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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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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43)-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제2부 周遊列國 제1장 첫 번째 출국 명재상 안영은 단 한번도 자신의 정적들을 죽인 적은 없었다.그러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적은 있었던 것이다.중국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술로 손꼽히고 있는 이 일화도 안자춘추의 ‘내편간하(內篇諫下)’에 실려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경공에게는 세 무사가 곁에 있어 호위를 맡아 보고 있었다.그들의 이름은 공손접(公孫接),전개강(田開彊),고야자(古冶子) 등 세 명의 장군이었다.그들의 용맹은 온 나라에 잘 알려져 있었지만 임금의 신임과 아랫사람의 존경에 우쭐해져서 날이 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은 길에서 그들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그러나 그들은 매우 오만하여 안영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안영은 경공을 찾아가 말하였다. ‘전하의 측근에 있는 공손접,전개강,고야자 등 세 명의 장군은 자신들의 공만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있습니다.그들은 나라에 해를 끼칠 화근이오니 일찍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대답하였다. ‘나도 경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소.하지만 그들의 무예가 너무 출중하여 밝혀놓고 잡으려 하다가는 난동을 부릴 것이고,몰래 죽일 수도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 말을 들은 안영은 경공에게 ‘신이 한번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궁궐을 물러나왔다.밤새 심사숙고한 안영은 다음날 경공을 만나자 품 속에서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꺼내 놓으며 말하였다. ‘전하,신이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이것으로 세 무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공은 안영이 내놓은 두 개의 복숭아를 쳐다본 후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어 말하였다. ‘아니 이것은 두 개의 복숭아가 아닌가.이런 것으로 어떻게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전하.’ 안영은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세 무사에게 이 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십시오.’ ‘무사들은 세 명이 아닌가.그런데 어찌하여 복숭아를 두 개만 하사할 수 있겠는가.’ ‘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복숭아 두 개를 하사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시오.세 무사로 하여금 서로 공로의 크기에 따라 복숭아를 나눠 먹으라고 하십시오.그들은 자기의 힘만을 믿지 장유(長幼)의 예의 같은 것은 모르는 자입니다.’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으나 경공은 안영이 시키는 대로 그들에게 두 개의 복숭아를 하사하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복숭아를 먹으라고 명령하였다.먼저 복숭아를 받은 공손접이 탄식하여 말하였다. ‘안자께오서는 정말 지혜롭군요.그 분께서는 전하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으로 세 사람의 공로를 비교해 보시도록 하셨으니 말이오.나의 힘은 멧돼지를 이길 수 있으며,호랑이를 잡을 수 있으니 충분히 복숭아를 먹을 수 있소.’ 공손접이 복숭아를 먹으려 하자 전개강이 복숭아를 낚아채며 말하였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소.그러니 복숭아를 먹을 자격이 있소.’ 고야자는 이미 두 사람이 복숭아를 차지해 버린 것에 몹시 분노하여 말하였다. ‘나는 일찍이 군주를 수행하여 황하를 건넌 적이 있는데,그때 말이 강 속의 큰 거북에게 물려 끌려가 버렸소.나는 곧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백 걸음을 헤엄치고,다시 아홉 리를 흘러내려가 큰 거북을 죽이고 군주가 타시던 말을 찾아왔소.당시 사람들은 나를 황하의 신이라고 불렀소이다.그러니 공로를 따지자면 복숭아는 마땅히 내가 먼저 먹어야 할 것이오.’ 고야자는 칼을 들고 나머지 두 무사들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 “망치들고 전쟁터 가나”

    김선일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추가 파병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정치권에서도 양극화하고 있다.한편에선 여야 의원 50명이 파병 재검토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다른 한편에선 오히려 파병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양상이다. 열린우리당의 외교·안보·국방 분야 정책을 조율하는 안영근 제1정조위원장은 25일 “자이툰 부대가 소총수 부대 수준인데 전쟁터에 망치를 들고 나갈 수 있느냐.”면서 자체 경계·방어력 강화를 위한 전투병 보강을 주문하고 나섰다. 안 위원장은 “아직 당 지도부와 협의하지 않은 개인적 의견이지만 다음주 국방부 등과의 정책협의를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혀 공론화를 예고했다. 파병 재검토를 주장한 의원들 가운데 일부도 ‘파병 불가피’를 전제로 할 경우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파병에 반대하는 한 초선 의원은 “어차피 가야 할 것이라면 안전 확보 차원에서 전투병을 보강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찬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도 전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추가 파병 병력에 대해 장비 등 방어력과 경계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밝혀 총리 인준을 받을 경우 파병군의 편성에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반면 이미경 의원은 전투병 강화를 주장한 동료 의원을 겨냥해 “그 XX,미친 X 아냐.”라고 거친 말을 쏟아내며 파병 반대를 주장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파병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데 정부의 준비 소홀로 불안하다.”면서 파병 부대의 자위력을 문제 삼은 바 있다.그가 ‘파병 재검토 결의안’에 서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투병력을 강화할 경우 평화 재건이라는 파병의 명분이 오히려 퇴색될 수 있다는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다.열린우리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부대 편제가 바뀔 경우 국회의 동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신중론을 폈다. 국방장관 출신인 조성태 의원도 “현재 그 정도 위협 때문에 부대 편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근현대사 상처담은 장편 두편 나란히 출간

    개인의 내면세계에 갇힌 사소설이나 감각적 작품이 큰 흐름을 차지한 우리 문단에 모처럼 선 굵은 장편 두 편이 나왔다.중견작가 김용성의 ‘기억의 가면’(문학과지성사 펴냄)과 젊은 작가 이대환의 ‘붉은 고래’(현암사 펴냄).두 편 모두 리얼리즘 창작방법을 거울로 해서 각각 우리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전쟁과 이데올로기 대립이 가족에 미친 영향을 심도있고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대환 ‘붉은 고래’ 3권으로 나온 젊은 작가 이대환의 대작은 이 작가의 서사적 힘과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1945년 이후,이 땅 모든 청춘의 사상 여정’이란 부제가 말하듯 작가는 이 서사시에서 삼형제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면서 일제 강점기,사회주의 운동,광주민주화운동 등 숨가쁜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장편소설 속으로 생생하게 불러온다. 소설은 막내 허경욱이 조카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면서 되돌아보는 지난 날에 대한 회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큰형 경민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 간부가 된다.작은형 경윤은 그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남한에서 군인이 되어 군사정권의 실력자로 성장한다. 대척점에 놓인 두 형의 삶 사이에서 자란 경욱은 남북한을 모두 체험하는 ‘경계인’으로 살게 된다.큰형을 만나러 일본에 갔다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북한을 방문한 경욱은 그곳에서 북한체제를 비판한 게 걸려 남파된다.이후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살다가 출소한 이후 한국 국적을 찾은 뒤 조카에게 가족사를 들려준다. 작가는 “자신의 시대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관통해나간 그들 삼형제의 삶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김용성 ‘기억의 가면’ 김용성이 6년만에 낸 장편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세 개의 전쟁과 그 상흔이 한 집안에 드리운 우울한 풍경이 자리잡고 있다. 초반부는 태평양 전쟁의 상처를 다룬다.일본 고베에서 태어난 소설가인 주인공 이진성은 1945년 ‘고베 대공습’으로 아버지를 잃고 삼촌과 귀국한다.일본으로 건너가 신문광고 등을 통해 일본인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찾으려 애쓰다가 우여곡절 끝에 누이동생을 만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어 삼촌의 삶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의 상흔이 등장한다.진성이 중국군 번역요원으로 활동했던 삼촌을 찾기 위해 브라질,중국 옌볜(延邊) 등을 오가며 삼촌의 아들일지 모르는 이종만을 만나는 과정이 서사시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마지막 상흔은 진성의 체험이 실린 베트남 전쟁.청룡부대원으로 참전했다가 보복 전투에서 베트콩 중대장 부부를 죽음으로 내몬 뒤 그들의 아기 롱이우를 성당에 맡겼던 진성이 용서를 빌기 위해 베트남을 다시 방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작가는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에게 바치는 묘비명이자 살아남은 자의 참회록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용인시-성남시 ‘서울 가는 길’ 7m의 전쟁

    ‘서울로 가는 길을 뚫어라.’ 경기도 용인시와 성남시가 연결도로 7m를 놓고 전쟁 수준의 대립현상을 보이고 있다.구미동 중앙하이츠빌과 토끼굴에 이어 세번째 도로분쟁이지만 이번에는 공격(?)과 방어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공기업인 토지공사는 10일 새벽 용역회사 직원을 동원해 용인∼성남간 구미동 접속도로 개설을 강행하려다 주민들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교통등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아파트를 지은 난개발의 후유증이다. ●실력행사한 토공 토공 용인사업단은 이날 오전 6시30분쯤부터 중장비를 동원해 용인시 죽전동∼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을 연결하는 왕복 4차선의 죽전∼분당간도로 가운데 미개통 구간(길이 7m)에 대한 공사에 들어갔다. 토공은 용역회사 직원 100여명을 동원,분당구 구미동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도로 접속에 반대하는 분당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토공은 오전 8시30분쯤까지 약 2시간 동안 성남시가 도로를 접속하지 못하도록 조성해 놓은 화단과 언덕(시유지)을 밀어내 언제든지 도로를 연결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분당 주민 300여명이 몰려 나와 공사를 저지하려다 용역회사 직원들과 충돌이 빚어져 이모(55·여)씨와 유모(48·여)씨가 어깨 골절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문제의 구간은 토공이 이달 말부터 입주가 시작되는 용인 죽전지구 주민들을 위해 신설중인 도로의 분당 접속 부분으로,성남시가 주민 반대를 이유로 접속을 불허하자 다급해진 토공이 공사를 벌인 것이다. 토공 용인사업단 관계자는 “곧 죽전지구의 입주가 시작돼 어쩔 수 없이 공사를 강행하게 됐다.”며 “용역회사 직원은 분당 주민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동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터 방불케하는 현장 성남시는 토공이 허가를 받지 않고 시유지를 무단으로 훼손함에 따라 경찰에 고발하기로 하는 한편 공사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중장비를 동원해 현장을 폐쇄했다.현재 접속지점에는 용인시와 성남시의 대형중장비 10여대가 대치상태를 보이는 등 사뭇 전쟁터를 연상시키고 있다. 성남시 관계자는 “토공측이 한마디 상의없이 기습적으로 공사를 강행했다.”며 “시유지를 불법적으로 훼손한 데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도로 개설에 반대하는 분당구 구미동 주민들도 현장에 천막을 쳐놓고 공사 감시에 들어갔다. 주민대책위 관계자는 “공기업인 토공이 깡패들까지 동원해 공사를 강행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비난하고 “협상이 안 되면 강행한다는 법도 없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용인시 주민과 공무원들도 불만이다.죽전동 K아파트 주민 김모(44·여)씨는 “분당주민들은 서울쪽으로 아무런 부담없이 길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지역은 타 시·군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며 “전형적인 지역이기주의”라고 꼬집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산 오르記]대구 비슬산

    산중에도 벌써 무더위가 찾아와 있었다.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와 계곡에는 때 이른 한 무리의 피서객들이 자리를 잡았다. 봄인가 싶더니만 어느새 여름이다. 비슬산(琵瑟山·해발 1083.56m)은 대구의 분지를 형성하는 대구 남쪽의 산이다.비슬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비슬이란 말이 인도 범어의 발음 그대로를 표기한 것이라고도 한다. 비슬산 산행 기점은 달성군 유가면의 유가사와 소재사가 있는 자연휴양림이다.유가사-정상-대견사터-휴양림 코스나 이의 역 코스가 일반적이다.유가사쪽에서 오르면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휴양림쪽에서 오르면 덜 가파르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에 역코스를 택했다.휴양림이 있는 소재사 계곡은 아직 지난해 태풍 매미의 복구 공사로 포클레인 소리가 등산객을 먼저 맞았다. 비슬산에 들어서면 우선 등산화부터 챙기고 볼 일이다.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불쑥불쑥 튀어나온 등산로 암석에 발을 상하기가 십상이다. 소재사 계곡의 6월은 흡사 태풍전야의 모습과 같다.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7월부터 이곳은 더위를 피해 몰려드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다.한번쯤은 자보고 싶은 통나무집의 올 여름 예약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평소에 미리미리 계획하고 부지런을 떨어야 피서도 좋은 곳으로 가는 법이다. 소재사 계곡은 여름이면 피서지로 인기가 높지만 겨울에도 얼음동산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로 비슬산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자 계곡에 물을 뿌려 갖가지 모양의 얼음빙벽을 조성,사계절 명소로 만들었다는 게 공무원들의 자화자찬이다. 아마도 겨울에도 편히 쉬지 못하는 게 비슬산의 팔자인가 보다. 쏟아지는 뙤약볕을 머리에 이고 계곡과 통나무집 사이로 난 포장길을 따라 30여분간 올라가면 낯선 모습의 암괴류(岩塊流)를 만난다. 암괴류란 큰 자갈 혹은 바위 크기의 둥글거나 각진 암석 덩어리가 산 경사면이나 골짜기에 아주 천천히 흘러 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한다. 비슬산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구성,장관을 연출할 뿐 아니라 발달규모가 대단히 커서 길이 2㎞,최대폭 80m,두께 5m에 달한다.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암괴류를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제법 가파른 바위 등산길이 나온다. 40여분 울퉁불퉁한 암석들이 뒤엉킨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삼층석탑 하나가 하늘끝에 매달려 있는 대견사(大見寺)터에 다다른다. 산사의 절집치고 빼어난 조망이 자랑거리가 아닌 곳이 없다지만 대견사터의 조망도 수준급이다. 멀리 서쪽으로 낙동강이 햇살에 반사돼 반짝반짝거리고 거칠것 없는 넓은 현풍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견사터 주변에는 스님바위,형제바위,코끼리 바위 등이 갖가지 형상을 한 바위들이 널려 있다. 벼랑끝에 세워둔 삼층석탑은 보는 것만으로 아찔하고 혹시나 넘어질까봐 괜히 근심스럽다.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대견사의 존재는 지난해 시굴조사를 벌인 결과 ‘대견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돼 실체가 확인됐다. 스님바위 앞에서 등산객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킥킥거린다.삿갓을 한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스님바위라고 이름 붙여 놓았지만 도발적인 남근(南根)을 쏙 빼 닮았다.정숙한 사람에겐 스님 모습으로 음탕한 사람에겐 남근으로 보인다 했던가.대견사터에서 숨고르기를 한 후 대견사터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큰 바위덩어리 사이로 만들어 놓은 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눈앞에 비슬산의 정상인 대견봉이 우뚝 솟아있고 참꽃 군락지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봄에는 비슬산을 붉게 물들이고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인 30여만평의 참꽃군락지는 지금은 온통 초록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초록바다를 연상케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등산객들은 너도나도 그자리에 주저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초록바다에 넋을 놓는다.해마다 참꽃이 피는 4월말이면 이곳은 밀려드는 인파로 전쟁터나 다름이 없다.능선과 능선을 넘나들며 파도치는 참꽃구경은 못하지만 산행의 호젓함을 즐기기엔 오히려 지금이 적기인 듯 싶다. 시원한 산바람이 한줄기 지나가고 등산객들은 발길을 떼지 못하고 다시 깊은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여기서부터 정상인 대견봉까지는 4㎞,1시간 정도 걸린다.정상으로 가지 않고 조화봉(1034m)을 거쳐 유가사 쪽으로 바로 하산하면 3㎞,1시간40분이 소요된다. 하산하는 길.휴양림 입구에서는 임도를 따라 승용차를 산 중턱까지 몰고가려는 등산객과 이를 막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도로위에 있어야 할 자동차들이 산속 깊숙이 진출하게 된 것은 마구잡이로 이곳저곳에 산길을 낸 인간들의 업보가 아닌가. ●볼거리·먹거리 비슬산에는 유가사,용연사,소재사 등 고찰들이 수두룩하다.용연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조계단(보물 539호)이 있고 유가사는 절 뒤로 각양각색의 봉우리들이 돌병풍을 이뤄 운치를 더한다.소재사 계곡에 들어선 자연휴양림(053-614-5481∼2)의 통나무집에서 묵거나 야영도 할수 있다.현풍읍 상리에는 1730년에 만들어진 현풍석빙고(보물 673호)는 아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현풍읍내에서 국도 5호선을 타고 대구방향으로 약 5분거리에 있는 약산온천(053-616-1100)은 칼슘과 중탄산 성분을 함유,수질이 부드럽고 혈액순환과 신경통 등에 효험이 높아 등산후 피로를 풀기에 안성맞춤이다.자연휴양림 입구의 보리밥 잘하는 집 목산촌가든(053-614-1435)은 단체로 찾는 이가 많다.현풍읍내에 위치한 50년 전통의 현풍 박소선 할매집곰탕(053-615-1122)의 국물맛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가는길 구마고속도로 현풍 나들목을 빠져나와 좌회전하면 잘 정비된 비슬산휴양림 가는 길이 나온다.휴양림까지는 6㎞ 정도.휴양림 입구에는 대형 무료주차장이 있다.토·일요일에 한해 대구서부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601번 시내버스(1일 10회)가 휴양림까지 운행한다.유가사쪽에서 등산을 하려면 현풍 버스정류장에서 유가사행 시내버스(1일 8회)를 이용하면 된다.용연사쪽으로 가려면 대구서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836번(1일 8회)을 타면 된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가겠소”

    한국 전쟁 당시 전사한 한 병사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담긴 빛바랜 편지가 6일 공개됐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1953년 4월12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고(故) 김종석 하사다.편지는 김 하사의 부인이 반세기 가량 보관했다가 지난 98년 별세하기 전 며느리 박현자(51)씨에게 ‘가보’로 물려줬다.이 며느리가 최근 이 편지를 국가보훈처에 전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공개된 4통의 편지는 김 하사가 홀어머니와 부인,동생에게 각각 보낸 것이다.반세기가 지나면서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당시 편지를 받은 김 하사의 부인이 편지지에 기름을 먹여 놓아 읽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김 하사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공 오랑캐를 무찔러 국경에 태극기를 꽂고….쏘련 모스코바까지 들리도록 만세를 부르고 꽃잎처럼 떨어진 전우가 고이 잠든 뒤에 그리운 가족품에 상봉하겠다.”고 뜨거운 조국애를 표현했다. 이어 “어제도 적의 토치카로 뛰어들다가 탄알에 두 방이나 맞아 뚫어진 형의 철모 자랑인 듯 보이고 싶다.”며 치열한 전쟁터를 묘사했다. ‘어머님 전상서’ 제하의 편지에는 “조부님 모시고 철도 모르는 자식들 데리고 얼마나 고생하십니까….농사에 대해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 걱정입니다.”라며 장남으로서 홀어머니를 두고 온 걱정이 배어 있었다. 보훈처는 편지 4통 중 3통의 수신날짜가 8월 19일이고 중공군과의 교전상황이 묘사된 점에 비춰 중공군과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던 51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편지를 공개한 김 하사의 며느리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편지를 꺼내보시며 눈시울을 적시던 시어머니께서 ‘잘 보관해 후세에 물려주라.’고 주셨다.”면서 “요즘 사람들이 과거를 너무 잊는 것 같아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가평격전지 흑백사진 주인공 유해 귀향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중부전선 화악산 기슭에서 나온 빛바랜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피란지 부산에서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그날 쓰러졌던 그 모습 그대로 반세기가 넘도록 가족을 기다리던 그 학도병은 법원 서기 출신 나영옥(당시 18세) 상병이다. 현충일인 6일 사진 속의 미소년은 유해가 돼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1리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동생들과 상봉했다. ●똑같은 사진 54년간 간직 나 상병의 동생 나영일(59·서울 중랑구 신내동)씨는 이날 태극기가 덮인 형의 관을 어루만지며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어머니와 만나 행복하게 잘 사시라.”며 상상하지 못했던 ‘재회의 슬픔’을 나누었다. 여동생 옥자(64)씨도 “전쟁터에 나갔다가 소식이 없는 오빠 때문에 아버지는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흐느끼면서 전쟁이 낳은 가족사의 아픔을 비로소 털어내는 모습이었다. 나 상병의 신원을 확인한 것은 육군이 벌이고 있는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의 결실이다.육군 27사단은 지난 2일 341번 지방도로변 고추밭에서 발굴한 전사자의 주머니에서 비닐에 싸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나영일씨는 “언론에 공개된 사진을 본 아들이 ‘큰아버지와 비슷하다.’고 하기에 집에 있던 사진을 꺼내보니 바로 같은 사진이었다.”면서 “보관하던 사진은 어머니가 간직하고 계시다가 돌아가시면서 ‘형님을 잊지 말라.’고 물려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장을 찾은 나 상병의 가족은 모두 20여명.가족들에 따르면 나 상병은 8남매의 둘째로 순천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벌교에서 법원 서기로 근무하다 전쟁이 터지자 피란지 부산에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그는 5사단 36연대 본부 소속으로 1951년 1월 이른바 1·4후퇴 당시 화악산을 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서다 전사한 것으로 유해발굴단은 추정하고 있다. 가족들은 “이 사진을 찍을 때 입은 옷은 군복이 아니라 법원에 근무할 때 입었던 옷”이라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서 선물로 받은 만년필 2개를 왼쪽 가슴에 꼽고,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영일씨는 “휴전협정에 따라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지만 둘째 형님만은 소식이 없었다.”면서 “가족들은 명절이나 현충일이 되면 그저 꽃 한다발을 사들고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서성이곤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발굴된 29구 유해 국립묘지 안장 계획 한편 육군 27사단은 이번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에서 나 상병을 비롯해 모두 2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27사단은 오는 17일 사령부 연병장에서 합동 영결식을 가질 예정이다.나 상병 등의 유해는 영결식이 끝난 뒤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나영일씨는 이날 “아직까지도 착잡하고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그동안 국군포로 얘기만 나와도 혹시 형님이 아닐까 안절부절 못했다.”면서 “형님을 찾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발굴단 관계자의 손을 꼭 잡았다. 서동철기자 dcsuh@seoul.co.kr˝
  • 24일 프랑스오픈 개막… 2주간 열전 돌입

    ‘앙투카 코트’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올시즌 테니스 두번째 메이저대회인 프랑스오픈이 24일 파리 롤랑가로에서 개막,2주 동안 펼쳐진다.호주오픈,US오픈,윔블던대회 등과 함께 4대 메이저대회로 꼽히는 프랑스오픈은 유일한 클레이코트 대회.벽돌가루가 섞인 인공흙을 깐 붉은색의 앙투카 코트는 프랑스오픈의 상징이다. 총상금은 지난 대회에 견줘 약 2.3%가 는 1326만유로(약 191억원).남자 단식 우승자에게는 86만유로(12억3800만원),여자 단식 챔피언에게는 83만 8500유로(12억700만원)가 각각 돌아간다. ●이변을 비켜갈 자 없다. 타구의 탄력을 흡수하는 클레이코트의 특성상 하드코트에 익숙한 선수들에게 롤랑가로는 ‘무덤’으로 비유된다.그랜드슬램 최다 타이틀을 갖고 있는 피트 샘프러스(미국)는 윔블던 7회 우승을 비롯,13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하고도 롤랑가로 정복에는 실패,그랜드슬래머 대열에 끼지 못했다. 지난 대회에서는 호주오픈에 이어 2연속 우승을 노린 앤드리 애거시(미국)가 8강에서 탈락,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가 황제로 우뚝 섰다.‘세레나 슬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여자테니스계를 주름잡은 세레나 윌리엄스(미국)도 쥐스틴 에냉(벨기에)에게 정상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남자는 유럽과 남미의 전쟁 1990년대 이후 남자부는 남미와 스페인 선수들이 지배해 왔다. 미국 선수로는 짐 쿠리어(91·92년)와 애거시(99년)가 겨우 체면을 살린 정도.올해도 남자 코트는 유럽과 남미 선수들의 전쟁터다. 우선 기예르모 코리아(아르헨티나)와 로저 페더러(스위스)의 약진이 눈에 띈다.지난달 몬테카를로오픈 챔피언 코리아는 일주일 전 함부르크 마스터스대회 결승 이전까지 클레이코트 31연승을 달렸고,통산 8개 타이틀 가운데 7개를 클레이코트에서 거뒀다.함부르크대회 정상에 오른 페더러 역시 클레이코트에서만 9승1패의 강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98년대회 챔프 카를로스 모야(스페인)가 6년 만의 왕관을 노리고 있고,다비드 날반디안(아르헨티나),러시아의 자존심 마라트 사핀도 첫 메이저 우승을 벼르고 있다. ●‘부상 병동’ 여자코트는 안개속 지난 대회 여자 결승은 에냉-킴 클리스터스의 ‘벨기에 슬램’이었지만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클리스터스는 고질적인 부상으로 출전을 포기했고,에냉 역시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고심끝에 출전을 강행했다.재기에 성공한 듯하던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자매도 다시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이 와중에 아멜리 모레스모(프랑스)가 21년 만의 안방 타이틀을 노리고 있다.자국 선수의 우승은 남녀 통틀어 지난 83년 야닉 노아가 마지막.세계 3위의 모레스모는 이달초 독일여자오픈과 이탈리아 마스터스를 거푸 제패하며 첫 메이저 우승을 준비했다. 슈테피 그라프와 모니카 셀레스가 각각 지난 87년과 90년에 두 대회 우승에 이어 롤랑가로 정상에 선 것은 모레스모의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철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47)의 깜짝 출전도 변수.통산 18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보유중인 나브라틸로바가 메이저대회 단식에 나서는 것은 지난 94년 윔블던 이후 10년 만이다.와일드카드로 출전한 나브라틸로바는 “하루에 단식과 복식 2경기를 모두 치를 준비가 돼 있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삶과 경영 이야기⑧] 과자 생산 58년 크라운제과 윤영달 사장

    ‘죠리퐁,콘칩,쵸코하임,쿠크다스,뽀또,미니쉘….’58년 동안 과자생산 ‘외길’을 고집해온 크라운제과가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은 과자 이름이다.기성세대인 40∼50대가 코흘리개 때 먹던 간식에서부터 ‘첨단 세대’인 10대 입맛에도 맞춘 이들 제품에는 독특한 신개념 경영철학이 깃들어 있다. 윤영달(尹泳達·59) 사장은 창업주인 고 윤태현 회장의 장남으로 1999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선친의 가업을 이어 크라운제과의 외길을 이끌고 있다.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67년부터 크라운제과의 경영과 인연을 맺었다.77년부터 20년 가까이 자동차 부품회사 등 개인사업을 하다가 회사사정이 악화되면서 95년 대표이사로 크라운제과에 복귀했다. 윤 사장은 회사가 나이테만큼이나 부침을 겪었지만 까다로운 청소년들의 입맛을 앞서야 한다는 점을 경영신조로 삼고 있다고 했다.이에 따른 그의 경영 아이디어는 독특하다.‘크로스 마케팅’ ‘루트 세일’ 등 생경하기까지 한 경영방식을 잇따라 도입해 경영위기를 성공으로 돌려세웠다.주위에서는 이에 ‘신개념 경영’이란 말을 붙였다. 크로스 마케팅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부도났던 회사를 헤쳐나올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동종업체끼리 경쟁사의 상품을 공급받아 판매하는 이 기법은 국경을 뛰어넘는 전략적 제휴이기도 했다.영어 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외국인들로부터 뜻과 맞아떨어지는 단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 사장은 이사직에 있을 때인 72년, 크라운제과의 최고 히트상품이면서 지금은 추억의 과자처럼 인식되고 있는 ‘죠리퐁’을 개발해냈다.여기에다 ‘루트 세일’이란 독특한 판매방식을 얹은 뒤 국민들의 입맛을 파고들어 장수제품으로 만들었다. ●한국적 유통방식 루트세일도 효과적 루트 세일은 제조업체의 유통사원이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의 구멍가게까지 소매점을 직접 찾아다니며 물건을 공급하는 유통방식.이는 외국업체들이 쉽사리 국내시장을 뚫지 못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 회사의 외환위기 극복에 일조를 했다.현재 식품업계에서 한국적 유통방식으로 정착했다. 크라운제과의 역사는 1947년 서울역 뒤편 중림동의 ‘영일당’에서 시작됐다.고 윤태현 회장이 직접 과자 틀의 쇠를 깎아가며 장수과자 ‘산도’를 만들어낸 이야기는 김혜수가 주연했던 MBC 드라마 ‘국희’의 기둥 줄거리가 될 정도로 성공 신화였다.산도 외에도 죠리퐁,콘칩,쵸코하임,쿠크다스,뽀또,미니쉘 등의 히트 상품을 거느렸던 크라운제과도 98년부터 몰아친 외환위기의 파고를 맞아야 했다. 윤 사장은 위기를 역전의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크로스 마케팅 등 위기때의 역발상적인 경영기법들을 통해 회사를 이끌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는 몸집 부풀리기에만 치중하는 확대경영을 했다.이익규모 내에서의 투자가 아니라 빚을 얻어가며 껍데기만 키우는 바보짓을 해왔다는 후회를 한다.외환위기가 오니까 금리는 올라가고 환율도 뛰고 무엇보다 대출금과 단기차입금이 압박을 해왔다.연장을 해줘야 계속 돈을 쓸 수 있는데 갑자기 단기회수를 당해 어려움을 겪었다. -1998년 1월 결국 회사가 부도나는 비운을 맞았다.50년 역사의 회사가 도산하자 화의를 신청해 융자를 받았다.많은 채권단으로부터 지원받은 고마움은 잊지 않는다.화의가 돼서 회사가 투자를 못 하자 신제품을 못 내고,거래선에서는 회사가 쓰러질지 모른다며 외상을 잘 안 주고 수금도 어려웠다.이대로 가다가는 밥도 못 먹겠다 싶어 회사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본사 제1공장을 파는 등 일부 구조조정을 했다. -구조조정을 하고도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발견되지 않았다.신제품과 영업확대 전략을 생각하다가 내부에서 만들 능력은 없지만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크라운제과의 영업조직은 루트 세일에 기반한 강력한 조직이다.4대 과자업체 중에 크라운이 회사 규모는 가장 작지만 30년 전에 루트 세일이란 현재의 과자 영업형태를 가장 먼저 착안해서 시작했다.영업조직은 확실히 살아있어 뭔가 팔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갖고 있는 제품이 진부했다.전쟁터에서 고물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격이었다.부도로 자금이 없고 설비투자도 안돼 신제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설은 있지만 판매를 못하는 기린·삼립·동아당 등 몇몇 회사와 접촉해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품으로 판매를 시작했다.하지만 국내 조달은 불만스러웠고 설비가 우리보다 작은데다 새로운 설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신제품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수입해 판매해 보자고 생각하게 됐다.수입상이 아니라 역시 OEM으로 한다는 방침이었다.1차로 타이완 업체와 접촉했다.타이완의 1,2,3위 제과업체인 이메이,왕왕,콰이콰이를 동시에 방문했다.회사제품인 샘플 3세트를 준비해서 서로 상대회사의 제품을 팔아보자는 의향을 이야기했다. ●中·美·호주 등 대형 업체와 제휴 추진 -이메이는 타이완 1위의 종합식품회사로 자국 내에서 막강한 시장과 마케팅능력을 보유한 업체이며,왕왕은 타이완에 본사를 두고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쌀과자 전문 회사다.처음에는 상호간에 이득이 될 수밖에 없는 제안에 대해 모두들 관심은 높았지만 내심을 숨기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한마디로 믿기 어렵다는 것이었다.또 크라운이 당시에 화의상황이라는 것도 큰 장애요인 중의 하나였다. -왕왕과는 바로 협의가 끝나 쌀과자를 들여오기 시작했다.현재 판매하고 있는 참쌀 설병,선과라는 제품이다.연간 180억원씩,모두 800억원어치를 팔았으니 성공적인 마케팅이라 할 수 있다.콰이콰이와도 거래를 계속하고 있으나 많은 양은 아니다.1위 업체인 이메이는 우리와의 거래에 있어 염려를 많이 했다.2000년 1월에 방문,2003년까지 진전이 없었다.화의를 종료하고 왕왕과의 거래를 설명하자 이메이가 우리를 이해하게 됐다.거래를 시작해서 이제 경영자원과 경영정보를 주고받고 있다.공동투자를 해서 공동사업까지 벌이는 것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남가촌과 미국 위글리사의 껌 제품,호주의 가장 큰 제과회사 아노스와도 크로스 마케팅을 협의 중이다.일부 제품은 들여오고 국내 제품도 나가는 단계다.한국 야구르트의 스낵을 크라운이 팔아주고,야구르트가 우리 죠리퐁을 러시아에 팔아주는 크로스 마케팅도 진행 중이다. -크로스 마케팅은 처음에는 ‘더덕’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산삼’이었다.크로스 마케팅이 아니었다면 화의를 4년만에 조기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크로스 마케팅 덕분에 과잉투자도 모면할 수 있었다.이전에는 국내 설비상황만 보고 국내에 없는 설비는 투자해도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타이완처럼 크로스 마케팅이 가능한 지역에 있는 설비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이제는 기업간에 국경이 없으므로 함부로 설비투자를 하다가는 큰일난다.다른 산업에서도 크로스 마케팅을 많이 활용해야 한다. -크로스 마케팅을 수입이란 관점에서 보면 국내에서 만들지 수입하냐고 하지만,바꿔서 보면 수출하는 것이다.크로스 마케팅은 수입을 통해 수출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우리 제품의 시장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크로스 마케팅이 가능한 지역에는 우리제품을 얼마든지 수출하므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국내 판매량보다 많은 양을 생산하므로 원가도 절감할 수 있다.경영 관점에 지구촌이란 개념을 확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주변에 크로스 마케팅을 전파했더니 경쟁업체라 생각해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공장을 한번 보자는 제안도 못했는데 크라운의 사례를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외국회사에서도 국내 업체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외국회사를 경쟁사가 아니라 파트너로 생각하니 공장도 둘러볼 수 있고,공동사업과 공동투자도 확대됐다고 하더라. -크로스 마케팅이 좀더 발전하게 되면 중국 회사인 남가촌에서 우리 제품을 만들어 중국,일본,타이완,홍콩 등에 판매하는 전략을 갖고 있다.이는 ‘트랜스퍼 트레이드’라 이름붙였다. -외국에 나가 기술을 지도하고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연구진의 수준이 올라갔다.크로스 마케팅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얻은 결과다. -생산방식으로는 일본 자동차회사인 도요타의 적기에 정량을 생산하는 ‘JIT(Just In Time)’가 있다면,영업방식에는 크라운 제과의 크로스 마케팅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크로스 마케팅이 많이 보급돼서 다른 산업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크라운제과가 화의를 조기 졸업하는 원동력으로 크로스 마케팅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윤 사장은 화의 전에는 멋모르고 골프도 쳤지만,부도난 사장이 골프치고 돌아다니냐는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골프를 그만뒀으며 아직도 안하고 있다.대신 직원들과 등산을 한다.직원들과 함께 산에 오르며 땀을 흘리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한다. ●4년 전부터 사내 독서회 만들어 유대강화 -등산을 한 뒤 목욕탕에서 같이 등을 밀고,신발이 떨어지면 사장이 직접 뛰어가 사오면서 힘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사장인 내가 몸무게가 0.1t으로 가장 많이 나가고,부사장은 저지방 진단을 받을 정도로 모든 직원이 날씬해졌다.하루에 20∼30㎞씩 걷고 아침 8시에 나가 저녁 9시에 돌아올 정도로 체력도 길러졌다.점심을 먹은 뒤 오후 3시쯤 다시 산에 오르면 지방이 타는 느낌을 받는다.최근 100회 산행 기념으로 북한산 청소를 했다.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직원들과 함께 백두산에 오를 계획이다. -4년 전부터 차장·부장 독서회 두가지를 만들었는데 프리 리딩이라고 해서 무조건 책을 사서 돌린다.차장들이 책을 읽고 키워드 하나,A4용지 한장으로 정리해 회사 내부 사이버 연수원에 올린다.부장 독서회는 책을 읽고 발표한다.책의 저자를 가능한한 연사로 모셔 강의를 듣고,연사 앞에서 토론을 한다.저자 앞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굉장히 심도있는 토론을 할 수밖에 없다.서울고등학교 16회 졸업생들 20여명이 한달에 한번씩 모이는 독서회에서 하는 똑같은 방법을 사내 독서회에 쓰고 있다.도요타 관련 책을 보니 ‘강한 사원이 강한 회사를 만든다.’는 좋은 말이 나왔다.직원들에게 ‘자네는 충분히 강한가?’라고 묻는다. 정리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남규철의 DVD페인]개미 하품하는 소리도 잡아라

    DVD를 즐기는 이들이 타이틀 선정시 먼저 고려하는 부분 중의 하나는 그 타이틀이 얼마나 멋진 사운드를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화질이나 부가영상들에 대한 관심도 높지만 DVD라고 하면 사방의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사운드가 가장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운드가 ‘멋진’사운드라 말할 수 있을까? 우선은 영화 속 장면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장감 넘치는 사운드를 꼽을 수 있다.그 외에도 이동감과 공간감을 잘 드러내는 서라운드 효과,육중한 무게감과 공포감을 주는 저음,풍부하고 선명한 영화음악,효과음에 파묻히지 않는 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아래 소개하는 타이틀들은 이런 멋진 사운드로 무장,DVD애호가들이 ‘레퍼런스급 사운드’를 가진 타이틀로 손꼽힌다.자,이제 평소보다 볼륨을 조금 더 높이고 즐겨보자.강렬한 멀티채널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dts) 모든 사람들이 주저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강력한 멀티채널 사운드를 들려주는 타이틀.특히 도입부의 상륙장면은 몇 번을 봐도 쾌감이 느껴지는 멋들어진 사운드를 들려준다.해변에 부딪치는 무서운 기세의 파도소리로 시작되는 이 장면은,전후좌우의 사방에서 날아오는 탄환들의 궤적들과 육중하고 무시무시한 폭탄 소리들,병사들의 비명까지,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반드시 소장해야 할 타이틀 중 하나이다. ●U-571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강렬한 멀티채널을 느끼게 해준다면 U-571은 둔중하면서도 압도적인 저음들과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심해에 가라 앉은 잠수함 속,섬뜩하고 기분 나쁜 쇳소리들과 밀폐된 공간을 조여오는 수압의 진동음,머리 위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폭뢰들과 마침내 공간을 휘어잡으며 강력하게 진동하는 육중한 폭발음까지.몇 번이고 앰프의 볼륨을 살펴봐야 할 만큼 멋들어진 저음들의 향연을 들려준다. ●마스터 오브 커맨더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가 배 안을 훑고 지나간다.이 장면의 사운드는 잘 만들어진 사운드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웅변한다.삐걱거리는 나무 바닥,뱃전을 때리는 파도소리,누군가의 고함소리와 갈매기 소리 등이 사방의 스피커를 통해 현실감 넘치게 들려와,범선 위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이어지는 해상 전투장면에서는 날아드는 포탄의 궤적과 갑판을 꿰뚫는 둔중한 폭발음,아비규환의 전투장면 등으로 역동적이면서 공포감마저 느끼게 할 만큼 힘이 넘치는 사운드가 가득하다. 이외에도 ‘블레이드 2’는 육감적 테크노 사운드 위로 육중한 저음들과 실감나는 서라운드효과들이 가득하고,‘트위스터(dts)’는 집안을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게 들려오는 토네이도의 사운드가 인상적이다.아울러 음악 타이틀인 ‘이글스:Hell Freezes Over’와 ‘로이 오비슨:Black & White Night’등도 멋진 서라운드로 이루어진 음악을 들려주는 타이틀로 유명하다. DVD칼럼니스트·09DVD업무팀장˝
  • 국회 진출 39명으로 본 ‘女風’ 현주소

    17대 국회는 ‘여풍(女風)’이 드센 ‘여성정치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승리의 축배를 들기엔 다소 미심쩍어 보인다는 게 여성들의 말이다.“최악의 위기에서 겨우 여성에게 내맡겨진 정치”라거나 “결국엔 여성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끌어내릴 것이다.”라는 선거 전의 ‘음모론’은 조금씩 가라앉고 있음에도, 과연 이번 총선을 ‘진정한’ 여성의 승리라고 기뻐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여성들 사이에 여전히 오간다. 여성 39명의 국회 진출을 ‘여성의 시대’라고 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위험한 낙관’이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여성시대’,‘위기엔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 ‘여성이 정치하면 맑아진다’는 세 화두로 새롭게 여성정치를 가늠해본다. ●여성시대가 열렸다? 여성의원 39명 탄생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13대 국회에서는 6명,14대 3명,15대 9명,16대 15명(5.9%)과 비교하면 단번에 39명(299명 중 13%)으로 늘어난 것은 괄목할 만한 숫자다. 여성의원이 이처럼 늘어난 것은 각 정당이 앞다퉈 여심을 잡기 위해 비례대표제에 지퍼식 공천을 선택하면서부터 예정됐던 일. 주부 서영숙(56·서울 은평구 갈현동)씨는 “옛날에는 아예 여자가 없었으니까 찍으려고 해도 못 찍었던 것이지.여자라도 똑똑하고,일 잘하면 찍어야지.왜 여자가 여자를 안 찍어?”라고 말했다. 혼란의 와중에서 야당을 이끈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민주당 추미애 선거대책본부장은 돋보이는 존재였다.그러나 ‘여성들의 시대를 개막할 전사’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에서도 두 사람은 똑같이 여성계로부터 ‘가부장적인 남성문화의 보호를 받았다.’는 곱지않은 시선에 놓여야만 했다.더욱이 이들은 ‘감성을 자극한 정치행보’로 인해 적잖은 우려를 낳았다. 물론 대부분의 남성 정치인도 똑같이 감성코드와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여성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시각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는 큰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여성정치인에 대한 언론의 시선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라고 비난하는 김지현(29·대학강사)씨는 “똑같이 감성을 이용해도 남성 정치인에게는 인간적이 풍모로 비춰지지만 여성에게는 연약함이란 부정적인 측면으로 비춰지는 게 현실이다.우리 또래 여성의 눈에는 그런 면이 못마땅했다.”라고 지적했다. 40대 여성 정혜선(46·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씨는 “박근혜씨에게 아버지의 후광이라고 폄하하는 것,그것 자체가 여성비하다.남성정치인들도 후광이나 연고를 이용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을 만큼 여성정치인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내비쳤다. 여성들은 13%라는 여성의원의 숫자는 ‘여성정치시대’라고 놀랄 만큼 대단한 수치는 아니라고 말했다.남성보다 61만 2900명 더 많은 여성유권자(50.9%) 숫자로 단순비교해도 이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국제의회연맹(IPU)의 2003년 자료에 따르면 여성의원의 비율은 스웨덴 45.3%,덴마크 38%,핀란드 36.5%,아시아권에서도 베트남 27.3%,중국 21.8%,파키스탄 21.1%,필리핀 17.8%이다. 동덕여대 김경애 교수는 “한 집단에서 목소리를 내고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0%는 차지해야 한다.임계수치가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30%만으로는 제대로 성 평등적인 정책수렴이 되지않는다는 판단도 나와 2000년 프랑스에서는 남녀동수법(PACS)’을 제정했다.남녀동수법안이란 모든 정당들이 경선의 입후보자 명단에 여성을 50% 포함하도록 하는 법률이다. 유엔은 양성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선 어떤 분야에서든 한 성(性)이 최소 30%는 돼야 한다고 권고했다. ●위기에는 여성이다? 이번 선거에서 3당 대변인의 역할이 모두 여성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은 연일 화제를 불러왔다.그러나 이를 반기기보다 오히려 ‘위기타개용’이나 ‘유행’이라 우려하거나,“우리 정치풍토에서 여성은 결국 꽃일 수밖에 없는가.”란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특수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족을 살리거나,민족을 구한 것은 역사 속에서 현실로 존재했었다.그러나 위기상황에서 벗어난 순간 여성의 능력은 다시 가정에 국한됐고 여성은 권력의 주변부에 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전례가 여성사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2차세계대전 당시의 예를 들면 남성이 전쟁터에 투입된 후 여성의 노동력이 군수물자인 탱크나 총을 만들어야만 했을 때,여성들은 ‘강한 존재’로 부각됐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남성들이 사회로 복귀하면서 여성들에게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인 ‘모성’이 강조됐다.여성들은 해고됐고 일자리는 남성 노동자에게 돌아갔다.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위기에는 여성’이란 부추김이 반갑기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여성들에게서 여성노동자의 인권문제와 여성운동이 시작됐음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연세대 김현미 교수는 “정치와 경제적 위기에 여성들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정치적·역사적으로 습관화된 방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비관적이지 않은 것은 월드컵 이후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적·집단주의적인 마초문화에서 상호공존적·여성적 문화로 탈바꿈했다는 점에 있다.”라고 지적했다. ●여성이 하면 정치가 맑아진다? 여성계는 정치에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참여하면 맑아진다.”고 강조했다.‘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102명의 여성후보를 내세워 보다 적극적인 여성참여를 유도했다. 그러나 한정된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를 두고 여성들이 벌인 경쟁이 과연 남성과 달랐는가,또한 여성끼리 서로 ‘그녀가 승리해야 우리도 승리한다.’는 ‘자매애’가 강조됐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한 편에서는 ‘남성문화를 익힌 여성이 더 성공한다.’는 말이 오가는 만큼 여성이란 이유만으로는 절대로 맑은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균관대의 정현백 교수는 “여성들이 벌이는 대리전쟁을 보면서 여성이 많이 진출하더라도 과거의 부끄러운 정치문화가 끊임없이 재생산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경애 교수는 “이전에도 선거운동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면 민주정치가 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이젠 어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그것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조현옥 대표는 “여성이 ‘원천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정·부패의 뿌리인 남성들의 학연·지연 등 연고주의에서 훨씬 자유롭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여성이 부정·부패·폭력 정치의 대안세력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선거 전후의 과정이야 어쨌든 여성의원들이 당적을 떠나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공감했다. 허남주기자 hhj@seoul.co.kr˝
  • [총선 릴레이 기고 ②] 국민 안심시키는 새 국회 되길/박근 한미우호협회장 전 유엔대사

    “나를 좀 안심시켜주고 마음 편하게 해 주세요.” 이것이 새 국회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고 주문이라고 믿는다.따라서 이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새 국회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탄핵의 태풍 속에 치러진 총선은 또한 국민의 불안과 걱정 속에 치러진 총선이다.그렇게도 인기 없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하루아침에 하늘로 치솟고,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땅바닥으로 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하루만에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국민의 갈채를 받을 만한 공적을 쌓아올린 것은 아니다.대통령을 쫓아낸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처사가 그러지 않아도 불안하던 국민을 더욱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즉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나 동정의 바람이 아니고 ‘불안의 바람’이었다. 동시에 탄핵이 갑자기 발의되고 가결된 밑바닥에도 불안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이 불안의 원천은 무엇인가.한 외국기자도 지적했듯이 노 대통령 측근과 정부 요직 중에 북한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이 있다.또 노 대통령의 몇몇 발언,예컨대 우방 동맹국의 군대에 관해 3·1절 기념사에서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인 용산기지가 이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고 한 말에서 오는 한·미 동맹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북한 핵문제를 외면한 채 남·북연합제 통일을 주장하는 대북정책도 불안하다.현대그룹 총수와 부산시장·대우건설 사장의 자살에서 받는 권력의 비정한 가혹성과,불법 정치자금과 관련해 대기업을 향해 계속되는 매질을 보고 느끼는 불안감이 있다.이는 경제 침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구호아래 시민단체를 동원한 촛불시위와 시위대의 힘으로 몰아쳐 성취하자고 독려하는 ‘시민혁명’구호도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기존의 지역적 갈등과 세대적 갈등에 겹쳐서 계급적 갈등과 이념적 갈등으로 더욱 깊이 양분되고 말았다.양쪽 모두 전쟁터에서나 나올 듯한 극한 구호와 매도로 서로를 증오하고 불신한다.그러면서 양쪽이 모두 불안한 것이다. 새 국회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분열상과 불안의 거울이 되고 확대경이 될 것인가,아니면 국민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해주는 마음의 안식처 구실을 할 것인가. 국민은 노 대통령이 있을 때보다 없는 현재가 더 조용하고 편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탄핵을 유발한 불안과 탄핵이 몰고온 불안,대통령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한,이 이질적인 불안의 이중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는 새 국회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선 탄핵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정을 조용히 기다리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되든지 성숙한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국민답게 깨끗이 수용해야 한다.시민단체들의 데모나 극단적인 행동은 입법을 통해 금지해야 한다. 양당 구도로 정립된 새 국회가 양보와 타협의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원내 다수당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나간다면 국민 불안은 증폭될 것이고 새 국회도 실패한 국회로 전락할 것이다. 사회와 정치권의 좌·우익 갈등,보·혁 갈등,이념적 갈등은 새 국회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각자의 입장을 투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도 국민 불안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이다. 한·미동맹은 초당적 국가 이익이다.새 국회는 초당적으로 한·미동맹을 보완하고 강화해야 한다. 대기업은 21세기 우리나라의 자랑이고 긍지이며,우리 국민의 경제적 복지의 기반이다.불법 정치자금의 책임은 정치권에 있지,권력이 무서워서 비자금을 만들어 정치인에게 바치는 대기업인들에게 있지 않다.새 국회는 대기업에 대한 매질을 중지하고 기업을 육성하고 보호하고 강화해주는 입법활동을 전개해 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통일과 대북정책의 기본은 북한의 핵문제 해결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북한에는 핵이 있고 남한에는 핵이 없다는 사실은,유사시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박근 한미우호협회장 전 유엔대사˝
  • [시론] 청년실업 눈높이를 맞춰라/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

    엊그제 미국과 우리나라의 증권사 객장이 환해졌다.미국 고용사정이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이 호재로 작용했다. 어느 나라나 실업문제가 가장 큰 현안이다.먹고 사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고,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기업 3곳 중 2곳이 올해 채용계획이 없다고 한다.상황이 2001년 4·4분기 이후 가장 나쁘다.그러나 깊은 수렁에 빠진 고용문제를 쉽게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먼저,흔히 반기업정서라고 일컫는 악화된 경영환경을 서둘러 바꿔야 한다.기업들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경영자들을 비난하는 사람 중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몇 안 된다.일부 문제를 갖고 모두를 매도하는 구태는 이제 버려야 한다. 실패도 마찬가지다.실패책임은 경영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직원이나 노조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선 어떤 의사결정도 영원한 효자가 되기 힘들다.어제의 효자가 오늘은 불효자가 되는 것이 다반사다. 경영자는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많은 기업인들이 경영을 포기하려고 한다.최소한 기업인들이 자신감만은 잃지 않도록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해서 안 되는 것은 투명하게 제시하고,나머지는 자유롭게 함으로써 예측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경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이다. 둘째,지금도 그렇지만 기업들은 경영혁신과 기술개발을 가속화할 것이므로 ‘고용없는 성장’은 필연적이다.전국적으로 사람을 기다리는 일자리가 10만개에 이른다.중소기업들은 인력을 못 구해 아우성인데,다른 한쪽에선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있다. 이제 대학 졸업자들도 용기를 내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안락의자 같은 대기업만 바라보지 말고 중소기업에서 일을 배우고,경력을 쌓고,자신의 상품성을 키워 원하는 기업으로 옮겨야 한다.호황시절의 착각에서 벗어나 현실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셋째,경기가 좋아지면 고용사정도 일정 부분 나아지겠지만 청년실업 문제는 계속 남을 것이다.요즘 기업들은 당장 활용가능한 인재를 찾는다.따라서 대학생들은 1·2학년부터 인턴제도를 활용해 현장을 배우고 기업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인턴과정은 일도 배우지만 신뢰를 검증받는 과정이다.어느 기업이 검증된 사람들을 선택하지,새로운 사람들을 찾겠는가.대학도 현장과 연계된 교육으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기업들은 대학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대학이 기업만큼만 변하면 세상은 더욱 달라질 것이다. 노조도 변해야 한다.임금을 삭감하더라도 고용을 지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근로조건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기업 경쟁력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거나 규제완화 등에 대해서도 목소리도 높여야 한다. 현장과 밀착된 실학(實學)정책이 필요한 세상이다.꿈같은 얘기는 이제 필요없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일꾼이 있었다.학자가 다가가서 말했다.‘언덕의 각도가 몇도이니 힘의 방향을 몇도로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수레는 별 진전이 없었다.두번째로 온 정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하며 열변을 토했다.그러나 사람들은 냉담했다.뒤늦게 온 언론인은 정치가가 사람동원에 성공하는지,학자의 견해는 어떤지 취재하기에 바빴다. 그때 팔을 걷어붙이고 수레를 힘껏 미는 이가 있었다. 경영자였다. 수레는 힘차게 언덕을 올라갔다.” 얼마 전 책에서 본 뼈있는 이야기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
  • [김후년의 클럽하우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최근 중견 연기자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펴냈다.이 책은 지난 10여년 동안 소말리아 등 전쟁터에서 고통받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 느낀 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공 때리는 기계로 전락한 주니어 골퍼에게 눈을 돌려보자. 국내의 주니어 골퍼는 3000∼4000명으로 추산된다.협회나 산하 연맹에 등록한 선수는 2000명 선이지만 골프를 막 시작한 선수를 포함하면 어림잡아도 두 배는 넘을 것이다. 전국 규모로 치러지는 골프대회의 상위 입상자에게 상급 학교 진학의 특전이 주어지는 것이 주니어 골퍼가 늘어나는 첫 번째의 이유겠지만 엄청난 돈과 명예를 거머쥔 타이거 우즈와 박세리의 등장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 결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선수는 얼마나 될까.학업을 전폐한 채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닭장 같은 연습장의 한 귀퉁이에서 매일 500개가 넘는 공을 때리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심지어 굳은살이 박인 고사리 손을 보면 목이 메인다.도대체 골프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를 쓰고 매달리는 것일까.여름 방학에 몰려 있는 대회에 출전해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때론 주위의 시선은 물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적이 좋지 않다고 아이를 때리는 아버지들을 보면 당혹스럽다. 늘어나는 주니어 골퍼를 둘러싼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레슨비 챙기기에 급급한 일부 몰지각한 프로,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티칭 프로를 쉽게 바꾸는 조급한 부모,이 과정에서 골이 깊어진 불신,학업 전폐를 방기하는 교사,이를 외면하는 교육제도 등등. 최근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2004 학교체육 정상화를 위한 기본 방향은 골프를 포함한 체육 분야의 문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도달해 있음을 방증한다.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그러나 관행에 비춰볼 때 학교 수업을 충실하게 진행하기 위해 초등학생의 정상 수업,중·고생의 오전 수업이 반드시 이뤄지도록 지도·감독하라는 지침이 실제로 지켜질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 지금 제주도에선 어린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는 제주도지사배 골프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다. 설사 성적이 예상 밖으로 부진하다고 해도 절대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아이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어떻게 풀어줄 것인가. 골프 칼럼니스트 golf21@golf21.com˝
  • [儒林 속 한자이야기](10)

    유림 39에 하마(下馬)가 나온다.下는 ‘아래,아래로,내리다’등으로 해석되는데,말(馬)의 모양을 본뜬 馬자와 합해 ‘말에서 내리다.’의 뜻이 된다.이는 한자(漢字)가 앞뒤 글자에 따라 명사,동사,형용사,부사 등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이다. 낙마(落馬)는 ‘말에서 떨어지다.’의 뜻으로 下馬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말(馬)은 사람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동물인 만큼 관련된 어휘나 일화가 많다. 가마 또는 말(馬)은 대체로 상류층의 교통수단이었는데,도로의 일정 장소에는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힌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이곳에서 주인,기사,말들은 쉬거나 볼일을 보았다.이때 가마꾼이나 마부들은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었는데,그들의 주인이 대부분 고급관리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기에 주로 주인들의 출세나 진급 또는 면직 등에 대한 평(評)이 많았다.그래서 요즘 개각이나 요직의 개편이 있을 때마다 떠도는 하마평(下馬評)이란 말이 나왔다.이는 세간(世間)의 화제,잡담,험담으로 해석되는 ‘가십’과는 구분된다. 출마(出馬)는 원래 ‘말을 몰고 나오다,또는 말을 나라에 바치다.’가 주요 뜻이다.그런데 임지(任地)로 가는 관리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 등은 말을 타고 나갔다.그래서 선거때 많이 거론되는 ‘출마(出馬)’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말을 타고 가던 주인이 길을 잃었을 때 말(馬)이 알아서 길을 찾아 갔다는 일화도 있다.춘추 전국시대 제나라의 환공이 습붕,관중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고죽(孤竹)이라는 작은 나라를 토벌한 후 돌아올 때 길을 잃었다.관중은 늙은 말이 길을 찾을 것이라며 가장 늙은 말을 풀어놓았다.말은 사방(四方)을 둘러본 뒤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군사들이 말을 따라가다 보니 무사히 돌아오게 됐다.이래서 ‘노마(老馬)의 지혜(智)’라는 말이 나왔는데,이는 ‘많은 일을 잘 알고 있더라도 그 지혜가 늙은 말(馬)만도 못한 경우가 있으니,아무리 변변치 못한 사람이나 동물도 나름대로의 재능이나 특징은 있다.’는 뜻이다. 말이 자기 집을 스스로 찾아 온 일화는 한비자(韓非子)의 인간훈(人間訓)에도 있다.옛날 중국 북방 오랑캐들과 인접한 요충지 근처에 점을 잘 보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그런데 어느 날 노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이웃 주민들이 노인을 위로하자 노인은 ‘이 일이 오히려 복(福복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서운해하지 않았다.몇 달 후 달아났던 말이 오랑캐의 준수한 말을 짝으로 맺어 돌아옴에 이웃 주민들이 축하하자 노인은 ‘이 일이 오히려 화(禍재앙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기뻐하지 않았다.그 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즐기다 낙마(落馬),다리가 부러졌다.주민들이 노인을 위로하니,노인은 ‘이 일이 오히려 복(福복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해했다.얼마 후 오랑캐가 침입하자 젊은이들이 징발되어,전쟁에서 대부분이 죽었다.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 때문에 징병에서 제외되어 살아 남았다.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또는 새옹지마(塞翁之馬)나 북옹마(北翁馬)로 불리는 이 일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행(幸)과 불행(不幸),길(吉)과 흉(凶)이 늘 교체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생겼다고 너무 기뻐할 것도,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너무 서운해 할 것도 없음을 뜻한다. 박교선 교육부 연구사˝
  • [스포츠 라운지] TG삼보 외국인코치 제이 험프리스

    “폭탄주는 ‘원샷’이 제격이지요.라면에는 신김치가 최고,소주 안주로는 붕어찜이….” TG삼보가 03∼04프로농구에서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쥐는 데 한몫을 한 제이 험프리스(42) 코치는 국내생활 2년여 만에 한국인이 다 됐다.경기가 없는 날이면 평소 봐둔 한식당으로 전창진 감독을 안내해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타고난 사교성으로 팀 연고지인 원주지역의 판·검사들은 물론 군장교들과도 친하게 지낸다.최근에는 미국의 아들 엑스비어(13)까지 불러들였다. 2년전 TG가 험프리스를 영입할 때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용병 선수들에게 주는 ‘달러’도 아까운데 이전 몇 차례 시도해 큰 효과를 보지못한 외국인 코치에게까지 또 월 1만달러를 줄 필요가 있느냐는 것.미국프로농구(NBA) 출신이라고 해도 한국농구에 뿌리 내리기는 힘들다는 얘기였다.그러나 03∼04시즌에는 KCC와 SK도 NBA 출신 코치를 영입했다.‘험프리스 효과’인 셈이다. ●‘어머니’ 같은 미국인 코치 TG가 지난시즌 챔프전과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정상에 오른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험프리스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또 ‘전창진-험프리스’ 하모니가 TG의 사상 첫 통합챔피언 등극을 이룰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감독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나는 위치 선정을 정확히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감독이 전쟁터의 사령관이라면 자신은 사령관과 병사들의 곁을 지키는 참모라는 것이다.이런 그를 전 감독은 “우리 어머니들이 자식을 살피듯 꼼꼼하게 선수 뒷바라지를 하는 코치”라고 평가했다. 특히 외국인 선수들을 한국무대에 연착륙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그는 지난시즌 챔프전 때 ‘향수병’이 도져 미국으로 떠나려던 데이비드 잭슨을 설득해 보따리를 풀게 했다.이번 시즌에도 다혈질에다 ‘나홀로 플레이’를 고집하는 앤트완 홀을 구슬러 팀에 융화시켰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NBA의 온갖 전술과 트레이닝 방법도 TG로서는 큰 자산이다.감독은 물론 선수들까지 허물없이 자문을 구하고,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노하우를 전수한다. ●“한국농구 발전 가능성 무궁” 험프리스와 한국농구의 인연은 그가 미국 대학선발로 활약한 지난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미국 대학선발팀은 타이완의 존스컵에 참가하기 앞서 한국에서 1주일간 머물며 국가대표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다. 험프리스는 “한국 농구가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으며,발전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선수들의 기량은 물론 감독들의 지도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칭찬만 하지는 않는다.험프리스가 한국 농구에 당부하는 첫번째는 빅맨을 키우라는 것.드리블과 슛이 좋은 선수는 많지만 골밑에서 궂은 일을 하려는 선수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그는 “승리는 3점슛이 아닌 골밑슛에서 나온다.”면서 “현재 만연해진 ‘센터 홀대’를 극복해야 한국농구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또 감독이 요구하는 플레이만 고집하지 말고 경기 전체를 읽고,상황에 맞게 풀어나가는 자율적인 농구를 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특히 프로선수들의 ‘사회성’을 강조한다.“한국선수들은 코트 밖으로 나오면 왠지 어깨가 처지는 것 같다.”면서 “농구를 무기로 다른 분야에서의 대인관계를 적극 넓혀야 농구와 자신이 함께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열린세상] 송두율과 알키비아데스/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교장

    시민은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며,자유 의사에 따라 국가를 선택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자유로운 정신의 표현이었다. 개인이든 나라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법을 보면,그 나라나 개인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추상적으로 말해서 자기 아닌 타자에 대해 얼마나 개방적일 수 있는가를 보면 한 사회의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이를테면 송두율을 감옥에 가두는 한국사회와 알키비아데스(Alkibiades)가 살았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비교해 보라.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5세기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페리클레스의 뒤를 이어 아테네를 이끌었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특히 그는 이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이른바 시칠리아 원정을 주도적으로 발의했던 사람인데,원정 부대가 출발하기 직전에 아테네 전역에서 헤르메스 신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다.평소에 알키비아데스의 성공을 시기하던 정적들은 터무니없게도 이것을 알키비아데스의 소행으로 몰아 그를 탄핵했다. 그는 이 문제를 깨끗이 마무리하지 못한 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시칠리아를 향해 떠났는데,원정대가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자마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소환을 요구받았다.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알키비아데스는 자기를 호송하는 배가 투리오이에 기항했을 때,배에서 도망쳐 적국인 스파르타에 망명하였다. 전쟁 중에 가장 뛰어난 장군을 적에게 넘겨준 것이 아테네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겠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기민하고도 정확하게 대처하였고,그 결과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 원정군의 전멸로 끝났다.사실상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패는 이것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이 몸에 밴 사람으로서 스파르타에 동화되어 살 수 있는 위인은 되지 못하였다.스파르타의 왕이 전쟁터에 나가고 없는 사이 그의 왕비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을 정도였으니,소피스트적 개인주의에 깊이 영향받은 자유분방한 아테네인에게 스파르타는 역시 너무도 적응하기 어려운 획일적 사회였던 것이다. 스파르타를 떠나 아테네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알키비아데스는 당시 스파르타와 동맹관계에 있던 이오니아의 페르시아 태수(太守)에게로 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 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을 때 아테네 함대를 도와 스파르타 함대를 크게 무찔렀다.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에는 개선장군이 되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전에 공연히 죄없는 알키비아데스를 죄인으로 몰아 스파르타에 망명하게 함으로써 시칠리아 원정에서 참패한 것을 후회할지언정 그를 반역자로 몰아 감옥에 가두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머리에 황금관을 얹어주고 해군과 육군 모두의 전권을 장악하는 장군으로 추대하였다.그리고 과거에 그를 추방하면서 몰수했던 재산을 돌려주었다. 생각하면,아테네 시민들이 한때의 반역자에게 이리도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은,나라를 선택하는 것이 시민의 천부적 권리라고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당시 아테네에는 성인이 된 후에 아테네가 싫으면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가족들과 어디로든 이주할 수 있는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그것은 시민이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며,자유 의사에 따라 국가를 선택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자유로운 정신의 표현이었다. 요사이 신자유주의다 뭐다 하면서 모든 부문에서 정부의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유행이다.그런데 다른 일에는 규제 없는 작은 정부가 좋다면서 시민의 사상과 정치 활동의 규제는 왜 풀지 않는가.송두율이 북한을 방문해 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한들 그것이 우리들 각자에게 무슨 대단한 피해를 입혔는가.송두율을 석방하고,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시민에 대한 국가폭력의 역사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김상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교장˝
  • [CEO칼럼] 소박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오상현 대한손해보험협회 회장

    이제 사회지도층은 공적 의무를 도외시한 소모적 논쟁과 분열을 그만두고 자기희생적 노력을 통해 공동선에만 오로지 헌신해야 한다. 천지기운을 보니 기어이 봄이 오려나 보다.섭리인즉슨 진정한 봄은 꽃샘추위를 거치고서야 온다.최근 불법 정치자금 때문에 사회 전체가 시끄럽다.이것을 혹자는 사회불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꽃샘추위처럼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견해가 맞는 듯하다. 정치자금의 예에서 보듯 과거에는 알게 모르게 용인되던 도덕률이 점점 투명하고도 엄격한 형태로 진보하고 있다.선진국일수록 이러한 도덕률은 더욱 철저한데,미국 공직자의 경우 20달러 이상의 접대만 받아도 법으로 처벌받는다고 알고 있다. 또 이러한 도덕률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책무는 영향력이 큰 국가 엘리트 혹은 사회지도층에게 더 엄격히 적용되는 게 당연하다.왜냐하면 사회지도층이야말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지대한 권력이나 명예,혹은 부를 누리며 그만큼의 사회적 대우도 받는다. 영국만 보더라도 웰링턴 국립묘지의 묘비에는 일반 서민들의 이름보다는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이름이 훨씬 더 많이 새겨져 있다.포클랜드 전쟁 때 앤드루 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해 최전방에서 싸운 일화는 유명하다.그래서 일반 영국 국민은 위난시에 목숨을 버리며 앞장선 사회지도층에 대해 기꺼이 존경하고 흔쾌히 대우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1950,1960년대에는 소를 팔아야 대학을 보낸다고 하여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유행했다.6·25전쟁 때에는 대학생이면 병역연기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는데 소 한마리 값이 없어서 대학에 못 보내는 대신 전쟁터로 보낸 멀쩡한 자식을 한 줌 뼛가루로 돌려받는 일도 많았다. 얼마 전까지도 자랑스러워야 할 병역의무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아서,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자기희생적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 사회지도층을 지켜보는 많은 민초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양반과 상놈으로 차별해 서민대중을 무시하고 핍박하던 섣부른 선민의식 탓인지,친일을 하던 반민족주의자들이 적반하장격으로 득세하던 탓인지 모르겠으되,사회갈등을 야기하고 국민평등에 위배되는 이러한 악습은 앞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16세기 조선조에 퇴계 이황은 선비의 역할로 사회적 공의정신(公儀精神)을 강조한 바도 있다.이러한 선비정신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지조의식으로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 의미의 선비정신이란 자기만족의 고루한 이념이 아니라 몸을 낮춘 채 배운 자는 배움으로,힘 있는 자는 힘으로,돈 있는 자는 돈으로 서민대중 속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는 소명의식의 적극적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배양성공으로 세계적 찬사를 한몸에 받은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특허로 생기는 수입은 사회에 헌납하고 오직 조국과 인류의 공동선에만 기여하겠다고 밝힌 각오는 선비정신의 현대적 응용으로 혼탁한 세상에 던진 신선한 충격이 됐다. 이제 사회지도층은 공적 의무를 도외시한 소모적 논쟁과 분열을 그만두고 자기희생적 노력을 통해 공동선에만 오로지 헌신해야 한다.그런 후에만 비로소 지도층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지도층이 거듭남으로써 부여받은 소명을 다하고 진정으로 존경받게 되는 사회야말로 국민 대통합의 토대가 될 것이며,이것은 그대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소박하지만,아름다운 화원(花園)이 될 것이다. 오상현 대한손해보험협회 회장˝
  • 3년6개월만에 공직복귀 이헌재 경제부총리

    상하이(上海) 출신으로 올해 61세.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3년여간 금융·기업구조조정을 맡으면서 ‘미스터 구조조정’이란 별칭을 얻었다. 경기고가 배출한 수재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법대 수석합격,행정고시 수석합격 등으로 학창시절이나 재무부 근무 당시 돋보이는 존재였다.69년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당시 김용환 장관의 눈에 띄어 금융정책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79년 율산사태에 연루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으나,외환위기 직후 또다시 김 전 장관의 도움으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으로 발탁됐다.이후 금감위원장을 거쳐 재경부장관에 올랐으나 8개월여 만에 낙마했다가 이번에 다시 부총리로 돌아왔다.취임 전에는 3조원대의 ‘이헌재펀드’를 모아 우리금융 인수에 나서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공직에서 물러난 뒤 재계 인사들을 많이 사귀어 ‘이헌재사단’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요로에 지인들이 많다. 난세의 풍운아로 불리는 이헌재.3년6개월 만에 ‘부총리’라는 직함을 더해 경제수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의 복귀는 그의 존재를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됐고,시장은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시장은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다. 하지만 위엄 뒤에 감춰진 늦깎이 공직자로서 이 부총리의 웃지 못할 애환도 적지 않다.취임 이후 한달 가까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진솔하게 털어놓은 신변잡기는 ‘인간 이헌재’의 또다른 면을 읽게 해준다. ●“체력달려 폭탄주 양주양도 5부로 줄여” 이 부총리는 폭탄주 애호가로 소문 나 있다.그런 그가 최근 이런 말을 했다.“폭탄주를 제조할 때 양주의 양을 7부에서 5부로 바꿨어.5부가 맛이 더 있더라니까.” 그리고는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그전에는 친구들과 엄청나게 마셔댔지.아주 친한 친구인 심재륜 전 고검장과는 한번 만나면 12∼13잔씩 폭탄주를 돌리곤 했지.그런데 요즘은 서로가 자존심 때문에 전화를 잘 안해.만나면 먹어야 하고,그러면 다음날 몸이 부대껴서 힘들어.체력이 떨어진 거지.” 1주일에 한 두번 집무실에 들를 정도로 바깥 행사에 파묻혀 있는 그의 달라진 생활패턴은 이것뿐이 아니다. 공직생활을 그만둔 뒤부터 늦게 일어나는 오랜 습관이 골칫거리다. 나이 탓이 크다고 한다.전에는 느긋하게 일어나 부부가 함께 골프연습을 하거나 산책을 하곤 했는데,지금은 출근 시간이 일러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저녁형 인간에서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아.” 얼마 전부터 좋아하는 바둑도 끊었다.바둑에 한번 몰입하면 밥상을 물리고 밤을 새우는 체질인데,요즘은 그렇게 할 여유도 체력도 안된다는 것. “밤을 새우고 나면 눈물이 막 나고,얼굴도 퉁퉁 붓고 해서…” 골프도 특기에서 취미로 바뀌었다.‘주4파(주 4일 골프를 치는 것)’는 옛날 얘기.“골프를 너무 좋아해 한때는 주당 4일씩 연속 5∼6주를 다닌 적도 있었는데….그런데 골프는 계속 치니까 오히려 스코어가 더 안 좋아지더라고.”라며 못내 옛날(?)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주말에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이나 친구 등과 함께 라운드에 나서 샷의 묘미를 즐긴다.핸디는 한 자릿수를 넘기지 않는다. ●시장은 놀이터 아닌 전쟁터 시장을 향해 툭툭 던지는 애매모호한 화법도 요즘은 아낀다.직설 화법에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다.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틈날 때마다 “경제는 심리”라고 외친다.말을 함부로 해서 시장의 혼선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해 보인다. 요즘은 귀를 열어놓고 산다는 말도 곧잘 한다.현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듣고 있고 호흡을 같이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그래서 그의 독특한 화법인 선문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애매모호한 언급으로 시장에 메시지를 던지는 미국의 루빈 전 재무장관이나 그린스펀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선문답식 화법을 무척 좋아하고 자주 거론한다.‘한국의 그린스펀’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기대감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지금은 아니지만,조만간 선문답식 화법을 다시 시작하려 할 것이란 관측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사스타일에는 자신만의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친다.극도로 말을 자제하면서도 “나는 어디를 가나 늘 새로운 사람을 발굴해왔어.옛날 사람을 다시 쓰지 않고 새 사람을 찾지.그래서 인력풀도 많은 편이지.”라고 말한다.‘이헌재사람들’로 불리는 인맥들이 최근 이런저런 곳에 불려가기도 하고 거론되기도 하지만,정작 자신이 다시 데려다 쓴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지금의 재경부 내에서도 몇 명을 발굴해낼 테니 두고 보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재경부 한 간부가 “그가 취임 이전에 이미 국장급 이상 간부 등의 업무능력 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로 들린다.그래서 이 부총리한테 국실별로 업무보고를 할 때 긴장하지 않는 간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황하게 현황 설명부터 시작하려 들면 급브레이크가 걸린다.”똥개 훈련시키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해!” 타고난 관료로 불릴 만큼 공직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지만,그는 스스로 공직생활이 체질적으로 딱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그린스펀’도 결혼안한 자식걱정 낭인 기질을 타고났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학창 시절부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기적어기적 걸어다녔다고 자신의 기이한 행동을 자랑삼아 얘기한다. 스스로 낭인임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다.한국 서예계의 대표작가인 원로 대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이 예전에 ‘평생자상무관락’(平生自想無冠樂·평생 명예나 돈따위를 생각하지 말고 즐거움만 생각하고 살아라.)이라고 써준 글귀대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재정금융심의관을 마지막으로 79년 재무부를 떠날 때까지 무려 사표를 여덟번이나 썼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그의 자신감 넘치는 낭인 기질의 단면이다. 하지만 천하의 ‘이헌재’도 자식 얘기가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아직 미혼인 아들·딸을 의식한 듯)짓궂게 남의 약점을 건드린다.”며 더 이상 언급을 피한다.그러면서도 강한 애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부모님이 중경등지로 피란생활을 할 때 나를 상해에서 낳았는데,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을 주고 유명한 작명가한테서 헌재라는 이름을 지어왔어.이름값을 하고 살 거라는 작명가의 덕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큰 걱정 않고 살고 있는 것 같아.부모가 나에 대한 욕심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자기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는 부모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주병철기자 bcjoo@˝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8)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하)

    문:중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徐:당시 청나라는 계속된 전쟁으로 만주족의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요.대부분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농사 지을 일손이 부족하여 토지가 황폐해졌지요.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이나 양식이 필요했는데,그 농사를 짓기 위해 포로가 필요했지요. 그 포로들을 농장 노예로 만들어 중노동을 시켰는데,조선인들은 주로 심양 부근인 동주보(東州保),둔소(屯所),안산(鞍山),흥경,청룡,풍윤(豊閏) 지역에 집중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조선인 노예들은 뒷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徐:민족동화 과정을 거쳐 만주적(滿洲籍)에 편입되어 귀화인이 되었는데,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譜)에 올라 만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청나라 포로가 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까요? 徐:소수지만 군인,지도층에 편입된 흔적도 있지만 대개는 농장노예,만주족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조선인 포로를 분산시키거나 나누어 가졌다는 말인데,혹 인신매매도 있었을까요? 徐:‘심관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이 문헌은 심양으로 끌려 온 조선의 두 왕자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포위된 채 살았던 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조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었거나 포로 가족이 돈을 가져 와서 주고 데려가는 속환(贖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문:노예라면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고대 오리엔트,고대 그리스·로마,식민지시대 아메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요.노예무역선,노예사냥,미국의 흑인노예라는 말이 그 증거지요.그런데 조선인 전쟁포로가 노예로 매매되었으며,그들이 조선족의 원류이고,오늘날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 속에 그런 비극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퍽 충격적인 일입니다. 徐:심관록 기록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매매하려고 모여들었다.성문 밖에는 포로가 된 남녀 수만 명이 있었다.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상봉하였거나 형제끼리 서로 만나 끌어 안고 통곡하는 데 울음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잡혀간 사람을 돈을 주고 찾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성문 밖에 모였다.포로가 되어 있는 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자식들이 와서 얼마면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가격을 흥정하는데,값이 비싼 경우는 백냥 또는 천냥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값이 너무 높아 어이없어 통곡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친척이 없어 홀로 있는 사람은 세자(世子)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속환시켜 달라고 울고 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세자라면 누구를 말합니까? 徐:조선 인조대왕의 큰아들 이조(소현세자),둘째아들 이호(봉림대군,효종)입니다.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패배를 한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데려왔거든요.노예로 매매당할 가혹한 운명에 놓여진 조선인들이 왕자들의 처소 울타리 밖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지요.두 왕자는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오늘날 중국 조선족 역사에는 이같은 노예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그렇다면 조선인의 중국 이민사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여기는 견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18세기 후반 이전에 중국으로 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화해 버렸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문:귀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徐: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만주족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인구를 증가시키고,군인이 될 인원을 보충하며,노예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 나머지 만주인 호적에 편입될 사람을 모집하는 정책을 발표하며,편입자 숫자대로 상을 주는 제도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으로 귀화를 시켰지요.그런 연후에 조선인들은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스스로 귀화하고 만주호적자 모집에 순응하는 자연적 귀화과정을 밟았지요. 헤이룽장조선민족이란 문헌에는 청나라 초기에 만주적에 가입한 조선인의 성씨가 42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천총(天聰) 연간인 1627∼1635년에 청나라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문:그러니까 17세기 초·중엽에 이미 조선인들은 국적을 바꾸어 청나라 사람이 되고 만주 씨족에 올라 만주인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徐:설혹 그런 식으로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이같은 통혼을 기초로 하여 혈연관계와 친척관계를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민족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조선족의 처지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북성 청룡현 박씨(朴氏) 조선족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 박씨들의 조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중국으로 왔는데 동성동본 불혼 제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 합니다. 문:한족,몽골족,만주족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그 뒤로 조선족으로의 회복이 영영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徐:아닙니다.심리적으로는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게 존속되어 왔습니다.그러다가 1982년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서 조상이 남겨 둔 민족성을 회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 말에서 20세기 일제 때 중국으로 와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그리운 고향입니다.참,마음이 아픕니다. 문:일제 때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서도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조선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徐:아주 많습니다.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것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일왕(日王)정권이었지요.한반도의 남과 북은 통일이 되면 그날로 하나가 되겠지만 중국 조선족은 다르겠지요.그러니 일제의 식민통치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원한의 상처지요. 문: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인 카레이츠들의 삶을 둘러 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같은 도시의 장마당이라 부르는 난전에서 조선족 장사꾼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국경의 세관에서 비자를 받고 러시아로 오는데,주로 옷장사를 하더군요.하지만 한달간씩 머물며 장사를 해도 체재비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나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했습니다.그런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것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만,요즘 한국에 온 조선족들의 처지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카레이츠들보다 중국의 조선족 운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둘 다 우리 민족이 안고 사는 슬픔의 뿌리인데…. 徐:한국이 잘 살게 되어야 합니다.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게 되어야만 이 아픔의 역사가 통한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러시아의 카레이츠,일본의 조센징은 모두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이들의 삶을 생각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등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조선족,고려인들은 사는 데 어려움이 크다. 그 어려움의 한 원인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저지른 잘못이며,식민통치가 옳았다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친일파 지식인들이 숭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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