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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사 함께했던 형제

    6·25전쟁 직후 동반 징집된 뒤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전사한 형제의 사연이 뒤늦게 공개돼 전쟁의 비극성을 일깨우고 있다.1951년 4월 전남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숨진 유석오·석환 형제의 이야기다. 24일 국립현충원에 따르면 유씨 형제는 1950년 12월31일 입대해 국군 8사단 10연대에 함께 배치받았다. 유족들은 입대연령이 안 된 동생 석환(당시 17세)씨가 함께 징집된 형 석오(당시 19세)씨를 의지하며 줄곧 따라다닌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2005년 개봉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장동건 분)·진석(원빈 분) 형제의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형제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 때 강원도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한 뒤 같은 해 4월6일 전남 화순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됐다가 화순읍 이십곡리에서 전사했다. 육군 전사(戰史)에는 유씨 형제가 배속됐던 8사단 3대대 10중대가 화순지역 화학산, 밀봉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려고 1951년 4월5일 이십곡리 일대로 파견됐다가 이튿날 빨치산의 기습을 받고 26명이 숨진 것으로 나와 있다. 형제의 유해는 육군이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2001년 5월21일 실시한 유해발굴 작업에서 함께 발견됐다. 육군은 유해에서 유전자(DNA)를 채취해 전사자 유가족의 DNA와 일일이 대조한 결과 신원을 최종 확인,2002년 4월2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형제는 죽어서도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나란히 묻혔다.이세영기자·연합뉴스 sylee@seoul.co.kr
  • 함양, 황석산성 역사 다시 쓴다

    함양, 황석산성 역사 다시 쓴다

    “황석산성을 아시나요?” 경남 함양군이 순국선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황석산성 역사 재발굴 작업에 나섰다. 천사령 함양군수는 6일 “사장돼 있다시피한 황석산성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 내겠다.”고 밝혔다. 황석산성은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구축했던 높이 3m, 길이 2.9㎞의 요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한양 입성을 위해 전주 방면으로 진격하던 일본군 주력 부대를 맞아 조선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격전지.2박3일 동안의 전투에서 353명의 조선군이 전사한 곳으로 밝혀져 1987년 국가문화재 사적지(322호)로 지정됐다. ●일본내 관련 자료 수집 하지만 실제로는 353명이 아닌 3500여명의 조선군과 민군이 숨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함양군이 황석산성 역사 재발굴에 나선 까닭도 여기에 있다.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이나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과 비슷한 격전지였는데도 제대로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양군 문화관광과 최용배씨는 “353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 정도의 군사로 지킬 수 있는 성이 아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거창·함양 등 7개 현의 군사들이 황석산성으로 집결해 있었고, 김해부사도 황석산성으로 옮겨와 일본군과 전투준비를 했다. 함양군은 올해 황석산성 사적지 지정 20년을 맞아 1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400여년 전 전투 상황을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자료 발굴에 나서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황석산성 전투와 관련된 일본내 자료를 입수하는 등 본격적인 역사 발굴 작업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日, 전투 결과 왜곡 의혹 최근 들어 일본군의 황석산성 전투 사실 왜곡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함양군의 역사재발굴 결과가 주목된다. 황석역사연구소 박선호 소장은 “7만 5000여명의 일본의 주력 부대 가운데 2만여명이 사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본군 피해 규모는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일본군은 이름없는 시골산성이라고 가볍게 보고 전투를 벌였다가 뜻밖에 전사자가 많이 나오자 전투결과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황석산성 전투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내면서도, 상을 내리지 않은 점이 일본군 피해 규모가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순국선열 추모사업 국가차원 승격 추진 함양군은 이같은 역사 발굴작업을 토대로 민간차원에서 치러지고 있는 순국선열 추모 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승격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동원 황석산성 순국선열추모위원장은 “사당만 있고 관리사무소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적지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국가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주문했다. 문화재청 사적과 관계자는 “칠백의총은 성역화 추진과정에서 예외적으로 국가가 관리하게 됐다.”면서 사적지 관리 등은 광역 또는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양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Ⅳ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이 심하전역(深河戰役)에서 패하여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야(朝野)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한편에서는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들여 가두라는 아우성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항복 때문에 조선도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명 일각에서는 조선군의 항복이 고의적인 것이라는 의구심과 조선에서 다시 원병을 동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광해군은 이 같은 안팎의 아우성을 잠재우고 패전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명 원정군의 실상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薩爾滸) 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1619년 3월1일부터 4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10만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후금군의 전사자는 고작 200명 정도였다. 청나라 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에서는 ‘이 같은 전과는 하늘이 후금을 도왔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적었다. 후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예측했던 것처럼, 명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참패였다. 명군은 우선 병력에서 후금군을 압도하지 못했다. 명군 지휘부는 47만의 대군을 동원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 순수 명군 병력은 10만이 채 되지 못했다. 당시 후금군은 6만 정도였다. 공격군의 병력이 수비군의 병력보다 3배 정도는 많아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병가(兵家)의 정설임을 고려하면 명군은 우선 원정군의 면모를 제대로 갖췄다고 하기 어려웠다. 명군 병사들의 자질 또한 열악했다. 원정군의 병력 가운데 상당수는 사르후 전역 직전에 끌어 모은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중에는 시정의 무뢰배나 비렁뱅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갑자기 훈련시켜 정예병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 같은 병력 100만을 끌어모아도 적 한 명을 죽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다. 갑자기 끌어모은 오합지졸로 후금의 철기(鐵騎)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명군의 무기와 화력 역시 문제가 많았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군을 지휘했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의 사령관 유정(劉綎)의 휘하에는 대포조차 없었다. 좌익중로군(左翼中路軍) 사령관 두송(杜松) 역시 조선군 화기수 300명을 끌어다가 선봉으로 삼았다. 변변한 화력을 갖추지 못한 채 객병(客兵)인 조선군 화기수들을 서로 먼저 끌어가려고 했다. 명군 지휘관들은 서로 전혀 인화(人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네 개 방면의 부대로 편제된 명군은 본래 3월1일을 기하여 일제히 허투알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약속했는데, 주력군인 좌익중로군을 이끌던 두송은 약속을 어기고 하루 일찍 출발했다. 공명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후금군의 정탐에 걸렸고, 고지를 선점한 후금군의 돌격전에 말려 참패하고 말았다. 두송의 패배 이후 마림(馬林)과 유정이 이끄는 나머지 부대들도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전후 수습책 병력, 병사들의 자질, 무기, 지휘관의 인화와 지휘 능력 등 승패를 결정하는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조선 내부에서는 패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조선군에게 돌리고 있었다. 심지어 ‘명이 요동 전체를 누르하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순전히 강홍립 때문’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 신료들도 있었다. 전쟁 직후 명 조정과 요동에서는 미묘한 소문이 돌았다.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군이 고의적으로 후금군에게 항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투항한 강홍립이 후금 진영에 머물고 있는 사실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조선 조정이 강홍립의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주시했다. 명은 강홍립의 투항을 계기로 조선이 후금 측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서광계(徐光啓)는 조선과 후금이 연결되는 위험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조선으로 가서 조선 군신(君臣)들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자청했다. 서광계는 임진왜란 당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키고, 조선을 다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야흐로 명의 압박이 다시 가중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서광계 등의 재징병 요구를 막아내기 위해 부심했다. 그는 우선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의심을 차단하기 위해 김응하(金應河)를 현양(顯揚)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는 원정군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한 인물이었다. 후금군의 공격으로 진영이 함몰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순국한 용장이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빼들고 적과 맞섰고, 오른손에 화살을 맞자 왼손으로 칼을 바꿔 잡고 끝까지 저항하여 후금군조차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이 의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김응하를 모시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또한 그의 전공(戰功)을 찬양하는 시집 ‘충렬록(忠烈錄)’을 편찬했다. 편찬 이후 충렬록을 요동 지역까지 유포시켰다. 조선군 전체가 김응하처럼 용맹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강홍립의 항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명의 재징병 요구를 거부하다 1619년 4월 이후, 명에서는 조선을 설득하여 후금을 치기 위한 원병을 다시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명 조정은 조선에 누차 사신을 보내 병력의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물론 그 명분으로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이 거듭 강조되었다. 오랑캐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여 또 다른 ‘오랑캐’ 조선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체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더 이상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화기수들이 심하전역에서 대부분 전사했다는 것, 거듭된 흉년 때문에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재징병 거부의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이 다시 군대를 보내면 누르하치는 의주까지 쳐들어 올 것이고, 의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명의 전략 요충인 뤼순(旅順)을 공략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그 같은 사태를 막으려면 조선은 평안도를 확실히 지키는 것이 최상이고, 그것이 궁극에는 명을 돕는 계책이라고 설파했다. 명의 재징병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의 단호한 태도는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광해군은 “나는 이미 출병 이전부터 패전을 예견했다.”고 상기시키고 자신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료들의 반발을 묵살했다. 그는 강홍립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홍립으로부터 밀서(密書)를 전달받아 후금의 내부 정세를 파악했다. 신료들은, 강홍립의 투항 직후 후금이 보내온 국서를 소각하여 명으로부터 의심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국서에 속히 응답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들을 질타했다.‘우리에게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형세가 없는 처지에 고담준론(高談峻論)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오랑캐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신료들이, 출병과 패전 때문에 재정 상황이 어려워졌음을 들어 궁궐 건설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축했다.‘궁궐 공사를 중단하면 누르하치의 목이라도 베어올 수 있느냐?’고 비아냥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채근하여 패전을 초래했던 신료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다. 자신의 예측대로 맞아떨어진 심하전역 패전을 계기로 외교정책에 대한 광해군의 자신감은 커졌다.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고, 신료들의 궁궐 공사 중단 건의를 묵살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부작용을 부르는 법이다. 이미 폐모논의 때문에 광해군을 삐딱하게 보고 있던 재야의 신료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하전역 이후, 외교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가열되는 와중에 인조반정의 조짐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씨줄날줄] 평화지수/육철수 논설위원

    “전쟁은 욕심과 자만에서 탄생하며, 눈물과 고통 그리고 피만 남는 비참한 것이다.” 19세기 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는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꿰뚫었다.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에서는 세계 1,2차 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중동전, 이라크전 등으로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인류는 철이 덜 들어도 한참 덜 든 것 같다. 역사상 나라간 크고 작은 전쟁이 4만 5000회나 벌어졌다니,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숙명적으로 평화와 공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100년동안 세계에서 2억명이 전쟁과 학살로 목숨을 잃었고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잿더미가 됐다. 그런데도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더니, 평화는 멀고 전쟁은 가까운 탓인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게 벌써 4년이 넘었다. 미국은 그동안 5000억달러를 전비로 쓸어부었다.1분에 2억 3000만원꼴이다. 전쟁 중 이라크 민간인 65만명이 희생되고, 미군 전사자도 3500명에 이른다. 이들의 고귀한 생명과 바꿀 만한 전쟁의 가치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그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조사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글로벌 평화지수’는 전쟁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는 미국에 엄중한 책임을 묻는 듯하다.EIU는 ▲최근 5년간 전쟁 횟수 ▲참전 중 사망 군인의 수 ▲무기 판매액 ▲폭력범죄 수준 ▲이웃 국가와의 관계 등 20여개 항목을 바탕으로 나라별 평화지수를 산출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미국은 121개국 중 96위로 나타났다. 알카에다가 암약 중인 예멘이나, 미국이 ‘평화의 훼방꾼’으로 지목한 이란과 비슷한 수준이다. 자칭타칭 ‘세계평화의 수호자’로서 국가적 자존심과 체면이 말이 아니게 생겼다. 더구나 이라크는 미국 때문에 가장 평화롭지 못한 나라로 평가됐으니 억울할 만도 하겠다.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가 뭔지 한수 가르쳐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살상과 파괴로 이라크 국민정신의 피폐화는 회복불능 상태다. 자고로 평화란 힘으로 심는 게 아니거늘, 뭘로 이를 보상할 것인가.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전사자 유족의 품으로 간 강아지 美 전역 감동

    전사자 유족의 품으로 간 강아지 美 전역 감동

    “내 아들이 생전에 함께 한 강아지라서…” 최근 이라크에서 전사한 한 병사가 키우던 강아지를 유족들이 인도 받아 훈훈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초 이라크에 주둔한 미국인 저스틴 로린즈(Justin Rollins)병사는 유기견 한 마리를 발견해 정성들여 키웠다. 그러나 얼마 후 저스틴 병사는 갑작스런 폭탄 테러로 사망해 강아지만이 홀로 남겨졌다. 유족들은 그 강아지를 찾아 달라고 소속부대에 연락, 부대원들은 강아지의 사진을 들고 수색에 나섰다. 부대원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강아지를 찾아 유족들의 품으로 인도했으며 가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저스틴 병사의 약혼녀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행복을 가져다 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품으로 오길 바랬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유족들은 전사한 아들을 기리는 뜻으로 강아지에게 ‘Hero’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주검 쌓이는 이라크

    주검 쌓이는 이라크

    미국에서 5월의 넷째주 월요일은 주(州) 정부마다 전몰 장병을 추모하는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 주간의 시작일이다. 남북전쟁 이후 연례 행사로 굳어졌지만 이라크 개전 후 매년 새로 조성되는 무덤 숫자만 헤아리는 행사가 됐다. AP통신은 27일(이하 현지시간) 지난해 ‘메모리얼 데이’ 이후 지금까지 1000여개의 새로운 무덤이 생겼다고 전했다. 무덤주인의 대부분은 이라크 전사자들이다. 실제 26일까지 사흘동안 이라크에서는 미군 8명이 무장단체의 공격이나 교전 중 사망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같은 날 바그다드와 남부 바스라 일대를 폭격했다.2003년 5월1일 한달 열흘만에 종전이 선언된 이라크 전쟁은 만 4년을 넘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민과 이라크인 모두에게 너무 많은 생채기만 내고 있다. 2월부터 ‘이라크 안정화’ 작전을 밀어붙인 부시 행정부의 기대와 정반대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특히 4,5월에는 개전후 처음으로 월별 사망자가 두달 연속 세 자릿수를 기록했다. 미군 전사자는 4월 104명,5월에는 26일까지만 101명으로 두달 연속 100명을 넘어섰다. 매일 3.5명정도 숨진 꼴이다. 현 추세대로라면 5월 사망자는 120명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개전 후 최대 월별 사망자는 2004년 11월 137명이다. 지금까지 미군 사망자는 모두 3452명, 부상자는 2만 5242명으로 집계됐다. 미군만이 피해자는 아니다. 이라크 민간인은 매달 1000명이 넘게 희생되고 있다. 이라크 보안군과 민간인 사망자는 4월 1821명,5월 1499명으로 집계됐고 전체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6만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군과 이라크 민간인에게 ‘잔인한 4월’,‘피의 5월’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군 시한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부시 대통령은 25일 마침내 1000억달러에 달하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추가 예산법안에 서명했다. 철군시한을 명기키로 한 미 의회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으름장에 양보안을 내놓은 것이다. 의회는 최종안에 철군 시한을 삭제했다. 부시 대통령의 집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이라크 전쟁을 끌고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진 셈이다. 백악관은 이날 내년 대선 기간에 이라크 주둔 미군을 절반까지 감축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26일자 뉴욕타임스 보도를 정면 부인했다. 한편 현재 미국이 치르고 있는 이라크 침공의 대가는 개전 이전부터 충분히 예고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라크 침공 전인 2003년 1월 국가정보위원회가 이라크 침공시 문제점을 경고했던 2개의 문건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서해교전 전사자 이름 차기고속정 함명 검토

    해군이 차기고속정(PKX) 1번함에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장병의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해군 관계자는 7일 “차기고속정 사업은 서해교전 때 침몰한 구형 고속정을 대체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당시 숨진 장병 6명의 이름을 붙이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밝혔다.이 관계자는 그러나 “1번함에 고 박동혁 병장의 이름을 붙일지, 고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붙일지는 세부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해군은 이달 중순까지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다음달 진수되는 차기 고속정 1번함은 시험평가를 거쳐 내년쯤 실전 배치된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실종장병 유가족들 ‘눈물의 청와대오찬’

    실종장병 유가족들 ‘눈물의 청와대오찬’

    동티모르 실종장병의 가족이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정부의 무성의한 후속조치에 분통을 터뜨리며 오열했다. 노 대통령이 2일 군 작전과 해외파병 임무수행 중 순직한 장병의 유가족 22명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였다. 노 대통령은 “위로를 드리려고 모셨는데 너무 엄숙해서 말을 못하겠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이어 참석자 대표로 마이크를 잡은 동티모르 파병중 실종된 김정중 병장의 형 하중씨는 “대통령 내외분께 몇가지 묻고 싶다.”면서 “동생의 시신을 아직도 못찾고 있는데 시신을 찾고 있는 건지, 조치가 있는 건지 동생이 죽고 나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부모님은 명절만 되면 눈물로 지새우는데 국방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김씨는 “꼭 답변을 해달라. 미국은 돈을 들여 6·25 전사자 시신까지 찾는데 동생 시신을 찾지는 못할망정 이렇다 저렇다 말씀을 해 주셔야 하는 게 아니냐.”고 호소했다. 하중씨가 말을 잇는 동안 옆자리의 모친 장홍여씨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배석했던 김장수 국방장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침통한 표정 속에 김씨의 말을 메모한 노 대통령은 “유가족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여자친구와 잘됐으면…”

    “입사 13년만에 1억 5000만원을 저축했습니다.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윤섭(36) 무궁화전자 대리는 19일 자신의 꿈을 담담하게 말했다. 일견 평범하게 들렸지만 그가 앉은 휠체어를 보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무궁화전자 첫 입사생인 그는 1995년 입사 이후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주식, 부동산투기로 ‘억억(億億)’하는 세태에 13년간의 월급을 저축으로 모았다는 그의 이야기가 청량제처럼 들렸다. 그는 “중도에 나가면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 다달이 월급의 80%를 꼭 저축했다.”고 말했다. 이 대리가 일하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무궁화전자에는 그와 같은 장애인이 123명에 이른다. 전체 직원 170명의 73%를 넘는다.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장애인 전용 공장이다. 이들 가운데 1∼2급 중증 장애인도 66%인 76명이다. 삼성전자가 94년 230억원을 들여 설립했다. 1971년생인 그는 84년까지는 정상인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수술을 했다.‘의료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왔다. 실의와 좌절, 절망으로 고통을 겪다 87년 특수학교를 다녔다.“다른 회사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사 원서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그의 경험담이다. 직장을 가진 그는 스스로 ‘행운아’로 여기고 있었다. 무궁화전자는 최첨단 TV인 LCD TV의 컨트롤보드를 비롯해 청소기·전화기 등을 만든다. 생산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정상인들의 70∼80% 수준이다. 반면에 불량률은 거의 없어 고객사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보람 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지난해 3월 주문자상표부착(OEM)이 아니라 우리 브랜드의 스팀청소기 ‘바로바로’를 냈을 때”라고 말했다. 자기 브랜드 제품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에 깊은 자긍심이 배어 있었다.6개월 간의 노력 끝에 완성한 전사자원관리프로세스(ERP)가 채택됐을 때도 무척 기뻤단다.“다음에 제가 공장장이 되면 기자님을 한번 초청하겠습니다.”라며 크게 웃는 그의 모습은 휠체어가 아니라 의자에 앉은 보통 사람과 꼭 같았다. 수원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충훈비가 단체장 공적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한 수천만원의 보조금으로 만든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가 참전 유공자들의 공적보다는 현직 자치단체장의 공적을 지나치게 부각해 유공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18일 경북 군위군 등에 따르면 군위읍 오곡리 872의1 일대 ‘6·25 참전 유공자 충훈비’ 현지에서 오는 24일 주민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훈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 충훈비는 6·25 참전유공자회군위군지회가 2004년 11월 6000만원(도·군비 각 3000만원 보조)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제막식이 늦어진 것은 주변 조경이 늦어진 때문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충훈비가 전쟁 참전자들의 유공보다는 단체장의 건립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비신(碑身)의 전면에는 ‘나라를 지킨 유공자비’가, 후면 전면에는 비문과 단체장의 이름이 비교적 큰 글씨(사진 위쪽)로 새겨졌다. 또 좌측면은 지역 유지들인 당시 경찰서장, 교육장, 농협장, 관변단체장 등 비 건립추진위원 26명의 명단이 차지했다. 정작 비의 주인공들인 전사자 및 상이용사 등 군위지역 8개 읍·면 참전 유공자 1525명의 명단은 비신을 떠받치고 있는 좌대(座臺)에 작은 글씨(사진 아래쪽)로 올라 있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군위군지회가 2001년 이 비석에서 5m 떨어진 지점에 세운 ‘무공 수훈자 전공비’의 수훈자 명단이 비신에, 단체장과 건립위원들의 명단이 좌대에 새겨진 것과도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지역 참전 유공자와 유족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유공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충훈비가 군수 공적비로 전락했다.”면서 “보조금을 지원한 군의 직·간접적 간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또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대해 참전유공자회 홍영삼(74) 군위군지회장은 “비 제작 당시 추진위원들과 협의해 명단을 배치했다.”면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홍 회장은 이 지역 단체장과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보조금은 지원했지만 충훈비가 어떻게 제작·건립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군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日軍 위안소 설치 지시 네덜란드 판결문 발견”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가 없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뒤집는 증거가 네덜란드의 법원 판결문에서 발견됐다고 교도통신이 11일 베를린발로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자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 아오치 와시오(사망)가 2차 세계대전 후 체포돼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에서 증언한 판결문 내용이다. 아오치는 재판에서 점령지의 군정 당국인 군정감부(軍政監部)의 지시를 받고 민간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오치는 지난달 일본 국회도서관의 야스쿠니신사 자료 공개에서 지난 1967년 전사자들과 합사됐던 것으로 드러난 당사자다. 독일에 체류 중인 언론인 가지무라 다이치로가 입수한 전범재판소 판결문은 “아오치는 1943년 6월2일 군정감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뒤 수용했다.”고 기록,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한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또 아오치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 중이던 1943년에 ‘사쿠라클럽’이란 위안소를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아오치의 애인인 네덜란드 여성은 “헌병을 부르겠다.”며 협박, 소녀를 포함해 네덜란드인 여성들에게 매춘을 강요했다. 매춘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관헌에 체포돼 감금당하기도 했다. 아오치는 1946년 10월 네덜란드군이 개설한 임시 군법회의에서 강제 매춘죄로 금고 10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숨졌다.hkpark@seoul.co.kr
  • 의 마지막 2분이 시작된다

    의 마지막 2분이 시작된다

    왕년의 명화를 거론할 때 서부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쓴 <하이눈>을 빼어 놓을 수는 없다.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남우 주연, 주제가상, 음악상, 편집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가장 많이 감상한 영화이기도 한데 특히 클린튼과 아이젠하워가 백악관 재임 시에 각각 2~3번 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자신 매카시즘에 의해 시달리던 칼 포어맨이 각본을 담당하였고 유태인으로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명장 프레드 진네만이 감독한 영화이다. 촬영 당시 부인과의 이혼과 좌골 신경통, 그리고 출혈성 위궤양으로 심신의 타격을 받고 있던 51세의 주연 스타 게리 쿠퍼의 수척한 표정이 이 영화를 더욱 실감나게 각인시킨 셈이다. 아픈 몸을 일으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그런데 영화 평론가 팀 덕스에 의하면 영화 <하이눈>은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2년에 만든 것으로 한국전쟁 중에 공산국들과 벌인 냉전과 혈전, 그에 따른 미국의 외교정책이 처한 난처한 현실의 비유로 해석되어 왔다는 것이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여러 해 동안 신의를 가지고 계속 도와줬던 해들리빌 마을사람들, 즉 유럽 우방들이 보안관을 배신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비겁함(cowardice), 무기력(physical inability), 이기심(self-interest), 편의주의(expediency), 엉거주춤(indecisiveness) 때문에 더 이상 보안관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 마을사람들이 협조를 거부하는 가운데 그는 겁이 나긴(Fearful)하지만 의무감(duty-bound)을 지닌 채 4명의 악당 즉 북한 공산군 ,중공군, 소련군, 기타 공산권과 마주서서 변방마을, 즉 한국의 정의(frontier justice)를 지키기 위하여 한낮 정오에 결투에 임한다는 것이다. 숨 막히는 총성이 멎자 영화 속의 주인공 윌 케인(게리 쿠퍼)은 승리하였다. 요즘 돌아가는 정세로 봐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 2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가를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대결이 끝나고 나서 보안관 윌 케인은 보안관 배지인 ‘양철 별(tin star)’을 가슴에서 떼어내 그를 배신했던 마을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던져버리고 이 수치스러운(dishonorable) 서부의 최일선에 위치한 변경마을을 떠나간다. 막 결혼식을 올린 사랑하는 젊은 신혼 부인과 같이 말이다. 미국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의 3년여 기간 동안 한국전쟁에서 전사자 5만 4천 명, 부상자 무려 10만 명을 내었다. 이 기간 동안 미 국방성 자료에 의하면 동원된 군인 수는 연인원 572만 명이나 된다. 전비는 현재 가액으로 수천 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참고로 고이즈미 일본수상은 2006년 6월 29일 미국에서 있었던 국빈만찬에서 “보안관 게리 쿠퍼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악당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게리 쿠퍼와 오늘날의 미국과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악이 상존하는 세계에서 미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의 친구이자 동맹인 일본은 항상 미국 편에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해 만찬 스피치로는 드물게 30초 정도의 긴 박수를 받았다. 영화 <하이눈>을 예로 든 미·일 양국 간의 우정은 만찬 참석자는 물론 미국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화 <하이눈>은 9·11 테러 직후 고이즈미가 텍사스를 방문했을 때 부시를 게리 쿠퍼에 비교하면서부터 화제에 올랐다. 고이즈미는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미국을 상대로 소위 ‘하이눈 외교’를 선보였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미국의 시각에서 해들리빌 마을사람들은 누구인가. 또한 사랑하는 새로운 젊은 신혼 부인은 누구일까? 글 최정호 한양대 겸임교수, 경영학 박사, 《CEO여, 문화코드를 읽어라》의 저자     월간 <삶과꿈> 2007.02 구독문의:02-319-3791
  • 고 윤장호 하사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고 윤장호 하사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부디, 편안하게 잠드소서….’ 5일 이른 아침부터 흩날리던 진눈깨비가 영결식이 시작될 무렵인 오전 8시 쯤부터 거센 바람과 눈보라로 변했다. 장례식장에는 스물일곱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낮은 곡(哭)소리만이 울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테러로 숨을 거둔 고 윤장호 하사의 영결식 및 안장식이 이날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졌다.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영결식은 부모인 윤희철·이창희씨 부부 등 유가족, 정·관계 관계자 및 군 장병 등 600여명이 참석해 조사, 종교의식, 헌화, 조총 및 묵념, 폐식사의 순으로 40분간 진행됐다. 엄숙함마저 감돌던 영결식은 특전사 동기인 엄선호(22) 병장의 조사가 낭독되자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엄 병장이 “6개월 뒤 복귀 환영회식은 이 엄선호가 쏘겠다던 약속을 기억하냐.”고 말한 대목에서 동료 장병들은 어깨를 들썩거렸다.“장호야!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넌 멋진 동기였고 훌륭한 아들이었으며 자랑스러운 군인이었다는 것을…”이라는 말로 전우들은 고인을 마음 속에 묻었다. 고인이 입대전 근무했던 HB어드바이저스 직원들은 ‘장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걱정하지 마세요. 전 잘 있어요.’라고 위로하는 걸 알지만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라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놀랄 정도로 침착하던 유족들은 영결식이 끝난 뒤 운구가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옛 성남화장장)로 옮겨지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려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어머니 이창희씨는 유해가 운구차에 실리는 순간 못내 아들을 떠나 보낼 수 없다는 듯 관에 얼굴을 비벼댔다. 아버지 희철씨도 “장호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을 잇지 못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아들 같은 장병들이 몸 건강하게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생사업소에 도착한 유해는 운구차에서 곧바로 2층에 있는 화장로로 향했다. 화장로 앞 관망실에서 유족과 군 관계자 등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윤 하사의 부모는 차마 화장로로 들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는지 자리를 피했다. 분골작업이 끝난 유해가 국방부 헌병대의 호위 속에 영생사업소를 떠나자 거짓말처럼 하늘에 흩날리던 눈발도 그쳤다. 고인은 오후 3시 대전 국립현충원 전사자 묘역의 차가운 땅 속으로 돌아갔다. 지난 2일(현지시간) 고인이 유학시절 다녔던 미국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의 한인감리교회에서도 지인과 교민, 현지 언론관계자 등 100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열었다. 고인의 절친한 친구인 김준엽씨는 “장호를 생각하면 웃고 싶다. 하지만 (장호를 앗아간) 이 세상에서는 웃을 수가 없다.”며 슬퍼했다. 한편 이날 오후 7시 서울 광화문에서는 시민 300여명이 ‘고 윤장호하사 추모와 아프간-이라크파병 한국군 즉각 철수’ 촛불문화제를 열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전 이천열 성남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다신 이런 희생 없게…” 끝없는 애도 물결

    아프가니스탄에서 폭탄 테러로 숨진 고 윤장호(27) 하사의 빈소에는 궂은 날씨 속에도 주말 내내 조문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성남 국군수도병원 분향소에는 4일 오전 일찍부터 고인의 희생을 애도하는 조문객들이 늘어섰다. 분당에 사는 최윤환(11·탄천초 4)군은 아버지와 함께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시민 고성혁(40)씨도 “장하고 대단한 아들을 조국으로 보내주셨다.”면서 유족들을 위로했다. 3일에는 윤 하사와 초등학교 때부터 ‘삼총사’ 친구였던 백현준·이호승(이상 27)씨가 찾아와 어머니 이창희(59)씨와 슬픔을 나눴다. 친구 이씨는 “지난해 파병 전에 휴가나왔을 때 앞으로 볼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 잠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미국에서 2일 밤 도착한 백씨도 “파병 전날 통화할 때 너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는데 ‘미군과 같이 있고 전투병이 아니어서 안전하다.’고 안심시켰다.”며 고개를 떨궜다. 정계 및 군 고위관계자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4일 허평환 국군 기무사령관과 트롬비타스 주한미군 특전사령관이 유족들을 위로했다. 허 사령관은 “좋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와 안타깝다. 윤 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국가 방위에 만전을 기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트롬비타스 사령관도 “용감한 사람이었다. 미군과 미 정부를 대신해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고 윤 하사의 아버지는 이에 대해 “아들이 한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전사한 것이 자랑스럽다.”고 답했다.3일에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김성곤 국회 국방위원장이 빈소를 찾았다. 고인의 영결식은 5일 오전 8시 국군수도병원에서 특전사부대장(葬)으로 치러지고 유해는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옛 성남화장장)에서 화장된 뒤 대전 국립현충원 전사자묘역에 안장된다. 한편 고인을 추모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5일 저녁 광화문에서 열린다.35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파병반대국민행동은 4일 “영결식에 맞춰 윤 하사의 희생을 추모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병 한국군의 철군을 촉구하는 추모 촛불 문화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국민행동은 또 이라크전 발발 4주년에 즈음한 17일 국제공동반전행동의 날에 맞춰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뒤 광화문까지 거리행진을 할 예정이다.성남 윤상돈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윤병장 유해 2일 서울로

    아프가니스탄 무장세력의 폭탄테러로 숨진 윤장호 병장의 유해가 2일 전세기 편으로 서울공항에 들어온다고 합참측은 지난달 28일 밝혔다. 한편 이날 윤 병장이 지난해 12월 3일 어머니 이창희(59)씨에게 보낸 24초 짜리 ‘영상편지’와 호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윤 병장의 형 장혁(33)씨에게 보낸 이메일이 공개돼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2억원대 보상금 유해는 국군 수도병원에 안치될 예정이며 장례 일정과 절차는 유가족 의사를 존중해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합참은 숨진 윤 병장에게 전사자 처리와 함께 1계급 특진과 무공훈장 추서를 건의할 방침이다. 군인연금법시행령상 전사자에게는 일정액의 보훈연금과 함께 2억원대의 사망보상금이 주어진다. 윤 병장의 유족에게는 매달 89만5000원의 연금과 2억3100여만원의 보상금이 주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윤 병장의 사인과 관련, 합참은 후폭풍으로 인한 쇼크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합참 관계자는 “검시결과 파편에 의한 외상이나 과다출혈보다는 폭발로 발생한 공기압박이 원인으로 보인다.”면서 “옆구리와 둔부에 파편상이 있지만 출혈이 적어 직접사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현장통제로 시신확인 늦어져 윤 병장은 또 당초 알려진 것처럼 병원 후송 뒤 숨진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확인이 늦어진 것과 관련, 합참 관계자는 “현장과 다산부대의 거리가 3㎞나 되고, 사건 직후 미군 경계병들이 차량과 인원의 현장접근을 철저히 통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철군일정 앞당겨질까 국방부는 윤 병장의 희생으로 해외파병부대에 대한 조기철군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고 대책을 고민중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파병에 대한 여론이 호전되던 상황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위항시인들이 주관하는 백일장인 백전(白戰)에 수백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수경이나 장혼이 한양 인왕산에서 커다란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항시인 이경민이 편찬한 위항인들의 전기집 ‘희조질사(熙朝 事)’의 천수경편에 의하면 “한달에 60전을 내게 하니…(줄임)배우는 아이가 많게는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제자 가운데)나은 자가 못한 자를 가르쳤다.”고 했으니, 조를 나누어 가르칠 정도로 체계를 갖춘 기업형 서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혼의 서당에도 아들과 손자 또래의 제자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교정 보고 책 만드는 일로 반평생을 보낸 장혼 장혼(張混·1759∼1828)의 아버지 장우벽(張友壁)은 날마다 인왕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그가 노래 부르는 곳을 가대(歌臺)라고 불렀다. 장우벽 자신은 글을 웬만큼 알았지만, 총명한 아들 장혼을 서당에 보내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도 쓸 데가 없는데다, 오히려 중인 신분의 한계를 탄식하며 처절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혼의 어머니 곽씨가 집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가난한 집안 살림은 장혼이 도왔다. 여섯살 때에 개에 물려 오른쪽 다리를 절었지만,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1790년에 옛 홍문관 터에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고 여러가지 책들을 인쇄하여 반포하려고 하자, 오재순이 장혼을 사준(司準)에 추천하였다. 교정 보는 일을 맡은 사준은 정9품 잡직이었는데, 기술직 중인들이 맡는 말단 벼슬이었다. 그는 “원고와 다른 글자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솜씨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았다. 규장각의 여러 고관들 가운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그에게 일을 맡겼다.”고 한다. 책 한권을 다 만들면 의례 품계를 올려주는 법인데, 그는 번번이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적은 봉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받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유를 밝혀, 정조가 봉급을 더 많이 주었다. 모친상을 당한 3년을 빼고는 1816년까지 줄곧 사준으로 일하며, 사서삼경을 비롯해 ‘이충무공전서’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들을 간행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장혼이 교정을 보았다. 장혼이 교정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나자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금속활자를 만들려면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 민간에서는 대개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재산이 넉넉하고 인쇄할 책이 많은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문중의 책을 다 찍은 다음에는 그 활자를 남에게 빌려주며 돈을 받기 때문에 처음에 많은 자본을 들이면 어느 정도 상업성도 있었다. 돈암(敦岩)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누이가 순조의 생모 수빈 김씨였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지극한 총애를 입어 호조판서에 오르고 훈련도감을 맡았다. 그는 가통을 세우기 위해 5대 이하의 유고를 모아 ‘반남박씨 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했으며,1816년에 정교한 금속활자를 직접 만들어 세고와 함께 아버지의 문집 ‘금석집(錦石集)’을 인쇄하였다. 청나라 취진판(聚珍版) 전사(全史,二十一史)의 글자를 자본으로 인서체(印書體) 동활자 20만자를 주조한 것이다. 박종경이 개인적으로 만든 활자를 전사자(全史字), 또는 그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활자(敦岩印書體活字)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주변에 빌려줘 여러 종류의 책이 만들어졌다. 박종경의 활자로 인쇄한 초기 십여종의 책은 대부분 장혼이 교정하였다. ●목활자 만들어 서당 교재를 인쇄 인왕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장혼은 ‘천자문’ 말고도 여러가지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기 서당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직접 찾아와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좋은 교과서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위주로 만들어진 ‘천자문’이 좋지 않은 교과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이미 비판해, 나름대로 대안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장혼이 처음 만든 교과서는 ‘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보아야 할 내용을 가려뽑은 책이다. 정리자체 철활자를 빌려 1803년에 인쇄하였다. 그런데 남의 활자를 빌려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했다. 그래서 인쇄 전문가였던 장혼은 스스로 필서체(筆書體) 목활자를 만들었다. 웬만한 책을 만들려면 금속활자를 10만개 넘게 주조해야 했는데, 장혼의 재산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무로 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윤병태 교수(전 충남대문헌정보·작고)는 이 목활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폭 12mm 내외, 높이 8mm 내외의 비교적 폭이 넓은 납작한 평면을 가진 활자로 보인다. 그 자체(字體)는 필서체로 되어 있으며, 다른 관주활자(官鑄活字)에 비해 약간 작은 아름다운 글씨체로 보인다. 활자의 자본(字本)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으나, 김두종은 초예(草隸)에 능한 장혼의 의장(意匠)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장혼이 처음 목활자로 인쇄한 교과서는 ‘몽유편(蒙喩篇)’과 ‘근취편(近取篇)’ ‘당률집영(唐律集英)’ 세권이다. 모두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경오는 1810년이니 그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빨리 닳아서 찍을수록 글씨가 뭉툭해지는 단점이 있는데,1810년에 인쇄된 책들은 글자체가 비교적 정교하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크기가 작지만 만든 솜씨가 정교하면서도 글자 모양이 예뻐서, 이 활자로 찍은 책들은 금속활자본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 있다. 장혼이 직접 짓거나 편집한 책은 위항시인 333명의 시 723수를 천수경과 함께 편집한 ‘풍요속선(風謠續選)’에서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요약한 ‘동사촬요(東史撮要)’까지 24종이다. 그는 자신의 책만 인쇄한 것이 아니라 1816∼1818년 위항시인들의 책 5종을 자신의 목활자로 인쇄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최성환이 이 활자를 인수해서 장혼의 제자나 후배 문집 5종을 인쇄했다. 그의 문집인 14권 분량의 ‘이이엄집(而已集)’은 끝내 간행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그가 편집 인쇄한 책들을 통해 위항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그의 서당 제자들이 금서사(錦西社)와 비연시사(斐然詩社)로 인왕산 시사의 대를 이었다. ■ 아희원람이란 ‘아희원람(兒戱原覽)’은 고금의 사문(事文) 가운데 아이들이 찾아보아야 할 내용을 열가지 주제로 가려뽑은 책이다. 1803년에 제작된 본에는 동국(東國)·수휘(數彙)·보유(補遺)가 더 실렸다. 몽유편(蒙喩篇)은 낱글자로 배웠던 천자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어휘집이다. 상권에는 신형(身形)·연기(年紀)·칭호(稱號)·위분(位分)·명물(名物)의 기본어휘 1049개에 동의어나 유사어가 붙어 있다. 우리말 어휘도 383개나 실렸다. 하권은 인명록인데 덕행(德行)부터 이단(異端)까지 일곱 부류 1 441명의 이름을 실었다. 근취편(近取篇)도 어휘집인데 13장까지는 네글자로 된 속담과 고사숙어 1046개, 그 다음에는 세글자로 된 고사숙어 98개, 그 다음에는 두글자로 된 숙어 192개를 실었다. 아희원람은 윤병태 교수가 확인한 판본만도 7종이나 될 정도로 자주 인쇄돼 널리 읽혔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씨줄날줄] 유해발굴감식단/황성기 논설위원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유지하는 은밀한 영적(靈的)장치였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유족의 슬픔을 “죽어서 신이 된다.”는 기쁨으로 바꾸어 젊은이들을 전장에 내보내는 통치 기제로 이용했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진보 지식인이 쓴 야스쿠니 관련서 중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야스쿠니 문제’를 통해 야스쿠니에 ‘감정의 연금술’이 내재한다고 분석했다.2차대전과 한국전, 베트남전 개입에 이어 이라크 전쟁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고, 이 시각에도 사상자를 내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런 미국이 30년 된 육군중앙감식소 등을 통합해 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령부(JPAC)를 하와이에서 창설한 것이 2003년이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라는 모토에서 알 수 있듯 전사자건 실종자건 전쟁포로건 최후의 1인까지 고국으로 귀환시킨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미국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 땅에 두고온 미군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처음에는 북측이 발굴한 유해를 감식한 뒤 사들였다. 그것도 모자라 북한에 들어가 유해를 발굴하며 그 대가로 2500만달러를 지불했다. 북핵 문제로 2005년 5월 중단하긴 했어도 미국이 전쟁 희생자에 쏟는 집착은 유별나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으면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보증을 JPAC는 유형무형으로 보여준다. 연중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 유일의 국가인 미국에 이 같은 보증은 전장에 나가거나 내보내는 사람들에겐 든든한 기제로 작동한다. 정치적 안경을 벗어 던진다면 유해든 포로든 찾아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국방부가 그제 JPAC를 본뜬 ‘유해발굴감식단’의 창설행사를 가졌다. 한국전쟁의 전사·실종자 13만여명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낙동강변,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철의 삼각지를 포함한 중부전선이 주 대상이다. 서둘러 퇴각했던 평북 운산을 비롯한 북한 내 유해발굴도 장기과제다. 다만 생존한 국군포로의 귀환은 업무 밖이라는 점이 아쉽다. 이 점만큼은 미국을 본뜨지 않은 모양이다. 단장인 박신한 대령은 하나 더 덧붙인다.“발굴이 군만의 일이 아닌데도 경찰과 지방자치단체의 협력이 없다.”고. 새겨들었으면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씨줄날줄] 유황도 전투/이용원 수석논설위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우위가 확고해진 1945년 2월19일 미 해병대는 일본령인 유황도(硫黃島·이오지마)에 상륙했다. 이 때는 레이테 섬 전투의 승리로 미 해군이 이미 동남아시아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였고, 개전 초 필리핀에서 쫓겨난 맥아더 장군도 마닐라에 복귀한 시점이었다. 그 무렵 미군의 목표는 일본을 ‘덩굴째 말려 죽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쿄에서 불과 1200㎞ 떨어진 유황도는 미군에게 일본 본토를 직접 공습하는 데 꼭 필요한 공군기지였다(조지 베어 저 ‘미국 해군 100년사’에서). 유황도는 면적이 20여㎢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사흘 동안 집중적으로 함포 사격을 한 다음 미 해병대가 섬에 상륙했지만 그곳을 지키는 일본군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시 종군기자가 남긴 증언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해변 백사장에는 미군·일본군 가릴 것 없이 팔다리가 제대로 붙은 시신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백병전이 치열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전사자 6000명을 비롯해 2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래서 이 전투는 미 해병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기록됐다. 반면 섬을 수비하던 일본군 또한 2만명이 전사해 생존자 비율은 5%에 불과했다. 결국 유황도는 일본인에게 ‘옥쇄의 섬’이 되었다.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전장으로 꼽히는 유황도 전투를 소재로 해 할리우드에서 한 감독이 동시에 두 가지 버전의 영화를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조만간 소개될 예정이라는 이 작품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다.‘아버지’는 승자인 미 참전군인들의 시각에서,‘이오지마’는 섬을 사수하려 한 일본 군인들의 시각에서 각각 유황도 전투를 그려냈다고 한다. 역사를 흔히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패배한 자에게도 하고픈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승자와 패자의 관점을 함께 수용해야 역사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하긴 역사뿐인가. 일상적인 삶에서도 상대방의 시각으로 나를 되돌아보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까닭에 모처럼 시도된 이 영화적인 실험이 성공을 거둘지를 주목하게 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美서 유행한 올해 숫자

    올해 미국 사회에서 유행했던 숫자는 무엇일까?17일(현지시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이 2006년 미국 사회에서 회자된 숫자를 발표했다. 2040년 지구 온난화로 북극해 빙하가 모두 녹아버릴 것으로 예측된 해다. 370억달러 세계적인 투자자로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자선기금으로 내놓겠다고 서약한 주식 규모다. 3278명 2001년 이라크 침공 이후 올해 12월15일까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 전사자수. 5020억달러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쓴 돈이다. 2043년,그리고 3억 미국 인구가 지난 10월 3억명을 돌파했다.2043년이면 4억명을 돌파한다. 750만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미국 포드자동차가 21년 동안 생산한 토러스 승용차 숫자다. 지난 10월27일 이 모델 생산은 중단됐다. 50년 국제 해양학자들이 현재의 수산물 남획과 서식지 파괴 속도로 추정한 해양생물종 멸종까지 남은 시기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책꽂이]

    ●대당서역기(현장 지음, 권덕녀 옮김, 서해문집 펴냄) 당나라 승려 현장이 1500년 전에 쓴 인도여행기. 서기 627년 스물 여섯의 청년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몰래 취경(取經)여행을 떠났지만 18년 뒤 인도에서 견문을 넓히고 수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오는 길엔 장안이 들썩일 만큼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서기 645년 현장은 640질의 불경과 불상 등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당으로 돌아왔다. 트로이전쟁에 참가해 활약한 뒤 긴 세월 동안 온갖 위기를 이겨낸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닮은꼴. 당나라 때 불경은 오역이 많아 승려들 사이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1만 1900원.●노블레스 오블리주(예종석 지음, 살림 펴냄)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제국의 2000년 역사를 지탱해준 힘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철학이라고 지적했다. 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고 한다.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콘술(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역사를 다룬 책.3300원.●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김충열 지음, 예문서원 펴냄) 조선 중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당대의 사상계를 이끈 영남유림의 종장이다. 그러나 정권과 타협하기보다는 현실개혁에 관심을 둔 남명학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됐다. 남명학의 권위자인 저자는 남명이 문묘배향을 불허한 점, 북인정권의 영수인 내암 정인홍의 실각, 곽재우 등 남명 문하에서 의병장이 많이 나와 일제강점기 때 역사가 왜곡된 점 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자득과 실천을 중시한 남명의 학문세계와 강의직절(剛毅直切)한 선비정신을 살폈다.2만 6000원.●공자와 논어(요시카와 고지로 지음, 조영렬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 공자는 조국 노나라를 떠나 56세부터 69세까지 14년간 제자들을 이끌고 산동 하남의 여러 제후국을 방문했다. 그것은 “외뿔소도 아니고 범도 아닌데 저 광야에 떠돈다.”라고 공자 자신도 말한 것처럼 황량한 방랑이었다. 정나라 성문 밖에서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서 있을 때의 공자는 상갓집 개와 같았다고 ‘공자세가’는 전한다. 공자는 학자이자 동시에 정치가였다. 공자의 정치 중시, 그것은 ‘논어’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공자 평전이라 할 만한 글과 논어에 대한 설명이 실렸다.1만 8000원.●거울 속의 원숭이(이언 태터솔 지음, 정은영 옮김, 해나무 펴냄) 우리는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다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러나 인류학자인 저자는 이같은 자연선택론의 아성에 반기를 든다. 그런 식의 단선적 이야기는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진실을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의 세계에는 적응의 증거도 있지만 비행을 위해 생겼던 펭귄의 날개가 지금은 나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수영에 이용되는 ‘탈응’의 증거가 있는 것처럼, 인간도 진화할 때가 있었지만 가끔은 숨을 고르기 위해 한 박자 정지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1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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