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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3월5일(모스크바 새 증언:28)

    ◎“스탈린 사망”… 소 「휴전협상 조기타결」 급선회/크렘린 새 지도부,북한·중국에 “입장 변경” 급전/모 “더 싸울수 있다” 몇차례 이견 표명후 곧 동의 전선현황을 일일이 보고받아 전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알면서도 스탈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무슨 신념같이 휴전협상에서 이같은 강경입장을 절대 바꾸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북한은 스탈린이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훈령을 보낸 바로 그날,51년 11월 19일,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같은 제의를 발표할 예정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탈린은 이튿날 정치국 이름으로 다시 한번 평양주재 라주바예프대사 앞으로 전문을 띄워 엄청난 질책을 퍼부었다.(51년 11월20일.N334/93) 『우리는 조선동지들이 조속한 휴전성사를 위해 유엔에 청원하겠다는 건과 관련,대사가 취한 태도를 용납할수 없음.대사는 조선이 유엔에 청원할 의사가 있음을 11월 18일에서야 보고했음.귀하는 북한의 이러한 청원이 우리의 공식입장에 위배되지 않는지 문의했음. 그러나 귀하는11일,18일자로 귀하가 보낸 전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같은날(11월 19일) 박헌영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그 청원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고했음.도대체 누가 그것을 작성했는지 캐내 보고하라는 거듭된 훈령을 묵살하고 대사는 그것이 라디오로 방송될 예정이라는 사실만 보고했음. 따라서 조선동지들은 이같은 유해한 청원을 우리의 승인없이 내놓았음.…중략…귀하는 매우 경솔히 행동했고 조선동지들이 이 청원을 중국과 사전협의했는지 조사해 보고하라는 훈령도 묵살했기 때문에 귀하의 죄는 더 가중됐음. 모든 비판을 받아들여 후일의 교훈으로 삼을 것』 ○주북대사에 질책 전문 이런 식의 논란이 그뒤 1년간 계속된 것이다.그런 소동이 벌어진 지 1년 뒤인 52년 12월 17일 모택동은 마침내 스탈린의 생각을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듯 휴전협상이 지연되니 장기전에 대비해야한다며 소련의 추가무기원조를 요청했다.(전문번호N26499) 『휴전협상이 지연되고 또한 미국은 군사행동을 중단할 정도로 전력손실이 크지 않으니 최소한 1년정도는 전투가 치열해질 것에 대비해야함.아이젠하워는 취임과 동시에 작전을 개시할 의도로 전투준비를 하고 있음.적은 우리 방어망이 견고한 전방을 공격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높음. 적의 상륙작전은 내년 봄,빠르면 2월에 감행될수 있음.가장 큰 과제는 이 상륙작전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막을 것인가 하는 것임.지난해 8월 적의 대공세를 막아낸 이후 전황은 다소 안정적임.이 기간 동안 아군은 전방 방어선과 해안방어망을 강화했음. 아군은 전술적 공격을 감행해 58개 적의 진지를 뺏았고 9월­10월중 우리가 집계한 적의 피해는 미군 4만명을 포함,사상자수가 11만명에 달함.10월중순 적은 2개 사단을 동원해 아군 진지 2곳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했음. 이같은 진지쟁탈전이 계속됨에 따라 포탄소모량이 크게 늘었음.최근 3개월간 아군은 총2백40만발의 포탄을 썼음.하지만 현재 포 보유대수는 적이 1만4천문인데 비해 우리는 1만3천문임.그리고 적은 대부분 중포 및 탱크포인데 비해 우리는 경포가 주류임.또다른 문제는 현재 아군은 소련제 포 2천문을 보유하고 있는데 소련제 포탄을 비롯,포탄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임.만약 적이 우리의 실정을 알아채고 조기공세를 감행할 경우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임.소련제 포탄 추가공급이 최우선 과제임』 모택동은 이 전문에서 또한 앞으로 중국은 새로 의용군을 모집해 이듬해 25만명을 한국전에 추가투입하겠다고 밝혔다.모는 또 북한에 철도,도로건설등 각종 시설을 무상으로 건설해주고 식량을 비롯,모두 미화 6천만달러에 상당하는 각종 물품을 3년동안 매년 북한에 공급키로 했다고 밝혔다.그외 전쟁고아도 대거 중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모는 호언했다.이렇게 잔뜩 장황설을 늘어놓은 뒤 모는 『그렇지만 이 일들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며 본론인 소련의 도움을 거듭 요청했다. ○“미 대공세없다” 반박 모가 가장 시급하게 요청한 품목은 포탄이었다.스탈린은 이 요청에 대해 12월27일 다음과 같이 답전을 보냈다.스탈린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대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모택동의 지적에 이의를 달았다.아울러 그가요청한 추가 무기지원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했다.다음은 이 답전의 주요내용. 『미국이 1953년 봄 공세를 취할 것이라는 동지의 분석은 현 트루만정권의 계획을 기초로 한 것임.하지만 아이젠하워가 취임하면 한국전에서의 긴장을 훨씬 완화하는 쪽으로 전략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음.물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미국의 상륙작전을 가정하는 것은 좋은 생각임. 동지가 요청한 53년도분 추가 무기지원내역은 우리의 능력한도를 넘는 양임.53년도에 20개 사단용 이상의 무기,탄약은 공급하기 곤란함.다시말해 동지가 요청한 양의 4분의 1밖에 공급할 수없음』 그러나 모택동은 끈질기게 추가원조를 요청했다.이듬해인 53년 1월12일에는 모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사고문단의 바실리예프스키장군과 소콜로프스키장군 이름으로 추가무기요청 전문이 스탈린 앞으로 전달됐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N738343)이 전문에서 중국은 53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6백24문의 각종 포와 탄약 2백35만5천발을 시급히 요청했다. 이 전문에서 모는 이전에 약속한 20개 사단용 무기공급을 53년3월부터 시작해 매월 2개사단분씩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모는 이와함께 무기공급의 구체적인 스케줄까지 다음과같이 적어보냈다. 기간 탄약 포 1월 20만발 166 2월 20만발 166 3월 18만발 132 4월 18만발 132 5­12월 8만발 132 (매월) 휴전협상을 둘러싼 중·소간의 강온 의견대립은 53년 3월5일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사정이 급변했다.크렘린의 새지도부는 한국전쟁의 조속히 끝내기로 입장을 굳혔다.중국·북한도 곧바로 이같은 크렘린의 새 결정에 동의했다.물론 모택동은 한두차례 자기는 좀더 싸울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순순히 전쟁조기 종결에 동의했다. ○소각료들은 결의문 채택 53년 3월19일 소련당국은 스탈린 사망에 따른 긴급각료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전에 관한 정부입장을 변경시키기로 하고 이같은 결정을 중·조 양국정부에 통보했다.다음은 당시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N858­372cc) 『소련정부는 현재의 전쟁 상황과 최근의 사태발전을 면밀히 검토했음.그 결과 소련정부는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정책방향을 현정치정세에 맞게,그리고 소련,중국,조선 인민들의 이익에 부합되게 바꾸어야함.우리 인민들은 전세계에 평화가 강화되기를 원하며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위해 항상 노력해왔음』 스탈린이 그렇게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전쟁계속 노선이 하루아침에 돌변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비극이 마침내 마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이 결의안은 「영·미 블록의 침략적인 제국주의정책」을 비난한 뒤 다음과같이 계속됐다. 『우리는 중·조 국민들의 기본적인 이익과 여타 평화애호 국민들의 이해를 고려해 이 전쟁을 끝내야한다.우리는 다음 사항의 조속실현을 주장함. 1.김일성과 팽덕회는 클라크장군이 2월27일자로 제시한 환자·부상포로의 교환에 관한 제의에 긍정적인 회신을 보낼 것. 2.김일성과 팽덕회의 답신이 발표된 직후 중국당국의 대표(가장 적임자는 주은래임)가 북경에서 역시 긍정적인 성명을 발표할 것.이 성명에서는 환자 및 부상포로교환을 포함,포로문제 전반을 긍정적으로 해결할 것과 한국전쟁의 종결 및 휴전협정을 체결할 시기가 됐다는 점을 지적할 것. 3.북경 당국자의 성명에 때맞춰 평양에서는 북조선 대표 김일성이 위 중국대표의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연설을 할 것. 4.우리 역시 북경과 평양에서의 당국자 성명이 발표된 직후 소련외무장관 연설을 통해 이 두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을 고려중임. 5.위에 언급한 4가지 조치에 발맞춰 유엔주재 소련대표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조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 ◎“전쟁 계속하되 무기지원 감축”/모스크바­북경 종전까지 갈등 스탈린과 한국전쟁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그동안 공개된 자료를 통해 전쟁의 기원과 결정에서는 이미 그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전쟁의 전개과정에서의 역할은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가 최초로 그의 역할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번 회에서는 종전과 관련된 그의 역할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그것은 그의 죽음이었다.1952년 12월 17일과 27일의 모택동과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의 종결이 임박한 시점에서까지도 이들의 입장이 조정이 안되었음을 보여준다.특히 스탈린의 전문은 전쟁을 계속하되 중국이 요청한 무기를 그대로 지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다만 요구한 양의 4분의 1만을 제공하겠다고 단정적으로 통보하고 있다.이 답변은 그동안의 모택동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담고 있기까지 하다.53년 1월 12일의 모택동의 전문은 스탈린의 거부가 계속되자 아예 지원무기의 월별 필요 양까지 명기하고 있다.이는 종전시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의 긴장과 내적 갈등이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3월 5일의 스탈린의 사망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둘 사이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그것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스탈린이 사망한 지 10여일이 지난 3월 19일의 소련각료회의의 결의문은 스탈린의 사망이 전쟁의 종결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지금까지 공개된 것 중 최초의 문건이다.즉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전쟁의 종결이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문건인 것이다.거기에는 『현재의 정책을 지속하는게 옳지 않다』는 분명한 지적이 나온다.소련지도부 전체의 종전정책으로의 극적 전환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려있는 다섯가지의 권고사항은 스탈린이 전쟁을 계속하려한 이유가 얼마나 비평화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이 권고사항들은 실제의 종전과정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스탈린은 자신의 죽음으로써만 이 참혹한 전쟁의 종결을 도울 수 있었을 뿐임을 이 자료는 처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입양고지(외언내언)

    북구 노르웨이가 한국아 입양을 시작한 지 40년된다.6·25전쟁후 병원선 봉사자들이 전쟁고아 한둘 데려가기 시작한 이래 지난 5월말로 5천명에 이르렀다.한국아이를 기른 양부모들 잔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주 중요한 조사자료가 40년 기념으로 발표됐다. 13세이상 한국입양아출신 3천명과 노르웨이태생 3천명에 대한 사회조사결과다.전문사회조사기관이 1년여에 걸쳐 방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적응도·사회비중도·부모기대부응도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항목을 조사한 것이다.한국입양아출신이 건강도·적응도등 여러 항목에서 우수하고 학교생활·학업에서는 단연 적극적인 것으로 나왔다. 특히 부모기대부응도에서는 단연 점수가 높았다.십대만되면 일찍 부모곁을 떠나는 노르웨이 아이들에 비해 집 떠나는 것이 늦고 학교 남녀친구문제등 걱정거리를 부모나 조부모에게 말하고 조언을 들어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점에 양부모들이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청소년기 봉사활동참여도 높고 사회직업에서도 남을 돕는 간호직·사회사업직·의료직·법률직등에 많이 진출하여 노르웨이 국가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됐다.미국이나 덴마크·벨기에등 세계 13개국에 입양된 한국아이들이 우수하고 유난히 부모를 따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이들은 모두 알만한 나이에 입양자라는 것을 알고 큰 아이들이다.양부모들이 잘 키워낸 것이다. 국내서도 입양자라는 것을 알리고도 잘 길러낸 사람들이 많다.홀트양자회가 57년도부터 입양한 국내 입양자명단 1만3천여명속에는 이름대면 바로 알 저명인도 상당하다.개중에는 입양자인것을 알게 된 아이가 가출하거나 반항해서 곤경을 겪은 집도 있지만 적합한 시기에 입양사실을 알게 한 것이 양육성공과 좋은 관계 지속조건이라고 조사됐다.다만 충분한 사랑속에 키우고 소중한 자식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 것이 성공의 전제였지만…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2명의 국민교 5년 여아사건은 가슴아픈 일이다.
  • 6·25전쟁고아 구제사업에 헌신/제30회 용신봉사상수상 황온순여사

    ◎“배우고 가진자로서 할일 했을뿐인데…” 6·25의 참상을 그린 영화 「전송가」의 주인공으로 수천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여사(93·학교법인 휘경학원 이사장)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제정 제30회 용신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살면서 일제시대와 8·15해방,6·25전쟁을 모두 겪었으니 우리나라의 어려웠던 시절은 모두 살아봤지요.그러니 많이 배우고 가진자로서 사회사업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또 예전에는 주변에서 워낙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927년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하고 38년 일제하에서 전쟁 뒷바라지를위해 동원된 부녀자들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탁아소 운영을 시발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는 황이사장은 6·25전쟁 당시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외아들 강필국씨가 실종되는 와중에서도 1·4후퇴중 주한미공군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9백명에 가까운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데려가는 등 고아구제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황이사장은 41∼45년엔 미국여선교회가 운영하던 동대문 부인병원(현이대부속병원)을 인수,운영했고 이화장을 직접 짓기도 했다.증권업을 하던 남편 강익하씨를 6·25때 잃은 그는 현재 두 딸중 장녀인 서울음대 강운경교수와함께 지낸다고.
  • 국외입양/지건길 국립경주박물관(굄돌)

    간혹 신문 사회면의 한 귀퉁이에 까까머리나 단발머리를 한 어린애의 자그마한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의 기사를 대하게 되면 누구든 잠시나마 측은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대개는 어렸을 적에 부모와 떨어져 먼 나라로 입양을 떠났다가 어른이 되어 돌아와 그들의 생부모와 혈육을 찾는다는 내용이다.더러 기적같은 상봉의 기사가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수많은 어린이들이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시절,양자회와 같은 사회사업단체의 주선에 의해 혼혈아를 비롯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외국으로 입양되어 나갔다.당장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던 나라 형편에 이들을 부양할만한 능력이 모자라 취해진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을 것이다.이러한 국외입양은 우리사회가 얼마간 안정되어가던 시기까지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국외입양이 어떤 부득이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이유 때문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외국에 나가서 입양아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좋은 양부모를 만나 호의호식하고 지내는 경우라도 이역만리에서의 반가운 마음보다 서글픔이 앞서게 될 것이다. 80년대초의 유학시절,지도교수의 소개로 대서양에 면한 프랑스의 한 해변도시에 초청되어 간 일이 있다.교수의 아는 한 분이 한국에서 입양해온 어린 양자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작은 도시에는 그 밖에도 대여섯명의 한국입양아가 더 있어 그들의 양부모가 한국사람도 만나볼 겸 우리 문화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뭣 모르고 가족과 함께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그 집에 닿아 막상 입양아를 대했을 때의 너무도 애처러웠던 기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철없는 아내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고 태연스러웠던 양부모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민망스러웠던지,지금도 신문에서 입양아 관계기사를 대할 때면 그때의 일들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지곤 한다.
  • 「6·25」 3년1개월간 인명·재산피해

    ◎군인·민간인 258명 사망·실종/장애자·미망인·고아 등 전재민 5백망/항만1백곳·교량 3백12㎞ 완전 파괴/주택·학교·병원·공장 등 63곳 초토화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1개월동안 계속돼 막대한 인명·재산피해를 냈다. 남북한군은 물론 연합군등 수백만명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한 부상을 입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산업·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돼 휴전뒤 남북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전쟁복구에 땀흘려야만 했다. 우선 군인의 피해를 보면 한국군은 전쟁중 14만9천5명이 전사하고 71만7천8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3만2천2백56명이 실종됐다. 또 포로로 붙잡힌 사람은 9천6백34명으로 한국군 전체의 인명피해는 1백만여명에 이른다. 또 한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은 5만7천6백15명이 전사하고 11만5천3백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과 포로는 8천8백97명으로 집계돼 유엔군의 피해는 18만여명에 달했다.이중 대부분은 미군으로 전사 5만4천2백46명을 비롯,부상 10만3천2백84명과 실종·포로 5천5백29명등 16만여명이다. 공산측의 피해는 더욱 커 북한군은 29만4천명이 전사하고 부상 22만6천명,포로 11만2천명등 모두 63만2천여명이나 되고 중공군은 전사 18만4천명,부상 71만6천명,포로 3만1천명등 93만1천여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산가족 1천만 이같은 군인피해에서 사상자수만 따로 떼어내 보면 유엔·한국·북한·중국군을 통틀어 사망 41만4천여명,부상 1백77만4천여명등 모두 2백18만8천여명이다. 6년동안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사상자가 일본 6백46만명,미국 1백7만명이었고 14년간 계속된 월남전에서 1백90만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과 비교했을 때 3년여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치러진 한국전쟁이 다른 전쟁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얼마나 치열했었나를 입증하고 있다.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는 더욱 엄청나다. 남한의 경우 민간인 사망 24만4천여명,학살 12만8천여명등 37만2천여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고 부상 22만9천명,납치 8만4천명,행방불명 30만명등 모두 99만1천여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전재민 3백62만명과 미망인 50만명,불구자 33만명,결핵환자 1백만명,전쟁고아 10만명등 무려 5백55만여명이 전쟁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2천50만명 정도였던 남한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직접적인 전쟁피해를 입은 것이다. 특히 6·25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도 전쟁의 깊은 상처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있다. 서울의 경우 49년 6월 1백43만명이던 인구가 52년 3월 67만명으로 추계돼 전쟁으로 76만명이 피란살이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거나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남한의 총인구는 55년 1천8백92만여명으로 전쟁전보다 1백만명 이상 감소됐다. ○재산피해 40조원 6·25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0년도 불변가격으로 약 4천억원이었으며 이를 9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4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계산됐다. 당시 재산피해 내용을보면 민간가옥 61만호,각급학교 4천23개교 15만4천여동,경찰관서 1천9백여곳,행정관서 2천7백여곳,의료기관 1천5백여곳,금융기관 1천1백여곳,종교단체 8백여곳,생산업체 1만3천여곳이 파괴됐다. 또 기간시설을 보면 항만은 1백개소가 파괴됐고 철도 3백29㎞,교량 3백12㎞,전선 61㎞등이 끊겨 전국토의 도로망과 통신이 완전 초토화 되었다. 이같은 사회간접시설등의 파괴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발발 당시 56달러에서 전쟁이 끝난 53년에는 67달러로 겨우 11달러가 증가하는데 세계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통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쳐 예를들면 전쟁직전 5백30원하던 어떤 물건의 경우 51년 그 값이 2천1백28원으로 4배나 껑충 뛰어올랐고 52년에는 다시 2.5배 오른 5천2백43원으로,53년에는 7천6백18원으로 급상승했다. 전쟁전과 종전직후를 비교하면 물가는 3년만에 무려 14배가 오른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물가상승은 휴전협정이 체결된뒤에도 계속돼 54년에는 73%,55년에는 57%등의 놀랄만한 인플레율을 보인 바람에 민생고가극에 달했다. 당시 주요 공업생산규모를 보면 면직물은 50년 1백34만필생산에서 전쟁이 끝난 53년 생산량이 27만필로 4.9배가 줄었고 시멘트는 1만t에서 2천여t으로 4.3배,전깃줄은 1백78t에서 50t으로 3.6배나 줄어들었다. ○담배소비만 급증 그러나 담배만은 유일하게 생산량이 늘어 연간 4백11만개비보다 무려 1백76배 급증한 7억9백53만개비를 생산,생활고와 전화에 시달린 나머지 국민들이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만일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신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미루어 인명과 재산피해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대명제이다.
  • 조국 광복에 몸바친 삶 2제

    ◎“나운규기념회 운영 어려움… 지원 기대”/공적증명위해 노력… “훈장추서돼 기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인 고 나운규선생의 아들 봉한씨(60·영화감독·동작구 상도1동 388의2)는 12일 『영화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워온 선친의 뜻이 이제야 빛을 보게돼 자식된 도리를 조금이나마 한 것같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나씨는 그동안 정부문서보관소 및 국회도서관등을 오가며 관련자료를 찾던중 경찰청에서 보안법위반죄등의 죄명으로 된 형량자료를 찾아내 이를 근거로 지난 92년 3월에 서훈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나씨는 선친과 함께 활동했던 윤봉춘선생도 독립운동공로를 인정받게돼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나씨는 『선친의 뜻을 기리기 위해 4년전 발족된 「춘사 기념사업회」가 재원부족으로 매년말 실시하는 「춘사 예술상」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번 추서를 계기고 뜻있는 분들의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친의 대를 이어 대전 엑스포 정부관에서 상영하는 「전통의 뿌리에서 미래의 열매를」이라는 4분짜리 멀티비전 영상물과 독립기념관 원형극장에서 상영하는 「내사랑 금수강산」이라는 20분짜리 홍보영화도 만든 나씨는 오는 15일 선친의 훈장을 들고 망우리 묘역에 참배할 예정이다. ◎동래고 재학중 항일시위,8개월 옥고/“사회 그늘진곳서 봉사로 여생 보낼것” 『오로지 민족정기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젊은 한몸을 던졌을 뿐인데…』 광복 48주년을 맞아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훈장추서를 받게된 정두렬씨(71)는 뒤늦은 공적인정에 못내 쑥스러워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40년 11월 부산에서 학생시위를 벌이다 1년여의 옥고를 치른다. 부산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시절이었다.부산 대신동의 공설운동장에서 벌인 제2회「전력증강국방대회」에서 일본심판관의 편파성과 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벌인 가두시위에 참여한데 이어 일본인 심판장이었던 내대염치 일본육군대좌의 관사를 부순 혐의로 다음날 체포돼 1심 2심을 거쳐 8개월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정씨는『부산학생시위는 할말을 못하고 살던 암흑시대에 민족의 정기를 일깨우려는 몸부림이었다』고 50여년전 그날을 회상했다. 출감후 일제의 감시와 생활고에 못이겨 중국 심양으로 건너갔다 해방되던 해 7월 귀국한 정씨는 미군 군정청 비서실등에서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전쟁고아를 돌보는 사회사업을 10년 넘게 참여한 경험등을 토대로 그늘진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 「난민촌 사람들」/「독도 365」/정통 다큐멘터리 진수 선보인다

    ◎M­TV난민촌…/세계 분쟁지역 난민의 고단한 삶조명/K­1TV…365/제작진 1년간 머물며 독도의 사계 촬영 다큐멘터리 드라마와 심층보도 다큐멘터리등 각종 다큐멘터리 프로들의 홍수속에서 정통 다큐멘터리 2편이 방송을 앞두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충실한 사실기록을 중심으로 한 이들 정통 다큐멘터리는 바로 MBC-TV의 「‘93 르포­난민촌 사람들」과 KBS-1TV의 「독도 365일」. 오락및 선정성과는 거리가 먼 두 작품은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고 역사의식을 갖게하며 문화적 삶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한다」는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충실한데다가 최근 들어 보기 드물게 방송사들이 직접 제작한 것들이어서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다.더군다나 얼마전 방영됐던 다큐멘터리 「76인의 포로들」이 던져준 감동을 잊지 못하는 많은 시청자들에게는 또 한번의 신선한 충격을 기대하게 만든다 오는 29일부터 방송되는 MBC-TV 다큐멘터리 「‘93 르포­난민촌 사람들」은 내전을 겪고 있는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 피란민들의 고단한 삶과 전쟁의 상처를 조명한 4부작.지난 3월 한달에 걸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공화국,캄보디아,케냐등 4개국 현지 취재로 난민들의 비참한 삶을 담았다.특히 전쟁고아,부상당한 아이들,이들의 전쟁경험및 불안한 미래등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자신들과는 무관하게 발발한 어른들의 전쟁속에서 살아나가야하는 「전장속의 아이들」이 밀도있게 다뤄진다. 촬영지역으로는 인종과 종교의 차이로 보스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이계로 분열돼 내전의 화염속에 휩싸여있는 신유고연방의 난민들이 수용돼있는 헝가리의 나지아타드 난민촌과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아동병원,기아와 내전으로 아사직전에 놓여있는 소말리아 난민들이 임시로 모여사는 케냐의 카쿠마 난민촌,그리고 캄보디아의 난민 재정착촌등이 포함돼있다.취재진의 접근이 불가능해 쿠르드족 난민촌 모습은 제외됐다. 다큐멘터리 「난민촌 사람들」은 55분짜리 4부작으로 헝가리의 보스니아 난민과 크로아티아공화국 난민을 각각 다룬 제1부 「탱크와 장미」가 전·후편으로 나눠 29∼30일 하오7시5분부터 8시까지 방송된다. 다음주에 방송될 제2부「모래위에 그린 그림」에서는 굶주림과 지뢰밭을 넘어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 피란온 난민들이 생활하고 있는 케냐의 카쿠마 난민촌과 소말리아 난민들이 모여사는 만데라 수용소에서의 삶이 다뤄진다.마지막으로 제3부「슬픈 평화」에서는 오랜 내전 끝에 유엔의 중재로 연립정부가 들어선 캄보디아의 난민 임시수용소가 소개된다. 홍종선PD는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작은 전쟁과 분쟁들을 보면서 『원인 분석과 정의를 내리지 못하더라도 「그러지 말자」를 보여주고자 했다.전쟁도 가난,질병,실연처럼 인간이 겪는 「불행」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은 인간에 의해 극복돼야 하고 극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편 KBS-TV의 「독도 365일」은 제작진이 지난해 3월부터 꼬박 1년동안 독도에 머물면서 최초로 독도의 모든것을 카메라앵글에 담아 방송전부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화제작이다.8·15특집으로 방송되는 이 작품은 오는13일부터 15일까지 3부작으로 방송된다.「꿀벌의 세계」「휴전선 4계」「한국의 야생동물」「한국의 나비」등 이미 방송됐던 수준급의 자연 다큐멘터리의 맥을 이으면서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더없이 좋은 납량물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있다.
  • 6·25… 모두 잊고들 있는가(사설)

    국토의 허리가 잘려있는 그 상태대로 또 한번의 6·25를 맞는다.동서이념대결의 시대상황으로 해서 광복된 조국이 남북으로 갈려 동족끼리 3년 남짓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비극이 6·25였다.이제 그 싸움 있게한 냉전시대는 공산주의의 조락과 함께 스러졌건만 지구촌에 유일한 냉전시대 산물로서의 분단국인채로 그날의 아픔을 되새겨야하는 우리의 마음은 쓰리고 착잡해진다. ○「침략상기」와 「통일추구」 사이 6·25에대한 인식은 해가 갈수록 달라져간다.흔히 구세대는 「침략의 상기」로서,전후세대는 「통일의 추구」로서 인식한다고 표현되기도 한다.그만큼 「역사」는 흘렀다.발발한 그해가 43년전이고 보면 지금 50세초로가 국민학교 1∼2학년이었다는 얘기이다.그렇다할때 이 역사적인 민족의 비극을 피부로 지각할수 있었던 세대는 이제 20%안팎으로 좁아들었다고 할것이다.그 현실 속에서 「역사」로서만 객관화하려는 경향은 짙어간다.그탓에선지 일부 체험세대까지 잊어가고들 있고 또 그러한 사고의맥락에서 남북한문제에 접근하는 층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실은 포성만 멎었다뿐 그날의 연장선상에서 대치가 계속되고있는 상황이다.힘의 균형이 무너질때 언제 그날이 재현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휴전선이 그 대치의 경계가 아닌가.더구나 그날에 전단을 연 북의 무리들은 그날에 내건 「적화통일」의 기치를 이 엄청나게 변화한 지구촌의 시대상황 속에서도 결코 내리지않고 있다.붙들어야할 종주국을 잃은 마당에서 외로워진 생존을 위하여 더 배타적으로 냉혹해졌다고도 할 것이다.핵무기 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세계에 도전장을 낸사실이 그 일단을 말해준다. ○불변의 노선 「적화통일」 그들은 휴전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2백m에 이른다는 「전승」기념탑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인민들은 굶주리고 있는데도 6·25를 「이긴전쟁」으로 선전하고자하는 무리한 공사이다.그들은 그렇게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개방을 외면한채 체제유지를 위한 폐쇄사회의 틀을 더 굳혀나가고 있다.이와같은 그들의 기본자세를 외면한채 공개사회이기에 지닐수있는 가치관의 잣대로써저들을 재려하는데는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통일의 추구」도 「침략의 상기」를 바탕에 깔때 비로소 올바른 이정표를 세워나갈수 있다고 할것이다. 사실,민주사에 커다란 오점을 찍은 저들의 죄업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물질적 피해는 잠시 젖혀두더라도 국군·유엔군의 사망·실종·부상자 1백15만8천명,민간인 1백만명이라는 인명피해만으로도 참상을 알기엔 충분하다.거기에 전재민 4백만명,전쟁미망인 30만명,전쟁고아 6만명,수많은 실향민이 있다.이는 이쪽의 피해일뿐이니 피아를 합치면 얼마로 될것인지 모른다.그 상처를 쉬이 잊을수가 있겠는가.또 잊어서 되겠는가.국립묘지에 잠들어있는 영령은 말할것 없고 수많은 무명용사와 무고하게 죽어간 원혼이 잊지못한다.그뿐이 아니다.그날의 상이용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훈병원에 누워 그날을 신음한다.「침략의 상기」를 바탕에 깐 「통일의 추구」여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잊지 않는것이 재발 막는길 그날에 배후조종한 구소련과는 물론 그날에 우리와 직접 총칼을 맞댄중국과도 수교를 했다.그만큼 세상은 변전했다.그렇건만 유독 북녘의 내나라 내겨레와는 그날과 다름없이 갈라선 채로 오가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그럴수록 겨레의 통일에의 욕구는 용솟음친다.현실보다도 이상쪽에 치우치는 젊은 혈기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냉철할수 있어야한다.북한의 인민을 생각하면서도 그 인민과 그 위에 군림하는 집권층은 다르다는 사실에 상도해야한다.남한에 남아도는 쌀을 괭이낯짝같은 체면때문에 못받는것이 집권층이라면 이밥에 고기국물 배부르게 먹기 바라는 것이 인민들이다.감시원 있는데서는 『경애하는…』 운운하다가도 그가 잠시 눈돌리는사이 손을 꼭쥐며 눈물흘리는 고향방문단 누이동생의 마음과 집권층마음을 혼동하지 말자는 뜻이다.하건만 대화의 상대는 불행하게도 그 집권층이다.그점에서 민족을 앞세운 감상이나 여과되지못한 정열은 저들에게 자칫 오판만 심어줄 뿐 지향하는바 통일에의 길에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겠다. 국민들은 전쟁재발에 대한 우려도 적잖이하고있다(61.1%=91년조사).그러나 그날을 잊지않는 것이 재발을 막는 길임은 두말할것이 없다.잊진않되 민족의 양심으로 돌아올때 용서하고 그 바탕에서 순이에 따를때 통일은 이뤄진다고 할것이다.새문민정부 아래서 그를 위한 지혜와 힘을 모아 나가게 돼야겠다.
  • 김정일,「비밀친위대」운영/91년말「215부대」창설… 신경변호 전담

    ◎전쟁고아 등 2천여명 특수훈련 시켜 북한 김정일이 자신의 신변경호만을 전담하는 「비밀친위대」를 신설,비밀리에 운영해 오고 있음이 최근 드러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비밀친위대는 일면 「216부대」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 입수된 북한관계 자료에 의하면 비밀친위대는 구소련및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직후인 91년 말경 김정일의 비미리지시로 신설됐는데 요원은 약 2천명으로 이들 중 김정일에게 밀착하다시피하며 경호하는 인원은 약 2백명이다.이중 20명은 중국 소림사에서 중국고유 무술인 「쿵후」를 연마한 고단자이며,1백80명은 이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정일은 당시 루마니아의 챠우세스쿠가 고아들을 양성하여 친위대를 조직,자신의 신변을 보호토록한데 착안하여 이 「비밀친위대(216부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김정일의 비밀친위대는 그 출신성분이 6·25전쟁 고아와 혁명유가족 자녀 중 만경대혁명학원및 강반석혁명학원(구남포혁명학원)출신자들로 대부분 구성돼 있다.출신성분이 말해주듯 이들은 6·25전쟁중 직계가족을 잃은 자들로서 대남적개심과 미국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으며,김정일은 이들을 가리켜 『공산주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닌 당의 아들』이라며 절대적인 신임을 주고 있다. 김정일이 자신의 신변경호를 위해 이같은 비밀친위대를 별도로 조직,운영하게 된것은 북한의 선전과는 달리 당과 군부내에서 김정일에 대한 불평불만이 점증하고 있는데다,경제난으로 일부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식량폭동이 발생,그 어느때 보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기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 수잔의 외침/차정미 시인·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굄돌)

    인기있는 앵커우먼 백지연씨의 모습을 MBC 뉴스데스크 화면에서 볼 수 없게 된지도 한달여가 되고 있다.MBC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시청자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고 있을테니 이 지면에서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한 언급은 피하려고 한다. 다만 그 덕(?)에 지난 3일 토요일 소위 황금시간대인 저녁 7시에 MBC화면을 통해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란 영화 한편을 보게 되었으며 그 영화를 보면서 공정방송과 방송성장화를 바라는 시청자의 한사람으로써 갖는 안타까움을 스스로 달래게 되었다. 평소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교양 기획물들을 종종 11시 이후인 심야에 보아왔던 기억을 되살리면서,단지 시청률만 내세워 좋은 프로그램을 방송사가 스스로 홀대하는 풍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영화를 보면서 갖게 되었던 느낌이다. 이 영화는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해외입양아인 수잔 브링크(한국이름·신유숙)의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성장과정속의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50년대 전쟁고아를 입양보내면서 시작되었던 해외입양아의 숫자가 전쟁도 없었던 70∼80년대에 더욱 늘어나 그 문제의 심각성이 여론화된 바도 있지만 이제 해외 입양아의 문제는 곧 우리 자녀들의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는 때라고 본다. 해외입양아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프게 여겨지는 것은 어릴적 바구니에 담겨져,혹은 이름표만 단 채 떠난 아이들이 머리와 가슴이 커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자기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그로 인한 고통,갈등이 일지 않을까? 수잔은 다행히 전파를 타게 돼 생모도 찾게 되었고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품에도 안기게 되었지만,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해외 입양아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채 외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지 않는 해외입양은 절대로 보내져선 안된다』라고,영화 끝장면에서의 수잔의 외침이 뭉클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깊어가는 가을 날씨 탓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세르비아 난민 대학살/“이민족 말살”… 유고판 킬링필드

    ◎회교도등 12만명 강제수용소 억류/4개월새 5만명 집단 피살 주장도 유고판 「킬링필드」가 내전중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재연되고 있어 전세계인을 전율에 떨게 하고 있다. 지난 4월 유럽공동체(EC)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한 이래 불붙기 시작한 보스니아내의 민족분규는 최근 세르비아가 곳곳에 이민족 말살을 위한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고문과 무차별 학살극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해결을 더욱 어둡게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이같은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유엔안보리가 4일 유고의 내전당사자들이 유엔의 검색을 위해 모든 수용소를 개방할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한데 이어 미국은 5일 「인도적 차원」에서의 무력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제네바의 유엔인권위원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다.또 EC측은 이날부터 모든 집단수용소의 공개를 요구했으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러시아도 이에 동참하는등 국제적 압력이 더한층 강화되고 있다. 보스니아측에 따르면 현재 세르비아 세력들은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에 모두 1백5개의 집단수용소를 설치해놓고 적어도 12만명이상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회교도를 억류하고 있으며 보스니아내에만 45개 시설에 7만명이상이 수용돼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세르비아측은 이같은 집단수용소의 존재자체를 부인했으며 오히려 4만여명의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와 회교도들의 수용소에 억류돼 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유고주둔 유엔평화유지군 부사령관을 역임했던 캐나다의 루이스 매킨지장군은 한 기자회견에서 『세르비아인들의 만행에 대한 호소가 약2개월전 세르비아인들이 이른바 「인종청소」캠페인을 강화시키면서 부쩍 증가했다』고 세르비아측을 비난하며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을 사라예보동물원에 사자밥으로 주고 있다는 믿지못할 소문까지도 나돌고 있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보스니아측이 지난달 29일 유엔안보리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사라예보 근처의 10개 수용소에서만 1만7천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가운데는 군기지내에 있는 만야카수용소에서만 8천명,브로츠코수용소에서 3천명등이 집단처형당한 것으로 나타나있다.하리스 시라즈드지치 보스니아 외무장관은 지난 4개월동안 회교도 5만여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또 지금까지 4백30만 인구중 1백30만명이 피난길에 올라 보스니아 전역이 폐허화 돼있다. 세르비아인들의 만행은 지난2일 사라예보의 전쟁고아 40명을 독일로 보내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어린이들이 탄 버스를 저격병들이 공격,2명을 죽게했으며 그들의 장례식장에까지 포탄을 떨어뜨려 다른 어린이들이 부상을 입게 했다. 유고연방 붕괴 이후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간의 민족감정에 의한 치열한 전쟁이 있었고,그에 이은 보스니아 내전중의 대학살극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회교도간의 뿌리깊은 반목과 불신이 가셔지지 않는한 쉽게 중단되기는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 수단내전 10년… 전쟁고아 10만 육박

    ◎정부군의 「반군사냥」에 부모 희생/밀림서 헤매다 맹수밥되기 일쑤/국제 원조도 정부서 도중차단… 아사자 급증 「이동중 강물에 휩쓸려 희생되기도 하고,맹수의 사냥감이 되기도 하며,매일같이 먹이를 찾아 숲과 들판을 누비는 일단의 무리」 이것은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슴이나 얼룩말 이야기가 아니다.바로 지금 이순간 동부아프리카 수단의 전쟁고아들이 전쟁과 가뭄,국제사회의 외면속에서 연명을 위해 하루하루 겪고 있는 실제 생활상이다. 집권 회교도아랍인들과 기독교도 흑인들사이의 10년가까운 내전으로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수단은 현재 곳곳이 전쟁고아들로 들끓고 있다. 어림잡아 1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거의 전부가 5살에서 15살 사이의 흑인남자어린이들.어른들의 전쟁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한 또다른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이들의 참혹상은 가히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전쟁터로 내몰렸던 13세기 소년십자군단을 능가한다. 83년 내전발발이후 수단정부군과 회교민병대는 반군토벌을 앞세워 남부 흑인마을들에 대한 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이때 학살표적인 어른들과 도망엄두를 못내는 여자아이들은 거의 살해되거나 납치되지만 사내아이들은 뿔뿔이 인근숲속으로 도망친다.이곳에서 하나둘 모여 무리를 지은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같은 운명의 다른 마을 또래들과 합류,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천명까지 유랑군단을 형성한다. 이들의 목적지는 「절망의 소년공화국」「저주받은 유치원」등으로 불리는 전쟁고아 집단수용소.그곳에는 먹을 것과 의약품,학교와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철부지들의 고난의 장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중 상당수는 수용소를 구경도 하기전에 목숨을 잃는다.독초를 잘못 먹거나 강물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려 희생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며 곳곳에서 사자,하이에나,악어에게 생명을 빼앗긴다.이곳에 흔한 익지않은 망고열매를 따먹고 장을 손상당한 많은 아이들은 사소한 질병이나 상처에도 쉽게 목숨을 잃고 있다.그뿐아니라 더러는 숲속에서 반군이나 회교민병대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한다.그러나 이처럼 죽을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수용소에 도착해봐야 맹수의 습격만 없을뿐 먹을 것과 쉴곳이 없기는 마찬가지.목격되는 것이라고는 같은 처지의 경쟁자들과 이곳에서 사망한 어린이들의 무덤뿐이다.그나마 전선의 확대로 수용소가 폐쇄되면 또다시 들판과 숲으로 나가 유랑을 계속해야만 한다. 현재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남부지역일대에 임시가설한 수용소에 수용돼있는 고아들의 수는 약5만명.이보다 많은 고아들은 지금도 주린 배를 채우기위해 들녘을 헤매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을 도와줄 손길은 어디에도 없다.수도 카르툼의 정부와 회교민병대는 이들을 잠재적 반군으로 인식,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물론 호시탐탐 제거를 노리고 있다.같은 집단인 반군측도 당장 눈앞의 전투에 급급,전투력이 없는 이들을 성가시기만 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한때 구호품을 보내주고 관심을 보였던 국제구호단체나 서방국들마저 걸프사태당시 수단정부의 이라크지지를 기점으로 등을 돌려버렸다.설사 구호품을 보내주어도 이제는 정부군이 반군수중에 들어간다며 압수하고 있다. 이같이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도처에서 목숨을 앗아가는 최악의 생존조건속에서 이들은 삶을 방어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즉 자신들의 협력에 의지해 이 형벌의 시대를 나고 있다.그러나 수단의 내전이 끝날 조짐은 아직껏 보이지 않고 있다. 수용소근처에 살고있는 한 가톨릭성직자는 『수천명의 어린이들이 허기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것은 없다』는 말로 이들의 비참한 운명과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몰인정의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 국가유공자에 존경을/김원홍 사회2부 차장(오늘의 눈)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유공자들은 국민적인 존경을 받으며 명예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나라일수록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도 높다. 영국 사람들은 현충일에 전국민이 빨간 양귀비꽃을 달고 런던 수상관저앞에서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장중한 추념식을 갖는다.프랑스에서도 현충일엔 파리 개선문앞 무명용사비에 하루종일 헌화가 계속되며 샹젤리제거리에는 낡은 훈장을 단 참전용사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국가유공자들은 광복이전 독립운동가와 6·25전쟁 수훈자등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해방전에 독립운동을 하기란 그야말로 태풍속에서 촛불을 켜는것 만큼이나 어려워 수십만이 희생됐으며 광복이후 6·25전쟁 때에는 수백만명의 동족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수많은 미망인과 전쟁고아,상이용사들이 전쟁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연금을 받고 있는 상이군경은 4만7천64명,유족은 7만3천9백29명,독립유공자및 후손은 6만3천7백66명 등 17만5천3백35명으로 가족까지포함하면 보훈인구가 1백만명 가까이 된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연금은 월 27만4천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유공자들에게 사업자금 학자금 영농자금 주택자금 자립자금 등을 지원하고 그외 취업알선,의료지원 등을 하고 있으나 유공자 대부분은 노령과 불편한 몸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6·25전상자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65세가 넘은 고령이어서 상처부위의 재발로 고통스러운 특별생활을 하고 있다. 보훈의 달인 이달들어 국가유공자들이 입원중인 병원과 상이용사촌엔 각계각층의 위문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위문이 일년에 한번씩하는 의례적인 행사같이 느껴져 안쓰럽다. 평소 유공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는 것은 물론 그들이 긍지와 명예를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보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 평생모은 1백50억“사회환원”/박로사할머니 쾌척… 작고(일요화제)

    ◎유언따라 복지재단 설립 “이웃돕기”/6·25때 월남… 조산원하며 사랑 실천 80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간 할머니가 평생 모은 1백50억여원의 재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사회복지기금으로 쾌척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난해 10월27일 부산시 남구 망미동 천주교회에서 생활하다 부산대학병원에서 78세를 일기로 숨진 박로사씨(속명 범숙·사진)는 임종직전 천주교 마산교구청(주교 박정일신부)앞으로 평생동안 모은 현금 41억원이 예금된 통장과 토지·임야등 1백10억원상당의 부동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넘겨주었다. 박씨의 재산을 기탁받은 천주교 마산교구청은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그해 11월 「범숙복지재단」을 설립했으며 이를 주축으로 노인복지회관,청소년수련의집 건립을 추진하는등 각종장학사업및 복지사업을 펴고있다. 지난 1914년 평남 평원군 순안면 남산리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난 박씨는 6·25전쟁이 터지자 단신 월남,경성제대 의학부 부설간호학과를 수료한뒤 이화여대 의예과에 입학,2년간 다니다 수녀가 되기위해 명동성당 수녀원에 입회했으나 건강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주위의 주선으로 미인디애나주 노르메딩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씨는 조산원자격증을 얻어 부산에서 개업하면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폈다. 그녀는 또 1·4후퇴이후 부산 서구 서대신동 시장통에 텐트를 치고 전쟁고아 20여명을 수용,「고아들의 대모」로서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실천해 나갔다. 박씨는 이때부터 지난 40여년 동안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저축을 하면서 목돈이 생기면 땅과 임야를 사들여 부산 남구 망미동 천주교회 뒷산 1만여평과 김해군 생림면일대 3만여평의 논,창녕군 성산면등지의 임야 수십만평을 마련했었다.
  • 고아들의 아버지/슈왈츠신부 선종

    지난 35년동안 한국에서 고아들을 보살펴온 미국인 알로이시오 슈왈츠신부(한국명 소재건)가 1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62세로 선종했다. 슈왈츠신부는 미워싱턴시 출신으로 일리노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57년 한국에 와 부산교구에서 6·25 전쟁뒤 가난과 질병에 찌든 전쟁고아들의 재활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64년 마리아수녀회를 설립,이곳 수녀들과 함께 고아 1백20명을 돌보았고 70년 부산에,그리고 75년에는 서울에 「소년의 집」을 개원,본격적인 고아교육을 벌였다.
  • “부끄러운 수출” 한해 3,500명/장수근 국제부차장(오늘의 눈)

    미 이민국은 얼마전 89년 한햇동안 미국가정에 입양된 한국고아의 수가 3천5백52명이라는 통계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숫자는 부끄럽게도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인도 6백77,필리핀 4백81,베트남·중국 1백명에 비해 턱없이 많은 것이었다. 오비이락 격이긴 하지만 우리 정부는 미 이민국의 이같은 집계결과가 공개된지 나흘뒤인 28일 국회에 제출한 외무부 국감자료를 통해 오는 96년부터 고아의 해외입양을 전면 중단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무부에 따르면 매년 4천여명에 이르고 있는 해외입양아수를 오는 95년까지 해마다 10∼20%씩 감축시킨 뒤 96년 이후에는 한명의 고아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고아해외입양은 6·25동란으로 졸지에 부모를 잃어버린 이른바 「전쟁고아」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의 전쟁고아 해외입양은 상당히 긍정적인 문제해결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여 졌었다. 수용시설이 태부족한 터에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고아들은 정부나 유관기관이 다 구휼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해외입양은 그나마 최선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GNP)이 5천여달러에 이르고 올림픽까지 치른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수천·수억대를 호가하는 외제 자동차와 가구등속이 불티나게 팔리고 국민학교 학생들이 장난감을 사며 10만원짜리 수표를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세태의 한 모퉁이에서 우리의 고아들이 여전히 외국으로 입양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수치요,어찌보면 정부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경제가 선진국 수준에 올랐다고 으시대지만 아직도 그늘진 곳이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바로 고아들의 해외입양도 그런 그늘의 한 부분이다. 모름지기 「부」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뉘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어느 나라들에도 부의 편중현상은 있다. 사회학자들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리나라는 편중의 정도가 큰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혈연의식이 지나쳐 남의 피는 외면하는 현상도 세계 최대의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을얻는데 일조하고 있다. 세모가 가까워 진 탓인지 고아수출기사가 한결 싸늘해 보인다.
  • 다시는 전쟁을 말하지 말자/6ㆍ25 40주년에(사설)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로운 국제기류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6ㆍ25동족전쟁 발발 40주년을 맞는다. 40년전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40년후 오늘은 월요일이다. 같은 민족끼리 벌였던 열전의 포성은 멎어있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40년전 그들은 남쪽에 대고 포탄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의 대남스피커는 평화와 민족과 해방만을 선전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동서 양대진영간의 해빙과 군축추세에도 불구하고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북한간의 불신과 긴장은 이렇듯 끝없이 지속되고 있다. ○왜 전쟁은 일어났는가 진실은 하나다. 결코 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사 최대의 비극인 6ㆍ25를 놓고 전통적인 남침설에 대항하는 북침설에 남침유도설까지 나돌면서 진실이 가려지려할 때가 있었다. 따라서 6ㆍ25동족전쟁에 관한 한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가,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는가,우리는 그것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역사는 바로 봐야 한다. 6ㆍ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문제는 이제 논쟁거리조차 될 수 없는 역사의 사실로 확정되었다. 6ㆍ25남침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그 남침을 부추겼고 무력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소련 내부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 북한에서는 「6ㆍ25」를 전후하여 갖가지 조직적 사업을 통해 주민들에 대한 대한ㆍ대미 선전선동과 적개심 고취가 한창이라고 들린다. 북한 당국자들에게 있어 6ㆍ25는 지금껏 북침 전쟁이다. 그 한국이 지금 자기들의 가장 큰 지원자였던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고 정식 수교마저 눈앞에 두고 있다. 소련으로부터는 남침 전쟁도발이래 유일독재체제를 유지해온 김일성의 정체가 폭로되고 있고 남침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전쟁을 통해 확보하고 유지했던 유일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아마 김일성은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6ㆍ25전쟁의 비극이 누구에 의해서 비롯됐는가는 전세계가 다 알고 있다. 그 원흉은 김일성이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그 공범자들이다. 부질없는 논쟁은 그만두고 동족전쟁의 책임자는 이제 역사와 민족앞에 사죄해야 한다. ○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생각하면 부모형제가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40년전 6ㆍ25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3년1개월동안 치러진 그 전쟁은 이 민족 모두를 희생자로 만들었다. 전쟁이래 40여년간 지속돼온 동족간의 첨예한 군사적 대결은 서로의 장벽을 보다 높이 쌓아올렸고 의식의 골마저 깊게 패어져 역사상 경험한 바 없던 동족간의 심각한 이질화 현상마저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은 참혹했다. 조상이 물려준 한 땅덩어리에서 사생결단으로 총부리를 겨눈끝에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손실만 사망ㆍ실종ㆍ부상 등을 합쳐 1백15만에 달했다. 민간인 피해는 1백만명,전재민 4백만명,전쟁미망인 30만명,전쟁고아 6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겼다. 재산피해는 또 어떠했는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전쟁의 실체들은 전체국민의 30%남짓한 전쟁체험세대들에겐 아직도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다. 휴전선과 판문점,국립묘지의 묘비들이 그것이고 40년만에 이 땅을 다시 찾아 전쟁의참혹성을 증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전쟁의 실체인 것이다. 직접적인 전쟁의 상흔이나 실체 이외에 6ㆍ25가 우리에게 남긴 더 큰 상처는 분단의 굴레를 우리민족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시켰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하여 전쟁에 대한 위기적 인식을 생활화시켰다는 점이다. 국민의 76%가 북한의 재침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6ㆍ25에 대한 인식도와 관련하여 국민의 45%가 또다른 6ㆍ25의 재발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굴레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6ㆍ25전쟁 40년이 지난 뒤에도 그 전쟁의 도발자는 살아있다. 그러나 그 북한의 김일성은 아직껏 단 한번도 전쟁도발의 과오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족전쟁 그 자체가 그의 한반도 무력적화통일 전략에서 비롯된 민족자해행위였음이 명백한데도 그는 아직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남한은 아직 해방되지 않은 남반부이며 분단상태의 해결수단은 무력이외에 다른것이 아닌 것이다. 즉 정확히 말해 김일성은 아직도 전쟁적 방법으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세계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의 자유개방물결은 기존의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미소의 화해는 동서양진영의 긴장과 군사적 대립의 상징이었던 나토및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근본적인 변질을 가져왔다. 강대국의 팽창주의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40년전 6ㆍ25 그날에 그들은 조국의 통일,민족의 해방을 외치면서 소련제 탱크,전투기와 막강한 기계화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돌파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들은 엄청난 병력과 화력의 70%이상을 휴전선 일대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그들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쏠려있는 오늘 북한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는 평화를,그리고 통일을 얘기해야 한다. 40년전 전쟁의 아픔을 잊는 길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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