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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민속박물관/민족긍지 서린 서민문화메카로(국정탐방)

    ◎내년 2월 새 전시장 개관… 대대적 위상변화 모색/어떻게 달라지나/전래의 생활사 연구·자료기능 확충/보여주는 곳에서 체험적 공간으로 보통사람들의 문화 산실을 표방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보통이상의 큰 걸음을 내딛고 있다. 새로운 보금자리로의 이전 개관이 내년 2위로 바짝 다가오는 가운데 최근에는 직제개편에 따라 중앙박물관에서 분리,독립했다.바야흐로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를 대표할수 있는 국제수준의 민속박물관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는 자리는 경복궁 동쪽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모두 1백10억원을 들여 추진중인 건물 내부개조공사의 공정은 현재 1백% 가까이 이루어져 마무리 손질만을 남겨 놓고있다.옛청사에 보관되어있던 유물은 9월28일부터 신청사로 옮기기 시작해 지난달 24일에는 민속박물관답게 터주신에게 무사히 이사를 끝낸것을 감사하는 고사까지 지냈다. ○최근 직제도 개편 경복궁안 한쪽에 그것도 일제가 지어놓은 낡은 옛청사에서 위풍이 당당한 새청사로 옮긴 것이 외형상의 변화였다면 지난 10월29일 단행된 직제개편에 따라 문화부직속기관으로의 독립은 내용적인 변화였다고 할수있다. ○정신사 중심으로 직제개편에 따라 관장은 4급상당의 학예연구관에서 3급상당의 학예연구관으로 격상됐으며 조직도 관리과·전시과의 2개과에서 관리과·전시운영과·민속연구과등 3개과로 확대 개편됐다.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원이 25명에서 13명의 학예직을 포함한 47명으로 늘어남으로써 연구및 사회교육기능의 확대가 가능해진 것도 내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이종철관장은 『이제 민속박물관의 틀이 갖추어진 만큼 심부름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긴 장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민속박물관의 변신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번째는 지금의 변화가 오래뒤에야 제대로 평가받게될 보이지않는 커다란 치적이라고 반기는 쪽이다.그동안의 박물관정책이 고고미술박물관에만 치우쳤던데 비해 민속박물관의 이같은 위상변화는 물질사중심의 정책에서 정신사쪽으로 옮겨가는 증거로 받아 들여질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민속박물관만이 가질수있는 전문성과 독창성이 발휘되어 비로소 정상적인 역할수행을 기대할수있는 조직적 정책적 기반이 완성됐다는 점도 높이 평가됐다.두번째는 이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민속박물관의 기능이 아직도 크게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시각이다.오늘날 정치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안의 하나가 민속박물관이 활발히 기능을 수행하는 것임을 정부나 국민 모두가 아직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다소 불만스런 입장이다. 그러나 얼핏 편차가 큰 것처럼보이는 이 두 시각에서도 「민속박물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공통분모가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이처럼 새 민속박물관이 수행할 역할에 대해서 누구나 큰 기대를 걸고있다. 이에따라 새 민속박물관은 민속에 대한 의미부터 국민들의 마음속에 새롭게 자리잡게 만든다는 것을 당면목표로 삼았다.역사가 대개 왕후장상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 역사의 행간에 민중의 슬기와근면 장엄함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찾는 것이 민속학이고 민속박물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새민속박물관을 고리타분한 고대문화의 창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문화 생산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위해 새민속박물관은 유형적인 삶의 문화와 함께 정신적인 풍속을 지켜주는 산실로 가꾸기로 했다.이를테면 농경문화의 전시를 통해 「쌀이 생산되기까지는 여든여덟번 손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되면 「쌀이란 도저히 훔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울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족대이동의 설날등 형태가 없는 체험적 문화적 공간까지 포용하는 방안까지 마련해 놓았다. ○미풍양속 등 발굴 이처럼 새민속박물관은 전시기능외에 연구와 자료관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강화된다.이에따라 근·현대생활사를 체계적 종합적으로 조사 수집해 전산기록화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또 전통적 미풍양속을 계속적으로 발굴,재현하고 기록화해 영구보존할 방침이다. 이렇게 모아진 생활문화및 문화재에 관한 자료는 대학과 연구소 일반국민을위해 무한봉사 제공함으로써 국립민속박물관이 민족생활문화에 관한한 명실상부한 중심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 약사 ▲1946년 남산 왜성대자리에 국립민족박물관 개관. ▲1950년 전쟁으로 폐관. ▲1966년 경복궁내 수정전 자리에서 한국민속관으로 출범. ▲1973년 구민속박물관 건물로 이전. ▲1975년 한국민속박물관으로 확장 개관. ▲1979년 국민민속박물관으로 개칭,문화재 관리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소속변경. ▲1992년5월28일신청사로사무실이전. ▲1992년10월2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부 직속기관으로 독립. ▲1993년2월 이전개관(예정) ◎무엇을 보여주나/선사∼조선시대 서민삶의 모습 재현/서당·회갑연·민속신앙 등 모형 전시/옥외엔 장승·귀틀집·물레방아 설치 문화부산하의 새국립민속박물관은 전시공간 및 연구인력이 늘어난 만큼 전시내용도 크게 확충된다.먼저 민속박물관은 구관의 2천9백60평에 비해 크게 늘어난 1만2천8백50평의 부지를 확보함에 따라 불가능하던 대규모 야외기획전시가 가능해졌다.옥내전시공간은 모두 2천2백24평으로 구관의 6백26평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났다.옥내전시공간은 다시 주전시공간과 보조전시공간으로 나뉜다.주전시공간은 3관 15실의 상설전시장과 기획전시가 가능한 특별전시실로 구분시켰다. 보조전시공간에는 국제민속전시실과 영상실을 겸한 강당,민속사랑방등이 포함됐다. 이처럼 전시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전시유물도 2천5백11점에서 4천3백23점으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민속박물관은 새 전시관을 ▲진실로 강한 민족문화의 환상적 지평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축적된 공간 구성 ▲삶의 현장이 살아 움직이는 마당으로 만듣다는 기본방향을 설정했다.이에따라 기존의 정적 폐쇄적 전시에서 탈피해 체험적 전시가 될수있도록 디오라마 파노라마 입체음향등 특수전시기법을 적극활용해 역동적 입체적 통시적인 전시가 되도록 했다. 이런 원칙아래 전시장은 한국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민족생활사 ▲생활문물과 생산민속 ▲생애의례의 3영역으로 나뉘어 조명된다. 한민족생활사를 담은 전시1관은 선사시대에서부터조선시대까지의 생활사 측면을 역사적으로 다루도록 배려했다. 이 전시관에는 단군신화및 삼국건국신화와 함께 최근 발주된 부안격포제사유적을 재현하는등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추적해보는데 중점을 두기도 했다.여기에는 또 가야의 기마인물과 야철공방이 모형으로 재현되고 발해유물이 전시되는 등 민족자존의 회복문제가 비중있게 다루어진다.전시2관은 생산민속과 생활문물로 꾸며진다.이곳에는 우리의 자연환경과 농경문화 생업 세시풍속 수공업 그리고 전통사회의 의·식·주생활을 선보일 계획이다. 생애의례를 주제로한 전시3관은 출생에서부터 상·제례 민간신앙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전시한다.이에따라 선바위에 아들을 비는 풍습에서부터 출산 의례 돌상 서당 향교 관례 및 혼례 회갑연 상청과 상복 제사와 고사 사당등을 모형으로 꾸민다.또 각 통과의례 사이사이에 아이들의 놀이모습과 과거시험장면 주막 놀이기구 문방구와 책 선유락 한약방 굿청등도 역시 모형으로 만들어져 전시된다. 이밖에 박물관 옥외에는 물레방아와 귀틀집 장승등으로 살아 숨쉬는 서민문화의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게 될 개관기념전시는 아직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박물관측은 현재 「잊혀져 가는 과거를 조명해주는 거울로서의 전시」계획을 구상중이다.또 「과거뿐 아니라 미래를 투영해 줄수있는 내용으로 가능하면 보고 느끼고 직접 만져볼수 있는 전시」라는 원칙을 세워놓고 4∼5개의 시안을 검토하고 있다. ◎“「우리 것 알기」 교육현장 만들터”/“문화마당 넓히는 계기됐으면”/이수정 문화부장관(인터뷰) 이수정문화부장관은 내년 2월로 다가온 국립민속박물관의 이전 개관을 앞두고 요즘 1주일에 한 두번씩은 꼭 현장을 찾아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이장관은 이 작업이 『침체된 민속박물관의 기능을 정상화한다는 의미와 함께 문화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대로 된 문화공간」확보작업이 성과를 거둔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고 말한다. 『지금과 같이 높아진 국민들의 문화욕구는 경제 형편이 크게 나아지면서 현실화된 것입니다.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문화예술의 마당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습니다.민속박물관 이전은 그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장관은 그동안 문화공간 자체가 부족했었던데다 국가문화시설은 대부분 위치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남산의 국립극장이나 과천의 현대미술관의 경우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 이상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 건립이 시급한 자연사박물관은 똑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겠다는 제 소신이기도 합니다.미군이 떠날 용산기지는 이같은 기간문화시설이 들어설 서울의 마지막 공간인셈입니다.다행히 각 당의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이러한 취지에 뜻을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반갑습니다』 이장관은 현재 또 하나의 「제대로 된 문화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그것은 내년중 완공될 덕수궁 뒤편의 연극 전용극장이다. 『당초 이 땅은 영화진흥공사의 사옥 부지였습니다.그러나 극장을 이곳에 세우고 사옥은 홍릉에 짓도록 했습니다.문화공간은 시민에게 가까이 있어야하지만 사무실은 조금 멀어도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지요』 이장관은 이제 부족한대로 기본적인 문화시설은 어느정도 확보 되고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민속박물관의 이전 개관과 함께 대구와 부여박물관을 신축중이고 김해박물관이 가야유물 중심으로 탈바꿈한다.또 제주박물관도 신축중에 있다. 『그러나 어렵게 세워진 구민회관이나 문예회관이 아직은 문화공간이 아닌 예식장이나 안보교육장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럼에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음악인과 극단등은 무대가 없어 아우성입니다.이제는 새롭게 확충된 문화시설을 국민들이 직접 문화를 접할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데도 신경을 써야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장관은 이를 위해 『국립민속박물관도 현재의 단순한 전시기능에서 연구기능위주로 탈바꿈시켜 국민교육을 위한 중추적인 국가기관으로 키워나가겠다』는 포부를 털어 놓았다.
  • “북한은 오웰도 상상못한통제사회”/로이터통신브라운기자의 평양방문기

    ◎마지막 독재자 김일성의 “거대기념관”/장애자·노인 격리… 표준형 시민만 활보 북한 사람들은 비틀즈의 노래를 들어본 일이 없으며 코카콜라를 마셔본 일도 없고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도달한 사진을 본 일도 없다. 북한 사람들은 당국이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만 알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특히 김일성의 사생활은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이에 관한 질문은 무례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일성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가 초가집에서 태어났고 현재는 어마어마한 궁전에서 살고 있으며 국민들로부터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다만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그의 개인습관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의 경우도 출생장소와 날짜조차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외부세계에 대해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고 있다. 단지 북한의 공식적 전기를 보면 현재 그의 나이가 당초 기록보다 한 살 많은 49살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것은 그의 50회 생일을김일성의 80회 생일과 같은 해로 맞추기 위한 것으로서 출생연도 변경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도 불분명한 상태이다. 북한은 최근 우방이었던 동구 공산국가들이 민주화로 북한의 적이 되자 국가통제라는 나사를 더욱더 단단히 죄고 있다. 『조지 오웰도 이런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양의 한 서방 외교관은 말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전 대통령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금물이다. 한 외교관은 『이곳에는 반체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주민들은 김일성을 신처럼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양은 세계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 독재의 전시장으로,하나의 도시라기보다는 제2차대전 후 스탈린에 의해 권좌에 오른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기념관이다.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 노인들이 거의 없고 지체부자유자나 정신질환자들이 전혀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지만 점점 분명하게 알게 된다. 평양 시민 중에는 비만자도,말라빠진 사람도 없고 키가아주 큰 사람도,아주 작은 사람도 없다. 그들은 모두가 젊고 건강상태가 좋으며 옷차림도 거의 같아 남자는 회색 양복 차림이고 여자는 무지의 치마를 입고 있다. 『평양시민은 선택된 사람이며 그들은 신체장애자들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다른 외교관이 말했다. 평양에는 자전거,가게,거리 노점들이 없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진열장의 창을 통해 물건을 구경만 하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거리모퉁이에서 한담하거나 외식을 하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없다. 술집과 레스토랑이 몇몇 있기는 하나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나 가족을 찾아오는 해외교포들이 이용할 뿐이다. 국가는 식품으로부터 옷이나 주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급한다. 깨끗한 도시 평양에는 냄새가 없다. 자동차의 경적소리도,자전거의 벨소리도 들을 수 없고 행상인들의 고함소리,음악,어린이들의 웃음소리,화가 나서 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시민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행진하며,특히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그렇다. 그들은 출생해서죽을 때까지 어떻게 거동해야 하는지 배우며 심지어 웃는 방법까지 익힌다고 평양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이 말했다. 평양에는 재판소나 교화소도 없다고 관리들은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낙원」인 북한에는 범죄가 없다고 정색을 하면서 주장한다. 서방 인권단체들의 주장대로 북한에 정치범 10만명이 가득 차 있는 수용소군도가 있다 해도 여기서 탈출했거나 또는 그 진상을 외부세계에 공개한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 평양의 지하철과 노상 검문소에서는 신분증 조사가 엄중하게 실시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동구의 변혁을 알고 있으나 이 변혁으로 모두가 오히려 전보다 나빠져 실업과 경제 파탄으로 이어졌다는 말을 당국으로부터 들어왔다. 북한당국은 세계 다른 곳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했기 때문에 북한 주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외교관들은 말했다. 『북한은 개방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동구에서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한 외교관은 말했다. 그래서 북한은 세계에서 여전히 고립된 채있다. 북한을 폐쇄되고 궁핍한,그리고 혹자의 말처럼 위험한 요새로 만든 것은 김일성­김정일이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비밀에 싸인 지도자의 존재 때문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교조적인 주체사상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들 부자가 전세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첨예한 한반도 북쪽 2천1백만 주민들의 생활과 정신을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이들이 세계에 관해 무엇을 알고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즉,걸프전을 일으켰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처럼 김일성도 이와 유사한 오판을 할 수도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외교관은 『북한에서는 그 누구도,심지어 김정일까지도 감히 김일성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며 그의 측근들은 그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충격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외교관은 『김일성이 자신의 무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외교관들은 세계정세와 김일성에 대한 북한주민들의 무지가 이들의 장기통치를 가능케 하고 있다고 말한다.
  • 권기진특파원 총리회담 취재기(90년 가을의 평양:하)

    ◎“우리식대로”… 개방물결 막기 안간힘/말마다 “위대한 수령”… 「주체교」에 도취/곳곳 거대한 건물… 시민도 「전시용」 역할 평양은 북한이 작심하고 건설한 거대한 전시장이었다. 고층의 빌딩과 살림집(아파트)ㆍ인문문화궁전ㆍ천리마동상ㆍ개선문 등 각종 규모있는 시설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수령」 교시에 따라 조립됐다는 것이다. 특히 높이 1백70m의 주체사상탑,1백5층의 유경호텔(현재 골조만 완공된 채 공사가 중단),15만명 수용의 5ㆍ1경기장 등은 세계 최고ㆍ최대 규모라는 안내원들의 자랑이다. 이러한 시설들과 널직한 도로가 조화를 이뤄 평양은 겉보기가 잘 정돈돼 있었다. 그러나 고층살림집의 외장이 매끄럽지 못하는 등 전체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밤에는 중심가에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켜져 있었으나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전시장에서 김일성 주석의 연출에 따라 행동하는 충직한 「인민배우」 같았다. 도시전체 분위기는 이 때문에 생동감이 없어 보였다. 개성에서 평양사이의 농촌모습과 평양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단층 기와집이었고 일부 살림집(아파트)은 3∼5층 규모로 내외장 처리가 잘돼 있지 않았다.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는데 안내원들은 전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나무를 심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자 『혁명과업 수행에 몰두하다 보니 나무를 심을 수가 없었다』고 답한다. 추수가 끝난 논들은 대부분 방치돼 있었는데 땅힘을 돋우기 위해 휴작한다는 얘기였다. 경지나 농수로 정리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것 같았다. 시골길에는 인적이 뜸했고 통행차량도 별로 없었다. 판문점에서 개성까지는 2차선 고속도로가 훤히 뚫려 있었다. 안내원은 현재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는 노면공사가 끝났으며 마무리작업 중이라고 알려준다. 평양의 대규모 시설들을 보면서 기자는 다른 산업수준들은 어떨까고 생각해봤다. 그러나 거리의 낡은 트럭이나 숙소의 가전제품들을 보고 자동차ㆍ철강ㆍ전자산업 등은 낙후됐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숙소에 비치된 TV와 냉장고ㆍ1회용 면도칼 등도 모두 일제였다. 지금 평양전시장은 온통 김일성숭배와 혁명구호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주민들은 동구권의 개방물결에 주체사상으로 대응,「우리 식대로 산다」고 외치고 있다. 동구권 변혁은 지도자들이 부패해 인민의 배반을 당했기 때문에 일어났지만 북조선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위대한 수령」이 혁명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지상낙원」을 이뤘고 부지런하고 똑똑한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계승,혁명과업의 완수를 지향하고 있다며 김일성 부자의 세습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한국과 수교한 소련에 대해서는 심한 배신감을 토로하면서 그들이 없어도 잘살 수 있다고 큰소리다. 백화원 초대소 접대원은 『소련은 미제가 제공한 달러를 남조선을 통해 받고 동맹국을 배반한 나라』라고 매섭게 성토했다. 어떤 행인은 소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통일과업을 위해 와서 왜 그런 얘기만 하느냐. 우리는 의리를 23억달러에 팔아먹은 소련의 배신에 눈하나 깜짝 않습네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살아갑네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본과의 수교움직임에 대해선 『일본이 과거잘못을 사과했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논리로 주민들을 이해시키고 있었다. 『과거 잘못했더라도 진실로 사과하면 받아줄 수 있다. 흰 기를 들고 왔는 데 박대할 수 있느냐』는 외교부의 한 부국장의 얘기였다. 평양주민들은 세상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최근의 북경아시안게임이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최후 등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고위간부 등 극히 일부는 그런대로 바깥소식을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일반 주민들은 너무나 깜깜했다. 노동신문ㆍ민주조선ㆍ통일신보 같은 신문과 중앙 TV가 있으나 바깥소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는 실정. 라디오와 TV는 사이클과 채널이 고정돼 그들 방송만 듣도록 돼 있었다. 지난 18일 아침 기자는 백화원초대소 정원에서 혼자 서울서 갖고 갔던 라디오로 그쪽 방송을 듣고 있었다. 어느 틈에 한 안내원이 달려와 『뭘 듣고 있지요』라며 라디오를 쳐다보다가 평양방송임을 알고 멋적게 웃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평양주재 외신기자는 『그들은 문을 열면 체제가 붕괴된다는 위기의식에서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외부차단으로 가능한 것 같습니다』고 전해준다. 해외방송은 청취가 불가능해 혹 접시 안테나라도 설치하면 웬일인지 그날로 고장이 난다는 얘기였까. 그는 이곳에서 외국방송을 청취하다 발각되면 8∼12년 징역을 살 정도로 중형에 처해진다고 알려줬다. 이같이 외부세계와 철저히 벽을 쌓는 반면 내부적으론 통일을 체제결속 이념으로 활용하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것 같았다. 「통일원무곡」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는 한겨레」 「이제 더 못참아」 「조선은 하나다」는 등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책자를 발간하고 각종 공연 때 이들 노래를 제창토록 하고 있다. 「해방의 감격에 춤추던 강산이/외세에 분렬된 기나긴 반세기/아 이젠 더 못참아/외세를 내몰고 통일을 이루자」 「반만년의 피줄을 이어온 우리는 하나의 민족/백두산의 줄기가 내리여 이땅은 하나의 강토/갈라져 몇해더냐 헤어져 몇해더냐/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 길로 조선은 하나다」­통일가요인 「이젠 더 못참아」와 「조선은 하나다」의 1절 가사다. 이같은 노래들은 『90년대를 통일의 연대로 빛내이자』는 각종 통일구호와 함께 북쪽을 「통일열병」에 들뜨도록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속셈을 읽고 우리의 순수한 통일염원을 생각할 때 가슴만 답답했다. 그렇더라도 계속 두드려야 할 통일의 문이지 않는가. 그 언젠가는 폐쇄의 벽에 틈새가 생겨 민주화와 자유화바람이 솔솔 스며들 날이 오겠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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