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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야구] 때리는 놈 넘기는 놈 지키는 놈

    [프로야구] 때리는 놈 넘기는 놈 지키는 놈

    올스타 브레이크를 마치고 21일부터 후반기에 돌입하는 KBO리그는 풍성한 개인 기록을 예고하고 있다. 전반기를 30홈런으로 마친 박병호(넥센)는 사상 첫 홈런왕 4연패에 도전한다. 이만수(1983~1985년)와 장종훈(1990~1992년), 이승엽(삼성·2001~2003년)도 이루지 못한 영역이다. 경쟁자 테임즈(NC·28개)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레이스가 전개될 전망이다. 박병호는 또 전무후무한 2년 연속 50홈런도 노린다. 지난해 52개를 친 박병호는 올해는 50.2개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34년째를 맞는 KBO리그에서 50홈런을 친 선수는 박병호 외에 이승엽(1999년, 2003년)과 심정수(2003년) 둘뿐이다. 14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도 2년 연속 50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베이브 루스(1920~1921년, 1927~1928년)와 마크 맥과이어(1996~1999년) 등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전반기에 12승을 따낸 유희관(두산)은 1999년 정민태 이후 맥이 끊긴 토종 20승에 도전한다. 2007년 리오스와 지난해 밴헤켄(넥센)이 각각 22승과 20승을 거뒀지만, 토종은 18승까지가 한계였다. 두산은 후반기에 63경기를 치르며, 유희관은 13~14경기 등판이 가능하다. 부상만 피한다면 20승 고지가 불가능하지 않다. 지난 16일 광주 LG전에서 5와3분의2이닝 1실점(1자책)으로 호투한 양현종은 전반기 평균자책점 1.77을 기록했다. 시즌 끝까지 1점대를 유지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1점대 평균자책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24차례나 작성되는 등 보기 힘든 기록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2010년 류현진(1.82)이 유일하게 달성했다. 유한준(넥센)의 2루타 기록도 돋보인다. 전반기에만 30개를 때려 박정태(1992년)와 이병규(1999년), 이종범(2003년)이 갖고 있는 43개를 무난하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86타점을 기록 중인 테임즈는 2003년 이승엽의 144타점을 갈아치울 기세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中증시 폭락에 다시 ‘깡통 계좌’ 악몽

    中증시 폭락에 다시 ‘깡통 계좌’ 악몽

    중국 증시의 대폭락으로 ‘깡통 계좌’에 대한 악몽이 떠오르고 있다. 우리 자본시장에서 25년 전 증권사의 ‘일괄 반대매매’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가의 가격제한폭이 지난달 15일부터 ±30%, 즉 하루 60%까지 커진 상황이므로 신용잔고가 많은 종목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용거래 잔고는 지난 8일 기준 7조 7119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다. 지난달 15일 주가 가격제한폭 확대로 주춤하던 신용거래가 유가증권시장을 중심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증권시장의 신용거래 잔고는 3조 7345억원으로 사상 최고다. 코스닥시장의 신용거래 잔고는 3조 9774억원으로 사상 최고치인 지난 5월 27일 4조 181억원에 다가가고 있다. 신용거래는 주식을 사는 대금의 일부를 증권사에서 빌려 주식을 사는 것이다. 이른바 빚 내서 투자하기다. 신용거래의 담보는 주식이다. 따라서 담보 주식이 빌린 돈의 일정 비율에 미달하면 증권사들은 강제로 이를 팔아(반대매매) 자금을 회수한다. 중국 증시의 폭락에는 신용거래와 주가 폭락에 따른 반대매매 급증 등의 영향이 컸다는 지적이다. 담보 주식을 팔아도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깡통계좌’가 속출하면서 자살자도 속출, 중국 정부를 긴장시켰다는 분석이다. 앞서 1990년 10월 10일 국내 증권사들은 일괄적인 반대매매를 단행, 깡통 계좌가 속출했다. 무리한 증시 부양책의 후유증이다. 1985년 139에서 시작한 코스피는 1989년 초 1000을 넘어섰다. 당시 3저(저유가, 저금리, 낮은 환율) 호황이 끝나고 주가가 하락하자 그해 12월 12일 정부는 주식매입 대금의 40%만 있으면 주식을 살 수 있는 증시 부양책을 발표했다. 개인투자자들이 불나방처럼 몰렸으나 기초체력이 떠받쳐 주지 못한 증시는 1990년 9월 중순 566까지 떨어졌다. 악성 매물이 쌓여 미수금이 1조원을 넘자 정부가 깡통 계좌를 일괄 정리했다. 이후 코스피는 2주간 40% 상승했다. 이은택 SK증권 연구원은 “1990년 한국 증시에서 교훈을 얻자면 (중국 정부가) 주가를 받치기 위해 돈을 쏟아붓는 시점이 아니라 악성 매물이 소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유승민 퇴진] ‘反朴·배신자 낙인’ 총선 부담… ‘합리적 보수 각인’ 큰 자산

    [유승민 퇴진] ‘反朴·배신자 낙인’ 총선 부담… ‘합리적 보수 각인’ 큰 자산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의원총회의 사퇴 권고를 수용, 국회법 개정안 위헌 논란과 거부권 파동의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향후 그의 정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당내에서는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확실한 ‘견제’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전망과 이른바 ‘반박’(反朴·반박근혜) 색채가 더욱 뚜렷해지면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이날 의총 결정사항을 전달받고 곧바로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고 강조했다. 이는 자신이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법과 원칙에 위배된다는 뜻으로 박 대통령을 정면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또 “아무리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는 신념 하나로 정치를 해 왔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친박 핵심이자 청와대 정무특보인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과 노선을 부정하고 위헌 논란까지 만들어 내면서 당·청 갈등을 증폭시킨 유 원내대표가 마지막까지 당과 대통령을 비난하고 돌아선 것은 유감”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유 원내대표는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2007년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 선봉장을 맡으면서 최측근이자 ‘원조 친박’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2012년 2월 새누리당 당명 변경을 유 원내대표가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탈박’, ‘비박’으로 분류되면서 지난해 10월에는 청와대 외교안보팀을 ‘얼라’로 칭하고, 지난 4월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박 대통령의 공약가계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어 청와대의 반대에도 국회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것이 ‘거부권 정국’을 형성하면서 결국 사퇴의 결정타가 됐다. 향후 유 원내대표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서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전망이 교차한다. 이날 의총에서 결정된 의원들의 뜻에 따른다는 형식을 갖춰 스스로 굴복하는 모양새는 피했지만, 원내대표직 사퇴는 그의 정치 인생에 큰 오점이 됐다. 특히 대통령과 원내대표의 갈등이라는 전무후무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향후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당내 입김이 세지면서 총선 공천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친박계가 당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면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대구·경북(TK) 출신인 유 원내대표가 ‘배제 1순위’가 될 수도 있다. 반면 유 원내대표가 얻은 정치적 자산과 보상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도 있다. 유 원내대표는 사퇴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됐다. 또한 거부권 정국에서 의도치 않게 인지도와 지지세력의 호응을 얻었다는 평가다. 또한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과 마찰을 빚으면서 ‘합리적 보수’의 이미지를 굳혔다. 내년 총선과 차기 대선에서 여당 지지층의 외연 확대에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만큼 그의 주변에 비박계를 비롯한 지지세력이 몰려들 가능성도 있다. 차기 당권 또는 대권주자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한편 여론 조사업체 리얼미터는 이날 여권 차기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유 원내대표가 16.8%의 지지를 얻어 김무성 대표(19.1%)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이은주 기자의 컬처K] 대세 연예인 겹치기 CF 출연…왜 씁쓸할까

    [이은주 기자의 컬처K] 대세 연예인 겹치기 CF 출연…왜 씁쓸할까

    순간 눈을 의심했다. MBC 월화드라마 ‘화정’은 분명히 아까 전에 끝났는데 곤룡포를 입은 광해군 차승원이 다시 TV에 등장했다. 신하와 장기를 두며 “데이터가 풍년인데…”라는 대사를 한다. 모 이동통신사 광고다. 잠시 뒤에 다시 등장한 그가 화선지에 일필휘지로 글을 쓴다. ‘고객수익률’이라는 문구가 클로즈업된다. 한 증권사 광고다. 아무리 요즘 드라마나 영화 형식의 CF가 대세라지만 ‘광고에 낚였다’는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방금 전까지 냉혹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광해군에 몰입했던 시청자라면 더욱 그렇다. 스타들의 CF 겹치기 출연이 작품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CF는 스타들의 인기 척도이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아무리 콧대 높은 스타라도 CF와 관련된 행사에는 군말 없이 출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고는 프로그램에서 좋은 이미지를 보여준 이들에겐 달콤한 ‘보상’이다. 지난 1월 종영한 ‘삼시세끼-만재도 편’에서 전무후무한 요리 실력을 보여주며 ‘차줌마’라는 별명을 얻은 차승원은 기존의 자동차, 맥주 광고 이외에 의류, 게임, 음료, 면세점, 제약, 패스트푸드, 조미료, 비타민 광고 등 10여개의 광고를 더 찍었다. 웬만한 아이돌 가수, 한류 스타 못지않은 인기다. 이 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했던 유해진도 이동통신사 및 카드 광고 등 출연료가 높은 알토란 광고를 따냈다. ‘삼시세끼-정선 편’과 ‘꽃보다 할배’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매사 툴툴거리지만 솔직한 매력으로 인기를 얻은 이서진 역시 요즘 광고계의 스타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후 이동통신사, 치킨, 에어컨, 여행사, 식품 등 10여개의 광고를 더 찍었다. 이들에게 CF 제의가 줄을 잇는 것은 최근 드라마 시청률이 하락하고 예능이 대세가 되면서 예능 속 이미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광고계의 욕구가 거세지기 때문이다. 한 유명 광고기획사 팀장은 “시청률 하락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과거처럼 TV의 광고 주목도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예능 프로에서 특정한 캐릭터로 뜬 스타는 정보 인지 시간을 단축시키므로 바로 제품 설득에 들어갈 수 있다”면서 “요즘 심각하지 않고 재미를 강조한 엔터테인먼트형 광고가 뜨면서 예능 스타들이 각광받고 있지만 자칫 모델만 주목되고 제품이 묻혀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의 겹치기 CF 출연과 이를 이용한 잦은 PPL은 시청자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등 시청에 방해가 되기 쉽다. 얼마 전 이서진이 ‘삼시세끼’에서 자신이 광고하는 커피를 마시거나 출연진에게 대접하는 장면이 나왔다. 맷돌로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마시던 초기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꽃보다 할배-스페인’ 편에도 이서진이 광고하는 연어로 김치찌개를 끓이는 장면이 등장해 한 차례 PPL 논란이 일었다. 한 40대 여성 시청자는 “소박한 자급자족을 외치는 ‘삼시세끼’에 최근 인스턴트 음식의 PPL이 등장하고, 출연진의 상업 광고가 난무해 뭔지 모를 배신감을 느낀다”고 꼬집었다. 물론 CF 출연 선택권은 전적으로 배우와 소속사에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심리’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광고를 무의식적으로 봐야 하는 시청자들을 배려해 적정 수준을 지킬 필요는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광고 이미지가 남발될 경우 작품의 캐릭터에 빠져 있는 시청자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면서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상호 예의와 상식을 지키는 선에서의 광고 제작과 출연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rin@seoul.co.kr
  • 벵거 감독 ‘최고의 영입’ TOP 10 (더 텔레그래프 선정)

    벵거 감독 ‘최고의 영입’ TOP 10 (더 텔레그래프 선정)

    영국 현지 언론 ‘더 텔레그래프’는 아르센 벵거 감독이 영입한 아스널 최고의 영입 TOP 10을 선정했다. 10위 알렉시스 산체스 2014년 여름 바르사에 3,500만 파운드(환화 610억원)를 주고 영입한 산체스가 10위에 올랐다. 물론 아스널의 레전드 엠마뉴엘 프티나 프레드릭 융베리가 산체스를 대신해 최고의 영입 명단에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아스널이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하던 시절 영입된 선수들로 산체스와는 사정이 다르다. 산체스는 단 첫 시즌 만에 아스널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47경기 출전 25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에 챔피언스리그 진출권과 FA 우승을 선사했다. 말 그대로 혼자 힘으로 아스널을 이끌었다. 9위 로빈 판 페르시 2004년 아스널은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출신의 공격수 판 페르시를 250만 파운드(한화 44억원)에 영입했으나 2012년 라이벌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무려 10배의 가격(한화 440억원 )을 받고 되판다. 판 페르시는 벵거 감독이 영입한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최전성기를 아스널에서 보냈다. 또한, 그가 맨유로 이적할 당시에는 구단에 엄청난 이적료를 가져다줬다. 그가 맨유에서 보낸 첫 시즌도 엄청났지만, 2011년 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17개월간 아스널에서 보여준 절정의 골 감각(56골 기록)은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8위 솔 캠벨 배신자 혹은 영웅으로 불리는 솔 캠벨, 그는 토트넘에서 9년간 선수로 활약했으며 구단의 상징적인 존재로 주장까지 맡았다. 그러나 2001년 놀랍게도 지역 라이벌인 아스널로 자유 이적한다. 아스널에 새롭게 둥지를 튼 그는 최강의 포백라인을 구축하며 팀에 3번의 FA 컵 우승과 전무후무한 2003-04시즌 무패우승을 포함 총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안겼다. 그는 입단 당시와 마찬가지로 2006년 포츠머스로 자유 이적한다. 7위 로베르토 피레스 벵거 감독은 2000년 마르세유에서 활약 중인 프랑스 출신의 젊은 윙어 로베르토 피레스를 6백만 파운드(한화 105억원)에 영입한다. 그는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영입됐지만, 그의 실력은 매우 출중했으며 아스널에서 보낸 6년간은 환상적이었다. 그는 마크 오베르마스의 완벽한 대체자로 2001-02시즌 축구 기자 협회가 뽑은 올해의 선수 그리고 축구 선수 협회 선정 올해의 팀에 3년 연속(2002년, 2003년, 2004년)으로 이름을 올렸다. 6위 콜로 투레2001년 아스널이 리그앙 소속의 ASEC 미모사스에서 활약 중이던 중앙 수비수 콜로 투레를 15만 파운드(한화 2.6억원)에 영입해 2009년 1,600만 파운드(한화 280억원)에 맨체스터 시티로 되판다. 투레가 영입될 당시만 해도 그는 무명의 선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2003-04시즌 무패 우승을 이끌었고 아스널에서 총 326경기를 소화하며 베테랑 수비수로 성장한다. 또한, 그는 2009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면서 아스널에 많은 수익을 가져왔다. 5위 세스크 파브레가스 벵거 감독은 2003년 바르사 ‘라 마시아’ 출신의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단돈 50만 파운드(한화 8.7억원)에 영입해 2011년 고향팀에 3,500만 파운드(한화 614억원)라는 거금을 받고 되판다. 그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아스널로 이적했고 총 303경기에 출전해 57골을 넣었다. 벵거 감독은 그를 원금의 70배를 받고 바르사에 되팔았지만,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파브레가스를 경제의 논리에 따라 팔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늘 안타까워했다. 4위 니콜라스 아넬카 1997년 벵거 감독이 파리 생제르맹 소속의 공격수 니콜라스 아넬카를 50만 파운드(한화 8.7억원)에 영입해 1999년 2,250만 파운드(한화 394억원)에 레알 마드리드로 되판다. 비록 그가 아스널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데니스 베르캄프와 함께 공격을 책임지며 1998년 더블(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 컵 우승)을 기록한다. 그의 선수 생활 중 많은 팀을 거쳐 갔지만, 아스널에서 보낸 28개월보다 훌륭했던 시절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3위 마크 오베르마스 벵거 감독이 1997년 아약스 출신의 마크 오베르마스를 550만 파운드(한화 96억원)에 영입해 2000년 2,500만 파운드(한화 438억원)에 바르사로 되판다. 100m 달리기 10초대로 질주하던 윙어 오베르마스는 아스널에 있는 동안 환상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을 뿐 아니라 구단에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줬다. 벵거 감독은 그를 바르사 팔고 600만 파운드(한화 105억원)에 피레스를 영입하며 구단에 총 1,350만 파운드(한화 236억원) 수익을 가져왔다. 2위 패트릭 비에이라 벵거 감독이 아스널에 부임한 첫해인 1996년 AC 밀란의 패트릭 비에이라를 단돈 350만 파운드(한화 61억원)에 영입했다. 패트릭 비에이라는 아스널의 리더이자 10년간 중원의 핵심인 선수로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아스널의 선수로 벵거 감독에게 총 3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FA 우승을 선사했다. 또한, 그가 팀을 떠나기로 한 2006년에도 1,350만 파운드(한화 236억원)에 유벤투스로 이적하며 구단에 많은 수익을 안겼다. 1위 티에리 앙리 1999년 유벤투스에서 활약 중인 티에리 앙리를 1,100만 파운드(한화 192억원)에 영입해 2007년 1,600만 파운드(한화 280억원)에 바르셀로나로 되판다. 당시 왼쪽 윙어로 활약하던 티에리 앙리는 벵거 감독의 지시를 받고 공격수로 자리를 옮긴다. 포지션을 변경한 티에리 앙리는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고의 공격수이자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한다. 그는 아스널의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226골)이자 동시에 구단 최고의 레전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후 처음으로 2회 연속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선수상(2003년, 2004년)을 받은 선수이기도 하다. * 데니스 베르캄프는 1995년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널에 부임하기 전 전임 감독인 브루스 리오치가 영입.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naver.com
  • [곽태헌 칼럼] ‘애연가黨’ 만들어 내년 총선에 나온다면…

    [곽태헌 칼럼] ‘애연가黨’ 만들어 내년 총선에 나온다면…

    대학 1학년 1학기 때 담배를 잠깐 폈다. ‘뻐끔 담배’라 담배 맛도 알 수 없었다. 당시 가장 비싼 담배는 500원이었던 솔과 거북선이었다. 생맥주 500㏄ 가격(450원)과 비슷했다. 정부는 흡연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올해 1월 1일부터 담뱃값을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올렸다. 담뱃값이 비싸지면 금연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었다. 정부가 국민의 건강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니 ‘성은(聖恩)이 망극(罔極)’할 정도다. 삼척동자가 봐도, 겉으로는 국민건강 운운하면서 실제는 담뱃값 인상에 따른 세수 확보를 노린 것이라는 걸 다 안다. 담뱃값 인상만으로 올해에 2조 8000억(정부)~5조 1000억원(국회 예산정책처)의 세수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담뱃값 인상으로 올해 초에는 한 개비에 200원 하는 ‘가치담배’를 사서 피우는 게 화제가 됐으나 1980년대 초에도 한 개비에 30원을 주고 ‘가치담배’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올해부터 면적에 관계없이 모든 음식점과 커피숍 등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아파트에서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없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담뱃갑에 흡연의 위해(危害)성을 경고하는 그림을 인쇄하도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도 우여곡절 끝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오늘 본회의 의결만 남았다. 통과되면 1년 6개월 뒤 담배 제조회사는 담뱃갑 포장 앞뒤 면적의 30% 이상을 경고그림으로, 20% 이상을 경고문구로 채워야 한다. 흡연자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술과는 달리, 흡연은 간접 피해도 준다. 그래서 정부가 금연정책을 강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담배연기를 맡고 싶지는 않다. 고속도로나 시내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담배꽁초를 밖으로 버리는 양심불량의 흡연자는 왜 그리 많은지, 길거리에서 꽁초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양심불량은 또 얼마나 많은지. 담배 예절도 없는 꼴불견 흡연자들을 생각하면 최근의 정부 압박이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비흡연자인 기자가 볼 때에도 너무하다. 흡연자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고양이도 쥐를 잡을 때 도망갈 곳은 남겨 둔다는데 한국에서 흡연자들은 고양이 앞의 쥐보다도 못한 신세가 됐다. 숨을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그렇다고 비흡연자들의 환경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사무실, 공원, 광장, 버스정류장 등으로 금연구역은 늘어났지만 걸어가면서 피우는 흡연자들이 늘면서 비흡연자들도 더 고통스러워졌다. 금연구역 확대가 흡연자는 물론 비흡연자의 불쾌지수를 높인 꼴이다. 흡연자를 죄인처럼 취급하는 게 온당한 것도 아니다. 이참에 내년 4월 총선을 위해 흡연자들이 가칭 ‘애연가당(黨)’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양당체제라 지역구에서 의원을 배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례대표에서는 해볼 만하다. 정당별 투표에서 3% 이상(혹은 지역구 의석 5석 이상)을 득표하면 비례대표 의석을 받을 수 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220만표(10.3%)로 6석을 얻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친박계 공천학살에 따라 급조됐던 친박연대가 226만표(13.2%)를 얻으며 8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이 277만표(13%)로 8석의 비례대표 의원을 배출하는 ‘깜짝쇼’의 주인공이 됐다. 지역구에서 4석으로 한석이 부족했던 자민련은 60만표(2.82%)를 얻는 데 그쳐, 비례대표 의원 배출에 실패했다. 그래서 당시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 총재는 전무후무할 10선(選) 의원이 되지 못했다. 2번은 자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었다. 흡연자는 9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흡연자들을 잘 끌어모을 수 있는 전략을 펴면, 이념과 지역적 기반은 없지만 200만표를 얻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흡연자들이 담배 매너를 지키면서 어느 정도의 권리도 찾기를 바란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나는 흡연을 부추기거나 조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애연가당’에 소중한 한 표를 줄 용의는 있다. 흡연자들이여 단결하시라!
  •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인류의 오랜 과학사에서 최대의 과학적 발견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우주팽창'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우주팽창의 증거를 발견하여 인류에 고함으로써 20세기 천문학의 최고 영웅이 된 사람은 허블 우주망원경, 허블 법칙 등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에드윈 허블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허풍스러운 태도의 '20세기 천문학 최고 영웅' 1889년 미국 미주리 주의 마시필드에서 태어난 허블은 한마디로 온갖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보험 대리인이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부모로부터 높은 지능과 강건한 체질까지 물려받은데다 미남형이라 매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철철 흘렀다. 허블은 고등학교 시절 육상대표로 7종 경기에서 우승했고, 그밖에도 여러 대회, 여러 종목에서 메달을 수두룩하게 받았다. 공부도 잘했다. 명문 시카고 대학 법학과에 어렵잖게 진학했다. 말하자면 허블은 엄친아 대표선수였다. 대학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인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 유학기간 3년이 허블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때부터 허블은 늘 정장차림에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멋을 내며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풍스러운 영국식 억양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버릇은 평생 바뀌지 않았다. 천문학 하는 사람 중에 괴짜가 많긴 하지만, 허블도 그런 면에서는 전혀 꿀리지 않는 등급이었다. 아무튼 그런 허블이 어떻게 20세기 천문학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을까? 가끔 세상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손대는 일마다 떡 먹듯이 성공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불공평하게 보이고 배 아픈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블이 바로 그런 인간형이었다. 1913년 귀국해서 잠시 변호사 협회에 이름을 걸어놓은 허블은 얼마 후 돌연 하던 일을 접고 시카고 대학 천문학과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훗날 허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문학은 성직과도 같다. 소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스빌에서 1년 동안 법률업무에 종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소명을 받았다.” 뒤늦게 시작한 천문학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와 약간의 노력으로 밀린 공부를 따라잡아 1917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손에 쥐었다. 졸업 후 은사인 조지 헤일의 추천으로 윌슨 산 천문대에서 일하려던 허블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일로 취소되었다. 미국이 뒤늦게 1차대전에 뛰어들었던 탓이다. 육군 장교로 지원한 허블은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덕으로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그 역시 허블에게는 자랑거리였다. 평생 소령 칭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니까. -무시받던 '희미한 빛뭉치'에 꽂히다 전선에서 돌아온 허블은 1919년 30살 때 짐을 꾸려서 윌슨 산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입산이었다.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있는 윌슨 산 천문대에는 당시 세계 최대인 2.5m 후커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새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한나절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라 생활은 고행이었고, 일과는 고달팠다. 그럼에도 수십 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관측대 위에 앉아 온밤을 지새웠다. 거대한 반사망원경을 조그마한 손잡이를 돌려 조절하며, 렌즈의 십자선을 응시하면서 최고 12시간을 버텨야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난방기구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망원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연구원 숙소에 여자가 머무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그곳을 수도원이라 불렀다. '수도원 원장'인 조지 헤일은 천체물리학은 모든 잡념을 버린 남자만이 전념할 수 있는 분야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윌슨 산 꼭대기에서 허블은 먼 우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성운들을 향해서 망원경의 주경을 겨누고는, 사진을 찍고 스펙트럼을 찍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는 열흘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허블은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의 망원경으로 별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퍼시벌 로웰의 화성 이야기를 들으며 우주로의 꿈을 키워왔다. 허블의 박사논문 주제는 ‘희미한 성운’이었다. 주류 천문학자들은 밝은 별과 행성, 혜성에 연구할 주제가 얼마든지 있는데 무엇하러 그런 희미한 빛뭉치를 연구한다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허블의 깊은 관심은 늘 그 희미한 빛뭉치인 성운에 있었다. ‘저 가스 구름들은 과연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은하 바깥을 떠도는 별들의 도시인가?’ 라틴 어로 '안개'를 뜻하는 성운(nebula)은 20세기 초만 해도 정말 안개에 가려진 천체였다. 허블의 머리속에는 늘 성운에 대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허블이 윌슨 산에 오자마자 대망원경의 주경을 성운 쪽으로 돌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건달에 가까운 노새 몰이꾼 휴메이슨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한 사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허블의 조수였던 그 사내 역시 천문학사에서는 전설이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원래 노새 몰이꾼이었다. 이름은 밀턴 휴메이슨, 나이는 허블보다 2살 아래였다. 윌슨 산 천문대로 장비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잡일꾼으로 일했던 휴메이슨은 학교는 일찌감치 중2 때 때려치우고, 당구와 도박, 여자 후리기에 한가락하는 사내로, 좋게 말하면 한량, 나쁘게 말하면 건달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영리하고 호기심도 풍부한데다, 도박으로 다져진 눈썰미와 손재주, 머리회전에 힘입어, 천문대의 각종 장비와 기계에 대해 질문하고 익히고 하는 새에 어느덧 엔지니어 비슷한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휴메이슨의 놀라운 변신이 펼쳐진다. 야간 관측 보조원이 병결했는데, 대타로 투입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한 망원경을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문대에서는 하룻밤 공칠 요량을 하고 휴메이슨에게 대타로 뛰어볼 용의가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 업무는 거대한 덩치인 망원경을 다룰 뿐만 아니라 천체사진까지 찍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밤 휴메이슨은 임시직 관측 보조원이 되어 왕년에 트럼프 장 다루듯이 거대 망원경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자랑했다. 그뿐인가, 천문대 연구원들은 휴메이슨이 찍어놓은 은하 스펙트럼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명한 화질이 일급 전문가의 솜씨였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천문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허블의 조수가 되었다. 중학 중퇴로 천문대에 정식직원이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중학 중퇴 건달과 허풍기 있는 천문학 박사는 만나자마자 악동들처럼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휴메이슨은 일을 시작하자 이내 양질의 은하 스펙트럼을 얻는 데 어떤 천문학자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나중엔 '휴메이슨 혜성'을 발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완벽한 천문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건달에서 천문학자로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1923년 10월 어느 날 밤, 마침내 허블은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2.5m 반사망원경을 이용해 안드로메다 대성운으로 알려진 M31과 삼각형자리 나선은하 M33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 건판을 분석하던 허블은 갑자기 “유레카!” 하고 크게 외쳤다. 성운 안에 찍혀 있는 변광성을 발견한 것이다. 1912년 헨리에타 리빗이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우주를 재는 표준 촛불로 삼아,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하늘의 잣대를 제공한 바 있었다. 리빗의 발견을 잘 알고 있던 허블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해본 결과 31.4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다 리빗의 자를 들이대어 지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93만 광년이란 답이 나왔다. 우리 은하 크기보다 10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단순히 나선 모양의 성운으로 알고 있었던 안드로메다는 사실 우리 은하를 까마득히 넘어선 곳에 있는 독립된 나선은하였다. 칸트의 섬우주론이 200 년 만에 완벽히 증명된 셈이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측정했던 허블은 새로운 우주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당시 천문학계는 우리은하의 크기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다', '우리은하 외에도 많은 은하들이 있을 것이다'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가 그 판정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허블의 계산은 참값보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250만 광년이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은하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우리 태양계는 조그만 웅덩이 정도로 축소되어버리고, 태양은 우주라는 드넓은 바닷가의 한 알갱이 모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허블의 발견 이후 은하들 뒤에 다시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는 무한에 가까운 우주임이 드러났다. 인류에게 이것은 근본적인 계시였다. -하늘도 불안정하다! 은하를 추적하는 허블의 망원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후 6년 동안 허블과 그의 조수 휴메이슨은 은하들의 거리에 관한 데이터들을 모으느라 춥고 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과학자들은 은하들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12년, 로웰 천문대의 베스토 슬라이퍼는 은하 스펙트럼에서 적색이동을 발견하고, 은하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허블은 슬라이퍼의 연구를 기초로 삼고, 그 동안 24개의 은하를 집요하게 추적해서 얻은 자신의 관측자료를 정리하여 거리와 속도를 반비례시킨 표에다가 은하들을 집어넣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후퇴하고 있다. 먼 은하일수록 후퇴속도는 더 빠르다. 그리고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다. 이것이 허블 법칙이다.(사실 허블-휴메이슨 법칙이라 불러야 공평하다) 훗날 이 상수는 허블 상수로 불리며, 'H'로 표시된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주의 크기와 나이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허블 상수는 우주의 로제타 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허블과 휴메이슨의 발견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올베르스의 역설도 이로써 우주팽창이라는 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허블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심오한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묘하게도 죽이 잘 맞았던 이 덤앤더머 커플이 인류를 우주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갈 이론적 토대를 닦았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천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받아들여졌다. 1929년,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이 우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이 현기증 나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망해했다. 최초로 인류가 지구상을 걸어다닌 이래 우리 인간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하늘조차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대우주였다. -허블의 유해는 어디에? 허블은 죽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은하를 관측했다. 1953년 허블은 팔로마 산 천문대의 지름 5m의 거대 망원경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 관측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대천문학자다운 열반이었다. 향년 64세.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최대의 공헌을 한 허블의 업적은 노벨 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허블은 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 물리학상이 천문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규정이 바뀌어 허블에게도 상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상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허블이 죽은 지 3개월 뒤였던 것이다. 노벨 상은 고인이 된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을 받으려면 업적 못지않게 수명도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죽은 뒤에도 허블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허블의 유언에 따른 거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부인 그레이스는 장례식과 추도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허블의 행방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되는 바람에 허블을 추념하려면 우주공간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1990년 우주 공간으로 쏘아올려진 우주망원경에 허블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 중심 궤도를 95분마다 한 바퀴씩 돌며 먼 우주를 담아 보내고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지난 4월 24일로 관측 25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발사될 때까지 계속 운용될 전망이다. 마지막 허블의 말로 이 글을 접기로 하자. “오감만 잘 갖춰져 있으면 인간은 우주가 무엇인지 탐험할 수 있으며, 그걸 모험과학이라 부른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야기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야기

    인류의 오랜 과학사에서 최대의 과학적 발견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우주팽창'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우주팽창의 증거를 발견하여 인류에 고함으로써 20세기 천문학의 최고 영웅이 된 사람은 허블 우주망원경, 허블 법칙 등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에드윈 허블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허풍스러운 태도의 '20세기 천문학 최고 영웅' 1889년 미국 미주리 주의 마시필드에서 태어난 허블은 한마디로 온갖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보험 대리인이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부모로부터 높은 지능과 강건한 체질까지 물려받은데다 미남형이라 매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철철 흘렀다. 허블은 고등학교 시절 육상대표로 7종 경기에서 우승했고, 그밖에도 여러 대회, 여러 종목에서 메달을 수두룩하게 받았다. 공부도 잘했다. 명문 시카고 대학 법학과에 어렵잖게 진학했다. 말하자면 허블은 엄친아 대표선수였다. 대학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인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 유학기간 3년이 허블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때부터 허블은 늘 정장차림에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멋을 내며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풍스러운 영국식 억양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버릇은 평생 바뀌지 않았다. 천문학 하는 사람 중에 괴짜가 많긴 하지만, 허블도 그런 면에서는 전혀 꿀리지 않는 등급이었다. 아무튼 그런 허블이 어떻게 20세기 천문학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을까? 가끔 세상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손대는 일마다 떡 먹듯이 성공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불공평하게 보이고 배 아픈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블이 바로 그런 인간형이었다. 1913년 귀국해서 잠시 변호사 협회에 이름을 걸어놓은 허블은 얼마 후 돌연 하던 일을 접고 시카고 대학 천문학과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훗날 허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문학은 성직과도 같다. 소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스빌에서 1년 동안 법률업무에 종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소명을 받았다.” 뒤늦게 시작한 천문학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와 약간의 노력으로 밀린 공부를 따라잡아 1917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손에 쥐었다. 졸업 후 은사인 조지 헤일의 추천으로 윌슨 산 천문대에서 일하려던 허블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일로 취소되었다. 미국이 뒤늦게 1차대전에 뛰어들었던 탓이다. 육군 장교로 지원한 허블은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덕으로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그 역시 허블에게는 자랑거리였다. 평생 소령 칭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니까. -무시받던 '희미한 빛뭉치'에 꽂히다 전선에서 돌아온 허블은 1919년 30살 때 짐을 꾸려서 윌슨 산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입산이었다.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있는 윌슨 산 천문대에는 당시 세계 최대인 2.5m 후커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새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한나절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라 생활은 고행이었고, 일과는 고달팠다. 그럼에도 수십 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관측대 위에 앉아 온밤을 지새웠다. 거대한 반사망원경을 조그마한 손잡이를 돌려 조절하며, 렌즈의 십자선을 응시하면서 최고 12시간을 버텨야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난방기구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망원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연구원 숙소에 여자가 머무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그곳을 수도원이라 불렀다. '수도원 원장'인 조지 헤일은 천체물리학은 모든 잡념을 버린 남자만이 전념할 수 있는 분야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윌슨 산 꼭대기에서 허블은 먼 우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성운들을 향해서 망원경의 주경을 겨누고는, 사진을 찍고 스펙트럼을 찍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는 열흘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허블은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의 망원경으로 별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퍼시벌 로웰의 화성 이야기를 들으며 우주로의 꿈을 키워왔다. 허블의 박사논문 주제는 ‘희미한 성운’이었다. 주류 천문학자들은 밝은 별과 행성, 혜성에 연구할 주제가 얼마든지 있는데 무엇하러 그런 희미한 빛뭉치를 연구한다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허블의 깊은 관심은 늘 그 희미한 빛뭉치인 성운에 있었다. ‘저 가스 구름들은 과연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은하 바깥을 떠도는 별들의 도시인가?’ 라틴 어로 '안개'를 뜻하는 성운(nebula)은 20세기 초만 해도 정말 안개에 가려진 천체였다. 허블의 머리속에는 늘 성운에 대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허블이 윌슨 산에 오자마자 대망원경의 주경을 성운 쪽으로 돌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건달에 가까운 노새 몰이꾼 휴메이슨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한 사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허블의 조수였던 그 사내 역시 천문학사에서는 전설이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원래 노새 몰이꾼이었다. 이름은 밀턴 휴메이슨, 나이는 허블보다 2살 아래였다. 윌슨 산 천문대로 장비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잡일꾼으로 일했던 휴메이슨은 학교는 일찌감치 중2 때 때려치우고, 당구와 도박, 여자 후리기에 한가락하는 사내로, 좋게 말하면 한량, 나쁘게 말하면 건달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영리하고 호기심도 풍부한데다, 도박으로 다져진 눈썰미와 손재주, 머리회전에 힘입어, 천문대의 각종 장비와 기계에 대해 질문하고 익히고 하는 새에 어느덧 엔지니어 비슷한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휴메이슨의 놀라운 변신이 펼쳐진다. 야간 관측 보조원이 병결했는데, 대타로 투입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한 망원경을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문대에서는 하룻밤 공칠 요량을 하고 휴메이슨에게 대타로 뛰어볼 용의가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 업무는 거대한 덩치인 망원경을 다룰 뿐만 아니라 천체사진까지 찍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밤 휴메이슨은 임시직 관측 보조원이 되어 왕년에 트럼프 장 다루듯이 거대 망원경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자랑했다. 그뿐인가, 천문대 연구원들은 휴메이슨이 찍어놓은 은하 스펙트럼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명한 화질이 일급 전문가의 솜씨였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천문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허블의 조수가 되었다. 중학 중퇴로 천문대에 정식직원이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중학 중퇴 건달과 허풍기 있는 천문학 박사는 만나자마자 악동들처럼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휴메이슨은 일을 시작하자 이내 양질의 은하 스펙트럼을 얻는 데 어떤 천문학자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나중엔 '휴메이슨 혜성'을 발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완벽한 천문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건달에서 천문학자로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1923년 10월 어느 날 밤, 마침내 허블은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2.5m 반사망원경을 이용해 안드로메다 대성운으로 알려진 M31과 삼각형자리 나선은하 M33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 건판을 분석하던 허블은 갑자기 “유레카!” 하고 크게 외쳤다. 성운 안에 찍혀 있는 변광성을 발견한 것이다. 1912년 헨리에타 리빗이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우주를 재는 표준 촛불로 삼아,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하늘의 잣대를 제공한 바 있었다. 리빗의 발견을 잘 알고 있던 허블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해본 결과 31.4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다 리빗의 자를 들이대어 지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93만 광년이란 답이 나왔다. 우리 은하 크기보다 10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단순히 나선 모양의 성운으로 알고 있었던 안드로메다는 사실 우리 은하를 까마득히 넘어선 곳에 있는 독립된 나선은하였다. 칸트의 섬우주론이 200 년 만에 완벽히 증명된 셈이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측정했던 허블은 새로운 우주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당시 천문학계는 우리은하의 크기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다', '우리은하 외에도 많은 은하들이 있을 것이다'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가 그 판정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허블의 계산은 참값보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250만 광년이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은하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우리 태양계는 조그만 웅덩이 정도로 축소되어버리고, 태양은 우주라는 드넓은 바닷가의 한 알갱이 모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허블의 발견 이후 은하들 뒤에 다시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는 무한에 가까운 우주임이 드러났다. 인류에게 이것은 근본적인 계시였다. -하늘도 불안정하다! 은하를 추적하는 허블의 망원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후 6년 동안 허블과 그의 조수 휴메이슨은 은하들의 거리에 관한 데이터들을 모으느라 춥고 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과학자들은 은하들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12년, 로웰 천문대의 베스토 슬라이퍼는 은하 스펙트럼에서 적색이동을 발견하고, 은하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허블은 슬라이퍼의 연구를 기초로 삼고, 그 동안 24개의 은하를 집요하게 추적해서 얻은 자신의 관측자료를 정리하여 거리와 속도를 반비례시킨 표에다가 은하들을 집어넣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후퇴하고 있다. 먼 은하일수록 후퇴속도는 더 빠르다. 그리고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다. 이것이 허블 법칙이다.(사실 허블-휴메이슨 법칙이라 불러야 공평하다) 훗날 이 상수는 허블 상수로 불리며, 'H'로 표시된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주의 크기와 나이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허블 상수는 우주의 로제타 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허블과 휴메이슨의 발견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올베르스의 역설도 이로써 우주팽창이라는 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허블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심오한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묘하게도 죽이 잘 맞았던 이 덤앤더머 커플이 인류를 우주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갈 이론적 토대를 닦았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천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받아들여졌다. 1929년,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이 우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이 현기증 나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망해했다. 최초로 인류가 지구상을 걸어다닌 이래 우리 인간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하늘조차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대우주였다. -허블의 유해는 어디에? 허블은 죽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은하를 관측했다. 1953년 허블은 팔로마 산 천문대의 지름 5m의 거대 망원경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 관측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대천문학자다운 열반이었다. 향년 64세.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최대의 공헌을 한 허블의 업적은 노벨 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허블은 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 물리학상이 천문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규정이 바뀌어 허블에게도 상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상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허블이 죽은 지 3개월 뒤였던 것이다. 노벨 상은 고인이 된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을 받으려면 업적 못지않게 수명도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죽은 뒤에도 허블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허블의 유언에 따른 거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부인 그레이스는 장례식과 추도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허블의 행방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되는 바람에 허블을 추념하려면 우주공간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1990년 우주 공간으로 쏘아올려진 우주망원경에 허블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 중심 궤도를 95분마다 한 바퀴씩 돌며 먼 우주를 담아 보내고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지난 4월 24일로 관측 25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발사될 때까지 계속 운용될 전망이다. 마지막 허블의 말로 이 글을 접기로 하자. “오감만 잘 갖춰져 있으면 인간은 우주가 무엇인지 탐험할 수 있으며, 그걸 모험과학이라 부른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선물로 롤스로이스까지…메이웨더 새 여친 공개

    선물로 롤스로이스까지…메이웨더 새 여친 공개

    오는 5월 3일(한국시간) 세기의 혈전을 앞둔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38)의 새 여자 친구가 공개돼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영국 일간 미러 30일자 보도에 따르면, 메이웨더는 최근 몇 달 동안 도랄리 메디나(30)라는 이름의 멕시코 출신 여성과 교제하고 있다. 도랄리는 2년 전 메이웨더가 고용한 안마사였지만, 최근 그와 사귀고 있는 것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된 수많은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서 ‘나쁜 메디나’(Bad Medina)라는 예명을 쓰고 있는데 메이웨더가 그렇게 지어줬다고 밝히고 있다. 또 메이웨더로 받았다는 각종 값비싼 선물을 공개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핸드백이나 시계는 물론 디자이너가 만든 구두는 컬렉션을 이뤘고 지난 생일에는 우리 돈으로 4억원이 넘는 롤스로이스 고스트를 받았다고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 밖에도 그녀는 최근 메이웨더가 라스베이거스로 이사한 330억원이 넘는 대저택 안에서의 생활을 꾸준히 공개하고 있다. 도랄리는 또 메이웨더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하고 있다. 그녀는 “플로이드는 넓은 마음씨를 갖고 있으며, 매우 사랑스럽고 상냥하다”면서 “그는 매우 외향적이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매우 달콤하고 너그러운 남자”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메이웨더와의 데이트 당시 찍은 사진도 공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그가 “메이웨더 항공”이라고 부르고 있는 500억원 상당의 항공기 내에서 애완견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해안 구조대에서 간호사를 거쳐 안마사로 취직했던 그녀는 “성공한 여자보다는 가치 있는 여자가 되라”라고 적고 있다. 도랄리의 말대로라면, 메이웨더는 그녀에게 푹 빠진 듯하다. 하지만 무패를 기록 중인 그는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지고 있다. 메이웨더는 2010년 자신과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둔 전 동거녀인 조시 해리를 폭행한 혐의로 90일 징역 선고를 받고 2달 복역했었지만, 최근 케이티 쿠릭이 진행한 야후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또 올해 초까지 약혼녀였던 셴텔 잭슨과는 폭행과 불법 감금 혐의로 소송 중에 있다. 한편 메이웨더는 다음달 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필리핀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36)와 세계복싱협회(WBA),세계권투평의회(WBC)와 세계복싱기구(WBO) 웰터급 통합챔피언 자리를 놓고 맞붙는다. 메이웨더는 47전 전승으로 무패의 복서고, 파퀴아오는 전무후무한 8체급을 석권한 선수다. 사진=도랄리 메디나/인스타그램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씨줄날줄] 대통령의 건강/문소영 논설위원

    1933년 취임해 뉴딜 정책으로 미국에서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39살의 나이에 뒤늦게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무척 불편했다. 하지만 재임 중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지팡이를 짚은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적인 인기를 위해 정력적으로 거침없이 일하는 강인한 대통령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열적이고 방종한 연애 이력에도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세계 최초로 진행된 대통령 후보자 TV 토론에서 젊고 싱싱한 이미지로 공화당의 닉슨 후보를 눌렀다. 당시 TV 화면에 비친 닉슨이 창백하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병색이 완연해 보였던 탓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케네디가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부신피질 호르몬의 분비 부족으로 발생하는 에디슨병으로 평생 고통받았다. 만성적인 요통 증세가 있었고 두 차례 허리 수술을 받았다. 수시로 대장염에 노출됐으며, 요도염 재발도 잦았다. ‘미드웨이 해전’에 따르면 케네디는 1942년 태평양전쟁에 해군 장교로 참전했고, 건강 문제를 은폐하고자 입영 서류를 조작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다량의 진통제와 항생제 처방, 물리치료사의 치료를 받았다. 체중의 급격한 감소로 고생했지만, 건강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가 그가 46살 때 암살되자 한참 만에 평전 등을 통해 드러났다. ‘머리를 빌려 쓴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경호원들과 함께 새벽에 조깅을 하며 건강을 과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가 되자 한국 나이로 일흔을 넘긴 탓에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악성 루머가 돌아다녔다. 대통령직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명하려고 그는 고령에도 전국의 유세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후 대통령 임기 후반에 오후 일정을 완전히 비워 뒀다는 소문들이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에 앞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남몰래 했는데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가 슬쩍슬쩍 됐고, 이해찬 전 총리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자 언론은 “주요 국가 정보 관계자들이 그 부분을 주목했을 것”이라며 안이한 인식을 질타했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인 4월 16일 출발해 12일간의 남미 순방을 떠나 27일 새벽에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인두염과 위경련 등으로 1~2일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오늘까지 아무런 공식 일정도 잡지 않았다고 했다. 과문(寡聞)해서 그런지 역대 현직 대통령 중 아프다는 발표는 물론 병으로 일정을 비워 뒀다는 청와대의 공식적인 입장도 처음 듣는 듯하다. 역대 대통령들이 병환이 없이 건강해서 그런 발표가 없었다기보다 대통령의 건강이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사안이라 극비에 부쳐졌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와병에 대한 공표는 신선한 발상이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아하! 우주] 지구는 ‘별’이다? 아니다?

    [아하! 우주] 지구는 ‘별’이다? 아니다?

    태양계의 운수납자(雲水衲子)…지구는 '별'이 아니다? ​ 지구와 금성을 흔히 초록별이니 샛별이니 하는데, 과연 행성도 별일까? ​ 관례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행성은 별이 아니다. 보통 태양처럼 천체 내부의 에너지 복사로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 곧 항성을 별이라고 한다. 따라서 항성의 빛을 반사시켜 빛을 내는 행성이나 위성, 혜성 등은 별이라고 할 수 없다. 태양계에서 빛을 내는 천체는 태양이 유일하다.​ 예로부터 인류와 가장 가까운 천체는 해와 달을 비롯,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었다. 옛사람들은 밤하늘이 통째로 바뀌더라도 별들 사이의 상대적인 거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별은 영원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류에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위의 다섯 개 행성은 일정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별들 사이를 유랑하는 것을 보고, 떠돌이란 뜻의 그리스 어인 플라나타이(planetai), 곧 떠돌이별이라고 불렀다. ​ 플라톤 시대 이후부터 서구인들은 이들 행성은 지구에서 가까운 쪽부터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이 차례로 늘어서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동양에서도 이 다섯 행성은 쉽게 관측되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드넓은 밤하늘에서 수많은 별들 사이를 움직여 다니는 다섯 별을 본 고대 동양인은 이 별들에게 음양오행설에 따라 '화(불), 수(물), 목(나무), 금(쇠), 토(흙)'이라는 특성을 각각 부여했고, 결국 이들은 별을 뜻하는 한자 별 성(星)자가 뒤에 붙여져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단, 지구만은 예외인데, 그 이유는 고대 사람들이 지구가 행성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망원경이 발명된 이후에 발견된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서양에 대해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 행성의 이름을 자국어로 옮길 때, 우라누스가 하늘의 신이므로 천왕(天王), 포세이돈이 바다의 신이므로 해왕(海王), 플루토가 명계(冥界)의 신이므로 명왕(冥王)이라는 한자 이름을 만들어 붙였고, 한국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요일 이름에는 '천동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쓰는 요일 이름이 해와 달을 포함하여 다섯 행성들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은 천동설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요일 이름이 지어질 당시에는 천동설이 대세를 이루어 태양과 달도 지구 둘레를 도는 행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애용하는 일, 월, 화, 수,목, 금, 토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가 행성으로 낙착된 것은 17세기 초 망원경이 발명되면서,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머리를 옥죄어온 천동설의 굴레가 벗겨지고 지동설이 확립된 이후의 일이다. 태양계의 개념이 인류에게 자리잡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니까 태양계라는 말의 역사가 겨우 40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토성까지 울타리 쳐진 이 아담한 태양계가 우주의 전부인 줄 알고 인류가 나름 평온하게 살았던 시간은 200년이 채 안된다. 인류의 이 평온한 꿈을 일거에 깨뜨린 사람은 탈영병 출신의 한 음악가였다. 유럽에서 터진 7년전쟁에 종군하다가 영국으로 도망친 독일 출신의 윌리엄 허셜이 오르간 연주로 밥벌이하는 틈틈이 자작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열심히 쳐다보다가 그만 횡재를 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1781년의 천왕성 발견이다. 그 행성은 토성 궤도의 거의 2배나 되는 아득한 변두리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토성 바깥으로 행성이 더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쨌든 한 천체의 발견으로 신분이 혁명적으로 바뀐 예는 허셜 외에는 없을 것이다. 한 무명 아마추어 천문가에 지나지 않던 허셜은 천왕성 발견 하나로 문자 그대로 팔자를 고쳤다.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왕립협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영국왕 조지 3세의 부름으로 궁정에서 왕을 알현하고는 연봉 200파운드의 왕실 천문관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허셜은 음악가라는 직업을 벗어던지고 명실공히 프로 천문학자로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천문학상의 발견으로 이처럼 신분의 수직상승을 이룬 예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어쨌든, 천왕성의 발견이 당시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신대륙 발견 이상으로 엄청나게 컸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믿어온 아담하던 태양계의 크기가 갑자기 2배로 확장되는 바람에 세상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반세가 남짓 만인 1846년에 영국의 애덤스와 프랑스의 르베리에에 의해 해왕성이 발견되었고, 다시 1930년에 미국의 C. 톰보에 의해 명왕성이 발견되어 태양계의 9번째 행성이 되었다. ​ 가난한 고학생 출신의 톰보를 일약 천문학 교수로 만들어준 이 명왕성의 영광은 그러나 한 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이 행성의 정의를 새로이 함으로써 명왕성이 행성 반열에서 퇴출되어 '왜소행성 134340'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태양계 행성은 모두 여덟 개로, 물리적 특성에 따라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으로 분류되는데, 전자는 암석형 행성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고, 후자는 가스형 행성으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다. 또한 지구를 기준으로 궤도가 안쪽이면 내행성, 바깥쪽이면 외행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성은 절대로 '혹성'이 아니다 마지막으로서 하나 짚어둘 것은, 이 '행성'을 아직까지 '혹성(惑星)'이라고 하는 책(특히 일본 책 번역한 전문사전류들)이나 사람들이 꽤 있는데, 이건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용어로, 순 일본말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당연히 잘못된 제목이다. 일본 것 보고 그대로 베껴서 그렇다. 혹성의 ‘혹(惑)자는 ‘혹시’라는 뜻인데, ‘혹시 별?’ 이런 엉거주춤한 용어다. 행성을 영어로는 플래닛(planet)이라 하는데, ‘떠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플라네타이(planetai)에서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말인 떠돌이별, ‘행성(行星)’이란 말이 더 아름답고 맞는 말이다. ​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인 수성은 초속 60km로 88일 만에 태양을 한 바퀴 돌지만, 가장 멀리 있는 해왕성은 초속 5km로 165년을 달려야 태양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2011년으로 해왕성이 발견된 지 딱 1주기을 맞았다. 지금 해왕성이 심우주의 머나먼 궤도를 한 바퀴 돌아와 70억 인구가 사는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겠지만, 그 전에 보았던 얼굴은 하나도 찾을 수 없으리라. 캄캄한 우주공간을 쉼없이 달리며 태양을 도는 이들 지구의 형제, 행성들을 생각하면 마치 운수납자(雲水衲子)와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구름 가듯 물 흐르듯 떠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스님을 일컫는 아름다운 말이다. 지구와 같은 궤도평면을 떠나지 않고 46억 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지구와 길동무 해서 같이 가고 있는 저 화성이나 천왕성 같은 행성이 바로 태양계의 운수납자가 아닐까?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아이폰6S, 6S플러스, 6C 삼총사 9월 출시”

    “아이폰6S, 6S플러스, 6C 삼총사 9월 출시”

    지난 해 출시된 아이폰6와 아이폰6플러스가 전무후무한 판매성과를 보인 가운데, 애플이 오는 9월 3대의 디바이스를 추가로 출시할 예정이라는 루머가 업계에 돌기 시작했다. 대만의 ‘디지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올 하반기 아이폰6 시리즈의 후속인 아이폰 6S와 아이폰6S플러스 출시를 준비하는 동시에 보급형의 아이폰6C를 출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급형 아이폰6C는 4in의 소형 디스플레이를 장착해 ‘아이폰6 미니’라고 부르기도 하며, 아이폰6S, 아이폰6S플러스 등 3종은 모두 재팬 디스플리에, 한국 LG디스플레이가, 아이폰6C는 위의 두 회사와 샤프 사가 패널을 공급한다. 아이폰6S와 아이폰6S플러스에는 삼성의 A9 프로세서가, 보급형 아이폰6C에는 A8 프로세서가 각각 탑재된다. 아이폰6S 시리즈는 중국의 폭스콘과 페가트론이 맡는다. 디지타임즈는 올해 출시될 것으로 보이는 차세대 아이폰들이 터치 ID센서와 NFC기능을 내장해 애플페이(Apple Pay)의 활용도를 높일 계획이다. 애플페이는 2014년 10월부터 애플이 시작한 모바일 결제서비스다. 이밖에도 아이폰6S, 아이폰6S플러스, 아이폰6C에는 애플워치에 적용된 다양한 기술이 탑재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차세대 아이폰 시리즈에는 기존 ‘S’시리즈의 행보와 마찬가지로 카메라 기능이 강화 될 것으로 보이며, 업계에서는 최근 애플이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취득한 고성능 카메라 관련 특허를 사용할 것으로 예측해 소비자들의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정우성 작서의 변 캐스팅, ‘제2의 괴물?’ 정우성 역할은?

    정우성 작서의 변 캐스팅, ‘제2의 괴물?’ 정우성 역할은?

    정우성 작서의 변, 조선시대 괴수영화 나온다 ‘기대감 폭발’ 정우성 역할은? ‘정우성 작서의 변’ 배우 정우성이 2015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액션 사극 ‘작서의 변–물괴의 습격’(이하 작서의 변)의 주연으로 캐스팅돼 화제다. 영화 ‘시실리 2km’, ‘차우’, ‘점쟁이들’을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작서의 변’은 중종 22년, 임금이 궐에 나타난 괴물을 피해 궁을 옮긴 희대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왕을 위협하는 물괴(物怪)와 왕의 자리를 넘보는 훈구세력과의 사투를 담은 작품이다. 정우성은 ‘작서의 변’에서 물괴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동시에 반정을 꾀하는 훈구세력을 처단하는 중종의 충신인 ‘윤겸’ 역을 맡았다. ‘작서의 변’ 연출을 맡은 신정원 감독은 캐릭터 윤겸에 대해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와 같은 매력적인 역할”이라고 소개하며 “이 역할에 오직 정우성만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정우성 역시 ‘작서의 변’ 시나리오를 읽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수영화라는 전무후무한 장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곧바로 신정원 감독과 미팅을 갖고, 출연을 결정할 만큼 ‘윤겸’ 캐릭터에 매료됐다고 한다. 영화 ‘작서의 변’ 제작진은 괴수영화로서 비주얼이펙트가 매우 중요한 만큼 전세계적으로 손꼽히는 CG전문회사 ‘웨타 디지털(Weta Digita)’과 작업할 예정이다. ‘웨타 디지털’은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킹콩’, ‘아바타’, ‘호빗’ 등의 영화에 참여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을 무려 네 차례나 수상하며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의 캐릭터를 모델링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CG회사인 웨타 디지털이 만들어 낼 조선시대의 괴물의 모습과 화려한 볼거리에 벌써부터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2015년 가장 기대되는 작품으로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우성 작서의 변 캐스팅 소식에 네티즌들은 “정우성 작서의 변, 대박이다”, “정우성 작서의 변, 완전 기대돼”, “정우성 작서의 변, 감독도 기대된다”, “정우성 작서의 변 무조건 본다”, “정우성 작서의 변, 제2의 괴물이 될까”등의 반응을 보였다. 정우성 주연 영화 ‘작서의 변’은 조선시대에 괴물이 나타났다는 중종실록의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팩션영화인 만큼 철저한 고증은 물론, 상상력을 적절히 배합해 작품성과 오락성,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계산이다. 정우성은 현재 ‘작서의 변’ 속에서 직접 사용할 검과 활을 제작해 무술 연습에 매진 중이라는 전언이다. 오는 2월 말 크랭크인. 사진=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사설] 승무원 내리게 한 조양호 한진 회장 딸의 갑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출발 직전의 비행기를 후진시켜 승무원을 내리게 한 ‘갑질’은 우리나라 재벌의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조 부사장은 지난 5일 뉴욕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 1등석에 탔다가 마카다미아넛(견과류)을 물어보지도 않고 봉지째 건넨 게 잘못됐다며 승무원에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이어 비행기를 후진시켜 매뉴얼을 제대로 못 찾은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고 한다. 이런 소동 속에 영문도 모르는 250여명의 승객들은 20분 이상 출발이 늦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들의 시간적 손실과 불편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땅콩 과자를 봉지째 준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라고 해도 나중에 자기들끼리 매뉴얼을 놓고 따지면 될 일이다. 자가용 비행기도 아닌데 여객기를 무작정 돌린 것은 어처구니없는 갑질 중 갑질이다. 항공법상 기장의 권한을 침해하는 안하무인격인 월권행위이기도 하다. 기장은 기체결함 등의 이유로 운항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탑승 게이트로 돌아가는 응급조치를 할 수 있다. 승객 난동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번처럼 오너가(家)인 항공사 임원이 기내 서비스를 이유로 기수를 돌리게 한 것은 항공 역사에 기록될 전무후무할 기록이다. 더구나 회장 딸이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사무장 없이 비행을 하도록 지시한 것은 월권도 이만저만한 월권이 아니다. 항공법을 위반했을 소지가 크다. 항공법에는 ‘항공기의 비행 안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장이 승무원을 지휘·감독한다’고 돼 있다. 국토교통부는 조 부사장이 관련 법을 어겼는지를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 봐주기식 조사를 해서는 안 된다. 국토부가 재벌의 눈치를 본다면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한 점 의혹 없이 위법 사항을 가려 조 부사장은 물론 대한항공 측에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조 부사장은 지난해에는 하와이 원정 출산으로 입길에 올랐다. 원정 출산은 사생활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분명 다르다. 도덕성 논란도 아니며, 단순한 실수로 보기도 어렵다. 자기 회사 직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재벌 3세의 비뚤어진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내에 탑승한 승객 250여명의 불편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마음대로 비행기를 후진시킬 생각을 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거창하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벌의 딸이라는 덕분에 회사 경영에 나섰다면 최소한 직원을 노예나 종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지녀야 되지 않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그 자리에 오른 조 부사장은 직원들을 ‘머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 후계 경영인의 명암 현대차그룹(하)] 현대ENG·엠코 합병 계열사 새판 짜기… 후계 승계 물밑작업

    [재계 인맥 대해부 (2부) 후계 경영인의 명암 현대차그룹(하)] 현대ENG·엠코 합병 계열사 새판 짜기… 후계 승계 물밑작업

    최근 현대차그룹은 계열사 간 합병 작업에 분주하다. 지난 1월 현대제철이 현대하이스코의 냉연부문을 합병한 데 이어 4월 현대엠코와 현대엔지니어링이 합병했다. 현대위아가 현대위스코와 현대메티아를 흡수 합병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 현대차그룹이 말하는 합병의 이유는 ‘계열사 간 중복된 사업영역을 정리해 경영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생각은 다르다. 이어지는 합병은 결국 장남인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권 이양을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대차그룹의 지배 구조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진다. 현대차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현대모비스가 있다는 이야기다. 30일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총수인 정몽구 회장의 모비스 지분율은 6.96%. 하지만 정의선 부회장이 가진 현대모비스 주식은 없다. 현대차, 기아차 등 그룹 주력 기업의 주식도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현실은 일찍이 자리를 준비한 삼성과 비교된다. 삼성은 이미 그룹 지주사격인 에버랜드의 지분 중 25%가량을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넘겼다.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픈 정 회장의 입장에선 마음이 급한 게 현실이다. 정 부회장은 현재 기아차 지분 1.74% 외에 현대글로비스(31.9%), 현대엔지니어링(11.7%), 현대오토에버(19.5%), 이노션(10%), 현대 위아(1.95%) 등을 갖고 있다. 증권가에서 보는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대략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글로비스와 이노션 등의 보유 지분을 매각해 이른바 ‘실탄’을 마련한 뒤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이는 방식이다. 정 부회장이 현대모비스의 경영권을 행사하기 위해 최소 5% 정도의 지분이 필요하다. 현대모비스 지분 5%의 시장가는 1조 2000억원 정도다. 정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가치만 약 3조 3000억원인 만큼 세금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상황은 아니다. 두 번째는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분할한 뒤 현대모비스 지주 부문과 현대글로비스를 합병한다는 시나리오다. 이미 보유한 지분을 매각할 필요도 없이 손쉽게 지배력을 높일 수 있지만 증손회사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하는 지주회사법상 복잡한 계열사 지분 교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떤 시나리오를 택하든 핵심에는 현대글로비스가 존재한다.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가 삼성에서 맡았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철저히 경영권 승계 입장에서 보면 ‘현대글로비스 주가가 오를수록, 현대모비스 주가가 안 오를수록’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실제 최근 5년간 현대 글로비스의 주가는 5배가량 올랐다. 현대차 내부에서 3세 경영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런 일이다. 76세인 정몽구 회장이 여전히 청년 같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조직 장악력도 변함 없다. 게다가 다른 기업에 비해 상명하복이 분명한 현대차 내부 조직문화 자체도 이를 용납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감히 정의선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다만 각자의 분야에서 맡은 소임에 따라 후계구도를 차근차근 준비 중인 이들은 있다. 다른 기업과 달리 구도가 명확한 만큼 후일을 준비하는 것 역시 정몽구 회장의 뜻이기도 하다. 정의선 부회장이 31.9%의 지분을 지닌 현대글로비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현대 글로비스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2년간 5명이나 대표이사가 물갈이됐다. 현재 글로비스는 2009년 7월 취임한 김경배(50) 사장이 맡고 있다. 단명했던 전임 사장들과 비교하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집권이다. 김 사장은 조직 내부에서도 “정 회장의 마음을 가장 잘 읽어 내는 인물”로 통한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90년 현대차의 엘리트 코스인 현대정공으로 입사해 현대건설과 자동차, 현대모비스 등 현대와 현대차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두루 거쳤다. 취임 당시에도 사주 일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젊은 나이(45)에 사장 자리에 올랐고 현재까지 이 타이틀은 유효하다. 무엇보다 김 사장은 현대차 내부에서 전무후무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1990년대부터 10년 동안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수행비서를 거쳐 2007년에는 정몽구 회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렇다고 현대가와의 긴 인연이 그의 자리를 보장해준 것만은 아니다. 물류분야에 대한 경험 없이 현대글로비스 사장에 취임했지만 그는 2009년 이후 지난해까지 평균 40%에 달하는 매출 신장세를 일궈 냈다. 같은 맥락에서 정 부회장의 지분이 14.2%인 현대위아와 11.7%인 현대엔지니어링도 눈여겨볼 조직이다. 각각 윤준모(59) 사장과 김위철(59) 사장이 담당하고 있다. 같은 나인인 두 사람 모두 전형적인 엔지니어지만 관리직에 오르면서 영업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비교적 신진세력으로 꼽히지만 정 회장의 신임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현대위아는 현대위스코와 현대메티아를, 현대엔지니어링은 현대엠코를 흡수합병했다. 단편적으로 두 사장의 과제는 각자의 사세를 키워 주가를 올리는 일이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조상경 디자이너 대리수상 “제 전처다” 경악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조상경 디자이너 대리수상 “제 전처다” 경악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대종상영화제에서 배우 오만석이 전 부인을 대신해 트로피를 받아 화제다. 2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KBS 방송국 신관 KBS홀에서 열린 제51회 대종상영화제에서는 조상경 디자이너가 의상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이때 제51회 대종상영화제에 불참한 조상경을 대신해 사회를 보던 오만석이 나왔다. 오만석은 마이크 앞에 서 “사실 부탁을 받았다. 제 전처다”고 말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오만석은 이어 “저번에 같이 식사를 하면서 혹시 상을 받게 되면 수상소감을 대신 말해달라고 했는데 오늘 진짜 안 왔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오만석은 “군도는 참 많은 스태프들이 고생하고 합심해 열심히 만든 영화로,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 의상을 잘 만들고 열심히 하는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말했을 것”이라는 재치 있는 소감을 남겼다. 네티즌들은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대박이다”,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진짜 쿨하네”,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재결합 하는 거 아냐”,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전 부인이 조상경 디자이너구나”, “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전무후무 대리수상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 = KBS(제51회 대종상영화제 오만석)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단독] 돈 되는 야구 vs 돈 새는 야구

    [단독] 돈 되는 야구 vs 돈 새는 야구

    올 시즌 프로야구 준우승팀 넥센과 미국 프로야구(MLB) 월드시리즈 준우승팀 캔자스시티는 우승팀 못지않은 조명을 받았다. 자본 논리가 지배하는 프로 스포츠에서 ‘저비용 고효율’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올 시즌 프로야구 각 구단이 1승을 얻기 위해 들인 선수단 연봉은 많게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성적은 연봉 순이 아닌 셈이다. 대부분 구단은 해마다 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모그룹의 지원 없이는 홀로 서기 어려운 게 프로야구의 현실이다. ‘저비용 고효율’과 획기적인 마케팅을 통한 흑자 경영의 시대가 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올 시즌 선수단(외국인과 신인 제외) 연봉으로 가장 많은 돈을 쓴 구단은 삼성이다. 총액 75억 8700만원, 1인당 평균 1억 4050만원을 지급했다. 정규리그에서 78승을 거뒀으니 1승당 9727만원을 썼다. 전무후무한 정규리그-한국시리즈(KS) 4연패를 달성해 투자가 아깝지 않은 성과를 냈다. 삼성이 KS 우승으로 얻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만 해도 상당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번 포스트시즌(PS)에서 총 72억 8000만원을 벌었는데, 운영비 40%를 뗀 나머지 60%를 PS에 진출한 4개 구단에 분배한다. 삼성에는 정규리그 우승 몫 8억 7000만원과 KS 우승 몫 17억 4000만원 등 총 26억원이 배당된다. 삼성이 시즌 전 가입한 우승 보험금 10억원을 합치면 36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삼성은 준우승한 넥센과 정규리그 3위 NC에 비하면 ‘고비용 고효율’을 거뒀을 뿐이다. 넥센의 연봉 총액은 51억 3900만원(평균 9883만원)으로 9개 구단 중 7위에 그쳤고, NC는 40억 1100만원(1인당 평균 7713만원)으로 최하위였다. 둘 다 성적은 돈 순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삼성과 같은 정규리그 78승을 올린 넥센이 1승당 치른 연봉은 6588만원, 70승의 NC는 5730만원이다. 올 시즌 쓴 돈에 비해 가장 성과를 내지 못한 팀은 한화다. 9개 구단 중 네 번째인 57억 8200만원(평균 1억 1564만원)을 연봉 총액으로 썼음에도 3년 연속 꼴찌의 수모를 겪었다. 정규리그 49승밖에 올리지 못했으니 1승당 1억 1800만원을 지출했다. NC의 두 배가 넘는다. 롯데도 삼성과 LG(64억 4700만원) 다음으로 많은 62억 6600만원의 연봉 총액을 지급했지만, 성적은 7위에 그쳐 투자에 한창 못 미쳤다. 한화와 롯데는 지난해 스토브리그에서 100억원이 넘는 돈을 뿌린 팀. 한화는 정근우와 이용규에게 각각 70억원과 67억원, 롯데는 강민호와 최준석에게 75억원과 35억원(이상 4년)의 돈다발을 안겼다. 이 때문에 올 시즌 선수단 연봉은 한화가 34.1%, 롯데는 26.2%나 뛰었지만 성적은 더 떨어질 곳 없는 제자리거나 뒷걸음질 쳤다. 사실 프로야구단은 대부분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 연간 수백억원에 달하는 운영비를 입장 수입과 마케팅으로 메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제출된 7개 구단(SK와 KIA 제외, LG는 LG스포츠)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모두 지난해 적자를 냈다. 삼성의 당기순손실이 121억원으로 가장 컸고, 넥센(67억원)·한화(18억원)·롯데(15억원)·LG(11억원) 등의 순이었다. NC(4억 8000만원)와 두산(1억 3000만원)은 그나마 적자 폭이 작았다. 삼성의 당기순손실은 2012년 1억 3000만원에서 지난해 10배 가까이 늘었는데, 광고수입이 280억원에서 190억원으로 크게 떨어진 탓이다. 특히 모그룹 계열사 광고가 240억원에서 150억원으로 줄었다. 1등 구단이라도 모그룹의 지원 없이는 버티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지난해 삼성의 입장 수입(75억원)은 전체 매출(430억원)의 17.5%에 불과했다. 다른 구단도 사정은 비슷하다. 매출액의 40~70% 이상을 모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한화의 경우 지난해 430억원의 매출 중 329억원(76.5%)이 모그룹 계열사의 지원금과 광고비 등으로 채워졌다. 관중 수요가 많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두산과 LG도 입장 수입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내외이며, 모그룹 수입 비중이 40%가 넘는다. 유일하게 모그룹이 없는 넥센은 네이밍 스폰서(스폰서 기업 이름으로 팀명을 사용)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아직 적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축 선수를 팔아 연명하던 2009~2010년에도 5억~6억원의 적자가 났고, 2011년부터는 해마다 40억원 이상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래도 모그룹 지원 없이 이 정도의 지표를 낸 것은 상당한 선전으로 볼 수 있다. 넥센의 매출은 2008년 115억원에서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두 배가 넘는 238억원까지 올랐다. 모그룹 지원에 따라 매출 변동이 심한 다른 구단과 달리 안정적인 상승세를 유지했다. 최근 넥센이 이택근과 김병현 등 고액 몸값 선수를 영입한 것은 이 같은 매출 신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모그룹이 대기업이 아닌 NC도 1군 무대 진입 첫해인 지난해 긍정적인 성과를 냈다. 330억원의 매출 중 모그룹 지원 비중이 61.5%(203억원)로 나타났는데, 한화나 삼성에 비해 낮다. 충성도 있는 팬들이 확보되고, 신축 구장이 완공되면 지표가 더 개선될 여지는 충분하다. 국내 유수 기업들이 거액을 지원하면서 야구단을 운영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경제적 효과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2010년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 체육과학연구원이 분석한 결과를 보면 프로야구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연간 1조 1838억원에 이른다. 롯데가 생산과 부가가치 파급효과를 합쳐 2313억원의 가치를 생산했고, LG(1715억원)·두산(1693억원) 등도 1500억원을 훌쩍 넘겼다. 재벌닷컴이 2011년 각 구단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나왔다. 8개 구단(NC 제외)의 가치는 총 2조 354억원으로 나타났고, 구단별로는 롯데(3509억원)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LG와 두산 역시 각각 2932억원과 2744억원으로 평가돼 서울 구단의 프리미엄을 누렸다. 야구단 운영이 곧 사회공헌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도 적자를 무릅쓰는 원인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는 게임으로 이룬 부를 야구를 통해 환원하겠다는 의지로 NC를 창단했으며, 최근 10구단 창단 경쟁을 펼쳤던 KT와 부영도 사회공헌 이미지를 중점적으로 부각시켰다. 프로야구는 정치적 의도가 깊숙이 개입해 출범한 스포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고자 기업을 끌어들여 출범시켰다. 야구단 운영은 초기부터 애초에 돈벌이 대상이 아니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야구는 여전히 주판알을 튕기는 대상이 아니며, 그룹 이미지와 인지도를 제고하는 데 큰 효과가 있는 종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33년째를 맞은 프로야구에서 야구단 운영에 손을 댄 기업은 10구단 KT까지 총 19개다. 삼성과 롯데만이 원년부터 팀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삼미·청보·MBC·빙그레·태평양·OB·쌍방울·해태·현대는 경영난이 오자 차례로 야구에서 철수했다. 대기업이 아니면 야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깔린 지 오래다. 공룡과도 같은 기업들의 틈바구니에 낀 넥센과 NC는 “제대로 운영이나 하겠느냐”라는 비아냥을 끊임없이 들었다. 올해 넥센과 NC가 적은 비용으로 좋은 성적을 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국 야구도 저비용 고효율의 ‘머니볼’이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이장석 넥센 대표이사는 장기적 관점에서 팀을 운영하는 프런트 야구의 진수를 발휘해 ‘한국의 빌리 빈’(MLB 오클랜드 단장이자 머니볼의 창시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MLB는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입장 수입이 차지하고 있다. 4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을 보유한 데다 좌석에 따라 최고 100만원이 넘는 입장료를 받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로, 국내 현실에서는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MLB에서도 머니볼에 대한 연구는 10년 넘게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스몰마켓임에도 효율적인 운영으로 흑자경영을 하는 구단이 여럿 있다. 넥센과 NC의 선전을 계기로 프로야구에서도 ‘한국판 머니볼’을 찾으려는 노력이 확산될지 주목된다. 글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그래픽 김송원 기자 nuvo@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삼성그룹(하)] 최지성, 이 부회장의 경영수업 ‘멘토’… 4대 사업 요직 두루 거쳐

    [재계 인맥 대해부 (2부)후계 경영인의 명암 삼성그룹(하)] 최지성, 이 부회장의 경영수업 ‘멘토’… 4대 사업 요직 두루 거쳐

    3세 체제를 맞아 삼성그룹은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삼성 ‘토박이’와 외부 인재가 삼성그룹 미래전략실(미전실), 삼성전자, 해외 사업부, 핵심 계열사에 고루 분포해 있다. 이 부회장 스타일에 맞게 국제 감각을 겸비한 ‘해외파’들도 뜨고 있다. 최지성(63) 미전실장(부회장)은 3세 체제를 상징하는 이 부회장의 대표 측근이다. 2010년 1월 삼성전자 대표이사(CEO·사장)를 맡아 최고운영책임자(COO·부사장)였던 이 부회장과 삼성전자를 투톱 체제로 이끌었다. 2012년 6월부터 미전실장을 맡아 매끄러운 3세 승계를 위한 마무리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올 5월 이건희 회장 입원 이후 매일 아침·저녁 두 차례 병상을 찾아 의식이 없는 이 회장에게 업무보고를 할 정도로 삼성그룹과 삼성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2001년 이 부회장이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돌입했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해 ‘멘토’, ‘가정교사’로도 불린다. 이 부회장은 2007년 1월 미국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최지성 당시 정보통신총괄 사장의 기자간담회 자리에 깜짝 방문해 친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삼성 특검 결과가 발표된 2008년 4월 이후 이 부회장의 ‘백의종군 시절’에도 해외 출장에 동행하며 줄곧 옆을 지켰다. 최 실장은 삼성전자의 4대 사업분야인 반도체, 모바일, TV, 디스플레이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무후무한 경력이다.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1981~1985년 회장 비서실(현 미래전략실) 기획팀에서 근무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삼성전자로 소속을 옮겨 삼성전자 반도체판매사업부장(1996~1998년), 디스플레이사업부장(1998~2003년), 디지털미디어 총괄(2003~2007년), 정보통신총괄(2007~2009년)을 맡았다. 외유내강형으로 승부근성이 독하기로 유명하다. 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1인 소장으로 일할 때 1000 페이지에 달하는 반도체 기술교재를 통째로 암기해 부임 첫해 반도체 10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는 일화도 자주 회자된다. 세계 각지에서 디지털 제품을 판다고 해서 ‘디지털 보부상’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최 실장 밑에는 이른바 ‘부산고 3대 천재’라는 장충기(60)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이 있다. 장 사장은 그룹 내 기획과 정보수집, 분석 등의 업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실무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삼성 컨트롤타워의 핵심이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삼성전자의 이상훈(59) 경영지원실장·이인용(57) 커뮤니케이션 팀장·김상균(56) 법무실장 등 경영지원파트 3인방은 이 부회장 ‘친위대’다. 삼성전자의 곳간을 책임진 최고재무책임자(CFO) 이상훈 사장은 1982년 삼성전자 경리과에 입사해 주로 재무파트에서 근무한 ‘재무통’이다. 1999년 2월~2002년 1월 삼성전자 북미총괄 경영지원팀장을 맡아 당시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던 이재용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전무를 단지 2년 만인 2007년 부사장, 2010년 사장으로 고속 승진해 삼성 3세 체제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다. 이 부회장의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인 이인용 사장은 MBC기자 출신으로 2005년 홍보팀장(전무)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올 5월 현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실시된 사장단 인사에서 김상균 사장과 함께 미전실에서 삼성전자로 옮겨왔다. 보통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일정은 미전실 커뮤니케이션팀에서 챙겼지만, 올 8월 올림픽 후원 연장, 9월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등 이 부회장 일정을 삼성전자 커뮤케이션팀에서 맡고 있다. 이 사장은 대외 소통을 강화해 삼성 비자금 사건 등으로 추락한 그룹 이미지를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반도체 공장 직업병 문제 등을 맡아 성과를 내고 있다. 22년 판사경력의 김상균 사장은 2005년 부사장으로 삼성에 발을 들여 삼성특검에 대응한 측근이다. 김용철 전 구조본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이후 인선이 까다로워진 법무조직 책임자를 10년째 맡고 있다. 김 사장이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이후 법무실은 국내법무팀, 해외법무팀, 준법지원팀을 비롯해 IP센터까지 산하조직으로 거느리게 됐다. IP센터는 2010년 애플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과의 특허 전쟁을 담당하고자 대표이사 직속으로 만들어졌다. 이종석(51) 삼성전자 북미총괄(부사장), 박재순(54) 중국총괄(부사장), 데이비드 은(47) 오픈이노베이션센터 부사장 등 ‘해외파’들도 뜨고 있다. 이 부회장이 국제감각을 중시하고 있어 앞으로 요직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사장은 올 7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린 ‘앨런앤코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동행하는 등 이 부회장의 북미 지역 동선을 함께하고 있다. 미국 코넬대 출신으로 P&G(샴푸제조사), 캘로그(시리얼제조사), 존슨앤드존슨(제약사) 등에서 근무하다 2005년 삼성전자에 합류했다. 박재순 부사장은 삼성전자 미국판매법인 상무를 맡고 있던 2007년 삼성전자 CCO(최고고객책임자)였던 이 부회장이 미국 등 해외 유력인사들과 교류할 때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입사한 데이비드 은 부사장은 이 부회장과 하버드대 동문으로 타임워너 통신그룹장을 맡았다. 이 부회장의 야심작으로 2012년 신설된 오픈이노베이션센터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계열사 사장단 중에는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이 부회장 시대 가장 각광받을 사람으로 꼽힌다. 멕시코, 미국 등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유학파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지만 이듬해 그만뒀고, 제너널일렉트릭(GE)에서 18년간 근무했다. GE에너지서비스 글로벌 영업총괄 사장 등을 지냈다. 2007년 삼성전자 고문으로 복귀한 뒤, 삼성전자 프린팅 사업부문, 삼성SDI, 삼성카드에 이어 삼성물산에서 네 번째 사장직을 지내고 있다. 삼성카드로 있을 때 ‘숫자 카드’를 출시해 파란을 일으킨 삼성의 대표 혁신가다. 미전실에서는 정현호(54) 인사지원팀장이 눈에 띈다. 이 부회장과 1990년대 말 함께 미국 하버드 대학을 함께 다녔다. 올 초 총장추천제로 지역차별 등의 논란을 일으키며 삼성그룹 채용제도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직후인 올 5월 인사지원팀장에 임명됐다. 주로 감사·재무 파트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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