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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자수송 군차량 동원/시멘트등 공급돕게 비상열차 증편

    정부는 철도파업으로 일부 공급애로가 빚어진 시멘트 등 주요물자의 수송을 위해 군용차량을 동원하고 비상열차를 늘리기로 했다. 25일 경제기획원에 따르면 공급이 달리는 수도권에 시멘트를 긴급수송하기 위해 충북 제천∼서울 성북노선에 양회수송열차를 하루 6차례 새로 배정했다.또 수출입용 컨테이너 수송을 24일 7회에서 25일에는 18회로 늘리고,신문용지 등 기타화물열차도 25일부터 하루 3회씩 운행하며 유류는 지금처럼 하루 10회를 유지키로 했다. 유류는 전국적인 재고가 20일분으로 다소 여유가 있으나 강원도와 전라도·충청도 등 공급이 부족한 일부지역은 긴급수송열차를 최대한 확보,울산과 여천에서 실어나르고 휘발유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등유와 경유 유조차도 휘발유를 수송토록 했다.
  • 고향의 봄/김홍명(굄돌)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토지가 차츰 융기하기 시작하면서 생명의 움직임이 또한 눈에 띈다.민들레,패랭이꽃,산수유같은 몇 안되는 꽃과 이곳 저곳 가지에서 움트는 새 싹에서 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조국의 강토에 널려있는 농민의 이마에 봄이 온 것은 아니다.모내기를 하랴,요즘은 이것 저것 일 손이 바빠지고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하다.농촌새마을운동이니 하면서 국민의 식량은 해결해 놓았지만,「농민의 아들」 박정희 전대통령이래 생활이 크게 향상된 것은 없다.하기야 그이 때문에 이제는 보릿고개를 거정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입식 부엌이다,막걸리 대신 냉장고에 맥주도 한 잔 들여다놓고 꺼내 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과거에 「입에 풀칠하면 다행」이었던 농민이 쌀밥도 대수롭잖게 보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농촌에는 미래를 짊어지고 이끌어갈 젊은이가 하나도 없는가? 왜 마을마다 애 울음소리를 들은지 10년이 되어가는가? 왜 아무도 고향의 논밭에 되돌아오지 않는가? 농촌이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다른 형태의 삶을 선택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늙은 노인들이 그럭 저럭 일구어온 땅을 다시금 희망없이 매만지는 「버려진 지대」가 되어온지 오래다.모두 떠나가고 어쩔 수 없는 사람들만 남은 우리의 농촌­.그것을 위해 정부는 중농정책이니 농공병진이니 하면서 노력해 왔다.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는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된 민주주의의 시신과 인간적 삶이 거부된 노동계급의 눈물젖은 운명이 놓여있다. 고속성장의 그늘에서 부모의 땅을 지켜왔던 공이박힌 무뚝한 손이 없었던들 조국의 매판성은 더욱 가중했지 않겠는가? 우루과이 라운드가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정부는 정책개발보다는 미국의 눈치보기에 급급하며,기껏해야 책임을 장관에게 지우는 것으로 해결하려든다.하기야 허신행 전장관이하 모두가 못하겠다고 사표한번 던져보지 못했으면서도 농민의 자식이요 전라도에서 왔다고 생각하리라. 농촌을 살려야한다.그러려면 먼저 농민을 살려야한다.농민을 살리는 길,그것은 더많은 지원 뿐만 아니라 이 나라가 농민을 위해 정신적으로도 희생할 각오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 거꾸로 타는 가야금/송혜진(굄돌)

    국민학교 때 읽은 어느 동화책에선가,흥부 놀부의 성이 제비 연(연)씨로 소개된 적이 있다.이후 판소리 홍보가를 제대로 들어 보고서야 「흥부가」가 아니라 「흥보가」가 옳다는 것을,그리고 두 형제의 성이 제비 연씨가 아닌 「박」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는 『전라도는 운봉이 있고,경상도에는 함양이 있는데,운봉·함양 두 얼품(사이)에 박씨형제가 살았으되 형이름은 놀보요,아우 이름은 흥보였다…』라는 「흥보가」의 첫대목을 들어보면 누구나 다 알 일이다. 물론 전래 이야기를 새로운 동화로 창작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이런 상상력은 가뜩이나 만날기회가 없는 전동문화에 대한 상식을 더 비 상식적으로 만든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겪었다.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음반 진열대를 둘러보는데 지난해 발매되었다는 한 레이저 디스크의 겉표지를 보고 놀라움과 씁쓸함을 가누기 어려웠다.그 표지에는 아무리 국악에 관심없다해도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자주 보는 이들이라면 금방 다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가야금 연주자의연주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그 어른이 글쎄 가야금을 거꾸로 안고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것은 분명 겉표지를 디자인 하는 과정에서 미처 실수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은 되었지만 기가 막힌 심정은 이내 가라앉지 않았다.이 음반이 나온 것이 엊그제 일도 아닌데 그 실수가 아직도 바로잡혀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음악과 관련된 「잦은 실수」와 「게으른 바로잡음」,그리고 속내까지 알려하지 않는 무신경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텔레비전의 사극을 제작할 때에 의상 고증을 하느라 누구누구의 자문을 받아 얼마를 들여 재현했다는 기사는 이따금 보지만 드라마 속의 음악을 고증했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원로 선생님의 지적,연주자가 부는 악기가 대금이거나 단소거나 피리거나 할것 없이 그저 「피리」 아니면 「퉁소」라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악을 잘 몰라서…』라고 말꼬리를 얼버무리겠지만 사실 『모른다』고 태연히 말할 수 있는 현실은 잘못되어도 너무잘못된 것은 아닌가.이렇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한국인답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교육부터 소홀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동편제/서편제/판소리 “비교의 한마당”

    ◎새달 2일 국악당소극장서 「우리음악 감상교실」 열어/동/호령하듯 “호방”/서/감정 표현 “애절”/김명곤 진행,명창 김일구·안숙선 출연 판소리 영화 「서편제」를 본 사람 가운데도 막상 그 제목의 의미를 자신있게 설명할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그 아리송함을 「서편제」주연배우의 설명으로 풀고 명창들의 실연으로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의 차이를 귀로 확인할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국립국악원이 「판소리의 동편제와 서편제」라는 주제로 4월2일 하오 2시에 국악당소극장에서 여는 「우리음악 감상교실」이 그 것.영화「서편제」의 스타로 판소리 이수자인 김명곤이 진행을 맡고 명창 김일구와 안숙선이 각각 동편제의 호방한 소리와 서편제의 절절한 소리를 비교해 들려준다. 전라도 무속음악을 기반으로 한 판소리나 산조는 처음에는 같은 줄기에서 출발했더라도 여러사람에 의해 구전심수되는 과정에서 소리꾼이나 잡이들의 개성에 따라 음악이나 사설의 내용이 달라질수 밖에 없었다.여기서 비슷한 성격으로 한데 묶을수 있는 큰줄기를 「유파」 또는 「제」라고 하는 것.산조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등 그 가락을 완성한 명인의 이름을 딴 「유」를 쓰는 반면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그리고 중고제로 흔히 나눈다. 동편제가 호령하는듯 씩씩한 소리라면 서편제는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음의 꾸밈새가 많은 남도 특유의 창법이라는 것.정노식의 「조선창극사」는 보통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 흥덕등지의 소리를 동편제,서쪽의 광주 나주 보성등지의 소리를 서편제로 나누었다.그러나 그것은 판소리 극성기 때의 이야기고 이제는 그같은 개성이 많이 희석됐다는 것이 국악인들의 이야기다.따라서 이번 행사는 이제 실제 소리판에서는 거의 분별히기 힘든 동편제와 서편제의 개성을 확실히 느껴볼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는 셈이다. 국립국악원이 매달 여는 「우리음악 감상교실」은 입장료가 없으며 40명 이상의 단체에게는 편도 교통편을 제공한다.문의는 585­0155.
  • 전봉준 피노리서 관군에 잡혀(동학의 함성을 찾아서:6·끝)

    ◎우금치전서 대패… 주력부대 뿔뿔이 흩어져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라도 금구·원평까지 쫓겨 거의 해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봉준은 정읍의 입암산성에 잠시 머무르다 갈재를 넘어 순창 피노리로 들어갔다.전봉준은 그곳에서 김덕명·최경선등 동지들과 다시 기병할 것을 모의하다 관군에게 붙잡혔다.1894년12월2일 밤이었다.전봉준은 곧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됐다. 한편 김개남은 우금치 이후 청주에서 또다시 패퇴해 태인으로 숨어들었다 뒤따른 강화병방 황헌주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붙잡혔다.전봉준이 체포된 바로 그날이었다.김개남은 전주감영으로 압송돼 12월3일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 사형에 처해졌다.손화중 역시 고창에 잠복해 있다 부락민들에 의해 관군에 넘겨져 서울로 압송됐다.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속속 체포되자 법무아문에 임시재판소가 설치됐다.이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백7명이었다.이 재판에서 총대장인 전봉준을 위시해 손화중 최영남 김덕명 성두한등 5명에 사형이 선고됐다.재판은 일본군이 무차별 학살을 은폐하고 형식적인 절차를 갖추어 공정히 처리하려했다는 인상을 주려는 책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재판의 문초관 가운데는 내전정퇴서울주재일본공사가 끼어 있었다.전봉준에 대한 문초는 모두 6차례 이루어 졌다.기록에 따르면 문초관이 전봉준에게 『고부군수에게 피해를 입은 일도 없는데 왜 봉기했는가』라며 1차기병의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이에 전봉준은 『일신의 해를 위해서 일어섰다면 어찌 남자의 일이겠는가,인민의 괴로움을 없에 주려함이었다』고 답했다는 것이다.그는 또 2차기병에 대해서는 순전히 일본의 침략행위로 말미암은 항일투쟁이었음을 분명히했다. 전봉준은 교수대 앞에서 가족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는 법관의 말에도 의연했다고 전해진다.『다른 할말은 없다.다만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피를 뿌려주어라』 1895년3월29일이었다. ◎순창 피노리/동학혁명의 횃불 꺼진 곳/쌍치서 6㎞… 국사봉아래 작은마을 순창 피노리마을은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에게 붙잡힘으로써 동학혁명의 마지막 횃불이 사그러든 곳이다.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지금도 전봉준이 이곳에 몸을 숨긴 이유에 대해 머리가 끄덕여 질 만큼 깊은 산골이다. 쌍치는 정읍에서 최근 깨끗하게 포장된 산길을 따라 순창으로 가는 중간쯤에 있다.피노리는 쌍치면 소재지에서 포장도로를 버리고 옥정호가 있는 산내면쪽으로 비포장도로를 시오리쯤 가면 나타난다. 피노리는 하늘을 가로막은 해발 6백55m 국사봉 아래 있는 작은마을.전봉준이 밥을 먹다 관군에 붙잡혔다는 주막거리는 버스정류장을 겸한 구멍가게 뒤편이다.경운기가 간신히 들락거릴 정도로 작은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는 십여호의 농가가 이어져 있다.이 집들은 대부분 다시 지어지기는 했지만 TV사극에 나오는 주막을 보는 듯한 집의 구조는 1백년전과 크게 다름없을 것이라는 동네노인들의 이야기다. 내장산이나 옥정호 담양 순창쪽으로 갈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일정에 넣어봄직하다.
  • 농민군,장성 황룡촌서 경군격파(동학의 함성을 찾아서:4)

    ◎아무런 저항없이 전주향해 북상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보고받은 정부는 경군을 파견해 진압키로 했다.이에 양호초토사로 임명된 홍계훈은 장위영병 8백여명을 거느리고 인천을 출발했다. 군산포에 닿은 경군이 임피를 거쳐 전주감영에 이른 것은 황토현싸움에서 영군이 크게 진 다음날이었다. 농민군은 그러나 영군을 추격해 전주로 진격하는 대신 고부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장성등 오히려 남쪽으로 내달았다.농민군의 세력 또한 1만명으로 크게 불었다.반면 경군은 도망자가 속출해 불과 4백70여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홍계훈은 증원군을 요청해 총제영중군 황헌주가 7백명을 이끌고 법성포에 도착했다.홍계훈과 황헌주는 영광에서 합류해 장성방면으로 농민군을 뒤쫓았다.경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농민군에 선제포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으나 곧바로 반격에 나선 농민군에 쫓겨 별동대를 이끌던 대관 이학승마저 전사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물리친 관군이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마저 쳐부순 것이다.북상길에오른 농민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않고 전주성에 입성했다.계속 농민군의 꽁무니만 쫓던 홍계훈은 전주성 함락 다음날 완산칠봉 일대에 진을 쳤다. 자신만만해진 농민군은 여러차례 경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지형상 불리한 여건에서의 무리한 공격으로 오히려 큰 타격을 입었다. 이즈음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군이 아산만에 도착했고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뒤이어 상륙했다.이런 안팎의 위기상황에 농민군은 정부가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전주성을 물러나왔다.이른바 전주화약이다. 농민군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지만 전라도 일대는 행정과 치안의 마비상태에 빠져있었다.관찰사 김학진은 전봉준을 초치해 화합의 방도를 논의했다.동학교도들의 도움없이는 행정질서와 수령의 위신을 돌이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주·읍에 관청이나 다름없는 집강소를 설치했다.이로써 치안은 사실상 동학교도들에게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월평장터로 변한 황룡촌/광주직할시∼내장산국립공원 중간에 위치/장성은 어디에 있나 동학농민군이 경군과 최초의 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장성은 호남고속도로와 호남선철도가 모두 거쳐간다.또 서쪽으로는 영광·함평,동으로는 순창·담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대전쪽에서는 백양사인터체인지에서 17㎞,광주쪽에서는 서광주인터체인지에서 16㎞ 지점이다.내장산국립공원과 광주직할시의 중간쯤이라고 보면 된다. 황룡강은 장성인터체인지를 벗어나 영광방면으로 접어들면서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다.먼저 마주치는 월평장터가 옛날 동학군이 점심식사를 하던 황룡촌.다리 건너 신호리가 영광에서 뒤 쫓아온 경군이 농민군에 포격을 가해온 지점이다.동학혁명사에 길이 남을 역사의 현장이지만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다소 허망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백양사와 담양의 소쇄원등 수많은 고적과 내장산의 단풍,장성호와 담양호,고창의 석정온천,담양의 죽물 및 순창의 고추장·장아찌,영광 굴비등 특산물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깊은 역사성과 다양한 볼거리,여기에 인심좋은 남도특유의 푸짐한 먹거리가 가세하면 이 지역은 과장없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휴양권임이 분명해 진다.
  • 문학의 향토성/손춘익 아동문학가(굄돌)

    김유정의 단편들 「봄봄」이나 「동백꽃」,「가을」,「소나기」들을 읽게 되면 궁벽진 강원도의 어느 산골마을 냄새가 물씬 풍긴다.순박하고 가난한 또 해학적이고 인정미가 넘치는 농투성이들의 사뭇 어이 없는 삶이 구수한 토속어로 적나라하게 펼쳐지니 말이다.그곳의 자연,또 거기에 딱 어울리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마치 여유작작한 구경꾼처럼 김유정은 그들의 입담 그대로 에누리없이 옮겨놓은 것이다.상가에 끼어든 우스개꾼일까.그는 도무지 심각한 티도 없이 그러나 사실은 자칫하면 묻혀 버리고 말았을 의미심장한 세계를 파헤쳐 놓는다.그의 그런 역량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만일 강원도가 고향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그런 작품을 남길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동리도 마찬가지다.「무녀도」나 「바위」「찔레꽃」「황토기」같은 빼어난 단편들은 모두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다.경주의 풍광,그곳의 인심,또 문화적 전통에 젖지 않고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작품들인 것이다.문체마저도 경주지방의 억양을 닮고 있으니 말이다.그의 초기 대표작들에는 그의 핏줄 속에 흐르는 경주의 향토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듯하다. 시에서도 그런 예는 흔하다.함경도가 고향인 백석의 시나 전라도가 낳은 김영랑의 시만 해도 향토성이 그 생명이다.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라는 백석의 시는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고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게 한다.혹은 명절날 나는 엄메아베 따라,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은 또 어떤가.오메­ 단풍 들겠네나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의 김영랑의 시가 한결 감칠맛이 나는 것도 전라도 지방 토음이 주는 생동감 때문이다. 백문불여일독.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새삼 문학의 본질이 향토성이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문학의 세계화나 국제화는 다름아닌 향토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 아닐까? 고향이야말로 영원한 문학적 영토인 것이다.
  • 만석보가 불붙인 고부봉기(동학의 함성을 찾아서:2)

    ◎보 축조때 농민 동원,수세 강제징수하자 분노/전봉준,사발통문 돌려 동지규합… 관아로 진격 조선정부의 개항은 곧 재정 지출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이러한 지출의 일부는 관세수입이나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으로 메워졌다.그러나 대부분의 수입은 여전히 농촌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농민의 조세부담은 더욱 늘어났다.농민들의 불평 또한 폭발할 기미를 보였다. 여기에 일본의 경제적 침략은 조선의 농촌을 더욱 좀먹어 들어갔다.일본상인들은 농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약탈무역을 일삼았다.그리고 수확물을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으로 2중의 이득을 챙겼다.농촌은 더욱 헐벗었다.농민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갔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악정은 도를 넘었다.자기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농민들로부터 1천냥을 거두어 착복하는가 하면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게한뒤 정작 추수기가 되면 강제로 세를 거두었다.그 가운데서도 가장 농민들의 원성을 들은 부분이 만석보 수세의 강제징수이다.조병갑은 옛 만석보 아래에 새 보를 축조할때 농민들을 동원하고는 그 땀흘린 농민들로부터 수세를 징수하여 삼켜버린 것이다. 이 지역의 동학접주였던 전봉준은 1893년12월 조병갑의 탐학에 피해를 입은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관아로 찾아가 진정하였으나 옥에 갇혔다 쫓겨났다.그 사이 조병갑은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났으나 전라감사 김문현을 구어 삶아 1894년1월초 고부군수로 재부임했다. 이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려 김도삼등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민들을 말목장터로 모았다.전봉준은 군중을 두패로 나누어 고부로 달려갔고 관아는 힘안들이고 점령됐다. 전봉준등 주도인물들은 처음부터 서울로 진격해 부패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그러나 조병갑 대신 부임한 고부군수 박원명의 유화책이 뒤따른데다 농민세력의 결집에도 허점이 발견되어 일단 해산했다.그러나 고부사태를 조사하러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주모자를 색출한다며 동학도의 가족들까지 살해하자 민심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의 발상지/전북 정읍군에… 전봉준고택 등 유적 즐비/고부는 어디있나 동학혁명의 발상지라 할 만한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 일대로 들어가는 길은 두갈래이다.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이나 대전쪽에서 간다면 신태인인터체인지에서,광주쪽에서 올라간다면 정읍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만석보와 전봉준 고택·황토현전적지·백산등 전북의 동학관련 유적지는 대부분 신태인읍과 고부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신태인으로 나갈 경우 고부쪽으로 가다 처음 마주치는 것이 만석보유지비.만경강과 정읍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높다랗게 쌓은 둑위에 휑뎅그레하게 서 있어 멀리서부터 바로 눈에 띈다.여기서 이평면 소재지를 지나 고부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황토현전적지로 가는 길이 나온다.여기서 조금 더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전봉준 고택이 있다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큰길로 나와 가던 길로 계속가면 영원면 소재지가 나오고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고부다.고부삼거리에서 가까운 고부국민학교가 바로 고부봉기 당시 농민군이 점령한 고부관아가 있던곳.관아터에는 교사가 들어서 있으나 향교는 아직도 옛 모습대로다.
  • 시인 이근배 그산하에 가다(동학의 함성을 찾아서:1)

    올해 2월10일은 동학혁명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가렴주구의 만석보 수세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18 94년 이날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쳐들어간 것이다.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미완의 혁명이었지만,그 정신은 우리의 자아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외세에 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요,부패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이기도 했다.서울신문사는 동학혁명 1백돌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격동의 현장에 취재팀을 보냈다.거기서 이근배시인은 대서사시를 쓰고,동행한 기자는 역사를 엮었다. ◎횃불 타오르다/「풀뿌리 혁명」 100년 서사시로 돼새긴다 해가 뜬다 둥둥 배들평야에 해가 뜬다 황토재에 해가 뜬다 갑오년의 해가 뜬다 전봉준의 해가 뜬다 흰옷 입은 백성들아 뜨는 해를 보아라 이 기쁜 설날 아침 가슴에 뭉친 설움일랑 털어버리고 천지신명께 비는 마음으로 뜨는 해를 보아라 오백년 왕조의 기둥뿌리는 썩어가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 설날이 와도 먹을 것이 없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꽝꽝 얼어붙은 배들평야녹이려 해가 뜬다 더냐 황토재 몰아치던 눈보라 쓸어내려 해가 뜬다 더냐 고을마다 백성들 피고름 짜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같은 탐관오리 천벌주려 뜬다 더냐 난리 난다 난리 난다 쥐불처럼 번지는 소문 틀어막으려 해가 뜬다 더냐 오냐 오냐 알겠다 다섯자 남짓 작은 키에 상투 쫓은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땅 새집 마을 한 귀퉁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눈 부릅뜨고 앉은 전봉준이 일어서라는 해로구나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일러주는 해로구나 아니다 아니다 전봉준이의 해는 백성이다 전봉준이의 하늘은 백성이다 전봉준이는 백성들의 가슴속을 본다 그 끓어오르는 설움을 본다 나라를 살리려는 붉은 마음을 본다 전봉준이는 산을 본다 들을 본다 이나라 백성들 말고 누가 이땅을 밟으랴 왜놈들이 어디라고 넘보느냐 양놈들이 어디라고 기웃거리느냐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 갓 마흔살 녹두 전봉준이 일어선다 서마지기 논밭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글방샌님 전봉준 동네 아이들 네댓 가르치고 무덤자리 골라주며 끼니를 이어가던 외톨배기 전봉준 남들 보기에는 그러했겠지만 사실은 녹두만큼 작은 덩치속에 해를 하나 품고 있었다 새 세상을 껴안고 있었다 백성들이 주인인 나라 백성들이 하늘 대접을 받는 나라 배달의 자손끼리 오손도손 깨를 쏟으며 사는 나라 전봉준은 새 나라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어둠속을 헤매이며 빛을 모으고 있었다 동학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1893년 계사년 음3월 초열흘은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스물아홉번째 제삿날이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 날을 맞아 보은 속리산자락 장내 마을에 전국 동학교도들을 집결시키라는 통유문을 팔도 각읍 접주들에게 내린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척왜양창의」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려고 대의로 일어선다 드높이 올린 깃발아래 2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충의대접주 손병희 충경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금구대접주 김덕명 정읍대접주 손화중… 보은 장내 집회가 있은지 열달 전봉준은 어둠속에서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정읍,금구,부안,태인을 오가며 곳곳에 불씨를 묻어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갑오년 음 정월 마침내 횃불에 불을 붙일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보은집회는 고부봉기의 “전야제”/사회변혁 시도한 세력의 애타는 몸짓/사상적 구심점 잃은 민중의 호응받아/보은에서 고부까지 약사 한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왕조가 해체되는 시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통치기강은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농민전쟁과 변란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렸다.여기에 이양선이라는 외국배들은 협박에 가까운 통상요구와 함께 약탈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즈음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급기야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돼 황제가 피란을 떠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실학도 역부족이었다.그러자 기층사회에는 정감록같은 도참사상과 후천개벽설이 구석구석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수운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 대응책을 구하고 나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서학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민중사상의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수용했다.그러나 최제우 당시 동학은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래서 동학혁명이란 곧 「사회변혁세력이 동학을 정치·사회운동으로 활용코자 했던 몸짓」으로 평가한다.19세기 변혁운동을 이어받고 있던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계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최시형의 북접계와는 달리 현실투쟁이 그 목표였다.전봉준계는 이를 위해 북접계를 끌어들여 남·북접이 연계되어 일본과 서구제국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의 대중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서 1893년3월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던 보은집회가 그것이다.북접이 남접의 뜻에 호응해「척왜양창의」를 내건 평화적 집회였다.그러나 같은 시간 전봉준의 남접계는 전라도 금구에서 따로 집회를 가졌다.보은의 교도들과 합세한뒤 제물포로 올라가 직접 위와 양을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금구집회도 4월2일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막을 내렸다. 1890년경 입교한 전봉준의 지도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세력이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893년4월 금구집회 해산에서부터 1894년2월 고부봉기까지는 바로 혁명의 기운을 결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혁명이 싹이 튼 땅/「척왜양창의」 깃발 흔적 간데없고/충북보은군 장내마을 가는길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는 동학혁명의 전야제라 할만한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보은에서 상주가는 길을 따라 20분쯤 달리다보면 면사무소와 농협을 표지판으로 쉽게 찾을수 있는 전형적인 면소재지이다. 장내는 현재 1백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요즈음의 지리감각으로는 왜 이곳에서 그같은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다.그러나 장내는 남으로는 영동,동으로는 상주,서로는 옥천·대전,북으로는 청주가 모두 1백여리 상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에서는 이제 서쪽의 옥녀봉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삼가천을 경계로 농성하던 2만 동학교도들의 주문외는 소리와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깃발의 흔적은 찾을수 없다.다만 속리산 쪽을 향해 마을을 2백∼3백m쯤 벗어난 왼쪽 논 사이에 남아있는 동학교도들의 얕은 돌성만이 지나간 역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삼가천 너머에 있는 선씨 문중 아흔아홉간 고옥은 옥녀봉과의 절묘한 구도로 찾는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 3인조강도 주범 몽타주 전국배포

    서울경찰청은 21일 최근 시내 여관·건강식품점·슈퍼마켓등에서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3인조복면강도의 주범으로 보이는 20대후반의 용의자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 경찰에 배포했다. 경찰은 1백70㎝정도의 키에 스포츠형머리의 이 용의자는 운동선수처럼 단단한 체격이며 전라도 말씨를 쓴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와함께 지난 6일 발생한 서울 중구 황학동 명신당 금은방 특수강도 용의자의 몽타주도 공개했다.
  • 국내최고 목판지도 발견/16세기 후반에 만든 「동국주현도」

    ◎8도 한눈에… “독도는 우리땅” 입증 국내에서 제작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판본 전국지도가 발견됐다. 삼성출판박물관은 7일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국주현도」를 공개했다. 이 지도는 가로32㎝·세로47㎝ 크기이며 조선중기 당시의 지방행정 조직인 8도,3백30개 주현을 모두 표시하고 있다. 더욱이 우산도(독도)를 비롯 울릉도·대마도·일본등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한데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지도를 고증한 이상태박사(국사편찬위원회)는 『1540년이후에 설치된 경상도 가덕진과,1600년에 사라진 전라도 진원현의 이름이 함께 표기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도는 16세기 후반에 만든 것임을 알수 있다』고 밝혔다. 삼성출판박물관측은 「동국주현도」에 대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목판본 지도로는 1531년 제작된 「동람도」에 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을뿐 전해지는 것으로는 「동국주현도」가 가장 오래된 문화재다. 삼성출판박물관은 「동국주현도」를 포함,백두산사진과 지도등 관련자료 2백40여점을 「백두산자료 특별전」이란 이름으로 오는 28일까지 박물관 전시장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 대마도의 오사키항/박성수(일본속의 한국문화:9)

    ◎왜구 본거지… 고려이래 약탈 일삼아/우왕때는 연27회 침범… 논의 벼까지 베어가/진노한 세종은 배 2백20척 동원,정벌 나서 일기도의 가쓰모토(승본)항도 왜구의 소굴이었으나 그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 곳은 대마도의 오사키(미기)항이었다.오사키항은 대마도의 윗섬과 아래섬을 갈라 놓고 있는 바다,아사마(천모)만에 있는 아주 작은 어촌이었다.백제산성을 보고 나서 이 모사키마을을 잠깐 둘러보았으나 그 옛날 조선 세종때 우리 정벌군이 이 마을을 공격한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언제 그랬나 할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다.단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이 이곳의 옛 호주 하야타(조전)가에 보존되어 왔다는 조선국고신이라는 문서 한장이었다. 「병조봉교피고이라 위승의부위」운운하는 우리나라 관이임명장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5백년전인 연산군때(1503년)것이다. ○벼슬 주어 달래고 왜구가 하도 심하니까 창무책의 하나도 대마도 왜인들에게 관직을 주어서 우리나라에 오면 쌀도 주고 장사도 할수 있게 해 준 것인데 이들을 가리켜 수직위인이라 했었다. 유명한 신숙주(1417∼1475)의 「해동제국기」를 보면 대마도의 지도를 그려놓고 모두 82개에 달하는 포구가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신숙주의 지도에는 대마도가 마치 등을 구부린 송충이처럼 그려져 있는데 보기에도 징그럽다.이 송충이의 털구멍마다 왜구의 소굴이 박혀 있어서 제각기 마음 내키는대로 우리나라 남해안은 물론 동·서해안까지 왕래하면서 약탈하였으니 견딜수가 없는 일이었다.우리나라 연해안을 약탈한 왜구의 소굴은 대마도에만 있지 않았다.멀리 구주땅의 여러 포구에서도 왜구떼가 몰려왔으니 이들 송충이의 공격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구는 고려말에 극성을 이뤄 그때문에 실제로 고려가 망하고 말았다.눈물의 왕 공민왕(1352∼1374)재위 23년동안에 크고 작은 왜구가 1백15회나 들락날락하였고 경상·전라도는 물론 경기·황해·강원·평안·함경도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심지어는 고려의 서울 개경근처까지 쳐들어와 수도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다음 우왕(1375∼1388)때에 이르러서는더욱 심하여 재위 14년동안에 왜구가 3백78회나 쳐들어 와 연평균 27회라는 이분야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이무렵 우리나라 연해안의 여러 고을들은 『황량하게 텅 비었다』고 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불상·범종 훔쳐가 왜구가 어떻게 우리나라 고을들은 습격하였는가 하면 왜구는 처음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기분나쁘게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상륙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였다.말하자면 치고 달리기 작전을 폈던 것이다.마치 서양의 바이킹같은 강도행위를 자행한 것인데 이때문에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왕조가 교체되는 정변을 겪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성계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특세하더니 끝내는 정변을 일으켜서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러면 대마도 왜구들은 무엇을 약탈하여 갔는가.주로 곳간에서 먹을 양식을 퍼가거나 곳간에 식량이 없으면 논의 벼를 베어다가 배에 싣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는 식량만 가져가는 예절바른 도적이 아니라 부엌의 그릇은 물론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 제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의 불상과 범종까지 들고 달아났다.대마도에 원통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서는 본존이 고려불이라고 버젓이 자랑하고 있다.부처님만 고려제가 아니라 대웅전앞에 걸어놓은 범종까지 우리나라 것이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훔쳐온 것을 훔쳐 왔다고 이실직고할 그들이 아니다.고려왕이 바쳤다느니 조선왕이 하사하였다느니 그럴듯하게 둘러대기 마련이니 도적질당한 놈만 억울할수 밖에 없다. 왜구들은 물건만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납치하여 팔아 먹었다.이런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 오사키 어부들은 우리를 낯선 이방인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누구의 후손들인지를 너무나 잘알고 있다.15세기말 성종때의 학자 성현(성현)이 쓴 유명한 「용재총화」에 보면 왜 세종 원년(1419)에 우리나라가 대마도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려말에 특히 왜구가 잦았는데 우리나라 연해에 진(군사기지)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태조가등극한 이후에는 주요한 포구에 만호를 두어 수군을 상주하게 하였더니 잠시 잠잠해졌었다.그러나 그뒤 다시 왜구가 침노하여 와서 세종이 삼군에 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만7천명 출정 이처럼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발본색원을 노린 일대 영단이었다고 할수 있는데 병력은 총1만7천명,배는 2백20여척이었다.총사령관 이종무가 중군장을 겸임하고 좌우군장이 그를 보좌하였다.공격목표는 바로 이 오사키항이었는데 길잡이가 대마도 사람이었다.우리 함대는 마산포와 거제도를 출발하여 그날로 이곳 오사키에 도착하였는데 처음에는 선발대 10척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곳 마을 사람들은 도적질 하러 떠난 자기네 배가 돌아오는줄로 알고 술과 떡을 들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탄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르고 헤어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다.잇따라 수백척의 배가 들어오니 모두 기겁을 하고 산으로 달아났다.바로 그 현장이 오사키항인데 향토사학자 영류씨는 웃으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유를 보였다.그렇다.지금은 서로 웃으면서 그날을 회상할수 있으나 이곳에서 전사한 좌군장 박실을 생각하면 반드시 웃을 일만은 아니다.박실 장군은 우군장과 중군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총사령관 이종무의 큰 실수였다.만일 그가 박실의 좌군을 지원했더라면 대승을 거두어 왜구를 발본색원하였을 것인데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때문에 그뒤에도 왜구는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는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다.
  • 시선집 「황토현… 노래」,「전봉준을 위하여」 출간

    ◎시·판소리에 나타난 동학정신 조명/89편수록… 농민항쟁의 좌절·비애 절절이 갑오농민전쟁 발발 1백주년(19 94년)을 앞두고 시와 판소리에 나타난 동학정신을 조명한 2권의 책이 나왔다.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가 엮은 시선집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창작과 비평사간)와 시인 장효문의 「전봉준을 위하여」(자유세계간)는 동학을 문학적으로 조명한 첫 작업이란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한국문학의 시적 형상화작업은 때늦은 감이 있다.근대문학의 경우 소설가 채만식,극작가 김우진을 제외하고 시로 형상화된 작품은 거의 없었다.또 지난 68년 신동엽이 「금강」을 발표하기 이전에는 19 47년에 발표된 조운의 시조「고부 두성산」1편이 겨우 명맥을 이었을 뿐이다. 우리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시적 대응이 문학사에서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황토현에…」는 74명에 달하는 시인들의 시 89편이 실려 있다.지금까지 발표된 2백50여편중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조운,신동엽,고은,황동규,김지하,김남주,고재종,안도현등 원로에서부터 젊은 시인의 작품까지 잘 모아져 있다. 특히 일명「파랑새요」로 불리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비롯,「가보세 가보세」「개남아 개남아」「칼노래」「유시」등 5수의 민요가 수록돼 민초들의 마음속에 그려진 동학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민요편에 수록된 「유시」는 18 95년 3월29일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되기 전에 남긴 작품.「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편이더니/운 다하자 영웅도 할 수 없구나/백성사랑 올바른길 무슨 허물이더냐/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라고 읊은 전봉준의 비통한 심사가 절절하다. 이밖에 신동엽의 「금강」,황동규의 「전봉준」,양성우의 「만석보」,김남주의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문병란의 「전라도 뻐꾸기」등 대표적인 동학관련 시들이 빠짐없이 수록됐다. 20여년을 동학문학연구를 위해 매달려온 시인 장효문씨(53)의 「전봉준을 위하여」에는 동학농민혁명현장기행과 함께 「창작판소리 전봉준」이 실려있다.자신이 이미 발표한 「서사시 전봉준」을 개작해판소리한마당의 창본을 마련한 것이다.「고부성의 함성」「일어나면 백산,앉으면 죽산」「전주성의 무혈입성」「우금치여 말하라」「새야 새야 파랑새야」등 다섯 대목으로 동학을 판소리로 형상화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교수(인하대·국문과)는 『농민군의 일어섬을 기리고 그 좌절을 애도하는 80년대 시 일각의 단순한 봉기주의 모델로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장려한 서사시적 화폭은 결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동학전쟁을 문학화하려는 시인들의 좀더 창조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 성주 소성동(한국의 종교성지:12)

    ◎원불교명 지은 종법사 송규종사 탄생지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종사가 탄생한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달마산 기슭으로 원불교 5대 성지의 하나. 정산종사는 종친인 영남의 거유 송준필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운후 17세때 「큰스승」을 찾아 전라도로 가 정읍 모악산 대원사를 거쳐 북면 화해리 김도일의 집에서 수도중 이듬해인 원기3년(1918) 수위단 중앙의 자리를 비워놓고 인물을 찾던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중앙단원으로 입교했다. 정산종사는 원불교 창건사를 기초하고 대종사 열반후 2대교주로 종통을 계승,교명을 원불교로 정하였다.그는 또 대종사의 교재정비 유업을 이어 「원불교교전」을 편수했으며 교화·교육·자선·생산등 각기관의 터전확립은 물론 삼동륜이로 일원세계를 건설할 대세계주의의 깃발을 높이 드는등 원불교의 기틀을 다졌다. 이곳에는 정산종사의 탄생가와 그가 기도를 드리던 거북바위,또 성장구도지인 박실마을에 세워진 「소성구도지」비 등이 있어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무용평론가 정병호씨(이세기의 인물탐구:37)

    ◎민속춤 발굴을 평생의 업으로/30년동안 전국 돌며 잊혀져 가는 농악·굿 채록/진도 씻김굿 등 재현… 24개춤 문화재 선정 기여/양반춤 어깻짓도 일품… 요즘 「최승희무용」 재평가작업 몰두 상모달린 전립과 전복을 입고 세마치장단인 왼삼채와 덩더궁이로 농악패가 동네를 휘돌기 시작하면 온몸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면서 두둥실 어깨춤이 절로 난다. 무용평론가 정병호씨는 어릴 때부터 농악대 리더인 열두발 채상돌리기 상쇠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천하지대본의 기를 앞세우고 쇠꾼이 추는 부들상모놀이며 장고잡이들의 설장고춤,북을 멘 북잡이들의 설북놀이와 상모쓴 버꾸잡이들의 채상놀이,징과 꽹과리소리에 맞춰 정신없이 빠지다보면 자신도 농악의 한 패거리가 되어 지치도록 신명을 낸 기분이다.실제로 그는 부모 몰래 옷자락 펄럭이며 추는 무동의 꽃사비춤을 출만큼 농악과 굿에 홀려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전국의 굿판이나 농악판에는 그가 나타나지 않는 자리가 없다. 전남 영광의 풍년굿인 칠월꽃대림굿·농사굿·메굿과 여수에서 한참 들어가는 여천 백초리 가장농악,진도 소포리 마을농악,부여에서만 볼 수 있는 은산별신제며 충북 옥천 마티(마치)마을 부락제,경기도 도당굿,통영 오구새남굿,진도 도깨비굿,강릉·양주·횡성·예천·남원등등 굽이굽이 누비고 다닌다. 민속춤을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현장조사를 위한 것이라곤 하지만 지난 30년동안 최남단 도서지방에서 각도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춤이 있는 곳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만큼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예인 기질 타고나 현장에 가서 하나의 굿을 보고 유래를 더듬거나 채록하려면 춤꾼들에게 술을 대접하거나 사례비를 내기도 하고 자신의 춤으로 흥을 돋우기도 한다.너름새가 크고 어깻짓이 일품인 그의 양반춤·한량춤은 그곳 토박이 춤꾼들을 한눈에 매혹하여 춤과 춤이 어우러져 흥청거리는 한밤을 지샌다. 평소에 점잖고 근엄하기만한 대학교수로서 그의 일면에 그런 한량기질·예인기질은 어쩌면 타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서민층에서만 추어지던 병신춤이며 곱사춤 발탈과 휘겡이춤도 냉대받고 천대받던 것을 그가 발굴해서 정립해놓은 춤이다. 농악이나 굿은 마을전체가 축제분위기로 어울리는 협동춤이라면 병신춤이나 곱사춤은 신분이 다른 계층에 대한 익살과 풍자,서민의 애환과 해학을 담아 지난날의 시대상과 지역의 풍습을 꾸밈없이 반영하고 있다. 병신춤만해도 처음은 허튼춤으로 시작하여 턱붙인 곱사춤,엉덩이 빠진 곱사춤,안팎 곱사춤,문둥이 곱사춤,절룸발이 곱사춤으로 이어지고 곰배팔이와 오리발 흉내등 명연기가 곁들여져 인간의 진한 삶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 병신춤으로 유명한 공옥진도 바로 그가 발굴해낸 인기 연희자다. 78년4월 전라도 정읍에서 남의 집 잔치에 불려다니던 공옥진을 서울에 데려다가 처음엔 그녀가 묵고 있던 종로 청진여관 옥상에서 몇사람에게 병신춤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자그마한 공옥진은 손과 발을 오그려뜨린 괴상한 춤사위를 다양하게 선보였고 이 연희는 그가 회장으로 있던 전통무용연구회 주최로 공간사랑에서 한달간 공연되어 민속예술분야로서는 최장기록을 세울만큼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그다음은 울진·강릉·주문진·삼척등 주로 해안지역을 따라 오귀굿·용굿으로 대를 잇고 있는 김석출을 소개,이는 70여명의 무인을 배출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세습무가로 지금도 30여명의 무인을 이끌고 풍어제를 위한 미포별신굿을 보존케 하고 있다. 그외에도 목포출신으로 전국각지로 돌아다니며 정착치 못하고 있던 호남승무·살풀이춤의 이매방의 YMCA강당 공연을 주선,무형문화재 지정에 앞장섰고 밀양 백중놀이와 덧배기춤의 하보경옹,진도 씻김굿의 박병천,필봉농악 양승룡,이동안옹의 태평무와 발탈도 그가 발굴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케이스다. 조금도 늦추지 않고 민속춤에 대한 연구와 발굴에 정열을 쏟는 한편 마을춤의 복원과 대중화를 실천해나가면서 최근에는 몽골등 동북아 무용의 비교로 한국춤 원류찾기,친일파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40여년간 어둠속에 묻혀버린 최승희의 삶과 예술에 손대고 있다. ○나주 부농의 종손 전남 나주 산정동 대지 3천평이 넘는 「산정밑에」로 유명한 대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는 집에서 피아노와 첼로·아코디언을 배울만큼 부족함이 없는 밝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피아노보다는 집안 머슴들과 이뤄진 농악팀에 합류하기를 즐겨 엄격한 부친에게 걸핏하면 매맞고 갇히기 일쑤,집안에서 쫓겨나기가 다반사였다. 부친 정홍봉씨는 호남지방에서 알아주는 토호의 종손에다 시대에 앞장서는 인텔리로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휘문고와 서울대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시인 이상과는 서울공대 동기동창생이다. 전남 제일의 방직회사인 종방 대표이사로 있다가 6·25후 광주공업고와 여수고 교장을 지낸 교육자. 그러고보니 4남2녀중 집안을 이어갈 장남이 춤과 꽹과리장단에 미친 모습은 가관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어쩌다 저런 것이 우리 집안에 태어났나』 『엉뚱하게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느냐』는 노발대발이 그치지 않았고 어머니 김수순여사는 이런 아들을 부군에게 감추고 빌기 위해 한숨과 눈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부친에게 반발하는 기분으로 농악이며 굿판에 끈질기게 따라다녔고 43년 광주극장에서 공연된 최승희의 무용발표회를 본 것이 춤에서 영영 헤어나올 수 없는 계기가 돼버렸다. 그때도 집에서 돈을 주지 않아 아끼던 아코디언을 전당포에 잡혀 무용발표회 입장권을 샀다. 『이세상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예인이 있었던가』 온통 넋을 빼앗긴 채 천하의 개인을 한번쯤은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고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뛰쳐올라왔고 지금 명동 YWCA자리에 있던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당시 현대무용의 선두주자이던 한귀봉씨에게 현재 극작가로 활약하는 차범석,「춤」지 발행인 조동화와 함께 춤을 배우면서 최승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서울음대에 입학 한편으로는 서울대음대에 적을 두고 전봉초씨에게 첼로를 배우다가 6·25후 고향에 내려가 다시 조선대를 졸업.춤추기보다 무용평론과 이론으로 돌게 된다. 그는 반짝이는 다재다능으로 악보 없이 쇼팽의 마주르카 원무곡을 칠 수 있는 피아노 솜씨를 지녔으나 고향의 머슴방에 드나들며 두들기던 꽹과리소리를 잊지 못했고 가슴을 후비듯 스치는 마을의 신들린 축제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문예진흥원이 사라져가는 민속무용에 관심을 기울이자 그는 그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그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징과 꽹과리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움츠렸던 영혼이 잠을 깬듯 온몸에 활기와 생기가 솟구쳤다.어디선가 굿판이 벌어진다는 정보에 따라 좇아가기도 하지만 현장에 가서 소문을 듣고 즉흥적으로 탐사를 떠나기도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씨는 『아마 그가 하지 않았다면 농촌의 현대화 물결에 밀려 우리만의 독특한 민속·무속춤이 그대로 소멸될 뻔했다』고 할 정도다. ○청정한 성품 지녀 특히나 「멀고 아득한 땅」이란 인식 때문에 조선조 유배지로 유명한 진도 씻김굿과 동네번영을 위한 도깨비굿,사람의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승화시키는 다시래기는 이 지방 특유의 것으로 50∼60년전부터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그가 채록하여 보충해서 재현시킨 「작품」이다. 지난해 30년동안 몸담았던 중앙대를 정년퇴직하면서 그는 그가 10대때 흠모해 마지않던 세계적 무희 최승희무용의 재평가작업에 본격적으로 집착하여 일제시대 최승희의 라이벌이었던 영화배우 이향란(지금은 야마구치 도시코로 개명),최승희평전을 쓴 가바시오 사부로(고도웅삼낭)등 인터뷰된 사람만도 90여명.최근에 집필에 들어갔다.가족은 부인 서정구여사(61)와 아들형제.근면성실하고 예술에 대한 청정한 일념이 성품이다. 그처럼이나 춤을 만류하던 부친의 뜻대로 그는 무대에서 춤추는 대신 부친처럼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춤의 아름다움은 은은하고 고요한 가운데 맺고 어르면서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무동작의 여백일뿐,무수한 선들과 숨막히는 정지가 바로 그의 몸부림에 끊임없이 명멸하고 있음을 그만은 알고 있다. □연보 ▲1927년 전남 나주출생 ▲1946년 광주농업고졸업 ▲1946년 서울대음대입학(첼로전공) ▲1947년 조선교육무용연구소(현대무용가 한귀봉사사) ▲1955년 조선대 문이대 체육과(무용전공)졸업 ▲1961년 서라벌예대 무용과강사,고대출강 ▲1962년 서울대 대학원입학,서울대 사대강사,단국대체육과조교수 ▲1963년 중앙대무용과교수 ▲1964년부터 민속무,무속무 발굴 위한 현장답사 ▲1974년 중앙대 대학원졸업 ▲1976년 문화예술진흥원 무용교원 심사위원 ▲1977∼85년 전통무용연구회회장 ▲1978∼현재 민속학회 상임이사 ▲ 〃 국제극예술협회(ITI)한국본부 상임위원 ▲1981년 문화공보부 문화재위원 ▲1989년 홍콩화교대학서 명예문학박사 ▲1992년 중앙대 정년퇴임 중앙대 명예교수 이대 숙대 세종대 한양대학원출강 문체부 문화재위원 시문화재위원 국립극장운영위원·무용분과 레퍼토리위원 진도씻김굿 밀양백중놀이 필봉농락 호남승무 이동안 태평무와발탈 진도다시래기 평택,강릉,이리농락 통영검무 영산재 통영사도놀음 송파답교놀이 김숙자살풀이춤 이매방살풀이춤등 24개 문화재지정을 위한 발굴조사 보고서 외 논문 250편,평론 1백여편 발표 「창작무용」(교육무용협회 69년)「세계의 민속무용」(교육도서 71년)「민속춤」(청림사 74년)「춤사위」(문예진흥원 81년)「한국춤」(열화당 85년)「농락」(열화당 86년)「한국민속춤」(삼성출판사 91년)「민속기행」(눈빛사 92년)일본어판 「한국□민속무용」(동경백제사 93년)등 16권 전라남도 문화상,한국무용협회 학술분야 문화대상,한국출판협회「올해의 책」(「한국춤」「농악」)선정
  • 국보급 문화재 도굴 밀매/함평 백제고분서/금동편등 65점 팔아넘겨

    ◎전문업자 2명 구속 서울지검 형사1부(신광옥부장·이종주검사)는 15일 백제시대 고분에서 국보급으로 추정되는 문화재를 도굴·밀매업자들에게 팔아넘긴 추창군씨(47·전과2범·서울 도봉구 미아7동 852)와 김재중씨(55·전과2범·대구시 북구 침산2동 156)등 2명을 문화재보호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또 오필부씨(52·전과2범)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입건하고 박흥묵씨(49)를 수배했다. 이들은 지난 91년 3월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산173 소재 백제시대 횡혈식석실고분인 신덕고분을 삽·곡괭이 등으로 파고 들어가 석실안에 매장된 금동편 등 65점의 유물을 훔쳐 이 가운데 10여점을 골동품수집상에 팔아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조사결과 이들은 전라도 일대 야산을 돌며 발굴되지 않은 백제고분을 사전답사한뒤 석실안으로 파고 들어가 매장된 유물들을 파내 이를 브로커등을 통해 1점에 6백만∼2천만원씩 받고 골동품상에 팔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 벌…,꿀보다는 독이로구나(박갑천칼럼)

    『궂은날 마른날 가리지 않고/높은데 낮은데 헤이지 않고/머나 가까우나 날아다니며/부지런 바지런 움직이는건/어여쁜 꽃모양 탐함 아니요/복욱한 향내를 구함 아니라/애쓰고 힘들여 바라는 것은/맛있는 좋은꿀 얻으렴이라…』(육당 최남선의 「벌」1련).이시는 벌이 게으른 사람들에게 경고도 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농촌에서 어린날을 보낸 사람이라면 땅벌떼한테 혼쭐이 난일 한두번쯤은 겪었을 일이다.꼴을 베다가 땅벌떼집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을때 그야말로 「벌떼같이」달려든다.충청·전라도쪽에서는 땅벌을 「오빠시」라고 하는데 이 떼거리는 달아나는 사람을 따라 어디까지고 쫓아온다.그래서 사람들은 벌이다 하면 쏘는 곤충인 줄로만 알지만 수많은 종류 가운데는 안쏘는 것도 있고 또 쏘는종류라도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한 평화주의자다.그런가하면 농작물의 해충을 잡아먹는 종류도 있다. 성호 이익도 최육당에 앞서 벌을 찬양하는 글을 남겨놓고 있다(성호사설:만물문·봉사).그는 스스로 꿀벌을 기르면서 그 일상생활을 자세히 관찰한다.여왕벌과 일벌의 관계를 보면서는 사람사회에서의 군신의 관계를 생각하기도 한다.『쏘는 벌레로서 어질고 착하기로는 꿀벌 같은것이 없는데 더구나 이들은 서로 다투는 법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그는 꿀벌 기르는 법에 대해 설명한다.꿀벌을 노리는 천적은 개구리·귀뚜라미·거미·버마재비·그리마·두꺼비…등등이라고 적어놓고도 있다. 곤충학에 이정표를 세운 사람으로 평가되는 JH파브르가 벌때문에 곤충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파브르 곤충기」에 그에 대한 내력이 쓰여있다.그는 곤충학자 레옹 뒤프루가 쓴 사냥꾼벌(진노래기벌)의 생태에 흠뻑 빠져든다.그래서 그 생활을 관찰한다.특히 단 한방으로 포로를 꼼짝못하게 하는 침의 효능에 감탄한다.『…그 억센 연잎무늬바구미가 침 한방에 꼼짝못하다니….한데 그렇게 적은 분량으로 그같은 효과를 내는 독약이란 대체 무엇일까.그런 힘이라면 청산가리나 가졌을 뿐일 텐데…』 벌침요법·봉독요법이라는 것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것도 「청산가리 맞먹는」그 독성 때문인 듯하다.꿀벌의 독은 관절염·신경통등 만성통증 치료에 큰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16일부터 열리는 동서의학 통증치료 학술대회에서는 미국에 사는 의학자 김문호박사에 의해 봉독요법의 실제가 발표되기도 한다.그는 벌의독이 에이즈치료에도 효과를 보인다고 주장한다.어허,벌의 효용은 꿀보다 독에 있었구나.
  • 중국지역(민족주의시대의 교민정책:중)

    ◎재중교포,남북교류 가교로/연 1만명 북한방문… 「개방」전파/한국 불법체류 2만명 포용해야/1860년대부터 이주… 연변 등 2백만명 거주 5백만의 재외동포가 우리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민족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외교포와 관련,우리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것이 재중교포에 대한 문제이다.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약 6만명의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약2만명이 재중교포이다. 이들 재중교포가 한때 서울역과 서울시청앞 길가에서 한약장사를 했다.지금은 한약장사 대신 아침 저녁으로 품을 팔기위해 지하철 서울역에서 대우빌딩으로 연결되는 곳에 서있는 모습을 흔히 접할수 있다. 이들이 많이 모일 때는 역의 직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해산시키거나 멀리 쫓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말하자면 우리 일반인은 재중교포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출입국관리소에서도 추방의 대상으로 인식하는등 우리가 갖고있는 재중교포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부정적 인식 바꿔야 그러나 재중교포를 친척으로 둔 사람마저 그들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또한 반성해본 경우가 없다. 현재 중국에는 2백만명의 교포가 살고 있다.두만강 건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함경도사람이,압록강 건너의 요령성에는 평안도사람이,그리고 더 멀리 흑룡강성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 재중교포는 1860년대부터 이주하기 시작하여 한일합방과 3·1운동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대거 이주를 했으며 특히 1932년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대거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 재중교포는 북한과 왕래가 잦은 사람들이다.최근 재중교포들이 남한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북한이 자제하고 있지만 연간 1만명의 재중교포가 북한을 찾고있으며 7천여명의 북한인이 연변이나 요령성을 방문하고 있다.재중교포는 말하자면 남북대화를 실제 추진시키고 있는 사람들인 셈이다. 재중교포가 한국을 많이 찾는것은 한국이 중국이나 북한보다 경제적인 풍요를 더 누리고 있는 때문이다. ○월평균 수입 4만원 현재 중국은 우리의 60년대 이전과 유사해 재중교포의 월수입은 평균 4만원정도(중국화폐로 2백원)이다.이들에게 한국은 환상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돈벌이를 위한 한국방문이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현재 60세 이상만 친척방문 비자를 발급해주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 젊은 사람들은 관광비자로 입국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며 체류기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부득이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을수 없는 실정이다. 또 중국교포 대부분은 특별한 기술이 없으며 기술이 있다고 해도 한국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무엇보다 오랜 세월 사회주의 사회에 젖은 근무태도가 한국에서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이러한 사정으로 재중교포는 단순노동에 종사하는게 통례로 돼있다.남자는 건설현장의 힘든 잡일을,여자는 식당일이나 재봉일을 한다.직장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는 사람도 있으나 개중에는 노임을 적게주거나 밀린 노임을 고의로 주지않는 악덕 고용주밑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교포도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재중교포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불법체류자로 적발되어 추방당하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다.저녁이 되면 저녁대로 걱정,아침이면 아침대로 걱정이다. 일본이 재일한인을 포함한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비록 가혹하게 대하지만 브라질 아르헨티나등지에서 찾아오는 일본계 사람들에게는 체류기간을 넉넉히 주고 또 불법체류자라해도 구속하거나 추방하는 법이 없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방문목적이 돈벌이를 위한 노동일 경우에도 중국은 체류하는 교포에게 최선을 다한다. ○동포애로 감싸줘야 우리 민족만큼 자기민족에 대하여 아량이 없는 민족은 드물것 같다.이는 우리나라에 다른 민족이 살지 않기 때문이며,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의 경험이 너무 길어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갖추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국제화시대에 결코 유리한 심성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자기민족을 아끼고 감싸고 사랑할줄 모르는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어떻게 소중히 여길수 있겠는가. 고국을 찾아온 중국교포 2만명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차 어떻게북한에 있는 2천만 동포를 포용할 것인가.
  • 왕복전후(외언내언)

    덜컹 덜컹 고갯길을 기어 오르는 트럭.덜커덩 멈춰 섰다가 다시 기어 오르기 몇번째.연신 목탄불을 피워 올리던 조수마저 차에서 내린다.조수의 몸무게라도 줄이기 위해서다.천신만고 끝에 고갯길을 넘어서면 자동차는 서서 기다린다.땀을 뻘뻘 흘리며 지름길로 올라 오는 조수를.하루에 한번 읍내와 면소재지를 오가는 버스가 이 고갯길에 도달하면 승객들은 모두 내려서 자동차를 고갯마루까지 밀어 올려야 한다. 불과 반세기전 시골길의 정경이다.지금은 이 길에 터널이 뚫리고 옆 좌석에 아내나 자식을 앉힌 운전자들이 성능 좋은 승용차를 쌩쌩 몬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44∼48년)의 우리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사회상」(통계청 발표)의 여러 숫자들을 들여다 보느라면 흡사 타임머신을 탄듯한 기분이 된다.자동차의 경우 당시와 지금 사이엔 7백60배라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93년 4월 현재 등록된 자동차수가 5백56만4천대로 모든 길이 자동차로 넘쳐나고 자동차가 우리의 주요수출 품목이 되고 있는데 비해 지난 45년 당시 남한의 자동차수는 7천3백26대에 불과했다.그나마 조그만 고갯길도 기어 오르기 힘든 자동차들이었다. 그뿐인가.46∼47년의 주요생필품 생산량이 운동화 25명당 1켤레,양말과 고무신 각 8명당 1켤레꼴이었다는 통계수치도 있다.이 수치는 「맨발의 어린시절」을 보낸 장년층에게 겨울이면 얼어터지던 발의 고통스러움을 상기시켜준다.그들은 상급학교 입학할때,또는 설빔으로 얻은 운동화나 고무신을 차마 신지 못하고 「모셔놓던」세대다. 지역감정의 피해자로서 경상도보다 인구가 적다는 사실에 울분을 느끼는 전라도 사람들은 지난 44년 당시엔 전남이 남북한 13개 도중 경기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았다는 통계수치에서 또 무얼 느낄는지? 상전벽해란 바로 이런것일게다.
  • 「확실히와 학실히」 저자 서울대 이병건교수(저자와의 대화)

    ◎“경상도 발음 음운론으로 풀이”/“모든 언어평등… 사투리 열등감 씻어/김 대통령 말씨 관련 편견 불식을 강조”/간통(관통) 강간(관광) 등 재미있는 예들어 쉽게 서술 「증권」 대신 「정건」(정권)을 산다고 하는가 하면 의과대학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국회」의원이 아니라 나라를 해치는 「국해」의원이라 애써 발음하는 사람들이 있다.바로 경상도 사람들이다.「벤하와 개헥」을 통해 「학실」하게 「겡제」를 살리자고 외치는 김영삼대통령도 물론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언어학자인 서울대 영문과 이병건교수가 펴낸 「확실히와 학실히」(한줄기간)는 김대통령을 비롯한 경상도 사람들이 그렇게 발음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음운론의 입장에서 밝힌 책이다. 이교수는 『편견이 없다면 모든 언어는 평등한 것』이라면서 『표준어에 대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경상도 사투리의 열등의식을 씻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확실히와 학실히」는 우리말 소리의 체계를 이론을 앞세우지 않고 시중의 화제를 내세워 풀어간 책이다.「확실히와학실히」,「관통:간통 그리고 관광:강간」,「겡제를 살리자」,「아아는? 묵자 자자」,「주앙정보부」 등 각 주제의 제목만 보면 흔한 「YS유머집」을 연상시킨다.첫 인상뿐 아니라 간혹 나오는 언어학 용어(물론 이교수가 친절하게 풀이해 놓았다)와 발음기호의 난관을 극복하고 꼼꼼이 읽으면 이 책은 그 어느 「YS유머집」보다 재미있다는 것이 읽어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김대통령의 말씨가 좌중의 화제가 되는 수가 많지요.그런데 경상도 사투리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괴상한 언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해요』 이교수는 김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와 같은 「사투리권」인 진주·진양 출신.따라서 김대통령의 말씨,곧 자신의 말씨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가 싫어지면 경상도 사람이 싫고 전라도 말씨가 듣기 싫으면 전라도 사람이 싫어집니다.김대통령의 말씨만 해도 입의 구조가 잘못되어 그렇다는 둥 교육이나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이 그렇게 발음한다는 둥 하는 어찌보면 약간은 악의적인말들까지 있지않습니까.이 책을 쓰게 된데는 대통령의 말씨와 관련된 이미지를 바로잡음으로써 그의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 지도록 돕고싶다는 생각도 조금은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수학이나 물리학,경제학 등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쓴 과학에세이는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그러나 언어학,그것도 음운론이 이같은 체제로 나온 것은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이교수는 『경상도 사투리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리말 소리의 체계를 될수 있는대로 광범위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이와함께 이 책에는 언어는 경제적인 쪽으로 바뀔수 밖에 없다는 「사람은 될수 있는 대로 게을러지려고 한다」와 사회적 편견이 없으면 언어에는 우열이 없다는 「언어민주주의」 등의 항목이 「재미」 속에 조용한 설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교수는 이 책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순 우리말로 하면 「고추장사」가 된다고 익살을 부린다.이 과학적 억설이 궁금한 사람은 서점에 가서 최소한 그 부분만이라도한번 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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