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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녀 이원집정제 추구하면 박근혜 집권할 것”

    “남녀 이원집정제 추구하면 박근혜 집권할 것”

    “이제 여자가 집권할 때가 됐는데, 박근혜 혼자 나와서는 안 된다. 안철수, 정운찬과 보완하면서 남녀 이원집정제를 추구하면 5년 집권할 수 있다.” 시인 김지하(71)가 1985년 낸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를 ‘남조선 뱃노래’(자음과모음 펴냄)로 재출간한 기념으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미국식 자본주의 안에서 통용되는 사회주의를 찾아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복간한 이 책은 시인이 옥중에서 쓴 양심선언과 법정 최후진술, 산문과 강연내용 등이 수록된 책이다.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 등으로 잘 알려진 김지하는 1964년 대일굴욕외교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권 때 8년간 투옥되고 사형을 구형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여자가 집권할 때가 됐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발언을 했다. ●“서민의 삶과 정치를 융합시킬 정치인 나와야” 김지하는 “요즘 정치하는 사람은 아무 양심이 없다. ‘내가 대세다’ ‘원래 나는 똑똑하다’ ‘유신조차도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면서 자기를 거창하게 포장한다. 유치해서 못 보겠다.”며 정치인들의 최근 언행에 대해 욕설과 비아냥을 뒤섞어 쓴소리를 날린 뒤 “그런 사람들이 정치하면 어떻게 되겠나? 정치가 단수가 높아야 한다. 서민의 삶을 광범위하게 도덕적인 면까지 끌어올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올해 뽑힐 대통령의 자질은 서민 대중의 삶과 전문적인 정치, 두 개의 정치를 어떻게 융합시키는지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28년 만에 책을 복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시인은 원주에서 매일 산을 다니면서 “산과 산 사이에 나무도 비뚤어지고 개울도 시커멓게 더럽혀진 그늘진 곳”에 관심을 둘 택시비가 필요했다며 웃었다. ‘볼란타’로 불리는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500만원의 택시비를 썼고, 다시 500만원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어원은 모르겠지만, 불교에서는 이 못난 볼란타가 부처님 자리보다 더 편하다고 하고, 전라도 판소리의 중요한 핵심인 시김새의 원리를 볼란타에서 찾아야 한다.”며 “볼란타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쏟아나오는 희망과 같은 것으로, 가수 임재범 노래에서도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한류나 K팝 인기의 원인을 찾아가려면 시김새나 볼란타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죽기 전에 미학 책이나 쓰다 갈 것” 김지하는 “다음달 광주에서 ‘못난 숲으로부터 배우는 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할 예정인데, 죽기 전에 미학 책이나 쓰다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지자체들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언제로” 9년째 싸움만

    동학농민혁명의 국가기념일 제정이 지방자치단체 간 이견으로 미뤄지고 있다. 200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기념일을 제정할 수 있게 되고서 9년째다. 특히 지난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이달 말~다음 달 초 여론조사를 해 기념일을 정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전북 고창군 등이 강하게 반발했다. 1968년 시작해 올해로 45회를 맞은 황토현 축제를 하는 정읍시는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로 하자고 주장한다.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정규군을 상대로 최초로 대승을 거둔 날이고 이미 교과서에도 실려 가장 널리 알려진 날이다. 정읍시 관계자는 “현실·상징·대중·역사성을 고려할 때 국가기념일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창군은 무장봉기일인 4월 25일이 국가기념일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규모 농민군이 조직된 것은 동학 대접주인 당시 고창현에 있던 손화중의 힘이었고, 무장에서의 봉기는 동학혁명군의 모습을 갖춘 최초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고창군 관계자는 “여론조사를 하면 정읍에 유리할 것이 뻔하다. 역사적 의의를 놓고 따져야지 여론 조사에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동학혁명의 의의를 축소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부안군은 백산대회일인 4월 26일로 하자고 주장한다. 1만여명이 모여 군대조직이 만들어졌고, 군율이 생기고, 격문을 전국 곳곳으로 보낸 시점이 바로 백산대회라는 이유에서다. 그 밖에도 기념일 후보로 고부군수를 몰아낸 고부봉기일인 2월 11일, 전라도 수도인 전주성을 점령한 날인 5월 31일, 최대 격전을 벌인 우금치 전투일인 12월 5일 등이 후보다. 특히 전주성 점령일은 집강소를 통한 개혁이 단행된 날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최초로 민초들이 모든 권한의 주인으로서 역할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갑오년(1894년) 음력 1월 고부(지금의 전북 정읍시) 봉기로 발발해 같은 해 12월 전봉준 등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막을 내린 미완의 혁명. 그 정신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곡조에는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민초들에게 두고두고 양각으로 아로새겨진 이 기억은 그러나 권세가들에게도 특별했긴 매한가지다. 무수한 세도가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고 머리를 조아렸던 혁명이다. 그 정신을 오롯이 기리고 있는 전북 정읍·고창·부안의 동학로를 찾았다.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끝자락에 있는 황토현 전적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 위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즉, ‘폭정을 없애고 나라를 보존하여 인민을 안정하게 한다’라고 쓰여 있다. 동학농민군은 갑오년 음력 4월 7일 이곳에서 정규 정부군인 전라 감영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최대 승리한 것을 이렇게 기념했다. ●과거 권력자들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 1963년 10월 3일 제막식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박 의장은 “동학혁명은 부패·당파싸움·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에게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 그 정신은 길이 계승돼야 한다.”면서 “5·16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윤식(69) 고창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5·16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꼼수였다.”고 비판했다. 또 같은 목적으로 전두환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황토현 기념관·전봉준 장군의 동상 등을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농고에서 열린 13회 동학문화제에 참석한 이후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기념사업회장을 구속하고, 정읍군수·경찰서장을 직위해제했다. 박대길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선양팀장은 “군부정권이 행한 ‘정화사업’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적비 뒷산인 두승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배들평야, 서쪽으로는 부안군 백산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로 끝에서 황토현로, 말목장터로를 따라오면 배들평야 끝으로 만석보터가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 만석보를 만들어 군민들에게 물세를 물렸고, 이에 전봉준 등이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사발통문을 쓰고 농민들과 함께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잘사는 사회”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면, 고창은 동학농민군의 조직·사상이 잉태된 곳”이라고 고창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고창지역에 있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무장현에서 봉기를 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충청도는 물론 경상·강원·황해도 등 전국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손화중은 당시 최시형과 함께 양대 동학접주 중 하나였다. 이런 점에 주목한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길은 전봉준로, 녹두로와 함께 동학농민군로, 손화중로 등으로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그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만 꾸미고 오직 제 혼자 온전할 방법에만 힘쓰면서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다스려지리오’ 동학농민군로가 끝나는 지점인 전남 영광과 접한 무장현 봉기 장소에 있는 기념비에는 당시 만들어진 이 포고문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정부관료들에게 훈계해도 될 법한 글귀다. 농민이기도 한 진 소장은 “무장포고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은 서푼어치라도 매년 오르지만, 쌀값만은 십수년째 16만원 내외로 같은 값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을 경시하고 있다.”면서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국민평균소득 정도는 벌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118년전 동학농민군이 이루고자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회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민란 아닌 혁명인 이유는 ‘인권중시사상’ 과거 고부군에 속했고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 백산(白山). 이곳에서 열린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 중 하나다. 해발고도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인 백산은 사방이 평야지대에 홀로 솟아 시야 확보가 쉽고, 호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정읍 배들평야 쪽에서 이곳 백산까지가 동학로라 이름 붙여졌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갑오년 음력 3월 25~26일 1만명 가까운 농민군이 모였다. 전봉준 장군을 총대장으로 조직이 재편됐고 호남·호서 일대에 격문이 나붙었다. 백산에서 농민군 군율인 4대 명의·12조 기율도 제정된다. 왜 동학농민혁명이 ‘민란’이 아닌 ‘혁명’이었는지, 이 군율에 나타난다. 4대 명의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는 내용이, 12조 기율에는 ▲항복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한다 ▲곤궁한 사람은 구제한다 ▲굶주린 사람은 먹여준다 ▲도주하는 사람은 쫓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진휼한다 ▲병든 사람은 약을 준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한 달 뒤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도 수도인 전주성 점령까지 승승장구했다. 이런 백산에서의 기억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부안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직접 계승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았다. 정재철 백산고 국사교사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부안에 저항정신·애향심으로 남아 있다.”면서 “그 힘으로 2003~2005년 2년 2개월여 전 군민의 방폐장 반대 시위를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세 지역 중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가장 활발한 곳도 역시 부안이다. 상서면 호암수도원에는 천도교 교구가 설치돼 있고, 주기적으로 집회가 열린다. 민관이 함께 통치하는 집강소를 세우는 등 새 시대를 열어가던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음력 11월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급격히 쇠퇴한다. 한 달 뒤 전봉준은 옛 친구의 밀고로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고, 이듬해 을미년 음력 3월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말에 민초들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가보(甲午·1894년)세. 가보세. 을미(乙未·1895년)적 을미적 병신(丙申·1896년)되면 못 가보리’ 혁명이 성공했다면 달랐을까. ‘동학로’라 이름붙여진 서로 다른 길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농촌길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이 지역 쌀 생산은 전국 최고지만, 농민들의 소득은 여전히 밑바닥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0회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 약수로를 소개합니다.
  •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통섭의 시대에 춤과 소리와 이야기를 아우르는 큰 별이 스러졌습니다.” 전통 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예술감독은 고(故) 공옥진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한과 해학을 담아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 창무극’의 창시자이고 곱사춤과 동물춤으로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인이기도 했다. ●최승희 일본집서 문틈으로 춤 배워 호적으로는 1933년생이지만 고인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공대일(1910~1990) 선생이고 아버지의 팔촌형 공창식(1887~1936)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으뜸가는 소리꾼이자 명창 임방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라도 유명 예술인 집안에서 자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환경에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접했다. 아버지에게는 단가(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하는 짧은 노래)를 배웠다. 단가를 모두 뗀 뒤에야 사설을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 때문에 사랑채 심부름을 하거나 부엌에서 흥얼거리면서 판소리 사설을 익혔다. 일곱 살쯤에 옥진은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본으로 가던 ‘신무용의 대가’ 최승희 선생에게 아버지가 1000원을 받고 부엌데기로 판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강제 징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옥진은 최승희의 일본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문틈으로 춤을 배웠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고, 열일곱 살에 경찰관과 결혼했다. 6·25전쟁 통에 경찰관 가족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야속한 세월 견디며 삶의 애환을 예술로 전쟁 뒤에 딸을 하나 낳아 어엿한 가족을 꾸리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동네 처자와 눈이 맞아 버렸다. 미련 없이 딸을 둘러업고 집을 나와 세상과 맞닥뜨렸다. 절에 얹혀살면서 스님들 밥을 지어 주고 때때로 절 뒤편에서 즐거운 일, 슬픈 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 울었다. 1960년대에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 단체에 참여하면서 무대를 만들었다. 야속한 세월을 견디면서 몸에 익은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풀어낸 것이 ‘1인 창무극’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 공연에서 첫선을 보인 ‘1인 창무극’은 그야말로 ‘빅히트’를 쳤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은 수십년간 서민을 웃기고 울렸다. 그 후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 공연하면서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는 ‘1인 창무극’ 전성기였다. 1995~1996년 서울 대학로 두레극장 공연에서는 500석 공연장에 1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쯤이면 국악계 어르신으로 대접을 누릴 만도 한데 고인은 한사코 호텔 숙식을 거부했다. 최고의 스타였지만 올 때마다 김치를 담아 와 제작진을 일일이 불러 먹이는, 그저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서울 종로3가에 있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에서 늘 묵었고 함께 올라온 아주머니와 직접 밥을 해 드셨어요. 방값도 못 내던 무명의 서러움을 생각하면서 이만큼이나 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면서요.” 당시 공연기획을 한 진옥섭 대표의 말이다.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8년 고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듬해 ‘1인 창무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0년이 지난 2009년 재신청을 할 때는 건축물이 주로 대상이 되는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 2010년 무형문화재로 인정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가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되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2010년 6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고인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 온 힘을 다해 생애 마지막 춤을 췄다. “공옥진 선생 하면 ‘곱사춤’부터 떠올려요. 하지만 이건 본질이 아닙니다. 곱사춤은 심청가에 나오는 맹인잔치에서 공 선생이 표현한 많은 맹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곱사춤이나 동물춤은 공 선생만이 할 수 있고 그분밖에 못 하는 ‘1인 창무극’의 일부인 거죠. 어떤 공연을 봐도 관객의 눈물과 콧물을 쏙 빼는,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느냐면서 웃겨주는 명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게 우리 문화계에는 큰 상실일 겁니다.” 빈소는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로 잠정 결정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삼남길’ 경기구간 9월 개통

    ‘삼남길’ 경기구간 9월 개통

    한양부터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까지 이어졌던 ‘삼남길’ 의 경기도 첫 구간이 9월 개통한다. 경기도, 수원·화성·오산시, 코오롱스포츠, 아름다운 도보여행 등 7개 기관은 3일 경기도청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협약을 맺었다. 개통되는 삼남길 구간은 수원∼화성∼오산 간 50㎞다. ●도보탐방위한 역사문화콘텐츠 발굴 남태령을 지나 경기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충청·전라·경상도를 연결하는 삼남길은 조선시대 10대 대로(大路) 가운데 가장 긴 보도 구간이었다. 7개 기관은 앞으로 삼남길 운영, 유지관리, 홍보 등에 공동 협력하게 된다. 삼남길 경기구간은 정도전과 정약용이 나주와 강진으로 유배를 가면서 걸었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융릉)에 가기 위해 자주 이용했다. ●내년 4월 과천·안양 등 전구간 개통 도는 옛길 복원사업으로 주민들에게 ‘길’을 통해 생활공간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한편 도보탐방객의 증가로 체험형 관광수요 확대, 민박 및 토산품 등 지역밀착형 소비 증가 등의 경제적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기도는 이번 3개 시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내년 4월에는 과천, 의왕, 안양, 평택 등 경기 삼남길 나머지 구간을 개통할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의주로(연행길), 영남로(사행길), 경흥로 등 경기도 관통 6대로를 모두 복원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옛 대로를 오롯이 되살려 옛길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콘텐츠를 더 발굴하고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개척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선택! 역사를 갈랐다] (17) ‘실학거성’ 정약용 & ‘북학거두’ 김정희

    다산(茶山)과 추사(秋史)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다. 한 사람은 조선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인물로 추앙받고, 한 사람은 북학(北學)의 종장으로 일컬어진다. 중국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다산, 청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인을 스승으로 삼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우고 좋아했던 추사,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삶이 달랐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당색(黨色)마저 달랐으니 애초부터 가까이 지내기엔 서로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추사는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가까운 친구였고 선배인 다산을 존경했다. 다산 사후에는 다산의 제자들이 추사의 문하를 수시로 출입하며 교유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삶이 다르면서도 닿아 있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죄인의 몸이 되어 유배형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배의 설움 글로 푼 정약용 대대로 문한(文翰)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은 정조 임금의 총애를 온몸으로 받았던 신하이자 제자였다. 그런데 출세가도를 달리던 다산에게 시련이 닥쳤다. 젊은 시절 천주학(天主學)에 관한 책을 읽고 연구했던 게 화근이었다. 다산의 집안에는 형님과 매형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호기심 많던 다산이 천주학에 관심을 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에 다산은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천주학과의 인연을 끊지만, 젊은 시절 그가 한때 마음을 두었던 천주학은 결국 인생의 항로를 바꾸고 만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 천주학에 몸담았던 사실은 점점 다산의 목을 겨누는 칼로 변해갔다. ●든든한 후원자 정조 죽자 유배생활 시작 상황이 악화되자 다산은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1800년 봄의 일이었다. 얼마 후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은 다음해 2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10월에 상경하여 재조사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고 만다. 죄인의 몸이 되어 강진을 찾은 다산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동문 밖 술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동천여사(東泉旅舍) 뒷골방인 사의재(四宜齋)였다. 이곳에서 1806년 여름까지 지냈다. 1805년 겨울은 승려인 아암(兒庵)의 배려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지냈다.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1년 남짓 살았다. 이렇게 떠돌던 다산은 1808년 봄부터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렀다. 다산은 유배생활 대부분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일로 보냈다. 누구보다도 승려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고 차(茶)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강진에 도착한 다음해 봄부터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저술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폐인이 될 지경이 되었고, 시력은 나빠져 늘 안경을 끼고 살았다. 다산이 그렇게 저술에 매달린 것은 폐족(廢族)이 되어버린 자신의 가문과 자신을 구원할 길이 오직 저술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이로써 죄인의 오명을 벗어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폐족 벗어나기 위해 두 아들의 학문정진 강조 한편으로는 두 아들에게 수시로 훈계의 글을 써 보내 공부를 강조했다. 청족(淸族)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존경을 받게 되지만, 폐족이 된 마당에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천시하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자포자기하면 자신의 저술이 후대에 전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자신의 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관청의 문서만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끝내 죄인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절박함은 다산으로 하여금 50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배의 恨 서화로 푼 김정희 김정희의 증조부는 영조 임금의 사위였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왕실의 한 구성원인 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였다. 1810년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온 뒤로 북학의 종장으로 성장하였다. 연경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유하기를 희망하였고,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이미 동아시아 최고의 석학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親청’ 추사, 反청 다산 선배로 여기고 후학들끼리 교류도 그러나 김정희가 45세 되던 1830년에는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40년에는 그 자신마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모두가 정쟁 속에서 빚어진 일들이었다. 평생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음식은 거칠어 목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날씨는 맞지 않아 걸핏하면 앓아누웠다.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해, 추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의 부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김유근은 추사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가장 큰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김유근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로 추사는 미쳐버린 듯, 정신이 나가버린 듯하였다. 하늘을 향해 혀를 차고 밥상을 대하면 수저를 드는 것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돌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하고 대못이 가슴에 박혀 있는 듯하여 몰골은 날마다 말라가고 정신도 따라서 나가버린 것 같았다. 슬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추사는 두 번째 아내인 예안(禮安) 이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의 친구들과는 소식도 점차 끊어졌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그런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추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그 덕분에 몸은 제주에 있었지만, 중국 소식을 손금 보듯 하며 지낼 수 있었다.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는 이상적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이상적의 행동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그림에 담아 이상적에게 선물하였다. 그렇게 ‘세한도’가 탄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바로 9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탄생하였다. 추사 또한 평생 수많은 저술을 하였고, 유배기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자신의 저술을 두 번에 걸쳐 불에 태워버렸다. 그가 남긴 것은 그의 혼이 담긴 서화뿐이었다.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 활발한 학술행사 열려 18년 유배생활을 저술로 보냈던 다산, 9년 유배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 이들의 삶은 이렇게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밖으로 풀어내 책을 지었고, 또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붓 끝에 모아 서화로 표출했다. 올해는 다산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곳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행사가 열린다. 다산의 바람대로 죄인이라는 오명은 오래 전에 씻어졌다. 이제 다산을 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500권의 저술을 남긴 위대한 학자로서의 명성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산의 치열했던 삶이 온전히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철상(고서연구가)
  •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선택! 역사를 갈랐다] (16) 연산군과 김일손

    세조의 치세가 열리는 길목은 가파르고 무서웠다. 많은 죽음이 널렸고, 한때의 임금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목숨을 빼앗기고 제사도 받지 못하였다. 또한 문종의 현덕왕후까지 ‘왕이 아닌 자의 어미’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문종에 앞서 소릉에 묻혔기 때문에 ‘소릉폐치사건’이라고 한다. 공포와 쇠락의 시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일탈과 분노의 서사였다. 세조의 공신들은 정변과 찬탈의 전리품을 즐겼다. 유학의 수기치인과 의리명분을 벗어난 화려한 외도였다. 역사의 상흔을 감추고 기억을 억압하였다. ‘사관의 이름을 적으면 바른 사초가 어렵다.’라고 말하는 관료들도 죽였다. 또한 남이의 옥사와 성종 즉위를 빌미로 공훈을 보탰다. 이들에게 세조는 ‘불세출의 중흥주’였다. 1478년(성종 9) 4월 이심원이 세조 공신의 퇴진을 상소하고, 이레 후 남효온은 소릉복위를 주장하였다. 철벽같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누구도 말하지 못한 금기를 들춘 것이다. 이심원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종친이며, 남효온은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개국공신 남재의 후예였다. 이 둘은 평소 친분이 깊었고, 논지는 서로 연속하였다. 새 정치 질서를 모색하자면 진실을 밝히고 상흔을 치유하자는 바람을 담았다. 기억운동, 역사운동의 시작이었다. ●왕실의 분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다 남효온이 세조의 최대 흠결을 적시하며 국가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할 즈음 왕실은 원자를 낳은 중전 윤씨 문제로 분란에 휩싸였다. 중전 윤씨는 결국 폐서인되어 사저로 쫓겨났다가 3년 후 환란의 싹을 자른다는 포고문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원자가 7살이던 1482년 8월 세자 책봉이 있기 반년 전이었다. 폐비의 묘는 버려지고 제사도 없었다. 1489년 5월 수호와 제사에 관한 방침이 처음으로 정해졌다. 수령이 주관하였으며, 기일제(忌日祭)가 아닌 명절의 속절제(俗節祭)였다. 물론 묘호나 사당도 없었다. 다만 제례의 물품만은 ‘죽은 왕비’의 예로 하였다. 세자의 마음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미래의 국왕을 배려한 고육책이었다. 폐비 윤씨를 제사지냈던 그해 겨울 남효온이 경상도 의령에서 ‘육신전’을 탈고하였다. ‘사육신충신론’이었다. 이듬해(1490) 3월 김일손은 경연에서 “노산군은 유약하여 책무를 이기지 못하였을 뿐이지 종사에 죄를 짓지 않았음”을 이유로 입후치제(立後致祭)를 건의하였다. 이때 무오사화로 밝혀진 사초를 작성하였다. “노산군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려서 한 달이 지나도 거두는 자가 없자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짊어지고 달아나서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 ‘세조실록’의 ‘예로서 장사 지냈다.’는 사론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김종직이 과거 들기 전에 꿈속에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충분(忠憤)을 부쳤다.’는 평가와 더불어 ‘조의제문’ 전문을 옮겨 놓았다. 또한 현덕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고는 사초에 “소릉의 관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적었다. 몰래 살폈던 길 위의 노래, 억압된 기억과 기록을 사초에 담았던 것이다. 왕조실록에 실리면 노래는 불멸의 증언이 되고 야사는 국가의 정사가 된다. ●치유와 화해로 미래를 열어야 김일손은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1486년 식년문과에 제출한 ‘중흥대책’(中興對策)은 인구에 비장하였다. 여기에 역대 왕조의 일치일란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면서 당대를 ‘중쇠’(中衰)로 규정하였다. 중쇠에서 중흥의 기회로 삼는 길은 간명하였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걷어내야 비로소 기강과 법도가 찬연하게 수복되고 예악문물이 가지런히 거행되고 마침내 중흥할 수 있다.” 즉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한 것이다. 재야의 역사운동이 조정에 점화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역사운동은 과거로 돌아가기가 아니라 과거에서 교훈 찾기였다. 김일손은 심온 일가를 멸문시키고도 중궁 심씨는 끝까지 보전한 태종의 도량을 새삼 되살렸다. 또한 두 왕자를 부왕에게 희생된 방번ㆍ방석의 후사로 삼아 제사 지내게 하였던 세종의 인정과 고려 왕씨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숭의전을 세운 문종의 관용을 추앙하였다. 그만큼 좋은 정치, 어진 임금을 향한 바람이 컸던 것이다. 남효온도 사육신을 희생시킨 세조를 광명의 군주로 리메이크하고 싶은 염원이 강렬하였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을 지키며 강호에 물러나 살게 하였다면, 상왕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치세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운동은 증오와 분열을 마감하고 화해와 미래를 향한 소망을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다. 세자는 처음부터 국왕 수업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부를 싫어하고 환관들과 희롱하기 일쑤였다. 장성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부왕의 훈계가 두려워 시강원에 나가더라도 건성이었고, 관료가 공부라도 독려할라치면 얼굴을 찌푸리며 배척하였다. 기본경전 ‘사서’를 멀리했다. 읽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방대한 ‘명신언행록’을 뒤적일 따름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유희는 심해졌다. 성종도 걱정이 많았다. 인정전 연회에서 우찬성 손순효가 반쯤 술에 취하여 용상 아래 엎드려 무언가를 아뢰고 임금도 몸을 굽혀 화답한 적이 있었다. ‘성종실록’ 21년 8월 22일 기사인데, 너무 소리가 작아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폭군의 맨얼굴 신왕은 경연에 소홀하고 국정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생모의 추복에 적극적이었다. 먼저 영사전(永思殿)에서 기일제를 지내고 분묘를 천장하고 ‘회묘’(懷墓)라 하고 ‘효사묘’(孝思廟)를 지었다. 신왕 즉위 6개월, 김일손은 시무개혁안 26조를 올렸다. 이때 국왕의 마음 공부를 기본으로 ‘내수사 혁파’ ‘공물 감액과 공안 개정’ ‘사관제도 확대’ ‘제조제의 혁파’ ‘천거제의 확대’ ‘어진 종친의 발탁’ 등을 제안하였다. ‘경국대전’을 보완하는 구상으로 차세대 기묘사림도 개혁과제로 삼았다. 물론 소릉 복위도 포함하였다. 신왕의 반응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김일손은 멈추지 않았다. 왕실 전래의 불교의식인 수륙재 반대에 앞장섰다. 이단을 반대한다는 것보다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복을 빌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외척을 우대하는 인사방침이나 폐비 제사도 반대하였다. 신왕은 싸늘했다. “총명을 조작하며 옛 법을 어지럽히지 말라.” 또한 “김일손은 나를 용렬하다고 여겨서 섬기려 하지 않을뿐더러 임금을 아끼는 마음도 없다.”고 비난했다. 결국 김일손은 소릉복위소를 마지막으로 조정을 떠났다. 1498년 봄 모친상을 끝낸 김일손은 고향 청도를 떠나 함양 남계로 옮겼다. 정여창이 살던 마을에서 멀지 않게 정사를 마련하고 서로 강론하고자 함이었다. 김일손은 여기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국왕은 모질었다. 처음에는 사초에 나오는 궁중 비사의 출처와 이유를 캤다. 그러다가 추국 3일 만에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풀이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김일손 등은 능지처사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였다. 또한 수기철학을 실천하던 도학자까지 난언과 붕당죄로 걸렸다. 무오사화는 왕실과 훈구세력의 비판 언론과 실천 도학에 대한 국가폭력이었다. 정국은 일순 얼어붙었고 국왕은 정국주도권을 틀어쥐었다. 그래도 뜻대로 폐비 복위는 쉽지 않았다. 많은 신료가 성종의 유지를 내세워 반대한 것이다. 겁박으로 제헌(齊憲)란 시호를 얻어내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높였다. 그리고 폐비사건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신료에게 보복하였다. 그동안 무오사화를 처결하고 폐비 추숭을 진행한 윤필상 등 훈구원로나 이미 세상 떠난 세조의 으뜸 공신 한명회까지 참화를 입었다. 또한 국왕의 뜻을 거슬렀던 삼사언론을 ‘능상’(上)으로 처벌하였다. 국왕은 스스로 공도(公道)의 주인임을 포기하였다. 과거로 인재 뽑듯 ‘흥청망청’ 각처 기생을 끌어오는 ‘도가니’ 세상을 연출한 것이다. 민심이반은 심각하고, 군신관계는 결딴났다. 신하들은 묵언패를 걸고 전전긍긍, 생존게임이 벌어졌다. ●자신을 세우지 않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다 국왕 재위 12년 여름 전라도에서 유배객 김준손·이과·유빈 그리고 옥과현감 김개 등이 반정의병을 준비하였다. 9월 15일 남원 광한루에 출정하기로 하였다. 도성의 성희안·유순정에게도 알렸다. 반정과 반란의 길목에서 혼선을 막고 경중 호응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9월 1일 김개가 격문을 가지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여의치 않으면 진성대군을 호위하여 내전에 대비할 요량이었다. 바로 이날 밤, 도성의 반정세력이 궁궐을 장악하였다. 인심을 잃으면 임금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일대 사변, 중종반정이었다. 국왕은 연산군으로 강등되어 쫓겨났다. 그런데 전라도의 거사에 앞장선 김준손은 김일손의 백형이었다. 연산군과 김일손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과 방향이 정반대였다. 선택과 방식도 천양지차였다. 김일손이 진실을 통하여 상흔을 치유하고 미래가치를 지향하였다면, 연산군은 개인적 분노와 욕심으로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며 보복하였다. 한편은 관용의 진보이며 다른 한편은 파괴의 퇴행이었다. 이렇게 갈리는 근본은 무엇이며, 교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극기복례, 수기처신(修己處身)의 마음 공부가 아닐까? 이종범(조선대 사학과 교수)
  • [연극리뷰] ‘봄의 노래는… ’

    [연극리뷰] ‘봄의 노래는… ’

    1막은 잔잔했고 2막에선 감정이 휘몰아쳤다. 휴머니즘에 강한 재일교포 극작가 정의신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던 그의 2012년 신작,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가 그렇다. 작품은 일제강점기 조선 남도의 외딴섬에 있는 홍길이네 이발소의 가족과 그곳에 주둔 중인 일본군, 조선인이지만 일본 헌병에 자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에 희생된 자들의 아픔을 말한다. 1막은 평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액자구조 형식을 취한 연극은 백발의 노인이 된 영순과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혼으로 부인 영순 곁을 맴도는 홍길의 대화로 시작된다. 68년 전 이들은 바다 내음이 봄의 남풍을 타고 코를 찌르던 지금의 봄과 같은 절기에 이뤄진 둘째 딸 미희의 결혼식을 떠올리고 극은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홍길이네 가족의 과거는 따뜻하면서도 아프다. 홍길과 영순에게는 왼쪽 발이 부러져 발목이 90도 정도 돌아간 절름발이 진희, 가수를 꿈꾸며 일본 부대의 클럽에서 노래하는 둘째 딸 선희와 그녀의 전 남편 춘근, 남편 만석이 자신보다 큰언니 진희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늘 질투하는 셋째 딸 미희, 당차고 사회 의식이 강한 넷째 딸 정희가 늘 곁에 있다. 홍길이네 이발소에 오가는 사람 중엔 홍길이네 가족 외에도 전쟁터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일본군 중좌 시노다, 조선인이지만 어려운 집안 살림을 일으키고자 일본 헌병에 지원해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에게 미움받는 대운이 있다. 2막 대부분의 장면에선 정의신 작가 특유의 눈물샘 자극 효과가 발동된다. 공연 시간 내내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일화가 주변 경계인, 가족, 한·일 양국의 역사, 그 역사 속에 희생된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일본군 기지를 폭파하려다 정희가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평화롭던 홍길이네 가족에게 위기가 닥치고 정희로 인한 슬픔을 토해 내는 영순 역의 배우 고순희가 선보이는 눈물 명연기는 관객의 눈물까지 훔치게 한다. 작품은 관객을 적절히 웃겼다 적절히 울린다. 연출은 관객에게 아예 맘껏 울라는 듯 슬픈 장면이 끝나면 비교적 긴 암전 시간에 애절한 음악을 흘려보낸다.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다. 한쪽 다리가 절단된 연기를 펼치는 시노다 역의 배우 서상원은 2시간 가까이 한쪽 다리를 접어 고정한 채 목발에 의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가끔 등장하는 가족들의 몸싸움 장면에선 모든 배우들이 몸을 아끼지 않는다. 음주 연기도 실제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며 때론 격한 감정을, 때론 정감 있는 모습을 보이는 배우들의 감정선도 풍부하다.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는 7월 1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다. 전석 2만 5000원. (02)758-2150.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조선 후기 콘텐츠의 보고 ‘임원경제지’ 개관서 나왔다

    조선 후기 콘텐츠의 보고 ‘임원경제지’ 개관서 나왔다

    ‘조선판 브리태니커’로 불릴 만한 조선 후기의 실학서 ‘임원경제지’의 개관서가 최근 나왔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 후기 실학자 풍석 서유구(徐有?·1764~1845)가 30여년에 걸쳐 쓴 책으로 총 54책 113권에 2만 8000여 가지의 지식을 담았다. 흔히 농경서로 알려졌지만, 조선 후기 실용백과사전이라고 보는 것이 책의 성격에 더 가깝다. 농사, 경제, 축산, 의학, 문학, 상업, 의례, 공업, 건축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의학을 기술한 ‘보양지’와 ‘인제지’ 부분은 광해군 때 완성된 허준의 ‘동의보감’과 비슷한 규모다. 단일 저작으로는 조선 최대의 저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방대하고, 전문적이다 보니 필요에 따라 일부만 번역됐을 뿐 책 전체가 번역된 적은 없다. ●서유구, 정약용과 비견될 ‘실학 대가’ 이번에 나온 ‘임원경제지 개관서’(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는 이같이 방대한 임원경제지의 구성과 구조 등에 대해 해제를 달고, 왜 중요한 책인지를 대중적으로 설명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풍석 서유구는 어떤 사람인지, 실학의 대가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비교할 때 임원경제지는 어떤 수준인지 등이 들어 있다. 고려대 유전공학과를 나와 이 책의 번역에 벌써 10년째 매달리고 있는 정명헌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2003년부터 학자 42명이 번역에 참여해 3년 동안 초벌 번역을 마쳤다.”면서 “2014년 3월 번역 완간을 목표로 정본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본으로 만든 뒤 초벌 번역한 것을 교정해 나가면 전집 55권으로 나오게 된다. 정 소장은 “정약용은 89학번, 서유구는 90학번으로 같은 시대의 실학자”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정조가 사랑한 ‘초계문신’으로, 정약용은 1789년에 갑과 2위로, 서유구는 1790년 병과 14위로 과거를 통과해 관리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는 시경 강의에서 500개의 시험문제를 제시하는데 정약용의 답변 중 채택된 답변은 117개로 채택률 20.2%이고, 서유구는 181개의 답변이 채택돼 31.3%에 이른다. 과거시험 결과는 정약용이 더 똑똑했지만, 시경 강의 답안 채택률을 보면 서유구가 더 똑똑했다. 이렇게 똑똑한 서유구는 벼슬을 살다가 작은아버지 서형수의 전라도 유배 등으로 벼슬이 떨어지고, 1806년 고향인 경기도 장단으로 낙향해 18년간 임진강변 장단에서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며 저술에 들어간다. 이때 그는 경학보다 실용 학문에 심취한다.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실용 기술들은 대체로 서유구가 직접 해보고 써넣은 것으로 보면 된다. 논에 물을 대는 데 사용하는 ‘자승차’(自升車) 같은 큰 기구부터 베개 만드는 법, 밭의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생산량을 늘리는 법, 다양한 재료로 만드는 술과 음식에 관한 정보 등 구체적인 지식을 담았다. 다시 그가 벼슬에 나간 것은 1823년이다. 조선 후기 경학의 대가답게 규장각 제학과 예조판서, 호조판서, 홍문관 제관과 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다. 아쉽게도 정승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또한 벼슬길에 다시 올랐을 때 귀향해 자신이 보고 겪고 느꼈던 조선 후기 가난한 국가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서울의 세도가,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던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사대부들이 일상을 개혁하면 국가 경제와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지만 정책을 통해 빛을 보지는 못한 것이다. 임원경제연구소의 민철기 번역팀장은 “임원경제지는 조선 후기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어 전통음식 복원, 신약 개발, 드라마·영화의 문화 콘텐츠, 테마파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고”라고 말했다. ●전액 민간 후원금으로 번역작업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현재 학문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책은 모두 252만자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 서유구가 중국·일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을 아주 정확하게 기록했고, 인용이 부실한 대목도 명확하게 지적해 놓았다. 그 결과 서유구가 직접 자신의 생각과 기술을 저술한 부분이 46만 9000자로 전체 책의 18.6%라고 밝혀 낼 수 있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학자들이 박사 학위 논문을 무작위로 베끼고, 자기 복제를 반복하는 행태와는 아주 다른, 엄격한 학문 태도다. 책의 번역에는 도올 김용옥의 제자들인 다양한 전공자와 직업인들이 매달리고 있다. 고전번역원이 아니라 전액 민간 후원금으로 진행된 점도 특이하다. 일본 오사카 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에 있는 ‘임원경제지’ 초고, 고려대·연세대·규장각의 필사본을 종합해 정비하고, 분야별로 초벌 번역을 마치는 데 10억원이 들었다. 번역 완간까지 25억원 정도가 더 필요하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장르 불문 팔도 사투리 선생님, 황영희

    [김정은 기자의 백스테이지] 장르 불문 팔도 사투리 선생님, 황영희

    연극,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사투리 연기에 도전하는 배우들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으로 꼽는 이가 있다. 바로 전국 팔도 사투리의 달인, 연극배우 황영희(43)다. 그녀에게 사투리를 배운 ‘제자’들은 유명 배우부터 단역 배우까지 폭넓다. #신애라 ‘아이스께기’ 전라도 사투리 ‘전수’ 2008년 배우 고수가 공익근무를 마친 뒤 복귀 무대로 선택한 연극 ‘돌아온 엄사장’에서 보여준 맛깔나는 사투리는 황영희로부터 며칠동안 1대1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졌다. 2006년 배우 신애라가 생애 첫 영화 ‘아이스께기’에서 보여준 정감있는 전라도 사투리 또한 황영희의 ‘가르침’이었다. 서울이 고향인 신애라는 지역별 사투리조차 구별하지 못했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사투리는 일품이어서 사투리 선생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낳았다. 전남 목포 출신인 황영희는 팔도 사투리를 현지인처럼 구사한다. 술을 마시면 전라도 말과 경상도 말을 뒤섞어 말하는 스스로가 신기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녀는 12일부터 서울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오르는 재일동포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의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의 사투리 작업에 참가했다. 가수들이 음반작업을 할 때 녹음 전 작곡가들이 가이드송을 불러주듯, 대부분의 대사가 사투리인 이 연극의 전체 대사를 휴대전화에 녹음해줬다. 황영희는 “경상도 배우에게 전라도 말을 가르치니 굉장히 어렵더라. 역시 전라도와 경상도의 벽은 높구나 싶었다.”면서 “몇 년 전부터 극단이나 사투리 연기로 오디션을 받아야 하는 배우들이 찾아와 저에게서 사투리를 배워가곤 한다.”고 말했다. 배우 봉태규의 여자친구로도 유명한 배우 이은 등이 드라마 오디션을 앞두고 그녀에게 속성으로 사투리를 배웠다고 한다. 사투리를 지도하거나 표준어로 된 대본을 사투리로 바꿔준 작품도 수십 개에 이른다고. 얼마 전 두산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던 연극 ‘목란언니’에선 북한 여성 조대자 역을 맡아 북한 사투리까지 멋들어지게 구사해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다양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황영희는 “사투리 연기를 위해 틈날 때마다 각 지역의 재래시장을 찾아 말투를 익히려고 한다. 이 방법은 사투리를 배우는 데 효율적”이라면서 “지역 사람들이 많이 나온 다큐멘터리도 분석하며 본다. 꼭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특이한 말투를 지닌 사람들은 면밀하게 관찰해 특징을 뽑아낸다.”고 설명했다. #각 지역 재래시장 돌며 연구 ‘사투리의 달인’이란 소문이 나면서 곳곳에서 자문 역할을 했지만, 정작 서운할 때가 있단다. “배우들에게 사투리를 가르치라고 할 게 아니라 저를 캐스팅하면 다른 배우들에게도 공짜로 사투리를 가르쳐 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캐스팅은 안 한다.”며 익살도 부린다.. “작은 재주이지만 저만의 장기를 살려 연극에 도움을 주는 자체로 행복하다.”는 그녀의 웃음이 정감 깊다. kimje@seoul.co.kr
  • [29일 TV 하이라이트]

    ●대장경 천년특집 다르마 제4편(KBS1 밤 11시 35분) 지리산 쌍계사는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잇는 절이다. 이곳에서는 여름철 3개월 동안 일절 외부 출입을 하지 않고 수행에만 몰두하는 하안거가 시작된다. 20대부터 50대 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비구 승려들은 먼저 3개월간 살림을 꾸려 갈 자신의 임무를 배정받는 의식을 치르고 선방에는 첫 죽비 소리가 울려 퍼진다. ●프랭키와 친구들(KBS2 오후 5시) 딸기가 없어진 딸기밭에서 프랭키와 친구들이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수색전을 펼친다. 도마뱀 리자에게 큰 발자국을 남기고 간 검은 숲 괴물에 대해 듣게 된다. 그 괴물을 찾아 동굴까지 온 프랭키와 친구들. 그런데 알고 보니 괴물이 아니라 딸기가 시들까 봐 시원한 동굴에 딸기를 보관해둔 빅풋이라는 착한 친구였다. ●그대없인 못살아(MBC 밤 8시 15분) 지수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촬영을 하게 된 민도. 도희는 철없는 동생 민도가 안타깝지만 마음과는 달리 툭툭거린다. 풍기는 인자의 잔소리를 피해 밖으로 나와 풍봉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한편 인자네 가족 행사가 엉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자는 인자에게 전화를 걸어 약올리듯 위로한다. ●문화가중계(SBS 낮 12시 30분) 클래식, 국악, 뮤지컬, 무용, 팝,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질 높은 공연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날로 높아가는 시청자들의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여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또한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에 잠시나마 휴식을 제공하고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키며 메말라 버린 감수성을 찾아본다. ●한국기행(EBS 밤 9시 30분) 다이아몬드제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암태도 서쪽에는 여객선이 닿지 않는 섬 속의 섬이 있다. 6000여개 돌로 만들어진 징검다리 노두를 통해 350년 전부터 본섬인 암태도와 왕래했던 추포도다. 여의도 면적 반만 한 크기에 인구 80여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노두에 대한 작은 추억을 갖고 있는데…. ●가족(OBS 밤 11시 5분) 40세 동갑내기 부부 유부현·박현주씨. 이들은 결혼 생활 7년차에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52일간 국토종단을 시작했다. 국토종단을 계기로 가장 가까운 것도, 가장 의지가 되는 대상도 가족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부부. 그 후로 가족이 늘 함께할 수 있는 귀농을 선택했고 충북 영동의 산골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 태백 이어 이번엔 경남에서… 1361명 연루 초대형 보험사기

    경남 창원시에서 2007년부터 5년간 무려 1361명이 총 95억여원의 보험금을 부당하게 타낸 조직형 보험사기가 적발됐다. 지역의 유명병원 3곳이 연루됐으며 주로 40·50대의 주부들이 허위 입원 등을 통해 보험금을 받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사기 혐의자 1361명 중 24%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금융당국은 경찰에 수사의뢰했으며 경찰 조사결과에 따라 400여명이 연루된 ‘태백사기사건’을 뛰어넘어 역대 최대 사기사건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창원시 일대 병원 3곳을 무대로 활동한 총 1361명의 보험사기 혐의자를 적발했다고 17일 밝혔다. 이들의 보험사기 규모는 95억 1500만원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창원 인근 3개 병원이 환자 1명당 10만~20만원을 브로커에게 지급하고, 환자는 브로커에게 보험금의 10%를 떼 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지난 3월부터 조사를 벌여왔다.”고 말했다. 이들 3개 병원은 건물이 6~8층이고 5개 이상의 진료과를 보유하고 있어 창원에서는 유명 병원들이다. 이들은 3개월간 평균 6.7개의 보험에 가입한 후 3개 병원에 돌아가며 입원해 일인당 평균 700만원의 보험금을 챙겼다. 생명보험이나 장기손해보험의 경우 입원할 경우 보험계약에 따라 하루 5만~10만원의 입원 일당을 중복해 지급한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총 33개 보험사가 이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했고, 생명보험 ‘빅3’와 우체국보험 가입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병원·병명 바꿔가며 입원 수법 특히 1361명 가운데 40·50대가 909명(66.8%)으로 가장 많았고, 여성이 893명(65.6%)이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험사기 수법 중 허위 입원보험금을 받은 경우가 91.2%(86억 7600만원)에 달했는데 아무래도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40·50대 주부들이 입원을 편하게 할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장 많은 보험금을 타낸 주부 손모(53)씨는 당뇨나 고혈압 등으로 3년간 18번에 걸쳐 564일간이나 과장 입원해 9500만원의 보험금을 받았다. 최다 건수의 보험사기를 기록한 것도 53세 주부였다. 그는 3년간 109건에 걸쳐 입원을 하면서 9133만원의 보험금을 타냈다. 이외 최모(63)씨 부부는 고혈압 등으로 6차례나 같은 병원에 동반입원해 240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았다. 보험설계사는 노모(45·여)씨는 2년간 9차례나 입원했지만 입원기간에 45건의 보험계약을 모집한 성과가 있었다. ●50대 주부 3년간 109번 입원 금감원에 따르면 처음에는 창원시 및 부산·경상도 지역에서 보험사기에 많이 가담했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경기뿐 아니라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등에서도 326명이 몰려들었다. 금감원은 보험사기 혐의자 1361명을 비롯해 관련 병원 3곳(보험사기 방조혐의)의 자료를 경찰에 넘기고 수사를 의뢰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은 환자와 병원이 공모했다고 보기에는 사안이 너무 커 다수의 브로커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만약 보험관계업무 종사자의 위법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현장검사를 실시해 엄중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번 사건이 지난해 11월 발생한 태백사기사건보다 피해가 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150억원대 보험금과 요양급여비를 가로챈 태백지역 병원장과 보험설계사, 가짜 환자 등 410명을 적발한 바 있다. 이경주·이성원기자 kdlrudwn@seoul.co.kr
  • 32살 조정래가 본 70년대 ‘부조리한 사회’

    호흡이 긴 작품만 써 내던 조정래가 단편소설집을 냈다. 토속적인 전라도 사투리와 맛깔스러운 생생한 대사로 근현대의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에 익숙한 독자들은 조정래의 단편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외면하는 벽’(해냄 펴냄)은 작가가 1977년부터 79년까지 문예지에 발표했던 8편의 작품을 담았다. 1999년 발간된 9권짜리 ‘조정래의 문학 전집’에서 ‘마법의 손’으로 묶어 나온 것을 이번에 제목을 바꿔 개정판으로 내놨다. 1943년생인 작가가 32살 무렵에 기록한 1970년대의 기록들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엄마를 찾아 서울로 가 철공소 직원, 짜장면 배달원, 소매치기, 소년원을 체험하고 나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덫에 걸리는 열다섯 살의 ‘동호’(‘진화론’)나, 기지촌에서 혼혈아로 자라난 20대로 단일민족을 자랑하는 어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깜둥이’ ‘흰둥이’들(‘미운 오리 새끼’),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적절한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외딴섬 돌로 만든 감옥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살다가 죽는 ‘독종’(‘비둘기’)들이 나온다. 장례는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치르는 줄로 당연하게 알고 있는 현실이 1970년대는 망자가 살던 집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외면하는 벽’). 조정래는 저자의 말에서 “2010년대 지금 세월이 흘러 흘러 장강이 되었으니, 살 만한 세상이 되었는가? 우리가 좀 더 사람다운 모습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조정래는 “작가로서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9) 조광조와 중종

    [선택! 역사를 갈랐다] (9) 조광조와 중종

    조광조(호 靜庵·정암, 시호 文正·문정)의 일생은 짧고 격절(激切)했다. 1519년(중종14) 겨울, 전라도 능주에서 사약을 마시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 젊은 선비가 남긴 일화들은 금세 신화가 되었고, 후세는 그를 성리학의 순교자로 기억하였다. ●절명시 전승되는 그의 최후 장면은 장엄한 서사다. 그때 조광조는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정중히 맞이하고, “임금께서 죽음을 명하셨다면 반드시 죄명이 있을 것이다.” 라며 죄명을 물었다. 그런데 가져온 명령서에는 죄명이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이렇게도 초라하단 말인가.” 라면서 “당장에 상소를 올려 바로잡아야 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에 관한 일이라 그만둔다”고 훈계했다. 사약을 마시기 전에 조광조는 시 한편을 읊었다. “나라님 사랑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소(愛君如愛父). 나라일 걱정 내 집안일처럼 걱정하였소(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세상을 내리쬐시니(白日臨下土), 밝고 밝게 비추어 내 마음 아시리라(昭昭照丹衷).” 이 서사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우선 그는 만고 충신이며, 지순(至純)한 도덕군자이고, 세사를 초탈한 영웅이란 것이다. 이것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조광조에 대한 집단기억으로 정착되어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끝없는 추모의 정을 불러일으켰다. ●기묘사화와 후세의 평가 정치가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쉬움으로 일관되었다. 학문이 완숙되기도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다 실패하였으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이이(1536~1584, 호 栗谷·율곡)는 “사람들은 입 모아 말하기를, 시기가 성숙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라고 말했다. 조광조를 쓰러뜨린 것은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그 시작은 1519년 11월 16일(음력) 아침이었다. 중종은 남곤, 심정 및 홍경주와 함께 정치적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사사로이 붕당을 지은” 죄로 조광조와 김정, 김식 및 김구 등 4명을 주범으로 몰았다. 윤자임, 박세희, 박훈 및 기준 등도 부화뇌동한 혐의로 엮였다. 붕당의 몸통으로 거론된 이들 8명은 당년 20~30대로, 사건 발생 나흘 만에 각지로 유배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문제가 된 자신의 정치행위에 대해 조광조는 “나라의 병통이 이원(利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의 명맥을 영구히 새롭게 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알다시피 사적 ‘이익’의 추구는 성리학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종반정 때 117명이나 되는 신하들이 마구잡이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된 것이 조광조 등의 입장에서 보면 큰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가 있는 76명의 공신칭호를 박탈하였다. 공신세력은 이에 분노했고, 중종은 반색하였다. 조광조 등이 숙청의 역풍을 맞은 것은 물론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네 가지 사실이 가려져 있었다. 첫째, 사건의 총지휘자가 중종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훈구파의 우두머리라는 남곤이 실상은 공신이 아니고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셋째, 조광조 일파의 정치적 성격은 다양해, 기준과 권전 등의 급진파가 있었나 하면, 김안국·김정국 형제 등 소극적 지지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조광조의 노선이 실은 선배 박경(?~1507)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였다는 점이다. ●조광조는 박경의 후계자 1507년(중종2) 박경 등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다. 놀랍게도 조광조를 비롯해 그 동지 김식, 공서린 및 조광좌 등이 연루되었다. 주모자 박경은 사림파의 종장(宗匠) 김일손(1464~1498) 계열의 학자였다. 서얼이었던 박경은 정국공신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변란을 꾀했으나 실패하였다.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박경은 정치적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숙독하는 것이 제일”이라며 성리학의 근본가치를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제를 폐지하고 대신에 ‘향리 선거법’ 즉, 추천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또한 관행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발탁할 것, 특히 서얼과 종친에 대한 차별을 문제 삼았다. 청년 조광조 등은 박경의 견해에 공감하였다. 서얼과 종친에 관한 부분을 뺀 나머지 사항들은 고스란히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중심축이 되었다. 한마디로 조광조 등은 박경의 뜻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이상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조광조의 도학적 리더십 조광조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 데는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우선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법 집행이 공정하였기 때문에 서민들의 지지가 컸다. 오죽했으면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자 한성부 향도들이 들고 일어날 정도였겠는가. 그때 1000명이 넘는 유생들도 대궐에 난입해 조광조의 구명을 요구했다. 조광조는 소통에 능하였고, 그래서 동지들의 신뢰가 대단했다. 특히 김정 및 한충 등과는 큰 이불과 긴 베개를 펴놓고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웠다. 그들의 우정은 죽기까지 조금도 변치 않았다. 또한 조광조는 정치적 명분이 뚜렷했고, 모든 일을 끝까지 정열적으로 밀고나가는 사람이었다. 반대파에 대한 공격 역시 격렬했다. “벼슬을 얻으려고 애쓰거나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게 되어, 겉으로는 칭찬하나 속으로는 욕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조광조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찬반 양편으로 갈라섰다. ●왕이 최고의 성리학자라야! 조광조는 요순시대의 재현을 확신했다. 1515년(중종15)의 증광문과시험 시권(답안지)에서 그는, 명도(明道)와 근독(謹獨)을 통해 황금시대를 복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펼친 이상(理想) 정치운동의 핵심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있었다. “임금은 하늘과 같고 신하들은 사계절과 같습니다.” 조광조는 이런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왕을 만인의 스승, 즉 군사(君師) 또는 철인군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독’과 ‘명도’를 주문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상정치가 구현된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훗날의 예를 보아도 ‘군사’를 자처한 당대 최고의 석학 정조 때에도 요순시대는 재현되지 않았다. 그야 어떻든 조광조는 이상정치의 구현을 위해 중종에게 대학과 중용 공부를 강조하였다. 특히 대학을 중시하였다. “비록 대학 한 권밖에 없다 해도 (왕은)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광조는 ‘소학’도 높이 평가했다. “세종 때는 오직 ‘소학’의 도(道)에 마음을 썼으므로, 그 책을 널리 반포하였습니다.”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희를 비롯한 송나라의 성리학자들도 이미 ‘소학’과 ‘대학’이 표리관계임을 말하였다. ‘소학’은 성리학적 행동규범을 가르치는 교과서요, ‘대학’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단계적으로 제시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새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중종 물론 조광조 등이 이념에만 매달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실제로 공신세력을 약화시켰고, 현량과를 실시하고 향약을 보급하는 등 몇 가지 개혁안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기묘사화라는 역풍에 휩쓸려 좌초하였다. 조광조 등은 위기가 닥쳐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대세를 뒤엎지 못하였다. 왕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종이었다. 인간적 삶이 평탄하지 못했던 왕은 누구든 불신하였다. 우선 자신을 추대한 반정공신들도 믿지 못했다. 사림파를 요직에 임명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라고 해서 중종이 끝까지 총애할 리가 없었다. 중종은 4년간의 정치적 밀월 끝에 결국 조광조를 배신하였다. 처음부터 중종에게는 이상정치의 구현이라는 바람이 없었다. “왕은 (경연에서) 몸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龍床)에서 퉁 하는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조광조와 김식 등은 중종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종이 ‘소인’(小人)들에게 쏠리는 날이 올 것을 예측하였다. 특히 조광조는 자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든 죄로 일망타진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러한 위험을 짐작하고서도 왕도정치의 길을 계속 걸어갔으니, 그들은 이상을 위하여 순교한 것이다. ●조광조의 유산 중종이 공신들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구체화한 것은 1512년(중종7년)쯤이었다. 부왕 성종이 사림파를 등용했던 것처럼 중종도 새 인물들을 찾았다. 그에 부응해 이조판서 안당이 조광조를 추천했다. 조광조는 동지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이성동 등 급진파는 삼정승까지 노골적으로 공격하며 개혁을 외쳤다. 왕과 공신들은 그들을 혐오하였다. 1519년 겨울, 그들은 사화를 일으켜 이상주의자들을 내쫓았다. 그러자 낡은 정치가 재연되었다. 중종은 외척과 권신들을 들였다 내쳤다하며 세월을 허비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선비들은 ‘불나비’ 조광조를 잊지 못했다. 그들은 조광조의 뒤를 이어 성리학 지상주의의 깃발을 더욱 높이 세웠다. 마침내 백인걸 등의 노력으로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선비들의 영원한 아이콘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여기저기서 굉장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그 본영인 미국 경제가 벌써 몇 년째 신음소리를 낸다. 스페인과 그리스 등은 아예 국가부도의 위기를 맞았다. 한국사회의 현안인 양극화와 청년실업의 문제 또한 신자유주의의 여파다. 그래서 지금은 근본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고식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 의미의 새로움이 요청된다. 우리가 조광조의 부활을 소망하는 이유다. 21세기의 그 개혁사상가는 구체제의 귀결인 지배와 종속의 갈등과 분열을 넘어 공존공생의 평화공동체를 일으킬 것이다. 착취와 오염으로 병든 생태계에 새 숨을 불어넣을 그의 출현을 기다린다. 백승종(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보릿고개 이겨내던 동강의 전통음식

    보릿고개 이겨내던 동강의 전통음식

    팥적, 수수노치, 원반죽, 꼴뚜국수, 나물국죽…. 한글로 된 음식 이름인데 정체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보릿고개를 이겨내던 강원도 동강 일대의 전통음식이다. KBS는 19일 오후 7시 30분 ‘한국인의 밥상’에서 ‘거친 음식의 재발견 - 동강의 보릿고개 밥상’ 편을 방송한다. 아직도 마을에 가려면 산길을 지나 줄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영월 가정마을. 50년 전 배를 타고 시집 온 김연자 할머니가 구워내는 팥적(팥을 불려 껍질을 벗겨낸 뒤 지진 부침개)과 수수노치(수수쌀을 빻아 반죽하고 나서 꿩고기와 숙주나물, 무채를 한데 섞어 속을 만들어 먹는 전병) 등 오지마을의 보릿고개 시절 이야기와 자연 밥상을 들여다본다. 동강 상류에 있는 영월군 문산리 뼝창 마을. 이곳에서는 그릇 안에 미끼를 넣고 구멍을 한 개만 뚫고서 밀봉하는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4~5월이 한창인 퉁가리는 한번 찔리면 ‘굿을 해도 낫지 않는다.’는 치명적 가시가 있다. 그런데 그 맛은 웬만한 민물고기와 비길 수 없다. 퉁가리로 원반죽이라는 음식을 해 먹는다. 물고기를 얇게 저며 밀가루와 함께 반죽하면 적은 양의 물고기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보릿고개 별미다. 지천으로 피어나는 나물은 주린 배를 채워 주던 봄의 선물이다. 질창구(지칭개)를 비롯해 봄이면 가장 먼저 나온다는 냉이와 갖은 나물에 물을 넣고 콩가루를 섞어 그 양을 늘려 먹었던 나물국죽도 있다. 전라도 새댁이 무서운 강원도 시어머니를 만나 야단맞아 가며 하루 종일 빻아야 겨우 밥상에 올릴 수 있었던 보릿고개 음식은 이양자 할머니가 소개한다. 특히나 영월 아낙들에게 소중한 양식이 되었던 메밀을 빼놓을 수 없다. 권산옥 할머니는 허기진 아이들의 배를 채우려고 쌀 대신 메밀을 갈아 국수를 만들었다. 메밀껍질까지도 국수로 만들다 보니 국수 가닥이 꼴뚜기처럼 시커멓고 못생겼다. 지긋지긋해서 꼴도 보기 싫다고 지어진 이름이 꼴뚜국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결혼이주여성들 ‘팔도요리 배우기’

    결혼이주여성들 ‘팔도요리 배우기’

    “색과 길이를 맞추니까 꼬치가 보기 좋게 만들어졌죠? 그럼 이제 여기 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서 굽는 거예요.” 17일 한남동 용산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요리실에는 한국 전통 음식을 배우려는 결혼이주여성으로 가득 찼다. 이들이 배운 음식은 황해도 전통요리인 ‘지짐누름적’.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음식이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이지만 참가자들은 강사의 지도에 따라 진지한 얼굴로 재료를 꿰고 꼬치를 프라이팬에 구웠다. 처음 개강한 ‘팔도건강 건강먹거리 요리교실’ 현장이다. 용산구가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전국 각지의 별미 요리를 전수하기 위해 기획한 문화 프로그램이다. 평범하고 획일화된 한식 요리가 아니라 지역 대표음식을 만들며 이주여성들이 한국 음식문화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심도 깊은 수준으로 익히게 한다는 취지다. 중부여성발전센터 소속 임인숙 요리기능장이 강사로 나서 월1회, 오는 11월까지 다양한 요리를 선보인다. 이날 교실에서는 프로그램 일정과 회기별 주제를 안내한 뒤 첫 음식으로 지짐누름적을 배웠다. 자리를 함께한 베트남 출신의 레티기(29·용산구 후암동)씨는 “한국에 와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적응하기 힘들었다.”며 “다양한 한국음식을 배우고 가족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참가 이유를 전했다. 다음 달에는 함경도 감자찰떡, 6월엔 평안도 가지나물 등을 배울 예정이다. 이어 경기도 조랭이떡국, 강원도 메밀전, 전라도 벌교꼬막요리 등이 예정돼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열린세상] 총선이 남긴 숙제/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열린세상] 총선이 남긴 숙제/박양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한바탕 축제가 끝났다. 총선이라는 잔치마당에서 승리한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의 얼굴엔 애써 감춘 미소가 흐르고 민주통합당 당직자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언론에선 박근혜 위원장의 완승이라고 요란하다. 그러면서 벌써부터 향후 국정 운영, 나아가서는 대권 구도 예측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동여서야(東與西野), 더 구체적으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연히 양분된 적·황색 색깔지도를 보는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다. 잔치가 끝난 뒤안길이 왠지 너무도 휑하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랜 서구에서도 지역적으로 선호 정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종족과 종교상의 차이로 대놓고 반목의 역사를 걸어온 영국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처럼 광역적으로 일당이 독주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현상이 개명 천지에도 바뀌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그 이유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영·호남 차별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조선시대의 당쟁, 삼국시대의 대립으로까지 시원을 찾기도 한다. 이유야 여하간에 양 지역의 일당 독식 현상은 분명 우리 정치발전을 위해서나 사회통합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사실 정당은 정치철학, 곧 정치이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서구의 예를 보면 오랜 기간 수없이 많은 정치인이 왔다 가도 정당은 존속하고 그 이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걸핏하면 당의 이름을 바꾼다. 유력한 정치인 따라 당도 바뀌고 정치인들도 헤쳐 모인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도 제대로 된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상대적 피해를 볼 수 있는 경상도 농촌지역은 한·미 FTA 재협의를 주장하는 민주통합당에 몰표를 줄 법도 한데 그 득표율은 처참하다. 보수정책으로 이득을 볼 유권자가 전라도에도 꽤 있을 텐데 새누리당의 득표율은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 같은 현상은 연말 대선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보고 정책적 이념이나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지역당들에 대한 맹종의 결과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간 양 지역이 보여 온 정치적 대립의 원인을 찾자면 꽤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지역 갈등이나 대립은 결국 편중된 지역 차별 정책에 있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근저에는 지역을 바탕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 바로 나 자신의 이기적 탐욕이 자리잡고 있을 터다. 내 지역 사람이 정부에서 중용되고, 그가 내 지역 편애정책을 폄으로써 결국 나와 내 자식에게 돌아오는 쏠쏠한 단맛을 누리고 싶은 이기적 욕심이 그것이다. 욕심이야 인간 모두가 갖고 있는 본성으로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끼리끼리 문화, 패거리 문화, 지역적 이기심으로 변질되면 사회적 문제요 국가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최근 이른바 영포라인을 중심으로 한 인사 전횡과 민간 사찰에서부터 며칠 전 끝난 총선에서의 동여서야 현상에서 이를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지역 대립을 하루아침에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그 원인이 다양한 만큼 해결 방법 또한 복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 수없이 공론화되어서 진부한 감이 없지 않지만 탕평인사와 균형적인 지역발전을 추진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이 일은 지역 이기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회의원들에게, 또 대단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연말 대선에서 또다시 지역당을 선택할 지역 주민들에게도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이 숙제는 고스란히 대선주자의 몫이고 또 차기 대통령의 무한책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선주자들은 이참에 인사 탕평정책과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공약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대통령이 되신 분은 공약 진행상황을 정기적으로 국민에게 보고하면 어떨까. 인위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한다면 우리에게 정치발전과 사회통합의 희망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면, 대선주자들은 당장의 총선 결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총선이 남긴 지역 대립의 상처문제와 해결책을 대국적 차원에서 보다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한다.
  • 거칠어진 예삐공주 ‘완전 조으다’

    거칠어진 예삐공주 ‘완전 조으다’

    ‘완전 조으다’, ‘완전 시르다’ 올 상반기 최고의 유행어가 아닐까 싶다. tvN 코미디 빅리그(이하 코빅) 시즌 2의 우승팀 ‘라이또’의 예삐공주 이용진(27)의 고정 레퍼토리 멘트다. ‘완전 조으다’, ‘완전 시르다’를 비롯해 매회 물품을 바꿔가며 ‘오빠, 예삐공주 OOO 사주세효우~’ 등 그가 코빅 ‘게임코너’에서 즐겨 쓰는 대사는 시대의 유행어가 돼 버렸다.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 웅이 아버지 등 히트 코너를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군대에 가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 이후 코빅에서 예삐공주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는 지금 제2의 전성기를 걷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 개그맨 이용진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예삐공주 캐릭터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여자캐릭터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멤버들과 함께 고민하다 자연스럽게 탄생했죠. 사실 저는 아직도 예삐공주 하면서 닭살 돋고 그러거든요. 원래 여성스러움이 잘 안 맞아요. 최근에 예삐공주 캐릭터가 다소 거칠거나 망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딱 저랑 맞죠. 하하. →“조으다, 시르다”, “사주세효우” 등 여러 유행어를 낳았다. 국민 유행어가 된 듯하다. -진짜 많이 쓰시는 거 같긴 해요. SBS ‘웃찾사’에서 웅이아버지 할 때보다 더 많이 사랑해 주시는 거 같아요. 얼마 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휴대전화 가게의 벽면에서 제 유행어를 패러디한 광고 문구를 봤어요. 신기했죠. 유행어의 힘이 센 거 같아요. →라이또 멤버 중에 가장 4차원적이라던데. -하하. 4차원적이라기보다 저는 자유로운 걸 좋아해요. 그래서 멤버 가운데 저만 소속사가 없죠. →제대 후 원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여행가이드 하려고 했었다던데. -맞아요. 전역한 그날 바로 차를 빌려서 한 달 반 동안 혼자 국내 여행을 했어요. 전라도 강진, 제주도 등 안 다닌 데가 없어요. 그러다 제주도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 라이또 멤버 세형이랑 규선이가 연락을 해왔어요. 같이 하고 싶다고 말이죠. 프랑스 가서 언어를 배운 뒤 여행 가이드 할 거라는 말에 세형이가 그러더라고요. ‘한 학기만 입학 미루고, 함께 코빅에 참여하자. 출연료도 유학생활에 큰 힘이 될 거다’라고요. 그 말에 솔깃했죠. 하하. 그러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시즌 3까지 참여하게 됐죠. →왜 전역 후 여행가이드를 하려고 했나. -같은 직업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게 참 지겹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요. 지금껏 33개국을 여행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데 그걸 다 못 보고 죽으면 억울해서 못 살아요. 하하. 군대도 특수보직 맡으면 외국여행을 할 수 있다는 말에 해군에 지원해 다녀왔고요. 해군 생활을 하면서 캐나다 등 11개국을 다녀온걸요. →어릴 때부터 개그맨이 되고 싶었나. -개그맨이 되고 싶다기보다 원래 여행작가를 하고 싶었어요. 꿈이 탐험가였어요. 하하.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1년 동안 지게차 운전을 했어요. 돈을 벌면 그 돈으로 해외를 나가고, 자주 그랬죠. →어떻게 개그맨의 길을 걷게 됐나. -어릴 때부터 반에서 오락부장 같은 걸 도맡아 하면서 일명 웃기는 애로 통했어요. 하도 사고를 치고 다니니까 선생님들이 늘 제게 ‘넌 잘돼 봤자 개그맨이야’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말이 씨가 됐죠. 세계일주를 준비하던 중에 후배 개그맨 진호가 이끌어 대학로의 개그 극장을 찾게 됐죠. 그때 무대의 맛을 알고, 개그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개그맨의 길을 걷게 됐어요. →예삐공주의 분장이 인상적이다. 기억에 남는 분장이 있나. -저 진짜 예전에 피부가 백옥 같았어요. 군대에서도 안 상했던 피부인데, 예삐공주 분장하면서 망가지더라고요. 하하. 근데 저는 분장으로 망가지는 수위가 셀수록 라이또 성적이 좋고요.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면 뭘 해도 웃으시더라고요. 하하. 통아저씨 분장 했을 때 얼굴 전체적으로 분장했거든요. 그때가 좀 힘들었고, 제일 저랑 잘 맞았던 건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해놓고, 얼굴에 가부키 화장했던 거 같아요. 그 외에도 심슨, 모나리자 분장 등이 마음에 들었죠. →라이또 팀 분위기는 어떤가. -너무 좋아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저랑 규선이 사이에 세형이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해 주거든요. 규선이는 동생인 데다 어차피 군대갈 놈이라 제가 많이 져 주는 편이에요 하하. →라이또 시즌 3는 어떻게 꾸려 나갈 건가. -일단 세형이 동생 시찬이가 군대에서 곧 제대해요. 제가 참 많이 아끼는 동생이죠. 함께할 것 같아요.(양세찬은 라이또 양세형의 친동생으로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웅이아버지’ 코너에서 왕눈이로 많은 인기를 누린 바 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총선 격전지를 가다] 부산진갑

    [총선 격전지를 가다] 부산진갑

    부산진갑 선거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초 이곳은 여야 간 대결구도로 갈 것이란 전망이 높았지만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정근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팽팽한 3파전 양상을 띠고 있다. 새누리당 나성린 후보와 민주통합당 김영춘 후보, 무소속 정근 후보 등 3명의 후보가 오차범위에서 혼전 양상을 보이며 ‘시계제로’ 상태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이모(55)씨는 “정권을 좌파에 넘길 수는 없다.”며 “여당 지지 의사를 내비쳤으며, 강은진(46·여·양정동)씨는 “아직 누구를 찍을지 정하지 않았다.”며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후보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세 후보는 각자 자신의 승리를 점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재래시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돌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공천을 받고 비교적 뒤늦게 선거판에 뛰어든 나 후보는 ‘부산진구가 낳은 경제전문가’임을 내세우며 표밭을 누비고 있다. 그는 “야당의 무책임한 복지 포퓰리즘 공세를 막아내고 진정한 서민경제 부활과 재벌개혁을 이끌 대한민국 경제통 나성린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민주당 김 후보는 “이번 총선이 민생파탄 정권을 심판하고, 부산정치 일당 독점을 청소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정권심판 논리를 펴며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첫 휴일인 지난 1일에는 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입구에서 부산 지역 야권 단일후보들이 함께한 ‘민간인 불법사찰 규탄 및 총선 승리’ 합동유세에서 사회를 보는 등 야당 바람몰이에도 앞장서고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다크호스’로 떠오른 무소속 정 후보는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며 표밭을 누비고 있다. 서부 경남 출신인 그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무료검진, 의료봉사 등 지역봉사 활동을 해 오면서 표밭을 다져 왔다. 부인의 고향이 전라도여서 부산진구 내 6개 호남향우회도 정 후보를 돕고 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열린세상] 해군기지 둘러싼 공동체 분열 어디까지 가려는가/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열린세상] 해군기지 둘러싼 공동체 분열 어디까지 가려는가/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

    해양주권 확보를 위한 해양기지를 두고 해군기지, 해적기지라는 타협할 수 없는 용어가 대결한다. 참여정부 시절 오프라인 신문과 인터넷 매체, 지방과 서울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국민들의 감성에 호소했던 정치적 유산의 저주인가? 전통적인 전라도와 경상도, 강남과 강북, 재벌과 서민의 대립구조에 더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가진 자와 못 가진자, 강자와 약자, 20~40대와 50대 이후의 연령층, 나꼼수 대 저격수, 해군장교 대 해군병사, 99% 대 1%, 급기야 해군 대 해적이 대립구조의 목록에 올랐다. 분열 메뉴의 다양성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대립각은 국책적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과 폐기,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한 단식투쟁 항의와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마치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의 무한대립 경쟁이 한국사회에서 재현된 것처럼 철천지 원수나 적과의 동침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극한대치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해적(海賊)이라는 용어 하나만 보더라도 아직 배움이 한참 짧은 20대 정치지망생이 빈정대듯 사용할 수 있는 감상적인 용어가 아니다. 해적은 인류의 공적을 의미하는 법률용어이다. 인류는 세계 평화와 안전에 위협을 초래하고 인류 양심에 충격을 주는 범죄에 대해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세계 관할 범죄로 규정했다. 집단살해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반인륜범죄가 이에 해당한다. 해적범죄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므로 해군을 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안보의 상징을 인류 공적으로 낙인 찍는 언어해적이다. 그런데 극한대립의 이유나 동기를 보면 어떤 심오한 이론이나 철학적 소신 때문이 결코 아니다. 핵심은 반미주의와 반정부주의이다. 직설적으로는 반이명박 대통령 정서이다. 이유 없이 싫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의 압권이다. 극도의 대립각도를 가져온 사람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인기몰이의 주역이 되는 현실이 대립을 더욱 부추긴다. 정치권은 또한 그들을 국회의원 후보자로 내세운다. 극한분열의 악순환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공동체 사회에서 대립각도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진정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빈부격차가 공동체 사회에 제기하는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과 동일하다. 불평등의 심화가 공동체에 주는 진짜 위험은,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생활영역은 점점 격리되고 단절된다. 같은 사회의 시민이면서도 원수처럼 만나지 않고 서로 멀리하려 한다. 증오와 투쟁의식만 커져간다. 결국 공동체는 파멸의 길로 진행한다. 공동체 사회에서 다양성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대립을 이념적, 정치적 그리고 개인의 인기몰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전제인 연대감과 유대감이라는 공동체의 미덕을 본질적으로 갉아 먹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사회 지탱의 원동력인 정치는 어떤 경우에도 100%의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아무리 이득이 된다고 하여도 해적 같은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면서 1% 대 99%의 대립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동체 통합을 이루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머지 1%를 공동체의 해적으로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류에게 생명권, 자유권, 재산권이라는 천부인권의 축복을 선물한 존 로크는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되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회는 부자가 존경받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좌절할 이유가 없는 사회이다. 권력이 있건 없건, 잘살건 못살건, 많이 배웠건 그렇지 못하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칭찬과 격려가 넘치는 사회이다. 해군과 해적의 대립이 없고 1%와 99%가 외면 없이 각자의 처지에 맞게 공동체 구성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회가, 정치가 앞장서고 일반시민들이 호응하여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정의로운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해군과 해적의 대립이 없고 1%와 99%가 외면 없이 각자의 처지에 맞게 공동체 구성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회가, 정치가 앞장서고 일반시민들이 호응하여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정의로운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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