라 지역사도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니 속초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업에 종사하는 피란민이 원주민보다 많아지면서 급속도로 어업 중심지로 바뀌었다. 종전 이후에도 연고를 찾아 몰려드는 연쇄 이동이 맞물렸다.‘일가 친척 없는 몸’들이 고향 사람을 찾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5만여명이 배를 타거나 육로로 내려와 이곳에 여장을 풀었다. 선단을 이룬 이들은 청초호 모래톱에 배를 댔다. 육로로 내려온 이들은 학사평(지금의 공설운동장 쪽)에 ‘해방촌’을 꾸렸으나 차차 흩어져서 도시 속에 녹아들었다. 반면, 본디 어업에 종사하던 청호동 사람들은 강인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는 중이다. ●쌀로 빚은 가자미식해·북청 사자놀이 일품 함경도, 그 중에서도 함경남도 사람들이 7할 정도 차지한다. 정평 이원 영흥 단천 흥원 신창 신포마을 등 청호동 집단취락명은 이네들이 내려와서도 응집력을 갖고 살아왔음을 웅변한다. 이 중에서도 단천과 신포마을이 헤게모니를 쥐고 살았다. 속초에는 지금도 함남도민회, 원산시민회, 함흥시민회, 북청군민회 등등 무수한 ‘월남 조직’이 있어 ‘피란민 도시’의 면모를 보인다. 이들이 석호의 모래톱에 불과한 청호동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국가 소유 해빈(海濱)인지라 무단 정착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밥벌이 기술’인 어업을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분단기에 이북 어민들이 전국 해안에 뿌리를 내리면서 ‘어업의 장기지속성’을 보여준 사실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 그러나 전국을 돌아보면 해안 곳곳에 이들이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서해안 덕적도 진리포구는 황해도민이 집단 거주하며, 화성의 마산포같이 작은 포구에도 황해도촌이 존재한다. 인천시 화수부두에도 유별나게 황해도민이 많았으니, 김금화같은 무당들이 인천을 거점으로 배연신굿을 하는 토대도 바로 이곳이다. 전쟁때 선단을 통한 대대적인 피란과 정착이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모진 해풍이 불어닥치는 낯선 바닷가에 당도하여 고생고생한 대목은 필설로 이루 말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분단의 비극이었다. 미군부대의 철조망 주변에 널린 레이션 박스를 주워 오고, 부서진 배 등을 엮어서 집이랄 것도 없는 집을 지었다. 겨울이 오면 흙을 발라서 흙집이 되었다. 구겨진 드럼통을 펴서 지붕을 얹기도 했고, 주변에 돌아다니는 모든 물건들을 주워 모아 청호동을 만들어 나갔다. 남해안의 여수, 거제 등으로 피란 갔던 이들, 경상도의 후포, 구룡포, 강원도의 양양, 대포 등에도 이들은 몰려 들었다. 나중에는 이른바 ‘반공포로’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 들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청호동에서도 모래톱 맨끝에 형성된 신포마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신포는 오늘날 북한 최대의 수산사업소가 있는 어업 전진기지이며, 일제시대에 함경도 어업의 최대 거점이었다. 한마디로 신포사람들은 동해안에서 가장 뛰어난 어민들이었으니, 이들의 저력이 모여 강원도 유수의 어항 속초를 만드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포는 남쪽으로 봉화반도가 뻗어 나왔고, 서쪽과 북쪽에 산이 있어 바람을 피하기 좋다.‘한국수산지’(1905)에 따르면, 호수 300, 인구 1360여명이었으며 명태 집산지로 이름 높았던 곳이다. 당시에 인구 1000명이 넘는 포구라면 상당한 규모다. 식민지로 접어들자 시가가 번창하며 기선 출입이 잦고 일본인 거주자가 증가했다. 건너편 북청으로 정기선이 다녔으며, 성진 원산 부산 등지로 연안 회항선도 다녔다. 1905년 당시에 이미 일본인 거주자는 수비대, 헌병대를 제외하고도 남자 31, 여자 23명이 살았으며, 직업도 무역상 기선업 잡화상 매약상 여인숙 음식점 과자상 우육상 등 다양했다. 신포 바로 앞의 마량도 출신인 박임학(79)옹의 증언.“북청군 신포읍 마량도가 고향이지요. 지금 경수로 만드는 곳까지 포함해 신포시가 되었어요. 신포 앞 섬, 거기가 내 고향 마량도지요. 신포 읍내에서 마량까지 수로로 10리 밖에 안되요. 연락선이 있었는데, 하루에 세번씩 다녔지요. 마량도는 12개 마을(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소방서, 주재소, 그리고 국민학교도 있고,300여 호가 살았지요. 평지 대신 산이 많았고….” 지도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신포와 홍원 사이의 마량도가 바로 코앞이다.12개의 마을이 형성될 정도의 크기이니 동해안에 섬이 없다는 우리들의 통념을 깰만 하다. 밑으로는 함흥이 있고, 함흥만 아래에 원산이 있어 천혜의 산란장이다. 이른바 한반도의 허리라고 하는 바로 그곳이다. 신포사람들은 청호동에 정착한 이래 한 시도 배를 떠나지 않았다. 함경도 명태잡이 기술이 이곳에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피란민을 통한 어업기술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 당연히 ‘아바이 말씨’와 음식도 함께 와 뿌리를 이어갔다. 덕분에 지금도 청호동 골목길에는 아바이순대를 비롯하여 함흥냉면 간판 등이 줄지어 서있다. 단천 출신으로 단천식당이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윤복자(63)씨는 함경도 음식 중에서 해산물로 명란젓 창란젓 아가미젓 꽁치젓 메가리젓 오징어젓 등의 젓갈류를 꼽았는데, 그 중 가장 함경도적인 것으로 가자미식해(食)를 내세웠다. 생선을 소금에 절이면 염장어가 되고, 발효시키면 식해 또는 어장(魚醬)이 되는 것이니, 이런 유의 음식은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생선식해는 이른바 ‘감주’식혜와는 다른 것이지만, 발효시킨다는 뿌리는 같다. 곡식과 생선을 섞어 발효시킨 것이 가자미식해이니, 동해안의 원래 주인공인 동예(東濊)나 발해인들이 바로 이 식해를 먹었을 것이다. 곡식과 생선을 버무려서 발효시켜 저장하는 기술은 선사시대 이래의 식생활이니 가자미식해는 한반도에 흔치않게 남아있는, 그 자체가 바로 살아있는 무형의 문화유산 아니겠는가. ●명태잡이 어업기술 고스란히 전파 사실 동해안에 가자미만큼 흔한 고기도 없다.“왜 식해를 만들때 수많은 생선 중에서 가자미를 쓰느냐.”는 질문에 “뼉다구가 날래 물르기(빨리 삭기) 때문”이란다. 덧붙여 “가재미 식해는 뼈가 물러야지 좋으니까.”라고 사족을 단다. 재미있는 것은 조밥 대신에 쌀밥을 쓴다는 점.“경상도 사람들이 조밥을 넣지, 여기서는 그리 안해요.”이런 습속은 다른 곳도 같아 강릉시 사천면 진리 일대 등 여타 강릉시 일대에서도 흰 쌀밥을 이용해 식해를 만든다. 조로 만드는 것과 비교해 맛이 어떠냐고 묻자 “조밥보다 쌀밥이 더 맛있어요. 예전에는 값도 쌀이 비쌌지요. 삼척 넘어가고 경상도 가니까 다 조밥 넣데요. 그러나 이 인근은 모두 쌀밥으로 해요.”우리가 알던 ‘조밥 가자미식해’와는 다르다. 반백년쯤 지나다보니 아바이들의 삶도 서서히 변해 갔다.2세대들은 강원도 원주민과 많이 결혼했으며,3세대들은 학교, 직장 문제 등으로 외지로 나가 사는 경우도 많아 ‘아바이마을’의 정체성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속초시는 낙후된 이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지금도 드라마 ‘가을동화’에 등장한 ‘갯배’라는 독특한 도항 수단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새 다리가 완공되면서 거대한 교각에 마을 경관이 눌린 꼴이 되고 말았다. ●취락지 보존 ‘아바이박물관’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2세,3세로 내려가면서 피가 섞이고, 함경도적 정체성도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청호동 바닷가 취락지를 보존해 ‘살아있는 아바이박물관’ 정도로 했으면 하는 희망이다. 분단시대의 박물관이자 분단의 균열 속에서도 고향의 응집력을 지니고 반백년을 살아온 그네들의 삶은 그 자체가 ‘역사자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양문화사적으로 그들의 어업기술사는 이북의 신포와 마량도 어업사를 고스란히 옮겨온 경우에 해당된다. 옛 사진첩에 1950년대의 북청사자놀이가 확인되니,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고향의 춤과 노래를 계속 이어왔다는 증거 아닌가. 쌀밥으로 빚은 가자미식해와 북청사자놀이의 호탕한 대륙적 음악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바이 삶’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시신을 화장하여 속초 바닷가에 뿌리면서 바닷물을 통해서라도 고향으로 되돌아가길 기원하는 아바이들이 존재하는 한, 청호동은 지켜지고, 또 살아 남으리라.
  • “서산사업장 증설… 중국수출 전진기지로”

    “서산사업장 증설로 중국 수출의 전진기지를 확보하고, 매출도 올해 1조 2000억원에서 내년에는 1조 5000억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은 10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폴리에스테르 의류와 식음료 포장류 등으로 사용되는 고순도 텔레프탈산(PTA) 생산공장인 서산사업장의 생산규모를 연간 30만t 늘리는 증설공사를 마쳤다.”며 이같이 밝혔다. 삼성석화는 올해 초 서산사업장 증설공사를 착공,800억원을 들여 10개월 만에 완공했다. 당초 서산사업장의 생산규모를 연간 20만t 증설할 계획이었으나 30만t으로 확대했다. 허 사장은 “서산사업장은 기존의 연간 생산량 40만t에서 단위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70만t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면서 “울산사업장의 110만t을 포함해 모두 180만t의 PTA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서산사업장 증설을 통해 종업원 1명당 연간생산량이 기존 5700t에서 1만t으로 늘어나고 에너지 사용량의 40%를 절감하는 등 경쟁력을 구축하게 됐다.”면서 “수출물류비를 t당 17달러에서 6달러로 줄여 중국 수출의 전진 기지로서의 전략적 지위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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