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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 60주년’ 참전국 대표단 유엔공원 참배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12개 참전국 대표단과 참전 용사 등 500여명이 28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이날 행사는 국가보훈처가 주관했으며 존 키 뉴질랜드 총리와 줄리아노 판티노 캐나다 보훈부 장관을 비롯해 9개국의 장관급 인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허남식 부산시장, 참전 용사 58명 등이 참석해 헌화하고 묵념했다. 합동 참배 행사 후에는 국가별 참배 행사가 이어졌고, 참전 용사들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간 전우들의 묘비를 쓰다듬으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미국의 6·25 참전 기념비 헌정식도 엄숙하게 거행됐다. 미국전쟁기념비위원회(ABMC)가 제작한 이 기념비는 미국이 1, 2차 세계대전 이외의 전쟁과 관련해 처음으로 해외에 건립한 참전 기념비다. 가로 1.2m, 세로 2.4m가량인 이 기념비는 미국 버몬트주에서 채석한 진회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전쟁의 영예를 상징하는 별 모양 3개와 ‘영예, 자유, 평화’라는 세 단어가 새겨졌다. 바버라 리 디에몬슈타인슈피보겔 ABMC 위원장은 “이 기념비는 60년간 이어 온 한·미 양국의 군사 동맹은 물론 경제, 사회,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시진핑 8개월 인사대장정 완료

    [김규환 선임기자의 차이나 로드] 시진핑 8개월 인사대장정 완료

    중국이 8개월간에 걸친 ‘인사(人事) 대장정’을 끝냈다. 지난해 11월 제18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대) 개최를 전후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달 초 군 핵심 수뇌부인 인민해방군 7대군구 사령관의 세대교체를 이뤘다. 이어 지난 24일 딩쉐샹(丁薛祥·51) 당중앙 판공청 부주임이 공석 중이던 당총서기판공실 주임을 겸임하도록 해 비서진에 대한 보직 인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중국 권력 핵심의 진용을 완비한 것이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낙하산 인사의 천국’이다. 18차 전대 이후 선임된 22개 성장(도지사)급 인사의 절반이 낙하산으로 채워지는 등 800여명의 중앙 관리가 지방 요직을 차지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다. 이 같은 현상은 5년 전인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때 성장급 낙하산 인사가 두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중앙의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SCMP는 지적했다. 중국 낙하산 인사의 목적은 여러 가지다. 자파 세력 심기라는 일반적인 목적 외에도 능력 있는 지방 인재를 발탁하고, 차세대 지도자로 육성하기 위해 중앙 인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경험을 쌓도록 하는 까닭이다. 자파 세력 심기의 대표적 사례는 시 주석의 ‘심복’인 천시(陳希·60) 과학기술협회 상무부주석을 ‘인사총관’(人事總管) 당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1975년 칭화대(淸華大) 화학공정과에 시 주석과 같이 입학해 사이가 각별하다. 1970년 푸젠(福建)성 기계공장에 하방된 천 부부장은 칭화대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학교에 남아 당 관련 업무를 맡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방문 학자로 다녀온 뒤 칭화대 당서기 등을 지냈다. 시 주석이 차기 최고 지도자로 예약된 뒤인 2008년 교육부 부부장(차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랴오닝(遼寧)성 부서기를 거쳐 2011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딸 덩난(鄧楠)의 후임으로 과학기술협회 상무부주석에 선임돼 중국 정계의 혜성으로 떠올랐다. 시 주석의 ‘왕비서’로 불리는 중사오쥔(鐘紹軍·52) 당중앙 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과 ‘오른팔’ 딩쉐샹 부주임도 빼놓을 수 없다. 시 주석의 저장(浙江)성 수장 시절 그의 비서로 입문한 중 주임은 시 주석이 상하이시 당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근 거리에서 수행하고 있다. 중 주임은 지난달 20일 군 감독 업무를 수행하면서 시 주석의 군 장악을 막후 지원하는 당중앙 군사위의 중임을 맡고 있는 사실이 공개됐다. 관료 경력의 대부분을 상하이(上海)에서 보낸 딩 부주임은 부패 혐의로 실각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서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시 주석이 상하이시 당서기로 내려온 2007년 상하이시 판공청 주임을 맡아 측근에서 보좌하며 가까워져 ‘오른팔’이 됐다. ‘류링허우’(60後·1960년 이후 출생)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천민얼(陳敏爾·53) 구이저우(貴州)성장과 양전우(楊振武·58) 인민일보 총편집(사장급)도 눈여겨볼 만하다. 천 성장은 시 주석의 저장성 지도자 시절 선전부장을 맡아 그를 보좌하면서 신임을 얻은 ‘심복’이다. ‘시진핑의 입’으로 통하는 양 총편집은 2005년 인민일보 부총편집으로 일하다 2009년 상하이시 선전부장으로 전직했다. 시 주석이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에서 당서기로 일할 때 인연을 맺어 줄곧 친밀하게 지냈다. 저우샤오촨(周小川·65) 인민은행장은 2002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 인민은행장 최장수 기록을 세우게 됐다. 기계공업부장을 지낸 저우젠난(周建南)의 아들로 태자당 출신인 그는 시 주석이 2002년 칭화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초빙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 인재를 발탁한 사례는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파 중심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대부분이다. 리잔수(栗戰書·63) 당중앙판공청 주임이 우선 눈에 띈다. 허베이성 공청단 서기를 지낸 공청단파로 분류되지만 시 주석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1983년 허베이성 우지(無極)현 당서기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 시 주석은 인근 정딩현 당서기여서 친밀하게 지냈다. 1998년 시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의 혁명 무대인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당서기를 맡아 친분이 깊어졌다. 저우창(周强·53) 최고인민법원장과 류치바오(劉奇?·60) 당중앙선전부장, 궈성쿤(郭聲琨·59) 공안부장, 장다밍(姜大明·60) 국토자원부장, 장제민(蔣潔民·60)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국자위) 주임, 장이(張毅) 국자위 부주임, 궁푸광(宮蒲光·56) 민정부 부부장, 친이즈(秦宜智)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등이 중앙정부에 스카우트된 지방 인재들이다. 지방행정 경험을 쌓도록 내려보낸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인사들도 많다. 루하오(陸昊·46) 헤이룽장성장과 궈수칭(郭樹淸·57) 산둥성장이 전형적인 사례다. 루 성장은 28세이던 1995년 적자에 허덕이던 베이징의 직물공장 공장장으로 임명돼 3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32세 때는 베이징 중관춘(中關村) 과학기술단지관리위원회 주임을 맡아 중관춘을 중국 정보기술(IT) 산업의 핵심기지로 만들었다. 2003년 35세에 베이징시 부시장, 2008년 41세에 공청단 제1서기, 46세에 헤이룽장성장이 됐다. 줄줄이 최연소 기록이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사단’의 궈 성장은 차세대 지도자급 재정·금융 전문가로 주목받고 있다. 최고 지도부가 그를 산둥성으로 내려보냈다는 게 베이징 정가의 분석이다. 최고 지도부 인사급인 정치국위원(서열 25위 이내)이 되기 위해서는 지방 경험이 필수요건이다. 법학박사로 인민은행 부행장, 국가외환관리국장 등을 지낸 그는 2011년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을 맡아 증권시장 개혁 조치를 내놓아 최고 지도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베이징 정가의 소식통은 “궈 성장의 발탁은 그를 부총리급 재정·금융 전문가로 키운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차기 인민은행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내다봤다. 공안부 정치부 주임을 지낸 리춘성(李春生·52) 광둥성 부성장, 상무부 부장조리를 지낸 리룽찬(李榮燦) 간쑤(甘肅)성 부성장, 당중앙조직부 간부2국장을 거친 마쉐쥔(馬學軍·51)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조직부장, 국자위 영도인원 관리2국장을 지낸 장즈강(姜志剛·53) 베이징시 선전부장,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 부국장을 지낸 리웨이(李偉·55) 베이징시 선전부장 등의 인사이동도 같은 범주에 든다. khkim@seoul.co.kr
  • 정전 60년… 구로의 두 영웅 다시 살다

    정전 60년… 구로의 두 영웅 다시 살다

    스물한 살에 자원 입대한 지 불과 일주일.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 화기소대 소속으로 낙동강 전선, 그것도 영천전투에 투입됐다. 전황은 암담했다. 경북 일부와 경남 지역을 제외하곤 모두 북한군 손에 떨어졌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한 달 넘게 밀고 밀리는 공방이 펼쳐지고 있었다. 1950년 9월 4일 이른 저녁 영천 냇가 동남쪽 언덕 참호에 몸을 담았다. 북한군은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를 건너 언덕을 기어오르며 총을 쐈다. 우리도 총을 쏘았다. 조준할 새도 없었다. 총알이 어디쯤 날아가 박히는지 보지도 못했다. 두려움이 컸다. 총탄이 떨어지자 육박전이 시작됐다. 함성과 착검 소리가 난무했다. 대검을 소총에 꽂고 참호에서 튀어 나갔다. 장작 패는 도끼처럼 소총을 휘두르고 찌르고 막기를 거듭했다. 발로 차고 차였다. 난리통에 참호로 굴러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군가 8중대를 찾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몸 위로 무너져 내린 병사들을 헤치며 기어 나왔다. 여기저기서 위생병을 찾았다. 전장은 어느새 울음소리, 사람 찾는 소리로 뒤섞였다. 그렇게 동이 트고 있었다. 삶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던 박주성(85)씨의 이야기다. 영천전투를 기점으로 전세가 뒤집히며 박씨는 북진의 선봉에 섰다. 파죽지세로 평양에 입성했다. 하지만 압록강을 앞두고 중공군과 마주쳤다. 격전을 벌이며 묘향산 인근 용문산 고지에 태극기를 꽂기도 했다. 기쁨도 잠시. 중공군에 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우 12명과 함께 지옥 같았던 하풍광산 포로수용소에서 탈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정전 60주년, 전쟁 영웅의 생활은 녹록지 않다. 서울 구로구의 한 아파트에서 얼마 되지 않는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원망은 없다. 남은 생에 소원이 있다면 중부전선 어딘가 누워 있을 동생의 유해를 찾는 것이다. 한 달 먼저 입대했던 네 살 터울 동생은, 박씨가 훈장을 받던 그해, 1952년 열아홉 나이로 전사했다. 박씨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구술 자서전(왼쪽)이 최근 출간됐다. 생생한 참전 경험과 회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전쟁 이후 삶까지 담았다. 포항·영덕 전투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명수(87)씨의 자서전(오른쪽)도 함께 나왔다. 이씨는 북한군 전차 3대를 파괴하고 포로로 잡힌 전우를 구출하는 특공 임무를 이끌어 대한민국 사상 병사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영웅이다. 그는 현재 구로구 소재 한 요양원에서 부인의 간호를 받으며 병마와 싸우고 있다. 자서전은 이성 구로구청장의 아이디어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지역 현장을 돌다가 이들의 삶을 접하고는 기록으로 남겨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 구청장은 “그 큰 공훈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만 함께 전장에 섰던 다른 많은 이들의 공덕까지 기록한 것으로 받아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전우 찾아 60년 만에 방북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조종사 출신 88세 미국인이 동료 유해를 찾아 6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눈길을 끈다. 19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20일 미국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는 주인공은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전투에서 해군 조종사로 콜세어 항공기를 몰며 항공화력지원 작전을 수행했던 토머스 허드너 중위. 그는 당시 동료이자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인 제시 브라운 소위가 몰던 콜세어가 중공군에 피격돼 추락했음을 알고 그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콜세어를 근처 눈밭에 동체 착륙시키고 브라운 소위를 구하려 했지만 영하의 추위 속에서 브라운 소위의 다리가 부서진 기체에 끼여 결국 구조에 실패했다. 비록 구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구조 노력이 알려져 1951년 4월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허드너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허드너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뒤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러던 중 허드너의 전기 집필을 문의해온 작가 애덤 마코스로부터 방북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들은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설립자이자 북한 군부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재미교포 김지연씨를 찾았고, 김씨는 허드너와 마코스,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리처드 보넬리 등과 함께 유해 발굴단을 꾸렸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베트남까지 가서 싸웠는데… 국가에 배신감 느껴

    베트남까지 가서 싸웠는데… 국가에 배신감 느껴

    “참담한 심정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했는데 배신감도 느낍니다.” 김성욱 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12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국가를 위해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다가 후유증을 입었는데 인정을 안 해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67년 12월 베트남 호이안 지역에 파견돼 작전을 펼치다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엽제의 위험성에 대한 주의사항 등 사전통보가 전혀 없었다. 동료들은 모기를 없애 준다며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고엽제를 일부러 맞기도 했다. 전쟁 기간 중 정글 제거와 시야 확보 등을 위해 사용된 고엽제에는 각종 암, 신경계 손상 등 질병을 유발하는 독극물인 다이옥신이 포함돼 있어 각종 후유증을 야기했다. 김 사무총장 역시 한국에 귀국한 뒤 20여년이 지난 1989년부터 몸에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며 마비가 오기도 했다. 당시 양곡 부대를 생산해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했던 그는 외국 바이어와 상담을 하던 도중 쓰러지기도 했다. 결국 직원이 250여명에 달했던 무역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생계는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그는 “여자의 몸으로 공사장에서 일도 하고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라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픔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는 “당뇨, 심근경색 등의 질병 때문에 매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다”면서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만 해도 3~4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김 사무총장과 같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는 4만 1940명(후유의증 4만 7807명)이고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 군인 2세들도 65명에 달한다. 그는 “14년 동안 끌어 왔던 소송이 이렇게 되다니 안타깝다”면서 “오는 16일 전국 고엽제전우회 지부장들이 모여 회의를 한 후 향후 대책을 논의하겠다”며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고엽제訴 사실상 패소… 피해자 39명만 인정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에 노출돼 후유증을 겪었다며 미국의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14년 만에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참전 군인들이 겪은 후유증 중 당뇨병, 폐암, 비호지킨임파선암, 말초신경병, 버거병 등 질병에 대해 고엽제 노출을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염소성여드름은 고엽제 노출이 원인이 됐다며 제조사 책임을 세계 처음으로 인정했다.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12일 참전 군인 김모(70)씨 등 1만 6579명이 고엽제 제조사인 미국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당뇨병, 폐암 등 질병은 유전·체질 등의 선천적 요인과 음주·흡연 등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질환”이라면서 “이 질병들이 베트남전에서 살포된 고엽제가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고엽제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만으로 판결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에서 일부 승소한 5227명 중 시효가 소멸되지 않은 염소성여드름 피해자 39명에 대해서는 “1인당 600만∼1400만원씩 모두 4억 6600만원을 지급하라”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 다우케미컬 측은 이날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법원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참전 군인들은 “유해물질인 다이옥신이 포함된 제초제 때문에 피해를 겪었다”며 1999년 9월 5조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김성욱 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선고 직후 “대법원이 우리 주권을 포기했다는 기분까지 든다”며 “판결문을 받아본 뒤 변호사와 상의해서 향후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사설] 고엽제 피해 보상 미국정부가 적극 나서야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피해자 1만 6579명이 미국 제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베트남전이 막을 내린 것이 1973년이니 피해자들은 최소한 40년 이상의 세월을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고엽제 제조회사인 미국의 다우케미컬과 몬산토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 1999년이라 판결을 기다린 세월만 14년이다. 더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은 2006년 제조사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2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당시의 희망이 오히려 피해자들에게는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만 재판부가 피해자의 일부지만 고엽제 노출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은 의미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마저도 대상은 39명에 불과해 실망감을 털어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미국, 베트남의 고엽제 피해자들은 그동안 고엽제 제조회사와 미국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받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미국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대부분 법리에 가로막혀 기각되거나 패소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가 1994년 제기한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외국인은 전쟁 중 발생한 어떤 피해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자국 법률을 근거로 패소 판결했다. 베트남고엽제피해자협회가 2004년 미국 뉴욕주 연방법원에 낸 소송에서도 기각 논리는 “고엽제가 베트남에서 사용될 당시에는 국제법상 독극물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미국 법에 따라 패소하고, 우리 법원에서도 사실상 패소했으니 피해자들은 이제 하소연할 곳조차 사라진 셈이다. 판결과 관계없이, 젊은 시절 전장에서 피흘린 것도 모자라 평생을 질병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고엽제후유의증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로 이들을 지원하는 것도 이런 인식이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어떤 방식이든 미국 정부에 고엽제 피해자의 고통에 책임감을 갖도록 촉구해야 한다. 한·미동맹도 상대를 존중할 때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미국 정부의 성의를 기대한다.
  • [인사]

    ■국무총리비서실·국무조정실 ◇고위공무원(국장급) 임용△외교안보정책관 박상진△산업통상미래정책관 정동희△민정민원비서관 전재호△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김형돈◇과장급 전보△청년위원회(기획팀장) 파견 정병규 ■기획재정부 △조세정책관 문창용△재산소비세정책관 최영록△조세기획관 한명진 ■산업통상자원부 △기술표준원 적합성정책국장 이상진△국무조정실 산업통상미래정책관 정동희△코트라 방산물자교역지원센터장 윤갑석 ■대전시 △국제교류투자과장 고종승△안전총괄과장 윤종준△공원관리사업소장 김길석 ■충북도 ◇4급 승진△혁신도시관리본부장 박승영△바이오산업엑스포조직위(파견) 이차영 정재호△정보화담당관 조귀영△안전총괄과장 김선호△바이오육성과장 김종수△혁신도시관리본부 기획조정과장 김동원<소장>△청남대관리사업 이재덕△북부출장 한필수<농업기술원>△기술지원부장 이광해△지원기획과장 김영석◇4급 전보△정책기획관 박인용<국장>△경제통상 윤재길△문화체육관광 신찬인△균형건설 신필수△바이오환경 고세웅<담당관>△법무통계 전우배<과장>△총무 이성수△자치행정 정효진△세정 이상칠△회계 김호기△경제정책 허경재△기업유치지원 신강섭△농업정책 윤충노△원예유통식품 김종석△교통물류 이태훈△치수방재 경구현△수질관리 정인성<의회사무처>△정책복지전문위원 최창국<직속기관 및 사업소>△자치연수원장 오진섭△자치연수원 교육운영과장 김영환△도로관리사업소장 권봉억<전출>△충주시(부시장요원) 이우종<전출(부군수요원)>△청원군 김우종△보은군 류일환△증평군 박은상△괴산군 김희수△단양군 김문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총무상임이사 설정곤△징수상임이사 박경순△부산지역본부장 조진호△인력관리실장 전종갑△감사실장 권준석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이선민(예비역 육군 중장) ■재단법인피플 △사회공헌이사 송미경 ■IBK연금보험 ◇신규 선임△퇴직연금사업단장 한영우 ■BC카드 ◇신규 선임△경영기획본부장 전경혜△크레디트아카데미추진단장 박복이△경영지원실장 오경섭△기업문화팀장 손용선△교육기획팀장 임홍균◇전보 <실장>△경영관리 천덕종△CRM 임표△감사2 이경훈<팀장>△SBG 강원석△신용관리 이영환△준법감시 윤주호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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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청 ◇총경 <본청>△기획조정관실 미래발전담당관(승진) 조병노△교육담당관 최석환△수사구조개혁팀장 임성덕△위기관리센터장 김준철△항공과장 이자하△외사기획과(인터폴 파견) 양근원<경대>△학생과장 김창룡△치안정책연구소 진정무<교육원>△교무과장 이익훈<중앙>△운영지원과장 이연태<병원>△총무과장 백준태<서울>△경무과 김진홍(BH위기관리 파견) 정병권(지방자치발전추진단 파견)△수사과 임홍기(금융위원회 파견) 윤성혜(형사사법공통시스템운영단 파견)△제3기동단장 윤외출[서장]△동작 김원환△광진 김남현△금천 천범녕△방배 박채완△은평 이문수<부산>△홍보담당관 안정용[과장]△제1부 정보화장비 박재구△제1부 교통 양명욱△제3부 보안 김주전△제3부 외사 이순용[서장]△중부 이승재△영도 이흥우△동부 주용환△서부 김형철△해운대 전창학△금정 양두환<대구> [담당관]△홍보 정식원△정보화장비 최재천[과장]△생활안전 이창록△수사 이현희[서장]△남부 이석봉△달성(승진) 양원근<인천> [과장]△경무 황경환△생활안전 권기섭△경비교통 배영철△정보 배상훈[서장]△삼산 조정필△연수 박승환<광주>△정보화장비담당관 김창수[과장]△생활안전 김홍균△수사(승진) 김철우△경비교통 백혜웅△정보 김근[서장]△서부 김재석△남부 이기옥△광산 김원국<대전>△홍보담당관 김동락[과장]△생활안전(승진) 김보상△수사 태경환△정보 김재선△보안 박진규[서장]△중부 김경원△서부 이병환△대덕 이동기<울산>△홍보담당관 김해주[과장]△생활안전(승진) 이길호△정보 곽예환△보안 이갑형[서장]△남부 김창규<경기>[과장]△제1부 정보화장비 김성용△제1부 교통 최정현△제3부 보안 최영덕△제3부 외사 고기철△제2청 경무 조용태△제2청 경비교통 김충환[대장]△청사경비 박춘배[서장]△수원중부 이명균△안양만안 이왕민△부천원미 김수희△부천오정 오성환△화성서부 오동욱△안성 김균철△양주 김평재△고양 이형세△포천 우희주△동두천 추수호<강원>△청문감사담당관 고창윤[과장]△생활안전 조지호△수사 곽경호△경비교통(승진) 김광식[서장]△춘천 손호중△동해 이철민△속초 최승렬△영월 강도희△홍천 이의신△화천(승진) 전용찬△양구 장신중<충북> [담당관]△홍보 윤중섭△청문감사 주현종△정보화장비 김창수[과장]△경무 손종국△보안 이찬규[서장]△청주흥덕 이동섭△청주청남 강병로△충주 권수각△단양 박창호△옥천 이상수△음성 홍기현<충남> [담당관]△홍보(승진) 송정애△청문감사 정두성△정보화장비(승진) 배병철[과장]△생활안전 이재승△수사 이동주△정보 심은석[서장]△천안서북 홍완선△아산 서정권△보령(승진) 신주현△당진(승진) 유제열△부여 이시준△세종(승진) 박종민<전북>△청문감사담당관 이상주[과장]△생활안전(승진) 박헌수△수사 강윤경△경비교통(승진) 최호순△보안 방춘원[서장]△전주완산 안기남△정읍 김동봉△남원(승진) 김관△김제 최종문△순창 정진관△장수 박훈기<전남> [담당관]△청문감사 김성열△정보화장비(승진) 박상우[과장]△경무 노재호△생활안전(승진) 민성태△수사 권영만△정보 양성진△보안 김재병[서장]△고흥 안병갑△장흥 박병동△보성 김영근△함평 강칠원△담양 박지영△완도 나원오△진도(승진) 박근주<경북>△청문감사담당관 박효식[서장]△경주(승진) 원창학△구미 권오덕△칠곡(승진) 정태진△청도 조용성△영덕(승진) 김항곤△영양(승진) 정남권△군위(승진) 강신걸△울릉(승진) 박도영<경남> [담당관]△홍보 권창만△청문감사(승진) 이병진△정보화장비(승진) 이태규[과장]△정보 이희석△외사 추문구[서장]△창원서부 류재응△김해서부 전병현△진해(승진) 최병부△통영(승진) 이준형△고성 김정완△함안 한원호<제주>△홍보담당관 함현배[과장]△수사(승진) 전재희△경비교통(승진) 이지춘△정보(승진) 강월진△보안 김학철[단장]△해안경비(승진) 양영석[서장]△서부 고석홍<운영지원과(교육)>△경대 서대용<경무과(교육)>△부산 변항종△인천 정지용△광주 우형호△강원 이인상△충남 김택준<경무과(교육·승진)>△서울 최종상 유윤종△부산 정규열△대구 배대희△광주 이성순 노규호△대전 김종식△울산 전오성△강원 윤치원△충북 이종원△전북 안상엽△전남 장효식△경북 김상렬△경북 이상현<경무과(대기)>△부산 정용환 이일우△대구 채한수△광주 한재숙△경기 노혁우 신동호 고경철△강원 엄영민 김종관△충북 최길훈△전남 이윤 황호선 김치중△경북 임주택 이영태△경남 백광술<경무과(치안지도관)>△광주 전준호△전북 백용기<경무과(치안지도관·승진)>△서울 김병기 김준영 송준섭 정훈도 한영록△부산 정재화△대구 윤종진 정상진△인천 황창선△광주 서병률△대전 김광남△울산 박주진△경기 김기동 이수경 정방원 홍명곤△강원 김희중△충북 이병무 최기영△충남 이준배△전북 김주원 박정근△전남 이용석 이재영△경북 김병우 김병찬 김한탁△경남 김균 ■KBS △부산방송총국 보도국장 김지원 ■MBC △특보 문철호△보도국 부국장(편집2센터 주간뉴스부장 겸임) 김대환△보도국 취재센터 기획취재부장(중부권 취재부장 겸임) 민병우 ■CBS △아나운서부장 신지혜△정치부장 이재웅 ■한림대 △대외협력처장 윤태일 ■우리은행 ◇승진 <부장대우>△개인심사부 원상연△외환서비스센터 이대진△퇴직연금부 윤동현△전략기획부 오재일△리스크총괄부 이도영△기업금융부 서두종△홍보실 한승철△준법지원부 김호연 이학조 이상학△인재개발부 노욱진 김진순 전준원 임동열 한미숙 정상수 좌순양 전영길 김동미 염종호 정규택 최강호 권태숙 우건형 하병철 유병규 김남정 이종남 최규삼 송강영 장창현 박형인 이재옥 김은미 김태형 김형철 최방용 이수정 김운용 김동호<기업지점장>△강남교보타워 김현창△남역삼동 권기진△선릉 소춘수△양재중앙 김용국△창원공단 이종길<지점장>△구로구청 윤정근△서초구청 한만교△천안청수 변재경△거제동 박원석△기장 정인화△범일동 도호근△사직동 이현진△토곡 최진주△해운대아이파크 조경우△내외동 곽경도△안정공단 김명삼△평리동 김헌수△영주 한봉희△동광양 김명길△군장공단 한영찬◇이동 <영업본부장>△부산서부 이승록△경남 김종원<부장>△WM자문센터 이인호△기관영업전략부 박판수△대기업심사부 김종주<부장대우>△기업개선부 김명규△인사부 김종득△준법지원부 이은석 강신종△국제부 이세정△인재개발부 이영섭 한병규 배국호 우현숙 김호영 황세형 김공직 유영규 정영기 조인환 박강식 유정희 장봉영 문석훈 이태주 양충호 유정현 강영숙 이성원 허준회 김병두<기업지점장>△본점 김응철△트윈타워 정성엽△중앙 김백철△종로 안영진△여의도 이정훈△서부 임동수△본점영업부 이필보 김정태△가산IT 고종호△강남교보타워 이성규△명동 이상혁 주대규△무역센터 이형근 안종해△상암DMC 박순길△서소문 원점연△서여의도 정연성△서울스퀘어 이종근△서초 노현 한승훈△세종로 이능원△송파 박완식△여의도 조만제△여의도중앙 김용진 고재설△역삼역 김형찬△역전 박경훈 안선영△종로 문석 김행삼△충정로 송한영△테헤란로 박윤호△남동공단 이백일△부평 조남석 박장근△분당중앙 심상형△용인 신희철△부전동 박기봉△울산중앙 배강한<지점장>△가산하이테크 정순우△강남구청 손공국△강남중앙 고광철△강서 최영군△개롱역 황희철△갤러리아팰리스 김장수△관악구청 양경웅△광장동 박준보△광진구청 조병희△구로중앙 이진원△금천구청 박완기△길동역 김금순△남대문시장 김복일△논현두산 박남식△논현역 이진욱△논현중앙 전명선△대림3동 이창민△대치남 김종혁△도곡스위트 정종숙△도로교통공단 노양환△도봉 박근호△독산동 나석운△돈암동 이승재△동대문구청 안홍주△뚝섬역 조병열△문래동6가 손종보△미아역 송기옥△반포서래 김점식△법조타운 박화재△북가좌동 이훈재△사당북 오정훈△사당역 박흥수△서강대 안영모△서초로 김양태△석계역 박창진△선릉역 김형석△성수남 이명애△센트럴시티 이석영△시설관리공단 안병국△시흥동 김용승△신도림동 이원원△신반포 김용호△신정남 김대식△아현동 김용남△압구정현대 김선규△여의도광장 조광호△역삼동 유은숙△영등포구청 김수길△영등포서 신하섭△영등포중앙 이경환△올림픽 하범수△원남동 박용문△월계역 백상록△일원동 안승환△자양동 전우탁△잠실 정준구△장충동 이기범△종로4가 장석문△중구청 김승세△창동 김병환△청계7가 윤석모△청파동 서상준△태릉역 이장희△테크노마트 박세혁△평창동 최병헌△하계동 서동영△홍제동 이영희△효자동 김성배△투체어스 강남센터 박승안△가좌공단 최병도△남동클러스터 강신규△연수동 이종근△인천항 이성영△주안공단 양병재△주안서 이태식△광명사거리역 강봉희△구성연원 권영운△군자 박노춘△동백역 정찬익△동탄 서영옥△분당금곡 서상철△산본역 조시형△삼성디지털시티 김영태△성남 홍윤기△신갈 남성진△신중동역 최인△안성 정광원△여주 이훈우△역곡 박해권△오산남 이봉수△오산세교 김대용△운정중앙 노미라△죽전역 정선홍△중동중앙 명삼진△중산 고창득△파주 오세황△판교테크노밸리 허정필△평택 송태호△화성정남 양호준△대덕 임수헌△대전중앙 송경자△대전 김윤태△도안신도시 성윤제△엑스포 조진영△서산 이재길△온양 양승재△홍성 박성호△오창 이익진△청주 김진범△남부민동 조태호△마린시티 안삼룡△해운대중앙 장영중△화명동 장귀옥△동울산 박형근△울산 양기섭△마산 기종광△창원 곽우권△상무 이병식△동경 이태영<금융센터장>△공덕동 김대영△동여의도 김영화△동역삼동 윤동영△마포 정승택△삼성 하태중△삼성타운 이창재△수송동 신현창△신대방동 김영재△장충남 김병규△트윈타워 김윤석△포스코 이동연△한강로 마호웅△한화 강병모△CJ 최재혁△GS타워 이성호△과천중앙 이종성△LS타워 김형식△강남교보타워 최창락△남역삼동 이종인△명동 김치식△무역센터 권광석△상암DMC 이용수△서소문 이동연△서여의도 김원배△서울스퀘어 전종섭△서초 조수형△선릉 이기재△세종로 김영세△송파 안기천△양재중앙 박혜숙△여의도 우춘기△여의도중앙 고재도△역삼역 정채봉△역전 이한모△종로 채현식△충정로 최정△테헤란로 장근성△부평 박대일△용인 용성봉△부전동 양춘옥△울산중앙 이경복△창원공단 조철제 ■동양그룹 ◇승진 <동양네트웍스>△상무 박근덕△상무보 김성훈 한효덕<동양인터내셔널>△이사대우 손태구<동양시멘트>△이사대우 김원호
  • 진짜 사나이 진급 측정…샘 해밍턴 최대 고비

    진짜 사나이 진급 측정…샘 해밍턴 최대 고비

    ‘일밤-진짜 사나이’(이하 ‘진짜 사나이’) 멤버들이 일병 진급 측정을 받게 됐다. 오는 30일 방송되는 MBC ‘진짜 사나이’ 녹화에서 배우 김수로, 방송인 서경석, 배우 류수영, 개그맨 샘 해밍턴, 가수 손진영 등 5명의 멤버들은 이병에서 일병으로 진급하기 위한 테스트를 받았다. 앞서 지난 3월 육군 훈련소에 입소했던 진짜 사나이 멤버들은 이번 일병 진급 측정에서 실거리 사격,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3km 뜀걸음 등 체력 검정을 거쳤다. 이날 녹화에서 ‘진짜 사나이’ 멤버들은 진급 측정의 마지막 코스인 ‘3km 뜀걸음’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특히 샘 해밍턴이 이 코스에서 고비를 맞아 팀원들의 걱정을 샀다. 이를 본 류수영은 그를 부축하며 끝까지 함께 뛰는 의리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제작진은 “진급을 앞두고 뜨거운 전우애를 과시한 멤버들의 모습을 기대해 달라”고 전했다. 한편 지난 5월 입소한 배우 장혁과 그룹 제국의아이들 멤버 박형식은 이번 진급 측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진짜 사나이’ 멤버들의 진급 측정 소식에 네티즌들은 “진짜 사나이 진급 측정, 결과 기대되는데?”, “진짜 사나이 멤버들 진급 측정 받았다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진짜 사나이 진급 측정, 장혁과 박형식도 두달 뒷면…”, “누가 붙고 누가 떨어질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사]

    ■국세청 ◇고위공무원△소득지원국장 서진욱 ■소방방재청 ◇부이사관 승진△방재대책과장 박종윤◇전보△복구지원과장 홍철△재해경감과장 윤용선△기후변화대응과장 홍경우△재난상황실장 임현우△지진방재과장 강옥륜 ■산림청 ◇과장급 직위승진△행정관리담당관 염종호△국제협력담당관 최영태△도시숲경관과장 박도환◇과장급 전보△목재생산과장 박기남△국립산림과학원 연구지원과장 원상호◇4급 전보△숲길정책팀장 민한기△북부지방산림청 춘천국유림관리소장 용환택△남부지방산림청 산림경영과장 이용권 ■세종특별자치시 ◇4급 승진△경제산업국 농업유통과장 남궁호△시설관리사업소장 김종헌 ■대전시 ◇2급 승진△자치행정국장 김광신◇3급 승진△보건복지여성국장 오세희△건설관리본부장 신혜태◇3급 전보△경제산업국장 윤태희△교통건설국장 이원종△총무과(미국 파견) 유세종◇4급 승진△법무통계담당관 유춘수△문화산업과장 김기환△세정과장 김추자△장애인복지과장 전우광△식품안전과장 이계성△건설도로과장 유장부△인재개발원 교학과장 고현덕△오정농수산물도매시장 관리사업소장 윤대한◇4급 전보△도시주택국장(직대) 양승표△동구 부구청장 이창구△총무과(안전총괄과 TF팀장) 윤종준△자치행정과장 김동선△여성가족청소년과장 백운권△대중교통과장 노수협△운송주차과장 민동희△도시계획과장 정무호△도심활성화기획단장 이인기△도시디자인과장 이권구△의회사무처 총무담당관 송석근△의회사무처 의사담당관 장춘순△인재개발원 교육지원과장 김홍경△연정국악문화회관장 이임무△대전테크노파크 파견 박기남△지방공기업평가원 파견 전재현△상수도사업본부 수도기술연구소장(지방환경연구원) 이봉우△농업기술센터소장(지방농촌지도관) 홍종숙 ■KBS △편성본부장 전진국 ■단국대 △대외부총장 김병량△산학부총장 이계형◇대학원장△경영 김진형△행정법무 류지성△부동산·건설(사회과학대학장 겸임) 김호철△스포츠과학 조현익△보건복지 천재식△정책경영 박승환◇대학장△문과 황현국△공연디자인 김혜정△상경 송동섭△자연과학(죽전) 안용현△건축 이재훈△사범 정재철△음악 강대식△행정복지 유홍림△자연과학 김욱△공학 권경희△스포츠과학 이유찬△의과 유문집△치과 이진우△약학 오좌섭◇실·단장△기획실 김오영△비서실 남보우△산학협력단 방성일△천안캠퍼스산학협력단 태건식◇처장△국제 이재동△교무 홍인권△학생 김재호△입학 김현수△취업진로 이승기△대학원교학 현준원△교무지원 강상대△학생지원 김종규 ■서울신용보증재단 ◇1급 승진·전보△채권관리부장 신용호△서부지역본부장 왕희원△감사실장 조재목△경영기획실 실장(IT부장 겸임) 엄창석△소기업진흥실장 김남표△보증지원부장 권영호◇2급 승진·전보 <지점장>△중랑 박장혁△구로 구자견△금천 박창진△마포 주승휴△강동 박대원△도봉 황동조△사당 이재상 ■한국증권금융 ◇신규 선임△상무 강승원 ■삼정KPMG ◇승진△부대표 위승훈 유기석 조자영 최정욱△전무 김진만 인병춘 정창기 허세봉△상무(파트너) 고정우 권준석 김민규 김정환 김현석 박정수 오영석 이상욱 장현국
  • 한국전쟁서 피흘린 그들의 영혼 기리며…

    한국전쟁서 피흘린 그들의 영혼 기리며…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앞둔 23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워싱턴카운티의 헤이거스타운에서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앤티텀 312지부(회장 레스 비숍) 주최로 열린 행사에서 노병들은 한국전에서 목숨을 잃은 이 지역 출신 전우 42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바라보며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행사에는 비숍 회장 등 참전용사들과 에드워드 초우 메릴랜드주 보훈부 장관, 미 국방부 및 주미한국대사관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존 도너휴 메릴랜드주 하원의원은 축사에서 “지난 3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기념비 제막식이라는 결실을 거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참전용사들께 감사한다”면서 “이 기념비는 후세대에 대한 교육 목적도 될 수 있고, 발전된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정부와 시민 기부금 등 총 10만 달러가 투입된 한국전 참전기념비 공원에는 3개의 대형 비석과 3개의 깃발이 나란히 세워졌으며, 벤치도 마련돼 인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될 예정이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6·25 대한해협 전투 승리 ‘…바다의 전우들’ 펴낸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김문이 만난 사람] 6·25 대한해협 전투 승리 ‘…바다의 전우들’ 펴낸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때는 1950년 6월 25일 정오. 진해항에 정박 중인 국내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 갑판에는 외출·외박을 나갔던 장병들이 급히 모였다. 최용남 함장은 비장한 모습으로 말했다. “적 인민군대가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임원해안으로 쳐들어왔다. 우리는 지금 동해로 출동한다. 적 상륙군을 격멸해야 한다. 각자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라.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자.”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승조원들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투준비를 한 뒤 오후 3시 진해항을 출항했다. 여기서 잠깐, 백두산함에 대해 잠시 살펴본다. 초창기 해군의 염원은 함포가 장착된 군함을 갖는 것이었으나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군함 구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해군은 자체적으로 군함 구입자금을 모으기 위해 장병들의 월급에서 5~10%씩 갹출하고 부인회에서 삯바느질, 의복세탁, 수선, 뜨개질로 1만 5000달러를 모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했다. 이 대통령은 해군의 뜻을 높이 사 4만 5000달러를 보태 군함 구입을 주선했다. 결국 1949년 12월 뉴욕 맨해튼 섬 부두에서 정박 중인 고물 함정(2차대전 직후 퇴역)에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마이애미와 파나마 운하를 지나 1950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입항했다. 3인치 포를 장착하는 등 무기정비를 마친 3월 20일 하와이를 떠나 25일 콰잘린 섬에 기항해 연료를 공급받고 괌 섬 아프라 항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형편에 맞춰 3인치 포탄 100발만 장착하고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했다. 이후 심하게 녹이 슨 배를 진해항에서 한 달 동안 정비했다. 모든 승조원들이 달려들어 시뻘겋게 녹슨 선체를 해머로 털어내고 방부 페인트를 칠한 후 깨끗하게 단장해서 탄생된 것이 백두산함이다. 그렇게 해서 진해항을 떠난 백두산함이 부산항과 울산 앞 방어진 동쪽 3마일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25일 밤 9시 10분쯤이었다. 이때 우현에서 근무 중인 승조원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견시보고,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항해 당직사관 최영섭 소위는 쌍안경으로 동쪽 수평선을 봤다. 수평선에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夏至) 때라 해는 넘어갔으나 시정(視程)은 좋았다. 해상은 흐리고 너울이 일고 있었다. 최 소위는 함장에게 이러한 사실을 즉각 보고했다. “함장님, 저기 수평선에 검은 연기가 흐르는 것이 보이지요. 그쪽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함장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백두산함은 당초 목적지인 옥계 방향을 바꿔 15노트 속력으로 수평선을 향해 달렸다. 밤 9시 30분쯤 연기를 뿜으며 남하하는 배가 가까이 들어왔다. 백두산함과 비슷한 형태의 괴선박은 백두산함이 접근하자 항로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계속 남하했다. 최 소위는 부하들에게 국제통신부를 통해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문의하는 신호 부호를 찾도록 했다. 이어 발광신호를 보내게 했다. 최 함장은 괴선박의 예사롭지 않은 행태를 보고 적 인민군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최 소위는 괴선박의 발견과 추적, 여러 동태 등을 해군본부에 타전했다. 이어 최 소위는 신호사에게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라는 국제부호를 찾아놓으라고 지시한 뒤 공격적 탐색기동을 개시했다. 그러자 장교들 사이에 “무장한 군대가 갑판에 가득 깔려 있습니다. 아, 함수 갑판에 대포가 있습니다. 양현에 기관포도 있습니다”라는 외침이 잇따랐다. 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괴선박과 거리를 좁히자 장교들은 다시 “주갑판, 후갑판, 중갑판에 있는 병력만 500명은 돼 보입니다. 선실과 선창에 타고 있는 군대는 보이지 않지만 모두 합치면 700~800명쯤 되겠습니다. 적함이 틀림없습니다. 공격합시다”라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최 함장도 “저 배는 대포와 기관포로 무장하고 1000명 가까운 무장 육전대(해병대)를 태우고 있다. 저 배의 항로로 보아 부산을 점령하려고 내려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 전투에 돌입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라고 명령했다. 이어 함장은 다시 한번 장교들의 얼굴을 보면서 냉수로 건배를 했다. “살아서 마지막 마시는 대한민국 물이다”고 결의를 다졌다. 최 소위는 건배를 마치고 곧바로 함수 사병 침실로 가서 포술갑판 부대를 집합시킨 뒤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했다. 26일 밤 12시 30분, 함장의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3인치 포탄 첫 발이 포성을 울리며 적함으로 날아갔다. 최 소위의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일시에 풀렸다. 백두산함은 인수 후 포탄이 아까워 모의탄으로만 훈련했지 실탄사격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함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응사해 왔다. 백두산함은 18노트 최고 속력으로 기동하며 주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적함도 주포와 기관포로 맹렬히 반격해 왔다. 치열한 포격전이 20여분간 계속됐다.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으로 적함을 향해 돌진하면서 포탄을 계속 쐈다. 이윽고 적 함교에 포탄이 명중했다. 백두산함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 함은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좌현으로 기울어져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때 적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외판을 때렸다. 조타사 김창학 등이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또 적 포탄 한 발이 주포 갑판에 떨어져 파편이 튀었다. 장전수 전병익 등이 가슴에 파편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주포 전화수 김춘배 등이 다리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부상병을 후갑판 아래 사병식당으로 이송해 응급처치하고 3인치 포 수리에 착수했다. 이때가 6월 26일 오전 1시 20분쯤이었다. 백두산함은 약 4시간에 걸친 적함 잔해물 수색을 끝내고 아침 6시쯤 부상자 치료를 위해 포항기지로 향했다. 이상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대한해협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이 해상 전투는 전사(戰史)에는 기록돼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한국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3·8선 돌파하고 육상으로 남침한 것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육상은 물론 남한의 부산과 진해항을 점령해 유엔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던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문서기록보관청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한해협 전투에서 백두산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던 최영섭씨를 지난 13일 경기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위 내용을 상세하게 밝히기 위해 ‘6·25 바다의 전우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책을 펴냈다. 당시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대한해협전투’는 물론 서해 봉쇄작전, 인천상륙작전, 함경도 동해진격작전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다의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적함을 침몰시키고 포항으로 항진할 때 함미 사병식당에 있는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군의관 김인현 중위는 심한 배멀미로 목에 깡통을 달고 구역질을 하면서도 출혈이 심한 전병익, 김창학에게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두 중상자는 그 와중에도 ‘적함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라고 했더니 두 중상자의 눈빛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러더니 ‘대한민국 만세’라면서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지요.” 그는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육지에서 불이 붙었으나 바다에서 진화해 갔다. 6·25 그날 대한해협 전투 승첩으로 부산항을 지켜냈고 대한민국을 돕는 유엔군과 무기, 탄약, 장비 등 병참 물자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7년 미국 해군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이라는 책자에도 ‘전쟁의 가장 중요한 해상 첫 전투로, 백두산함이 1000t급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수장시켜 부산항을 통해 증원 병력과 물자가 도착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도 1961년 4월 ‘대한해협 해전 승전’이라고 공표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최씨는 해군사관학교 3기 출신으로 나중에 백두산함 함장,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 함장, 51전대 사령관 등을 거쳐 1968년 해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최씨는 매년 6월 25일 당시 대한해협전투를 겪은 전우들(당시 70명이었으나 현재 생존한 15명)과 같이 부산에서 만나 그날을 되새기고 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 조국의 군복을 입고 바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됐다. 이번에 펴낸 ‘6·25 바다의 전우들’을 쓰기 위해 26개월 동안 자료수집을 다시 했고 1년 동안 연필로 직접 썼다. 그는 자칭 ‘통합군사령관’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첫째 아들은 해군장교, 둘째와 넷째는 육군장교, 셋째는 공군장교, 손자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을 맡고 있다. 올해 85세의 고령인데도 열심히 강의를 다니면서 “육지 자원은 더 이상 없다. 우리나라는 이제 바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하늘로 돌아간 전우들이여, 그리고 머지않아 사라져 갈 전우들이여, 조국과 6·25의 바다는 그대들의 피끓는 조국애를 길이길이 기억하리라”고 말한다. 노병의 눈가가 잠시 적셔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1928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시립 제2중학교(우에노)를 졸업했다. 광복 이후 남한으로 와 해군사관학교 3기로 1950년 졸업했다. 또 단국대학교 법정학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육군대학, 미국 국방산업대학원 등을 나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해상전투에 참전했다. 주요 참전 경력은 6월 25일 대한해협전투를 비롯해 인천 철수작전, 여수 철수작전, 진동리 정찰작전,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군산 양동작전, 인천상륙작전, 대청도·소청도 탈환작전, 원산·함흥·성진 동해진격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등이다. 해상 근무 시에는 백두산함 함장, 충무함 함장, 51전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기록한 ‘고하도’ 등 3권이 있다.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으며 모두 육·해·공군 장교를 지냈다. 현재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있다. 백두산함에 3인치 포를 설치하는 모습.
  • [책꽂이]

    박새 둥지에 날아든 뻐꾸기 영어교사들(전정완 지음, 북랩 펴냄) 현재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영문법의 오류를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한 책. 보어 규칙과 8품사, 분사·동명사·부정사 용법 등 학교에서 잘못 가르치고 전수되는 엉터리 영문법의 유래와 오용 사례를 촘촘히 추적·분석했다. 134쪽. 1만원. 나는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박재현 지음, 공명 펴냄) 유엔 나이로비 사무소 안전보안국 보안대 작전담당관으로 활동하는 박재현의 에세이집.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꿈이 ‘최고의 보안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구체적 꿈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담았다. 280쪽. 1만 4000원. 6·25 바다의 전우들(최영섭 지음, 세창미디어 펴냄) 6·25 전쟁 북침설이 만연한 사회를 향해 예비역 해군 대령이 내놓은 자서전적 증언기. 저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을 넘은 북측의 육전대(해병) 1000여명이 부산 앞바다에서 수장됐다는 새로운 증언을 내놓는다. 360쪽. 1만 5000원.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2(박정호 지음, 한빛비즈 펴냄) ‘이야기 속에 숨겨진 경제학의 힘’ ‘음식에 깃든 경제원리’ ‘역사를 바꾼 인물들의 경제학적 통찰’ 등의 소주제들을 통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내재된 경제학적 진실을 읽어 낸다. 320쪽. 1만 5000원. 나의 프랑스식 서재(김남주 지음, 이봄 펴냄) 1990년 장 그르니에의 책을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의 삶을 살고 있는 저자의 번역 에세이. 프랑수아즈 사강, 아멜리 노통브,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등 그동안 번역한 책들에 붙인 ‘옮긴이의 말’을 묶었다. 272쪽. 1만 2000원. 지식의 반전:거짓말 주의보(존 로이드·존 미친슨 지음, 이한음 옮김, 해나무 펴냄) 잘못된 통념과 상식을 바로잡는 책. ‘시원하려면 짙은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한다’ 등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이 많다. 또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인 평균인 164㎝보다 큰 169㎝의 ‘키다리’였다고 주장한다. 340쪽. 1만 4800원. 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클레어 던 지음, 공지민 옮김, 지와사랑 펴냄) 전대미문의 심리학자 융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평전. 무서우면서도 심오한 의미가 있는 여러 이미지에 주목했던 어린 시절, 직업적 성공을 거둔 청년기, 영혼 세계를 재발견한 중년 시절까지 융의 여정을 정리했다. 336쪽. 2만 5000원.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강제윤 지음, 호미 펴냄) 300여곳의 전국 섬을 순례한 강제윤 시인이 섬의 풍경을 담은 아름다운 사진을 짧은 글과 함께 엮은 포토 에세이집. 섬 유랑자의 눈길을 따라 비경을 찾아 떠난다. 시인은 가장 인상 깊었던 섬으로 전남 신안군의 가거도를 꼽았다. 220쪽. 1만 6000원. 당신으로 충분하다(정혜신 지음, 푸른숲 펴냄) 정신과 의사가 들려주는 6주간의 힐링 토크. 개인맞춤형 심리분석 프로그램인 ‘내 마음 보고서’ 분석 결과 평균적 모습을 보인 30대 여성 4명과 저자가 6주간 진행한 집단 상담을 바탕으로 했다. 288쪽. 1만 3800원.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에리히 프롬 지음, 이종훈 옮김, 휴 펴냄)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저자가 1966년에 쓴 책.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구약 읽기를 시도했다. 구약은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해방돼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267쪽. 1만 4000원.
  • [포토 갤러리] 60년 전 전우여, 노병의 경례를 받게나

    [포토 갤러리] 60년 전 전우여, 노병의 경례를 받게나

    지난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찾은 참전용사 김태영(82)씨가 먼저 떠난 전우들의 이름을 묘비에서 찾은 뒤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3년 1개월간 이어졌다. 국방부에 따르면 13만 7899명의 국군이 숨지고 1만 9392명이 실종됐다. 민간인은 24만 4663명이 사망했으며 30만 3212명이 행방불명됐고 22만 9625명이 부상을 당했다. 8만 4532명이 납치되는 등 피해가 100만명에 이르렀으며, 70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전쟁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전우가 남긴 한마디’ 가수 허성희”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전우가 남긴 한마디’ 가수 허성희”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6월 호국 보훈의 달이면 떠오르는 가수가 있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의 허성희다. 그녀는 최근 국민들이 6월 한달만이라고 조국을 위해 희생분들의 고마움을 노래로서 되새기는 것 같아 기쁘다고 밝혔다.또 이 노래가 히트 한 계기는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우연히 들어보시고 군 부대에 노래 확산을 권장했었기 때문”이란 일화를 소개했다.  이번달 말 그녀는 오랜 공백을 깨고 신곡 ‘독도 찬가(작사 손기복·작곡 임정호)’를 발표 한다. ‘독도찬가’는 경쾌한 디스코풍 노래다.   “파도를 이겨내고 동해를 지켜온 자랑스런 한반도코리아 섬마을~” 시인이 지은 시적인 가사가 친숙하고 누구나 따라 부를수 있는 건전 가요이다.레코딩 판을 들어 보니 젊은 시절 같은 파워풀한 음색이 ‘전우가 남긴 한마디’처럼 힘찬 기운을 불어 넣은 듯 하다. 여가수가 불러서인지 기존의 여타 남성 가수들이 부른 독도 노래와는 색다른 맛을 준다.그녀는 “ ‘독도 찬가’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의 힘을 모으는 응원가 처럼 불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79년말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정착했었다. 미국서 CEO에서 세일즈 우먼까지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비즈니스 우먼으로 성공을 맛보기도 했지만 본업인 노래를 놓지 않았다. 특히 한인 교포들을 위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노래로서 그들에게 향수를 달래 주었다고 한다.  무서울 것 없었던 미국에서의 다양한 생활 경험이 강한 가수로 재기하는데 용기를 주었다.신곡 ‘독도 찬가’를 계기로 ‘40소절의 왈츠 ‘뜨거운 사랑’등 그녀의 명곡들을 리메이크 음반에 담았다.‘전우가 남긴 한 마디’도 영어로 부를 계획을 갖고 있단다.   새 앨범 ‘독도찬가’로 다시 팬들앞에 서 신인가수로 돌아온 기분이라는 가수 허성희. 조용필, 문주란,김흥국 같은 노장 가수의 복고 열풍을 타고 올드팬은 물론 신세대들에게도 감동을 줄지 그녀의 활동에 기대가 모아진다.   장상옥 기자 007jang@seoul.co.kr
  • 유공자 수당·의료비 지역·연령별 제각각

    유공자 수당·의료비 지역·연령별 제각각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참전 유공자에 대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복지 혜택이 지역과 연령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형평성 논란이 거세다. 모두 목숨을 걸고 희생했지만 이에 대한 금전적·의료적 보상은 현재 거주하는 지역과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여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참전 유공자의 명예수당은 자치단체(거주지 기준)에 따라 최대 10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5일 국가보훈처와 자치단체 등에 따르면 전국 대부분의 자치단체는 2005년 5월 제정된 국가보훈기본법에 근거해 6·25 등 참전 유공자에게 명예수당을 지원하고 있다. 전국 17개 광역 자치단체 가운데 10개 자치단체는 관련 조례를 제정해 참전 명예수당을 지원하고 있다. 시·도별 참전 명예수당 지원액은 매월 1인당 1만~10만원으로 최고 10배 차이가 났다. 세종시가 1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인천·대전시 각 5만원, 서울시·제주도 각 4만원, 부산·대구·광주·울산시 각 3만원, 경북도 1만원 등이다. 특히 세종시는 명예수당 지원 대상을 65세 이상으로 제한한 다른 시·도의 지원 기준과 달리 모든 참전 유공자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반면 경기·강원·경남·충남·충북·전남·전북도 등 나머지 7개 도는 참전 명예수당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들 도의 시·군·구 대부분은 참전 명예수당으로 매월 1인당 2만~10만원씩을 자체 예산으로 지급하고 있다. 자치단체 간 명예수당 지원 범위도 달랐다. 일부는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유공자를 포함하는 반면 어떤 곳은 6·25 참전 유공자로 한정하고 있다. 명예수당을 광역·기초자치단체가 중복 지원하는 곳도 있었다. 경북도와 시·군(3만~5만원), 인천시와 구·군(3만~6만원), 광주시와 서구(2만원) 등이다. 6·25 당시 칠곡 전투에 참가했다는 김영조(83·가명·대구 남구)씨는 “경북에 사는 전우는 매월 6만원을 명예수당으로 받지만 난 그 절반밖에 안 된다”면서 “전장에서 목숨 걸고 고생한 건 마찬가지인데 거주지 자치단체가 다르다고 수당까지 차별을 둬서야 되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자치단체마다 참전 수당 지원 기준이 달라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면서 “이미 수년 전부터 자치단체들에 참전 수당을 매월 1인당 평균 4만원 수준으로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참전 유공자의 의료 혜택도 거주지와 연령별로 차이가 심각하다. 정부는 대상과 나이에 따라 본인부담 진료비의 50~100%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보훈병원과의 접근성에 따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다른 실정이다. 현재 전국에는 310여개의 위탁 병원이 있고, 보훈병원은 서울과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5개 지역에만 있다. 보훈병원에서는 참전 유공자의 연령에 상관없이 의료비 60%의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위탁 병원에서는 75세 이상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75세 이하 참전 유공자가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서울이나 대전 등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서울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제2연평해전·천안함 폭침 경험한 현역 해군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제2연평해전을 경험한 해군 장교 A의 ‘악몽’은 11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6월만 되면 더욱 심해진다. 북한 경비정의 포격에 참수리 357호 고속정 전우들이 피 흘리는 광경이 선하다.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 없다. 잠이 들었다가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여지없다. 2002년 6월 29일 그 바다가 눈앞에 있다.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을 경험한 현역 해군 부사관, 장교들이 여전히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민간 연구기관인 안보경영연구원이 국방부 의뢰를 받아 최근 수행한 ‘해외 파병자 PTSD 관리 방안’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국내에서 교전을 경험한 현역 군인에 대한 PTSD 조사는 처음이다. 연구진은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생존한 현역 부사관, 장교 30여명 가운데 6명(제2연평해전 5명, 천안함 1명)을 대상으로 올초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병행했다. 6명 가운데 5명(83.3%)은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1주일 동안 수면 장애와 정서적 마비, 반복적인 악몽(침습), 생리·자율적 흥분(과각성), 관련 사건·장소 의도적 회피 등 전형적인 PTSD 증세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명도 정도만 덜했을 뿐 부분 PTSD집단으로 분류됐다. 특히 제2연평해전 경험자 5명 모두 PTSD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뷰 대상자 6명 전원은 PTSD 관련 교육을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연구를 총괄한 안보경영연구원의 김기정 소장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교전 경험자들은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전 해역에서의 근무를 견딜 수 없어 함대를 옮겨도 다를 게 없다며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軍에서 따낸 고교 졸업장

    軍에서 따낸 고교 졸업장

    육군 수도군단 공병대대 조래준(25) 일병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사업에 실패했다. 부모의 이혼과 함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는 어머니, 누나는 아버지와 살았다. 어머니는 화장품 외판으로 살림을 겨우 꾸렸고,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17살이 돼서 겨우 검정고시로 중졸 학력만 얻었을 뿐 그 이상은 무리였다. 공사장 막노동과 나이트클럽 아르바이트 등 돈이 된다면 뭐든 했다. 가정형편 탓에 뒤늦게 입대를 하고 보니 부대 안에 ‘충의학교’라는 검정고시 준비 교육과정이 있었다. 망설임 없이 입교를 결심했다. 대부분 그처럼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뒀던 비슷한 환경의 동료들이었다. 학습 도우미로 나선 전우들과 자원봉사 교사들의 도움으로 지난 5월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김 일병은 “학교에 보내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하시던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이제야 볼 수 있게 됐다”면서 “부사관을 지원해 직업 군인이 되는 길도 열렸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해 훗날 내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24일 수도군단에서 열린 2013년 전반기 ‘충의학교’ 졸업식에서는 김 일병을 비롯해 검정고시에 합격한 32명이 졸업장과 졸업 앨범을 받았다. 손자뻘 되는 장병 28명과 함께 만학의 꿈을 이룬 김경례(64) 할머니 등 지역주민 4명도 포함됐다. 복무 기간 단축과 저출산으로 병역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연간 6000명 이상의 고졸 미만 학력자가 현역으로 입대하고 있다. 육군은 2009년부터 학습용 교재를 무료 제공하고, 부대별로 학습 동아리를 꾸리는 등 검정고시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09년 한 해 847명이던 현역병 검정고시 합격자는 올 상반기 2278명으로 늘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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