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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시댁 눈치+잔소리 폭발 “엄마 보고싶다” 눈물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시댁 눈치+잔소리 폭발 “엄마 보고싶다” 눈물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들의 눈물샘이 폭발했다.19일 오후 방송된 MBC 새 파일럿 교양 프로그램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서는 울음을 터뜨리는 며느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민지영은 전라도 곡성 시댁에 방문했다. 민지영은 친정엄마가 해준 이바지 음식을 가지고 시댁을 찾았다. 민지영은 시어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안절부절하며 부엌을 떠나지 못했다. 민지영은 일을 하지 않는 남편 김형균에게 “자기가 밥을 퍼라”며 시켰지만 이내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김형균은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를 보고는 “설거지가 많다”고 말했지만 손만 씻고 가버렸다. 이에 설거지는 큰 며느리 차지가 됐다. 민지영은 시어머니와 시고모님과 함께 밥상을 치웠고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했다. 방으로 들어온 민지영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김단빈은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치를 떨었다. 김단빈은 이른 아침부터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일손을 도우러 갔다. 시어머니는 늦게 도착한 며느리에 “너는 빨리빨리 오지”라고 소리쳤다. 이어 김단빈은 교통사고로 다친 손으로도 무거운 음식을 나르는 등 쉼 없이 일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했다. 김단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를 했다. 이를 지켜보던 MC들은 “숨이 다 막힌다”며 경악. 더구나 시어머니는 김단빈의 의견은 무시한 채 백화점에서 비싼 아기 옷을 사오는가 하면 문화센터까지 알아보며 김단빈을 혼냈다. 결국 김단빈은 옥상에 올라가 “짜증난다”며 눈물을 보였다. 박세미는 아들의 점심을 챙기려고 애를 썼다. 박세미는 음식 투정을 하는 아들을 붙잡아두고 씨름을 했다. 이때 시어머니는 “우리 손주 주려고 빵 사왔다”며 아들을 유혹했다. 이에 박세미는 “밥을 다 먹고 빵 먹는 것”이라며 교육을 했지만 시어머니는 “안 먹는다는데 먹이지 말라”며 빵을 권유했다. 이어 박세미는 남편 김재욱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다. 박세미는 첫째 지우를 제왕절개로 낳았기 때문에 둘째도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재욱은 의사에게 “제왕절개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적은 소견서를 달라”고 했다. 자연분만을 선호하는 시아버지 때문. 이에 박세미는 서운한 듯 “당신이 그런 것도 설득 못하냐”며 말을 했다. 박세미는 결국 “아버님은 병원에서 제가 위험하니 제왕절개를 하라는데 손주만 생각하셔서 자연분만을 권하시는 것”이라며 “부담스럽다”고 털어놨다. 이어 속상함에 눈물을 흘렸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결혼 이후 여성에게 보다 많은 책임과 희생을 요구하는 이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을 과감하게 꼬집는 신개념 리얼 관찰 프로그램. 3부작으로 26일 목요일 밤 8시 55분 최종화가 전파를 탄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황사로 미세먼지 ‘매우나쁨’…광주 최고 422㎍/㎥

    황사로 미세먼지 ‘매우나쁨’…광주 최고 422㎍/㎥

    남부지방 전역에 황사가 관측되면서 미세먼지 농도가 곳곳에서 ‘매우나쁨’ 수준을 보이고 있다.광주시와 전남도는 15일 오후 1시를 기해 광주와 전남 서부권에 미세먼지(PM10·1000분의 10㎜보다 작은 먼지) 경보를 발령했다. 이날 오후 2시 기준 광주와 전남의 미세먼지 농도는 1㎥당 422마이크로그램(㎍)과 309㎍를 기록했다. 정오에는 광주 331㎍/㎥, 전남 300㎍/㎥로 관측됐다. 이외에도 오후 2시 기준 지역별 미세먼지 농도는 △진주 283(이하 ㎍/㎥) △전주 205 △고산(제주) 256 △대구 232 △울산 182 △천안 157 △군산 139 △문경 162 △수원 136 △안동 133 △서울 111 △경기 124 △인천 95 등으로 관측됐다. 미세먼지 경보는 시간당 미세먼지 평균농도가 300㎍/㎥ 이상 2시간 넘게 지속할 때 발령된다. 이번 황사는 14일 중국 북동지방에서 황사가 발생한 것으로, 15일 오후 전라도 전역을 비롯한 남부지방 곳곳에서 황사가 관측되고 있다. 기상청은 “남부지방 외에서도 평소보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게 나타나는 곳이 있을 수 있으므로 건강관리에 유의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사찰을 두고 흔히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에서 말한 ‘잘 늙은 절 한 채’의 변주(變奏)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절은 완주 화암사(花巖寺)다. 절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다. 시인이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고 한 그대로다. 그렇게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나타나는 절이 화암사다. 그런데 ‘화암사 중창비’의 분위기도 안 시인의 묘사와 닮아 있다. ‘바위 벼랑의 허리에 한 자 폭 좁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서면 이 절에 이른다.…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다’ 비문은 1441년(세종 23) 지은 것이다.●‘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 국보 지정 화암사라면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1년 해체 수리하면서 찾은 기록으로 1605년(선조 38)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극락전은 이른바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한마디로 지붕을 높여 맵시 있게 보이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면 크게 망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건물의 겉모습만으로 알아차리기란 전문가도 쉽지 않다. 하앙식 구조가 아니더라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지붕이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극(極)·락(樂)·전(殿) 세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따로 내건 편액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편액을 이렇게 만든 것도 하앙식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화암사를 말할 때 강당에 해당하는 우화루도 빼놓으면 안 된다.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이 절의 인상은 아마도 우화루에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극락전과 우화루, 여기에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당을 감싸며 이른바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이 완성됐다. 화암사가 아름다운 것도 각각의 전각도 전각이지만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극락전도, 우화루도 아닌 화암사에서 가장 작은 철영재(英齋)로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극락전 동쪽에 자리잡은 철영재는 불과 한 칸짜리 사당이다. 뜻밖에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절집에 무신의 사당이라니….●철영재 현판 글씨는 문인 자하 신위가 써 철영재 현판 글씨는 자하 신위(1769~1845)가 썼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되곤 하는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하는 금강경을 필사하고 감상을 적은 ‘서금강경후’(書金剛經後)를 남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물이 사당의 현판 글씨를 썼다니 성달생과 화암사, 나아가 성달생과 불교의 인연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암사는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창비는 전한다. 원효와 의상도 수도했다고 적었다. 1425년(세종 7)부터 1440년(세종 22)까지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大)시주가 성달생이다. 그는 1417년(태종 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화암사와 인연을 맺은 듯하다. 그런데 인연은 중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불경(佛經) 간행의 역사에서 화암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 성달생과의 인연이 있다. 성달생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성석용의 아들이다. 유후는 조선의 창건 수도인 개성을 다스리는 벼슬이었다. 태종실록에 있는 성석용의 졸기(卒記)에는 ‘글씨를 잘 썼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글씨라면 그의 아들 삼형제 달생·개·허도 일가견이 있었다.●법화경 등 판각한 조선 불경 간행 중심지 성달생과 성개가 필사한 안심사판 묘법연화경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완주 안심사는 화암사에서 멀지 않다. 화암사와 더불어 불경 판각이 활발했던 안심사에는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등 조선시대 한글 경판도 다수 전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1443년(세종 25)부터 쏟아져 나온다. 법화경, 능엄경, 중수경, 부모은중경, 지장경, 육경합부, 시왕경 등 모두 12종에 이른다. 육경합부(六經合部)는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아미타경, 관세음보살예문, 법화경의 한 대목씩을 엮은 것이다. 성달생의 아들과 손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성승(?~1456)과 성삼문(1418~1456)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성달생이 필사한 화암사판 법화경에는 성승과 성삼문도 발원자로 참여했다. 화암사판 법화경은 이후 복각본만 24종이 나왔다. 조선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를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철영재 현판을 쓴 자하 역시 ‘성달생 법화경’을 읽으며서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 갔을 것이다. 그러니 화암사는 성달생의 존재로 ‘조선시대 불경 간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절 경내, 그것도 큰 법당 곁에 이런 인물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화암사에 남은 성달생의 흔적은 철영재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창비는 높이 130㎝, 폭 52㎝, 두께 11㎝이니 그야말로 아담하다. 비문은 15세기 중엽 지었다지만 비석을 세운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중창비에는 비문을 누가 짓고, 글씨를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매우 이례적이다. 그 주인공으로 성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문을 지었다는 1441년은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성달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승의 아비에 대하여 연좌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파주 무덤의 석물(石物)을 모두 없앤 것이다. 성승과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1691년(숙종 17)이다. 중창비를 세운 시기 그들은 여전히 ‘대역죄인’이었다. 성달승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달생은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전라도관찰사에서 내직인 내금위삼번절제사로 옮긴 1418년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직책상 칼을 찼다. 세종이 즉위한 해다. 그런데 상왕, 즉 태종 앞에서 칼을 찼다는 이유로 세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등 칼로 일어선 태종 이방원이 적지 않게 놀랐던 때문일 듯하다. ●유감동 ‘섹스 스캔들’에 연루돼 물의도 성달생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명나라 황제의 친척’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공녀(貢女)의 악습을 원나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408년(명나라 영락 6)부터 1433년(명나라 선덕 8)까지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 소녀를 징발한다. 성달생의 열일곱 살난 딸도 여기에 포함됐다. 공조판서 시절이었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공녀의 부친으로는 가장 벼슬이 높았다. 성달생은 유감동의 간부(奸夫)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딸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으로 세종시대 40명 남짓한 조정의 전·현직 관리와 스캔들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는데, 성달생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충청도 초수로 안질을 치료하러 간 세종을 호종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왈츠를 추듯, 美味

    왈츠를 추듯, 美味

    봄이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즐기는 날이 많은 때다. 햇살 좋고, 바람 따스하니 볼거리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좋다. 가족과 함께 보고 즐기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축제와 먹거리를 모았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사진 한국관광공사, 리에또#울산 옹기축제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다. 예부터 이어온 우리의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표면의 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 옹기 특유의 장점은 현대 기술로도 여전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울산옹기축제는 우리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옹기의 멋과 기품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다. 새달 4일부터 7일까지 울산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열린다. 핵심 프로그램은 도붓장수 옹기장날, 외고산 옹기 팔러가세, 옹기장난촌 등이다. 도붓장수 옹기장날은 옹기장터와 주막, 깜짝경매, 놀이마당으로 구성된다. 다양한 이벤트가 쉼 없이 진행되는 축제의 핵심 장소다. 옹기장난촌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테마 구역이다. 옹기 제작의 기본이 되는 흙과 물속에서 마음껏 놀 수 있다. 무형문화재 장인들의 옹기 제작 시연행사도 열린다. 울산옹기축제 사무국(227-4961, 이하 지역번호 052).입에서 사르르 녹는 맛 언양불고기 울주를 대표하는 음식은 언양불고기다. 일제강점기부터 도축장과 푸줏간이 많았던 언양읍에 1960년대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의 입을 통해 유명해졌다. 언양불고기는 소고기를 얇게 썰어 양념을 한 다음 석쇠에 구워 낸다. 한양불고기(서울식), 광양불고기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불고기로 꼽힌다. 서울식에는 육수가 들어 있고, 광양식은 생고기를 구워 먹는데 견줘 언양불고기는 구워서 나온다. 재료는 등심을 주로 쓴다. 등심의 지방과 육즙 덕에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언양기와집불고기(262-4884)와 갈비구락부(264-4746) 등이 알려졌다.#연천 구석기축제 경기 연천의 전곡리 일대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1978년 한 미군 병사가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석기를 발견했는데, 이게 고고학의 정설을 무너뜨렸다. 당시 일반적인 견해는 양면의 날을 세운 아슐리안형 석기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사용됐고, 동아시아는 찍개문화였다는 것이었다. 아슐리안형 석기를 사용한 유럽 쪽의 선사 인류가 동아시아보다 진화가 빨랐다는 은근한 우월 의식이 고고학계에 퍼져 있었는데, 이게 뒤집어진 것이다. 이 일대에서 5월 4~7일 연천구석기축제가 열린다.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구석기문화를 두루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학습형 축제다. 학생 자녀를 둔 가정의 참여도가 은근히 높다. 초대형 화덕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구석기 바비큐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연천구석기축제추진위원회(839-2562, 이하 지역번호 031).매콤달콤 불맛 가물치 구이에 민물매운탕 가물치 구이는 연천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먹거리로 꼽힌다. 회처럼 도톰하게 썬 가물치 살에 양파와 파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린 다음 불판에 구워 먹는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가물치 살이 매콤달콤한 양념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별미다. 가물치 구이 1㎏이면 3~4명 정도가 먹을 수 있다. 한탄강오두막골(832-4127)이 이름났다. 민물매운탕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불탄소가든(834-2770)이 알려졌다. 재인폭포 초입에 있다.#함평 나비대축제 함평나비대축제가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성년을 맞아 올해 더욱 풍성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축제는 27일~5월 7일 함평엑스포공원에서 열린다. 대표 이벤트는 나비 날리기다. 다섯 마리의 나비가 들어 있는 나비통을 받아 참가자가 직접 하늘로 날려 보낸다. 수백마리의 나비가 펼치는 날갯짓의 향연이 장관이다. 평일은 중앙광장 꽃밭에서 오후 1시 30분, 주말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1시 30분 두 차례 진행된다. 직접 나비가 될 수도 있다. 나비, 곤충 등의 복장을 하고 최고의 나비복장 선정 이벤트를 벌인다. 22종 15만 마리의 나비를 볼 수 있는 나비곤충생태관을 비롯해 10종 1만 마리가 전시된 나비 탄생관과 22종 6만 마리의 나비가 전시된 생태관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인근의 황금박쥐전시관, 다육식물관, 숲속의 곤충마을 등도 둘러볼 만하다. 함평군 문화관광체육과(320-1781~5, 이하 지역번호 061).생고기에 육회비빔밥… 일품 소고기 딱! 함평은 한우로 이름난 고을이다. 한때 전라도 소값을 쥐락펴락했다는 함평 우시장 덕에 한우고기를 싼값에 먹을 수 있다. 특히 날것으로 먹는 소 생고기의 명성이 높다. 날것이라 해서 모두 생고기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고 품질의 특정 부위만 쓸 수 있다. 목포식당(322-2764)의 생고기는 접시를 세워도 생고기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지다. 금송식육식당(324-5775), 해보면 문장리의 해월축산한우직판장(324-6692) 등도 이름났다. 읍내 함평시장 주변에 음식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육회비빔밥으로 이름난 초록식당(322-5287) 등 다양한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 ‘사람이 좋다’ 국악인 남상일, 초보 신랑 분투기 ‘어서와, 결혼은 처음이지’

    ‘사람이 좋다’ 국악인 남상일, 초보 신랑 분투기 ‘어서와, 결혼은 처음이지’

    ‘사람이 좋다’ 국악인 남상일 부부의 달콤 살벌한 신혼 일기가 전격 공개된다.10일 오후 MBC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서는 ‘국악계 아이돌’로 불리는 남상일(41), 이원아 (34) 부부의 이야기가 전파를 탄다. 국악계 아이돌 남상일, 장가가던 날 최초 공개!국악인 남상일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4살에 판소리를 시작하더니 최연소 국립창극단에 입단, 최단기 주연 등 각종 기록을 갈아치운 신동이다. 이제 시대를 대표하는 소리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구라도 혀를 내두른 화려한 입담과 특유의 넉살로 어머니 팬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한 ‘국악계 아이돌’ 남상일이지만 37년간 오로지 국악만 바라보느라 어언 40살이 된 그. 일이 좋아 결혼 생각이 없다며 어머니의 마음을 애태우던 그가 지난 3월 드디어 신명 나는 소식을 알렸다. 무려 7세 연하의 여자친구와 3년간 비밀 연애 끝에 지난 3월 깜짝 결혼 발표했다. 연예계 대표 노총각의 결혼 소식에 홍경민, 선우용녀, 송소희 등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어머니 팬들의 원성을 뒤로 하고 드디어 노총각 딱지를 뗀 남상일의 결혼식 현장과 꽁꽁 숨겨왔던 미모의 새신부가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서울과 포항을 잇는 3년간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남상일과 경상도를 떠나본 적 없는 아내 이원아는 3년 전 지방 공연을 위해 들른 포항에서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지금의 아내를 보고 첫눈에 호감을 느낀 남상일은 빡빡한 스케줄에도 꼬박꼬박 짬을 내 먼 길을 내달린 끝에 원아 씨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 3년 동안의 서울과 포항을 잇는 장거리 연애 끝에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 하지만 결혼하고 보니 두 사람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온 남자’ 남상일 VS ‘럭비공 같은 여자’ 이원아 2G 전화기를 목숨처럼 아끼며 011 번호를 21년째 사용하는 남상일의 취미는 다도와 서예다. 어머니 이명순 여사 말에 의하면 ‘양반 놀음’만 잘하고 집에선 못 한 번 박아본 적 없다는데 이 정도면 조선시대에서 냉동됐다 깨어난 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다. 반면 아내 이원아는 대세 아이돌 ‘워너원’의 노래는 물론이고 춤까지 꿰고 있는 흥 많은 신세대다. 즐겨듣는 음악부터 성격, 패션까지 정반대인 두 사람. 꿀이 떨어져도 모자란 신혼이건만 결혼 일주일 만에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상일은 목숨같이 아끼는 자신의 한복을 아내에게 넘겨주지만 아내의 한복 다림질이 성에 찰리가 없다. 폭발한 잔소리에 대응하는 아내의 비장의 무기가 공개된다. ‘어서 와, 결혼은 처음이지?’ 남상일의 초보 신랑 분투기 남상일은 사위 노릇도 남다르다. 장인어른과 어깨동무는 물론이고 ‘처가 예쁘니 아파트 정문도 예뻐 보인다’는 농담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능글맞은 사위다. 하지만 천하의 남상일도 식은 땀 뻘뻘 흘리는 자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내와 어머니의 ‘시월드’ 현장이다. 아직 어색한 시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선 초보 신랑 티가 역력하다. 고부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모르다 그가 꺼내 든 카드는 다름 아닌 다도와 가야금?! ‘국악계 싸이’답게 사위 노릇도, 신랑 노릇도 평범함을 거부하는 남상일. 그의 범상치 않은 초보 신랑 분투기가 10일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사진=M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전참시’ 이영자 휴게소 먹방, 이번엔 우동+도리뱅뱅..그 맛은?

    ‘전참시’ 이영자 휴게소 먹방, 이번엔 우동+도리뱅뱅..그 맛은?

    이영자의 휴게소 먹방이 화제다.지난 7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는 이영자가 매니저와 함께 금강휴게소를 향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영자는 금강휴게소에 대해 “휴게소의 세종대왕”이라며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모든 음식을 파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영자는 “금강휴게소에서 파는 우동은 꼭 먹어야 한다. 우동 국물이 정말 진하고, 면발이 탱탱하면서 쫀득쫀득하다. 그런 것 하나 먹으면 꽃샘추위를 견딜 수가 있다”며 우동을 추천했다. 또한 이영자는 “도리뱅뱅이라는 메뉴가 있다. 금강에 사는 민물고기를 고추장 양념에 발라서 철판에 구워서 판다. 그걸 입에 딱 넣으면 뼈 마디마디가 힘이 난다”고 설명했다. 매니저와 이영자는 휴게소 폭풍 먹방을 선보였다. 사진=MBC ‘전지적 참견 시점’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언로 넓혀라” “사교 폐단 없애자”… 유교 국가의 초석 쓰다

    기묘년인 1519년(중종 14년) 12월 20일 능주에는 밤새 내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은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목욕을 마친 뒤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마지막 소회를 담담히 써 내려 갔다.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였고 愛君如愛父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憂國若憂家 밝은 해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白日臨下土 나의 충심을 환히 비추는구나 昭昭照丹衷 -정암집 부록 권1 죽음을 앞두고 지은 시-#자신만의 길을 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김일손이 사초(史草)에다 기록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화의 빌미가 됐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이 세조를 헐뜯은 것이라는 훈구세력의 참소를 믿었다. 무덤에 묻힌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의 문집도 불태워졌다. 김종직 제자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김굉필과 정여창은 먼 지방으로 유배됐다. 1498년(연산군 4년)에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던 무오사화다. 사화를 겪은 뒤로 사림의 기세가 꺾이고, 자기를 수양하는 공부보다는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힘쓰는 풍조가 만연했다. 무오사화가 있던 그해, 17세 소년 정암은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 김굉필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김종직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화를 당하는 무서운 세상에 김종직 수제자인 김굉필을 찾아가 배운다는 것은 웬만한 선비도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약관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이미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는 선비의 지조를 지녔던 셈이다.#공론(公論)을 세우다 정암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데다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일찌감치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재주와 학식을 가진 그를 하늘은 초야에 묻어두지 않았다. 1515년(중종 10년) 6월 34세 정암은 성균관의 천거로 6품직에 올랐다. 정암은 벼슬에 오른 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 명성만 드러나는 것을 나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반드시 벼슬길에 나가야 한다면 차라리 과거를 통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과거 시험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정암이 사간원 정언(正言)일 때, 사림 출신 신진 관료인 김정과 박상이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했다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 됐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직후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훈구세력에 의해 폐위된 중종의 원비였다. 정암은 언관으로서 글을 올려 사림의 공론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의 흥망과 가장 관계돼, 통하면 다스려지고 평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합니다.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과 백관으로부터 아래로 마을과 시장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정암집 권2 사간원에서 양사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 이 계사 덕분에 김정과 박상을 탄핵했던 모든 사람이 파직됐으며, 정암은 중종의 신임을 받게 됐다. 정암은 연산군의 독재를 겪으면서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려면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열린 언론을 통해 이뤄진 사림의 공론에 의한 정치가 바로 유교의 왕도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묵은 폐단을 개혁하다 중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정암은 벼슬길에 나선 지 3년 만에 홍문관 실무 책임자인 부제학에 올랐다. 사림을 선도하고 임금을 도와 유교의 교화를 펼치는 자리를 맡은 그는 묵은 폐단을 개혁하는 조치로써 소격서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풀지 못하고 하늘에는 믿음을 받지 못하면서 도리어 아주 어둡고 근거 없는 곳에다 헛된 보답과 영원한 천명을 기원하니 매우 식견이 모자란 것입니다.”(정암집 권2 홍문관에서 소격서의 혁파를 청하는 상소) 소격서는 도교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다. 사교(邪敎)를 통해 복을 비는 것은 합리주의와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교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중종은 소격서가 선대부터 대대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폐지할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폐단을 개혁해 순수한 유교 국가를 실현하려는 정암의 굳은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임금과 신하가 꼬박 한 달 동안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소격서가 마침내 혁파됐다.#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다 정암은 바름과 부정함,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격했다. 임금에게 인의를 실천하는 바른 군자와 사욕을 추구하는 부정한 소인을 밝게 분별해 달라고 요구했다. “부정함과 바름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비록 바름으로 부정함을 억제하더라도 부정함이 바름을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목을 가지고 보더라도, 잡초와 잡목을 비록 호미로 열심히 제거해도 여전히 무성합니다만, 지초와 난초 같은 아름다운 화초는 날마다 북돋아 줘도 도리어 시들고 맙니다. 부정함이 쉽게 이기고 바름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사실은 초목에 비유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이치를 제대로 규명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셔야 할 것입니다.”(정암집 권4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계사) 그는 국가가 병든 근원에 사리사욕만을 좇는 훈구세력이 있다고 봤다. 부정함을 바로잡는 일단의 조치로 ‘정국공신’(靖國功臣)을 개정할 것을 청했다. 정국공신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였다. 훈구세력들이 자기 친인척 중에 공이 없는 사람도 마구 끼워 넣어 공신이 무려 117명에 이르렀다. 훈구세력의 탐욕과 부정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국공신을 개정하자 공신에서 삭제된 자가 76명이나 됐다. 이전부터 정암이 추진하던 개혁에 불만이 쌓였던 훈구세력은 이를 계기로 정암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519년 11월 15일 야밤을 틈타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경복궁 신무문으로 은밀히 입궐해 중종에게 밀계를 올렸다. 조광조 등을 위시한 사림들이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중종도 정암의 급진적인 개혁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민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던 터였다. 그날로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처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정암은 옥에 갇혀 심문을 받다가 사형에서 감형돼 사흘 만에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는 한 달 뒤에 사약을 받았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기묘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부른다.#왕도정치 실현 꿈꾼 선구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정암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학문에만 전념하려던 꿈을 접고 벼슬길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맞이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잘못이 있다면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나의 백성을 요순의 백성처럼 만들도록 온 힘을 다한 것뿐이었다. 정암은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대해 주던 임금이 하루아침에 돌변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진실한 마음만은 밝은 하늘 아래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정암은 뛰어난 학문적인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유려한 문장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고 그에 대한 선비들의 존경심은 매우 깊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유교의 최고 목표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개혁을 시도했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선조 때 윤근수가 경연(經筵)에서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을 향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조광조가 쏟은 공력의 결과입니다”라고 한 말은 후세에 끼친 정암의 영향력을 잘 보여 준다. 정암은 비록 개혁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조선이 완전한 유교 국가로 정립되는 초석이 됐던 것이다. 양기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 ■정암집 해제 정암 시신 수습한 학포 후손 주도…조선시대 세 차례 간행 정암집은 조광조의 시문집이다. 조선 시대에 세 차례 간행됐다. 처음 간행은 1681년 남원에서, 두 번째 간행은 1685년 대구에서, 세 번째 간행은 1892년 능주에서 진행됐다. 특히 세 번째 간행된 문집은 정암의 동지였던 학포(學圃) 양팽손의 후손들이 주도해 간행한 것이다. 정암이 유배됐던 능주는 학포의 고향이었다. 정암이 세상을 떠나자 학포가 시신을 수습해 가매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학포 후손들의 정암에 대한 존경심과 학포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정암집 간행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한국문집총간에는 능주 간행본 정암집이 수록됐다. 정암집에 수록된 글 가운데 정암이 손수 지은 것은 많지 않다. 생애가 길지 않았고 사화에 희생돼 유고가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록문자로는 이황이 지은 행장, 이이가 지은 묘지명, 노수신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됐다.
  • 승려 가스총 분사…소란 제지하던 행인 봉변

    승려 가스총 분사…소란 제지하던 행인 봉변

    술에 취해 행인에게 가스총을 분사한 70대 승려가 경찰에 붙잡혔다.부산 동부경찰서는 특수상해 혐의로 승려 A(74)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4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일 오후 6시 5분쯤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범일역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B(66)씨를 뒤따라가 길을 막은 뒤 호주머니에서 분말 가스총을 꺼내 B씨 얼굴에 1차례 분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눈에 심한 고통을 느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변 시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A씨는 이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승강기 내에서 소란을 피우자 B씨가 “집에 들어가시라”고 말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A씨는 앙심을 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길을 가던 B씨를 뒤따라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스총에 대해서는 A씨는 “호신용으로 들고 다녔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가 전라도의 한 사찰 승려로 이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우리가 남이가’ 박나래 “권진영, 무명시절 유일하게 손 내밀어준 선배”

    ‘우리가 남이가’ 박나래 “권진영, 무명시절 유일하게 손 내밀어준 선배”

    ‘우리가 남이가’ 박나래가 선배 코미디언 권진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26일 방송된 tvN ‘우리가 남이가’에는 코미디언 박나래가 출연했다. 이날 박나래는 무명시절, 힘들었던 자신을 챙겨준 선배 권진영에게 직접 도시락을 선물하기 위해 집밥 요리를 준비했다. 박나래는 “내가 무명이 길었다. (도시락을 드릴 분은)도움을 많이 주셨던 분”이라며 “잘 되고 나서 보답을 했어야 했는데 못 했다. 나래바에 초대 한 번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가 직접 담가주신 묵은지와 벌교에서 공수한 꼬막, 한우, 장어 등 재료들을 준비, 전라도 밥상을 뚝딱 차렸다. 정성을 담아 만든 음식은 코미디언 권진영에게 전해졌다.박나래는 “(권진영은) 고마운 분이다. 당시 일이 있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 선배님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어 “어린 나이에 코미디언이 돼 들어왔을 때, 너무 힘들고 외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가 나와 코너를 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 선배님이 함께 코너를 짜보자고 먼저 손 내밀어 주고 힘이 돼주셨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에 권진영은 영상편지를 통해“우리 만나면 폭식 한 번 하자”라며 “두번째 이야기 한다. 이번에 안 만나면 삼진아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요즘 네가 제일 웃기다”며 후배 박나래에 대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한편 ‘우리가 남이가’는 특정 인물에게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배달하고, 이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사진=tvN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별 후 들었던 노래, 내 이야기였던 까닭

    이별 후 들었던 노래, 내 이야기였던 까닭

    ‘링딩동’ 등 후렴구 ‘얄리얄리…’ 빗대 노래의 언어/한성우 지음/어크로스/364쪽/1만 6000원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본다 유행가 유행가 서글픈 노래 가슴치며 불러본다 유행가 노래 가사는 사랑과 이별 눈물이구나 그 시절 그 노래 가슴에 와닿는 당신의 노래”눈으로 읽다가 당신도 모르게 속으로 흥얼거렸을 이 노래는 가수 송대관이 2003년에 발표한 ‘유행가’다. 이 노래만큼 대중가요의 속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노래도 없을 터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웃다가 우는 우리 삶 그 자체가 노래가 아니던가. 대중의 인기를 얻은 유행가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노래에 보통 사람들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국어학자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주목한 것 역시 바로 이것이다. 그는 “(노랫말은) 옛 문헌이나 사전에 박제된 말이 아닌 삶 속에 살아 있는 말이니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비춰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소리와 방언을 오래 연구해 온 저자는 통계 기법을 활용해 언어, 시대, 사람과 삶이 노랫말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들여다본다. 모든 노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힘들기에 저자는 노래방 책에 실린 ‘모두가 두루 즐겨 부르는’ 2만 6250곡에 집중했다. 1923년 음반으로 발매된 최초의 가요 ‘희망가’부터 방탄소년단의 노래까지 약 100년간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선별한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울산대 한국어처리연구실의 형태소분석기 프로그램을 이용해 분석했다. 분석 결과 중에는 의외의 사실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음원 사이트 차트만 대충 훑어봐도 사랑 노래가 빠지는 법이 없다. ‘사랑 타령’이라고도 불리는 대중가요 가사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놀랍게도 ‘사랑’이 아니다. 의외로 1, 2위는 인칭대명사인 ‘나’(22만 9272회)와 ‘너’(12만 8781회)다. ‘사랑’은 8만 2782회 언급됐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노래는 ‘내가 너에게 들려주는 사랑 고백’이라고 재정의한다. 또 노래 제목에서 ‘사랑’을 꾸미는 말들은 ‘○○ 없는’, 슬픈’, ‘아픈’ 등 대체로 부정적인 말들이다. 긍정적인 수식어는 전체의 3분의1 수준에 그친다니 이별 후 유행가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다 내 이야기’라고 여기는 것은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던 셈이다. 저자는 최근 노랫말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로 사투리를 꼽는다. 아이돌 그룹명 중 한글을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인데 사투리로 가사를 쓴 아이돌도 있다. ‘서울 강원부터 경상도 충청도부터 전라도 우리가 와 불따고 전하랑께 우린 멋져 부러 허벌라게 아재들 안녕하십니꺼’ 구수한 말맛을 살린 이 노래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방탄소년단의 ‘팔도강산’(2013)이다. 저자는 이 노래 뒷부분 구절(‘결국 같은 한국말들 올려다봐 이렇게 마주한 같은 하늘 (중략) 전부 다 잘났어 말 다 통하잖아’)을 짚으며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말이 우리말”이라며 방탄소년단의 사회적인 감수성을 치켜세웠다. 요즘 노래에서 빠지지 않는 영어 가사의 대부분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기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문장의 무한반복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I’, ‘baby’, ‘love’, ‘yeah’, ‘girl’ 등 우리 노래 가사에서 많이 사용되는 100개 단어가 가사에서 사용된 비율이 64.2%였다. ‘I love you, oh my baby yeah’만 알아도 영어 가사의 대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샤이니의 ‘링딩동’, 소녀시대의 ‘Gee’처럼 ‘후크송’의 반복되는 후렴구를 고려가요의 ‘얄리얄리 얄라셩’에 빗대거나, 네덜란드 기원의 외래어 중 뱃사람을 가리키는 ‘마도로스’가 노랫말에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한다. 계량언어학을 적용해 우리 삶을 훑은 인문서라 딱딱할 것 같지만, 시대의 면면을 분석하는 저자의 통찰력과 차진 입담이 어우러져 쉽게 읽힌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전북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방향을 잡아 시내를 막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타난다. 만복사가 있던 자리다. ‘춘향가’의 몇몇 고전소설 판본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관아로 행차하기에 앞서 만복사를 찾아 노승들이 춘향을 위해 재를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은 김연수제 판소리 ‘춘향가’에도 있다. 춘향을 월매가 만복사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린 공덕으로 낳은 자식으로 그리고 있다.잘 알려진 대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금오신화’의 한 편으로 ‘만복사저포기’를 남겼다. 저포(樗浦)는 윷놀이다.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내기를 해서 이긴 다음 아름다운 처자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같은 사흘을 지내고는 헤어진다. 이 처자는 왜구에 죽은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줄거리다.소설 속 여주인공이 부처님에게 바친 축원문에는 당시 사정이 담겨 있다. ‘지난번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지금 만복사에 가면 텅 빈 마당에서 높이 1.6m의 당당한 석제 불좌(佛座)를 만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양생이 불좌 뒤에 숨어 아름다운 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 불좌가 아닐까 싶다. 매월당과 시대를 초월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1567∼1649)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휘하에서 종군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최척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성 옥영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정유재란 당시 남원이 왜군에 함락됨에 따라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과 기적적인 재회를 그렸다. 소설 속에서 최척은 만복사에서 가까운 동네에 산다. ‘춘향전’이 조선 후기 남원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만복사저포기’와 ‘최척전’은 각각 조선 초기와 중기 왜적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파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원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 기슭이다. 왜구의 세력은 단순한 해적 수준을 크게 넘어섰다. ‘만복사저포기’가 묘사한 대로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극성을 부렸다. 특히 14세기 후반기 피해가 가장 커서 고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계는 고려시대 왜구의 발생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있다. 1223년 현재의 김해인 금주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265년까지 10차례 이상 침입했는데, 대부분 선박 2~3척 규모였다. 왜구는 1350년부터 연안뿐 아니라 내륙에도 출몰한다. 해안 조창에서 걷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이 공격 목표가 되자, 고려가 세곡 운송의 상당 부분을 육운(陸運)으로 전환한 것이 이유의 하나가 됐다. 대형 선단을 이룬 왜구는 개경이 지척인 강화 교동도에도 출몰했고, 조정은 천도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는 태조가 즉위한 뒤 5년 동안에만 53차례나 침입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시대 왜구의 남원 침입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에 배를 매고 하삼도에 들어와 연해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선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신우’라 했다. 왜구가 충청·전라·경상도를 휩쓴 참상은 ‘만복사저포기’와 매우 닮아 있다. 당시 고려는 금강 하구 진포에 정박한 왜구의 선단을 최무선 장군의 화포로 모두 불사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한다. 이어 남원으로 몰려들어 운봉 인월역 황산에 진을 친 왜구를 당시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섬멸한 것이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비는 1577년(선조 10) 이 싸움의 현장에 세운 것이다. 만복사는 남원 시내 서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황산대첩비를 찾으려면 자동차를 타고 시내에서 동쪽으로 20분쯤 달려야 한다. 이성계가 어린 두목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끈 왜구를 무찌른 현장이다. 당시 지명 인월(印月)은 이후 인월(引月)로 바뀌었다. 부처의 교화가 세상 곳곳에 비친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따온 듯한 불교적 이름이 황산대첩 당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밤 보름달을 끌어올려 왜구를 물리쳤다는 설화 속 의미로 대체됐다.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학술상 사료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이라면서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라고 했다. 결국 1945년 1월 폭파됐고, 지금의 비석은 1957년 복원한 것이다. 그러니 대첩비는 받침돌과 지붕돌만 옛것이다. 하지만 파비각(破碑閣)에 비석 조각이 남아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훨씬 커졌다. 1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이성계는 대첩 이듬해 함께 싸운 원수와 종사관들의 이름을 이곳 바위에 새겼다. 일제는 이 글씨도 정으로 쪼아내 지금은 알아볼 수가 없다. 황산에 승전의 역사가 있다면 남원 시내에는 패전의 역사가 곳곳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곡창 호남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를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한 왜군은 정유재란을 벌이면서 전라도를 먼저 점령하고 북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 5만 6000명은 1597년 8월 13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성은 전라 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000명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남원 백성들까지 모두 1만명이 합심해 싸웠지만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하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세웠다. 지금의 만인의총은 옛 남원역 근처에 있던 것을 1964년 옮긴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남원성의 흔적은 시내에서 만인의총으로 가는 중간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옛 남원읍성의 서북쪽 모서리에 해당한다. 시내 남문로 골목 안에 있는 관왕묘도 왜란의 흔적이다. 남원싸움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은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1599년 자신들의 수호신인 관우의 사당을 지었다. 성 동문 밖에 있던 것을 174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관왕묘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조선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학자이자 조선 최초 문형(文衡·대제학)으로 칭해지는 걸출한 문장가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사람들은 동시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에게 열광할 뿐 왕조가 교체하는 격변기에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초기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 데는 양촌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과거에 급제한 까마귀 소년 고려 공민왕 때 얼굴이 유난히 검었던 청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작은 까마귀라는 의미의 ‘소오자’(小烏子)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이 18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공민왕이 급제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갑자기 그 과거를 주관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돌아보며 “아니, 이렇게 젊은 자도 급제시켰는가”라고 노기에 가까운 불평을 했다. 장차 크게 쓰일 그릇이라는 이색의 극찬을 듣고서야 왕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바로 양촌 권근이었다. 이후 양촌은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왕조의 교체기에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 양촌은 1389년(창왕) 38세 되던 해에 탄핵을 받은 이숭인(李崇仁)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편당으로 몰려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됐다. 이후 약 1년간 이곳저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유배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지만, 경우에 따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일 수도 있다. 바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촌의 저술도 이 시기에 주로 완성됐다. 1390년 7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익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양촌은 초학자들이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담긴 유학의 기본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림과 설명을 곁들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그 앞부분에 실린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4도인 ‘대학도’에 그대로 전재하고 있을 정도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1월 홍수로 인해 사면받아 풀려났으나, 그는 다시 충주의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의 주석 작업에 몰두했다. 54세 때인 1405년(태종)에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마지막으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완성했다. 겸손하게 ‘자신의 얕은 견해’라는 의미의 ‘천견’(淺見)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 경전 주석서다. 특히 유학 경전 주석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저술이다. 이런 학문적 업적은 결코 짧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벼슬살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학문적 성과가 유배라는 일종의 휴식을 계기로 꽃피게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려의 신하, 조선에 몸을 맡기다 양촌은 개국 소식을 듣고도 1년 가까이 양촌에서 은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양촌의 아버지 권희(權僖)를 통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양촌은 할 수 없이 계룡산에 행차했던 이성계에게 나아갔다. 그곳에서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개국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이성계의 덕을 송축하는 ‘풍요’(風謠)를 짓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국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왕조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실망감이었다. ‘축수록’(逐睡錄)이라는 야사에 “당시 선비들이 평소에 공을 종주(宗主)로 여겼었는데, 그때 이후로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신원에 가장 공이 컸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포은과 비교하며 변절(變節)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런 시각은 조선 후기까지 계승돼 유학에 끼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공자(孔子)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지 못하고 말았다.#황제가 시를 내리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와 조선은 초기부터 기세 싸움이 있었다.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 표전은 국왕이 황제에게 올리는 일종의 외교 문서다. 평소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이 거슬렸던 명나라 태조는 1396년(조선 태조)에 조선에서 보낸 표전의 표현을 문제 삼아 표문의 작성에 관여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들여보내라고 독촉했다. 의도를 눈치 챈 삼봉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자 45세의 양촌이 자원해 명나라로 들어가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를 가상하게 여긴 황제가 학사들이 모인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게 하고 시를 지으라 명했다. 양촌은 모두 24수를 지어 올렸는데 18수는 여정과 조선의 역사, 절경을 읊었다. 6수는 명나라와 태조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감탄한 황제는 그를 ‘수재’로 칭하면서 직접 시 3수를 지어 하사하고 융숭하게 대우했다. 외교 문제도 자연히 잘 해결됐다. 이 당시 양촌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훗날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사신 유사길(兪士吉)이 왔을 때 국경에서 양촌의 안부를 물었고 연회에서 양촌이 술을 권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받는 등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나라의 문장을 주관하다 관각(館閣), 즉 예문관과 홍문관은 주로 왕실 의식, 외교 문서 등 국가의 공식적인 제술(製述)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문학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이 배속되는데 그 수장인 대제학은 문형(文衡), 주문(主文)이라 해 국가에서 특별히 우대하였고 문신들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생각했다. 양촌은 조선 최초의 문형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인 문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관각체(館閣體)는 권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정조(正祖)의 평가에서 양촌의 문학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관각체는 수식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서정적인 문장에 비해 다소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관각체 비중이 높은 양촌의 문장에 대해서도 자연히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양촌의 문장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시의 경우는 꾸밈없이 평담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진가는 다음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봄날 성남(城南)에서의 즉흥시 봄바람에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 春風忽已近淸明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 細雨??晩未晴 집 모퉁이 살구꽃은 온통 필 듯한데 / 屋角杏花開欲遍 이슬 머금은 몇 가지가 내게로 기울이네 / 數枝含露向人傾 정도전은 이 시를 보고 “시어가 천지조화를 빼앗았다”고 극찬했다. #수성(守城)의 군주를 보필하다 조선은 삼봉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국가의 각종 시스템은 물론 궁궐의 이름까지도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과언은 아니다. 양촌은 목은 문하에서 삼봉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경세 능력도 출중했다. 서로를 존경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정치적으로 선택한 길이 달랐다. 이는 두 사람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다. 개혁적인 성향의 삼봉은 창업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고, 보수적인 가문에서 성장한 양촌은 수성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다. 삼봉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고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촌은 태종을 도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쪽에 더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누구의 업적이 더 뛰어났던 것일까.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창업 시기에는 삼봉이 곧 양촌이었고, 수성 시기에는 양촌이 곧 삼봉이었기 때문이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 [인사]

    ■해양수산부 ◇국장급 전출△주 영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송상근 ■중소벤처기업부 ◇국장급 승진△독일 교육파견 김성섭◇과장급 전보△운영지원과장 박치형 ■국민권익위원회 ◇과장급 승진△감사담당관 하홍순 ■부산항만공사 ◇2급 전보△감사실장 서정태◇3급 전보△감사실 이영무△홍보부 이정우 ■한국천문연구원 △기획부장 김경호△행정부장 신용태△광학천문본부장 선광일△전파천문본부장 김종수 ■기술보증기금 ◇1급 승진△성과평가실 임종학△윤리경영실 김경철△기술보증부 이은일△진주지점 김동준◇2급 승진△창업진흥실 박종필△벤처혁신연구소 이형승△포항지점 김기홍△군산영업소 윤선중 △부천지점 구민옥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승원스님△문화부장 종민스님△사업부장 승원스님△총무원장 종책특별보좌단장 정만스님△정무특보 금곡스님△문화특보 혜일스님△법무특보 만당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주경스님 ■안양시 ◇4급 승진△평생학습원장 박의순 ■용인시 ◇전보△교통관리사업소장 이동무△도서관사업소장 정해동△교육훈련 파견 김진배 이한익 ■포항시 ◇4급 승진△여성출산보육과장 권태흠△형산강사업과장 허성두△농업기술센터 기술보급과장 김진근 ■삼성바이오로직스 ◇전무 승진 제임스 박◇상무 승진 심병화 마이클 가비 ■삼성바이오에피스 ◇전무 승진 민호성◇상무 승진 신동훈 홍일선 ■키움증권 ◇전보△리스크관리본부장 겸 위험관리책임자 권혁동△고객자산관리본부장 김호범△프로젝트투자본부장 박대성 ■동아대 △한림생활관장 강익선△교무과장 정우철△공과대학 행정지원실장 최익준△스포츠단 스포츠지원과장 박동식△학생복지과장 하광봉△사회과학대학 행정지원실장 김경봉△도서관 학술정보지원과장 정태일△관리과장 박재진△기획과장 박진호△글로벌비즈니스대학 행정지원실장 권명수△의과대학 행정지원실장 곽동우△예술체육대학 행정지원실장 정혜선△기초교양대학 행정지원실장 오은미△대학원 행정지원실장 허남인△총무과장 김성목△경리과장 김진석△평생교육원 행정지원실장 서성구△자연과학대학 행정지원실장 하연주△연구지원실장 나진숙 ■광주MBC △편성제작국장 곽판주△보도국장 겸 전라도 천년 특집단장 한신구△기술국장 백호진
  • 전남북 연결 명품 메타세쿼이아길 조성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의 메타세쿼이아 길을 연결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조성하는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숫길 조성을 위한 도로점용 허가 등 인허가 절차를 공동으로 추진키로 전북 순창군, 전남 담양군과 합의했다고 20일 밝혔다. 이에따라 순창군은 행정절차가 마무리되는 다음달 메타세쿼이아 명품 가로수길 조성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군은 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가로숫길이 단절된 순창읍 백산리에서 담양까지 950주의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심는다. 2020년까지 추진되는 이 사업은 담양구간 8.5km, 순창 3.2km 등 11.7㎞ 구간 가운데 가로수가 없는 국도 24호선 9.6km에 메타세쿼이아를 심어 한국에서 가장 가고 싶은 길, 아름다운 길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또 순창 강천산∼고추장 민속마을∼담양 메타세쿼이아길∼죽녹원∼담양호를 잇는 투어버스를 운영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시스템도 만든다. 이 사업은 ‘전라도 1천 년 새로운 시작, 순담(순창·담양) 메타서클 프로젝트’ 사업이 국토부 공모 지역 수요 맞춤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순창군과 담양군측은 현재 연간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양 지역을 찾고 있는 만큼 이번 사업이 완료되면 향후 5년 안에 2000만명 관광시대를 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전남도, 수묵화를 테마로 한 국제 비엔날레 개최

    전남도, 수묵화를 테마로 한 국제 비엔날레 개최

    ‘2018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오는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두 달간 목포 갓바위 문화타운과 진도 운림산방 일원에서 개최된다. 전야제 행사는 8월 30일 진도, 개막식은 다음날 목포 문화예술회관 야외공간에서 열린다. 한국·중국·일본 등 국내외 수묵화 저명작가 300명이 참여하는 수묵전시관을 비롯 국제레지던시, 국제학술대회, 교육·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행사를 운영한다. 한국 전통회화를 테마로 한 국내유일의 수묵비엔날레다. 전남도는 살아있는 전통문화예술을 느끼고 체험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전라도 정도(定道) 천년을 맞아 수묵화를 널리 알려 나갈 방침이다. 수묵화의 전통성과 현대성의 비교 전시를 통해 미래 수묵화의 나아갈 방향성을 확립하는게 기본계획이다. 지역과 지역을 서로 잇고 도시 전체를 커다란 전시장으로 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방침도 정했다. 평면, 입체, 영상 등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진도 운림산방권을 중심으로 ‘전통수묵의 재발견’, 목포 갓바위권과 유달산권의 ‘현대수묵의 재창조’ 콘셉트에 따라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진도 운림산방권에서는 해외작가와 함께 산수화의 현대적 해석과 사물의 상태나 경치를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사생 전시를 통해 남도 실경을 재발견한다. 목포 갓바위권 일원에서는 전국 대학 청년작가 미술 동호인 초대전과 청년작가 중심의 현대적 작품, 남도 문예 르네상스를 연계한 그림들을 접할수 있다.세계 수묵의 미래 담론을 주도하기 위해 국내외 수묵작가·전시기획자·평론가들이 토론하고 결과물을 해외에 출판하는 ‘국제학술회의’도 만날수 있다. 음식점을 연계한 앞치마 미술제, 특화거리예술제, 수묵화를 활용한 전통시장 포장지 제작 등 저명인사와 지역주민,학생, 미술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도 마련됐다.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총감독은 “오늘의 수묵 어제에 묻고 내일에 답하다라는 주제로 수묵의 과거·현재·미래를 관람객에게 보여 주겠다”며 “현대 수묵의 변화와 전통성을 살려 한국 미래 발전 가능성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눈과 함께 찾아온 한파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나흘째인 12일 전국적으로 구름이 끼고 곳곳에 눈이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기상청은 11일 “충청도와 전라도, 제주도는 서해상에서 만들어진 눈 구름대의 영향을 받아 13일 새벽까지 제법 많은 눈이 내려 쌓이겠다”면서 “내린 눈이 얼어 도로가 미끄러울 수 있으니 교통 안전에 신경 써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경기, 강원 영서 등에도 산발적으로 눈이 날릴 수 있겠지만 예상되는 눈의 양은 1㎝ 내외로 많지 않을 것으로 기상청은 예보했다. 12일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4도에서 영하 3도, 낮 최고기온은 영하 3도에서 영상 4도로 각각 예보됐다. 아침 최저기온은 서울이 영하 9도, 춘천이 영하 14도, 강릉이 영하 8도 등을 보이겠다.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평창은 이날 구름이 끼고 흐리겠으며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4도, 낮 최고기온은 영하 3도로 한낮에도 영하권일 전망이다. 기상청은 “내륙을 중심으로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등 추위가 13일 오전까지 계속되겠다”면서 “건강 관리에 유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어김없이 ‘입춘 한파’…오늘 서울 체감 -18도

    어김없이 ‘입춘 한파’…오늘 서울 체감 -18도

    계절이 입춘을 지나 봄의 길목에 들어섰지만 오는 7일까지는 ‘입춘 한파’가 지속될 전망이다. 특히 5일 서울의 아침 체감온도는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등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영하 10도 안팎의 추운 날씨를 보일 것으로 예보됐다.기상청은 “5일은 전국이 대체로 맑은 날씨를 보이겠지만 중국 북부지방에 위치한 차가운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춥겠으며 찬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욱 떨어질 것”이라고 4일 밝혔다. 5일 전국의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20~영하 5도, 낮 최고기온은 영하 7도~1도 분포를 보이겠다. 지역별 아침 최저기온은 춘천 영하 17도, 서울·대전 영하 12도, 대구 영하 10도, 광주·부산 영하 8도, 제주 영하 1도 등을 기록하겠다. 한편 전라도 일부와 제주도에는 4일 새벽 대설특보가 내려져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에는 화요일인 6일 오후까지 눈이 이어질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기상청 관계자는 “중부지방과 일부 남부 내륙지방은 아침 기온이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건강관리에 각별히 유의해 달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입춘대길 건양다경’ 무슨 뜻?…‘봄 왔는데’ 전국 혹한 ‘꽁꽁’

    ‘입춘대길 건양다경’ 무슨 뜻?…‘봄 왔는데’ 전국 혹한 ‘꽁꽁’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은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봄이 시작됐다’는 입춘(2월 4일)을 맞아 대문이나 들보, 기둥, 천장 등에 써붙이던 글이다.그러나 입춘인 4일 전국이 혹한으로 꽁꽁 얼어붙었다. 전라도 일부 지역과 제주도에는 대설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눈이 내리고 있다. 오전 5시 기준 전국 주요지점 적설량은 광주 4㎝, 전남 목포 3.6㎝, 제주 2.5㎝ 등이다.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하지는 않지만 레이저·폐쇄회로(CC)TV 측정 적설량은 전북부안 줄포 14.4㎝, 고창 10.5㎝, 정읍 8.5㎝ 등으로 더 많은 눈이 쌓인 곳도 있다. 이날 전국은 한파로 종일 낮은 기온을 보이고 맑겠으나, 충남 서해안·전라도·제주도에는 눈이 오는 곳이 있을 전망이다. 낮 최고기온은 서울 -5도, 인천 -5도, 수원 -4도, 춘천 -4도, 강릉 -1도, 청주 -4도, 안동 -3도, 대전 -2도, 전주 -2도, 대구 -1도, 울산 -1도, 광주 -2도, 창원 0도, 목포 -3도, 부산 -1도, 여수 -1도, 제주 3도로 전국 대부분 영하권에 들 전망이다. 기상청은 북쪽에서 찬 공기가 계속해 유입되면서 기온이 매우 낮겠고,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 추우리라고 내다봤다. 이번 추위는 당분간 이어지면서 중부지방과 일부 남부내륙에는 아침 기온이 -15 이하로, 그 밖의 지역은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곳이 있겠고 낮 기온도 영하권에 머무르겠다. 전북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건조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추위가 이어지면서 난방기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화재 발생 가능성이 크다. 기상청은 산불 등 각종 화재 예방에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동해안과 일부 전남해안에는 강풍특보가 발효됐다. 해안과 산지를 중심으로 바람이 강하게 불고 그 밖의 지역에서도 약간 강하게 불겠으니 시설물 관리에도 주의해야 한다. 미세먼지 농도는 전국 모든 권역이 ‘좋음’ 또는 ‘보통’ 수준을 보이리라고 국립환경과학원이 예보했다. 바다의 물결은 서해·남해 앞바다에서 1∼3m, 서해·남해 먼바다에서 2∼4m로 일겠다. 동해 앞바다와 먼바다의 파고는 각각 1.5∼5m와 3∼6m로 예보됐다. 대부분 해상에 풍랑특보가 내려지는 등 바람이 강하게 불고 물결이 높게 일어 항해·조업하는 선박은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동해안에 너울로 인한 높은 물결이 해안도로나 방파제를 넘는 곳이 있어 안전사고를 조심해야 한다. 4일까지 천문조에 의해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 밀물 때 서해안과 남해안 저지대에는 침수 피해가 없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금산→전주 침범 왜군 두 차례 격전… ‘곡창 ’ 호남 지킨 관군ㆍ의병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금산→전주 침범 왜군 두 차례 격전… ‘곡창 ’ 호남 지킨 관군ㆍ의병들

    큰 대(大) 자에 이길 첩(捷) 자, 대첩이란 곧 크게 이긴 싸움을 이른다. 흔히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면 1592년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같은 해 10월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그리고 이듬해 2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들곤 한다. 꺼져 가던 목숨을 가까스로 이어 가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지휘하는 왜군 1만 8700명을 태운 배는 전날 밤 이미 부산진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왜군은 이튿날 안개가 걷히자 상륙해 부산진성을 포위했고 첨사 정발이 이끄는 500명 남짓 조선군은 전원이 장렬히 전사한다. 이후 왜군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양도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상한다.북변 방비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 장군이 갑작스럽게 삼도순변사에 임명된 이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 그로부터 보름도 지나지 않은 4월 28일이다. 탄금대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은 우왕좌왕했고, 결국 선조는 한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치 승리로 권율 전라도 순찰사 올라 행주대첩 한편으로 왜군은 곡창 호남으로 진출하려 안간힘을 썼는데 당연히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왜군이 장악한 부산진-한양 라인에서 호남으로 가는 방법은 수군(水軍)이 해로를 장악하거나, 보군(步軍)이 진주를 공략해 서진(西進)하거나, 지금은 충청도 땅이 된 전라도 금산에서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로 가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왜 수군은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대패해 기세가 꺾였고, 보군은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에 가로막혀 쉽사리 서쪽을 넘보지 못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 병력으로 하여금 이치를 공략하게 했다. 배치재라고도 하는 이치는 오늘날 충청남도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의 경계에 해당한다. 해발 340m의 고갯마루에 서면 완주 쪽으로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대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광주목사 권율은 7월 8일 1500명 남짓한 군사를 지휘해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복병전으로 왜군을 격퇴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관군(官軍)이 거둔 첫 번째 대승이었다. 권율은 이치의 승리로 전라도 순찰사에 올랐고, 같은 직함으로 이듬해 행주대첩의 명장이 된다. 권율의 휘하에는 화순 동복현감 황진도 있었다. 세종시대 명재상 황희의 5대손이라고 한다. 황진 역시 이치 승리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올랐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그는 경기도 죽산 전투 이후 패퇴하는 적을 경상도 상주까지 추격해 연전연승하기도 했다. 그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막아내다 머리에 조총을 맞고 전사했다. ‘선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해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장 위대기·공시억 등과 재를 점거해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해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해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수들을 독려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은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부친 순국 소식에 장ㆍ차남 참전 나섰다 모두 전사 당시 왜군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도 의병에게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치 전투 당시 권율 장군의 휘하에도 적지 않은 의병이 가세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월 3일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성을 공격하다 순국한다. 옥천의 조헌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 18일 금산성을 공격했지만 모두 순절하고 만다.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은 이들의 무덤이다. 전라도 익산 유생 이보와 소행진은 금산에서 들려온 조헌 의병의 순절 소식에 400명 남짓한 의병을 규합한다. 이들은 금산으로 향하다 8월 27일 이치에서 왜군과 맞닥뜨렸다. 400명의 무명 의병은 급조한 활, 낫과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들고 왜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모두 순국했다. 소행진의 큰아들 소계는 아버지 장사를 마치자 금산으로 달려갔고, 작은아들 소동도 형의 순국 소식에 금산으로 달려가 전사했다. 소동의 부인 민씨는 강화 친정에서 남편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권율 대첩비 1940년 왜경이 파괴… 1964년 재건 이치에 가려면 대전통영고속도로는 금산, 호남고속도로는 논산이나 전주를 경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치 전투라는 하나의 역사를 기리건만 유적은 ‘금산 이치대첩지’와 ‘완주 이치전적지’로 나뉘어 있다. 이치대첩지는 충남 기념물 154호로, 이치전적지는 전북 기념물 26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금산이 1963년 충남에 편입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굳어졌다. 완주 전적지는 이치 정상에 있다. 길가에 ‘이치전적지’라 새긴 비석이 있고, 그 안쪽으로 ‘무민공(武愍公) 황진장군 이현(梨峴)대첩비’가 보인다. 이치전적지 비석은 1993년, 이현대첩비는 2006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첩비 뒤편에 숨어 있는 ‘이치대첩유허비’(遺墟碑)에서는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은 느껴진다. 전적지 옆에는 휴게소가 있다. 탐방객은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게 마련인데, 전적지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 휴게소와 주차장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 이곳에서 금산쪽으로 1.5㎞쯤 달리면 대첩지가 나타난다. ‘이치대첩문’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권율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와 대첩비각이 보인다.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都元帥權公梨峙大捷碑)는 당초 금곡사(金谷祠)와 함께 1902년 건립됐다. 하지만 1940년 일본 경찰이 비석과 사당을 모두 파괴했고, 지금의 비석은 1964년 다시 세운 것이다.●무명 의병 희생 외면하다 2016년 ‘반성 비석 ’ 세워 이치전적지와 이치대첩지는 행정구역뿐 아니라 기리는 주체도 갈려 있다. 전적지는 황진의 기념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대첩지는 완벽하게 권율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념물이 승리한 관군의 역사만 기억할 뿐 무명 의병의 희생은 외면하고 있다는 반성도 뒤따랐다. 2016년 전적지에 400명의 무명 의병을 기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름하여 ‘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다. 이런 글귀도 보인다. ‘관군의 주력부대가 승리를 거둔 7월 전투는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병이 주도한 8월 전투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 채 묻혀지고 있다. 그것이 아쉬워 이 비를 세워 바로 알리고자 한다.’ 글ㆍ사진 dcsuh@seoul.co.kr
  • 천년의 숲, 천년의 정원… 전라도 ‘부활 프로젝트’ 빛난다

    천년의 숲, 천년의 정원… 전라도 ‘부활 프로젝트’ 빛난다

    새해 첫날인 지난 1월 1일 0시 광주 금남로 5·18 민주광장에서는 윤장현 광주시장과 이재영 전남도지사 권한대행, 김송일 전북도 행정부지사가 ‘천년맞이 타종식’을 갖고 ‘전라도 정도 1000년’을 선포했다. 이들은 ‘전라도, 천년을 품다. 새 천년을 날다’를 슬로건으로 선정하고, 다가오는 ‘천년 전라도’의 번영을 기원했다.올해는 ‘전라도’로 명명한 지 천년이 되는 해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전주 일원의 강남도와 나주 일대의 해양도를 통합한 뒤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상도(1314년, 고려 충숙왕), 충청도(1356년, 고려 공민왕) 등 국내 다른 행정구역 지명과 비교해 보면 ‘전라도’라는 이름이 가장 먼지 지어졌다. 이 명칭은 1896년(조선 고종 33년)까지 878년간 사용됐다. 전라도는 천년의 세월 동안 동북아 경제와 문화의 국제교류 중심지였다. 그러나 산업화에서 소외되면서 그 위상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낙후의 상징이 됐다.●2024년까지 기념사업에 4600억 투입 이에 따라 광주 등 호남 3개 시·도는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아 올부터 대대적인 기념사업에 나섰다. 반세기의 낙후를 극복하고 지역민의 자긍심을 살리자는 구상이다. 이들 3개 시·도는 올부터 2024년까지 모두 4600억원을 들여 ‘전라도 천년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한다. 오는 10월 18일을 ‘전라도 천년 기념일’로 지정하고 조선조 전라감영이 설치됐던 전주에서 대대적인 이벤트 행사도 펼친다. 호남권 3개 지자체는 행정협의회 등을 통해 모두 7개 분야 30개 기념사업을 선정했다. 분야별로는 ▲전라도 이미지 개선 ▲전라도 천년 문화관광 활성화 ▲전라도 천년 기념식 ▲학술 및 문화행사 ▲문화유산 복원 ▲전라도 천년 랜드마크 조성 ▲전라도 천년 숲 조성 등이다.이들 3개 시·도는 전라도 이미지 개선의 핵심 과제인 전라도 천년사 편찬에 착수했다. 2022년까지 천년사를 편찬, 보급한다는 복안이다. 천년사에는 전라도 탄생과 고려의 멸망, 조선의 건국과 기축사옥(정여립의 난·선조 22년, 1589년), 기축사옥~동학농민혁명(1894년), 근현대의 전라도의 시기별 인문지리·사회·정치 등이 망라된다. 이미 구성된 편찬위원회는 올 안으로 자료수집을 마치고 내년부터 4년 동안 15~20권을 발간할 예정이다. ‘지나온 전라도의 발전상’과 ‘다가올 천년에 대한 기대’를 주제로 ‘전라도 천년 연중 캠페인’도 진행한다. 기념 슬로건과 엠블럼 제작 등을 통해 새롭게 도약하는 전라도를 대내외에 알린다. ●청소년 문화대탐험단, 역사·인문 체험 호남권 3개 지자체는 지난해 11월 2018년을 ‘전라도 방문의 해’로 선포했다. 지난 26일 SRT 종착역인 서울 수서역에서는 호남권관광진흥협의회 관계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차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전라도 관광 100선’ 등 전라도 방문의 해를 알리는 첫 홍보 활동이 펼쳐졌다. 홍보물 배포, 선물 증정, 특산품 전시 등도 이뤄졌다. 이를 시작으로 다음달에는 평창동계올림픽, 3월에는 고속도로휴게소 등 비전라권에서의 아트&버스킹 공연 등 각종 이벤트를 갖고 ‘전라도행’ 붐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전략이다. 또 청소년 문화대탐험단을 구성해 국내외 청소년들이 전라도의 역사·인문 등을 체험토록 한다. 수도권과 전국 관광지 등에서는 매달 ‘전라도 천년 아트&버스킹’을 열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국제관광콘퍼런스를 열어 아시아의 중심 관광지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전라도 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문화행사도 연중 내내 펼쳐진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천년의 꿈’을 비롯, ▲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전라도 미래천년 프로그램 ▲전북도립미술관 전라 밀레니엄전 ▲전라도 미래천년 포럼 ▲전북도립국악원 ‘전라천년’ 특별공연 ▲국제수묵화 비엔날레 천년테마 특별전 ▲천년기념 해외 향우 고향 방문행사 ▲전라도 천년 국제관광콘퍼런스 등이다. 문화유산 복원 사업도 활발히 추진된다. 광주 희경루 중건, 전주 전라감영 재창조 복원, 나주목 관아 복원·나주읍성 재생 등이다.광주 희경루는 화재로 소실된 문화역사적 가치가 높은 광주시 대표 누정이다. 1541년(조선 문종 1년) 광주가 무진군에서 광주목으로 회복하자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희경루로 불렸다. 광주시는 내년부터 2022년까지 60억원을 들여 남구 구동 광주공원 안 부지 4911㎡에 전체면적 460㎡ 규모로 복원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재탄생한다. 전북도는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에 63억원을 들여 전라감영을 복원한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전라감영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통할하는 관청이었다. 내년까지 선화당, 관풍각, 내아, 연신당, 내삼문 등 5개 동과 실감형 콘텐츠 체험장이 조성된다.●나주목 관아·나주읍성 등 복원도 전남도도 오는 2024년까지 635억원을 들여 나주시 성북동·금남동 일원에 나주목 관아와 나주읍성 등을 복원한다. 사대문과 나주향교, 읍성공원, 성벽과 동헌 정비 등이 이뤄진다. 이와 연계한 다양한 전통도시 체험공간도 들어선다. 공원과 가로수길 등이 전라도 천년 랜드마크로 조성된다. 광주 구도심인 금남로·충장로·광주공원 등지에는 경관 문화관광 거점인 ‘천년의 빛 미디어 창의파크’가 들어선다. 2020년까지 440억원을 들여 상징 조형탑인 ‘천년의 빛’을 비롯해 빛의 숲, 빛의 길, 전망타워 등이 잇따라 건립된다. 전남 나주시 영산강 일원 5만㎡의 부지에는 테마별 ‘천년 정원’이 조성된다. 역사의 정원, 절의 정원, 뿌리정원, 문예정원, 미래정원 등이다. 전주시 구도심(전라감영 일대)에는 현대적인 밀레니엄 공간으로 ‘새천년 공원’이 들어선다. 2022년까지 450억원이 투입되며, 전라도 천년탑과 역사광장 등이 조성된다. 전라도 천년 숲 조성은 ▲무등산 남도피아 ▲국립 지덕권 산림 치유원 ▲전라도 천년 가로수길 등이 포함됐다. 무등산 남도피아는 무등산·광주호·가사문화 누정 등 전라도를 대표하는 자연과 역사문화자원을 보전·활용하는 방향으로 조성된다. 국립 지덕권 산림치유원은 힐링 생활문화공간을 목표로 진안군 백운면 일원에 들어선다. 가로수길은 전남 서남해안인 영광·함평~목포~해남·진도~여수·광양 등 16개 시·군에 걸쳐 522㎞의 해안을 따라 조성된다.●‘미래천년 포럼’ 등 천년 기념전 잇따라 올해 미래천년 포럼,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국제수묵화 비엔날레 특별전 등 10개 학술·문화행사도 잇따라 열린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올 한 해 지역작가 발굴육성과 지역미술 아카이브 구축에 집중하는 가운데 다음달 중진작가초대전을 시작으로 ▲신소장품전(2~3월) ▲하정웅컬렉션 오일전(3~5월 하정웅미술관) ▲대한민국 명품전(3~6월) ▲2018 문화도시광주전(4월) ▲미디어아트 특별전(11월~2019년 2월) 등을 진행한다. 올해 10월부터 전남 목포 갓바위 일원에서는 수묵화 위주의 ‘전라도 천년 1018~2018 특별전’이 열린다. 9월 7일~11월 25일 전북도립미술관에서는 ‘전라 밀레니엄전’이 펼쳐진다. 회화·조각·영상·설치 등이 망라된다. 광주시 관계자는 “전라도 천년사업이 단순히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라도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미래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와 관광활성화 등을 꾀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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