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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종면허에도 택시운전 허용/강력범전과자 운전기사 취업 제한

    ◎모범택시 미터요금 반값 임대 가능/교통부,부처혐의후 곧 시행 앞으로 2종운전면허를 가진 사람도 택시영업을 할 수 있으며 살인이나 강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택시운전사자격을 따는데 제한을 둔다. 미터요금만 받던 모범택시도 시간당 고시요금으로 임대할 수 있고 신용카드나 선불카드로도 택시요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한다.운전사의 급여방식으로는 완전월급제가 아닌 성과급식 월급제를 도입한다. 교통부는 11일 택시를 고급 교통수단으로 전환하기 위해 이같은 방안을 마련,관계부처와 협의가 끝나는대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안은 모자라는 택시운전사를 확보할 수 있도록 2종운전면허소지자도 택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하되 3∼5년정도 사고가 없는 사람으로 제한하기로 했다.이를 위해 도로교통법을 개정한다. 택시를 이용한 범죄를 줄이기 위해 강력범전과가 있는 사람이 새로 택시운전을 하려 할때 제한을 둔다.그러나 운전사자격을 완전히 제한할지 일정기간 연수를 거쳐 자격을 줄지는 정하지 않았다. 시간당 요금으로 모범택시를임대할 수 있도록 시·도지사가 미터요금의 절반정도를 시간제요금으로 고시하도록 한다.예컨대 시속 40㎞로 8시간 운행하면 미터요금은 27만9천원이지만 임대할 경우 절반수준인 14만원정도만 내도록 한다.4시간에 7만원,2시간은 3만5천원 등이다. 오는 96년부터 시행될 택시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에 맞춰 월급제를 도입하되 수입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성과급을 주는 성과급식 월급제를 적용한다.택시의 외부광고를 대폭 허용,운전사의 복지개선에 쓰도록 하며 10%인 회사택시의 부가가치세도 개인택시와 같은 2%로 낮춘다. 교통부의 관계자는 『운전사의 자격을 제한하는 문제는 다소 논란이 있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 조창호씨/현역군인가 귀순동포인가/43년만의 생환… 군적 어찌되나

    ◎「포로」인정땐 원계급 회복,「최장수 소위」/단순 탈출… 「민간인」 간주땐 제대자 처리 6·25당시 포병소위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땅에서 살아온 조창호씨(64)가 43년만에 북한을 탈출,생환해옴에 따라 조씨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하고 조치를 취했던 정부의 관련부처들이 조씨에 대한 대우등을 놓고 부심하고 있다. 국방부와 육군은 조씨를 「전사자」로 처리,중위로 1계급을 추서했으며 국립묘지측은 조씨의 위패를 봉안해놓고 있는 상태다.또 국가보훈처는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처리,가족들에게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했었다. 조씨에 대한 처리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부분은 조씨의 군적문제이다.즉,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을 포로생활로 인정하고 지난 43년동안 군적을 유지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제대한 것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이다.이 문제는 조씨가 앞으로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부여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돼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씨는 포로상태가 인정되면 사망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지만 단순한 탈출로 간주되면 앞으로 실제 사망때에는 국립묘지안장이 불가능해진다. 현행 국립묘지령등에 따르면 현역군인등으로 20년이상 근무한 군인연금 수급권자등을 국립묘지안장대상으로 선정하고 있어 조씨는 자칫 생존시에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됐다가도 실제 사망했을 때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군인연금수혜여부는 조씨가 정상적으로 근무하지 않아 매달 연금갹출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금수혜는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와 육군은 따라서 조씨에 대해 북한생활이 포로생활이었는지를 앞으로 조사할 방침이다.이 조사에서 포로로 인정되면 당연히 지난 43년을 현역으로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이 경우 조씨는 전사를 조건으로 1계급특진,중위가 된 만큼 다시 원계급을 회복,「최장 소위근무자」가 된다.그러나 조씨가 북한에서 결혼을 하는등 포로생활에서 벗어난 민간인이며 북한을 탈출한 동포로 단순하게 보면 조씨는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된다.이때 조씨는 전사처리된 51년 9월 자동제대한 것으로 간주된다. 육군에 따르면 조씨는 51년 4월14일 임관,5월 실종돼 4개월후인 9월10일부로 전사처리됐다.병역법과 군인사법등 관련법규에서는 「전투중 행방불명자에 대해서는 2년 경과시 전사처리하고 생환시 전사처리일부로 제대처리한다」고 규정돼있어 조씨는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육군의 한 관계자는 『조씨의 사례가 처음있는 일이라 관련규정이 정비돼 있지 않다』면서 『조씨의 처리결과가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관련법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적문제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조씨의 가족들이 그동안 받았던 국가유공자연금의 환수여부다.국가보훈처는 조씨가 전사처리된데 따라 61년 8월 국가유공자등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조씨를 국가유공자로 등록,조씨의 부모인 조연국씨(사망)와 이곤옥씨(사망)에게 61년 당시에는 한달에 5백원씩을,연금수혜자인 부모가 모두 사망한 82년 8월에는 마지막으로 1만9천9백원을 연금으로 지급했었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가유공자예우등에 관한 법률에서 본인이 거짓말을 하는등 본인의 귀책사유가 없으면 군기록이 변경되더라도 관계없다는 조항이 있어 조씨가 받았던 연금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조씨가 앞으로 정착금등을 받을 수 있을지의 여부도 관심거리다.보사부와 안기부등 관계당국은 조씨에 대해 귀순동포인지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현행 「귀순월남동포보호법」은 북한에서 출생해 귀순한 사람을 대상으로 최저임금의 15∼20배를 정착금으로 지급하도록 돼있어 조씨의 경우는 해석이 다소 다르다는 입장이다. 관계당국은 이에따라 국방부가 조씨를 현역군인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지켜본뒤 조씨에 대한 처우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포병소위 무사귀환 신고합니다”/생환 조창호씨,방문한 이국방에 거수경례 북한을 43년만에 탈출,극적으로 조국의 품에 안긴 조창호씨(64)는 25일 하오3시쯤 이병태 국방장관이 위문을 위해 병실을 방문하자 불편한 오른팔과 다리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크게 군번등을 외치며거수경례,군인정신을 보여줬다. 조씨는 당초 자신이 입원해 있던 서울중앙병원에서 이날 하오2시47분쯤 국군통합병원 5층 VIP실로 이송된 뒤 이장관이 자신을 방문하자 병상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로 『포병소위,군번 212966,국방장관님께 무사히 귀환했음을 신고드립니다』라며 신고한 것. 이어 이장관은 『선배님이 오랫동안 고생하시다가 돌아오시게 된 데 대해 우리국민과 국군이 환영하며 대통령께서 저를 대신 보내셨다』면서 김영삼 대통령명의의 꽃다발을 전했다. 한편 이장관의 조씨 방문에 동행한 군 관계자들은 『조씨가 귀환신고를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콧등이 시큰했다』며 『신고를 하는 조씨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니 조씨가 그토록 고생했어도 군인정신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 조씨 국립묘지에 위패 봉안중/「전사자규정」에 따라 77년 사망처리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삭제」 첫 기록 6·25 참전중 포로로 잡혀 납북됐다 43년만에 탈출한 전 육군소위 조창호씨(64)는 지난 77년이후 전사자로 처리돼 동작동 국립묘지 위패실에 봉안돼 있는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이에따라 조씨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봉안된 사람 중 생존자로 밝혀져 위패를 삭제하게된 최초의 인물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국립묘지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6·25 참전 군인이나 경찰·군무원중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전사자 처리규정」에 따라 실종된지 25년이 지나면 전사자로 처리돼 위패를 봉안하게 되는데 위패가 봉안된 사람중 살아돌아온 경우는 조씨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조씨의 위패는 국립묘지 현충탑 지하에 설치된 위패실 좌측 대리석에 「육군 중위 조창호」라는 명단으로 새겨져있다. 조씨의 위패 카드번호는 47­8­052로 이 카드에는 성명과 함께 육군 중위로 추서된 계급,소속 사단,군번,사망일자,유가족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다. 조씨의 위패카드에는 육군 9사단 소속 육군 중위,군번 211366,사망일자 51년9월10일이라고 적혀 있다. 또 유가족난에는 부친 조영국씨의 성명과 서울 종로구 효자동 165라는 조씨의 당시 주소가 기록돼 있다.
  • 6·25포로 국군장교/43년만에 북한 탈출/당시 포병소위 조창호씨

    ◎목선타고 서해 건너와/연대재학중 자원입대… 중공군에 잡혀/52년탈출실패… 아오지등서 강제노역/중국대련거쳐 조국에… 서울형제 상봉 한국전쟁중 포로가 되어 전사자로 처리된 국군소위가 43년만에 북한에서 탈출,중국을 거쳐 23일 새벽 조국의 품에 안겼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4일 6·25전쟁당시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북한에 끌려간 당시 국군포병대소속 소위 조창호씨(64)가 북한을 탈출,서울에 도착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씨가 중국 대련에서 작은 밀항선을 타고 해상으로 탈출,23일 새벽 1시쯤 군산항 서남쪽 80마일 해상에서 표류하던중 조업지도중이던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고 밝혔다. 구출당시 조씨는 미리 준비한 횃불을 이용해 긴급 피난신호를 보냈으며 구조하러간 수산청직원들에게 『나는 43년만에 북한을 탈출한 전 국군소위』라고 신분을 밝혔다. 조씨는 북한억류중 27년동안 강제노역과 탄광노동으로 인해 심한 진폐증(2기)을 앓고 있는데다 북한탈출후 오랜 항해와 긴장 등으로 탈진상태에 빠져 현재 서울 풍납동 현대중앙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치료을 받고 있다. 병원측은 조씨가 응급을 요하는 위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규폐증과 언어장애,하체 신경마비등 뇌졸중 증세를 보이고 있어 당분간의 안정가료와 정밀검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기부조사결과 조씨는 연희대 문과 1학년 재학중이던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육군본부 직속 101포병대대 관측소위로 참전했으며 이듬해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혀 북한에 억류돼온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는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남쪽으로의 탈출을 노리다 52년 2월 월남을 기도하다 북한공안당국에 적발돼 13년간 교화노동형을 선고받고 강제노역을 했으며 77년7월까지 다시 14년동안 지하 막장에서 광부로 일했다. 조씨는 남쪽으로 탈출하기 위해 2년전부터는 중국땅이 마주보이는 압록강변에서 숨어 지냈다.탈북 D데이인 지난 4일 새벽 2시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선족 동포 이모씨(45)의 도움으로 고기잡이배를 타고 북한초병들의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후 중국 국경에 위치한 달라츠광산(4일)과 청구시(5일),심양시(6일)를 거쳐 7일 상오 대련항까지 달아 나는데 성공했다. 압록강을 넘어온지 17일 만인 20일 새벽 중국 어선을 타고 1차 밀항을 시도했다.그러나 악천후로 실패,대련항으로 되돌아 갔으며 22일 새벽 5시 2차 밀항을 시도,23일 새벽 서해상에서 우리측에 발견돼 귀환에 성공했다. 국내에는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을 역임한 조씨의 누나 조창숙씨 등 형제4명과 이종사촌 형인 전리비아 대사 최필립씨 등 가까운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둘째누나와 남동생등 2명은 미국에 살고 있다. 조씨는 귀순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조창숙씨 등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가족을 만나게 돼 꿈만 같다.죽어서라도 조국땅에 묻히게 돼 여한이 없다.조국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나는 한일이 없어 면목없다』고 감격해 했다. 안기부는 조씨의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구체적인 탈북경위 및 북한생활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 42년만에 치른 소대장 영결식/연천 DMZ서 심창섭소위 유골 발견

    ◎6·25 백마고지전투서 산화… 현장에 묻혀/신분증 등 찾아내 신원확인… 훈장 추서 「군번 120728.이름 심창섭.소속 보병 제9사단 28연대 2대대 5중대.계급 소위」 6·25당시 임관 6개월도 못돼 격전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전사,전우들에 의해 포연이 자욱한 그 자리에 묻힌 심소위의 유골과 유품이 42년만에 발굴돼 17일 현장에서 영결식이 치러졌다.심소위의 유골은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전방 열쇠부대 수색대대 소대장 권오윤소위(25)등 수색대원 10명은 지난 6월15일 연천북부 비무장지대에서 진지보수작업을 위해 땅을 파내려가던중 흩어진 유골을 찾아냈다. 초여름의 더위속에서 땀을 흘리며 삽을 놀리던 대원 이상현상병(22)이 땅에 묻힌 유골과 가죽지갑,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빛바랜 신분증 1개등을 발견한 것. 수색대원들은 이 유골이 전투끝에 산화한 선배장병의 것으로 직감,헌병대에 보고하고 정밀조사에 들어가 유골일체와 「심창섭」이라고 새겨진 플라스틱도장,실탄 10발이 들어 있는 카빈소총을 추가로 찾아냈다. 열쇠부대는 이 유품들을 즉시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지문감식등을 의뢰하는 한편 육군본부 병적과의 참전장교연명부와 국립묘지의 위패봉안자명부등을 통한 신원확인작업에 나섰다. 지문감식에는 실패했지만 참전장교연명부와 국립묘지에서 전사·위패봉안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한달여만인 지난달 중순 신원이 최종확인됐다. 국군문서보관소는 심소위에 대해 「52년5월24일 소위임관,52년10월9일 강원 철원지구에서 두부파편창으로 전사,본가에 봉송」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마고지는 52년10월6일부터 15일까지 열흘동안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혈전이 펼쳐진 격전지.양측 합해 1만3천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 바뀐 것으로 전사에 기록돼 있다. 육군은 당시 23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한 심소위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7일 상오 부대안에서 참전동지·유가족등이 참가한 가운데 영결식을 치르고 심소위에게 1계급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독자로 대가 끊긴 심소위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이날 영결식에 참석한 심재홍씨(47)는『항상 위패만 국립묘지에 봉안돼 있어 안타까웠다』면서 『고인도 이제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 “살아계신줄 알았던 당신이…”/북국적 홍승복씨 국립묘지서 「상봉」

    ◎6·25때 월남,전사한 남편찾아 귀국/중국서 40년거주… 삯바느질로 연명 북한국적의 홍승복할머니(66·중국 요녕성 심양시)가 43년만에 6·25때 전사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중국에서 배편으로 28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홍할머니는 이날 하오 4시쯤 동작동 국립묘지 서편9번묘역에서 남편 현만호씨의 묘비를 확인하는 순간 『살아있을 줄 알았던 당신이 왜 여기 누워있느냐』며 오열했다. 홍할머니가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결혼한지 만 6년만인 지난 51년 1·4후퇴 직후.남편 현씨는 평남 중화군 용현면에서 만삭의 몸이었던 홍할머니에게 『아들을 낳거든 광섭이라고 이름을 지으라』면서 월남,곧바로 국군에 자원했다가 51년 3월17일 경기도 양평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조차 알지못한 홍할머니는 6·25가 끝나고 북한당국이 남편의 월남전력을 문제삼아 사상 감시를 계속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55년 중국으로 밀입국,삯바느질과 공장잡역부생활등으로 심한 고생을 했다.홍할머니는 『중국이 북한탈출자란 이유로 국적을 바꿔주지 않아 현재까지 북한국적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홍할머니가 월남한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90년 4월.고국을 방문했던 아들 광섭씨(45·철도기관사)가 남편의 전우이자 국민학교 동창인 최양근씨(64·국가유공자)에게 남편의 묘지를 찾아달라는 수백통의 편지를 띄운끝에 남편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편 외무부는 홍할머니가 비록 북한국적을 갖고 있지만 6·25 전사자의 아내인 점등을 고려,한국국적으로 인정해 홍할머니가 국내에 영구귀국할 수 있도록 다른 관계기관들과 협의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베트남인 3백만명 희생됐다”/첫 정부보고서

    ◎2백만명 고엽제 “시름” 【하노이 교도 연합】 20여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 군인및 민간인 총 3백만명이 숨졌으며 고엽제등 화학무기로 2백만명이 불구자가 됐다고 베트남 노동부가 21일 보고서에서 밝혔다. 베트남정부가 지난 75년에 끝난 베트남전 사망자의 총 숫자를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트남 노동부와 전상자복지부는 보고서에서 전사자 3백만명중 1백만명은 공산베트남(월맹)측 군인이었으며,2백만명은 남부 베트남(월남)측 군인과 민간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약 4백만명의 민간인과 군인들은 아직도 부상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는 지난 61년부터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국의 고엽제 사용을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라고 비난하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2백만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또 신체적으로 불구자가 되거나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중 약 50만명은 베트남전쟁중 고엽제가 과다하게 살포된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베트남전쟁중 실종미군의 숫자는 밝히지 않았다. 베트남 재향군인단체는 실종 미군이 약 3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전쟁과 반전쟁/이재근(서울광장)

    「제 3의 물결」「권력이동」등의 매혹적인 저서로 잘 알려진 앨빈 토플러는 최근 저서 「전쟁과 반전쟁」에서 전후로부터 탈냉전시대로 이어진 이 시대의 일반적인 「전쟁 불감증」을 강한 어조로 경고한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족들은 서로 증오의 살육전을 벌이고 있고 지구는 황폐화되고 있으며 전쟁이 전쟁을 낳는 또다른 암흑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고 토플러는 지적했다.그는 1945년 「평화」가 마련된 이후 전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과 내전은 1백50여회나 되고 민간인을 제외한 군인만도 7백20여만명이 희생됐다고 적었다.제1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전체 전사자수가 약 8백40만명임에 비추어,놀랍게도 세계는 45년이후에도 세계대전을 다시 한번 치른 셈이 된다는 게 토플러의 분석이다.실제로 45년부터 90년까지의 모두 2천3백40주중에서 지구상에 전쟁이 전혀 없었던 주간은 단 3주에 불과하다.그러므로 45년이후의 그 오랜 기간을 전후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토플러는 말한다.한반도의 현실은 더욱 그러하다. 동서독통일과 남북한통일문제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이 전쟁과 반전쟁의 차이라 할수 있다.남북한통일은 누구에게나 지상명제이겠지만 그 성취과정에는 반전쟁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동서독에는 그것이 없었다.세계전쟁의 끝에서 분단이 됐고 동족전쟁의 미완으로 분단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고 보면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반전쟁은 통일의 기본전제가 되지 않을수 없다.우리에게 있어 언제나 통일과 안보가 표리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수만은 없는 속성을 갖고있다.그것은 어느날 아침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일어날수 있다.그래서 전쟁의 우발성과 파괴적 비인간성을 놓고 트로츠키는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무서운 말이다. 지금 한반도에는 이상하게도 전쟁의 망령이 끊임없이 어른거리고 있다.북한핵,팀스피리트,스커드미사일,패트리어트 배비,판문점,휴전선,전진배치,북의 남침 시나리오,반격 격멸시나리오,서울 불바다론,평양 초토화작전등이 모두 한반도에깊게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들이다. 지난 4월 82회 생일을 맞은 북한주석 김일성은 그무렵 주석궁에 앉아 전쟁과 평화를 얘기했다.『북한에는 핵무기가 없다.물론 제조할 생각도 없다』고 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큰 피해를 입는다.이만큼 해놓고 왜 전쟁을 하는가.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제정신이 아니다』면서 「서울 불바다」운운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명」도 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맞다.그러나 『전쟁은 좋은 것이다.그래서 나는 전쟁을 해야하겠다』고 예고하며 전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전쟁은 그것이 터지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평화」인 것으로 머물며 그 가혹한 살상과 파괴의 발톱을 감추고 있다.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는 「평화주의자」였다.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야심과 환상은 정권을 잡기전 일찍이 옥중에서 기술한 「나의 투쟁」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데도 그는 항상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위장했다.33년 1월 총리에 지명된뒤 의회 시정연설에서 그는 『나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현재의 유럽과 독일은 평화스럽다.제국과 독일사이의 현안들은 모두 평화적인 교섭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들 뿐이다.물론 독일은 유럽 어느 국가에도 전쟁을 유발시킬 사유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고 다짐했다.저돌적인 히틀러의 출현을 지켜보던 유럽인들은 이 한마디에 안심했다.히틀러의 숨겨진 호전성을 간파하여 전쟁위험을 역설하던 영국의 처칠이 오히려 전쟁 모험주의자로 몰려 진짜 평화주의자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전쟁은 터졌고 이제 히틀러는 표변하여 『평화를 떠드는 자가 꼭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지꺼렸다. 서울 불바다 발언이 잘못됐다는 말을 믿고자 하는게 우리 입장이다.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여전히 서울 불바다론의 속내와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그가 평화를 말하니까 더 그렇다.이 단계에서 제정신을 갖고 거듭 지적컨대 모든 전쟁은,한 사람의 광적인 지배야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그리고 지금 한반도의 휴전선 북쪽에는 거금 44년전에 전쟁을 일으켰던 한 사람이 살아있다는사실을 알아야 한다.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말대로 「제정신」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
  • “국가서 6·25 잘못대처”/손배소낸 상이군인 패소(조약돌)

    ○…대법원 민사1부(주심 김주한대법관)는 25일 조모씨(서울 중랑구 면목동)등 상이군인 및 전사자 유가족 12명이 『6·25 전쟁당시 이승만대통령과 신성모국방장관,채병덕육군참모총장의 잘못된 상황대처로 인해 우리들이 부상을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증거부족 등을 이유로 기각.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6·25 발발직전 이대통령이 국제정세와 국내상황을 잘못 판단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신장관과 채총장도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런 사정만으로 민법상의 불법행위 책임이나 국가배상법상의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 조씨등은 92년 『신장관등이 6·25직전인 50년 6월24일 저녁 긴급상황이라는 전황보고가 있었는데도 댄스파티를 개최,군 지휘관들을 만취상태에 이르게 해 전쟁수행능력을 떨어뜨렸고 이대통령은 국방외교를 잘못해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되도록 하는등 당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며 이들의 무책임한 행위로 전쟁이 발발한 만큼 국가가 전·사상자들에게 20여억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
  • 윤화는 줄일수 있는 인재다(박갑천칼럼)

    이색의 「목은집」(목은집:자경잠)에 『힘쓸지어다(면지재)힘쓸지어다.자포자기,이는 어떤 물건인고』하는 구절이 보인다.자강불식 할 것을 채찍질하는 아픔이 전달되어 오는 글이다.『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일 뿐이니 오르고 또 올라서 봉우리에 우뚝 서라는 자기경고이자 자기독려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되는 일은 물론 있다.사람이기에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사람이 제 아니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하는 식은 잘못이다.오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노력 없는 곳에서 열매를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할 것이다.또 노력을 한다 해도 「하는척」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안하는 것에 진배없다.노력이란 최선을 다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세 그것 아니었던가. 지난 연말 우리는 통계청이 발표하는 창피한 통계숫자를 또 한번 대했다.92년의 우리나라 윤화사망률은 10만명에 34.5명으로 세계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망자수가 1만1천5백85명이었으니 「교통전쟁」이라는 방정맞은 말의 아귀를 맞춰 준 셈이기도 하다.이 숫자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는 베트남전에서의 희생자수와 잠시 대비해 봐도 느낄수가 있다.64∼73년의 10년동안 연인원 30여만명이 참전했던 이 싸움에서 우리 국군 전사자는 4천6백87명이었던 것으로 발표되었다(92년 국방부 자료공개).1년 윤화사망자가 그 배를 넘는 것이 아닌가. 가슴쳐야 할 일은 노력하면 줄일수 있는 일로 계속 「기네스북거리」신세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92년의 사고율도 91년(38·2명)이나 90년(39.7명)에 비해서는 줄어들었다는 점이 희망적이기는 하다.줄어들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뜻은 깊으나 그 정도로는 모자라다.운전자가 교통법규를 지키고 보행자가 공중도덕 실천의 시민의식을 보일때 훨씬 더 줄일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교통부가 2000년까지 윤화사망자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나선 「교통생명 5000운동」도 우리의 자동차문화 확립으로써 기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당국의 의욕에 못지않은 국민들의 노력­,즉 준법·질서의식이 뒤따라야 겠다는 뜻이다. 정초 연휴동안 전국에서의 교통사고로 88명이 숨지고 1천9백50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다.기뻐야 할 나들이가 한순간의 실수와 불운으로 해서 슬픔과 절망으로 변해버리지 않았는가.문명화의 대가를 아주 없앨순 없다 치자.그러나 우리의 노력을 모을때 자그만 백병전 규모로 줄일 수는 있다.그길로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세계제일」의 불명예에서 어서어서 벗어나야 겠다.
  • 유엔,정신대보상 심사 착수

    【도쿄 연합】 유엔 인권위원회는 시민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인권협약에 따라 일본 정부가 제출한 인권보고서를 대상으로 27일부터 군대위안부 보상문제등에 관한 심사에 착수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제네바발로 보도했다. 첫날 심사에서는 위안부 보상문제와 함께 일본내 한국인 학생에 대한 교통요금할인 차별등을 논의했으며 대만인출신 전일본군 전사자 보상청구권 문제도 처음 의제로 채택됐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 생명은 하나(외언내언)

    자동차를 비롯,철도·비행기·선박등이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임엔 틀림없다.그러나 이런 이기들도 제대로 이용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흉기로 변한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 수의 급증과 함께 교통사고 발생률이 매년 크게 늘어 문명의 흉기화한지 오래다.자동차가 늘어나는 만큼 도로등 교통시설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데다 자동차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낙후돼있는 탓이다. 교통선진국들은 10여년전부터 범정부적으로 교통사고 줄이기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이들 나라에선 운전면허시험에서부터 전지역에서의 안전벨트 착용의무화,도로별 속도제한,어린이·보행자 안전대책등 획기적인 정책들을 마련,시행해 오고 있는 것이다.영국의 경우 지난 87년부터 「교통사고 3분의1 줄이기운동」을 전개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한햇동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총 26만여건에 1만2천3백76명이 사망하고 32만명이 부상했다.그중 자동차사고만 25만건에 1만1천6백40명이 숨지고 32만5천9백43명이 부상해 자동차 1만대당 사망률이 22.3명이었다. 이는 미국의 9배,일본의 11배,프랑스의 6배에 달하는 높은 수준이다.베트남전쟁에서도 1년간 미군 전사자가 5천명이었다고 하니 과연 「윤화왕국」이란 오명을 얻을만하다. 정부가 「교통생명5천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교통안전시설 확충,운전자 관리강화등 모두 9개분야 30개 과제를 중점적으로 추진,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오는 2000년 이전까지 5천명선으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뿐이다.또 교통사고는 천재지변이 아니다.인재일 따름이다. 모두가 조금씩 주의하고 지킬 것을 지키면 교통사고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교통선진화도 하면 된다고 본다.
  • 배상요구 우려… 모호한「침략」언급/호소카와 「소신연설」무얼 뜻하나

    ◎“침략 전쟁” 발언후 당내·우익 반발 봉착/연내 정치개혁 강조… “새로운 일본” 역설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총리의 23일 국회연설은 과거 침략사에 얽매였던 일본의 전후시대를 청산하고 냉전후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에 적극 참여하는 「국제국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의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과거청산은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과거청산은 미흡 호소카와총리는 과거 침략사를 정리하려는 의지로 『일본의 침략행위와 식민지지배가 많은 사람들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초래한 것에 대해 깊이 사과·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소카와총리의 이날 연설내용은 지난 10일 기자회견때의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으로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표현보다 많이 후퇴한 것이다.그는 「침략전쟁」대신 「침략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쳤다.그는 더욱이 사과에 앞서 『일본의 번영과 평화는 2차대전에서의 귀중한 희생위에 이룩됐다』며 전쟁희생자를 배려했다. ○전쟁희생자 배려 호소카와총리의 이같은 후퇴는 자민당등 일본내 우익세력의 반발및 유가족에 대한 배려와 배상문제로의 발전을 우려한 때문으로 분석된다.호소카와총리가 「침략전쟁」을 인정한후 자민당내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었다. 야스쿠니신사관계 3협의회의 하라다 겐(원전헌)대표는 지난 11일 『전사자의 죽음은 개죽음인가』라며 총리 발언 취소를 요청했다.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낭)자민당정조회장도 『전쟁배상문제 등으로 다른 국가들이 기대감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며 「침략전쟁」발언을 비난했다. 일본정부는 내심 침략전쟁 인정이 아시아국가들의 보상요구로 비화되지 않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일본외무성은 이때문에 총리 발언이 새로운 보상문제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표현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해왔다. ○세심한 표현 요청 하타 쓰토무 외상은 그러나 『전쟁보상문제는 샌프란시스코조약과 각국과의 협정 등을 통해 이미 마무리됐다』며 침략전쟁 사과와 보상문제는 별개임을 강조하고 있다.일본은 북한과 대만을 제외하고는 보상문제가 모두 종결됐다는 입장이다. 호소카와총리는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를 배경으로 침략전쟁 표현을 완화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호소카와총리는 전후처리에 강한 의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연설초안에는 침략이라는 표현 자체가 없었으나 호소카와총리 자신이 이를 추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더욱이 총리소신표명 연설에서 일본의 침략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호소카와총리가 처음이었다. 호소카와총리는 그밖에 ▲연내 정치개혁 ▲정치·관료·재계의 유착구조 타파 ▲생활자·소비자의 이익우선 ▲경기대책 ▲국민이 실속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실질국가」지향 약속등을 통해 연립정권이 과거 자민당정권과는 다르다는 면을 강조하며 일본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역설했다. ○「질실국가」 지향 호소카와총리는 국내적으로는 경제대국에 어울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질실국가」를 지향하고 대외적으로는 세계적인 과제 해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일 총리,「침략」발언 안할듯/23일 국회연설 종전입장 후퇴

    【도쿄=이창순특파원】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일총리는 오는 23일 국회에서 있을 소신표명 연설을 통해 「침략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8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휴양지 가루이자와에서 휴양중인 호소카와 총리가 측근들과의 협의에서 앞서 총리취임 후 가졌던 기자회견에서처럼 2차대전이 일본의 『침략전쟁이었으며 잘못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전했다. 호소카와 총리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기자회견 때와 같은 말을 하면 전사자유족의 감정을 거스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 빗속 19만명 입장 신기록(엑스포 이모저모)

    ◎문 열자마자 인기관 향해 달리기행렬/피지관 식인용포크 관람객 “등골 오싹” ○수백명씩 줄달음 ○…전시관이 문을 여는 상오 9시30분부터 남문·서문·동문등 엑스포장 3개 출입구에서는 인기전시관으로 향하는 청소년들의 달리기행렬로 육상경기장을 방불케할 정도. 주로 10대와 20대들로 구성된 이들은 새벽 6시쯤부터 출입구앞에 나와 있다가 입장이 시작되자마자 3백∼4백명씩 떼를 지어 각 전시관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이같은 때아닌 육상경주는 우주탐험관,한빛탑등 국내 인기전시관들이 개장된지 10분만 지나면 관람객들로 몰려 자칫 상오 관람이 불가능해지자 미리 대기권을 받기 위한 것. ○관람분산책 효과 ○…주말과는 달리 16일 아침부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개막이래 최대 관람객인 19만여명이 몰려들자 조직위는 관람객분산책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기뻐하기도. 12만8천명과 12만5천명으로 집계된 지난 토·일요일과는 달리 이처럼 최대 관람인파를 기록하자 조직위 한관계자는 『주말관람자제 홍보및 단체관람객의 휴일관람통제등이 맞아떨어진 것이 아니냐』며 안도해하기도. ○뾰족한 창에 섬뜩 ○…국제전시구역 남태평양공동관내 피지관에 전시되어있는 식인용포크인 「둘라 니 보콜라」가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공포분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둘라 니 보콜라」는 옛날 피지원주민들이 외지인들이나 부족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이 패배한 부족의 전사자·포로 등을 불에 익혀먹을 때 사용했다는 포크의 일종이다. 현재 피지관에는 길이 30㎝·지름 3㎝의 검은 빛을 띤 추장이 사용한 작은 둘라와 길이40㎝·지름 8㎝의 일반 식인종들이 사용한 큰 둘라가 전시돼 있다. 특히 큰 둘라는 바깥으로 휘어진 4개의 뾰쪽한 창을 갖추고있어 더욱 섬뜩한 느낌. ○…대우 인간과 과학관 초청으로 엑스포장을 구경나온 청주지역 1백5명의 소년소녀가장들은 첨단영상시설을 관람한뒤 대우측이 마련한 푸짐한 선물을 받아들자 매우 즐거워하는 표정.
  • 아르메니아­아제르 영토분쟁 5년(포연속의 코카서스에 가다:중)

    ◎두민족 금세기 4차례 피의 살육전/“카라바흐 독립운동”“침략전쟁” 입장차/「국경선 변경」 걸려 국제적 중재도 허사 아르메니아군의 대공세는 금세기들어 4번째이다.3차 공세때인 1918년에는 수도 바쿠까지 아르메니아군이 진격,1만1천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두 민족간 원한의 뿌리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아제르바이잔측은 이번 공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토확장욕에 의한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이를 구소련시절 잘못된 역사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한 카라바흐주민들의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다.동족인 카라바흐주민들에 대한 무기·경제지원은 시인하되 자기들의 직접개인은 절대 부인한다. 양국분쟁의 진원지인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내에 고도같이 떠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주이다.이들이 고르바초프시절인 지난 88년 개혁분위기를 틈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다수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소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내쫓으면서 두 민족간 유혈충돌이 시작됐고 이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영토전역에서 강제추방과 피의 살육이 자행됐다. 지난 5년간 이렇게해서 생긴 인명피해가 쌍방 합쳐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의 공동묘지들은 전선에서 실려온 전사자들과 민간인 피해자들로 초만원이 됐다. 아르메니아의 직접 개입여부는 향후 카라바흐문제의 평화논의에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국제사회는 지금까지 아르메니아측 주장에 일리가 있다며 아르메니아정부에 아무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았다.유엔결의안도 카라바흐자치군대가 켈바자르를 침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격규모상으론 아르메니아 정규군의 직접 개입없인 불가능하다는게 통설이다.카라바흐자치군의 규모는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3만5천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번 아그담공격 때는 아르메니아군의 T­72탱크 20대와 20대의 장갑차가 동원됐고 지대지 그라드 미사일과 D­80가우비차 미사일이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2개의 탱크여단과 5개의 포병사단으로 구성된 아르메니아군 제2군단병력 6천명이 공세를 주도했다고 아제르바이잔측은 파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군의 배후에는 러시아군까지 개입돼 있다는게 아제르바이잔측의 주장이다.소련방해체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소련군이 완전 철수한 반면 아르메니아영토에는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러시아군 제7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군이 밀리는 이유 가운데는 정규군의 경험·훈련부족도 큰 몫을 차지한다.아르메니아는 지난 88년 독자군을 창설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금년초 겨우 독자군을 창설,그것도 각지구별 지방군대로 이루어져 일사불란한 작전수행이 어렵게 돼있다. 어떤 싸움에서든 쌍방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타협은 힘든 법이다.역설적으로 아그담이 점령된 직후 전전선에서 극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막후모색도 시작됐다. 그러나 양국간에는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를 자국영토내의 한 자치주로 간주,후원국인 아르메니아와의 국가간 협상을 고집하는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협상주체가 카라바흐 자치정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우선 카라바흐를 독립공화국으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바흐의 독립국인정은 넓게 보면 2차대전후 수립된 「국경선의 변경」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말이 날 성질이 아니다.우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양국의회의 승인도 있어야 한다. 국제적인 평화노력도 진행되고는 있다.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주도하는 중재노력이 대표적인 하나다.러시아·미·독·불·이·벨로루시·스웨덴·체코·터키등 「민스크그룹」9개국이 ▲점령지 선철수 ▲즉각휴전 ▲CSCE평화유지군주둔등을 명시한 유엔결의안 822호의 시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군이 힘의 절대우위를 확보한 이상 민스크그룹의 중재안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게 이곳의 분위기이다. 팰릭스 파미코니안 주모스크바 아르메니아대사는 『점령지철수등은 카라바흐정부가 결정해야지 아르메니아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아르메니아정부가 국제적인 중재 대신 카라바흐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 1대1 협상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음을 인정한 것이다.카라바흐는 이미 협상대표까지 선임해 놓고있다.휴전합의도 공식적으로는 카라바흐자치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에 마무리됐다. 아제르바이잔 아사이라다통신의 이라다 사장은 『전쟁와중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로서는 군사적으로 더 이상 밀리면 정권유지 자체가 어렵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일단 협상에 임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아제르바이잔 새정부가 쉽게 카라바흐의 독립을 인정해 아르메니아측에 넘겨주리라고 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6월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잃은 실지회복을 거사의 주명분으로 내세웠다.정권유지를 위해서도 일단 숨을 돌린 다음 재반격 기회를 노릴 것이 분명하다.평화해결의 길은 여전히 요원하게만 보인다.
  • 「잊혀진 전쟁」 기념식/이경형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포토맥강이 내려다 보이는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는 유난히 더 더웠다.27일 상오 10시,아침부터 섭씨 30도를 넘는 폭염속에 19발의 예포가 울려퍼졌다.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한국전쟁 휴전40주년 기념식이 한국참전용사와 한국전쟁 전사자유가족 등 관계인사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먼저 한승수 주미대사와 허셀 고버 미원호부 부장관 등이 『여기 하나님만이 아는 미국의 병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적힌 무명용사묘비에 헌화를 했다.이어 묘역내 노천 원형극장에서 미해군 군악대가 미국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추모식이 이어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고버 부장관이 대독한 특별 메시지를 통해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바친 그들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면서 『오늘 이 자리에 대거 참석한 노병과 희생자 유족들이 바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입증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고버 부장관은 기념사에서 『자유세계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는 이미 한국전쟁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했고 한대사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눈부신 발전은 바로 여러분의 희생위에서 이룩된 것』이라며 『한국민은 결코 6·25를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청기를 착용한 백발의 한 노인은 한국의 가을하늘과 같은 파랑색 바탕에 흰글씨로 이렇게 적힌 티셔츠를 입고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계속 경례를 하고 있었다. 「나는 1950년 11월2일 북한 원산에서 산화한 제8연대소속 나의 동생 프랭크 제임스상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약 1시간 남짓뒤 추모식이 끝나자 노병들과 유족들은 특별히 마련된 한국전 전사자헌화대에 노란 국화 한송이씩을 바쳤다. 이날자 워싱턴 포스트지에는 26일 98세를 일기로 타계한 6·25동란 당시 워커장군에 이어 두번째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매슈 리지웨이장군의 일대기가 크게 실렸다. 휴전 40주년을 맞아 거행된 한국전 전사자추모식은 리지웨이장군의 부음과 함께 미국민들에게 「잊혀진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새삼 돌이키게 했다.
  • 항공기 피아식별 새방치 개발 박차

    ◎미군,“전사자중 15%가 오인공격 희생”/컴퓨터 화면서 아군 움직임 파악 가능 미 육군은 최근 50년간 일어난 전쟁의 전사자중 15%이상이 적군의 공격이 아닌 아군의 오인 공격으로 희생됐다고 분석,이같은 일을 막기위한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미 육군의무감 데이비드 사다대령은 최근 육군작전연구 심포지엄에서 오폭에 의한 전사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데도 대책을 세우지않고 있다며 주의를 촉구했다.또한 생태학을 전공한 군의관인 데이비드대령은 20세기에 일어난 4차례의 큰 전쟁중 전사한 장병들의 사체 부검결과와 중상이장병및 야전 지휘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데이비드대령의 분석결과 버마에서는 14%,태평양에서는 24%,베트남에서는 11%,걸프만에서는 17%가 아군의 공격에 의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국방과학기술의 발달로 탱크는 사정거리가 2㎞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전투기는 20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 하기 때문에 적·아 구분을 할 수 없게 됐다.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이라크등지에서 파괴된 다국적군 전투차량의 77%가 이라크의 공격이 아닌 미국의 브래들리탱크와 M1A1탱크에서 발사된 포와 미사일 공격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육·해·공군·해병대 고위 지휘관들은 현재 군에서 사용중인 원시적인 피아 식별장치에서 민간항공과 지상관제탑에서 사용하는 최신의 피아식별장치를 공동개발,아군끼리의 접전을 최대한도로 막기로 했다. 일명 호출신호라고 명명된 이장치는 민간항공기의 동체밑에 부착되어 외부신호에 자동적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라디오 또는 레이더 송수신기로 전자자력방사선과 레이저와 적외선을 방출하는 장치이다. 이 장치를 개발하면 야전사령관들은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아군의 장비와 장병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수 있게되어 오폭이나 오인 공격을 사전에 막을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비를 개발하는 데는 2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있다. 아무튼 미육군이 아군에 의한 오인 공격에의한 전사율을 인정하고 국방 당국자들이 이를 줄이기 위해 배전의노력을 하기로 한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 캄보디아 23일 총선 불투명/20일 남기고 정국위기 심화

    ◎크메르루주 거부로 실효 상실/중국·베트남 등돌려 “설상가상” 총선거를 20여일 앞둔 캄보디아정국에 또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오는 23일부터 27일까지 실시되는 이번 총선은 13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킨 지난 91년 파리평화협정의 완결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합법적인 신정부를 출범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일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한 이후 심화되고 있는 정치적 불안상황은 총선이 과연 공정하게 치러질수 있는가,또 총선이 무난히 치러진다고 해서 평화가 보장될 것인가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특히 최근 안전상의 이유로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SNC)탈퇴를 선언한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내 베트남계 주민들을 집중적으로 습격하는가 하면 평화유지군을 기습,일본파견군이 사망하는등 부상자와 전사자가 속출,총선불가론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급기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 정부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고 나서자 노르돔 시아누크 SNC의장은 분쟁 당사자 4파간의 긴급회담을 소집제의했다.오는 6일부터 사흘간 열릴 북경회담에서 시아누크 의장은 캄보디아 총선거의 재검토를 포함한 「과도 연합정권 구상」안을 4파 대표들에게 제안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오는 23일의 총선 결과는 사실상 실효성을 잃게되고 우여곡절끝에 마련된 파리평화협정이 사문화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관측통들은 중국과 베트남의 지원없는 캄보디아의 평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해 이들이 적극 나서야 할것으로 보고 있다.즉 현 프놈펜정권을 움직이는 베트남과 크메르 루주의 배후 지원세력인 중국이 캄보디아 평화와 안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총선을 아무리 치러도 캄보디아의 평화는 요원하다는 풀이다.
  • 소설 「무당」펴낸 전라도 무당 정강우씨(저자와의 대화)

    ◎“무속 원형 보존위해 글쓰기 시작”/생업인 무업 팽개치고 전국굿판 순례/군산 무녀통해 무당의 인생·수난 전달/본인이 부른 열림굿 등 테이프로도 제작 그의 이야기는 신명나는 한판 굿거리장단이다.죽어있는 문장과 말의 조합,나열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우리의 소리를 찾기위해 안간힘을 쏟아 붓는 살풀이 한마당이다. 정강우무당은 요즘 굿을 하지 않는다.세상에 굿안하는 무당도 다있나 하겠지만 목하 「무당」(현암사)이라는 제목의 무당이 쓴 무당이야기를 책으로 펴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녜,군산사는 전라도 무당 정강우입니다』라는 걸쭉한 전라도사투리를 오리지널사운드트랙으로 듣는다.9살때 할아버지신이 내려 점치고 굿하면서 살아온 마흔다서햇동안 국민학교졸업장 한장 학력에 번듯한 책이라고는 제대로 읽어 본적도 없다.그런 사람이 웬 책을 지었느냐,의문이 앞서겠지만 본인에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수도꼭지처럼 틀기만 하면 이틀밤낮을 쉼없이 떠들어 댈 수 있는 수 많은 소리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리와 글이 다 같은 이치아닙니까요.군대다닐때 부모님께 편지쓰기가 싫어서 휴가가서 문안드리려고 참았다가 부모님 애간장을 다 녹였어요.글과는 담쌓은 인생이지만 막상 쓰려고 마음먹으니까 한달에 책한권 분량씩의 원고가 쌓이더라고요』 이 정도면 자기가 글 쓰는일에 뛰어든 설명으로 충분하다는게 입심좋고 재기 넘치는 이 무당의 생각이다.사실 그가 무구를 팽개치고 펜을 든데는 더 급한 이유가 있었다.세상무당들이 돈벌이에 매달려 우리의 전통소리인 「굿소리」전승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였다.소리를 제대로 배운 세습무는 차츰 사라지는 반면 강신무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그의 표현처럼 『점치고 사기쳐서 소쿠리에 넘칠만큼 지전을 끌어 모으는 무당이 득실대는』것이 오늘날 우리 무속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소설「무당」은 전3부로 펼쳐진다.현재 제1권이 서점가에 화제를 던지며 매기가 승승장구하는 중이다.일제말기서부터 제3공화국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무당이 받아온 수난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항구도시 군산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순녀라는 무당의 생애를 빗대어 이 땅의 한무당이 살아가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우리 민족문화의 수난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소설「무당」이 뜻한바는 소리꾼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테이프2개에 육성으로 녹음돼 있는 「소리」에 있다.책의 절반가량이 소리로 채워져 있는 이 소설은 차라리 소리다.「소리소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때문 인듯하다.테이프속에는 열림굿,성조풀이,전라도육자배기,사설칠성풀이,사설장자풀이 같은 귀한 소리들이 담겨 있다.지리산 피아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녹음한 이 소리를 듣다보면 무당과 굿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어짐을 느끼게 된다.무당이란 우리 전래문화의 전승자요 굿 또한 전승민요와 다를 바가 없다. 『용한 무당으로 소문이 나고 매스컴도 타면서 한때 돈방석에 앉을뻔 했어요.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토속종교인 무속이 미신으로 버림받는 현실이 참을 수 없었죠.무업에서 손을 놓고 무속의 맥과 원형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떠돌면서넋을 달래는 상여소리,장돌뱅이의 흥타령,남사당패의 소리를 채록하기 시작했습니다.편하게 사는 길을 마다하고 고생을 자청한 셈이지요』 80년대들어 그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졌다.군산용왕굿을 원형대로 복원해 보유자로 지정받았다.대학가를 드나들며 우리것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을 부추겼다.89년에는 지리산 달궁에서 갑오동학혁명전사자와 지리산토벌대,빨치산들의 넋을 기리는 씻김굿판을 벌였다.지금은 황토현문화연구회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무당」제2부를 이제야 탈고했습니다.좀쉬고 3부에 들어가야겠지요.어떻게 끝맺음을 해야할지,그림은 다 그려 놓았어요.한동안 여행이나 다니면서 머리도 식히고 채록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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