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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준 단국대이사장/장기·시신 등 기증키로(조약돌)

    ○…단국대 김학준이사장이 2일 열린 개교기념식에서 서울캠퍼스이전계획을 공표하면서 자신의 사후에 장기와 시신을 학교에 기증한다고 밝혀 화제. 김이사장은 이날 기념식에서 『학교발전계획에 따라 앞으로 경기도 용인군일대에 지어지는 새 캠퍼스의 교사가 1백년이상을 유지,전승될 수 있도록 한점 의혹이 없이 지어지는 데 나의 모든힘을 쏟겠다』며 『그 증표로 장기와 시신을 사후에 단국대병원에 기증하겠다』고 발표.
  • 구비문학 발달/설화­민요 생생하게 구전(연변 조선족 1백년:3)

    ◎민담집엔 모국서 사라진 옛날 이야기 가득 중국에서는 이야기꾼(말꾼)을 일반적으로 고사강슬자라 한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혼자서 수십편 정도를 구술하는 사람을 고사능수,1백편 이상을 구술하는 사람은 민간고사가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우대하는 의미가 있다.혼자서 1백편이상을 구술하는 민간고사가를 높이 찬양하면서 상해문예출판사가 단독민담집을 내어 준 일이 있었다.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중국조선족 김덕순 할머니이다. 「김덕순고사집」(김덕순고사집·1983)에는 88편이 수록되었지만 실제 구술수는 1백50여편이 되었다고 하니 팔순의 할머니가 자랑스럽기만 하다.김덕순 할머니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중국조선족 사이에서는 속속 민간고사가가 발굴되기 시작했다.그 중에 차병걸 노인은 혼자서 무려 설화를 4백20여편,민요 3백여수,속담과 수수께끼 1백여개,판소리 10여편을 1년에 걸쳐 구연했다니 인간문화재가 되고도 남을 만큼 놀라운 구전문학의 산증인인 셈이다. ○혼자 4백20개 이야기 중국의 56개 민족중 인구 1백20여만명 밖에안되는 소수민족이건만 조선민족이 가장 구전문학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중국인 학자들사이에서 공인된 사실이다.필자는 그동안 중국에서 출판되는 중국어·한국어 문자로 된 중국조선족의 설화자료집을 닥치는 대로 수집 해 검토했다.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이미 한반도에는 끊겨버린 자료가 생생하게도 살아 구전되고 있는 것이다.또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은 한반도에는 없는 설화가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왕 학회에 참가한 김에 훌륭한 구술자를 만나고 싶다는 제의를 했더니 어렵지 않게 올 여든한살의 심윤철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그는 중국어를 모른다.8살에 두만강을 건넜으니까 중국땅에서 73년을 산 셈이다.그런데도 중국말을 모르고 살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비록 이국땅이지만 한국민족이 집단으로 살아온 탓일까….중국어가 필요 없었을는지도 모른다.어떻든 이 노인은 구술자임에 틀림 없다.이를테면 상대가 대학교수이든 누구이든 신분에 상관 없이 말문을 연다. 『옛날이야기 한마디 들려 주십시오』하고 정중히 부탁하자 빙긋이 웃으며, 『나야 「옛날이야기」같은건 모르오.「거짓말」이라면 한마디 할 수 있지만』『거짓말?』 놀랍다.이곳에선 민담을 거짓말이라고 한다.그래서 맞장구를 쳤다. 『네,좋습니다.거짓말 한마디 해 주시구려』 이렇게 해서 단숨에 10여편을 듣고서는 점심식사 때문에 중단이 되었다.놀라운 구술자다.물론 교육도 받았을 리 없고,8살에 건너 왔으니 고향인 함격도 단청에서 들은 이야기와 연변에 와서 들은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곳에선 구전설화를 기능별로 구분한다.전설은 「역사」로,민담은 오락중심에서 「거짓말」로,교훈이나 아이들에게 들려줄만한 이야기는 「덕담」이다.그리고 민요는 「참말」이다.민요는 과장도,허구도 없는 마음의 노래이기에 진실되다 하여 참말이라고 한다.진실로 개념설정이 확연하다.바람과 눈과 먼지와 싸우며 기나긴 만주벌의 겨울을 상상만 해도 지겹다.구수하고 짭짤한 「거짓말」과 「덕담」이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살벌한 나날이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이야기가 보존될 수 있었고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민요는 「참말」로 표현 「옛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그는 장례식이 끝나자 아버지 묘옆에 초막을 짓고 수묘를 시작했다.산 짐승들도 효자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을 했는지 해치기는 커녕 먹을 것을 갖다 주거나 추위를 이기도록 덮어주기도 했다.이렇게 3년 수묘를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중병에 걸렸다.효자는 용한 의원을 찾아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다.끝내 아들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았다. 『자네 어머니는 약으로는 낫지 않네.오직 한가지 천년두골에 쌍룡수(천년두골쌍용수)라면 모를까』아들은 통사정을 했다.점쟁이는 『이 약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에 있다네.천년 묵은 해골에 물이 담겨 있고 지렁이 두마리가 있을걸세.그것을 가져다 먹이면 낳을걸세』효자는 마을 사람에게 어머니의 간병을 부탁하고 깊은 산으로 향했다.기진맥진 했으나 참고 참았다.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효자는 뜻도 이루지 못한 채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것을 생각하자 호랑이가 무섭다기 보다는 몹시도 얄미웠다. 『호랑이야,넌 산중의 왕이다.나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고 약을 구하는 중이다.날 꼭 잡아 먹어야 직성이 플리겠거든 어머니 약이나 찾은 다음에 잡아먹거라』하고 통사정을 하자 호랑이는 털썩 꿇어앉았다.효자는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이내 호랑이 등에 올라 탔다.호랑이는 효자를 등에 태우고 날듯이 바람같이 산을 몇겹이나 넘었다.호랑이가 선 곳을 둘러보았다.그곳에 과연 천년 묵은 해골이 있고 속에는 물이 담겨 있는데 지렁이 두마리가 있었다.효자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고 다시 호랑이 등에 올라 탔다.눈 깜짝할 새에 마을앞에 닿았다.효자는 약물과 지렁이를 어머니에게 대접했다.그러자 어머니는 자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더니 배가 고프다고 했다」.예로부터 만물이 효자를 돕는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는가 보다. 『내가 아직 1백살도 안 먹었는데 이게 덕담이란겝니다』 이렇게 한마디 붙이는 구술형식을 보더라도 구전설화가 체계적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비록 소수민족이지만 도덕과 덕성을 기르는데 이 구전설화가 얼마나 큰 몫을 했는가 짐작이 간다. 고무적인 것은 12억 중국의 인구중에서도 1백20여만명 밖에 안되는 중국조선족의 정신적·문화적 유산인 구전설화가 보존되고 전승되는 현장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특별기 타고 급행…“폐암 중증” 관측/오진우,왜 갑자기 파리 갔나

    ◎주치의등만 수행… 정치목적 없는듯/의료수준·인도적 정책 고려 불 선택 북한의 권력서열 2위인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폐암치료를 위해 프랑스를 방문한 것은 입국 신청 4일만에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한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측은 지난 20일 북경주재 프랑스대사관에 오진우부장의 입국 비자를 신청했다는 것이다.프랑스정부는 정식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 「거물」의 입국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이틀 뒤인 지난 22일 알렝 쥐페 외무장관의 승인을 받아 입국을 허락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진우부장은 비자를 받은지 이틀 뒤인 24일 서둘러 평양을 출발했다.그의 비자발급을 위한 입국 목적도 「폐암 치료」라고 돼 있을뿐 아직은 그가 중병을 앓고 있는지 단순한 검진차원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수교국간의 영공통과 문제로 특별기보다는 민간항공기를 이용해 달라는 프랑스정부의 의사전달에도 굳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특별기를 타고온 점등을 보면 그의 폐암이 중증일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오진우부장을 수행한 인물은 주치의2명,간호요원 2명,경호원 1명,통역 1명인 것으로 전해졌다.때문에 그의 프랑스 방문에 신병치료 이외의 망명등 정치적 목적은 없는 것으로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그가 입원한 것으로 알려진 파리 시내 라에넥병원은 파리의 6대 종합병원의 하나로 호흡기전문 병원이다.그러나 26일 현재 그의 병원입원 기록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가명으로 입원한 것으로 보인다. 오진우부장이 중국 등 수교국을 두고도 프랑스를 택한 것은 프랑스의 발달된 의료기술,프랑스와의 관계및 프랑스의 인도주의적 정책 때문인 것으로 관측된다.프랑스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회당 정권의 출범으로 서방국가 가운데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84년 12월에는 통상대표부에서 일반대표부로 승격됐다.평양의 양각도호텔도 프랑스 기업이 투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의료기술은 에이즈 백신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등 세계적 수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또 고 김일성주석의 심장박동기도 프랑스 의료진이 방북해 달았을 만큼 북한에는 프랑스 의료기술이 친숙한 점도 고려된듯하다. 또 프랑스가 미수교국의 지도층이 치료나 검진을 희망하는 때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허락해준 전례들도 오진우부장의 프랑스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프랑스는 지난 85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제2인자의 치료를 받도록 했으며 지난 5월에는 리비아의 외무장관이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 파리를 경유하는 과정에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 적이 있다. ◎오진우의 전력과 최근 행보/항일유격대출신 혁명 1세대… 77세로 거동 불편/군 좌지우지… 김정일과 권력투쟁설 올해로 만 77세인 북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최근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이 될 정도로 노쇠현상이 뚜렷했다.가장 최근에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지난 16일 김일성사망 1백일 추모회였는데 이때 다리를 저는등 거동이 몹시 불편한 모습으로 북한 TV에 비쳐졌다. 그는 김정일에 이어 권력서열 제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8일 김일성사망 이후 몇몇 주요 행사에 나타나지 않아 김정일과의 불화설등 그의 신변을 둘러싸고 이상이 있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즉,7월20일 중앙추도대회 후 첫 중요행사인 「7·27 전승기념일」 행사에 군원로이며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그가 당연히 참석해야 했으나 불참했고,이어 9·9절(정권수립기념일)행사,10월11일의 단군릉 개건 준공식등 비중있는 행사에 잇달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다만 지난달 20일 추석을 맞아 「혁명열사릉」에 헌화한 뒤 다음날인 21일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사망 45주 추모회에 참석했고 또 하루 뒤인 22일 김정숙동상에 헌화한 사실이 전해졌다.생전에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 왔던 김일성부부,혁명열사 추모행사에만 참석했을 뿐이다. 폐암이라는 오의 병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지금까지 파악된 것으로는 86년 9월께 음주운전 사고를 내 의식불명의 중태에까지 빠졌었다는 것이 전부일 정도이다.당시 오는 한 연회에 참석한 뒤 만취된 채로 차를 몰고가다 평양시내 전승기념관의 가로수를 들이받아 9개월가량 고위 당정간부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이때 김정일이 헬리콥터까지 동원,긴급 후송을 하도록 지시하고 치료에도 세심한 배려를 해 준 것이 계기가 돼 김정일에 호감을 갖게 됐다는 후문이다.그의 출생연도가 김일성보다 불과 5년 아래인 1917년생인 것으로 알려져 폐암이 아니더라도 노환을 피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원 출신으로 혁명 1세대를 대표하고있는 그는 김일성과함께 오늘의 북한 체제를 구축한 주역의 한사람이다.함남 북청출신인 오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구조에서 언제나 2인자로 군림함으로써 그의 거취에 관심이 집중됐다.옛 소련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을 수료한 뒤 항일유격대에 가담한 오는 45년 10월 인민군 최고사령부 호위국장에 취임하면서 북한 군부의 핵심라인에 올랐다.이어 60년 8월 1집단군 군사령관을 거쳐 당정치위 후보위원이 됐으며 마침내 76년 5월 인민무력부장에 취임,군부를 장악했다.92년 4월에는 원수에,93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올라 실질적인 3인자 지위에 있다가 김일성이 죽자 권력서열 2위로 뛰어올랐다.최근에는 그의 「거세설」·「연금설」과 함께 아들의 중국탈출설도 나왔었다. ◎“오진우란 환자없다” 입원 부인/파리병원 주변 스케치 ○…파리시내 비노가에 있는 북한 일반대표부는 오진우 부장의 방문에도 불구,겉으로는 조용한 분위기. 북한측 한 관계자는 기자가 전화를 걸어 오부장이 대표부내에 있는지 등을 묻자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면서 『왜 그리 관심이 많으냐』고 딱딱한 반응. 북측은 한달여전부터 폐암치료병원을 물색해 왔으며 암치료약을 상당분량 구입해 평양으로 수송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오늘중 검진 받을것” ○…오부장은 입원할 병원이 워낙 취재진에게 노출돼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거소에서 의사왕진을 통해 진료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라에네크병원측은 많은 취재진이 몰리자 『오늘 이 시간 현재 「오진우」라는 환자는 병원에 없다』며 『그러나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겠다』고 발표. ○노출우려 왕진 가능성 ○…프랑스 내무부는 26일 상오 오부장이 이날 중 라에테크병원의 검진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 외무부는 검진결과에 따라 입원,수술,귀국등이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 ○외교소식통,망명 일축 ○…한 외교소식통은 오부장이 망명할 가능성에 대해 『프랑스정부는 인권탄압등의 경우에 한해 망명을 허용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며 일축. 이 소식통은 『오부장의 프랑스방문이 핵문제합의문 채택에 이어 남북대화등 관계진전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
  • 법령 1백40여개 제정·개정 해야/남북교류 대비 정비해야할 법체제

    ◎야·업계선 왕래·교역 신고제 전환 주장/「적」개념 「괴뢰집단」등의 용어도 바꿔야 북한에 대한 경수로 지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북한에 들어가는 인력만 해도 1천∼5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사람이든 물자든 남북간에 왕래가 시작되려면 현행 법령이나 관련용어등을 상당부분 정비해야 한다.정부와 민자당이 새로 만들거나 손질할 계획인 법령은 무려 1백40여개에 이른다.물론 인적왕래,투자보장,이중과세 방지등 92년 남북기본 합의서의 세부 합의서가 채택돼 남북교류협력이 본격 궤도에 오른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이를 위해 통일원을 포함해 경제기획원 법무부 안기부 등 거의 모든 정부부처들이 각 분야에서 소관법령과 씨름하고 있다. 정부와 민자당은 이와 관련해 세가지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첫째 남북 교류의 진전에 대비해 내용을 정비할 대상법령은 1백23개이다.인적왕래 및 이산가족 재결합 분야가 37건으로 출입국 관리법·검역법·의료법 등이다.경제분야는 대외무역법·저작권법·항공법 등 55건이고 사회문화분야는정기간행물 등록등에 관한 법률·영화법·문화재 보호법등 31건이다. 이 가운데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는 제한을 보다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통일원에서는 앞으로 교류협력이 다양해지면 이 법 하나로 모든 분야를 다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세분화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단계다.즉 기본법과 인적왕래·교역·협력사업 분야의 법을 따로 만들자는 의견이다.민주당이나 기업체들은 남북간 상호왕래및 교역에 대해 통일원 장관의 사전승인을 받도록 돼있는 규정을 신고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통일원측은 무분별한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을 우려해 곤란하다는 방침이다.아울러 이 법의 제26조에 『남북간 교역에 관하여 국가간의 관계에 적용되는 대외무역법등을 준용한다』는 규정도 남북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이 법의 다른 규정이나 남북기본 합의서 정신등에 상충된다는 지적도 있다. 남북주민의 자유왕래및 이산가족 결합에 따른 신분관계의 변동,민사분쟁 조정,남북합작 투자,남북당국간의사법및 수사공조등에 관한 사안들도 조정이 필요하다.특히 국가보안법의 통신·회합죄,고무찬양죄,이적표현물 소지죄등의 존속여부도 해결과제로 남아 있다.이와 함께 남북합작 투자촉진 특별법등의 제정도 고려하고 있다. 둘째 북한을 「적」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 법령에서의 용어를 정비해야 하는데 모두 14개가 있다.이 가운데 몰수금품 등 처리에 관한 임시특례법,국가유공자 예유등에 관한 법,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법률등 3개 법은 「북한 괴뢰집단」「북한 공산집단」이라는 표현을 바꿔야 한다.부재선고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재외국민 취적·호적 정정 및 호적정리에 관한 임시특례법,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임시조치법등 11건에서 「수복」「미수복」의 용어도 마찬가지다. 셋째 현행 교류협력과 관련해 운용체제를 개선하고 명령·규칙·규정등을 마련하는 일이다.남북교역 승인의 처리시한을 30일에서 20일로 줄이고 제출해야 하는 관계서류를 대폭 축소한 조치등이 이같은 취지에서 이미 이뤄졌다.음성정보 서비스를 통해 이산가족들이 대북 주민접촉 신청을 지방에서도 신청할 수 있는 방법등을 자동안내해주는 것도 포함된다.남북경제 협력사업 처리에 관한 규정등을 올해안에 확정 시행할 계획이다.
  • 한국 3연속 종합 2위/히로시마 아시아드 폐막

    【히로시마=특별취재단】 육상 1천6백m 계주에서 마지막 금메달을 추가한 한국이 종합 2위를 차지한 가운데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가 16일 열전 15일의 막을 내렸다. 「아시아인의 화합」을 내걸고 42개국 7천2백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이번대회는 이날 하오 메인스타디움에서 폐막식을 갖고 98년 방콕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한국은 사상 최대규모,국가가 아닌 도시 주도의 첫 대회,중앙아시아 5개국의 합류 등 아시아드에 새 이정표를 세운 이번대회에서 홈팀 일본의 집요한 견제를 뿌리치고 금메달 63개,은메달 53개,동메달 63개로 금 59개,은 68개,동 80개의 일본을 제치고 3연속 종합2위를 달성,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했다.중국은 예상대로 독주를 거듭한 끝에 금 1백37개,은 92개,동60개를 따내 종합 4연패를 이룩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홈코스의 일본을 상대로 멋진 역전승을 거두며 또한번 세계정상의 마라토너로 성가를 떨쳤으며 여자배구와 남녀 농구,축구,유도와 배드민턴 등 주요종목의 한·일 맞대결에서 대부분 통쾌한 승리를 거둬 선수단 응원에 나선 재일동포와 원정응원단을 기쁘게 했다. 이날 폐회식은 육상과 축구,배구 결승전 등 10개종목의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메인스타디움 빅아치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메달 경쟁을 벌여온 참가국 선수들은 석별의 정을 나누며 4년후의 재회를 약속했다. 폐회식에서 이번대회 MVP인 한국의 황영조에게 이상백컵이,중국올림픽위원회에 셰이크 파하드컵이 수여됐다.아마드 OCA의장이 폐회를 선언한뒤 OCA기가 방콕대표에게 넘겨지고 OCA찬가와 평화의 시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성화가 사그라들면서 일본 육상자위대의 축포로 막을 내렸다. ◎3연속 종합 2위 쾌거/대표팀에 축하메시지/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은 16일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종합 2위를 이룩한 한국선수단에 축전을 보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김대통령은 축전에서 『30억 아시아인의 축제인 이번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탁월한 기량과 지칠줄 모르는 투혼을 발휘하여 대회 3연속 종합2위를 달성한 쾌거를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하며 선수단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했다.
  • 춘천서/전국민속예술 경연 19일 “팡파르”

    ◎19개 시·도서 19종목 1,843명 출연/8개 마당 종목 시연… 전통문화 발굴재현 “큰몫” 문화체육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화방송에서 공동주최하고 강원도와 춘천시가 주관하는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한국방문의 해 우리의 멋 세계로」라는 주제로 19일부터 21일까지 춘천종합경기장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잊혀져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발굴·재현하여 이를 보존·전승하기 위해 58년 처음으로 개최한이후 35회를 맞이하는 동안 3백여종의 민속예술을 발굴·재현함으로써 우리민속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왔다. 이번 대회에는 이북5도를 포함한 총 19개 시·도에서 각 1개 종목씩 1천8백43명과 지난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충남홍성 결성농요,83년 최우수상 수상작인 횡성 회다지소리등 8개 종목의 1천17명의 단원들이 출연한다. 최우수상 1개팀에게 대통령상과 함께 상금,전승보존금 등 1천만원이 수여되는 것을 비롯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부문별 우수상(문체부장관상) 등 단체상과 지도상 및 개인상이주어진다. 18일 전야제에 이어 첫날인 19일에는 춘천종합경기장에서 수원 장치기 등 8개마당종목의 경연과 마산 농청놀이 시연이 마련된다. 20일에는 춘천실내체육관에서 해주검무,돈돌날이 등 5개 무대종목 경연과 날뫼북춤,임실 필봉농악 등 3개종목 시연이 펼쳐진다. 마지막날인 21일에는 춘천종합경기장에서 명주농악,안섬 풍어당굿놀이 등 6개마당종목이 경연을 벌인다. 한편 강원도에서는 경축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대회기간을 전후해 강원종합예술제,내고장 농특산품 큰 장터 등을 마련한다. ■경연종목(19개) ▲바위절마을 호상놀이(서울·민속놀이)▲구덕 망깨소리(부산·민속놀이)▲서촌 상여소리(대구·민요)▲꽁당배와 두루메기 젓잡이(인천·민속놀이)▲호남 우도농악 도둑잽이굿(광주·민속극)▲부사칠석놀이(대전·민속놀이)▲수원 장치기(경기·민속놀이)▲양구 바랑골 농요(강원·민요)▲지동농악(충북·농악)▲안섬 풍어당굿놀이(충남·민속놀이)▲삼계고전 상여소리(전북·민속놀이)▲진도 닻배노래(전남·민요)▲명주농악(경북·농악)▲남해선구 줄끗기놀이(경남·민속놀이)▲영등굿 약마희놀이(제주·민속놀이)▲해주 검무(황해·민속무용)▲평안도 다리굿(평북·민속놀이)▲평양 검무(평남·민속무용)▲돈돌날이(함남·민요) ■시연(초청공연·8개) ▲날뫼북춤(대구·민속무용)▲정선아리랑(강원·민요)▲춘천 외바퀴수레싸움(강원·민속놀이)▲횡성 회다지소리(강원·민요)▲결성농요(충남·민요)▲임실 필봉농악(전북·농악)▲마산 농청놀이(경남·민속놀이)▲이리농악(원광대·농악)
  • 농지 등 비업무 토지 매각않고 불법개발/쌍용자동차

    감사원은 14일 경기도 송탄시에 있는 쌍용자동차주식회사가 농지불법전용등의 수법으로 18만8천5백54㎡(5만7천여평)의 농지·초지및 산림을 불법개발해 주행시험장·자동차 하치장및 직원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쌍용자동차사가 지난 90년5월 부동산투기억제 특별대책에 따라 강제매각 결정된 비업무용 토지 16만여평을 매각하지 않고 오히려 불법개발하고 있다는 주민들의 진정에 따라 감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쌍용자동차사의 불법행위가 드러남에 따라 관계규정에 따라 금융제재,고발및 원상회복·철거등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하도록 송탄시와 은행감독원에 통보했다.또 단속을 소홀히 한 송탄시관계자 21명에게 주의를 촉구하고 쌍용자동차사의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에 대해서도 지도감독 미흡을 이유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은행감독원에 통보했다. 감사원 감사결과 쌍용자동차사는 주거래은행의 사전승인없이 송탄시에 있는 비업무용 토지 2만9천9백15㎡에 4채의 연구소건물을 지었으며 공사용 임시 가건물을 축조해이를 불법용도변경하는 방법으로 1만7천1백66㎡의 공장을 불법증설했다는 것이다.
  • 노벨문학상(외언내언)

    일본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다.처음이 아니다.아시아의 「세번째 차례」가 처음도 아닌 일본에게로 돌아갔다.그 소식이 연일 일본의 「콧대꺾기」에 열이 올라 있는 와중에 전해졌다.정직하게 말해서 심사가 난다. 오기대로라면 『그깟 노벨문학상!』그래 버리고싶지만 그러나 그것은 『저 포도는 시다!』와 진배없다.우리에게 노벨문학상 수준의 문학이 없는것은 아니다.그것은 떳떳이 말할수 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수준높은 문학적 역량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없는 것이다.하다못해 스포츠에서 발휘하는 「일본 콧대 꺾기」같은 집념을 문학예술에서 살렸어도 그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국제기구같은데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일이 있다.이런저런 기금이나 재단에 지원금 또는 후원금을 내고 그걸 계기로 사람을 심고,선거가 있으면 자국인이 선출되도록 공을 들이는 일따위를 일본처럼 잘하는 나라가 드물다.그래서 중요한 일이 정해질 때면 많은 군소 회원국들이 일본 눈치를 살핀다. 하다못해 전승 주둔군 대장까지도 녹여서 일본 예찬론자를 만드는 노력도 한다.라이샤워씨라고 하는 일본문학의 이해자가 없었다면 「가와바타」의 노벨문학상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성 이야기」는 미국유수의 대학들이 연극론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작품도 우수하지만 대학에 들여놓은 공이 상당해서 성과도 쉽게 거둔다.그런 것들의 퇴적이 노벨문학상을 두번씩이나 차지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번역문학 기금을 마련하고 수준도 안되는 자기 작품 번역부터 하는 문단사업꾼 작가가 우리에게는 있다.번역분야를 독립된 장르로 육성한다든지 외국에 한국문학 애호가를 세월을 두고 만들어가는 성실함도 우리는 갖지 못해왔다.이제는 그런 것을 겸허하고도 성숙하게 반성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하려고만 들면 못할 것이 없다.「성실성의 결핍」만 극복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 여자농구도 일본 꺾었다/어제 금 10개추가… 48개로 일본과 동률

    ◎축구는 결승 진출 좌절 【히로시마=특별취재단】 한국이 여자농구 여자핸드볼과 유도에서 잇따라 일본을 꺾어 「타도 일본」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은 제12회 아시안게임 12일째인 13일 여자농구가 일본에 1점차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을 비롯해 여자 핸드볼도 일본에 낙승,구기에서만 2개의 금메달을 보탰고 남자 농구도 일본을 큰 점수차로 따돌리고 결승에 올라 「한국 구기 승리의 날」을 구가했다. 유도 여자 61㎏급의 정성숙,남자 78㎏급의 윤동식도 일본의 이모토와 호리코시를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그러나 축구는 준결승전에서 복병 우즈베키스탄에 어이없게 져 결승 진출을 놓쳤다. 한국은 이밖에도 사격·복싱에서 2개씩,사이클과 탁구에서 금메달 1개씩을 따내 이날 하루만 금메달 10개를 획득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좋은 수확을 올려 일본과 똑같은 금메달 48개를 기록했다. 사격에서는 이은철이 남자 소구경소총3자세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우승해 한국의 세번째 2관왕이 됐고 복싱에서는 밴텀급의 염종길과 미들급의 이승배가 금메달을 추가했다. 남자 사이클 40㎞ 포인트 경기에서는 조호성이 44점으로 카자흐스탄의 그라프첸코를 1점차로 따돌리고 이 종목에서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으며 한국선수끼리 맞붙은 탁구 남자 복식에서는 추교성­이철승조가 선배 김택수­유남규조를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한국축구 일본 깼다/3­2/황선홍 2골·유상철 1골 수훈

    ◎한국 금35개… 일본에 1개 뒤져 3위 【히로시마=특별취재단】 한국이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에 이어 축구에서도 일본을 꺾었다. 한국은 제12회 아시안게임 10일째인 11일 이곳 히로시마 현립 스타디움에서 열린 축구 8강전에서 2­2로 맞서 루스타임이 적용되던 후반 46분쯤 얻은 페널티킥을 황선홍이 가볍게 차넣어 일본에 3­2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4강에 올랐다. 이로써 한국은 이번 아시안게임 최대 이벤트로 「한·일의 자존심 싸움」을 벌였던 마라톤과 축구에서 모두 이기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날 한국의 금메달 행진은 다소 주춤했다. 당초 5∼6개의 금메달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은 근대5종 개인전의 김명건(상무)과 여자볼링 마스터스 그랜드의 이지연(부산남구청)이 금메달을 보태는데 그쳤다. 이에따라 한국은 금메달 35개로 이날 금메달 4개를 건진 일본에 금메달 수에서 1개 뒤져 지난 8일부터 지켜온 종합 2위 자리를 3일만에 내주고 3위로 내려 앉았다.
  • 한국,일과 「금」 동률/아시안게임

    ◎사격·배구서 셋 추가… 모두 20개 【히로시마=특별취재단】 한국의 금메달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제12회 아시안게임 6일째인 7일 사격에서 2관왕이 탄생하고 여자배구가 구기종목으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안겼다. 이로써 종합 2위를 다투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20개의 금메달로 치열한 접전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이날 시작된 사격 여자 공기소총에서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여갑순(20·한체대) 이은주(24·국민은행) 오미란(20·화성군청)이 한조를 이루어 단체전을 석권한데 이어 개인전서도 이은주가 금,여갑순이 동메달을 추가했다. 이은주는 여자볼링 김숙영(이화여대)과함께 한국선수로는 두번째 2관왕이 됐다. 또 전날 일본에 극적인 역전승으로 금메달 초읽기에 들어갔던 여자 배구도 대만을 완파하고 5전승으로 아시안게임사상 첫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 태평무/진쇠춤/대신무/가을 무용계 수놓는 전통춤판

    ◎내일부터 이동안옹·정승희씨 공연/이/가무악 익힌 만능예인… 「신선과 학무」 일품/정/화관등 우리춤 원형 복원위한 고증 돋보여 귀족적이고 세련된 태평무,흐드러진 멋의 진쇠춤,영혼을 부르는듯한 대신무,잔재주 없이 담백한 승무 등….우리춤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묵직한 전통춤판이 초가을 무용계를 풍성하게 장식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기능보유자인 운학 이동안옹의 전통무용 대공연(6일 하오4시·7시30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과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인 정승희씨의 우리춤연구2 공연(9,10일 하오7시30분 문예회관 대극장)이 그것.특히 이번 공연은 우리 전통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철저한 문헌고증 작업을 거쳤다는 점에서 무용계 안팎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조선조 재인청(재인조합)의 마지막 도대방이었던 이옹은 경서도창과 재담의 명인인 박춘재로부터 발탈을,줄광대 김관보에게서 줄타기와 전통춤을,명창 조진영으로부터 남도잡가를 배우는 등 가무악을 두루 익힌 만능예인.그의 재인청류 전통무용은 전문적인 재인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던 춤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8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그는 이번 무대를 위해 「신선과 학무」「즉흥무」「신로심불로」등 3편의 전통무를 펼쳐보인다.이 가운데 특히 「신선과 학무」는 신선과 동자,두마리의 학과 선녀가 등장하는 알록달록한 볼거리 위주의 춤으로 극적 요소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조선조 구극 전문극장인 광무대시절 단골로 올려지던 작품으로 한점 흐트러짐 없는 운학의 절제된 춤법도를 그대로 느끼게 한다.또 밀양 북춤의 하보경,진주 검무의 김수악 등 인간문화재들이 특별출연해 이옹과 함께 즉흥무를 펼친다. 정승희씨(49·상명여대 교수)의 우리춤연구2 공연은 한국 전통무용의 뿌리찾기 작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각종 춤사위와 의상,화관,가면 등의 원형을 되살리기 위한 문헌고증 작업이 돋보인다.선보일 작품은 「춘앵전」「태평무」「처용무」「승무」「불교의식무」등.특히 「춘앵전」공연에서는 조선시대 궁중음악이나 무용등을 기록한 책인 「진연의궤」에 따라 당시의 의상을 그대로 되살려낼 예정이어서 우리 궁중무의 복식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듯 싶다.원래 「춘앵전」은 궁중잔치에서 추던 것으로 조선 순조때 효명세자가 봄날 버들가지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에 도취돼 만든 춤.꾀꼬리 빛을 상징하는 노란색 앵삼을 입고 여섯자 길이의 화문석위에서 펼치는 개인독무가 일품이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는 처용설화에 근거를 둔 궁중정재로 신라 헌강왕때 비롯돼 고려정재로 굳어졌으며 조선조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춤이다.한편 이번 공연에서는 궁중정재가 본래 가창과 결합된 형태로 연출되는 것이 통례임을 감안,「춘앵전」「처용무」의 창사를 춤추는 사람이 직접 부르도록 해 의미를 더한다.중견 한국무용가인 정승희교수는 『우리민족 고유의 생활감정이 담긴 전통춤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전제,『우리춤의 본류찾기 작업을 통한 전통무용의 활성화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무악재/고개:하(서울 6백년 만상:61)

    ◎길마재·모래재·추모현으로도 불려/서울 서쪽관문… 이활의 난땐 관·반군격전지/중구사신 맞던 영은문자리에 「독립문」 우뚝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을 잇는 무악재는 왼편에 안산,오른쪽에 인왕산을 끼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고개다. 지금은 여러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고갯길이 35m로 넓혀지고 높이도 훨씬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서울 서쪽 관문의 좁은 길목이었다.명나라 사신 동월은 『천길 이어진 그 기세가 어찌 천군만 누를 수 있으랴.서쪽을 바라보니 좁은 길이 있는데 말 한필 겨우 지나 갈 수 있다』고 당시의 고개를 묘사하고 있다. 서울 시민들에게는 무악재 또는 홍제동고개로 더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길마재·추모현·모래재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길마재는 고개 왼편에 있는 안산의 한자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산의 형상이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또 모래재는 고개가 흙이 아닌 모래로 덮여 있어서이고 추모현은 영조가 명릉(숙종릉)의 역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 고개에서 능을 바라보며 추모했다고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위해 지금 경복궁·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과 인왕산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면서 안산을 무악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류설에는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을 한 부예암(북한산 인수봉)이 밖으로 뛰쳐 나온 형상이므로 이를 어미산 즉 모악』이라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재의 이름이 다양한 만큼이나 이 고개엔 조선왕조의 참담했던 수많은 역사들이 그대로 숨쉬고 있다. 인조 2년(1624)이괄의 난때는 관군과 반군이 맞선 격전지였다. 당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앞장섰던 이괄은 중신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평안병사로 쫓겨가 분을 삭인다.조정에서는 역모의 조짐이 있다고 해서 이괄의 아들을 볼모로 불러들였으며 이괄이 이에 반발,인조 2년 정예병력 1만2천여명을 이끌고 서울에 난입한 변란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백성들이 인왕산과 남산 성벽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 구경을 하는 가운데무악재에 진을 친 금남 정충신등이 이괄이 이끄는 반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승지이면서 내환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이 고개는 또 초입에 버티고 있던 모화관과 영은문이 말해주듯 중국사신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드나들고 조선처녀들이 진상이라는 이름으로 울고 넘던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이 묶던 모화관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독립문 바로 앞에 서있는 영은문을 떠 받치고 있던 두개의 커다란 석주는 오늘날까지 역사의 잔영으로 남아있다. 고종 32년(1895)민족의 수치였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건립되면서 무악재는 민족의 희망이 숨쉬는 고개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고개 밑으로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하고 출퇴근길이면 서울의 보통고개들처럼 차량행렬이 홍수를 이루지만 재를 넘어 이어진 국도1호선은 통일로로 내달린다. 조상들이 중국의 5백년 속박에서 벗어나던날 이곳에 독립문을 세웠듯이 민족의 소망을 담은 통일문이 이 고갯마루를 시작으로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 멸망의 원인(백제를 다시본다:30·끝)

    ◎한강유역 뺏긴뒤 서남부에 고립/의자왕,초기 전승에 자만 실정 거듭/대당외교 실패… 많은 충신 귀향보내/18만 나당연합군 침공때 동원가능 병력은 5천명 부소산성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노라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진다.1천3백년 전 이곳에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3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서기 660년 당의 침략군이 신라와의 사전협약에 따라 서해로부터 금강 하구에 소리없이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뒤 사비도성을 유린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이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란 없다.백제 멸망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역사적 인과관계에서 볼 때 우리들은 많은 멸망원인을 열거할 수 있으나 이를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이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랄까가 매우 좁았다.즉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로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백제가 기대를 건 잠재적인 동맹세력은 고구려였으나,양국은 다만 해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이었다.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것은 한 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하지만 백제는 결코 신라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와의 국경전쟁에서 헛되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내부사정은 차츰 악화되어 갔다.의자왕이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만 해도,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는 인간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성품이었고,국가중흥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왕태자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해동의 증자라는 평까지 듣던 의자왕이었다. ○신라 포위 못벗어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결행한 신라 침공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마침 642년 평양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군국의 대권을 장악했는데,의자왕은 그와 손잡고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백제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신라의 서해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화성군)의 목을 죄는 한편 신라의 낙동간 방면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경북 합천군)을 함락하여 경주를 가까이서 위협했다.이같은 전과는 의자왕의 경탄할 만한 기민성과 결단력에 힙입은 바 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자왕의 인간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전투에 잇따라 승리한 의자왕은 어느 덧 자만심에 빠져 만기를 독재하는 통치스타일로 기울어졌다.사태를 더욱 악화시긴 것은 왕비 은고의 지나친 권력욕이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여 정림사탑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는데,거기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설명하여 『의자왕이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아낙네(왕비)를 너무 믿어 형벌이 오로지 충양한 사람에게 미쳤다』고 했다.양심적인 재상인 성충이 옥사하고 흥수가 귀양을 간 것도 이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또한 해방 직후 부여에서 우연히 탑비가 발견됨으로 해서 그 실재가 확인된 대좌평 사택지적의 정계은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충신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임자 같은 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비 권력욕 지나쳐 무엇보다도 의자왕이 범한 큰 과오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당은 신라측의 끈질긴 한반도 개입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 화평관계를 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의자왕은 이같은 권고를 거듭 묵살했다.652년 이후 백제는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백제를 치기로 한 신라와 당 양국간의 비밀협상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절박한 때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바야흐로 백제 상공에는 잔뜩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었으나,의자왕은 전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서기 660년 여름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은 백제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백일하의 날벼락이었다.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국경선 깊숙이 나타났을 때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사대 5천명이 고작이었다.이 결사대는 사흘동안 황산벌(충남 연산)에서 신라군과 처절하게 싸운 끝에 전원 옥쇄했다.한편 13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금강 동쪽 기슭에 상륙,7월 11일 신라군과 합세했다. 드디어 12일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공격에 나섰다.연합군은 도성 동쪽 20여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의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했다.적군의 강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이에 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왕권을 대행했으나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이윽고 연합군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부소산성을 포위하자 절망에 빠진 지배층과 백성들이 떼지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다.그리하여 부소산성 정상에는 나당 연합군 깃발이 나부끼게 되었다. ○부흥운동 무위로 그러나 백제는 그 뒤 3년간 더 살아 꿈틀거렸다.국왕의 항복결정을 거부한 지방주둔 병력이 왕족 복신의 지휘 아래 총집결하여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다.이들은 한때 사비도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주류성(서천 한산 혹은 부안으로 짐작됨)과 임존성(예산 대흥)이 당시 부흥운동군의 일대 거점이었다. 663년 가을 백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이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3만대군을 보냈다.그러나 왜군은 백강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포착되어 네차례의 접전 끝에 섬멸되고 말았다.당시 불에 탄 왜선 4백척에서 뿜어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중 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왜군 격파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일제 공격으로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백제부흥운동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가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이식되어 그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했다.지난해말 세상에 공개된 금동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화로,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망국의 군주/의자왕 중국 북망산에 묻힌듯/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병사 우리가 고대사에서 만날 수 있는 큰 비극을 꼽자면백제패망을 다룬 AD660년의 기사가 그 하나일 것이다.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옛 이야기와 더불어 아련히 들려오는 사비도성의 황급스러운 말발굽소리는 백제사가 간직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붙잡혀 2만여 백제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 망국의 군주는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당에서 병사한 것으로만 되어있다.이는 의자왕과 휩쓸려 포로가 된 왕자 부여릉(AD615∼682년)이 당에서 남긴 비교적 소상한 활동기록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이 물음에 해답을 던져줄 가능성은 있다.의자왕의 신하로,또 왕자 부여릉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흑치상지(AD630∼689년)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9년에 발굴된 이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왕자 부여융이 주군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또 묘지명은 AD677년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었을 때 흑치상지는 속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다만 41줄 1천6백4글자나 되는 묘지명 새김글씨에 의자왕 기록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는 당나라 왕후장상들의 묘역 북망산을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다.북망산에서는 백제유민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 말고도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유민인 천생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이로 미루어 의자왕의 무덤도 북망산 묘역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백제 최후의 군주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한·중학계의 협력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학계는 북망산 한쪽에 묻혀있을 의자왕 묘지명을 찾아야할 큰 역사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지상군 50만명·함정2백여척·항공기 2천대/미,한반도 유사시 증파

    ◎국방부 국감자료/전쟁억제­전승보장에 충분/신속억제전력은 72시간내 도착/북 화학전대비 집단보호시설 26곳 설치 한반도의 유사시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지상군 50여만명과 함께 함정 2백여척,항공기 2천여대등 엄청난 규모의 전투병력과 장비를 파견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는 27일 민주당의 나병선의원에게 제출한 국회 국정감사자료를 통해 유사시 한반도에 파견되는 미군의 증원전력을 이같이 밝히고 이는 한반도에서 전쟁억제및 전승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규모라고 설명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돌발상황이 전개될때 한반도에 전개되는 미군전력은 전쟁억제를 위해 신속하게 전개되는 신속억제전력(FDO)과 전쟁수행을 위해 전개되는 증원전력(TPFDL)으로 구분된다.이가운데 신속억제전력은 주로 태평양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72시간안에 도착되며 항공기 수백대와 항공모함 전투단,적정규모의 지상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전쟁수행을 위한 증원전력은 개전초기에는 해·공군전력이 주로 전개되고 그 뒤에는 육군및 해병대전력이 전개되는 계획이며 총규모는 지상군 50여만명,함정 2백여척,항공기 2천여대에 이른다. 한편 이 자료는 북한이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는 화학무기등에 대한 대책으로 『집단보호를 위해 핵심시설 26곳에 화생방 집단보호시설을 설치하고 일반 대피시설은 21만5천여곳을 확보했으며 접적지역 주민과 민방위 화생방 분대요원은 개인및 부대장비를 88% 확보했다』고 밝혔다.
  • 구전 아리랑 집대성/정선 등 현지인 노래 녹음… CD출반

    ◎예천·인제·밀양·진도아리랑 등 33곳 수록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는 아리랑이 현지인들에게 구전되는 그대로 녹음되어 4개의 콤팩트디스크에 실렸다. 신나라레코드에서 펴낸 「한반도의 아리랑」은 전국에서 전승되는 것으로 알려진 아리랑가운데 현지 전승되어 녹음이 가능한 대표적인 아리랑 33곡을 담은 것.녹음팀이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동안 강원도 정선을 필두로 울릉도,제주도,중국 연변까지 찾아가 현지전승자에 의한 현지녹음작업으로 이 음반을 완성했다고 한다. 「한반도 아리랑」은 아리랑을 4개 권역으로 분류하고 있다.먼저 동쪽 아리랑으로는 정선 아라리와 정선 엮음아라리,태백 아라리,명주 자진아라리,예천 아리랑,인제 아라리,횡성 어리랑타령,중원 아라성,울릉도 아리랑등 11곡,남쪽 아리랑은 밀양 아리랑과 광복군 아리랑,제주도 아리랑,진도아리랑Ⅱ등 4곡을 담았다.또 서쪽 아리랑은 긴아리와 자진아리,긴아리랑,구조아리랑,본조아리랑,어랑타령,강원도 아리랑,봉화 아리랑,진도 아리랑 Ⅰ등 9곡,북쪽 아리랑은 어랑타령과 얼쑤아리랑,아리랑,강원도아리랑 Ⅰ·Ⅱ,아리랑연곡,새아리랑,기쁨의 아리랑,장백의 아리랑등 8곡이다.북쪽 아리랑은 중국 연변과 목단강 지역에서 현지녹음한 것이다. 이 음반에 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도아리랑을 녹음한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같은 전문 소리꾼도 있지만 그저 자기 고장에서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평생을 살아온 70대 노인이 대부분.이들은 아리랑의 마지막 세대로 이 녹음이 없었다면 많은 아리랑이 곧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릴 운명이었다는 것이 작업에 참여한 오용록 서울대 음대 교수의 설명이다. 이 음반을 펴낸 신나라측은 북한지역 아리랑의 경우 전통적인 것이 거의 소멸되고 창작 아리랑만이 남아있으나 정치적 색채가 짙어 수록을 훗날로 미루었으며 현재 실려있는 것이외에 다른 가치있는 아리랑이 발견되면 증보판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 전 전대통령 「국민께 드리는 말씀」 요약

    ◎“「12·12」는 사회 평온… 쿠데타 아니다” 주장/전 총장측이 먼저 자의적 부대 출동/보안사,내전 막으려 대응병력 동원 90년대도 반이 지나고 몇년 안있어 21세기를 맞이하게 되는 이 시기에 제가 70년대의 「12·12사태」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12·12는 박정희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된 「10·26」사건과 관련해서 용의자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입니다. 범인은 대통령을 제거한뒤 자기계열의 군부세력을 이용해서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정권을 탈취하려 했습니다. 김재규 스스로 털어놓고 확인한 이러한 「3단계 혁명계획」은 10·26의 성격이 내란사건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정씨는 김재규와 동향이며 호형호제하는 친밀한 관계로 김재규의 추천으로 참모총장이 되었고 10·26 당일에는 범행장소인 안가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접해 있는 50m의 지척거리에서 수분에 걸쳐 수십발의 총성이울렸는 데도 평생 총격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그가 대수롭지 않은 오인사격으로 생각했다고 억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건직후 김재규로부터 대통령의 유고사실을 알게 됐으면 육군참모총장 직책을 맡고 있는 정씨로서는 우선 그 엄청난 사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진상과 경위를 알아보는 일이 급선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김재규를 의심하면서도 그와 같은 차를 타고 그가 하자는대로 황급히 현장에서 벗어났습니다. 육군본부로 이동한 뒤에도 군과 휴전선의 이상동향을 알아보고 일단 긴급상황이 없는 것을 확인했으면 곧바로 정상적 조치들을 취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범행현장 별채에서 김재규를 대기하고 있었던 사실과 그 곳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보안을 유지하라는 김재규의 지시대로 대통령권한대행(국무총리)과 상관인 국방부장관에게도 수시간 동안 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김재규의 내란계획이 실패로 판단될 때까지는 사태추이를 살피며 김재규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계엄사령관이 된 뒤에는 『박대통령의 서거는 애석하지만 국가와 국민전체의 불행은 아니다』고 김재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쿠데타를 해서라도 막겠다』고 정치적 저의를 드러냈습니다. 내란사건에 대한 수사는 바로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목적이었습니다. 소장이 대장을 연행했으니 「하극상」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나 이 사건은 수사담당자가 범법용의자를 조사한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범인이 권부의 한 축인 중앙정보부장이었다는 사실,관련용의자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바로 용의자 수사를 위한 영장발부권자(계엄사령관)였다는 사실등 통상적 방법과 순리적 절차에 따라 용의자를 연행·수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밟는 절차에 하자가 있었지 않나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고 사전재가가 나기 전에 정총장을 연행한 것도 시비가 될 수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미리 연행계획을 보고한 바 있고 처음에는 재가가 난뒤에 정총장을 연행할 계획이었습니다.재가에는 국방부장관의 배석이 필요했으나 국방부장관은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로 출두를 지시했음에도 두차례나 도피·잠적함으로써 그 시간 만큼 재가가 늦어진 것입니다. 합수부측이 처음부터 쿠데타 목적으로 전투병력을 출동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정총장을 연행할 때에는 수사관과 수사관을 돕기 위해 합수부에 이미 배속돼 있던 헌병들만 동원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다른 부대가 출동하게 된 것은 국방부장관의 도피잠적으로 군지휘계통에 공백이 생긴 가운데 정총장 계열의 일부 지휘관들이 먼저 군통수체계를 무시한채 자의적으로 부대를 출동시킨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습니다. 정총장측 지휘관들은 합수부와 대통령 경호부대인 30경비단을 향해 포격을 명령했는데 이는 청와대와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총리공관등이 있는 특정지역까지 사정권에 포함시키는 위험천만한 만행이었습니다. 서울 중심가에 미사일 발포까지 명령한 저들의 난동에 대해 보안사령부는 무고한 시민들의 피해를 예방하고 사태가 내전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대응병력을 출동,난동지휘관들을 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김재규의 10·26내란사건 관련 용의자를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충돌사건」일 뿐입니다. 12·12사태 다음날에도 대통령께서는 건재하셨고 헌정질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행정부·국회·사법부나 국민생활에 아무런 변화나 영향이 없었습니다.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러한 사태를 「쿠데타」라고 하거나 「군사반란」이라 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당시 우리의 생각은 순수했고 우리의 판단과 행동은 정당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몇몇 개인의 자의가 아니라 필연적 인과에 따라 굴러가며 10·26이라는 반인륜적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12·12의 결단에 힘입은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승화·장태완씨,전씨측 「석명서」 반박/“계염사령관 불법 체포… 분명한 반란행위”/대통령 경호병력 사전결제없이 교체/정/무단 서울진입 무장병력 진압은 당연/장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은 15일 하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쌍용아파트 자택에서 전전대통령측이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 대해 『반성은커녕 지금까지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 『법정 말고는 어디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내가 가만히 있으면 저들의 뻔뻔한 거짓말을 인정하는 꼴이 돼 말문을 털어놓는다』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전대통령측은 우선 정전총장의 내란방조의혹에 대해 김재규가 육본벙커로 오는 도중 차안에서 박정희전대통령의 시해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따지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그날 하오7시20분쯤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이 와이셔츠차림으로 뛰쳐나오며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다급한 김에 김부장에게 「외부소행이냐 내부소행이냐」를 물었으나 김부장이 「나도 정신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고 해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당시 신군부측은 정전총장이 차안에서 김재규와 앞으로 계엄이 내려질 경우 어떤 부대를 동원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상의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차안에서 김부장이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이 내용에 대해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야 하고 계엄령을 내려야 할 텐데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본 것은 사실이다.일국의 대통령이 돌아가신 비상상황에서 사후수습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보안을 지켜야 하지만 참모총장으로서 동원가능한 부대를 염두에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전전대통령측은 시간을 끌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기회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흉계다.김재규와 육본벙커로 돌아오자마자 전군에 비상을 걸어 북한의 남침에 대비토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또 자체방위력이 없는 육본을 방어하기 위해 9공수에 출동을 명령했다.전방부대는 북한병력의 움직임에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양평에 있던 20사단에 대해 서울로 이동할 준비를 시켰다.장태완수경사령관을 불렀는데 1시간후쯤 육본벙커로 왔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그날밤 11,12시무렵 김비서실장으로부터 범인이 김정보부장이란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해 듣고 김진기헌병감에게 체포토록 명령했다.수사관들을 차출하는등 준비에 1시간가량 걸렸을 것이다.체포한 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신군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김재규와 한통속이었다면 왜 나와 사이가 좋지도 않던 보안사령관에게 수사토록 했겠는가. ­전두환전대통령등 12·12관련자들의 행위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나는 당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수습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계엄사령관이다.전두환의 합수부도 따지고 보면 법에 명시된 기관이 아니라 대통령 시해범 색출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참모총장의 권한중 일부를 위임해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들이 언제 전두환일파에게 참모총장의 공관을 무력으로 점령해 계엄사령관을 체포할 권한을 줬느냐. 그것도 대통령을 경호하고 있던 헌병대병력을 자기들 수하의 부대로 교체하고 사전결재를 9시간이나 미루고 감금상태에서 사후결재를 한 것이 어떻게 합법이냐. 또 12·12사태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장재향군인회장(63·종합11기)도 전전대통령의 석명내용에 대해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면서 『지휘계통 없이 불법적으로 서울시내에 들어온 무장병력은 당연히 진압해야 하며 이 진압행위를 반란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치군인들의 궤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1개분대이상 규모의 무장병력이 서울시내에서 돌아다니려면 24시간이전에 참모총장의 사전승인을 얻어야 하고 반드시 헌병과 함께 다녀야 한다』면서 『수경사령관은 통보가 없는 병력에 대해서는 즉시 연행하거나 포획·사살하도록 임무가 부여돼 있다』고 당시 임무를 설명했다.
  • 미 아이티 침공 “초읽기”/항모2척 연쇄 급파

    ◎백악관/“수일내 군사작전 감행” 【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미항공모함 한척이 13일 아이티해역으로 급파된데 이어 백악관은 아이티군사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아주 가까운 시일내」에 단행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미군주도 다국적군의 아이티침공이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편 클린턴대통령은 15일 하오9시(한국시간 16일 상오10시) TV연설을 통해 아이티침공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할 예정이다. 국방부관리들은 특수정예부대장병들을 실은 항모 아메리카가 이날 버지니아주 노퍽기지를 출발,아이티해역으로 떠났으며 14일중엔 역시 항모 아이젠하워가 증원병력과 헬리콥터 등을 싣고 작전수역으로 떠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두척의 항모에 적재된 장비와 병력에 관해 공식발표하지 않았으나 항모 아메리카엔 제82공정사단과 공격및 수송용 헬기 등이,또 항모 아이젠하워에는 60대의 전투기가 탑재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디 디 마이어스 백악관대변인은 아이티침공작전이 걸프전 당시 「사막의 폭풍」작전에 비해 소규모가 될 것이라면서 의회의 사전승인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은행 거액여신 「총액 한도제」 도입/내년부터

    ◎자본 15%이상 여신합계 일정액 못넘게/동일인 대출한도 15%·지보 30%로 낮춰 내년부터 은행별로 거액 여신 총액한도제가 신설된다.동일인에 대한 대출금과 지급보증의 합계액이 자기자본의 15%를 넘는 여신을 모두 합친 거액 여신의 총액이 자기자본의 일정 배수 이내로 제한된다.배수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5배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일인 여신한도는 대출의 경우 현재 자기자본의 20%에서 15%로,지급보증의 경우 자기자본의 40%에서 30%로 각각 낮아진다.한도 초과분은 97년 말(유예기간 3년)까지 회수해야 한다. 재무부는 9일 (주)한양의 사례처럼 은행의 대출이 한 곳에 너무 많이 몰리지 않도록 거액 여신의 취급을 억제하는 내용의 은행법 개정안을 마련,정기 국회를 거쳐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거액 여신의 총액한도는 앞으로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할 예정인데 유럽 국가의 경우 자기자본의 8배로 돼 있다.국내 은행들의 거액여신 총액은 현재 자기자본의 3∼5배이다. 은행의 증자에 대한 금통위의 사전승인 제도도 폐지한다.은행이 자회사를 설립해 증권·단자·리스·종금 등 여타 금융 업종에 진출하는 기회를 늘려주기 위해 자회사에 대한 출자한도를 현재 자기자본의 10%에서 20%로 높인다. 은행감독원장은 경영의 건전성이 저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 해당 은행에 공시를 요구할 수 있으며,각종 법령을 어긴 임직원에 대한 문책 요구권도 명문화된다.법령을 위반한 금융기관 직원에게는 임원과 마찬가지로 과태료를 물린다.과태료 부과한도는 현행 5백만원에서 1천만원으로 올린다. 현재 은행감독원 규정으로 돼 있어 위법 여부에 대한 시비의 우려가 있는 은행장추천위원회 제도의 근거 규정을 법에 마련한다.유능한 전문 경영인이 임원으로 선임되도록 임원의 자격요건을 신설한다.
  • 유교문화의 영향(백제를 다시본다:26)

    ◎고이왕때 경학사상 바탕 관제 정비/6좌평 16관계는 주례·예기 모델로/4세기엔 경학박사 배출… 일에 파견/성왕땐 태학교육 확충… 졸업생 대부분 관직에 등용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이는 백제불교가 계율불교로 자리잡는데도 유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백제유교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원시유교와도 부딪치지만,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건국 집단과 직결된다.이들 건국집단은 대륙의 선진학술을 수용,경학론이에 입각한 백제유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백제는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의 경학을 받아들였다.한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낭·대방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 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 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은 백제초기인 3세기경 국가제도정비에 우선 나타난다.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는 고이왕(AD 234∼286년)때의 중앙관제 제정이 그것이다.고이왕은 중앙관제를 6좌평 16관계로 제정했는데,이는 「주례」의 육관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공복제도를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그리고 고이왕은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예기」명당편에 나오는 남당은 군주가 신하들과 이야기하고 정사를 말하는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예속에도 영향 유교사상에 의해 국가제도가 정립된 것처럼 일반사회의 예속 또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는 인간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특히 원시유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의사상은 백제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중국의 사서 「주서」백제조는 이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백제는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절을 하는 예는 두손으로 땅을 짚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혼례는 중국 풍속과 거의 같았고,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3년동안 복상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체제를 굳건히 다지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고사상이 깔려있다.국민을 복종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과도 직결된 유교사상은 학술의 발전을 가져왔다.4세기경 백제를 중흥시키는데 공헌한 근초고왕(AD 346∼375년)은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했다.그 사서는 바로 「서기」다.국가 중흥기에 국사로서의 정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동시에 통치차원에서도 필수적인 국가사업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이역전에도 나온다.「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고흥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 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그리고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고흥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근초고왕 재위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이 그 사람이다.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의 추천으로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또 경서에 통탈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왕인,일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고사기」는 왕인의 이름을 화이로,「일본서기」는 왕인으로 적고 있다.화이나 왕인은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있으나,「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처럼 기록했다.30∼40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백제는 AD 475년 날로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핍박속에 웅진(공주)으로 남천하기에 이른다.이어 백제의 중흥대업을 꾀한 성왕(AD 523∼554년)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여러 제도를 정리,개정했다.내관 12부,외관 10부로 구성된 22부나 22첨노제가 그것이다.이들 관제는 10간12지와 오행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의 중앙집권체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에 완비되었다.이와 더불어 성왕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중국에 남량의 제도를 본떠 학교를 확충하고 오경박사를 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강화했다.그래서 성왕 때 들어와서는 전경전사가 비로소 등장하거니와,경학교육을 전담한 종래의태학교육은 신설된 22부의 하나인 사도부가 담당하게된다.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 도 하다.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중국의 군현제와 흡사한 첨노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백제전에 나온다.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전업박사의 존재는 AD 553년(성왕 31년)「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의,역,역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일본서기」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국의 유고/고구려·백제선 교육·통치와 직결/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2백∼3백년 뒤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나라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유교문화를 일찍 수용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교가 부분적으로 처음 들어온 시기는 대략 BC 3세기경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여겨진다.이 시대의 유교는 예의에 입각한 사회정의와 윤리적 정절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시유교다.다시 말하면 중국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와 주대의 인문주의적 예제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고대국가 가운데 맨 먼저 유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다.고구려 유교를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몇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유교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그 하나가 사서의 편찬인데,「유기」와 「신집」을 국가사업으로 찬수했다.그리고 교육제도의 정립은 가장 큰 고구려 유교문화의 소산으로,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태학을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설립한 것이다. 백제는 알려진대로 고구려계가 남하하여 세운 고대국가다.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유교체제의 통치력을 갖추었다.그 뿐이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묘제도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유교의 교사지례를 실천했다.이는 온조왕이 창업 6년만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것과 후대의 왕들이 즉위하는 해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 동남쪽에 외지게 자리잡은 데다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 유교수용시기가 늦다.법흥왕 재위시기인 AD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국사」편찬은 진흥왕 6년(AD 545년),국학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AD 682년)에 설치하는 등 유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3백년 뒤늦은 시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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