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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테러전쟁/ 북부동맹 쿤두즈 무혈입성

    탈레반군 투항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항복시한인 25일 북부동맹 선발대가 쿤두즈에 ‘무혈’ 입성,아프가니스탄 북부 전역이 사실상 북부동맹 수중에 들어갔다. 북부의 탈레반 최후 거점인 쿤두즈가 북부동맹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탈레반은 이제 남부의 마지막 거점 칸다하르를중심으로 최후 저항을 벌이게 됐다. 북부동맹의 미르 알람 사령관이이날 쿤두즈에 입성했다고 아시라프 나딤 북부동맹 대변인이 밝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AFP통신도 압둘 라시드 도스툼 사령관이 병력 2,500명을 이끌고 쿤두즈에 입성했다고 아프간이슬람통신(AIP)을 인용,전했다.북부동맹 내 각파벌들이 쿤두즈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입성을 서두르고 있다. 진입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알람 사령관을 동행한 북부동맹 관계자는 알람사령관이 쿤두즈 시내에 입성했으나 쿤두즈로 가는 거리곳곳에서 탈레반군들이 저항없이 투항해왔다고 말했다.북부동맹은 이날 중 쿤두즈시를 완전 장악할 것으로 내다봤다.앞서 쿤두즈 인근 탈로칸에 주둔 중인 북부동맹 다오우드칸 사령관은 탈레반과 외국 지원병 등이 25일까지 항복하지 않을 경우 무력장악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23일과 24일 이틀간 북부동맹에 투항한 탈레반군은 2,000명에 육박한다.북부동맹은 24일 탈레반군 700여명과 외국인 지원병 600여명이 항복했다고 말했다.탈레반군은 최소한 20대의 픽업트럭과 군용트럭 4대,탱크 4대 등에 나눠타고 이동했으며,약 500명의 탈레반 병사들 행렬이 수백m에 달했다고 덧붙였다.앞서 23일 600여명의 탈레반군이 투항했다.쿤두즈에는 지난 22일 북부동맹이 공세를 시작하기 전 외국 지원병 2,000여명을 포함해탈레반군 7,000∼1만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24일 현재 5,000∼8,000여명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현재까지 투항한 탈레반의 최고위 관계자는 물라 카차르 탈레반내무차관이다. 투항한 외국인 지원병들은 마자르 이 샤리프의 수용시설로 압송됐다.브루하누딘 랍바니 전 아프간 대통령은 25일외국인 지원병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유엔에인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선데이 텔레그래프는 25일 미·영국군 지휘관들이 탈레반의 최후 보루인 남부 칸다하르 공략을 위해 양국 공수부대의 합동작전을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은 칸다하르 공격에는병력 2만5,000명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했다.미국의 공격이 임박한 가운데 칸다하르의 탈레반 강경파는 병사들의 투항을 막기 위해 가족들을 볼모로 잡아두고 최후의 항전에대비하고 있다. 한편 미국에서 아프간전 미군 전사자 유무논쟁이 일고 있는 가운데 파키스탄 일간 ‘뉴스’는 지난 24일 남부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전투를 치르던 미군 특수부대원 중 최소한 35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은 “미군이 지난22일 탈레반과 알 카에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김균미기자 kmkim@
  • 일본 전역 꼬리문 ‘군국 참배’

    15일 정오 도쿄 시내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스산한 조가(弔歌)가 울려나오자 경내에 있던 참배객 수천명이 일제히묵도를 올린다. 일본 전역에서 실시된 1분간의 묵도가 끝나자 본전 앞 참배를 기다리는 행렬이 다시 조금씩 움직인다.30분은 기다려야 겨우 참배할 수 있을 만큼 경내는 인산인해다.옛 일본군복장에 대형 일장기를 든 단체 참배객들도 곳곳에서 눈에띈다. 대부분은 50대 이상이다.아버지나 할아버지,동료를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무수한 전쟁에서 잃은 유가족들이다.해군이던 아버지가 1944년 전장에서 사망했다는 한 50대 참배객은“야스쿠니 참배를 놓고 왜 한국이 이러쿵저러쿵 하느냐”며 “일본에는 일본의 방식이 있다”고 불쾌한 듯 손을 젓고는 다른 곳으로 홱 가버린다. 참배객은 유족이 대부분이지만 더러 “나라를 위해 희생한분들을 기리기 위해” 찾는다는 ‘소신파’도 있다. 한 참배객(57·자영업·도쿄 거주)은 “가족 가운데 전사자는 없으나 1년에 4차례는 이곳을 찾아 머리를 조아린다”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참배한 것은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보다는 한국이 신사 참배에 대해 잘 이해해주는 것 아니냐”고 엉뚱한 논리를 펴기도 했다. 젊은 대학생들도 꽤 많다.올해 처음 야스쿠니에 왔다는 남학생(20·대학 2년)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보통의 국민들을 생각해 왔다”면서 “참배에 정치적인 뜻은 없지만 일본 언론의 보도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 합사된 A급 전범에게도 참배를 했냐고 묻자 이내 말꼬리를 흐린다. 대다수 유족들의 참배가 이어지고 있는 본전 앞과는 달리신사 안팎은 우익의 선전장을 방불케 할 만큼 극우 조직원의 시위,집회가 계속됐다. ‘아시아 청년당’,‘정치결사,일본 황정당(皇政黨)’,’쇼화진구(昭和神宮) 창건회’,‘국수국방연합(菊水國防連合)’등 크고 작은 극우 조직들이 동원한 버스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노래와 구호가 연신 흘러나오는가 하면 우익 청년들이 군복 차림으로 신사 이곳저곳을 돌며 세를 과시하기도했다. 이들은 ‘천황 폐하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대동아전쟁은성전(聖戰)이다’,‘황국(皇國) 일본 만세’등의 구호가적힌 플래카드로 참배객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신사 본전 입구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 함대에 뛰어들었던 특공대를 기리는 그림과 붓글씨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지나가던 참배객들이 다투어 사진을 찍고 글씨를 들여다보고 있다.‘너와 내 사랑의 하늘의 이중주,맑아서 얘기하는 하늘의 순간’.말할 것도 없이 일왕에 목숨을 바친 특공대의 심정을 왜곡해 표현한 글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돌아보면 볼수록 점입가경이다.“한국과중국은 내정간섭을 하지 말라”고 규탄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나라에는 쇼와(昭和·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의 연호) 수난자만 있을 뿐 A급 전범은 없다”는 역사 왜곡마저도 서슴치 않았다. 두 얼굴의 야스쿠니 신사.일본의 무모한 야욕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나가 억울하게 희생된 국민들의 위패가 있는 곳인가 하면 군국주의 일본 정신을 확대 재생산하는 ‘마음의기지’이기도 한 야스쿠니 신사이다.그곳을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3일 참배했다. ◆ 야스쿠니 신사.1869년 메이지(明治) 일왕 때 지어져 일본군이 관리를 맡았다.전쟁에서 사망하면 신이 된다는 독특한 신앙으로 무고한 국민들을 전장으로 내몬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적 시설.2차대전 종전 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된 14명을비롯,246만여명의 위패가 합사돼 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현충일 6·25 유해발굴현장 잇따라 방송

    국방부가 지난해부터 진행해 온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을취재한 방송 프로그램이 현충일을 맞아 잇따라 방송되고 있다. KBS의 ‘추적60분’은 ‘사라진 전사자,조국은 그들을 잊지 않는다’란 제목으로 지난 3일 미국의 ‘실하이(CILHI·미군유해발굴단)’부대와 6·25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유해발굴 사업을 방송했다. EBS의 오는 6일 오후 7시50분 방송될 현충일 특집 다큐멘터리 ‘잊혀진 10만의 유해들’은 경기도 가평,전라남도 화순등지의 유해발굴 현장을 취재했다. 지난 5월7일 경기도 가평 설악면 엄소리 352고지에서는 호국영령들의 넋을 부르고 땅을 달래는 개토제(開土祭)를 시작으로 유해발굴이 진행됐다.넓은 산 어디에 무엇이 묻혀 있겠냐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발굴이 시작되자 6·25때 사용됐던 총탄이 나오고,호국영령이 살아 생전 지니던 유품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발굴 시작 5시간만에 20대 초반의유해는 전사 당시 앉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의 뼈마디를 드러냈다.다리뼈에는 총탄이 그대로 박혀 있고,흐르는 피를 지혈하기 위해 허벅지에 묶었던 가느다란 줄까지 남아있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리산 끝자락의 너릿재 고개는 51년 4월 빨치산 공비토벌에 투입된 일개 중대가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치열한 전투를 하다 26명이 사망한 현장이다.첫 삽을 들자마자 전쟁당시 비가 와 판초우의를 입은 유해,철모를 쓴 유해등이 나타나 10일 만에 모두 26구의 유해를 발굴해냈다.하지만 누가 누군지 가족을 알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6·25 유해발굴팀은 단 1구라도 유가족을 찾아 가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당시 참전자와 전사기록을 찾기 시작했다.여든을 내다보는 참전자가 박용선 소위의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박 소위의 입대 당시 기록이며 보훈 기록을 모조리 뒤진 결과,아버지 박도섭씨는 93세의 나이로 경기도 의왕시에 살고있었다. 주부 안병춘씨(54)는 전쟁 당시 3살밖에 안돼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치아 사이의 틈을 메웠다는 아버지 만수씨의 신체 특징을 기억해 냈다.발굴팀은 안씨의 진술에 따라 철모를 쓰고 군화를 신은 채로 50년 동안가족을 기다렸던 유해를 확인하기도 했다. 한편 KBS는 6일 오전10시25분 6·25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담은 다큐멘터리 ‘50년만의 진혼곡’을 방송한다. 윤창수기자 geo@
  • 국군포로 北생존 확인돼도 유족연금 지급중단 않기로

    정부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돼 전사자로 처리된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될 경우 유족연금지급을 중단키로 한 방침을 바꿔 이를 중장기 과제로 넘기는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27일 “형평성 차원에서 생존 사실이 확인된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유족연금 지급중단을 검토했으나,반대 여론이 거세 중장기 과제로 넘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北이산상봉 후보에 국군포로 2명 포함

    3차 이산가족방문단 북측 후보 가운데 6·25 전쟁중 국군전사자로처리된 북한거주자 2명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1일 확인됐다. 대한적십자사와 국방부에 따르면 전날 공개된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후보 200명 가운데 이기탁(73·경북 성주군 월항면 어산동 출신),손윤모씨(67·경남 통영군 일운면 지세포리 출신)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으로 입대한 뒤 50년 12월 전사자로 처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모두 위패가 모셔져 있다.이씨 부인 전금례씨(70)는 전몰 군경유족으로 등록돼 현재 연금을 받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전사자로 처리돼 있는 이들은 북한에 생존해 있는351명의 국군포로 명단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면서 “국군포로인지여부는 국방부에서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당국자는 “이들이 북한에 있게 된 원인·과정과 관계없이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상봉 등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석우기자 swlee@
  • 북 후보에 ‘6·25전사자’포함 의도

    3차 이산가족방문단 북측 후보 가운데 6·25전쟁 중 국군 전사자로처리됐던 북한 거주자 2명이 포함된 배경은 무엇일까. 북측 후보자에 포함된 이기탁(73·경북 성주군 월항면 어산동 출신),손윤모씨(67·경남 통영군 일운면 지세포리 출신) 두 사람은 6·25전쟁 중 국군으로 참전,행방불명돼 전사 처리된 상태다. 가족들의 말대로 이들이 북한군에 잡혀 포로로 지내왔다면 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폭을 넓히고 좀더 긍정적 자세로 전환한것으로 볼 수 있다.이 경우 북측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는 북한에 없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으로 인도주의적 명분과 남측 요구를 채워줄 수 있는 현실적인 접근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북측은 이들을 ‘자진 월북’이나 ‘투항’으로 처리,남측 요구를들어주면서도 명분과 자존심을 세우고 ‘포로 송환’이란 골치아픈쟁점을 피할 수 있다.앞서 지난해 9월 말∼10월 초에 이뤄진 지난 2차 상봉때 납북 어부 강희근씨의 어머니인 김삼례씨가 평양에서 강씨를 만난 것도 같은 예다. 당시 북측은 강씨를 ‘의거 입북’했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도 사실상 이들의 상봉은 허용했다.북측이 ‘진실’을 알지만 자존심과 명분을 강조하면서 실제적으로 남측 요구를 수용해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정부 당국은 조심스럽다.북측의 의도를 이렇다저렇다 말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또 이들 후보자들이 전쟁 수행중 전사로 처리돼 있지만 자진 월북인지 포로가 됐는지 혹은 민간인신분으로 북에 잔류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그러면서도 이산가족 해법에서 지평이 느리지만 확대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석우기자 swlee@
  • 이산상봉 후보에 국군포로 포함 국방부 견해

    국군포로 출신 2명이 북측 이산가족방문단 후보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 1일 국방부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국군포로 문제는 넓은 의미에서 이산가족 문제와 같은 범주에서해결책을 모색한다’는 통일부 방침과는 처지가 다른 탓이다.다만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국가 위기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군인에 대해서는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기존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거듭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명단에 포함된 속내와 향후 포로 송환정책에 미칠 부정적 영향 등을 놓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6·25전쟁 중 전사자로 처리된 두 사람이 북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남쪽의 유족에게 지급되는 연금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지난 99년 1월 만들어진 ‘국군포로 대우 등에 관한 법률’에 관련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군포로가 귀환할 경우 유족연금 지급은 중단하되 신분에 맞는 일시불 형태의 보상금과 주택 제공 등의 혜택이 주어져 왔다”며 “전사자로 처리됐더라도 북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유족연금은 계속 지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귀환 국군포로 3명 비공개 퇴역식

    지난 7월에 귀환한 국군포로 3명이 이달중 환영 및 퇴역식을 갖는다. 국방부는 5일 강상권(70)·허형직(68)씨의 환영 및 퇴역식을 6일과7일 수도사단과 3사단에서 각각 갖는다고 밝혔다.김인준(71)씨의 퇴역식은 9월 중순쯤 따로 잡혔다.이들의 퇴역식은 비공개로 치러진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들이 가족들의 안전 등을 고려해 신분 및 행사를 공개하지 말아 줄것을 요청,모든 행사를 비공개로 갖게됐다”고설명했다. 강씨는 지난 51년 국군 3사단에 입대,53년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광산 광부와 경비원 등으로 일한 것으로조사됐다.허씨는 지난 52년 수도사단에 입대,53년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김씨는 49년 8사단에 입대한뒤 50년 횡성전투에서 포로가돼 평양 승호구역에서 공원으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이중 허씨와 김씨는 지난 62년과 73년 각각 노동당에 입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포로가 될 당시 각각 병장,상병,일병인 이들의 계급을 모두 하사로 진급시켰다.또 그동안 밀린 임금 및 주거지원금으로 각각 3억5,000만원씩을 지급키로 결정했다.전사자로 처리돼 국립현충원에 봉안됐던 이들의 위패는 철거된다. 노주석기자 joo@
  • 국군포로·납북어부 8명 귀환

    국가정보원은 2일 국군포로 노준기씨(70·가명) 등 5명을 비롯해 납북어부 이재근씨(62) 일가족 3명 등 모두 8명이 최근 제3국을 통해귀환해와 관계기관과 합동으로 귀환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귀환한 국군포로는 노씨 외에 유진호(70)·강상권(70)·김인준(71)·허형직씨(68·이상 가명) 등이며,지난 94년 조창호(趙昌浩·70)씨이후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16명이라고 국정원은 밝혔다. 이들중 강·김·허씨는 그동안 귀환 사실이 밝혀졌으나 노·유씨는이날 국정원의 공식 발표로 귀환 사실과 신원이 최초로 확인됐다. 국정원은 이들 대부분이 함경북도 새별군 새별탄광,은덕군 오봉탄광,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광산 등지에서 광부로 생활해 왔다고 진술했다고 설명했다.현재 이들 5명의 국군포로는 전사자로 처리돼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납북어부 이씨는 함경남도 함주군 소재 선박전동기공장에서 운전공(노동자)으로 일하다가 지난 98년 부인(58)·아들(23)과 함께 탈북해지난 7월 제3국을 통해 입국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국군포로 4명 귀환

    6·25전쟁 당시 전쟁포로로 억류돼 북한에서 거주하던 강모씨(70)등 국군포로 4명이 지난 7월 귀환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25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강씨를 비롯,김모(71),허모(68),김모씨(71) 등 4명은 올해 초 북한을 탈출,제3국에 체류하다가 지난 7월 귀환했다. 이로써 지난 94년 조창호(趙昌浩)씨 이후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15명으로 늘어났다. 전남 영광 출신의 강씨는 51년 국군 3사단에 입대,53년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함경남도 단천 검덕광산 광부와 경비원 등으로 일했다. 충북 청원 출신의 김씨는 49년 8사단에 입대한 뒤 50년 횡성전투에서 포로가 돼 평양 승호구역에서 공원으로 일했다.경남 진양 출신의허씨는 52년 수도사단에 입대,53년 김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또 다른 김씨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이들은 모두 전사자로 처리돼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노주석기자 joo@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8.끝)체첸 사태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북카프카스 지역이 21세기 지구촌의 화약고로 떠올랐다.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군의 무력항쟁이 계속되고있고,매장량이 엄청난 카스피해 유전과 송유관을 둘러싼 연안국들의 힘겨루기와 크고 작은 민족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체첸과 지난 10년동안 두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러시아군은병력수 및 화력면에서 월등한 우세에도 불구하고 1차 전쟁에서 패배한데 이어 11개월째에 접어든 2차 전쟁에서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체첸전은 특히 러시아와 체첸간의 독립전쟁 이상의 성격을 띤다.슬라브정교의러시아에 맞서 체첸 지역에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쟁의 뿌리] 이슬람교도인 체첸인들의 대(對)러시아 독립투쟁 역사는 140년 가까이 된다.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페르시아제국과 오토만제국간 영토쟁탈전에,18∼19세기에는 제정러시아의 남진정책에 시달렸지만 지금까지 러시아의 통치를 거부하며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서슬퍼런 스탈린 정권때에도폭동을 일으켰을 만큼 반러 감정은 뿌리깊다. 1991년 옛소련이 해체되면서 이 지역의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이 독립했고 체첸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체첸에는 질좋은 유전과 카스피해 유전과 유럽을 잇는 송유관이 지나고 있다는 경제적 이유와 인근 공화국으로 독립 움직임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2차 전쟁] 러시아군이 94년 전격적으로 체첸을 침공함으로써 1차 전쟁이발발했다. 러시아군은 체첸군의 끈질긴 저항에 밀려 2년1개월만에 철수,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지난해 8월 강경파인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체첸군이 이슬람공화국을 세우겠다며 인근 다게스탄공화국을 침공,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체첸을 침략하면서 4년만에 2차전쟁이 시작됐다.러시아군은 정규군과 국경경비대등 15만명의 병력과 막강한 화력을 투입,전면전을 감행했다. 올 2월1일 수도그로즈니를 점령했고 2월6일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하지만 남부 산악지대로 밀려난 체첸군은 게릴라전으로 버티고 있다. 최근에는 자살폭탄공격을감행,러시아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전망]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 체첸전은 제2의 베트남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비춰지고 있다.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을 바에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힘을 받고 있다. 체첸전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민과 군부의 지지를 얻어 집권했지만 지금은 계속되는 전쟁과 군부의 지나친 기대가 오히려 짐이 되고있다.매달 1억달러의 전비가 들고 8개월동안 2,000여명의 러시아 연방군 전사자를 낸 전쟁을 마냥 끌고만 갈수도 없다. 현재 러시아 정부와 체첸 임시정부간에는 종전협상이 진행중이다.하지만 러시아는 체첸이 항복하는 것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체첸군은 마지막 한명까지 항쟁을 계속한다는 입장이어서협상전망은 밝지 않다. 김균미기자 kmkim@. *용맹하고 난폭한 체첸인들. 세계적 장수촌으로 유명한 카프카스 지역에는 80여개 소수민족이 모여살고있다.이중 러시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는 체첸인들은 용맹하고 난폭하기로 유명하다. 체첸자치공화국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정도 크기에 인구는 고작 120만명에불과하다.영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덮여있어 목축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사내아이들은 10세가 넘으면 아버지가 총과 칼을 주고 생존능력을 키워줄 정도라고 한다. 체첸인들의 반러 감정은 수백년동안 러시아와 터키 등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단련됐다.이들은 40년대와 70년대에도 옛소련 정권을 상대로 항쟁했고 스탈린은 이들을 아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이슬람교도인 체첸인들은 슬라브정교를 믿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하드(성전)로 생각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의 저항은 실로 처절하기까지 하다.전쟁전 6.7%이던 출산율이 현재 7.4%로 높아졌다.14∼16세 소녀들의 조혼은 물론 일부다처제를 적극 권장하고있다.다산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자금원 역할을 했던 유전과 정유시설 대부분이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거의파괴됐다.따라서 체첸전을 성전으로 여기고 있는 전세계의 이슬람단체들은체첸에 무기구입과 용병고용을 위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체첸은 연간 260만t의 원유 생산지이며 주요 정유시설의 소재지이다.체첸지역의 원유는 1932년 한때 러시아 전체 생산량의 10%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중이 떨어졌다. 김균미기자. *체첸분쟁 일지. ●1944 스탈린,체첸인들 친나치세력으로 몰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1957 후루시초프,체첸인들 귀향 허용●1991.10 옛 소련 공군장군 출신 조하르 두다예프 체첸대통령에 당선●1991.11 체첸-잉구시공화국,러시아로부터 독립선언●1993.10 체첸,반정부군과의 내전 발발●1994.11 옐친,체첸 반군에 휴전 촉구●1994.12 러시아군,체첸 공격으로 1차 체첸전쟁 발발●1997.1 반군 지도자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에 당선●1997.5 러시아-체첸 평화협정 체결●1999.8 체첸반군,다게스탄 국경 침범해 이슬람공화국 선언●1999.9.30 러시아군,체첸 재침략으로 2차 전쟁 발발●1999.12.25 러시아군,수도 그로즈니전면 공격●2000.2 러시아군,그로즈니 장악.‘전쟁 종료’ 선언●2000.7 체첸반군,자살테러 감행.현재 종전협상 진행중
  • [50돌에 되돌아 본 6.25](2)최대격전 안강·다부동 전투

    “이땅에서 전쟁은 영원히 사라져야 합니다.” 6·25전쟁 50돌을 나흘 앞둔 21일 조선시대 사상가 이언적(李彦滴)선생의사당이 있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동리에서 만난 학도병 출신 참전용사 김영재(金泳在·69·경주시 용강동·상이2급)씨의 피맺힌 절규다. 전사(戰史)에 ‘최후결전 안강전투’로 기록돼 있는 이 지역은 본래 경주북쪽에 위치한 평야지대였다.동쪽으로는 포항,서쪽으로는 영천이 이웃한 요충지로 포항∼영천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의 중심지였다.당시 송요찬(宋堯讚)대령이 지휘한 국군수도사단과 이종찬(李鍾贊)대령의 3사단이 북한군 2군단,12사단의 8∼9월 두 차례에 걸친 공세를 저지하며 반격의 기틀을 다졌던 6·25전쟁 최대 격전지중 한곳이다. 20여일 동안의 안강전투가 끝나갈 무렵인 50년 9월20일 오른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아직도 투병중이라는 김씨는 “160명이던 중대원이 하루밤 사이에2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악몽 같은 그날을 회고했다. 김씨는 경주공업중 5학년이던 50년 8월15일 입대,열흘 동안 기초군사훈련만받고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안강은 낮에는 미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은 국군이,밤이면 게릴라전에능한 인민군이 점령하는 등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는 숨막히는 전투가 이어졌다.전사에는 남북한 군인 2,5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간 상처는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꽃다운 젊음이 무수히 사라진 전장터는 신록만 무성할 뿐이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안강 양동 골짜기는 지난 68년 저수지로 바뀌었다. 동족상잔의 한맺힌 땅이 포항시민들의 식수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희생자들의 넋을 떠올리며 낙산 1·2교와 동해남부선 철도가 가로지르는 100m 폭의 형산강 옆 야산에 자리잡은 전적기념관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기념관은 건설회사의 부도로 짓다만 채 흉물처럼 버려져 있었다. ‘잊혀져 가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며 안강에서 자동차로 2시간여를 달려 낙동강 물결이 굽이치는 경북 칠곡군 왜관에 도착했다. 다부동지역은 50년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0여일간 북한군 4개 사단,아군2개 사단이 투입돼 아군 2만5,900명과 북한군 3,500명이 목숨을 잃은 혈전의현장이다. 이곳에서는 경북도와 칠곡군 주최로 23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낙동강 세계평화의 제전’ 준비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24일에는 희생자 위령제가,25일에는 ‘낙동강 평화 선언식’이 이어진다. “가신 님의 짧은 인생은 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리”.최대의 격전이 치러졌던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왼쪽 봉우리 중턱에는 애절한 글귀가 새겨진호국용사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기념관 방명록에는 미국 등 참전군인들의 서명이 줄을 이었다. 최근 육군본부가 실시한 6·25전사자 유해발굴 결과 이곳에서 모두 117구의유해와 유류품 1,038건이 발굴됐다.이곳에서 나온 북한군 유골 2구는 경기도파주시 적성면의 적군묘지로 옮겨져 안장됐다. 다부1리에 사는 최사순(崔四順·80)씨는 “피란에서 돌아오니 군인들의 시신이 널부러져 있어 구덩이를 파고 30∼40구씩 끌어묻는 데만 꼬박 닷새가걸렸다”면서 “이렇게 묻은 시신만 해도 족히 300구는 될 것”이라며 어느덧 눈시울을 붉혔다.이곳도 최근 개설된 등산로를 따라 산새 울음소리와 패랭이꽃만 만발할 뿐전쟁의 흔적은 간데 없었다. 낙동강전선 최대 격전지였던 안강과 다부동은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으면서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안강·왜관 송한수기자 onekor@
  • [대한광장] 다시 새기는 보훈의 뜻

    6월은 보훈의 달이다.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피끓는청춘을 강토와 바다·하늘에 바친 혼백들을 위로하며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다시금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일하다 다치거나 핍박받은 사람은 물론이고 공익을 위해 사적 이익을 덜 취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보훈을 실천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형편이 크게 개선되고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라도 자리잡기까지우리는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헌신적인 사랑을 입었으며 수많은 보훈대상자들에게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다.가까운 세월의 강 너머에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키기 위해 열화같이 일어섰던 광주민주화운동의 혼령들이 두눈을 부릅뜬 채 아직도 유신망령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들의 주위를 떠나지못하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은 자신들의 이익과 영광만을 위해 죄없는 백성들에게 죄를 들씌워 살육했거나 긴급조치라는 악법을 날조해 수많은 민초들을 감옥에 처넣었지만 ‘부마항쟁’은 이 독재자들의 심장부를 쏘았고 광주 일원의 선량한국민들은 재편된 신군부의 집권기도를 막고자 싸웠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주월 한국군의 주적인 월맹군이 무력으로 통일한 베트남과 화해하고 대사급 수교를 하고 있지만 한 세대쯤 세월을 거슬러가면 그때의전사자들을 만날 수 있다.그들은 오늘의 경제적 풍요에 시동을 걸어준 자신들의 전공과 위훈을 송두리째 가로챈 박정희 정권의 고관대작들에게 구천에서라도 “오,노”라고 외칠 것이다. 필자는 얼마전 국가보훈처로부터 김대중 대통령 명의의 참전용사증서와 국립공원 등에 무료입장할 수 있는 보훈혜택을 받게 됐다.증서를 받던 날,필자는 1968년부터 69년까지 한국해군 LST808함에 함께 승조했던 참전전우들이보고팠다.그래서 주월한국군 백구부대 사령관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몇 구절을 다시 읽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그리고 형제들인 백구부대 전장병들은…골육지정으로 뭉쳐 한결같이 왕성한 책임감과 백전불굴의 정신력으로 제반 난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그러자 68년 6월 어느 새벽녘 사이공의 메콩강에서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해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LST815함의 이병철 상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역사를 반세기쯤 되돌아가보면 우리 민족은 가난과 돈,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그물망에 걸린 채 사람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사상’이라는 귀신에 홀리고 외세의 이익에 빌붙어 절대소수인 자기들만 잘 살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치렀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부자지간에, 그리고 형제자매가 나뉘어 지구상 어떤 야수보다도 잔인하고 악랄한 대량살상극을 주고 받았다.이 전쟁으로 많은 가족들은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다.지금 와서 그책임을 따지는 것은 별로 얻을 게 없지만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위훈에 무한한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 이상으로 부상당한 분들의 여생을 정부가 책임져야 함은 물론이다.동시에 전쟁의 와중에서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가족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쓰라린 분단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평양에서 만나 남북간 제반문제를 협의하는 것은 50년전의 동족상잔으로 만들어진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세월과 더불어 마감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분단을 극복하면서 겨레가 민주주의와 풍요로움과 평화를 공유할 수 있는 모티브를 만드는 민족적 대사건이다. 보훈의 달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은 남북 두 정상의 만남에 우리보다 더힘찬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월남자들의 이북거주 가족상봉은 물론 월북자들의 남쪽 거주 가족들도 죽기 전에 반드시 헤어진 남편과 아내,자식과 형제자매들이 다시 만나기를 기원할 것이다.저승의 그들은 이승의 우리들보다 욕심도 없고 어리석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이산가족의 재회 그리고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하루 속히 이루어야 할 민족적 과제이기에 남북정상회담 후속 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보훈의 참뜻을 다시 새기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6·25와 월남전 참전용사 그리고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은 이제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적 요구 앞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는점을 새삼 인식하자. 柳 一 相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장
  • 경실련, 북한군묘지 참배

    경실련 통일협회(이사장 韓完相 전 통일부총리) 간부와 회원 등 20명은 16일 민족 화해와 평화를 기원하는 차원에서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 북한군 묘지(일명 적군묘지)를 참배했다. 이들은 오후 2시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의 북한군 전사자 묘지에서묵념을 올렸다. 군 당국은 6·25전쟁 당시 전사자와 68년 1·21사태(청와대 습격사건) 때침투한 무장공비,98년 12월 반잠수함을 타고 침투하다 사망한 공작원 등 북한이 인수를 거절한 110명의 시체를 모아 관리하고 있으며,일반인의 방문은이번이 처음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 방송사 6·25 50주년 특집 고민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각 방송사의 6·25 특집이 예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북한에 대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새로운 시각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예년에 비해 특집 프로그램의 수가 크게 줄었다.이는 남북정상회담이성공을 거두면서 냉전의 유산인 한국전쟁을 종전처럼 다루기 어려워진 탓이다.아울러 6·25를 불과 10여일 앞두고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남북화해의 시각을 담은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는게 시간적으로 힘들게 됐다. 드라마는 KBS의 ‘유리구슬’이 유일하다.그나마 6·25 전후에 방송될 예정이었으나 7월3일과 4일(밤9시50분)로 날짜를 늦춰 방송된다.예년의 6·25 특집극이 6·25 전에 방송됐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유리구슬’은 한국전쟁당시 양민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풍우(정은표)가 베트남전에 참전, 양민학살을 하게 되고 나중에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 반전운동가가 돼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다큐멘터리 방송에도 비상이 걸렸다.KBS가 지난해부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12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아직 방송시각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남북한의 분단을 세계 역학구도와 한반도 정치세력의 대결 등에서 풀어나간 1편 ‘분단’은 KBS1에서 25일부터 매일 방송하기로 두달 전부터 확정돼있었다.그러나 18일 방송하기로 예정됐던 KBS1 ‘일요스페셜-6·25 전사자들의 유골찾기’가 25일로 늦춰짐에 따라 방송연기가 논의되고 있다.18일 ‘일요스페셜’에서는 남북정상회담 기간동안 남과 북의 다양한 표정을 담은 ‘서울-평양,2000.6.13-15’가 방송된다. MBC가 23일 방송할 ‘6·25 50주년 특집­한국전쟁’은 내용이 훨씬 늘어났다.프로그램 촬영은 방북단이 돌아온 15일 끝났지만 한국전쟁 참전국을 돌며6개월 정도 해외촬영을 한 부분은 현재 편집과정까지 끝나 손을 쓸 수 없는상태다. 대신 프로그램 말미에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의 3일간 일정을 담고내레이션을 현재 시점으로 바꾸는 등 대폭 수정할 예정이다.외국인 전문 케이블방송인 아리랑TV에서 제작하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전쟁 참전국에도 배포돼 해당 국가에서도 방송될 예정이다. 전경하기자 lark3@
  • 벨기에서 한국戰 조망 국제학술회의

    [브뤼셀 연합] 한국전 발발 50주년을 맞아 유럽의 시각에서 한국전을 조망하는 대규모 학술회의와 전시회가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잇따라 열린다. 13일부터 이틀간 알베르 2세 벨기에 국왕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한국전 관련국제학술회의는 한국과 벨기에,프랑스,미국,일본, 러시아 등 각국의 학자와관리,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한국전의 배경과 역사적 파장을 다각적으로 논의한다. 회의 준비에 참여해온 벨기에의 한국전 참전용사전우회는 이 회의에서 38선의 획정 배경과 주체 및 유럽국들의 유엔군 참전이 유럽의 정치 발전에 미친영향 등을 중점 토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브뤼셀의 왕립군사박물관에서는 한국전 당시의 사진 등을 전시하는 한국전 50주년 전시회가 15일 개막된다.벨기에는 한국전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3,250명(룩셈부르크 78명 포함)을 파병해 339명의 전사자와 실종 39명,포로 29명,부상 1,240명의 희생을 치렀다.
  • 특별기고/ 맑은 마음으로 허심탄회해지시라

    모레,2000년 6월12일,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대표단과 취재단 일행이 대거 평양으로 들어간다.그렇게 2박 3일간의 북한 체류 일정이 시작된다. 남북 당국간에 이 합의가 이뤄진 뒤 지난 두어달 어간에,이 나라의 수많은논자들은 이번 이 회담의 거창한 뜻을 중언부언 강조한 바 있거니와,정작 이 날에 와 닿으니,그 수다한 말,말,말 너머의 본원적인 떨림,전율이 온 몸을휘감아 온다. 더러는 ‘언외(言外)’의 국면이라는 것이 있다.한두마디 말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어느 절대절명의 정지.말 몇마디나 글 몇줄이 일거에 싹수가 없게 떨어져버리는 국면.이번 남북 정상회담이야말로 바로 대표적으로 그런 정지요,국면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선포되고,같은 해에 역시 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나라가 반 동강이 난 뒤,실로 처음으로 남북 두 정상이 마주 앉는 이 자리는,비단 지난 55년간의 피 어린 남북 분단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이전, 19세기 말부터 이 나라 운세가 곤두박질 쳐 오다가 끝내는 35년간식민지로전락해 버렸던 저 망국의 비운까지, 지난 백년 어간의 이 나라 이민족의 갖은 환란과 굴욕을, 그리고 끝내는 제 땅에서 못 살고 이국 땅을 떠돌다가 유랑민으로 숨져갔던 선대들의 통한까지를 안 자락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남북 정상 두 분께서 만나는 그 현장을 우리 산 사람은 산 사람들대로 텔레비전 화면으로 볼 것이지만,이미 저승에 가서도 유한(遺恨)을 품은 채 삭이지 못하는 6·25전란시의 저 수다한 남북 양측 전사자들의 원혼과,그 이전에 나라를 잃고 이국 땅에서 비명에 간 저 수많은 우리 선대들도 선대들대로,한껏 눈을 부릅뜨고 두 정상이 만나는 저 광경을 뜨겁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그렇게 ‘망국’에서 ‘식민지’로,다시 ‘분단’으로,지난 백년을 악몽으로 얼룩지게 했던 우리 현대사는 한 맥락이었음이 이 자리서도 새삼스럽게 확인이 된다. 따라서 이 민족의 지난 현대사 백년의 그 깊은 질곡을 이 참에 끝장내고,이 민족이 명실상부하게 새롭게 일어서며 웅비(雄飛)해갈 수 있는 기본 터전을 마련해 보자는 웅대한 뜻이 이번 이회담에는 담겨 있다.두 정상께서는 어련하시겠지만,2박 3일 긴 체북(滯北) 일정을 지켜보게 될 우리 모두 이만한시야는 모름지기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창한 뜻을 중언부언 강조하는 것이 이 자리에서는 조금 어색하고 가당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왜냐하면 남북 정상의 만남이 바로 코 끝에 와 닿은 이 마당에서는,그런 종류의 장중한 연설은 그 분들의 운신을 필요 이상으로 무겁게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며칠 전의 모 기관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3.3%가 2차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벌써 전망들을 하고 있었으며,서울에서 열릴 경우 95.1%가 찬성한다고 하였고,특히 81.9%는 그럴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할 것이라고도 하고 있었다.환영할 것이라고…!! 아,어떤가.놀랍지 않은가.이 정도로까지 우리 남쪽 인심은 지난 2,3년 어간에 급변하고 있었던 것이다.98년 ‘현대’의 정주영옹이 소 1,0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 입북(入北)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기겁을 하게 놀랐었고,온 세계가그 그로테스크한 정경에 혀를 내둘렀었지 않은가.그리고작년 99년에는 서해상에서 남북 함정 간에 불을 뿜으며 투덕투덕 맞붙기도했었는데,이젠 북의 국방위원장이 서울로 오게 되면 환영할 것이라고들 하고 있으니,이거야말로 명실공히 격세지감이 아니고 무엇인가.우리 남북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이런 정도로 급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북도 마찬가지였다.지난 2년 어간에 북도북대로 알게 모르게 엄청나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오죽하면,김정일 총비서가 예고도 없이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중국 요인들을 만났을 것인가…!! 요컨대 결론은 간명할수록 좋다.무겁고 장중한 것일랑 일단 차후로 미루고,우선은 남북 정상 두 분께서는 진정으로 맑은 마음으로 허심탄회해지시라.그렇게 두 분부터 그 간에 50여년간 끊겼던 동족의 정분이 싸목싸목 되살아 오며,공히 가슴이 화릇하게 따뜻해지시라. 두 분이 같이 파안대소로 많이 많이 웃으시라.우리 모두 이번 두 정상의 ‘만남’에서는 그 이상으로 더 바라질랑말자.과욕을 부릴 것 없이,이번 ‘만남’에서는 이런 정도면 족하다.이거야말로 바로 남북간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발이 될 것일테니까…. 이호철 소설가·경원대 초빙교수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 (1)17년 내전 스리랑카

    지구촌 곳곳에서 인종간,종교간 반목과 무력분규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그범위가 확산되고 있다.무력 분규는 코소보,체첸등 옛소련,동구지역에서 시작해 지금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등 지구촌 전역을 무대로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다.제3세계 분쟁지역의 경우 무지와 가난,천재지변,질병등이 겹쳐 자체해결의 희망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유엔이나 서방의 관심권 밖에 있어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렵다.주요 분쟁지역의 현황과 분쟁이 일어난 배경,해당 민족들의 역사,문제점등을 시리즈로 보도한다. ‘긴급…,스리랑카 반군 자프나 탈환 임박’‘정부군 2만여명 자프나에 고립’,‘반군 150명 사망’.외신들이 남아시아 끝에 위치한 스리랑카로부터급박하게 전개되는 내전소식을 연일 전세계로 전송하고 있다. 타밀족 독립 무장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가 5년만에 옛 수도인 북부의 자프나 탈환을 눈앞에 두고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올해를 ‘전쟁의 해’로 선언한 반군이 자프나에서 1㎞ 떨어진 곳까지 진출,정부군에 “항복하거나수도를 즉각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4월말 자프나지역과 본섬을 잇는 길목인 ‘코끼리 통로’를 반군에 내주고 자프나 반도에 고립된 정부군 2만여명은 2,000여명의 반군에 대항,유일한 보급로이자 퇴각로인 팔라리 공군기지와 인근 항구를 사수하고 있다.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정부군에겐 이마저 힘에 부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스리랑카 정부는 인도를 비롯,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국내 언론의 보도를 전면 통제하고 전비충당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다.인도가 개입 의사를 시사했고 평화협상 중재자로 나선 노르웨이 외무차관이 찬드리카 쿠라마퉁가 대통령과 만나 8만명의 사망자와 70만명의 난민을 낸 17년 내전을 종식시킬 방안을 논의중이다.쿠라마퉁가 대통령이 타밀족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이지만 야당과 정부내 반발,자치가 아닌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반군의 주장에 밀려 결실을 맺을 지는 미지수다. ◆분쟁의 역사 스리랑카는 16세기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다1948년 영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했다. 65년부터 소수 힌두계 타밀족(18%)은 다수 불교계 싱할리족(75%)으로부터분리독립운동을 펴왔다.이것이 민족·종교간 분쟁으로 내닫기 시작한 것은 72년 타밀족에 대한 차별정책에서 비롯됐다.싱할리족 정부가 싱할리어와 불교를 우대하는 등 타밀족에 불리하게 헌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영국식민지 시절 타밀족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이들의 지배를 받았던 싱할리족의 보복조치인 셈이다. 이에 반발,타밀족의 폭동이 77년,81년,83년 간헐적으로 일어났다.83년 7월타밀족의 본거지인 자프나에서 싱할리족 군인 13명이 살해되자 수도 콜롬보등에서 싱할리족에 의한 무차별 보복전이 시작됐다.전국적으로 1,000여명의타밀족이 살해되는 이른바 ‘대학살’이 자행됐고 콜롬보시에서만 10만명의난민이 발생했다.이를 계기로 타밀엘람해방호랑이가 결성되면서 무력대결로치달았다.90년부터 5년간 자프나 지역에서 사실상의 독립정부 역할을 해왔던반군은 그러나 95년 9월 정부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정글로 쫓겨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정부군과 반군이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한 평화적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노르웨이가 중재는 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밀접한 인도가 국내외 역학관계에 발목이 잡혀 적극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두차례 군대까지 파병했지만 이번에는 군사개입은 배제한 채 양쪽이 요청할 경우 중재 의사만 밝혔다.91년 인도군을 파병했던 라지브 간디 총리의 암살 악몽을 잊지 못하는 인도 국민들과 연정을 이룬 타밀 정당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노리는 상황에서 지역 맹주로서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도 아쉬워 인도 정부는 개입여부를 놓고딜레마에 빠져있다.그래서 사태가 진정돼 지친 반군이 협상테이블에 나오도록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 분석까지 나온다. 김균미기자 kmkim@. *'엘람해방호랑이' 어떤조직. 83년 결성된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는 타밀족 분리독립을 주도하고 있는무장반군 조직이다. 병력은 1만여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10만명이 넘는정부군의 10%에 불과하다.이들은 자동소총에서부터 지대공미사일과 로켓포 등중화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세계에서 훈련이 가장 잘된 최정예 전사로불리운다.야포와 탱크 등으로 중무장하고 해군력까지 보유하고 있다.특히 포로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몸에 청산가리를 소지하고 다닌다. 반군 지도자는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46).인도 타밀족 출신으로 무자비하고 포악하기로 이름난 그는 18살때인 72년 자프나 시장을 살해하면서 반군활동에 참여했다.86년 LTTE의 유사 타밀 무장조직인 TELO의 지도자를 모두살해하고 89년 타밀 무장조직을 통합했다. 반군은 특히 ‘검은 호랑이’로 불리는 자살특공대로 악명이 높다.2차 대전때 일본 가미카제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연상시킨다.프레마다사 대통령(93년 5월),위저라튼 국방장관(90.12월),디사나야케 대통령 후보를 암살했다.91년 라지브 간디 인도총리도 자살특공대 소속 여성대원에게 암살됐다.95년스리랑카 해군에서 둘째로 큰 군함이 소녀대원 3명의 자폭공격으로 침몰됐으며,지난 3월10일 수도 콜롬보 국회의사당 앞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28명이 사망하고 60여명이 부상했다.지난해 12월대통령 선거 유세현장에서 자살테러가발생, 집권당 후보였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한쪽 눈을 실명했고 3명의 장관 등 38명이 숨졌다. 전사자가 늘면서 남성대원들의 자리를 여성들로 채우기 시작,현재 전체 병력의 30%를 차지하며 상당수가 자살특공대로 활동중이다. 인도 남부의 5,000만 타밀족과 캐나다 영국 등 해외에 거주하는 수십만 동족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 김균미기자
  • 베트남 통일 25주년/ (하)미국의 상처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어느 전쟁이나 그렇겠지만 미국에게 특히 베트남 전쟁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남긴 뼈아픈 전쟁이었다. 호치민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린든 B.존슨이 군사개입을 시작한 베트남 전쟁은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 동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잊지못할 상흔만 남겼다. 1955년 미군 고문단이 베트남 땅을 밟은 이래 65년 첫 전투병력이 들어가개전,75년 4월29일 미대사관철수 때까지 1,500억달러를 쏟아부었고 5만8,000명이 희생됐건만 결국 패전의 쓴맛을 봐야 했다. 남북전쟁이 미국의 완전한 통일체 국가형성에 기여하고 세계 1·2차 대전이미국에 부를 가져다 주었다면 베트남전은 정치권력의 부정적 속성과 지방정부의 중앙통제 반발,군산복합체의 상업주의,이에 따른 국내여론 분열과 충돌등 미국의 환부를 여지없이 드러낸 전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이 받은 상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1,2차대전 승전국으로 미국 제일주의를 과시하던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이후 걸프전 승전때까지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이라고 역사가 피터 쿠즈니크는 지적했다. 54년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지역 침공으로 프랑스군 3,000명,베트남군 8,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제네바조약을 끝으로 식민지배를 종식시켰다.하지만이때 맺은 조약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현실,즉 냉전 대결장으로인도하고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세계와 소련·중국이 중심이 된 공산주의와의 갈등은한반도의 38선 같은 ‘이념의 국경’ 북위 17도선을 그었고, 한국전에서 끝장을 보지 못한 냉전 강대국들은 베트남에서 재대결을 준비해야 했다. 혁명의 대상인 남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캄보디아를 통한 루트를 만든 뒤 미군을 공격한 북베트남의 호치민을 단죄한다는 명분에 4명의 미국 대통령은울창한 열대우림 땅속으로 숨은 ‘보이지 않는 적’ 베트콩과 숨바꼭질하며베트남 전쟁이라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주창했던 드와이트 아이젠아워,프론티어 주창으로 미국의 힘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존 F.케네디,그의피살로 대권을 인수받은 뒤 차기를 노린 린든 B.존슨,종전이란 국민들과의 약속을 어겨가며 확전에 열을 올렸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등 역대 4명의 대통령은 그들의 미국내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두 베트남전으로 비난받아야 했다. 미 대통령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베트남전쟁에 M16 자동소총,신형제트전투기,각종 장갑차량,‘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 등 물량공세로 대응했지만 결과는 전례없는 미군의 인명피해에 불과했다.미국은 베트남전장과 국내반전여론이라는 2중 전선에 시달리면서 전략부재를 드러내야 했다. 존슨은 매일 아침 신문과 TV화면을 통해 죽어나가는 미군 모습이 생생하게전달되는데도 불구하고 승전 홍보를 강조하다 여론에 부딪혀 “차기 대권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해야 했다.닉슨은 비등한 반전 여론 와중에 폭로된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다. 반전 여론은 70년 오하이오주 켄트대학의 반전론자 학생 4명이 경찰총에 숨진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고 미국은 결국 75년 4월 베트남 철수와 함께 씁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hay@. *한국에 남긴 교훈.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나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뤘지만 한국은여전히 북한과 대치중이다.통일된 지 2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겪고 있는 각종 후유증은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베트남은 인구 7,800만명중 전후 세대가 50%를 넘는다.이들은 돈에 대한 생각이나 의식구조가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와는 판이하게 달라 세대간 갈등이현안으로 떠오를 정도다.한국의 경우 전후세대가 인구의 80% 가량을 차지한다.올해로 종전 50년을 맞는 한국은 분단의 역사가 긴 만큼 세대간 인식의골도 깊다. 남북간 개발의 불균형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베트남은 뒤늦게 북부개발에 나섰지만 베트남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외국자본 유치도 난관에 부딪쳤다.남에서는 북부를 살리기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고있다는 불만과 함께 남의 제한된 ‘번영’마저 잃을까 불안해한다. 호치민시(옛 사이공)를 중심으로 남부는 86년 경제개혁 정책을 표방하면서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특히 97년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경기가 악화되면서 이들은 순식간에 극빈층으로 추락했다.범죄와 마약,매춘 등 사회문제가 심각하다.교통망과 상하수도 시설등사회간접자본시설은 거의 갖춰져 있지 않다.남북간 경제격차는 날로 심화돼지난해 상반기 남부의 수출은 22% 증가한 반면,북부는 15% 감소했다. 상호불신과 감정의 앙금도 여전하다.북부인들은 전쟁통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책임을 남부인에 돌리며 원망섞인 눈초리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최근 중앙정부내 고위직에 남부인의 진출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남부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공직과 공기업에서 득이 되질 못한다. 한국의 경우 통일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대한 우려는 더욱 크다.베트남의교훈을 거울 삼아 남북의 균형개발과 이질감 해소 등 장기적인 민족화합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김균미기자 kmkim@. *베트남 근대사 주요 일지. ◆1859 프랑스군 사이공 점령◆1930 베트남 공산당 결성◆459.2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45 9. 미·프랑스 연합군 베트남 진주◆54 제네바협정서 17도선 남북 분단◆55 남부에 미국지원 응오 딘디엠 정부 출범◆60 베트콩 월남민족해방전선 수립◆65 2 미국의 북폭개시,베트남전 시작. ◆68 9 호치민 사망◆73 1 파리 휴전협정 조인.3월 미군 마지막 철수◆75 4. 29 미대사관 철수◆75 4.30 월남 패망.통일◆76 7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86 6차전당대회서 도이머이 경제정책 도입◆92 12.22 한국과 수교◆95 7.12 미국과 수교
  • 피의 능선등 격전지 6곳 6·25전사자 유해 찾는다

    6·25전쟁중 전사한 국군 유해발굴작업이 오는 3일부터 실시된다. 31일 육군에 따르면 6·25 격전지 29곳 가운데 올해 1차로 경북 다부동·안강지역과 경기도 김포 개화산을 비롯,강원도의 화천 마현리,양구 백석산,양구 피의능선 등 6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진다. 발굴된 유해는 고고인류학자,유전공학자,치과의 등 20여명의 국내 전문가와청주 중원문화연구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을 통해 군번표,신발,탄약 등유류품과 DNA 유전자 감식으로 신원확인작업을 거치게 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DNA 유전자 감식을 위한 시료채취가 불가능한 유해는 국립묘지 납골당에 합동 안장할 계획이다. 북한군과 유엔군으로 판명된 유해는 북한을 비롯해 해당국가에 인도하되,인수를 거부하면 경기도 파주군의 ‘북한군·중공군 묘지’와 부산 ‘유엔군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다. 육군은 오는 2001년과 2002년 9개 지역,2003년 5개 지역 등에서 유해발굴작업을 계속하며,이 지역에 최소한 10만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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