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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티모르 독립운동 삼두마차…구스마오,벨로주교,오르타

    사나나 구스마오와 카를로스 펠라페 시메네스 벨로 주교,호세 라모스 오르타 이 세사람은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삼두마차다. 현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연금되어 있는 구스마오는 무력투쟁의 대부로,오래동안 동티모르 사정을 외부세계에 알려온 벨로 주교는 동티모르 주민의정신적 지도자로 각각 독립운동의 한 축을 맡고 있다. 반면 탁월한 외교관 출신으로 호주에서 활동하는 오르타는 유엔과 국제인권단체를 상대로 동티모르의 문제를 국제쟁점화하는 외교적 노력을 쏟고 있다.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는 구스마오는 17년 동안 무력 독립투쟁을 벌여온 주인공.본래 시인이었던 그는 75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강제점령하자 가족을 호주로 보내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92년 11월 산악지대에서체포돼 정부전복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으나 20년형으로 감형됐다. 동티모르 평화정착의 실제적인 구심인물이며,동티모르가 독립할 경우 초대대통령으로 유력시되고 있다.인도네시아 정부는 오는 9월15일쯤 그를 석방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권운동가인 벨로 주교는 91년 인도네시아군이 독립을 요구하는 동티모르시위대에 무자비하게 발포,100명 이상이 무참히 살해된 ‘비극’을 최초로서방에 알려 유명해졌다.수년전부터는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이나 실종자들의 명단을 수집,발표하며 동티모르에 대한 지구촌의 관심을 유도하고있다. 96년 벨로 주교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 ‘망명인사’ 오르타는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대변인이다.세계 유수 신문에 기고활동을 통해 동티모르의 실상을 알리면서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을 촉구하는 주역이다.동티모르민족저항위원회(DNRM)를 조직,이끌고 있다. 이경옥기자 ok@
  • 金대통령, 탄생100주년 기념미사 참석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7일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열린 운석(雲石) 장면(張勉)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에서 고인에게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뜻을 기렸다.고 장면박사가 역사에 새롭게 자리매김한것이다. 김대통령은 훈장을 추서하면서 “장박사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세뇌작업으로 오랫동안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면서 “장박사의 위대함은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추모했다. 김대통령은 추모사에서 “젊었을 때는 영예와 찬사를 받다가 사후에 엄중한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생존 당시에는 비판받던 사람이 사후에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면서 “의인은 불멸”이라고 강조했다.이어 “5·16을 한 사람들은 ‘장면정권이 너무 유약하다.약한 정권이다.나라를 지탱할수 없다’는 식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했다”고 지적한 뒤 “내가 옆에서 본 장총리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실례로 민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과 실천의지,민주적 경선을 통한 총리 당선,지방자치 실시,소급입법 반대,야당인사를 포함한 연립내각 구성 등을 적시했다. 김대통령은 그러면서 “고 박순천(朴順天)여사가 지적했듯이 장면정권 출범 한달도 안돼 쿠데타세력이 충무로에서 정권전복을 모의한 사실이 5·16 혁명사에 들어있다”고 전하고 “한달도 안된 상태에서 어떻게 부패와 무능을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또 “무능한 정권이라면 어떻게 지방자치와 나라경제 바로잡기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당시신문은 장면정권이 부패했다고 보도했으나 재판결과 출장중 헌 냉장고를 받은 장관만 유죄판결을 받고,모두 무죄로 풀려났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장면박사는 위대한 인격과 경륜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건국의공로자”라며 “역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지도자”라고 말했다.“한국의대통령으로서 훌륭한 지도자가 오랫동안 부당한 평가와 누명을 받던 것을 벗기고 건국의 어른으로 훈장을 수여하게 돼 기쁘다”고 추모사를 맺었다.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장박사를 복자나 성인으로 올리는운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인을 기렸다. 장박사의 아들 장익(張益)주교가 집전한 이날 미사에는 1,000여명의 교인들과 국민회의 김상현(金相賢)·이길재(李吉載),자민련 한영수(韓英洙),한나라당 한승수(韓昇洙)의원 등이 참석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옷로비 청문회] 증인들 누가 거짓말하나

    옷로비 의혹사건의 진실이 갈수록 미궁에 빠지고 있다.국회 법사위 청문회에 출석한 핵심 증인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상황마저도 증인에 따라 180도 뒤집히는사태가 속출하고 있다.이로 인해 24일 이틀째 증인신문을 벌인 청문회는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맸다. 이날 신문을 받은 김태정(金泰政) 당시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延貞姬)씨는핵심 사안을 둘러싼 진술에서 전날 청문회에 출석한 강인덕(康仁德) 당시 통일부장관 부인 배정숙(裵貞淑)씨의 답변과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전날 증언한 신동아그룹 최순영(崔淳永)회장 부인 이형자(李馨子)씨의 동생 이형기(李馨基)씨와 배씨,연씨 등 세 사람의 증언 내용도 서로 물고 물렸다. ■연씨의 로비 개입 여부 엇갈린 진술 가운데 연씨와 배씨가 직접 연루된 부분은 지난해 11월7일 신라호텔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모임은 사실상 옷로비 의혹의 실체를규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 국회 법사위의 판단이다. 당시 배씨는 외화유출혐의를 받고 있던 최회장의 사돈 조복희(趙福姬)씨를연씨에게 소개한 뒤 “우리가 만들 봉사단체인 ‘낮은 울타리’에 조씨를 가입시키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연씨는 한마디로 이를 거절했다. 문제는 연씨가 조씨의 가입을 거절한 이유다.배씨는 전날 “당시 연씨가 조씨 남편의 직업(항공화물)까지 미리 알고 들먹이면서 외화유출 가담 내사사실을 적시했다”고 증언,연씨가 공공연히 수사기밀 사항을 옷로비의 빌미로삼았다는 점을 시사했다.그러나 연씨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조씨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배씨가 그날 말해 줘서 알았다”고 로비 관련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호피코트 배달·반환시점 호피코트의 ‘동선(動線)’도 옷로비 의혹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대목이지만 증인간 진술은 어긋난다.연씨는 이날 청문회에서 “지난해 12월26일 호피코트가 본의와 상관없이 배달돼 11일 뒤인 1월5일 돌려줬다”고여러차례 반복 진술했다.반면 전날 배씨는 “연씨가 라스포사에서 호피코트를 입고 마음에 든다고 한 것은 지난해 12월19일이며,20일뒤인 1월7일 연씨가 호피코트를 입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확언했다. ■옷값 대납 요구 여부 증인간 ‘진실게임’은 전날 이형기씨와 배씨 사이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됐다.핵심은 배씨가 이형자씨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는지에 맞춰져 있다. 무대는 지난해 12월18일 이형자씨가 원장으로 있는 횃불선교원 원장실로 옮겨진다.이형기씨는 전날 청문회 증인 신문을 통해 “원장실 바깥에서 배씨의옷값 대납 요구에 언니가 펄쩍 뛰며 서로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그러나 배씨는 “이형자씨가 나에게 스스로 신세를 하소연했을 뿐 옷값대납을 요구하지도 않았고,다툰 사실도 없다”고 잡아뗐다. ■전복선물 수수 여부 ‘애꿎은’ 전복 선물세트도 증인간 신경전의 도마에 올랐다.배씨와 이형기씨는 “이형자씨가 선물로 보낸 전복을 연씨가 돌려보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연씨는 “지난해 추석 무렵 할렐루야 기도원이라면서 전화로 ‘전복을배달할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기에 가정부가 거절했다”고 반박했다. 박찬구기자 ckpark@
  • [옷로비 청문회] 延貞姬씨 증인신문 중계

    국회 법사위는 24일 옷로비사건 청문회를 열어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부인 연정희(延貞姬)씨 등 증인 5명과 나나부티크 사장 심성자(沈性子)씨 등참고인 3명을 출석시킨 가운데 이틀째 증인신문을 벌였다. ■ 연정희 증인?정일순 사장은 호피코트를 재킷,스카프와 함께 증인 몰래 쇼핑백에 담아보냈다는데. -맞다. ?호피코트는 언제 발견했나. -며칠 후인데 잘 모른다.코트는 뒷방에 포장에 담긴 채로 그대로 있었다. ?코트를 발견하고 어떻게 했나. -놀라서 아주머니에게‘이 코트는 원하지 않은건데 언제 받아놨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 운전기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했다.정사장에게 전화해 돌려보내겠다고 했고,정사장은 언제든지 가져오라 했다. ?기도원 갈 때 호피코트를 팔에 걸쳤나. -반환하려고 손에 걸치고 나가 기사에게 넘겨줬다. ?입지는 않았다는 것이냐(이상 국민회의 조찬형 의원)-점퍼인데 어떻게 코트를 입은 상태에서 그걸 입나. ?1월7일 기도원 갔다와서 1월8일 코트를 반납한 것 아닌가. -아니다.코트를 돌려주려고 팔에 걸친 것은 1월2일이다.운전기사 수첩에도 1월5일 보냈다고 적혀있다. ?청와대에 가 이희호 여사에게 울면서 억울하다고 했다는데. -만나 뵌 일도 없다. ?배정숙씨는 증인의 호화 의상실 쇼핑을 지적하며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했다는데.(이상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30년 동안 공직자 부인 생활을 하면서 정장 한벌 변변한 것이 없었다.검찰총장이 되고 나서 모임이 잦고 3월 딸 결혼식을 앞두고 있어 맘 먹고 정장몇벌 장만하려다 이런 일이…. ?정일순은 증인이 상당히 맘에 들어해서 600만∼700만원 되는데 옷값은 나중에 얘기하자면서 보냈다고 하는데. -아니다. ?코트를 12월19일 가져와 1월8일 돌려줬다면 소유기간이 20일로 늘어난다. 박주선 법무비서관으로부터 이를 돌려주라는 귀띔을 받은 적 있나.(이상 자민련 김학원 의원)-없다. ?평소 검찰청 직원이 운전하나. -아니다.사적으로 (검찰청) 기사를 쓴 데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추석에 (이형자씨가) 전복 보내온 것을 거절한 일이 있나. -전복을 보내온 사실도 없다.전화만 왔었다.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으니 할렐루야 교회라면서 전복을 보내고 싶은데 주소를 물어 이 댁은 그런 것 안 받는다고 했다. ?배정숙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문을 걸고 오래 얘기했다는데 압력을 넣은 것 아닌가. -진실을 알고 싶고,형님 각혈상태도 알고 싶었다.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괘씸하기도 했다. ?배씨 증언에 대해 느낀 점은.(이상 한나라당 박헌기 의원)-본인이 한 말을 모두 내가 한 것처럼 얘기하더라. ?배씨가 최순영 회장 사건에 대해 직접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나. -전혀 없다. ?11월7일 신라호텔에서 배씨와 만나 조복희씨의 낮은울타리회 가입이 안된다고 말한 이유는. -최회장 사돈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단지 그것이었다. ?남편 직업 때문에 일반 사람보다 더 잘 알 수 있지 않나. -어떤 친척이라도 사건과 관련되면 (남편은) 집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성격이다.밖의 이야기를 물어볼 수도 없고 해주는 분도 아니다. ?배정숙씨가 입원한 병원에 갔을 때 강인덕 전 장관이 화를 내고 면회사절을 했다던데.(이상 국민회의 조순형 의원)-절대 그렇지 않다. ?라스포사 정사장한테가서‘만일 입 다물지 않으면 중수부에 잡아 넣겠다’며‘증인과 정씨는 모르는 사이’라는 진술서를 쓰라고 위협했는가. -그런 사실이 없다. ?사직동팀에서 4번 조사 받았나.(이상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한번이다.오전 11시부터 다음날 2시까지 15시간 조사를 받았다. ?검찰수사 기간동안 이형자씨와 화해한 이유는. -조사를 받는 도중 내가 최회장과 이형자씨에 대해 많은 안좋은 얘기를 했다고 했는데 그런 사실이 없어 이를 말하고 대납요구를 했다는 데 대해서도 직접 들어봤다. ?배씨는 지난 11월 자신을 만나서 증인이 ‘63건은 연말까지 보류됐다’고했다.또 ‘외자유치가 안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어렵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는데.(이상 자민련 송업교 의원)-배씨가 ‘외자유치가 안되면 어떻게 되노’라고 해 상식적으로 (외자유치가) 되는 것보다 안되면 어렵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12월 박주선 청와대법무비서관으로부터 식사자리에서 자연스럽게 1차 조사를 받았나. -그런 일 없다. ?박비서관이 ‘매일 강남 쇼핑한다는데 자중하라’고하지 않았나.상부지시로 조사한다고 말했다는데. -박비서관을 만난 적이 없다. ?코트가 400만원이 아니라 4,000만원이라는 제보가 있다.배정숙씨는 증인이 1,000만원 이하의 물건은 쳐다보지 않는다고 얘기했다는데.(이상 한나라당정형근 의원)-내 진실을 들어달라.자꾸 그쪽 이야기만 듣지 마라. ?이형자씨가 3월 목사를 연씨에게 보내 전혀 근거없는 사실로 고통을 줬다며 사죄의사를 표한 사실이 있나. -있다.그러나 이씨를 만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몰라 편지를 써달라고했다. ?19일 배정숙씨 등과 라스포사 갔을 때 배씨가 ‘이왕이면 밍크를 장만하라. 옷값은 걱정말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나.(이상 국민회의 박찬주 의원)-그런 얘기는 없었다. 최광숙 주현진기자 bori@
  • [옷로비 청문회] 신문요지

    국회 법사위는 23일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청문회를 열어 강인덕(康仁德)전 통일장관 부인 배정숙(裵貞淑)씨 등 증인을 상대로 신문을 벌였다.다음은 신문요지. ■ 함석재의원(자민련)■ 라스포사에 주로 함께 간 인사는. 연정희씨,전옥경 작가,이순희씨,최 권사라는 분 등이다. ■12월10일 이형자씨 사돈인 조복희씨에게 ‘비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며로비필요성을 시사했나. 조씨를 무색회에 넣지 않겠다고 해 이유를 물었더니 외자도피건 등과 관련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그래서 그 얘기를 했다. ■16일 30만원짜리 블라우스를 왜 연씨에게 선물했나. 연씨가 집에 있는 전복,송이,갓김치 등 돈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랑을 줬다.크리스마스도 되고 블라우스를 너무 좋아해 내가 선물한다고 했다. ■17일 오후 이형자씨에게 2,400만원어치 옷 구입했다며 알고 있으라는 전화를 했나. 그런 일 없다.값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나. ■ 안상수 의원(한나라당)■작년 12월19일 강창희 장관 딸 결혼식 후 연정희,김정길 전 행정자치장관부인 이은혜씨 등과 함께 라스포사에 간 일 있나. 그렇다. ■라스포사 직원이 옷을 연정희씨 차에 실어줬나. 사는 것도,실어주는 것도 못봤다. ■연정희씨가 반환했다는 말 안했는가. 그냥 반환했다고 하더라. ■99년 1월 라스포사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증인이 쓰러져 정일순씨가 병원까지 태우고 간 적 있나. 1월18일이다.어린이를 위한 세미나에 갔다가 이은혜씨 전화받고 라스포사에갔더니 조사하고 있더라. ■병원에 이은혜씨와 연정희씨가 찾아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했다는데. 그런 애기를 들은 적 없다. ■ 한영애 의원(국민회의)■이화여대 바자회에서 이형자씨가 연정희씨에게 그림을 고르라고 했다는데. 그런 얘기를 해서 정신 없는 소리를 한다고 했다. ■이형자씨가 연정희씨에게 전복을 보낸 일로 서로 감정이 상했다는데. 이형자씨가 IMF시대에 전복도 귀한 것인데 돌려보냈다고 해서 서로 감정이좋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 최연희 의원(한나라당)■검·경 조사는 밍크코트 입은 날을 12월26일로 통일하고 있는데. 19일 강 장관 딸 결혼식 후 라스포사에 가서 그날 분명히 밍크코트를 봤다. 그 이후로는 보지도 못하고 입지도 않았다. ■19일 라스포사 2층에 가서 밍크코트를 입은 뒤 갖고 온 적이 없나. 전혀 그런 일 없다. ■ 조찬형 의원(국민회의)■이형자씨가 증인을 통해 최 회장사건을 청탁했나. 아니다. ■이씨가 호피코트를 연정희씨에게 사줬나. 아닐 것이다. ■밍크코트를 본 것이 26일이 아니고 강 장관 딸 결혼식 날인 19일이 맞나. 병원에 있을 때 ‘모두 26일 이라고 답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면 그날이 맞겠지요’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19일이 분명했다. 김성수 주현진기자 sskim@
  • 백휴씨‘김성종 읽기’서 주장

    추리작가 김성종의 추리문학세계와 작가론을 담은 ‘김성종 읽기’(남도)란 책이 나와 관심을 모은다.지은이는 한국추리작가협회 감사인 백 휴씨.‘사이버킹’으로 97년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받기도 한 백씨는 이 책에서 김성종 추리문학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성종 문학의 철학성은 곧 장자의 도추(道樞,Pivot of the Law)의 세계관과도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도추는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말로,절대적인 도(道)의 관점에서 시비(是非)를 봄으로써 사물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를 일컫는 말.끝이 없는 시비의 논의를 둥근 테로 볼 때 도추는 그 테 가운데 있는 공허한 부분에 해당한다. 한편 백씨는 추리소설의 문체와 관련,김성종은 늘 오감에 호소하는 시각적이고 영상적인 언어를 구사한다고 말한다.또한 김성종은 일본의 유명한 추리작가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가 소설의 서두를 주로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비해 소설 서두를‘묘사’로 시작하는 것도 색다른 점이라고 주장한다. 이밖에 ‘김성종과 장정일:욕망의 전복과 정신분열의 시뮬레이션’‘양가성(兩價性)과 무차별성의 세계:카뮈와 김성종으로부터 로브 그리예에 이르는 길’‘범죄에 대한 미학적 태도는 가능한가:19세기 중·후반의 유럽 상황을 중심으로’ 등을 주요 주제로 다뤘다. 김종면기자
  • [이것이 문제다]-지휘체계 혼선…재난관리 ‘구멍’

    집중호우와 태풍은 해마다 찾아들고 있다.그리고 피해는 반복되고 있다.화재와 대형건물 붕괴같은 대규모 재난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피해의 불안감도떨치지 못하고 있다.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계기로 재난관리법이 만들어지고 중앙 119구조대가 창설된 지도 4년이 지났지만 재난관리체계의 취약성은 거의 고쳐지지 않았음이 이번 수해에서 드러났다.재난대책이 발전하기는 커녕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고질화됐다고까지 말하여지는 국가재난관리체계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재난관리업무는 부처별로 따로 놀고 있으며 중복돼 있다.부처간 긴밀한 협조체계도 찾아볼 수 없었다.경찰(112)과 소방(119),그리고 보건복지부의 응급환자정보센터(129) 등으로 흩어진 응급구조 및 신고체계는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긴급대응 및 구조재난은 피해확산을 막고 사회적·경제적 파장을차단하는데 중요한데도 구조장비와 인력은 부족한 상태이다. 이재민 구호과정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중앙정부내의 행정자치부와보건복지부·기상청·소방본부 등은 제각각 업무를 처리했다.행정자치부 장관과 각 부처의 차관들이 참석하는 재해대책위원회에는 정작 기상청장은 끼지도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점도 효율적인 재해대책을 가로막는 한 원인으로꼽힌다.중부 수해는 재난과 재해에 종합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는 관리체계수립이 시급함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수마(水魔)가 잇달아 찾아들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단체의 구호 준비도 소홀,이재민들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제도적인 허점 못지 않게 공무원이나 국민들의 의식전환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대구 가스폭발,성수대교 붕괴에 이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서야 재난관리법이 제정될 수 있었다. 한동안 대형참사가 일어나지 않자 재난관리 조직과 법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온 것이 사실이다.정부 구조조정 과정에서 총리실의 안전관리심의관 자리가 없어지고,행정자치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가 3국 11과에서 2국5과로 크게 줄어들었다.소방인력의 상당수도 감축됐다. 하지만 조직이 축소되는 만큼 재난관리에구멍이 생길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이번 수해가 나고서야 뒤늦은 지적들이 속출하고 있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문가 양성은 기대조차 어려웠다는 게 관료들의 설명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재난관리의 문제점을 영화 ‘타워링’에 비유했다.미국식의 최첨단 설비와 장비들이 들어간 초고층 빌딩 타워링이었지만 몇 푼의돈때문에 불량전기부품을 사용하는 안전불감증이 있는한 대형참사를 피하기어려웠다는 얘기다. 재해의 사후대책과 관리도 중요하지만 사전 예방책에 더욱 중점을 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재해대책 예비비를 재해대책비로 바꿔 예방설비에투자하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립방재연구소의 심재현(沈在鉉)연구관은 “재해복구비의 3분의 1정도를예방에 투자하면 재해복구비 전체를 절약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며 “재난 예방 시설 설치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10년간 연평균 재해피해액을 재해대책비로 편성해 지출하면 엄청난 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서동철기자 dcsuh@ *민방위 재난통제본부 수습 총괄 ‘안전사고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는 것’이라는 군(軍)의 격언이 있다. 안전관리를 강조하는 말이다.대형재난은 사회적 충격이 큰 만큼 국민경제에미치는 악영향도 클 수 밖에 없다. 각종 재난·재해 가운데 풍수해가 가장 많은 재산피해를 입히고 있으며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피해가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이같은 재난을 예방하고,피해를 수습하는 행정체계는 국무총리 직속의 중앙안전대책위원회를 정점으로 한다. 예방기능은 각 부처로 분산되어 있다.민방위·화생방·자연재해·재난관리·소방안전·수난구호는 행정자치부,산업재해는 산업자원부,수질 오염은 환경부,방사능 재난은 과학기술부,산림재해는 농림부,해양오염은 해양수산부,전염병 관리대책은 보건복지부가 맡는다. 그러나 일단 재난이 일어나면 수습은 행자부의 민방위재난 통제본부가 실무적으로 총괄한다.각 지방자치단체에도 비상기구가 편성되어 있다.그러나이들 기구는 종합적이고 강력한 집행기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받고 있다. 구조·구급 기능은 119 구조대가 맡는다.첨단장비를 갖춘 중앙 119구조대는 대형재난에 대비한 조직으로 최근 첨단 구조체제를 갖춘 새 청사가 마련되기도 했다.전국 132개의 소방서마다 구조·구급대가 배치되어 있다.이번 수해에서는 119구조대의 활약이 두드러지기도 했다.또 여천공단의 화학구조대와 지리산 국립공원 등의 산악구조대,한강·청평·충주·통영의 수난구조대등 특수구조대도 운영되고 있다. 서동철기자 * 대안은 무엇인가…업무 단일화 통합기구 필요중부 수해에서 재난·재해대책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대책이 각 부처별로 분산돼 있는데다 행정자치부장관이 본부장인 중앙재해대책본부도 적절한 대책마련보다는 상황집계에 치우쳤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종합적이고 강력한 재난대책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정부의 구조조정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줄어든 재난관리조직은 효율적인 대책에 역부족이었다. 까닭에 대통령 직속의 재난관리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감사원장자문기구인 부정방지대책위원회(부방위)가 최근 제시한 재난관리체계의 3가지 모델도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부방위의 방안은 재난 관리청이나 소방청을 신설하거나 기존의 조직을 보완하자는 것이다.재난관리청 신설안은 행정자치부 산하에 독립청을 신설해 수해를 비롯한 모든 재난의 사전 예방과 사후 대책을 총괄하도록 하자는 방안이다. 소방기능을 중심으로 재난관련 조직과 업무를 일원화하자는 소방청 신설안은 자연재해와 인위재해가 원인만 다를 뿐이고 인명과 재산피해를 끼치며 복구과정도 비숫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마지막 보완방안은 민방위 재난통제본부 체제를 유지하되 재난 종류별로 돼 있는 것을 단계·기능별로 업무를 분담시켜 조직을 재편한다는 것이다.부방위는 단기적으로는 현재의 재난체계에 통합관리기능을 부여하고,장기적으로는 소방청같은 독립기구 신설이 바람직스럽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서동철기자 @*대형 재난·사고 일지■93.1.7.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93.3.28. 구포열차 전복사고■93.7.26. 아시아나 여객기 해남 추락■93.10.10. 서해 위도 여객선 침몰■94.10.21. 성수대교 붕괴■94.10.24. 충주 유람선 화재■94.12.7.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95.4.28. 대구 도시가스 폭발■95.6.29. 삼풍백화점 붕괴■96.4.3. 남한강 버스 추락■96.4.23. 강원도 고성 산불■96.7.25.∼7.28. 서울·경기 북부·강원 집중 호우■97.8.6.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98.7.31. 지리산 폭우■98.8.3.∼8.6. 서울·경기 북부 집중호우■98.10.29. 부산냉동창고 화재■99.6.30. 씨랜드 화재■99.7.31.∼8.3. 서울·경기 북부·강원 집중호우·태풍 * 외국의 재난관리 워싱턴 최철호특파원·황성기기자 미국은 수해나 각종 사건·사고를 비롯한 모든 재난관리는 전화번호 911의 통합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70년대 전까지 비상 방송은 대통령실,화재는 상무부,국민방위는 국방부,범죄는 경찰과FBI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이런 비효율적인 체계는 대통령 직속으로 연방비상관리처(FEMA: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가 설립되면서 일원화됐다. FEMA는 LA 대지진과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사고가 터졌을 때 사태와 혼란을 효율적으로 수습하고 일사분란하게 피해를 복구하는 데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수해나 토네이도가 발생,인명피해가 나면 1차적으로 911신고를 받은 지방관리소는 응급구호팀이나 재해복구팀에 즉각 연락해 인명피해를 최소화시키는동시에 지방행정기관장을 거쳐 주지사에 알린다.주지사는 FEMA와 중앙정부에 연락하며,피해정도에 따라 대통령은 재난지역을 선포하게 한다.중앙정부 차원에서는 긴급대응팀이 구성돼 의료,위험물관리,복구,소방,식량 등의 종합적 대책이 세워져 일사불란하게 진행된다. FEMA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직접 비상관리연구소라는 비상대비담당 공무원및 전문가 교육부서를 운영하는 것.연방과 지방정부의 소방요원,경찰과 민간업체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는 실기위주의 토의식 교육으로 효과적인 대응책이 몸에 배도록 한다. 일본에서는 지진같은 대형 재해가 많은만큼 방재체계가 잘 발달돼 있다.지진피해 판독이나 화재확대 예측 등에 첨단 컴퓨터 영상시스템 등을 통한 정보전달체계의 첨단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그러나 95년 고베(神戶)지진때 재난대책에 일부 허점이 드러나 미국의 FEMA를 본뜬 비상대책기구 설립을추진중이다. 프랑스는 긴급 재난사태에 5분내에 소방대원이 출동,군경과 공조로 응급조치를 한다.26만6,000명의 소방대원이 전국 1만여곳의 비상센터에 20개의 비행장을 갖추고 출동태세를 갖추고 사뮈(SAMU)라 불리는 의료서비스기관과 함께 응급조치를 취한다. hay@
  • 「중부 물난리」부처별 수해복구 대책

    2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수해대책 관계장관회의에서 각 부처 장관이 보고한 부처별·도별 수해복구 대책은 다음과 같다. ■ 경기도 비축물자를 파주와 연천지역에 집중 지원한다.연천 800명,포천 210명 등 모두 1,010명의 이재민에게 급식을 시행한다.동두천·파주·연천의급수 중단지역에는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급수차량 10대를 지원받아 급수한다.연천댐 응급복구를 위해 육군에 장비지원을 요청한다. ■ 강원도 수해복구를 위해 1,242명의 민방위 대원을 긴급 소집했다.인명구조에 25명,응급복구에 817명,주민대피 지원에 200명,시설물 순찰에 140명을투입한다.이재민을 위해 담요 168장과 쌀 90kg,라면 95상자,치약 등 생필품125세트 등을 지원한다. ■ 농림부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농림부 예산 16억원과 시·도에서 확보하고 있는 공동방제 예산을 투입,침수 농지 방제작업을 실시한다.침수 농작물에 대해서는 1㏊마다 4만9,940원의 농약값을 지원하며,농작물 피해가 심한농가에는 경지규모 및 피해정도에 따라 1∼3개월간 생계비를 지원하고 중·고생 학자금을 3∼6개월간 감면한다.수해 시·군 인근지역의 장비를 수해지역에 긴급지원하는 한편 가축전염병 예방을 위해 폐사가축을 즉시 묻는다. ■ 보건복지부 수인성 전염병환자 발생에 대비해 수해지역에 대한 예방 홍보 및 방역소독을 강화한다.수해지역의 환자발생 현황을 파악해 보건소를 중심으로 진료활동을 전개한다.수해지역의 식품접객업소 및 이재민 집단 수용소의 급식시설에 대한 위생 지도점검을 강화한다.이재민에 대한 생계구호비를지급하고 인명피해에 따른 장례비와 침수주택수리비 등을 지원한다. ■ 국방부 연천 한탄강 주변의 민간인 대피를 지원하는 데 120명의 병력을투입했다.탐색구조부대 11개팀 643명,재난구조부대 14개 부대 1,424명이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다. ■ 환경부 동두천·파주·연천 지역에 먹는 샘물을 긴급 공급하고 한국샘물협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 건설교통부 2003년까지 2,464억원의 예산을 들여 하천 172㎞를 정비하고2곳에 배수펌프장을 설치한다.2000년까지 45억원을 들여 임진강 유역에 강우레이더를 설치한다. ■ 정보통신부 경기·강원지역 이재민 대피소 37곳에 47대의 무료전화기를설치한다.침수지역 유선통신시설은 물이 빠지면 1주일 안에 완전복구한다. ■ 산업자원부 수해 기업에 대해서는 하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중소기업 구조개선자금 및 경영안정자금·공제사업기금 등의 상환을 6개월간 연장한다. 공공기관이 물품을 구매할 때 수해업체를 우선 선정토록 한다. ■ 해양수산부 및 해양경찰청 94개 항로 127척의 운항을 통제했다.집중호우에 대비해 항·포구,상습침수지역 어민 및 주민을 대피시켰다. ■ 산림청 산사태 피해지 82곳을 응급복구하고 붕괴우려 지역에 대한 안전조치를 완료했다.고립지역의 주민을 구조하기 위해 32대의 헬기와 114대의 중장비를 동원했다. ■ 철도청 경원선 15곳,경의선 3곳,교외선 1곳 등 파손된 19개의 철로 가운데 12곳의 복구를 완료했다.경원선 4곳과 경의선 3곳은 물이 빠진 뒤 복구할예정이다. ■ 경찰청 1만여명을 동원해 순찰활동에 3,538명,교통통제에 3,098명,이재민수용시설 방범에 2,873명,인명구조 및 피해복구에 450명씩 지원하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사설] 수해복구 신속하게

    연 3일째 중부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에서는 잠수교와 동부간선도로가 침수되는 등 수도권에 엄청난 재난을 몰고왔다.중앙재해대책본부는 이번 집중호우로 전국적으로 주택 1,189채와 농경지 8,611㏊가 침수되거나 유실되고 5,8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수백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고 잠정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중형 태풍으로 일컬어지는 태풍 ‘올가’가 북상중인데다 기압골이계속 중부지방에 머물면서 최고 520㎜의 비가 더 내릴 것으로 예보하여 비피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사전에 만전을 기하지 않은 허술한수방(水防)대책이 예상 외의 비피해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지난해비피해 때도 당장 눈가리고 아웅식의 임시 복구보다 두번다시 같은 사태가일어나지 않도록 완전복구 등 수방대책에서의 허술한 점을 철저히 점검해서대비할 것을 촉구했었다.그러나 올들어 장마철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부랴부랴 땜질식 복구로 응급조치를 한 것 등이 더 큰 피해를 부른 것 같다. 사전에 철저히 예방하지못한 것을 후회하기보다 이제는 재난 현장에서 발생하는 추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수습과 복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루 아침에 집을 잃거나 재산을 잃은 수재민들은 오늘 내일 쉽게 그칠 것같지 않은 집중호우 속에서 집을 잃은 안타까움에 앞서 각종 수인성(水因性) 질병,쓰레기 악취 등의 삼중고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특히 물난리 뒤에 기승을 부리는 장티푸스,이질,콜레라,악성 피부병 등 수인성 질병의 방역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더구나 전염률이 높은 세균성 이질 등은 수해지역에서의 급속한 전염이 우려되는 만큼 소독과 예방접종을 철저히해야 한다. 언제 호우가 또 퍼부을지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민들은 당황하지 말고 라디오와 TV를 통해 기상상황을 계속 청취하면서 집 부근 축대나 담장이무너질 우려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긴급사태에 대비하여 이웃과 행정기관간의 비상연락망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만은 괜찮겠지 하거나 귀찮아서 머뭇거리다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자초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지구 곳곳은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으로 폭염과 물난리,가뭄을 겪고 있다.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집중호우나 태풍같은 자연현상을 막을 수는 없을것이다.그러나 아무런 예고없이 닥치는 것이 자연재해라지만 미리 대책을 세우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될 수 있는 한 피해를 줄이고 재난현장에서발생하는 질병 전염 등의 추가재해를 예방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 독도생태계 첫 국가차원 조사

    독도 생태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종합적인 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된다. 해양수산부는 다음달 초부터 내년 말까지 5억원의 예산을 들여 독도의 해저지질,해양물리,수질환경,기상역학 등 물리 화학 생물학적 차원에서 독도의생태계를 종합적으로 조사하기로 하고 22일 독도생태계 조사연구계획 보고회를 가졌다. 독도에 대한 조사는 97년 민간단체인 독도보존협회가 해양자원에 대한 기초연구를 실시하는 등 단편적으로 진행된 적은 있지만 종합적인 연구가 실시되기는 처음이다. 이번 조사에는 한국해양연구소를 중심으로 국립수산진흥원,해양조사원,해양수산개발원,서울대,동국대,독도보존협회 등이 대거 참여한다. 해양부는 이번 조사를 통해 기존 독도의 해양현상에 대한 단편적 조사를 취합,사장될 우려가 있는 자료들의 활용가치를 높이는 한편 독도가 갖는 경제적인 의미와 인문지리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분야를 망라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독도의 주생산물인 전복 등 어자원이 최근 급격히 줄고 있는 원인에 대한 정밀분석도 실시해 대책을 제시할 방침이다. 해양부는 독도 생태계 조사가 끝나는 내년 말쯤 독도에 관한 모든 자료를집대성한 ‘자원환경도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해양연구소 책임연구원 권문상(權文相)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독도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면서 “이번 조사는 독도가 진정 우리 국토로서 과학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것을 대내외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박사는 특히 “독도 자원환경도집을 영문으로도 만들어 국제 해양학계에발표,우리나라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과학적인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는 인식을 대외적으로 심어주겠다”고 말했다. 함혜리기자 lotus@
  • 아폴로11호 달 착륙 30주년-2017년엔 민간인 달여행 가능

    “이것은 하나의 작은 발자국이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거대한 도약이다.” 1969년 7월20일(한국시각 7월21일 오전 5시17분) 수많은 지구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에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디면서 ‘아폴로 계획’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 3명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11호 착륙선 ‘이글(독수리)’호가 달에 착륙한지 올해로 30년이 지났다.20세기의 대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인류의 달 착륙 3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달착륙경쟁은 미·소 냉전의 산물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기 전까지만 우주과학 기술의 최강자는 러시아(옛 소련)였다.57년 10월 세계 최초로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러시아는 61년 4월 12일 인간을 처음으로 우주로 보냈다.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최악이었다.가장 큰 충격을받은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었다.가가린의 최초 우주비행 성공과 거의 동시에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미국 CIA의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 대통령 존 F.케네디는 그해 5월 “60년대가 끝나기 전 달에 인간을 보내고 이들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선언했다.달 정복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62년 유인 달착륙계획(아폴로 계획)이 수립되고 NASA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우주기술은 급성장했다.미국보다 2년 늦게러시아는 본격적인 달 착륙계획(루나계획)을 수립해 65년 인류역사상 최초의우주 유영에 성공했지만 69년 2월 로켓실험에서 실패,선두를 빼앗기고 만다. 드디어 69년 7월16일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다.4일 뒤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은 ‘고요의 바다’에 성조기를 꼽았다.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사회주의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했음을 알리는순간이었다.미국은 아폴로계획에 24억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러시아가 루나계획에 투자한 액수는 4억5,000만달러에 불과했다. ■아폴로 계획,그 이후 아폴로 11호 이후에도 아폴로 12호가 ‘폭풍의 바다’를,14호가 ‘프라마우 고지’를 찾았다.15호에 탔던 우주비행사들은 전기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겼다.아폴로 계획은 72년 12월 17호 승무원인유진 셔먼과 해리슨 잭 슈미트가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한 것을 끝으로 조용히 막을 내렸다. 아폴로 이후 미국의 우주계획은 침체됐다.소련과 우주경쟁을 위한 사령탑으로서 무제한의 예산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NASA는 실속없는 우주사업에 예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기까지 했다.우주예산을 삭감할 수 밖에 없는상황에서 NASA는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수송시스템,즉 현재의 우주왕복선과우주 스테이션 ‘스카이 랩(sky lab)계획을 추진했다.달에 다시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수립한 나라는 없다.엄청난 비용은 물론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달여행은 언제나 가능할까? 달 여행을 하려면 자급자족이 가능한 영구 달기지가 우선 건설돼야 한다.지난 97년 11월 ‘더 퓨쳐리스트’에 실린 조지워싱턴대학의 예측에 따르면 영구 달기지가 건설되는 시기를 2028년,그 가능성은 55%였다. 한편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루나리소스사는 민간차원의 달여행을 구현하는것을 목적으로 94년 8월 ‘아르테미스 계획’(http:///www.asi.org)을 세우고 회원권 판매에 들어갔다.이 계획에 따르면 늦어도 9년안에 시험비행을 하고 2017년쯤 50인승 왕복 우주선 50대가 마련돼 여행이 가능하다.이때쯤엔또 187개의 객실을 갖춘 루나시티호텔이 달에 들어선다.1주일 여행비용은 약9만6,000달러(1억여원). 함혜리기자 lotus@
  • 남녀차별 새달부터 제재…국무회의, 시행령 의결

    정부는 14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시행령안’ 등 26건의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다음달 1일부터 시행되는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시행령은 직장내 성차별이나 성희롱 논란이 벌어졌을 때 여성특별위원회가 조사에 들어가결과에 따라 해당 사업장에 시정조치를 권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성특위는 조사를 위해 해당 사업장에 관계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소속 직원이나 전문요원을 현장으로 보내 실지조사도 할 수 있다.사업장이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시행령은 또 공공기관의 장(長)과사용자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1년에 한차례 이상 실시토록 의무화했다.이밖에 시행령은 여성특위로부터 위임받은 남녀차별 개선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실무위원장 1명을 포함,12명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남녀차별개선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국무회의는 또 국군기무사령부령을 개정,군 및 군과 관련이 있는 첩보의 수집·처리에 관한 사항에 대(對) 정부전복,대 테러 및 대 간첩작전에 관한사항을 명시했다.또 기무사 소속 군무원도 직무수행에 필요하면 무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함께 국무회의는 김학수(金學洙)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을 국제경제담당 대사에 임명했다. 정상천(鄭相千)해양부장관은 회의에서 오는 2010년 ‘해양,인류와의 조화’를 주제로 열리는 세계 해양엑스포를 전남 여수에 유치키로 했다고 보고했다.세계 해양엑스포는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해양관련 종합전시회로 세계 150여개국이 참가,각국의 첨단 해양과학,해양개발 현황,해운 및 수산산업 등을소개하는 행사다. 이도운기자 dawn@
  • ‘출어금지’로 매일 1억이상 손해

    북한 경비정의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침범으로 취해졌던 서해 5도서 해역의 어로금지조치가 9일 서쪽 해상만 제한적으로 해제됐다.그러나 북한 경비정 월선지점과 가까운 동쪽바다는 10일까지 출어금지 조치가 풀리지 않아 꽃게잡이 어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흘째 발이 묶인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남서쪽 연평어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게 어장.옹진군청에 따르면 지난해 1,447t의 꽃게를 잡아 78억6,100만원의 어획고를 올렸다. 꽃게잡이가 3월부터 시작돼 5∼6월에 절정을 이루는 점을 감안할 때 요즘은 1년 중 가장 풍성하게 꽃게를 잡아올리는 철이어서 어민들의 피해는 더욱큰 셈이다. 연평도 내 선박 50여척이 꽃게잡이 제철을 맞아 하루 1만여㎏의 꽃게를 잡아올리고 있었지만 출어 금지로 매일 1억2,000∼1억5,000만원의 손해를 보고 있다. 옹진군청 어업지도계 관계자는 “꽃게 산란기인 다음달 1일부터 8월31일까지 2개월동안은 꽃게잡이가 금지되기 때문에 요즘이 꽃게잡이 어민들에게 1년 농사를 갈무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안전을 위해 조업을 금지하는 것은 좋지만 조업금지가 장기화돼 시기를 놓치면 그 피해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백령·대청어장(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의 경우 까나리와 멸치,우럭,해삼,전복 등이 많이 잡히는 곳이다.이 지역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10일부터 74척이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조업을 시작했다. 함혜리기자 lotus@
  • 제주도 日관광객 유치 ‘리조트의 섬’ 판촉 나서

    제주도가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리조트의 섬,제주’ 라는 관광상품을 내놓고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판촉에 나섰다. 도는 일본에서 3∼4일씩 쉬는 연휴가 7월부터 내년 봄까지 6차례에 이르는점을 감안,2박3일 일정의 ‘리조트의 섬,제주’ 상품을 통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로 했다. 이 상품은 남성의 경우 골프 등 레저스포츠,여성은 미용과 휴양을 중심으로 일정이 마련됐고 남녀공통으로 기생화산인 오름 트래킹과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해안 절경지 탐방 등으로 코스가 짜여졌다.코스에는 말고기 요리와 전복죽 등 제주 전통음식을 즐기는 일정도 포함돼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 금강 탐사 뗏목 전복… 3명 익사

    금강 상류에서 뗏목 전복사고로 실종된 교회신도 4명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119구조대와 경찰은 23일 11시쯤 사고 지점에서 500여m 떨어진곳에서 사체 3구를 인양했다. 인양된 사체는 손명환(42·유성구 송강동 25의 9) 최명환(33·유성구 봉산동 893) 황진이(28·서울 중랑구 면목동 210)씨 등으로 함께 실종된 모일순씨(45·유성구 송강동 송강그린아파트 319동 1506호)씨는 찾지 못했다. 대전 구즉감리교회 신도인 이들은 22일 같은 교회 신도 7명과 함께 자체 제작한 뗏목을 타고 금강탐사에 나섰다가 오후 4시40분쯤 뗏목이 뒤집혀 실종됐었다. 이 교회 전도사 박정훈(31)씨는 “수련회 프로그램중 하나로 11명이 뗏목을 타고 오전 9시20분쯤 대전시 유성구 구즉동을 출발했는데 뗏목이 사고지점에서 가교(假橋)에 부딪치면서 중심을 잃어 뒤집혔다”면서 “7명은 헤엄쳐나왔으나 손씨 등 4명은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 “박정희씨 찬양 용납할수 없는일”-김영삼전대통령 성명 발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과의 역사적 화해를 선언한 것과 관련,“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민주헌정을 중단시킨 독재의 상징인물인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김 전대통령은 17일 측근인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의원을 통해 퇴임 이후 처음 발표한 성명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아 있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면서 “전임 정권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내릴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대통령은 박정희정권을 ‘장기 독재정권’으로 규정한 뒤 “박정권에대한 미화는 기본적으로 지역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현정권의 사고에서 비롯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오전 수유리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파월, 對유고 전면전 촉구

    워싱턴 AFP 연합 콜린 파월 전 미 합참의장은 16일 코소보 사태를 둘러싼 나토의 유고전 수행방식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이제라도 사상자 발생을 각오한 ‘전면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참의장 재임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파월은 NBC 방송 시사 토크쇼에서 미국은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을 히틀러에 빗대거나 코소보 사태가 사상 최악의 참극이라는 수사를 쓰고 있지만 정작 밀로셰비치 정권을 전복시키지 않고 단지 지상군 파병을 허락하도록 설득한다는 한정된 정치적 목표만을설정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습만 되풀이하는 것은 밀로셰비치에게 주도권을 쥐게 해 주는 것이라면서 걸프전 당시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했기에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그는 아무리 부인해도 지상군투입은 언젠가 하게 돼 있다며 승리를 위해서는 전면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車 주행시험중 바퀴파손 대우自연구소 상무 사망

    대우자동차는 14일 영국에 출장갔던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 강승훈(姜升勳·46)상무가 13일 오후 2시(현지시간) 차량 주행시험중 사고로 사망했다고발표했다. 강 상무는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 4륜구동(4WD) 차량 개발 책임자로 영국로터스(ROTUS)사 주행 시험장에서 도요타 랜드 크루저 차량을 시험운행하다타이어 파손으로 차량이 전복되면서 사망했다. 강 상무는 미국 ‘루트거스’주립대 공학박사 출신으로 해군사관학교 강사,루트거스 주립대 조교수,풍성전기 상무를 거쳐 지난 91년 쌍용자동차 이사로 입사했으며 지난해 대우의 쌍용자동차 인수후 대우자동차로 옮겨 4륜구동차량 개발 책임을 맡아왔다. 김병헌기자 bh123@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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