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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메니아­아제르 영토분쟁 5년(포연속의 코카서스에 가다:중)

    ◎두민족 금세기 4차례 피의 살육전/“카라바흐 독립운동”“침략전쟁” 입장차/「국경선 변경」 걸려 국제적 중재도 허사 아르메니아군의 대공세는 금세기들어 4번째이다.3차 공세때인 1918년에는 수도 바쿠까지 아르메니아군이 진격,1만1천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두 민족간 원한의 뿌리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아제르바이잔측은 이번 공세도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토확장욕에 의한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이를 구소련시절 잘못된 역사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한 카라바흐주민들의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다.동족인 카라바흐주민들에 대한 무기·경제지원은 시인하되 자기들의 직접개인은 절대 부인한다. 양국분쟁의 진원지인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내에 고도같이 떠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주이다.이들이 고르바초프시절인 지난 88년 개혁분위기를 틈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다수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소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내쫓으면서 두 민족간 유혈충돌이 시작됐고 이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영토전역에서 강제추방과 피의 살육이 자행됐다. 지난 5년간 이렇게해서 생긴 인명피해가 쌍방 합쳐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의 공동묘지들은 전선에서 실려온 전사자들과 민간인 피해자들로 초만원이 됐다. 아르메니아의 직접 개입여부는 향후 카라바흐문제의 평화논의에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국제사회는 지금까지 아르메니아측 주장에 일리가 있다며 아르메니아정부에 아무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았다.유엔결의안도 카라바흐자치군대가 켈바자르를 침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격규모상으론 아르메니아 정규군의 직접 개입없인 불가능하다는게 통설이다.카라바흐자치군의 규모는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3만5천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번 아그담공격 때는 아르메니아군의 T­72탱크 20대와 20대의 장갑차가 동원됐고 지대지 그라드 미사일과 D­80가우비차 미사일이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2개의 탱크여단과 5개의 포병사단으로 구성된 아르메니아군 제2군단병력 6천명이 공세를 주도했다고 아제르바이잔측은 파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군의 배후에는 러시아군까지 개입돼 있다는게 아제르바이잔측의 주장이다.소련방해체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소련군이 완전 철수한 반면 아르메니아영토에는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러시아군 제7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군이 밀리는 이유 가운데는 정규군의 경험·훈련부족도 큰 몫을 차지한다.아르메니아는 지난 88년 독자군을 창설한 반면 아제르바이잔은 금년초 겨우 독자군을 창설,그것도 각지구별 지방군대로 이루어져 일사불란한 작전수행이 어렵게 돼있다. 어떤 싸움에서든 쌍방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한 타협은 힘든 법이다.역설적으로 아그담이 점령된 직후 전전선에서 극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평화협상 재개를 위한 막후모색도 시작됐다. 그러나 양국간에는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아제르바이잔은 카라바흐를 자국영토내의 한 자치주로 간주,후원국인 아르메니아와의 국가간 협상을 고집하는 반면 아르메니아측은 협상주체가 카라바흐 자치정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우선 카라바흐를 독립공화국으로 인정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카라바흐의 독립국인정은 넓게 보면 2차대전후 수립된 「국경선의 변경」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말이 날 성질이 아니다.우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양국의회의 승인도 있어야 한다. 국제적인 평화노력도 진행되고는 있다.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주도하는 중재노력이 대표적인 하나다.러시아·미·독·불·이·벨로루시·스웨덴·체코·터키등 「민스크그룹」9개국이 ▲점령지 선철수 ▲즉각휴전 ▲CSCE평화유지군주둔등을 명시한 유엔결의안 822호의 시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군이 힘의 절대우위를 확보한 이상 민스크그룹의 중재안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게 이곳의 분위기이다. 팰릭스 파미코니안 주모스크바 아르메니아대사는 『점령지철수등은 카라바흐정부가 결정해야지 아르메니아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아르메니아정부가 국제적인 중재 대신 카라바흐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 1대1 협상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음을 인정한 것이다.카라바흐는 이미 협상대표까지 선임해 놓고있다.휴전합의도 공식적으로는 카라바흐자치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간에 마무리됐다. 아제르바이잔 아사이라다통신의 이라다 사장은 『전쟁와중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로서는 군사적으로 더 이상 밀리면 정권유지 자체가 어렵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일단 협상에 임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아제르바이잔 새정부가 쉽게 카라바흐의 독립을 인정해 아르메니아측에 넘겨주리라고 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6월말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아제르바이잔 새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잃은 실지회복을 거사의 주명분으로 내세웠다.정권유지를 위해서도 일단 숨을 돌린 다음 재반격 기회를 노릴 것이 분명하다.평화해결의 길은 여전히 요원하게만 보인다.
  • 「잊혀진 전쟁」 기념식/이경형 워싱턴특파원(오늘의 눈)

    포토맥강이 내려다 보이는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는 유난히 더 더웠다.27일 상오 10시,아침부터 섭씨 30도를 넘는 폭염속에 19발의 예포가 울려퍼졌다.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 한국전쟁 휴전40주년 기념식이 한국참전용사와 한국전쟁 전사자유가족 등 관계인사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먼저 한승수 주미대사와 허셀 고버 미원호부 부장관 등이 『여기 하나님만이 아는 미국의 병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적힌 무명용사묘비에 헌화를 했다.이어 묘역내 노천 원형극장에서 미해군 군악대가 미국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추모식이 이어졌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고버 부장관이 대독한 특별 메시지를 통해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바친 그들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면서 『오늘 이 자리에 대거 참석한 노병과 희생자 유족들이 바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입증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고버 부장관은 기념사에서 『자유세계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는 이미 한국전쟁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했고 한대사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눈부신 발전은 바로 여러분의 희생위에서 이룩된 것』이라며 『한국민은 결코 6·25를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청기를 착용한 백발의 한 노인은 한국의 가을하늘과 같은 파랑색 바탕에 흰글씨로 이렇게 적힌 티셔츠를 입고 애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계속 경례를 하고 있었다. 「나는 1950년 11월2일 북한 원산에서 산화한 제8연대소속 나의 동생 프랭크 제임스상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약 1시간 남짓뒤 추모식이 끝나자 노병들과 유족들은 특별히 마련된 한국전 전사자헌화대에 노란 국화 한송이씩을 바쳤다. 이날자 워싱턴 포스트지에는 26일 98세를 일기로 타계한 6·25동란 당시 워커장군에 이어 두번째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매슈 리지웨이장군의 일대기가 크게 실렸다. 휴전 40주년을 맞아 거행된 한국전 전사자추모식은 리지웨이장군의 부음과 함께 미국민들에게 「잊혀진 전쟁」에 대한 기억을 새삼 돌이키게 했다.
  • 항공기 피아식별 새방치 개발 박차

    ◎미군,“전사자중 15%가 오인공격 희생”/컴퓨터 화면서 아군 움직임 파악 가능 미 육군은 최근 50년간 일어난 전쟁의 전사자중 15%이상이 적군의 공격이 아닌 아군의 오인 공격으로 희생됐다고 분석,이같은 일을 막기위한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다. 미 육군의무감 데이비드 사다대령은 최근 육군작전연구 심포지엄에서 오폭에 의한 전사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데도 대책을 세우지않고 있다며 주의를 촉구했다.또한 생태학을 전공한 군의관인 데이비드대령은 20세기에 일어난 4차례의 큰 전쟁중 전사한 장병들의 사체 부검결과와 중상이장병및 야전 지휘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데이비드대령의 분석결과 버마에서는 14%,태평양에서는 24%,베트남에서는 11%,걸프만에서는 17%가 아군의 공격에 의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국방과학기술의 발달로 탱크는 사정거리가 2㎞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전투기는 20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 하기 때문에 적·아 구분을 할 수 없게 됐다.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이라크등지에서 파괴된 다국적군 전투차량의 77%가 이라크의 공격이 아닌 미국의 브래들리탱크와 M1A1탱크에서 발사된 포와 미사일 공격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육·해·공군·해병대 고위 지휘관들은 현재 군에서 사용중인 원시적인 피아 식별장치에서 민간항공과 지상관제탑에서 사용하는 최신의 피아식별장치를 공동개발,아군끼리의 접전을 최대한도로 막기로 했다. 일명 호출신호라고 명명된 이장치는 민간항공기의 동체밑에 부착되어 외부신호에 자동적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라디오 또는 레이더 송수신기로 전자자력방사선과 레이저와 적외선을 방출하는 장치이다. 이 장치를 개발하면 야전사령관들은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아군의 장비와 장병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수 있게되어 오폭이나 오인 공격을 사전에 막을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비를 개발하는 데는 2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있다. 아무튼 미육군이 아군에 의한 오인 공격에의한 전사율을 인정하고 국방 당국자들이 이를 줄이기 위해 배전의노력을 하기로 한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 캄보디아 23일 총선 불투명/20일 남기고 정국위기 심화

    ◎크메르루주 거부로 실효 상실/중국·베트남 등돌려 “설상가상” 총선거를 20여일 앞둔 캄보디아정국에 또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오는 23일부터 27일까지 실시되는 이번 총선은 13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킨 지난 91년 파리평화협정의 완결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합법적인 신정부를 출범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7일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한 이후 심화되고 있는 정치적 불안상황은 총선이 과연 공정하게 치러질수 있는가,또 총선이 무난히 치러진다고 해서 평화가 보장될 것인가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특히 최근 안전상의 이유로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SNC)탈퇴를 선언한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내 베트남계 주민들을 집중적으로 습격하는가 하면 평화유지군을 기습,일본파견군이 사망하는등 부상자와 전사자가 속출,총선불가론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급기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 정부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고 나서자 노르돔 시아누크 SNC의장은 분쟁 당사자 4파간의 긴급회담을 소집제의했다.오는 6일부터 사흘간 열릴 북경회담에서 시아누크 의장은 캄보디아 총선거의 재검토를 포함한 「과도 연합정권 구상」안을 4파 대표들에게 제안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제안이 성사될 경우 오는 23일의 총선 결과는 사실상 실효성을 잃게되고 우여곡절끝에 마련된 파리평화협정이 사문화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관측통들은 중국과 베트남의 지원없는 캄보디아의 평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해 이들이 적극 나서야 할것으로 보고 있다.즉 현 프놈펜정권을 움직이는 베트남과 크메르 루주의 배후 지원세력인 중국이 캄보디아 평화와 안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총선을 아무리 치러도 캄보디아의 평화는 요원하다는 풀이다.
  • 소설 「무당」펴낸 전라도 무당 정강우씨(저자와의 대화)

    ◎“무속 원형 보존위해 글쓰기 시작”/생업인 무업 팽개치고 전국굿판 순례/군산 무녀통해 무당의 인생·수난 전달/본인이 부른 열림굿 등 테이프로도 제작 그의 이야기는 신명나는 한판 굿거리장단이다.죽어있는 문장과 말의 조합,나열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우리의 소리를 찾기위해 안간힘을 쏟아 붓는 살풀이 한마당이다. 정강우무당은 요즘 굿을 하지 않는다.세상에 굿안하는 무당도 다있나 하겠지만 목하 「무당」(현암사)이라는 제목의 무당이 쓴 무당이야기를 책으로 펴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녜,군산사는 전라도 무당 정강우입니다』라는 걸쭉한 전라도사투리를 오리지널사운드트랙으로 듣는다.9살때 할아버지신이 내려 점치고 굿하면서 살아온 마흔다서햇동안 국민학교졸업장 한장 학력에 번듯한 책이라고는 제대로 읽어 본적도 없다.그런 사람이 웬 책을 지었느냐,의문이 앞서겠지만 본인에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수도꼭지처럼 틀기만 하면 이틀밤낮을 쉼없이 떠들어 댈 수 있는 수 많은 소리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리와 글이 다 같은 이치아닙니까요.군대다닐때 부모님께 편지쓰기가 싫어서 휴가가서 문안드리려고 참았다가 부모님 애간장을 다 녹였어요.글과는 담쌓은 인생이지만 막상 쓰려고 마음먹으니까 한달에 책한권 분량씩의 원고가 쌓이더라고요』 이 정도면 자기가 글 쓰는일에 뛰어든 설명으로 충분하다는게 입심좋고 재기 넘치는 이 무당의 생각이다.사실 그가 무구를 팽개치고 펜을 든데는 더 급한 이유가 있었다.세상무당들이 돈벌이에 매달려 우리의 전통소리인 「굿소리」전승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서였다.소리를 제대로 배운 세습무는 차츰 사라지는 반면 강신무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그의 표현처럼 『점치고 사기쳐서 소쿠리에 넘칠만큼 지전을 끌어 모으는 무당이 득실대는』것이 오늘날 우리 무속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소설「무당」은 전3부로 펼쳐진다.현재 제1권이 서점가에 화제를 던지며 매기가 승승장구하는 중이다.일제말기서부터 제3공화국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무당이 받아온 수난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항구도시 군산을 무대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순녀라는 무당의 생애를 빗대어 이 땅의 한무당이 살아가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우리 민족문화의 수난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소설「무당」이 뜻한바는 소리꾼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테이프2개에 육성으로 녹음돼 있는 「소리」에 있다.책의 절반가량이 소리로 채워져 있는 이 소설은 차라리 소리다.「소리소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때문 인듯하다.테이프속에는 열림굿,성조풀이,전라도육자배기,사설칠성풀이,사설장자풀이 같은 귀한 소리들이 담겨 있다.지리산 피아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녹음한 이 소리를 듣다보면 무당과 굿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어짐을 느끼게 된다.무당이란 우리 전래문화의 전승자요 굿 또한 전승민요와 다를 바가 없다. 『용한 무당으로 소문이 나고 매스컴도 타면서 한때 돈방석에 앉을뻔 했어요.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토속종교인 무속이 미신으로 버림받는 현실이 참을 수 없었죠.무업에서 손을 놓고 무속의 맥과 원형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떠돌면서넋을 달래는 상여소리,장돌뱅이의 흥타령,남사당패의 소리를 채록하기 시작했습니다.편하게 사는 길을 마다하고 고생을 자청한 셈이지요』 80년대들어 그의 노력이 세상에 알려졌다.군산용왕굿을 원형대로 복원해 보유자로 지정받았다.대학가를 드나들며 우리것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을 부추겼다.89년에는 지리산 달궁에서 갑오동학혁명전사자와 지리산토벌대,빨치산들의 넋을 기리는 씻김굿판을 벌였다.지금은 황토현문화연구회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무당」제2부를 이제야 탈고했습니다.좀쉬고 3부에 들어가야겠지요.어떻게 끝맺음을 해야할지,그림은 다 그려 놓았어요.한동안 여행이나 다니면서 머리도 식히고 채록작업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에요』
  • 승리의 환희/생사의 스릴/서바이벌 게임 새 레포츠 부상

    ◎미국에서 개발된 성인 전쟁놀이/야산 등서 모의총기·착색탄 사용/최근 레저업체 통해 확산… 판단력·협동심 등 길러 남들보다 기민하고 능동적이어야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이 인기있는 레포츠로 부상하고 있다.지난 8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된 뒤 대학 동호인서클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던 서바이벌게임은 최근 레저업체 동화엔담(723­8811)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행사를 벌이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게됐다.일반인의 호기심을 끌자 코니언(723­7236),에어로스츠라인(549­9113)등 많은 레저업체들이 주말마다 참가자를 모집하기에 이르른 것. 서바이벌게임은 한마디로 레포츠화된 성인 전쟁놀이다.이 게임은 많은 일반시민들이 2차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갖고있는 미국에서 근접대치 전투의 긴박한 상황을 평화시 여가시간 활용의 효과적인 소재로 채용하면서 비롯됐다.호전적인 냄새 대신에 현재 유행하는 레포츠에서는 드물게 인간의 유희적 본능을 자발적으로 일깨우는 요소를 지니고있다.숲이 우거진 야산에서 모의총기를 이용해 모의전투를 하다보면 뛰고 오르고 포복하고 하는데서 운동효과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일상생활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가신다.또 소속 팀의 승리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판단력,추리력 및 협동심이 길러진다. 재현되는 전투장의 규모가 일반의 상상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워 게임」이 성행하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국내 서바이벌게임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있으나 규격화된 성인 전쟁놀이의 기본틀은 갖춰졌다.신체를 사용하는 백병전이 전적으로 금지된 가운데 오로지 모의총기와 모의총탄으로 생사를 가린다.군용총기를 실물크기로 본뜬 데 지나지 않는 에어나 가스용총기와 작은 콩알 크기(지름6㎜)의 플라스틱구슬인 탄알은 부상의 위험이 하나도 없지만 참가자는 게임 내내 안구보호용 고글을 착용해야 한다. 특히 명중 여부가 가려지도록 페인트용액이 든 착색탄을 사용해 「페인트볼 게임」이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착색탄을 맞으면 옷에 페인트가 칠해져 「전사」하지만 서바이벌게임은 생사를 다투면서도 참가자의 양심을 기본으로 한다.즉 모든 신체부위와장비에 탄알을 맞은 즉시 「맞았다」「죽었다」라고 소리친 후 팀 식별띠를 풀어 두손과 총을 머리에 높이 들고 「전사자」장소인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것이다.경기중 고글을 벗으면 퇴장조치되며 3m 내에서는 사격이 금지돼 「손들어」라는 말로 사격을 대신한다.포로 규정이 없을 경우 상대방은 전사 처리된다. 게임의 종류에는 전멸전·깃발탈취전·전투도열방식·릴레이게임 등이 있다.팀을 짠 뒤 상대편을 먼저 전멸시키는 쪽이 승리하는 전멸전에서는 리더가 전투를 지휘하는 가운데 상대팀원을 제거한다.보통 30분으로 시간이 제한되며 전멸되지 않을 경우에는 생존자수로 판정한다.깃발탈취전은 상대편의 진지에 쳐들어가 깃발을 빼앗아 무사히 자기 진지까지 가지고가야 이긴다.깃발탈취 이전에 상대팀을 전멸시킬 수도 있다.전투 도열 방식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게임이다.자신을 제외한 전원이 적이며 마지막 일인만이 승자가 되는 문자그대로 서바이벌(생존)전투이다.전투를 하면서 필드 곳곳에 설치된 체크포인트를 먼저 돈 팀이 이기는 릴레이게임도 있다.
  • 곡 조경한옹(외언내언)

    백강 조경한옹.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증 마지막 생존자였다.그가 7일 영면했다.1900년생이니 93세.천수를 누렸다고 하겠다. 이렇게 장수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하는 동안 흉악한 적탄이 그를 「피해 갔기」때문이다.「백강 회고록」속에서 『…노획한 전리품의 풍성함과 전멸 당한 적군의 엄청난 수에 있어 나라 망한후 항일전사상 가장 큰 기록』이라고 자평하는 것이 왕청현 대전자대첩.그런데 이 싸움에서 『기이하고 다행한 일은 아군측에 1인의 전사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그의 바지 저고리를 뚫고간 총알은 세군데.그렇건만 사람은 안다쳤다.그는 광복후 그 전투복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6·25때 없어졌다.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네살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문재가 빛났던 듯하다.여섯살 때 촌숙에서 한자 석자씩 모아 한 구절을 만드는 시를 지은 것이 회고록에 적혀 있다.­운기산 하처거 풍동수 하처래 거래자 개자연(구름은 산에서 일어나 어디로 가며 바람은 나무를 흔드니 어디서 왔느냐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14살때 친구한테서 양계초의 「음빙실전집」을 빌려 읽고부터 사상 변화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평생을 애국·우국 일념으로 고고하게 살아온 지사.그의 회고록을 읽느라면 고개가 수그러진다.그는 재작년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기자를 만나 세상을 걱정한다.돈과 권력만 생각하는 세상 풍조를.『정치인들이 권모술수만 부리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게 마련이지요』『더 늦기 전에 인륜을 바로잡아야 해요』.평소 입만 열면 민주정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백강옹.여러해 전 병석에 누워 위독했을 때는 『포용하고 조화하라』고 거푸거푸 되뇌었다.이악스러워지면서 배타로 흐르는 세속을 안타까워함이었으리라. 여섯살 어린 나이로 읊었던 『가고 오는 것이 모두 자연이어라』는 시구 그대로 그 또한 자연으로 돌아 간다.하지만 나라와 겨레 위해 살아 왔던 생애의 빛은 이승에 남아 영원히 귀감으로 되는 것이리라.명복을 빈다.
  • 미·영·불등 참전국,대규모 기념행사/6·25발발 42주년 맞아

    ◎“평화수호 기리자” 박물관 견학·참전비 기공/유엔·비·가·그리스등서도 잇따라 추모집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42주년이 된다.미국 캐나다등 당시 참전국들은 이달들어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바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각종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 행사들은 특히 최근들어 중국과 구소련등에서 북한의 남침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열리고 있어 한국전 참전용사들뿐만 아니라 전후세대들에게도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각국별로 치러지고 있는 기념행사를 간추려 본다. 유엔은 동부지역 한국전 참전 용사회주관으로 25일 기념식을 베터리 공원에서 가진다. 미국에서는 지난 13일 참전용사 초청 리셉션과 한국전쟁영화 상영회가 있었다.14일에는 한국전 참전기념비 기공식을 부시 미대통령,체니 국방장관,콜린 파월 합참의장,현홍주 주미 한국대사등 한미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이 기공식에서 노태우대통령은 현대사가 대신한 인사말을 통해 『미병사들이 보여준 숭고한 희생은 한미양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격려했다. 월남전 참전용사 기념비 맞은편에 세워질 이 기념비는 한국정전 41주년이 되는 오는 94년 7월 27일 준공될 예정이다.그리고 25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재향군인회 서부지부(회장 조인하)주최로 기념식과 참전교포 위문활동도 가진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에서도 25일 참전용사들과 교민등이 기념비 참배및 헌화등을 한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오는 10월 참전용사와 그가족,그리고 유럽각국의 참전용사회가 모이는 최대규모의 추모및 재회행사가 열릴 예정이다.이밖에 26일 주한 필리핀 대사관에서는 6·25기념 티 셔츠를 나눠준다. 벨기에는 26일 한국전 참전전통 인수부대인 제3공수대대에서 한국의 날 기념행사를 가지고 한국박물관등을 견학한다.28일에는 캐나다 호주 터키에서 기념행사와 참전용사 재상봉및 전사자 추도회를 가진다.그리스에서는 30일 주한 그리스 대사관주관으로 참전용사 위로 리셉션및 무명용사비 헌화식을 거행했다.
  • 6·25관련 구소 극비문건 공개/러시아 군사연 코로트코프박사

    ◎「남침 D­데이」 김일성이 선택했다/“인민군 서울 진격” 소대사 본국 급전/미군 인천상륙하자 김일성 “나는 실패했다” 당황/스탈린 수습책임 중국에 떠넘기며 김에 등돌려 다음은 러시아 국방부직속 군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가브릴 코로트코프박사가 비밀문건을 중심으로 밝혀낸 한국전쟁과 북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집권과정등에 관한 내용의 요약이다. ▷한국전쟁 관련◁ 한국전쟁이 어느 편에 의해 발발됐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모스크바와 평양이 「해방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다만 시기에 관해서는 김일성이 6월25일 단추를 눌렀을 뿐이다.당시 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가 개전 당일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전문에는『조선인민군이 강을 습격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평양은 아주 조용한 분위기이며 사람들은 누구도 전쟁개시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씌어 있다. ○평양시민도 몰라 또 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작전계획 초안」에는 『6월25일,○○탱크연대는 ○○도시로 향한다.○○보병사단은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식으로 연대급 이상 부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으며 이밖에 「서울점령 초안」도 포함돼 있다. 전쟁이 초기 승세에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김일성은 크게 당황했다.당시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전문에는 『김일성이 쇼크를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그의 군대지휘와 국가지도는 엉망이 되고 있다.김은 지하사령부에서 본인에게 「나는 실패했다.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나는 또다시 빨치산투쟁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것같다.(미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서)상황이 긴박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부탁해 나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돼있다. ○“김일성 무능” 불만 스탈린은 10월 전쟁이 실패했음을 느끼자 수습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기 시작함과 동시에 초기에는 매우 빈번히 김과 전문을 주고 받았으나 이때부터는 김에게 아무런 답신도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실망감을 표시했다. 당시 스탈린측근으로 총참모부 작전부장이었던 스테멘코 장군은 후일 본인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이 『김은 아주 무능한 장군이다.그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대체인물이 없으니 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또한 본인이 극동군총사령관 말리노프스키원수 휘하에서 한국전 정보담당 장교로 재직시 그는 김일성을 한번도 이름으로 호칭하는 법이 없이 오직 「모자를 쓴 대위」라는 별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다.군대지식도 적고 전쟁도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한국과 관련된 소련군◁ 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부터 53년 종전까지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은 군인은 모두 약 1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훈장을 받았거나 전사자·부상자 및 유가족들은 2차대전 심지어는 최근의 아프간전쟁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소련당국(지금은 러시아정부)이 한국전 개입사실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본인 역시 한국전쟁과 관련해 적성훈장을 받았다.그러나 훈장증서에는이상하게도 「조선전쟁에서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으므로 이 훈장을 수여함」으로만 돼 있고 구체적인 공적사항은 전혀 없다.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 김일성이 붉은 군대에 정식 입대한 것은 1942년 7월17일이었다.이같은 사실은 45년 8월30일 그가 적기훈장을 수여받은 훈장증서에서 명백히 나타나 있다.김이 훈장을 받게 된 공적사항으로는 항일빨치산투쟁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돼 있다.그러나 이에 앞서 김이 소련군 대위로 진급시 승진 상신서에는 「진지첸(김일성)을 만주에서 빨치산대장으로 활동하도록 파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이는 김일성이 북한당국의 공식 선전에서 처럼 스스로 빨치산부대를 편성,지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극동군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군이 항일 명령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북한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의 인물평가서에는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수차 걸쳐 사령부로 부터 표창 ▲42년 입대,현재 대대장등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는데 입대 전에 이미 소련군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수차 받은 사실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이지도자로선택된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때 김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다. 두 장군은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자후보 분석 이에앞서 모스크바에서는 북한의 새 지도자감으로 많은 후보들이 심도있게 분석,평가되었다. 주로 장시우,박동홍 등 코민테른그룹과 박헌영,김두봉 등 자생적 공산주의자,김일성등 만주그룹,그리고 조만식선생등 비공산 민족주의자들이 대상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들이 군대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스탈린은 결국 그의 구미에 딱맞는 인물을 물색한 결과 김일성이 돌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하여 지도자로 선택을 받은 김은 45년 10월2일 부터 「진지첸」이란 이름을 버렸으며 8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소련함정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당시 원산시 소련 군정책임자인 크루지코프 대좌가 영접했는데 그는 후일 본인과의 면담에서 김일성 영접은 평양의 스티코프 대장의 긴급명령으로 행해졌다고 말했다.
  • 불법횡포 택시의 단속(사설)

    누구나 알고 또 겪고 있는 서울의 무법횡포택시양상에 두가지 정책이 다시 한번 강조됐다.하나는 11일 차관회의의 결정.서울택시의 불법행위가 무정부,비상사태의 수준이다라고 진단하고 악질운전사구속수사의 원칙을 세웠다.또 하나는 12일 서울시의 좀더 세분화된 후속조치내용.택시운전자격제가 실시되는 6월부터 불법의 경우 사업자운행정지및 운전사자격정지를 동시에 10일간씩 적용하고,차를 세워놓고 호객하는 행위에까지도 각5일씩 정지를 시키겠다는 강경책이 마련됐다. 우리는 물론 이 강경책을 지지한다.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택시이고,이 때문에 서울오기를 아예 꺼리고 있다는 공공연한 현실에 대해서만 심각하기 때문이 아니라,근자에는 멀쩡한 대낮 한가한 시간대마저 보통시민 택시타기가 무서워진 상태에 대해,이를 아직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국기의 체면문제로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차 지적해온 바이지만 불법영업적발시 사업자만을 처벌토록 한 현행제도의 모순은 운전사의 횡포를 오히려 조장하는 역할까지 했던것이다. 하지만 단속철저와 엄벌주의가 실시된다 해도 그 실효가 과연 어느정도 될것인가는 또 따로 봐야 한다.지난해 서울택시의 61%가 승차거부나 합승등 불법행위로 적발됐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이를 대수로 보면 3만6천대를 넘는다.결국 적발이나 처벌이라는 것이 현상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가 아닐수도 있다.보다 구조적개선의 여지가 더 큰 것이다.무엇보다 택시경영의 능력이 택시회사들에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그동안 택시회사는 택시의 사회적 기능을 도외시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돼 왔다. 택시회사는 승객을 안전하게 수송할 책임을 공적으로 지고 사업구역의 수송수요에 대응하는 공급수송력까지를 가져야 한다.이러기위해 이에 적정한 일정규모이상의 차량·자본금·차고지들을 갖춰야 마땅하다.한 연구에 의하면 이 일정규모의 차량수는 현재 70대쯤 돼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택시회사들은 현행 운송면허조건들마저 악용해 왔다.지입제나 도급제로 변형하여 외형적으로는 회사체제지만 거의 무책임한 개인들의 집합체로 만들어 왔다.이 역시 단속대상이 되기는 했다.지난 91년만 해도 현 2백72개회사중 32개의 택시회사가 지입제운영으로 적발됐다.면허취소처분도 당했다.그렇다고 적발되지 않은 회사들은 충분히 택시의 공기능을 책임질 수 있다는것을 뜻하지는 않는다.오히려 이중 1백여회사가 경영난이라고 알려져 있다.이 불법횡포로도 경영난이라면 택시제도의 근본적 개선책을 따질 수밖엔 없다. 택시제도에는 지금 여전히 소형택시와 중형택시가 있다.그리고 교통현장에서는 누구의 원칙변경도 없이 소형택시는 종적을 감췄다.이것만 해도 택시요금은 오른것이다.이에 더하여 중형택시의 요금은 거의 자의적이다.이 자의성이 외국인들에게는 더 극심하게 쓰여지는 셈이다.따라서 단속규정엄격화만이 아니라 요금체제의 적정성도 찾아는 내야한다. 우선 급한것은 준대중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성립이다.지금엔 이 기능자체가 없어진것과 같다.답답한 현실이다.
  • 탈냉전시대와 한국인(특별기고)

    ◎“이젠 미래에 눈을 돌리자”/21C엔 경제·기술 강국만이 살수 있다 아프리카의 제3세계 지역국가들을 여행해 보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에 어깨가 우쭐해지며 구제받지 못할 국가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지난날 우리의 삶과 비교하면 오늘날 한국은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한두집 건너 자가용이 즐비하며 1인당 국민소득은 6천달러인데 생활은 2만달러 수준으로 하고 있는 이웃을 쉽게 볼 수 있다.덕수궁 돌담길에서 종종보던 젊은 노랑머리의 배낭족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이제 구라파의 기차역은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쉼터가 되었다.사회전반의 민주화 진전에 따라 근로자의 목소리가 커지고 지방의회가 구성되면서 「지도급 인사」가 증가하고 정치목소리도 다양해졌다.풍요로운 물질적 삶을 추구하는 노력과 정치·사회·경제적인 제몫 찾기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정열을 쏟고 있는 사이에 바깥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2차대전이후 세계를 지배해오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얄타체제는 종식되었고,74년간 유지되어 온 소련 공산당의 해체로 중국·북한·베트남·쿠바를 제외하고는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국가간의 경쟁요인이 이데올로기로부터 경제와 기술로 옮겨가고 있다.걸프전쟁은 많은 신화를 남겼다.42일만의 전쟁에 연합군은 2백19명의 희생자를 낸 반면 이라크군은 40개 사단이 궤멸되고 10만명의 전사자와 17만명의 포로가 발생하였다.하루 전쟁비용은 무려 3억달러의 엄청난 액수에 달하였다.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무기의 정확도와 파괴력 수준의 향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 국민이 안방에 앉아서 전쟁게임을 볼 수 있게 되었다.걸프전쟁은 21세기의 전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수년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이같은 질적 변화에 따라 선진국이나 앞서가는 중진국들은 모두들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미국은 새로운 세계질서의 성격규명과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지위약화문제를 놓고 학계의 논쟁이 확산되고 있으며 영국을 비롯한 EC국가들은 기왕의 민주국가단위를 초월하는 유럽 경제단일공동체를 지향한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어느 나라 보다도 열띤 21세기논쟁은 이웃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다.도쿄의 책방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의 대부분은 미래의 일본문제를 다룬 책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정치인·관료·언론인·지식인들은 하나같이 21세기의 일본의 역할과 강대국에 걸맞는 국제적 일본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방안에 지혜를 모으고 있다. 눈을 우리의 문제로 돌려보자.독일통일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교훈은 통일의 여건이 일단 성숙되면 통일은 복잡한 과정을 거칠 여유없이 단기간에 이루어 진다는 점이며,또 다른 하나는 동구에서 가장 발전수준이 높은 동독의 경제사정이 그간 서독에서 알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나빠서 통일에 따른 비용이 천문학적 숫자에 이른다는 사실이다.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절반이상이 금세기안에 통일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북한의 국제적 고립화와 날로 심각해지는 경제사정과,그리고 최근의 소련사태등은 북한 정권의 순조로운 권력승계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북한이 향후 몇년간이나 그들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함을 갖게하는 것이 사실이다.이렇게 보면 오늘의 현실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는듯 하다. 변화하는 국제질서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시대에 적응하여 만든 국내제도와 틀을 바꾸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세계적 탈냉전과 남북대결의 냉전체제가 공존하는 2중적 현상은 상황대처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통일의 대비라는 차원에서 보면 할 일은 더욱 많아진다.문화적 동질성 회복,남북한 산업의 접목,사회간접자본의 엄청난 소요에 대비한 재원조달등 통일후에 한민족이 세계 최대 강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번영을 유지하기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통일한국이 2010년에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때 통일된 우리의 국토면적은 소련의 1백분의 1,중국의 44분의 1,미국의 44분의 1,일본의 2분의 1에 불과하다.인구면에서 보더라도 중국은 통일한국의 18배,소련은 4.2배,미국은 3.7배,일본은 1.6배이며 국민총생산면에서는 미국이 9.5배,일본이 7배,소련이 2.8배,중국이 2.1배가 되어 향후 20년 후 통일한국을 상정해도 우리는 동북아지역에서 왜소한 위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국민은 눈을 미래로 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금년의 무역수지가 예상보다 밝지 못하고 또한 오늘날 국가간 산업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더 나아질 것 같은 자신도 없는 국가적 상황인데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노력의 결집이 보이지 않으며 더욱이 지역간 갈등,노사대립,정치인들의 소모적인 정쟁의 지속,과소비와 사치풍조의 만연등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고가 우리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21세기의 통일한국의 번영은 절대로 그냥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미래의 꿈을 갖지 못한 개인이 보람있는 삶을 성취할 수 없듯이 미래를 위한 꿈을 함께 나누며 지금의 나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하고 화합하지 않는 민족이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시대적 조류와 국내외 여건은 평화적 통일 추진에 순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독일의 통일이 독일민족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의 구비와 민족적 결단에 의해 가능하였듯이 우리에게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멀리,그리고 넓게 생각하고 깨어서 준비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80일만에 37도선돌파…병참선 재정비(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4)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의 추적/보급난 간파한 유엔군,대대적 기습 반격전/“한강이남 포기… 휴전 모색” 건의에 모가 반대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기 앞서 김일성은 12월초 비밀리에 북경으로 가 모택동을 만났다.두 사람은 이자리에서 중국·북한군 통합사령부를 창설키로 합의했고 팽덕회가 총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임명됐다. 팽덕회는 공세작전의 성패는 병참에 달렸다고 판단,즉시 수송 및 보급망 개선에 주력했다.이와함께 중공당중앙군사위는 국공내전참전 용사 8만4천명을 추가동원하고 인민해방군 제19군단에 대해서도 51년3월까지 춘계대공세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공군의 3차공세는 50년12월31일 시작됐다.초기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돼 이듬해 정월 2일까지 중·북한합동군은 유엔군 방어선을 15∼20㎞정도 밀고 내려갔다.중국지원군 38군과 조선인민군 1군은 서울과 인천을 향해 진격했고 중국군 42군은 인민군 제2,제5군의 지원을 받아 홍천,횡성으로 밀고들어갔다. 이들은 1월4일 서울을 함락하고 1월8일에는 37도선까지 밀고내려갔다.그쯤에서 팽덕회는 전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중공군들이 엄청난 곤경을 겪고있었기 때문이다.팽은 유엔군이 비록 후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전력의 우위와 반격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공격작전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전선에 시달했다. 1월8일 중공군사령부는 「조정기 중 우리의 할일」이라는 지침을 각급부대에 하달,차기 공세에 대비할 것을 명령했다.팽은 공격중지로 유엔군이 반격할 여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단시일내에 반격해오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팽의 건의대로 공격중지를 허락했지만 미군에게 반격능력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51년1월14일 모는 팽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미군은 최악의 경우 부산·대구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을 할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월25일 중·북한군지도부는 춘계대공세를 위한 합동작전회의를 개최했다.같은날 유엔군은 김포,인천지역에서 대규모 반격작전에 나섰다.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장군이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매튜 리지웨이장군이 대신 작전지휘를 맡았다.리지웨이장군은 중공군의 작전수행능력이 물자,전투장비의 보급난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지웨이장군은 유엔군이 화력·기동성·보급면에서 앞서기 때문에 최단시간내 공세로 국면전환이 가능하다고 보고 반격작전에 나섰다.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춘계공세계획을 일단 중지하고 유엔군 저지에 나섰다. 1월27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미군의 작전목표가 『중국군을 한강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탄약,식량의 부족 때문에 3월말까지는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기가 힘들다고 보고했다.이와함께 팽은 『정치적으로 가능하다면』한강 이남지역을 포기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모는 1월28일 저녁 팽에게 전문을 보내 반격할 것을 명했다.모는 이 전문에서 ▲4차공세의 목표는 미군과 이승만정권을 몰아내고 대전과 안동 이북을 점령하는 것▲중국군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주공격을 원주·홍천방면에 집중시킬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고▲대전·안동이북을 차지하면 일단 2∼3개월 힘을 모은 뒤 마지막 5차공세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팽은 다음날 중·북한군 합동작전회의에서 모의 뜻을 전달하고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전세로 보아 전면반격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선 현위치를 고수하고 서부전선에서만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서부의 중국지원군 제50군과 38군예하 1백12사단은 현위치를 지키고 제39·40·42·66군은 횡성과 지평리에서 진격해오는 유엔군을 공격하도록 했다.동시에 북한인민군 제2군과 제5군은 평창에서 한국군 제7사단을 공격,남진활로를 뚫도록 했다. 전면공격을 요구한 모의 지시에 크게 미흡한 작전계획이었지만 팽은 사실 이 정도도 무리라고 생각했다.1월31일 팽은 모에게 전문을 보내 현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팽은 중국병사들이 식량·탄약·신발보급을 제대로 못받아 『눈길을 맨발로 걸어야 할』형편이라고 밝혔다.팽은 2월12일을 공격개시일로 잡았음을 알리고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한국전 전반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2월 11일 횡성·원주지역에서 시작됐다.작전초기 한국군 제8사단을 상대로 잠시 승리를 거둔 중공군은 미제2사단의 우세한 탱크·포 화력앞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결국 지평리에서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중·북한 합동군사령부는 37도선북쪽과 38도선 이남의 두곳에 방어선을 치고 둘 중 한곳에서만이라도 유엔군의 북상을 막아보려고 했다.그리고 팽덕회는 북경으로 가 3월말까지 머물며 모와 향후전략을 숙의했다. 팽의 보고를 받고 한국전에 대한 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모는 3월1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1년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당초의 생각을 바꿔 전쟁이 2년 정도 더 끌 것같다고 밝혔다. 모는 중국군이 심각한 병참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단위부대 병력충원에 1개월 이상씩 걸린다고 말하고 『38도선 이북을 다시 적에게 내줄 가능성이높다』고 실토했다.이러한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모는 마침내 전략상의 일대 수정을 가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전에 대비,총병력을 3개조로 나눠 교대로 전선에 투입한다는 전략이었다.
  • 유엔군 평양점령…중공군,압록강 도강(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3)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미 뉴욕 주립대)의 추적/방어진지 갖출 시간 없어 기습공격 감행/국경전투 12일… 전선은 청천강으로 남하/초기 두 차례 전과에 들뜬 모택동,“38선 돌파하라” 명령 소련의 공군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중국은 당초 세운 전쟁목표의 축소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10월14일 모택동은 주은래 앞으로 전문을 보내 한국전에 개입하되 방어자세를 유지하라는 초기작전 지침을 시달했다. 평양·원산 북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향후 공격작전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이 공군지원에 대한 약속위반을 함에 따라 중국지도부는 소련과의 동맹관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됐고 중·소 분쟁의 씨앗은 결국 이때 뿌려진 것이다. 중국군의 독자참전 결정이 내려지자 팽덕회는 즉시 심양으로 돌아가 10월14일 인민지원군,동북인민해방군,동북지구당의 고위간부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같은 당의 결정을 통보했다. 10월19일 중국군은 마침내 압록강을 넘어 한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루 전날인 19일 팽덕회는 미리 북한으로 가 10월20일 아침 김일성·박헌영을 함께 만났다. 팽은 이 자리에서 소련군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반드시 적을 섬멸해 한반도의 혁명을 완결짓겠다는 중국지도부의 의지를 전달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은 바로 그날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유엔군 선봉대는 각 방면에서 한·중 국경 30∼40마일 전방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중국군은 한국진입 즉시 방어진지를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격해 들어왔기 때문에 방어진지를 갖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인 팽덕회는 유엔군 선봉대의 북진작전이 너무 서둘러 진행됐다는 점에 착안,10월21일 이들을 기습공격하겠다는 뜻을 당중앙군사위에 보고했다. 같은날 모는 답신을 보내 『당분간 방어진지 구축을 보류하고 공격준비를 갖춰 수일내 공격을 시작하라』고 팽의 건의를 수락했다. 팽은 적을 깊숙히 유인해 후면·측면을 친다는 전략을 세우고 2개군의 추가병력 파병을 당중앙군사위에 요청했다. 한국내 전중국지원군에게는 명령이 있기 전에 유엔군과의 교전은 피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동부전선에 2개 사단,서부전선에 5개군이 집중배치됐다. 중국군의 이 기습공격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0월25일 중국지원군 제40군 휘하 118사단이 운산지역에 진격한 한국군에게 첫 공격을 개시한 지 12일 만에 한국군은 압록강에서 청천강까지 후퇴했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이 첫 공세에서 한국군은 1만5천명의 전사자를 냈다. 맥아더 장군은 이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전력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추가공세를 취했다. 반대로 중국군은 30㎞를 다시 후퇴한 뒤 방어대형을 갖추고 계속 유인작전을 썼다. 11월25,27일 유엔군이 마침내 「덫이 놓인」 지점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중국군은 동부·서부전선에서 동시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세에 당황한 유엔군은 치욕스런 패주를 거듭했고 12월5일 평양이 다시 북한군 수중에 넘어갔다. 12월 중순에는 북한영토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두 차례의 공세에서 성공을 거두자 모는 적을 완전 궤멸시켜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다는 당초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적의 핵심전력은 건재했고 모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는 두 차례의 패배를 당한 미국이 휴전을 제의해 올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모는 휴전에 앞서 미군을 38선 이남으로 패퇴시키고 서울을 수중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는 중요한 시기에 사태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 전선총사령관으로서 팽덕회는 보다 신중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팽은 초기공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중국지원군이 안고 있는 몇 가지 취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첫째 2개월간의 공세결과 중국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됐고 둘째 유엔군의 핵심전력이 건재하고 셋째로 미·영이 절대로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생각했다. 팽은 이 시점에서 38선을 넘기보다는 본국으로부터 추가 보급지원을 받고 전략위치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팽은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모에게 보고하고 조기승리보다는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모는 사태를 군사적인 현실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려고 했다. 그는 38선이 갖는 상징적인 경계선의 의미를 허물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는 12월21일 팽 앞으로 전문을 보내 『미·영은 38선 앞에서 휴전을 맺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경계선에 현혹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라』고 말했다. 본토 내전을 수행할 때도 그랬지만 모는 군사적인 고려와 정치적 목적이 서로 상충될 경우 항상 정치적 고려를 우선시키는 사람이었다. 팽덕회는 모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최고결정권자는 모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팽은 모의 지시를 따라 3차공세 작전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팽은 38선을 따라 배치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북한군 3개군과 중국지원군 6개군을 집중 투입시켰다. 임진강 동안에서 북한강 서안에 이르는 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제8,6,2사단과 5사단 일부를 궤멸시키는 것을 주작전목표로 설정했다.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일거에 서울과 그 외곽도시들을 점령하고 다시 힘을 축적해 51년 봄 마지막 공세를 감행,전쟁을 끝낸다는 계산이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대미접근 위한 「유화제스처」/북한 미군유해 인도의 배경

    ◎유엔가입 앞두고 선전효과 노린듯/미군 포함,아직도 1만여구 잔존 추정 북한 쪽에서 24일 「미군유해」 11구를 미국 쪽에 인도한 것은 극히 폐쇄적인 그들의 일상관행에 비추어볼 때 대단한 선심행사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군사·외교관측통들은 일반적으로 미국 등 자유세계국가들에 대한 일종의 유화제스처로 보고 있다. 우리의 유엔 외교정책에 밀려 오는 가을 남북한 동시가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수세적 입장에 놓인 북한으로서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호감을 사둘 필요가 무엇보다 절실했을 것이라는 게 그 논거이다.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절차가 우리 쪽의 주도 아래 이뤄지는만큼 자칫하다가는 앞으로의 유엔 외교무대에서 상당한 열세를 모면하기 어려워지리라는 판단 아래 미리부터 손을 쓰고 있다는 풀이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유엔 참전국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전 시실종자문제에 대해 그들이 아직까지 성의를 가지고 대처하고 있으며 이는 곧 참전국에 대한 우호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참전국은 물론그 주변 유엔 회원국들에게 「평화애호국」의 이미지를 심으려 하는 셈이다. 그것도 6·25발발 41주년에 즈음한 타이밍을 맞춤으로써 선전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북한 쪽에서는 이에 앞서 우리 쪽이 유엔가입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타진하고 있던 지난해 5월에도 미국 쪽에 은근히 유화제스처를 쓰면서 5구의 「미군유해」를 넘겨주었었다. 이들 유해는 정밀진단 결과 대부분이 미군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긴 했지만 그런대로 미국 쪽에 호의적인 인상을 준 것 만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인도된 11구 가운데 미군이 과연 몇 명이나 포함돼 있을지는 의문이라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북괴군의 때아닌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난 50년 6월25일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53년 7월27일까지 37개월 동안 국군 14만9천5명을 비롯,유엔군 3만6천8백37명,경찰 3천5백여 명,민간인 37만3천여 명 등 모두 56만1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 국군 71만7천여 명,유엔군 11만5천여 명,경찰 7천여 명,민간인 23만여 명 등 1백6만9천여 명이 부상했다. 국군9천6백34명과 유엔군 6천2백67명 등 1만5천여 명은 포로가 됐으며 국군 4만3천여 명,유엔군 2천2백32명,경찰 7천여 명,민간인 30만여 명 등 35만여 명이 실종됐으며 민간인 8천4백여 명은 납북됐다. 전쟁기간 동안 북한은 평북 강계 등에 모두 29곳의 국군과 유엔군 포로수용소를 운영했고 만주지역에도 18개의 포로수용소를 따로 두었었다. 북한과 만주지역에 수용되어 있던 국군과 유엔군 포로들은 휴전 직전 포로교환 때 대부분 송환됐으나 수용소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부상병들이나 영양실조,과로로 숨진 희생자들은 휴전 뒤 1년이 지난 54년 8월17일 유엔군 쪽에 유해로 인도됐다. 당시 유엔군 쪽에 인도된 유해는 모두 4천23구로 미군의 유해가 1천8백69구였다. 유엔군 쪽에서는 아직도 북한에 8천5백6구의 미군유해와 함께 2천2백32구의 영국·캐나다·터키 등 참전국 장병유해가 더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엔군 쪽에서 전투 중 실종자(MIA)로 추산하고 있는 장병의 수도 2천여 명이나 된다. 유엔군 사령부는 이에 따라 휴전 이래 줄곧 이를 전사자와 실종자 1만여 명의 유해를 넘겨줄 것을 공산군 쪽에 요청해오고 있다. 나아가 유해를 찾아내는 작업을 위해 중립국감시위원단을 포함한 전쟁당사국의 다국적 조사반을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북한 쪽에서는 실종 미군이나 유엔군 유해의 발굴작업은 군사정전위원회의 소관사항이 아니라고 이같은 제의를 일축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2차대전후 최대 축하집회/걸프 승전 퍼레이드 이모저모

    ◎1,200만불 투입… 80만 시민 참가/장병 9,000명·장갑차 행렬 4㎞ 【워싱턴 UPI 연합】 걸프전 참전미군 귀국환영대회가 8일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요인과 시민 등 모두 80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려 제2차대전 종전 이후 최대규모의 승전축하집회라는 기록을 남겼다. 걸프전의 영웅 슈워츠코프 장군과 예하부대 장병 8천8백명이 일부는 도보행진으로,일부는 장갑차에 탄 채 백악관과 미모리얼교를 지나 컨스티튜션가에 이르는 4㎞의 거리를 행진하는 동안 군중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이들의 귀향을 축하했다. 시민들은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성조기를 흔드는가 하면 「축 귀향」 「잘했다」 혹은 「댕큐」라고 쓴 포스터를 높이 쳐들어 열렬한 환영을 표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슈워츠코프 사령관과 악수하기 위해 사열대 계단을 내려오면서 감격적인 어조로 『오늘은 위대한 날』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사열에 앞서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걸프전 전사자 3백76명에 대한 추도식에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우리가 추모하는 사람들은 우리들 개개인보다 더 커다란 원칙,즉 국가라는 심장의 근육과 힘을 동시에 형성해주는 원칙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저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하오 10시의 불꽃놀이를 포함,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계속된 이날 환영행사에는 모두 1천2백만달러의 경비가 소요됐으며 백악관 뒤편에서 열린 군인가족 야유회에서만도 핫도그 2만5천개,통닭 4만쪽,캔디 5만개가 소비되면서 3t의 쓰레기가 나왔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앨런 이터씨는 『베트남전이나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해서는 이런 행사가 없었다』면서 『오늘의 행사는 승리의 축하며 모두를 위한 퍼레이드』라고 말했다.
  • 「중동 신질서」 구축 “교감의 행보”/부시·베이커의 순방외교 결산

    ◎분쟁해결 「방법론만 이견」 확인/“점령지와 평화 맞바꾸기” 가능성 시사/「팔」 해결·무기금수엔 소·불과 큰 시각차 전후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조지 부시대통령과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 직접 나섰던 미국의 탐색외교는 걸프전 종전을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의 호기로 삼아야 한다는 「총론일치」와 아랍­이스라엘분쟁 해결방법을 둘러싼 「각론이견」속에 서막을 내렸다. 캐나다·프랑스·영국의 정상을 연쇄접촉한 부시대통령과 아랍·이스라엘·팔레스타인,그리고 소련의 지도층과 잇따라 만난 베이커 국무장관은 아랍­이스라엘간 뿌리깊은 불신과 적의,아랍세계내 패권다툼,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힌 중동문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세계에 보여 주었다. ○뿌리깊은 불신 재확인 워싱턴은 부시와 베이커의 이번 외교여로가 해묵은 중동분쟁의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없으나 중동에 전례없는 평화무드를 조성하고 새방안 탐색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번에 부시대통령과 만난 캐나다의 멀로니총리와 프랑스의 미테랑대통령은 중동평화노력에 긴급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했으나 이러한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에선 상당한 이견을 드러냈다. 또 베이커장관이 접촉한 아랍·이스라엘 지도자들도 이라크의 패배가 중동분쟁 해결을 위한 「신사고」의 폭을 넓힌 건 사실이나 이번 전쟁이 아랍­이스라엘간 적대행위와 불신을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사실도 분명히 했다. 베이커는 이들과의 대화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올만한 큰 기대를 남기지 않았다면서 평화정착의 「전도가 험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부시와 미테랑은 지난 14일 회담에서 ▲PLO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합법적인 대표기구인가 ▲중동평화를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어야 하는가 ▲팔레스타인 국가가 창건되어야 하는가 등 일련의 주요 문제에 관해 상호 대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세가지 문제에 부시는 모두 「노」라는 답변을 내놓은 반면 미테랑은 보다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부시와 미테랑은 중동평화를 위한 미불 양국의 협조와 공동이해를 강조하려고 애썼다. 두사람이 심각하게 대립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만 접근법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드러났다. ○PLO의 대표성 논란 이에앞서 13일 오타와 방문에서 부시는 대중동 무기금수를 위해 우선 유엔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간에 협정을 체결하고 세계 정상회담도 개최하자는 캐나다 제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부시행정부는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나 이집트,그리고 이스라엘 등에 대한 무기판매는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베이커 장관은 15일 소련 지도부와 회담후 『중동의 전후 질서에 관한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견해엔 뚜렷한 접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베스메르트니흐 소 외무장관은 『중동에 대한 무기판매 규제협정을 성사시킬 때가 됐다. 중동안보기구 조직은 역내 국가들의 소관 사항이나 유엔안보리가 할 역할이 있다』며 워싱턴과 구별되는 모스크바의 입장을 부각시켰다. 그는 또 『PLO는 중동문제 해결의 일익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은 걸프전쟁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이 취한 친이라크 태도와 관련,중동평화 협상대상에서 PLO를 배제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포로 송환을” 베이커장관은 1주일간에 걸친 중동 순방에서 아랍국가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신뢰 구축조치를 취할 것을 역설했다. 특히 시리아에겐 이스라엘 전쟁 포로와 전사자 유해를 돌려주도록 촉구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에 대해 점령지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규제 완화와 대화분위기 조성을 촉구했다. 베이커가 요구한 이러한 「신사고」 조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노」라고 얘기한 나라도 없었지만 「예스」라고 답변한 나라도 없었다. 그런 반응은 다마스쿠스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시리아의 파루크 샤라 외무장관은 이라크가 이번 전쟁에서 사용했던 것보다 정교한 북한제 스커드미사일 도입에 관한 기자 질문에 이를 시인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이스라엘과 전쟁상태에 있다. 이스라엘은 무척 많은 미사일과 대량 파괴무기를 갖고 있다』고 응수했다. 이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에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몇가지 고무적인 조짐을 열거하는 가운데 시리아의아사드대통령이 이스라엘과의 「참된 평화」를 구축하는데 관심을 표명했던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참된 평화」란 용어는 지금까지 전쟁 계속을 다짐해온 시리아의 태도변화를 무게 있게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풀이했다. ○유엔결의안 준수 합의 아랍의 여러 수도에서 베이커는 미국이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활편의를 위해,그리고 언젠가는 점령지와 평화를 교환하도록 이스라엘에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포기를 요구한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호와 338호를 미국이 지지한다는 다짐을 베이커로부터 거듭 받아냈다. 미국이 유엔 결의안 적용을 사담 후세인에겐 엄격히 하고 이스라엘에 대해선 관대하게 나간다면 그것은 아랍인들의 눈에 불쾌한 「이중기준」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시는 점령지와 평화를 교환하는 방식을 지지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점령지는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땅이며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 주장이다. 그러나 아랍은 점령지와 평화를 교환하는 바탕 위에서만 협상을 하려들 것이다. 워싱턴이 추구하는 중동평화는 궁극적으로 점령지를 둘러싼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이 거리를 어떻게 좁혀 나가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 전비 5백억불… 미군 전사 1백84명/수치로 본 결프전·2차대전

    ◎공습비용 1백33억불… 하루 3억불/슈워츠코프 월급 아이젠하워의 14배/폭탄 14만t 투하… 2차대전의 4% 단기전으로 끝난 걸프전은 2차대전 및 베트남전과 비교해서 여러가지 의미있는 변화를 보여줬다. 이는 미국사회와 미군체계의 변화 및 각종 첨단기술이 동원된데 따른 것이다. 위 표에서 보듯이 고가의 장비가 총동원된 이번 전쟁은 희생자는 적었지만 전비는 상당히 들어간 전쟁이었다. 이에 못지않게 미군 유지비용도 크게 늘어났다. 미군내 기혼자의 비율은 2차대전 당시 27%에 불과했던 것이 이번 전쟁에는 53%로 늘어났다. 부모로서 참전한 군인이 1만6천3백37명이며 특히 부모 모두가 참전한 경우도 1천2백31명이나 됐다. 군인봉급도 크게 늘어 2차대전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달에 6백66달러를 받은데 비해 슈워츠코프 장군은 8천4백85달러에 제수당 9백42달러를 받았다. 소위 조종사의 경우에는 2차대전때 2백달러를 받았고 이번 전쟁에서는 1천7백45달러를 받았다. 2차대전때 하사 7호봉이 월 1백65달러를,걸프전에서는 한자녀를 가진 5호봉 하사가월 1천6백44달러를 수령했다. 이등병은 2차대전때 71달러에서 6백69달러로 봉급이 올랐다. 미군 병사들은 전장에서도 하루 평균 1인당 3.75통의 편지를 받아 총 1백57.5통의 편지를 받았다. 걸프전에는 예비군이 총병력 가운데 15%나 차지했으며 소방수가 9백60명,종군목사 등도 8백명이나 파견됐다. 이번 전쟁으로 부시 대통령은 지지율이 85%를 기록,2차대전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84%를 넘어섰지만 미국 기업들은 테러의 위협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포천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5백개의 기업 가운데 51%가 테러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사업의 성격(24%),유태 배경(6%) 등의 이유 때문에 위협을 느낀다고 밝혔다. □미국의 걸프전관련 통계 수치 ●배치병력 및 민·군 희생자 걸 프 전 2 차 대 전 배치병력 53만2천명 1천2백만명 전사자 184명 407,318명 §이라크군 8만∼10만명 §2차대전중 총전사자 (사우디 정부추정) 2천4백만명 §1월17∼2월27일중 미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4,400명 부상자 213명 67만명 포로실종자 52명 14만명 민간인 0 10명미만 희생자 §이라크 민간인희생자 §영국:6만595명 1,591명(이라크 정부 소련: 250만명 추정) 독일: 30만명 일본: 50만명 ●전비 걸 프 전 2 차 대 전 총비용 4백억∼5백억달러 3천6백억달러 90.8.2 19억달러 하루평균 전비로 구입한 장비 ∼ 7천6백80만달러 탱크 57.027대 91.1.16 트럭 676,433대 곡사포 1,054문 바주카포 476,628문 공습비용 133억달러 하루평균 M­1소총 4,014,731정 2억9천5백만달러 캘리버 45 지상전 21억달러 하루평균 4,072,000,000정모직내의 5억2천만달러 57,488,000벌 전후비용 3개월간 기관차 7,570량 철수비용 52억달러 방독면 23,500,000개 ●무기·연료 걸 프 전 2 차 대 전 폭탄투하량 141,921톤 나가사키 24,200톤 드레스덴 3,421톤 총투하 3,360,000톤 탱크킬러 1,106달러 A­10기 시간당비용 1개 기갑사단 25만갤런 1일 연료소비량 병력16,500명 탱크 350대 전차 200대 장갑차 200대 기타 300대 미 8개 기갑사 8백만갤런 단 지상전시 §미국내 1일연료소비량 연료소비량 7억1천4백만갤런 M­16소총 1발 20센트 M­60 1발 43센트 탱크 105㎜ 565∼1,813달러 120㎜포 1발
  • 이라크 경제손실만 2천억불선

    ◎쿠웨이트 주둔 50만은 궤멸/탱크·야포등 80% 이상 파손/전사 5만∼10만,포로 10만명 넘을듯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은 피해가 경미했던 반면 이라크의 피해는 엄청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막상 이라크가 입은 전쟁피해의 정확한 규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는 전쟁중에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가 격심하다고 전세계를 향하여 「읍소」작전을 폈었다. 하지만 이나마 2월중순 2만여명이 죽고 6만여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전쟁피해 상황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라크 관계자들은 다국적군의 이라크 시설파괴로 통신이 두절돼 민간인 사상자를 집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라크의 피해정도에 대해서는 추측만이 무성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추측들로만 보더라도 이라크가 당한 전쟁피해는 「피해를 당했다」라는 표현보다도 오히려 「전멸했다」는 표현이 걸맞다. 사우디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이라크의 민·군 전사자는 8만5천내지 10만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트레보 두푸이라는 한 군사학자는 사상자 숫자가 10만내지 15만명 정도이며 이 가운데 3분의 1내지 4분의 1이 사망자일 것으로 분석했다. 이라크가 무역금수조치와 다국적군 공습에 의해 입은 물적 피해도 어림짐작이기는 하지만 2천억달러 규모를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가 입은 가장 「완벽한」 피해는 뭐니뭐니 해도 쿠웨이트 전장에 투입됐던 군부대의 완전 궤멸이다. 쿠웨이트와 이라크남부에 배치됐던 이라크군의 총 규모는 공화국수비대 11만명을 포함 55만명. 탱크는 4천2백80대,장갑차 2천7백50대,야포 3천1백10문,전투기 6백50대가 동원됐지만 살아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 산산히 부서져 전투력 발휘는 꿈도 못꿀 형편. 바스라의 남쪽 다국적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은 지상전 발발 당시 이라크의 정예 공화국수비대가 포진한 곳이었지만 다국적군측에 의하면 지금은 5개 기계화대대와 3개 보병대대만이 겨우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숫자는 5천명도 채 안된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포로숫자도 다국적군이 미처 헤아릴 수가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미군당국은 포로가 8만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포로로 등록된 숫자일 뿐 다국적군에 의해 붙잡혔지만 미등록된 숫자까지 포함하면 17만5천명(민간인 5만 포함)은 넘을 것이라는게 영국 국방부의 추산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머지 42만5천명의 이라크군은 어디로 갔을까. 다국적군측은 지상전이 개시되기 전에 이미 이라크군이 30%의 도주율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 도망병들은 뿔뿔이 사막을 가로질러 고향을 향하고 있어 추계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다국적군도 이라크군의 정확한 피해는 알길이 없어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매우 매우 많다」고만 이야기한다. 많은 이라크군들이 다국적군의 공습과 집속탄 등에 맞아 벙커속에서 죽었으며 다국적군은 이들을 나를 수 없어 표식기만 건채 그대로 묻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전황 브리핑을 전담하다시피 한 닐 미군준장은 벙커에서,탱크속에서 죽어 그대로 묻힌 이라크군의 매장장소를 곧 이라크군측에 알려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번 전쟁으로 인한 이라크의 피해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어림으로나마 잡힐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운좋게 전장을 피해 배치된 이라크군은 대부분 커다란 피해 없이 그대로 살아 남았다. 터키 국경쪽의 10내지 12개 사단,시리아 국경쪽의 6개 사단,사우디 국경쪽의 5개 사단,1천3백대의 탱크,3천2백대의 장갑차,2천문의 야포가 아직 건재하며 2만내지 2만5천명의 공화국수비대가 바그다드부근에 포진하고 있다. 해군은 전쟁전 이탈리아 항구에 억류된 4척의 프리깃함을 제외하고는 전멸이지만 전투기는 1백60대만 부서지고 나머지는 이란에 대피해 있거나 은닉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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