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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자극않고 「조문파문」 수습/정부의 대북입장 정리에 담긴 뜻

    ◎“6·25 책임” 등 최소 언급… 비방용어 자제/“조문은 불법” 천명… 이념논쟁 확산 제동 정부가 18일 이영덕국무총리의 국무회의 지시 형식을 빌려 김일성의 사망과 관련한 견해를 밝힌 것은 어찌 보면 두마리 토끼를 쫓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김일성의 역사적 죄과를 지적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논쟁에 쐐기를 박자는 것이 그 하나이다.또 하나는 상중에 있는 북한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란 매우 어렵다.김일성이 죽은 뒤 열흘동안 정부가 침묵하며 고심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 이날 이총리의 발언도 그렇다.보수적인 쪽에서 보면 김일성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는 비판이 나올만 하다.예전같으면 자연스레 썼을 「전범」이나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자제됐다.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책임자라는 평가도 새로 규정한게 아니라 「이미 내려져 있음」을 밝히는 형식을 취했다. 반면 진보적인 쪽에서는 남북관계를 경색시킬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여야 정치권에서 이념논쟁이 수그러들고 있는데 굳이 김일성의 역사적 평가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총리의 이날 발언은 어느 쪽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했다.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최선의 결론이라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안으로는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조문파문으로 빚어진 이념논쟁을 잠재우는 효과를 이미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총리의 이날 발언을 계기로 김일성 사망 조문은 「불법이며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분명해지리라 예상된다.통일이나 평화정착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전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뜻도 읽을수 있다. 민주당등 야당도 이날 이총리가 밝힌 정부 견해를 지지한다고 논평했다.여야 정치권이 소모적인 사상논쟁을 중지하자는 차원을 넘어 초당적인 목소리를 낼 여지를 만들고 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운동권 학생들의 분향소 설치나 친북해외동포들의 김일성 사망 조문을 막는 효과는 아직 미지수이다.하지만 그런 행동이 이어진다해도파문이 확산되지는 못하리란게 대체적인 예측이다.국민들 대다수가 무엇이 불법인지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면 일부의 법위반은 여론의 외면을 받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보다 걱정하는 부분은 북한의 대응이다.북한이 이총리의 발언을 구실삼아 남북대화를 기피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높인다면 우리로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이다. 정부관계자들은 단기적으로는 북한이 강경자세를 유지하리라 전망하고 있다.우리 정부가 일단 김일성을 전쟁및 분단고착의 책임자로 규정한 것을 놓고 비난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특히 김일성 사망 조문을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것은 이번 기회에 남측을 통일전선전략으로 흔들어 보겠다는 북한의 의도를 봉쇄하는 것이기에 북한으로서는 아픈 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이 오랫동안 강경자세를 유지할 수는 없으리라 여겨진다.북한이 김정일체제를 조기에 안정시키려면 국제사회,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남북관계를 경색시킨다면 오히려 북한의 붕괴가 촉진될수도 있다.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더 느끼는 쪽도 북한이다.적절한 시점에 자세를 누그러뜨리고 대화의 마당으로 나올 것으로 정부관계자들은 기대하고 있다.이총리도 이날 남북대화,특히 정상회담 개최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강조,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총리 「대북입장」 발언 내용◁ ▲김일성은 민족분단의 고착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는 역사적 평가가 이미 내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부 재야및 운동권 학생과 사회일각에서 김일성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조전발송,조문단 파견 논의 등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무분별한 행동으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일들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특정 대학에서 일부 학생들이 김일성을 애도하면서 그를 미화시키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분향소까지 차린 것은 국민적 정서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아니라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불법행위이다.정부는 실정법을 위반하는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법에 따라 이를 엄단할 것이다.▲그러나 정부는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 진전시켜 나간다는 정책기조는 일관성있게 견지할 것이며,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원칙은 유효하다는 자세에 변함이 없다. ▲통일원,외무부,국방부등 관계부처는 북한의 권력승계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북한 내부의 어떠한 상황변화에 대해서도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해 주기 바란다.
  • 오늘 국무회의… 대북발언 수위조절

    ◎“김일성 「6·25」 책임”… 불법조문 엄단/죄과불구 정상회담 등 대화노력 지속/북 상황변화·대남분열책 등 “예의주시” 정부는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뒤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해온게 사실이다.사망직전의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하는등 대화자세를 보여 한반도에 화해의 분위기가 흘렀는데 굳이 그것을 깰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정부의 이같은 「호의」가 북한에 의해 좋게 수용되었다면 크게 바람직스러운 일이나 그렇지를 못했다.북한은 김일성 사망 조문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려는 의도를 여기저기서 드러냈다. 우리 쪽에서도 문제는 터져 나왔다.일부 야당 의원들이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조문문제를 노골적으로 거론했다.민자당은 이들의 사상성을 의심하며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운동권 학생들은 분향소를 설치했고 일부 인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하는등 심각한 이념분쟁 양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부도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주말을 거치며 청와대를 중심으로 확립된 여권의 구상은 김일성의 죽음으로생긴 문제를 한번 종합 정리해주되 우리 내부에서 더 이상 소모적 논쟁이 이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아무리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 하더라도 김일성이 저지른 역사적 죄과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결론도 내려졌다.이념논쟁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는 민자당이 앞장서 야당과의 설전을 피함으로써 분위기를 잡기로 했다. 정부가 김일성의 역사적 죄과를 따진다는 방침을 확정했음에도 형식및 발언 강도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심한 기색이 있다. 일요일인 17일에도 청와대·총리실·통일원등 관련부처 담당자들은 대북발언의 「수위조절」을 위해 대책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결과를 청와대에서 발표 한다면 남북정상회담이 당분간 물건너 갈 우려가 있다.대통령이나 총리의 공식담화로 해도 북한이 「남측이 우리에게 도발하고 있다」고 크게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따라서 18일 국무회의에서 이영덕국무총리가 김일성죽음과 관련한 우리 정부의 견해를 정리,내각에 지시를 내리는 발언을 한뒤 강형석총리공보비서관이 발표하는 형식을 갖추기로 했다.국무회의는 헌법상 최고의결기구라 거기에서 하는 발언이 공식담화못지 않은 무게가 실린다는 점도 감안했다. 이총리의 발언 내용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있다. 발언요지는 대체로 4∼5부분으로 나뉜다.첫째는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라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그러나 「전범」 혹은 아웅산테러를 주도한 「테러범」이라는 식의 자극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피하려 하고 있다.또한 김일성의 역사적 죄과에도 불구하고 7천만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분명히 밝힐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둘째,불법조문이나 무단 방북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철저히 다루겠다는 뜻도 밝힐 예정이다.셋째로는 북한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겠다는 의지도 함께 피력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조문논쟁이 가열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으므로 그것을 바로 중지하자는 간곡한 호소도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 전범조문이 동족애인가/박찬구 사회부기자(현장)

    ◎범민련,“방북의도 순수하다” 강변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서거로 리념과 사상을 초월하여…민족적으로 애도를 금할 수 없다』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강희남목사(75)는 16일 상오 11시 45분쯤 서울 종로5가 신흥빌딩 6층 4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북 조문단 출발에 앞선 성명을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 강목사는 최근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김일성사망에 따른 조의표명과 조문단 파견에 대한 사회여론의 거센 비난을 의식한 듯 다소 기죽은 목소리였다. 『냉전도 종언을 고하고 있는 전향적인 정세속에서 남한 정부가 이번 애사에 조의도 표하지 않고 민간차원의 조상행사를 막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강목사는 이어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면 북에서 조의조차 없었겠느냐』면서 『범민련은 무엇보다 동족애의 차원에서 순수한 조문을 위해 판문점을 통과,방북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범민련측은 당초 「고 김일성주석조문단」을 강목사등 범민련 소속 간부5명으로 구성했으나 이날 상오 1시간여동안의 간부회의를 거친 끝에 강목사와 안장호간사(30·가명)등 2명만 조문단으로 파견키로 결정했다. 강목사는 그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행동하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뻔한 마당에 우리 단체의 장래와 사정을 감안해 소수 대표만을 파견키로 했다』고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강목사등 2명의 조문단은 낮12시쯤 사무실에서 나와 굳은 표정으로 번화한 종로6가의 인파를 헤치고 스텔라 택시를 잡아 탔다.이어 하오 1시 20분쯤 판문점으로 간다는 택시는 겨우 서울을 막 벗어난 경기도 고양시 내유검문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강목사의 연행과정에서 이 일대 왕복2차선 도로는 20여명의 보도진과 경찰·차량들때문에 한때 체증현상을 보였고 지나가던 시민들은 강목사의 외침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금세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실정법을 어긴」 설득력없는 외침은 유난히 인파가 붐비는 주말 하오의 통일로에 이내 파묻혀버렸다.
  • “김일성망령 몰아내자”/우익노병들 나섰다

    ◎「민족회의」 결성…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결의/국론분열 좌익책동 배격 다짐/“김일성의 반민족적 죄과 단죄해야 한국전쟁의 장본인 김일성조문파문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해방후 좌익들과 싸웠던 「우익노병」과 각계 원로인사들이 16일 「자유민주민족회의(민족회의)」를 결성,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기폭제로 나섰다. 이 모임은 김일성사망과 관련,일부 야당 국회의원의 조문발언과 한총련 대학생들의 분향소 설치등으로 물의가 빚어지면서 자유·민주수호애국연합,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등 80여개 민간 단체및 정치·법조·언론·학계·종교계등 저명인사들이 기존의 관변 반공단체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대거참여해 구성한 것으로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철승반탁·반공 건국학생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점곤평화연구원장·장지양전공군참모총장·오제도변호사등 원로인사 5백50여명은 이날 상오 10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민주평화통일등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민주민족회의」결성대회를 열었다. 대회에는 채명신예비역중장·김재춘전중앙정보부장·박용만민자당고문·이도형한국논단발행인·양동안교수·정재호전국회의원등과 함께 육사8기를 비롯,원로 반공인사들이 참석했다. 상임공동의장을 맡은 이철승씨는 대회사에서 『최근 김일성 사망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론분열양상이 나타나는등 해방 이후 최대의 체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애국단체와 자유민주주의 인사들이 힘을 모아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이 모임체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6·25 전범 김일성은 비록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반민족적 죄악은 반드시 민족과 역사가 단죄할 것』이라면서 『김일성 독재체제와 반민족 노선을 계승하는 자와의 남북정상회담을 엄중 경계한다』고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또 『북한의 통일전선 동조세력들의 작태를 우리 주변에서 단호히 배격한다』면서 『북한 동포들이 반세기에 걸친 조선노동당의 일당 독재에서 해방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민족회의는 이날 김일성 사망에 애도를 운운하며 반민족적인 망언을 한 국회의원은 즉각 사과하고 의원직을 사퇴할 것과 일본 무라야마총리의 김에 대한 조의 표명은 우리 국민을 모독한 것으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을 경우 오는 23일 방한을 저지하겠다는 장수동통일정책개발원장이 내놓은 긴급동의안을 채택,시행하기로 했다. 한편 이들은 이날 이찬혁전노총위원장등 12명을 상임공동의장으로 선출하고 오는 8월12일까지 체제를 완전히 정비,본격적으로 민주평화통일운동을 비롯해 북한 민주화촉진과 자유인권회복·해외동포의 평화통일 역량강화·이산가족 재회및 북한과의 다각적 교류추진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북5도민,조문 규탄대회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는 16일 하오2시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내 통일회관에서 실향민등 3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 죄상 규탄및 친북 용공분자 분쇄 궐기대회」를 갖고 김일성에 대한 조문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 엄중처벌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대회를 마친뒤 하오 3시쯤 이북5도청 광장에서 친북 용공세력을상징하는 허수아비 화형식을 갖고 구기삼거리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김일성 사망으로 남한에서 「주사파」를 비롯한 친북 회색분자들이 김일성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하는 등 반민족적·반민주적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면서 『국토분단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실향민들로서는 김일성사망으로 빚어진 국민의식의 혼란을 좌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의문은 또 『김일성의 죄상을 규탄함으로써 국론분열을 불러 일으키는 친북 용공분자들의 정체와 책동을 단호히 분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 「조문」 규탄시위/무공 수훈자회/“김 찬양세력 발본” 촉구

    ◎해병전우회도 단죄 촉구 대한무공수훈자회 소속 회원 2백여명은 15일 하오4시쯤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정문앞에서 최근 김일성 조문단 파견주장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살육한 전범자이자 민족의 반역자』라면서 『그러함에도 김일성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문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각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나약한 태도를 보이지 말고 차제에 김일성 찬양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또 이날 해병전우회중앙회(총재 이병문해병예비역대장)도 서울 캐피탈호텔에서 역대 해병대사령관및 전우회 간부연석회의를 갖고 김일성 조문발언으로 국민의식을 오도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을 이적죄로 단죄할 것을 촉구했다. 6·25 참전해병용사들인 이들은 이날 채택한 성명을 통해 이같이 정부에 촉구하고 김일성사망과 관련,조문단 파북등을 주장하며 공권력에 도전하고 있는 좌경세력들을 전원 검거,사법처리하여 자유민주주의사회 본연의 법치기강을 확립토록 강력히 요망했다.
  • 전남대서 발견된 유인물내용과 수사방향

    ◎“남한민중 통곡”… 북한조사 방불/김일성 극찬… 김정일에 충성서약까지/골수주사파 제작 추정… 전원 구속방침 전남대에서 15일 「김일성서거추모사」등 각종 유인물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김일성분향소까지 설치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12종 2천5백장의 유인물은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단순한 좌경세력의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게 검찰의 시각이다. 작성단체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16절지 2쪽 분량의 김일성추모사는 북한이 공식발표한 김일성사망 관련 문건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김부자의 주체사상과 생애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민족의 태양이시며 백전백승의 전설적 영장이시며 전체 조선민중의 심장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장군님의 서거에 남한 민중은 하염없이 통곡합니다」라는 긴 제목을 붙인 이 추모사는 한국땅에서 태어나 한국교육을 받은 학생이 썼다고 볼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 검찰의 분석이다. 추모사에는 김일성을 미화하는 수식어의 종류만 무려 15개나 됐다.북한방송을 통해서나 들을 수 있는 「위대한 수령」「어버이 수령」에서부터 「민족의 태양」「7천만 겨레의 영수」「경애하는 수령」「이 시대의 가장 걸출한 수령」등등이다. 이밖에 운동권의 유인물에서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김정일이 등장하고 있다.본문 말미에 「김정일비서의 두리(주위)로 더욱 똘똘 뭉쳐」라는 부분과 함께 유인물 맨마지막 문장을 다른 본문활자와는 다른 고딕체로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의 재현자 김정일비서 만세」라고 표기하고 있다. 검찰은 김일성추모와 관련,15일 현재 전국 25개 대학에 나붙은 각종 대자보 가운데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수사하고 있는 경북대·부산대·서강대·한림대등 4개 대학의 대자보및 유인물은 이번에 발견된 추도사에 비하면 오히려 순진한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검찰은 특히 이들 유인물이 전남대에 있는 남총련산하 전조통위사무실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전남대 조통위원장 김성옥군(23·공법학과4)과 전남대 총학생회장 진재영군(자연과학4년)등 2명이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김군은 한총련 조통위의 핵심간부 검거령에 따라 사전영장이 발부된 핵심인물이며 진군도 같은 혐의로 수배중이다. 검찰의 판단은 결국 이 문건은 조통위자체에서 작성된 것이 분명하며 한총련 출범식 당시 발견된 각종 이적성향의 유인물과 맥락을 같이 하는 골수「주사파」들의 작품으로 분석하고 있다. 검찰은 또 추도사와 함께 발견된 「김일성서거발표문및 생애」의 경우 북한방송을 청취해 타자로 옮겼거나 운동권에 침투해 있는 북한공작원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전남대분향소」 충격… 각계 반응/민족 최대전범 찬양·추도하다니…/현실 못보는 용공행태 안타까워 국민정서에 배치되는 일부의 「김일성조문」 발언으로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15일 전남대에서 김일성분향소와 김부자 찬양 유인물이 발견돼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유명철씨(61·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 사무총장)=한마디로 한심스런 작태다.이들의 행동은 용공분자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짓거리다.통일에 대한 국론을 한데 모아야 할 시점에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이들의 처사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특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해서 마치 통일이 금방 다가 올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환상을 깨게 만들어야 한다. ▲김재훈씨(67·실향민)=6·25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너무 쉽게 흥분하고 또 빠져드는 것 같다.우리 민족사에 최대의 비극을 안겨준 김일성을 어떻게 추도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지금도 북한은 대남비방방송을 계속하고 있지 않는가.정말 의식있는 학생들이라면 투철한 국가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이들의 행동은 분명 반국가적인 행태로 밖에 볼 수 없다. ▲허연씨(49·외환은행 방배동지점장)=학생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조문·애도를 표시하기에 앞서 북한의 인권상황,6·25전쟁발발의 책임자가 누구인지등 현실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학생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적인 이념에만 몰두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세종군(22·서울대 경영학2년)=남총련의 무턱댄 친북성향이 이번 전남대의 김일성분향소설치로 여실히 나타났다.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관계가 과도기적 시기에 처해있는 조심스러운 시점에서 기본적으로 남북당국간의 접촉이 선행되어야 함이 원칙인데 조문사절파견논의,분향소설치등은 국민정서에도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무분별하고 책임의식이 결여된 행동이다. ▲천동호씨(35·회사원)=어떤 해결책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정부도 과거 문익환목사 방북때와 달리 너무 느슨하게 핵생들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차제에 정부에서 김일성에 대한 입장표명을 확실히 하여 이러한 국론분열 양상을 막아야 한다.
  • 정상회담 빠를수록 좋다/김형국(대북정책 새 접근)

    ◎핵연료봉 재처리시간 주지말아야 북한 김일성사후의 새로운 지도체제는 장례식 이후에 공식적으로 윤곽을 드러내겠지만 그동안 명실공히 제2인자로 군림해 왔던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할 것이 거의 틀림이 없다. 김일성의 영향력 아래서 후계자로 지목받은 이후 가능한 공공행사의 참석을 피해왔던 김정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혹자는 그의 비정상적인 사생활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고 혹자는 그가 비범한 두뇌와 논리를 가진 자로 평가하고 있다. 어떤 경우이든 앞으로 그의 행동은 향후 남북관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정부가 현재 남북정상회담의 개최원칙에는 변함이 없으면서도 북한의 권력계승이 완전히 완료된 후에 정상회담개최를 위한 시기나 조건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나름대로 신중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을 정점으로 하는 북한의 신체제는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상당기간 권력기반을 공고히 해나갈 것으로 분석된다.일부의 평가처럼 그의 권력승계 이후 당장 족벌간,파벌간 권력투쟁이 일어나거나 군부와의 마찰 등을 상정하는 것은 북한의 정치권력을 서구의 시각으로 보는데서 연유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정일체제는 그동안 김일성이 근 반세기동안 구축해온 「주체노선」의 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관측이 가능하다. 과거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이 사망한 후에 풍미했던 전임자에 대한 격하운동은 김일성사후의 북한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더욱이 군사쿠데타에 의한 전혀 새로운 지도층의 확립은 거의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김일성은 『일제로부터 민족해방을 가져오고 미제국주의로부터 인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의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너무나 확고히 굳혀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명분과 카리스마를 꺾을 자는 없는 것이다. 김정일체제는 그러나 새로운 지도자로서 이미지의 구축을 필요로 할 것이다.그러한 이미지는 이른바 「인민의 행복과 안녕」을 구두로서가 아니라 현실로서 보장해야만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만약 이같은 「물질적인 보상」이인민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이미지 구축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체제유지 자체가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김정일체제는 생전에 우상화했던 김일성을 이제는 신격화시키고 김일성이 죽기 전에 추구하려 했던 정책노선을 당분간 답습할 것으로 예상된다.왜냐하면 이 길만이 김정일지도체제의 조기정착을 가능하게 하고 김일성이 구사했던 방대한 권력의 공백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김정일체제의 갑작스런 대외정책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그것은 김일성노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뿐아니라 김일성노선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자신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정일체제가 개방을 추구한다 해도 지금까지의 『주체성을 훼손받지 않는』 극히 제한적인 범위내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김정일체제의 성격을 감안하여 우리의 대응에 관해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남북정상회담을 가급적 신속히 재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북한의 김정일체제가 사실상 구축된 이상 남북한 정상이 하루빨리만나는 것이 한반도의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한간이 더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온 세계가 다 알고있는 이상 회담결과의 성패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북한 신지도층의 핵에 대한 의견과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안에 대한 견해를 직접 알아보는 것만해도 큰 소득이 될 것이다.대화가 없는 대결보다는 대화가 있는 대결이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북한핵문제를 고려하여 가급적 8월말전에 1차 회담을 갖고 이어 적절한 시기에 2차 회담을 곧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리고 남북관계에 관한한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좋다. 북한이 지난 6월 원자로에서 꺼내 냉각저수조에 보관중인 연료봉은 8월말이면 재처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정상회담의 주요한 의제의 하나가 한반도의 비핵화문제라면 가능하면 8월말 전에 만나는 것이 북핵개발의 저지에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북한의 내부정세를 빨리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에서 한·미·일 공조체제를더욱 공고히 해야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치부되어야 마땅할 김일성의 돌연한 죽음이 분단 반세기만에 찾아온 남북화해의 기회를 또다시 지연시킨 아쉬움을 남겼듯이 김정일체제의 구축을 도와주는 것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 아이러니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과거의 일들을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분석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주어지는 것이며 당대의 사건들은 역사적 사명감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져야 미래의 역사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을수 있는 것이다.
  • 「김일성조문」 공방 가열

    ◎여/“전범에 테러리스트”/야/“화해차원 거론” 일부 야당의원의 「김일성조문」발언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여야의원들은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4분 자유발언을 활용,이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민자당의 김영광의원은 『김일성은 수백만의 동포를 죽인 전범이자 아웅산,KAL기 폭파 테러리스트이며 1천만 이산가족을 생이별시킨 원수』라면서 『김일성이 누구인데 조의표명,조의사절단 운운하며 비상경계령을 시비할 수 있느냐』고 민주당측을 비난했다. 민자당의 김기도·김두섭의원도 『민주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신뢰구축 차원에서 조문사절단 파견을 주장했다지만 조문단이 가서 무슨 일을 할수 있느냐』면서 『그같은 발언이 실언인지,역사의식의 왜곡인지,가치관의 상실인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이부영의원은 『민주당이 김일성의 전쟁도발이나 테러리즘을 역사적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바가 없다』면서 『조문사절 얘기는 김일성 개인에 대한 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남북간의 화해와 신뢰를 도모하자는 차원에서 꺼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의 장기욱의원도 『사이가 나빴던 집안들이 초상을 계기로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면서 같은 주장을 폈다. 이처럼 공방이 진행되는 동안 여야 의원들은 고함과 야유로 상대당의원의 발언을 비난,한동안 소란이 계속됐다. 한편 신민당은 이날 성명을 내고 『김일성 조문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 대화상대로는 김정일쪽이…(송정숙칼럼)

    정직하게 말해서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에 예정됐던 정상회담이 우리는 다소 불안했었다.그무렵 항간에서는 김일성을 만나고 온 사람은 모두가 좋지않은 운과 만나거나 다녀온 뒤에 「망했다」는 말이 이것저것 떠돌기도 했었다.조국이 통일만 된다면 조용히 시골로 낙향하여 과수원이나 돌보며 여생을 살고 싶다고 한 김구선생의 욕심없는 감회까지를 두고두고 모양사납게 만들어버렸고,독립지사 조소앙선생도 그에게 기만당했다.하려고만 들면 자신과 만난 사람들을 여지없이 곤란한 함정에 빠뜨리는 노회한 독재자가 김일성이다.그를 상대로 합리적이고 결이 곧은 민주주의 사회의,누가뭐래도 순진한 모범생격인 김영삼대통령이 마주 앉는다는 것은 국민으로선 조심스런 일이다.또 김일성은 김대통령과 한세대가 차이나는 노인이었다.경로사상에 물들어 성장하는 한국인에게는 노인을 거역못하는 체질이 유전되어 있다.게다가 유난히 효성스럽고 노인에게 다정한 김대통령이,자신의 부친과 동년배인 그 노욕 강한 늙은이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우리는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의 죽음소식을 듣고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무산되는 아쉬움은 들면서도,그런 노파심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운이 좋을 징조인가보다」하는 마음과 함께 은연중 고개를 드는 안도감같은 것을 체험했다. 이제 싫든좋든 정상회담의 상대는 김정일로 정해지는 것같다.김정일은 작가 최인훈의 표현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지체와 지각』속에서 희극처럼 만들어진 권력세습의 작품이긴 하다.그래도 그가 북을 장악한 실세라면 우리는 그와 대화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그는 누구인가.그가 입을 열고 했다는 말로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무엇무엇에 영광있으라』라고 외친 외마디소리가 전부다.알아듣기도 어려운 우물거리는 발음으로 내뱉은 이 한마디로는 도무지 그 사람됨이나 지적 수준같은 것을 짐작할 수가 없다.부시시한 몰골로 지척지척 걷는,언제나 자다가 끌려나온 것같은 모습이 비치는 화면만 보았을뿐 제대로 된 연설문 하나도,그를 짐작할 단서는 없는 것같다.그저 옹색한 정보를 토대로 해서나마 아마추어식 분석을 해보면 그는 『CNN뉴스를 시청하고 서방영화를 즐기며 「난쟁이 똥자루」같은 자기 희화의 말투를 서슴지않는』,말하자면 자본주의식 사고가 약간 침투된 과육을 지닌 「준비된」독재권력의 주인공인 것같다. 그런 상대가 정상회담의 새 상대로 불리할지 유리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몇가지 예측은 가능하다.우선 그와는 같은 문법의 말놀이(랭귀지 게임)가 가능하지 않을까싶다.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면 최고』인 인민을 만들려고 반세기를 군림해온 그러나 그걸 이루지도 못한 통치가였다.그러나 아들인 김정일은 다소 퇴폐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의 정보가 입력된 세대다.그가 즐겨 시청한다는 CNN의 정보만으로도 지구촌이 어떻게 개방이 불가피한 곳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병약하고 기형적인 안하무인의 무능한 예비독재자인지,영특하고 완결된 권력승계자인지 제대로 알길은 없지만 그래도 그가 그의 부친보다 대화상대로 다소 나을 수 있을 몇가지 기본 조건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이를테면 적어도 그는 직접 전범은 아니다.권력을 세습했으므로 죄의 책임도 「대를 이어야」한다는 이론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아닌 것이다.김일성의 경우 그 이름만 듣고도 치가 떨리는 것이 우리의 오랜 정서다.그런 분노를 털어보지 못하고 김일성을 저세상에 보낸 일에 허탈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그런 대화상대를 마주하면 감정의 기복을 겪게 된다.그건 쌍방에 좋을 일이 아니었다.김정일로서도 스스로 직접 지은 과오가 아니므로 비교적 부담이 덜할 수 있다.그러므로 깨끗이 시인하고 청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같은 문법을 사용하는 그에게는 「혁명 1세대」가 갖는 시대착오적 집념의 몽매성을 설득해볼 수도 있을것이다.이미 조종이 울린 이념을 안고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도 내심 회의를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그가 개방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기대를 하게한다.아버지의 너무 커다란 외투를 걸치고,춥고 배고픈 채 허망한 충성심만 그득한 인민을이끌고 출발해야 하는 그는 자신의 공화국의 미래에 다소 당황해 있을 수도 있다.그런 그에게는 이쪽의 거짓없는 충심과 성의를 이해시키기가 덜 어려울 것이다.형제적 우애를 기울여 정직하고 진실된 통일논의를 하기에는 차라리 그가 그의 부친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만만히 생각하고 경박한 대응을 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오산을 초래한다.무슨 일만 생기면 물색없이 앞질러가다가 안해도 좋을 실수를 하는 약점을 우리는 지니고 있다.겉으로는 어벙해 보이지만 금세기가 낳은 가장 질긴 독재자가 수십년 빚어 만든 회심의 후계작이 김정일이다.만만하게만 여길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 김일성 조문단 파견/일부주장 경악·분노/자유총련 성명

    한국자유총연맹(총재 최호중)은 12일 성명을 내고 『김일성은 6·25전범으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이라면서 『그럼에도 김일성이 사망하자 이를 애석해 하는 분위기와 심지어는 조문단을 파견하자는 일부 주장이 생겨나고 있는데 대하여 경악과 분노를 참지 못한다』고 밝혔다.
  • 국민정서(외언내언)

    김일성은 사망했으나 우리의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그에 대한 감정의 표현부터 사실은 자유로워지지 않고 힘들어졌다.지금 대부분의 공식적 표현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에 「아쉽다」「애석하다」「착잡하다」는 등의 범주에 있다.그러나 시민의 반응엔 「매우 기쁘다」「속 후련하다」가 서슴없이 나오고 「아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까지 당당하게 나타난다. KBS는 방영하던 프로를 중단하는 곤욕까지 치러야 했다.8일 하오 6시 폴란드제작 다큐멘터리 「인류최후의 황제 김일성」은 빗발치는 시청자들의 항의에 못이겨 송출 31분만에 막을 내렸다.동양적 윤리로 대부분 인간의 죽음은 용서를 의미한다.그럼에도 김일성에게는 죽음으로써도 용서되지않는 국민적 감정의 응어리가 별도로 크게 한덩어리 있다는 것을 KBS가 잠시 잊었던 듯싶다. 이 프로는 실은 2년전 방영돼 낯익은 것이었다.그러나 사망하고서는 수용되지 않았다.이 미묘함이 바로 우리만의 어려움이다.그는 6·25전범이었고 끝내 스스로 이 전쟁에 대한 용서를 민족에게 빌지 않았다.그러니까 남북 최초의 정상회담이라도 성사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또 하나의 바람도 사실은 얼마든지 반격과 비난을 받을수 있는 생각이다. 이 변하지 않는 국민감정의 한부분은 세월만이 해결할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나 그 세월은 아직 멀고,그 이전 우리는 통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그러면 이 감정은 또 가장 큰 갈등과제일 것이다.정치적­경제적­세대간적 갈등으로부터 집단적­상대적 갈등에 이르기까지 극복해야할 장애가 한둘이 아니나 특히 이 「엄연한 사실로서의 심정적 거부」의 갈등은 결코 쉽게 해소되지 않을것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를 다시 정리하거나 또는 더 거슬러올라가 전통문화에 근거한 동질성 확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미래사회에 대한 전망을 통해서만 통일을 이룩해 갈수 있을 것이다. 더욱 힘든 때를 맞고 있다.
  • 김일성 사망소식이 남다른 두사람

    ◎이북5도민회 강제문의장/“분단 고착 장애물 사라져”/동족상잔 원흉… 정상회담 진의 의심 『남북이산가족의 한맺힌 염원은 한걸음 앞당겨 실현되겠지만 한편으로 김일성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사과를 받아야 할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1천만 실향민들의 정신적 고향역할을 해온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 강제문 대표의장(72)은 김일성의 죽음을 『남북분단 고착화의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라고 평가했다.25살때인 지난 47년 공산당학정을 피해 월남한 강의장은 김일성이 좀더 살아 남북화해의 기틀을 정착시켰으면 좋았겠다는 일부 견해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그는 최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 때문에 그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한공산정권이나 김일성의 본질과 죄과를 망각한 감상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강의장은 이어 오는 25일로 잡혔던 1차 평양남북정상회담에 이어 2차 서울회담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등을 새겨보면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김일성이 진심으로 민족화해를 위해 응하려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김일성이 「불바다」발언 파문때 죽지않고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남북화해에 혹시나 기여하지 않았을까」하는 한가닥 아쉬움을 남긴채 죽은 것을 보면 『김일성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쓴웃음을 짓는 강의장은 『그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남북의 창을 열지를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김일성은 잘 죽었다』고 말하는 강의장은 『김일성은 분명 민족분단의 원흉이요 동족상잔이라는 반역사적인 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살아생전에 꼭 사과와 참회를 받아 냈어야 했다』고 아쉬워 했다. 강의장은 『김일성은 북한주민들에게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지만 김정일은 숙명을 지닌 인간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휘둘러온 절대권력을 그대로 이어 받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김정일이 당장은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록 김일성처럼 강도높은 주민통제정책을 실시하더라도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개방과 개혁으로 대내외정책기조를 전환하게되고 따라서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이나 제한적인 「만남의 장」을 마련할 수밖에 없을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원로 장로회 회장(대한예수교합동)이기도 한 강의장은 일요일인 10일 교회에서 『실향민들의 한풀이 마당이 하루라도 앞당겨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며 말을 맺었다. ◎군번1번 예비역대장 이형근씨/“사죄 한마디 없이 죽다니”/세계유일 분단국 멍에 벗는 계기로 6·25참전용사는 물론 그 미망인이나 유족들이 말하는 북한주석 김일성의 사망에 대한 느낌은 남달랐다. 『김일성은 우리에게는 불구대천지원수입니다.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사실외에도 그가 이 땅에 저질러 놓고 간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입니까』 6·25전쟁중 아내와 동생(이상근 당시 대령)을 한꺼번에 잃은 예비역 육군대장 이형근씨(74)는 『당시 참전용사와 그 미망인,그리고 유족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일 것』이라며 『그를 자연사하도록 버려둔 것이 오히려 죄스럽다』고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오늘아침 미국대통령이 사망한 김일성에게 「미국국민들을 대신해 북한주민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아마 미국대통령은 김일성이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UN군 15만2천명,한국군 25만7천명,민간인 86만명을 사상케 한 전쟁 책임자라는 것을 잊은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뿐만아니라 죽는 날까지 전세계 평화애호 국민들을 위협한 장본인이었습니다』이씨는 김일성이 최근까지 「핵」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했던 사실등을 예로 들고 『사죄한마디 하지않고 사망한 그에게 개인적으로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예비역 육군대장이라는 영예외에 「대한민국 군번 1번(10001)」·「창군의 주역」·「최연소 육군참모총장」등 군최고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그는 6·25전쟁때 2사단장으로 의정부전투에 참가,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위해 최일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그는 『현재 우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는데도 아직껏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며 『이번 김일성의 죽음이 우리민족에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있도록 국민 모두가 국력을 결집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아직은 체제유지에 급급한 만큼 당장 어떤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들 것이라고 밝힌 그는 그러나 북한이 과거 김일성때보다는 개방과 개혁에 눈을 돌려 남북대화등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응해 올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정부와 국민들이 이에 신중히 대처해 나갈것을 다짐했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미 나치문서 보관소/독일에 관리권 이양

    【베를린 로이터 연합】 미국은 1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나치기록문서 보관소의 관리권을 약 반세기만에 독일당국에 넘겨주었다. 미국은 이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전범들을 기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7천5백만건의 각종 나치기록들이 보관돼 있는 베를린 문서보관센터를 국무부 관리하에서 독일연방문서보관소로 이양했다.
  • 김일성 서울에 와야 한다/유은걸(데스크시각)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과연 서울에 올 것인가. 28일에 있은 남북예비접촉에서 김영삼대통령의 평양방문일정은 확정됐으나 북한 김주석의 서울방문문제는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분명하게 매듭지어야했을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번 정상회담을 꼭 성사시키겠다는 우리 정부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그리고 이번회의가 김주석이 직접 TV로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지시하는 가운데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북측에 어떤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분단 49년만에 이루어지는 이번 정상회담은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정상들이 상대방 수도를 방문하는 것 역시 이에 못지않게 의의가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북측은 2차서울회담 합의를 끝내 거부하고 나왔다.신뢰를 잃어버린 북한이기 때문에 항상 의심이 가는 바이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저의가 더욱 궁금해진다. 저간의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김주석은 아예 서울에 올 생각이 없는데다 설령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가 서울방문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자체가 우리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이렇게 될 경우 「하나의 조선,하나의 국가」를 겨냥한 그의 적화통일정책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이다.게다가 미국과 짜고 북침했다고 몰아세우던 남조선을 찾아가는데 대해 북한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는가 하는 문제도 상당한 부담을 주고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둘째 미국과의 수교와 경제지원을 노리고 대미협상에 매달린 나머지 우리와의 정상회담은 부수적으로 여겨 서울방문엔 별 뜻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설사 그럴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차기 대남협상카드로 써먹기 위해 쉽게 응해오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이밖에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정치선전거리로 최대한 활용할 속셈이어서 서울방문은 생각조차 않고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또 서울에 올 수 없은 것은 그가 TV를 통해 보았거나 말로만 듣던 서울의 발전상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측근들이 이를 적극 만류하고 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그는 6·25때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한 틈을 이용,수안보까지 내려왔다가 서울을 처음으로 거쳐간 일이 있다.그가 다시 서울을 찾는다면 적화통일야욕이 얼마나 과대망상이었는가를 실감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가 수백만동포를 희생시킨 전범이기 때문에 서울을 감히 방문할 처지가 못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전력을 의식,서울방문시 신변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주석은 사정이 어떻든 반드시 서울을 방문해야 한다.이는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당연한 도리이다.지난 70년 첫 동서독정상회담때 상호교환방문이 있었음을 김주석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서울방문 성사는 또 남북한이 앞으로 화해시대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며 4천만 한국민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김주석은 김대통령과 「언제,어디서든 만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김주석은 서울에 와서 6·25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사죄를 해야한다.아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1천만 이산가족들에게 이제 더이상의 고통을 주지않기 위해 헤어진 혈육과 재회할 수 있도록 인도적인 조치를 취해야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노회한 그가 서울에 와서 조금도 뉘우침없이 갖은 쇼맨십을 발휘하며 위세를 부릴 경우 국민들한테 주게될 실망을 감안하면 차라리 안와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않다. 더욱이 그의 서울방문을 김주석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현지지도」한 것처럼 북한 선전매체들이 떠들어댈 가능성도 많아 더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44년전의 상처 되새기며/살아남은 한 다신 없어야/이문구(기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에 화가여생이란 말이 있다.법에 저촉되어 재앙을 입은 집의 자손이란 뜻이라고 한다.이제 말 자체는 역사소설 같은 데서나 쓰임직한 말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의 뜻까지 함께 은퇴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6·25와 더불어 하루아침에 쑥밭이 된 좌익 집안의 자식으로 어렵게 살아온 전쟁 피해자이자 전형적인 화가여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필자와 비슷한 환경으로 정서적인 폐허에서 젊은 날의 방황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더욱이 그 환경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권위주의 군사문화에 작가적인 저항으로 일관하여 마침내 문민정부 출현에 나름껏 일조를 한 줄로 여기는 사람이라면,오늘 다시 맞는 6·25에 대한 회포 또한 남다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6·25의 상처는 44년전의 신음소리를 아직도 이어오는 보훈병원을 비롯하여 휴전선과 판문점과 국립묘지와 산야에 널려있는 전적비며 엊그저께 문을 연 전쟁기념관에 이르기까지 가시적인 것만 해도 이루 다 줘섬길 수가 없이 허다한 터다.그러나 그 무엇보다도응어리가 깊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즉 전쟁에 희생된 집안의 결손가족,이산가족들의 사무친 여한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전형은 누구인가.가슴에 서린 채 못다한 만단설화를「그때 겪은 얘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것」이라는 한 마디로 줄이면서 체념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다.아는 병도 쇠면 백약이 무효인데 하물며 보이지 않는 상처를 반세기 가까이나 가슴에 끓여온 그들의 여한일 것이다. 그들의 피맺힌 여한의 대상은 물론 전범자다.그리고 그 전범자에 대한 여한에 있어서 보훈가주과 화가여생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터다.이는 필자가 자기나름에 유추하여 모개흥정식으로 일매지어 하는 말이 아니다.6·25야말로 남북간 공동의 패전이자 민족 전체의 패배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위가 엄연히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6·25의 재현을 기대하는 것이나 아닌가 싶게 혐의쩍은 사람들링 사회 일각에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오늘날의 정부를 「미제에 의한 예속성과 매판성을 갖는 식민지의 대리정권」운운하는 이른바 주사파의 존재는,화가여생의 악조건 속에서 권위주의 군사문화와 맞서는 동안에 스스로 보이지 않는 상처를 수도 없이 멋내었던 필자로서는 일말의 모욕감을 넘어 차라리 헙헙한 심정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전범자가 사료 조절이나 다름없는 식량 배급표로 주민의 생존권을 근저당하고 「쌀밥과 고깃국과 기와집」이란 신기루로 혹세무민하여 「이조」보다도 퇴보적인 「김조」를 꾸며 인주로 군림하고 세습하는 것이 어떻게 「주체의 위업」이며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것인지 실로 불가사의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불가사의한 것은 아무리 북한의 대남방송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과외공부를 해왔다고 해도 걸핏하면 민중·민족·민주·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이 자식은 아비의 존호를 대원솔로 올리고 아비는 세자로 책봉한 자식의 권위 안보를 위해 원솔란 작호를 더하여,모든 것을 부자지간에 겸지우겸하는 근세적 전제군주 체제에 대하여 상식적인 비판은 커녕 자못 우러르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렇다면 5·16이래 군사문화에 맞서 민주화·문민화를 부르짖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남한의 군사문화는 저항의 대상 북한의 군사문화는 추앙의 대상이란 말인가.남한의 국민은 혁명과 피가 아쉬운 「민중·민족」이고 「당원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식의 계급사회 북한의 주민은 이미 혁명을 통해 「김조」의 신민이 되었으니 혁명을 혁명하여 배급표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까닭이 없다는 것인가.북한의 회담꾼이 6·25의 본질을 거듭 일깨워 준 「서울 불바다」협박이 핵문제에 맞추어 다시 포장한 군사문화의 기본 강령임을 생각하면,남한에서 자기도 모르게 「어버이 부자」의 「효자동이 충성동이」로 「김씨조선」의 식민이 되어 「책으로 쓰면 열권도 넘을」여한의 재생산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 “남경대학살 희생자수 과장”/일 이시하라의원

    ◎“당시 거주인구 20만불과”/일왕 진주만방문등 외교활동 반대 【도쿄 AP 연합】 일본의 골수 보수파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석원신태낭) 중의원 의원은 26일 미국과 중국이 지난 1937년의 남경대학살의 중국인 희생자 수를 고의로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의원은 이날 도쿄외신기자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군의 중국 침공 당시 남경의 인구는 20만명이었으며 『따라서 일본군이 30만명을 학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단지 중국측이 세운 남경의 추모비에 3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적혀있다고해서 실제 30만명이 살해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시하라는 이어 『실제 사망자수를 확인하는 것은 일본과 중국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면서 『미국 역시 히로시마및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와 관련한 「죄의식」때문에 도쿄전범재판당시 중국인 희생자의 수를 과장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하라의원은 또 다음달 미국방문에 나설 아키히토(명인)일왕이 진주만을 방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일왕이 진주만방문과 같은 외교활동에 관여할 경우 그가 지니는 상징적이며 문화적인 존재의 이미지가 완전히 손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남예멘,선전포고 경고/북군에 포위해제 촉구

    【아덴·사나 AP 로이터 연합】 남·북예멘이 통일된지 4년만에 양측군간에 충돌이 발생,사상자가 2천명까지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남군측은 1일 북군이 남군 포위를 해제하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하겠다고 경고했다. 남예멘 사회당 고위관리들은 이날 북예멘 출신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을 「전범」으로 규정하고 북군이 북예멘 수도 사나부근주둔 남군에 대한 포위를 해제하지 않을 경우 공식 선전포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달 27일 처음 발생한 남군 제3여단과 북군 제1여단간의 전투가 통일이후 북측에 배치된 남군을 제거하려는 북측의 「사전 계획된」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 범양상선 사기사건/김문찬피고인 보석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민수명부장판사)는 21일 전범양상선 대표 박승주씨(32)로부터 1백억원을 가로채고 외화 25만달러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항소한 김문찬피고인(43)의 보석신청을 받아들여 석방했다.
  • 불 법정에 선 나치일가/파리=박정현(특파원코너)

    ◎“전범” 투비에 부인·자녀도 증인 신세 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재판소에는 한 가족이 법정에 섰다. 그것도 중죄재판소에서다.2차대전의 나치 협력자인 올해 79세의 폴 투비에가 종전49년만에 법정에 선 것이다.그의 부인 베프테(69)와 아들 피에르(44),딸(46)은 증인 자격으로 나왔다. 투비에는 나치독일하의 괴뢰정권인 비시정부가 1943년 만든 민간보안대의 리옹지역 대장을 지내면서 독립운동가와 유태계 프랑스인 탄압에 앞장선 인물이다.전쟁이 끝나자 투비에는 자취를 감췄으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은둔생활을 해오던 투비에는 지난 89년 니스의 한 수도원에서 검거 됐고 64년 제정된「반인류범죄 불말소법」에 의해 기소돼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투비에는 동료의 죽음에 보복하기 위해 리옹의 거리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해 시민7명이 목숨을 잃게하는등 잔학상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의 재판도 이같은 피해자 친지들과 인권단체등의 숱한 진정에 따라 이뤄진 것이고 사형을 촉구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그의 가족들은 전후50년가까운 투비에의 도피생활때문에 자신들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진술했다.투비에의 부인은 21살이던 지난46년 당시 오빠를 찾아온 투비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며 71년 퐁피두대통령이 사면을 내린 직후의 6개월이 결혼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었다고 회고했다.그의 아들과 딸들은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해야만 했고 이름과 주소등 신원이 공개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할수 밖에 없었다」면서 「가족의 미래는 아버지의 석방여부에 달려 있다」고 선처를 호소했다.온갖 고생을 한 가족들의 처절한 진술이 계속되는 동안 당사자인 투비에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듣기만 했다.투비에 공판이 속개될 오는 6월6일엔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리고 작전에 참가했던 퇴역군인등 8백여만명이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동시에 유럽에서는 아직도 전범과 투비에같은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조사와 심판이 한창이다.역사의 심판은 50년이란 세월의 흐름에 상관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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