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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회고록
    202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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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심려끼쳐 죄송… 경제난 가슴 아파”/전·노씨 석방 이모저모

    ◎동네입구서 하차,환영객과 악수/수형소감 묻자 “교도소 가지마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22일 특별사면으로 2년여에 걸친 수감생활을 끝내고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건강한 모습으로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를 나선 전씨와 노씨는 경제난국 타개를 위해 온 국민이 단합해 줄 것을 당부했다. ○소설 읽고 회고록 준비도 ○…상오 10시50분쯤 750일만에 안양교도소를 나온 전 전대통령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수감기간 동안 국민들이 보내준 끊임 없는 격려에 감사한다”고 출소 소감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 전씨는 “안정 속에 성장을 거듭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경제위기를 맞게 됐는지 모르겠다.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고 개탄. 이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에 대해 “난국을 헤쳐나갈 관록있고 믿음직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돼 기쁘게 생각한다”고 평가. 전씨는 교도소 생활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여러분들은 절대로 교도소에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대기 중이던 승용차에 탑승. 전씨는 수감생활 동안 역사소설과 대하소설 등을 주로 읽었으며 틈틈이 지난 일을 메모하는 등 회고록을 준비했다는 후문. ○…노 전대통령도 상오 10시50분쯤 밝은 표정으로 서울구치소를 나온 뒤 “국민 여러분께 크나큰 심려를 안겨드린 데 대해 정말 송구스럽다.국민여러분의 깊고 따뜻한 사랑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인사. 노씨는 특히 손자·손녀의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는 “할아버지 힘내세요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같다면서 위안을 삼았다고 교도관들이 전언.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를 출발한 전·노 전대통령은 30여분만에 연희2동과 1동의 자택에 도착,환영나온 주민들과 일일이 악수. 연희동 골목 입구 곳곳에는 주민들과 ‘서대문축구연합회’ ‘재경경북도민회’‘건우회원’등이 ‘어서오십시오.그동안 고생많았습니다’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환영. ○“대구서 올라오셨습니가” ○…전 전대통령은 동네 입구에서 사저까지 1백여m 가량을 걸으며 환영객들에게 “반갑습니다.오늘은 날씨가 포근해서 다행이네요” “대구에서 여기까지 올라오셨습니까”라고 인사. 전씨는 한 불교신자가 건네 준 염주를 받아들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뒤 사저 바로 앞에서 손자를 안고서 취재진에게 잠시 포즈를 취하기도. ○…노 전대통령은 아들 재헌씨와 함께 집 앞에 도착,기다리던 주민 3백여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고 인사 집안으로 들어간 노씨는 딸 소영씨와 노재봉 전 국무총리 등과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인사.
  • 전·노씨 석방 전날 이모저모

    ◎전­소지품 정리·교도관 위로·마지막 예불/노­틈틈이 써 온 회고록 수백장 따로 정리 특별사면을 하루 앞둔 21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책과 필기도구 등 그동안 사용해 온 소지품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출소를 준비했다. 일요일에는 면회와 접견이 금지되고 종교행사나 운동시간도 따로 없어 나머지 시간은 독서나 명상을 하며 보냈다. 안양교도소의 전 전 대통령은 수감생활 내내 위안을 삼아 왔던 사동 앞 공터의 좌불을 향해 마지막 예불을 올렸다. 교도소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이 전담 교도관들에게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며 섭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고 전했다. 서울구치소의 노 전 대통령은 틈틈히 써 온 회고록 수백장을 따로 정리했다. 전 전 대통령 등 사면대상자들은 22일 상오 10시를 전후해 석방될 것으로 보인다.법무부 관계자는 “일반 출소자는 대개 상오 5시를 전후해 석방되지만 전·노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 의결 등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다소 늦게 석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 등은 특별사면 사실을 통보받는 즉시 감방에서 나와 수의와 담요 등 관물을 반납하고 출소자 대기실에서 구속 당시에 입었던 사복 등 영치품을 되찾은 뒤 옷을 갈아입는다. 이어 당직계장 입회하에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묻는 간단한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 뒤 형기 종료 사실이 기재된 확인증을 받는 것으로 1시간 가량의 출소 절차를 마친다. 전 전 대통령은 출소할 때 교도소 정문 앞에서 대국민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생각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이양우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은 곧바로 자택으로 향할 것”이라면서 “오랜 수감생활에 몹시 쇠약한 상태”라고 말했다.
  • “「이순자 회고록 제출」 사실무근”/권성 재판장 문답

    ◎영·미 판례 참조… 성공한 쿠데타 처벌 12·12 및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 항소심 재판장인 서울고법 권성 부장판사(55·사시8회)는 18일 기자들과 만나 『하나의 재판을 끝냈다는 것 이상의 특별한 소감은 없다』면서 선고후의 심경을 털어놨다.다음은 권부장판사와의 문답 내용. ­그래도 재판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힘든 일로 치면 지난 93년9월 윤관 대법원장 취임이후 추진된 사법실천연구발전위원회 실무책임을 맡았던 일이다.굳이 따지자면 법복을 입은 이후 두번째로 힘들었다. ­심리기간이 짧지 않았나. ▲판사 3명으로는 역부족이었다.외국 판례와 논문 번역 등에 다른 10여명의 판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성공한 쿠데타 처벌이론은 어떻게 완성됐나. ▲영·미판례를 뒤졌다.특히 미국 학술잡지에 난 논문 3편을 많이 참고했다.이 논문에 파키스탄·가나 등 세계각국의 쿠데타에 대한 판례와 학자들의 분석이 들어있었다. ­6·29선언까지를 내란과정으로,금융실명제 위반부분을 무죄로 판단한데 따른 파장이 큰데. ▲판결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이미 내 손을 떠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의 회고록이 재판부에 제출됐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증거자료를 살펴보면 알 것이다. ­판결문 작성은 언제 마쳤나.전씨에 대한 감형결정 시기는. ▲판결문은 선고 이틀전인 14일 작성을 마쳤다.형량에 대한 판단과정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재판과정에서 계속됐다.엄밀히 말하자면 선고순간 결정된 것이다. ­재판진행 과정이 원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가능한한 검찰과 변호인 쌍방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게 하고 요청사항이 있으면 조사해 주려고 노력했다. 한편 이순자씨는 「6·29 선언」 과정과 전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을 곧 발간할 것으로 알려졌다.
  • 전씨 일어공부·독서로 소일/수감생활 1년

    ◎「분단과 전쟁」 읽어… 이순자씨 1주1회 면회/메모지에 일기 써… 회고록관련 내용 관심 전두환 전 대통령이 3일 안양교도소에서 수감 생활 1년을 맞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달리 「골목길」성명,경남 합천에서 강제구인,수감 후 28일간 단식강행 등 자신에 대한 사법처리에 대해 분노를 나타냈던 전씨는 1년이 지난 요즘은 담담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상오 6시 기상해 아침 점호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독서·맨손체조 등으로 시간을 보낸 뒤 하오 10시40분에 잠자리에 든다. 특히 퇴임후부터 구속되기 전까지 교수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아온 일본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전씨가 「대망」 등 대하소설과 성경·불경·동양고전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상당량 독파했다』면서 『요즘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밝혔다. 1식3찬의 교도소 관식을 깨끗이 비우는 것은 물론 사비로 끼니마다 김·계란·소시지·우유·사과 등을 구입해 먹고 있다.매일 들르는 이양우 변호사와 1주일에 한번 찾아오는부인 이순자씨 등을 통해 바깥소식을 듣는다. 전씨는 노씨가 메모지를 활용해 회고록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게 매일 일기를 써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김씨측,「사료」에 “발목”

    ◎군원로 회고록 「노병의 증언」서 쿠데타 규정/5공 비사담은 「전사」는 검찰측 무기로 변해 12·12사건의 피고인들이 제 꾀에 넘어갔다.치적을 남기려고 만든 책자에 되레 발목을 잡혔다. 검찰은 이 책자들을 법정신문에서 정곡을 찌르는 무기로 활용,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문제의 책자는 「제 5공화국 전사」와 「노병들의 증언」,「10·26,12·12,광주사태」 등이다. 25일 열린 12·12 사건의 3차 공판에서 검찰신문과 박준병피고인의 진술로 5공전사의 비밀이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5공 전사의 편찬은 12·12의 성공 직후인 79년 12월14일 보안사의 회식석상에서 노태우 당시 9사단장이 제의했다.노피고인이 보안사령관이던 81년초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에게 지시,편찬이 시작돼 박피고인이 보안사령관이던 82년 5월 완간됐다. 4·6배판 크기의 책자 6권과 부록 3권으로 총 3천8백쪽이다.연두색 표지로 제목이 금박이다.70년대의 국내 정치·경제·사회상황에서 81년 4월의 11대 국회 개원까지의 중요 사건을 기록,정리했다. 필진은 당시 육사교수이던이병주 대령(역사학)을 필두로 모두 8명.이들은 3백여명의 증언을 듣고 『학자적 양심에 따라 편찬했다』고 밝혔다. 박피고인은 당시 집필자들에게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이조실록과 같은 사초를 만드는 자세로 만들라』고 당부했으며 『20년 뒤 공개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한쪽 입장에서 써서 과장됐을 수도 있다』며 『육본측 지휘관을 면담하지 못하고,주로 영관장교들의 회고에 의존했다』고 평가절하했다. 「노병들의 증언」은 12·12 사건의 성격에 대한 군 원로들의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육사 8기회(회장 윤흥정)가 지난 92년 5월 간행한 1천3백70쪽의 회고록이다. 그는 『12·12는 일종의 하극상 성격을 띤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출세욕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찬탈,군의 인사권과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전두환 피고인의 자서전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쓴 천김성씨가 장세동피고인 등의 면담을 토대로 저술한 「10·26…」도 12·12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주요 자료로 활용됐다.검찰은 이들 책자를 증거물로 신청할 참이다.〈박선화 기자〉
  • 전기공 바웬사/반영환논설고문(외언내언)

    옛날 동양에서는 높은 관직에 있다가 물러나면 귀거래사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간다.조선시대에는 정승벼슬을 한 뒤 강호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하며 저술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미덕으로 돼 있었다.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으려 했다.송강 정철의 가사문학이나,고산 윤선도의 시조문학은 그런 은거에서 나온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오히려 돋보이는 인물이다.1980년 재선에서 낙선한 뒤 고향 조지아주로 낙향해 카터 평화센터를 설립,국제분쟁 해결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평양에도 다녀왔고 아이티·보스니아·수단 등 분쟁이 있는곳 어디든지 나타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활약하며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지난해에는 「늘 생각하며」란 시집을 출간,베스트셀러가 되었다.낙선후 써 낸 회고록 「신념을 지키며」도 베스터셀러였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 초대총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원래의 생업인 구둣방을 차렸다.우리로 말하면 「신기료 장수」다.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행복한정치인들이다. 최근에는 대선에서 실패한 레흐 바웬사 폴란드 전 대통령이 원래의 본직인 조선소 전기기술자로 복귀하리라는 외신이 전해지고 있다.우리에겐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다.자유노조의 기수로,자유폴란드의 첫 민선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옛 동료와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전직대통령의 만년은 참담하다.이승만대통령은 하야후 망명,장면총리는 강제 하야,박정희대통령은 재임중 피살,그리고 전두환·노태우대통령은 군사반란죄와 거액뇌물수수죄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던 전·노전직대통령은 평범한 시민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축재와 부정을 저질렀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전직대통령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우리도 이젠 대통령직을 물러난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전직대통령을 갖고 싶다.
  • 묵비권행사로 조사 난항/전씨 수사 어떻게 전개될까

    ◎정 총장 연행·병력출동과정 규명에 초점/최 전 대통령 진술 받아내기에 주력할듯 3일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을 상대로 검찰은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을까.또 전씨구속이후 검찰수사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전씨 사건의 주임검사인 김상희 부장검사 일행은 3일 상오 전씨가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절차를 끝냈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검찰청사를 출발,1차 구류신문조사를 벌였다.그러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전씨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얻어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은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 혐의사실에 지난해 12·12수사결과 발표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새로운 사실이라곤 수감중인 노태우전대통령에 대한 4시간동안의 조사내용을 첨부했을 뿐이다. 이는 전씨의 구속기간인 20일안에 공소유지가 가능할 만큼 수사가 일사천리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현재 전씨의 완강한 자세로 보아 12·12와 5·18사건에 대한 향후 조사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전·노씨 뿐 아니라 12·12와 5·18 관련자 모두를 의법처리해야 한다는 전제아래 시작된 검찰재수사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날 구류신문에서는 12·12사건에 대해 전씨의 주장과 검찰의 혐의사실이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정승화 당시 육참총장을 합수부로 연행·조사해야 할 필요성이 충분했는지 여부와 ▲계엄군과 합수부 양측 가운데 어느쪽이 먼저 병력을 출동시켰는지 ▲최규하전대통령의 하야배경 ▲참모총장연행시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낸 과정 등을 집중신문했다.그러나 전씨로부터 『재판과정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는 답변을 받아내는데 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검찰은 나머지 관련자조사로 수사의 초점을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전씨 구속이후 수사의 핵심은 최규하전대통령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검찰내부의 지배적인 기류다. 『사후에 회고록을 통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온 최전대통령의 진술을 받아내는 것이 전·노씨 및 나머지 관련자들의 혐의를입증하는 「지름길」이라는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또 나머지 관련자들도 반란죄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 더이상 「피의자신분」으로 소환조사할 수 없다는 점도 난제다.이들이 검찰의 소환에 불응해도 강제할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이다.검찰은 이를 풀 「묘수」를 강구하고 있다.
  • 전씨 소환 불응­전·노·최씨 수사

    ◎「전씨 선구속 후수사」 검찰방침 선회/노씨 구속만기 촉박… 환문 서둘러/최규하씨 「회고록」 증거 확보 방침 전두환 전대통령이 2일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겠다고 발표하자 검찰은 전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청구라는 초강수로 대응했다.정면도전에 대해 한치의 빈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단호함의 표시다.「속전속결」로 이번 사건수사를 마무리짓겠다는 뜻도 엿보인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날 전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청구 방침을 공개하면서 『전씨가 정면도전으로 나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밝혔다.전씨가 이날 순순히 소환에 응했다면 조사를 마치고 일단 귀가시키려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검찰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선구속 후수사」로 급선회했다는 설명이다. 검찰의 이같은 강경방침은 이날 하오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대검과 서울지검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에서는 사전구속영장 청구가 임박했다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전씨가 정면도전을 선언한 만큼 재소환통보나 구인장·긴급구속 등의 요식절차는 불필요하다는 것이 검찰 수뇌부 긴급대책회의의 결론이었다.현행법상 강제수사의 강도가 가장 높은 사전영장을 택해 전씨를 「강제구인 즉시 구속수감」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5·18특별법 제정과 관련,야당이 주장하는 특별검사제도입 논의를 일거에 불식시키겠다는 생각도 깔려있다는 분석이다.야당 정치공세의 「핵」인 전씨를 전격구속하는 것이야 말로 특별검사제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선구속 후수사」라는 원칙의 바탕위에서 수사를 더욱 가속화시키기 위해 「다단계 수사기법」을 구사하기로 수사일정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이날 노태우 전대통령이 수감된 서울구치소에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 3명을 보내 12·12및 5·18에 대해 처음으로 신문한 것도 「속전속결」식 수사일정에 따른 것이다.노씨의 구속 만기일이 오는 5일로 촉박한 것도 조사를 서두르게 만든 요인이다.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직접 조사도 최대한 앞당기겠다는 방침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다.검찰이 이미 최전대통령측과 접촉해 왔다는 사실도 이날 이종찬수사본부장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최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다음주초쯤으로 전망되고 있다. 검찰은 최전대통령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직접 조사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왔다.다만 최전대통령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고 12·12 및 5·18사건의 「선의의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참작,소환조사 방식보다는 방문조사 형식을 취할 가능성도 있다. 검찰은 그러나 최전대통령이 조사에 계속 불응하거나 「입」을 열지 않으면 증거확보를 위해 법원에 「공판기일전 증인신문」을 요청,강제 구인한 뒤 증거조사를 벌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특히 최 전대통령이 집필을 거의 마무리한 「회고록」을 증거로 입수,최 전대통령이 전·노씨 등 당시 신군부세력에 의해 받은 유·무형의 압력을 입증하는데 주력할 방침이다.
  • 8·15 대사면/정주영·박철언씨 “나도 풀렸나” 놀라

    ◎주요 복권 정치인의 움직임/정몽준 의원 민자 입당 “시간문제”/김근태씨는 부천·서울 출마 확실 뛰어넘는 대폭적인 사면·복권조치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특히 사면·복권된 정치권 인사들의 면면을 볼 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지난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적대관계에 섰던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박철언 전의원,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측은 사실을 확인하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정치권에서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경축분위기가 정치적인 해빙으로 이어진데 대해 국민대화합의 계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있다.특히 정치적인 재기가 불투명했던 인사들이 거의 모두 사면·복권됨에 따라 최근 신당의 출현등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맞물려 「정치의 봄」을 기대하는 인사들도 많다.조심스럽게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는 일부 당사자들의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먼저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번 조치를 「명예회복과 화해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정회장은 정치의 근방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측근들에게 밝히고 있다.그러나 대한축구협회장 등으로 여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명예회장의 아들 무소속 정몽준의원의 민자당 입당은 시간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소취소된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은 현재 미국 뉴저지에서 신병을 치료하고 있으며 6개월간 요양후 귀국할 것이라고 측근은 밝혔다.그나 박전최고위원은 귀국후에도 회고록 집필 등에만 전념하며 정치활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자민련 부총재로 이미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박철언 전 의원은 이번 조치로 「날개를 단 격」이 됐다.부인 현경자 의원에게 물려준 대구 수성갑지역구에서의 15대 출마는 기정사실화되고 있다.그러나 박전의원이 자민련의 당무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어 대구지역의 무소속 움직임이나 신당에 참여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이번에 복권된 김근태전민주당부총재는 현재 새정치 국민회의의 지도위원으로 고향인 부천이나 서울에서의 출마가 확실하다.정치개혁 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지막 재야」 장기표씨는 이번 복권을 계기로 장을병씨등과 함께 「3김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제3정치세력 결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민주당의 김부겸 당무기획부실장은 이부영부총재 등의 구당파 활동을 도우며 세대교체에 대비하겠다고 밝혔다. 수서사건으로 정치권에서 축출됐던 오용운 전 국회건설 위원장 등의 재기도 주목된다.건강이 안좋은 것으로 알려진 오전의원은 자민련 김종필총재와의 오랜 인연으로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더라도 자민련을 후원하는 쪽의 소극적인 정치활동은 할 것으로 전해졌다.민주계로 한때 5공청문회 스타 대열에 끼었던 김동주전의원은 최근 개인사무실을 내고 조용히 여권을 도우며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그는 민자당에 복귀할 의사를 갖고 있지만 당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직 미지수다.이대섭 전 의원도 당분간 정치권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재기를 도모하겠다는 자세다. ◎정치권 반응/여­“신선한 충격”/야­“개혁 후퇴”/대화합정치 구현… 김대통령다운 결단­여/“민심이반 만회조치”·“긍정평가”엇갈려­야 김영삼대통령이 11일 단행한 「8·15 특별사면·복권」에 대해 여권은 예상하지 못한 큰 폭에 「신선한 충격」이라며 환영.그러나 신당과 민주당은 사정으로 처벌받은 일부 구여권인사가 포함된 데 대해 「개혁의 후퇴」라고 혹평했다. ▷청와대◁ ○…사면복권을 담당하고 있는 민정수석실의 관계자들은 발표 직전까지 『법무부에서 전담하기로 했다』면서 보안을 철저히 지키다 이날 하오에야 『뚜껑이 열리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귀띔을 했다. 다른 비서실 관계자들은 대부분 발표 때까지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으며 박철언전의원 등이 모두 특사에 포함됐다는 얘기에 『역시 YS다.통이 크다』고 놀라워했다. 청와대측은 또 특사내용이 발표된 뒤 여론의 동향이 호의적이라는 자체판단을 내리고 고무된 분위기다. 한 관계자는 『그동안 각종 사건·사고로 얼룩진데다 서석재전장관의 발언파동,그리고 무궁화호 발사 이상과 남북관계악화 등 악재만 있었는데 오랜만에 신선한 발표가 나왔다』고 말했다. ▷민자당◁ ○…김윤환 사무총장은 『역사적인 광복 50주년을 맞아 기쁨과 감격을 되새기고 국민화합의 전기를 이루기 위해 대폭적인 사면·복권을 대통령에게 건의한 바 있으며 결과에 대해 크게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승윤 정책위의장은 『대통령이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기 전 이같은 대화합의 정치를 펴는 것은 김대통령다운 정치철학의 구현』이라면서 『이같은 화합이 정당 사이에도 이어져 사회분위기를 이끌고,나가 남북의 화합을 이끌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민정계의 한 당직자는 『이번 조치는 그 폭과 내용에 있어 획기적이라는 점에서 김대통령다운 정면돌파식 난국타개책』이라고 평가하고 『이번 사면·복권에서 일단 당의 요구가 대폭수용됨에 따라 앞으로 있을 당정개편 등 김대통령의 정국운영방향에 더욱 관심이 모아지게 됐다』고 기대를 표시했다. ▷야권◁ ○…김근태·장기표·김부겸씨등 주요시국관련 사범이 사면·복권된 것을 환영하면서도 권력형 부정비리관련자가 포함된 데 대해서는 『개혁의 실종을 의미한다』며 강한 유감의 뜻을나타냈다. 가칭 「새정치국민회의」의 박지원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한마디로 민심이반을 구여권 끌어안기로 만회하려는 조치』라면서 『사정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다수 포함된 것을 볼 때 「개혁은 끝」이라고 평가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이규택 대변인은 『국민대 화합차원에서 정부의 사면·복권조치를 환영하며 그 의의를 평가한다』고 일단 긍정평가했다. 이대변인은 그러나 5·6공비리에 연루된 권력형 부정비리관련자가 대거 사면·복권된 점을 들어 『대화합차원이라고 하지만 국민정서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며 현정권의 개혁의지가 실종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자민련은 『박철언 부총재에 대한 복권은 국민의 승리』라면서 『정부의 사면·복권조치를 전폭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박부총재측은 『당연히 원상회복해야 할 일』이라고 애써 담담해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부총재의 한 측근은 『죄가 없는 사람을 죄를 덮어씌웠으니 이를 벗겨주는 것은 결자해지 차원에서 당연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박부총재는 이날 사면·복권대상에 포함된 사실을 모른 채 하오에 친지 몇사람과 함께 북한산 산행에 나섰다. ▷구여권◁ ○…전두환 전 대통령측은 『이번 조치가 전전대통령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이 아니냐』고 말하면서도 사면의 폭이 예상보다 큰 데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민정기비서관은 『우리는 정치를 하지 않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정당처럼 정부의 조치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박영훈 비서관은 『잘된 일』이라고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종구 전 국방장관 등 6공인물의 대거 사면·복권에 환영을 표시했다.그러나 노전대통령이 외유중인 탓인지,인사를 오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관계자는 뜸한 편이라고 박비서관은 설명했다. ○…현정부 출범이후 미국과 일본 등에서 「유랑생활」을 해온 박태준전민자당 최고위원측은 공소취소조치를 받게 된 데 대해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며 크게 반겼다. ◎경제계 반응/“정부­재계 냉기류 걷혔다”/무한경쟁시대 힘합쳐 대처해야 재계와 정부사이의 냉기류가 사라졌다.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박태준 전 포항제철 명예회장,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등 재계인사들을 대거 사면한데 대해 재계는 함박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다.이번 조치가 기업인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재계는 환영하고 있다. 새정부 들어 정부와 재계의 관계는 최악으로 출발했다.정치에 「관여」했던 정주영 명예회장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실형 선고에다,「순수」재계 인사인 김승연회장이 지난 93년11월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충격을 줬다.10대그룹 총수가 구속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또 올 2월에는 최종현전경련 회장이 정부의 업종 전문화 정책에 도전하고,지난 4월에는 이건희삼성그룹 회장이 북경에서의 발언으로 각각 설화를 입어 관계는 더욱 꼬였다. 대사면에 앞서 정부와 재계의 관계호전조짐은 지난 9일의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감지됐다.김영삼대통령은 이날 30대그룹 총수와의 회동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대기업들의 역할과 그동안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한 참석자는 『청와대 오찬중 가장 분위기가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오찬에는 지난 달 말의 김대통령의 미국 순방을 수행하려 했으나 청와대쪽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이건희 회장이 참석해 정부와 삼성,정부와 재계의 관계가 호전됐다는 분석을 낳기에 충분했다.김대통령은 지난 7일 이회장과 단독 면담한 것으로 알려져 그동안의 「오해」는 해소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김대통령은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김승연회장과도 단독 면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사면에 재계인사를 대폭 수용할 것이란 사전예고도 있었던 것으로 들린다.정주영 명예회장과 김우중회장은 이번 주 초 각각 대법원 상고를 취하했었다.재판에 계류중이면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와의 사전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이번 조치에 경제인들을 대거 포함시킨 것은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정부와 재계가 힘을 합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으로 재계는 분석하고 있다.게다가 지난 6월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결과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한화그룹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구속의 멍에로 해외사업을 추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사면으로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환영했다.다른 그룹관계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각계의 반응/“사면폭 커 일단 환영”/「사회 비리」 관련자 많아 뜻밖 시국공안사범 등 모두 3천1백69명에 대한 정부의 대사면이 11일 발표되자 사면의 「폭」에 대해서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비리사건 등으로 구속됐던 일부 인사까지도 이번 사면대상에 포함돼 있어 「뜻밖」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유재현씨(경실련 사무총장)=분단을 맞이한 이번 대사면에 보다 많은 이데올로기 희생자들이 구제되지 못해 조금 실망스럽다.정부는 과거 독재정권에 의해 상처를 받은 양심수와 장기수들을 대화합의 차원에서 적극 제도권으로 끌어들어야 했다.그러나 우리나라 최장기수인 김선명씨가 포함돼 다행이다. ▲이필상씨(고려대 교수)=사면의 폭이 예년에 비해 커 일단 환영한다.잇따른 대형사고와 정치권의 사분오열로 우리의 민심은 크게 이반되어 있다.해방 50년을 맞아 국민대화합과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해 구속된 재야인사에 대해서도 사면·복권이 대폭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다. ▲이창복씨(전국연합의장)=이번 사면은 정부가 약속한 광복 50년을 맞아 단행된 국민대화합의 조치로 보기 어렵다.기대를 걸었던 공안사범은 극히 적었고 경제비리사범과 수서비리 관련자에게 면죄부만 주었다.진정한 국민화합을 위해 다가오는 개천절과 성탄절에 대규모 시국사범의 사면을 기대한다. ▲최영섭씨(서울대 외교학과 대학원생)=사회비리사건으로 구속된 일부 인사들도 이번 사면에 포함돼 뜻밖이다.한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적극포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아직도 단절된 이념의 굴곡을 벗어나지 못해 아쉽다. ◎풀린 인사들 ▷일반 형사범◁ ◇정치권 인사 ▼특별사면및 특별복권 ▲김종인(전 국회의원) ▲오용운(전 국회의원) ▲김동주(전 국회의원) ▲이동근(국회의원) ▲정몽준(국회의원) ▲김형래(전 국회의원) ▼특별복권 ▲박철언(전 국회의원) ▲이원배(전 국회의원) ▲이대섭(전 국회의원) ▲김문기(전 국회의원) ◇고위공직자및 군인사 ▼특별사면및 특별복권 ▲김종호(전 해군참모총장) ▲엄삼탁(전 병무청장) ▲명의식(전 축협중앙회장) ▲안병화(전 한전사장) ▲이종구(전 국방부장관) ▲이상훈(전 국방부장관) ▲김철우(전 해군참모총장) ▲한주석(전 공군참모총장) ▲정용후(전 공군참모총장) ▲조기엽(전 해병대사령관) ▲이인섭(전 경찰청장) ▲옥기진(전 경우회 이사) ▲한호선(전 농협중앙회장) ▲김상조(전 경북지사) ▲이건개(전 대전고검장) ▲장병조(전 청와대 비서관) ◇경제인 ▼특별사면 및 특별복권 ▲정주영(현대그룹 명예회장) ▲정몽헌(현대상선 대표) ▲박세용(국민당대표 특별보좌역) ▲송윤재(〃) ▲김승연(한화그룹 회장) ▲김우중(대우그룹 회장) ▲최원석(동아그룹 회장) ▲박기석(삼성건설 회장) ▲정태수(전 한보건설 대표) ▲황경로(전 포철 회장) ▲유상부(전 포철 부사장) ▲이화일(조선내화 대표) ▲이종열(삼정강업대표) ▲정도원(강원산업대표) ▲김진홍(보성건설 대표) ▲김택기(한국자보 사장) ▲이창식(한국자보 전무) ▲박장광(한국자보 상무) ▲정의승(학산실업대표) ▲윤춘현(전 삼성항공 자문) ▲손병용(선진건업대표) ▼특별사면 ▲조기현(청우종합건설대표) ▷시국 공안사범◁ ▼미전향 장기수 형집행정지 ▲김선명(70) ▲안학섭(65) ▲한장호(72) ▼재일교포 관련간첩 가석방 ▲최해보(67) ▲신상봉(68) ▲김철(63) ▲조봉수(52) ▲유종안(62) ▼군사비밀 누설 관련 가석방 ▲이근희(전 김대중 개인비서) ▼특별감형 ▲이병설(전 서울대교수) ▼전대협관련자 특별사면 ▲김종식 ▲태재준 ▼부산동의대 사건관련자 특별사면 ▲이철우 ▲이종현 ◇정치권인사 ▼특별복권 ▲김근태(전 민주당 부총재) ▲이종국(전 충남지사) ▼특별사면및 특별복권 ▲김부겸(전 민주당 부대변인) ▲임재길(전 민자당 지구당위원장) ▲한준수(전 연기군수) ▲이진삼(전 정보사령관) ◇재야인사 ▼특별사면및 특별복권 ▲김현장(한미문제연구소장) ▼특별복권 ▲문부석(동부소장) ▲장기표(전 민중당 정책위원장) ▷공소취소◁ ▲박태준(전 포철회장)
  • 전·노씨 각각 연쇄 연말모임/활발한 5·6공진용 「송년회동」

    ◎당정개편·신당설 맞물려 “시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잇따라 대규모 송년모임을 갖고 있다.두 전직대통령은 지난해에도 비슷한 송년모임을 가졌으며 이번에도 정치적 의미는 없다고 설명한다.그러나 「12·12사건」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데다 연말 당정개편에서 옛 여권출신의 기용폭 및 「5·6공 신당설」등과 맞물려 눈길을 끌고 있다. ○…전전대통령은 오는 14일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노신영 전국무총리 시절의 내각 모임인 「무궁화회」 송년모임에 참석할 예정. 이 모임에는 「무궁화회」회원인 40여명의 전직 각료들이 참석하며 정석모 금진호 의원등 현재의 민자당 의원들도 당시 장관을 지낸 인연으로 참석할 것으로 예상. 특히 「5공」출신 각료들의 또다른 모임인 「평교회」도 「무궁화회」와 같이 송년모임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날 모임이 「5공」인사들의 대대적 행사가 될 가능성도 대두.「평교회」는 김정열 전총리시절의 각료모임으로 따로 송년 모임을 가져왔으나 김전총리가 작고함에 따라 「무궁화회」와 합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전대통령은 노전대통령이 최근 대구를 방문하는등 비교적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공식활동을 자제하는 눈치이나 「12·12」의 기소시한인 오는 12일 뒤에는 보다 행보가 빨라질 수도 있다는 관측. 특히 전전대통령의 측근인 장세동씨는 이번달말쯤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때 「5공」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세를 과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정부관계자가 전언.전전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여사도 회고록 집필을 끝내고 곧 출간할 계획이라는 전문. ○…노전대통령은 지난 7일 무역센터에서 「6공」초기 이현재 전총리내각 모임인 「육초회」 송년모임에 참석한데 이어 강영훈 전총리내각의 「육중회」와 정원식 전총리내각의 「육영회」 송년모임에 각각 참석할 예정.이들 모임에도 민자당 현직 의원들이 대거 참석할 것으로 보여 관심. 지난 7일 「육초회」모임에는 나웅배 이춘구 사공일 정해창 조상호 윤근환 이관 최동섭 권이혁 최명헌 오명 조경희 현홍주씨등 「6공」초 각료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는 것. 오는 16일로 예정된 「육중회」모임에도 조순 최호중 이한동 이규성 허형구 이상훈 최병렬 김집 김식 박승 장영철 최영철 정종택 씨등이,23일의 「육영회」에는 최각규 김기춘 윤형섭 이어령 박철언 조경식 이봉서 진념 이진설 안필준 최창윤 씨등이 참석할 것 같다고 노전대통령측은 소개.
  • “쿠데타적 사건”/「12·12」 진상 규명될까

    ◎검찰,피고소인 소환 착수/정승화총장 연행과정 등 집중조사/전대통령 3명 조사방식 싸고 고심 검찰이 「12·12」고소·고발사건과 관련,지난주까지 고소인·참고인 조사를 벌인데 이어 23일 허삼수의원을 전격 소환한 것을 시작으로 피고소인 37명에 대한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이 사건의 「법적 해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7월 정승화전육참총장 등의 고소 이후 고소인 22명,노재현전국방장관 등 참고인 31명 등 모두 53명을 조사했다. 이와 함께 국회청문회 기록,언론보도,관계 인사들의 회고록,당시 작전상황일지 등 방대한 양의 참고 자료를 입수해 검토작업을 벌여 왔다. 이번 사건의 공소시효는 오는 12월13일이어서 앞으로 8개월여 남았다. 검찰은 이에 따라 늦어도 공소시효 3개월 전인 9월까지는 피고소인 조사를 마치고 수사결과및 사법처리 여부를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수사방향과 관련,『12·12에 대해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의 조사결과,고소인및 참고인측이 ▲정총장 연행 재가과정에서 최규하 당시대통령에 대한 협박이 있었고▲정총장 연행에 앞서 신군부측이 미리 병력을 동원하는등 쿠데타 의사를 갖고 있었다는 점등을 주장함에 따라 피고소인들을 대상으로 이 부분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그러나 검찰의 의욕적인 수사 의지에도 불구하고 피고소인들에 대한 사법처리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 수사 관계자는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법적 평가는 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 아니냐』고 말한다.검찰의 고민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특히 김영삼대통령이 12·12를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주동자 처리에 대해서는 『역사에 맡기자』고 밝힌 만큼 검찰의 판단도 이 범위를 넘지 못할 것이라는게 법조계 주변의 중론이다. 법적으로는 쿠데타로 인정하되 신병처리는 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지지않겠느냐는 시각이다. 검찰은 내부적으로 ▲무혐의 처분 ▲기소유예 ▲불구속기소등 모든 가능한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식적으로는 『아직 고려할 단계가 아니다』 말하고 있다. 검찰은 또 결정적인 참고인인 최규하전대통령및 피고소인인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에 대한 조사 여부및 방식에 대해서도 뾰족한 「해법」을 찾지못해 고심하고 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수사상의 효율성을 감안,일단 피고소인 조사를 마친뒤 이들에 대한 조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혀 경우에 따라서는 조사가 생략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조사가 이뤄질 경우 소환조사보다는 방문 또는 서면조사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의원을 비롯한 정호용·박준병·허화평·정동호의원등 5명의 현역 의원들에 대한 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 88∼93년통치사료 정부보존소로/퇴임준비·이사 마무리 바쁜 청와대

    ◎휘호집 등 기록물정리도 거의 매듭/노 대통령,이임앞서 재산 공개할듯 노태우대통령의 퇴임에 대비한 청와대의 주요 업무로는 통치사료의 정리,연희동 사저로의 이사등을 들 수 있다.김영삼차기대통령의 집무개시에 앞선 경내정리와 단장도 중요하다. 이들 작업은 이미 완료됐거나 진행중에 있다.특히 노대통령의 퇴임준비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노대통령 재임 5년간의 통치사료 가운데 공식문서는 대다수가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졌다.약 2만쪽에 달하는 공식문서 가운데 일부와 복사본은 청와대내 도서실에 있는 통치사료실에 보관된다. ○공식문서 2만쪽 달해 미국의 경우 재임기간중 모든 통치사료는 대통령의 개인재산으로 법에 명시돼 있으나 우리의 경우는 이에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따라서 역대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노대통령도 개인사료만을 연희동 사저로 갖고 간다.이 사료들은 노대통령의 회고록 작성등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주변에서는 언젠가 이 사료들이 외국의 경우처럼 「개인기념관」에 보관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은 그러나 노대통령이 퇴임후 별도의 사무실도 갖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적어도 1년간은 사저에서 독서를 하며 외부인사접견,골프·테니스·수영등의 취미생활등으로 소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부에 오해를 살 두드러진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이는 다분히 전두환전대통령이 일해재단 문제로 물의를 빚었던 선례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이런만큼 「개인기념관」은 입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공보비서실에서 맡고 있는 기록물 정리작업도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지난 연말 노대통령의 영문선집과 영문화보를 발간한 데 이어 국문선집 국문화보 동정기록화보 휘호집들도 발간을 눈앞에 두고있다.미진한 자료를 보완하는 사초정리 작업도 거의 끝낸 상태다. ○큰짐은 대부분 옮겨놔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연희동 사저로의 이사도 큰짐은 거의 옮겨 이제는 생활용품정도만이 청와대에 남아있다.노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올 때 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이 한결 수월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다만 청와대에서 결혼한 아들 재헌씨와 딸 소영씨의 혼수품,즉 이불 장롱등이 덩치 큰 이삿짐 정도였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남아있는 옷가지와 생활용품은 퇴임 마지막 주에 모두 옮길 계획이다. 연희동 사저 수리작업도 완전히 끝낸 상태다.요즘은 대통령 취임 훨씬 이전부터 함께 생활해 온 가정부가 청와대와 사저를 오가며 관리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퇴임후 이집에서 노모 김태향여사(82),부인 김옥숙여사와 지낼 예정이다. 사저앞 빈터에 지은 1백30평 규모의 가건물은 비서관 사무실,경호원 숙소,창고,주차장등으로 쓰여진다.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두게될 비서관 3명으로는 윤석천 청와대 제1부속실장,김종기수송과장,노문성1부속실 행정관등으로 확정됐다. 김차기대통령을 맞을 채비도 하나 둘씩 진행돼 가고 있다.그러나 집무실이 있는 본관,숙소인 별채 건물은 신축한지가 얼마되지 않아 별로 손볼 데가 없다고 청와대측은 밝히고 있다.경내 조경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숙소의 도배와 칠작업,본관의 카펫·유리창 청소작업 정도가 계속되고 있다. ○차기대통령 맞을 채비 본격적인 새대통령 맞이 작업은 대통령직인수위에 담당자가 임명되어야만 시작될 것 같다고 관계자는 말했다.기존의 집기들을 교체할 지 여부,이사시기와 방법등에서부터 청와대에 거주할 차기대통령의 가족수 등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협의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문제에 대해 김차기대통령측으로부터 어떠한 언질도 없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퇴임에 앞서 재산을 공개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노대통령은 지난 88년 4월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재산은 연희동 사저,고향의 전답,주식을 포함한 예금을 합쳐 「넉넉잡아 5억원 정도」라고 밝혔었다. 역대 어느정권에도 없었던 새로운 관례가 하나하나 추진되고 성사돼 가고 있는 것이다.
  • 「벌기보다 쓰기가,살기보다 죽기가」/코오롱 이동찬회장 회고록 펴내

    ◎부도잠적등 부끄러운 내용 진솔하게 담아/“공무원이 손 안벌리면 중소기업 발전” 지론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특별한 대책은 없어도 된다.공무원들만 기업에 들락거리며 손을 벌리지 못하도록 하면 중소기업은 저절로 발전할 것이다』 코오롱그룹 이동찬회장은 최근 고희를 맞아 자신의 70년을 돌아본 회고록 『벌기보다 쓰기가,살기보다 죽기가』를 펴냈다. 이회장은 이책에서 『오래 살았다』는 서문의 첫 문장처럼 사업가로서 5·16직후 부도를 내고 잠적했던일,술집여자와의 외도,경총회장과 농구협회장으로서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다른 재벌 총수들의 회고록들이 대체로 약점을 감춘것과는 달리 『일제시대에는 학도병으로 나가 생명을 건지기 위해 일본교관에게 잘 보이려 했다』는등 여러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담담하게 밝혔다. 또 숙부(이원천)와의 경영권다툼으로 인한 내분과 코오롱건설의 매입경위,장영자사건때 검찰의 조사를 받은 경위등을 고백하고 있다. 민자당최고위원 김종필씨가 이회장의 이복동생의 장인이기 때문에 5공때는 청와대로부터 못마땅하게 여겨지기도 했고 이로인해 한때 병까지 얻기도 했다. 이회장은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전두환전대통령이 「금메달을 딸 수 있겠느냐」고 다정스레 물었을때야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권력의 눈에 난 기업가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나일론과 섬유산업의 외길을 걸어온 이회장은 『80년대 초반 섬유산업을 사양산업으로 몰아붙일 때가 가장 가슴아팠다』면서 『자유당정권때 정치에 뛰어들까 생각했지만 부친(이원만)이 3선의원을 지냈고 기업을 일으키는 것도 보국이라는 생각으로 외길인생을 살았다』고 털어놨다. 이회장은 『한걸음 한걸음 서두르지 않고 가다보면 반드시 정상에 이르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마음에 들어 산을 좋아하며 『이를 기업경영에도 많이 참고하고 있다』는 기업경영관을 밝혔다.
  • 백담사 2년… 전 전대통령의 근황

    ◎“잘못된 건 이제 모두 내탓이려니 합니다”/하루 4∼5회 설법… 탈정치화된 내용 많아/하산시기·거처 아직 미정… 회갑도 산사서 지낼 듯/요즘은 청와대시절 회고록 집필에 열중 백담사가 세월에 깍여가고 있다. 만해당을 사저삼아 은둔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무릎까지 세월의 켜가 쌓였다. 풍화작용인 듯 두사람의 마음과 말이,두사람을 지켜보는 산아래 사람들의 시선도 뾰족한곳 보다는 둥글둥글한 곳이 많아지고 있다. 전 전대통령 내외가 백담사로 들어간지 오는 23일로 만 2년이 된다. 지난해 섣달 그믐날 국회증언을 위해 서울을 다녀간 것과,지난 여름 속초로 바람쐬러 나간 것 외에는 꼬박 2년을 산사에 묻혀 지낸 셈이다. 전 전대통령 내외의 산사생활은 2년전 입산당시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 예불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해 하루 4∼5차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고 틈틈이 독서를 하며 청와대시절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이 1년전의 그것과는 달라졌음이 백담사 방문에서 느껴진다. 11월19일 하오2시. 질척거리는 날씨탓인 듯 서울과 천안 등에서 온 신도 3백여명만이 백담사를 방문해 전 전대통령의 설법을 들었다. 우유빛 두루마기 차림으로 방문객들 앞에 선 전 전대통령은 백담사에서 사는 이야기와 경제이야기로 약 20분간,예전에 TV서 많이 듣던 목소리 그대로 설법을 했다. 『우리는 그저 무슨일이든 잘못된 건 내탓이려니 합니다. 전생에 업보가 있어 그러려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만사가 다 평화로워 집니다』 『우리가 86년도에 단군이래 처음으로 50억달러 흑자를 냈습니다. 87년도에는 선거치른다고 법석을 떨면서도 1백억달러 흑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과소비다 뭐다 해서 이제 조금 살만한데 흥청망청 다 까먹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백담사에서 만난 그의 측근들은 요즘의 설법내용이 크게 이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1년전인 지난해 11월에 들었던 전 전대통령의 설법내용은 사뭇 달랐다. 89년 11월18일. 『청와대에 있을때 앞에서 알랑거리고 아부를 가장 많이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크게 배신합니다. 보살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은 잘 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겁니다』(전 전대통령) 『기도를 통해 마음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하루도 살지 못했을 거예요. 이분이 현직에 계실때 용단을 내려 대통령직을 넘겨주기로 하신 것이 처음있는 일이었지 않아요.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도 소중하지만 국가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이순자여사) 말 군데군데서 세상에 대한 반감이 묻어났던 것이 1년전이었다. 『백담사를 내려가면 몇사람은 반드시 손을 보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것도 지난해였다. 지난해의 발언들과 비교해 보면 전 전대통령의 요즘 발언내용들은 비교적 탈정치화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라기 보다는 국가원로로서의 발언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오 2시 설법에 앞서 전 전대통령 내외는 이날 상오 11시쯤 관광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승용차편으로 온 방문객 50여명을 맞았다. 그러나 방문객수가 적은 탓인 듯 전 전대통령 내외는 설법을 하지 않고 기념촬영과 악수만을 차례로 나눈뒤 방문객들과 헤어졌다. 왜 이들에게는 설법을 해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경호관계자는 『방문객수가 적을 때는 설법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전해주었다. 전 전대통령의 모습은 건강해 보였고 얼굴색은 대통령 재임시절 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탄력있어 보였다. 악수를 나눈 뒤 잠시 서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울 흑석동에서 왔다는 40대 남자가 『백담사 위에 있는 오세암에서 아들 바둑공부를 시키기 위해 왔으나 경찰들이 짐을 들여보내주지 않아 못가게 됐다』고 「하소연」을 했다. 전 전 대통령은 『그래요. 몇살인데. 오세암은 아이들이 있을만한 곳이 못되는데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십니까』라고 친절하게 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여사와 경호관계자들이 『백담사 때문에 안들여 보내는 것이 아니라 11월15일부터 한달간은 설악산 입산이 금지된 탓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거들었다. 1년만에 다시 가본 백담사는 전 전대통령의 말외에도 달라진 것이 많았다. 백담사를 찾는 사람들의 방문이유나,생각이 달라지고 있음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였다. 백담사에서 7㎞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미니버스 안에서 방문객들의 화제는 여전히 두 내외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문객들은 1년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백담사를 찾고 있었다. 얼굴이 생각보다 좋아보이더라는 이야기며 전직 대통령과 사진을 찍었으니 가보로 간직해야겠다느니,언제쯤 사진을 보내준다느니 등이 차속의 주된 대화였기 때문이다. 초기에 백담사를 찾은 사람들은 확실히 2년이 된 지금에야 백담사를 찾는 사람들보다 더 열성적인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백담사를 다녀오는 차안의 대화내용이 『어떻게 전직 대통령을 이런 곳에 보내느냐』『두 사람이 참 불쌍하다』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과 비교하면 단순히 열성의 정도라기 보다는 그간의 세월이 전 전대통령에 대한 동정이나 미움같은 감정 모두를 무디게 만든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난 10월의 경우 하루 방문객은 최고 5천명선을 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날씨가 차지고 김장철이 되면서 방문객은 하루 1천명 이하로 뚝 떨어지고 있다. 방문객의 대부분이 사찰의 중년 이상 여신도들이었던 초기와는 달리 요즘은 남녀의 비율이 비슷해지고 있고 연령도 점차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전 전대통령의 측근들 중에 일부는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수록 그분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고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풀이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역시 전 전대통령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미움과 지지가 엇갈리는 정치인에서 그러한 개념이 없는 「역사」「지난시대」「원로」 등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하루 5천명에 달했던 방문객을 전 전대통령에 대한 지지의 확대로 해석하는 것은 어딘가 부담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전 전대통령 내외와 방문객들이 생각과 말이 둥글어진 것만큼이나 경호 역시 둥글어졌음이 눈에 띈다. 여전히 매표소 초입에서 경찰이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고 길목 4∼5군데에 전경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방문객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여느 관광지 입구에서 만나는 안내원들만큼이나 부드러워져 있었다. 방문객들의 소지품 검사는 여전히 엄격했지만 이들의 태도는 예전보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전 전대통령의 측근 경호를 맡은 경호원들도 부드러워지기는 마찬가지. 통제와 차단을 주임무로 하던 것에서 안내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이 눈에 띄었고 이들이 가능한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뜻밖일 정도였다. 백담사의 겨울은 춥다. 눈이 내리면 백담사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것은 체인을 감은 지프 뿐이다. 백담사 전체를 감다시피한 비닐천막들은 전 전대통령 내외가 이곳에 세번째의 겨울을 날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줄 알면서도 낯익은 경호원에게 『올 겨울도 여기서 나실 계획이냐』고 물었다. 그는 웃음으로 비닐천막들을 가리키기만 했다. 전 전대통령 내외가 기거하는 만해당은 지붕만 빼놓고 모두 비닐로 둘러 비닐하우스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백담사에서의 하산문제는 지난해말 국회증언 이후 계속해 백담사와 청와대간에 논의되고 있다. 지금 이 문제는국민과 백담사간의 문제가 아닌 여권내부의 문제로 좁혀졌다. 청와대측은 전 전대통령이 하산해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백담사측은 『이젠 우리 마음대로 살게 놔두라』는 주장을 꺾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입장차이는 하산이후의 거처문제에서 심한 이견으로 나타나고 있고 좀처럼 이견이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백담사측은 『이젠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다. 연희동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청와대는 아직 연희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국민감정에 맞지 않는다면서 서울 근교의 제3의 장소로 옮길 것을 권유하고 있다. 청와대의 국민감정 부분과 관련해 백담사측은 「핑계」로 치부하고 있다. 백담사측은 청와대가 전 전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행사 가능성 때문에 연희동 입주를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측의 입장은 모두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백담사가 주장하는대로 『이번에 연희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영원히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전 전대통령이 내려와 5공당시 사람들과 어떤 형태로든 활동을 하게 되면 여권에 치명적인 또 하나의 분열이 일게 된다는 우려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전 전대통령은 아마도 회갑일인 내년 1월18일도 백담사에서 회갑상을 받게될 것으로 예상된다. 백담사는 이미 많이 풍화됐다. 하산이 풍화를 촉진시킬 것인지 아닐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역사속으로 완전히 묻히기 위해서는 하산절차는 필요하고 따라서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전직대통령 「회고록」 나온다/최규하ㆍ전두환 전 대통령,출판 계획

    ◎「12ㆍ12」ㆍ「6ㆍ29」 등 주요사건 규명 기대/올해중 집필마무리… 95년쯤 출간할듯/최/하산이후 본격작업… 2∼3년뒤 탈고예상/전 국내에서도 오래지 않아 전직대통령들의 회고록이 출판될 것으로 보인다.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씨가 회고록의 집필을 마무리한 상태에 있다. 백담사에 은둔중인 전두환 전대통령도 회고록 집필을 위한 자료정리를 끝내고 구성작업에 들어갔다. 두 전직대통령의 측근들은 『최 전대통령의 경우 워낙 잘 챙기는 성품이어서 전혀 외부의 도움없이 집필을 하고 있고 전 전대통령 역시 과거의 일들을 대부분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알맹이 있는 회고록이 될 것으로 안다』고 전하고 있다. 회고록 집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에 비유된다. 특히 국정의 핵에 있었던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은 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 주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은 한국현대사의 격랑기이고 그같은 성격 때문에라도 역사적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규명된 부분보다 오히려 많다. 우리 헌정사에는 모두 5명의 전직대통령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회고록은 아직 나와있지 않다. 고 이승만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상당기간 미국 하와이에서 체류했으나 기억력 감퇴와 건강사정등으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었다. 3∼4 공화국의 주역이었던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재임중 비명에 갔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2공화국 당시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전대통령은 모일간지에 재임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술을 다른 사람이 문장화했고 권좌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넘은 뒤에야 이루어져 본격적인 회고록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80년대 중반부터 회고록을 집필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경험때문에 직접 작성한 메모를 비교적 풍부하게 갖고 있는 편이다. 최 전대통령의 한 측근은 『치밀한 성격때문에 한가지 사건을 다루는 데 어떤 것은 1년이 걸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얼마전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읽고 『너무 치켜세운 부분이 많다』고 측근에게 밝힌 바 있다. 작가 천금성씨가 80년 당시 「개혁주도세력」의 자료협조를 얻어 집필한 「황강에서…」는 전 전대통령의 출생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은 당시 집권세력에 의해 「홍보물」로 이용돼 널리 보급됐으나 정작 전 전대통령 자신은 백담사에 은둔한 이후에야 읽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전 전대통령은 『내가 쓸 회고록에는 절대 나를 미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육군사관학교 입교때 정식 합격생이 아닌 합격자 후보로 붙었다가 입교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모든 것을 있었던 대로 기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 본격집필은 하산과 함께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7년의 재임기간중에 대통령으로서 남긴 메모와 공보비서실에서 작성하는 「통치사료」를 모두 연희동사저에 옮겨 놓은 바 있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그의 약속대로 「사심없이」 회고록이 집필된다면 5공기간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여겨지고 있다. 전 전대통령은 풍부한 자료외에 수치에 매우 밝은 것으로 알려져 회고록에 거는 기대를 크게 하고 있다. 한 측근은 그의 기억력에 대해 『사단장시절에 30만원의 관공비 모두를 참모와 운전병에 이르기까지 20명이 넘는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것으로 말하는 데 언젠가 개개인에게 준 액수를 말씀하시길래 합해 보니까 정확하게 30만원이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두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이 출판될 경우 국회의 5공 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통해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80년대의 주요사건들의 실체와 배경이 공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 전대통령이 정승화당시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뒤늦게나마 추인하게 된 배경,5ㆍ17 계엄확대조치의 경위,광주 5ㆍ18 발발배경과 발포문제,최 전대통령의 하야문제 등은 두사람의 회고록에서 공동으로 다루어질 사안들이다. 이밖에도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에서는 6ㆍ29선언의 주체,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과정과 갈등 일해재단설립과 정치자금조성의 전말이 다시금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전 전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국회 5공및 광주합동청문회장에서 『이 자리에서 밝히지 못하는 사실들을 회고록에서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전직대통령의 회고록 출판경험이 없다시피한 나라에서는 회고록의 출판자체가 커다란 사건이 될 수 있다. 최 전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집필은 올해안에 마무리 하더라도 출판은 95년쯤에 가능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최 전대통령이 95년을 꼽고 있는 것은 국가기밀이 주내용이 되는 전직대통령의 회고록인 만큼 15년쯤은 지나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미국등에서는 통상 국가외교비밀등은 20년을 시한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전대통령이 계산한 15년은 우연찮게도 형법에 규정된 공소시효만기와 일치한다. 이 기한이 지나면 회고록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소추를 면할 수 있다. 전 전대통령의 경우 올 여름부터 본격 집필에 들어갈 경우 92∼93년쯤이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 출판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전망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 공개될 경우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만큼 여러가지 출판에 대한 견제를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 전대통령의 회고록은 90년대 후반기에나 출판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어떤 심판도 달게 받겠다”/전 전대통령,서면답변내고 백담사로

    ◎증언 소란끝에 중단,파행종결/「광주」 군 배치ㆍ이동 관여 안했다/정치자금 민정외엔 준일 없어/증언내용 전두환 전대통령은 구랍 31일 재임기간중 정치자금문제에 대해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받은 바 있다』고 말하고 『민정당 이외의 특정인에게 정치자금을 준 일은 없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국회 5공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로 열린 청문회에 출석,이같이 말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게 됨으로써 과거청산의 마무리가 아니라 청산의 새로운 시작이 되고 과거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될까 두렵다』며 구체적인 정치자금 내역은 밝히지 않았다. 전 전대통령은 6ㆍ29선언에 대해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어떻게 실현되고 추진돼 정치발전과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경위나 배경을 들추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면서 『정치이면의 얘기는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광주사태에 언급,『초동 진압단계에서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악의적인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의 과격시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하고 『본인은 당시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말해 광주사태진압 및 발포와 무관함을 주장했다. 전 전대통령은 『본인은 광주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고 시민 상대의 사태수습을 군작전 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는 의견을 계엄사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바 있다』고 말하고 『자위권행사 문제는 군인복무 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되며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의 작전지침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12ㆍ12사태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었다』고 밝히고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본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날 청문회는 전 전대통령의 증언 부실 등을 이유로 여야간 야유와 고함ㆍ몸싸움이 속출해 8차례나 정회를 거듭한 끝에 민정당측과 전 전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야3당 의원들만으로 자정을 넘겨가며 파행적으로 진행되다 1일 0시50분에 산회됐다. 이날 저녁 7시30분 5차례의 정회끝에 속개된 회의에서 광주문제에 대해 증언하는 가운데 평민당의원들이 격렬하게 항의,민정당의원들과 격돌을 벌였고 정회가 선포되자 민주당 노무현의원이 전 전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던지는 사태가 발생,민정당측이 서면사과를 요구했으나 야당이 이를 거부하자 민정당과 전 전대통령은 증언을 중단키로 결정했다. 이날 파행적인 청문회 결과 야당측이 위증시비를 제기하는 한편 부실답변을 계속 문제삼고 있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증언에 대해 평민당과 재야 등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증언이 중단된 뒤 서류로 제출한 나머지 증언을 통해 광주에서의 발포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입장에서 건의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부인하고 『광주의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책임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고 재임중 상처를 치유,해결하지 못한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 동기에 대해 『최대통령이 하야시 발표한 성명내용에 비춰 헤아려 볼 수 있을뿐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추측해 말하기 어렵다』고만 답변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미완의 증언… 한풀이 의식/파행적 「청산증언」과 그 파장

    ◎야의 위증고발 움직임이 변수/정치권 수용땐 새 정치촉매 될 수도 전두환 전대통령의 31일 국회증언은 여야의 삿대질과 몸싸움속에 「미완의 증언」으로 끝났다. 이날 증언은 지난해 12ㆍ15 노태우대통령과 야3당총재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지만 5공청산의 원만한 대단원을 가져오지 못한 채 한풀이의 한마당으로 막을 내렸다. 8차례나 정회소동을 빚었고 급기야는 야당의원들이 「살인마」를 외치는가 하면 명패를 증인석을 향해 던지는 난장판이 연출됨으로써 정치권이 새해에 「과거의 멍에」를 벗고 미래지향적으로 운신을 할 수 있을지는 매우 의문시된다. 난장판의 사과방법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한 끝에 야 3당은 야 단독으로 회의를 강행,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증인과 여당을 성토했고 전 전대통령은 나머지 증언을 서면으로 특위에 전달한 뒤 기자들에게 자신의 심경과 입장을 피력하고는 은둔지 백담사로 떠나버리는 것으로 「증언의 행사」는 끝났다. 증언이 이같은 모양으로 끝남에 따라 여야는 새해들어서도 5공청산의 종결문제를 두고 정치적대결을 벌일 공산이 없지 않다. 우선 야당은 전 전대통령의 증언이 위증과 불성실과 교만으로 일관됐다는 주장 아래 위증,국회모독혐의로 사직당국에 고발하면서 정치쟁점화를 시도할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평민ㆍ민주ㆍ공화당이 완전히 공조체제를 이뤄 행동통일을 할지는 불분명하다. 평민당내에서도 협상파와 강경파의 입장이 서로 다르고 야당 가운데서도 공화당은 5공청산문제의 새해 이월 및 재점화를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권은 노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 전대통령의 증언으로 5공청산 종결을 선언한다는 입장을 견지,답변이 다소 미흡하다고 해도 이 수준에서 과거문제를 매듭짓는데 정치적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보인다. 민정당은 전 전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위증고발을 최대한 방어할 것으로 예상되나 야 3당이 굳이 이를 수의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그것 자체로 5공문제를 마무리짓고 정치적으로 더이상 쟁점화하지 않도록 막전막후 대화를 펼 것 같다. 여권은 또 「미완 증언」에 따른 후유증을극소화하기 위해 정국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민정당내 5공청산 협상을 전담해온 총장ㆍ총무의 교체를 포함한 전면당직개편을 연초에 단행한다거나 지자제정국으로의 전환을 위해 4당구조의 변경 등 정계개편의 애드벌룬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증언은 지금까지 5공청산과 관련한 정치권의 의문점을 다소나마 해소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정치자금 비리의혹과 관련,민정당 이외의 특정당이나 특정인에게 정치자금을 준 사실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8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 분열을 위해 거액의 정치자금을 평민당측에 제공했다는 항간의 설을 부인했다. 또 일해재단 설립과 기금조성 의혹에 대해 기금조성과 관련해 특혜를 주거나 보복을 했다거나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전 전대통령은 ▲세세대육영회와 심장재단기금 모금과정에서 반대급부가 없었고 ▲해외재산의 도피,은닉사실이 없으며 ▲부실기업정리는 산업합리화차원에서 시행되었고 국제그룹 해체도 정치적 보복이나 압력이 아니라 부실기업 정리작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전 전대통령의 이같은 의혹사항에 대한 부인일변도의 답변은 개별질문에 대한 1문1답식 답변이 아니고 의혹사항에 대한 포괄적인 답변형식에서 연유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의혹의 완전 해소나 사안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얻어내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전 전대통령은 ▲공직자 정화조치과정에서 일부 정실 또는 개인감정의 개재 ▲언론인 해직과정에서 계엄당국 언론관계담당관들의 일부ㆍ영향력 행사는 시인하기도 했다. 광주사태와 관련,책임의 일부를 통감한다면서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 못한 점을 깊이 반성한다고 말해 광주문제에 대한 책임의 일단을 시인했다. 또 12ㆍ12사태는 자신이 주도했기 때문에 그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고 시인했고 재임중 친ㆍ인척 관리에 잘못한 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전 전대통령의 이날 증언은 대체로 보아 총체적인 면에서 책임통감,개별사안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에서 정책결정의 불가피성 또는 타당성을 얘기함으로써 역사 앞에 자신의 통치기간이무조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할 수 있다. 전 전대통령이 6ㆍ29선언의 내막은 훗날 회고록을 통해 밝히겠다고 한 것이나 정치자금문제를 일일이 공개하는 것은 정치권을 다시 과거의 수렁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 안하겠다고 한 것은 이미 이번 증언내용이 이른바 「폭탄증언」은 아니라는 것을 비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이 다소 미흡한 「증언」이긴 하지만 이를 과거문제의 종결로 수용한다면 새해 정국은 지방의회선거를 전후로 한 정계개편 탐색 등으로 발빠르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나 야당이 「위증」임을 주장하며 정치쟁점화를 시도할 경우 5공청산의 여진은 정치권을 또 한차례 흔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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